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칼럼
- 2017/11 제34호
모란공원에서 또 다른 오늘을 만나다
1017 빈곤철폐의 날 맞이 민중열사 묘역 참배에 함께하기 위해 마석 모란공원에 다녀왔다. 길고 뜨거웠던 여름이 드디어 끝나려는지, 아침 바람이 제법 차가운 날이었다. 왜인지 몰라도 매년 이맘때쯤 묘역을 참배하러 가는 날에는 아무리 뜨거웠던 날씨도 한 풀 꺾인다고 한다.
대학 시절 활동한 동아리방 책꽂이에는 하늘을 바라보는 어느 어르신의 흑백 영정이 올려져있었다. 처음엔 잠깐 보고 잊어버렸지만, 동아리방을 오고 갈 때면 그 영정이 눈에 들어오곤 했다. 한·미 FTA 협상에 반대하며 스스로의 몸에 불을 붙인 허세욱 열사의 이야기를 듣게 된 건 동아리방을 오간 지 몇 달이 지나고 나서였다.
이후에도 모란공원에 묻힌 열사들의 이야기가 주위를 맴돌았다. 전태일 열사의 이야기는 물론이고, 박종철 열사, 문익환 목사, 용산에서 돌아가신 다섯 철거민, 이소선 어머니. 그리고, 그리고, 그리고… 꼭 그래서만은 아니었지만, 빈곤철폐의 날 조직위원회에서 민중열사 묘역참배를 계획하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이번에는 꼭 마석에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조직위원회 분들과 함께 민병일·이덕인·우동민·정태수·허세욱·전용철 열사, 용산참사 철거민들, 전태일 열사, 이소선 어머니, 박종필 감독의 묘역을 돌아보고 간단히 인사드렸다. 이날 찾아뵌 열사들 중에는 젊은 나이에 돌아가신 분들이 많아 마음이 더 숙연해졌다.
투쟁 중에 돌아가신 열사라고 하면 수십 년 전 돌아가신 분들일 거라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비석 위의 날짜는 그게 틀렸다는 걸 보여주고 있었다. 소위 ‘민주화’가 된 1987년 이후에도, 더 나아가 오늘 이 순간에도 생존권을 짓밟는 국가·자본의 탄압은 곧 물리적인 폭력이고, 수없이 많은 희생자들을 양산했다.
용산에서 돌아가신 분들의 묘역을 참배할 때, 한 분이 고 이성수 묘비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었다. “다음에 만날 때는 꼭 소주 한 잔 사겠다고 하더니, 아직까지도 약속을 안 지키고 여기 누워 있구나…” 최근 까지 홈리스행동에서 활동했던 고 박종필 감독의 묘역 앞에서는 함께 있던 사람들 대부분이 눈물을 보였다. 여기 잠들어 있는 분들이 나와 같은 시공간을 살았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마음에 새긴 순간이었다.
묘역 참배가 끝나고 추모제가 이어졌다. 추모제 도중 계속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열사들이 마지막에 무엇을 가장 원했을지가 궁금해졌다. 그들이 원하던 바를 이뤄내기 위해서는 뭘 어떻게 해야 할까. 그리고 나는 그들의 삶과 죽음 앞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까. 그런 생각에 몰두하고 있던 차에 갑자기 나한테 마이크가 넘어왔다. ‘마석 모란공원에 처음 온 소감을 말해달라’고 해서 얼떨결에 ‘앞으로 이 분들의 뜻을 지키며 열심히 활동하겠다’고 말해버렸다. 다음에 다시 마석에 찾아갈 때 이날 한 말이 부끄럽지 않을 수 있다면 좋겠다. ●
- 필자 소개
한건희 l 오늘보다 편집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