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28일, 탈레반에 의해 피랍된 한국인 19명의 석방이 합의되었다. 7월 19일 피랍이후, 꼭 41일만의 일이다. 한국정부와 탈레반 간의 네 번째 대면협상을 통해 결정된 합의사항은 연내 한국군 철군 비정부기구에서 활동하는 한국인들 이달 말까지 철수 아프가니스탄에서 한국의 선교활동의 중단 인질 석방 중 탈레반을 공격하지 않을 것 탈레반은 아프가니스탄 정부에 의해 구금된 탈레반 포로들의 석방을 더 이상 요구하지 않을 것. 이상 5개 항이다. 인질의 몸값 지불여부, 한국의 외교 협상력의 치적, 기독교의 배타적·공격적 선교라는 맹비난 여론 등. 몇 가지의 선정적인 뉴스거리를 남기면서, 아프간 피랍사태는 일단락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한·미군사동맹이 초래한 죽음과 비극은 언제든지 반복될 수 있다. 미국의 '대테러전쟁'이 몰고 온 끔찍한 증오와 폭력이 이미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고 있고 이라크와 레바논서, 그리고 중동지역 전역에서 한국은 이미 그 전쟁의 한 가운데 서 있기 때문이다. 한국정부가 '테러와의 전쟁'에 동참하는 것을 중단하지 않는 한, 또 다른 참극은 이미 예고되고 있다. '대 테러동맹'의 참혹한 대가 정부와 언론은 피랍초기부터 줄곧 사태의 원인을 '기독교의 무리한 선교'로 돌리려 무던히도 애를 썼다. 탈레반은 처음부터 한국인이 탑승한 버스인지도 몰랐고, 따라서 파병국가의 국민이었기 때문에 한국인이 표적이 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사건은 한국군 파병과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으며, 문제의 핵심은 정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위험 국가'를 찾아간 23명의 '공격적 선교행위'에 있다는 것이다. 정부는 21명의 피랍자들에게 구상권을 행사하겠다는 방침까지 밝히고 나섰다. 이 얼마나 뻔뻔하고 가증스러운 주장인가. 아프가니스탄을 '위험국가'로 만들고 있는 것은 바로 한국이 참전하고 있는 미국의 아프간 점령이다. 가옥과 결혼식장, 장례식장을 무차별 공격하는 미국과 동맹국의 점령이 탈레반의 민간인 납치, 살해행위와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대한민국은 이미 많은 이들의 무고한 목숨을 전쟁의 희생양으로 삼으며 '테러와의 전쟁'에 온갖 충성을 갖다 바치고 있었고, 그 덕분에 탈레반은 23명을 납치, 살해할 수 있는 명분을 쉽게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백번 양보해 23명의 피랍자들이 '무리한 선교'때문에 스스로의 목숨을 위태롭게 만들었다고 치자. 한국정부의 파병과 한·미 군사동맹이 아프가니스탄을 향하지 않았었다면, 탈레반은 민간인을 살해하고 장기간을 피랍 할 수 있는 어떠한 명분도 가지지 못했을 것이다. 또한 한국정부를 통해 미국과 카르자이 정부에게 요구할 협상카드도 사고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정부는 고 배형규, 심성민 씨가 무참히 살해되는 그 순간까지, '즉각 철군' 이라는 카드를 결코 꺼내지 않았다. 잔인하고 참혹한 두 사람의 죽음 앞에서도 미국과의 '대테러동맹'을 굳건히 지켜냈다는 치적을 뽐내며, 이제 살려놨으니 돈으로 갚으라는 망발을 서슴지 않고 있다. 이라크 자이툰 부대 파병에 이어, 아프간과 레바논의 파병은 오무전기 노동자들과 김선일 씨의 피살, 윤장호 씨의 죽음과 이번 아프간 피랍사태까지 죽음과 비극의 기록을 남기고 있다. 이러한 참혹한 기록이 말하고 있는 진실은 무엇인가? 그것은 '테러와의 전쟁'을 수행하는 한·미 전쟁 동맹이 앞으로 더 많은 죽음, 더 많은 비극을 예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아프가니스탄에서 벌어지고 있는 '대테러전쟁'이 몰고 온 증오와 폭력은 이제 어느덧 한반도를 겨냥하고 있다. 한국은 한·미 동맹의 이름으로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레바논에서 '테러와의 전쟁'에 동참하면서 언제든, 누구든, 어느 때이든 폭력의 희생양이 될 수 있다는 공포에 휩싸였다. 이 공포는 더 많은, 더 강력한 '대 테러동맹'을 원할 것이고 그 결과 더 많은, 더 강력한 폭력이 그에 대한 대가로 돌아올 것이다. [%=사진1%] <파병반대 국민행동> 내의 논란 한국의 반전평화운동은 이번 사태를 계기로 미국의 점령반대, 한국군 즉각 철군을 요구하며 시민과 함께 하는 촛불집회를 지속해나갔다. 그러나 정부의 파병정책에 대한 분노는 위력적인 대중운동으로 형성되지 못하였다. 대중들의 지배적인 정서는 기독교 선교에 대한 반감으로 표상되었고, 미국의 점령과 파병이 사태의 본질적인 측면이라는 인식은 지배적 여론에 밀려 대중적 설득력을 갖지 못했다. 한편 반전평화운동 내적으로는 무엇에 초점을 두고 운동을 할 것인가에 대한 다양한 시각차이가 드러난 계기였다. 탈레반은 23명을 납치한 직후, 아프간에 있는 한국의 동의·다산부대의 즉각적인 철군을 요구했다. 반전평화운동은 <파병반대 국민행동>(이하 국민행동)을 중심으로 기자회견(7월 21일)과 촛불집회를 시급히 조직하였고, 즉각 철군과 미국의 점령 중단을 요구하였다. 이 과정에서 "탈레반에게 피랍자 석방을 요구할 것인가"의 문제가 쟁점으로 등장했다. 7월 26일 열린 <국민행동> 기획단회의에서는 '피랍자 즉각 석방'의 요구를 슬로건으로 삼을 수 없다는 입장이 제출되었다. 탈레반에게 인질석방을 요구하는 것은 사태의 본질을 양비론으로 몰고 갈 위험(미국 반대/탈레반 반대)이 있다는 주장이었다. 현 시기 운동의 방향은 점령과 파병에 모든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는 점을 제기하였다. 토론 끝에 이 문제는 결국 다수결을 통해 결정되었고 결국 다수 안으로 <국민행동>의 핵심요구는 "피랍자 석방, 점령종식, 즉각 철군"으로 정리되었다. 7월 말, 피랍 20일이 경과하면서 탈레반의 인질석방 조건이 '탈레반 수감자 석방'으로 변화된 것으로 알려졌다. <국민행동>은 당면 핵심요구에 탈레반의 '포로교환요구 수용'을 추가하는 것을 논의에 부쳤다. 이는 또 한 번의 논쟁을 일으켰는데 "민간인의 생명을 볼모로 한 탈레반의 잘못된 요구를 대변할 수 없다."는 입장과 "미국의 점령을 비판하고, 점령 종식을 압박할 수 있는 요구로써 탈레반의 요구는 수용 가능하다."는 입장이 대립되었다. 이 문제 역시 다수의 의견을 따라 '포로교환요구 수용'이 핵심적인 요구에 추가되었다. 이러한 쟁점들은 성명 발표, 촛불집회 기조를 결정할 때마다 참가단체들 간에 상당한 논란을 빚었고, 일부 시민단체들은 피랍자들의 조속한 석방을 촉구하는 활동을 독자적으로 조직하기도 하였다. (8월 7일, 평화 여성 환경 종교, 문화 분야 78개 시민단체, '노란 리본 달기'운동.) 논란은 8월 27일에 개최된 <국민행동> 운영위원회에서 일단락 되었는데, 당면 슬로건을 "무사귀환, 점령종식, 즉각 철군"으로 정리하고 이외에 '포로교환요구 수용'은 미국의 책임을 묻는 내용과 결합시키자는 것으로 정리되었다. 78개 시민단체들의 '노란리본 달기'를 호소하는 성명에는 탈레반에 대한 비판과 인질들의 조속한 석방이 가장 중심적인 내용으로 담겨있다. 이들은 무고한 민간인을 납치, 살해하는 탈레반의 폭력을 즉각적으로 중단시키고, 인질을 구해내는 것으로 사태의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다. 따라서 이들은 <국민행동>의 촛불집회 기조와 관련해서도 한·미 동맹의 문제를 부각시키는 것이 아니라, 시민들로부터 무사귀환의 염원을 확산시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또 한편에서는 이 사태를 계기로 반전·반미의 목소리를 보다 확산시켜 나가는 적극적인 계기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운동진영이 해야 할 역할은 피랍자 석방의 기술적 방법 자체를 제시하는 것에 있지 않으며, 한·미 동맹 반대라는 정치적인 목소리를 높여 반전평화운동의 정치적 고양에 기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양자의 입장은 모두 아프간 피랍사태에 대한 각자의 '평화주의적 해결방식'을 제시하고 있다. 미국과 동맹국들의 고도의 군사공격에 의해 격퇴 당한 탈레반이 '테러'라는 극단적인 방식으로 보복을 감행하고 있는 상황에서 피랍자들의 생명구제는 무엇보다 긴급한 문제일 수 밖 에 없다. 또한 탈레반 전쟁포로들이 미군에 의해 최소한의 포로대우도 받지 못하고, 끔찍한 인권유린과 폭력에 노출되어 있는 상황은 탈레반으로 하여금 민간인 납치를 볼모로 포로석방을 요구하게 하는 극단적인 행동을 추동하고 있다. '피랍자 즉각 석방'의 요구나 '탈레반 수감자 석방'의 요구들은 각각 이 사태를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어느 것 하나가 '절대적으로 수용될 수 없는 문제'라고 판단할 수는 없다. 그러나 양자의 입장이 모두 가로막혀 있는 지점은 결국 "오늘날 나타나고 있는 전쟁과 새로운 폭력의 양상들에 대해 반전평화운동이 어떠한 시각을 가져야 하는가?"라는 질문이다. 범세계적 공안정국과 새로운 폭력의 시대 9·11이후 시작된 '테러와의 전쟁'은 아프가니스탄 침공을 시작으로 이라크 전쟁, 가자, 레바논, 소말리아 전쟁으로 번져갔고, 현재는 이란으로까지 나아가고 있다. 그렇다면 이 전쟁은 세계를 어떻게 변화시키고 있는가? '테러'는 정치· 군사적 약자의 수단이라는 점에서 미국과 그 동맹국들이 제아무리 압도적인 정치· 군사적 우위에서 '테러와의 전쟁'을 확산해 나간다 하여도 반복적으로, 심지어는 새로운 유형의 폭력으로, 출현할 수 밖 에 없다. )1)따라서 '테러'에 대한 공격은 승리도 패배도 없는 끝없는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오직 항구적인 전투과정과 그렇기 때문에 더 넓고 광범위한 전장을 필요로 할 뿐이다. 2001년 10월 미국은 9·11의 배후세력인 빈 라덴을 '죽이거나 생포하는 것'을 전쟁의 목표로 삼았으나 7년이 지난 지금, '테러와의 전쟁'은 더 이상 알카에다, 탈레반과 같이 이미 드러난 무장단체만을 표적으로 삼지 않는다. 이는 점차 이슬람 전체에 대한 전쟁으로 인식되고 있으며 결과적으로 아프간에서 탈레반의 재등장이라는 새로운 유형의 폭력을 재생산하였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테러와의 전쟁'이 '테러'의 위협을 전 지구적으로 확산시켰기 때문에 이제 전쟁은 단지 중동 지역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다. 미국의 동맹국들은 거대한 '대 테러 동맹'을 결성하여 범세계적인 차원의 공안정국을 조성하고 있다. 무슬림에 대한 인종주의적 공격, '악마화'된 이미지를 유포하여 새로운 종교적, 종족적 분쟁을 촉진한다. 또한 각 국가는 다양한 차원에서 대 테러정책을 계발하고, 대 테러 대비 군사안보 시스템을 첨단화하고, 테러를 겨냥해 기존의 군사동맹의 성격을 전환하는 작업을 진행한다. 이러한 흐름은 새로운 유형의 국가폭력을 자연스럽게 양산하고 있고, 이와 동시에 새로운 저항수단, 새로운 폭력을 (재)생산하고 있다. 아프간에서 벌어지고 있는 탈레반에 의한 외국인 피랍, 살해의 방식 역시 새롭게 등장한 폭력의 한 유형이며 '테러와의 전쟁'에 대한 그들의 '피의 보복'인 것이다. 반전평화운동에게 던져진 질문 민주주의와 정치가 말살된 장소에서, 증오와 보복의 폭력들은 반전평화운동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일부 시민단체들의 '노란리본 달기 운동'은 이 폭력의 의미를 즉각적으로 거부하는 것으로 답하였다. 그러나 탈레반의 극악무도한 테러행위가 아프간의 평화를 더욱 어렵게 하는 요인이라는 점이 분명한 사실일지는 몰라도, 그들의 폭력을 직접적으로 작동시키는 '대 테러전쟁'의 정교한 시스템을 사고하지 않고서는 그들의 요구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 우리는 제대로 알 수가 없다. 다만 무고한 인간의 생명 볼모로 하는 저항수단이 '평화'와는 전혀 거리가 멀다는 사실을 반전평화운동의 다른 측면에서 제기할 수 있을 뿐이다. 따라서 탈레반의 요구와 행동을 '테러와의 전쟁'의 시각으로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아프간 민중의 평화적 원칙의 시각에서 비판할 수 있어야 한다. 반전평화운동은 그 원칙과 관점이 무엇인지에 대해 성찰하고 토론해야 한다. 지난 30년 동안 전쟁으로 얼룩진 아프간의 대지에 미국의 점령과 대 테러전쟁의 암흑을 거두어내고 어떠한 대안과 전망으로 새로운 민중의 평화를 건설해 나가야 하는가? 이것에 대한 적절한 해답을 찾는 것이 탈레반의 극단적 폭력을 비판할 수 있는 우리의 출발점일 것이다. 이제 세계의 거의 모든 지역이 새로운 전쟁과 폭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어졌다는 점에서, 아프간 피랍사태는 오늘 우리에게 중요한 질문들을 던지고 있다. 국가적, 지역적 틀을 넘어서는 국제주의적인 반전평화운동의 성장은 어떠한 '평화주의'를 필요로 하는가? 세계적 차원에서 새롭게 등장하고 있는 증오와 보복의 폭력들에 대해 반전평화운동은 '즉각적인 거부'와 '맹목'이라는 양자의 한계를 뛰어넘어서 무엇을 대안으로 제시할 수 있는가? 민주주의와 정치가 말살되고 있는 세계 곳곳에서 인류 절멸로 치닫고 있는 전쟁에 맞서 평화운동의 국제적 연대를 만들어 나가는 것이 바로 우리의 대안이다. 대안 세계화로서 반전 평화운동이 새롭게 거듭나기 위해 우리에게 던져진 이 질문들에 차근차근 답해나가자. 1).「미국은 결국 패배할 것이다」,사회화와 노동 105호 참고.본문으로
1. 아프가니스탄에서 23명의 한국인이 인질로 잡힌 지 40여 일이 지난 상황에서, 살해당하거나 석방되지 않고 남아있는 19명의 석방을 위한 협상이 급진전되고 있다는 보도가 나오고 있다. 사태가 어떻게 종결되더라도 피랍 사태 40여 일 동안 한국정부가 보였던 입장들, 이번 납치사태가 제기하는 쟁점들에 대해서 평가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지난 7월31일, 두 번째 인질이 살해되고 나서 곧 청와대, 외교통상부의 기자회견이 진행됐다. 정부는 여기서 이번 사태에 대한 자신들의 대응은 하나하나가 모두 무능과 기만으로 점철되어 있다는 점을 보여줬다. 정부는 탈레반의 포로교환이라는 요구사항에 대해서도 피랍 한 달이 되어간 이 당시에야 '공식확인'하는 등 사태가 진행될 때마다 '확인 중'이라는 말로 일관했다. 협상에서 무능을 감추기 위한 수사도 대거 동원한다. 언론에는 협상․타협 가능성을 흘리는 한편, "책임을 묻겠다"는 엄포까지 늘어놓았는데. 남한 정부가 탈레반에 책임을 묻겠다는 말은 정부 당국자 스스로도 진지하게 믿지 못할 것이다. 아프가니스탄의 미국 괴뢰 '정부'에 책임을 묻는 방식으로 책임전가도 진행되었지만 남한 정부 자신의 무능을 드러낼 뿐이다. 그런 과정에서도 시종 일관 돋보인 것은 미국의 책임을 배제해주는 '감동적인' 충성이다. 아프가니스탄 '정부'는 물론, 미국도 공식적으로 '협상은 없다'는 입장을 공공연히 밝혀왔다. 마치 故김선일 씨 납치 때 노무현이 '철군은 없다'고 곧장 대응하면서 살해를 재촉한 것을 반복이라도 하듯이 말이다. 여기서 납치 사건은 탈레반은 물론 미국도 전혀 손해 볼 것이 없는 사건이라는 점을 생각해야한다. 납치 사태의 해결에 키를 쥐고 있는 것은 미국 정부라는 걸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다. 심지어는 피랍자 가족들까지 미국대사관에 '호소'하러 가기도 했다. 그러나 미국은 현재 상태에서 해결할 의지가 별로 없는데 그것은 단지 '테러범과 협상없다'는 공허한 원칙 때문이 아니다. -이미 곳곳의 납치 사건에서 각국 정부들의 협상은 일반적인 것이다. 미국도 선례가 있으나 하려는 마음만 있으면 당장 할 수 있는 일이다. - 현재의 갈등, 즉, 탈레반의 잔인성을 부각하는 것이 미국의 '테러와의 전쟁'을 정당화하기 때문이다. 그럼 탈레반은 어떨까? 이들 역시, 자신들의 건재함과 주장을 전세계에 위성 TV로 매일 중계하고 있는 마당에 아쉬울 것이 없다. 미국과 탈레반, 양 극단주의자들의 이해가 이렇게 일치하는 사건인데다가, 이들이 사태 해결의 모든 열쇠를 쥐고 있는 마당에 남한 정부의 무능은 구조적으로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문제는 남한 정부가 이러한 자신의 무능에 대해서 책임지지는 않는 것은 물론이려니와 한 발 더 나아가 기만으로 일관해왔다는 점이다. 남한 정부의 무능은 미국의 '테러와의 전쟁'에 충실한 동맹국으로 복무해온데서 비롯된다. 독자적인 정치적 결정은 실종되고 미국의 전쟁전략이 곧 남한 정부의 결정사항이 되는 상황에서 남한 정부가 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다. 남한정부는 가장 미국에 충실했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가장 무능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처럼 정부가 아프가니스탄에서 보여준 무능은 인질협상에서의 무능이라기보다 미국에 대한 무능이라는 점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1) 따라서 정부가 기자회견을 통해서 한계를 간접적으로나마 인정하는 뉘앙스를 풍기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무능이 노무현 정부가 자초한 것이라는 점에서, 게다가 이에 대한 일말의 반성도 없는 데 이르면 정부의 태도는 ‘기만'이 된다. 국민들의 생명을 지키지도 못하고, 그것의 해결을 요구하지도 못하는 전적인 무능. 더구나 자신의 무능을 폭로하는 자리에서조차 미국의 책임을 끝까지 배제하는 태도는 정부의 기만이 매우 ’의식적‘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따라서 이러한 과정에서 사태의 해결을 위해 미국이 나서야한다는 반전운동의 진단과 주장은 정당했다. 그러한 요구가 이 사태의 원인은 물론 해결되지 않는 원인 또한 미국의 전쟁에 있다는 것과 남한 정부의 '묻지마 한미동맹'에 있다는 점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2. 두 번째 인질이 살해된 당일, 곧장 정부가 한 또 하나의 일은 뉴코아 농성장에 공권력을 투입한 것이다. 필수공익사업장도 아닌 민간사업장, 국가기간산업도 아닌 사업장에 공권력을 두 번이나 투입한 것도 이례적이지만 그 '신속한 집행'도 더 이례적이다. 남한 정부는 아프가니스탄에서의 완전한 무능을 국내에서 '만회'라도 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아프가니스탄 피랍자들은 구할 수 없지만 비정규직을 탄압하는 이랜드-뉴코아 악질자본은 구해줄 수 있다는 뜻일까? 정부가 '인질 살해에 책임을 묻겠다'는 것이 황당한 공문구라는 것을 아는 대중들은, 그들이 비정규직 노동자들에 대해서는 전혀 '공문구'를 날리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하고 있다. 게다가 정부는 탈레반에 대해서는 (자신이 불가능하고 무능하기 때문에) 무력사용을 배제하지만, 비정규직에 대해서는 그것을 ‘당장’ 사용한다. 신중함의 시차조차 없다. 이것은 오히려 역설적으로 비정규직 문제를 전혀 해결할 능력이 없는, 오직 쉽게 사용가능한 폭력을 통해서만 '해결'할 수 있는 남한 정부의 무능을 더욱 부각시킨다. 3. 마지막으로 한가지. 이번 사태의 핵심적인 원인들이 미국이 벌인 전쟁과, 이에 무조건 동조한 남한 정부에 있다는 것을 명확히 하는 것은 사태가 어떻게 정리되더라도 매우 중요한 과제다. 그것이 바로 정세적 개입이다. 따라서 피랍자들이 아프가니스탄에 간 것이 문제라는 식(여러가지 판본의 피랍자 책임론)으로, 정부의 책임을 면제하고 정부의 무능을 실천적으로 비호하는 입장들은 아무런 가치가 없을 뿐 아니라 매우 위험하다. 그러나, 다소 논쟁적일 수도 있는 하나의 쟁점을 피해갈 수 있을까? 피랍자들에게 어떤 '책임'을 묻는 것은 당연히 부당하다고 해도, 그렇다고 해서 남한 보수 기독교회의 책임까지 면제되는 것일까라는 점이다. 피랍자들과 보수 기독교회(라는 제도와 사회적 세력)은 구별해야한다고 생각한다. 또한 피랍자들이 살아 돌아와야 하는 이유는 그들의 아프가니스탄에서의 '단기선교' 혹은 '봉사'활동이 정당하거나 혹은 부당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전적으로 그것과 무관하게 그/녀들이 인간으로서, 조건없는 인권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을 부정한다는 점에서 탈레반의 납치행태도 정당성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은 물론이다.) 피랍자들을 아프가니스탄에 보낸 샘물교회는 기독교 우익 NGO운동의 중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고, 기독교 뉴라이트 등과 관계를 가져왔다. 이들의 기독교 뉴라이트 단체는 신지호 등이 주도하는 또 다른 뉴라이트 단체인 <자유주의연대>와 통합을 논의하기도 했다. 강남과 신도시 중산층을 기반으로 하는 신흥 대형교회들은 적극적으로 뉴라이트 운동을 통해 정치화되고 있다. 미국에 대해 비판의식이 전무한 것은 시청 앞 성조기 집회를 주도하는 순복음교회, 금란교회 등과 같은 <한국기독교총연합(한기총)> 주류의 선발대형교회와 다를 바 없다. 다만 보다 중산층의 구미에 맞게 보다 세련된 정치적 포지션을 유지할 뿐이다. 이들 기독교 보수주의 진영, 복음주의이자 근본주의자들인 이들의 행태는 비판적으로 보아야한다. 이들이 공격적인 '해외선교'에 나서고 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여기에는 국내에서의 선교가 한계에 봉착하고 있다는 측면도 작용한다. 그럼 이들이 아프가니스탄과 같은 곳에서 하는 '선교'의 본질이 무엇인가? 미국 선교사들이 한국전쟁 이후에 남한에서 '선교'하면서 반공발전주의에 기반한 이들 기독교 교회를 '부흥'시킨 것과 같은 역할을 자임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미국이 수행하는 ‘테러와의 전쟁’의 유기적인 일부, CNN과 더불어 이데올로기 전쟁의 일부라고 할 만하다. 따라서 오히려 보수주의 기독교가 수행하는 '해외 선교활동''에 대한 비판은 제기될 필요가 있으며 피랍자들은 그것과 무관하게 살아 돌아와야 한다는 점을 요구해야하지 않을까? 이런 비판이 없는 상황에서 사태의 원인의 일부인 보수주의 기독교 교회들은 '피해자 책임론은 안 된다'는 여론, 혹은 더 정확히는 '피랍 피해당사자' 뒤에 숨어서 자신들도 '피해자'인 척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 보수 기독교 교회는 오히려 23명을 사지로 내몬 가해자의 유기적 일부다. 이들은 지금도 일말의 회개와 반성이 없다. <한기총>에서 어떤 진지한 반성적인 입장이 나왔다는 이야기도 듣지 못했다. 이번 사태를 겪으면서 대중들의 이들 보수주의 기독교에 대한 반감은 숨김없이 표출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역설적으로 ‘납치피해자=보수 기독교 교회’로 더욱 강하게 등치되고 있다. 극단적인 네티즌들은 '반-기독교 근본주의'라고 할 만큼 극단적인 (상징적) 폭력을 자행하고 있고, 그 폭력은 성격에 상관없이 모든 기독교 교회와 신자들을 겨냥하고 있다. 사태의 원인의 일부인 보수주의 주류 기독교 교회들과 그렇지 않은 기독교 교회를 구별할 수 있는 비판, 책임묻기가 불가능해졌기 때문에 생기는 비극중 하나이다. 이미 그러한 은폐구도, 등치구조가 공고해진 지금 시점에서 다른 비판이 실제로 가능할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그것이 비록 늦어서 이제는 그것을 대중적으로 제기하는 것이 실천적으로는 너무 위험하고 불가능한 문제제기라고 해도, 사태를 이성적으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사고에서 그것을 억압해서는 안 된다. 그런 점에서 기독교 선교는 이번 사태와 전혀 관계가 없다는 주장들에 대해서도 그 순진함을 의심해볼 필요도 있다. 예를 들어 <다함께>는 "근본적인 문제는 ‘종교’가 아니라 제국주의적 침략과 억압"이라면서 이슬람 근본주의와 기독교 근본주의 모두 원인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슬람 근본주의에 관용적인 이들이 기독교 근본주의에도 역시 그런 것일까? 그러나 그 제국주의를 이데올로기적으로 정당화하는 것이 그런 극단의 이데올로기들이라는 점을 인식해야한다. 제국주의 지배 세계체제의 유기적 일부인 종교적 근본주의에게만 면죄부를 주는 방식은 이해하기 힘들다. 모든 지배체제와 같이 제국주의 역시 그것을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 없이는 작동하지 않는다. 이런 비판이 필요한 이유는 미국의 '테러와의 전쟁'에 동행해서 그것을 지지하는 미국의 근본주의-복음주의 기독교, 그리고 여기에 동조하는 남한의 근본주의-복음주의 기독교는 어떤 반성도 없이 자신들의 방식으로 ‘테러와의 전쟁’에 계속 복무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다음 비극을 또 다른 방식으로 예고할 수밖에 없다. ※ 이 글이 최종적으로 작성된 시점은 아프가니스탄 인질이 석방되기 전인 8월 25일 경이다. 1)탈리브(Ṭālib)는 원래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의 마드라사(이슬람 전통학교) 학생들을 가리키는 단어로써, 그 복수형 단어가 '탈리반'(혹은 탈레반)이다. 서방 언론에 이들의 존재가 알려지면서 ‘탈레반’이 이들을 지칭하는 고유명사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이 글에서는 기존의 언론보도를 통해 한국에 ‘탈레반’이란 명칭이 더 널리 알려져 있으므로 ‘탈리반’ 대신 ‘탈레반’으로 표기했다.본문으로
1. 아프가니스탄에서 23명의 한국인이 인질로 잡힌 지 40여 일이 지난 상황에서, 살해당하거나 석방되지 않고 남아있는 19명의 석방을 위한 협상이 급진전되고 있다는 보도가 나오고 있다. 사태가 어떻게 종결되더라도 피랍 사태 40여 일 동안 한국정부가 보였던 입장들, 이번 납치사태가 제기하는 쟁점들에 대해서 평가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지난 7월31일, 두 번째 인질이 살해되고 나서 곧 청와대, 외교통상부의 기자회견이 진행됐다. 정부는 여기서 이번 사태에 대한 자신들의 대응은 하나하나가 모두 무능과 기만으로 점철되어 있다는 점을 보여줬다. 정부는 탈레반의 포로교환이라는 요구사항에 대해서도 피랍 한 달이 되어간 이 당시에야 '공식확인'하는 등 사태가 진행될 때마다 '확인 중'이라는 말로 일관했다. 협상에서 무능을 감추기 위한 수사도 대거 동원한다. 언론에는 협상․타협 가능성을 흘리는 한편, "책임을 묻겠다"는 엄포까지 늘어놓았는데. 남한 정부가 탈레반에 책임을 묻겠다는 말은 정부 당국자 스스로도 진지하게 믿지 못할 것이다. 아프가니스탄의 미국 괴뢰 '정부'에 책임을 묻는 방식으로 책임전가도 진행되었지만 남한 정부 자신의 무능을 드러낼 뿐이다. 그런 과정에서도 시종 일관 돋보인 것은 미국의 책임을 배제해주는 '감동적인' 충성이다. 아프가니스탄 '정부'는 물론, 미국도 공식적으로 '협상은 없다'는 입장을 공공연히 밝혀왔다. 마치 故김선일 씨 납치 때 노무현이 '철군은 없다'고 곧장 대응하면서 살해를 재촉한 것을 반복이라도 하듯이 말이다. 여기서 납치 사건은 탈레반은 물론 미국도 전혀 손해 볼 것이 없는 사건이라는 점을 생각해야한다. 납치 사태의 해결에 키를 쥐고 있는 것은 미국 정부라는 걸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다. 심지어는 피랍자 가족들까지 미국대사관에 '호소'하러 가기도 했다. 그러나 미국은 현재 상태에서 해결할 의지가 별로 없는데 그것은 단지 '테러범과 협상없다'는 공허한 원칙 때문이 아니다. -이미 곳곳의 납치 사건에서 각국 정부들의 협상은 일반적인 것이다. 미국도 선례가 있으나 하려는 마음만 있으면 당장 할 수 있는 일이다. - 현재의 갈등, 즉, 탈레반의 잔인성을 부각하는 것이 미국의 '테러와의 전쟁'을 정당화하기 때문이다. 그럼 탈레반은 어떨까? 이들 역시, 자신들의 건재함과 주장을 전세계에 위성 TV로 매일 중계하고 있는 마당에 아쉬울 것이 없다. 미국과 탈레반, 양 극단주의자들의 이해가 이렇게 일치하는 사건인데다가, 이들이 사태 해결의 모든 열쇠를 쥐고 있는 마당에 남한 정부의 무능은 구조적으로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문제는 남한 정부가 이러한 자신의 무능에 대해서 책임지지는 않는 것은 물론이려니와 한 발 더 나아가 기만으로 일관해왔다는 점이다. 남한 정부의 무능은 미국의 '테러와의 전쟁'에 충실한 동맹국으로 복무해온데서 비롯된다. 독자적인 정치적 결정은 실종되고 미국의 전쟁전략이 곧 남한 정부의 결정사항이 되는 상황에서 남한 정부가 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다. 남한정부는 가장 미국에 충실했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가장 무능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처럼 정부가 아프가니스탄에서 보여준 무능은 인질협상에서의 무능이라기보다 미국에 대한 무능이라는 점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1) 따라서 정부가 기자회견을 통해서 한계를 간접적으로나마 인정하는 뉘앙스를 풍기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무능이 노무현 정부가 자초한 것이라는 점에서, 게다가 이에 대한 일말의 반성도 없는 데 이르면 정부의 태도는 ‘기만'이 된다. 국민들의 생명을 지키지도 못하고, 그것의 해결을 요구하지도 못하는 전적인 무능. 더구나 자신의 무능을 폭로하는 자리에서조차 미국의 책임을 끝까지 배제하는 태도는 정부의 기만이 매우 ’의식적‘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따라서 이러한 과정에서 사태의 해결을 위해 미국이 나서야한다는 반전운동의 진단과 주장은 정당했다. 그러한 요구가 이 사태의 원인은 물론 해결되지 않는 원인 또한 미국의 전쟁에 있다는 것과 남한 정부의 '묻지마 한미동맹'에 있다는 점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2. 두 번째 인질이 살해된 당일, 곧장 정부가 한 또 하나의 일은 뉴코아 농성장에 공권력을 투입한 것이다. 필수공익사업장도 아닌 민간사업장, 국가기간산업도 아닌 사업장에 공권력을 두 번이나 투입한 것도 이례적이지만 그 '신속한 집행'도 더 이례적이다. 남한 정부는 아프가니스탄에서의 완전한 무능을 국내에서 '만회'라도 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아프가니스탄 피랍자들은 구할 수 없지만 비정규직을 탄압하는 이랜드-뉴코아 악질자본은 구해줄 수 있다는 뜻일까? 정부가 '인질 살해에 책임을 묻겠다'는 것이 황당한 공문구라는 것을 아는 대중들은, 그들이 비정규직 노동자들에 대해서는 전혀 '공문구'를 날리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하고 있다. 게다가 정부는 탈레반에 대해서는 (자신이 불가능하고 무능하기 때문에) 무력사용을 배제하지만, 비정규직에 대해서는 그것을 ‘당장’ 사용한다. 신중함의 시차조차 없다. 이것은 오히려 역설적으로 비정규직 문제를 전혀 해결할 능력이 없는, 오직 쉽게 사용가능한 폭력을 통해서만 '해결'할 수 있는 남한 정부의 무능을 더욱 부각시킨다. 3. 마지막으로 한가지. 이번 사태의 핵심적인 원인들이 미국이 벌인 전쟁과, 이에 무조건 동조한 남한 정부에 있다는 것을 명확히 하는 것은 사태가 어떻게 정리되더라도 매우 중요한 과제다. 그것이 바로 정세적 개입이다. 따라서 피랍자들이 아프가니스탄에 간 것이 문제라는 식(여러가지 판본의 피랍자 책임론)으로, 정부의 책임을 면제하고 정부의 무능을 실천적으로 비호하는 입장들은 아무런 가치가 없을 뿐 아니라 매우 위험하다. 그러나, 다소 논쟁적일 수도 있는 하나의 쟁점을 피해갈 수 있을까? 피랍자들에게 어떤 '책임'을 묻는 것은 당연히 부당하다고 해도, 그렇다고 해서 남한 보수 기독교회의 책임까지 면제되는 것일까라는 점이다. 피랍자들과 보수 기독교회(라는 제도와 사회적 세력)은 구별해야한다고 생각한다. 또한 피랍자들이 살아 돌아와야 하는 이유는 그들의 아프가니스탄에서의 '단기선교' 혹은 '봉사'활동이 정당하거나 혹은 부당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전적으로 그것과 무관하게 그/녀들이 인간으로서, 조건없는 인권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을 부정한다는 점에서 탈레반의 납치행태도 정당성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은 물론이다.) 피랍자들을 아프가니스탄에 보낸 샘물교회는 기독교 우익 NGO운동의 중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고, 기독교 뉴라이트 등과 관계를 가져왔다. 이들의 기독교 뉴라이트 단체는 신지호 등이 주도하는 또 다른 뉴라이트 단체인 <자유주의연대>와 통합을 논의하기도 했다. 강남과 신도시 중산층을 기반으로 하는 신흥 대형교회들은 적극적으로 뉴라이트 운동을 통해 정치화되고 있다. 미국에 대해 비판의식이 전무한 것은 시청 앞 성조기 집회를 주도하는 순복음교회, 금란교회 등과 같은 <한국기독교총연합(한기총)> 주류의 선발대형교회와 다를 바 없다. 다만 보다 중산층의 구미에 맞게 보다 세련된 정치적 포지션을 유지할 뿐이다. 이들 기독교 보수주의 진영, 복음주의이자 근본주의자들인 이들의 행태는 비판적으로 보아야한다. 이들이 공격적인 '해외선교'에 나서고 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여기에는 국내에서의 선교가 한계에 봉착하고 있다는 측면도 작용한다. 그럼 이들이 아프가니스탄과 같은 곳에서 하는 '선교'의 본질이 무엇인가? 미국 선교사들이 한국전쟁 이후에 남한에서 '선교'하면서 반공발전주의에 기반한 이들 기독교 교회를 '부흥'시킨 것과 같은 역할을 자임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미국이 수행하는 ‘테러와의 전쟁’의 유기적인 일부, CNN과 더불어 이데올로기 전쟁의 일부라고 할 만하다. 따라서 오히려 보수주의 기독교가 수행하는 '해외 선교활동''에 대한 비판은 제기될 필요가 있으며 피랍자들은 그것과 무관하게 살아 돌아와야 한다는 점을 요구해야하지 않을까? 이런 비판이 없는 상황에서 사태의 원인의 일부인 보수주의 기독교 교회들은 '피해자 책임론은 안 된다'는 여론, 혹은 더 정확히는 '피랍 피해당사자' 뒤에 숨어서 자신들도 '피해자'인 척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 보수 기독교 교회는 오히려 23명을 사지로 내몬 가해자의 유기적 일부다. 이들은 지금도 일말의 회개와 반성이 없다. <한기총>에서 어떤 진지한 반성적인 입장이 나왔다는 이야기도 듣지 못했다. 이번 사태를 겪으면서 대중들의 이들 보수주의 기독교에 대한 반감은 숨김없이 표출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역설적으로 ‘납치피해자=보수 기독교 교회’로 더욱 강하게 등치되고 있다. 극단적인 네티즌들은 '반-기독교 근본주의'라고 할 만큼 극단적인 (상징적) 폭력을 자행하고 있고, 그 폭력은 성격에 상관없이 모든 기독교 교회와 신자들을 겨냥하고 있다. 사태의 원인의 일부인 보수주의 주류 기독교 교회들과 그렇지 않은 기독교 교회를 구별할 수 있는 비판, 책임묻기가 불가능해졌기 때문에 생기는 비극중 하나이다. 이미 그러한 은폐구도, 등치구조가 공고해진 지금 시점에서 다른 비판이 실제로 가능할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그것이 비록 늦어서 이제는 그것을 대중적으로 제기하는 것이 실천적으로는 너무 위험하고 불가능한 문제제기라고 해도, 사태를 이성적으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사고에서 그것을 억압해서는 안 된다. 그런 점에서 기독교 선교는 이번 사태와 전혀 관계가 없다는 주장들에 대해서도 그 순진함을 의심해볼 필요도 있다. 예를 들어 <다함께>는 "근본적인 문제는 ‘종교’가 아니라 제국주의적 침략과 억압"이라면서 이슬람 근본주의와 기독교 근본주의 모두 원인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슬람 근본주의에 관용적인 이들이 기독교 근본주의에도 역시 그런 것일까? 그러나 그 제국주의를 이데올로기적으로 정당화하는 것이 그런 극단의 이데올로기들이라는 점을 인식해야한다. 제국주의 지배 세계체제의 유기적 일부인 종교적 근본주의에게만 면죄부를 주는 방식은 이해하기 힘들다. 모든 지배체제와 같이 제국주의 역시 그것을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 없이는 작동하지 않는다. 이런 비판이 필요한 이유는 미국의 '테러와의 전쟁'에 동행해서 그것을 지지하는 미국의 근본주의-복음주의 기독교, 그리고 여기에 동조하는 남한의 근본주의-복음주의 기독교는 어떤 반성도 없이 자신들의 방식으로 ‘테러와의 전쟁’에 계속 복무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다음 비극을 또 다른 방식으로 예고할 수밖에 없다. ※ 이 글이 최종적으로 작성된 시점은 아프가니스탄 인질이 석방되기 전인 8월 25일 경이다. 1)탈리브(Ṭālib)는 원래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의 마드라사(이슬람 전통학교) 학생들을 가리키는 단어로써, 그 복수형 단어가 '탈리반'(혹은 탈레반)이다. 서방 언론에 이들의 존재가 알려지면서 ‘탈레반’이 이들을 지칭하는 고유명사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이 글에서는 기존의 언론보도를 통해 한국에 ‘탈레반’이란 명칭이 더 널리 알려져 있으므로 ‘탈리반’ 대신 ‘탈레반’으로 표기했다.본문으로
민족통일에서 경제통합으로? 햇볕정책을 주창한 김대중 정부는 '통일' 담론을 '경제통합' 담론으로 변형했다. 김대중 정부는 평화공존과 경제통합을 '사실상의 통일'로 규정하고 장기적인 경제통합 시나리오를 개발했다. 그 첫 번째 단계는 남북 무역자유화로서, 북한을 노동집약적 저부가가치 제조업 생산기지(가공무역형 수출기지)로 전환하여 남한 경제의 하위 파트너로 통합한다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김대중 정부는 한ㆍ미 역할 분담론과 정경분리 정책을 제시했다. 즉 군사안보 대응은 미국이 주도하고 남한은 경제협력과 사회문화교류를 주도하며, 정치정세의 변화와 관계없이 남한 기업의 대북한 교역 및 투자를 장려한다는 것이었다. 한국의 구상은 남측의 자본주의적 사회경제 질서의 확장을 분명하게 지지했다. 따라서 이러한 전략은 평화공존이라기보다는, 그러한 외피를 통하여 '2국가 1체제'와 같이 사실상 (흡수)통일의 효과를 획득하고자 하는 시도로 이해될 수 있다. 또한 김대중 정부는 이러한 방안이 북한의 붕괴에 따른 단시간 내의 흡수통일이 수반하는 '불필요한' 경제적, 정치적 비용을 절약한다며 보수 층의 지지를 얻어내고자 했다. 남한 정부가 주장하는 국가연합의 본질은 바로 여기에 있다. 현재 2차 남북정상회담을 앞둔 노무현 정부의 전략은 본질적으로 김대중 정부의 확장판이다. 한반도 핵 위기와 동북아시아 평화와 같은 의제는 기본적으로 미국의 정책적 의지와 6자 회담의 틀이 규정할 수밖에 없으므로, 한국이 독자적으로 운신할 수 있는 폭은 극히 제한되어 있다. 따라서 남한 정부가 어느 정도 주도성을 발휘할 수 있는 분야는 경제협력과 대북 지원이다. 이러한 조건은 남북 경제 공동체 건설을 강조한 노무현 대통령의 2007년 8ㆍ15 경축사에서 자연스럽게 드러났다. 그러나 이번 경축사에는 중대한 강조점의 변화가 있다. 노무현 축사는 경제협력이 "남쪽에게는 투자의 기회, 북쪽에는 경제회복의 계기가 되어야 한다."고 밝혔다. 즉 더 이상 남북 경제협력 사업이 남한의 일방적인 지원에 머물러서는 안 되며, 남한 기업에게도 '비즈니스'로서 상업성이 보장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북한이 자본주의 비즈니스의 논리를 이해하고, 이에 걸맞은 파트너로 바뀌어야 한다는 것을 함축하는 것이기도 하다. 남북경협 20년 남북교역이 시작된 첫 번째 계기는 1988년 7월 7일 노태우 대통이 발표한 <민족자존과 통일번영을 위한 특별선언>(7ㆍ7 선언)이었다.1) 선언은 6개항의 실천 방향을 제시했는데, 남북교역에 관해서는 "남북 간 교역의 문호를 개방하고, 남북 간 교역을 민족내부교역으로 간주한다."(3항), "남북 모든 동포의 삶의 질을 향상시킬 수 있도록 민족경제의 균형적 발전이 이루어지기를 희망하며, 비군사적 물자에 대해 우리 우방들이 북한과 교역을 하는 데 반대하지 않는다."(4항)고 명시했다.2) 같은 해 10월 <남북물자교류에 대한 기본 지침서>가 발표되면서, 남북 간의 '시범적' 성격의 교역이 이뤄지기 시작했다. 그 후 1990년 8월 '남북교류협력에 관한 법률'과 '남북협력기금법'이 제정되면서 민간 기업을 중심으로 물자교류와 위탁가공교역이 확대되기 시작했다. 남북교역 규모는 부침이 있었으나 1991년 1억 달러 수준에서 1999년 3억 달러 수준으로 증가세를 보였다. 하지만 2000년 남북정상회담이 이뤄진 후 정부 주도의 남북경협이 본격화되었다. 3대 경협사업이라고 불리는 철도ㆍ도로 연결 사업, 개성공단 사업, 금강산 관광 사업이 궤도에 오르게 되었다. 또한 식량, 비료를 비롯한 대북 지원이 본격 추진되었다. 현재 남북경협 사업은 대체로 상업성 거래와 비상업성 거래로 분류된다. 상업성 거래는 교역(일반교역, 위탁가공교역)과 좁은 의미의 경제협력사업(개성공단, 금강산, 기타 민간)으로 나뉘고, 비상업성 거래는 대북 지원(민간, 정부)과 사회문화협력 등으로 나뉜다. 이러한 분류법에 비추어 볼 때, 지난 10년 간 남북경협의 전체 규모는 96년 2.4억 달러에서 2006년 13.5억 달러로 5배 이상 증가했다. 같은 기간 중 상업성 거래(교역+경제협력사업)는 2.5억 달러에서 9.3억 달러로 3.7배 증가한 반면, 대북 지원은 0.16억 달러에서 4.2억 달러로 26배나 증가했다. 현재 남북경협은 북한 대외무역의 30% 이상을 점하고 있으며, 남북경협을 제외한다면 북한이 경제계획을 수립할 수 없는 수준에 이르렀다고 평가되고 있다. 예를 들어 남한이 북한에 지원하는 연간 50톤 규모의 쌀은 북한의 쌀 생산량의 25%에 이르며, 북한의 외부 식량 도입량(약 103만 톤)의 49%에 달한다. 또한 연간 20~30만 톤 규모의 비료 지원이 북한의 농업 증산에 미치는 효과도 고려해야 한다. 반면 남한의 입장에서 볼 때 현재 10억 달러 수준의 상업성 거래는 남한의 수출액 규모가 3000억 달러에 이르는 것과 비교해 볼 때 '비즈니스' 차원에서는 거의 무의미하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남북경협을 주도하는 세력은 직접적인 경제적 이득은 적지만, 남한 경제의 현실적, 잠재적 위협이 되는 '북한 리스크'를 관리한다는 측면에서 남한 경제의 신뢰성을 높이는 데 간접적으로 기여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현재의 대북 경협사업이 임가공 사업을 중심으로 이뤄져서 남북 분업구조 창출 효과가 아직은 미약하지만, 장기적으로 꾸준한 경협 사업이 실질적인 분업구조를 형성하고 남북 경제통합을 이끌어낼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그들은 남한은 북한의 제조업 부문에 관심을 보이고 있으며, 특히 개성공단 사업과 2006년 북한과 체결한 '경공업 및 지하자원 개발협력 방안을 주목하고 있다. 남한의 대북 경협 전략 1) 개성공단 개성공단은 2004년 12월 255명 북 측 노동자로 시작했으나 2007년 5월 현재 32개 사 1만 5천 명의 노동자가 고용되어 있다. 개성공단의 생산액과 수출액도 꾸준히 증가하여 2007년 1/4분기 생산액이 3,560만 달러에 이르며(1년 사이에 2.8배 증가), 수출액이 838만 달러에 이른다. 현재 한국 정부는 한ㆍ미 자유무역협정(FTA) 협상 결과를 두고, 개성공단 제품이 특례원산지 규정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며 자신감을 보이고 있다.3)한국 정부는 개성공단 사업의 확대가 북한에게 '비즈니스'의 현실을 실감케 하는 시금석이 될 것이고, 실제로 북한 내에서 개성공단을 정점으로 분업관계를 확장시켜 나갈 수도 있으리라 믿고 있다. 2) 경공업 및 지하자원 개발협력 또한 2006년 남북경제협력추진위원회가 합의한 '경공업 및 지하자원 개발협력'에 따르면, 남측은 8,000만 달러 상당의 경공업 원자재를 북한에 제공하고 북한은 그 중 3%를 아연과 마그네시아크링커로 상환하며, 나머지는 연 이자율 1%, 5년 거치 10년 상환 조건으로 지불하기로 했다. 그런데 현재까지는 개발협력 방안에 대해 남과 북이 동상이몽을 꾸고 있는 듯하다. 북한은 경공업 원부자재를 남한으로부터 차관 형식으로 구매한 것이므로, 품목이나 사용방식은 북한이 결정할 사항이라는 입장을 보였다 (북한이 현재 주로 요구하는 품목은 섬유, 신발, 비누 등이다). 반면 남한은 제공되는 원부자재의 효율적인 활용이 이뤄지기 위해서는 남북 간의 긴밀한 협력이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래서 남한이 고려하고 있는 것은 개발협력 방안을 확장하여 북한의 경공업 분야 생산능력을 확충하고 북한의 수출산업화 지원으로 발전시키자는 것이다. 이를 위한 구체적인 방안으로 제시되는 것은 ① 원부자재의 효율적 활용을 위해서 남측 기업이 보유하고 있는 유휴설비를 제공하거나 소규모 신규투자를 통해 설비를 제공하는 방식으로 임가공 사업을 확대한다. ② 특히 섬유, 의류산업의 기반을 확충하여 수출전략산업으로 육성한다. 이를 위해 에너지, 노동력 공급이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평양ㆍ남포 지역에 집약적인 생산지대를 창설한다. ③ 사업 초기부터 가능한 한 남북한 합작ㆍ합영을 실행하고, 북한 내 다른 기업과의 생산적 연계를 모색하여, 남한의 기술과 경영기법 등을 실제로 전파한다. 또한 인력훈련부터 해외마케팅 지원까지 종합적인 지원책을 마련한다. 현재 일각에서는 남북 간의 도로ㆍ철도 연결을 통해 새로운 실크로드를 열자거나, 북한의 풍부한 지하자원(석유 포함?)을 개발하여 한반도 번영을 꾀하자고 주장하고 있으나, 실제로 추진되는 사업은 이와 거리가 멀다. 현재 북한의 전 지역을 연결하는 교통망, 전력 망을 구축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재원이 필요하지만, 국제적인 협력이 없는 상태에서 이를 실현하는 것은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불필요하다는 판단을 내리고 있다. 그래서 일단은 남한이 보기에 '비즈니스'로서 성공 가능성이 있는 지역을 중심으로 교통망, 전력망 등을 구축해 나가는 것이 타당하다고 보고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대규모 지하자원 개발이 경제성이 있으려면, 해당 지역의 전력, 철도, 항만 등 인프라가 뒷받침되어야 하는데, 현재 조건에서는 상업적 타당성이 매우 낮기 때문에 일단은 북한의 임가공 제조업을 중심으로 경제개발지원에 나서고 있다. 3) 남북한 경제협력강화약정 최근 삼성경제연구소가 제시한 남북한 경제협력강화약정(CEPA) 역시 이러한 전망을 공유하고 있다. 북한의 비핵화가 진전되면 대북 반출품 제약, 수출시장 제약이 크게 완화되어서 남북경협이 활성화될 공산이 높은데, 이럴 경우 남북 간의 무관세 거래에 대해 WTO 회원국의 제소가 빈발할 수 있다. 따라서 남북 간의 무관세 거래를 국제적으로 인정받기 위한 방안이 필요한데, 그 중에서 CEPA가 가장 확실한 방안이라는 것이다. 이는 1국 내 2개 독립관세구역 간의 자유무역협정(FTA)으로서, 중국 내륙과 홍콩의 CEPA 사례를 모델로 삼고 있다.4) 삼성경제연구소는 CEPA를 통해 남북경제통합의 첫 번째 단계로 진입하자고 제안한다. 그들이 제시하는 장기적인 시나리오는 ‘자유로운 물자이동(자유무역단계) → 대외무역정책 및 대내경제정책의 상호조율(제도통합단계) → 화폐단일화(화폐통합단계) → 인적자원의 자유로운 이동(인적통합단계)’이다. 특히 CEPA 잠정협정 10년 동안 북한경제구조를 재편하여 북한을 수출지향형 경제구조로 전환하는 게 핵심이라고 제시한다. 4) 대북 경제지원 또한 대북 경제지원의 성격도 앞으로 변화되어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북한 식량난 이후 대북 지원은 주로 인도적 지원 또는 긴급 지원(식량, 의약품 등 구호물자) 위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인도적 지원만으로는 빈곤에서 탈피할 수 없고, 오히려 원조 의존적 체질을 정착시킬 수 있으므로, 이를 해당 국가의 사회경제적 개발을 돕는 '개발지원'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것이다.5) 그런데 긴급지원의 경우는 지원 물품이 취약층에게 제대로 전달되는지 확인하는 모니터링이 이뤄진다면 (북한은 이러한 모니터링 활동에도 강한 거부감을 표시했다), 개발지원의 절차와 조건은 훨씬 더 까다롭다. IMF와 세계은행 등이 요구하는 이행조건은 해당국이 특정한 정책과 제도의 채택을 강제하는 '정책 조건'과 개발사업의 추진절차와 방식을 규정하는 '프로세스 조건'으로 구성되며, 이러한 조건이 충족되지 않는다면 개발지원이 중단되기도 한다. 따라서 북한에 대한 개발 지원이 대규모로 이뤄질 수 있느냐의 문제는 북한의 개혁ㆍ개방을 향한 정책적 의지와 비례한다는 것이다. 결국 대북 개발지원이 시작된다면, 이는 북한에 대한 '양보'가 아니라 북한의 체제 전환을 위한 세련된 대북 정책으로 작동할 것이다. 북한의 경제의 해체와 딜레마 북한은 이미 1980년대 중반 이후 개혁ㆍ개방을 위한 여러 시도를 하였다. 1984년에는 '8ㆍ3 인민소비품 창조운동'을 개시하여 각 기업과 가정 별로 계획경제 영역 바깥에서 부업생산을 장려했다 (1989년에 장려 조치가 한층 더 강화되었다). 또한 1984년 합영법을 제정하여 주로 조총련계 기업들을 중심으로 외자를 유치했다(그러나 이 당시의 사업은 대체로 실패한 것으로 판명되었다). 1991년에는 라진ㆍ선봉 자유경제무역지대를 설치했고, 1992년 4월 개정 헌법에서는 외국인의 경제활동을 보장하고 기업 합영과 합작을 장려한다는 구절을 삽입했고, 곧 신무역체계도 도입하였다. 그러나 3차 7개년 계획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북한은 1993년부터 향후 2~3년 간을 '사회주의 건설의 완충기'로 설정하고, '무역, 농업, 경공업 제일주의'를 채택하였다. 그러나 북한 정부의 개혁 정책이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북한의 계획경제 시스템이 자생적으로 퇴화, 해체하는 경향이 극심하게 나타났다. 북한은 1990-98년 9년 연속 마이너스 성장을 경험했고, 1995년부터 북한의 국가예산이 그 이전에 비해 1/2로 감소했다. 이에 따라 북한은 1996년 1월 '고난의 행군 정신'을 주장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과거 북한이 제시한 공식통계에 비추어 볼 때 왜 이렇게 갑작스러운 붕괴 사태가 발생했는지 납득하기 어렵다. 그러나 북한의 '성장회계'는 극히 과장된 것이고 본질적으로 허구적이라는 게 최근의 분석 결과다. 공식통계에 따른 분석은 북한이 성장률이 하락하는 '데드-크로스'를 경험한 것은 1970년대 후반이며, 최근에는 이미 1960년 초반 이를 겪었다고 보는 의견도 있다.6) 따라서 북한경제의 위기는 갑작스러운 것이라기보다는 누적된 효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1990년대를 거치면서 북한의 계획경제는 완전히 마비되었다. 북한의 중앙, 도, 지방이 관리하는 기업소들이 차례로 붕괴하기 시작했고, 현재에도 공장가동률이 대략 20~30% 정도로 추정된다.7) 이에 따라 북한 주민들은 생존을 위해 합법, 반합법, 불법적인 다양한 방식으로 원시적인 형태의 시장 경제적 활동에 참가하게 되었고, 이것이 다시 계획경제를 위축시키는 악순환이 나타나고 있다. 현재 북한 시장에서 유통되고 있는 공산품은 대다수가 중국산이고, 이른바 '보따리 장사꾼'이 기관이나 회사로부터 상품을 인수하여 전국의 매대로 유통시킨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상품유통이 경제회복으로 연결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예컨대 상품유통을 통해 약간의 부를 축적한 자들이 공장을 인수, 운영하여 자본축적을 통한 성장을 추구하는 것과 같은 일(상업자본에서 산업자본으로 전환?)이 거의 발생하지 않고 있다. 또한 1990년대 이후로 북한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대규모 수해 사태는 북한의 경제 현실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계기다. 현재 북한은 전 국토가 민둥산으로 바뀌고 있다. 북한은 2/3이 산이며, 산림황폐화는 수자원 관리의 위기와 수해로 직결된다. 그렇지만 북한은 경제 정체와 위기 상황에 직면하여 5대 자연개조 사업의 하나로서 1976년부터 가능한 모든 산을 옥수수 밭으로 개간하기 위한 '다락밭' 조성 사업을 펼쳤다. 또한 취사와 난방을 위한 산림자원 채취가 급증하고 불법 화전인 뙈기 농사가 성행했다. 외화벌이를 위한 원목수출도 급증하여 북한의 원목수출은 1990년 14,000㎥에서, 1997년 410,000㎥으로 수십 배 이상 증가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은 토사유실과 침적에 따른 하수면 상승을 동반했고, 결국 반복적인 홍수 피해를 유발했다. 이러한 대혼란의 와중인 2002년에 북한은 '7ㆍ1 경제관리 개선 조치'를 발표했다 (기업자율권 확대, 독립채산제 강화, 가격ㆍ임금 체계의 현실화). 2003년 3월에는 농민시장을 종합시장으로 확대하여 합법적으로 취득 가능한 품목을 식량, 소비재 공산품으로 확대했다. 이러한 북한의 개혁 조치는 자생적인 시장지향적 변화에 대한 대응으로 이해할 수 있다. 북한의 공식적인 목표는 비공식 부문을 축소하고 공식 부문을 정상화하여 경제적 통제력을 회복하는 것이다. 하지만 현재는 계획경제와 시장경제의 병존이 불가피함을 인정한 상태에서 시장경제 방식의 활동을 적절히 통제하려는 의지를 보이고 있다. 북한 당국도 7ㆍ1 조치를 발표할 때 '실리 사회주의'라는 새로운 이념을 전파하면서 "이제는 국가가 생활을 다 보장해 주는 것이 아니라 각자가 일한 만큼 버는 것이다.", "낡은 경험에 사로잡히지 말고 사업방법을 대담하게 개선하라."고 말했다. 그러나 7ㆍ1 경제개선 조치가 발표된 후에도 공장가동률이 정체상태를 벗어나지 못한 것으로 보이며, '경공업 및 지하자원 개발협력'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의류, 신발, 비누 등 최소한의 소비재 경공업에 필요한 원자재마저 남한의 지원을 받아야 되는 상황으로 보인다. 또한 농업 부문은 금번 수해로 추가적인 식량 지원이 필요한 것처럼, 잦은 수해와 농업기반의 유실로 큰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북한이 직면한 또 하나의 문제는 '시장경제' 요소를 도입하는 개혁이 반드시 경제성장으로 귀결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1968년 헝가리의 '신경제 메커니즘'이나 1985~87년 이후 소련의 페레스트로이카는 현재 북한이 추진한 개혁조치보다 훨씬 더 광범위한 개혁조치를 구사했지만 경제회생을 가져다주지 못했다. 이로 인해 오히려 기존 메커니즘과 새로운 메커니즘의 충돌이 발생하거나, 소득격차 확대와 인플레이션 심화로 인한 대중소요가 나타나기도 했다 ('개혁 후 붕괴 시나리오'). 바로 여기에 북한의 딜레마가 있다. 북한의 대외의존과 경제개혁의 상관성 남북경협은 다양한 곳에서 다양한 안을 제시하고 있으나, 아직까지 구체적인 진전이 매우 더딘 편이다. 그러나 경제협력 사업은 남한의 일방적인 지원이 아니라 남한의 기업에게도 비즈니스로서의 상업성이 보장되어야 한다는 견해가 점점 더 힘을 얻고 있다. 이를 위해서는 북한이 자본주의적 비즈니스 논리를 이해하고, 일방적인 지원을 바라는 태도를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북한이 변화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한다면, 남한의 경제력 규모와 국제적 관심도를 고려할 때 북한을 좀 더 폭넓은 개혁, 개방으로 유도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도 늘고 있다. 이에 따라 남한의 다양한 기관에서는 중장기적으로 북한이 국제경제기구(WTO, IMF 등)에 가입해야 하며, 국제경제 규범과 정책에 맞추어 내부 개혁을 서둘러야 한다고 조언하고 있다. 그들이 던지는 궁극적인 질문은 이렇다. '북한은 정치적 안정과 인민의 경제적 피폐 상황을 맞바꾼 현재의 상태를 유지할 것인가, 아니면 정치적 불안정성을 어느 정도 감수하더라도 과감한 개혁ㆍ개방으로 북한 경제를 되살리고 인민의 생활상을 개선할 것인가?' 그러나 여기서 국제통화기금(IMF)과 동유럽 경제의 관계를 한 번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폴란드와 헝가리에서는 경제위기가 닥친 1980년대 초반부터 IMF의 활동이 시작되었고, 1980년대 말 본격적인 경제개혁을 시작한 대부분의 동유럽 국가는 IMF의 지도를 받게 되었다.8) 당시 IMF의 압력 하에 추진된 개혁은 ① 가격자유화, 임금자유화, 무역자유화, 기업경영 자율화 ② 거시경제적 안정화 ③ 국가기업의 사유화 ④ 시장경제 운영을 위한 제도적 장치와 기구의 확립 등이었다. 이는 1997년 외환위기를 통해 한국이 직접 체험한 것과 본질적으로 동일하며, 저개발국의 경제발전을 위해 도출된 1989년의 워싱턴 컨센서스와도 동일하다. 세계경제개혁을 주도하는 자들은 저개발 국가든, 기존 사회주의 국가든, 아니면 선진국이든 간에 각 국에게 적합한 특수한 경제정책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보편적으로 바람직한 단 하나의 경제정책(신자유주의!)이 있다는 관점을 공유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개혁이 경제적 생산의 감소, 인플레이션과 실업의 증가, 계층 간 경제적 격차의 확대라는 파괴적인 효과를 낳은 것 역시 분명한 사실이다.9) 워싱턴 컨센서스와 IMF 경제개혁의 입안자들은 이러한 부정적 효과는 경제의 체질 개선을 위한 일시적 혼란일 뿐이고, 이러한 어둠의 터널을 뚫고 나오면 건전한 경제성장이 가능하다는 논리를 펴고 있다. 그러나 과연 그들이 주장이 사실이냐는 문제는 세계의 민중운동이 세계적 불평등성의 증대와 빈곤의 심화를 고발하는 것처럼, 그 어느 때보다도 더 명백하다. 현재 남북 경제협력 사업은 1단계로 북한을 남한 경제의 '후배지'로 육성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으며, 북한경제의 통합 과정을 통해 세계경제체제로의 편입을 유도하겠다는 장기적 전망을 제시하고 있다. 나아가 남한의 여러 기관들은 이러한 전망이 북한이 선택해야 할 '유일한' 대안인 것처럼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더욱 심각한 문제는 북한이 점점 더 대외 의존적인 경제구조로 바뀌고 있고, 남한과 국제경제기구의 지원 없이 버틸 수 없는 상태로 악화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북한 경제의 해체와 퇴화냐, 신자유주의 개혁이냐는 질문은 서로 다른 모습의 재앙을 강요하는 것일 뿐이다. 1)1988년은 3월 29일 서울대 총학생회장 선거 유세장에서 김중기 후보가 6ㆍ10남북청년학생회담을 제안하고, 4월 4일 김일성 대학 학생위원회가 동의한다는 답신을 보내오면서 남북 청년학생 교류가 사회적 현안으로 부상하고, 통일운동이 급격히 확산되던 때였다. 노태우 정부의 7ㆍ7 선언은 이러한 저변의 흐름에 대한 일종의 대응책이었다. 그러나 노태우 정부의 7ㆍ7 선언은 단순히 우발적인 사건은 아니었고, 1970년 대 이래 미국의 동아시아 정책의 변화를 반영했다. 임필수,「미완의 교차승인 10년, 미완의 논쟁 10년」, 『사회진보연대』, 2000년 8월호. 본문으로 2) 나머지 4개항은 다음과 같다. ① 정치인ㆍ경제인ㆍ언론인ㆍ문화예술인ㆍ체육인ㆍ학자 및 학생 등 남북동포간의 상호교류를 적극 추진하며, 해외동포들이 자유로이 남북을 왕래하도록 문호를 개방한다. ② 남북적십자회담이 타결되기 이전이라도 인도주의적 견지에서 가능한 모든 방법을 통해 이산가족들간에 생사ㆍ 주소 확인, 서신왕래, 상호방문 등이 이루어지도록 적극 주선ㆍ지원한다. ⑤ 남북 간의 소모적인 경쟁ㆍ대결 외교를 지양하고, 북한이 국제사회에 발전적 기여를 할 수 있도록 협력하며, 또한 남북대표가 국제무대에서 자유롭게 만나 민족의 공동이익을 위하여 서로 협력할 것을 희망한다. ⑥ 한반도의 평화를 정착시킬 여건을 조성하기 위하여 북한이 미국ㆍ일본 등 우리 우방과의 관계를 개선하는 데 협조할 용의가 있으며, 한국도 소련ㆍ중국을 비롯한 사회주의 국가들과의 관계개선을 추구한다는 것 등이다.본문으로 3) 한국 정부는 한ㆍ미 자유무역협정(FTA) 협상 초기부터 개성공단 제품의 특례원산지 문제를 '역외가공지역'(outward processing zone) 인정으로 해결하려고 했다. 양국의 최종 타결 내용을 요약하면, 양국 대표로 구성되는 '한반도역외가공지역위원회'에서 수립한 '일정 기준'을 충족하는 북한 내 특정 지역이 역외가공지역으로 지정되면, 그 지역 내에서 생산된 제품은 한국 산으로 표기되며 한국 산과 동일한 대우를 받게 된다. 여기서 일정한 기준이란 ① 한반도 비핵화를 위한 '진전', ② 역외가공지역이 남북 관계에 미치는 영향, ③ 역외가공지역이 일반적인 환경기준, 노동기준, 임금 관행, 영업과 경영관행에 부합하는지 여부 등이다. 위원회는 한ㆍ미 FTA 협정이 발효된 후 1주년 기념일에 회합하여 활동을 시작하기로 했다. 한국 정부가 협상 결과를 긍정적으로 해석하는 근거는 ① 비핵화의 '달성'이 아니라 '진전'이라고 표현되었다는 점, ② 일반적인 환경, 노동기준에 부합하는지 판단할 때 '현지[개성] 경제와 그 밖의 다른 곳[북한 내 다른 지역]의 일반적인 상황과 관련 국제규범을 적절하게 참고한다.'는 조항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즉 ILO 기준만으로 판단하는 게 아니라 북한의 특수한 조건을 고려할 수 있다는 해석이다. 따라서 한국 정부는 6자 회담을 통해 한반도 해빙 무드가 조성되고, 개성공단 지역이 이미 다른 북한 지역에 비해 노동조건이 최상이고 앞으로도 개선될 수 있다는 점에서 자신감을 내비치고 있다. 본문으로 4) 삼성경제연구소는 남북한 경제협력강화약정남북관계 역시 국가 간 관계가 아니라 '통일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형성된 잠정적 특수 관계'(1991년 남북기본합의서)이므로 국가 간 협정(agreement)이 아니라 약정(arrangement) 형식으로 체결이 가능하며, 이는 '교류협력에 관한 부속합의서'(2002년)와 '4대 경협합의서' 등을 대폭 보완하고, 각종 경제협력 합의서를 통합함으로써 실행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주요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① 상품교역에 대해서는 무관세거래 원칙을 재천명하고, 남북 간 상품교역에 관해 원칙적으로 제한을 폐지하며, 국제전략물자통제체제 상의 대북 제재의 완화를 선도한다. ② 서비스교역에 관해서는 북한이 긴급히 필요로 하는 에너지, 물류, 의류 분야부터 단계적으로 서비스 시장을 개방한다, 한국이 필요로 하는 건설 사업에 대해 우선 혜택을 부여한다. ③ 무역/투자 편리화에 관해서는 기존의 4대 경협합의서와 원산지규정합의서를 부속 문서로 채택한다. 본문으로 5) 통상 긴급 지원은 식량, 의약품 등 구호물자 지원을 뜻하나, 개발 지원은 해당 국가의 사회경제적 개발을 돕는 지원을 뜻한다. 또한 개발지원에는 무상 지원뿐만 아니라 장기저리차관과 같은 대출도 포함된다 (물론 장기저리가 아니더라도 차관을 구하기 힘든 국가에 차관을 제공하는 것 자체가 지원의 성격을 지닐 때가 있다). 또한 개발지원을 제공하는 주체에는 특정 정부(양자간 지원)나 국제기구(다자간 지원)뿐만 아니라 NGO, 민간기업도 포함된다. 현재 국제 공적개발지원(ODA)의 추세와 부문별 비중을 보면 사회적 인프라와 행정적 인프라에 대한 투자의 비중이 경제적 인프라와 비슷하거나 더 높다. 사회 분야에는 교육, 보건의료, 인구, 수자원 공급, 위생 등이 포함되며, 행정 분야는 행적 시스템에 대한 지원을 뜻한다. 이는 아무리 좋은 경제인프라와 생산시설이 갖춰지더라도 '인적 자원'의 상태가 나쁘다면 무용지물에 불과할 것이며, 행정 시스템이 비효율적이면 투자가 낭비로 전환된다는 인식 때문이다. 한편 경제적 인프라에는 교통, 통신, 에너지 등이다. 이외에도 생산 분야 즉 농업, 광업, 제조업에 대한 지원도 이뤄진다. (생산 분야에 대한 개발지원은 농업 부문 투자를 중시하는데, 이는 개발지원 대상국이 대체로 농업국가이기 때문이다) 본문으로 6) 윤소영, 『마르크스의 '경제학 비판'과 소련 사회주의』, pp. 27~29, 공감, 2002. 대개 서구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북한의 주체사상/개인숭배에 대해서는 경악을 표시했지만 북한의 경제건설 성과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입장이었다(안드레아스 크라체크 외, 『서구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본 북한사회』, 중원문화, 1990). 그러나 이는 북한 경제에 대한 부족한 정보와 단편적인 경험에 의존한 것이기 때문에 현재 시점에서는 분명한 재검토가 필요하다. 본문으로 7) '한국은행에 따르면 2006년 북한의 철강, 시멘트, 비료 부문의 공장 가동률은 각각 18.3%, 46.1%, 11.8%로 추정된다. (차문석, 홍빈, 『현 시기 북한의 경제운영 실태에 관한 연구』, 진보정치연구소, 2007). 중요한 군수 공장이 가동되고 있으나, 특정 시간대에 전력과 에너지를 공급하여 생산이 이뤄진다고 한다 (예를 들어 ○월 ○일~○일까지 전력을 공급하고 그 시일에 맞춰서 생산을 감행하는 방식). 본문으로 8) 북한은 1971년 서방 각 국으로부터 대규모 차관을 도입하고 대 서방 무역 확대를 추진했지만, 1977년 이후 외채 상환 불능 상태에 빠지면서 대 서방 경제교류를 중단했다. 그 결과 1978년 2차 7개년 계획에서는 '주체 경제', '자력갱생 원칙'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1980년대 합영법 제정은 대외 경제관계 없이 생산성 증가나 국민경제 향상이 어렵다는 북한의 인식을 반영한다. 본문으로 9) 사회주의 개혁의 가장 비극적인 결말을 보여주는 사례는 아마도 유고 내전일 것이다. 미셀 초스도프스키의 「유고연방의 해체와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신식민지화」(『빈곤의 세계화』, 당대, 1998)는 유고의 경제개혁에 대한 IMF의 개입이 어떻게 유고 내전을 불러일으켰는지를 상세히 추적한다. 1990년 1월, IMF의 잠정조정안(SBA)과 세계은행의 구조조정차관(SALⅡ) 아래에서 유고의 일괄 경제개혁조치가 개시되었다. 외채를 갚기 위해서 연방세입의 재조정이 요구되었고, 예산삭감은 공화국 정부와 자치주로 전달되어야 할 지불금을 중지시켰고, 이는 분리주의에 기름을 부었다. 본문으로
민족통일에서 경제통합으로? 햇볕정책을 주창한 김대중 정부는 '통일' 담론을 '경제통합' 담론으로 변형했다. 김대중 정부는 평화공존과 경제통합을 '사실상의 통일'로 규정하고 장기적인 경제통합 시나리오를 개발했다. 그 첫 번째 단계는 남북 무역자유화로서, 북한을 노동집약적 저부가가치 제조업 생산기지(가공무역형 수출기지)로 전환하여 남한 경제의 하위 파트너로 통합한다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김대중 정부는 한ㆍ미 역할 분담론과 정경분리 정책을 제시했다. 즉 군사안보 대응은 미국이 주도하고 남한은 경제협력과 사회문화교류를 주도하며, 정치정세의 변화와 관계없이 남한 기업의 대북한 교역 및 투자를 장려한다는 것이었다. 한국의 구상은 남측의 자본주의적 사회경제 질서의 확장을 분명하게 지지했다. 따라서 이러한 전략은 평화공존이라기보다는, 그러한 외피를 통하여 '2국가 1체제'와 같이 사실상 (흡수)통일의 효과를 획득하고자 하는 시도로 이해될 수 있다. 또한 김대중 정부는 이러한 방안이 북한의 붕괴에 따른 단시간 내의 흡수통일이 수반하는 '불필요한' 경제적, 정치적 비용을 절약한다며 보수 층의 지지를 얻어내고자 했다. 남한 정부가 주장하는 국가연합의 본질은 바로 여기에 있다. 현재 2차 남북정상회담을 앞둔 노무현 정부의 전략은 본질적으로 김대중 정부의 확장판이다. 한반도 핵 위기와 동북아시아 평화와 같은 의제는 기본적으로 미국의 정책적 의지와 6자 회담의 틀이 규정할 수밖에 없으므로, 한국이 독자적으로 운신할 수 있는 폭은 극히 제한되어 있다. 따라서 남한 정부가 어느 정도 주도성을 발휘할 수 있는 분야는 경제협력과 대북 지원이다. 이러한 조건은 남북 경제 공동체 건설을 강조한 노무현 대통령의 2007년 8ㆍ15 경축사에서 자연스럽게 드러났다. 그러나 이번 경축사에는 중대한 강조점의 변화가 있다. 노무현 축사는 경제협력이 "남쪽에게는 투자의 기회, 북쪽에는 경제회복의 계기가 되어야 한다."고 밝혔다. 즉 더 이상 남북 경제협력 사업이 남한의 일방적인 지원에 머물러서는 안 되며, 남한 기업에게도 '비즈니스'로서 상업성이 보장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북한이 자본주의 비즈니스의 논리를 이해하고, 이에 걸맞은 파트너로 바뀌어야 한다는 것을 함축하는 것이기도 하다. 남북경협 20년 남북교역이 시작된 첫 번째 계기는 1988년 7월 7일 노태우 대통이 발표한 <민족자존과 통일번영을 위한 특별선언>(7ㆍ7 선언)이었다.1) 선언은 6개항의 실천 방향을 제시했는데, 남북교역에 관해서는 "남북 간 교역의 문호를 개방하고, 남북 간 교역을 민족내부교역으로 간주한다."(3항), "남북 모든 동포의 삶의 질을 향상시킬 수 있도록 민족경제의 균형적 발전이 이루어지기를 희망하며, 비군사적 물자에 대해 우리 우방들이 북한과 교역을 하는 데 반대하지 않는다."(4항)고 명시했다.2) 같은 해 10월 <남북물자교류에 대한 기본 지침서>가 발표되면서, 남북 간의 '시범적' 성격의 교역이 이뤄지기 시작했다. 그 후 1990년 8월 '남북교류협력에 관한 법률'과 '남북협력기금법'이 제정되면서 민간 기업을 중심으로 물자교류와 위탁가공교역이 확대되기 시작했다. 남북교역 규모는 부침이 있었으나 1991년 1억 달러 수준에서 1999년 3억 달러 수준으로 증가세를 보였다. 하지만 2000년 남북정상회담이 이뤄진 후 정부 주도의 남북경협이 본격화되었다. 3대 경협사업이라고 불리는 철도ㆍ도로 연결 사업, 개성공단 사업, 금강산 관광 사업이 궤도에 오르게 되었다. 또한 식량, 비료를 비롯한 대북 지원이 본격 추진되었다. 현재 남북경협 사업은 대체로 상업성 거래와 비상업성 거래로 분류된다. 상업성 거래는 교역(일반교역, 위탁가공교역)과 좁은 의미의 경제협력사업(개성공단, 금강산, 기타 민간)으로 나뉘고, 비상업성 거래는 대북 지원(민간, 정부)과 사회문화협력 등으로 나뉜다. 이러한 분류법에 비추어 볼 때, 지난 10년 간 남북경협의 전체 규모는 96년 2.4억 달러에서 2006년 13.5억 달러로 5배 이상 증가했다. 같은 기간 중 상업성 거래(교역+경제협력사업)는 2.5억 달러에서 9.3억 달러로 3.7배 증가한 반면, 대북 지원은 0.16억 달러에서 4.2억 달러로 26배나 증가했다. 현재 남북경협은 북한 대외무역의 30% 이상을 점하고 있으며, 남북경협을 제외한다면 북한이 경제계획을 수립할 수 없는 수준에 이르렀다고 평가되고 있다. 예를 들어 남한이 북한에 지원하는 연간 50톤 규모의 쌀은 북한의 쌀 생산량의 25%에 이르며, 북한의 외부 식량 도입량(약 103만 톤)의 49%에 달한다. 또한 연간 20~30만 톤 규모의 비료 지원이 북한의 농업 증산에 미치는 효과도 고려해야 한다. 반면 남한의 입장에서 볼 때 현재 10억 달러 수준의 상업성 거래는 남한의 수출액 규모가 3000억 달러에 이르는 것과 비교해 볼 때 '비즈니스' 차원에서는 거의 무의미하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남북경협을 주도하는 세력은 직접적인 경제적 이득은 적지만, 남한 경제의 현실적, 잠재적 위협이 되는 '북한 리스크'를 관리한다는 측면에서 남한 경제의 신뢰성을 높이는 데 간접적으로 기여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현재의 대북 경협사업이 임가공 사업을 중심으로 이뤄져서 남북 분업구조 창출 효과가 아직은 미약하지만, 장기적으로 꾸준한 경협 사업이 실질적인 분업구조를 형성하고 남북 경제통합을 이끌어낼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그들은 남한은 북한의 제조업 부문에 관심을 보이고 있으며, 특히 개성공단 사업과 2006년 북한과 체결한 '경공업 및 지하자원 개발협력 방안을 주목하고 있다. 남한의 대북 경협 전략 1) 개성공단 개성공단은 2004년 12월 255명 북 측 노동자로 시작했으나 2007년 5월 현재 32개 사 1만 5천 명의 노동자가 고용되어 있다. 개성공단의 생산액과 수출액도 꾸준히 증가하여 2007년 1/4분기 생산액이 3,560만 달러에 이르며(1년 사이에 2.8배 증가), 수출액이 838만 달러에 이른다. 현재 한국 정부는 한ㆍ미 자유무역협정(FTA) 협상 결과를 두고, 개성공단 제품이 특례원산지 규정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며 자신감을 보이고 있다.3)한국 정부는 개성공단 사업의 확대가 북한에게 '비즈니스'의 현실을 실감케 하는 시금석이 될 것이고, 실제로 북한 내에서 개성공단을 정점으로 분업관계를 확장시켜 나갈 수도 있으리라 믿고 있다. 2) 경공업 및 지하자원 개발협력 또한 2006년 남북경제협력추진위원회가 합의한 '경공업 및 지하자원 개발협력'에 따르면, 남측은 8,000만 달러 상당의 경공업 원자재를 북한에 제공하고 북한은 그 중 3%를 아연과 마그네시아크링커로 상환하며, 나머지는 연 이자율 1%, 5년 거치 10년 상환 조건으로 지불하기로 했다. 그런데 현재까지는 개발협력 방안에 대해 남과 북이 동상이몽을 꾸고 있는 듯하다. 북한은 경공업 원부자재를 남한으로부터 차관 형식으로 구매한 것이므로, 품목이나 사용방식은 북한이 결정할 사항이라는 입장을 보였다 (북한이 현재 주로 요구하는 품목은 섬유, 신발, 비누 등이다). 반면 남한은 제공되는 원부자재의 효율적인 활용이 이뤄지기 위해서는 남북 간의 긴밀한 협력이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래서 남한이 고려하고 있는 것은 개발협력 방안을 확장하여 북한의 경공업 분야 생산능력을 확충하고 북한의 수출산업화 지원으로 발전시키자는 것이다. 이를 위한 구체적인 방안으로 제시되는 것은 ① 원부자재의 효율적 활용을 위해서 남측 기업이 보유하고 있는 유휴설비를 제공하거나 소규모 신규투자를 통해 설비를 제공하는 방식으로 임가공 사업을 확대한다. ② 특히 섬유, 의류산업의 기반을 확충하여 수출전략산업으로 육성한다. 이를 위해 에너지, 노동력 공급이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평양ㆍ남포 지역에 집약적인 생산지대를 창설한다. ③ 사업 초기부터 가능한 한 남북한 합작ㆍ합영을 실행하고, 북한 내 다른 기업과의 생산적 연계를 모색하여, 남한의 기술과 경영기법 등을 실제로 전파한다. 또한 인력훈련부터 해외마케팅 지원까지 종합적인 지원책을 마련한다. 현재 일각에서는 남북 간의 도로ㆍ철도 연결을 통해 새로운 실크로드를 열자거나, 북한의 풍부한 지하자원(석유 포함?)을 개발하여 한반도 번영을 꾀하자고 주장하고 있으나, 실제로 추진되는 사업은 이와 거리가 멀다. 현재 북한의 전 지역을 연결하는 교통망, 전력 망을 구축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재원이 필요하지만, 국제적인 협력이 없는 상태에서 이를 실현하는 것은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불필요하다는 판단을 내리고 있다. 그래서 일단은 남한이 보기에 '비즈니스'로서 성공 가능성이 있는 지역을 중심으로 교통망, 전력망 등을 구축해 나가는 것이 타당하다고 보고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대규모 지하자원 개발이 경제성이 있으려면, 해당 지역의 전력, 철도, 항만 등 인프라가 뒷받침되어야 하는데, 현재 조건에서는 상업적 타당성이 매우 낮기 때문에 일단은 북한의 임가공 제조업을 중심으로 경제개발지원에 나서고 있다. 3) 남북한 경제협력강화약정 최근 삼성경제연구소가 제시한 남북한 경제협력강화약정(CEPA) 역시 이러한 전망을 공유하고 있다. 북한의 비핵화가 진전되면 대북 반출품 제약, 수출시장 제약이 크게 완화되어서 남북경협이 활성화될 공산이 높은데, 이럴 경우 남북 간의 무관세 거래에 대해 WTO 회원국의 제소가 빈발할 수 있다. 따라서 남북 간의 무관세 거래를 국제적으로 인정받기 위한 방안이 필요한데, 그 중에서 CEPA가 가장 확실한 방안이라는 것이다. 이는 1국 내 2개 독립관세구역 간의 자유무역협정(FTA)으로서, 중국 내륙과 홍콩의 CEPA 사례를 모델로 삼고 있다.4) 삼성경제연구소는 CEPA를 통해 남북경제통합의 첫 번째 단계로 진입하자고 제안한다. 그들이 제시하는 장기적인 시나리오는 ‘자유로운 물자이동(자유무역단계) → 대외무역정책 및 대내경제정책의 상호조율(제도통합단계) → 화폐단일화(화폐통합단계) → 인적자원의 자유로운 이동(인적통합단계)’이다. 특히 CEPA 잠정협정 10년 동안 북한경제구조를 재편하여 북한을 수출지향형 경제구조로 전환하는 게 핵심이라고 제시한다. 4) 대북 경제지원 또한 대북 경제지원의 성격도 앞으로 변화되어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북한 식량난 이후 대북 지원은 주로 인도적 지원 또는 긴급 지원(식량, 의약품 등 구호물자) 위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인도적 지원만으로는 빈곤에서 탈피할 수 없고, 오히려 원조 의존적 체질을 정착시킬 수 있으므로, 이를 해당 국가의 사회경제적 개발을 돕는 '개발지원'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것이다.5) 그런데 긴급지원의 경우는 지원 물품이 취약층에게 제대로 전달되는지 확인하는 모니터링이 이뤄진다면 (북한은 이러한 모니터링 활동에도 강한 거부감을 표시했다), 개발지원의 절차와 조건은 훨씬 더 까다롭다. IMF와 세계은행 등이 요구하는 이행조건은 해당국이 특정한 정책과 제도의 채택을 강제하는 '정책 조건'과 개발사업의 추진절차와 방식을 규정하는 '프로세스 조건'으로 구성되며, 이러한 조건이 충족되지 않는다면 개발지원이 중단되기도 한다. 따라서 북한에 대한 개발 지원이 대규모로 이뤄질 수 있느냐의 문제는 북한의 개혁ㆍ개방을 향한 정책적 의지와 비례한다는 것이다. 결국 대북 개발지원이 시작된다면, 이는 북한에 대한 '양보'가 아니라 북한의 체제 전환을 위한 세련된 대북 정책으로 작동할 것이다. 북한의 경제의 해체와 딜레마 북한은 이미 1980년대 중반 이후 개혁ㆍ개방을 위한 여러 시도를 하였다. 1984년에는 '8ㆍ3 인민소비품 창조운동'을 개시하여 각 기업과 가정 별로 계획경제 영역 바깥에서 부업생산을 장려했다 (1989년에 장려 조치가 한층 더 강화되었다). 또한 1984년 합영법을 제정하여 주로 조총련계 기업들을 중심으로 외자를 유치했다(그러나 이 당시의 사업은 대체로 실패한 것으로 판명되었다). 1991년에는 라진ㆍ선봉 자유경제무역지대를 설치했고, 1992년 4월 개정 헌법에서는 외국인의 경제활동을 보장하고 기업 합영과 합작을 장려한다는 구절을 삽입했고, 곧 신무역체계도 도입하였다. 그러나 3차 7개년 계획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북한은 1993년부터 향후 2~3년 간을 '사회주의 건설의 완충기'로 설정하고, '무역, 농업, 경공업 제일주의'를 채택하였다. 그러나 북한 정부의 개혁 정책이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북한의 계획경제 시스템이 자생적으로 퇴화, 해체하는 경향이 극심하게 나타났다. 북한은 1990-98년 9년 연속 마이너스 성장을 경험했고, 1995년부터 북한의 국가예산이 그 이전에 비해 1/2로 감소했다. 이에 따라 북한은 1996년 1월 '고난의 행군 정신'을 주장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과거 북한이 제시한 공식통계에 비추어 볼 때 왜 이렇게 갑작스러운 붕괴 사태가 발생했는지 납득하기 어렵다. 그러나 북한의 '성장회계'는 극히 과장된 것이고 본질적으로 허구적이라는 게 최근의 분석 결과다. 공식통계에 따른 분석은 북한이 성장률이 하락하는 '데드-크로스'를 경험한 것은 1970년대 후반이며, 최근에는 이미 1960년 초반 이를 겪었다고 보는 의견도 있다.6) 따라서 북한경제의 위기는 갑작스러운 것이라기보다는 누적된 효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1990년대를 거치면서 북한의 계획경제는 완전히 마비되었다. 북한의 중앙, 도, 지방이 관리하는 기업소들이 차례로 붕괴하기 시작했고, 현재에도 공장가동률이 대략 20~30% 정도로 추정된다.7) 이에 따라 북한 주민들은 생존을 위해 합법, 반합법, 불법적인 다양한 방식으로 원시적인 형태의 시장 경제적 활동에 참가하게 되었고, 이것이 다시 계획경제를 위축시키는 악순환이 나타나고 있다. 현재 북한 시장에서 유통되고 있는 공산품은 대다수가 중국산이고, 이른바 '보따리 장사꾼'이 기관이나 회사로부터 상품을 인수하여 전국의 매대로 유통시킨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상품유통이 경제회복으로 연결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예컨대 상품유통을 통해 약간의 부를 축적한 자들이 공장을 인수, 운영하여 자본축적을 통한 성장을 추구하는 것과 같은 일(상업자본에서 산업자본으로 전환?)이 거의 발생하지 않고 있다. 또한 1990년대 이후로 북한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대규모 수해 사태는 북한의 경제 현실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계기다. 현재 북한은 전 국토가 민둥산으로 바뀌고 있다. 북한은 2/3이 산이며, 산림황폐화는 수자원 관리의 위기와 수해로 직결된다. 그렇지만 북한은 경제 정체와 위기 상황에 직면하여 5대 자연개조 사업의 하나로서 1976년부터 가능한 모든 산을 옥수수 밭으로 개간하기 위한 '다락밭' 조성 사업을 펼쳤다. 또한 취사와 난방을 위한 산림자원 채취가 급증하고 불법 화전인 뙈기 농사가 성행했다. 외화벌이를 위한 원목수출도 급증하여 북한의 원목수출은 1990년 14,000㎥에서, 1997년 410,000㎥으로 수십 배 이상 증가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은 토사유실과 침적에 따른 하수면 상승을 동반했고, 결국 반복적인 홍수 피해를 유발했다. 이러한 대혼란의 와중인 2002년에 북한은 '7ㆍ1 경제관리 개선 조치'를 발표했다 (기업자율권 확대, 독립채산제 강화, 가격ㆍ임금 체계의 현실화). 2003년 3월에는 농민시장을 종합시장으로 확대하여 합법적으로 취득 가능한 품목을 식량, 소비재 공산품으로 확대했다. 이러한 북한의 개혁 조치는 자생적인 시장지향적 변화에 대한 대응으로 이해할 수 있다. 북한의 공식적인 목표는 비공식 부문을 축소하고 공식 부문을 정상화하여 경제적 통제력을 회복하는 것이다. 하지만 현재는 계획경제와 시장경제의 병존이 불가피함을 인정한 상태에서 시장경제 방식의 활동을 적절히 통제하려는 의지를 보이고 있다. 북한 당국도 7ㆍ1 조치를 발표할 때 '실리 사회주의'라는 새로운 이념을 전파하면서 "이제는 국가가 생활을 다 보장해 주는 것이 아니라 각자가 일한 만큼 버는 것이다.", "낡은 경험에 사로잡히지 말고 사업방법을 대담하게 개선하라."고 말했다. 그러나 7ㆍ1 경제개선 조치가 발표된 후에도 공장가동률이 정체상태를 벗어나지 못한 것으로 보이며, '경공업 및 지하자원 개발협력'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의류, 신발, 비누 등 최소한의 소비재 경공업에 필요한 원자재마저 남한의 지원을 받아야 되는 상황으로 보인다. 또한 농업 부문은 금번 수해로 추가적인 식량 지원이 필요한 것처럼, 잦은 수해와 농업기반의 유실로 큰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북한이 직면한 또 하나의 문제는 '시장경제' 요소를 도입하는 개혁이 반드시 경제성장으로 귀결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1968년 헝가리의 '신경제 메커니즘'이나 1985~87년 이후 소련의 페레스트로이카는 현재 북한이 추진한 개혁조치보다 훨씬 더 광범위한 개혁조치를 구사했지만 경제회생을 가져다주지 못했다. 이로 인해 오히려 기존 메커니즘과 새로운 메커니즘의 충돌이 발생하거나, 소득격차 확대와 인플레이션 심화로 인한 대중소요가 나타나기도 했다 ('개혁 후 붕괴 시나리오'). 바로 여기에 북한의 딜레마가 있다. 북한의 대외의존과 경제개혁의 상관성 남북경협은 다양한 곳에서 다양한 안을 제시하고 있으나, 아직까지 구체적인 진전이 매우 더딘 편이다. 그러나 경제협력 사업은 남한의 일방적인 지원이 아니라 남한의 기업에게도 비즈니스로서의 상업성이 보장되어야 한다는 견해가 점점 더 힘을 얻고 있다. 이를 위해서는 북한이 자본주의적 비즈니스 논리를 이해하고, 일방적인 지원을 바라는 태도를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북한이 변화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한다면, 남한의 경제력 규모와 국제적 관심도를 고려할 때 북한을 좀 더 폭넓은 개혁, 개방으로 유도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도 늘고 있다. 이에 따라 남한의 다양한 기관에서는 중장기적으로 북한이 국제경제기구(WTO, IMF 등)에 가입해야 하며, 국제경제 규범과 정책에 맞추어 내부 개혁을 서둘러야 한다고 조언하고 있다. 그들이 던지는 궁극적인 질문은 이렇다. '북한은 정치적 안정과 인민의 경제적 피폐 상황을 맞바꾼 현재의 상태를 유지할 것인가, 아니면 정치적 불안정성을 어느 정도 감수하더라도 과감한 개혁ㆍ개방으로 북한 경제를 되살리고 인민의 생활상을 개선할 것인가?' 그러나 여기서 국제통화기금(IMF)과 동유럽 경제의 관계를 한 번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폴란드와 헝가리에서는 경제위기가 닥친 1980년대 초반부터 IMF의 활동이 시작되었고, 1980년대 말 본격적인 경제개혁을 시작한 대부분의 동유럽 국가는 IMF의 지도를 받게 되었다.8) 당시 IMF의 압력 하에 추진된 개혁은 ① 가격자유화, 임금자유화, 무역자유화, 기업경영 자율화 ② 거시경제적 안정화 ③ 국가기업의 사유화 ④ 시장경제 운영을 위한 제도적 장치와 기구의 확립 등이었다. 이는 1997년 외환위기를 통해 한국이 직접 체험한 것과 본질적으로 동일하며, 저개발국의 경제발전을 위해 도출된 1989년의 워싱턴 컨센서스와도 동일하다. 세계경제개혁을 주도하는 자들은 저개발 국가든, 기존 사회주의 국가든, 아니면 선진국이든 간에 각 국에게 적합한 특수한 경제정책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보편적으로 바람직한 단 하나의 경제정책(신자유주의!)이 있다는 관점을 공유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개혁이 경제적 생산의 감소, 인플레이션과 실업의 증가, 계층 간 경제적 격차의 확대라는 파괴적인 효과를 낳은 것 역시 분명한 사실이다.9) 워싱턴 컨센서스와 IMF 경제개혁의 입안자들은 이러한 부정적 효과는 경제의 체질 개선을 위한 일시적 혼란일 뿐이고, 이러한 어둠의 터널을 뚫고 나오면 건전한 경제성장이 가능하다는 논리를 펴고 있다. 그러나 과연 그들이 주장이 사실이냐는 문제는 세계의 민중운동이 세계적 불평등성의 증대와 빈곤의 심화를 고발하는 것처럼, 그 어느 때보다도 더 명백하다. 현재 남북 경제협력 사업은 1단계로 북한을 남한 경제의 '후배지'로 육성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으며, 북한경제의 통합 과정을 통해 세계경제체제로의 편입을 유도하겠다는 장기적 전망을 제시하고 있다. 나아가 남한의 여러 기관들은 이러한 전망이 북한이 선택해야 할 '유일한' 대안인 것처럼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더욱 심각한 문제는 북한이 점점 더 대외 의존적인 경제구조로 바뀌고 있고, 남한과 국제경제기구의 지원 없이 버틸 수 없는 상태로 악화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북한 경제의 해체와 퇴화냐, 신자유주의 개혁이냐는 질문은 서로 다른 모습의 재앙을 강요하는 것일 뿐이다. 1)1988년은 3월 29일 서울대 총학생회장 선거 유세장에서 김중기 후보가 6ㆍ10남북청년학생회담을 제안하고, 4월 4일 김일성 대학 학생위원회가 동의한다는 답신을 보내오면서 남북 청년학생 교류가 사회적 현안으로 부상하고, 통일운동이 급격히 확산되던 때였다. 노태우 정부의 7ㆍ7 선언은 이러한 저변의 흐름에 대한 일종의 대응책이었다. 그러나 노태우 정부의 7ㆍ7 선언은 단순히 우발적인 사건은 아니었고, 1970년 대 이래 미국의 동아시아 정책의 변화를 반영했다. 임필수,「미완의 교차승인 10년, 미완의 논쟁 10년」, 『사회진보연대』, 2000년 8월호. 본문으로 2) 나머지 4개항은 다음과 같다. ① 정치인ㆍ경제인ㆍ언론인ㆍ문화예술인ㆍ체육인ㆍ학자 및 학생 등 남북동포간의 상호교류를 적극 추진하며, 해외동포들이 자유로이 남북을 왕래하도록 문호를 개방한다. ② 남북적십자회담이 타결되기 이전이라도 인도주의적 견지에서 가능한 모든 방법을 통해 이산가족들간에 생사ㆍ 주소 확인, 서신왕래, 상호방문 등이 이루어지도록 적극 주선ㆍ지원한다. ⑤ 남북 간의 소모적인 경쟁ㆍ대결 외교를 지양하고, 북한이 국제사회에 발전적 기여를 할 수 있도록 협력하며, 또한 남북대표가 국제무대에서 자유롭게 만나 민족의 공동이익을 위하여 서로 협력할 것을 희망한다. ⑥ 한반도의 평화를 정착시킬 여건을 조성하기 위하여 북한이 미국ㆍ일본 등 우리 우방과의 관계를 개선하는 데 협조할 용의가 있으며, 한국도 소련ㆍ중국을 비롯한 사회주의 국가들과의 관계개선을 추구한다는 것 등이다.본문으로 3) 한국 정부는 한ㆍ미 자유무역협정(FTA) 협상 초기부터 개성공단 제품의 특례원산지 문제를 '역외가공지역'(outward processing zone) 인정으로 해결하려고 했다. 양국의 최종 타결 내용을 요약하면, 양국 대표로 구성되는 '한반도역외가공지역위원회'에서 수립한 '일정 기준'을 충족하는 북한 내 특정 지역이 역외가공지역으로 지정되면, 그 지역 내에서 생산된 제품은 한국 산으로 표기되며 한국 산과 동일한 대우를 받게 된다. 여기서 일정한 기준이란 ① 한반도 비핵화를 위한 '진전', ② 역외가공지역이 남북 관계에 미치는 영향, ③ 역외가공지역이 일반적인 환경기준, 노동기준, 임금 관행, 영업과 경영관행에 부합하는지 여부 등이다. 위원회는 한ㆍ미 FTA 협정이 발효된 후 1주년 기념일에 회합하여 활동을 시작하기로 했다. 한국 정부가 협상 결과를 긍정적으로 해석하는 근거는 ① 비핵화의 '달성'이 아니라 '진전'이라고 표현되었다는 점, ② 일반적인 환경, 노동기준에 부합하는지 판단할 때 '현지[개성] 경제와 그 밖의 다른 곳[북한 내 다른 지역]의 일반적인 상황과 관련 국제규범을 적절하게 참고한다.'는 조항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즉 ILO 기준만으로 판단하는 게 아니라 북한의 특수한 조건을 고려할 수 있다는 해석이다. 따라서 한국 정부는 6자 회담을 통해 한반도 해빙 무드가 조성되고, 개성공단 지역이 이미 다른 북한 지역에 비해 노동조건이 최상이고 앞으로도 개선될 수 있다는 점에서 자신감을 내비치고 있다. 본문으로 4) 삼성경제연구소는 남북한 경제협력강화약정남북관계 역시 국가 간 관계가 아니라 '통일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형성된 잠정적 특수 관계'(1991년 남북기본합의서)이므로 국가 간 협정(agreement)이 아니라 약정(arrangement) 형식으로 체결이 가능하며, 이는 '교류협력에 관한 부속합의서'(2002년)와 '4대 경협합의서' 등을 대폭 보완하고, 각종 경제협력 합의서를 통합함으로써 실행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주요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① 상품교역에 대해서는 무관세거래 원칙을 재천명하고, 남북 간 상품교역에 관해 원칙적으로 제한을 폐지하며, 국제전략물자통제체제 상의 대북 제재의 완화를 선도한다. ② 서비스교역에 관해서는 북한이 긴급히 필요로 하는 에너지, 물류, 의류 분야부터 단계적으로 서비스 시장을 개방한다, 한국이 필요로 하는 건설 사업에 대해 우선 혜택을 부여한다. ③ 무역/투자 편리화에 관해서는 기존의 4대 경협합의서와 원산지규정합의서를 부속 문서로 채택한다. 본문으로 5) 통상 긴급 지원은 식량, 의약품 등 구호물자 지원을 뜻하나, 개발 지원은 해당 국가의 사회경제적 개발을 돕는 지원을 뜻한다. 또한 개발지원에는 무상 지원뿐만 아니라 장기저리차관과 같은 대출도 포함된다 (물론 장기저리가 아니더라도 차관을 구하기 힘든 국가에 차관을 제공하는 것 자체가 지원의 성격을 지닐 때가 있다). 또한 개발지원을 제공하는 주체에는 특정 정부(양자간 지원)나 국제기구(다자간 지원)뿐만 아니라 NGO, 민간기업도 포함된다. 현재 국제 공적개발지원(ODA)의 추세와 부문별 비중을 보면 사회적 인프라와 행정적 인프라에 대한 투자의 비중이 경제적 인프라와 비슷하거나 더 높다. 사회 분야에는 교육, 보건의료, 인구, 수자원 공급, 위생 등이 포함되며, 행정 분야는 행적 시스템에 대한 지원을 뜻한다. 이는 아무리 좋은 경제인프라와 생산시설이 갖춰지더라도 '인적 자원'의 상태가 나쁘다면 무용지물에 불과할 것이며, 행정 시스템이 비효율적이면 투자가 낭비로 전환된다는 인식 때문이다. 한편 경제적 인프라에는 교통, 통신, 에너지 등이다. 이외에도 생산 분야 즉 농업, 광업, 제조업에 대한 지원도 이뤄진다. (생산 분야에 대한 개발지원은 농업 부문 투자를 중시하는데, 이는 개발지원 대상국이 대체로 농업국가이기 때문이다) 본문으로 6) 윤소영, 『마르크스의 '경제학 비판'과 소련 사회주의』, pp. 27~29, 공감, 2002. 대개 서구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북한의 주체사상/개인숭배에 대해서는 경악을 표시했지만 북한의 경제건설 성과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입장이었다(안드레아스 크라체크 외, 『서구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본 북한사회』, 중원문화, 1990). 그러나 이는 북한 경제에 대한 부족한 정보와 단편적인 경험에 의존한 것이기 때문에 현재 시점에서는 분명한 재검토가 필요하다. 본문으로 7) '한국은행에 따르면 2006년 북한의 철강, 시멘트, 비료 부문의 공장 가동률은 각각 18.3%, 46.1%, 11.8%로 추정된다. (차문석, 홍빈, 『현 시기 북한의 경제운영 실태에 관한 연구』, 진보정치연구소, 2007). 중요한 군수 공장이 가동되고 있으나, 특정 시간대에 전력과 에너지를 공급하여 생산이 이뤄진다고 한다 (예를 들어 ○월 ○일~○일까지 전력을 공급하고 그 시일에 맞춰서 생산을 감행하는 방식). 본문으로 8) 북한은 1971년 서방 각 국으로부터 대규모 차관을 도입하고 대 서방 무역 확대를 추진했지만, 1977년 이후 외채 상환 불능 상태에 빠지면서 대 서방 경제교류를 중단했다. 그 결과 1978년 2차 7개년 계획에서는 '주체 경제', '자력갱생 원칙'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1980년대 합영법 제정은 대외 경제관계 없이 생산성 증가나 국민경제 향상이 어렵다는 북한의 인식을 반영한다. 본문으로 9) 사회주의 개혁의 가장 비극적인 결말을 보여주는 사례는 아마도 유고 내전일 것이다. 미셀 초스도프스키의 「유고연방의 해체와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신식민지화」(『빈곤의 세계화』, 당대, 1998)는 유고의 경제개혁에 대한 IMF의 개입이 어떻게 유고 내전을 불러일으켰는지를 상세히 추적한다. 1990년 1월, IMF의 잠정조정안(SBA)과 세계은행의 구조조정차관(SALⅡ) 아래에서 유고의 일괄 경제개혁조치가 개시되었다. 외채를 갚기 위해서 연방세입의 재조정이 요구되었고, 예산삭감은 공화국 정부와 자치주로 전달되어야 할 지불금을 중지시켰고, 이는 분리주의에 기름을 부었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