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보다

  • 생태보다
  • 2014/11 창간준비1호

노동운동, 기후·에너지 위기에 새롭게 접근하자

뉴욕 기후행진과 에너지민주주의노조네트워크 참가기

  • 구준모 에너지노동사회네트워크 집행위원
 
“이 플래카드 들고 무대로 올라갈 수 있어요?” 헐렁한 면바지에 구겨진 재킷을 입은 중년 아저씨가 불쑥 다가와 권유했다. 각양각색, 말 그대로 다른 모양과 다른 색깔의 사람들을 구경하며 센트럴파크 남쪽을 휘젓고 다니다가 노조 사전대회로 급하게 발걸음을 옮겼을 때였다. 말을 건넨 이는 국제공공노련(PSI) 사무부총장 데이빗 보이스(David Boys)였다. 

한국 참가단이 준비한 <민영화와 규제완화는 답이 아니다!> 플래카드는 행진 내내 플래시 세례를 받았다. 엄지를 치켜들며 윙크를 던지고, 함께 사진을 찍고, 뺨에 키스하는 사람까지. 일요일 오후 뉴욕 중심가에서 벌어진 시위에서 한국 참가단이 이렇게 인기가 있을 줄이야. 중년의 간호사가 뺨에 남기고 간 침을 닦아도 당황스러움은 없어지지 않았다.
 

“10년 만에 새로운 운동이 성장 중”

9월 21일 뉴욕 맨해튼에서 열린 민중기후행진(People’s Climate March)에 모인 사람들은 30만 명이 넘었다. 미국 활동가들은 2006년 부시의 이라크 전쟁에 반대해 35만 명이 모인 이후 뉴욕에서 열린 최대 시위였다며 흥분한 기색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모인만큼 시위의 성격과 성과를 두고 갑론을박도 벌어졌다. 규모에만 집중한 나머지 시위대의 명확한 요구안이 없었고, 기업과 기업이 후원하는 기금의 지원을 받았다는 비판이 두드러졌다. 결국에는 반기문 사무총장이나 오바마 대통령의 기후변화 정책을 지지하는 데 대규모 행진이 동원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있다.

하지만 성장하는 대중운동에 주목해야 한다는 반론도 강력하다. 행진에는 주류 환경단체만이 아니라 풀뿌리 운동, 노동조합, 사회주의 단체도 참여했다. 좌파 활동가인 폴 다마토(Paul D’Amato)는 미국에서 송유관 건설 반대운동과 오바마의 에너지 정책에 반대하는 운동이 커지는 상황 속에서 이번 행진이 있었다며, 성장하는 대중운동의 잠재력에 주목했다. 

행진에 참가한 임월산 공공운수노조 국제국장도 “반전 운동 이후 10년 만에 새로운 운동이 성장하는 것 같아요. 주류 환경단체 뿐만 아니라, 이전에는 이런 시위에서 보기 힘들었던 노동조합과 유색인 풀뿌리 단체들의 모습이 많이 보였죠. 새로운 운동의 성장이 아닐까요”라며 기대했다.  
 

‘샌디’를 계기로 교육 사업을

행진에 참여한 노조 조합원은 1만여 명으로 2만 명 목표에는 못 미쳤지만, 그래도 기후행진에 이만큼이라면 적지 않은 수였다. 특히 뉴욕간호사노조와 SEIU동부보건의료지부의 활기찬 행진과 참여 규모가 다른 노조보다 돋보였다. 이들은 어떻게 많은 노동자들은 조직할 수 있었을까?

행진 하루 전에 열린 회의에서 만난 미국의 노조 활동가들은 이구동성으로 2년 전인 2012년 10월에 뉴욕을 강타한 허리케인 샌디를 이야기했다. 뉴욕을 포함한 미동북부지역에서 샌디로 인해 55명 이상이 사망하고 850만 가구에 전기가 끊겼다. 초대형 허리케인이 10월 말에 미동북부까지 영향을 미친 일은 허리케인 관측 이래 처음. 기후변화의 영향을 빼고 설명할 수 없었다.

특히 뉴욕의 보건의료 노동자들에게 샌디는 자신이 겪은 커다란 사회 문제였다. “병원에서 일하던 조합원들은 홍수와 정전이 발생하자 환자들을 대피시켜야 했고, 불이 꺼진 병원 복도에서 밤새 환자들을 지켜야 하는 일도 생겼어요. 샌디 복구 작업에도 노조가 나섰는데, 이런 활동이 기후변화 문제의 심각성을 깨닫는 계기가 되었죠.” SEIU동부보건의료지부 부지부장인 에스텔라 바스케스(Estela Vasquez)는 자신들의 경험을 열성적으로 설명했다. 

나아가 교육사업도 체계적으로 진행했다. “에너지민주주의노조네트워크에 교육 프로그램을 의뢰해서 조합원들을 교육에 참여시켰어요. 먼저 점심 때 한번 진행했는데, 시간도 짧고 내용이 어려울 것 같아서 반응이 어떤지 궁금했죠. 그런데 첫 번째 교육에 85명의 조합원들이 참여했어요. 이걸 보고 노조가 기후변화 사업을 진행하기로 결정했고, 지금까지 여러 병원에서 교육을 진행하고 있어요.”
 

에너지민주주의노조네트워크에 주목하다

한국 참가단이 뉴욕에 간 건 에너지민주주의노조네트워크(TUED: Trade Unions for Energy Democracy)의 연례회의 참석 때문이었다. 2012년 결성된 TUED는 ‘에너지 민주주의’를 모색하기 위한 노동조합들의 국제적 연대망으로 15개국 40여개 노조가 가입해 있다.

기후변화와 에너지 문제 해결을 위해서 에너지를 노동자와 민중들이 민주적으로 소유하고 이용해야 한다는 지향이 에너지 민주주의라에는 말에 담겨 있다. 이를 위해서는 에너지와 자연환경을 둘러싼 사회·경제적 권력의 변화가 필요하다. 자본이 에너지를 이윤 생산의 도구로 사용하고, 민영화와 시장화로 에너지에 대한 민중의 접근권이 약화되는 것에 저항해야 함은 물론이다. 에너지 민주주의는 자본주의에 도전하는 급진적인 개념이다.
 

이것은 커다란 변화다. 지금까지 기후변화와 에너지 문제에 대한 국제 노동운동의 지배적 담론은 기업과 정치인들의 것과 다르지 않았다. 세계 엘리트들은 녹색경제의 성장을 대안으로 내세웠고, 노동운동은 그 틀 속에서 녹색 일자리 창출과 사회적 요소의 강화를 이야기했다. 여기서 녹색경제란 민영화, 시장화를 부정하지 않는 것으로, 자본주의 체제는 물론이고 2008년 금융위기로 문제가 되었던 신자유주의 정책들도 배제하지 않는 것이었다. 

또 녹색 일자리는 녹색경제 내에서 노사정의 사회적 대화로 만들 수 있다는 가정에 기반하고 있다. 그러나 유럽 일부에서 작동하던 사회적 대화는 신자유주의 시대에 힘이 약화되었다. 더구나 노동권 탄압이 극심한 남반구나 한국에서 이런 이야기는 비현실적이다.

TUED는 출범의 기반이 된 보고서에서 녹색경제 전략을 비판한다. “기업의 권력과 에너지 자원, 사회기반시설, 시장에 대한 기업의 통제에 맞서지 않기 때문에 실패했다. … 진정으로 지속가능한 세계에 관한 비전을 중심으로 사회운동들을 단결시킬 수 있는 새로운 담론이 필요하다.” 

이런 측면에서 TUED의 에너지 민주주의는 한국의 노동운동이 발전시킨 ‘에너지 공공성’과 닮았다. 민영화가 아닌 공영화, 보편적 접근권 보장, 계획된 에너지 전환을 요구하는 측면에서 그렇다. 한국의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에너지노동사회네트워크가 TUED 참가를 쉽게 결정한 배경이다. 이번 뉴욕 회의 참가단에도 최근에 침체되어 있었던 기후변화와 에너지 전환 대응 사업을 활성화하기 위해 발전, 가스, 가스기술, 한수원 등 많은 지부와 노조가 참여했다. 
 

기후변화에 대한 노조의 접근을 바꾸자

행진에 앞서 열린 TUED 회의 주제는 기후변화에 대한 노조의 접근법이었다. 큰 회의장이 70여명의 노조 대표와 활동가들로 채워졌다. 코넬대학교 숀 스위니(Sean Sweeney) 교수가 준비한 보고서 초안은 참가자들의 지지를 받았다. 

환경단체인 지구의 벗에서 참가한 활동가는 솔직한 생각을 들려주었다. “과거에는 환경문제의 심각성을 폭로하면 자연스럽게 각국 정상들이 대책을 찾을 것이라고 생각했죠. 환경단체가 양복을 입고 협상에 들어갔고 환경문제의 심각성을 이야기하며 로비를 했어요. 그러나 충분하지 않았어요.” 그는 반인종주의 운동을 하다 환경문제에 대한 대중적 운동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환경운동을 하게 되었다고 했다. 태풍, 가뭄 등 기후변화로 인한 민중의 경험을 운동으로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남반구 민중의 경험에 충분히 관심을 기울이면 하면 불평등 문제를 이야기할 수 있을 거에요.”

노르웨이 지방공무원노조의 아스뵈른 발(Asbjorn Wahl)은 보고서의 함의를 세 가지 차원의 변화로 요약했다. 첫째는 정책 변화다. “노조는 지금까지 녹색성장, 녹색시장, 녹색경제에 파트너로 참여하려고 했죠. 이게 바뀌어야 합니다.” 두 번째는 정치의 변화다. “기후변화뿐만 아니라 갈수록 심각해지는 불평등, 경제위기 하에서 노동자에 대한 공격에 같이 대응해야 합니다. 기후변화를 단일한 이슈로 대응하면 절대 안 돼요. 경제위기, 불평등, 실업 등에 같이 대응하고 다양한 의제를 어떻게 통합할 것인지가 우리에게 제일 중요한 과제입니다.” 세 번째는 방법의 변화다. “지난 20년 동안 로비 활동을 했는데 성과가 없었어요. 역사의 교훈을 얻어서 로비는 투쟁 없이 효과가 없다는 것을 잘 인식해야 합니다.”

필리핀 노총(SENTRO)의 조슈아 마타(Josua Mata)는 노동자의 권력을 키우는 것이 중요하다고 역설했다. “필리핀은 기후변화 때문에 많은 고통을 받고 있지만 기후변화에 대한 투쟁은 크지 않아요. 필리핀에는 결사의 자유가 보장되지 않습니다. 2006년부터 지금까지 60명의 노조 간부들이 살해당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비관적이지 않았다. 기후변화를 사회변화를 위한 긴 길 위에 놓여있는 과제로 본다면, 노동조합도 함께 행동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필리핀 노조의 급진주의 전통 하에서 기후변화를 체제 변화의 측면에서 이야기하면, 우리는 이해하기 쉽습니다. 기후변화는 자유무역과도 연결된 문제입니다. 기후변화는 이러한 더 큰 문제들 속에서 이해되어야 합니다.”
 

뉴욕과 한국의 거리는 멀지 않았다

뉴욕과 한국은 11만 킬로미터 거리지만 사회운동의 고민은 그렇게 멀지 않다. 한국에서도 2005년 노동조합과 환경단체가 함께 에너지노동사회네트워크를 결성하고, 에너지와 기후변화에 대한 새로운 접근법을 발전시켜왔다. 최근 3~4년 동안은 보수 정부의 노조 탄압에 생존을 지키기 위해 허덕였고, 시장 정책을 둘러싼 환경단체와 노동조합의 입장 차이로 정체했다. 그러나 다시 시동이 걸렸다. 

미국의 민중기후행진과 TUED는 우리에게 새로운 자극이다. 기후행진에 조합원 1만 명을 동원할 수 있는 힘, 미국에서 아래로부터 올라오는 대중운동의 성장, 기후변화에 대한 노동조합의 새로운 접근. 우리가 잠시 막혔던 지점에서 새로운 흐름이 나타나고 있다.

한국에서도 출장을 준비하고 보고대회를 열면서 노동조합과 환경운동이 다시 만나 토론하는 계기가 만들어졌다. 이종훈 공공운수노조 가스지부장은 출장 보고대회에서 “TUED가 국내 노동계에 시사하는 건 기후변화와 민영화 문제를 접목시켜 에너지 노동자들을 정의로운 기후전환의 주체로서 자리매김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보고대회 전에 진행된 에너지노동사회네트워크 대표자회의는 새로운 의지가 내비친 자리였다. 이제 우리가 한국에서 할 일을 해야 할 때가 아닐까.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향한 우리의 전망, 오늘보다
정기구독
태그
관련글
“비정규직도 재밌게 노조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