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보다

  • 필름X정치
  • 2015/09 제8호

드라마 속 투쟁은 여전히 투쟁중

<어셈블리>를 통해 본 드라마가 투쟁을 다루는 방식

  • 황지희 한국예술종합학교 돌곶이포럼
 
드라마 <어셈블리>의 한 장면
 
재벌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한 한국의 TV드라마에서 ‘서민’은 찾아볼 수 있어도 ‘노동자’는 찾아보기 힘들다. 재벌의 장남과 차녀가 싸우는 모습은 흔해도 착취와 탄압에 맞서 싸우는 노동자의 모습은 보기 드물다. 우리는 드라마를 보며 경영수업을 받는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드물게 투쟁 장면이 등장하는 드라마들이 있다. 

2010년 본격 정치드라마를 표방하며 동시간대 최고 시청률을 기록한 <대물>의 한 장면을 보자. 아나운서 서혜림(고현정 분)의 남편은 방송기자로 아프간에 취재를 갔다가 반군에게 피랍되고 살해당한다. 남편의 장례를 끝내고 슬픔에 젖어 있던 서혜림은 어느 날 국회 앞에서 시위대를 마주친다. 시위대는 ‘비정규직 차별과 해고를 중단하라!’, ‘끝까지 투쟁하자!’ 등의 문구가 적힌 피켓을 들고 있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서혜림은 경찰의 진압에 떠밀려 얼결에 시위대열에 합류하게 되고, 이윽고 ‘대한민국은 대체 누굴 위한 나라입니까!’라고 외치며 남편을 구하지 못한 정부의 무능을 규탄하기 시작한다. 아나운서 서혜림을 알아본 시위대는 들고 있던 피켓을 내리고 마이크까지 그녀에게 넘긴다. 그런데 갑자기 폭우가 내리자 시위대는 일제히 들고 있던 피켓을 버리고 이리저리 흩어진다. 땅에 나뒹구는 피켓들과 홀로 남은 서혜림. 그녀는 꿋꿋이 비를 맞으며 외친다. “우린 대체 누굴 믿고 살아야 합니까!”
 
드라마 <대물>의 서혜림과 시위대
 
3분 분량의 이 짧은 장면은 노동운동에 대한 일종의 모욕이라 봐도 무방하다. 시위대는 자신들이 외쳤던 결의 넘치는 구호가 무색하게 조그만 위기에도 뿔뿔이 흩어지고 마는, 다짐한 목표도 쉽게 내동댕이칠 수 있는 존재로 묘사된다. 이는 사회적으로 형성된 ‘시위꾼’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보다 더 악의적인 방식의 재현이다. 시위대에 대한 보통의 이미지가 자신의 권익만 추구하는 ‘이기적인 집단’이라면 <대물>에서 묘사된 시위대는 ‘집단’마저도 되지 못하는 오합지졸이기 때문이다. 이들의 투쟁은 그저 서혜림이라는 카리스마 있는 개인을 부각시키기 위한 배경효과로 기능할 뿐이다.

그렇다면 5년이 지난 지금, 해고노동자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화제를 모으고 있는 드라마 <어셈블리>는 어떠할까. 머리에 빨간 띠를 두르고 ‘단결투쟁’ 조끼를 입은 해고노동자들이 단체로 대법원을 향해 걸어가는 1화의 장면은 자못 감동적이다. <대물>에 비해 소속도 명확하고, 단결된 집단이라는 인식을 준다. 투쟁하는 주체들이 원경에서 근경으로 이동하고, 그로 인해 투쟁의 연원과 서사를 시청자에게 설명할 수 있는 시간을 갖게 된 것이다. 그들은 (한진중공업을 연상시키는)조선소에서 정리해고 돼 3년 넘게 복직 투쟁을 하고 있는 노동자들이다. 피켓의 내용은 <대물>의 그것과 큰 차이가 없지만 그럼에도 노동자들에게 서사가 부여됨으로써 다른 맥락이 발생한다.
 

결핍과 상실의 히어로물

하지만 이런 호기로운 시작과 달리 <어셈블리>는 이야기가 전개될수록 우려되는 점들을 보이고 있다. 복직투쟁위원회 위원장 배달수(손병호 분)는 조직부장인 진상필(정재영 분)에게 자기 대신 야당 후보로 보궐선거에 나갈 것을 부탁하며 위원장직을 물려준다. 여당 텃밭인 지역구에서 질 게 뻔한 선거지만 앞으로의 투쟁이 막막한 상황에서 자신들의 처지를 알릴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런데 그때 진상필은 여당으로부터 후보 제의를 받게 되고, 고민 끝에 결국 야당이 아닌 여당 후보로 출마하기로 결심한다. 제안을 수락하면 회사와의 협상을 주선하겠다는 여당 사무총장의 말에 마음이 흔들린 것이다. 결국 진상필이 위원장이 되고 처음으로 한 일은 자신의 손으로 천막을 철거하는 일이었다. 그는 독단적으로 회사와 협상을 진행한 후 조합원들에게 통보한다. 원래 목표로 삼았던 원직복직이 아닌 사내하청업체로의 취업 알선. 진상필은 일방적인 결정에 항의하는 조합원의 목소리를 묵살한다. 그러자 배달수가 소리친다. “우리가 이렇게 허망하게 포기할라고 그 고생을 했드나. 니는 억울하지도 않나?” 진상필은 대답한다. “억울하죠. 분하고 억울해서 억장이 무너져요. 근데 안 되잖아요. 아무리 지랄 발광을 해도 안 되잖아요. 예?! 이제 인정합시다. 우리 힘없는 거, 우리 뭣도 아닌 거, 인정하자구요”

진상필이 왜 독단적인 선택을 했는지 이유가 드러나는 대목이다. 정리해고 무효화라는 2심의 판결은 대법원에 의해 파기환송되고, 별거 중인 아내는 이혼서류를 보내고, 농성장은 시청에 의해 강제로 철거된 상황에서, 어차피 안 될 투쟁을 이어나가는 무력한 저항에 대한 피로. 진상필은 더는 이런 지는 싸움을 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오랜 투쟁에 지친 개인이 이런 마음을 가질 수는 있다. 문제는 진상필이 모두의 투쟁을 개인화된 방식으로 종결했다는 점이다. 그 많은 조합원들이 함께 싸워온 시간들은 진상필 혼자만의 것이 아닌데, 그는 혼자서만 그 세계를 빠져나온 것도 아니고 모두의 세계를 무너트리고 나온 것이다.

그런데 그런 인물이 바로 우리가 심리적 동선을 따라가야 하는 주인공이라면? 진상필의 선택들에는 여러 내외적 동기들이 코멘터리로 따라붙는 반면 나머지 해고노동자들은 합리적인 해결책도 없이 떼를 쓰는 인물들로 묘사된다. 그들은 종종 등장해서는 진상필에게 ‘배신자’, ‘변절자’라는 말을 내뱉는 방해꾼으로, 그저 주인공의 고독과 내면의 서사를 극대화하는 엑스트라로 전락하고 만다.

흥미로운 건 <대물>과 <어셈블리> 모두 제도를 통해 해결되지 못한 억울함을 가진 개인들이 그 제도로 들어가 변화를 도모하는 이야기라는 사실이다. 힘이 없어 수모를 당해야 했던 이들이 힘을 갖기 위해 분투하고, 종국에는 힘을 갖게 되는 이야기 말이다. 2013년에 방영된 <황금의 제국> 또한 앞의 두 작품과 유사한 면을 보인다. 공교롭게도 이 작품 또한 첫 화부터 철거민 투쟁이 등장한다. 주인공인 장태주(고수 분)는 가난하지만 똑똑한 법대생인데 그의 아버지가 운영하던 가게가 재개발 구역이 되면서 철거 위협에 시달리게 된다. 그의 아버지는 주민들과 함께 재개발 반대 투쟁을 벌이다가 철거 용역들에 의해 큰 부상을 입게 된다. 아버지가 병원에서 사망한 날, 장태주는 꿈에서 아버지의 유언(?)을 듣게 되는데 이 말은 그의 삶을 바꾸는 계기가 된다. ‘아버지는 한 번도 못 이겨본 세상에서 너는 꼭 이겨보라.’ 장태주는 ‘가진 자’가 되겠다고 결심한다. 
 
드라마 <황금의 제국> 속 재개발 반대 투쟁
 
세 드라마 모두 주인공들이 각성하게 되는 계기는 주변 인물의 상실이라는 ‘결핍’을 통해서다. 서혜림은 남편을 잃고 장태주는 아버지를 잃고 진상필은 친형과 같았던 배달수를 잃는다. 배달수는 ‘네가 정치를 잘 하면 크레인에서 내려오겠다’는 유언을 남기고 크레인에 올라가다 실족사하고 마는데, 이 메시지는 진상필이 제대로 된 정치를 하고 싶다는 마음을 먹게 하는 계기이자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스스로를 반추하게 하는 동기가 된다.

이러한 일련의 이야기 구조는 히어로물의 전형적인 패턴이다.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는 삼촌의 유언을 통해 영웅이 되는 피터(스파이더맨)를 생각해보라. <어셈블리>에서 진상필을 그리는 방식 또한 다분히 영웅주의적이다. 진상필이 가진 능력은 ‘진정성’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는 진정성과 호소력만으로 자신에게 적대적이었던 최인경(송윤아 분)과 김규환(옥택연 분)의 마음을 돌린다. 또한 어느 계파에도 휘말리지 않겠다며 독자 노선을 택하고, 살생부 의원들 회합에 참여하는 대신 지역구에 내려가 노인의 집 앞 개울에 다리를 놓는 등 자신이 의롭다고 생각하는 것을 굽히지 않는다.


이념의 제거와 리얼리티

허나 <어셈블리>에서 진상필이 줄기차게 호명하는 ‘국민’이 과연 다른 의원들이 호명하는 ‘국민’과 어떻게 다른지 아직까지는 알기 어렵다. 자기 지역구 예산을 가져오기 위해 추경 예산안을 통과시키려는 의원들과 자기 지역구에 사는 할아버지와 손녀를 위해 집 앞에 다리를 놔주려는 진상필의 차이는 무엇일까. ‘겨우 두 명’을 위해 시청과 싸울 거냐는 보좌관에게 진상필이 “겨우 두 사람은 국민 아닙니까?”라고 반문할 때 그의 기저에 깔려 있는 생각은 ‘모든 소외는 사라져야 한다’일 게다. 그러나 모든 국민을 선택할 수는 없다. 자신이 대변하려는 국민만을 선택할 수 있을 뿐. 진상필은 그 무수한 선택지들 중에서 자신의 위치가 어디인지 드러내기보다는 이념을 제거하는 일에 골몰하는 듯 보인다.

<어셈블리>에서 투쟁은 이제 쇼윈도 너머 하나의 풍경으로 전락한다. ‘농가부채 해결’, ‘사학연금 개혁’, ‘올바른 과거사법 제정’ 등 우리 사회의 의제들을 백화점식으로 나열한 국회 앞 시위대의 모습은 초라하다 못해 조악하다. 차를 타고 지나가다 이들을 목격한 진상필의 비서 변성기(성지루 분)는 말한다. “대한민국에 참 불쌍한 사람들 많아, 그치?” 이것이 투쟁을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은 아니리라 믿고 싶다. 그럼에도 그 풍경을 목도한 진상필이 한 행동이라는 게 그들에게 아이스크림을 사다주는 것이었다는 점은 여전히 이 드라마가 선의의 세계에 기대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게 만든다. 그리고 그 세계가 그리려는 희망이 조금은 의심스럽다. 

진상필이 좋은 국회의원이 되는 게 개인의 승리는 될 수 있겠지만 과거 그와 함께 투쟁했던 동지들에게도 승리가 될 수 있을까? 지금까지 소개한 드라마들에서 투쟁이 개인의 서사를 위한 알리바이로 사용됐다는 기분이 드는 건 왜일까. 투쟁의 실패가 그런 영웅적인 개인을 만든 것이 아니라 영웅적인 개인을 만들기 위해 투쟁이 실패해야 했던 것이라고 말이다. 이상화된 한 인간을 만들기 위해, 개인의 투쟁으로 전환하기 위해 공동의 투쟁은 실패해야만 했을 것이다. 드라마는 망원 렌즈보다는 접사 렌즈를, 인민보다는 영웅을 선호하니까 말이다. 

평론가들은 <대물>과 <어셈블리>가 정치에 대한 이상향을 제시하며 리얼리티보다는 판타지에 가까운 세계를 그린다고 비판한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공동으로 성취하지 못한 승리를 개인의 판타지로 성취하고자 하는 욕망, 투쟁으로부터 탈피하기 위해 투쟁중인 인물들의 모습은 딱 지금 우리 시대의 리얼리티 아닌가? 오히려 우리는 대중 서사에 더 많은, 그러나 새로운 판타지를 요구해야 한다. 현실에서 경험하지 못한 공동에 대한 감각을 상상하게 만드는 판타지를 말이다. ‘나’의 꿈이 이루어지는 드라마, 너의 승리를 나의 승리로 착시하게 하는 세계가 아니라, 함께 행동하고 성취를 이루는, 불가능한 꿈에 대한 드라마 말이다. 드라마 속 투쟁은 여전히 투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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