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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12 제35호

애틀란타에서 만난 노동보건 활동가들

2017 미국공중보건학회 참석 후기

  • 최보경
나는 11월 4일부터 8일까지 고려대학교 역학 연구실 사람들과 함께 미국 애틀란타에서 열리는 미국 공중보건학회(American Public Health Association, APHA)에 참석했다. 올해 제145회를 맞은 미국 공중보건학회에는 약 1만 5천 명의 연구자와 활동가들이 함께 했다.

이번 개회식의 주제는 기후 변화였다. 트럼프 대통령이 파리기후변화협정에 탈퇴하면서 이에 반격하고자 준비된 주제라 했다. 환경단체에서 활동하고 있는 소수 민족 출신 여성 활동가 에리얼 드렌져(Eriel Deranger)의 개막 연설로 공식 일정을 시작했다. 그녀는 기후 변화로 인해 삶의 터전이 어떤 피해를 입고 있는지 이야기했다. 신선한 재료를 구할 수 없고, 아이들의 놀이터는 사라지고 있다고 했다. 기후 변화는 북극곰만 죽이는 게 아니다. 잦아지는 태풍·가뭄은 민중의 삶을 위협하고 있다. 그녀는 기후 변화를 건강권·인권 문제로 인식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세계에서 중국 다음으로 온실가스를 많이 배출하는 미국은 무엇을 하고 있느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미국 공중보건학회는 연구자의 학술토론 뿐 아니라, 사회적 이슈인 보건 문제에 대해 활동가·당사자의 다양한 목소리를 들으려고 노력한다. 한국에서 만 명이 넘는 학회 토론장에서 여성 활동가가 기조연설자로 발언 기회를 얻을 수 있을까 생각하니 부러웠다.
 

간호사로 노동현장 들어가기

공중보건이 우리 삶에 큰 부분을 차지한다는 걸 보여주듯 다양한 분야에서 공중보건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졌다. 첫째 날엔 간호 관련 세션에 참여했다. 포스터 중 간호조무사의 노동환경에 관한 포스터가 눈에 띄었다. 요양 시설이나 호스피스 기관에서 근무하는 간호조무사를 대상으로 인터뷰를 시행했는데, 이들의 처우가 너무 열악하다는 것이었다. 간호사 인력이 부족한 곳은 간호조무사가 대부분의 업무를 대신하고 있다. 특히 요양 시설이나 호스피스는 돌봄 노동이 중요한 만큼 간호조무사의 역할이 중요하다. 

이 연구를 맡은 톨레도 대학의 린다 피어스(Linda L. Pierce) 교수는 간호조무사의 임금은 간호사의 반 혹은 2/3밖에 되지 않고, 노동시간은 하루 10시간에 육박하니 누가 이 중요한 업무를 지속할 수 있겠냐고 물었다. 간호조무사를 정규직으로 뽑아야하고, 자신이 하는 업무의 중요성에 대해 자부심을 가질 수 있도록 간호사가 연대해야한다고 말하는 린다 피어스 교수를 보면서 ‘간호조무사가 어딜 감히 간호사 자리를 넘봐’하던 학부 때 교수님이 생각났다. 부끄러웠다. 왜 간호조무사와 간호사를 서로 이해가 대립되는 상대로 보고 싸우려고 하나. 이런 대결 구도를 좋아할 이는 결국 자기 책임은 회피하는 병원일 뿐인데. 그러니까 우리는 간호라는 노동을 하는 노동자로서, 함께 연대해 더 나은 노동환경을 만들어 가야한다고 생각했다. 

또 다른 포스터에 소개된 프로그램은 너무나 부러웠다. 로드아일랜드 대학의 간호대 학부생들을 대상으로 시행하고 있는 프로그램이었다. 보건 정책 결정 관련 사항에서 간호사의 목소리는 간호사가 일하는 직업 환경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그래서 조앤 코스텔로(Joanne Costello)교수는 간호사의 정치적 역량을 키우기 위해 학부학생들을 대상으로 20년 프로그램을 기획했다. 크게 건강 형평성·건강의 사회적 결정요인·환경 보건·질병 예방·재해 예방·정신 건강·의료접근성에 대해 교육하고, 세부적으로는 외국인 노동자의 건강권과 성소수자 건강 불평등과 같은 사회적 이슈에 대해 어떤 접근을 할 수 있는지 토론한다고 했다. 작업장에서 감지된 위험요인은 그 작업장에서 일하는 노동자가 가장 잘 안다. 병원이란 곳은 도처에 건강을 위협하는 요인들이 많은 곳이다. 그런데 간호사가 본인의 건강에 영향을 미치는 것들에 대해서 침묵한다면 결국엔 간호사뿐만 아니라 돌봄을 받는 환자들에게도 악이 된다고 했다. 모두를 위해 간호사는 작업장 내 위험 요인을 공개적으로 알리는 훈련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훈련은 학생 때부터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렇게 학교·시민단체 등 다양한 곳에서 직업환경 안전과 노동자 건강을 연구하는 간호사와 연구로 끝나지 않고 직접 현장에 들어가 노동자들의 건강 증진에 개입하고 있는 이들을 만났다. 그들을 만나며 간호사로서의 자부심도 높일 수 있었다.

하지만 첫 월급으로 50만원을 받거나, 섹시한 옷을 입고 춤을 춰야 하고, 공식적으로 의료인으로 대우받지 못하는 한국 간호사들의 위치를 생각하니 무력감이 들기도 했다. 이상과 현실의 간극을 줄이기 위해 이번 경험을 참고로 여기기로 했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한국의 간호 노동자들의 연대에 대해 더 많은 고민이 필요할 것 같다.
 

노동자보다 우선되는 건 없다

미 공중보건학회는 직업안전보건(Occupational Health & Safety, OHS) 세션 활동이 매우 활발한 학회 중 하나이다. 직업안전보건 세션에서 만났던 직업안전보건연합 소속 연구자들은 전국 각지에서 여러 분야의 노동자 건강에 대해 연구했다.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National Institute for Occupational Safety and Health, NIOSH)와 함께 연구한 석사과정 학생 캐터리나 산티아고(Katerina Santiago)는 비정규직 건설 노동자와 정규직 건설노동자의 업무 중 부상률을 비교했다. 그녀는 건설 현장에 있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안전 관련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하지만 업무중 위험한 일은 더 많이 하는 점을 주목했다. 현재는 연구 결과를 통해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의 변호사·활동가와 함께 관련 법안 제정을 촉구하는 운동을 하고 있었다. 

바로 옆에는 직업안전보건연합에서 나온 피터 둘리(Peter Dooley)가 있었다. 그는 기름 공장에서 일했었다. 그런데 같이 일하던 동료들이 병들고 심지어 암에 걸려 일을 그만두는 걸 목격하고 무력감을 느꼈다고 한다. 뭐라도 해야겠단 생각에 늦은 나이에 다시 대학으로 들어가 직업안전보건 공부를 시작했다.

이번 학회에서 그는 일하다 죽은 노동자들을 추모하는 내용의 포스터를 소개했다. 미국에서도 많은 노동자들이 일하다 죽는다는 사실을 알고 새삼 놀랐다. 그 중 한 이야기가 눈에 띄었다. 20대 흑인 청년이 청소 업무를 시작하자마자 파쇄기에 떨어지는 사고로 목숨을 잃은 사고였다. 출근 첫날, 앞으로의 미래가 기대된다며 유니폼을 입고 웃으며 찍은 사진을 여자친구에게 보낸 뒤 일어난 것이었다. 

1년 반 전 우리에게 일어났던 재앙이 떠올랐다. 구의역에서 스크린도어를 수리하던 비정규직 청년 노동자의 죽음. 그는 열악한 근로조건 속에서 희망을 안고 노동조합 활동을 하며 쉬는 날엔 동료들과 함께 ‘고용 승계’를 외쳤던 꿈 많은 청년이었다. 잊어서는 안 된다. 언젠가 세계 사람들 앞에서 한국 사회의 불안전한 일터가 앗아간 노동자들을 추모할 수 있는 기회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 날에는 캘리포니아에 있는 직업환경보건연합에서 나온 연구자와 활동가·변호사들이 모이는 회합이 있었다. 케빈 라일리(Kevin Riley)는 에볼라 사태가 일어났던 당시 에어로졸 매개 감염병(Aerosol Transmissible Disease, ATD)에 대한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에진 놘코우(Ezinne Nwankwo)는 에볼라 사태 이후 자발적으로 환자 관리에 참여했던 보건의료노동자에게 제공한 지지 전략 프로그램에 대해 소개했다. 이들은 ATD 감염 환자를 효과적으로 관리하기 위한 전략보다, 위험을 감수하고 고위험 환자를 돌보는데 자발적으로 참여한 노동자를 위한 전략을 우선순위에 뒀다. 전략 프로그램은 돌봄을 제공하는 노동자가 느끼는 두려움·가족 혹은 주변인들 관계에서 나타날 수 있는 어려움·자가 관리·고려해야 할 문화적 요소 등 사회심리적 부분부터 조직과 기관 차원에서 가능한 지원, 캘리포니아주 규정까지 다차원적인 대안을 포함하고 있었다. 이 프로그램에 참여한 이들은 다음 국가 재난 사태에서도 자발적으로 참여할 것이라고 증언했다.

한국은 어떤가. 2015년 메르스 사태 때 자발적으로 참여했다가 이후 병원을 떠난 간호사가 떠올랐다. 빛도 잘 들어오지 않는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 침대 하나가 전부였던 공간에서 격리되었던 서울대병원 간호사들. 언론이 찬양했던 ‘숭고한 노동’에 대한 대가는 어떠했나. 다음에 제 2의 메르스 사태가 발생한다면 누가 나설 수 있을까?

프로그램 중 아시안을 위한 문화적 감수성을 고려한 전략들이 보이지 않는데, 혹시 한국의 보건의료노동자들에게 제시할 수 있는 전략을 위한 팁을 얻을 수 있겠냐고 물었다. 대답은 “현재는 없다”였다. 그러나 발표가 끝나고 발표자와 직업환경보건연합에서 나온 다른 전문가, 그리고 노동부에서 나온 공무원이 나를 찾아왔다. 한국의 메르스 사태 이야기를 꺼내줘서 고맙다며 미국에도 아시아 출신 보건의료 노동자가 있어 이들을 위한 문화적 감수성을 고려한 전략들이 포함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들은 연대를 강조하며 본인들이 전략을 제안하면 한국어로 번역하는 과정이 필요할 것 같다며 꽤나 구체적인 계획을 이야기했다. 학교 연구자와 지역의 단체·실무자가 ‘함께, 연대’를 외칠 수 있는 시스템이 정말 부러웠다. 

학회가 끝나고 돌아오는 길, 삼성 반도체 노동자들이 떠올랐다. 2007년부터 삼성 반도체 제조공정에서 일하던 노동자들은 백혈병·재생불량성빈혈 등의 암 질환을 진단받았다. 2008년 역학조사 결과, 삼성 반도체 제조공정에서 일한 여성 노동자의 암 발생률은 일반인보다 높게 나왔고, 특히 비호지킨 림프종·백혈병 발병률의 경우는 일반인에 비해 1.31~5.16배까지 높게 나타났다. 하지만 산업안전보건공단은 ‘발병률에서 통계학적으로 의미 있는 증가를 찾을 수 없다’는 이유로 산업 재해를 인정할 수 없다고 결론 내렸었다. 그런데 미국공중보건학회에서 만난 연구자들은 현장의 사례에 주목했다. 그들은 샘플 수가 적다거나, 통계적으로 유의하지 않다고 해서 불분명한 입장을 가지지 않았다. 논의가 더 필요하다는 말로 자신을 ‘보호’하지도 않았다. 대신 그들은 작업장 내 ‘어떤’ 위험요인이 노동자의 건강을 해치는지는 누구보다 당사자가 잘 알기 때문에 노동자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한다고 말했다. 

고개가 끄덕여졌다. 노동자들의 아픔에 공감하는 연구자들은 노동자의 편에서 노동자의 목소리를 듣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확고한 입장을 견지하는 ‘전문가’의 태도를 가져야 한다. ●
 
필자 소개

최보경 I 누구나 차별 받지 않는 건강한 세상을 꿈꾸며 공부와 활동을 병행하고 있다. 사회진보연대 보건의료팀에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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