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특집
- 2017/05 제28호
‘할머니’ 없는 한국, 유지될 수 있을까?
할머니가 파업하면 멈추는 사회
‘할머니’가 파업한다면 한국사회는 버틸 수 있을까? 할머니에게 어린자녀를 맡기고 있는 상당수의 직장인들은 출근할 수 없을 것이다. 아픈 노인들도 간병할 사람이 없어 방치될 것이다. 할머니네 가족들만 문제가 될까? 아니다. 할머니는 손주와 아픈 남편만 돌보는 것이 아니라 간병인・요양보호사 등으로 사회서비스 일자리에서 일하며 노인과 환자를 돌본다.
할머니가 파업하면 병원과 요양시설도 멈출 것이다.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경제성장도 멈출 것이다. 2010년 이후 한국경제는 저임금 일자리 증가로 성장하고 있다. 그 핵심은 50대 여성의 사회서비스 진출 확대로 분석된다.
이처럼 눈에 잘 띄지 않지만 아동과 노인, 환자를 돌보며 사회를 지탱하고 경제성장까지 이끄는 주역이 바로 할머니다. 바꿔 말하면 한국은 할머니의 출혈 노동으로 유지되는 사회다. 50~60대 여성이 가족과 사회의 공백을 메우며 사회를 지탱하고 있는 것이다.
50대 여성이 이끄는 한국경제성장
세계은행의 최근 연구에 따르면 한국경제는 2010년 이후 생산성 향상이 정체되고 기업투자가 감소하여 노동투입의 증가로 겨우 2퍼센트 대 성장을 하고 있다. 2010년 이후 노동참가율 증가는 대부분 50대 이상의 중장년층 취업자 증가에서 기인했다. 특히 50대 이상 사회서비스 일자리 확대가 큰 영향을 미쳤다.
실제로 같은 기간 전체 임금노동자가 15.7퍼센트 늘어난데 비해 50대 이상은 53퍼센트 증가했다. 사회서비스업으로 분류되는 보건복지산업은 2013년에서 2016년 10월 사이 여성 취업자가 36만 3천 명 증가해 여성 취업자 증가폭이 전체 산업에서 가장 컸으며, 그 중 50대 이상 취업자가 26만 5천 명에 달한다.
50대 이상 중고령 여성 취업자가 증가하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추정된다. 하나는 자녀로부터 부양을 기대하기 어렵고, 국가지원이 취약하다는 점이다. 자녀들의 취업준비기간이 늘어나고 안정된 수입이 보장되는 직장을 구하기 어려워, 중고령 여성들은 부양을 기대할 수 없다. 오히려 자녀를 지원해야 할 처지다. 국가 지원도 기대하기 어렵다. 한국은 고령자 소득 중 노동소득이 차지하는 비율이 60% 이상으로, 고령자 노동소득 비중이 20%대인 OECD 가입 국가들에 비해 현저히 높다. 두 번째 이유는 저출산·고령화로 사회서비스 일자리가 확대되어 여성인력 수요가 증가했다는 사실이다.
저임금으로 내몰리는 50대~60대 여성
사회서비스 일자리가 확대된 배경에는 저출산 고령사회로 빠르게 진입하면서 국가가 개별 가족에 돌봄노동을 전가하는 방식이 유지되기 어렵다는 판단이었다. 또 출산율 하락으로 노동인구가 감소하는 것을 만회하기 위해 여성의 노동참여를 확대하자는 요구도 있다. 가정 내에서 담당하던 돌봄 노동을 사회화하고, 동시에 여성 취업을 늘릴 수 있는 일자리가 바로 사회서비스 일자리였던 것이다.
사회서비스 일자리 양산은 여성인력을 활용해 재생산의 위기를 관리하려는 목적이 크다. 때문에 정부는 공공성을 강화하는 방향이 아니라, 시장화된 방식으로 사회서비스를 확장하고 있다. 현재 사회서비스의 대다수는 정부가 서비스 이용자에게 바우처 방식으로 재정을 지원하고, 민간기관이 서비스를 제공하는 방식이다. 노인돌봄, 장애인활동보조지원, 가사간병서비스, 산모신생아도우미 등이 이러한 방식으로 운영되고 있다. 문제는 서비스이용자는 제한적인데 반해 서비스제공 기관은 난립하고 있어 재정구조가 열악하고, 노동비용을 최소화하는 것을 통해 유지되는 곳이 대다수라는 점이다.
그 결과 50~60대 여성들의 노동시장 참여가 늘어나고 있지만 그 일자리의 질은 나쁘다. 대다수가 저임금 일자리다. 최저임금 및 근로기준법이 무시되는 일도 상당하다. 2016년 3월을 기준으로 50대 여성 임금근로자의 47퍼센트, 60대는 73퍼센트가 저임금 노동자(중위임금 3분의 2 이하)다. 남성의 경우 50대 저임금 비중이 14퍼센트, 60대에는 51퍼센트로 남성에 비해 여성의 저임금 문제가 심각하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손주병에 걸리는 할머니들
저임금 일자리로 내몰리지 않은 50~60대 여성들이라고 해서 삶이 편안한 것은 아니다. 손자녀를 돌봐야 한다. 신조어로 ‘손주병’이 생겨날 정도다. 손자녀를 돌보다가 허리나 무릎 관절염에 걸리거나 심지어 우울증을 겪는 경우가 늘고 있다. 조부모가 맞벌이 가구의 절대적 양육지원자이기 때문이다.
맞벌이 가구는 아이돌보미나 베이비시터보다 신뢰할 수 있는 조부모에게 자녀를 맡기는 경우가 많아 그 비율이 63퍼센트에 달한다. 2015년 육아정책연구소의 조사에 따르면 손자녀를 양육하는 조부모 대부분이 자녀와 동거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손자녀를 돌보는 데 소요되는 시간은 주당 42시간에 달하고, 육아만이 아니라 가사일도 하고 있으며 육아보다 가사노동이 더 고되다고 응답했다.
조부모가 손자녀 양육을 맡게 되는 주된 이유는 자녀의 직장생활을 지속하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해서였다. 신뢰할 만한 보육시설의 부족과 장시간 노동으로 인해 30대 여성의 직장생활은 할머니의 조력으로 겨우 유지되는 현실이다.
할머니, 허리 좀 펴자
가족이 변하고 있다. 그러나 변하지 않은 것은 여성이, 특히 50~60대 여성이 복지의 최후의 보루라는 점이다. 한국은 지금 가족의 변화 속에서 발생하는 돌봄노동의 공백을 중고령 여성들의 노동으로 메꾸고 있다. 할머니들은 가족 내에서 손자녀를 기르고, 아내로서 아픈 남편을 돌보고, 사회서비스 노동자로서 일터에서 장애인과 환자와 노인을 돌본다.
한마디로 부족한 사회서비스 인프라와 사회서비스의 시장화가 빚어낸 구조적 문제를 중고령 여성들에게 전가하는 상황이다. 그럼에도 손자녀 돌봄은 할머니의 사랑으로, 사회서비스 노동은 나이든 여자들이나 하는 쉬운 일로 여기며 쉽게 정당화된다.
할머니가 허리 좀 펴고 삶이 나아지기 위해 필요한 것은 손주의 재롱이 아니다. 돌봄노동의 가치를 인정하고 사회서비스 노동자들의 노동조건을 개선하는 것, 손주들이 할머니 손이 아니라 신뢰할 수 있는 보육시설에서 자라는 것이다. ●
- 덧붙이는 말
이유미 | 재벌문제, 노동자운동 강화에 관심을 가지고 노동자운동연구소에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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