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자유구역법 시행령 개정의 의미와 과제 2012년 4월 17일 ‘경제자유구역의 지정 및 운영에 관한 특별법(이하 경제자유구역법) 시행령’ 개정안이 국무회의를 통과하였다. 경제자유구역에 영리병원을 설립하는 데 필요한 요건과 허가절차를 규정하는 것이 이번 개정안의 핵심 내용이다. 당초 이번 건은 경제자유구역법 자체를 개정해야 하는 사안이었으나 영리병원 허용에 대한 부정적 여론과 사회운동의 반대로 통과가 힘들어지자 시행령을 개정하는 쪽으로 방향이 바뀌었다. 의료정책의 방향을 바꿀 수도 있는 중대한 사항을 결정하는 데 여론 수렴이나 정상적인 입법절차를 거치지 않고 편법으로 관료의 의지를 관철시킨 것이다. 이번 시행령 개정을 주도한 지식경제부는 보도자료를 통해 시행령 개정을 계기로 2002년부터 추진해온 외국의료기관 설립이 본격화될 것이며, 인천 경제자유구역(송도)에 600병상 규모로 세워질 송도국제병원이 그 시작이 될 것으로 전망했다. 영리병원 설립 문제는 인천시의 주요한 논란거리 중 하나였는데, 송영길 인천시장은 그간 영리병원 설립을 추진해왔으나 지역사회의 거센 반대에 직면해 있는 형편이다. 시장이 지역 민심을 의식하며 신중한 입장을 보이자 지경부 경제자유구역기획단장은 인천을 방문하여 빠른 결단을 내릴 것을 재촉했다. 미온적인 태도를 보일 경우 인천을 배제하고 다른 지역에서 추진하겠다는 것이다. 외국의료기관은 정말 외국인을 진료하기 위한 것일까? 시행령 개정이라는 변칙적 수단까지 동원하며 경제자유구역 내 영리병원 설립을 추진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지경부는 그 효과로 외국인 정주여건의 개선과 의료관광 활성화를 들고 있다. 하지만 외국인 정주여건 개선이 목적이라는 입장을 액면 그대로 믿기는 어렵다. 인천 경제자유구역청에 따르면 2011년 10월 현재 송도의 인구는 10만 2천명이며 이 중 외국인은 1,834명이다. 600병상 규모의 외국인 대상 의료기관이 필요하다고 보기 어렵다. 경제자유구역에 거주하는 외국인들은 현재도 국민건강보험의 적용을 받고 있다. 또한 외국인진료를 위한 의료센터(인하대 국제진료센터)가 마련되어 경제자유구역 내 외국인들의 의료접근성이 부족하다는 주장은 납득하기 어렵다. 의료관광 활성화 또한 마찬가지다. 연간 6만 명의 외국인 환자를 유치할 수 있다고 하는데 그에 대한 근거가 전혀 제시되지 않았다. 얼핏 살펴봐도 6만 명이라는 수치는 비현실적인데, 보건산업진흥원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2010년 인천지역에서 유치한 외국인 환자의 수가 2,898명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백번 양보해서 외국인을 진료할 병원이 필요하다 하더라도 그것이 영리병원 허용을 통해서 가능하다는 주장은 전혀 설득력이 없다. 국내 거주 외국인 진료와 외국인 환자 유치는 현행 시스템 하에서도 얼마든지 가능하며, 실제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외국인 진료가 정말 문제라면 질 높은 의료시스템을 마련하고 언어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인프라를 구축하면 될 일이다. 환자 입장에서 볼 때 외국의료기관의 유일한 차별점으로 규정된 것은 외국면허 소지 의사를 10% 이상 배치하도록 한 것인데, 외국면허 소지와 외국인들에 대한 질 높은 의료 사이에는 아무런 연관성이 없다. 경제자유구역 내 외국의료기관 설립의 진짜 목적은 영리병원의 전국적 허용이다 진정한 의도를 파악하기 위해 경제자유구역법의 개정 과정을 살펴보자. 2002년 경제자유구역법 제정 당시에는 외국인이 외국의 의료인을 고용하여 외국인을 진료하는 ‘외국인전용 의료기관’의 설립만이 가능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몇 번의 개정을 거치면서 내국인 진료가 허용되었고 국내 자본이 투자하여 영리병원을 설립할 수 있게 되었으며(외국인투자비율 50%가 최소요건) 내국인 의사를 90%까지 고용할 수 있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외국인전용 의료기관’이라는 애초의 취지는 유명무실해졌다. 내국인을 진료할 수 있으며, 의사의 90%가 내국인인 의료기관이라고 한다면 경제자유구역 내에 위치한다는 점을 제외하고는 기존 의료기관과 전혀 차이가 없다. 실질적으로 한국에 영리병원을 도입할 수 있게 만드는 법으로 성격이 완전히 바뀐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 지경부는 외국인 정주환경 조성 차원에서 추진되는 것일 뿐이므로 영리병원 문제와는 무관하며, 경제자유구역 내에서만 허용되기 때문에 전체 의료체계에서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이라는 입장을 밝히고 있다. 그러나 현재 경제자유구역은 인천, 부산·진해, 광양만권, 황해, 대구·경북, 새만금·군산 6개로 전국에 걸쳐 지정되어 있으며 추가로 지정할 수도 있다. 지금도 전국이 반나절 생활권으로 묶이면서, 환자들이 서울의 대형병원에 몰리고 있다. 이런 현실을 고려할 때, 이처럼 광범위한 경제자유구역에서 영리병원을 허용하게 된다면 결국 전국적 허용과 다를 바 없는 효과를 낼 것이다. 영리병원 허용이 불러올 연쇄효과 영리병원을 설립하는 법인의 목적은 투자한 자본에 대한 이윤을 얻는 것이므로 당연히 비영리병원에 비해 의료비가 비쌀 수밖에 없고 그 부담은 환자에게 돌아간다. 또한 진료의 일차적 목적이 이윤창출이므로 의료의 질이 저하된다. 이러한 사실은 이미 많은 실증적 연구를 통해서 입증되었다. 심지어 영리병원 추진 근거를 마련하기 위해 보건복지부가 보건산업진흥원에 발주한 영리병원 도입 필요성 연구에서도, 영리병원은 의료비를 증가시키고 의료인력 편중으로 중소병원의 존립을 위협할 것이라는 결과가 발표된 바 있다. 더 큰 문제는 경제자유구역 내 영리병원 허용이 보건의료체계의 공공성을 무너뜨리고, 의료이용의 불평등을 심화시키는 방아쇠가 될 수 있다는 점이다. 지금은 외국인 진료를 위한 것이라는 명분을 들고 있지만 막상 영리병원이 현실화되고 나면 내국인을 주로 진료하는 고급화된 병원이라는 것이 드러날 것이다. 이어서 실제로 외국인을 진료하는 것도 아닌데 외국인투자비율 50%, 외국면허 소지 의사 10% 등의 규정은 과도하다는 현실론을 근거로 설립요건이 완화될 가능성이 크다. 경제자유구역이 이미 폭넓게 분포하고 있으므로 영리병원이 확산되면 전체 의료계에도 영향을 미칠 것이고, 영리병원의 전면적 허용에 대한 요구가 커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영리병원은 건강보험체계를 통해 통제하기가 사실상 힘들다. 법적으로 보장된 영리병원의 이윤추구를 건강보험이 가로막고 있다고 주장할 경우 의료기관이 건강보험체계에서 이탈하는 것을 막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영리병원의 일반화와 건강보험체계로부터의 이탈이 현실화될 경우 영리병원-민간의료보험이 중산층 이상의 건강을 보장하고 비영리병원-건강보험이 나머지 부분을 담당하는 이원화된 체계가 등장할 가능성도 없지 않다. 이는 필연적으로 의료이용의 불평등을 심화시키고, 건강보험의 부실화를 초래할 것이다. 의료민영화, 의료 이용의 불평등, 건강보험의 부실화 등 영리병원 허용에 대한 우려는 결코 과장된 것이 아니다. 경제자유구역 내 ‘외국인전용 의료기관’에 대한 논의가 처음 시작될 때 이미 보건의료운동 진영에서는 영리병원 허용으로 이어질 가능성을 제기했었다. 당시 정부는 이를 허무맹랑한 억측이라고 단정했지만 10년이 지난 지금 우려했던 가능성은 모두 현실이 되었다. 게다가 이미 한미 FTA가 발효되었기 때문에 영리병원 설립 후에는 어떤 부작용이 발생해도 이를 되돌리는 것은 투자자국가제소(ISD)의 대상이 된다. 송도국제병원 설립을 막기 위한 투쟁이 절실하다 현재 상황에서는 송도에 영리병원이 현실화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지경부는 이번 시행령 개정을 통해 기대되는 효과로 송도국제병원 설립을 명시하고 있다. 송도국제병원을 설립․운영하기 위한 컨소시엄이 이미 구성되었으며(ISIH 컨소시엄: 다이와증권캐피털마켓 60%, 삼성증권·삼성물산·KT&G 40%의 지분을 가지고 있음), 인천시는 지난 3월 ISIH 컨소시엄을 우선투자협상 대상자로 선정했다. 인천경제청은 올해 말까지 사업계획 수립과 운영기관 선정을 끝내고 2015년 12월 개원을 목표로 공사를 시작하겠다고 밝히고 있다. 송도국제병원 설립은 결코 병원 하나를 짓는 문제로 가볍게 볼 수 없다. 인천 경제자유구역 내 영리병원 문제는 우리 사회에 영리병원이 현실화될지 여부를 판가름하는 중요한 시험대이기 때문이다. 의료비 상승과 건강불평등, 양극화를 심화시킬 영리병원 설립을 반드시 막아내자.
영리병원 설립을 위한 변칙적 방안, '경제자유구역 특별법 시행령' 개정을 즉각 철회하라! 2012년 4월 17일 '경제자유구역의 지정 및 운영에 관한 특별법 시행령' 개정안이 국무회의를 통과하였다. 개정안은 경제자유구역 내 영리병원을 설립하는 데 필요한 요건 및 허가절차를 담고 있다. 현재 '경제자유구역의 지정 및 운영에 관한 특별법'에는 경제자유구역 내 영리병원이 허용되어 있으나 구체적인 설립요건과 절차가 마련되지 않아 사실상 그동안 영리병원을 설립하지 못했다. 이에 새누리당 손숙미 의원 등이 설립요건과 절차를 담은 특별법 개정안을 발의했으나 시민사회운동진영의 반대로 통과되지 못하고 있었다. 정상적인 방식으로 진행이 어려워지자 지식경제부는 작년 10월 특별법 개정이 아니라 그 하위 단계인 특별법 시행령 개정을 통해 설립요건과 허가절차를 마련해 영리병원 설립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그 시행령 개정안이 4월 17일 국무회의를 통과한 것이고, 이제 대통령의 서명만 남아있다. 지식경제부는 영리병원이 경제자유구역 내에서만 허용되기 때문에 전국적 확대와 무관하다고 발표했지만, 현재 경제자유구역은 인천, 부산·진해, 광양만권, 황해, 대구·경북, 새만금·군산 6개로 전국에 걸쳐 지정되어 있으며 추가로 지정할 수도 있다. 전국 반나절 생활권으로 서울 재벌병원에 환자들이 몰려 지방 병원들이 망해가는 마당에 전국에 걸쳐 있는 경제자유구역에서 영리병원 허용은 전국적 허용과 마찬가지 효과를 낼 것이다. 물론 경제자유구역 내 외국인 진료라는 처음의 명분과 다르게 내국인 진료가 허용된 지는 오래이다. 영리병원은 돈을 투자해서 이윤을 얻는 것이 목적이다. 당연히 의료비가 증가하고 그 부담은 고스란히 환자에게 돌아온다. 영리병원 추진 근거로 활용하기 위해 보건복지부가 보건산업진흥원에 발주한 영리병원 도입 필요성 연구에서도 영리병원은 의료비를 증가시키고, 의료인력 편중으로 중소병원의 존립을 위협할 것이라는 결과가 발표된 바 있다. 결국 의료 이용의 불평등이 증가하고, 한국 보건의료체계 근간이 위협받을 것이다. 게다가 이미 한미FTA가 발효되었기 때문에 영리병원 설립이 진행되면 이러한 부작용이 발생해도 이를 되돌리는 것은 투자자국가제소의 대상이 된다. 국민 건강에 전혀 도움은 되지 않고 의료불평등만 야기할 영리병원 설립을 위해 변칙적으로 시행령을 개정한 정부를 강력히 규탄한다! 영리병원 설립을 위한 '경제자유구역 특별법 시행령' 개정을 즉각 철회하라! 국민 건강을 자본의 놀이판으로 보는 의료민영화 추진을 당장 중단하라! 2012년 4월 18일 사회진보연대
독립적 검토 절차가 약가 상승과 무관하다는 정부 주장의 기만성 지난 3월 1일 미국 제약협회는 한미 FTA 제5장(의약품)이 규정한 독립적 검토 절차를 한국 정부가 이행 법령에 제대로 반영하지 않았다는 입장을 공식 발표했다. 이에 대해 미국 무역대표부는 ‘미국은 전반적으로 만족하지만, 독립적 검토 절차 등 일부 조항에 대해서는 (이행 점검 협의에서) 우려를 표시했다. 협정 발효 뒤에도 한국 쪽이 독립적 검토 절차를 완전히 이행하도록 계속해서 압력을 가하겠다’고 밝혔다. 또 미국 무역대표부는 압력을 행사할 구체적인 방법으로 첫째, 한미 FTA에 따라 구성하는 ‘의약품 및 의료기기 위원회’에서 독립적 검토 절차에 관한 문제를 지속적으로 제기할 것이며, 둘째, 분쟁 제기를 포함한 모든 필요한 수단을 활용해 독립적 검토 절차와 관련한 두 나라의 이견을 해결할 방침이라고 설명했다. 이미 현실화되고 있는 한미 FTA 무역 분쟁 독립적 검토 절차란 의약품, 의료기기의 급여 여부나 가격 결정에 대해 제약사가 이의를 신청할 경우, 보건의료당국을 배제하고 이해당사자가 참여한 독립적 기구에서 급여와 급여액의 적정성 여부를 검토하는 제도다.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이하 심평원)에서 경제성 평가 등을 바탕으로 신약을 급여로 인정할 것인지를 결정한 후 건강보험공단에서 제약회사와 협상을 통해 가격을 결정하고 있다. 이에 보건의료 운동진영은 보건의료 당국을 배제하고 이해당사자끼리 급여 여부와 급여액을 재검토 하는 것은 부적절하며, 이는 약가를 상승시킬 우려가 있다고 주장해왔다. 그러나 관련 책임자인 외교통상부와 보건복지부는 이러한 우려를 ‘괴담’으로 일축했다. 독립적 검토 절차는 심평원의 경제성 평가 기준으로 외부 전문가가 한 번 더 평가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으로 검토 결과 자체가 구속력이 없으므로 독립적 검토절차를 통해 약가가 상승한다는 것은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미 FTA에 독립적 검토 절차의 대상을 급여와 급여액으로 명시하고 있음에도 심평원의 급여 여부 결정만을 재검토 대상으로 축소하여 설명하는 것은 명백한 거짓말이다. 또 검토 결과가 구속력이 없으므로 약가가 상승하지 않을 것이라는 발표 역시 거짓말이거나 지나치게 자의적인 해석이다. 미 무역대표부의 발표는 독립적 검토 절차로 인한 약가 상승이 결코 ‘괴담’이 아닌 현실임을 증명하고 있다. 독립적 검토 절차에 대한 분쟁 예고는 의료비 폭등의 불길한 전조 한미 FTA가 발효되기도 전에 미 무역대표부가 ‘분쟁’을 언급한 것은 한미 FTA가 가져올 험난한 미래를 예고한다. 독립적 검토 절차는 한미 FTA 보건의료분야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의약품 특허권을 강화하는 ‘의약품 허가-특허 연계 제도’와 의약품·의료기기 가격 결정시 초국적 제약회사의 권한을 강화하는 조항들은 이미 한국 의료비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의약품비를 더욱 상승시키고 의약품에 대한 정부와 국민의 통제를 어렵게 할 것이다. 민간의료보험상품의 규제 완화와 제주도·경제자유구역 내 영리병원·원격의료서비스의 개방 역시 의료비를 상승시키고 한국 보건의료체계를 점차 무너뜨릴 것이다. ‘의약품 허가-특허 연계 제도’는 특허가 만료되기 전 복제약을 시판하려면 특허권자에게 사전 통보해야 하는 제도이다. 외교통상부는 “특허권자가 특허권 침해를 주장하는 경우에만 적용되므로, 이로 인해 약값이 상승할 것이라고 예단하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의약품 허가-특허 연계 제도’가 생기면서 특허권자가 특허 침해 사항을 찾지 않거나, 특허 침해를 묵인할 가능성이 낮아지므로 값싼 복제약 생산이 줄어들어 전체 의약품비가 상승한다. 또 유효약리성분의 물질특허에 대한 무효소송에서 복제약 제약회사의 승소율이 77%에 달하는 등 특허가 엄격한 기준 없이 남발되는데도 이를 무조건 인정하고 복제약 판매를 일단 금지하므로, 특허 무효 소송에서 복제약 제약회사가 승소하더라도 지연된 시간동안 발생한 손해만큼 의약품비가 상승한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에 대한 부담으로 복제약 생산에 대한 유인이 감소하므로 역시 의약품비가 상승한다. 뿐만 아니라 한미 FTA는 특허의약품 모두를 혁신적이라고 규정하여 모든 특허의약품에 높은 약값을 줄 수 있도록 한다. 또 특허의약품·의료기기의 가격을 결정할 때 초국적 제약회사가 제시하는 급여액을 해당국이 적절히 인정하도록 하며, 비교제품보다 증가된 급여액 신청을 허용하고, 결정이 내려진 후에도 증가된 급여액을 신청할 수 있다. 추가적인 적응증에 대한 급여를 신청할 수 있으며, 의약품·의료기기의 가격산정 및 규제와 관련하여 초국적 제약회사에 의견을 제시할 기회를 제공하는 등 초국적 제약회사의 이익을 극대화하고 있다. 정부는 한미 FTA가 국민건강보험을 대상으로 하지 않는다며 국민건강보험 약화에 대한 우려 역시 ‘괴담’으로 일축한다. 그러나 한미 FTA 금융서비스장에서는 (건전성 사유 외에는) 신금융서비스에 대한 규제를 할 수 없도록 규정하고 있으므로 어떤 형태의 민간의료보험 상품에 대해서도 규제가 불가능해진다. 민간의료보험의 확대는 국민건강보험의 역할을 약화시키고 이는 다시 민간의료보험의 확대로 이어질 것이다. 이러한 악순환의 결과는 더 많은 돈을 내면서도 더 적게 보장받아서 아파도 제대로 치료받을 수 없는, 미국과 같은 민간의료보험 중심의 의료체계일 것이다. 한미 FTA는 보건의료서비스를 유보 항목(향후 규제를 강화할 수 있는 항목)으로 두었지만 ‘경제자유구역 및 제주특별자치도 특별법에 규정된 의료기관, 약국의 설치와 원격의료서비스 공급과 관련한 우대조치’는 예외로 한다. 따라서 경제자유구역을 중심으로 전국적으로 영리병원이 설립되거나 원격의료서비스가 진행되어 의료비 증가와 의료양극화의 부작용이 발생하더라도 이를 되돌릴 수 없다. 이에 대해 FTA 교섭대표는 설립된 영리병원이 국내 법령을 위반할 경우 허가를 취소할 수 있다고 동문서답을 하고 있다. 한국 보건의료의 어두운 미래, 투쟁을 조직할 때이다 정부의 궁색한 변명과는 달리, 한미 FTA가 한국 보건의료의 미래를 어둡게 한다는 점이 더욱 분명해졌다. 한미 FTA로 인한 의약품 특허권 강화와 의료비 상승, 민간의료보험의 폐해와 건강보험 약화, 한미 FTA와 맞물려 진행되는 의료민영화는 결코 ‘괴담’이 아닌 현실이다. 한미 FTA는 초국적 제약회사, 민간의료보험회사, 대형 병원자본의 배만 불려주고, 국민들을 높은 의료비에 허덕이게 만들 것이다. 복제약을 주력으로 하는 국내 제약업계는 벌써부터 한미 FTA로 인한 이윤 감소를 2만 명에 달하는 구조조정을 통해 극복하려 하고 있다. 사후대책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한미 FTA 자체가 문제인 것이다. 보건의료뿐만 아니라 농업, 공공 서비스 등 각 부문에서 나타날 문제점을 분석하고 이에 대응하기 위한 사회운동의 중장기적 대안을 준비할 때이다.
보건의료운동의 이념역사현실 -2 보건의료팀은 한국 보건의료운동의 과제와 전망을 밝히기 위한 보건의료팀의 입론을 마련하기 위해 2009년 세미나를 시작으로 2010년부터 교안을 작성하는 작업을 진행하였다. 교안의 구성은 크게 자본주의적 보건의료의 역사, 보건의료 분석의 이론, 한국 보건의료운동의 역사와 과제로 이루어진다.『사회운동』에서는 지난 1~2월호부터 총 4회에 걸쳐 그간 작성한 교안을 축약하여 연재한다(축약되지 않은 교안 원본은 사회진보연대 자료실에 게시함). 이번 호에는 두 번째 파트를 연재한다. 기획연재 1 I. 자본주의적 보건의료의 역사 1. 자본주의의 발전과 19세기 보건의료 2. 법인자본주의 발전과 20세기 보건의료 3. 한국보건의료체계의 역사 :1945년부터 1989년까지 기획연재 2 II. 보건의료 분석의 이론 1. 자본주의 사회에서 질병의 원인 2. 자본주의적 의료 분석 3. 생태학적 관점 4. 페미니즘적 관점 기획연재 3 III. 남한 보건의료운동의 역사 1. 보건의료의 신자유주의적 재편과 대안세계화 운동 2. 남한 보건의료운동의 시작과 발전 3. 남한의 신자유주의적 재편과 보건의료운동의 한계 기획연재 4 4. 신자유주의에 맞서는 보건의료운동의 모색 5. 보건의료운동의 현 정세와 과제 [기획연재 2] 보건의료 분석의 이론 1. 자본주의 사회에서 질병의 원인 건강과 질병 그리고 의료에 관한 두 가지 주요한 인식이 존재해왔다. 사회적유물론적 인식과 임상적개인주의적 인식은 노동자계급과 자본가계급의 대립적 이익을 반영하면서 보건의료의 이론과 실천에서 두 가지 주요한 조류를 이루었다. 엥겔스(Engels)는 『영국 노동자계급의 상태』에서 장티푸스, 결핵, 구루병의 병인학과 역학을 상세하게 분석했으며, 의학적 개입만으로는 그러한 질병들이 해결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질병을 사회적 생산관계와 그 관계가 낳은 계급구조에 연관시켰다. 그는 노동자계급의 영양상태 및 주거환경과 감염성 질병의 상관관계를 지적했으며 계급 간 영아사망률의 차이, 작업환경과 질병의 관계를 조사했다. 문제는 자본주의에 내재하기 때문에 실질적인 해결은 자본주의의 지양을 필요로 했다. 엥겔스의 영향을 받은 비르효(R. Virchow)는 발진티푸스의 유행에 대한 해결책으로 토지개혁과 소득재분배, 주거개선, 기타 사회적 프로그램을 요구했다. 그는 인구의 건강을 증진하기 위한 개혁은 사회의 지배적인 계급관계를 위협한다는 점을 인식하고 있었다. 엥겔스와 비르효의 사회적유물론적 입장은 마르크스주의적 보건의료 분석의 기원을 이룬다. 이들의 입장은 건강과 질병의 사회적 원인과 기원을 정의하고, 이를 사회의 권력관계와 관련시켰다. 반면 지배계급은 이러한 입장을 사회 질서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했다. 대신 질병의 원인을 박테리아와 같이 개인적 차원에서 일어나고 미시적으로 관찰 가능한 요소에서 찾으려는 입장을 지지했다. 이로 인해 현미경을 통한 미시적 탐구에 초점이 맞춰지면서 거시적사회적 조건은 무시되었다. 질병에 대한 개입역시 미시적 원인을 제거하는 것을 목표로 하게 되면서 임상적개인적 의료가 형성되며, 병원조직은 이를 완벽하게 구현하게 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질병의 원인을 사회적 생산관계와 계급구조에서 찾는다면, 노동과 건강의 관계에 대한 분석이 중요해진다. 주류적 입장에서 노동은 환경적인 문제로 제시된다. 이로부터 도출되는 개입전략은 노동자가 병리적 요인에 노출되는 빈도를 줄이는 것이다. 이것은 개별 노동자와 환경, 양자 모두를 결정하는 사회관계에 대한 이해를 심각하게 저해하는 개인과 환경이라는 이분법을 재생산한다. 또 다른 입장은 노동을 노동자의 욕구와 기대를 충족할 수 있게 하는 소득과 같은 자원의 원천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여기에서는 활동이자 사회관계로서의 노동이 등장하지 않으며, 시민은 노동자라기보다는 소비자로 인식되고 정의된다. 아이어(Eyer)와 카라섹(Karasek)은 마르크스주의의 영향을 받아 앞의 두 전통을 비판하는 작업을 수행했다. 이들은 건강과 질병을 사회의 조직화에 의해 결정되는 것으로 간주했다. 사회의 조직화 과정은 스트레스(아이어)와 노동과정에 대한 노동자의 통제 정도(카라섹)를 통해 건강과 질병을 결정한다. 이 작업은 건강과 질병의 총체성에 초점을 맞추고, 그러한 총체성을 생산관계와 결합시킨다. 다른 마르크스주의 연구자들은 노동을 사회적 생활의 조직자이자 사회적 모순의 구체적인 표현으로 간주했다. 나바로(Navarro)는 생산의 세계에서 개인이 점하는 위치(계급)가 소비교환분배정당화의 세계에서의 위치를 결정할 뿐만 아니라 건강을 결정한다고 보았다. 산업보건안전 문제에 초점을 맞추면서 마르크스주의 보건연구의 주요한 주제인 작업장의 변화가 건강에 미치는 영향과 그에 대한 국가의 대응을 분석하는 연구를 결합할 수 있었다. 산업보건안전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노동자계급과 직접적인 관계를 형성하는 것을 가능하게 만든 분야였다. 2. 자본주의적 의료 분석 가. 권력관계의 총체로서 의료 의료는 항상 특정한 생산양식 내에 접합되어 있다. 따라서 의료 일반에 대해 말할 수 없으며 봉건제적 의료, 자본주의적 의료, 또는 공산주의적 의료에 대해 말해야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역사 유물론적 분석은 특정한 의료형태 내부의 이데올로기적정치적경제적 수준에 대한 연구를 포함해야 한다. 달리 말하면, 의료는 여러 다른 부분들로 분리될 수 있는 도구가 아니다. 따라서 의료를 자립적 권력으로 간주하고 사후적으로만 지배계급에 의해 다양한 방식으로 활용되는 것으로 파악하는 도구주의적 인식을 경계해야 한다. 계급은 처음부터 의료 내부에 위치하며 의료의 결정과정에 개입한다. 의료에 대한 도구주의적 시각은 의료를 다양한 이익집단들(의사, 제약회사, 보험회사)로 구성된 것으로 파악하는 분석에서 발견된다. 이러한 분석은 의료에서의 집단적 투쟁의 일련의 규칙, 가치, 파라미터를 정의하는 비가시적 행위자들을 무시한다. 또한 의료 분석을 가시적인 행위자와 개인의 갈등에 관한 분석으로 축소하는데, 가시적인 행위자가 계급관계 내에서 투쟁하고 있는 계급의 한 집단이라는 사실을 무시한다. 도구주의적 시각의 또 다른 예는 의료를 우선적배타적으로 자본가계급의 필요에 따라 결정되는 것으로 파악하는 입장에서 발견된다. 의료는 부르주아지가 통제하는 도구로 간주되며 노동자계급은 의료의 ‘외부’에 존재하는 것으로 인식된다. 이러한 입장이 갖는 한계는 첫째, 계급투쟁이 의료 외부에서 일어나는 것으로 간주된다는 점, 둘째, 의료가 자본축적과 정당화라는 기능을 최대화하기 위해 부르주아지에 의해 활용되는 도구로 간주된다는 점, 셋째, 노동자계급은 단지 불만족스러워서 더 많은 의료서비스를 요구하거나 만족스러운 상태로만 간주된다는 점이다. 이러한 이분법적 사고는 노동자계급이 사회질서를 정당한 것으로 여기지 않지만, 현존질서 이외에 어떠한 대안도 발견하지 못하기 때문에, 또는 그것을 능가할 수 있는 물리력을 갖고 있지 못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봉기하지 않는 상태일 가능성은 배제하고 있다. 물론 국가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단순히 부르주아지의 의지의 결과인 것은 아니다. 부르주아지의 의료지배는 부르주아지만이 전적으로 행사하는 권력이 아닌 일련의 권력관계 내에서 이루어진다. 의료를 자본주의적 의료 또는 부르주아적 의료로 정의하는 것은 부르주아가 지배적인 계급투쟁의 과정에서 의료가 결정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의료지식행위제도는 계급관계와 계급투쟁을 핵심으로 하는 권력관계의 총체다. 마르크스주의적 분석에서 미국 의료의 진화는 미국 자본주의 진화의 일부로 간주된다. 따라서 의료의 법인화, 즉, 금융과 법인자본이 자금관리소유의료서비스의 점유 등에 깊숙이 관여하는 현상은 예측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의료에 대한 도구주의적 시각은 법인화를 의료에서의 새로운 권력집단, 예를 들어 법인기업의 출현으로 정의한다. 이들은 의료의 진화를 자본주의의 발전과 분리해서 사고함으로써 법인화가 왜 발생했는가를 설명하지 못하며, 예기치 못한 것으로 간주한다. 나. 자본주의적 의료의 이중적 기능 자본주의적 의료는 이중적 기능을 지닌다. 사회집단의 건강과 질병에 대한 관리와 치료라는 어떤 생산양식에서도 필요한 기능과 노동자계급과 대중에 대한 통제의 기능이다. 두 가지 기능은 단순히 병존하는 것이 아니라 필요의 기능을 통해서 통제의 기능이 작동하는 것이다. 즉, 자본주의적 의료는 효과가 있기 때문에 통제의 기능을 확보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또한 통제의 기능이 필요의 기능을 형성한다. 의료는 사회적 분업에서 그것이 차지하는 위치로 인해 자본가계급이 지배적인 지배·피지배의 계급관계를 재생산하기 때문에 자본주의적이다. 의료가 자본주의적 계급관계를 정당화하는 기능을 한다는 것에 대해 나바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의료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산과 소비과정에 대한 지배수단에 의해서 결정되는 기본적으로 집단적이며 따라서 정치적인 문제가 개인적인 치료방안으로 해결될 수 있다는 그릇된 의식을 창출한다. 즉, 의료는 정치적인 문제를 탈정치화하는 기능을 한다. 집단적인 대응을 필요로 하는 문제를 개인적인 문제인 것처럼 제시하는 이러한 역할이 의료의 이데올로기적 기능, 우리 사회 계급관계에 대한 정당화 기능이다. 의료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의료전문직이 아니라 부르주아지다. 의료에서의 지배·피지배 관계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사회적 생산관계에서 의료의 위치를 이해해야 한다. 의료전문직의 쁘띠 부르주아적 성격은 그 계급적인 기원과 구성위계지위수입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적 의료가 요구하는 의료전문직의 역할에서 비롯된 것이다. 따라서 의료의 계급적 성격은 의료전문직의 구성을 바꾼다고 해서 바뀌지 않는다. 그들은 개인의 의지와 무관하게 자본주의적 의료의 이중적 기능을 재생산한다. 상징적으로 말하면, 의료전문직은 의료의 관리자다. 부르주아지의 지배는 언제나 의료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 것인가를 최종심에서 결정한다. 이러한 지배는 의료행위나 제도뿐만이 아니라 의료지식의 생산에서도 나타난다. 따라서 자본주의적 의료는 근본적인 치료(노동과정과 계급관계에 대한 개입)를 하지 않고, 사후적인 관리로써 대증적 치료만을 할 뿐이다. 다. 의료의 위기 의료에 대한 인식의 차이는 의료의 위기에 대한 인식의 차이로도 나타난다. 서구에서 의료의 위기는 대체로 인구의 건강 증진에 조응하지 않는 의료비 지출의 급격한 증대로 개념화된다. 이러한 현상에 대한 해석 중 하나는 문제의 근원이 의료의 산업화에 있다고 본다. 의료기술의 진화 자체의 결과로 보는 입장이 있고, 의료전문직이 의료를 조작하고 유해한 성장을 촉진한다고 보는 입장이 있다. 그러나 나바로는 의료가 위기에 빠졌을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의 위기의 일부로 복지국가도 위기에 빠졌다고 지적한다. 즉, 의료의 위기는 의료제도에 반영된 자본주의의 위기이다. 의료는 서구 자본주의 사회가 직면한 주요한 보건문제들, 즉 노동자들이 노동과정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함으로써 나타나는 스트레스 관련 질환과 생활조건의 변화에 따른 질환들 · 심혈관계 질환, 궤양, 암 등 · 을 해결할 수 없다. 그러한 문제들은 대부분 의료 외부적인 조건들에서 기인하고, 따라서 의료의 효과는 제한적이다. 그러나 의료가 손상을 호전시킬 수 있다는 사실로 인해 이데올로기적 효과를 가진다. 따라서 사람들은 더 많은 의료를 원한다. 이러한 대중적 요구로 인해 의료가 성장하고 의료서비스가 확대된다. 자본주의의 확대에 따른 자본주의적 질병의 확산과 대증적 치료의 간극을 메우기 위한 의료의 양적 확대는 ‘의료비의 급격한 증가와 그에 조응하지 못하는 대중의 건강’이라는 현대 보건의료의 위기로 나타난다. 이에 대해 나바로는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우리 생활의 모든 영역에 대한 자본의 요구와 자본의 침투가 일반적으로 사회적 서비스, 특히 의료서비스의 성장을 필요로 하는 보건문제들을 점점 더 많이 창출하고 있다. 그에 따라 의료는 자신의 통제권 밖에서 야기된 문제점을 해결해야 하는, 즉 불가능한 것을 해야 하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이 점이 의료의 비효율성을 결정하는 요인이다. 위기에 대한 보수주의적인 또 하나의 대응은 보건문제의 해결책으로 개인의 라이프스타일을 강조하는 것, 즉 질병의 원인을 개인의 책임으로 돌리는 것이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적 전통에 속하는 크로포드(Crawford)는 이러한 희생자 과실론을 비판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들의 직업과 주거, 환경조건, 그리고 자신들이 포괄되는 관계의 형태를 자유롭게 선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굿마커와 베를리너(Gutmacher and Berliner), 스타크(Stark) 등은 (계급·인종·성 등을 포함하는) 사회의 권력관계 내에서 개인이 점유하는 지위가 건강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파악했다. 웨이츠킨은 의료의 위기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적 이윤의 구조와 분리될 수 없으며, 위기가 여러 가지 사회적 모순으로부터 발생한다고 주장한다. 그러한 모순으로서 웨이츠킨은 기업의 의료분야 침입, 불균등한 사회적 발전, 비싼 기술이 더 효과적이라고 전제하는 의과학의 이데올로기, 민간영역에 대한 공적인 재정 투여, 인도적인 치료를 방해하는 의료 인력의 특징 등을 제시한다. 특히 선진자본주의 국가와 저발전 국가 모두 의료비 부담은 중요한 문제가 되면서 법적 행정적 장치들이 의료비 절감을 위해 고안되었는데, 그것들은 주로 의료 기술 자체에 초점을 맞추는 비용효율 평가 모델에 근거한다. 즉, 의학적 효과에 비해 비용이 지나치게 높은 의료기술은 규제하는 것이다. 그러나 의료비에 대한 대부분의 비마르크스주의적 분석들은 비용유발적이고 비효율적인 기술이 도입되고 확산되는 보다 광범위한 정치경제적 맥락, 즉 자본주의적 이윤 구조에 대해 맹목적이다. 의료기술이 이윤 추구에 종속적이 되는 경향 자체가 어떤 의료기술을 개발할 것인가를 질적으로 결정짓기 때문에 이미 개발된 신의료기술에 대한 비용효과성 평가는 제한적이다. 이윤추구적 경향은 의료기술 개발을 민중들의 건강을 보편적으로 향상시킬 수 있는 방향이 아니라 구매력이 높은 방향으로 집중시키기 때문에 보편적인 건강 향상의 측면에서 비효율적이며 이는 의료의 위기를 심화시키는 요인이 된다. 3. 생태학적 관점 가. 현대의학의 생의학적 모형에 대한 비판 현대의학은 건강을 질병의 부재로 정의한다. 생물학적 정상성 개념에 기초한 정규분포곡선 상의 위치를 통해서 건강과 질병을 규정한다. 이러한 현대의학의 건강과 질병 개념은 ‘생의학적 모형’에 기초를 둔다. 생의학적 모형은 육체와 정신을 분리하고 육체를 다양한 부품들로 조합된 기계의 일종으로 간주한다. 또한 생의학적 모형은 ‘특정병인론’(모든 질병이 생물학적으로 검출 가능한 특정한 질병체에 의해 발생하는 것으로 가정하는 이론)을 수용한다. 그 결과 현대의학은 건강과 질병에 대해 생물학적 환원론의 입장을 취하게 된다. 감염성 질병을 정복할 수 있다는 환상을 심어주었던 현대의학은 20세기 말에 이르러 심각한 위기에 직면한다. 현대의학은 과거보다 강화된 독성과 내성을 가지고 복귀한 감염성 질병과 새로이 출현한 감염성 질병, 자본주의적 생활양식이 양산한 만성질병에 대해 근본적 원인을 제거하지 못한 채 대증요법으로 일관하고 있다. 이에 따라 현대의학에 대한 다양한 비판들이 제기된다. 그러나 사회적 요인을 강조하면서 의학보다 의료의 제도적 개혁을 대안으로 제시하는 견해는 의학의 생물학적 기초를 과학적으로 재구성하지 못하는 외재적 비판에 머무른다. 반면 생명체의 유기적 성격을 강조하면서 대체의학을 제시하는 입장은 대부분 반과학적인 신비주의 성격을 띤다. 건강과 질병이 결국 생명체의 상태에 대한 설명과 판단에 근거하는 이상 의학은 생물학에 기초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현대생물학은 생명 현상을 더 작은 단위, 즉 유전자나 개별 유기체 등으로 환원해서 설명하기 때문에 복잡한 체계에서의 상호작용을 파악하는 데 한계를 지닌다. 따라서 사회·생태적 요인을 의학적 지식에 체계적으로 통합시키기 위해서는 생물학적 관점의 변화가 필수적이다. 생태학적 관점의 발전 생태학은 기존 생물학에 대한 과학적 비판을 통해 현대의학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특히 마르크스주의 생물학자 레빈스는 생태학과 현대의학 비판을 결합하는 대표적인 이론가로서 생명현상을 복잡한 체계의 상호작용으로 파악하고, 이를 통해 건강과 질병에 대해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다. 생태학은 유전학에 기초한 현대생물학의 환원론을 비판하고 다양한 수준의 복잡한 상호작용을 통해 생명현상을 이해한다. 생명현상을 설명하는 방식에서의 이러한 차이는 궁극적으로 생명현상의 역사적 변화, 즉 진화를 설명하는 방식의 차이에 기인한다. 나. 생태학적 진화론 기존의 유전학적 종합설은 임의적·연속적 유전자의 변이가 주어진 환경에 적응하면서 자연선택이 이루어진다고 설명한다. 환경은 개체의 변화에 영향을 주지 않는 것으로 간주되고 결국 생명현상을 유전자의 문제로 환원하는 접근법을 따른다. 1890년대에 생물학의 한 분과로서 등장한 생태학은 생명체들 사이의 상호작용, 나아가 생명체와 환경의 상호작용을 대상으로 하는 과학이다. 환경은 고정된 것이 아니며, 단일한 기준에 따라 개체들의 적응도를 개별적으로 측정할 수 없다. 오히려 유기체의 적응 메커니즘은 환경의 다양한 측면에 대해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이러한 다양한 수준의 상호작용 메커니즘을 분석하는 과정에서 수학적 모형화의 시도와 성과들이 있었다. 대안적인 ‘생태학적 종합설’도 유전적 과정을 포함해야 한다. 유전자에서 지질학적 또는 천문학적 현상에 이르는 다양한 수준에서의 상호작용에서 자연선택이 발생한다고 본다. 또한 유기체의 모든 형질이 적응적 목적에 부합한다는 기능주의적 설명을 비판한다. 그들은 유전적 기초를 지닌 형질로 간주되는 많은 현상이 유기체의 발생 과정에서 나타난 필연적 부산물일 뿐 자연선택과는 무관하다고 주장한다. 진화가 개체의 유전자 수준이 아닌 개체, 개체군, 종 등과 같은 다양한 수준에서 파악된다면, 환경의 수많은 측면에 적응하는 다양한 방식들이 모두 적응적 이점을 지니고 있다. 또한 비적응적 과정이 조건의 변화에 따라 적응적 중요성을 부여받는 경우도 있다. 이에 따라 선형적 진보의 사다리라는 관점은 다양한 유기체들이 끊임없이 변화하는 환경적 조건의 다양한 측면과 수준에 적응하면서 공진화한다는 관점으로 대체된다. 다. 생태학적 관점과 보건의료 1) 역학적 전환 생태학적 관점은 자기조절체계의 작동이 자기보존적인가를 기준으로 건강과 질병을 판단한다. 다양한 수준의 자기조절체계에 대한 분석을 통해 질병의 원인을 다양한 수준에서 파악할 수 있다. 그리고 병원균과 인간의 공진화, 자본주의적 노동과정과 생활양식의 변혁 등은 건강과 질병에 관한 새로운 인식을 제공한다. 질병유형의 변화와 이에 따른 의료형태의 변화를 역학적 전환이라고 부른다면, 첫 번째 역학적 전환은 농경에 기초한 문명이 확립된 ‘신석기혁명’과 함께 발생했다. 인구가 성장하고 도시가 발전하면서 고유한 지역적 질병을 갖는 질병문화권이 형성되었다. 몽골제국의 성립에 따른 동서양의 교류는 질병이 유라시아 전체에 확산되게 하였고, 신대륙으로 질병이 확산되어 생태적으로 다양성이 부족하고 질병의 종류가 적어 면역이 되지 않았던 아메리카 원주민들에게 재앙적 결과를 가져왔다. 두 번째 역학적 전환은 자본주의의 발전에 따른 산업화도시화와 현대의학의 태동으로 이루어졌다. 현대의학이 발전하면서 항생물질과 면역법이 개발되었고, 물질적 생활조건이 개선되고 공중보건운동이 실시되면서 감염성 질병이 감소하였다. 이와 함께 자본주의적 노동과정 및 생활양식에 기인하는 비감염성 질병, 특히 만성질병과 노화가 중요한 의학적 문제로 제시되었다. 그러나 소멸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던 결핵과 같은 감염성 질병이 다시 등장했으며, 사회생태적 환경의 변화와 함께 인간면역결핍바이러스(HIV), 신종 인플루엔자와 같은 새로운 감염성 질병도 출현했다. 이는 세 번째 역학적 전환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현대의학은 병원균 퇴치에 실패했고, 자본주의는 질병이 만연할 수 있는 생태적 환경을 조성했다. 따라서 자본주의적 사회관계의 변혁은 필수적이지만 이것이 모든 것을 해결하는 것은 아니며, 생태학적 관점에서 감염성 질병에 대처해야 한다. 신종플루의 경우 대규모 사육은 밀집된 공간에 최대한 많은 돼지들을 집중시킴으로써 바이러스들이 복제를 통해 역병으로 발전할 기회와 가능성이 극대화시킨다. 또 돼지들의 원거리 수송이 늘어나면서 감염 범위도 확대될 수밖에 없다. 전 세계적인 습지 파괴 또한 신종플루의 원인으로 지목되기도 한다. 관개농업을 위해 댐을 건설하고 습지의 물을 이용하면서 철새들도 관개 수로와 농지로 모여들기 시작했고 이곳에서 방목되는 가금류, 특히 오리들이 야생 조류가 배설한 바이러스와 빈번하게 접촉하게 된다는 것이다. 2) 자기조절체계 자연에서 개별적으로 인식될 수 있는 모든 단위는 외부 환경과 구별되는 독자적인 내부 구조를 갖지만 또 그 경계에서 내부와 외부는 끊임없이 상호작용한다. 여기서 외부는 물리적 환경일 수도 있고 다른 개체나 종일 수도 있다. 생명체는 환경의 상반된 요구 속에서 내외부적 작용들이 자신의 생존을 위협하지 않도록 조정하는 자기조절체계를 가진다. 이 자기조절체계가 안정적일 때 내외부적 상호작용이 지속될 수 있으며, 파괴되거나 오작동하여 자기보존에 지장을 줄 때 건강하지 못한 상태로 규정될 수 있다. 자기조절체계는 여러 가지 방식으로 손상될 수 있다. 자기조절체계의 손상이 질병을 야기하며, 질병은 손상의 원인에 따라 감염성 질병과 비감염성 질병으로 나뉜다. 감염성 질병은 병원균으로 간주되는 다른 생명체와의 상호작용으로 인해 자기조절체계가 손상되는 것이다. 세포 내 미토콘드리아나 소화기관의 박테리아 등을 보면 기생체와 숙주의 관계는 항상 병리적인 것은 아니다. 양자의 상호작용의 결과가 숙주인 인간의 자기조절체계의 손상을 야기할 때 발생하는 것이 감염성 질병이다. 이 때 숙주의 영양 상태와 면역력 등이 발병의 조건이 된다. 또 인구밀도, 주거유형, 생산수단과 같은 생활방식이 변화할 때 병원균, 질병의 매개체 등과 우리의 관계 역시 변화한다. 예를 들어, 흑사병은 6세기 로마제국이 쇠퇴하는 시기에 최초로 창궐했으며 14세기 봉건제의 위기가 심화되던 시기에 다시 등장하여 인구를 격감시켰다. 그 사이에도 흑사병은 몇 번씩 유럽에 진입했겠지만 인구가 취약해지고 쥐를 통제할 수 있는 사회적 기반이 붕괴하는 시기에 창궐했던 것이다. 병원균은 질병 발생의 여러 원인들 중 하나에 불과하다. 병원균 외의 요인으로 인체의 자기조절체계가 손상되는 것이 비감염성 질병이다. 인간의 사회적 상호작용이 중요한 메커니즘인데, 이 질병의 주요 원인은 자본주의적 사회관계로 인한 생활습관과 노동조건의 변화, 일상적 스트레스와 사회생태적 위험 증가 등이다. 자본은 노동을 부를 축적하기 위한 수단으로 여길 뿐 노동을 매개로 한 신진대사 과정의 구체적 메커니즘은 고려하지 않는다. 특정 행위의 반복은 육체의 자기조절체계를 고갈시키며, 지속적인 통제와 감시로 인한 스트레스는 육체의 자기조절체제를 손상시킨다. 또한 사회경제적 불평등은 건강을 유지할 물질적 자원의 결핍일 뿐 아니라 그 자체로 스트레스를 가중시켜서 생리적 메커니즘을 통해 육체의 질병을 유발한다. 4. 페미니즘적 관점 가. 재생산의 의료화 20세기 대중보건의료의 발전은 여성에 대한 보건의료서비스를 확대한다. 그러나 그것의 기초를 이루는 생의학 모델은 건강한 남성의 육체를 인체의 표준으로 설정함으로써 여성 건강의 독자성을 무시한다. 그것은 여성 육체의 고유성을 생식기관의 해부학적 차이로 정의하고, 자기조절기능의 차이를 재생산 기능으로 환원한다. 이에 따라 여성보건 문제는 산과학 및 부인과학의 대상으로 한정되고, 여성의 건강 욕구는 모성 및 아동 건강 프로그램으로 위임된다. 전통적으로 여성의 관할에 있던 재생산과 관련된 모든 관행은 이제 대중보건의료에 의해 독점되는데, 이를 재생산의 의료화라고 부른다. 20세기 초까지 재생산을 보조하는 기술의 효과와 안정성의 측면에서 산과의사의 경쟁력은 여성조산사에게 밀리고 있었다. 임신출산은 질병으로 간주되고, 치료를 위한 병원출산이 권장, 확대되기 시작한다. 동시에 대공황과 2차 세계전쟁을 계기로 국가적 인구조절의 필요성이 인식되면서 가족계획을 기술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해 대중보건의료의 사회정치적 위상이 강화된다. 그리고 치료혁명으로 산부인과의 치료능력이 개선되면서 재생산의 의료화 과정이 실질적으로 완성된다. 이는 전문적 지식과 기술을 매개로 한 사회적 지배·통제관계의 변형이자 확장이다. 병원출산 과정은 전적으로 의사에 의해 주도되고, 산모는 오직 환자로서 취급되며, 그녀의 육체는 치료를 위해 개입조작되는 대상으로 환원된다. 법인자본의 생산력과 산부인과학의 전문성이 재생산에 대한 통제기술로 체계적으로 결합되자 임신과 출산의 모든 과정은 도말검사선별검사초음파검사 등 기술적 절차로 채워진다. 이제 여성은 산업화된 의료의 도움 없이는 자신의 재생산 능력을 알지도 쓰지도 못하는 무능한 존재로 전락한다. 여성과 현대보건의료의 관계가 재생산을 중심으로 형성되면서 임신출산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여성의 질병은 대부분 기질적 원인이 없는 꾀병 또는 심인성 질환으로 간주된다. 즉 재생산이 과잉의료화 된 반면 여성의 다른 질병은 과소의료화되는 것이다. 성차별적 의학적 임상연구는 이러한 현실을 대표한다. 중요한 임상연구의 대부분은 남성을 대상으로, 또 이른바 ‘남성적’ 질병을 주제로 이루어진다. ‘여성적’ 질병이 연구 주제가 될 때에도 생식과 무관한 문제들은 대부분 제외되거나, 남성을 대상으로 임상실험이 이루어진 후 바로 여성에게 시판된다. 나. 여성건강운동의 대중보건의료 비판 1960년대 말부터 권위주의적인 산부인과에 대한 이러한 경험의 공통성을 집단적으로 인식하면서 대중보건의료를 비판하는 여성건강운동이 조직된다. 초기 자유주의 페미니즘 여성건강운동은 남성의사의 권력 독점을 비판하는 데 집중된다. 따라서 그 해결을 위해서는 남성의사의 인식개선과 여성의사의 확대, 그리고 여성의 의사결정권을 요구한다. 특히 환자로서 여성의 합리적 선택권과 능력을 강조하면서 ‘충분한 정보에 근거한 동의’의 법제화를 주요 실천전략으로 채택한다. 그러나 여성의사의 비율이 크게 증가한 오늘에도 보건의료와 여성의 관계, 여성의사와 환자의 관계에서 근본적인 변화는 나타나지 않는다. 자유주의 페미니즘은 의사직에서의 성별 불평등만을 문제 삼음으로써 현대보건의료의 자본주의적 성격과 현대의학이 여성에게 미치는 모순적 영향을 간과한 것이다. 부분적으로 법제화된 ‘충분한 정보에 근거한 동의’ 전략도 새로운 기술을 임상에 도입할 때 환자의 동의만 받으면 된다는 식으로 전문가 집단이 책임을 회피하는 구실이 될 수 있다. 여성건강운동은 낙태권 운동과 결합하여 전국적인 정치세력으로 부상하는 한편 이론적으로도 급진화 된다. 급진주의 페미니즘은 여성에 대한 억압과 차별이 여성의 육체성욕재생산능력을 사회적으로 통제한 결과이며, 보편적 남성 지배를 뜻하는 가부장제를 그 원인으로 지적한다. 남성의사는 지배계급 남성들과 동맹하여 여성치료자와의 경쟁투쟁에서 승리하고 의학지식과 기술을 독점하면서 보건의료 영역으로부터 여성을 완전히 배제한다. 의료 지식과 기술은 가부장제의 역사적 산물이자 남성의 지배도구이며, 남성의사는 산부인과 지식과 기술을 통해 재생산을 의료화하고 여성의 육체와 성욕을 지배통제한다. 따라서 급진주의 페미니즘은 대중보건의료가 의학적 지식의 생산과정부터 근본적으로 변혁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남성의 지식과 기술은 여성의 억압과 지배를 목적으로 하기 때문에 여성의 건강과 복리 증진에 기여할 수 없으며, 여성 스스로가 자신을 위한 지식과 기술을 찾아서 소유해야 한다. 그러나 급진주의 페미니즘은 가부장제를 초역사적인 것으로 인식하면서 여성이 착취억압받는 구체적 형태와 그것을 결정하는 사회·역사적 요인들에 대한 분석을 간과한다. 그 결과 이론적 분석에서는 재생산이라는 여성의 공통성만이, 그리고 대안적 의료실천에는 자기결정에 기초한 재생산의료서비스만이 과도하게 부각된다. 다양한 사회적 조건에 있는 여성들이 재생산과 무관하게 호소하는 여러 다른 건강상의 문제는 여전히 간과되는 것이다. 그에 따라 기존의 남성 중심적 보건의료를 비판하며 등장한 페미니즘적 보건의료에서도 여성은 재생산하는 존재로만 간주되는 양상이 지속된다. 이러한 한계는 현대보건의료의 물질적 토대를 보지 못한 데서 비롯된다.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는 가족형태가 규정하는 성별 분업의 구조에 인종적민족적지역적 차이들을 결합하여 여성에게 상이한 생계조건과 활동방식을 할당한다. 여성의 보건의료 욕구는 이러한 생활조건의 차이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난다. 또한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는 그 자체가 대중보건의료를 구성하고 운영하는 원리가 된다. 남성의사의 권력의 원천이 되는 의학적 지식기술장비는 남성을 위해 생산된 것이 아니라 자본축적의 논리에 따라 생산된 것이다. 따라서 현대보건의료와 여성의 관계, 그리고 여성의 발병의 구조적 원인이라는 근본적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는 자본주의적 생산양식과 역사적 가족형태에 대한 분석이 필요하다. 다. 현대적 가족형태와 여성의 질병 사회적 생산관계는 가족형태 속에서 구현된 성별 분업을 매개로 성별화된다. 현대적 가족형태의 성별 분업은 보건의료의 실천과 이론에도 반영된다. 남성에게 더 나은 보건의료를 제공하는 대중보건의료의 성차별주의는 그것이 일차적으로 남성노동력의 안정적 재생산을 목표로 하는 데서 발생한다. 대중보건의료나 사회 전반의 여성에 대한 억압과 차별은 성적 동일성을 규정하는 지배적 가족형태와 가족임금으로 그것을 지지하는 법인자본주의의 상호작용에서 비롯된다. 여기에 남성과 여성의 고유한 생물학적 차이와 대중보건의료의 성차별주의가 결합된다. 여성이 겪는 질병과 고통은 여성의 고유한 육체적 특성에 기초하지만, 그 특성이 여성에게 위험이 되는 것은 20세기 법인자본주의의 산물이다. 가정에서 권리와 책임의 비대칭성은 여성의 과잉노동을 야기한다. 여성에게 주어진 가장 기본적인 활동인 가사노동은 단조롭고 지루하며 개별가정에서 혼자 수행하게 된다. 이는 신경과민, 우울증 등으로 표현되는 ‘주부신드롬’을 발생시킨다. 그러나 가사노동의 어려움은 가족에 대한 사랑이라는 외피로 인해 종종 은폐되고 무시된다. 가정폭력 역시 지속되는 경향이 있다. 이는 피해자 여성이 가정을 떠나는 것을 어렵게 만드는 사회경제적인 제도인 결혼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많은 여성이 가사노동 및 자녀양육과 함께 임노동을 병행한다. 현대적 가족형태와 가족임금 이데올로기는 여성의 노동력가치를 평가절하하고, 여성을 주로 저임금의 불안전한 직종과 직무에 배치한다. 특히 서비스직 등 이른바 ‘여성적’ 직종의 경우, 과도한 감정노동으로 인한 육체적·정신적 소진에 성희롱이라는 위험도 추가된다. 그밖에도 자본주의적 노동과정에서 산업적 유해요소들은 재생산 기능과 관련해서 여성에게 추가적인 위험이 될 수 있지만, 잉여가치 추출과 관련된 부분에서 여성은 무성적 존재로 간주된다. 산업역학 연구의 대부분이 남성노동자를 대상으로 실시되며, 따라서 작업장 환경의 개선도 남성의 육체를 기준으로 이루어진다. 한편, 성욕과 재생산은 노동과 일상생활로 환원되지 않는 여성보건의 고유한 영역을 이룬다. 여성이 성욕재생산에 대한 자율적 결정권을 상실하면서 성욕과 재생산의 관리에 관련된 신체적사회적 위험은 여성에게 전가된다. 새롭게 개발되는 피임기술은 대부분 여성을 대상으로 하며, 여성은 피임용구에 대한 충분한 정보를 갖지 못한 채 차악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출산장려정책 또는 출산억제정책이 피임용구나 영구불임술 등 재생산기술의 형태와 공급 방식을 결정하며, 종종 우생학적 함의를 내포하면서 계급인종지역에 따라 차별적으로 시행된다. 재생산조절법의 하나인 낙태의 법적 지위는 여성의 건강지위를 결정하는 단일요인으로는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다. 또한 현대적 가족 형태에서 많은 여성이 ‘의무적’인 성생활을 영위하며, 그에 따른 종속감은 여성의 정신 건강을 저해할 뿐만 아니라 종종 생식기전염병과 같은 심각한 부산물을 낳는다. 라. 생명공학기술과 재생산의 분절화 20세기 대중보건의료에서 여성보건의 주요 목표는 임신과 출산을 잘 관리하여 ‘성공률’을 높이는 것이다. 그에 따라 불임은 현대 산과학(産科學)에서 치명적인 여성보건 문제로 규정되어 불임치료술은 비약적으로 발전한다. 새로운 재생산기술 · 체외수정, 시험관 아기 · 은 ‘생명공학기술’이라는 형태를 띠는데, 이는 여성의 재생산과 관계된 것이라는 사실을 소거시키고, 첨단산업으로서 생명공학의 잠재력과 파급효과만 부각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인간생명의 도덕적 위상을 강조하는 담론과 새로운 기술의 잠재적 혜택을 강조하는 담론의 논쟁 구도 속에서 새로운 생명공학기술이 여성 육체에 대한 인위적 개입이자 기존의 성별 이데올로기를 강화하는 재생산기술이기 때문에 여성의 권리를 위협할 수 있다는 페미니즘의 주장은 주변화 되고 있다. 재생산기술이 생명공학기술로 발전함으로써 이제 재생산은 분절화된 형태로 의료화 된다. 생산과정의 분업처럼 재생산과정의 분절화도 각각의 과정에 수반되는 전문기술의료자원서비스의 개발 등을 촉진한다. 노동과정의 분절화가 자본의 통제력을 확대시키고 노동자의 자율성을 약화시키는 것처럼, 불임치료과정에 의사뿐만 아니라 다양한 전문가들의 개입이 증가하면서 실제 부모나 여성의 의사결정권은 더욱 제약된다. 게다가 재생산의 분절화는 원료를 공급하거나 작업 대상이 되는 여성의 육체를 착취하며, 소비자의 계층화를 통해 대중을 분할한다. 난자와 자궁은 상품화되었고, 이는 경제력 있는 여성이나 의료자본이 빈곤하거나 주변화 된 여성을 생물학적으로 착취할 가능성을 내포한다. 따라서 체외수정기술 나아가 생명공학기술은 페미니즘적 분석과 비판의 중요한 대상이 된다. 재생산에 대한 여성의 권리는 그러한 비판의 기초를 이룬다. 현재의 재생산기술은 여성의 재생산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는 동시에 여성의 모성을 핵가족형태에 종속시킨다. 유전적으로 연결된 ‘자기 자식’을 갖는다는 의미를 강조함으로써 핵가족형태의 생물학적 기초를 부각시킨다. 이러한 사회적 흐름은 여성의 모성이 사회적 모성으로 전화될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제약하며, 가족 형태를 통한 여성의 억압과 종속을 더욱 고착시킬 것이다. 한편, 생명공학기술에 대한 페미니즘적 비판은 더 넓은 경제적사회적 맥락을 반드시 고려해야 한다. 생명공학산업 자본은 생산기술의 원료가 되는 난자와 정자, 대리모 등은 이미 세계적으로 거래되고 있다.
시그나(Cigna)와 국내의료기관이 체결한 진료비 직불계약의 경과와 의미 지난 1월 31일 글로벌 보험사인 시그나(Cigna International Corporation)가 11개 국내 의료기관과 진료비 직불계약을 체결했다. 이번 계약을 통해서 시그나의 의료보험상품에 가입한 외국인환자들이 한국의 의료기관을 이용할 때 보험혜택을 받을 수 있게 되며, 의료기관은 환자의 진료비를 시그나로부터 직접 지급받을 수 있게 된다. 계약에 참여한 병원은 서울대병원, 가천의대길병원, 서울성모병원, 세브란스병원, 강남세브란스병원, 서울대치과병원, 세종병원, 인하대병원, 청심국제병원, 한양대의료원, 화순전남대병원으로 대부분 수도권 대형의료기관이다. 2009년 1월 국내 병원이 외국인환자를 유치할 수 있도록 의료법이 개정된 후 외국인환자 유치를 위한 시도가 활발한데, 주로 정부기관 주도로 추진되는 모양새다. 보건산업진흥원은 의료계를 대상으로 외국인환자 유치를 위한 워크숍과 설명회를 열고 해외 보험업계 관계자들을 대상으로는 ‘한국병원 체험행사’를 개최하는 등 외국인환자 유치 활성화를 위해 다각도로 노력해왔다. 2011년 2월에는 ‘외국인환자 유치기관 정보포털’을 개설하여 유치사업 전반을 관장하는 시스템을 구축하기도 하였다. 이번 계약 역시 2011년 3월 진수희 당시 보건복지부장관과 시그나 총수와의 면담이 중요한 계기였으며 보건산업진흥원이 나서서 MOU 체결, 표준직불계약서 공동작성 등을 진행한 후 의료기관을 모집하는 형태로 이루어졌다. 그간 정부에서 강력한 의지를 가지고 추진해왔음에도 지지부진하던 외국인환자 유치사업이 이번 계약을 계기로 전환점을 마련할 것으로 보인다. 물론 외국 보험회사와 국내 병원간 진료비 직불계약 체결이 처음 있는 일은 아니다. 하지만 이번 사례는 미국시장 점유율 10위권의 대형 민간보험회사와 국내 주요 의료기관들이 참여하였다는 점에서 이전의 사례와는 구별된다. 보건의료체계의 붕괴를 불러올 외국인환자 유치 사업 표면적으로 보기에 이번 계약이 보건의료영역에 미치는 영향은 제한적이다. 시그나의 의료보험상품에 가입한 외국인 환자의 진료에만 해당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민간보험자본과 병원자본의 이해관계, 그리고 외국인환자 유치사업이 추진되는 맥락을 고려해 보면 문제가 그리 간단하지만은 않다. 현재 의료법에는 ‘보험업법 제2조에 따른 보험회사, 상조회사, 보험설계사, 보험대리점 또는 보험중개사는 외국인환자를 유치하기 위한 행위를 해서는 안된다’고 규정되어 있다. 외국인 환자 유치에는 민간보험회사의 역할이 매우 중요한데, 국내 보험회사들은 여기에 전혀 개입하지 못하는 것이다. 향후 비슷한 형태의 협약들이 이루어지고 외국인환자를 상대로 한 시장이 커지면 국내 보험회사들은 자신들도 외국인환자 유치와 관련한 사업을 하기 위해 의료법 개정을 요구할 것이다. 한편 ‘진료비 직불계약’이라는 형태에도 주목해야 한다. 의료기관과의 직불계약을 통해서 민간보험회사는 의료기관에 진료비를 지불하는 ‘갑’의 입장이 되어 진료 내용에 개입할 수 있게 된다. 또한 진료비 지급심사라는 명분으로 환자의 건강정보 및 의료기록에의 접근이 가능해진다. 더불어 직불계약이 체결된 병원에서만 진료가 이루어지므로 보험회사는 피보험자를 보다 더 효율적으로 관리할 수 있게 된다. 요컨대 의료기관과의 직불계약은 의료시장에서 민간보험자본의 우위를 확보하고 민간의료보험 시장을 확대하는 핵심적 장치인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두 가지 가능성이 결합될 경우 보건의료체계에 심각한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 국내 보험회사들도 외국인환자를 유치할 수 있게 되면 의료기관과 직불계약을 체결하여 환자를 끌어들일 것이고, 외국인환자를 대상으로 한 민간보험회사와 의료기관 사이의 직불계약이 일반화되면 이는 곧 직불계약의 전면적 허용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보험자본이 의료시장을 장악할 때 나타나는 부작용은 미국의 사례를 통해 널리 알려져 있다. 이윤을 극대화하기 위해 진료의 질을 떨어뜨리고, 건강하지 못한 사람들을 보험가입에서 배제하는 등 대중의 건강에 악영향을 미친다. 보험료 대비 지급율도 공적보험에 비해 훨씬 낮다. 보다 심각한 것은 민간보험자본과 의료기관과의 직접적 연계망 형성이 장기적으로 건강보험을 무너뜨릴 수 있다는 점이다. 의료기관과의 직불계약 허용은 민간보험자본의 오랜 숙원이다. 삼성생명은 내부보고서에서 직불계약 허용을 건강보험 해체로 가는 중간단계로 설정하고 있기도 하다. 의료산업화가 아닌 의료공공성 강화가 필요하다 병원자본은 “건강보험 당연지정제를 폐지하고 민간의료보험을 활성화하는 것이 외국인환자 유치 활성화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과제”라고 주장하는 등(한나라당 심재철 의원과 대한병원협회가 공동주최한 ‘한국의료의 국제화 그 현황과 전망’ 토론회, 2009년 6월) 외국인환자 유치 사업을 빌미로 의료민영화를 구체적으로 요구해왔다. 정부는 자본의 요구에 호응하여 외국인환자 유치 사업이 국부를 창출하고 경제를 발전시킬 신성장동력산업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중앙일보를 필두로 한 보수언론은 삼성생명과 삼성병원 등 의료자본의 이해를 반영하여 외국인환자 유치를 위해서는 영리병원이 허용되어야 한다는 기사를 끊임없이 쏟아내고 있다. 그러나 의료관광산업 활성화는 대형병원, 민간보험회사의 배를 불려줄지언정 민중에게는 어떠한 이득도 되지 않는다. 오히려 의료관광산업 추진 과정에서 보건의료체계가 붕괴되고 국민건강이 악화될 것이 우려된다. 국민건강에 심대한 위협이 될 수 있는 지금과 같은 방식의 외국인환자 유치사업은 중단되어야 한다. 지금 필요한 것은 의료산업화가 아니라 국민의 건강권을 보장할 수 있는 공공적인 보건의료체계의 구축이다.
보건의료운동의 이념 역사 현실 -1 보건의료팀은 한국 보건의료운동의 과제와 전망을 밝히기 위한 보건의료팀의 입론을 마련하기 위해 2009년 세미나를 시작으로 2010년부터 교안을 작성하는 집단작업을 진행하였다. 교안의 구성은 크게 자본주의적 보건의료의 역사, 보건의료 분석의 이론, 한국 보건의료운동의 역사와 과제로 이루어진다.『사회운동』에서는 이번 호부터 총 4회에 걸쳐 그간 작성한 교안을 축약하여 연재한다. 기획연재 1 I. 자본주의적 보건의료의 역사 1. 자본주의의 발전과 19세기 보건의료 2. 법인자본주의 발전과 20세기 보건의료 3. 한국보건의료체계의 역사 :1945년부터 1989년까지 기획연재 2 II. 보건의료 분석의 이론 1. 자본주의 사회에서 질병의 원인 2. 자본주의적 의료 분석 3. 생태학적 관점 4. 페미니즘적 관점 기획연재 3 III. 남한 보건의료운동의 역사 1. 보건의료운동의 시작과 발전 2. 보건의료의 신자유주의적 재편과 대안세계화 운동 3. 한국의 신자유주의적 재편과 보건의료운동의 한계 기획연재 4 4. 신자유주의에 맞서는 보건의료운동의 모색 5. 보건의료운동의 현 정세와 과제 자본주의적 보건의료의 역사 자본주의 사회의 보건의료는 자본주의적 생산과정에서 발생하는 질병을 치료한다. 질병의 치료는 노동자에게 필요하므로, 이러한 기능을 통해 의료는 자본주의 생산관계를 유지하고 정당화하는 지배와 통제의 기능을 한다. 자본주의적 질병은 자본축적 과정에서 발생하며 보건의료는 단지 사후적으로 대처할 뿐이다. 보건의료가 질병의 원인을 근본적으로 치료할 수 없기 때문에 문제의 발생과 해결 사이에 비효율성이 증대하며 이 간극을 메우기 위해 보건의료는 지속적으로 성장한다.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발전할수록 보건의료의 영역 또한 확대되며, 자본주의적 임노동의 확대재생산은 계속해서 새로운 형태의 질병을 발생시킨다. 이러한 과정에서 보건의료도 자본축적의 수단으로 편입된다. 1. 자본주의의 발전과 19세기 보건의료 가. 산업화·도시화와 감염성 질병의 위협 19세기 초 유럽에서는 산업화가 진전되면서 유례없는 인구증가가 나타났고 실질임금이 감소하고 주택난이 심화되었다. 도시외곽의 공장을 중심으로 빈민가가 형성되었다. 대공업과 급속한 도시화는 만성적인 빈곤, 불결한 상하수도 및 통풍시설, 유해한 작업환경 등을 양산하여 감염성 질병이 유행할 수 있는 생태적 조건을 만들었다. 특히 콜레라가 1831년부터 유럽 전역을 휩쓸었는데 이는 대중적 공포와 사회적 혼란을 증폭시켰고 착취에 대한 저항과 결합하여 대중봉기를 야기했다. 이에 대한 자본가계급의 최초의 대응은 검역과 방역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대응은 민족 간 교류와 무역을 제한했기 때문에 심각한 경제문제를 초래했다. 그래서 도시의 위생조건을 개선하는 일련의 사회개혁이 진행되었다. 그러나 콜레라의 유행이 국가의 개입을 직접적으로 가져온 것은 아니었고, 노동자의 질병이 자본축적을 저해하는 것으로 인식되면서부터 공중보건이 도입되었다. 나. 사회의학과 위생개혁 운동 1840년대에 이르러 질병의 원인을 빈곤과 자본주의의 모순에서 찾고자 하는 사회의학이 나타났다. 이것을 선도한 것은 엥겔스와 비르효였다. 엥겔스는 질병의 원인을 계급구조와의 관련 속에서 파악했다. 그는 노동자계급의 영양상태 및 주거환경과 감염성 질병의 상관관계를 지적했으며 계급 간 영아사망률의 차이, 작업환경과 질병의 관계를 조사했다. 비르효는 사회의 결함이 감염성 질병의 필연적 조건이라고 주장하는 역학이론을 발전시켰으며, 감염성 질병을 예방·제거하기 위해서는 의학적 치료만큼이나 사회적 변화가 중요하다고 여겼다. 당시 지배계급은 1830년대 이래의 대중봉기와 사회의학의 등장을 콜레라만큼이나 위협적인 것으로 간주했다. 그 결과 영국, 프랑스, 독일 등에서 이에 대응하여 위생개혁운동이 출현했다. 영국의 왕립구빈원 자문 위원이었던 채드윅은 사회의학과 반대로 빈곤의 원인을 질병에서 찾았다. 개인들은 질병으로 인해 노동능력과 생계수단을 상실해서 빈곤해진다는 것이다. 따라서 질병을 일으키는 위생조건을 개선함으로써 빈곤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에 따라 1848년에 공중보건법이 제정되었다. 채드윅의 위생개혁운동은 생태적 요인과 사회적 요인의 접합이라는 19세기적 질병에 대한 부르주아적 대응이었으며, 대중의 저항을 순치하고 사회의학의 관점을 기각하는 것이었다. 사회의학의 관점은 이후 세균학의 확립에 따른 생의학의 체계화 속에서 위축되었다가 칠레의 아옌데에게 계승된다. 1939년 인민전선정부의 보건장관으로 재직하던 아옌데는 질병을 사회적 조건의 박탈에 따라 나타나는 개인들의 장애로 개념화하고, 사회의 광범위한 구조적 변혁을 동반하지 않고 이루어지는 보건의료 내에서의 개혁 조치들은 아무런 성과도 거둘 수 없다고 주장했다. 20세기 전반기에 라틴아메리카를 중심으로 전개된 사회의학은 1970년대 이후 미국과 유럽에서 보건의료에 관한 마르크스주의적 연구들을 통해 계승되었다. 다. 의학의 지체와 공중보건의 확산 19세기에는 과학적인 의학 지식이 부재했기 때문에 당시의 보건의료는 사실상 병원을 중심으로 한 빈민구제사업의 일환이거나 감염성 질병에 대응하는 공중보건의 형태였다. 위생개혁운동으로 공중보건에 대한 관념이 점차 확산되어 질병의 유행이 비위생적 생활환경과 관계가 있다는 점이 널리 인식되었다. 19세기 중반 이후 대도시마다 도로가 포장되었고, 상하수도 시설이 확충되었으며 가정에서의 세탁과 목욕이 널리 보급되었다. 공중보건은 장기적으로 감염성 질병의 유행에 따른 노동력 고갈의 위협을 해소하고, 개별 자본이 부딪히게 되는 노동자계급의 요구와 저항을 균등화하는 효과를 갖는 것이었다. 2. 법인자본주의의 발전과 20세기 보건의료 가. 감염성 질병의 감소와 비감염성 질병의 증가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발전하면서 생활환경 및 영양상태가 개선되었고, 항생제와 스테로이드의 발견 등 치료의학이 발전하면서 감염성 질병은 감소했다. 그러나 자본주의적 노동·생활조건의 변화로 야기된 비감염성 질병이 증가했다. 19세기 말 이후 미국의 산업자본은 소유와 관리를 분리시키는 법인적 형태로 변화하면서 구상과 실행을 분리시키는 노동과정의 혁신을 수반했다. 이러한 혁신의 핵심은 포드주의라고 불리는 이동조립라인인데, 이는 노동자의 숙련을 기계로 대체하는 것이었다. 노동은 기계의 흐름에 실질적으로 통합되었고, 노동자계급은 노동과정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함으로써 장애, 불만, 불안, 압박감, 불쾌감 등 이른바 스트레스로 통칭되는 새로운 병리적 양상을 경험하게 되었다. 나아가 스트레스는 수면장애, 식욕부진, 심장 박동 수 증가, 생리적 긴장과 우울증, 과민증과 같은 증상으로 발전했다. 한편 생산성 증가에 따른 임금 상승은 생활조건의 변화를 일으켰고, 이른바 ‘풍요의 병’으로 심혈관계질환, 궤양, 암 등을 가져왔다. 나아가 노동·생활조건의 변화에 따라 새롭게 출현한 질병들은 진통제, 진정제, 커피, 담배, 암페타민과 같은 약물의 소비를 증가시켰다. 비감염성 질병은 감염성 질병과 유사하게 확산되었고, 질병이 일상화·만성화 되듯이 보건의료 또한 일상화·만성화 되었다. 이에 따라 질병의 책임을 개인적 행위의 탓으로 돌리고, 질병의 해결을 개인적 교정으로 환원하는 희생자 과실론이 등장했다. 나. 현대의학과 대중보건의료의 확립 체계적인 의학지식이 발전하면서 미국에서는 도제교육을 지양하고 의학교육을 표준화하려는 시도가 나타났다. 플렉스너 개혁이라고 불리는 의학교육의 개혁은 궁극적으로 의료전문직의 양성과정과 의료제도를 표준화하고 통제하려는 법인자본의 이해를 반영하는 것이었다. 존스홉킨스 모델을 통해 실험의학(연구실), 의료제도(병원), 의학교육(대학)을 결합하는 현대적 의학연구·교육제도가 정착되었고, 표준화된 교육과정과 의사협회의 면허를 통해 공인된 의료전문직이 출현했다. 빈민구호의 기능을 하던 병원은 대학에 기반을 두고 진단과 치료의 기능을 수행하는 현대의료의 중심으로 완전히 변형되면서 그 수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그러나 1930년대 대공황 시기에 중산층이 의료비용의 증가를 더 이상 감당할 수 없게 되자 병원은 위기에 봉착했다. 이러한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미국에서는 병원의 주도하에 사적 보험에 의한 제3자 지불방식이 도입되었다. 사적 보험이 도입되면서 중산층이 다시 병원을 이용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노동자계급에게까지 병원 이용이 확대되었다. 기업주들은 사적 보험을 제공하면서 노동자계급의 보건의료 요구를 수용하는 동시에 이를 구실로 임금인상과 급진적 노동자운동을 통제했다. 현대의학에 따른 치료비용은 노동자계급에게 큰 부담이었기 때문에 보험제도가 뒷받침되어야 했다. 그러나 이를 통한 대중보건의료의 형성은 동시에 보건의료를 이윤추구를 위한 새로운 산업의 영역으로 편입하는 계기이기도 했다. 미국의 법인적 형태와 달리 영국과 소련에서는 국가적 형태의 보험제도가 병원과 결합하여 대중보건의료가 형성되었다. 영국은 1911년에 강제보험제도인 국가의료보험을 도입했고, 1945년 노동당 정부는 그 적용범위와 급여를 확대하여 국가보건서비스를 확립, 무상의료를 제공했다. 그러나 이 제도는 의료전문직의 지위와 자율성을 보장하는 타협에 기초한 것으로, 일반의들이 보건의료 예산의 상당 부분을 영유할 수 있는 길을 열어놓았다. 소련에서는 1917년 혁명 직후 무상의료를 실시했으나 내전과 경제적 곤란 속에 제대로 시행되지 못했다. 1930년대에 중화학 공업화를 촉진하기 위한 정책의 일환으로 보건의료제도가 다시 구축되었는데, 보건의료서비스를 전문화·중앙 집중화하고 대형병원 중심으로 재편했다. 국유화를 통해 보건의료자원의 분배방식을 변화시켰지만, 의료의 성격과 내용 면에서는 자본주의 사회와 별다른 차이가 없었던 것이다. 다. 의료보장제도의 발전 1) 영국 NHS의 형성 의료보장제도는 영국, 미국, 유럽 복지국가에서 경제정책과 사회정책이 결합된 양상에 따라 다르게 발전했다. 하지만 공통적으로 국가가 시민들에게 안정적인 소득을 보장해야 하고 이를 위한 일차적 수단은 높은 수준의 고용을 유지하는 것이라는 합의가 존재했다. 따라서 완전고용은 미국에서 스웨덴에 이르는 다양한 나라들에서 지향해야 할 일종의 원칙이었다. 완전고용은 자유롭게 처분할 수 있는 높은 수준의 직접임금을 안정적으로 제공하기 때문에 가장 높은 수준의 복지로 여겨졌다. 반면 고용을 통해 소득을 획득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사회적 지출의 형태로 제공되는 간접임금은 완전고용에 비해 부차적인 위상을 가졌다. 1930년대 이후 미국 법인자본주의의 산업적 팽창은 산업예비군을 급속하게 흡수함으로써 노동자의 ‘사회적 권력’을 증가시켰다. 또한 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노동자는 전쟁에 참전한 대가로 노동조합과 단체교섭을 인정받았다. 노동조합은 양적으로 팽창하면서 힘을 키운 결과 고용의 안정성을 확보했고, 임금인상을 요구했으며, 나아가 노동자의 대표가 생산과정에 대한 의사결정 과정에 참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미국에서 이러한 노동자들의 요구와 자본의 대립은 1946~1948년 사이의 제너럴 모터스(GM)에서 파업의 물결로 나타났다. 이에 경영자들은 노동자들의 임금인상 요구를 수용했고, 물가상승분 뿐 아니라 생산성 증가에도 비례하는 임금의 인상을 약속했다. 대신 노동자는 경영에 참여하지 않겠다는 양보를 하였으며, 이러한 타협과정에서 공산주의자들은 노동조합에서 제거되었다. 미국과 달리 유럽에서 노조는 사회적 합의를 통해 임금정책을 수용함으로써 생산성 증가에 따른 임금 인상에 못 미치는 임금을 받아들였으며, 그 대가로 국가를 매개로 한 사회복지 프로그램을 확장시키는 전략을 선택했다. 이런 의미에서 유럽의 코포러티즘은 기본적으로 미국식 생산성 임금과 다른 형태라고 할 수 있다. 2차 세계대전으로 영국에서는 노동당과 노동조합이 참여하는 삼자협정을 체결하였으며, 이는 1940년대 후반 ‘전후의 합의’의 토대를 형성했다. 전후 장기적인 완전고용의 결과로 노동계급의 힘이 증가하였고 이는 지속적으로 인플레이션 압력을 형성했다. 인플레이션을 억제하기 위해 노동조합이 임금인상 투쟁을 자제하는 대가로 ‘사회적 임금’의 개선이 협상대상물로 사용되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영국에서는 일련의 사건들이 1948년 국가보건의료서비스제도(NHS)를 성립하게 한다. 영국노총(TUC)의 권고로 1941년 만들어진 베버리지 위원회는 2년 후 자신들의 활동 결과를 베버리지 보고서로 발간한다. 베버리지 보고서는 전후 재건될 복지국가의 청사진이었으며 대중들의 엄청난 관심을 끌었다. 보고서에서 NHS는 복지국가 사회정책 중 하나가 아니라 복지국가의 전제조건으로 제시되었다. 베버리지 보고서는 영국에만 국한되지 않고 프랑스, 서독, 스웨덴 등 서유럽 복지국가 형성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NHS가 성립한 데는 전쟁의 경험이 매우 중요하게 작용했다. 2차 세계대전에서 영국은 유럽 국가 중 유일하게 개전에서 종전까지 독일과 전선을 형성하여 독일로부터 무차별 폭격을 받았다. 전쟁 중 사상자가 많이 발생하자 정부가 이들의 치료를 전적으로 책임지지 않을 수 없었고, 무료의 보편적이고 효율적인 의료서비스가 즉각적으로 필요하게 되었다. 이를 위해서는 기존에 조직적인 체계를 갖추지 못한 병의원 및 의료 인력 시스템에 대한 정부의 직접적인 통제가 불가피하였다. 전시 구축된 전국응급의료서비스체계는 이후 NHS의 토대가 된다. NHS가 실제로 도입이 된 것은 2차 세계대전 직후 총선에서 예상을 뒤엎고 노동당이 집권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노동당은 베버리지 보고서에 입각하여 복지국가를 만들어나갔다. 1945년부터 6년간 집권하면서 노동당은 국유화 강령을 시행하는데, 그 중 공공서비스로서의 의료가 그 대상이었다. 그러나 사실 그러나 사실 노동당이 노동자계급의 이해를 대표하게 된 것은 1차 세계전쟁 이후 영국의 헤게모니가 쇠퇴하면서 기존에 노동자계급의 대표를 자임했던 자유당과 노조 사이의 공조체제가 해체되었기 때문이었다. 노동당의 국유화는 더 이상 부르주아지가 나설 수 없는 상황에서 노동당이 노동자의 협력을 설득하면서 헤게모니를 상실한 자본주의 국가를 관리한 의미를 지닌다. 더군다나 노동당의 국유화 방식은 무상몰수가 아니라 유상매입을 통한 것으로 부르주아 공공경제학을 적용하는 것이었다. 2) 미국은 왜 전국민의료보장제도를 도입하지 못했는가 미국에서도 전국민의료보장체계를 만들기 위한 노력과 시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비교적 이른 시기부터 꾸준히 제기되었다. 미국에서는 정당의 정강 정책보다 민간단체의 입법 활동이 사회적으로 더 큰 영향을 미쳤는데 민간단체인 미국 노동자입법협회(AALL)가 1915년 최초로 국민의료보험 법안을 제안한 것이 미국에서 전국민의료보장운동의 효시라고 볼 수 있다. 이 제안은 의사 단체를 비롯한 여러 조직의 광범위한 지지를 받았고 사회적으로 큰 영향을 미쳤다. 미국 의사협회의의 경우 AALL의 노력과 지도부의 입장이 결합하여 초기에는 지도부를 중심으로 전국민의료보험에 대해 찬성하는 입장이었으나 의료보험을 정부가 통제하는 문제와 의사들에 대한 진료비 보상을 사람당 정액제로 하자는 주장에 반발하여 결국 반대로 돌아서게 된다. 한편 사회보장제도의 발전에 좌파 정당들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 유럽과는 달리 미국에서 좌파 정당의 영향은 미미했다. 심지어 노동운동의 입장은 오히려 전국민의료보험을 반대하는 것이었다. 미국노동연맹(AFL)은 강제적인 의료보험이 불필요한 국가의 개입을 조장하고 건강에 대한 과도한 간섭을 초래한다는 이유에서 반대 입장에 섰다. 정부가 중앙집권적으로 운영하는 제도를 도입함으로써 임금이나 노동조건 등에서 노동조합의 영향력이 줄어들 것을 우려한 것이 반대의 주된 이유였다. 특히 사용자가 제공하는 복지 프로그램이 확대되자 전국민의료보험에 대해 더욱 부정적인 반응을 하게 되었다. 또한 19세기를 관통하여 미국의 대표적인 노동조합 조직이었던 AFL은 결성 당시부터 이민자, 흑인, 여성을 철저하게 배제한 백인 숙련공을 중심으로 한 조직이었고 이 때문에 기업적 노동조합의 성격을 탈피하지 못했다. 이러한 노동운동의 성격은 전국민의료보험 운동에 반대하는 것으로 나타났고, 결국 이를 좌절시키는 데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전체 노동자를 모두 포괄하지 못하고 정치 사회적 의제를 기피하는 기업 중심적 노동운동이 이후 고용을 기초로 한 민간보험이 확산, 정착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다. 역사적으로 두 번째 대대적인 시도는 1930년대 대불황 시기에 런딘 상원의원이 사회보장에 대한 법률을 제안한 것이었으나 실현되지 않았다. 다음으로 1940년대 중반과 후반에 트루먼 행정부에서의 시도가 있었다. 당시 미국노총(AFL-CIO)이 주도적 역할을 했지만 대중적 참여나 대중운동의 역할을 고려하지 않고 상층 정치권 내에서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을 것으로 믿었다. 그러나 이는 현실적이지 못했고 미국 의사협회의 언론매체 광고, 의원들에 대한 편지, 일선 의사들이 환자들에게 편지쓰기 운동과 같은 조직적인 반대운동에 압도당했다. 이런 반대 운동과 당시 냉전체제로 접어드는 정치 환경은 전국민의료보장을 ‘사회주의 의료’로 낙인찍는 데 성공했다. 당시 의료보장의 주된 방법은 사용자가 비용을 부담하는 형태의 민간보험이었다. 노동자들에 대한 민간보험은 노동자와 사용자 사이의 협상이나 집단 교섭의 산물이었다. 뉴딜정책은 노사 간의 단체교섭을 의무화하였고, 제2차 세계대전 시기에는 정부가 임금을 통제하는 대신 일정 수준의 부가급여를 허용했다. 이런 노사관계의 변동은 기업이 노동자들에게 의료보장을 제공하는 직접적인 동기가 되었다. 이 시기에 새로운 민간보험이 만들어지는데 이들은 병원과 진료소 등 자체 공급구조를 가지고 있었고 일정액의 보험료를 받고 정해진 모든 서비스를 포괄적으로 제공하는 ‘정액 보험료-포괄적 서비스’방식을 택했다. 이런 방식이 1970년대 이후 미국 의료보장의 주된 방식으로 등장하는 ‘관리의료’의 기본적인 틀을 제공하는 것이다. 1960년대 이미 전국 노동자의 3/4이 이런 방식의 보험에 가입되어 있었다. 이러한 민간보험의 성장은 노동운동이 전국민의료보험체계를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하게 하는 하나의 요인으로 작용하게 되었다. 게다가 민간보험 또한 전국민의료보험운동이 민간보험의 유지나 성장을 막을 우려가 있는 정책이라고 판단했고 이에 대한 조직적인 반대운동을 시작했다. 1915년 AALL이 전국민의료보험 입법안을 제출할 때까지 민간보험회사의 영업에서 의료가 차지하는 상품은 비중이 크지 않았지만 이후 많은 성장을 했던 것이다. 3. 한국 보건의료체계의 역사 : 1945년부터 1989년까지 한국의 보건의료체계 역시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변화에 조응하여 빠르게 변화해왔다. 20세기 전반에는 감염성 질환에 대응한 공중보건, 위생이 발달하였고 1970년대 중화학공업의 발달과 함께 1977년 사회보험 형태의 의료보험을 실시한다. 이후 의료보험의 확대로 의료기관의 이용은 점차 일반화되고 병원 수는 대형병원을 중심으로 빠르게 확대된다. 이 과정을 통해 민간 부문 중심의 대중보건의료가 형성된다. 가. 미국식 보건의료제도의 이식 : 1945년~1961년 의학, 의료기술은 발전하지만 의료공급체계, 보건의료제도는 방치된 시기다. 이는 미국식 보건행정체계의 특징이기도 하다. 미군정은 조선총독부의 경무국 위생과를 폐지하고 위생국을 따로 설치했다. 그 후에 보건후생부로 독립 승격되었다. 보건후생부는 공중보건업무를 주로 담당했고 의료서비스는 민간부문에서 담당하는 자유방임적 구조였다. 500여 개의 보건진료소를 설치하여 가난한 국민들에게 구호차원의 서비스만 제공하였고 차별현상이 극심했다. 노동기준법(1953)으로 출산 휴가제등 부분적 모성보호가 시작되었다. 전염병예방법(1954)을 제정해 국가적 전염병 관리체계를 갖추기 시작했다. 의학과 의료기술은 상대적으로 발전하였다. 1951년 의료업자 전문 과목 표방 허가제가 시행되었다. 일제는 경성제대만 6년제로 운영하여 학술연구를 지향하고, 나머지 학교는 4년제 교육을 통해 의사를 양성했으나, 건국이후 모든 의대가 현행 6년제가 된다. 이는 의사공급이 부족하게 된 원인이었다. 1952년 세계보건기구는 일차의료수요를 충족하기 위해 준의사제도를 권고하였으나 정부와 의대교수들이 반대한다. 대신 충족되지 않는 일차보건의료의 수요를 약사가 주로 담당하게 되었다. 약사가 처방전 없이 조제를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정부 재정에서 보건의료비 지출비율은 1%로 건강문제를 개인적 책임으로 전가시켰다고 볼 수 있다. 나. 제도의 확립과 민간 중심 의료공급체계의 형성 : 1961년~ 1977년 1961년 위생관련 법규, 1962년 의료법, 보건소법, 식품위생법, 1963년 사회보장 관련 법, 산업재해보상보험법, 예방접종의무화, 의료보험법이 재정되었다. 제도는 정비되었으나 의료서비스를 공급하기 위한 공적 투자는 이뤄지지 않았다. 일제 시대 때 설립된 도립병원을 포함하여 시·도립병원을 추가 설립하였으나 종교재단이나 사립대학 등이 소유한 사립재단 병원의 증가추세를 넘어서지 못했다. 그 결과 1949년에서 1971년까지 국공립병원이 1.6배 증가하는 동안 사립재단병원은 7.3배 증가하였다. 병상 수뿐만 아니라 시설, 인력과 같은 질적인 측면에서도 사립병원이 국공립병원을 앞서기 시작한다. 개인의원이 의료서비스 공급의 주축을 이루는 시대였다. 당시에는 국민 대다수가 가난하고, 의료보험이 없었기 때문에 입원 유효수요가 적었다. 병상 이용률은 50%를 밑돌 수밖에 없었다. 경제적 여유가 없는 환자들은 의료요구를 외래로 해결할 수밖에 없어 외래 수요가 주를 이루었다. 외래 수요에 맞춰 의사들은 대부분 개인의원을 설립하였다. 전체의사 중 70%가, 전문의 중 60%가 개원의사였다. 1960년대 한국 병원의 보수가 적은 것도 개원을 선호하게 된 또 다른 이유였다. 전문의는 과잉인데 의료보험의 부재로 병원비가 비싸 병원에 대한 환자의 유효수요는 부족했다. 이러한 가운데 미국에서 이민 요청이 있자, 196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 초까지 약 3,500명의 의사가 이민을 했다. 이는 당시 전체의사의 1/4에 해당한다. 종합병원도 수익을 위해서 외래에 집중하면서 개인의원과 역할이 겹치기 시작한다. 병원의 외래 환자는 1960년에 입원 환자의 2배에서 1971년에는 4~5배로 증가한다. 개인의원을 설립한 의사들 중 일부는 의료자본형성을 주도해서 자본가가 된다. 개원의가 종합병원의 시설을 이용하지 못하는 폐쇄형 체계에서 개원의사가 병상을 갖춰 준병원 기능을 하다가 자본을 모아 시설을 확대하는 방식의 의료자본형성이 이루어진다. 지역사회의 의료수요에 알맞은 규모로 재원이 투자되고 병원이 설립되는 외국과 달리, 민간의료의 이윤추구논리가 주도하면서 무질서한 의료공급체계를 만들어 낸 것이다. 또한 이러한 역사적 과정으로 인해 한국 민간의료기관의 다수가 법적으로 비영리법인이지만 실제로는 법인 이사장이나 재벌 기업의 오너 혹은 그 가족이 지배하는 형태가 되었다. 다. 법정의료보험의 시작과 대중보건의료의 형성 : 1977년~1989년 1977년 500인 이상 사업장을 대상으로 의료보험이 시작된다. 박정희 정부가 의료보험을 도입하게 된 이유는 대중의 정치적 불만을 무마하기위한 통치성 확보의 필요라고 볼 수 있다. 노동, 생활조건의 변화에 따른 의료수요에 부응해야 할 필요도 있었고, 발전주의시기 중공업 발전에 필요한 숙련 노동자의 건강을 일정 정도 확보해야 할 자본의 필요도 존재했다. 처음 도입된 의료보험은 전체 인구의 8.6%에 해당하는 중산층을 대상으로 하고 불평등을 강화하는 역진적 정책이었다고 평가될 수 있다. 또 다른 특징은 조합방식이다. 지역, 직장별로 조합을 만들어서 독립적으로 재정을 운영하게 하고, 법정급여는 균등하나 부가급여는 조합에 따라 차등을 주는 방식이다. 조합방식은 전 국민을 포괄하지 못하는 선별적 방식이면서, 재정 위험을 분산하는 기능도 제한적이라는 단점이 있다. 게다가 정권을 지지하는 인사들을 조합장에 임명하면서 의료보험조합들은 지배벨트의 기능을 하게 되었다. 그 후 지속적으로 대상이 확대되어 1989년에 전국민의료보험이 달성된다. 이는 근본적 개혁은 아니고 점증적, 추가적 개혁에 가깝다. 1988년 농어촌 지역의료보험의 경우 직장조합중심의 의료보험제도에 138개의 지역의료보험조합을 추가하는 것으로, 1989년에 도시자영업자를 위한 117개의 지역의료보험조합을 추가하는 것으로 완성한다. 보험 확대로 인해 의료수요가 증가한다. 그러나 정부는 공공의료기관 공급을 확대하기 위한 재정 부담을 늘리지는 않고 민간에 대한 차관과 금융지원을 통해서 민간의료기간 위주의 공급체계를 촉진한다. 1980년대 초 의료취약지역 병원건립사업이 그 첫 번째 예다. 67개 의료취약지역을 설정하여 건립희망자가 부지를 구입하면 건축비는 금융기관에서 장기융자를 해주고, 장비는 일본해외개발자금(OECF)차관을 이용하여 현물로 지원하였다. 6,580병상이 건립되는데 주로 의료법인에 융자를 준다. 아산재단, 대우의료재단에서 건립을 하는데, 초기부터 문제가 나타나서 대도시 주변 지역이 아닌 병원들은 인력부족, 운영자금부족, 수요부족에 시달리게 된다. 민간의료시설에 대한 정부 지원투자의 두 번째 예가 재정투융자특별회계자금과 농어촌특별회계 자금 지원을 통한 민간병원 확충지원사업이다. 이전 사업의 실패를 반영하여 41개 군 지역에 한정해서 100병상 이내로 운영부담을 줄이고 인력수급을 원활히 하기 위해 의사를 건립자로 선정한다. 자금은 농어촌 발전기금을 통해 장기 저리 융자를 해준다. 이들 사업으로 인한 병상증가 기여도는 1994년 26.9%, 1995년 48.2%, 1996년 45.4%등 우리나라 병상증가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의과대학 신설 남발을 통해 그 수가 증가한 의과대학 부속병원은 두 가지 측면의 비교우위를 무기로 병원시장에서 규모를 계속 확장시킨다. 첫째, 학교법인 부속 수익사업체 형식으로 설립이 허가되어 세제지원을 누릴 수 있었다. 둘째, 의사인력에 대한 자본통제력을 갖고 있었다. 교수라는 지위로 숙련인력을 안정적으로 고용할 수 있었고, 전공의를 통해 의사인력을 저임금으로 고용할 수 있었다. 이렇게 확대된 사립대학 부속병원은 2002년 전체 종합병원 병상의 1/3을 차지하고, 의원, 2차병원의 생산기지 역할을 한다. 정부의 의사 공급 확대정책 오류로 인해 거대한 민간의료기관과 그 생산기지가 양산된 것이다. 공공병원 민영화는 매각, 운영권 이양 혹은 외주, 독립채산제 도입, 시장자유화, 규제철폐, 국가지원의 축소 등의 형태로 1970년대 후반부터 진행된다. 시·도립병원은 1971년부터 지방공기업으로 운영되었는데 만성적 경영 적자 등을 비판받다가 1981년 지방공사체계로 전환된다. 이러한 지방공사의료원화는 독립채산제를 통해 수익성을 고려한 운영을 하게 되어 민간병원과 차이가 없어진다. 비슷한 흐름으로 1978년 국립 서울의대 부속병원의 특수법인화, 1987년 시립영등포병원 민간위탁 등이 있다. [표 1] 의료기관의 종별 추이 연도 이러한 민간 중심의 의료자원개발을 지원한 결과, 1977년에서 1987년까지 국공립병상의 비율이 53.2%에서 29.9%로 줄어들었다. 의료자원개발이 본격화된 이 시기에 민간 중심의 의료공급체계와 공적 의료재정체계의 결합이라는 한국 보건의료체계의 특수한 성격이 틀을 갖추게 된다. 이러한 모순적 결합은 의료전달체계를 왜곡한다. 개인의원의 성장세는 계속되었으나 내용적으로는 위기를 맞으면서 민간병원이 주도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한다. 경제력 상승과 의료보험 도입으로 인해 입원수요가 폭증하고 정부가 병상 증대 장려, 지원을 한 결과다. 의료기관의 종별 증가 추이(표 1)에서 종합병원이 압도적으로 증가하고 있는 사실이 이를 반영한다. 민간의료기관의 비율이 높아지면서 종별 시설 비율뿐만 아니라 진료의 성격도 왜곡된다. 종합병원의 외래 점유율은 건강보험을 통한 의료보장이 확대될수록 더욱 심해진다. 의료서비스는 적절한 전달체계를 갖춰야 지역사회의 요구에 부응할 수 있다. 필수서비스인 일차의료는 지역적으로 균등하게 배분하여 형평성을 높이고, 고도의 의학기술이나 자원이 필요한 의료서비스들은 특정 의료기관에 집중시켜서 분화와 전문화, 자원의 효율을 높여야 한다. 병원은 중증 입원 환자를 중심으로 진료하고, 의원은 경증 외래 환자를 진료하면서 중증환자는 병원으로 이송시키는 의료전달체계가 형성되어야 한다. 그러나 한국의 경우 입원수요가 적은 상태에서 민간병원이 수익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외래진료를 할 수밖에 없다. 그러기 위해서 병원 운영의 재정적 책임과 통제를 공공적으로 해결하는 것이 이상적이지만 최소한 보험정책을 통해서라도 조정할 필요가 있었다. 병원의 외래 진료에는 수가를 적게 책정하고, 입원 진료는 수가를 많이 책정하는 방식이 그 예다. 그러나 그러한 정책은 미흡했고, 1979년 전체 의료기관 외래 진료비의 9.5%를 차지하던 종합병원이 1984년에는 31.3%를 차지하게 되었다. 전달체계 왜곡이 이 시기부터 이미 구조적으로 굳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민간 중심의 의료공급체계와 공적 의료재정체계의 결합이라는 한국 대중보건의료의 특수한 성격은 모순을 가지고 있다. 공적 성격을 갖는 의료재정체계와 사적 성격을 갖는 의료공급체계가 서로를 확대시키면서 양 체계의 위기를 강화하기 때문이다. 건강보험은 공급자를 제대로 규제하지 못해서 지속적인 재정위기, 정당성 위기에 처하게 된다. 이미 수 천억 원의 자본규모를 갖춘 기업으로 성장한 병원을 효과적으로 통제할 수 없게 되면서 의료전달체계 확립이나 고가의료장비 구입 규제와 같은 정책이 계속 실패한다. 낮은 보장성은 보험제도가 건강을 보장하기 위한 사회제도가 아니라 ‘의료비를 할인 받을 수 있는’, 단순한 의료이용 및 소득보장의 장치로 이해되었다. 한편 공급체계는 거시적 비효율성이 증가하게 된다. 의료전달체계가 붕괴되어 효과적으로 질병에 대응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무질서한 경쟁 속에서 병의원은 경영위기에 처한다. 수입을 보전하기 위해 공급자는 건강보험공단에 급여 항목의 수가 인상을 지속적으로 요구하는 한편 고가진단장비, 상급병실, 선택진료 등 비급여 의료를 확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