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동보다
- 2017/10 제33호
고객님은 매우 만족 방문노동자는 매우 불만족
방문 설치·수리기사 안전과 인권 실태조사 결과
지난 6월, 한 고객이 인터넷 수리를 위해 방문한 KT 인터넷 수리기사에게 흉기를 휘둘러 숨지게 했다. 인터넷 서비스가 마음에 안 든다는 게 이유였다. 사건 직후 한 SK브로드밴드 인터넷 기사가 고객으로부터 “너도 KT기사처럼 되고 싶냐”고 협박당하는 일도 생겼다. 두 가지 사건 모두 가히 충격적이었다.
한국 기업은 소비자에게 굉장히 다양한 ‘방문서비스’를 제공한다. 해외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서비스 속도가 빠르고 질도 좋다고 알려져 있다. 지금껏 소비자 편의에만 초점을 맞춰왔기 때문에 이런 서비스 속도와 질은 ‘자랑할 만한 것’이었지만, 정작 방문서비스를 제공하는 노동자들의 실태는 ‘부끄러운’ 드러나지 않았다.
‘기술서비스 간접고용노동자 권리 보장과 진짜사장 재벌책임 공동행동’은 방문 설치·수리 노동자의 안전과 인권의 실태를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 설문조사를 했다. SK브로드밴드, LG유플러스, 삼성전자서비스, 티브로드, 딜라이브의 노동자 총 796명이 조사에 참여했다. 일부를 제외하고 대부분은 하청업체에 소속되어 일하는 노동자들이다.
결과는 심각했다. 고객님을 ‘매우 만족’하게 하기 위해 일하는 방문노동자들의 안전과 인권 실태는 ‘매우 불만족’ 상태였다.
설치·수리기사 대부분, “언어적·신체적 폭력 경험했다”
설치·수리기사 약 77퍼센트(614명)가 고객으로부터 폭언·폭행 등 폭력적 상황으로 인해 안전과 생명의 위협을 경험한 적이 있었다. 언어폭력을 경험한 적 있다는 응답은 61.1퍼센트(486명), 신체폭력 또는 물리적 위협을 경험한 적 있다는 응답은 31.4퍼센트(250명)였다.
특히 언어폭력은 “너무 일상적이어서 사례를 특정하기 어렵다”는 토로가 많았다. 소리 지르고 반말이나 욕설하는 건 예사고, “죽고 싶냐”고 협박하거나 해피콜(고객평가)을 빌미로 해고하겠다는 위협까지 이뤄지고 있었다. 신체 폭력의 경우도 상상을 초월한다. 제품이나 물건 던지기, 멱살 잡고 뺨이나 주먹 때리기에 그치지 않는다. 칼이나 몽둥이를 휘두르거나 집에서 못 나가게 감금하는 경우도 있었다.
고객들은 왜 이런 폭력적인 행동을 보일까? 설문 응답에 따르면, 제품 품질·서비스 정책·수리 비용에 대해 불만이 있을 때, 무상으로 수리받고 싶을 때, 늦거나 일찍 방문했을 때, 지금 당장 오라는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 인터넷 문제로 게임이나 주식투자 등에서 손해를 입었을 때, 기사의 권한 밖이거나 무관한 일을 요구했다가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 고객들에 의한 폭언·폭행이 발생한다고 한다. 특별한 이유 없이 다짜고짜 폭력을 행사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고객 달래기’만 하는 회사
폭력적 상황이 발생했을 때 사후 대처는 어땠을까? 응답에 따르면 회사(관리자급 이상)는 잘 나서지 않으며, 기사 개인이 혼자 감당하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회사가 나서서 문제를 해결했다’는 응답은 14.6퍼센트(82명)에 불과했다. 반면 ‘기사가 알아서 처리했다’는 응답이 85.4퍼센트(481명)에 달했다. 기사 혼자 해결한 경우 ‘회사에 알렸으나 무대책·무관심했다’(332명)는 응답이 가장 많았다. ‘회사에 알리지 않고 혼자 감당했다’(83명), ‘회사에 알렸으나 고객의 요구를 수용하고 사과를 강요했다’(41명), ‘회사에 알렸으나 오히려 기사를 질책했다’(23명)는 응답이 뒤를 이었다.
회사가 대책을 강구해도 그리 도움이 되지도 않았다. 노동자를 보호하거나 재발 방지 대책을 세운 경우는 거의 없었다. 최소한의 지침도 없이 센터마다 임기응변만 난무한다. 게다가 철저히 ‘불만고객 응대’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폭력 피해자인 노동자에게 고객 ‘케어’를 강요하기도 한다. 특히 고객이 과격하게 난동을 부릴수록 회사는 더 굽실거리고 수리비에 이익을 제공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러한 잘못된 대처가 악순환을 낳는다. 이러한 대처는 가해자 고객이 반성하기는커녕 마치 승자가 된 것 같은 기분을 제공해 다시 그런 행동을 반복하게 만드는 학습효과를 남길 가능성도 크다.
안정을 취하고 적절한 조치를 받아야 할 노동자를 추궁하거나, 기사 자질이 없다고 질책하거나, 경위서를 쓰게 하고 패널티를 주는 경우도 많았다. 이는 하청업체가 고객평가제와 원청의 실적압박에 매몰된 결과다. 이처럼 원·하청 모두 노동자의 안전과 인권에 대한 책임을 완전히 회피하고 있다.
고객 인식 바꾸려면 기업부터 변해야
“우리가 만난 사람들은 괴물이 아니라 평범한 이웃이었습니다.”
지난 9월 8일 국회에서 열린 ‘방문노동자 증언대회’에서 희망연대노조 엘지유플러스비정규직지부 최영열 지부장이 강조한 말이다. 폭력적 행위를 하는 고객이 ‘일부 비정상적 사람들’이 아니라는 뜻이다.
왜 이렇게 방문서비스 노동자를 막 대하는 고객들이 많은가? 근본적 원인진단과 해법이 필요하다. 우선, 고객(갑)과 노동자(을)의 대립 구도로 접근하면 진짜 책임자인 회사 역할이 가려질 수 있다. 고객을 ‘왕’으로 여기는 서비스가 노동자를 ‘하인’으로 전락시켰다. 그 ‘갑질 고객’ 서비스 정책을 운영하는 주체가 바로 본사(원청)다. 따라서 고객의 인식과 행동을 바꾸려면 본사 차원에서 ‘고객만족 제일주의’ 서비스 정책에서 벗어나야 한다.
다음으로, 노동자의 권리와 인격 역시 고객의 권리만큼 중요하다는 원칙을 원·하청 모두가 분명히 세워야 한다. 노동자뿐 아니라 고객도 지켜야 할 의무가 있음을 고지하고 강조해야 한다. 이런 점에서 고객의 주관적 의사만 존중되고 있는 고객평가제(해피콜)를 폐지 또는 개선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위험한 상황에 빠졌을 때 노동자가 주체적으로 판단하고 행동할 수 있는 권한을 가져야 한다. 산업안전보건법에 규정된 ‘작업중지권’이 방문서비스 노동자에게도 필요하다. 또한 작업중지권의 온전한 작동을 위해 고객평가와 실적압박, 급여문제(건당 성과급)에 속박당하지 않는 노동환경이 마련되어야 한다. ●
- 필자 소개
황수진 | 간접고용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노조할권리 보장과 확대를 위해 진짜사장 재벌책임 공동행동에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