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필름X정치
- 2016/08 제19호
"막연한 희망이 아니라 삶"이었던 노조
한진중공업 노동자들의 삶과 투쟁, 다큐멘터리 <그림자들의 섬>
2003년 가을 학생회관 복도에는 향냄새가 자욱했다. 국화꽃이 놓인 허름한 탁자 위에는 빼곡한 글씨의 대자보와 서글서글하게 웃고 있는 한 남자의 사진이 걸려있었다. 남자는 크레인에서 내려오면 아이들에게 힐리스 운동화를 사주고 싶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2003년, 한진중공업 지부장으로서 농성을 시작한 지 129일째 되는 날. 크레인 위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김주익 열사의 이야기다. 그의 이야기는 당시 라디오방송 ‘정은임의 영화음악’을 통해 널리 알려지기도 했다.
한진중공업이라는 이름을 다시 들은 건 약 10년이 지난 뒤 내가 다른 대학에 진학했을 때였다. 김주익 열사가 올랐던 바로 그 크레인에서 김진숙 지도위원이 정리해고를 반대하기 위해 목숨을 건 농성을 시작했다. 새로운 학교에는 부산 한진중공업으로 향하는 ‘희망버스’를 함께 타자는 대자보가 군데군데 붙어 있었다.
영화를 소개하는 자리에서 지난 기억들을 떠올린 것은 이 영화가 환기하는 역사가 바로 그것이기 때문이다. 한진중공업 노동조합(현 금속노조 한진중공업지회)을 다룬 다큐멘터리 <그림자들의 섬>은 부산 영도의 풍경을 보여주면서 시작한다. 높은 크레인이 듬성듬성 솟아있는 부둣가 공장. 언덕배기로 빽빽하게 들어찬 낮은 집들과 그 사이를 구불구불 굽이친 골목길. 2012년도에 희망버스를 한번이라도 탔던 사람들이라면 김진숙을 만나겠다며 새벽 내내 헤매던 그 길을 어렴풋이 떠올릴 것이다. 그렇게 영화는 부산의 한 작은 섬으로 우리를 다시 부른다. 하지만 영화가 말을 거는 방식은 희망버스 때의 들뜬 열기와는 달리 아주 차분하다.
영화는 희망버스가 끝나고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이후 한 걸음 떨어져 한진중공업지회의 역사를 초기부터 되돌아본다. 1980년대 초, 한진중공업의 전신이었던 대한조선공사에서 처음 일을 시작할 때의 설렘과 다짐. 더럽고 열악했던 일터에 대한 첫인상. 허구한 날 사고로 사람이 죽어나가는 현장에서 무심한 듯 보이지만 저마다의 방식으로 동료를 추모하는 투박한 눈물. 동료의 죽음이 회사 책임이 아니라고 하는 문서에 얼떨결에 서명을 하고, 집으로 가는 길에 동료의 어린 자식들을 마주쳤을 때의 황망함. 쥐똥이 섞여 있는 도시락을 도저히 못 먹겠다며 엎고 투쟁을 시작했을 때의 흥분. 어용노조 간부를 무릎 꿇리고 민주노조를 처음 만들었을 때의 기쁨 등 영화는 노동자 개개인의 사적인 기억을 통해 민주노조의 역사를 복기한다.
정적인 인터뷰와 자료화면으로만 진행되는 영화지만 생생하고 구체적인 말이 주는 힘 때문에 짧지 않은 러닝타임이 결코 지루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특히 인터뷰이 중 한 명인 김진숙의 말은 마치 어제 본 것을 설명하는 듯 생생하다. 노동자들의 구체적인 언어는 ‘민주노조’라는 다소 딱딱한 단어에 의미와 역사, 그리고 생명력을 부여한다.
영화 속 김진숙의 말을 그대로 옮기자면 민주노조는 “막연한 희망이 아니라 삶” 그 자체였다. 즉 그들에게 ‘민주노조’는 단순하게 노동자들이 연합한 단체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존엄한 삶을 위해서 꼭 지켜야만 했던 것이고, 또 많은 동료들이 죽으면서까지 지켜왔던 어떤 것이다.
역동적이었던 한진중공업지회의 투쟁. 한진 노동자들의 역사에는 낡은 식당과 더러운 화장실을 신식으로 개축하는 등 승리의 기쁨도 있었지만, 저항의 과정 속에서 동료를 잃어야 했던 가슴 아픈 순간도 있었다. 1991년 당시 지회장이었던 박창수 열사가 경찰의 조사를 받던 와중 병원에서 미심쩍은 죽음을 맞았고, 2003년에는 김주익 열사가 크레인 농성 중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또 보름 뒤에는 김주익 열사의 죽음을 자책하던 동료 곽재규 열사가 50미터 도크 아래로 몸을 던졌다. 한진중공업 노동자들에게 노동조합은 가슴 뿌듯한 사랑의 기억이자 처절한 투쟁의 시간이기도 했던 것이다.
영화 속에서 인터뷰가 진행되는 장소는 작고 허름한 사진관이다. 일반적으로 다큐멘터리에서 인터뷰는 그 인물을 설명할 수 있는 배경에서 진행된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인물을 설명하는 장치는 그들이 입고 있는 허름한 작업복뿐이다. 굳이 사진관을 인터뷰 장소로 선택한 것은 이 영화의 기록이 마치 기념사진을 찍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물론 이 사진에는 승리의 기억만 있는 것은 아니고, 쓰디쓴 패배의 경험도 있다.
잘 찍은 한 장의 기념사진은 오래도록 그 순간을 간직할 수 있게 해주고, 그 기억은 다시금 우리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힘을 준다. 이 영화가 노동조합, 나아가서는 1987년 이후 한국 민주노조운동의 기념사진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지나간 시간을 잘 기억하고 미래로 나아가게 하는 것은, 이제 남은 사람들의 몫이 되었다. 한진중공업 노동자들은 자신의 과거를, 그리고 우리는 한진중공업지회의 투쟁을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