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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특집
  • 2017/10 제33호

브렉시트 이후 영국 노동운동의 고민과 실천

  • 임월산
2016년 6월 23일, 영국의 유럽연합 탈퇴(브렉시트)를 결정한 국민투표는 영국 사회 뿐 아니라 유럽 전역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는 분수령이었다. 브레시트 결정은 유럽통합이라는 장기적 과정을 역전시킨 첫 계기로, ‘유럽’이라는 정치적·경제적 프로젝트에 제기된 의문들을 현실로 만들었다. 또한 이 사건은 유럽연합의 신자유주의적 통합을 당연시하는 중도우파와 중도좌파가 주도하는 정치 헤게모니 내의 균열을 보여줬고, 우파 포퓰리즘(인민주의) 부상의 징후와 결과로 해석됐다. 반면 브렉시트의 중요한 원인인 긴축 정책과 사회적 양극화의 심화는 노동당 좌익화와 새로운 젊은 좌파세력의 등장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 상황은 영국 노동조합에 많은 과제를 던지고 있다. 노동운동 주류가 우익 포퓰리즘 정당인 영국독립당(UKIP)이 주도한 브렉시트 지지 캠페인의 민족주의적이고 인종차별적인 담론을 단호히 부정하고 잔류를 지지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노동자들은 브렉시트에 투표했다. 때문에 노동조합들은 강화되는 민족주의와 인종주의에 대응하면서도 브렉시트를 택한 노동자들의 신뢰를 회복하고 새로운 희망을 줄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더불어, 탈퇴가 결정된 상황에서 유럽연합과 어떤 새로운 관계를 도모할 것인지 입장을 정리해야 한다. 또 제러미 코빈의 노동당과 코빈을 지지하는 젊은 층과의 발전적인 관계 역시 모색해야 한다.
 
 

‘이민의 이득에 대한 공정한 분배’

잔류를 지지했던 주류 노동운동은 국민투표 결과에 대해 충격받았다. 그러나 곧 대부분의 노조들은 브렉시트를 지지한 많은 노동자들의 선택을 이해할 필요성을 인지했다. 국민투표 직후 영국노총(TUC)은 조합원 대상으로 탈퇴 투표 여부와 그 이유를 묻는 설문조사를 진행했다. 이 연구에 따르면 이민자 문제는 탈퇴에 투표한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고민 중에 하나였으며 잔류에 투표한 많은 사람에게도 고민거리였던 것으로 나타났다.

국민투표는 유럽 전역에서 시리아를 비롯한 중동으로부터의 이민자와 난민이 급증하던 시기에 실시됐다. 유럽의 다른 우파들과 마찬가지로 영국독립당의 브렉시트 지지 캠페인은 무슬림들을 잠재적 테러리스트로 묘사했다. 특히 일자리와 노동조건에 대한 이민자들의 위협을 강조하면서 외국인혐오주의를 노골적으로 자극했고, 국경 통제를 대폭 강화하자고 주장했다. 국민투표 후, 유럽연합의 기본 원칙이었던 이동의 자유(free movement of people)와 영국에 거주하는 300만 명의 유럽연합 출신 이민자들의 체류자격이 쟁점화됐다. 브렉시트의 연장선으로 유럽연합 국민의 추방을 요구하는 목소리도 불거졌다.

이에 맞서 영국노총은 유럽연합 국민의 체류권을 확실히 주장하고 있다. 원칙적인 입장만 되풀이하지 않고, ‘효과적인 이민관리’와 ‘이민의 이득에 대한 공정한 분배’를 기조로 이민문제에 대한 새로운 패러다임과 정책방향도 모색하고 있다. 특히 이민자에 관한 제반 문제의 근본 원인은 이민 당사자가 아니라 ‘제도의 결함’이라고 밝히고, 해결책을 제시함으로써 국민투표를 통해 표출된 국내 노동자들의 불만에 보다 적극적으로 대응하고 있다. 또 인종주의 발호를 야기하는 사회적 갈등의 해소를 위해서도 노력하고 있다.

영국노총이 제시한 정책은 국경 통제보다는 이민노동자에 대한 착취를 근절해 임금에 대한 압박을 해소하는 것에 초점을 두고 있다. 특히 출입국관리사무소 소속 직원을 늘리고 노동 착취와 인신매매 단속을 담당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영국노총은 새로운 이민영향기금(Migration Impacts Fund)의 설립 역시 제안하고 있다. 이는 2016년 10월 보수당 정부가 발표한 ‘이민통제기금’에 맞서 제시한 대안으로, 지역 공공서비스에 대한 부담을 줄이는 것을 목표로 한다. 영국에 체류하는 유럽연합 이민자들은 연 20억 파운드의 세금을 내고 있는데, 이 돈을 출입국관리 강화가 아니라 이민영향기금을 조성하기 위해 쓰자는 것이다. 기금을 이민자들이 새롭게 투입된 지역에서 공립학교·공공주택을 비롯한 공공서비스 강화 및 좋은 일자리 확대와 이민자를 위한 영어교육에 투자하면, 이민자와 내국인 간 갈등 해소에 기여할 수 있다.
 

이동의 자유와 유럽의 단일시장

이민자에 대한 전향적인 정책과 달리 ‘이동의 자유’에 대한 영국 노동운동의 입장은 국민투표 이후 후퇴한 것으로 보인다. 국민투표 전 영국노총을 비롯한 대부분 노조들은 이동의 자유를 당연히 지지했다. 그러나 지난 7월, 영국노총의 제안은 이동의 자유는 원칙적으로 보장하면서 실제 이민을 억제하는 것에 맞춰져 있다. 이 정책은 유럽연합 이민자에 대한 체류 등록제 도입, 내국인 우선 고용 독려정책, 비시민권자의 공공부문 취직 제한 등으로 구성된다. 국내 체류 이민자와 장래의 유럽연합 이민자에 대한 입장 차이는 한편으로는 국제주의·반인종주의 원칙과 이민자 조합원을 보호할 의무를 지키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내국인 노동자의 불만에 보다 적극적으로 대응할 필요성을 조율하는 어려움에서 비롯된 듯하다.

유럽연합과의 경제적 관계를 지속하겠다는 영국 노동운동의 구상도 작동하고 있다. ‘브렉시트’를 주도하는 보수세력과 렉시트(국민투표 당시 브렉시트를 지지한 영국 좌파들의 캠페인)를 주장한 일부 좌파와 달리, 영국의 노동조합들은 유럽연합과의 협상에서 유럽연합 단일시장 접근권 유지를 필수 조건으로 제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영국노총은 일자리와 노동조건을 보장하기 위해 단일시장에 대한 자유로운 접근이 차단될 경우 이에 뒤따를 경제 위축과 물가 상승을 피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이를 위해 탈퇴가 이뤄지더라도 탈퇴 이전 경제 체계와는 지속성을 가져야 함을 강조한다.

다른 유럽연합 회원국 정부들과 노동조합들은 영국이 이동의 자유 원칙을 지켜야 브렉시트 이후에도 단일시장 접근권을 유지할 수 있다는 입장이 확고하다. 따라서 영국노총은 이 조건을 맞추기 위해 이동의 자유 원칙은 준수하고, 동시에 이민을 실제 제한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고 있는 것이다.
 
 

노동운동과 ‘모멘텀’

자유 이동과 단일시장에 관한 쟁점을 둘러싼 쟁점에서 노동운동과 노동당 내 좌파 간 긴장관계가 형성되어 있다. 노동운동의 입장을 반영해 올해 6월 총선 전에 발표한 노동당 매니페스토(공약집)는 ‘유럽연합에서 떠나는 순간, 이동의 자유가 끝날 것’임을 명확히 하며 이민 규제 정책을 제시하고 있다.

하지만 코빈과 노동당 좌파의 젊은 지지자들이 모여 있는 ‘모멘텀’은 다른 입장을 내고 있다. 이들은 코빈이 여전히 자유 이동을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어떠한 추가적인 이민 규제도 반대한다며, 자유 이동을 유지하자는 캠페인을 벌이고 노총 입장을 공개적으로 비판하고 있다. 이에 영국노총 지도부는 이런 모멘텀의 입장이 비현실적이라며 거리를 두고 있다.

반면 코빈을 적극적으로 지지해온 최대 산별노조 유나이트(Unite)는 모멘텀과 협력관계를 모색하고 있다. 유나이트의 간부들은 코빈이 잔류에 소극적이었다는 노동당 주류파의 비판을 적극적으로 방어했고, 올해 6월 총선에 함께 주력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노동조합들은 아직까지 모멘텀으로 모이는 좌파성향 청년들의 에너지를 조직할 전략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왼쪽으로 가는 노동운동

한편 진보적 노동조합들은 코빈이 주도하는 노동당의 좌익화 과정을 지속가능한 경제에 대한 그들의 구상을 추진하는 기회로 삼고 있다. 예컨대 영국공공노조(Unison), 유나이트, 영국공공상업서비스노조(PCS) 등 일부 노조들이 참여하는 에너지민주주의노조네트워크(TUED)는 연초부터 노동당 예비내각 에너지장관을 지속적으로 접촉해 공적 소유와 민주적 통제, 재생에너지 확대에 기반을 둔 에너지전환 방안을 제안하여 수차례 토론했다. 그 결과 노동당의 총선 공약집에는 에너지 공급망에 대한 통제권 회수, 공적 분산형 에너지 체제로의 전환, 재생에너지 도입 확대, 주택 및 공공건물 단열 사업과 프래킹(물과 모래, 화학약품을 섞은 혼합액을 고압으로 분사해 퇴적암(셰일) 층에 고여 있는 천연가스와 원유를 추출하는 기법) 금지 계획이 상당히 구체적으로 서술돼 있다. 공약집은 또한 노동조합들의 주요 투쟁 목표인 지역별 상수도 공기업 육성, 철도 및 우정공사 재국유화와 국민건강서비스(NHS) 강화 공약을 포함하고 있다.

이는 보수당 정권 하 노동운동의 끈질긴 투쟁의 결과다. 경제위기 발발 후부터 영국의 노동운동은 NHS 예산삭감과 민영화를 반대하는 캠페인과 여러 차례의 대규모 집회를 진행했다. 작년엔 의료 노동자 파업도 있었다. 교통 부문에서는 TUC와 철도산업 노조들이 최근 5년 간 1990년대에 민영화된 장거리 철도의 재국유화를 쟁취하기 위한 ‘철도 행동 캠페인’(Action for Rail)을 펼치고 있다.

이러한 재국유화와 공공성 강화 투쟁은 대중의 지지를 얻고 있다. 최근 여론조사에 따르면 영국인의 절반 이상은 재국유화 관련 노동당 공약을 지지하고 있다. 앞으로 노조들이 노동당의 급진화와 영향력 강화를 재국유화와 공공성 강화를 위한 대중 투쟁을 확대할 기회로 활용할지, 아니면 정치권에 더 의존하게 될지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영국 노동운동의 과제

예상과 다르게 올해 6월 8일에 치러진 영국 총선에서 노동당은 1945년 이후 가장 큰 성과를 기록(30석이 늘어난 262석 차지)했다. 반면 보수당은 13석을 잃어 과반에 미달한 318석을 차지하게 됐다. 여론에 있어서 코빈이 승리한 것은 확실하다.

젊은 유권자들은 총선에 적극적으로 참가했다. 출구조사에 따르면 2015년 총선에서 56퍼센트의 투표율을 기록한 35세 이하 유권자들은 이번 총선에서는 68퍼센트가 투표했다. 18~24세 유권자의 경우, 국민투표에선 59퍼센트로 추정되었는데, 이번 총선 투표율은 72퍼센트로 13퍼센트 더 높았다. 노동운동이 좌파적 대안에 대한 젊은 층의 열망을 법제도 개혁으로 관철하고, 브렉시트가 가져올 혼란에 대비해 조직을 확대·강화에 집중화시킬 수 있을지가 관건이다. 그러려면 노동조합들이 모멘텀과 코빈의 젊은 지지자들과 보다 적극적인 관계를 맺어야 한다. 또, 이민자에 대해 그랬듯, 이동의 자유를 비롯한 ‘조합원의 고민’을 해소하기 위해 보다 전향적인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브렉시트에 대한 영국노조들의 대응은 현 제체의 지속성을 보장함으로써 일자리와 노동조건을 최대한 보호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러나 다음 총선에 코빈이 이끄는 노동당이 집권한다면 브렉시트는 매우 다른 조건에서 이루어질 수 있다. 일부 좌파들은 코빈이 집권하면 사회적 소유, 민주적 통제, 보편적 노동권과 공평한 재분배에 기반을 둔 국가 계획이 가능할 것으로 전망한다. 하지만 브렉시트가 이뤄지지 않고 영국이 유럽단일시장에 남는다면 이 비전을 실현할 수 없을 것이라고 강조한다.

이는 영국 노동운동이 적극적으로 검토해야 할 매력적인 비전이다. 하지만 이 비전에서 ‘유럽’이 사라지면 안 된다. 대안 체제를 구상하면서도 이민 정책을 비롯해 유럽 노동자들에게 제기되는 문제에 대해 유럽의 노동조합들과 일상적이고 솔직한 대화가 필요하다. ●
 
 
필자 소개

임월산 | 공공운수노조 국제·통일국장, 노동자 국제주의를 고민하고 공부하고 실천하려고 노력하는 활동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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