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는글
- 2016/07 제18호
신자유주의 종주국의 정치위기
영국과 미국에서 1년 전만 해도 상상하기 어려웠던 일들이 벌어졌다. 미국에서 무슬림 입국 금지와 같은 극단적 인종주의를 입에 담는 트럼프가 공화당의 대선후보로 선출되고, 영국에서는 설마설마했던 유럽연합 탈퇴가 국민투표를 통해 결정됐다. 그리고 두 사건은 종착지가 아니라 그 방향이 어디인지 알 수 없는 변화의 한 마디일 뿐일 게다.
두 사건의 배경에는 보수 정치의 위기가 자리한다. 미국에서 극우 티파티 운동이 극단적인 정부 축소와 인종주의를 공공연하게 주장하며 공화당 기층을 뒤흔들어 놓았지만, 공화당 엘리트들은 오바마 때리기에 이를 동원하거나 수수방관할 뿐이었다. 결국 당내 경선에서 공화당 주류는 변변한 대항마조차 세우지 못하고 트럼프에게 왕관을 넘겼다. 영국에서는 이민 제한과 유럽연합 탈퇴를 내건 영국독립당이 급성장했다. 2014년 유럽연합 의회선거에서 27.5퍼센트 득표로 1위, 2015년 영국 총선에서는 12.6퍼센트로 보수당과 노동당에 이어 3위를 차지했다. 이번 국민투표 과정에서는 집권 보수당 정치인들도 양분되어, 각료 6명과 의원 절반가량이 탈퇴 진영에 가담했다.
영미에서 1990년대 신자유주의로 ‘현대화’한 중도좌파 정치의 균열도 발생하고 있다. 미국 민주당 경선에서 미국식 자유주의를 넘어선 민주적 사회주의를 견지해온 샌더스가 부상했다. 영국에서는 신자유주의를 세련화해 한국의 김대중·노무현 정권에도 영향을 미쳤던 블레어 노선을 비판하고, 평화운동과 노동운동에 기반을 둔 노동당 내 좌파 노선을 견지했던 코빈이 당대표 선거에서 돌풍을 일으키며 승리했다.
하지만 미국과 영국에서 일었던 이 물결이, 정치 구조를 변화시키는 데까지 나아갈 수 있을지는 아직 모른다. 샌더스가 힐러리 클린턴의 대선 승리를 위해 민주당 내에서 협력하기로 하면서, ‘샌더스 진영’의 앞날을 두고 토론이 진행되고 있다. 민주당의 개혁을 추구할 것인지 아니면 독자적인 새 정치세력을 추구할 것인지, 만나기 힘든 양 갈래길이 쟁점이다. 영국 노동당 의원단의 대다수를 장악한 주류 세력은 국민투표 결과에 대한 책임을 물으며 다시 코빈 흔들기에 들어갔다. 영국 좌파들이 안팎의 압박을 이기고 탈신자유주의, 친이민, 평화 운동으로 브렉시트 이후를 돌파할 수 있을지가 관건이다.
신자유주의 종주국이자 금융세계화 패권인 영미에서의 정치적 격변은 낡은 체제의 취약성을 보여준다. 2008년 세계금융위기 이후 8년, 예전의 성장세를 회복한 선진 경제는 없으며, 중국 경제의 활력 하락은 뚜렷하다. 인류는 매번 새로운 시대에 살지만, 지금처럼 당대가 구조의 격변기임을 알 수 있는 때는 흔치 않을 것이다. 30년간 세계를 호령한 신자유주의 체제의 대위기는 끝나지 않았다. 그러나 대안 이데올로기와 새로운 정치가 미약하고, 아래로부터의 변화 열망은 애꿎은 적을 찾는 극우 정치에 동원된다. 한국에서 이주민, 여성, 동성애에 대한 혐오가 늘어나는 것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변화의 주도권을 잡기 위한 사회운동의 임무를 가볍게 생각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