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보다

  • 칼럼
  • 2015/06 제5호

잡스가 사랑한 로스코?

  • 김영글 미술 작가
마크 로스코, <오렌지 레드 그리고 오렌지>
 
 
커다란 캔버스 위, 빨강 검정 오렌지 등으로 과감하게 칠해진 네모난 색면들. 그게 전부다. 그런데도 그 화가의 그림 앞에 서면 북받치는 감정에 눈물을 흘리게 된다고들 한다. 작품에 대해 집착에 가까운 태도를 고수하다 1970년 손목을 그어 자살한 마크 로스코 얘기다. 

그림에 압도되는 경험. 드물지만 그것은 하릴없이 흘러가는 부박한 우리 삶에서 사랑에 빠지는 일 못지않게 소중한 경험일 것이다. 예능과 오락의 향연 속에서도 예술이 간신히 떠밀려나가지 않을 수 있는 이유가 거기에 있을지 모른다. 예능과 오락이 우리를 대리만족의 안락한 소파로 이끄는 데 반해, 예술은 근원을 알 수 없는 감정 혹은 질문과 홀로, 그리고 직접 대면하게 한다. 현대인의 인내심이 아무리 보잘것없다 하더라도, ‘좋은 질문’이 되는 예술 앞에서라면 조금 더 오래 서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오늘날의 미술은 ‘좋은 질문’이 되는 것 말고도 곤혹스러운 과제를 안고 있다. 그것은 ‘대면’ 자체의 어려움이다. 

예술의 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지난 3월부터 열리고 있는 마크 로스코 전은 이 어려움의 면면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는 듯하다. 로스코는 사람들이 자신의 그림에서 인간의 본질과 근원적 감정을 보길 원했다. 그러나 ‘국내 대규모 최초 전시’, ‘진정한 힐링’ 등의 진부한 마케팅 수사와 함께, 이 전시는 베스트셀러 인문학 전도사로 군림하고 있는 강신주를 도록의 해설자로 삼으면서 노골적으로 세팅된 상품으로 거듭난다. 무엇보다도 메인 카피 ‘스티브 잡스가 사랑한 화가 마크 로스코’는 이른바 먹히는 대중 마케팅의 진수를 보여주는 동시에 자본주의 시대의 얄팍한 예술관이 밑천을 드러내는 문구다. 물론, 제품에서 불필요한 요소를 생략하고 오직 단 하나의 버튼으로 세상과의 접속을 시도한 잡스와 캔버스에서 모든 형상과 구체의 환상을 지우고 평면 속에서 진실을 찾고자 했던 로스코의 철학에 흡사한 면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전시장이 둘의 유사점을 입증하는 데에 쓸데없이 많은 벽을 할애하고 있는 건 우스꽝스러운 일이다. 

전시는 시종일관 ‘마크 로스코’라는 상품을 ‘전시’하는 데 열중한다. 캔버스 옆에 빽빽하게 붙은 설명글은 작품의 가치를 관람자 입에 떠먹여주는 데 급급하고, 너무 많은 말들을 쉴 새 없이 쏟아내는 도슨트(전시안내자)는 TV만 틀면 달콤한 물신의 세계로 우리를 안내하는 홈쇼핑 호스트를 연상케 한다. 전시의 하이라이트는 미국 휴스턴에 있는 로스코 채플을 본떠 제작한 공간이다. 로스코는 현대인들이 ‘고요한 작은 공간’을 필사적으로 찾고 있다고 생각했고, 그러한 사색과 교감의 공간을 모색하기 위해 열두 점의 그림을 벽처럼 둘러 세운 로스코 채플을 건축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작은 예배당 모형 안에서 유명 관광지를 찾은 구경꾼이 될 수 있을 뿐이다. 도슨트의 구호에 맞춰 2분 명상 맛보기 체험이 시전 되는가 하면, 바깥에선 채플 안에 깔려 있던 명상을 위한 방석이 2만 9000원에 판매되고 있다. 그림을 통한 깊은 명상과 몰입으로 인간의 내면과 만날 수 있고 그 치유의 경험이야말로 예술의 본령이라고 여겼던 로스코의 믿음은 이 작은 자본주의의 사원 안에서 무색하기 이를 데 없다.

요컨대 대형미술관에서 열리는 블록버스터 전시를 보러 갈 때는 희망을 버리는 편이 낫다. 온전한 감상의 시간을 가질 수 있으리라는 희망. 그림과 대면하는 경험이 있으리라는 희망. 그러나, 누가 섣불리 대답할 수 있을까? 그것이 개별 미술관의 정책 탓인지 아니면 시대의 불행인지에 대해서.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건, “다르게 생각하라(Think Different)”는 전언을 풍부하고 세심한 의미로서 받아들이기에 자본주의의 대화법은 너무나도 진부하다는 사실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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