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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특집
  • 2016/07 제18호

한국 여자들은 어떻게 김치녀가 되었나?

  • 이유미 《지금 여기 페미니즘》저자, 노동자운동연구소 연구원

 

고개 숙인 남자, 일베 하는 청년

1997년 IMF 외환위기 이후 대규모 감원과 줄지은 파산으로 40~50대 남성 가장들은 큰 타격을 입었다. 직장에서 쫓겨나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공원 벤치에 앉아 있는 남성들의 모습이 텔레비전 뉴스에 단골로 등장했다. 위축된 가장의 자화상을 그린 ‘고개 숙인 남자 신드롬’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전 사회적으로 가장의 기를 살려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기 시작했다. 해법은 구조조정에 브레이크를 걸거나, 실업자들에게 새로운 일자리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었다. 가정에서 아내가 남편 기를 살려야 IMF 위기도 빨리 극복된다며, ‘남편 기 살리기 10계명’이 등장했다. 마치 아내가 기 죽여서 남편 고개가 숙여진 것처럼. 

한국 사회가 IMF 위기를 ‘가장의 위기’라는 형태로 받아들였다면, 2008년 세계금융위기 이후 저성장 국면에 주목받은 것은 ‘청년의 위기’다. 외환위기 이후 본격화된 신자유주의 정책으로 한국 사회에는 비정규직이 확대되고 고용조정이 일상화되었다. 이제 고용안정과 적절한 임금을 보장하는 일자리는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다. 또한 고용 없는 성장으로 청년실업 문제가 심각해졌다. 청년들은 부모 세대보다 나은 삶을 살 수 있다는 기대를 버렸다. 

상당수 남성 청년들은 경제적 박탈감, 절망감을 또래 여성들에 대한 혐오로 분출하고 있다. 여성들 때문에 취업이 어려워지고 연애와 결혼이 어려워진 것도 아닌데, 젊은 여성들을 ‘김치녀’라며 매도해 비난한다. 이러한 여성혐오는 ‘일베(일간베스트저장소)’ 등 온라인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점점 확대되고 있다.

과거 고개 숙인 남자 신드롬이 아내의 응원을 강조하면서 원인에 어긋나는 해법을 내놓았다면, 김치녀 담론은 문제의 원인을 오도하고 여성에게 분풀이를 한다. 그리고 남성이 피해자라고 호소하는 특성을 보인다. 여성은 더 이상 사회적 약자가 아닌데, 여성가족부의 도움을 받고 있어 ‘역차별’이 발생하므로 남성들이 경쟁에서 불리하다는 것이다.
 

경쟁자 여성

이런 형태의 피해의식은 어디서 비롯되었을까. 연구(한국여성정책연구원, <남성의 삶에 관한 기초연구Ⅱ: 청년층 남성의 성평등 가치 갈등 요인을 중심으로>, 2015.)에 따르면 남성 청년들은 한국 사회에서 가장 살기 좋은 세대가 ‘20~30대 여성’이라고 답했다. 

여기서 여성을 경쟁자로 여기는 남성들의 생각을 엿볼 수 있다. 청소년기, 취업준비기는 학업성취도를 중심으로 경쟁하는 시기다. 여성이라고 해서 남성에 뒤처지지 않는다. 게다가 여성들에게 좋은 직장이라 여겨지던 교사, 공무원, 공기업은 남녀 모두가 선망하는 직장이 됐다. 예전에는 이런 직업이 수입이 많지 않더라도 격무에 시달리지 않아 가정과 병행하기 좋다는 의미에서 여성에게 적합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안정적 일자리가 드물어지자 인기 직장으로 변모했다. 

학교 성적이나 각종 취업 시험에서 여성들과 경쟁하는 남성들은 여성을 약자로 볼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취업을 준비하는 시기에 남성은 군 복무를 감수해야 한다는 생각에 피해의식이 증폭된다. 그러다보니 군가산점제를 폐지하고 사회적 약자로서 여성을 위한 할당제와 같은 정책을 추진하는 여성가족부에 반감이 크다. 이는 앞의 연구에서 남성들이 여성혐오의 원인으로 여성가족부를 가장 많이 지목한 사실에서도 드러난다. 여성가족부는 남성들에게 경쟁을 통한 생존이라는 게임의 룰을 위반하는 대표적 존재인 것이다. 

그러나 청년들은 남녀의 사회경제적 격차가 본격화되는 시기에 아직 진입하지 않았다. 다수 여성들은 임신, 출산 이후 경력단절을 경험하고 재취업하는 과정에서 남성과 사회경제적 격차가 현격하게 벌어지는 것을 경험한다. 그렇기에 여성에 대한 경쟁의식과 피해의식은 취업을 준비하는 청년기의 특성이 상당히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사치를 일삼는 김치녀

단지 취업경쟁만 문제가 아니다. 연애와 결혼에서 전통적 성역할 수행이 어려워지자 이로 인한 여성과 남성 사이의 갈등도 발생하고 있다. ‘남자는 능력, 여자는 외모’라는 통념에서 알 수 있듯, 경제력은 남성 매력의 중요한 부분이라고 여겨진다. 그리고 남성에 대한 여성의 경제력 의존이라는 구도는 성별 권력관계에서 남성이 우위를 점하는 물질적 기반이기도 하다. 남성들은 데이트 비용, 결혼 비용, 가족부양 비용을 충분히 감당할 수 있음을 여성에게 어필해 왔다. 그러나 오늘날 전통적인 성역할에 대한 남성 청년들의 부담감이 커지자 여성의 속물근성을 비난하기 시작한 것이다.

연애와 결혼이 어려워진 것은 여성들이 돈 많은 남성만 찾아서가 아니라 경제적 어려움을 유발한 청년 실업이나 사회문제 때문이다. 우리는 그러한 사회에 변화를 요구하는 행동을 선택할 수도 있다. 생계부양의 짐이 부당하게 느껴진다면 그간 지배적이었던 ‘남자는 능력 여자는 외모’ 도식이 여성에게는 어떤 부당함으로 작용했는지 성찰할 수도 있을 것이다. 평등한 성역할로의 전환을 모색하는 길이 사실 가장 바람직한 선택지다. 하지만 집단적 행동으로 사회를 바꾸는 정치에 대한 불신이 팽배한 시대에, 불만은 사회 변화의 열망이 아닌 약자를 향한 비난으로 쉽게 돌변한다.

한국 사회에서 이 상황은 특히 여성에 대한 비난으로 귀결되고 있다. 대표적인 신화가 ‘김치녀’다. 김치녀는 한국 여성을 비하하는 표현으로, 일반적으로 ‘여성으로서의 권리는 원하지만 의무는 다하지 않는 여성’, ‘남성의 가치를 돈으로 평가하고 남성에게만 경제적 책임을 지우는 여성’ 등을 의미한다. 오늘날 젊은 여성들이 아침밥도 안 차려주면서 남자 돈으로 명품가방이나 사들이며 사치를 일삼는다는 것인데, 데이트 비용, 결혼 비용, 생계비용을 남자친구나 남편에게 전부 떠넘겨놓고 정작 자신은 여성의 역할을 방기한다며 비난한다. 이러한 비난의 바탕에는 성별 권력관계에서 남성으로서 우위를 포기하고 싶지는 않은데, 경제력을 갖출 방도가 없다보니 여자들이 원망스럽다는 심리가 있는 것으로 짐작된다. 여성에 대한 이러한 분노는 사실 열등감의 표출인 것이다.
 
강남역 10번 출구에는 '모든 남성을 가해자로 몰지 말라'는 메시지로 시위를 벌인 남성들도 있었다.
5월 20일 핑크코끼리 복장의 남성이 대표적이다.
 

남성임을 확인받고 싶은 몸부림

성역할 수행이 불가능하다는 남성의 좌절감은 여성혐오라는 퇴행으로 치닫고 있다. 남성이 사회적으로 남성성을 인정받는 경로는 노동을 통해 처자식을 부양하는 것이다. 즉 남성은 아내와 자녀를 소유하고 통제하는 남성생계부양 가족을 구성해야 한다는 의미다. 그러나 청년들은 생계부양자 남성으로서 전망이 요원하여 사회적 남성성을 획득하기가 어려워졌다. 

아내를 가진 남자가 될 수 없다는 좌절감은 여성의 주체성에 대한 노골적 부정으로 이어진다. 여성을 인격체로 여기지 않고 성욕의 해소 수단으로 강등시켜 소유물로 여기고, 대상화된 여성을 소유하는 남성으로 존재감을 확인받고자 하는 것이다. 일베를 비롯한 남초 커뮤니티에 여성을 성적 대상화하는 이미지가 넘쳐나는 이유다. 여성을 성기로 환원하여 성욕 충족을 위한 도구로 비하하고 수치심을 유발하는 ‘보슬아치(보지와 벼슬아치의 합성어로 여자인 것이 벼슬인 양 행세한다고 비꼬는 말)’라는 단어에서도 그러한 심리를 엿볼 수 있다.
 

남편 기 살리는 여자들, 사치하는 여자들?

지금까지 남성의 심리와 상태를 중심으로 여성혐오가 발생하는 사회적 맥락을 짚어봤다. 그렇다면 여성들은 어떤 상황에 놓여 있을까? 

IMF 이후 고개 숙인 남편의 기를 살려야 했던 여성의 현실은 어떠했나. 직장에서는 남성 가장보다는 여자들이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바람직하다며 우선적으로 여성이 해고되었다. 또한 여성 직무를 중심으로 외주화 및 비정규직 전환이 이뤄졌다. 대규모 구조조정으로 노동자들이 실직하고 가계 수입이 감소하자 더 많은 여성들이 돈을 벌러 비정규직도 마다 않고 일터로 나갔다. 가정에서의 의무가 덜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여성들은 직장과 가정의 어려움이 심화됐다. 이중부담이 견딜 수 없는 수준이 되면서 출산 파업이 시작됐다. 이미 여성들은 성역할이 불가능할 지경으로 내몰렸던 것이다.

한편 오늘날 사치하며 돈만 밝힌다고 비난당하는 젊은 여성들은 아직 고용관계, 결혼, 임신, 출산 시기에 본격적으로 진입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앞선 세대들의 이중부담을 답습하긴 꺼려한다. 엄마들이 고생하는 것을 직접 지켜봤으니 피하고 싶은 것은 당연한 순리다. 그들은 자의식이 강하고 사회적 성취 욕구도 크다. 게다가 기혼 여성에게 불리한 노동시장, 가사와 양육이 여성에게 여전히 전가되는 가족 관계, 자녀양육에 대한 부담이 큰 상황에서 성평등한 관계로 변화를 고려하지 않는 남성과의 결혼은 여성들에게 전혀 매력적인 선택지가 아니다. 

결국 여성들은 연애, 결혼, 출산을 거부하기를 선택하고 있다. 전통적 성역할에 대한 젊은 남성의 좌절은 여성혐오라는 퇴행으로, 젊은 여성의 부담은 기존 성역할에 대한 기피로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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