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특집
- 2015/07 제6호
사회운동에 기여하는 교육프로그램의 모색
사회운동학교를 시작하며
재미있는 강의?
현재 여러 단체에서 진보적인 내용의 강좌를 개설하고 있고, 노동조합 등 대중조직에서는 외부 강사를 초빙해서 교육을 진행하기도 한다. 그런데 많은 경우 ‘재미’를 기준으로 주제를 선정하거나 인지도 있는 명사를 초빙하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재미있는 강의’란 도대체 무엇일까. 교육사업 담당자들이 정보를 교류할 때면 ‘그 강연 재밌니?’, ‘그 강사 재밌어?’라는 질문이 가장 많이 반복된다. 재미가 없으면 강연 신청자가 거의 없을 것이고 참가자들도 실망할 것이라는 걱정이 반영된 질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문득 선후관계가 뒤바뀌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성인을 대상으로 교육을 한다는 것은 무언가를 배우고자 하는 의지가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전제한다. 양극단을 가정해보자. 만약 배우고자 하는 의지가 전혀 없는 경우 어떻게 될까? 원치 않는 의무교육을 떠올려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이런 교육일수록 억지로 교육에 관심을 갖게 하도록 강사의 명망성이 중시되고, 졸던 사람도 눈뜨게 할 만한 화려한 스킬이 중요하다.
반대로 배우고자 하는 의지가 완전 충만한 경우는 어떻게 될까? 이미 관심 있는 주제에 대한 사전학습이 어느 정도 이뤄져 자신의 입장이 분명히 서 있고, 따라서 자신이 모르는 것이 무엇인지 알기 때문에 배우고자 하는 분명한 목적의식이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이 경우 강사의 명망성, 강연 스킬 등은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현실의 교육에는 이 두 가지 경향이 혼합되어 있을 수 있다. 가령 흥미유발을 위한 교육을 먼저 진행한 후 조금 더 공부해보고자 하는 의지가 있는 사람들을 위한 심화교육은 별도로 진행할 수도 있다. 하지만 대중의 지적능력이나 각 운동단체 구성원들의 역량이 높아질수록 전자보다는 후자가 점차 중요해질 것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또한 교육의 효과라는 측면에서도 교육 참가자가 교육을 통해 어떤 지식을 새롭게 얻게 되었는지, 교육 이후에 더 많은 학습과 실천으로 이어질 수 있는지를 따져봐야할 것이다. 한편의 영화를 보고 나온 듯 스펙터클하고 인상적인 강연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기존에 이미 알고 있던 상식을 보다 재미있는 언변과 화려한 시청각 자료로 되풀이할 뿐이라면 교육의 효과는 매우 낮다고 봐야한다. 이런 측면에서도 후자를 지향해야한다는 점은 더욱 분명해진다.
배우고자 하는 사람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지향을 현실화하기 쉽지 않은 것은 진보진영 내외부를 막론하고 무언가를 적극적으로 배우고자 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기 때문이다. 공식적 교육제도가 개인의 직업적 경력을 준비하는 수단으로 변모되면서, 개인의 경제적 지위 향상에 도움이 되지 않는 지식에 대한 대중적 무관심이 더욱 커졌다. 누구나 경제, 정치, 사회, 역사를 배우지만 입시나 취업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부분이 아니라면 별 관심을 갖지 않게 된 것이다.
경제, 정치, 사회, 역사를 공부하는 것은 시민 또는 노동자로서 자신의 존재조건을 이해하기 위한 것이다. 그 존재조건은 자신이 살아온 경험이나 직관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에 과학적인 지식을 학습하는 과정이 필수적이다. 이런 지적 욕구가 감소하면 시민 또는 노동자의 지적 능력도 낮아질 수 있고, 이는 대안적인 사회를 모색하는 사회운동의 대중적 토양이 척박해짐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심각한 문제다.
따라서 배우고자 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도록 하는 것, 다시 말해 대중의 지적 능력과 각 운동단체 구성원들의 역량을 강화한다는 것을 지향점으로 삼고 그 현실적 경로를 확보하는 것이 중요하다. 여기에 있어서 순수하게 대중적 홍보에만 의존하지 않을 수 있는 즉, 조직적인 기반이 있는 사회단체나 대중조직이 조직 내부의 일상적인 토론 및 학습 문화를 통해서 이런 지향을 보다 구체화해나가는 것이 가장 현실적인 경로가 될 것이다.
교육의 독자성
하지만 사회단체나 대중조직에게는 약점이 있다. 이들이 투쟁이나 연대활동 등 실천을 우선순위에 두기 때문에 체계적이고 전문적인 교육 프로그램이 상대화될 수 있다. 이런 경우에는 보통 이슈가 되고 있는 현안에 대한 일회성 교양 강의가 주를 이루게 된다.
가령, 의료민영화 문제가 사회적으로 부상하는 때에는 의료민영화의 문제점에 대해 교육을 하고, 민주노총 총파업을 앞두고는 정부의 노동시장 구조개혁안의 문제점에 대해 교육을 하는 등 다양한 사례가 있을 것이다. 어쨌든 이런 경우는 교육이 사실상 투쟁이나 연대활동에 종속된 경우로 볼 수 있다.
반면 현안과는 다소 거리를 두면서 (또는 현안으로부터 시작하더라도) 장기적인 필요에 의해서 체계적이고 연속성 있는 교육을 진행하는 경우도 있다. 특히 노동운동에는 현안교육이나 실무교육과는 구별되는 체계적인 교육을 진행해온 경험이 풍부하다. 1980~90년대에는 노동조합 운동이 크게 성장했지만 시급한 투쟁으로 인해 안정적인 교육을 진행하기가 쉽지 않아 주로 방침 교육이나 실무교육에 사회과학적 지식을 녹여내려 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보다 체계적인 교육 프로그램이 필요하다는 판단하에 2000년대부터는 노동대학, 노동자학교 등의 시도가 이뤄졌고 2007년에는 민주노총 교육원이 설립된다.
민주노조운동 외곽에도 여러 교육기관이 설립되었는데, 이 기관들은 공통적으로 현안 대응보다는 노동자 및 활동가들의 장기적인 변화에 초점을 두고 있다. 몇 가지 사례를 보면, 사이버노동대학은 노동운동 위기라는 중장기 정세에 대응해서 참 노동운동의 일꾼들을 키워낸다는 목표를, 평등사회노동교육원은 노동운동을 재구축할 새로운 동력을 만들겠다는 목표를, 노동자교육센터는 노동자 삶 전체를 노동자답게 바꾸기 위한 노동자 교육운동이 필요하다는 목표를 가지고 있다. 교육내용은 기관마다 차이가 있으나 노동자계급의 관점에서 사회를 분석한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또한 1회성 강의가 아니라 연속적이고 체계적인 강의를 구성하고 있고, 과제물이나 실습 등을 통해 스스로 배우고자하는 사람들을 늘려나간다는 것도 공통점이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노동자 및 활동가들의 장기적인 변화에 초점을 두고, 안정적인 교육을 추진해나갈 수 있는 조건을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 그 조건이 반드시 별도 교육기관의 설립이라는 형식적 분리를 통해서만 담보될 수 있는 것인지는 아직 모르겠다. 다만, 현재로서는 직업적 경력이나 투쟁 같은 어떤 다른 목적에 종속되지 않은 교육과정의 필요성에 대해 합의하고, 교육의 성과는 당장이 아니라 우연한 계기에 드러난다는 점에서 조급증을 극복하는 것이 필요하다.
운동 위기와 교육 공간
특히 지금처럼 민중운동이 심각한 위기를 겪고 있는 상황에서 장기적 안목을 갖고 일관된 교육을 추진해나가는 것은 중요한 의미가 있다. 현재 민중운동은 노동조합운동, 정당운동, 전선운동 등 총체적인 위기를 겪고 있고, 이념(정체성)과 계급대표성의 측면에서 대중적으로 의미있는 대안세력으로서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게 객관적 현실이다.
이런 한계는 집회 분위기에도 그대로 반영되고 있다. 집회 참여자들이 보수주의나 자유주의 세력과 구별되는 민중운동이라는 대안을 함께 강화해나가고 있다는 큰 틀의 의지를 확인하기가 점차 어려워지고 있는 것이다. 투쟁형태가 아무리 격렬하더라도 그 내용이 새정치민주연합과 별반 차별성이 없거나, 1퍼센트 특권층에 대한 공분만 나눈 채 해산하는 무기력한 상황이 반복되기도 한다.
이는 운동에 참여하는 시민, 노동자, 활동가들이 투쟁과 연대활동 속에서 치열하게 실천하고 학습하면서 스스로 거듭나는 데 있어 현실적인 어려움이 크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고 투쟁이 아닌 다른 일상적 활동들이 이러한 어려움을 보완해주고 있는가 하면 그렇지도 않다.
10년 전이라면, 노동조합의 일상 활동이나 집회에 참여하는 것 이상의 활동을 하고자 할 때, 퇴근 후 민주노동당 지역모임에 참여하면서 보람을 느끼기도 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진보정당 등의 공간들마저 크게 축소돼 있는 상황이다.
투쟁은 관성적으로 다가오고 활동할만한 대안적 공간을 찾기도 어려운 상태가 당분간 지속될 수 있다면 어떤 준비를 해야 할까. 민중운동의 정체성 재정립, 투쟁과 연대활동의 혁신, 진보정당의 의미 있는 성장 등 각각 그 자체로 해결해야 할 과제가 많다. 이 각각의 과제는 다른 무언가로 대체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현재와 같은 상태가 당분간 지속된다면 운동에 참여하고자 하는 이들이 자신의 문제의식을 예리하게 가다듬으며 능동적인 활동을 지속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는 것이 또 다른 과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교육 공간은 이를 위한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성찰과 실천, 비판과 대안
배우고자 하는 사람들을 늘려나가고, 체계적이고 안정적인 교육을 가능케 하며, 그것이 민중운동이 겪고 있는 한계 속에서 하나의 씨앗이 될 수 있다는 믿음으로 사회운동학교를 시작한다. 사회운동학교의 슬로건은 ‘성찰과 실천, 비판과 대안’이다. ‘성찰과 실천’은 맹목적이거나 자기만족적인 교육을 넘어서자는 것이고, ‘비판과 대안’은 민중운동이 위기를 겪고 있는 현 시점에서 보다 현실적이고 숙고된 교육내용을 준비해나간다는 문제의식을 담았다.
앞으로 여러 사회단체와 대중조직에서 교육 프로그램에 대해 고민해온 활동가들의 경험을 공유하면서 더욱 의미 있는 사회운동학교를 만들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