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보다

  • 반란을 찾아서
  • 2015/05 제4호

해방공간의 노동자운동과 1946년 9월 총파업

  • 정희찬 한국방송대학교 강사
1945년 8월 15일, ‘도둑처럼 찾아온 해방’은 마냥 달콤한 것만은 아니었다. 1905년 러일전쟁 이후 한반도를 사실상 지배해온 일본제국주의가 자신들의 군사적 팽창에 대한 포장으로 강조하던 ‘대동아공영’의 꿈이 산산조각난 상황에서, 일부를 제외한 대다수 식민지 조선 사람들은 어리둥절함을 감출 수 없었다. 전시(戰時) 총력전 체제가 안겨준 끔찍한 고통으로부터 벗어난 기쁨을 환호와 만세로 표현했을 뿐 앞으로 한반도에 어떠한 정세가 전개될지는 불확실하고 불투명했다. 

이러한 점은 일제 치하 가장 혹독하게 탄압받았으며, 모든 정치사회운동 세력 가운데 식민지 당국에 가장 일관되게 비타협적인 자세를 견지함으로써 해방 직후 가장 큰 신망과 권위를 지니고 있던 공산주의자들과 재건된 조선공산당에게 해방정국이 시련으로 작용할 수 있음을 의미했다.
 

공장관리운동의 가능성과 제약

1930~40년대 한반도에는 중국 대륙으로의 팽창을 전면화한 일제 군부의 전략 속에서 전시경제체제가 구축되었다. 공업 부문의 성장 속도는 다른 부문에 비해 높았으며, 이는 임금노동자의 양적 성장으로 귀결되었다. 

물론 당시 조선 경제의 ‘고도성장’은 ‘식민지에 진출한 일제자본’의 축적에 다름 아니었다. 1944년 산업 설비의 민족별 비율이 일본 자본 98퍼센트, 조선 자본 2퍼센트라는 통계에서 단적으로 나타나듯이 철저하게 ‘본국’에 종속된 식민지 경제구조가 강화하였다. 이러한 조건에서 일제의 급작스런 패망으로 인한 일본 자본의 철수는 조선 경제에게는 재앙에 가까운 부담을 안겨주었다. 1944년 6월에서 1946년 11월 사이 이남지역에서 공장은 40.9퍼센트, 노동자수는 52.4퍼센트 감소했고, 이 와중에 실업자는 급증했다. 뿐만 아니라 고용된 노동자라 해도 실질임금은 이전의 3분의 1에도 못 미치는 실상이었다. 

일제 패망에 따른 총독부 지배의 공백과 조선 경제의 압도적 비중을 차지하는 일본 자본의 철수는 일찍이 공산주의자들과 노동자들이 경험해보지 못한 ‘국가권력과 자본의 부재(철수)’라는 정세를 조성하였다. 전자(국가권력 수립)에 대한 공산주의자들의 대응은 건국준비위원회와 인민위원회 조직과 인민공화국 수립 시도로 나타났다. 후자(자본의 부재)에 대해 노동자운동의 활동가들은 전국적인 단결력의 구심으로서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이하 전평) 결성(1945.11.6.), 공장관리위원회 조직운동(이하 공장관리운동)으로 대응하였다. 공장관리운동이란 생산을 지속하여 노동자 생계를 유지한다는 차원에서 뿐 아니라 생산수단에 대한 노동자의 집단적인 통제와 소유를 통해 노동자 민주주의를 실현한다는 점에서 적극적인 의미를 부여할 수도 있는 운동이었다. 

그러나 공장관리운동에 대한 공산주의자들의 태도는 적극적이지 않았다. 통일된 지도방침 또한 부재했다. 당시 전평 집행부는 박헌영을 중심으로 한 조선공산당 중앙과, 박헌영과 함께 구(舊) 경성콤그룹의 일원이었으며 전평 결성에 주도적 역할을 담당한 김삼룡의 영향력이 절대적이었다. 전평 집행부의 입장은 인민정권 수립과 국유화 이전에 노동자의 공장관리는 불가능하다는 것으로서 공장관리운동을 정권수립의 수단으로 부차화하는 것이었다. 이와 달리 당시 산업지대로서 노동자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던 영등포 일대를 중심으로 형성된 이른바 ‘영등포 사회주의 그룹’은 공장관리운동을 프롤레타리아 헤게모니 획득의 주요 계기로 삼고자 했다. 그러나 그들 역시 미군정의 점령정책에 대한 대응 및 노동자운동의 정치적 전망과 결부시키지는 못하였다. 이러한 조건 속에서 대중들의 공장관리운동은 대체로 자생적인 차원에서 전개되었고, 조업준비, 실업수당 지급 등 노동조건 개선을 넘어서는 공산주의적 정치 전망과 결합되지는 못하였다.
 

1946년 9월 총파업과 인민항쟁

전평은 해방 직후 전국 각지에서 조직된 산업별 노동조합의 대표와 직업활동가 500여 명이 모인 대표자대회(1945년 11월 5~6일)를 통해, 금속, 철도, 광산 등 16개 산업별 노동조합의 1194개 분회에 속한 전체 조합원 21만 7073명(일제말 노동자 총수 추산 212만 명의 10퍼센트에 달하는 규모)을 거느린 전국적인 노동자운동의 구심으로서 정식 발족했다. 

앞서 언급했듯이, 전평 집행부의 정세 인식 및 운동 노선 역시 당시 조선공산당과 별다른 차이가 없었다. 재건된 조선공산당의 정세 판단과 정치적 전망을 담은 이른바 〈8월 테제〉는 기본적으로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론에 입각하고 있었다. 구체적으로는 코민테른 7차 대회에서 고안한 반파시즘 통일전선의 구축과 인민(민중)정부 수립이라는 정치적 목표를 제시하는 것이었고, 국제적으로는 소련이 2차 대전 연합국의 일원으로 참전하게 되면서 당연하게도 미국을 협력자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나 해방 이후 미군정의 정책은 조선 공산주의자들의 낙관적 전망과는 반대로 인민위원회-인민공화국으로 이어지는 자치권력 흐름을 부정했을 뿐 아니라 노골적인 반공(反共) 일변도였다. 

1946년 5월경 정세는 험난해졌다. 정치자금 조성과 경제교란 목적의 위조지폐 인쇄 혐의로 기관지 《해방일보》을 정간하고 이관술 등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하는 등 공산당 활동은 사실상 불법화되었다. 지방에서는 미군정의 지휘 속에서 해방 직후에도 고스란히 일제시기의 조직을 보전한 경찰의 주도 속에서 인민위원회, 노동조합, 농민조합, 청년동맹 등 주요 대중조직에 대한 습격과 대량 검거가 계속되고 있었다. 당시 대중집회에서의 주된 요구사항 중 하나가 “테러를 중단하라”였을 정도다. 

무엇보다 전혀 진정될 기미를 보이지 않는 도시의 실업 문제와 식량난, 농촌에서의 강제적 미곡 공출에 대한 대중적 불만은 “일본놈들 때보다 더 살기 어렵다”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로 빠르고 심각하게 고조되고 있었다. 경제 파탄과 대중운동에 폭압적 탄압 속에서 노동자들의 총파업과 인민항쟁은 오히려 일어나지 않는 것이 이상한 것이었다. 

공산주의자들 역시 조선의 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미소공동위원회가 휴회하는 등 미군정에 대한 협력적 정치방침을 구사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이른바 ‘신전술’ 채택을 통해 미군정에 대한 종래의 협력적 태도를 수정했다. 신전술을 논의하는 과정에서 당과 대중운동을 탄압하는 미군정에 대한 강경한 대결입장을 보인 박헌영과 정면대결을 반대한 김일성의 입장 차이로 드러났듯 전국적인 공산주의 운동 내부의 입장이 통일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적어도 38선 이남에서 해방 직후 공장관리운동의 사례에서 나타났듯이 공산주의자들의 정치적 전망이 오히려 대중운동의 발전 가능성을 질곡하지는 않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1946년 9월 24일 쌀 배급을 요구하며 일어난 철도총파업은 지역 내에서 일련의 연대파업(당시에는 이를 동정파업으로 불렀다)으로 확산되었다. 철도의 공간적 속성상 특정 지역에 국한되지 않는 전국 규모의 전개 양상을 보이게 되었다. 서울에선 전평 계열 노동조합이 조직된 공장과 회사로 확대되었고, 모든 신문 발행이 중지되었으며 남한 내 전보·전신이 두절되었다. 심지어 오늘날 서울시청에 해당하는 경성부 직원들마저 파업에 동참했다. 대학교, 전문학교, 중고등학교 학생들은 동맹휴학을 결의하고 가두시위를 주도하는 등 점차 대중투쟁으로 발전해갔다. 그러나 9월 30일 미군정과 경찰의 무력진압 속에 1700여 명의 노동자가 검거되면서 대중투쟁은 하강 국면에 들어서게 되었다. 
 
1947년 철도노동자들의 파업 모습

이밖에도 인천·경기, 부산·경남, 광주·전남 지역 등에서 벌어진 총파업은 공통적으로 ‘철도노동자들의 9월 24일 파업’-‘전평 계열 공장과 회사 노동자들의 연대파업’-‘일반 대중이 결합해 가두시위를 전개하는 대중투쟁’-‘진압군경 병력과의 유혈충돌과 관공서 습격을 병행하는 인민항쟁’으로, 투쟁의 주체가 각계각층으로 확대되면서 투쟁이 고조되는 모습을 보였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대구·경북 지역이다. 대구에서는 ‘남조선총파업 대구시투쟁위원회’가 조직되어 파업투쟁의 흐름의 구심을 형성했다. 쌀을 요구하는 군중에 대해 미군정과 경찰 당국은 사태를 ‘폭동’으로 규정하고 발포 등의 강경 대응을 했다. 그러나 이에 맞서 광범위한 인민항쟁이 전개되었던 것이다. 급기야 10월 2일 대구에는 계엄령이 선포되었고 무장한 미군부대가 증파되었다. 그러나 경북도청의 과장급 이하 직원들마저 행정권의 조선인으로의 이양을 요구하며 총파업을 결의했다. 통역관들도 파업 태세를 보이게 되어 계엄당국을 당황스럽게 하였다. 대구·경북 지역에서는 이후 노동자들의 파업이 일단락되는 것과는 별개로 인민위원회를 중심으로 한 대규모 군중시위와 관공서 습격·점거가 계속되었다. 일부 통계에서는 대구·경북의 항쟁 참여자가 무려 72만 명으로 집계되는데 다소 과장되었음을 감안하더라도 거의 대부분의 주민이 항쟁에 어떤 식으로든 참여한 것으로 보인다. 
 

‘실패’라는 평가를 내리기에 앞서

9월 총파업투쟁은 미군정과 경찰의 적극적인 개입과 무력 진압, 우익 노동단체를 활용한 파업방해 공작, 항쟁의 구심을 형성하지 못한 채 산발적으로 전개되었던 한계로 11월경 막을 내렸다. 향후 공산주의자들은 남한에서 인민정부 수립 및 일체의 대중운동 발전 전망을 질곡하는 미군정과 전면적인 대립으로 나아가게 된다. 사실상 이 시기부터가 엄밀한 의미에서의 ‘혁명적 정세’로 볼 수 있다. 그리고 혁명적 정세가 분단과 전쟁이라는 비극으로 귀결되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해방정국의 공산주의자들과 노동자운동을 좌절과 실패의 시각에서만 평가해야 할까? 1991년 소련의 붕괴를 ‘공산주의 실험의 실패’로 규정하는 일반적인 시각에서 본다면, 역사적으로 전개된 많은 대중운동과 저항은 사실 실패했다고 할 수 있다. 역사학도의 한 사람으로서 승리/실패의 도식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을 종종 하게 되는데, 이러한 고민은 비단 역사연구자에게만 해당되는 질문은 아닐 것이다. ●
 
 

<기획연재 : 우리의 반란을 찾아서> 목차

1894년 동학농민운동
1919년 3.1운동
1929년 원산총파업
1946년 전평총파업
1960년 4.19혁명
1971년 광주대단지 사건
1980년 광주항쟁
1987년 6월항쟁
1987년 7.8.9노동자대투쟁
1991년 5월투쟁
1996~97년 총파업
2008년 광우병촛불
종합토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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