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보다

  • 반란을 찾아서
  • 2015/04 제3호

원산총파업 : 일제강점기 노동자 저항의 분출과 좌절

  • 류정선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강사
 
1929년 1월부터 4월까지 약 90일간 지속되었던 원산총파업은 일제 식민지기 발생한 최대의 파업이었다. 3000여 명이라는 당시 가장 큰 규모의 파업대오를 형성한 투쟁이었다는 점, 그리고 한 지역단위의 노동자가 모두 참여하여 총자본 대 총노동의 대결로 전개되었다는 점, 이때를 계기로 일제의 노동정책과 국내 노동운동의 활동 방식 및 노선이 크게 변한다는 점은 후대에도 원산총파업이 중요한 사건으로 남도록 하기에 충분했다. 
 

일본인 구타사건에서 촉발된 파업

원산총파업의 직접적인 발단은 1928년 9월 원산 인근의 문평제유공장에서 발생한 파업이었다. 이 공장의 한 일본인 감독이 조선인 노동자들에게 욕설과 횡포가 심해 원성을 사고 있었는데, 9월 7일 구타사건까지 발생하자 분노한 노동자들이 일본인 감독의 파면을 요구하고, 더불어 노동조건에 대한 교섭을 회사에 요구했다. 하지만 사측의 거부로 문평제유노조는 원산지역 노동조합 조직인 ‘원산노동연합회’(이하 원산노련)의 지도 아래 9월 16일 파업을 단행했다. 

원산노련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사측과 교섭하려고 하였지만, 사측은 면담조차 거부하고 오히려 파업주동자에게 징계처분을 내렸고, 경찰은 주동자 3명을 연행했다. 이에 원산노련은 회사 측의 사과와 일본인 감독의 파면, 임금 인상, 최저임금제 등의 요구를 내걸고 전면파업을 단행했다. 결국 회사는 감독 파면 및 파업 중의 인사조치 취소, 재해 위자료·최저임금·퇴직금 등을 3개월 내에 쌍방 타협으로 결정한다는 조건으로 협약을 맺었다. 그러나 사측은 3개월이 지나도록 약속을 이행하지 않았다. 회사 측은 오히려 일체의 노동단체를 인정하지 않는다며 단체교섭을 거부하였고, 이에 원산노련은 1929년 1월 14일을 기해 파업을 선언, 이후 원산 전역에서 90일간에 걸쳐 파업투쟁을 전개하게 되었다.

사실 1920년대에 접어들면서 식민지조선 곳곳에서 노동쟁의가 발생했다. 조선인 노동자에 대한 차별 및 횡포, 구타, 저임금, 불안정한 고용구조 등은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것들이었다. 게다가 1920년대 초반 사회주의가 유입되면서 상호부조적이거나 노사협조 노선을 취하고 있는 노동단체는 점차 퇴조하고 노동조합이 건설되면서 노동쟁의는 좀 더 조직적인 형태로 발전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산총파업과 같이 직종을 불문하고 한 지역 전체의 노동자들이 파업을 전개하는 현상은 매우 드문 것이었다. 그렇다면 무엇이 지역단위의 총파업으로 확산될 수 있게 하였을까?
 

전근대와 근대가 결합된 노동조직

당시 원산은 노동자 구성상 부두노동자 또는 토건, 일용직 노동자가 대다수를 차지했다. 부두노동자들은 ‘도중(都衆)’이라는 동직자 조직을 만들어냈는데, 도중의 우두머리인 십장이 화물주와 하역과 관련 계약을 체결하고 노동자들을 배치하고 통제하였으며 노동자 임금에서 일정한 몫을 떼어갔다. 즉 도중의 십장은 자본가의 입장에서는 노무공급자이자 노동통제대행인으로서, 노동자의 입장에서는 단체교섭권자로서의 역할을 담당하는 이중적인 존재였다. 이는 아직 노동자와 자본가 관계가 전면화되지 못하고, 온정주의적이고 전근대적인 노동관계가 형성된 것으로 평가된다. 원산 지역 최초의 노동단체인 ‘원산노동회’(1921년 설립)는 바로 40여 개 도중의 연합체였다. 

‘도중’은 원산총파업에서의 노동자 조직을 이해할 때 핵심적인 요소다. 왜냐하면 이것이 부두노동자의 결속력을 높일 수 있는 조건으로 작용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노조 간부와 노동자의 관계가 중간관리자와 일반 노동자의 관계로 나타나는 이상, 이들 간에 일정한 틈이 생길 수밖에 없고 그 틈으로 자본의 분열공작이 진행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하지만 도중을 통한 고용방식은 사측의 노동자에 대한 장악력을 현저히 떨어뜨렸다. 또한 회사별로 공간적 구획이 이루어지지 않는 부두노동의 특성상 부두노동자들은 일찌감치 지역 전체를 하나의 단위로 인식하였다. 이러한 고용방식 때문에 분쟁이 발생했을 때 개별자본가에 대한 투쟁을 뛰어넘어 지역 전체로 확산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노동단체의 전근대적인 요소는 자본가에 대한 투쟁이 진행되면서 점차 극복된다. 원산노동회는 설립될 때부터 ‘객주조합’에 강하게 예속된 채 노사협조적이고 상호부조적인 단체로서 출발했지만, 1925년 1월 객주조합에 대한 파업에서 승리하면서 벗어나게 되었다. 그리고 ‘원산노동연합회’로 개편하면서 공장노동자까지 포섭하였고, 도중 연합체를 7개의 직업별 조합으로 재편성하였다. 

이후 원산노련은 20여 회에 걸쳐 파업투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1920년대 중후반에 이르면 사회주의자들도 이 지역에 진출하여, 공산주의 서적 강독, 1차 공산당 사건 공판 참가 등의 활동을 벌였다. 운동 방침도 세계노동자와의 제휴, 민족 협동 전선 확립을 위하여 신간회와 제휴, 중국 혁명 성원, 원산의 각 사회단체연합회 참가 등을 채택했다. 1927년 6월에 전개된 파업에서는 회원 1700여 명이 동참해 기존의 봉건적 관행을 철폐하고 특히 십장-객주라는 고용관계 대신 원산노련의 단체계약권 획득을 요구했다. 이때 이미 총자본 대 총노동의 대결구도로 투쟁이 전개되었고 결국 승리를 거두면서 단결을 통한 노동계급의 역량을 보여줄 수 있었다.
 

원산총파업과 일제의 반격

1928년에 일제 및 자본은 반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일본 경제는 이미 1926년 금융공황을 겪으며 상당한 타격을 받고 있었다. 게다가 1920년대 후반 조선에서는 사회주의 운동 세력의 확산, 신간회의 결성, 소작쟁의와 노동쟁의의 증가로 식민통치가 위협당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제는 공세적으로 노동자조직을 파괴하려고 하였고, 그 시작이 문평제유공장의 파업이었다. 

파업이 시작되자 원산노련 소속 부두노동자들은 문평제유공장의 화물을 취급하지 않기로 결의하였다. 고용주들은 해고 선언을 하며 맞섰다. 운송업자들은 곧 자본가단체인 원산상업회의소(이하 원산상의)에 일임하였는데, 원산상의에서는 이유 없이 원산노련에서 임금 인상을 요구하고 파업시켰다고 허위선전을 하고 새로운 노동자들을 모집하려고 하며 도발하였다. 이에 원산노련에서는 원산상의의 중재를 거절하고 1월 23일부터 총파업에 들어가게 되었다.

언론과 자본에서는 파업에 대한 이데올로기 공세를 펼쳤으나, 곧 파업 투쟁은 원산노련에 유리하게 전개되었다. 전국에서 지원 기금과 격려가 쇄도하였고, 신간회에서도 개입하였으며, 일본인 노동자들까지도 파업에 동참하였다. 심지어 원산상의에 의한 노동자 모집이 잘 이루어지지 않을 뿐더러, 그렇게 모인 일본인 노동자들도 파업의 대의에 동의하며 돌아갔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이 파업은 패배하고 말았다. 그것은 1차적으로 일제-자본가의 노조파괴 작업이 치밀하고 강도 높게 이루어졌기 때문이었다. 경찰은 모든 집회와 선전물 배포를 금지시켰다. 또 경찰과 소방대원, 의협단 등이 배치되었고, 훈련 명목 아래 군대가 출동하여 위협적 분위기를 연출했다. 

1월 말에는 파업 투쟁이 절정에 달하며 투쟁의 승리가 눈앞에 보이는 것 같았는데, 그 순간에 일제가 직접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한다. 경찰이 노련 산하 각 조합을 수색하고 문서를 압수하였으며, 노련 집행위원장 등 주요 간부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를 시작하였다. 고용주들은 노련에 대항하는 어용 노동단체로 ‘함남노동회준비위원회’를 조직하여 노조 파괴에 나섰다. 그럼에도 투쟁 열기가 좀처럼 사라지지 않자 2월 중순부터는 300여 명의 경찰이 노련 회원의 가정을 일일이 방문하여 공포감을 조성하였다. 또 강령과 마크가 불온하다며 파업 투쟁을 공산주의 운동으로 몰아 분열을 획책하기도 하였다. 2월 말에는 원산 사건에 단호히 처치하겠다는 총독부의 입장이 언론을 통해 전달되어 원산노련 측에서 겁을 먹도록 하였다.

결국 원산노련은 3월 7일 강령과 마크를 개정하고 모든 간부를 교체하였다. 이미 총파업 직전에 조선공산당 검거 사태로 원산지역 사회주의자들이 대부분 검거되어 총파업에 사회주의자들이 개입하기 어려웠다. 사회주의자들의 부재 속에서 기존 지도부는 기존에 그래왔던 것처럼 교섭과 타협만으로 승리할 수 있다고 낙관했다. 하지만 일제가 공세적으로 나오고 게다가 원산노련을 이끌고 있던 김경식이 검거되자 3월 지도부 교체를 단행하였다. 하지만 새 지도부는 더욱 개량주의적인 성격을 띠었다.

파업이 장기화되고 원산노련의 패색이 짙어지는 와중인 4월 1일부터 3일간 노동자 10~20여명이 함남노동회 등을 습격하여 수십 명이 다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당시 무장경관 수백 명이 동원된 일종의 계엄 상태였음에도 이들 중 한 명도 현장에서 검거되지 않은 기묘한 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노련의 지도부가 개량화된 후 불만을 품은 기층노동자들 일부가 폭력을 자행했을 가능성이 높지만, 일제 측의 계략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어쨌든 이 사건으로 원산에는 수색과 검거 선풍이 불어 닥치고 무장 경관과 기마 경관이 증파되면서 살풍경이 연출되었다. 결국 원산 노련 지도부측은 4월 6일 전체 집행위원 30여 명 중 11명 참석한 집행위원회에서 노동자의 자유 복업 명령을 내렸다. 각 세포 단체는 집행위원회 불신임을 제기하기도 했지만 곧 전체 대의원회에서 집행위원회 결정을 추인하였다. 이후 원산 고용자 단체에서 노련 탈퇴와 함남노동자회 가입을 강요하여 결국 4월 21일 노련 사무실과 소비조합을 폐쇄하였다.
 

원산총파업의 영향

1928년 우연히 발생한 구타사건으로 시작된 원산총파업은 일제와 자본의 승리로 종결되었다. 초기에 유리했던 국면이 조성되었음에도 노동자의 패배로 끝난 것은 무엇보다 일제와 자본 측의 강력한 노조 파괴 의지와 더불어 파업 투쟁을 낙관하며 교섭과 타협만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본 지도부 노선의 한계 때문이었다. 이와 더불어 노조 간부들이 기층노동자들의 여론을 수용하지 못하고 일부 간부들이 권위적인 의사 결정하는 방식도 문제가 되었다. 한편 원산총파업에서 중소 조선인 자본가 내지 민족 부르주아지들은 노동자 측이 아니라 일본 대자본들의 입장에 서게 됨으로써 민족운동으로부터 완전히 탈락하고 만다. 이러한 문제점은 이후에 노동조합운동이 혁명적 노동조합운동·적색 노동조합운동으로 변모하게 되는 주요 근거가 되었다. 즉 개량적인 민족 부르주아지를 배제하고 조선공산당의 재건과 부르주아 민주주의혁명을 내걸며 급진적인 노동조합운동이 전개되었던 것이다.

원산총파업은 아직 전근대적 조직 방식을 완전히 탈각하지 못했고 전술과 노선상의 한계성을 갖고 있지만, 일제의 모진 탄압에도 불구하고 직종을 넘어서 한 지역의 모든 노동자들이 참여한 동맹파업이었다. 비록 실패한 투쟁이었지만, 노동자들이 직종과 민족을 넘어 단결한 역사적 경험은 소중하다. 노조운동을 비롯한 사회운동이 어려워지고 있다는 소식과 암울한 전망만 듣게 되는 오늘날, 더욱 암울했을 그 시기에도 꿋꿋이 버텨온 역사를 되돌아보는 작업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으면 좋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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