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보다

  • 2006-02-03

    가족문제: 성별분업의 재생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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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번역> 이진숙 여성위원장·정지영 정책편집부장 [편집자 주] 지난 호에서 다뤘던 1970년대 사회주의 페미니스트들의 가사노동 논쟁은 이후 가부장제를 둘러싼 논쟁과 가족형태에 대한 논쟁으로 발전했다. 가부장제를 둘러싼 논쟁은 여성억압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규명하려는 시도였다. 하지만 가부장제를 여성억압의 근본 원인으로 제기하는 것에는 가부장제가 자본주의와 병행하는 생산양식을 의미하는 것인지 여성억압 일반을 추상화하는 것인지 모호함이 존재했다. 가족형태에 대한 역사적인 분석은 ‘여성억압의 원인이 자본주의냐 가부장제냐’라는 불모의 논쟁을 넘어설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다. 이로써 현재의 가족이 역사 이래 고유한 것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조직된 것임을 밝히고, 그 과정과 의미를 분석할 수 있었다. 그리고 역사적 가족형태에 대한 분석을 통해 가정성 숭배, 성별분업, 공사 분리, 여성노동에 대한 평가절하 등을 복합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 가능성과 가족의 전화가 여성의 권리와 해방에 가지는 중요한 무게를 인식할 수 있다. 이 글은 ‘전통적’이라고 여겨지는 현재의 가족형태가 사실은 매우 짧은 역사를 가지고 있음을 지적하고, 이 새로운 가족이 발전하는 과정을 다루면서, 그것이 조장하는 성별분업과 그것을 지탱해주는 이데올로기를 비판하고자 한다. 이를 통해 우리는 가족이 현재처럼 가족 구성원 사이의 애정과 배타적인 유대로 정의된 것이 최근의 일이며, 남성 생계부양자·여성 가사담당자 모델이 보편적인 것도 아니고 그렇게 될 수도 없음을 알 수 있다. 번역대본은 다음과 같다. Drucilla K. Barker and Susan F. Feiner, "Family Matters: Reproducing the Gender Division of Labor," Liberating Economics: Feminist Perspectives on Families, Work, and Globalization, The University of Michigan Press, 2004. 한 인기 있는 식당의 슬로건은 활기차게 외친다. “이 곳에 오면, 당신은 가족입니다!” 우리는 묻는다. 우리의 저녁은 공짜인가? 돈을 내는 대신 설거지를 할 수 있나? 물론 아니다. 당신이 어떤 식당의 단골이 되어도, 당신은 가족이 아니라 고객이다. 가족이란 결혼, 출산이나 입양, 또는 서로에게 경제적·사회적·감정적 지원을 제공하는 데 상호 동의함으로써 결합한 사람들로 구성된 사회적 단위다. 경제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가족은 생산, 재생산, 재분배와 관련된 많은 경제적 활동이 벌어지는 장소다. 요리, 청소, 양육, 그리고 시장 수입에 접근할 수 없는 가족 성원의 부양은 이런 활동들의 예다. 누가 이런 일을 하고 어떻게 가족의 자원을 할당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일에는 종종 긴장과 갈등이 발생한다. 실제 가족 내부의 경제적 관계는 지원, 보살핌, 협동뿐만 아니라 불평등, 갈등, 착취로 특징지어 진다. 가족(family)이라는 말은 라틴어 파밀루스(familus)에서 유래했는데, 이 말은 “한 남성과 그의 하인들”을 의미한다. 이 해석은 고대에 아내가 남편의 재산이었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아내는 아이를 낳아 기르고, 요리하고, 옷감을 만들고, 가구를 관리함으로써 남편에게 봉사하는 존재로 여겨졌다. 남편은 가구의 당연한 우두머리였다. 결혼, 부부의 역할, 배우자의 의무 개념이 역사 속에서 변해왔지만 남성의 권위와 특권에 대한 기대는 19세기까지도 거의 도전받지 않았다. “한 남자의 가정은 그의 성(城)이다”1)라는 유명한 경구를 생각해보라. 페미니스트로서 우리는 묻는다. 이 성에서 일하는 가신과 하인은 누구인가? 그 경구는 결국 다음과 같은 사실을 함축하고 있다. 가정에서 한 남자의 생활은 왕의 생활과 마찬가지로 가사의 고역에서 면제되어야 한다. 가구를 운영하는 데 필요한 일들은 많이 변했지만, 사랑, 명예, 복종의 권고가 많은 결혼식의 일부인 것처럼 대부분의 가사 노동은 여성의 영역으로 남아있다. 페미니스트 경제학자들은 가부장적 권력과 가족 내에서 발생하는 자원 재분배, 가사 노동, 소비의 유형 사이의 상호작용을 분석한다. 오늘날 가족생활을 구성하는 경제적 관계의 많은 부분들이 과거와 마찬가지로 시장 외부에서 발생한다. 아이들은 식사의 대가를 부모에게 지불하지 않으며 성인 구성원도 서로의 도움과 협력에 비용을 지불하지 않는다. 이런 이유들로 인해 페미니스트 경제학자들은 가족 경제와 시장 경제가 평행하다고 가정하지 않고 가족을 분석한다. 시장 경제는 공급과 수요, 교환을 위한 생산, 이윤, 계급 갈등으로 이뤄진 친숙한 공적 경제다. 가구 경제는 시간, 애정, 돈의 지출을 통해서 인구가 재생산되는 가내 관계의 “다른” 경제를 구성한다. 가족의 조직에서 남성 생계부양자·여성 가사담당자 모델이 이상으로 유지되고 있기 때문에 현재의 서구 가족의 발전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가족에 대한 이런 견해의 역사적 우연성, 그것이 조장하는 성별분업, 그것을 유지시키는 이데올로기를 증명하는 것은 현재의 경제 정책에 대한 페미니즘적 비판에 핵심적이다. 대다수 페미니즘적 사회정책의 입장은 이런 가족 형태에 대한 비판적인 이해에 기초하고 있다. 가족, 과거와 현재 애정 관계가 가족생활에서 분명 중요한 역할을 해왔지만, 가족 구성원 사이의 감정적 유대만으로 가족관계를 정의하는 것은 최근에 이르러서다. 페미니스트 학자들은 가내 영역이 중요한 경제적 기능을 한다는 점을 오래 전부터 인식해왔다. 생존(특히 영·유아와 노인들의 생존)은 보통 가족 집단의 소속에 의지하고 가족의 생존은 보통 개인의 생존에 핵심적이다. 역사적으로 여성과 아동의 일상 노동은 남성의 일만큼이나 경제에 필수적이었다. 인간의 사회 조직의 장구한 발전에서 대다수 가족들은 가구의 생산 활동에 참여하는 모든 이들에게 의존했다. 하인과 다른 일꾼을 포함하여 가구 내에서 일하는 모든 사람들은 가족 구성원으로 간주되었다. 그리고 그들―하인, 일꾼, 아내, 어린이― 모두는 가장의 지배와 권위에 종속되었다. 18세기 말 19세기 초 산업혁명 이전에, 즉 대량 생산과 임금 노동이 대다수 서구인의 생활을 주조하기 전에, 가족은 음식과 옷, 그리고 일상에서 사용하는 물품을 만들었다. 이런 자급자족의 유형은 생산과 소비, 일과 여가가 병행되었음을 의미한다. 즉 이런 활동들은 시·공간적으로 분리되지 않았다. 가족이 사는 곳이 가족이 일하는 곳이었으며 가족이 소비하는 것은 주로 가구 노동의 산물이었다. 전(前)산업 시대의 농업 공동체에서 경제 활동은 일차적으로 교환이 아니라 사용을 위한 것이었다. 따라서 대부분의 인간 역사에서 가정과 경제는 동일한 것이었다. 우리의 현대적인 시각에서 보면, 가족생활과 노동의 결합은 전근대 생활의 향수어린 낭만적 이미지를 환기시킬 수도 있다. 하지만 그 가족은 가부장적이었고 노동은 끝이 없었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 여성과 아동은 자신의 운명에 대한 발언권이 거의 없었고 생존을 위해서는 동틀 녘부터 어스름까지 고역을 했던 것이다. 가구는 일차적으로 실을 잣고 베를 짜고 옷을 짓는, 고기를 도살하고 야채를 저장하는, 양초와 비누를 만드는 내부의 노동에 의존했다. 이런 생필품은 상업적 생산이 아닌 가구 생산의 일부였다. 가구가 완벽하게 자급자족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거래와 물물교환이 존재하기는 했다. 바구니, 통, 못, 쟁기, 신발 등의 중요한 물품들의 생산에는 전문화된 노동이 필요했다. 가족은 농산물을 이런 수공품과 거래했다. 장인(匠人) 가구와 농민 가구는 그들의 생산품 중 일부를 시민적·종교적 제도에 바쳤고, 다시 이들이 이런 물품을 종종 사치품이나 전쟁 도구와 교환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가구는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생산했고, 가구의 통상적인 필요를 초과하는 대부분의 잉여는 부수적이었다. 이런 잉여가 생긴다면 지역 시장에서 수공품과 교환되었을 것이다. 성별분업이 존재하긴 했지만, 남성과 여성은 대개 식료품과 수공품의 생산을 병행했다. 농촌의 자급자족은 건강한 인구가 모든 필수적인 일을 수행해야만 가능했다. 따라서 노동 기술은 소수에게 전문화되기 보다는 인구 전체에 보급되었다. 대부분의 유럽에서 대략 6세기부터 16세기까지 경제 조직의 지배적인 형태는 일차 생산 단위인 가부장적 대가족으로 이뤄진 이런 유형의 비교적 자급자족적인 농업 공동체를 포함했다. 16~17세기 동안 수많은 내·외적 변화가 일어나 봉건 경제의 특징이었던 생산과 소비의 통일을 침식했다. 이 과정은 영국에서 가장 명백하게 나타났다. 영국의 시골에서 부농들이 토지에 대한 자신의 관습적·봉건적 권리를 공식적인 계약상의 사적 소유권으로 전환함에 따라 토지의 집합적 사용이 서서히 사라졌다. 이 새로운 사적 소유권으로 인해 지주들은 농업 생산의 조직에서 전면적인 변화를 꾀할 수 있었다. 기술이 농업 생산을 혁신하고 자본(기계)이 인간노동을 대체함으로써 가족과 심지어는 마을 전체가 변화를 겪었다. 곡물의 윤작, 배수, 경작 패턴, 구획에 있어서의 혁신을 통해 농업 산출량과 경쟁력 있는 농업을 운영하는 데 필요한 자본이 증가했다. 땅을 경작했던 또는 토지를 이용할 권리를 가졌던 많은 이들이 더 이상 농업에 필요치 않게 되었고 채무 때문에 선조 대대로 내려오는 집을 떠나야만 했다. 농촌 실업이 심화되면서 빈곤 역시 심화되었다. 점점 더 많은 가족들이 땅을 경작할 수 있는 전통적인 권리를 상실하면서, 그들은 생존에 필요한 재화를 구매하기 위해 화폐 임금에 의존하게 되었다. 18세기 초반에 영국의 인구 대다수가 농장에 살았으나, 18세기 말에 이것은 더 이상 사실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도시에 살게 되었다. 이런 과정의 변종이 서유럽과 미국에서도 발생했다. 19세기를 거치면서 기계가 대량으로 생산한 재화가 장인·가내 생산을 대체했다. 점점 더 많은 사람들―여성, 남성, 아동―이 생존을 위해 화폐 임금에 의존하게 되었다. 가구의 필수품들은 이제 가족노동으로 생산되지 않았고, 대신 화폐로 구매해야 하는 상품이 되었다. 이런 상황이 발생함에 따라, 상품 생산과 상품 소비는 점차 시·공간적으로 분리되었다. 상품이 가정 밖의 작업장에서 생산되었다면, 상품 소비는 작업장 밖에서 이루어졌다. 여러 면에서 경제사는 한 때 가구에서 만들던 물건을 더 좋게, 더 빠르게, 그리고 더 싸게 생산하고 그것을 가구에 되파는 기업의 역사다. 가정 생산에 비해 공장 생산이 가진 더 큰 효율성은 직물, 비누, 신발, 양초, 연장, 심지어 기초적인 식량의 가정 생산을 여분의 것으로 만들었다. 공장, 시장, 임노동 체계가 전통적인 경제 관계를 침식함에 따라 생산과 소비의 통일은 점차 압박을 받았다. 이런 변화는 가족의 경제적인 조직과 정서적인 조직을 심대하게 분화시켰다. 자본주의적 생산관계가 점차 확장되면서 생활의 인격적·정서적인 관계의 측면과 상품생산, 고용, 시장에 관련된 측면이 분열되었다. 이런 변화가 여성의 후생에 미친 영향에 관해서는 상당한 논쟁이 있다. 어떤 이들은 이 변화가 여성들의 소득벌이 가능성을 제한함으로써 여성이 점차 남성과 남성의 임금에 의존하게 되었다고 주장했다. 전통적으로 여성들은 집합적으로 활용하는 공유지에서 남은 곡식을 모으고, 땔감을 줍고, 작은 가축을 돌보는 활동으로 소득을 벌었기 때문이다. 다른 이들은 이런 변화를 통해 여성들이 가사의 고역으로부터 해방되었다고 주장했다. [양자가] 동의하는 한 지점은 비록 여성들이 소득벌이의 길을 찾았더라도 19세기의 일반적인 경향에 따라 여성의 생산 활동이 점차 가정적 영역으로 강등되었고 이는 여성의 노동이 아니라는 생각에 기여했다는 사실이다. 산업생산이 점차 중요해지면서 가구는 오로지 소비만 하는 장소로 간주되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가구의 생산 활동은 비생산적인 것으로 정의되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중요한 생산적 경제 기능이 가구 내에서 지속되었다. 가구는 오늘날까지도 노동력이 “생산”되는 곳이다. 가구의 많은 활동―쇼핑, 계획, 식사 준비, 세탁―은 소비인 동시에 노동이다. 사회세력의 흥미로운 배열은 이런 변형을 설명해주고, 가사 노동의 주변화가 어떻게 성별 불평등에 기여했는지 보여준다. 가정성 숭배 자본주의가 봉건주의를 대체함에 따라 새로운 사회·경제 관계가 출현했다. 자본주의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용의 양식을 구매하기 위해서 노동 시간(일한 시간)을 화폐 임금으로 교환해야만 했다. 이는 두 개의 새로운 사회 계급을 창조했다. 하나는 생존을 위해 임금에 의존하는 산업, 농업, 소매 노동자들을 포괄했다. 또 다른 새로운 계급은 부유한 농장주, 장인, 소매상인, 상인의 층에서 출현한 부르주아였다. 부르주아가 자신들의 이윤을 재투자함에 따라 그들의 공장과 농업이 성장했다. 그 결과로 나타난 농업·산업 상품의 쇄도는 가격을 낮췄고, 따라서 효율성이 떨어지는 소규모 가정 생산자들을 파괴했다. 가정 생산자들이 산업에서 구축(驅逐)됨에 따라 임노동자 계급이 부상했다. 부르주아가 번성함에 따라 이 계급의 권력·위세·지위를 표현하는 새로운 방식이 부상했다. 봉건 사회가 소농과 토지 귀족 사이의 위계적인 경제적·정치적 관계로 형성되었다면, 부상하는 자본주의 사회는 임노동자와 부르주아, 즉 임노동자를 고용한 공장, 가게, 광산 소유주 사이의 위계적인 관계로 형성되었다. 부르주아는 경제적 자원을 축적했고 엄청난 정치권력을 휘두르게 되었다. 문화 영역에서 부르주아는 봉건 귀족의 행동을 모방함으로써 새로운 사회적 위계 속에서 자신들의 특권적 지위의 정당성을 추구했다. 18, 19세기 동안 부르주아의 가족은 여성과 아동을 산업 작업장의 노동에서 체계적으로 철수시킴으로써 (귀족과의 유사성을 보여주는 동시에) 스스로를 노동자와 구별할 수 있었다. 이 시대의 기업가 남성이 초기 자본주의의 살인적인 경쟁에 매여 있었다면 이 계급의 여성들은 주부가 되어 점차 여성에게 자연스러운 것으로 간주되었던 의무―가사와 모성―에 종사할 것을 기대 받았다. 이런 배치는 수 세기 동안 노동하지 않고도 살 수 있었던 귀족을 모방하려는 부르주아의 열망을 반영했다. 가정생활과 산업생활의 이런 양식이 사회적 지위의 표지로 수용되면서 이런 가구 관계를 정당화하기 위해 “가정성 숭배” 이데올로기가 출현했다. 이 이데올로기는 가족과 가구를 오로지 양육, 친애, 정서의 관점에서 정의했다. 가구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노동과 노력이 대개 무시되었고, 여성의 참된 본성과 소명에 대한 화려한 감상 속에서 경제적 의존 관계가 은폐되었다. 이 이데올로기의 중요한 효과는 수없이 많지만, 그 중에서도 생산과 소비, 공과 사, 노동과 여가, 경쟁과 순응이라는 친숙한 이원론을 재생산한다는 점이 중요하다. 가정성 숭배는 무급의 가사 노동이 여성의 일이며 여성의 일은 노동이 아니라는 믿음을 합리화했다. 결국 빅토리아 주부의 이상은 모든 여성의 규범이 되었고 주부는 “유한부인(woman of leisure)”으로 불리게 되었다. 하지만 외양과 이데올로기에도 불구하고 많은 여성들이 유급 고용을 필요로 했(고 오늘날까지도 그렇)다. 여성들은 비혼(非婚)일 때, 자신이 의존하는 남성의 소득이 너무 적어 가족을 부양할 수 없을 때, 사별·이혼·유기 또는 선택에 의해 아이들을 홀로 부양해야 할 때 직업을 필요로 한다. 우리는 자신의 의존적인 지위에 대해 불만을 표현해왔던 여성들의 기나긴 그녀만의 역사(herstory)가 있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엄청난 사회적 치욕에 맞서 여성들은 교육·고용·재정적 독립을 추구했다. 그러나 여성의 권리를 위한 투쟁은 격렬한 반대를 낳았다. 여성에게 적합한 장소는 가정임을 사람들에게 확신시키기 위해 믿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양의 지적·문화적·종교적 에너지가 투여되었다. 사실 18, 19세기에 여성들이 쓴 소설들은 종종 여성 억압과 여성의 공민권 박탈의 감정적 결과를 상세히 다루고 있다. 페미니스트이자 경제학자이며 사회 비평가인 샬롯 퍼킨스 길먼은 그녀의 소설 『노란 벽지』에서 이런 이상화된 규범을 페미니스트의 통찰력으로 분석하고 있다. 만약 여성들이 화폐 수입에 접근할 수 없다면 자신들의 시간을 무급 활동에 보낼 수도 없기 때문에, 빅토리아 이상에 부합하는 방식으로 사는 것은 남편이나 아버지의 성공에 따라 좌우되었다. 오직 상층 계급만이 의존적인 주부라는 이상을 실현할 수 있었다. 대부분의 다른 여성들에게 빅토리아 시대의 산업 경제는 엄혹한 곳이었다. 하지만 가정성 숭배를 통해 성별에 대한 사회적 시각이 형성됨에 따라 가난한 노동자 여성의 억압적인 경제 현실은 은폐되었고, 상층 계급 여성으로 엄격히 한정된 기회는 여성에게 적합한 것으로 여겨지는 성별 역할의 숨 막히는 협소함을 은폐하는 감정적인 미사여구로 치장되었다. 빅토리아 가구를 유지하는 데에는 하인들의 가사 노동이 필요했다. 19세기와 20세기 초 유럽의 부르주아 가구는 하층 계급 출신의 하인들을 고용했는데, 노동과 서비스에 적합하도록 이들의 언어와 복장은 구별되었다.2) 미국 북동부의 유복한 여성들은 동유럽과 아일랜드의 새 이민자들을 고용했다. 남부의 백인 여성들은 남북전쟁 이전에 노예였던 아프리카계 여성들을 고용했다. 아프리카계 여성들은 비록 법적으로는 해방되었지만 인종적 아파르트헤이트 체계―짐 크로우(흑인차별정책을 명문화한 법안)―에 의해 여전히 최악의 직종에서 비참한 급여를 받는 노동자였다. 가정성 숭배는 그 시대 경제적·사회적 관계의 핵심적 요소로, 여성들을 전업주부이자 소비자의 역할로, 남성들을 전업 임금 생활자이자 생산자로 규정했다. 가정성 숭배의 옹호자들은 이런 이분법적 성별관을 종교, 생물학, 자연법, 심리학에 이식하려 했다. 성별에 관한 이런 본질주의적 견해의 발전이 가족·교회·국가에서 여성의 종속적 지위를 보증하는 법, 인습, 사회적 관습의 체계를 주도했다. 여성, 재산, 고용, 법 법 앞에서 여성이 동등한 권리를 가진 완전한 인간이라는 것은 혁명적인 개념이다. 19세기 중반까지 여성들은 ― 결혼 여부와 상관없이 ― 독립적인 법적 존재가 아니었다. 중앙 정부가 전국의 법률을 실행하는 서구에서 유부녀 신분에 관한 법률(또는 유사한 교의)은 사실상 여성의 생활의 모든 면을 지배했다. 이 법들은 남성과 그 아내를 일체로 규정했고, 그 일체는 남성이었다. 여성들이 가족의 생계에 얼마나 기여했는가는 중요하지 않았다. 어떤 상황에서도 여성은 모든 종류의 재산이나 임금에 대한 독립적 권리를 갖지 못했다. 아내는 남편의 재산으로 남편들이 아내의 소득이나 물려받은 재산에 대한 법적 권리를 가졌다. 심지어 여성의 노동이 가족 농장과 가족 기업의 성공에서 핵심적이라 할지라도 여성들은 수당, 자신의 임금, 자신의 재산을 집행할 수 있는 법적 권리가 없었다. 유사하게 재산의 매각에서도 여성들은 매각의 절차에 대한 어떤 권리도 없(고 심지어 그 재산이 그들의 친척에게서 유산으로 받은 것일 때도 매각을 막을 수 있는 법적 권리도 없)었다. 이는 재산 가치가 증식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사실 남편이 죽은 여성과 아이들을 집 없고 곤궁한 상태로 방치하고서 가족 재산을 팔 수 있는 상황도 있었다. 게다가 유급 고용이 흔한 많은 나라에서도 여성들은 결혼과 동시에 그들의 직업을 포기해야 했다. 19세기 중반에 이르러서야 많은 여성들과 일부 남성들이 이런 관행의 근본적인 불공정성에 문제를 제기하기 시작했다.3)영국에서 바바라 레이 스미스 보디천, 엘리자베스 바렛 브라우닝, 해리엇 마티뉴, 존 스튜어트 밀, 해리엇 테일러 밀과 같은 사회 개혁가들은 영국의 이런 억압적인 법을 바꾸기 위해 작업했다. 이 개혁가들의 가장 중요한 업적들 중 하나는 1880년대 후반에 ‘기혼여성의재산법’을 통과시킨 것인데, “이 법을 통해 아내들은 자신의 개인적인 재산과 소득을 통제할 수 있었다.” 아내가 결혼에서 모은 재산과 시장에서 번 임금에 대한 권리를 가진다는 급진적인 관념은 처음에는 1850년 이후 유럽과 미국을 휩쓴 혁명적 사회주의 운동의 지지를 받았다. 여성들이 임금을 벌어야한다는 견해는 당시의 지배적인 이데올로기를 거스르는 것이었고 노동자의 연대를 위협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오늘날도 여전히 페미니스트들을 분노케 하는 정치 운동 속에서 혁명적 사회주의자 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완전한 경제적 평등을 위한 여성들의 요구를 거부했다.4) 이들의 입장은 놀라울 것이 없다. 1890년대에 여성들이 본성상 가정생활에 적합하다는 통념은 상식이었다. 여성의 역할이 가정·가족에 연관되어 정의되면, 그들의 유급 고용은 말이 안 되는 것처럼 보인다. 결과적으로 기업이 여성들에게 남성보다 적은 임금을 주는 것은 정당화된다. 매우 영향력 있는 알프레드 마셜 같은 일부 경제학자들은 실제로 여성들이 가정에서 책임을 다하도록 여성의 임금을 낮게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세기 중반에 영국은 마셜의 견해를 담은 법(공장법)을 제정했는데, 이 법은 여성이 일할 수 있는 시간과 벌 수 있는 임금을 제한했다. 영국 여성 중 18~20%는 생존을 위해 생계를 꾸려가는 가구의 가장이었기 때문에 여성의 임금과 노동시간의 제한은 여성의 빈곤을 증가시키는 직접적인 결과를 낳았다. 유사하게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반, 미국에서도 개혁가들이 여성의 직종과 노동시간을 제한하는 여성 보호입법을 주장했다. 여기서 여성을 목표로 한 보호입법은 고임금이 여성의 의존성을 깨뜨릴 수 있기 때문에 임금이 너무 높아서는 안 된다는 관념에 기초했다. 동시에 여성의 임금이 너무 낮아서도 안 되는데, 그 이유는 극도의 빈곤이 여성을 성매매로 내몰 수 있기 때문이었다. 입법가, 성직자, 신문 편집장들은 “혈통의 어머니”의 도덕과 특성을 보존하려는 정책이 공익에 가장 잘 봉사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페미니스트 경제학자인 데보라 피가트, 엘렌 무타리, 마릴린 파워가 보여준 것처럼, 여성성·순백·혈통은 여론 속에서 연계되었고, 법은 이런 연계를 강화하기 위해 제정되었다. 앵글로 유럽 여성들을 보호하는 입법은 백인 여성들의 경제적 생존을 보장하려고 했다. 반대로 그런 보호는 유색 여성들이 하는 일에는 해당되지 않았다. 아프리카계, 라틴계, 아시아계, 그리고 미국 원주민 여성들에게 개방된 소수의 일자리는 이 새로운 법에 적용되지 않았다. 인종주의는 이런 여성들의 도덕성의 보존이 공익과는 무관하다는 견해를 분명히 보여주었다. 유색인종의 여성들은 어머니로도 노동자로도 노동입법에 포함되지 않았다. 성별과 인종 이데올로기는 이 여성들의 생활과 경험을 보이지 않는 것으로 만들었다. 영국과 미국 모두에서 이런 유형의 입법은 남성 생계부양자·여성 가사담당자 가족이라는 이데올로기를 반영했고 또 재생산했다. 이 이데올로기가 여성들의 경제적 독립에 장애가 되었기 때문에 이는 여성들의 물질적인 환경에 매우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실제 1960년대까지 기업이 동일한 직종에서 남성들보다 여성들에게 임금을 적게 지급하는 것은 합법적이었다. 오늘날, 여성들의 상황은 여전히 경제적 평등과는 거리가 멀다. 더 낮은 임금으로 인해 여성들은 남성들에게 의존적이고 종속적인 상태에 머물러있다. 남성의 임금이 여성의 임금보다 높은 것은 대체로 가정성 이데올로기의 물질적 기초였던 가족임금 체계의 유산 때문이다. 한 성인 남성이 그의 가족을 부양하기에 충분한 임금을 버는 것이 노동자계급 조직의 중요한 목표였다. 슬프게도 노동자계급 남성의 임금을 개선하는 것은 계급을 불문하고 여성들의 경제적 기회를 희생시켰다. 가족임금의 간략한 역사 남성지배적인 노동자계급 조직들은 가정성 이데올로기를 활용함으로써 상층계급과 동맹을 추구했다. 노동자계급 남성들은 고임금의 남성적 직종에서 가족임금을 수호하기 위해 여성들을 이 직종에서 배제하려 했다. 상층계급의 개혁가들은 여성의 본성에 관한 자신의 견해 때문에 여성들을 유급 고용에서 배제하려 했다. 실제로 여성은 너무 연약해서 산업 생활의 혹독함을 견딜 수 없다는 통념이 이 시기 노동사의 중요한 주제로 부상했다. 주지하듯이 가족임금의 성취는 영국, 미국, 그리고 나머지 서유럽 국가들의 노동조합의 중요한 목표였다. 남성 노조활동가들은 직종 경쟁을 제한하고 임금을 높이기 위해 특정 산업과 직종에서 여성을 배제하는 입법청원 운동을 활발히 펼쳤다. 그 결과 19세기 말, 핵심 산업에서 몇몇 최상층의 노동자들과 새로운 법인 관료조직의 관리자들은 중간계층 가족 수준의 음식·의복·집을 구매하기에 충분한 임금을 획득하는 데 성공했다. 이는 가정 밖에서 일자리를 구하는 또 다른 노동자가 없어도 한 명의 노동자가 대체로 가족을 부양할 수 있는 정도였기 때문에 가족임금이라고 불렸다. 심지어 모든 여성들의 절반 이상이 가정 밖에서 임금을 받는 오늘날에도 많은 이들이 여전히 기혼 여성―특히 백인 중산층의 어린 아이가 있는 여성―은 그 가족이 돈이 필요할 때만 가정 밖에서 일해야 한다고 믿는다. 여성을 양육의 특별하고 신비한 원천으로 지목하는 이런 집단적 신화가 존속한다는 사실이 이데올로기의 힘을 증명해준다. 생계부양자 남편과 가정적인 아내라는 이데올로기가 사회적인 진리가 되어갈수록 남성과 여성의 임금 격차는 더 커졌다. 대중적인 감성이 여성을 노동자가 아닌 아내·딸·어머니로 간주하기 때문에 여성의 임금은 필수적이라기보다는 부수적인 “용돈”으로 치부되었다. 이런 인식은 많은 여성들에게 남성의 부양이 가족을 유지하는 데 부족하다는 사실을 무시한다. 게다가 여성의 임금이 단지 “용돈”이라는 믿음은 저임금 공장, 제재소, 그리고 가내에서 요구하는 노동자의 용이한 공급에 딱 맞아 떨어진다. 즉 여성을 포함한 많은 이들이 여성의 임금을 일차적인 생계부양자의 임금을 보조하는 것으로 간주하는 한, 여성들은 남성들보다 적은 임금을 받을 것이다. 가족임금 체계가 기대되는 규범이 되어감에 따라 여성이 무급 가구 노동을 전문적으로 수행해야 한다는 경제적 압력도 높아졌다. 여성의 임금이 사실상 남성의 임금보다 낮기 때문에 여성이 유급 노동력에서 배제되는 것은 경제적으로 합리적이었다. 여성의 임금은 너무 낮아서 가정 밖의 임금 노동에 고용되면 할 수 없는 양육, 청소, 요리와 같은 일을 대체할 수 없을 것이다. 가족임금의 성취가 언제나 소수의 노동자계급에게 한정되었다는 점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미국에서 특정 인종 집단을 좋은 일자리에서 배제하는 것은 표준적인 관행이었다. 예를 들어 가족임금을 지급하는 일자리에서 유색인종 남성을 배제하는 데 인종주의가 의식적이고 고의적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미국 원주민, 아프리카계, 라틴계, 그리고 아시아계 미국인 가족은 여성과 아이들의 수입에 의존했다. 이 문제에 대한 노조의 인종주의적 정책은 노동자들을 분할했을 뿐만 아니라 백인 여성들과 유색인종 여성들의 이해를 분화시켰다. 이 여성들은 유급 고용의 절차, 출산, 양육, 가족 형성에서 상당히 다른 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가정성 숭배에 의해 이상화된 가구 유형은 인종주의적이고 성차별주의적인 기초 위에 세워졌다. 미국의 인종주의적인 노조 가입 규칙과 성차별적 보호입법은 가족임금에 대한 접근권을 엘리트 “노동귀족”에게 한정했다. 하지만 미국 내의 유색인종에 대한 착취가 현대 가족의 경제적 발전을 추동한 인종적 착취의 유일한 방법은 아니었다. 남미, 아시아, 아프리카로 팽창한 식민지는 유럽과 북미에서 많은 이들이 경험한 생활수준 향상에 중요한 기여를 했다. 노동계급 최상층의 임금상승은 부분적으로 식민지 산품(産品)교역의 대량 확산이 가져온 이윤 덕분에 가능했다. 노동귀족의 임금이 상승함에 따라 고용되지 않은 그들의 의존적인 아내들은 계급적 지위를 나타내는 장식품들을 구매할 수 있었다. 이 시기에 고급스런 사치품들이 제국주의적 무역 관계를 반영하는 이국적 생산품이었던 것은 우연이 아니다. 빅토리아 주부의 값진 소장품이었던 고급 카펫, 마호가니 탁자, 칠 도자기는 아프리카, 아시아, 남미, 카리브 연안의 식민지에서 남성·여성·아이들이 착취당했음을 보여주는 묵언의 증언이다. 페미니스트 경제학자 데어드르 맥클로스키는 여성들이 시장의 확대와 산업 자본주의의 발전으로부터 분명히 그리고 한결같이 이득을 얻었다고 주장한다. 이런 주장은 상품의 기계제 생산과 이에 따른 소비자 가격의 하락으로 인해 생활수준 향상이 널리 확산될 수 있었다는 견해에 기초한다. 이런 주장은 경제학·사회학·역사학 내에서 뜨겁게 논쟁되고 있다. 친시장주의적인 주류 경제학자들은 이런 견해를 지지하는 반면, 이단 경제학자들은 이런 혜택의 규모와 분배 양자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자본주의의 영향에 대한 이런 의문은 이 글의 시작에서 제기된 질문과 분석적인 수준에서 궤를 같이 한다. 즉 “한 남자의 가정이 그의 성일 때, 가신과 하인은 누구인가?” 무역과 산업혁명의 혜택이 대다수 사람들의 생활이 더 좋아지도록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할 수 있는가? 특정 인구가 경제적 관계의 이런 혁명적 변화의 비용을 과도하게 부담했는가? 부르주아의 여성과 노동자계급 여성은 이 비용과 혜택에 동일한 관계를 맺었는가? 서구 제국주의 국가의 국민들은 아프리카, 아시아, 남미의 국민들과 동일한 방식으로 식민주의를 경험했는가? 다른 페미니스트들 및 이단 경제학자들과 더불어 우리는 그렇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19세기와 20세기 초반 공장의 성가신 작업과 혹독한 규율은 산업혁명의 주요한 대가였다. 이런 노동조건 하에서 가정으로의 도피는 하나의 특권, 사실상 하나의 혜택이었다. 여성과 아이들의 보호는 상층계급 사회 개혁가들과 노동자계급 남성들이 공유한 목표가 되었다. 이 목표의 일부는 아동을 노동력에서 배제하고 양육을 중산층 가구의 주된 경제활동으로 만드는 것을 포함했다. 가정성 이데올로기는 양육을 여성만의 영역으로 만들었다. 이것의 중요한 경제적 기능은 주목받지 못했다. 동시에 보호입법에 의해 여성들은 수입에 대한 욕구나 일자리를 유지하고자 하는 욕망과 상관없이 많은 유형의 유급노동에서 밀려났다. 가정성 숭배는 남성 생계부양자·여성 가사담당자 가족 모델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제시함으로써 가족생활을 주조하는 다양한 이해관계를 은폐했다. 현재 서구 가족 안에서의 권력과 이해관계 20세기 동안 서구사회에서 가족은 남편과 아버지가 소득을 만드는 활동에 주력하고, 아내와 어머니가 가사와 양육을 전문화하는 형태를 동경했다. 이런 형태의 가족은 매우 현대적인 것이지만, 역설적이게도 종종 “전통적인” 가족으로 언급된다. 더욱이 실제 많은 가족들은 가정생활을 조직하는 이런 양식을 선택할 수도 없었다. 상대적으로 짧은 역사와 이런 정의에 해당하는 인구 분포의 협소함에도 불구하고 그런 가족 모델이 문화, 정치학, 경제학, 심지어 심리학의 영역에서 사회에 미치는 영향력은 강력했다. 우리가 이미 본 것처럼, 부르주아가 하층계급으로부터 스스로를 분리하려는 시도에서 출현한 전통적인 가족이 점차 다른 모든 가족 유형을 판단하는 규범 또는 표준이 되었다. 전통적인 가족에서 노동에 소비되는 시간의 양과 수행되는 일의 유형은 성별에 따라 다르다. 남성은 소득을 벌기 위해 가정 밖에서 전일제로 일하고, 여성은 가족을 유지하기 위해 가정 내에서 전일제로 일한다. 이런 가족 형태를 모방하고 싶어 하는 여성과 남성은 분명히 존재한다. 누군가 저임금 노동의 열악한 조건에서 면제될 수 있다는 전망은 극빈층 가족에게 분명 강한 호소력을 지닌다. 어떤 가족에게 전일제 주부는 중요한 신분적 상징이다. 또 다른 가족에게 여성이 전일제 주부의 역할을 맡는 것은 고비용의 질 좋은 양육 및 적정한 보수와 혜택을 제공하는 일자리의 부족에 대한 합리적인 대응책이다. 전통적인 가구 구조는 이런 가구의 성별분업이 여성의 노동, 소득, 재생산, 전반적인 후생에 대한 남성의 가부장적 권력을 어떻게 반영하는지 보여준다. 전통적인 가구 안에서 여성은 소득에 대한 독립적인 접근권이 없다. 따라서 여성은 남성 생계부양자의 관대함과 공정함에 의존하고, 그 결과 남성은 가구의 중요한 결정에 있어 상당한 권력을 소유한다. 실제로 페미니스트 사회학자 알리 혹쉴드의 노동과 가족의 관계에 대한 선구적인 연구는 전통적인 가구의 붕괴에 기여하는 주요 요인이 성공과 자아실현을 위해 추가적인 수입을 추구하고 가부장적 권위에 복종하지 않으려는 여성과 연관이 있음을 밝혔다. 점차 흔해지고 있는 다른 가구 유형은 “과도적” 가족이다. 이 가족형태에서 두 배우자는 모두 가정 밖에서 소득을 벌지만, 가사와 양육은 여전히 대체로 여성의 책무다. 여성이 가정 밖의 유급노동에 종사하지만 가구 노동이 여전히 여성에게 부과되기 때문에 이런 가구에서는 갈등이 발생하기 쉽다. 양육, 요리, 그리고 청소는 시간과 에너지를 소진시키며, 반복적이다. 기혼 여성이 주당 가사 노동에 소비하는 시간은 18~23시간 사이로 추산된다. 이에 비해 남편은 7~12시간 사이의 시간을 소요한다. 수잔 비안키는 최근의 연구에서 가정 밖에서 일하는 어머니의 숫자가 급격히 증가하고 있지만 아이와 함께 보내는 시간은 고용된 어머니와 고용되지 않은 어머니 사이에 별 차이가 없다고 보고한다. 그녀는 고용된 여성이 잠을 덜 자고 자진해서 일을 하며 자유 시간을 거의 갖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많은 고용된 어머니들이 가사를 담당할 노동자를 고용하고 싶어 한다는 것은 당연하다. 페미니스트인 우리는 유급의 가내 하인이 일련의 윤리적인 쟁점을 제기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가내 하인으로 고용된 이들은 일반적으로 인종·계급·종족 때문에 사회적 위계의 최하층에 있는 빈곤한 여성들이다. 이런 여성들은 점차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자신의 가족을 떠나 부유한 나라에 유입되는 이주자나 난민들로 채워지고 있다. 미국의 가내 노동은 대개 아프리카계 여성들의 유일한 선택지였고, 1960년대까지 대부분의 고용된 아프리카계 여성들이 가내 노동자였다.5) 오늘날, 미국에서 가내 노동자의 인종적·종족적 구성은 아프리카계 여성이 작업장에서 얻는 수입과 빈곤의 다양한 면모를 반영한다. 현재 미국의 가내 노동자들은 대체로 필리핀, 라틴 아메리카 또는 경제적 이행중인 동유럽으로부터 유입된 빈곤한 여성들이다. 세계적으로 다른 지역에서의 상황 역시 거의 동일하다. 페미니스트 지리학자 조니 시거에 따르면, 백만에서 백오십만 사이의 여성들이 가내 노동자로서 고용되기 위해 아시아에서 중동의 산유국으로 이주한다. 페미니스트들은 가내 노동자를 고용하는 것이 윤리적인가를 두고 논쟁한다. 어떤 이들은 다른 유형의 하인(예를 들면 배관공이나 정원사)을 고용하는 것이 문제가 안 된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다른 이들은 요리사, 청소부, 유모를 고용하는 것이 본질적으로 착취적이라고 주장한다. 우리의 입장은 노동, 양육 또는 요리를 위해 돈을 지불하는 것이 잘못되었거나 부도덕하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문제는 노동조건과 관련된다. 이런 하층의 일자리는 거의 언제나 가난하고 종종 자신의 가족이 형편이 안 좋은 여성들의 영역이었다. 이런 일자리를 공식 부문으로 들여오고, 성, 인종 또는 이주민 신분에 관계없이 모든 노동자들에게 법적 보호를 제공하는 것이 가내 노동의 지위, 급여, 안전성을 개선시킬 수 있을 것이다. 여성과 남성의 성별 역할에 대한 태도는 변하고 있다. 엄청난 수의 여성들이 노동력에 유입되면서 새로운 가족 형태, 즉 “평등주의적” 가족이 출현하고 있다. 이런 유형의 가족 안에서 성은 누가 가정 밖에서 소득을 버는가, 누가 가사 노동을 하는가를 결정하는 핵심 변수가 아니다. 가사 노동과 시장 노동은 분담된다. “‘각자의 능력에 따라’에서, ‘각자의 필요에 따라’로”6)라는 구호는 여기에서 작동한다. 많은 페미니스트들이 평등주의적 가구의 형성과 재생산을 장려하는 사회·경제 정책을 주창한다. 평등주의적 가구는 양육에 필요한 시간과 유급노동에 필요한 시간을 조정해야만 한다. 낸시 프레이저는 어떤 가족형태가 성평등을 촉진하고 성별분업을 해체하는가를 체계적으로 사고하기 위해 가족의 세 가지 이상적인 상, 즉 보편적 부양자 모델, 양육자 등가 모델, 보편적 양육자 모델을 제시한다. 보편적 부양자 모델은 여성과 남성의 노동 시장에서의 평등한 기회에 초점을 맞춘다. 이런 모델에서는 오늘날 가구 안에서 통상 여성이 제공하는 요리, 청소, 양육, 노인보살핌 서비스를 정부나 시장이 제공한다. 양육자 등가 모델은 양육자(보통 여성)가 가족을 돌볼 수 있도록 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런 정책은 관대한 가족 수당과 유급 휴가의 제공을 통해 전통적인 성별분업의 비용을 최소화한다. 여성의 생활은 남성의 생활과 다르지만 동등한 것이다. 프레이저는 완전한 성평등 실현에 이 두 가지 전략이 모두 부적합하다는 것을 인정한다. 한편으로, 보편적 부양자 모델은 유급노동에만 가치를 부여하기 때문에 남성 중심적이다. 다른 한편으로, 양육자 등가 모델은 여성의 경제적 독립을 촉진하지 못한다. 보편적 양육자 모델은 가정 안과 밖의 평등한 분업을 전망한다. 이 모델에서 여성과 남성은 모두 유·무급의 노동에 참여한다. 가사 노동 및 아동과 피부양자의 양육, 그리고 유급노동이 성인 가구성원들 사이에서 평등하게 분담된다. 이러한 분업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보편적 부양자 모델에서처럼 여성의 소득이 남성의 소득과 동등할 필요가 있다. 그래야만 여성이 [유급노동을 하지 않고] 양육과 가사를 전문화하는 것이 경제적으로 이득이 아닐 것이다. 유사하게, 양육자 등가 모델에서처럼 아동과 다른 가족 구성원들에 대한 양육의 책임을 담당하는 성인에게 경제적 불이익이 없도록, 여성과 남성 모두의 노동이 재구조화되어야 한다. 이러한 변화들은 더디게 실현될 것이지만, 그 목표는 국가적·국제적 공공 정책에 반영되어야 한다. 최근에 정치인, 연구자, 학자, 그리고 활동가들이 가족정책에 보이는 관심은 가족 구성의 극적인 변화에서 비롯되었다. 맞벌이 가구의 숫자는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세계적으로, 여성 가구주의 경우가 대부분인 편부모 가구의 존재가 점차 일반적인 현상이 되고 있다. 그리고 가족 구조의 다른 중요한 변화는 자녀가 있건 없건 동성 커플의 증가와 연관된다. 유럽연합 다수의 국가들이 동성 결혼의 법적 지위와 관련하여 개혁적인 사회정책을 가지고 있다. 이런 정책은 성적 취향이 경제적, 정치적, 또는 사회적 차별의 법적 근거가 되지 못하도록 하기 때문에 개혁적이다. 그러나 다른 많은 국가들에서 동성 결혼의 금지는 경제적 차별의 형태가 되고 있다. 왜냐하면 결혼에서 유래하는 많은 혜택들(부부소득에 대한 세금 우대, 재산 상속법, 건강보험의 적용 범위를 포함하여)이 있기 때문이다. 결혼할 수 없는 이들도 이에 따라 차별받는다. 2004년 미국에서 매사추세츠 고등법원이 “시민 결합(civil union)”은 위헌이라고 판결하자 동성 커플의 지위에 대한 논쟁이 격해졌다. 이 사건은 미국 전역에서 동성 결혼의 문을 열어 젖혔다. 사회적 보수주의자들은 이러한 변화에 반대하며, 동성 결혼을 금지하기 위해 미국 헌법과 주정부의 법을 개정하기 위해 작업 중이다. 이와 같은 금지법들은 게이와 레즈비언이 결혼의 특권과 책임의 향유를 가로막을 것이다. 가족 내 협력과 갈등 현금, 현물, 서비스, (실물과 금융)자산과 같은 자원의 재분배를 통해 가족 구성원들에게 물질적 후생을 제공하는 것은 가족의 중요한 경제적 기능이다. 자원의 사용을 관리하는 사회적 규범은 문화마다 그리고 같은 문화 내에서도 다양하다. 여기서 우리는 이런 가구의 의사 결정 과정에 대한 페미니즘적 분석을 제공하고자 한다. 요구르트냐 셔벗이냐에 대한 가족 구성원들 사이의 이견은 조정하기 어렵지 않지만, 격렬한 갈등을 불러올 수 있는 다른 지출 결정도 존재한다. 예를 들면, 교육이 무상이 아닐 때 아들과 딸이 모두 학교에 갈 것인가? 가구 내 분업에 대한 결정 또한 어려울 수 있는데, 누가 가정 밖에서 유급노동을 수행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문제가 좋은 예다. 주류 경제학에서는 가족을 공통의 이해관계를 가지는 집단으로 보는 견해가 주를 이룬다. 이런 관점에서 가족 내 성별분업은 여성과 남성 모두에게 이득이 되는 전문화의 특수한 사례일 뿐이다. 남성 생계부양자·여성 양육자로 조직된 가족이 고유한 유용성을 가진다는 통념은 성별분업의 관점에 의해 “신가정경제학” 안에 뿌리내렸다(그리고 이 경제학자들에게 가구 내 성별분업은 사회적으로 조직된 성별이 아닌 생물학적 성을 기초로 한다). 시카고학파의 정통 자유 시장 경제학자들로부터 연원하는 가족에 대한 이런 접근은 시장을 그 출발점으로 삼고 수요와 공급 관계를 통한 교환을 분석의 핵심에 놓는다. 이런 해석에 따르면, 남편과 아내는 각각을 더 부유하게 만든다고 정의되는 교환에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동등한 관계다. 만일 가구 구성원 중 한 사람이 더 많은 은사 결정권을 갖는다면, 이 사람은 가장으로 간주되거나 이타적이라고 전제된다. 이 때 이타적인 가장은 소득·자원의 재분배·소비와 관련된 가족의 모든 것을 가족 구성원 모두를 위해 결정한다. 노동의 성적(성별)분업은 생물학에서 유래했지만 단지 상호 이득이 되는 개인적 선택의 결과 중의 하나로 탈바꿈한다. 시몬느 드 보부아르 탁월하게 비판한 것처럼 “입법가, 성직자, 철학자, 과학자 모두가 여성의 종속적인 지위가 천국이고 지상의 모두에게 이득을 준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분투하고 있다.” 이런 결론을 지탱하는 논리를 추적해 보는 것이 좋겠다. 커플들은 누가 가정에서 일하고 누가 수입을 위해 가정 밖에서 일할 것인지를 결정해야만 한다. 이것은 근본적으로 교환 체계다. 즉 식사준비, 세탁, 양육, 성관계는 소득과 부를 위해 교환될 수 있다. 신가정경제학은 생물학적 근거에 따라 여성의 자연적인 성향이 그런 활동에 있다는 전제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여성이 가구 내 서비스를 전문화할 것이라는 점은 놀랍지 않다. 이것은 현대 성별분업에 대한 고전적인 본질주의적 관점이다.7) 이런 자연적인 성향은 노동 시장에서 여성의 임금이 일반적으로 남성에 비해 매우 적다는 사실과 결합되어 여성에게 가사 노동에서 경제학자들이 “비교 우위”라고 부르는 것을 부여한다. 그리고 아동은 새 차나 주택 구입에 대한 결정과 크게 다르지 않은 소비 결정이나 주식, 채권, 또는 다른 자산에 대한 투자 결정처럼 다뤄진다. 이런 연구가 다른 페미니즘적 연구처럼 여성과 가족을 연구 대상으로 삼기는 하지만 신가정경제학을 페미니즘으로 보는 것은 오해다. 페미니스트 경제학의 창시자 중의 한 명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바바라 버그만을 인용하자면, “신가정경제학자들은 그 지향에 있어서 페미니스트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은 벵골 호랑이가 초식동물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만큼이나 절제된 표현이다.” 첫째, 무엇보다 직접적으로 페미니즘적 분석과 상반되는 것은 그들이 자율성과 권력의 성별 차이를 문제 삼지 못한다는 점이다. 둘째, 그들의 견해는 남성이 소득벌이에 주력하고 여성이 가내 노동에 주력하는 성별분업을 자연적인 것으로 수용하기 때문에 본질주의적이다. 페미니스트 이론이 경제 과정에 영향을 발휘하기 위해서 우리는 어디에나 존재하는 이런 가정들을 분석해야 한다. 낫버가 오트나 비나 에가월 같은 일부 페미니스트 경제학자들은 배우자들의 상대적 협상력이라는 측면에서 가족을 분석하는 것이 유용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런 분석은 갈등과 협력이 모두 가족 관계의 구성 요소라는 것을 보여주며, 가족의 상호작용을 협상의 한 유형으로 묘사한다. 가구 내 자원과 책임의 분배는 이런 협상의 결과이다. 우리는 가족 안에서 이런 협상 유형―한 사람이 요리를 하면 다른 사람은 설거지할 것에 동의하거나 한 사람이 아이를 데려오면 다른 사람은 장을 본다―에 익숙하다. 이런 분석은 가족 구성원들의 협상력 차이를 잘 보여준다는 점에서 우리의 관심을 끈다. 좋은 직업이나 수입에 대한 다른 접근수단을 소유하는 것이 협상 테이블에 나온 사람의 주요한 힘이 되는 것은 당연하다. 결과적으로 가족에서 여성의 권력은 그녀의 노동 시장 수입에 따라 영향을 받고 이런 수입은 또 노동시장에서 그녀의 지위에 따라 영향을 받는다. 즉 여성이 무급 가사 활동 시간을 줄일수록 그리고 시간제에서 전일제 유급고용으로 전환할수록 여성의 수입은 증가한다. 가구 내 성별분업이 여성에게 비시장 노동을 할당할 때, 여성은 가족의 의사 결정에서 영향력을 덜 갖게 될 것이다. 가족에 대한 전통적인 경제학의 시각에서 가족 내 성별분업이 갖는 이런 함의는 간단히 무시된다. 페미니스트 경제학자들은 게이와 레즈비언 가족에 대해서도 흥미로운 분석을 제시했다. 리 바젯은 협상 모델이 이성 커플의 가족을 전제하고 이런 모델을 레즈비언과 게이 남성의 가족에 적용하는 것은 “정상” 가족 형태는 이성 커플로 이루어진다는 전제를 영속화한다고 지적했다. 그녀는 동성 커플과 이성 커플의 의사 결정 방식이 근본적으로 동일하다는 가설에 문제를 제기한다. 그녀의 연구는 동성 관계가 가진 차별적인 법적·정치적·문화적 지위 때문에 게이와 레즈비언 가족이 대안적인 가족의 원동력을 발전시킬 수 있다는 견해를 지지한다. 바젯은 동성 커플 가족 연구가 가족생활의 복잡성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풍부히 한다고 주장한다. 가족에 대한 표준적인 경제적 견해와 가구와 기업의 관계에 대한 경제학자들의 전통적인 이해 사이에 몇몇 공통점이 있음을 지적하는 것은 흥미롭다. 가구는 경제의 원료(생산 요소: 토지, 노동, 자본)를 소유하고 있다. 기업은 가구가 소비하는 재화와 서비스를 생산하기 위해 생산 요소를 사용한다. 가구가 기업에 생산 요소를 제공할 때, 가구는 기업이 생산하는 재화와 서비스를 구매하는 데 사용할 수 있는 소득을 얻는다. 기업이 가구에 재화와 서비스를 판매하는 데 성공하면, 기업은 더 많은 생산 요소를 활용할 수 있는 예산을 확보한다. 가구와 기업은 완벽하게 상호보완적이 되고, 각각은 상대방의 필요를 정확히 충족시킨다. 가구와 기업에 대한 전통적인 시각은 여성과 남성을 상호보완적인 대립물로 보는 전통적인 견해와 공통점이 많다. 남성은 공격적이고 경쟁적이며 강하고 이성적인 반면, 여성은 수동적이고 순응적이며 약하고 감정적이다. 여성성과 남성성의 이런 진부한 특성이 가구(사적영역)와 기업(공적영역)의 이분법 위에서 나타난다는 사실을 아는 것은 어렵지 않다. 이렇게 보면, 경제는 끊임없는 교환의 연쇄처럼 보인다. 토지, 노동, 자본은 임금, 지대, 이자, 이윤으로 교환되고, 이것은 다시 재화와 서비스를 구입하는 데 소비된다. 이런 교환의 연쇄가 어떻게 그 연쇄에 포함되지 않는 다른 모든 활동을 눈에 보이지 않는 것으로 만드는지를 주목하자. 많은 이들이 가구의 유지에 막대한 노동, 시간, 감정적 노력이 투입되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이런 노동은 직접적인 소득으로 보상되지 않고, 따라서 그것은 시야에서 사라진 것처럼 보인다. 이처럼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려면 누가, 얼마만큼의 시간 동안 가사 활동을 수행하는지 알 필요가 있다. 불균등하게 많은 양의 가구 노동이 여성에 의해 수행되고, 심지어 그들이 가정 밖에서 소득을 벌고 있을 때도 그럴 것이다. 신가정경제학은 이런 분업을 자연적인 것으로 수용했다. 사실 신가정경제학의 창시자 게리 베커는 표준적인 거시경제학적 분석을 가구의 분업을 포함한 가족 내부 활동에 적용한 것으로 노벨상을 수상했다. 그는 명시적인 현금 거래나 시장 교환이 없어도 가족의 행위가 여전히 수요와 공급으로 설명될 수 있음을 보여 주었다. 이런 접근이 가족 내에 존재하는 성별 불평등을 합리화하기 때문에 많은 페미니스트 사회과학자들은 경제학 안팎에서 이에 반대했다. 가구에서 수행되는 노동을 고려하면서 페미니스트들이 제기한 또 다른 관심사는 가족이 경제적으로 필수적인 많은 활동을 수행하지만 이런 노동의 가치는 사회의 경제적 건강과 후생을 측정하려는 취지의 통계에는 드러나지 않는다는 사실로부터 부상했다. 국민 소득 통계에서 가구 생산의 가치를 무시하는 것은 심각하게 고려되어야 할 문제다. 그것은 결국 경제 전반의 그림을 왜곡하고 정책결정이 가족에 미치는 실제적인 영향을 은폐한다. 예를 들어 양육 보조금을 없애는 것이 비용을 절감하는 조치로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외양은 문제를 오도할 수 있다. 이런 정책은 그 비용을 단지 가구로 전가할 뿐이다. 가사 노동의 가치가 밝혀지지 않을 때, 이런 비용은 은폐된다. 마찬가지로 이는 가구 생산의 변화가 다른 경제 행위의 수단에 미치는 영향을 은폐한다. 예를 들어 여성의 유급노동력 유입이 증가하면서 가구 생산은 시장 생산으로 전환되었다. 경제학자 제프 매드릭이 주장하는 것처럼, 이전에 가구에서 제공되던 재화와 서비스를 판매하는 사람들에게 지불되는 임금과 급료가 통계에 반영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런 여성들이 받는 임금과 급료는 통계에 반영된다. 따라서 경제가 성장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 성장은 가구로부터 시장으로 생산이 전환된 것에 기인한다. 무급 가구 노동의 가치를 측정하는 것은 어렵지 않으며, 페미니스트 경제학자들은 이런 중요한 노동을 반영하기 위해 국가의 소득 집계 체계가 어떻게 변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1934년 페미니스트 경제학자 마거릿 리드는 “제 삼자 척도”를 사용하자고 제안했다. 만일 제 삼자가 가구 노동을 유급으로 수행할 수 있다면, 그 노동의 추산 가치는 국가 전체의 산출이나 국민총생산(GNP)의 일부로 계산되어야 한다. 국제연합(UN)은 이를 추산하기 위해 측정에 기초한 방법론을 개발했다. 비시장 노동에 소요되는 시간을 측정하면 다양한 가구 업무에 필요한 노동시간의 평균량이 측정된다. 그리고 시장 임금은 이러한 업무를 완수하는 데 필요한 시간으로 환산된다. 평균 노동시간을 시간으로 환산한 시장임금으로 곱하면 가사 노동 가치의 추정치가 산출된다. 하지만 이 노동에 대한 환산 임금이 “여성”의 노동에 대한 사회의 저평가를 반영하기 때문에 이런 추산은 그 노동의 실제 가치를 적게 보여주는 경향이 있다. 보수적으로 추산을 해도 이런 노동의 규모는 놀랄 만한 수준이다. 세계 경제발전을 연구한 캐슬린 크라우드와 낸시 가렛은 1990년 132개 국가의 무급노동의 가치를 추산했다. 이들은 무급 가구 노동이 8조 달러 또는 각 나라의 공식 국민총생산 총계의 1/3 이상의 기여를 하고 있음을 발견했다. 오스트레일리아 통계청은 1992년 무급노동(주로 요리, 청소, 양육)의 가치가 국내총생산(GDP)의 거의 40%에 이른다고 추산하면서 유사한 결론에 도달했다. 시간과 가치 모든 면에서 무급노동은 분명 중요하다. 결론 페미니스트와 그 지지자들이 유급노동, 가사, 가족생활, 가구의 의사결정에 대한 남성과 여성의 기여를 전통적으로 정의해 온 가부장적 규범에 도전해 왔기 때문에 무급 가구 노동을 평가하는 것은 확실히 논쟁적이다. 실제로 여성과 남성에게 적합한 역할을 둘러싼 이견은 경제학 내부의 논쟁을 포함하여 오늘날 세계적으로 공공 정책을 둘러싼 많은 논쟁의 핵심에 있다. 이런 쟁점들은 새로운 것처럼 보일 수 있다. 엘리자베스 캐디 스탠톤, 루크레티아 모트, 소져너 트루스, 이다 웰즈, 샬롯 퍼킨스 길먼, 조세핀 버틀러, 헤리엇 마티뉴와 같은 19세기 페미니스트들은 이런 권력과 이해관계의 불균형은 여성이 사회에 완전히 참여하는 데 장애가 된다고 주장했다. 남성 생계부양자·여성 양육자 가족 모델이 우리의 가부장적 과거에 깊이 뿌리박았다고 하더라도 이런 성별 역할을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는 산업혁명의 산물이다. 여성적 가정성 이데올로기는 여성과 남성에게 부정적 결과를 지속시키고 있다. 무엇보다 그것은 실존하는 현재 가족의 실제적인 다양성을 정의에서 누락시키는 경향이 있다. 다양성의 인정은 성별 역할을 페미니즘적으로 재구조화하는 첫걸음이다. 그러나 여성 유급노동의 중요성이나 여성 무급노동의 실제 사회적 가치, 또는 전통적인 성별 위계의 부정적인 영향을 인식하지 못하는 경제·사회 정책의 접근 속에서 빅토리아 이데올로기는 여전히 살아 있다. 성별분업에 대한 시대착오적인 시각에 기초한 공공 정책은 가족 구성원들이 공통의 이해관계를 공유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인식할 수 없다. 반대로 가족에 대한 페미니즘적 관점은 이런 모순들이 성별 역할을 구조화하는 방식을 보여주기 위해 애정과 착취의 모순적인 힘에 초점을 맞춘다. [각주] 1)“이 속담은 영국의 관습법의 기본 개념만큼이나 오래된 것이다.” William Morris and Mary Morris, Morris Dictionary of Word and Phrase Origins(HaperCollins, 1988). 유사한 표현으로는 이런 것이 있다. “당신의 집에서 당신은 우두머리다. 그 곳에서는 누구도 당신에게 무엇을 하라고 말할 수 없다. 누구도 당신의 허락 없이 당신의 집에 들어갈 수 없다. 이 속담의 기원은 ‘천주교 장난감 무대’(1581)로 거슬러 올라간다. 1644년에 영국의 판사 에드워드 코크 경(1522~1634)은 '한 남자의 집은 그의 성이고 한 사람의 가정은 모두에게 가장 안전한 피난처다'라는 속담을 인용했다. 미국에서는 ‘의지와 운명’(1692)에서 처음 나왔다. 영국에서 ‘영국남자’는 종종 남자를 대신한다.” Gregory Y. Titelman, The Random House Dictionary of Popular Proverbs and Sayings (Random House, 1996). 본문으로 2)이것은 2001년 영화 『고스포드 파크』(Gosford Park)에서 훌륭하게 묘사되었다.본문으로 3) 지배적인 성별 질서에 대해 분노를 표현하고 있는 주목할 만한 문서 중에는 1792년에 처음 출판된 메리 울스톤크래프트의 A Vindication of the Rights of Woman과 엘리자베스 캐디 스탠톤과 루크레시아 모트가 쓴 1848년 세네카폴 여성권리대회의 보고서, Declaration of Sentiments가 있다. 이 문서들과 또 다른 글은 The Feminist Papers: From Adams to de Beauvoir (Columbia University Press, 1973)에서 볼 수 있다. 본문으로 4)Folbre, "Socialism, Feminist and Scientific." 이런 요구가 가장 급진적인 남성에게조차 과도한 것이었음을 알게 되면서, 페미니스트 지도자들은 한 걸음 후퇴하여, 투표권으로 대표되는 남성과의 공식적 법적 평등을 위한 훨씬 더 협소한 요구에 집중했다.본문으로 5)1900년에 아프리카계 여성의 44%가 사적 가구 서비스에 종사했고, 다른 44%는 농업에 종사했다. 본문으로 6)이 표현은 칼 마르크스·프리드리히 엥겔스의 『공산주의자 선언』(1848)에서 유래했다.본문으로 7)이런 본질주의가 우리의 의식을 얼마나 깊이 관통하고 있는가를 평가하려면 불후의 아동만화 The FlinstonesThe Jetsons을 생각해보기만 해도 된다. 이런 부분을 지적할 수 있게 된 데에는 울랴 그라파드 교수의 공이 크다. 본문으로 <참고문헌> Arlie R. Hochschild and Ann Machung, The Second Shift. William Morrow,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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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6-02-03

    가족문제: 성별분업의 재생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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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번역> 이진숙 여성위원장·정지영 정책편집부장 [편집자 주] 지난 호에서 다뤘던 1970년대 사회주의 페미니스트들의 가사노동 논쟁은 이후 가부장제를 둘러싼 논쟁과 가족형태에 대한 논쟁으로 발전했다. 가부장제를 둘러싼 논쟁은 여성억압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규명하려는 시도였다. 하지만 가부장제를 여성억압의 근본 원인으로 제기하는 것에는 가부장제가 자본주의와 병행하는 생산양식을 의미하는 것인지 여성억압 일반을 추상화하는 것인지 모호함이 존재했다. 가족형태에 대한 역사적인 분석은 ‘여성억압의 원인이 자본주의냐 가부장제냐’라는 불모의 논쟁을 넘어설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다. 이로써 현재의 가족이 역사 이래 고유한 것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조직된 것임을 밝히고, 그 과정과 의미를 분석할 수 있었다. 그리고 역사적 가족형태에 대한 분석을 통해 가정성 숭배, 성별분업, 공사 분리, 여성노동에 대한 평가절하 등을 복합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 가능성과 가족의 전화가 여성의 권리와 해방에 가지는 중요한 무게를 인식할 수 있다. 이 글은 ‘전통적’이라고 여겨지는 현재의 가족형태가 사실은 매우 짧은 역사를 가지고 있음을 지적하고, 이 새로운 가족이 발전하는 과정을 다루면서, 그것이 조장하는 성별분업과 그것을 지탱해주는 이데올로기를 비판하고자 한다. 이를 통해 우리는 가족이 현재처럼 가족 구성원 사이의 애정과 배타적인 유대로 정의된 것이 최근의 일이며, 남성 생계부양자·여성 가사담당자 모델이 보편적인 것도 아니고 그렇게 될 수도 없음을 알 수 있다. 번역대본은 다음과 같다. Drucilla K. Barker and Susan F. Feiner, "Family Matters: Reproducing the Gender Division of Labor," Liberating Economics: Feminist Perspectives on Families, Work, and Globalization, The University of Michigan Press, 2004. 한 인기 있는 식당의 슬로건은 활기차게 외친다. “이 곳에 오면, 당신은 가족입니다!” 우리는 묻는다. 우리의 저녁은 공짜인가? 돈을 내는 대신 설거지를 할 수 있나? 물론 아니다. 당신이 어떤 식당의 단골이 되어도, 당신은 가족이 아니라 고객이다. 가족이란 결혼, 출산이나 입양, 또는 서로에게 경제적·사회적·감정적 지원을 제공하는 데 상호 동의함으로써 결합한 사람들로 구성된 사회적 단위다. 경제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가족은 생산, 재생산, 재분배와 관련된 많은 경제적 활동이 벌어지는 장소다. 요리, 청소, 양육, 그리고 시장 수입에 접근할 수 없는 가족 성원의 부양은 이런 활동들의 예다. 누가 이런 일을 하고 어떻게 가족의 자원을 할당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일에는 종종 긴장과 갈등이 발생한다. 실제 가족 내부의 경제적 관계는 지원, 보살핌, 협동뿐만 아니라 불평등, 갈등, 착취로 특징지어 진다. 가족(family)이라는 말은 라틴어 파밀루스(familus)에서 유래했는데, 이 말은 “한 남성과 그의 하인들”을 의미한다. 이 해석은 고대에 아내가 남편의 재산이었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아내는 아이를 낳아 기르고, 요리하고, 옷감을 만들고, 가구를 관리함으로써 남편에게 봉사하는 존재로 여겨졌다. 남편은 가구의 당연한 우두머리였다. 결혼, 부부의 역할, 배우자의 의무 개념이 역사 속에서 변해왔지만 남성의 권위와 특권에 대한 기대는 19세기까지도 거의 도전받지 않았다. “한 남자의 가정은 그의 성(城)이다”1)라는 유명한 경구를 생각해보라. 페미니스트로서 우리는 묻는다. 이 성에서 일하는 가신과 하인은 누구인가? 그 경구는 결국 다음과 같은 사실을 함축하고 있다. 가정에서 한 남자의 생활은 왕의 생활과 마찬가지로 가사의 고역에서 면제되어야 한다. 가구를 운영하는 데 필요한 일들은 많이 변했지만, 사랑, 명예, 복종의 권고가 많은 결혼식의 일부인 것처럼 대부분의 가사 노동은 여성의 영역으로 남아있다. 페미니스트 경제학자들은 가부장적 권력과 가족 내에서 발생하는 자원 재분배, 가사 노동, 소비의 유형 사이의 상호작용을 분석한다. 오늘날 가족생활을 구성하는 경제적 관계의 많은 부분들이 과거와 마찬가지로 시장 외부에서 발생한다. 아이들은 식사의 대가를 부모에게 지불하지 않으며 성인 구성원도 서로의 도움과 협력에 비용을 지불하지 않는다. 이런 이유들로 인해 페미니스트 경제학자들은 가족 경제와 시장 경제가 평행하다고 가정하지 않고 가족을 분석한다. 시장 경제는 공급과 수요, 교환을 위한 생산, 이윤, 계급 갈등으로 이뤄진 친숙한 공적 경제다. 가구 경제는 시간, 애정, 돈의 지출을 통해서 인구가 재생산되는 가내 관계의 “다른” 경제를 구성한다. 가족의 조직에서 남성 생계부양자·여성 가사담당자 모델이 이상으로 유지되고 있기 때문에 현재의 서구 가족의 발전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가족에 대한 이런 견해의 역사적 우연성, 그것이 조장하는 성별분업, 그것을 유지시키는 이데올로기를 증명하는 것은 현재의 경제 정책에 대한 페미니즘적 비판에 핵심적이다. 대다수 페미니즘적 사회정책의 입장은 이런 가족 형태에 대한 비판적인 이해에 기초하고 있다. 가족, 과거와 현재 애정 관계가 가족생활에서 분명 중요한 역할을 해왔지만, 가족 구성원 사이의 감정적 유대만으로 가족관계를 정의하는 것은 최근에 이르러서다. 페미니스트 학자들은 가내 영역이 중요한 경제적 기능을 한다는 점을 오래 전부터 인식해왔다. 생존(특히 영·유아와 노인들의 생존)은 보통 가족 집단의 소속에 의지하고 가족의 생존은 보통 개인의 생존에 핵심적이다. 역사적으로 여성과 아동의 일상 노동은 남성의 일만큼이나 경제에 필수적이었다. 인간의 사회 조직의 장구한 발전에서 대다수 가족들은 가구의 생산 활동에 참여하는 모든 이들에게 의존했다. 하인과 다른 일꾼을 포함하여 가구 내에서 일하는 모든 사람들은 가족 구성원으로 간주되었다. 그리고 그들―하인, 일꾼, 아내, 어린이― 모두는 가장의 지배와 권위에 종속되었다. 18세기 말 19세기 초 산업혁명 이전에, 즉 대량 생산과 임금 노동이 대다수 서구인의 생활을 주조하기 전에, 가족은 음식과 옷, 그리고 일상에서 사용하는 물품을 만들었다. 이런 자급자족의 유형은 생산과 소비, 일과 여가가 병행되었음을 의미한다. 즉 이런 활동들은 시·공간적으로 분리되지 않았다. 가족이 사는 곳이 가족이 일하는 곳이었으며 가족이 소비하는 것은 주로 가구 노동의 산물이었다. 전(前)산업 시대의 농업 공동체에서 경제 활동은 일차적으로 교환이 아니라 사용을 위한 것이었다. 따라서 대부분의 인간 역사에서 가정과 경제는 동일한 것이었다. 우리의 현대적인 시각에서 보면, 가족생활과 노동의 결합은 전근대 생활의 향수어린 낭만적 이미지를 환기시킬 수도 있다. 하지만 그 가족은 가부장적이었고 노동은 끝이 없었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 여성과 아동은 자신의 운명에 대한 발언권이 거의 없었고 생존을 위해서는 동틀 녘부터 어스름까지 고역을 했던 것이다. 가구는 일차적으로 실을 잣고 베를 짜고 옷을 짓는, 고기를 도살하고 야채를 저장하는, 양초와 비누를 만드는 내부의 노동에 의존했다. 이런 생필품은 상업적 생산이 아닌 가구 생산의 일부였다. 가구가 완벽하게 자급자족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거래와 물물교환이 존재하기는 했다. 바구니, 통, 못, 쟁기, 신발 등의 중요한 물품들의 생산에는 전문화된 노동이 필요했다. 가족은 농산물을 이런 수공품과 거래했다. 장인(匠人) 가구와 농민 가구는 그들의 생산품 중 일부를 시민적·종교적 제도에 바쳤고, 다시 이들이 이런 물품을 종종 사치품이나 전쟁 도구와 교환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가구는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생산했고, 가구의 통상적인 필요를 초과하는 대부분의 잉여는 부수적이었다. 이런 잉여가 생긴다면 지역 시장에서 수공품과 교환되었을 것이다. 성별분업이 존재하긴 했지만, 남성과 여성은 대개 식료품과 수공품의 생산을 병행했다. 농촌의 자급자족은 건강한 인구가 모든 필수적인 일을 수행해야만 가능했다. 따라서 노동 기술은 소수에게 전문화되기 보다는 인구 전체에 보급되었다. 대부분의 유럽에서 대략 6세기부터 16세기까지 경제 조직의 지배적인 형태는 일차 생산 단위인 가부장적 대가족으로 이뤄진 이런 유형의 비교적 자급자족적인 농업 공동체를 포함했다. 16~17세기 동안 수많은 내·외적 변화가 일어나 봉건 경제의 특징이었던 생산과 소비의 통일을 침식했다. 이 과정은 영국에서 가장 명백하게 나타났다. 영국의 시골에서 부농들이 토지에 대한 자신의 관습적·봉건적 권리를 공식적인 계약상의 사적 소유권으로 전환함에 따라 토지의 집합적 사용이 서서히 사라졌다. 이 새로운 사적 소유권으로 인해 지주들은 농업 생산의 조직에서 전면적인 변화를 꾀할 수 있었다. 기술이 농업 생산을 혁신하고 자본(기계)이 인간노동을 대체함으로써 가족과 심지어는 마을 전체가 변화를 겪었다. 곡물의 윤작, 배수, 경작 패턴, 구획에 있어서의 혁신을 통해 농업 산출량과 경쟁력 있는 농업을 운영하는 데 필요한 자본이 증가했다. 땅을 경작했던 또는 토지를 이용할 권리를 가졌던 많은 이들이 더 이상 농업에 필요치 않게 되었고 채무 때문에 선조 대대로 내려오는 집을 떠나야만 했다. 농촌 실업이 심화되면서 빈곤 역시 심화되었다. 점점 더 많은 가족들이 땅을 경작할 수 있는 전통적인 권리를 상실하면서, 그들은 생존에 필요한 재화를 구매하기 위해 화폐 임금에 의존하게 되었다. 18세기 초반에 영국의 인구 대다수가 농장에 살았으나, 18세기 말에 이것은 더 이상 사실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도시에 살게 되었다. 이런 과정의 변종이 서유럽과 미국에서도 발생했다. 19세기를 거치면서 기계가 대량으로 생산한 재화가 장인·가내 생산을 대체했다. 점점 더 많은 사람들―여성, 남성, 아동―이 생존을 위해 화폐 임금에 의존하게 되었다. 가구의 필수품들은 이제 가족노동으로 생산되지 않았고, 대신 화폐로 구매해야 하는 상품이 되었다. 이런 상황이 발생함에 따라, 상품 생산과 상품 소비는 점차 시·공간적으로 분리되었다. 상품이 가정 밖의 작업장에서 생산되었다면, 상품 소비는 작업장 밖에서 이루어졌다. 여러 면에서 경제사는 한 때 가구에서 만들던 물건을 더 좋게, 더 빠르게, 그리고 더 싸게 생산하고 그것을 가구에 되파는 기업의 역사다. 가정 생산에 비해 공장 생산이 가진 더 큰 효율성은 직물, 비누, 신발, 양초, 연장, 심지어 기초적인 식량의 가정 생산을 여분의 것으로 만들었다. 공장, 시장, 임노동 체계가 전통적인 경제 관계를 침식함에 따라 생산과 소비의 통일은 점차 압박을 받았다. 이런 변화는 가족의 경제적인 조직과 정서적인 조직을 심대하게 분화시켰다. 자본주의적 생산관계가 점차 확장되면서 생활의 인격적·정서적인 관계의 측면과 상품생산, 고용, 시장에 관련된 측면이 분열되었다. 이런 변화가 여성의 후생에 미친 영향에 관해서는 상당한 논쟁이 있다. 어떤 이들은 이 변화가 여성들의 소득벌이 가능성을 제한함으로써 여성이 점차 남성과 남성의 임금에 의존하게 되었다고 주장했다. 전통적으로 여성들은 집합적으로 활용하는 공유지에서 남은 곡식을 모으고, 땔감을 줍고, 작은 가축을 돌보는 활동으로 소득을 벌었기 때문이다. 다른 이들은 이런 변화를 통해 여성들이 가사의 고역으로부터 해방되었다고 주장했다. [양자가] 동의하는 한 지점은 비록 여성들이 소득벌이의 길을 찾았더라도 19세기의 일반적인 경향에 따라 여성의 생산 활동이 점차 가정적 영역으로 강등되었고 이는 여성의 노동이 아니라는 생각에 기여했다는 사실이다. 산업생산이 점차 중요해지면서 가구는 오로지 소비만 하는 장소로 간주되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가구의 생산 활동은 비생산적인 것으로 정의되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중요한 생산적 경제 기능이 가구 내에서 지속되었다. 가구는 오늘날까지도 노동력이 “생산”되는 곳이다. 가구의 많은 활동―쇼핑, 계획, 식사 준비, 세탁―은 소비인 동시에 노동이다. 사회세력의 흥미로운 배열은 이런 변형을 설명해주고, 가사 노동의 주변화가 어떻게 성별 불평등에 기여했는지 보여준다. 가정성 숭배 자본주의가 봉건주의를 대체함에 따라 새로운 사회·경제 관계가 출현했다. 자본주의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용의 양식을 구매하기 위해서 노동 시간(일한 시간)을 화폐 임금으로 교환해야만 했다. 이는 두 개의 새로운 사회 계급을 창조했다. 하나는 생존을 위해 임금에 의존하는 산업, 농업, 소매 노동자들을 포괄했다. 또 다른 새로운 계급은 부유한 농장주, 장인, 소매상인, 상인의 층에서 출현한 부르주아였다. 부르주아가 자신들의 이윤을 재투자함에 따라 그들의 공장과 농업이 성장했다. 그 결과로 나타난 농업·산업 상품의 쇄도는 가격을 낮췄고, 따라서 효율성이 떨어지는 소규모 가정 생산자들을 파괴했다. 가정 생산자들이 산업에서 구축(驅逐)됨에 따라 임노동자 계급이 부상했다. 부르주아가 번성함에 따라 이 계급의 권력·위세·지위를 표현하는 새로운 방식이 부상했다. 봉건 사회가 소농과 토지 귀족 사이의 위계적인 경제적·정치적 관계로 형성되었다면, 부상하는 자본주의 사회는 임노동자와 부르주아, 즉 임노동자를 고용한 공장, 가게, 광산 소유주 사이의 위계적인 관계로 형성되었다. 부르주아는 경제적 자원을 축적했고 엄청난 정치권력을 휘두르게 되었다. 문화 영역에서 부르주아는 봉건 귀족의 행동을 모방함으로써 새로운 사회적 위계 속에서 자신들의 특권적 지위의 정당성을 추구했다. 18, 19세기 동안 부르주아의 가족은 여성과 아동을 산업 작업장의 노동에서 체계적으로 철수시킴으로써 (귀족과의 유사성을 보여주는 동시에) 스스로를 노동자와 구별할 수 있었다. 이 시대의 기업가 남성이 초기 자본주의의 살인적인 경쟁에 매여 있었다면 이 계급의 여성들은 주부가 되어 점차 여성에게 자연스러운 것으로 간주되었던 의무―가사와 모성―에 종사할 것을 기대 받았다. 이런 배치는 수 세기 동안 노동하지 않고도 살 수 있었던 귀족을 모방하려는 부르주아의 열망을 반영했다. 가정생활과 산업생활의 이런 양식이 사회적 지위의 표지로 수용되면서 이런 가구 관계를 정당화하기 위해 “가정성 숭배” 이데올로기가 출현했다. 이 이데올로기는 가족과 가구를 오로지 양육, 친애, 정서의 관점에서 정의했다. 가구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노동과 노력이 대개 무시되었고, 여성의 참된 본성과 소명에 대한 화려한 감상 속에서 경제적 의존 관계가 은폐되었다. 이 이데올로기의 중요한 효과는 수없이 많지만, 그 중에서도 생산과 소비, 공과 사, 노동과 여가, 경쟁과 순응이라는 친숙한 이원론을 재생산한다는 점이 중요하다. 가정성 숭배는 무급의 가사 노동이 여성의 일이며 여성의 일은 노동이 아니라는 믿음을 합리화했다. 결국 빅토리아 주부의 이상은 모든 여성의 규범이 되었고 주부는 “유한부인(woman of leisure)”으로 불리게 되었다. 하지만 외양과 이데올로기에도 불구하고 많은 여성들이 유급 고용을 필요로 했(고 오늘날까지도 그렇)다. 여성들은 비혼(非婚)일 때, 자신이 의존하는 남성의 소득이 너무 적어 가족을 부양할 수 없을 때, 사별·이혼·유기 또는 선택에 의해 아이들을 홀로 부양해야 할 때 직업을 필요로 한다. 우리는 자신의 의존적인 지위에 대해 불만을 표현해왔던 여성들의 기나긴 그녀만의 역사(herstory)가 있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엄청난 사회적 치욕에 맞서 여성들은 교육·고용·재정적 독립을 추구했다. 그러나 여성의 권리를 위한 투쟁은 격렬한 반대를 낳았다. 여성에게 적합한 장소는 가정임을 사람들에게 확신시키기 위해 믿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양의 지적·문화적·종교적 에너지가 투여되었다. 사실 18, 19세기에 여성들이 쓴 소설들은 종종 여성 억압과 여성의 공민권 박탈의 감정적 결과를 상세히 다루고 있다. 페미니스트이자 경제학자이며 사회 비평가인 샬롯 퍼킨스 길먼은 그녀의 소설 『노란 벽지』에서 이런 이상화된 규범을 페미니스트의 통찰력으로 분석하고 있다. 만약 여성들이 화폐 수입에 접근할 수 없다면 자신들의 시간을 무급 활동에 보낼 수도 없기 때문에, 빅토리아 이상에 부합하는 방식으로 사는 것은 남편이나 아버지의 성공에 따라 좌우되었다. 오직 상층 계급만이 의존적인 주부라는 이상을 실현할 수 있었다. 대부분의 다른 여성들에게 빅토리아 시대의 산업 경제는 엄혹한 곳이었다. 하지만 가정성 숭배를 통해 성별에 대한 사회적 시각이 형성됨에 따라 가난한 노동자 여성의 억압적인 경제 현실은 은폐되었고, 상층 계급 여성으로 엄격히 한정된 기회는 여성에게 적합한 것으로 여겨지는 성별 역할의 숨 막히는 협소함을 은폐하는 감정적인 미사여구로 치장되었다. 빅토리아 가구를 유지하는 데에는 하인들의 가사 노동이 필요했다. 19세기와 20세기 초 유럽의 부르주아 가구는 하층 계급 출신의 하인들을 고용했는데, 노동과 서비스에 적합하도록 이들의 언어와 복장은 구별되었다.2) 미국 북동부의 유복한 여성들은 동유럽과 아일랜드의 새 이민자들을 고용했다. 남부의 백인 여성들은 남북전쟁 이전에 노예였던 아프리카계 여성들을 고용했다. 아프리카계 여성들은 비록 법적으로는 해방되었지만 인종적 아파르트헤이트 체계―짐 크로우(흑인차별정책을 명문화한 법안)―에 의해 여전히 최악의 직종에서 비참한 급여를 받는 노동자였다. 가정성 숭배는 그 시대 경제적·사회적 관계의 핵심적 요소로, 여성들을 전업주부이자 소비자의 역할로, 남성들을 전업 임금 생활자이자 생산자로 규정했다. 가정성 숭배의 옹호자들은 이런 이분법적 성별관을 종교, 생물학, 자연법, 심리학에 이식하려 했다. 성별에 관한 이런 본질주의적 견해의 발전이 가족·교회·국가에서 여성의 종속적 지위를 보증하는 법, 인습, 사회적 관습의 체계를 주도했다. 여성, 재산, 고용, 법 법 앞에서 여성이 동등한 권리를 가진 완전한 인간이라는 것은 혁명적인 개념이다. 19세기 중반까지 여성들은 ― 결혼 여부와 상관없이 ― 독립적인 법적 존재가 아니었다. 중앙 정부가 전국의 법률을 실행하는 서구에서 유부녀 신분에 관한 법률(또는 유사한 교의)은 사실상 여성의 생활의 모든 면을 지배했다. 이 법들은 남성과 그 아내를 일체로 규정했고, 그 일체는 남성이었다. 여성들이 가족의 생계에 얼마나 기여했는가는 중요하지 않았다. 어떤 상황에서도 여성은 모든 종류의 재산이나 임금에 대한 독립적 권리를 갖지 못했다. 아내는 남편의 재산으로 남편들이 아내의 소득이나 물려받은 재산에 대한 법적 권리를 가졌다. 심지어 여성의 노동이 가족 농장과 가족 기업의 성공에서 핵심적이라 할지라도 여성들은 수당, 자신의 임금, 자신의 재산을 집행할 수 있는 법적 권리가 없었다. 유사하게 재산의 매각에서도 여성들은 매각의 절차에 대한 어떤 권리도 없(고 심지어 그 재산이 그들의 친척에게서 유산으로 받은 것일 때도 매각을 막을 수 있는 법적 권리도 없)었다. 이는 재산 가치가 증식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사실 남편이 죽은 여성과 아이들을 집 없고 곤궁한 상태로 방치하고서 가족 재산을 팔 수 있는 상황도 있었다. 게다가 유급 고용이 흔한 많은 나라에서도 여성들은 결혼과 동시에 그들의 직업을 포기해야 했다. 19세기 중반에 이르러서야 많은 여성들과 일부 남성들이 이런 관행의 근본적인 불공정성에 문제를 제기하기 시작했다.3)영국에서 바바라 레이 스미스 보디천, 엘리자베스 바렛 브라우닝, 해리엇 마티뉴, 존 스튜어트 밀, 해리엇 테일러 밀과 같은 사회 개혁가들은 영국의 이런 억압적인 법을 바꾸기 위해 작업했다. 이 개혁가들의 가장 중요한 업적들 중 하나는 1880년대 후반에 ‘기혼여성의재산법’을 통과시킨 것인데, “이 법을 통해 아내들은 자신의 개인적인 재산과 소득을 통제할 수 있었다.” 아내가 결혼에서 모은 재산과 시장에서 번 임금에 대한 권리를 가진다는 급진적인 관념은 처음에는 1850년 이후 유럽과 미국을 휩쓴 혁명적 사회주의 운동의 지지를 받았다. 여성들이 임금을 벌어야한다는 견해는 당시의 지배적인 이데올로기를 거스르는 것이었고 노동자의 연대를 위협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오늘날도 여전히 페미니스트들을 분노케 하는 정치 운동 속에서 혁명적 사회주의자 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완전한 경제적 평등을 위한 여성들의 요구를 거부했다.4) 이들의 입장은 놀라울 것이 없다. 1890년대에 여성들이 본성상 가정생활에 적합하다는 통념은 상식이었다. 여성의 역할이 가정·가족에 연관되어 정의되면, 그들의 유급 고용은 말이 안 되는 것처럼 보인다. 결과적으로 기업이 여성들에게 남성보다 적은 임금을 주는 것은 정당화된다. 매우 영향력 있는 알프레드 마셜 같은 일부 경제학자들은 실제로 여성들이 가정에서 책임을 다하도록 여성의 임금을 낮게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세기 중반에 영국은 마셜의 견해를 담은 법(공장법)을 제정했는데, 이 법은 여성이 일할 수 있는 시간과 벌 수 있는 임금을 제한했다. 영국 여성 중 18~20%는 생존을 위해 생계를 꾸려가는 가구의 가장이었기 때문에 여성의 임금과 노동시간의 제한은 여성의 빈곤을 증가시키는 직접적인 결과를 낳았다. 유사하게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반, 미국에서도 개혁가들이 여성의 직종과 노동시간을 제한하는 여성 보호입법을 주장했다. 여기서 여성을 목표로 한 보호입법은 고임금이 여성의 의존성을 깨뜨릴 수 있기 때문에 임금이 너무 높아서는 안 된다는 관념에 기초했다. 동시에 여성의 임금이 너무 낮아서도 안 되는데, 그 이유는 극도의 빈곤이 여성을 성매매로 내몰 수 있기 때문이었다. 입법가, 성직자, 신문 편집장들은 “혈통의 어머니”의 도덕과 특성을 보존하려는 정책이 공익에 가장 잘 봉사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페미니스트 경제학자인 데보라 피가트, 엘렌 무타리, 마릴린 파워가 보여준 것처럼, 여성성·순백·혈통은 여론 속에서 연계되었고, 법은 이런 연계를 강화하기 위해 제정되었다. 앵글로 유럽 여성들을 보호하는 입법은 백인 여성들의 경제적 생존을 보장하려고 했다. 반대로 그런 보호는 유색 여성들이 하는 일에는 해당되지 않았다. 아프리카계, 라틴계, 아시아계, 그리고 미국 원주민 여성들에게 개방된 소수의 일자리는 이 새로운 법에 적용되지 않았다. 인종주의는 이런 여성들의 도덕성의 보존이 공익과는 무관하다는 견해를 분명히 보여주었다. 유색인종의 여성들은 어머니로도 노동자로도 노동입법에 포함되지 않았다. 성별과 인종 이데올로기는 이 여성들의 생활과 경험을 보이지 않는 것으로 만들었다. 영국과 미국 모두에서 이런 유형의 입법은 남성 생계부양자·여성 가사담당자 가족이라는 이데올로기를 반영했고 또 재생산했다. 이 이데올로기가 여성들의 경제적 독립에 장애가 되었기 때문에 이는 여성들의 물질적인 환경에 매우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실제 1960년대까지 기업이 동일한 직종에서 남성들보다 여성들에게 임금을 적게 지급하는 것은 합법적이었다. 오늘날, 여성들의 상황은 여전히 경제적 평등과는 거리가 멀다. 더 낮은 임금으로 인해 여성들은 남성들에게 의존적이고 종속적인 상태에 머물러있다. 남성의 임금이 여성의 임금보다 높은 것은 대체로 가정성 이데올로기의 물질적 기초였던 가족임금 체계의 유산 때문이다. 한 성인 남성이 그의 가족을 부양하기에 충분한 임금을 버는 것이 노동자계급 조직의 중요한 목표였다. 슬프게도 노동자계급 남성의 임금을 개선하는 것은 계급을 불문하고 여성들의 경제적 기회를 희생시켰다. 가족임금의 간략한 역사 남성지배적인 노동자계급 조직들은 가정성 이데올로기를 활용함으로써 상층계급과 동맹을 추구했다. 노동자계급 남성들은 고임금의 남성적 직종에서 가족임금을 수호하기 위해 여성들을 이 직종에서 배제하려 했다. 상층계급의 개혁가들은 여성의 본성에 관한 자신의 견해 때문에 여성들을 유급 고용에서 배제하려 했다. 실제로 여성은 너무 연약해서 산업 생활의 혹독함을 견딜 수 없다는 통념이 이 시기 노동사의 중요한 주제로 부상했다. 주지하듯이 가족임금의 성취는 영국, 미국, 그리고 나머지 서유럽 국가들의 노동조합의 중요한 목표였다. 남성 노조활동가들은 직종 경쟁을 제한하고 임금을 높이기 위해 특정 산업과 직종에서 여성을 배제하는 입법청원 운동을 활발히 펼쳤다. 그 결과 19세기 말, 핵심 산업에서 몇몇 최상층의 노동자들과 새로운 법인 관료조직의 관리자들은 중간계층 가족 수준의 음식·의복·집을 구매하기에 충분한 임금을 획득하는 데 성공했다. 이는 가정 밖에서 일자리를 구하는 또 다른 노동자가 없어도 한 명의 노동자가 대체로 가족을 부양할 수 있는 정도였기 때문에 가족임금이라고 불렸다. 심지어 모든 여성들의 절반 이상이 가정 밖에서 임금을 받는 오늘날에도 많은 이들이 여전히 기혼 여성―특히 백인 중산층의 어린 아이가 있는 여성―은 그 가족이 돈이 필요할 때만 가정 밖에서 일해야 한다고 믿는다. 여성을 양육의 특별하고 신비한 원천으로 지목하는 이런 집단적 신화가 존속한다는 사실이 이데올로기의 힘을 증명해준다. 생계부양자 남편과 가정적인 아내라는 이데올로기가 사회적인 진리가 되어갈수록 남성과 여성의 임금 격차는 더 커졌다. 대중적인 감성이 여성을 노동자가 아닌 아내·딸·어머니로 간주하기 때문에 여성의 임금은 필수적이라기보다는 부수적인 “용돈”으로 치부되었다. 이런 인식은 많은 여성들에게 남성의 부양이 가족을 유지하는 데 부족하다는 사실을 무시한다. 게다가 여성의 임금이 단지 “용돈”이라는 믿음은 저임금 공장, 제재소, 그리고 가내에서 요구하는 노동자의 용이한 공급에 딱 맞아 떨어진다. 즉 여성을 포함한 많은 이들이 여성의 임금을 일차적인 생계부양자의 임금을 보조하는 것으로 간주하는 한, 여성들은 남성들보다 적은 임금을 받을 것이다. 가족임금 체계가 기대되는 규범이 되어감에 따라 여성이 무급 가구 노동을 전문적으로 수행해야 한다는 경제적 압력도 높아졌다. 여성의 임금이 사실상 남성의 임금보다 낮기 때문에 여성이 유급 노동력에서 배제되는 것은 경제적으로 합리적이었다. 여성의 임금은 너무 낮아서 가정 밖의 임금 노동에 고용되면 할 수 없는 양육, 청소, 요리와 같은 일을 대체할 수 없을 것이다. 가족임금의 성취가 언제나 소수의 노동자계급에게 한정되었다는 점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미국에서 특정 인종 집단을 좋은 일자리에서 배제하는 것은 표준적인 관행이었다. 예를 들어 가족임금을 지급하는 일자리에서 유색인종 남성을 배제하는 데 인종주의가 의식적이고 고의적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미국 원주민, 아프리카계, 라틴계, 그리고 아시아계 미국인 가족은 여성과 아이들의 수입에 의존했다. 이 문제에 대한 노조의 인종주의적 정책은 노동자들을 분할했을 뿐만 아니라 백인 여성들과 유색인종 여성들의 이해를 분화시켰다. 이 여성들은 유급 고용의 절차, 출산, 양육, 가족 형성에서 상당히 다른 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가정성 숭배에 의해 이상화된 가구 유형은 인종주의적이고 성차별주의적인 기초 위에 세워졌다. 미국의 인종주의적인 노조 가입 규칙과 성차별적 보호입법은 가족임금에 대한 접근권을 엘리트 “노동귀족”에게 한정했다. 하지만 미국 내의 유색인종에 대한 착취가 현대 가족의 경제적 발전을 추동한 인종적 착취의 유일한 방법은 아니었다. 남미, 아시아, 아프리카로 팽창한 식민지는 유럽과 북미에서 많은 이들이 경험한 생활수준 향상에 중요한 기여를 했다. 노동계급 최상층의 임금상승은 부분적으로 식민지 산품(産品)교역의 대량 확산이 가져온 이윤 덕분에 가능했다. 노동귀족의 임금이 상승함에 따라 고용되지 않은 그들의 의존적인 아내들은 계급적 지위를 나타내는 장식품들을 구매할 수 있었다. 이 시기에 고급스런 사치품들이 제국주의적 무역 관계를 반영하는 이국적 생산품이었던 것은 우연이 아니다. 빅토리아 주부의 값진 소장품이었던 고급 카펫, 마호가니 탁자, 칠 도자기는 아프리카, 아시아, 남미, 카리브 연안의 식민지에서 남성·여성·아이들이 착취당했음을 보여주는 묵언의 증언이다. 페미니스트 경제학자 데어드르 맥클로스키는 여성들이 시장의 확대와 산업 자본주의의 발전으로부터 분명히 그리고 한결같이 이득을 얻었다고 주장한다. 이런 주장은 상품의 기계제 생산과 이에 따른 소비자 가격의 하락으로 인해 생활수준 향상이 널리 확산될 수 있었다는 견해에 기초한다. 이런 주장은 경제학·사회학·역사학 내에서 뜨겁게 논쟁되고 있다. 친시장주의적인 주류 경제학자들은 이런 견해를 지지하는 반면, 이단 경제학자들은 이런 혜택의 규모와 분배 양자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자본주의의 영향에 대한 이런 의문은 이 글의 시작에서 제기된 질문과 분석적인 수준에서 궤를 같이 한다. 즉 “한 남자의 가정이 그의 성일 때, 가신과 하인은 누구인가?” 무역과 산업혁명의 혜택이 대다수 사람들의 생활이 더 좋아지도록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할 수 있는가? 특정 인구가 경제적 관계의 이런 혁명적 변화의 비용을 과도하게 부담했는가? 부르주아의 여성과 노동자계급 여성은 이 비용과 혜택에 동일한 관계를 맺었는가? 서구 제국주의 국가의 국민들은 아프리카, 아시아, 남미의 국민들과 동일한 방식으로 식민주의를 경험했는가? 다른 페미니스트들 및 이단 경제학자들과 더불어 우리는 그렇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19세기와 20세기 초반 공장의 성가신 작업과 혹독한 규율은 산업혁명의 주요한 대가였다. 이런 노동조건 하에서 가정으로의 도피는 하나의 특권, 사실상 하나의 혜택이었다. 여성과 아이들의 보호는 상층계급 사회 개혁가들과 노동자계급 남성들이 공유한 목표가 되었다. 이 목표의 일부는 아동을 노동력에서 배제하고 양육을 중산층 가구의 주된 경제활동으로 만드는 것을 포함했다. 가정성 이데올로기는 양육을 여성만의 영역으로 만들었다. 이것의 중요한 경제적 기능은 주목받지 못했다. 동시에 보호입법에 의해 여성들은 수입에 대한 욕구나 일자리를 유지하고자 하는 욕망과 상관없이 많은 유형의 유급노동에서 밀려났다. 가정성 숭배는 남성 생계부양자·여성 가사담당자 가족 모델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제시함으로써 가족생활을 주조하는 다양한 이해관계를 은폐했다. 현재 서구 가족 안에서의 권력과 이해관계 20세기 동안 서구사회에서 가족은 남편과 아버지가 소득을 만드는 활동에 주력하고, 아내와 어머니가 가사와 양육을 전문화하는 형태를 동경했다. 이런 형태의 가족은 매우 현대적인 것이지만, 역설적이게도 종종 “전통적인” 가족으로 언급된다. 더욱이 실제 많은 가족들은 가정생활을 조직하는 이런 양식을 선택할 수도 없었다. 상대적으로 짧은 역사와 이런 정의에 해당하는 인구 분포의 협소함에도 불구하고 그런 가족 모델이 문화, 정치학, 경제학, 심지어 심리학의 영역에서 사회에 미치는 영향력은 강력했다. 우리가 이미 본 것처럼, 부르주아가 하층계급으로부터 스스로를 분리하려는 시도에서 출현한 전통적인 가족이 점차 다른 모든 가족 유형을 판단하는 규범 또는 표준이 되었다. 전통적인 가족에서 노동에 소비되는 시간의 양과 수행되는 일의 유형은 성별에 따라 다르다. 남성은 소득을 벌기 위해 가정 밖에서 전일제로 일하고, 여성은 가족을 유지하기 위해 가정 내에서 전일제로 일한다. 이런 가족 형태를 모방하고 싶어 하는 여성과 남성은 분명히 존재한다. 누군가 저임금 노동의 열악한 조건에서 면제될 수 있다는 전망은 극빈층 가족에게 분명 강한 호소력을 지닌다. 어떤 가족에게 전일제 주부는 중요한 신분적 상징이다. 또 다른 가족에게 여성이 전일제 주부의 역할을 맡는 것은 고비용의 질 좋은 양육 및 적정한 보수와 혜택을 제공하는 일자리의 부족에 대한 합리적인 대응책이다. 전통적인 가구 구조는 이런 가구의 성별분업이 여성의 노동, 소득, 재생산, 전반적인 후생에 대한 남성의 가부장적 권력을 어떻게 반영하는지 보여준다. 전통적인 가구 안에서 여성은 소득에 대한 독립적인 접근권이 없다. 따라서 여성은 남성 생계부양자의 관대함과 공정함에 의존하고, 그 결과 남성은 가구의 중요한 결정에 있어 상당한 권력을 소유한다. 실제로 페미니스트 사회학자 알리 혹쉴드의 노동과 가족의 관계에 대한 선구적인 연구는 전통적인 가구의 붕괴에 기여하는 주요 요인이 성공과 자아실현을 위해 추가적인 수입을 추구하고 가부장적 권위에 복종하지 않으려는 여성과 연관이 있음을 밝혔다. 점차 흔해지고 있는 다른 가구 유형은 “과도적” 가족이다. 이 가족형태에서 두 배우자는 모두 가정 밖에서 소득을 벌지만, 가사와 양육은 여전히 대체로 여성의 책무다. 여성이 가정 밖의 유급노동에 종사하지만 가구 노동이 여전히 여성에게 부과되기 때문에 이런 가구에서는 갈등이 발생하기 쉽다. 양육, 요리, 그리고 청소는 시간과 에너지를 소진시키며, 반복적이다. 기혼 여성이 주당 가사 노동에 소비하는 시간은 18~23시간 사이로 추산된다. 이에 비해 남편은 7~12시간 사이의 시간을 소요한다. 수잔 비안키는 최근의 연구에서 가정 밖에서 일하는 어머니의 숫자가 급격히 증가하고 있지만 아이와 함께 보내는 시간은 고용된 어머니와 고용되지 않은 어머니 사이에 별 차이가 없다고 보고한다. 그녀는 고용된 여성이 잠을 덜 자고 자진해서 일을 하며 자유 시간을 거의 갖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많은 고용된 어머니들이 가사를 담당할 노동자를 고용하고 싶어 한다는 것은 당연하다. 페미니스트인 우리는 유급의 가내 하인이 일련의 윤리적인 쟁점을 제기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가내 하인으로 고용된 이들은 일반적으로 인종·계급·종족 때문에 사회적 위계의 최하층에 있는 빈곤한 여성들이다. 이런 여성들은 점차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자신의 가족을 떠나 부유한 나라에 유입되는 이주자나 난민들로 채워지고 있다. 미국의 가내 노동은 대개 아프리카계 여성들의 유일한 선택지였고, 1960년대까지 대부분의 고용된 아프리카계 여성들이 가내 노동자였다.5) 오늘날, 미국에서 가내 노동자의 인종적·종족적 구성은 아프리카계 여성이 작업장에서 얻는 수입과 빈곤의 다양한 면모를 반영한다. 현재 미국의 가내 노동자들은 대체로 필리핀, 라틴 아메리카 또는 경제적 이행중인 동유럽으로부터 유입된 빈곤한 여성들이다. 세계적으로 다른 지역에서의 상황 역시 거의 동일하다. 페미니스트 지리학자 조니 시거에 따르면, 백만에서 백오십만 사이의 여성들이 가내 노동자로서 고용되기 위해 아시아에서 중동의 산유국으로 이주한다. 페미니스트들은 가내 노동자를 고용하는 것이 윤리적인가를 두고 논쟁한다. 어떤 이들은 다른 유형의 하인(예를 들면 배관공이나 정원사)을 고용하는 것이 문제가 안 된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다른 이들은 요리사, 청소부, 유모를 고용하는 것이 본질적으로 착취적이라고 주장한다. 우리의 입장은 노동, 양육 또는 요리를 위해 돈을 지불하는 것이 잘못되었거나 부도덕하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문제는 노동조건과 관련된다. 이런 하층의 일자리는 거의 언제나 가난하고 종종 자신의 가족이 형편이 안 좋은 여성들의 영역이었다. 이런 일자리를 공식 부문으로 들여오고, 성, 인종 또는 이주민 신분에 관계없이 모든 노동자들에게 법적 보호를 제공하는 것이 가내 노동의 지위, 급여, 안전성을 개선시킬 수 있을 것이다. 여성과 남성의 성별 역할에 대한 태도는 변하고 있다. 엄청난 수의 여성들이 노동력에 유입되면서 새로운 가족 형태, 즉 “평등주의적” 가족이 출현하고 있다. 이런 유형의 가족 안에서 성은 누가 가정 밖에서 소득을 버는가, 누가 가사 노동을 하는가를 결정하는 핵심 변수가 아니다. 가사 노동과 시장 노동은 분담된다. “‘각자의 능력에 따라’에서, ‘각자의 필요에 따라’로”6)라는 구호는 여기에서 작동한다. 많은 페미니스트들이 평등주의적 가구의 형성과 재생산을 장려하는 사회·경제 정책을 주창한다. 평등주의적 가구는 양육에 필요한 시간과 유급노동에 필요한 시간을 조정해야만 한다. 낸시 프레이저는 어떤 가족형태가 성평등을 촉진하고 성별분업을 해체하는가를 체계적으로 사고하기 위해 가족의 세 가지 이상적인 상, 즉 보편적 부양자 모델, 양육자 등가 모델, 보편적 양육자 모델을 제시한다. 보편적 부양자 모델은 여성과 남성의 노동 시장에서의 평등한 기회에 초점을 맞춘다. 이런 모델에서는 오늘날 가구 안에서 통상 여성이 제공하는 요리, 청소, 양육, 노인보살핌 서비스를 정부나 시장이 제공한다. 양육자 등가 모델은 양육자(보통 여성)가 가족을 돌볼 수 있도록 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런 정책은 관대한 가족 수당과 유급 휴가의 제공을 통해 전통적인 성별분업의 비용을 최소화한다. 여성의 생활은 남성의 생활과 다르지만 동등한 것이다. 프레이저는 완전한 성평등 실현에 이 두 가지 전략이 모두 부적합하다는 것을 인정한다. 한편으로, 보편적 부양자 모델은 유급노동에만 가치를 부여하기 때문에 남성 중심적이다. 다른 한편으로, 양육자 등가 모델은 여성의 경제적 독립을 촉진하지 못한다. 보편적 양육자 모델은 가정 안과 밖의 평등한 분업을 전망한다. 이 모델에서 여성과 남성은 모두 유·무급의 노동에 참여한다. 가사 노동 및 아동과 피부양자의 양육, 그리고 유급노동이 성인 가구성원들 사이에서 평등하게 분담된다. 이러한 분업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보편적 부양자 모델에서처럼 여성의 소득이 남성의 소득과 동등할 필요가 있다. 그래야만 여성이 [유급노동을 하지 않고] 양육과 가사를 전문화하는 것이 경제적으로 이득이 아닐 것이다. 유사하게, 양육자 등가 모델에서처럼 아동과 다른 가족 구성원들에 대한 양육의 책임을 담당하는 성인에게 경제적 불이익이 없도록, 여성과 남성 모두의 노동이 재구조화되어야 한다. 이러한 변화들은 더디게 실현될 것이지만, 그 목표는 국가적·국제적 공공 정책에 반영되어야 한다. 최근에 정치인, 연구자, 학자, 그리고 활동가들이 가족정책에 보이는 관심은 가족 구성의 극적인 변화에서 비롯되었다. 맞벌이 가구의 숫자는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세계적으로, 여성 가구주의 경우가 대부분인 편부모 가구의 존재가 점차 일반적인 현상이 되고 있다. 그리고 가족 구조의 다른 중요한 변화는 자녀가 있건 없건 동성 커플의 증가와 연관된다. 유럽연합 다수의 국가들이 동성 결혼의 법적 지위와 관련하여 개혁적인 사회정책을 가지고 있다. 이런 정책은 성적 취향이 경제적, 정치적, 또는 사회적 차별의 법적 근거가 되지 못하도록 하기 때문에 개혁적이다. 그러나 다른 많은 국가들에서 동성 결혼의 금지는 경제적 차별의 형태가 되고 있다. 왜냐하면 결혼에서 유래하는 많은 혜택들(부부소득에 대한 세금 우대, 재산 상속법, 건강보험의 적용 범위를 포함하여)이 있기 때문이다. 결혼할 수 없는 이들도 이에 따라 차별받는다. 2004년 미국에서 매사추세츠 고등법원이 “시민 결합(civil union)”은 위헌이라고 판결하자 동성 커플의 지위에 대한 논쟁이 격해졌다. 이 사건은 미국 전역에서 동성 결혼의 문을 열어 젖혔다. 사회적 보수주의자들은 이러한 변화에 반대하며, 동성 결혼을 금지하기 위해 미국 헌법과 주정부의 법을 개정하기 위해 작업 중이다. 이와 같은 금지법들은 게이와 레즈비언이 결혼의 특권과 책임의 향유를 가로막을 것이다. 가족 내 협력과 갈등 현금, 현물, 서비스, (실물과 금융)자산과 같은 자원의 재분배를 통해 가족 구성원들에게 물질적 후생을 제공하는 것은 가족의 중요한 경제적 기능이다. 자원의 사용을 관리하는 사회적 규범은 문화마다 그리고 같은 문화 내에서도 다양하다. 여기서 우리는 이런 가구의 의사 결정 과정에 대한 페미니즘적 분석을 제공하고자 한다. 요구르트냐 셔벗이냐에 대한 가족 구성원들 사이의 이견은 조정하기 어렵지 않지만, 격렬한 갈등을 불러올 수 있는 다른 지출 결정도 존재한다. 예를 들면, 교육이 무상이 아닐 때 아들과 딸이 모두 학교에 갈 것인가? 가구 내 분업에 대한 결정 또한 어려울 수 있는데, 누가 가정 밖에서 유급노동을 수행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문제가 좋은 예다. 주류 경제학에서는 가족을 공통의 이해관계를 가지는 집단으로 보는 견해가 주를 이룬다. 이런 관점에서 가족 내 성별분업은 여성과 남성 모두에게 이득이 되는 전문화의 특수한 사례일 뿐이다. 남성 생계부양자·여성 양육자로 조직된 가족이 고유한 유용성을 가진다는 통념은 성별분업의 관점에 의해 “신가정경제학” 안에 뿌리내렸다(그리고 이 경제학자들에게 가구 내 성별분업은 사회적으로 조직된 성별이 아닌 생물학적 성을 기초로 한다). 시카고학파의 정통 자유 시장 경제학자들로부터 연원하는 가족에 대한 이런 접근은 시장을 그 출발점으로 삼고 수요와 공급 관계를 통한 교환을 분석의 핵심에 놓는다. 이런 해석에 따르면, 남편과 아내는 각각을 더 부유하게 만든다고 정의되는 교환에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동등한 관계다. 만일 가구 구성원 중 한 사람이 더 많은 은사 결정권을 갖는다면, 이 사람은 가장으로 간주되거나 이타적이라고 전제된다. 이 때 이타적인 가장은 소득·자원의 재분배·소비와 관련된 가족의 모든 것을 가족 구성원 모두를 위해 결정한다. 노동의 성적(성별)분업은 생물학에서 유래했지만 단지 상호 이득이 되는 개인적 선택의 결과 중의 하나로 탈바꿈한다. 시몬느 드 보부아르 탁월하게 비판한 것처럼 “입법가, 성직자, 철학자, 과학자 모두가 여성의 종속적인 지위가 천국이고 지상의 모두에게 이득을 준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분투하고 있다.” 이런 결론을 지탱하는 논리를 추적해 보는 것이 좋겠다. 커플들은 누가 가정에서 일하고 누가 수입을 위해 가정 밖에서 일할 것인지를 결정해야만 한다. 이것은 근본적으로 교환 체계다. 즉 식사준비, 세탁, 양육, 성관계는 소득과 부를 위해 교환될 수 있다. 신가정경제학은 생물학적 근거에 따라 여성의 자연적인 성향이 그런 활동에 있다는 전제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여성이 가구 내 서비스를 전문화할 것이라는 점은 놀랍지 않다. 이것은 현대 성별분업에 대한 고전적인 본질주의적 관점이다.7) 이런 자연적인 성향은 노동 시장에서 여성의 임금이 일반적으로 남성에 비해 매우 적다는 사실과 결합되어 여성에게 가사 노동에서 경제학자들이 “비교 우위”라고 부르는 것을 부여한다. 그리고 아동은 새 차나 주택 구입에 대한 결정과 크게 다르지 않은 소비 결정이나 주식, 채권, 또는 다른 자산에 대한 투자 결정처럼 다뤄진다. 이런 연구가 다른 페미니즘적 연구처럼 여성과 가족을 연구 대상으로 삼기는 하지만 신가정경제학을 페미니즘으로 보는 것은 오해다. 페미니스트 경제학의 창시자 중의 한 명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바바라 버그만을 인용하자면, “신가정경제학자들은 그 지향에 있어서 페미니스트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은 벵골 호랑이가 초식동물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만큼이나 절제된 표현이다.” 첫째, 무엇보다 직접적으로 페미니즘적 분석과 상반되는 것은 그들이 자율성과 권력의 성별 차이를 문제 삼지 못한다는 점이다. 둘째, 그들의 견해는 남성이 소득벌이에 주력하고 여성이 가내 노동에 주력하는 성별분업을 자연적인 것으로 수용하기 때문에 본질주의적이다. 페미니스트 이론이 경제 과정에 영향을 발휘하기 위해서 우리는 어디에나 존재하는 이런 가정들을 분석해야 한다. 낫버가 오트나 비나 에가월 같은 일부 페미니스트 경제학자들은 배우자들의 상대적 협상력이라는 측면에서 가족을 분석하는 것이 유용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런 분석은 갈등과 협력이 모두 가족 관계의 구성 요소라는 것을 보여주며, 가족의 상호작용을 협상의 한 유형으로 묘사한다. 가구 내 자원과 책임의 분배는 이런 협상의 결과이다. 우리는 가족 안에서 이런 협상 유형―한 사람이 요리를 하면 다른 사람은 설거지할 것에 동의하거나 한 사람이 아이를 데려오면 다른 사람은 장을 본다―에 익숙하다. 이런 분석은 가족 구성원들의 협상력 차이를 잘 보여준다는 점에서 우리의 관심을 끈다. 좋은 직업이나 수입에 대한 다른 접근수단을 소유하는 것이 협상 테이블에 나온 사람의 주요한 힘이 되는 것은 당연하다. 결과적으로 가족에서 여성의 권력은 그녀의 노동 시장 수입에 따라 영향을 받고 이런 수입은 또 노동시장에서 그녀의 지위에 따라 영향을 받는다. 즉 여성이 무급 가사 활동 시간을 줄일수록 그리고 시간제에서 전일제 유급고용으로 전환할수록 여성의 수입은 증가한다. 가구 내 성별분업이 여성에게 비시장 노동을 할당할 때, 여성은 가족의 의사 결정에서 영향력을 덜 갖게 될 것이다. 가족에 대한 전통적인 경제학의 시각에서 가족 내 성별분업이 갖는 이런 함의는 간단히 무시된다. 페미니스트 경제학자들은 게이와 레즈비언 가족에 대해서도 흥미로운 분석을 제시했다. 리 바젯은 협상 모델이 이성 커플의 가족을 전제하고 이런 모델을 레즈비언과 게이 남성의 가족에 적용하는 것은 “정상” 가족 형태는 이성 커플로 이루어진다는 전제를 영속화한다고 지적했다. 그녀는 동성 커플과 이성 커플의 의사 결정 방식이 근본적으로 동일하다는 가설에 문제를 제기한다. 그녀의 연구는 동성 관계가 가진 차별적인 법적·정치적·문화적 지위 때문에 게이와 레즈비언 가족이 대안적인 가족의 원동력을 발전시킬 수 있다는 견해를 지지한다. 바젯은 동성 커플 가족 연구가 가족생활의 복잡성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풍부히 한다고 주장한다. 가족에 대한 표준적인 경제적 견해와 가구와 기업의 관계에 대한 경제학자들의 전통적인 이해 사이에 몇몇 공통점이 있음을 지적하는 것은 흥미롭다. 가구는 경제의 원료(생산 요소: 토지, 노동, 자본)를 소유하고 있다. 기업은 가구가 소비하는 재화와 서비스를 생산하기 위해 생산 요소를 사용한다. 가구가 기업에 생산 요소를 제공할 때, 가구는 기업이 생산하는 재화와 서비스를 구매하는 데 사용할 수 있는 소득을 얻는다. 기업이 가구에 재화와 서비스를 판매하는 데 성공하면, 기업은 더 많은 생산 요소를 활용할 수 있는 예산을 확보한다. 가구와 기업은 완벽하게 상호보완적이 되고, 각각은 상대방의 필요를 정확히 충족시킨다. 가구와 기업에 대한 전통적인 시각은 여성과 남성을 상호보완적인 대립물로 보는 전통적인 견해와 공통점이 많다. 남성은 공격적이고 경쟁적이며 강하고 이성적인 반면, 여성은 수동적이고 순응적이며 약하고 감정적이다. 여성성과 남성성의 이런 진부한 특성이 가구(사적영역)와 기업(공적영역)의 이분법 위에서 나타난다는 사실을 아는 것은 어렵지 않다. 이렇게 보면, 경제는 끊임없는 교환의 연쇄처럼 보인다. 토지, 노동, 자본은 임금, 지대, 이자, 이윤으로 교환되고, 이것은 다시 재화와 서비스를 구입하는 데 소비된다. 이런 교환의 연쇄가 어떻게 그 연쇄에 포함되지 않는 다른 모든 활동을 눈에 보이지 않는 것으로 만드는지를 주목하자. 많은 이들이 가구의 유지에 막대한 노동, 시간, 감정적 노력이 투입되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이런 노동은 직접적인 소득으로 보상되지 않고, 따라서 그것은 시야에서 사라진 것처럼 보인다. 이처럼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려면 누가, 얼마만큼의 시간 동안 가사 활동을 수행하는지 알 필요가 있다. 불균등하게 많은 양의 가구 노동이 여성에 의해 수행되고, 심지어 그들이 가정 밖에서 소득을 벌고 있을 때도 그럴 것이다. 신가정경제학은 이런 분업을 자연적인 것으로 수용했다. 사실 신가정경제학의 창시자 게리 베커는 표준적인 거시경제학적 분석을 가구의 분업을 포함한 가족 내부 활동에 적용한 것으로 노벨상을 수상했다. 그는 명시적인 현금 거래나 시장 교환이 없어도 가족의 행위가 여전히 수요와 공급으로 설명될 수 있음을 보여 주었다. 이런 접근이 가족 내에 존재하는 성별 불평등을 합리화하기 때문에 많은 페미니스트 사회과학자들은 경제학 안팎에서 이에 반대했다. 가구에서 수행되는 노동을 고려하면서 페미니스트들이 제기한 또 다른 관심사는 가족이 경제적으로 필수적인 많은 활동을 수행하지만 이런 노동의 가치는 사회의 경제적 건강과 후생을 측정하려는 취지의 통계에는 드러나지 않는다는 사실로부터 부상했다. 국민 소득 통계에서 가구 생산의 가치를 무시하는 것은 심각하게 고려되어야 할 문제다. 그것은 결국 경제 전반의 그림을 왜곡하고 정책결정이 가족에 미치는 실제적인 영향을 은폐한다. 예를 들어 양육 보조금을 없애는 것이 비용을 절감하는 조치로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외양은 문제를 오도할 수 있다. 이런 정책은 그 비용을 단지 가구로 전가할 뿐이다. 가사 노동의 가치가 밝혀지지 않을 때, 이런 비용은 은폐된다. 마찬가지로 이는 가구 생산의 변화가 다른 경제 행위의 수단에 미치는 영향을 은폐한다. 예를 들어 여성의 유급노동력 유입이 증가하면서 가구 생산은 시장 생산으로 전환되었다. 경제학자 제프 매드릭이 주장하는 것처럼, 이전에 가구에서 제공되던 재화와 서비스를 판매하는 사람들에게 지불되는 임금과 급료가 통계에 반영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런 여성들이 받는 임금과 급료는 통계에 반영된다. 따라서 경제가 성장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 성장은 가구로부터 시장으로 생산이 전환된 것에 기인한다. 무급 가구 노동의 가치를 측정하는 것은 어렵지 않으며, 페미니스트 경제학자들은 이런 중요한 노동을 반영하기 위해 국가의 소득 집계 체계가 어떻게 변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1934년 페미니스트 경제학자 마거릿 리드는 “제 삼자 척도”를 사용하자고 제안했다. 만일 제 삼자가 가구 노동을 유급으로 수행할 수 있다면, 그 노동의 추산 가치는 국가 전체의 산출이나 국민총생산(GNP)의 일부로 계산되어야 한다. 국제연합(UN)은 이를 추산하기 위해 측정에 기초한 방법론을 개발했다. 비시장 노동에 소요되는 시간을 측정하면 다양한 가구 업무에 필요한 노동시간의 평균량이 측정된다. 그리고 시장 임금은 이러한 업무를 완수하는 데 필요한 시간으로 환산된다. 평균 노동시간을 시간으로 환산한 시장임금으로 곱하면 가사 노동 가치의 추정치가 산출된다. 하지만 이 노동에 대한 환산 임금이 “여성”의 노동에 대한 사회의 저평가를 반영하기 때문에 이런 추산은 그 노동의 실제 가치를 적게 보여주는 경향이 있다. 보수적으로 추산을 해도 이런 노동의 규모는 놀랄 만한 수준이다. 세계 경제발전을 연구한 캐슬린 크라우드와 낸시 가렛은 1990년 132개 국가의 무급노동의 가치를 추산했다. 이들은 무급 가구 노동이 8조 달러 또는 각 나라의 공식 국민총생산 총계의 1/3 이상의 기여를 하고 있음을 발견했다. 오스트레일리아 통계청은 1992년 무급노동(주로 요리, 청소, 양육)의 가치가 국내총생산(GDP)의 거의 40%에 이른다고 추산하면서 유사한 결론에 도달했다. 시간과 가치 모든 면에서 무급노동은 분명 중요하다. 결론 페미니스트와 그 지지자들이 유급노동, 가사, 가족생활, 가구의 의사결정에 대한 남성과 여성의 기여를 전통적으로 정의해 온 가부장적 규범에 도전해 왔기 때문에 무급 가구 노동을 평가하는 것은 확실히 논쟁적이다. 실제로 여성과 남성에게 적합한 역할을 둘러싼 이견은 경제학 내부의 논쟁을 포함하여 오늘날 세계적으로 공공 정책을 둘러싼 많은 논쟁의 핵심에 있다. 이런 쟁점들은 새로운 것처럼 보일 수 있다. 엘리자베스 캐디 스탠톤, 루크레티아 모트, 소져너 트루스, 이다 웰즈, 샬롯 퍼킨스 길먼, 조세핀 버틀러, 헤리엇 마티뉴와 같은 19세기 페미니스트들은 이런 권력과 이해관계의 불균형은 여성이 사회에 완전히 참여하는 데 장애가 된다고 주장했다. 남성 생계부양자·여성 양육자 가족 모델이 우리의 가부장적 과거에 깊이 뿌리박았다고 하더라도 이런 성별 역할을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는 산업혁명의 산물이다. 여성적 가정성 이데올로기는 여성과 남성에게 부정적 결과를 지속시키고 있다. 무엇보다 그것은 실존하는 현재 가족의 실제적인 다양성을 정의에서 누락시키는 경향이 있다. 다양성의 인정은 성별 역할을 페미니즘적으로 재구조화하는 첫걸음이다. 그러나 여성 유급노동의 중요성이나 여성 무급노동의 실제 사회적 가치, 또는 전통적인 성별 위계의 부정적인 영향을 인식하지 못하는 경제·사회 정책의 접근 속에서 빅토리아 이데올로기는 여전히 살아 있다. 성별분업에 대한 시대착오적인 시각에 기초한 공공 정책은 가족 구성원들이 공통의 이해관계를 공유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인식할 수 없다. 반대로 가족에 대한 페미니즘적 관점은 이런 모순들이 성별 역할을 구조화하는 방식을 보여주기 위해 애정과 착취의 모순적인 힘에 초점을 맞춘다. [각주] 1)“이 속담은 영국의 관습법의 기본 개념만큼이나 오래된 것이다.” William Morris and Mary Morris, Morris Dictionary of Word and Phrase Origins(HaperCollins, 1988). 유사한 표현으로는 이런 것이 있다. “당신의 집에서 당신은 우두머리다. 그 곳에서는 누구도 당신에게 무엇을 하라고 말할 수 없다. 누구도 당신의 허락 없이 당신의 집에 들어갈 수 없다. 이 속담의 기원은 ‘천주교 장난감 무대’(1581)로 거슬러 올라간다. 1644년에 영국의 판사 에드워드 코크 경(1522~1634)은 '한 남자의 집은 그의 성이고 한 사람의 가정은 모두에게 가장 안전한 피난처다'라는 속담을 인용했다. 미국에서는 ‘의지와 운명’(1692)에서 처음 나왔다. 영국에서 ‘영국남자’는 종종 남자를 대신한다.” Gregory Y. Titelman, The Random House Dictionary of Popular Proverbs and Sayings (Random House, 1996). 본문으로 2)이것은 2001년 영화 『고스포드 파크』(Gosford Park)에서 훌륭하게 묘사되었다.본문으로 3) 지배적인 성별 질서에 대해 분노를 표현하고 있는 주목할 만한 문서 중에는 1792년에 처음 출판된 메리 울스톤크래프트의 A Vindication of the Rights of Woman과 엘리자베스 캐디 스탠톤과 루크레시아 모트가 쓴 1848년 세네카폴 여성권리대회의 보고서, Declaration of Sentiments가 있다. 이 문서들과 또 다른 글은 The Feminist Papers: From Adams to de Beauvoir (Columbia University Press, 1973)에서 볼 수 있다. 본문으로 4)Folbre, "Socialism, Feminist and Scientific." 이런 요구가 가장 급진적인 남성에게조차 과도한 것이었음을 알게 되면서, 페미니스트 지도자들은 한 걸음 후퇴하여, 투표권으로 대표되는 남성과의 공식적 법적 평등을 위한 훨씬 더 협소한 요구에 집중했다.본문으로 5)1900년에 아프리카계 여성의 44%가 사적 가구 서비스에 종사했고, 다른 44%는 농업에 종사했다. 본문으로 6)이 표현은 칼 마르크스·프리드리히 엥겔스의 『공산주의자 선언』(1848)에서 유래했다.본문으로 7)이런 본질주의가 우리의 의식을 얼마나 깊이 관통하고 있는가를 평가하려면 불후의 아동만화 The FlinstonesThe Jetsons을 생각해보기만 해도 된다. 이런 부분을 지적할 수 있게 된 데에는 울랴 그라파드 교수의 공이 크다. 본문으로 <참고문헌> Arlie R. Hochschild and Ann Machung, The Second Shift. William Morrow,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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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6-02-03

    오늘, 여성으로 산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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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여성으로 산다는 것은 참 어렵다. 일상 곳곳에서 부지불식간에 복병처럼 튀어 나오는 여성문제를 외면하지 않으려면 과감한 저항과 끊임없는 자기 성찰이 전제될 수밖에 없다. 닳고 단 듯 회자된 ‘사적인 것이 정치적’이란 명제가 얼마나 끈질기게 유효한가를 새록새록 체득하고 있는 이에게, 치열하고 현학적인 논쟁의 테이블에서 해답을 얻는 것보다 대낮의 지하철에서 버젓이 횡행하는 성폭력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 방안을 모색하는 일이 더 어려울 수 있다. 다른 듯 닮았을 기억의 끝자락을 당겨본다. # 1 처음 여성주의를 만나다 다각도에서 엄청나게 떠들어대는 주입식 사고마비 과정에도 불구하고 시니컬한 삐딱함의 겉멋에 들었던 것일까. 괜시리 운동권에 대한 막연한 호감을 품고 대학에 입학했다. 학생운동이 쇠락기였던 당시에도 유난히 운동권을 배척하던 단과대 분위기에서 난 학생회실을 들락거리는 소수의 신입생 중 하나였다. 친밀한 듯 하면서 왠지 모를 어색함이 배어있는 끈적끈적한 분위기에 섞여 놀다가도 한순간 꺼림칙해지는 순간들이 찾아들곤 했다.“선배가 말씀하시는데 어디 딴 데 보고 있냐”, 학내 여성운동 주체들을 두고서 “지금 무엇이 중요한지 모르는 애들”이라며 소리 높여 흥분했던 그 떨림을 아직 기억한다. 방학 중 학내 여학생위원회에서 주최하는 세미나에 참여하게 되었다. 어떤 또렷한 계기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저 자연스러운 이끌림이었다. 나의 불편함은 정당한 것이었다. 칼부림을 마다치 않는 가정폭력이 고이 간직해야 할 부끄러운 풍경이 아님을 확인했다. 수감 중이던 학생회장의 성폭력 전력을 공개 발표한 여학생위원회의 행동이 지나치지 않았냐고 반문했던 나의 사고가 가부장제의 자장에 꽤나 흠뻑 젖어든 상태였음을 깨달았다. 일상과 활동의 경계를 넘나드는 숱한 사례들을 도마 위에서 올려놓으면서 수다를 계속했다. 애정과 연대보다 분노와 저항감을 한껏 들이쉰 때였다. 나의 부당함에 이름을 부여해준 여성주의가 든든했지만, 정작 중요한 무언가는 빠져있었다. # 2 언니들을 만나다 인터넷 서핑을 하다가 그 작은 여성 노조를 접하게 되었다. 학내에서 운동의 희노애락을 나눌 둥지를 찾지 못해 외롭던 차, 밖에서 무언가를 구하고 싶었다. 사이트에 올려진 성명서의 기조가 꽤 셌다. 당시 그것이 중요했다. 여타 큰 노조들의 타협적인 언행의 틈을 비집고 굽히지 않는 목소리를 올곧게 표현한 듯 한 그곳이 그 어디보다도 정당해보였다. 참‘가족적’인 분위기였다. 자그마한 테이블에 앉아 회의를 진행하곤 했다. 주로 소규모 사업장에서 근무하거나 실업상태에 내몰려 있는 조합원 언니들의 경험이 어울려진 편안한 자리였다. 내가 지금 마시고 있는 찻잔이 누군가의 노동으로 만들어졌음을 새삼 깨달으면서 배워갔다. 여성주의에 관심이 있다고 머리만 굴렸던 이전과 비교해, 여성노동 현장의 우울한 색채를 간접적으로나마 덧입을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어 참 소중했다. 불안정한 여성 노동의 현주소를 생생하게 들으며 생활 속에서 마주치는 분노스럽고 어지러운 경험들을 같이 공감해주는 그곳이 좋았다. 언젠가부터 어긋나기 시작했다. 꽤나 놀랍고 안타까운 사건을 접하면서 그곳과의 인연은 끝이 났고 동시에 ‘여성’을 힘주어 강조하던 시절도 일단락되었다. 머리가 굵어지고, 조금씩 쌓여가는 혹은 내려놓을 짐들의 무게가 버거워지면서 페미니즘을 실천하며 살아가는 일이 너무 고단하고 피곤한 일임을 깨쳤다. 그리고 가능하면 외면하고 싶었다. # 3 인권운동을 만나다 영화를 좋아한다. 운동과 영화에 관심 있던 대학 시절, 덥석 인권영화제 자원활동을 시작했고 인연이 닿아 졸업 후 인권단체에서 상근을 하게 되었다. 별로 예견치 못한 진로였다. 여성인권을 표방하거나 이를 의식적으로 흡수하지 않았지만, 웃음이 많고 서열이 없는 그곳의 조직문화가 매력적이었다. 언니들이 많고 일상의 언행에 민감했던 그곳에서 비폭력과 나눔을 실천하기 위하여 힘들게 배워갔다. 그렇지만 숨어있을 때가 많았다. 빡빡하고 체계적인 완벽함이 선으로 받아들여지는 때에 운동을 제대로 해보지 않아서 그러겠거니 느슨한 나를 질책했지만 그 순간 여성주의와 만난다면 어떻게 달라졌을까 상상력을 발휘하고 싶기도 했다. 난 여전히 여성인권을 앞에 두고 맞짱 뜨지 못하고 있었다. 역시 봉합을 목격했고 고심의 흔적 없이 여성주의를 한두 마디로 재단하는 시간들을 관찰했지만, 여성이 흡수된 인권의 방향 찾기가 뿌옇게 불투명했지만, 바꾸기 위한 적극적인 행동을 펼치기란 참말로 어려웠다. 헉헉거리며 맡은 일을 제대로 마치기도 숨이 차오르던 때에, 문제제기에서부터 골머리 썩이며 진통을 거듭할 것이 뻔한 여성인권을 의제로 끌어들이는 노력을 그다지 기울이지 못했다. 나눌 수 있는 사람은 있었지만 여기서도 이는 미지의 개척지였다. 적잖은 그녀들에게도 마찬가지였을 터이다. 아쉽지만 기회는 남아있으리라 믿는다. 수평적이고 식물적인 정체성을 띤 것이라 믿고 있는 여성인권을 ‘실천’하기 위한 머나먼 여정에서 여전히 서성이며 좌충우돌 하는 델마를 위하여.

  • 2006-02-03

    오늘, 여성으로 산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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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여성으로 산다는 것은 참 어렵다. 일상 곳곳에서 부지불식간에 복병처럼 튀어 나오는 여성문제를 외면하지 않으려면 과감한 저항과 끊임없는 자기 성찰이 전제될 수밖에 없다. 닳고 단 듯 회자된 ‘사적인 것이 정치적’이란 명제가 얼마나 끈질기게 유효한가를 새록새록 체득하고 있는 이에게, 치열하고 현학적인 논쟁의 테이블에서 해답을 얻는 것보다 대낮의 지하철에서 버젓이 횡행하는 성폭력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 방안을 모색하는 일이 더 어려울 수 있다. 다른 듯 닮았을 기억의 끝자락을 당겨본다. # 1 처음 여성주의를 만나다 다각도에서 엄청나게 떠들어대는 주입식 사고마비 과정에도 불구하고 시니컬한 삐딱함의 겉멋에 들었던 것일까. 괜시리 운동권에 대한 막연한 호감을 품고 대학에 입학했다. 학생운동이 쇠락기였던 당시에도 유난히 운동권을 배척하던 단과대 분위기에서 난 학생회실을 들락거리는 소수의 신입생 중 하나였다. 친밀한 듯 하면서 왠지 모를 어색함이 배어있는 끈적끈적한 분위기에 섞여 놀다가도 한순간 꺼림칙해지는 순간들이 찾아들곤 했다.“선배가 말씀하시는데 어디 딴 데 보고 있냐”, 학내 여성운동 주체들을 두고서 “지금 무엇이 중요한지 모르는 애들”이라며 소리 높여 흥분했던 그 떨림을 아직 기억한다. 방학 중 학내 여학생위원회에서 주최하는 세미나에 참여하게 되었다. 어떤 또렷한 계기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저 자연스러운 이끌림이었다. 나의 불편함은 정당한 것이었다. 칼부림을 마다치 않는 가정폭력이 고이 간직해야 할 부끄러운 풍경이 아님을 확인했다. 수감 중이던 학생회장의 성폭력 전력을 공개 발표한 여학생위원회의 행동이 지나치지 않았냐고 반문했던 나의 사고가 가부장제의 자장에 꽤나 흠뻑 젖어든 상태였음을 깨달았다. 일상과 활동의 경계를 넘나드는 숱한 사례들을 도마 위에서 올려놓으면서 수다를 계속했다. 애정과 연대보다 분노와 저항감을 한껏 들이쉰 때였다. 나의 부당함에 이름을 부여해준 여성주의가 든든했지만, 정작 중요한 무언가는 빠져있었다. # 2 언니들을 만나다 인터넷 서핑을 하다가 그 작은 여성 노조를 접하게 되었다. 학내에서 운동의 희노애락을 나눌 둥지를 찾지 못해 외롭던 차, 밖에서 무언가를 구하고 싶었다. 사이트에 올려진 성명서의 기조가 꽤 셌다. 당시 그것이 중요했다. 여타 큰 노조들의 타협적인 언행의 틈을 비집고 굽히지 않는 목소리를 올곧게 표현한 듯 한 그곳이 그 어디보다도 정당해보였다. 참‘가족적’인 분위기였다. 자그마한 테이블에 앉아 회의를 진행하곤 했다. 주로 소규모 사업장에서 근무하거나 실업상태에 내몰려 있는 조합원 언니들의 경험이 어울려진 편안한 자리였다. 내가 지금 마시고 있는 찻잔이 누군가의 노동으로 만들어졌음을 새삼 깨달으면서 배워갔다. 여성주의에 관심이 있다고 머리만 굴렸던 이전과 비교해, 여성노동 현장의 우울한 색채를 간접적으로나마 덧입을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어 참 소중했다. 불안정한 여성 노동의 현주소를 생생하게 들으며 생활 속에서 마주치는 분노스럽고 어지러운 경험들을 같이 공감해주는 그곳이 좋았다. 언젠가부터 어긋나기 시작했다. 꽤나 놀랍고 안타까운 사건을 접하면서 그곳과의 인연은 끝이 났고 동시에 ‘여성’을 힘주어 강조하던 시절도 일단락되었다. 머리가 굵어지고, 조금씩 쌓여가는 혹은 내려놓을 짐들의 무게가 버거워지면서 페미니즘을 실천하며 살아가는 일이 너무 고단하고 피곤한 일임을 깨쳤다. 그리고 가능하면 외면하고 싶었다. # 3 인권운동을 만나다 영화를 좋아한다. 운동과 영화에 관심 있던 대학 시절, 덥석 인권영화제 자원활동을 시작했고 인연이 닿아 졸업 후 인권단체에서 상근을 하게 되었다. 별로 예견치 못한 진로였다. 여성인권을 표방하거나 이를 의식적으로 흡수하지 않았지만, 웃음이 많고 서열이 없는 그곳의 조직문화가 매력적이었다. 언니들이 많고 일상의 언행에 민감했던 그곳에서 비폭력과 나눔을 실천하기 위하여 힘들게 배워갔다. 그렇지만 숨어있을 때가 많았다. 빡빡하고 체계적인 완벽함이 선으로 받아들여지는 때에 운동을 제대로 해보지 않아서 그러겠거니 느슨한 나를 질책했지만 그 순간 여성주의와 만난다면 어떻게 달라졌을까 상상력을 발휘하고 싶기도 했다. 난 여전히 여성인권을 앞에 두고 맞짱 뜨지 못하고 있었다. 역시 봉합을 목격했고 고심의 흔적 없이 여성주의를 한두 마디로 재단하는 시간들을 관찰했지만, 여성이 흡수된 인권의 방향 찾기가 뿌옇게 불투명했지만, 바꾸기 위한 적극적인 행동을 펼치기란 참말로 어려웠다. 헉헉거리며 맡은 일을 제대로 마치기도 숨이 차오르던 때에, 문제제기에서부터 골머리 썩이며 진통을 거듭할 것이 뻔한 여성인권을 의제로 끌어들이는 노력을 그다지 기울이지 못했다. 나눌 수 있는 사람은 있었지만 여기서도 이는 미지의 개척지였다. 적잖은 그녀들에게도 마찬가지였을 터이다. 아쉽지만 기회는 남아있으리라 믿는다. 수평적이고 식물적인 정체성을 띤 것이라 믿고 있는 여성인권을 ‘실천’하기 위한 머나먼 여정에서 여전히 서성이며 좌충우돌 하는 델마를 위하여.

  • 2005-12-22

    2005년 여성위원회 마지막 소식지가 나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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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회진보연대 여성위원회 월간소식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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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5 여성위원회 활동을 돌아본다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가 양산하는 빈곤의 여성화와 여성에 대한 폭력에 맞선 투쟁을 확산한다. 불안정 노동을 철폐하기 위한 여성노동자들의 투쟁에 연대를 강화한다. 또한, 전쟁이 여성에게 부과하는 폭력의 양상을 비판하고 이에 맞서는 투쟁을 조직한다. 더불어 성매매방지법 시행을 둘러싼 논의를 확산하고 여성의 권리를 실현하기 위한 투쟁에 결합한다...-2005 여성위활동과제 중

     
     

    2005 여성위원회 송년모임을 함께해요~

    일시: 12월 26일 월요일 오후 7시
    장소: 사회진보연대 회의실

     
     

  • 2005-12-16

    여성의 권리와 평등을 위하여 유럽헌법조약을 거부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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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번역 바울라 수녀(르베르 애덕 수녀회) [편집자 주] 이번 호에서는 유럽헌법조약을 부결시키는 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섰던 아탁의 활동 중에서 페미니스트들의 대응을 살펴본다. 유럽의 여성운동과 페미니스트들은 헌법조약이 여성에게 미칠 부정적인 영향을 인식하고 활발한 반대운동을 벌였다. 헌법조약에 관한 첫 번째 국민투표를 시행했던 스페인에서는 2005년 1월 ‘마드리드 페미니스트 회의’가 열렸고, 이를 통해 여성들의 반대운동을 조직했다. 아탁 프랑스의 페미니스트들은 투쟁을 더욱 적극적으로 만들고자 노력했다. 이 글은 그런 노력의 일환으로, 올해 5월, 프랑스에서 헌법조약 반대운동이 한창이던 시기에 아탁 프랑스에서 발표한 글이다. 이 글은 헌법조약을 남녀의 사회적 관계라는 측면에서 분석하고 있다. 헌법조약은 마치 유럽의 전 인민들의 의지에 따라 만들어진 것처럼, 그리고 남녀평등을 진전시킬 것처럼 강요되었다. 여성억압과 불평등의 기원을 고려하지 않고 성적 차이를 반영하지 않는 평등이란 실상 여성에게 매우 해악적인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아탁은 여성의 진정한 권리와 평등을 위해서는 헌법조약을 반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아탁의 주장은 지난 호에 소개한 성별화된 시민권을 성문화하려했던 이리가레의 시도와 맞닿는 부분이 있다.

    * * * * *
    남녀평등의 진보는 다른 모든 불평등의 축소와 같은 말이라는 것을 경험이 증명하고 있다. 따라서 여성의 지위와 평등에 대한 요구는 경쟁보다 연대와 협력을 중요시하는 사회적 유럽을 건설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사회적 유럽은 기본권과 공공 서비스가 유럽연합(이하 연합) 단일시장보다 우선하는 유럽이며, 여성들이 획득한 권리를 보장하고 남녀평등과 인권의 전체적인 수준을 높인다. 또 다른 유럽을 건설하기 위해 모두가, 특히 여성들이 유럽헌법조약에 꼭 반대해야 한다. 헌법 지지자들은 헌법조약이 여성에게 기회를 준다고 한다. 헌법 지지자들은 남녀평등이 오래 전부터 유럽사회제도의 관심사이며, 헌법조약이 남녀평등을 진전시킬 것이라고 사람들이 믿고 있음을 근거로 들지만, 현실에서 이는 어불성설이다. 만약 사람들이 연합 회원국 목표기준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작동되는지를 이해한다면, 누구도 헌법조약이 여성을 위한 기회라고 믿지 않을 것이다. 예를 들어, 남녀평등의 진전이란 야간근무가 모든 사람을 위해 금지되는 것, 설령 야간근무를 인정한다고 해도 전체의 이익을 위해서만 인정하는 것일 텐데, 유럽에서는 평등이라는 이름으로 많은 여성들이 [남성들처럼] 야간 근무를 하게 되었다. 유럽의 자유주의 정책에서 작동하는 남녀평등의 원칙은 평등의 기준을 낮추는 것이다. 이것이 현재 유럽헌법조약에 기입되어 있는 정책이다. 유럽헌법조약은 여성의 권리를 위한 진보와는 거리가 멀고 오히려 그 반대로 심각한 후퇴의 위험이다. 헌법조약과 목표기준을 보면 새로운 권리는 하나도 없으며, 여성을 위한 기본적인 권리는 부재하다. 기본권헌장(헌법조약 Ⅱ부)은 불충분하다. 그것이 다룰 수 있는 사법적 범위는 매우 한계적이고, 여타의 헌법조약 규정에 좌우된다. 남녀평등은 인간의 존엄이나 민주주의처럼 연합의 기본가치로 인정되지 않았다. 남녀평등은 연합의 목적으로 제시되어 있지만, 이를 적용하는 규정은 없고 단지 선언으로 발표될 뿐이다. 마지막으로 제일 중요한 것은 헌법의 기초를 구성하는 자유주의적 교리는 그 자체로 여성의 권리를 침해한다는 점이다. 자유주의는 사회복지의 후퇴, 공공서비스, 민영화, 불평등 심화, 이미 많은 여성들에게 영향을 주고 있는 불안정한 삶을 양산하고 있다. 유럽고용전략에서 작용하고 있는 남녀평등의 개념은 그 개념의 진보적 내용을 명분삼아 자유주의자의 이익에 봉사하고 그들이 언제나 유연하게 스스로를 정당화하는 데 이용된다. 1. 심각한 결여 기본권헌장은 “연합의 새로운 권한이나 임무를 만들지 않고,” “헌법의 다른 부분에서 규정된 임무와 권한을 수정하지 않는다(헌법조약 Ⅱ- 111).” 기본권헌장은 “각 나라의 관습에 맞게 해석이 되어야하고(헌법조약 Ⅱ-112-4),” 또 “각 국가의 법률을 충분히 고려해야한다(헌법조약 Ⅱ-112-5).” 이런 문장들은 확실히 기본권헌장이 구속력이 없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기본권헌장은 여성을 위한 새로운 권리를 전혀 만들지 않고, 기본권을 결여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후퇴하고 있다. 피임, 낙태, 성적지향 선택의 권리 자신의 신체와 재생산 능력을 통제하는 권리, 즉 낙태와 피임의 권리는 기본적 자유의 영역이다. 그러나 그것은 부재하다. 몇 개국(포르투갈, 아일랜드, 폴란드, 몰타, 키프로스)에서 낙태는 금지되거나, 엄격한 제한을 받고 있다. 연합은 그 국가들에게 낙태의 제한이나 금지를 강제하면 안 되기 때문에 낙태의 권리를 헌장에 넣을 수 없다고 한다. 이것은 헌장이 법적 구속력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 권리들에 관한 법률 수준을 높이는 것을 통해 전체 수준을 높이는 것이야말로 헌장의 목표 중에 하나여야 했다. 자신의 성적지향을 선택할 권리는 표기되지 않았다. 성적지향에 따른 모든 차별은 명백히 금지한다(헌법조약 Ⅱ-81)는 표현으로는 불충분하다. 성에 다른 차별 금지는 평등의 권리를 단언하는 것으로 대체될 수 없다. 차별을 증명하기가 어려워서 더욱 그렇다. 폭력을 당하지 않고 생활할 권리 다른 것과 마찬가지로 이 기본적인 권리도 부재하다. 여성들이 당해왔던 폭력은 요즘 알려지기 시작했다. 폭력을 당하지 않고 생활할 권리는 가정폭력, 강간, 여성 매매, 강제결혼, 성기절단 등의 모든 폭력에 대항하는 타협 없는 투쟁을 의미해야 한다. 이혼의 권리 결혼해서 가정을 꾸리는 것은 헌법조약 Ⅱ-69에 보장된 권리지만, 이혼의 권리는 그렇지 않다. 성매매 목적의 인신매매 금지 노예와 강제노동을 금지하는 헌법조약 Ⅱ-65는 확실히 성매매 목적의 인신매매를 겨냥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일부 사람들은 성매매가 확대되는 것을 다른 서비스업처럼 큰 이익을 얻을 수 있는 시장으로 생각한다. 자본 이동을 제한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고(헌법조약 Ⅲ-156, 157), 따라서 성매매 목적의 인신매매로 생긴 검은 돈을 통제할 수 없다. 대의제 민주주의 원칙 조항 Ⅰ-46에 정의되어 있는 대의제 민주주의 원칙은 민주주의가 남녀 사이의 균등한 대의, 즉 균등제(parite)와 경제적․정치적 결정의 모든 수준에서의 균등을 보장할 때에만 대의할 수 있다는 점을 명확히 밝혀야한다. 유럽헌법조약을 계획했던 회의는 그 구성원 대다수가 남성이었다고 알려지고 있다. 시민권 연합의 시민권 규정은 사회적 권리와 헌법조약 Ⅱ-99~106에 정의된 권리(투표권, 피선거권, 이동의 권리 등)를 위해 남녀 거주민들에게 확대되어야 한다. 개인적 지위에 관한 법률로 인하여 외국인 여성 또는 이주여성의 권리는 너무 자주 그 남편의 지위에 따라 좌우되고, 그녀들의 출신 국가의 억압적 관습이나 규범에 따라야 한다. 보호받을 권리 헌법조약 Ⅱ-78에 정의된 보호받을 권리는 성별이나 섹슈얼리티 때문에 여성들이 당하는 폭력, 억압, 박해에 대한 보호권을 인정해야 한다. 고용의 권리 유럽헌법조약은 모든 사람의 “노동의 권리(le droit de travailler)”와 “구직의 자유”를 인정한다(헌법조약 Ⅱ-75). 이 얼마나 행운인가! 그러나 그것은 “노동권(le droit au travail)”과는 매우 다르다. 그것은 1948년 세계인권선언에 쓰여진 노동권으로부터 많이 후퇴한 것이다. 유럽의 25개국 실업률은 평균 9%(2004년 8월 Eurosignal조사)고, 여성의 실업률은 남성보다 2% 높다. 그럼에도 유럽헌법조약 어디에도 실업률 감소라는 목표는 쓰여 있지 않을 뿐더러 실업이라는 단어조차 언급되지 않는다. 일을 갖는 것은 여성이 자립하기 위한 조건이다. 그러나 여성들은 심각한 실업, 탁아소와 돌봄 노동 서비스 부족, 일자리의 불평등, 고용의 질 하락과 같은 여러 가지 어려움에 부딪친다. 고용의 권리, 즉 고용의 질에 대한 규범과 더불어 실업의 감소라는 목표가 [헌법조약에서] 실종된 것은 그저 잊혀진 것이 아니다. 이런 권리들은 자유주의적 교리와는 양립 불가능할 뿐이다. 최저 소득, 연금, 실업 수당의 권리 이 권리들은 인정되지 않는다. 모든 사람은 “자신과 자신의 가족이 건강하고 인간다운 삶을 보장받기에 충분한 생활기준에 대한 권리를 가진다. 이것은 실업자, 환자, 장애인, 과부․홀아비, 노인의 경우에도, 그리고 생계수단을 잃었을 경우에도 보장되는 권리다”라고 선언한 1948년 세계인권선언의 내용에서 후퇴한 것이다. 거기에서는 [프랑스식] 최저임금(SMIC, 전직종 최저임금제)을 인정하지 않고, 유럽 차원의 최저임금은 말할 것도 없다. 한편 이 권리들은 실업자, 그 중에서도 수당을 받지 못하는 실업자, 저임금 노동자, 최저의 사회보장 수혜층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여성들과 특히 관련이 있다. 이런 여성들은 프랑스에서 가난한 노동자의 80%와 노령 연금의 최저 수준보다 낮은 연금을 받는 은퇴자들의 83%에 달한다. 이주 여성과 편모들에게는 사회적으로 불리한 조건이 가중된다. [사회보장]수당에 대한 권리를 폐지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것은 회원국의 정책을 규정하는 “경제정책의 일반 방침”(헌법조약 Ⅲ-178)을 적용한 것이다. 이 방침은 “노동시장에 활동적으로 남아있는 것이 재정적으로 유리하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 공공 예산과 [사회보장]수당에 제한을 부과한다. 더 쉽게 말하면, 최저소득보조금(RMI)이나 실업수당이 너무 높아서 사람들이 구직활동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마치 RMI 수급자나 실업자들이 스스로 원해서 그렇게 한다는 것처럼! 그리고 새로운 위협 [헌법에 따르면] 교회와 종교 공동체가 합법적인 대화상대로 인정되었다(헌법조약 Ⅰ-52). 이런 인정은 표현, 양심, 신앙의 자유가 이미 보증되어 있기 때문에 전혀 쓸모없는 것일뿐더러 위험한 것이다. 도처에 여성혐오증을 가진 종교적 보수주의자들이 대두하는 것은 피임, 낙태와 같이 이미 획득된 권리에 대한 증대하는 위협에 해당한다. 일반적으로 교회, 그리고 특히 보수주의자들은 더 강하게, 남자와 여자의 사회적 역할이 다르고 따라서 여성의 지위는 열등하다고 이론화하고 그 결과 불평등을 낳는다. 연합의 모든 제도와 법규에서 정교분리의 원칙이 재확인될 때에만 교회의 압력에 맞서 여성의 권리를 지켜낼 수 있다. 2. 유럽연합은 남녀평등의 가치에 기반을 두지 않는다 「연합의 가치들」이란 제목의 헌법조약 1-2에 의하면, 남녀평등은 “연합이 기반을 둔 가치”가 아니며, 새로운 국가들의 가입 기준도 아니다. 연합의 가치들은 문서의 첫 문장처럼 “연합은 인간존엄성, 자유, 민주주의에 기반하고 있다”고 명시되어 있다. 남녀평등은 이 조약의 두 번째 문장에서만 언급되는데 “이 가치들은 남녀가 평등한 사회에서 가입 국가들에게 공통적이다.” 하지만 이렇게 언급되었다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점은 두 문장의 지위에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유럽헌법조약이 많은 사회단체들이 요구했던 인간존엄성, 자유 그리고 민주주의와 같은 수준으로 남녀평등에 가치를 부여하지 않은 것은 우연이 아니다. 헌법의 공식문서에서는 남녀평등을 새로운 가치로 제시하지 않는다. 연합을 찬성하는 사람들은 그것에 대해 침묵하고 남녀평등이 연합의 가치이고 중요한 진보적 요소인 것처럼 말하고 있다. 3. 유럽 연합의 남녀평등은 속 빈 강정이다 남녀평등의 목적(헌법조약 1-3)과 남녀차별 금지(헌법조약Ⅱ-81)를 명시한 것은 확실히 주목할 만하다. 하지만 전혀 새로운 점은 볼 수 없다. 국제적으로나 연합의 국가들에서 이미 다루어진 권리들뿐이다. 실제 이런 권리들은 법적으로 이미 명시되어 있고, 70년대부터 페미니스트들의 요구로 조금씩 구성되었다. 그러나 여성의 권리는 아직 충분히 보장되지 않고 있다. 우리의 현실은 형식적인 법과 실제의 권리가 얼마나 다른지 보여준다. 오늘날 필요한 것은 구체적인 조치들을 취하는 것이다. 헌법조약에 구체적으로 명시된 것은 하나도 없다. 남녀평등의 진전을 원했다면 헌법조약의 목표 안에 이 문제에 대한 언급도 있어야 한다. 헌법조약124조가 미약하게 다루고 있을 뿐이다. “헌법의 다른 조항들을 해치지 않으면서 헌법이 연합에 부여한 능력의 범위 안에서, 유럽 헌법조약은 모든 차별과 싸우기 위해 필요한 조치들을 확립해야 한다”고 명시되어 있다. 그리고 이러한 조치들을 확립하기 위해서는 만장일치가 되어야 한다. 이것은 그 성과를 기대하지 말라는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게다가 군사비용이 늘어나지만(헌법조약Ⅰ-41-3) 남녀평등에 관한 재정지원은 전혀 없다. 4. 자유주의적인 논리를 위해서 실제적인 자유주의 정치의 심화, 심각한 빈곤의 책임들, 그리고 불안정한 일자리, 이 세 가지는 여성들과 상당히 밀접히 관련되어 있고 공적 서비스의 파괴이기도 하다. 이러한 경험은 공적서비스의 후퇴가 공동체에 의해 더 이상 보장되지 않는 일과 비용 상승에 대한 책임을 여성에게 지운다는 것을 보여준다(예를 들자면 프랑스에서 유아원이 없어질 것이라는 두려움이 있었다). 공적 지출의 제한(헌법조약Ⅲ-194)은 복지 서비스를 더 비싸고 접근하기 어렵게 만들면서 사회 복지예산(실업 수당과 영세민 보조금) 삭감을 의미한다. 유럽고용전략(European Employment Strategy, 유럽연합에서 2000년~2006년을 기간으로 설정하여, 15개 회원국이 고용확대 및 고용환경 개선 등에 대한 공동목표를 설정하여 관련 정책을 수행하는 것)에는 남녀평등에 대한 내용이 있긴 하지만, 자유주의의 논리에 이용되어 모든 진보적 내용은 공허해졌다. 자유주의의 논리는 여성의 노동을 이용했고 비정규직을 정당화하며, 일자리 창출에서 여성을 제외한다. 잠재적 노동력으로서의 여성 연합의 노동 전략은 고용율의 증가를 목표로 정했다. 목표는 2010년까지 전체 고용율 70%, 여성 고용율 60%가 되게 하는 것이다. 이것은 두 가지의 문제점이 있다. 첫째는 더 이상 실업률을 언급하지 않도록 한다는 점이다. 헌법은 .“고용율을 높이는 것”을 “일자리의 수준을 끌어올리는 것”으로 해석한다(헌법조약Ⅲ-205). 이런 교활한 문구는 구직자들이 실업률이 낮아졌다고 생각하게 한다. 두 번째는 남녀평등이라는 개념이 자유주의의 논리로 사용되는 것과 관련된다. 그것은 이용당하는 것일 뿐이다. 여성들을 노동시장으로 들어가게 하는 것은 평등에 대한 배려가 아니라, 단지 경제적인 관점에서 필요하기 때문이다. 여성은 너무나 불평등한 대우를 받는다(불안정한 일자리, 상한선이 정해진 직업, 입사시의 차별 대우 등). 유럽헌법조약(조항Ⅲ-214)에서는 분명히 전문직에서도 남녀가 평등하다고 명시했다. 그러나 평등이란 개인적인 차원에서만 존재하고 공적인 차원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연합이 만든” 평등의 자유주의적인 개념은 불평등의 기원으로부터 비롯된 사회적으로 차별적인 역할을 문제 삼는 것을 조심스럽게 피해간다. 이는 고용율의 목표가 남성들보다 여성들에게 더 낮은 수준으로 정해져 있다는 것에서 드러난다. 여성운동의 요구에도 불구하고, 가사노동의 평등한 분배는 “가족에서의 삶과 직장에서의 삶의 절충”이라는 개념이 차지하였다. 그 개념은 여성이 노동, 양육, 가사노동을 다 하도록 하는 것일 뿐이다. 시간제노동, 유연화, 불안정화 시간제노동은 절충이라는 문제의 해결책으로 존재한다. 이것은 특히 회사에게 이익이 되고 임금생활자들에게는 항상 불리하다는 것은 은폐된다. 그것은 부분적인 임금, 부분적인 퇴직 그리고 종종 부분적인 실업의 동의어다. 오늘날 “가족에서의 삶과 직장에서의 삶, 유연화와 고용보장 사이의 최상의 평등을 보장하기 위해서” 유럽고용전략은 “노동계약의 다양화”를 추진한다. 노동시간에 대한 새로운 방향은 주당 최대노동시간을 48시간에서 60시간으로 늘리도록 하고 있다. 그리고 사업주가 최대한 만족하도록 개별적인 협상을 일반화하도록 하고 있다. 프랑스에서 주당 35 시간에 대한 공격은 “더 많이 벌기 위해 더 많이 일하”고 싶다는 욕망을 불러일으키면서 진행된다. 그러나 그것이 “시간제를 강요받는 노동자”들이 정규직이 되도록 허락하는 것은 아니었다. 동일한 임금 하에 노동시간의 축소는 최상의 삶의 질과 가사노동의 평등한 배분을 위한 여성들의 요구였고 지금도 그렇다. 그것은 유럽헌법조약과는 반대되는 것이다. 싸구려 일자리들! 여성들이 가사 업무의 부담을 덜고 일자리를 찾을 수 있게 만들기 위해, 자유주의적 전략은 아동 양육과 가족 구성원에 대한 서비스의 욕구를 매우 잘 파악한다. 왜냐하면 그 전략은 여기에서 영리활동의 새로운 기회를 발견하기 때문이다. 확실히 적절한 자격과 안정적 지위를 얻은 인력을 갖춘 양질의 공적 서비스의 확대가 아니라, 값싸고 질이 낮은 일자리를 활용하는 것이다. 그러한 일자리는 “전통적으로” 여성들에게 할당되고 어떤 경우 그것은 “할머니들”이나 “이주여성들”의 일로 규정된다. 이는 그 자체로 서비스 부문으로의 여성 집중과 성별 임금 불평등을 다시 강화한다. 어렵고 보수도 낮은 그런 직업들이 큰 매력이 없다는 사실을 의식해서 자유주의자들은 그 직업들의 가치를 높이 평가하는 것처럼 보이는 ‘가정공학’(볼루 2004년 보고서)과 같은 새로운 명칭을 고안한다. 그러나 그들은 임금을 위해서 일을 한다는 사실을 망각하며, 가장 나쁜 부문들 중 하나에 속하는 그 부문의 집단적 관습들을 재고해야 한다는 사실을 망각한다.

  • 2005-12-16

    여성의 권리와 평등을 위하여 유럽헌법조약을 거부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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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번역 바울라 수녀(르베르 애덕 수녀회) [편집자 주] 이번 호에서는 유럽헌법조약을 부결시키는 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섰던 아탁의 활동 중에서 페미니스트들의 대응을 살펴본다. 유럽의 여성운동과 페미니스트들은 헌법조약이 여성에게 미칠 부정적인 영향을 인식하고 활발한 반대운동을 벌였다. 헌법조약에 관한 첫 번째 국민투표를 시행했던 스페인에서는 2005년 1월 ‘마드리드 페미니스트 회의’가 열렸고, 이를 통해 여성들의 반대운동을 조직했다. 아탁 프랑스의 페미니스트들은 투쟁을 더욱 적극적으로 만들고자 노력했다. 이 글은 그런 노력의 일환으로, 올해 5월, 프랑스에서 헌법조약 반대운동이 한창이던 시기에 아탁 프랑스에서 발표한 글이다. 이 글은 헌법조약을 남녀의 사회적 관계라는 측면에서 분석하고 있다. 헌법조약은 마치 유럽의 전 인민들의 의지에 따라 만들어진 것처럼, 그리고 남녀평등을 진전시킬 것처럼 강요되었다. 여성억압과 불평등의 기원을 고려하지 않고 성적 차이를 반영하지 않는 평등이란 실상 여성에게 매우 해악적인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아탁은 여성의 진정한 권리와 평등을 위해서는 헌법조약을 반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아탁의 주장은 지난 호에 소개한 성별화된 시민권을 성문화하려했던 이리가레의 시도와 맞닿는 부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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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녀평등의 진보는 다른 모든 불평등의 축소와 같은 말이라는 것을 경험이 증명하고 있다. 따라서 여성의 지위와 평등에 대한 요구는 경쟁보다 연대와 협력을 중요시하는 사회적 유럽을 건설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사회적 유럽은 기본권과 공공 서비스가 유럽연합(이하 연합) 단일시장보다 우선하는 유럽이며, 여성들이 획득한 권리를 보장하고 남녀평등과 인권의 전체적인 수준을 높인다. 또 다른 유럽을 건설하기 위해 모두가, 특히 여성들이 유럽헌법조약에 꼭 반대해야 한다. 헌법 지지자들은 헌법조약이 여성에게 기회를 준다고 한다. 헌법 지지자들은 남녀평등이 오래 전부터 유럽사회제도의 관심사이며, 헌법조약이 남녀평등을 진전시킬 것이라고 사람들이 믿고 있음을 근거로 들지만, 현실에서 이는 어불성설이다. 만약 사람들이 연합 회원국 목표기준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작동되는지를 이해한다면, 누구도 헌법조약이 여성을 위한 기회라고 믿지 않을 것이다. 예를 들어, 남녀평등의 진전이란 야간근무가 모든 사람을 위해 금지되는 것, 설령 야간근무를 인정한다고 해도 전체의 이익을 위해서만 인정하는 것일 텐데, 유럽에서는 평등이라는 이름으로 많은 여성들이 [남성들처럼] 야간 근무를 하게 되었다. 유럽의 자유주의 정책에서 작동하는 남녀평등의 원칙은 평등의 기준을 낮추는 것이다. 이것이 현재 유럽헌법조약에 기입되어 있는 정책이다. 유럽헌법조약은 여성의 권리를 위한 진보와는 거리가 멀고 오히려 그 반대로 심각한 후퇴의 위험이다. 헌법조약과 목표기준을 보면 새로운 권리는 하나도 없으며, 여성을 위한 기본적인 권리는 부재하다. 기본권헌장(헌법조약 Ⅱ부)은 불충분하다. 그것이 다룰 수 있는 사법적 범위는 매우 한계적이고, 여타의 헌법조약 규정에 좌우된다. 남녀평등은 인간의 존엄이나 민주주의처럼 연합의 기본가치로 인정되지 않았다. 남녀평등은 연합의 목적으로 제시되어 있지만, 이를 적용하는 규정은 없고 단지 선언으로 발표될 뿐이다. 마지막으로 제일 중요한 것은 헌법의 기초를 구성하는 자유주의적 교리는 그 자체로 여성의 권리를 침해한다는 점이다. 자유주의는 사회복지의 후퇴, 공공서비스, 민영화, 불평등 심화, 이미 많은 여성들에게 영향을 주고 있는 불안정한 삶을 양산하고 있다. 유럽고용전략에서 작용하고 있는 남녀평등의 개념은 그 개념의 진보적 내용을 명분삼아 자유주의자의 이익에 봉사하고 그들이 언제나 유연하게 스스로를 정당화하는 데 이용된다. 1. 심각한 결여 기본권헌장은 “연합의 새로운 권한이나 임무를 만들지 않고,” “헌법의 다른 부분에서 규정된 임무와 권한을 수정하지 않는다(헌법조약 Ⅱ- 111).” 기본권헌장은 “각 나라의 관습에 맞게 해석이 되어야하고(헌법조약 Ⅱ-112-4),” 또 “각 국가의 법률을 충분히 고려해야한다(헌법조약 Ⅱ-112-5).” 이런 문장들은 확실히 기본권헌장이 구속력이 없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기본권헌장은 여성을 위한 새로운 권리를 전혀 만들지 않고, 기본권을 결여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후퇴하고 있다. 피임, 낙태, 성적지향 선택의 권리 자신의 신체와 재생산 능력을 통제하는 권리, 즉 낙태와 피임의 권리는 기본적 자유의 영역이다. 그러나 그것은 부재하다. 몇 개국(포르투갈, 아일랜드, 폴란드, 몰타, 키프로스)에서 낙태는 금지되거나, 엄격한 제한을 받고 있다. 연합은 그 국가들에게 낙태의 제한이나 금지를 강제하면 안 되기 때문에 낙태의 권리를 헌장에 넣을 수 없다고 한다. 이것은 헌장이 법적 구속력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 권리들에 관한 법률 수준을 높이는 것을 통해 전체 수준을 높이는 것이야말로 헌장의 목표 중에 하나여야 했다. 자신의 성적지향을 선택할 권리는 표기되지 않았다. 성적지향에 따른 모든 차별은 명백히 금지한다(헌법조약 Ⅱ-81)는 표현으로는 불충분하다. 성에 다른 차별 금지는 평등의 권리를 단언하는 것으로 대체될 수 없다. 차별을 증명하기가 어려워서 더욱 그렇다. 폭력을 당하지 않고 생활할 권리 다른 것과 마찬가지로 이 기본적인 권리도 부재하다. 여성들이 당해왔던 폭력은 요즘 알려지기 시작했다. 폭력을 당하지 않고 생활할 권리는 가정폭력, 강간, 여성 매매, 강제결혼, 성기절단 등의 모든 폭력에 대항하는 타협 없는 투쟁을 의미해야 한다. 이혼의 권리 결혼해서 가정을 꾸리는 것은 헌법조약 Ⅱ-69에 보장된 권리지만, 이혼의 권리는 그렇지 않다. 성매매 목적의 인신매매 금지 노예와 강제노동을 금지하는 헌법조약 Ⅱ-65는 확실히 성매매 목적의 인신매매를 겨냥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일부 사람들은 성매매가 확대되는 것을 다른 서비스업처럼 큰 이익을 얻을 수 있는 시장으로 생각한다. 자본 이동을 제한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고(헌법조약 Ⅲ-156, 157), 따라서 성매매 목적의 인신매매로 생긴 검은 돈을 통제할 수 없다. 대의제 민주주의 원칙 조항 Ⅰ-46에 정의되어 있는 대의제 민주주의 원칙은 민주주의가 남녀 사이의 균등한 대의, 즉 균등제(parite)와 경제적․정치적 결정의 모든 수준에서의 균등을 보장할 때에만 대의할 수 있다는 점을 명확히 밝혀야한다. 유럽헌법조약을 계획했던 회의는 그 구성원 대다수가 남성이었다고 알려지고 있다. 시민권 연합의 시민권 규정은 사회적 권리와 헌법조약 Ⅱ-99~106에 정의된 권리(투표권, 피선거권, 이동의 권리 등)를 위해 남녀 거주민들에게 확대되어야 한다. 개인적 지위에 관한 법률로 인하여 외국인 여성 또는 이주여성의 권리는 너무 자주 그 남편의 지위에 따라 좌우되고, 그녀들의 출신 국가의 억압적 관습이나 규범에 따라야 한다. 보호받을 권리 헌법조약 Ⅱ-78에 정의된 보호받을 권리는 성별이나 섹슈얼리티 때문에 여성들이 당하는 폭력, 억압, 박해에 대한 보호권을 인정해야 한다. 고용의 권리 유럽헌법조약은 모든 사람의 “노동의 권리(le droit de travailler)”와 “구직의 자유”를 인정한다(헌법조약 Ⅱ-75). 이 얼마나 행운인가! 그러나 그것은 “노동권(le droit au travail)”과는 매우 다르다. 그것은 1948년 세계인권선언에 쓰여진 노동권으로부터 많이 후퇴한 것이다. 유럽의 25개국 실업률은 평균 9%(2004년 8월 Eurosignal조사)고, 여성의 실업률은 남성보다 2% 높다. 그럼에도 유럽헌법조약 어디에도 실업률 감소라는 목표는 쓰여 있지 않을 뿐더러 실업이라는 단어조차 언급되지 않는다. 일을 갖는 것은 여성이 자립하기 위한 조건이다. 그러나 여성들은 심각한 실업, 탁아소와 돌봄 노동 서비스 부족, 일자리의 불평등, 고용의 질 하락과 같은 여러 가지 어려움에 부딪친다. 고용의 권리, 즉 고용의 질에 대한 규범과 더불어 실업의 감소라는 목표가 [헌법조약에서] 실종된 것은 그저 잊혀진 것이 아니다. 이런 권리들은 자유주의적 교리와는 양립 불가능할 뿐이다. 최저 소득, 연금, 실업 수당의 권리 이 권리들은 인정되지 않는다. 모든 사람은 “자신과 자신의 가족이 건강하고 인간다운 삶을 보장받기에 충분한 생활기준에 대한 권리를 가진다. 이것은 실업자, 환자, 장애인, 과부․홀아비, 노인의 경우에도, 그리고 생계수단을 잃었을 경우에도 보장되는 권리다”라고 선언한 1948년 세계인권선언의 내용에서 후퇴한 것이다. 거기에서는 [프랑스식] 최저임금(SMIC, 전직종 최저임금제)을 인정하지 않고, 유럽 차원의 최저임금은 말할 것도 없다. 한편 이 권리들은 실업자, 그 중에서도 수당을 받지 못하는 실업자, 저임금 노동자, 최저의 사회보장 수혜층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여성들과 특히 관련이 있다. 이런 여성들은 프랑스에서 가난한 노동자의 80%와 노령 연금의 최저 수준보다 낮은 연금을 받는 은퇴자들의 83%에 달한다. 이주 여성과 편모들에게는 사회적으로 불리한 조건이 가중된다. [사회보장]수당에 대한 권리를 폐지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것은 회원국의 정책을 규정하는 “경제정책의 일반 방침”(헌법조약 Ⅲ-178)을 적용한 것이다. 이 방침은 “노동시장에 활동적으로 남아있는 것이 재정적으로 유리하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 공공 예산과 [사회보장]수당에 제한을 부과한다. 더 쉽게 말하면, 최저소득보조금(RMI)이나 실업수당이 너무 높아서 사람들이 구직활동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마치 RMI 수급자나 실업자들이 스스로 원해서 그렇게 한다는 것처럼! 그리고 새로운 위협 [헌법에 따르면] 교회와 종교 공동체가 합법적인 대화상대로 인정되었다(헌법조약 Ⅰ-52). 이런 인정은 표현, 양심, 신앙의 자유가 이미 보증되어 있기 때문에 전혀 쓸모없는 것일뿐더러 위험한 것이다. 도처에 여성혐오증을 가진 종교적 보수주의자들이 대두하는 것은 피임, 낙태와 같이 이미 획득된 권리에 대한 증대하는 위협에 해당한다. 일반적으로 교회, 그리고 특히 보수주의자들은 더 강하게, 남자와 여자의 사회적 역할이 다르고 따라서 여성의 지위는 열등하다고 이론화하고 그 결과 불평등을 낳는다. 연합의 모든 제도와 법규에서 정교분리의 원칙이 재확인될 때에만 교회의 압력에 맞서 여성의 권리를 지켜낼 수 있다. 2. 유럽연합은 남녀평등의 가치에 기반을 두지 않는다 「연합의 가치들」이란 제목의 헌법조약 1-2에 의하면, 남녀평등은 “연합이 기반을 둔 가치”가 아니며, 새로운 국가들의 가입 기준도 아니다. 연합의 가치들은 문서의 첫 문장처럼 “연합은 인간존엄성, 자유, 민주주의에 기반하고 있다”고 명시되어 있다. 남녀평등은 이 조약의 두 번째 문장에서만 언급되는데 “이 가치들은 남녀가 평등한 사회에서 가입 국가들에게 공통적이다.” 하지만 이렇게 언급되었다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점은 두 문장의 지위에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유럽헌법조약이 많은 사회단체들이 요구했던 인간존엄성, 자유 그리고 민주주의와 같은 수준으로 남녀평등에 가치를 부여하지 않은 것은 우연이 아니다. 헌법의 공식문서에서는 남녀평등을 새로운 가치로 제시하지 않는다. 연합을 찬성하는 사람들은 그것에 대해 침묵하고 남녀평등이 연합의 가치이고 중요한 진보적 요소인 것처럼 말하고 있다. 3. 유럽 연합의 남녀평등은 속 빈 강정이다 남녀평등의 목적(헌법조약 1-3)과 남녀차별 금지(헌법조약Ⅱ-81)를 명시한 것은 확실히 주목할 만하다. 하지만 전혀 새로운 점은 볼 수 없다. 국제적으로나 연합의 국가들에서 이미 다루어진 권리들뿐이다. 실제 이런 권리들은 법적으로 이미 명시되어 있고, 70년대부터 페미니스트들의 요구로 조금씩 구성되었다. 그러나 여성의 권리는 아직 충분히 보장되지 않고 있다. 우리의 현실은 형식적인 법과 실제의 권리가 얼마나 다른지 보여준다. 오늘날 필요한 것은 구체적인 조치들을 취하는 것이다. 헌법조약에 구체적으로 명시된 것은 하나도 없다. 남녀평등의 진전을 원했다면 헌법조약의 목표 안에 이 문제에 대한 언급도 있어야 한다. 헌법조약124조가 미약하게 다루고 있을 뿐이다. “헌법의 다른 조항들을 해치지 않으면서 헌법이 연합에 부여한 능력의 범위 안에서, 유럽 헌법조약은 모든 차별과 싸우기 위해 필요한 조치들을 확립해야 한다”고 명시되어 있다. 그리고 이러한 조치들을 확립하기 위해서는 만장일치가 되어야 한다. 이것은 그 성과를 기대하지 말라는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게다가 군사비용이 늘어나지만(헌법조약Ⅰ-41-3) 남녀평등에 관한 재정지원은 전혀 없다. 4. 자유주의적인 논리를 위해서 실제적인 자유주의 정치의 심화, 심각한 빈곤의 책임들, 그리고 불안정한 일자리, 이 세 가지는 여성들과 상당히 밀접히 관련되어 있고 공적 서비스의 파괴이기도 하다. 이러한 경험은 공적서비스의 후퇴가 공동체에 의해 더 이상 보장되지 않는 일과 비용 상승에 대한 책임을 여성에게 지운다는 것을 보여준다(예를 들자면 프랑스에서 유아원이 없어질 것이라는 두려움이 있었다). 공적 지출의 제한(헌법조약Ⅲ-194)은 복지 서비스를 더 비싸고 접근하기 어렵게 만들면서 사회 복지예산(실업 수당과 영세민 보조금) 삭감을 의미한다. 유럽고용전략(European Employment Strategy, 유럽연합에서 2000년~2006년을 기간으로 설정하여, 15개 회원국이 고용확대 및 고용환경 개선 등에 대한 공동목표를 설정하여 관련 정책을 수행하는 것)에는 남녀평등에 대한 내용이 있긴 하지만, 자유주의의 논리에 이용되어 모든 진보적 내용은 공허해졌다. 자유주의의 논리는 여성의 노동을 이용했고 비정규직을 정당화하며, 일자리 창출에서 여성을 제외한다. 잠재적 노동력으로서의 여성 연합의 노동 전략은 고용율의 증가를 목표로 정했다. 목표는 2010년까지 전체 고용율 70%, 여성 고용율 60%가 되게 하는 것이다. 이것은 두 가지의 문제점이 있다. 첫째는 더 이상 실업률을 언급하지 않도록 한다는 점이다. 헌법은 .“고용율을 높이는 것”을 “일자리의 수준을 끌어올리는 것”으로 해석한다(헌법조약Ⅲ-205). 이런 교활한 문구는 구직자들이 실업률이 낮아졌다고 생각하게 한다. 두 번째는 남녀평등이라는 개념이 자유주의의 논리로 사용되는 것과 관련된다. 그것은 이용당하는 것일 뿐이다. 여성들을 노동시장으로 들어가게 하는 것은 평등에 대한 배려가 아니라, 단지 경제적인 관점에서 필요하기 때문이다. 여성은 너무나 불평등한 대우를 받는다(불안정한 일자리, 상한선이 정해진 직업, 입사시의 차별 대우 등). 유럽헌법조약(조항Ⅲ-214)에서는 분명히 전문직에서도 남녀가 평등하다고 명시했다. 그러나 평등이란 개인적인 차원에서만 존재하고 공적인 차원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연합이 만든” 평등의 자유주의적인 개념은 불평등의 기원으로부터 비롯된 사회적으로 차별적인 역할을 문제 삼는 것을 조심스럽게 피해간다. 이는 고용율의 목표가 남성들보다 여성들에게 더 낮은 수준으로 정해져 있다는 것에서 드러난다. 여성운동의 요구에도 불구하고, 가사노동의 평등한 분배는 “가족에서의 삶과 직장에서의 삶의 절충”이라는 개념이 차지하였다. 그 개념은 여성이 노동, 양육, 가사노동을 다 하도록 하는 것일 뿐이다. 시간제노동, 유연화, 불안정화 시간제노동은 절충이라는 문제의 해결책으로 존재한다. 이것은 특히 회사에게 이익이 되고 임금생활자들에게는 항상 불리하다는 것은 은폐된다. 그것은 부분적인 임금, 부분적인 퇴직 그리고 종종 부분적인 실업의 동의어다. 오늘날 “가족에서의 삶과 직장에서의 삶, 유연화와 고용보장 사이의 최상의 평등을 보장하기 위해서” 유럽고용전략은 “노동계약의 다양화”를 추진한다. 노동시간에 대한 새로운 방향은 주당 최대노동시간을 48시간에서 60시간으로 늘리도록 하고 있다. 그리고 사업주가 최대한 만족하도록 개별적인 협상을 일반화하도록 하고 있다. 프랑스에서 주당 35 시간에 대한 공격은 “더 많이 벌기 위해 더 많이 일하”고 싶다는 욕망을 불러일으키면서 진행된다. 그러나 그것이 “시간제를 강요받는 노동자”들이 정규직이 되도록 허락하는 것은 아니었다. 동일한 임금 하에 노동시간의 축소는 최상의 삶의 질과 가사노동의 평등한 배분을 위한 여성들의 요구였고 지금도 그렇다. 그것은 유럽헌법조약과는 반대되는 것이다. 싸구려 일자리들! 여성들이 가사 업무의 부담을 덜고 일자리를 찾을 수 있게 만들기 위해, 자유주의적 전략은 아동 양육과 가족 구성원에 대한 서비스의 욕구를 매우 잘 파악한다. 왜냐하면 그 전략은 여기에서 영리활동의 새로운 기회를 발견하기 때문이다. 확실히 적절한 자격과 안정적 지위를 얻은 인력을 갖춘 양질의 공적 서비스의 확대가 아니라, 값싸고 질이 낮은 일자리를 활용하는 것이다. 그러한 일자리는 “전통적으로” 여성들에게 할당되고 어떤 경우 그것은 “할머니들”이나 “이주여성들”의 일로 규정된다. 이는 그 자체로 서비스 부문으로의 여성 집중과 성별 임금 불평등을 다시 강화한다. 어렵고 보수도 낮은 그런 직업들이 큰 매력이 없다는 사실을 의식해서 자유주의자들은 그 직업들의 가치를 높이 평가하는 것처럼 보이는 ‘가정공학’(볼루 2004년 보고서)과 같은 새로운 명칭을 고안한다. 그러나 그들은 임금을 위해서 일을 한다는 사실을 망각하며, 가장 나쁜 부문들 중 하나에 속하는 그 부문의 집단적 관습들을 재고해야 한다는 사실을 망각한다.

  • 2005-12-16

    가사노동 논쟁을 넘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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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번역>책속의책 번역팀 [편집자주] 이번 호부터 '책 속의 책'은 페미니즘 기획을 시작한다. 신자유주의 시대에 여성운동의 새로운 전망을 토론하는 데 필요한 자료로 구성될 것이다. '가사와 직장의 양립'으로 요약되는 정부의 여성정책과 주류 여성운동의 방향성은 '성주류화' 전략에서 맞닿는다. 이런 전략은 저임금, 장시간 불안정 노동과 빈곤에 내몰린 대다수 여성들의 현실을 정확하게 인식하지 못하고, 따라서 여성의 권리와 해방과는 거리가 멀다. 그러므로 새로운 여성운동의 전망은 현재 여성들이 처한 현실의 문제를 과학적으로 적합하게 인식하는 것에서 시작될 수 있다. 이를 위해 '책 속의 책'은 세계화, 빈곤, 재생산 노동, 캐어(care) 노동, 여성의 성욕, 성매매 등의 쟁점에 대해 검토할 것이다. 이런 기획의 첫 번째로 사회주의 페미니스트들의 가사노동 논쟁을 정리한 논문을 싣는다. 이 글은 여성의 가사노동을 자본주의와 구별되는 '가내 생산양식' 개념으로 이론화하려는 시도의 문제점을 검토하고, 여성 억압에 대한 이론적 초점을 가사노동이나 순전히 경제적 분석에 맞추는 것은 협소한 분석과 그릇된 정치적 결론을 초래한다고 비판한다. 그 대신 성적 분업, 재생산, 노동시장, 국가의 역할 등 사회적 관계의 복합적인 결정과정에 대한 분석과 정치적 실천을 촉구한다. 그리고 여성 종속에 대한 이론적 작업은 정신분석학, 성욕, 언어와 이데올로기 영역에 대한 고찰로 확대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번역대본은 다음과 같다. Maxine Molyneux, Beyond the Domestic Labour Debate, New Left Review, 116, July-August 1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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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의 가사노동 논쟁에서 최초의 글이 나온 지 거의 10년이 지났고, 그 후로 가사노동을 주제로 삼은 논문이 영국과 미국의 사회주의 출판부에서만 50여 편이 넘게 발표되었다.1) 가사노동에 대한 관심은 페미니스트와 마르크스주의자를 비롯해 다양한 방향에서 생겨났다. 하지만 이처럼 방향이 다양하더라도 그들은 모두 하나의 기초적인 가설을 공유했다. 즉 과거에는 무시되었던 이 주제를 연구함으로써 여성의 종속을 이해하고, 이것의 폐지에 적합한 정치를 공식화하도록 기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문헌의 두 가지 주요한 관심사는 다음과 같다. 첫 번째 관심사는 억압, 예속, 착취로 다양하게 묘사되는 여성의 종속이 종종 '경제외적'(extra-economic)인 것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물질적 토대에 기초하며 자본주의 사회의 정치경제와 연결되어 있다고 설명하는 것이다. 이러한 접근법은 가사노동이 노동력의 재생산에 필수적인 노동을 제공함으로써 자본주의 체계의 유지에 경제적으로 기여한다고 설명하고자 했다. 이런 접근법은 자본주의 발전이 어느 정도까지 현재 가내체계, 특히 '가사노동'을 창조하는 데 얼마나 기여했냐는 문제를 제기했다.2) 이러한 관점은 흔히 과거에는 자본주의 경제의 일반적이며 전통적이고 공적인 특징을 분석하는 데 제한되었던 개념들을 가사노동 영역에 적용하려는 시도를 동반했다. 두 번째는 더 직접적인 정치적 관심사로서, 사회주의 투쟁에서 여성의 현실적이며 잠재적인 역할을 규명하는 것이다. 이런 문제에 대한 분석에서는 비관적인 견해와 좀 더 긍정적인 견해가 엇갈렸다. 비관적인 견해는 주부의 정치적 행동에서 보이는 비활동적이고 보수적인 역할을 강조한다. 긍정적인 견해는 주부이든 임금소득자이든 여성의 정치적 잠재력을 강조한다.3) 이러한 좀 더 낙관적인 관점에 따르면 여성과 프롤레타리아는 자본에 의한 일반적인 착취를 공유하며 따라서 착취의 전복이라는 공통의 객관적인 이해를 공유한다. 이러한 접근법들은 여성의 종속에 관한 토론에 중요한 공헌을 했지만, 이 글에서 나는 지금까지 가사노동에 관해 생산된 이론적 작업은 스스로 규명하고자 했던 문제들을 적절히 다루지 못했다고 주장할 것이다. 특히 두 가지 관심사를 분석적으로 다룰 수 있는 여성에 관한 정치경제이론을 생산하려는 시도는 다음과 같은 한계를 하나 이상 드러냈다. 첫째, 경제 환원주의 경향, 둘째, 자본주의와 가사노동의 관계를 구성할 때 기능주의적 논증 양식에 의존한다는 점, 셋째, 가족(familial)/가계(household)라는 더 넓은 맥락을 이론화하지 않고 가내영역에서 수행되는 노동에만 협소하게 초점을 맞춘다는 점. 세 번째 한계는 주부가 수행하는 노동이 남성 임금노동자에게 중요하다는 점을 지나치게 강조하며, 노동자의 다음 세대를 위한 양육 노동을 사실상 무시하는 결과를 낳았다. 따라서 논쟁은 가사노동에서 가장 덜 중요할 수도 있는 한 측면만을 심각하게 고려하고, 문헌에서 가끔 나타나는 '노동력을 재생산하는' 주부에 대한 언급도 이러한 결핍을 극복하지 못한다. 가사노동에 대한 재평가는 주요한 두 부분으로 구성된다. 첫 번째는 논쟁에서 특별하고 도전적인 공헌을 했던 '가내 생산양식'(domestic mode of production) 명제를 평가하는 것이다. 여기서는 서로 대비되는 두 이론, 즉 마르크스주의 이론과 비(非)마르크스주의 이론이 사용한 생산양식 개념을 비판한다.4) 이러한 이론에 특유하면서도, 어떤 경우에는 모든 토론에 공통된 잘못된 개념과 가설을 검토한다. 특히 가사노동은 노동의 가치를 반드시 낮춘다는 공통의 가설에 질문을 제기한다. [이런 공통 가설] 대신에, 자본주의에서 생물학적 재생산의 주요 장소인 가내영역이 유지되기 위해서는 노동력의 가치가 가족의 재생산 비용을 보장하는 임금만큼 충분히 높아야 한다고 주장할 것이다. 이어서 두 번째 부분에서는 두 책이 제시하는 가사노동 명제의 기초를 이루는 다른 가설을 비판한다. 이 부분은 여성과 가내영역의 관계를 더 넓은 토대에서 개념화하면서 끝맺는다. 크리스틴 델피: 여성의 노동은 항상 무급이다 팜플렛, {가장 중요한 적}(The Main Enemy)은 1976년 영국에서 출판되었고, 지금까지 영국과 프랑스 여성운동으로부터 상당한 지지를 얻었다. 이 글에서 크리스틴 델피는 마르크스주의가 전통적으로 여성 억압은 계급투쟁에서 부차적으로 중요하다고 보고, 계급투쟁은 '오로지 자본이 프롤레타리아를 억압하는 것에서 발생한다고 정의하는' 방식을 비판했다. 문제의 뿌리는 마르크스주의가 생산과정에서 계급을 도출하는 것이다. 그녀는 이것이 '여성과 가정 내부의 (비(非)자본주의적인) 생산의 특수한 관계'를 무시한다고 주장한다. 델피에 따르면, 이러한 노동은 보통 가치가 없다고 오인되지만, 본질적인 의미에서 상품부문에 존재하는 가사노동의 사회화된 형태와 다르지 않다. 유일한 차이는 자동세탁소, 식당, 육아시설의 직원은 자신의 노동에 대해 임금을 지불 받지만 주부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따라서 무급으로 가사노동을 수행하는 기혼여성은 이러한 상황의 수혜자인 남편에 의해 착취당한다. 이것은 생산으로서 이해되는 가사노동에 기초해 발생하는 착취양식이며, 자율적인 가내 생산양식이라는 델피의 개념이 나온다. 이러한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해 그녀는 여성의 노동에 관련된 몇 가지 명제를 제출한다. (1) 가족에서 여성의 노동은 인정되지 않더라도, 핵심적으로 경제에 항상 기여한다. 역사적으로 항상 여성은 아무런 대가도 받지 못하면서 가사노동을 포함한 노동을 수행해왔다. 이는 가족이 생산단위인 경우, 예를 들어 소규모 농장, 소매 사업, 가내작업장에서 특히 분명하다. 지금도 프랑스에서는 백만 명의 여성이 '가족 보조원'(family aides), 즉 무급 노동자로 분류되며, 그들 중 대부분은 농업부문에 종사한다. (2) 산업화가 이뤄지고 생계농업이 쇠퇴한 결과로 여성의 노동은 더 이상 가족 단위 내에서 완전히 착취될 수 없었다. 따라서 일부 여성은 교환을 위한 생산에서 배제된 채 전업주부로 남았고 나머지 여성은 임금노동에 흡수되었다. 그러나 여성의 임금노동 진입은 두 가지 이유 때문에 그들의 전반적인 지위를 현저히 변경하지 않았다. 첫째, 모든 여성은 그들이 무엇을 하든 간에 계속 무급으로 가사노동을 수행했다. 둘째, 여성이 임금노동에 진입하더라도 남편이 그들의 임금을 통제하곤 했고, 또 대부분의 경우 여성의 임금은 여성 스스로가 수행했던 서비스(예를 들어 육아와 세탁)를 지불하는 데 소비되곤 했다. 따라서 유일한 차이는 여성이 임금노동을 시작하기 전에는 생계의 대가로 가사노동을 했지만, 이제는 무급으로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임금노동을 하는 여성은 임금부문에서 생계를 유지하기 때문이다. (3) 이런 상황을 유지케 하는 것은 여성 대부분이 생애 어느 시점에 진입하게 되는 결혼 계약이다. 이런 공통의 계약상 지위가 여성 공통의 계급 조건의 토대다. 결혼을 통해 여성은 '자신의 노동을 통제할' 권리를 박탈당하고, 따라서 여성이 자신의 노동을 판매할 자유도 없다. 그리고 여성의 노동과 그 생산물에 대한 통제가 남편의 의지에 종속된다. 따라서 남성은 여성의 노동을 착취함으로써 계급적 압제자가 된다. 델피는 이러한 명제로부터 두 가지 주요한 이론적·정치적 결론을 이끌어낸다. 첫째, 그녀는 현대 사회에는 두 개의 생산양식이 있다고 주장한다. 하나는 자본주의 소유관계와 착취로 정의되는 산업적 생산양식이며 다른 하나는 가부장적/가족적 생산관계와 가부장의 착취(즉 남성에 의한 여성 착취)로 정의되는 가부장제 생산양식이다. 이 생산양식들은 서로 구별되며 자율적이다. 이는 자본주의 관계의 전복이 여성 억압의 폐지를 낳지 않는다는 사실로 입증된다. 나아가 델피는 가부장제 생산양식에서 여성은 자신의 직업이나 남편의 계급적 지위와 무관하게 남성에 의한 공통의 억압으로 인해 통일된 하나의 구별되는 계급을 구성한다고 주장한다. 그녀는 여성이 가부장제와 그것을 배태한 사회를 전복하기 위해 자율적으로 힘을 발휘해야 한다고 결론을 맺는다. 몇 가지 초기 문제 델피의 주장과 관찰의 일부는 일반적인 의미에서 진실이다. 가사노동은 중요하지만 그 활동은 전체적으로 과소 평가되며, 여성 억압의 중심 장소이자 원인으로 남아 있다. 그리고 계급적·문화적으로 상이한 남성들도 가정 내 여성의 노동에서 다소 명백한 방식으로 이득을 얻는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그녀가 자신의 주장을 입증하고 정치적 결론을 발전시키기 위해 구성한 이론 체계는 여러 면에서 부적합하다. 델피의 결론 중 일부는 해리슨의 결론과 비슷하기 때문에 다음절에서 그 내용을 함께 검토할 것이다. 여기서는 델피에게 특유한 접근법에 한정해서 몇 가지 문제들을 다룰 것이다. 우선 여성의 종속에 관한 델피의 이론은 그녀가 결혼 내부에서 일어난다고 규정한 착취, 남성이 여성의 잉여노동을 영유하는 착취에 기초를 둔다. 하지만 이것이 여성 억압의 이론으로서 얼마나 적합한가? 모든 여성이 결혼 관계에 포함되는 것은 아니며, 또 모든 결혼 계약과 결혼 내부의 실천이 동일한 것도 아니다.5) 반대로 다양한 사회에서 여성들간에는 뚜렷한 차이가 있을 수 있으며, 여성과 남성 모두 매우 상이한 노동의무를 지게 된다. 여성 노동의 영유를 다루는 델피의 주장의 대부분은 프랑스 여성이 농장, 가내작업장과 여타 가족기업에서 차지하는 지위에 관한 분석에 기초하며, 이것은 이런 형태의 여성 무급노동이 상대적으로 중요하지 않은 국가와 비교할 수 없다. 따라서 델피가 보편적으로 타당한 이론을 생산했다는 주장은 그녀가 취한 자료의 특수성과 이론의 경험주의적 도출을 고려함으로써 완화되어야 한다. 그녀가 취한 접근법의 더 큰 문제는 여성의 종속을 오직 결혼 관계로 환원함으로써 모성과 노동시장에서 여성 위치의 억압적 측면을 고려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또한 그녀는 결혼 내부에서 노동의 영유에만 협소하게 초점을 맞춤으로써 여성 억압의 문제를 순전히 경제적 문제로 환원한다. 따라서 도대체 왜 결혼이 생겨나는지 이해하는 데 결정적인 이데올로기적·심리적 차원을 고려하지 못한다. 델피의 논문에서 지적해야 할 또 다른 중요한 문제는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비판적인 태도다. 왜냐하면 그녀의 논문은 본질적으로 마르크스주의에 반대하는 논쟁으로 창안된 것이지만, 그녀가 공격하는 마르크스주의 이론은 다소 지나치게 단순화되고 만화처럼 묘사된 판본이기 때문이다. 이는 부분적으로는 {가장 중요한 적}이 1970년에 맨 처음 저술된 사실에서 기인한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 이론의 발전과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 문헌의 개화에 비추어 보면 이제 그녀의 책은 최소한 개정될 필요가 있다. 그녀가 매우 호되게 비난한 통속적인 마르크스주의는 일반적으로 마르크스주의자뿐만 아니라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스트들도 버린 것이지만, 여전히 델피는 마르크스주의 전통의 좀 더 최근 작업보다는 통속적인 마르크스주의를 다루고 있다. 이 때문에 델피는 마르크스주의 이론을 자신의 방식대로 사용한다. 그녀는 마르크스주의가 여성운동을 '가로막는' 장애물이라고 공격하면서도, 비록 주요한 수정을 가할 목적이 있지만 마르크스주의 언어와 개념을 흡수하려고 시도한다. 예를 들어 그녀는 '생산관계', '생산양식', '노동력', '교환가치'와 같은 용어를 사용하지만, 그때마다 이러한 용어를 전통적인 정의와는 매우 다른 경험주의적이며 상식적인 구성물로 변형한다. 일례로 생산관계는 '생계를 유지하는 방식'으로 정의된다. 왜 다른 것이 아니라 이런 개념을 사용해야 하는지, 또는 왜 이런 개념을 본질적으로 다시 정의하는 게 필요한지에 대한 어떠한 이론적 설명도 제시되지 않는다. 델피는 자신이 마르크스주의자라고 주장하지 않으며, 따라서 그녀가 마르크스주의 개념을 사용할 때 생기는 수많은 문제를 열거하는 것은 아마도 부당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가 개념을 수정하는 것은 아무런 의도가 없는 게 아니라 그녀의 주장을 위해 필요한 것이다. 즉, 그녀는 마르크스주의의 몇몇 기본 개념(착취, 생산양식, 가치, 생산)을 다시 공식화함으로써 분리주의적인 정치적 결론을 발전시킨다. 이러한 수정이 없다면 그녀는 남성이 [여성] 계급의 가장 중요한 적이라는 그녀의 주요 명제를 유지할 수 없다. 다시 말해 마르크스주의적 정의를 고수했다면 그녀의 주장은 붕괴되거나 본질적인 변화를 겪었을 것이다. 해리슨: 가사노동, '예속적 생산양식' 존 해리슨은 {가사노동의 정치경제학}(The Political Economy of Housework)에서 세계 자본주의 체계와 자본주의 생산양식을 구별하며, 전체로서 사회구성체와 그 내부의 생산양식을 구분한다. 그는 하나의 주어진 사회구성체 내부에는 지배적이며 구성적인 생산양식과 구별되는 종속적인 생산양식이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이러한 종속적인 생산양식이 이행기의 현상이라고 지적한다. 즉 이행기에는 과거의 유산이 잔존할 수 있는데, 그는 이것을 '퇴화'(vestigial) 생산양식이라고 부른다. 또한 이 시기에 미래를 예견하는 것이 등장하는데, 그는 이것을 '맹아'(foetal) 생산양식이라고 부른다. 그는 여기에 또 다른 종류의 생산양식, 즉 '예속적'(client) 생산양식을 추가한다. 이것은 지배적이지도 않으며 과거의 유산도, 미래의 맹아도 아니다. '예속적 생산양식은 경제적·사회적 체계 내부에서 특정 기능을 충족시키기 위해 지배적인 생산양식이 창조하거나 포섭한 것이다. 이것의 생존은 지배적인 생산양식의 지속적 존재 여부에 달려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지배적인 생산양식의 재생산과 결부되어 있기 때문이다.' 해리슨은 주변부 사회구성체에서 특정한 비자본주의 부문이 이런 범주에 속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사노동과 국가 활동의 많은 부문'이 이 범주에 속한다고 말한다. '가사노동 생산양식'은 여러 점에서 소상품생산과 비슷하다. 양자 모두 분업이 없고, 노동의 사회화 수준이 낮으며, 생산자가 개인적으로 노동한다는 특징이 있다. 그러나 가사노동은 소상품생산과 자본주의와 달리 교환을 위한 사용가치를 생산하지 않는다. 게다가 가사노동은 노동자의 재생산을 위한 사용가치를 제공하지만, 벤스톤(Margaret Benston)과 다른 이들이 주장했듯이 직접적으로 노동력 상품을 생산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가사노동 생산양식의 기능은 우선 임금노동자의 생계에 필요한 사용가치를 제공함으로써 그들의 노동력을 재생산하는 데 기여하는 것이다. 그러나 해리슨은 아내가 자신의 노동의 대가로 오직 생계를 보장받을 뿐이지만, 그녀는 자본주의 부문의 영여가치로 나타나는 잉여노동에 기여한다고 주장한다. '이처럼 가사노동의 잉여노동이 자본주의 부문으로 이전되는 메커니즘은 자본가가 노동력 가치에 미달하는 임금을 지불하는 것이다.' 주부가 자신의 노동을 통해 노동력의 가치를 떨어뜨리기 때문에 이런 메커니즘이 가능하다. 주부는 서비스를 제공하는데, 이런 서비스를 시장에서 구매한다면 생계비용이 늘어나고 따라서 결국에는 임금에도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다. 가사노동 양식의 존재는 자본주의에 다른 영향을 미치지만, 이것은 양면적이다. 한편으로 그것은 여성을 노동인구 외부에 둠으로써 협상에서 남성 노동자의 지위를 개선한다.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여성 산업예비군을 창조하여 협상력을 잠재적으로 약화시킬 수 있다. 해리슨은 여성의 노동이 자본주의 생산양식 외부에서 수행되므로 여성은 분리된 계급을 형성한다고 주장하며 결론을 맺는다. 따라서 주부이자 동시에 임금소득자인 여성은 두 계급에 속한다. 그는 억압의 두 형태, 즉 자본주의의 억압과 가족의 억압에 반대하는 투쟁을 촉구한다. 해리슨은 델피에 비해서 덜 독단적이고 더 정교한 주장을 제기하지만, 그의 분석은 더 큰 이론적 문제를 야기하며, 여기서 검토가 필요한 한 가지 특유한 영역의 문제가 있다. 자본주의와 가사노동의 관계에 대한 그의 개념화가 그것이다. 이 문제는 다른 곳에서 널리 토론되었으므로 여기서는 간단히 다루겠다.6) 가내 잉여노동이 자본주의 영역으로 이전되며, 잉여가치로 나타난다는 해리슨의 주장이 잘못된 전제에 기초한 것이다. 그는 가내영역의 구체노동과 상품생산의 추상노동 시간이 등가이므로 비교 가능하다고 간주한다. 그러나 가사노동은 노동의 일반적인 균등화에 영향을 받지 않으므로 양자를 비교할 수 없다. 따라서 가치법칙을 다시 정의하지 않는다면, 두 영역에서 잉여노동 시간의 이전을 계산할 수 있는 원리가 없다. 가사노동이 비자본주의적라는 해리슨의 지적은 문제를 더 어렵게 한다. 한 저자가 말했듯이 '가치형태를 취하지 않는 비자본주의 양식의 구체노동이 어떻게 자본주의 생산과정의 물질적 토대도 없이 자본주의 부문의 부가 가치로 나타날 수 있는가?'7) 따라서 가사노동과 자본주의의 관계에 대한 해리슨의 이론은 그 핵심부터 금이 가기 시작한다. 가사노동과 노동력의 가치 이런 문제들 외에도, 가사노동이 노동력의 일상적 재생산에 필요한 노동을 ('무급으로') 제공함으로써 노동력의 가치를 떨어뜨린다는 널리 수용되는 명제가 남아 있다. 이 명제에 따르면 무급 가사노동이 없다면 이 노동은 인상된 임금으로 시장에서 구매되어야 한다. 해리슨의 분석은 이러한 전제에 의존하며, 그의 주장은 가사노동 논쟁 전반에서 상당한 지지를 얻었다. 이제 가사노동에서 나오는 '보조금'은 자본주의가 가정 내 여성의 종속적인 지위를 유지하려는 주요한 동기로 간주된다. 이러한 문제제기는 틀림없이 정당한데, 이것이 노동력의 가치를 결정하는 문제를 다루려는 시도를 대표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장을 제시하는 방식과 그것의 기초가 되는 몇 가지 가설 때문에 잘못된 결론에 도달한다. 이는 특히 반드시 구별해야 할 두 요소가 섞여있기 때문이다. 하나는 가사노동이 반드시 노동력의 가치를 떨어뜨리느냐는 질문이다. 다른 하나는 이 때문에 자본주의가 가정 내 여성의 종속적인 지위를 유지하는 데 이해가 걸려있다는 주장이 설득력이 있냐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정당한 것으로 수용되지만, 면밀한 연구가 필요하다. 노동력의 가치는 궁극적으로 노동력의 재생산에 필요한 '상품 묶음'의 가치에 의해 결정된다. 그러나 그것은 이런 경제적 계산만으로 환원되지 않는데 왜냐하면 똑같이 중요한 다른 요인들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가사노동에 대한 모든 문헌은 일반적 용어로 노동력의 가치를 검토할 수 있으며, 가사노동은 노동력의 가치와 불변의 관계를 맺는다고 가정한다. 하지만 사실 노동력의 가치는 오직 특정한 사회와 역사적 시기에 따라 결정될 수 있을 뿐이다. 노동력의 가치는 다양한 문화적·정치적 조건에 따라 결정되며, 그 조건에 따라 상이한 계층과 범주의 노동자계급의 생계표준이 결정된다. 노동력의 가치는 상이한 범주의 노동자(숙련/비숙련, 흑인/백인, 남성/여성)에 따라 다를 뿐만 아니라, 노동력의 공급이나 계급투쟁의 수준과 같이 특정 시기에 협상에서 노동자의 위치에 영향을 끼치는 조건에 따라 다르다. 또한 노동력의 가치는 일반적인 축적 수준이나 축적률, 특정 기업이나 생산부문의 이윤 수준, 1부문과 2부문의 관계, 일반적 기술수준과 같은 다른 요인들의 영향을 받는다.8) 이런 다양한 결정 요인들 중에서 가사노동이 노동력의 가치를 결정하는 데 기여하는 바는 상대적으로 미미하다. 오히려 가사노동이 그것의 결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선험적으로 가정할 수 없다. 가사노동과 노동력의 가치의 관계는 항상 역사적/문화적 변화에 따라 결정된다. 선진 자본주의 국가에서 노동자 대부분의 노동력의 가치가 가사노동이 수행되는 곳, 즉 '가정'을 재생산하는 비용을 보장할 수 있는 수준으로 상승한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만약 일상적 재생산에 필요한 투입물의 시장가격이 높다면, 이데올로기적·문화적 동기가 결합되어 남성이든 여성이든 특정 양의 무급 가사노동(요리, 청소, 빨래)을 수행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가사노동이 노동력의 가치를 모든 노동 투입물이 상품화되는 것보다 낮은 수준으로 유지하는 데 도움을 준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을 공리로 간주될 수 없다. 노동자가 가사노동을 수행하는 것이 시장에서 필요한 것을 구매하는 것보다 비용이 더 적게 든다는 사실을 입증할 경험적 증거가 필요하다. 왜냐하면 이는 최소한의 조건, 즉 저렴한 서비스 시장이 없고, 소비할 때 변형 노동이 거의 또는 전혀 필요 없는 생필품을 소비할 수 없는 조건에서만 성립하기 때문이다. 이런 조건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할 수는 없다. 제3세계는 말할 것도 없고, 선진 자본주의 국가에서도 노동자는 재생산의 욕구를 시장에 상당히 의존하며, 이것이 더 높은 임금을 받는 노동자에게만 들어맞는 것도 아니다. 반대로 노동력의 가치가 가장 낮은 곳에서 흔히 가사노동의 투입이 최소에 머무른다. 여성 가사노동의 이득을 보지 못한 채 노동력이 보통 하루 단위로 재생산되는 독신 노동자, 이주노동자는 항상 평균 이하의 임금을 받는다. 필수적인 살림을 마련할 여유나 의지가 있더라도, 이런 범주의 노동자는 가사노동을 직접 수행하기 어려운 조건(빈민가, 합숙소, 판자집)에서 살고 있다. 따라서 그들은 시장의 서비스와 식품에 의존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상황에서 체결되는 임금협상은 가사노동의 상당한 투입을 전제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기성제품을 구매하는 대신에 노동자가 직접 가정에서 노동한다면 과연 노동력의 가치가 떨어질지는 최소한 열린 문제다. 예를 들어 사적인 소비와 한 가정을 꾸리는 데 필요한 요리와 청소를 가능케 하는 조건을 확보하는 것은 더 높은 노동력 가치에 의존할 수도 있다. 달리 말해 노동력의 가치는 역사적·문화적 변화에 따라 결정되므로 가사노동과 노동력의 가치 사이의 관계가 불변이라고 가정할 수 없다. 이로써 자본주의에서 가사노동이 중요하다는 어떠한 일반적인 주장도 미심쩍게 되며, 가사노동이 어떤 의미에서는 자본주의에 본질적이라는 주장도 침식되고 만다. 두 번째 전통적인 명제는 가사노동이 노동력 가치에 공헌하는 바가 가정 내에서 여성의 지위를 설명하는 데 도움을 준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 역시 노동력의 가치에 관한 지나치게 정적이며 몰역사적인 개념화를 전제로 한다. 많은 저자들처럼 노동력의 가치가 반드시 노동자계급 가족의 재생산 비용을 포함한다고 가정해서는 안 된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그것은 다양한 요인들에 따라 결정되기 때문이다. 최소한, 노동력의 가치는 반드시 임금소득자의 노동력 재생산에 필요한 상품 묶음의 가치와 등가여야 한다. 그러나 선진 자본주의 국가에서 어떤 부문에 속한 노동자의 노동력 가치는 의존적인 가족에 필요한 비용을 포함하는 수준에서 결정되었고 이것은 이른바 '가족임금'이라는 현상을 낳았다. 가족임금은 노동자계급 가족이 특정 생활수준을 유지하는 데 충분한 일인 임금이다. 동시에 상당수의 노동자들에게 노동력의 가치와 임금은 이러한 최저치 이하로 떨어지고 따라서 남성 임금이 가족 생계를 보장하지 않는다. 이러한 두 경우의 차이는 여성의 지위에 극히 중대한 의미가 있다. 만약 임금이 위에서 정의한 의미에서 가족임금이라면 기혼여성이 노동인구 밖에서 전업주부로 남는 것이 가능하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면 가족은 만족스러운 생활수준에서 가족을 재생산하기 위해 추가 소득을 확보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기혼여성의 공통 대응은 노동인구에 진입하는 것이다. 하지만 어떤 경우에도 가사노동의 수행 여부가 가정 내 여성의 지위를 설명할 수 없다. 이런 경우에 아마도 중요한 것은 남성 노동력의 가치가 가족임금 이하로 떨어졌고 노동시장에 진입할 수 없거나 진입할 의지가 없는 의존적인 주부가 가족임금을 보조하기 위해 노력을 배가한다는 사실일 것이다. 이것은 본질적으로 노동력의 가치를 떨어뜨리지 않으며 오히려 이미 주어진 상황에 대한 대응일 뿐이다. 하지만 다른 요인들이 불변이라면 이는 노동력의 가치를 그 수준으로 유지시킬 수 있을지도 모른다. 따라서 어떤 상황에서 가사노동이 노동력의 가치를 떨어뜨릴 수 있다는 사실을 수용더라도, 이것이 가정 내 여성의 지위를 설명할 수 없다. 주장이 옳고 가사노동이 자본에게 유익하다고 해도, 왜 일반적으로 여성이 가사노동을 하는지도 반드시 설명되어야 한다. 물론 현실에서 오직 여성만이 가사노동을 하는 것은 아니다. 독신 남성, 아이, 다른 이들 역시 가사노동을 하며, 때때로 가구 구성원끼리 가사노동을 분담하기도 한다. 그러나 가사노동이 수행되는 한, 그것이 수행되는 사회적 관계와 그것을 수행하는 행위자에 대해 자본이 무관심하다는 것은 분명하다. 전업주부가 가족임금을 지탱하기 위해 더 많은 잉여노동을 수행하고 더 많은 노동시간을 투여하며 더 열심히 노동하므로 전업주부의 존재가 자본에게 가장 유익하다고 여전히 주장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을 일반 법칙으로 주장하는 것은 곤란하다. 왜냐하면 주부의 가사노동이 가족 소득을 보충하는 데 실로 도움을 줄 수 있지만 그녀 역시 가족의 아이들과 더불어 재생산되어야만 하며, 개별적인 가사노동에 필요한 추가적인 가전제품을 구입하고 유지해야 한다는 사실을 고려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주부가 임금소득자라면 이런 비용이 그녀의 임금을 통해 부분적으로 충당될 수 있다. 그러나 그녀가 전업 주부라면 사정은 달라진다. 이 경우에 문제는 주부의 노동이 남편의 노동력의 가치를 떨어뜨려서 자본가에게 숨겨진 이익을 준다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가정살림과 개인의 유지에 필요한 숨겨진 비용이 수반된다는 것이다. 이런 경우에 숨겨진 비용은 남편에게 제공되는 가족임금을 통해 보장된다. 따라서 자본주의 기업이 이득을 얻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따라서 선진 자본주의 국가에서 가사노동에 관련된 중요한 사실은 자본이 '무급' 가사노동에서 경제적 가치를 얻는다는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오히려 가사노동을 수행하는 전업주부의 존재는 주부로 남기에 충분한 임금이 존재하느냐는 사실에 달려있다는 것이다. 이는 노동자계급의 모든 계층은 말할 것도 없고 모든 계급에게 적용되는 게 아니며, 심지어 경제위기가 아니더라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인플레이션이 노동력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경기후퇴기에 많은 수의 여성은 유급 노동을 시작하도록 고무된다. 이는 남편의 임금이 불충분하고 이런 상태에 제공할 수 있는 이득 때문이다. 따라서 단순히 노동력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주부의 가사노동이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주부의 존재조건이 노동력의 가치를 올리거나 최소한 유지하게 하는 정도가 문제다. 따라서 노동력의 가치는 가정에서 여성의 위치와 관련이 있을 수도 있지만, 이것은 해리슨이나 가사노동 논쟁에 참여한 대부분의 논자가 주장한 방식대로는 아니다. 더 설명이 필요한 부분은 이런 관계의 다양한 형태며, 어떤 계급·계층의 구성원에게는 지불되지만 다른 이에게는 지불되지 않으며, 남성에게는 지불되지만 여성에게는 지불되지 않고, 어떤 자본가는 지불하지만 다른 자본가는 지불하지 않는 '가족'임금을 낳는 특수한 정치적·역사적·경제적 원인이다. 유사점과 차이점 이러한 이론의 여러 측면을 각각 검토했으므로 이것들의 유사점과 차이점을 규명할 수 있다. 물론 가장 중요한 차이는 이론적 접근법에 있다. 해리슨의 분석은 착취의 특수한 형태로서 '가내 생산양식'이란 개념을 전통적인 계급 분석에 추가한다는 의미에서 일관되게 가사노동을 마르크스주의 시각으로 포괄하려고 한다. 여기서는 자본주의가 최소한 암시적으로나마 가장 중요한 적으로 남아 있다. 한편 크리스틴 델피는 자본주의를 비난하고 그것의 전복을 주창하지만 마르크스주의 분석에 적대적이다. 해리슨은 자본주의가 가사노동으로부터 어떻게 이익을 얻는지 관심을 두지만, 델피는 (여성의) 가장 중요한 적이 자본주의가 아니라 남성이라고 입증하는 데 관심을 둔다. 또한 델피는 남성과 여성의 관계에 관심이 있지만 해리슨은 가사노동과 노동력의 가치의 관계에 관심이 있다. 게다가 해리슨 논문의 이론적 대상은 여성 억압이라기보다는 자본주의다. 가내 생산양식 명제를 지지하는 두 사람의 근본적 차이는 최소한 이 개념을 적용하는 것만으로는 여성운동의 정치적 실천의 문제를 해명할 수 없음을 보여 준다. 하지만 이러한 근본적 차이를 넘어서 두 이론이 공유하며 더 상세한 토론이 필요한 세 가지 주요 입장이 있다. 첫째는 여성을 계급으로서 분류하는 것이며, 둘째는 가사노동을 비자본주의적라고 규정하는 것이며, 셋째는 가내영역을 생산양식으로 분류하는 것이다. 1. 여성은 계급인가? 대체로 마르크스주의자는 여성이 분리된 계급을 형성한다는 생각을 거부하는 경향이 있다. 이는 부분적으로는 여성에게 고유하며 모든 여성에게 공통된 경제적인 계급 위치를 확고히 정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해리슨과 델피는 이러한 주장을 지지하는 논증에서 큰 차이를 보이지만, 여성을(최소한 여성 일부를) 하나의 계급으로서 개념화할 수 있는 경제적 토대가 존재한다고 설명하고자 한다. 계급에 대한 델피의 주장은 다소 불만족스럽다. 한 페이지에서 여성은 '노예' 관계에 있는 것으로 묘사되기도 하며, '본질적으로 프롤레타리아'라거나 '농노 관계'에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어쨌든 그녀는 결혼 관계 내에서 발생하는 것으로 간주되는 착취에서 계급을 도출한다. 우리는 그녀가 결혼 형태를 보편화하고 그것에 특권을 부여하는 것과 관련된 문제들을 이미 언급했고, 여성과 가사노동의 관계에서 [역사적·문화적인] 중요한 차이를 설명하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여성을 계급으로 간주하는 그녀의 설명에는 또 다른 문제가 있다. 예를 들어 착취에 대한 델피의 개념은 고유한 이론적 함의를 지닌 마르크스주의 담론에서 빌린 것이지만, 그녀는 '노동의 영유'라는 더 느슨한 정의를 이용한다. 마르크스주의 용어법에서 노동의 영유가 등장하더라도, 그것이 계급의 존재를 확증하기에는 불충분하다. 반드시 착취관계를 구성하지 않더라도 모든 사회에서 특정한 개인을 위한 잉여노동이 항상 수행된다. 게다가 단순히 인간 주체 사이의 관계에 대한 경험적 관찰로부터 계급을 도출할 수 없다. 계급 착취는 생산관계 수준의 관계를 수반하며 잉여노동의 '영유'라는 단순한 사실로 환원될 수 없다.9) 계급에 관한 델피의 명제는 이론적 근거가 없으므로 그녀는 자신의 명제를 유지할 수 있는 설득력 있는 논증을 발전시킬 수 없다. 그리고 그녀의 정의가 철저히 적용된다면 우리가 살펴볼 볼 것처럼 그녀의 주요 주장과 모순되는 결론에 도달할 것이다. 여성이라는 보편 계급이 존재한다는 델피의 주장에는 더 큰 문제점이 있다. 그녀는 결혼이 모든 여성의 공통 조건이고, 이것이 결혼계약상의 부와 지위의 차이뿐만 아니라 문화적 차이까지도 무효화하기 때문에 모든 여성이 동일한 계급에 속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녀의 주장을 분석하면 심각한 비일관성이 나타난다. 델피는 여성의 종속에 대한 관념적 이론에 맞서기 위해 모든 여성-주부가 동일한 '생산관계'에서 노동하며 '동일한 직무'를 수행한다고 주장하고, 따라서 여성에게 공통적인 억압의 물질성을 강조한다. 유물론적이라고 가정되는 이러한 강조는 그녀의 주장 전체에서 근본적이다. 하지만 더 특권적인 여성을 그녀의 도식 내에 포함하려고 할 때 그녀의 논증은 설득력을 상실한다. 왜냐하면 여기서 그녀는 가사노동이 수행되는 형태는 중요하지 않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사노동은 프롤레타리아 아내의 육체노동이 될 수도 있고, 오직 부르주아 아내에게 강요되는 '사회적인 과시 활동'이 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여성이 어떤 의미에서 공통의 '생산관계', 즉 '생산'에 기초한 공통의 물질적 착취로 인해 통일된다고 할 수 있는가? 또 '사회적 과시'가 어떤 의미에서 생산인가? 분명히 가사노동과 양육을 위해 하인을 고용하는 부르주아 아내는 특권이 더 적은 여성과 물질적 억압을 공유하지 않는다. 또한 이는 부르주아 아내의 특권이 남편의 부에서 유래한 것이므로 이혼을 통해 그것을 하루아침에 박탈당할 수 있다는 사실과 모순되지 않는다. 물론 그녀는 다른 방식으로 모든 여성에게 공통된 억압과 차별을 경험할 수 있지만(이는 특정한 투쟁의 기초를 형성할 수 있다), 이는 여성 억압의 물질성에 기초해 여성 노동의 착취를 정의하려는 델피의 직접적인 관심사는 아니다. 2. 가사노동과 자본주의의 관계 가사노동과 자본주의의 관계를 분석하면서 두 저자는 가사노동이 자본주의와 구별되며 본질적으로 비자본주의적이라는 데 동의한다. 하지만 자본주의가 가사노동에 허용하는 자율성의 정도에 대해서는 의견이 다르다. 이 점에서 해리슨은 델피보다 좀 더 미묘한 태도를 취한다. 그는 가내 생산양식을 '예속적' 또는 '절단된'(truncated) 생산양식이라는 상당히 어색한 공식으로 제시하면서, 가내 생산양식이 비자본주의적이지만 자본주의에 통합되거나 접합된다고(articulated) 인정한다. 심지어 가사노동 양식은 국가 양식처럼 '특정한 기능을 완수'하기 위해 자본주의가 '창조한'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문제는 이러한 양식들이 매우 우연적이고 의존적인 특성을 지녔지만 생산양식을 구성한다고 말할 수 있는지 여부다. 이 문제는 나중에 검토할 것이다. 하지만 델피는 가족적·가부장적 양식은 [자본주의와] 아무런 이론적 관계도 없는 자율적 실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가사노동이 자본주의에 대해 어느 정도나 자율적인지는 문제로 남는다. 왜냐하면 가사노동과 자본주의의 접합은 전체 가족생계를 제공하는 데까지 확장되며, 가족생계는 자본주의 부문에서 유래하는 소득으로 지불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가사노동, 서비스와 생필품은 자본주의 부문에서 생산되고 구매되는 상품의 이용이나 변형에 의존한다. 노동을 제외한 모든 가사노동 투입물은 자본주의 부문에서 나오므로 만약 가사노동이 자본주의에 대해 자율적이라면 어떤 의미에서 그러한가? 오히려 델피는 이런 자율성을 단언하면서 '여성의 가정 외부 노동을 착취하기 위해 가족적 의무를 확립하는 것'이 자본주의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가부장제가 여성을 억압하기 위해 자본주의와 공모한다면 이런 체계는 어떤 종류의 '자율성'을 지닌 것인가? 이런 모호성은 여성해방을 위해서는 가족적 생산양식의 혁명만으로 충분하지 않으며 오히려 사회 전체의 전복이 필요하다는 델피의 암묵적인 입장에서 가장 분명하게 드러난다. 델피는 왜 이런 이중 혁명이 필요한지 자세히 설명하진 않지만, 그렇게 한다면 그녀가 거부하는 입장에 가까운 주장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해리슨과 델피가 적절하게 다루지 못한 더 큰 문제는 즉 가사노동의 역사적·문화적 특수성이다. 해리슨은 가사노동이 자본주의의 고유한 창조물이라고 암시한다. 반면 델피는 가내 양식의 자율성은 봉건주의, 자본주의, 사회주의와 같은 주요 생산양식의 특수한 발전 단계와 독립적인 것으로 간주되어야한다고 암시한다. 이런 관점은 모두 만족스럽지 못하다. 왜냐하면 가사노동과 가족에 대한 역사적인 설명은 거의 없고 양자를 비교하는 설명은 더 적으며, 가사노동 이론의 일부는 이 쟁점에 대한 증거와 적절한 설명을 제시하지 않기 때문이다. 억압적인 가사노동의 기원을 현대 자본주의의 출발에서, 특히 주요 생산단위로서 가족의 해체에서 찾으려는 시도는 종종 지나치게 단순하다. 가족이 생산단위인 곳에서도 가내 소비(예를 들어 음식준비, 청소, 세탁, 옷감 짜기, 바느질)와 양육를 위한 가사노동은 시장에서의 교환이나 물물교환을 위한 생산과 구별된다. 이런 구별은 기술적으로 가장 덜 발전한 국가에서도 마찬가지다. 즉 (아무리 개별화된 가사노동이라 할지라도) 가사노동과 성별 분업은 자본주의에 이전에도 존재하며, 보편적이지 않다고 하더라도 거의 그런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는 가내영역이 영원불변하다는 의미가 아니다. '노동과정'의 일부는 비슷해 보일 수 있으나 수세기에 걸쳐 중요한 변화가 일어났으며 그러한 변화의 일부는 지배적인 생산양식의 변화와 관계를 맺었다. 예를 들어 델피가 인정하는 것처럼 자본주의 농업으로 이행에 의해 가족이 생산한 식량을 스스로 소비하는 양보다 구매하는 양이 증대했다. 금세기 동안 가내생활 영역 대부분이 변화를 겪었다. 더 나은 주택의 개발로 인해 더 많은 서비스를 가정 내로 통합되었고(난방, 물, 조명), 동시에 시장에서 다른 서비스가 성장했다. 가공식품 냉동과 통조림과 같은 기술의 발전이나 노동절약 설비의 활용은 가사노동의 변화를 낳거나 그런 잠재력을 지닌다. 또한 국가는 보건, 교육, 육아의 책임 일부를 떠맡았다. 이런 발전이 보여주는 것은 가사노동이 자율적인 실체를 구성한다는 사실이 아니라, 가사노동과 관련된 노동과정과 사회적 관계가 지배적인 생산관계의 경제적 조직화의 변화에 따라 여러 방식으로 영향을 받는다는 사실이다. 물론 이는 가사노동이 단지 생산관계에 의해 결정된다는 의미는 아니다. 이런 변화가 가사노동과 여성의 지위에 미치는 효과는 한편으로는 부분적이며 또 한편으로는 모순적이기 때문이다. 가사노동의 어떤 측면은 변화에 저항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러나 가사노동에 역사가 있지만, 이것이 자율적인 역사는 아니다. 3. 가내 생산양식이 존재할 수 있나? 가사노동이 '비자본주의적'이라고 정확하게 규정하는 것에는 한 가지 중요한 의미가 있다. 즉 가사노동이 본연의 상품생산 영역 밖에 있고, 따라서 가치법칙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는 것이다. 해리슨은 이를 인정했기 때문에 가사노동이 분리된 생산양식을 구성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우리가 지금부터 문제로 삼으려는 것은 바로 이런 결론이다. 모든 생산양식 이론의 출발점은 생산양식이 무엇이냐는 것이어야 한다. 델피는 정의를 제시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용어를 '생산방식'의 유비로 사용하면서, 더 이상의 정의를 시도하지 않는다. 따라서 그녀는 '생산양식' 개념을 마르크스주의 맥락에서 분리하고, 그 대신에 가사노동의 특징들을 요약하는 설명구조를 덧붙인다. 반면 해리슨은 알튀세르의 개념화로 볼 수 있는 생산양식 개념을 채택한다. 이 개념에는 자연의 변형양식(또는 노동과정), 생산물의 영유양식, 그리고 경제적 소유의 일정한 분배라는 세 가지 요소가 결합된다.10) 해리슨의 생산양식 개념은 발리바르가 정교화한 개념을 토대로 한 것이므로, 우리는 해리슨의 적용이 그것에 부합하는지 살펴볼 것이다. 마르크스주의 용어법에서 '생산양식' 개념은 일반적으로 두 가지 분석 수준과 관련된다. 하나는 생산적 구조의 요소들(즉 생산력과 생산관계)이고, 다른 하나는 해당 생산양식의 운동 법칙이다. 양자는 마르크스의 자본주의 경제 분석의 이론적 대상을 형성한다. 여기서 우리는 한편으로 자본주의에 고유한 일군의 요소들과 사회적 관계(노동과정, 소유 형태, [노동자와 소유의] 분리 형태)를, 또 한편으로 자본주의 경제의 통일성에 대한 개념인 재생산 이론을 발견한다. 그것은 자본유통, 분배관계와 생산관계, 기업들 간의 결합 형태가 하나의 통합된 생산체계의 일부분을 형성하는 체계로서 인식된다. 이처럼 이중적 의미로 인식된 생산양식은 일정한 경제체계와 사회적 관계에 관한 고도로 추상적인 개념이다. 일반적 개념으로 명기할 수는 없지만 주어진 생산양식의 재생산을 보증하기 위해서 필수적인 생산양식의 존재조건은 다른 분석수준, 즉 사회구성체라는 분석수준에 속한다. 이러한 조건은 해당 생산양식의 추상적 개념에서 추론될 수 있지만, 이것은 매우 일반적인 용어로 표현될 수 있을 뿐이다. 왜냐하면 특정한 사회구성체에서 그런 조건을 보증하는 양식은 상당히 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발리바르의 마르크스 독해에 따르면 '생산양식' 개념은 두 가지 방식으로 기능한다. 하나는 마르크스의 용어로 말하면 시기구분의 단위로서, 사회의 경제적 발전 시대(자본주의, 봉건주의, 사회주의)에 따라 역사를 구별하는 것이다. 또 하나는 특정한 사회구성체에 대한 우리 지식의 기초를 이루는 개념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생산양식의 구성적인 경제적·사회적 관계에 관한 이론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내 생산양식은 생산양식의 이런 필요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한다. 가내 생산양식의 '예속적' 특성에 대한 해리슨의 강조는 정의상 그것이 존재하는 사회구성체에 관한 지식의 토대를 제공하는 것이 불가능해지도록 한다. 실로 그의 용어법에서 가내 생산양식에 대한 지식은 자본주의 생산양식에 대한 지식을 조건으로 한다. '가내 생산양식의 재생산은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재생산에 의존하며, 그것은 자본과 대단히 복잡한 공생관계를 맺는 절단된 생산양식과 같은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운동법칙에 따라 결정되며, 자신의 운동법칙이 없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가내 생산양식은 어떤 의미에서 일정한 사회구성체에 대한 지식을 제공할 수 있는가? 가사노동 생산양식이 다른 기준, 즉 시기구분의 단위로 기능할 수 있는지를 고찰할 때 동일한 문제가 발생한다. 해리슨은 '예속적' 양식이란 개념을 정식화하면서, 사회구성체는 내부에 하나 이상의 생산양식을 포함할 수 있다고 지적한다. '퇴화' 양식이나 '맹아' 양식이란 그의 개념은 이런 분석에 부합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같은 종속적 양식들은 '예속적' 양식과 하나의 결정적인 측면에서 차이가 있다. '퇴화' 양식이나 '맹아' 양식은 과거에 일반화될 수 있었거나 미래에 일반화될 수 있지만, 가내 생산양식 같이 의존적 양식들은 결코 사회구성체의 경제적·사회적 토대를 구성할 수 없으므로 결코 일반화될 수 없다. 달리 말해 예속적 양식은 자신의 생산적 토대가 없다. 가사노동 생산양식이 지배하는 어떤 사회구성체나 그것의 일부조차도 존재한 적 없거나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이처럼 가내 생산양식 안에 생산적 토대가 없고 어떤 사회적 생산도 없기 때문에 이런 맥락에서 '생산'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 자체가 문제가 된다. 가내 생산양식의 구성 요소를 규명하려고 시도할 때 더 큰 문제가 생긴다. 노동자(주부)가 있고 노동대상이 있다. 그러나 그 안에 어떤 사회적 생산도 없고, 생산물이 주부의 잉여노동의 어떤 형태를 취하는 생산양식에서 무엇이 생산수단인가? 요리든 원예든 간에, 사적 소비를 위한 사용가치의 창조가 이 활동에 사용되는 도구를 가리키려고 '생산수단' 개념을 이용하는 것을 정당화하는지 의심스럽다. 가사노동이 사회적으로 중요하다고 인정하는 것이 가사노동이 사회적 생산이나, 심지어 마르크스가 일반적으로 제시하는 의미에서 생산과 동등하다는 뜻은 아니다. 해리슨에 따르면 가내 생산양식의 '생산관계'는 노동자와 생산수단의 통일이라는 특성을 지닌다. 그러나 설사 우리가 그의 개념 사용을 받아들이더라도, 그의 개념이 생산물(여기서는 주부의 잉여노동)의 영유양식과 어떻게 연관되는지, 또는 어떻게 주부가 이 같은 사회적 착취관계에 종속되는지는 분명치 않다. 또한 '생산양식' 개념은 발리바르가 명명한 (그릇된 인상을 줄 수도 있는)11) '비(非)노동자'를 포함하는데 여기에 더 큰 어려움이 따른다. '비노동자'는 잉여노동이나 잉여생산물을 영유하는 행위자다. 따라서 해리슨과 델피의 정의에 따르면 여성이 자신의 필요를 넘는 가사노동을 할 때 이러한 '잉여노동'을 영유하는 행위자가 누구냐는 문제가 발생한다. 크리스틴 델피의 답변은 명확하다. 잉여노동을 영유하는 자는 남성이다. 그러나 이것이 사실이라면 아이 역시 주부 노동의 많은 부분을 '영유'한다. 하지만 아이는 성인 남성의 일부가 될 수 없으며, 아이를 독립적인 비노동 착취계급으로 간주하는 것도 이치에 맞지 않다. 남성이 착취자라는 엄격한 페미니즘의 주장은 1개월 된 남자아이는 착취자일 것이고, 1개월 된 여자아이는 아닐 것이라는 식으로 아이를 구별해야 한다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결론으로 사실상 귀결된다. 남편이 영유계급이라고 설명하는 델피를 따른다면 추가적인 어려움이 있다. 경험을 볼 때 대부분의 결혼에서 남편이 가사에 관한 한 '비노동자'라는 점은 분명하다. 그러나 가정 밖에서 남편은 대개 노동자인데, 자신의 노동력을 판매함으로써 그 역시 가족 생계에 기여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델피의 용어로 말하면 남편 역시 아내와 아이가 '영유'하는 어떤 '잉여노동'을 수행한다. 이것이 아내와 아이를 남편의 착취자로 전환시키는가? 이처럼 받아들이기 어려운 결론은 델피의 착취에 대한 정의를 따른다면 피할 수 없다. 해리슨은 가족적 생산양식에서 남성의 위치를 사실상 전혀 논하지 않음으로써 이 문제를 교묘히 피해간다. 남성이 가내 생산양식의 계급구조에 포함되는지는 분명치 않지만, 그는 가내 생산양식이 단지 하나의 계급, 즉 주부 계급만을 포함한다고 암시한다. 그러나 만일 여성이 두 계급들에 속할 수 있다면, 남성은 왜 그럴 수 없는가? 아마도 해리슨이 이 문제를 피하는 이유는 가내 생산양식 안에 남성의 위치를 정하면 그는 델피의 결론과 너무 가까워질 것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남성과 자본주의의 관계보다는 남성과 가사노동, 남성과 여성의 관계라는 질문을 즉각 제기하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 문제에 대한 해리슨의 침묵은 성들 간의 관계라는 쟁점을 대체로 회피하려는 징후다. 해리슨이 볼 때 여성의 잉여노동을 영유하는 행위자는 자본이고 따라서 가내양식 바깥에 있다. 그러나 이는 발리바르의 개념과 좀 더 멀어진다. 왜냐하면 엄격히 말하면 발리바르에게 비노동자는 이런 외적 영유를 허용하지 않는 생산양식 개념의 불변요소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우리가 종속적 생산양식의 특징은 외부 행위자의 영유라고 받아들이더라도 무엇이 영유되는지, 영유의 창출이 생산을 구성하는지는 여전히 문제로 남아 있다. 우리가 살펴본 것처럼 가사노동의 사례에서 이 개념을 적용하는 것에는 문제가 있고, 최소한 문헌에서 제시한 것 이상의 이론적 실증이 필요하다. 가사노동 논쟁의 문제점 가내 생산양식 명제 덕분에 델피와 해리슨은 수많은 가사노동 문헌에서 자주 반복되는 두 가지 오류를 피한다고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제 우리는 이러한 오류를 살펴볼 것이다. 하나는 가사노동을 자본주의 생산양식 내로 흡수하려는 오류고, 다른 하나는 가사노동이 자본주의와 완전히 기능적인 관계를 맺는다고 보는 오류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작업에는 여성의 가사노동에 대한 체계적 분석이 없기 때문에 그들을 대신해 이 이론을 정교하게 만드는 게 필요하다는 근거로 가사노동을 자본주의 생산양식 내로 흡수하려는 시도가 흔히 정당화되었다. 몇몇 저자는 가사노동과 자본주의의 관계에 관한 이론이 없는 것이 역사유물론 창시자들의 성차별적 태만 탓이라고 주장했다.12) 다른 이들은 역사유물론 이론의 중심 주제에서도 마르크스의 많은 개념이 미발전된 채로 남아 있고 더욱 정교화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특히 가사노동의 분석에 관한 개념에 적용된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 이론을 발전시키기 위한 막대한 작업이 남아있는 것이 사실이더라도,『자본』에서 불충분하게 이론화되거나 전혀 이론화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는 모든 것이 자본주의 생산 이론으로 통합될 수 있거나 통합되어야 한다고 곧장 가정해선 안 된다. 특히 한 저자가 희망에 차서 기록한 것처럼 가사노동이 자본주의 생산양식 개념과 '조화'를 이룰 수 있다고 가정하기보다는 여기에 의문을 품는 것이 필요하다.13) 한 가지 주요 문제는 수많은 저자가 생산양식이라는 추상수준을 사회구성체 추상수준과 혼동한다는 점이다. 이 문제는 가사노동 사례에서 우리가 어떤 추상 수준을 다루고 있는지를 먼저 확립한다면 벗어날 수 있다.14) 왜냐하면 가사노동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 분석을 생산하는 것과 가사노동을 자본주의 생산양식 개념과 자본주의 경제의 운동 법칙으로 흡수하려는 것은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이 개념들은 특히 상품생산과 가치증식과정과 관련을 맺기 때문에, 가치법칙을 따르지 않는 사적인 개별 노동으로서 가사노동은 자본주의 생산양식 이론의 외부에 있다. 마르크스의 친숙한 정식화처럼, 노동자는 '스스로에게 속하고, 생산과정 외부에서 필수적인 생명 활동을 하기' 때문에 자본가는 '안전하게 (노동자의 재생산을 노동자의) 자기보존과 증식 본능에 내맡긴다'.15) 즉 이런 추상수준에서 자본은 가사노동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러나 다른 수준, 즉 구체적인 사회구성체 수준에서는 가내영역의 조직화 형태와 가내영역 내부의 사회적 관계가 일정한 사회구성체의 재생산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사회적 재생산의 필요조건과 가내영역의 관계가 무엇이든 간에 이러한 관계는 단순히 자본주의 기능 때문에 확립되는 것은 아니다. 이는 직접적으로 두 번째 문제, 즉 기능주의의 문제로 이어진다. 가사노동과 가족에 관한 논쟁에는 기능주의 가설이라는 평가가 가장 적합한 것으로 가득 차 있었다. 예를 들어 가사노동은 자본주의에 '결정적', '필연적' 또는 '본질적'이라고 다양하게 언급된다. 자본주의 편에서 보면, 때로는 자본주의가 가사노동을 '창조'했다고 간주되며, 어떤 정식화에서는 심지어 자본주의가 생존을 위해 가사노동에 '의존'한다. 우리는 이미 가사노동이 자본주의에 결정적이라는 통념에 반대한다고 언급했고, 가족 조직의 현재 형태에 관해서도 같은 유보조항을 달아야만 한다. 가사노동에 대한 문헌은 가족 조직 역시 기능적이라고 간주하고, 가내영역이 특정한 국면에서 아무리 유익하더라도 자본주의 팽창이나 계급투쟁의 결과로서 심원한 변화를 겪을 수도 있고 또한 자본에게 모순적 효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고 인정하지 않는다. 몇몇 저자가 제안한 것처럼 자본주의가 가사노동과 가족에 의존한다는 가설이 수반하는 논리적 결론은 가사노동과 가족의 폐지는 자본주의의 몰락을 낳는다는 것이다. 이 같은 묵시록의 관점은 이론적으로 잘 실현되지 않지만, 다른 주의 깊은 분석(예컨대 벤스톤의 분석)의 결론에 자주 따라다닌다. 이는 아마도 여성운동을 반자본주의 투쟁의 일부로 명확히 정의함으로써 여성운동의 혁명적 성격을 입증하려는 욕망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그러나 여성의 종속이 자본주의 생존에 필수적이고 프롤레타리아에 대한 착취와 동등하다고 주장하지 않더라도 이것은 틀림없이 논증될 수 있다. 일원론과 경제주의 비록 델피와 해리슨이 전반적으로 위 문제들을 비켜가지만, 그들이 가사노동 논쟁과 공유하는 하나의 중요한 한계가 있다. 그것은 가사노동에 대한 경제적 분석을 배타적으로 강조하는 것이다. 논쟁이 다룬 주요 문제는 가사노동이 가치를 창조하는지, 노동력 상품을 생산하는지, 가치법칙에 따라 결정되는지, 생산적 노동인지 비생산적 노동인지 등등이었다. 이는 논쟁이 마르크스주의 안에서 발전됨에 따라 최초의 관심사가 '여성노동에 대한 유물론적인 분석'에 입각해 여성 억압을 분석하려고 했기 때문에 아마도 불가피했다. 처음에 이것은 보편적이고 몰역사적인 '가부장적 억압'을 가정했던 일부 페미니즘 분석의 관념론을 반대하고, 가족을 순전히 이데올로기 관계로 이해했던 일부 마르크스주의 분석의 관념론을 반대하는 데 필요하다고 환영받았다. 그러나 가사노동에 대한 이런 접근법은 경제주의라는 한계뿐만 아니라, 여성의 경제적(·비경제적) 활동 전체와 그것이 이뤄지는 관계들에 대한 분석을 희생하면서 협소하게도 가사노동과 주부에 집중했다는 한계가 있었다. 따라서 그것은 제한된 조건에서조차 여성의 대한 포괄적인 정치경제학 이론을 제시하는 데 실패했다.16) 이처럼 경제주의와 결합된 협소한 초점은 가사노동에 대한 페미니즘 비판이 [이론적] 분석으로부터 전적으로 전위되는 결과를 낳았다는 사실을 지적해야 한다. 이것은 가사노동이 노동력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효과가 있다는 주장에서 가장 분명히 입증된다. 이 주장은 오직 가사노동이 자본에게 어떻게 이득을 주는지 보이는 데에만 관심을 둔다. 정말로 그것은 아마 더욱 중요한 무언가를 전혀 보여줄 수 없다. 즉 왜 가사노동을 가정주부[여성]가 수행하는지, 어떻게 가사노동이 여성 종속의 구조와 연결되는지를 보여주지 못한다. 더욱이 자본에게 결정적으로 중요한 노동은 예컨대 여성의 육아 활동보다는 (남성) 노동자의 일상적 재생산과 관련된 노동이라고 대개 간주된다. 결국 이 이론은 왜 이런 노동이 여성과 남성 사이에서 정말로 동등해질 수 없는지, 심지어 독신 임금노동자 스스로 이런 노동을 수행할 수 없는지 전혀 설명하는 않는다. 그것의 피할 수 없는 결론은 여성의 책임으로서 가사노동의 종식과 이런 형태의 여성 억압의 제거가 자본에게 어떤 손실도 입히지 않은 채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델피의 주목할 만한 예외가 있지만, 가사노동 논쟁에 기여한 많은 문헌이 성들 간의 관계 전반에 대한 논의를 회피했다는 점을 주의해야 한다. 이런 문헌이 어쨌든 서로 대립한다고는 거의 생각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 목적이 여성의 종속으로부터 이득을 얻는 것이 예컨대 남성이라기보다는 일차적으로 자본이라고 설명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요약하면 가사노동이 자본에게 경제적으로 기여하는 것만을 배타적으로 조명함으로써, 페미니즘의 관점에서 발전한 관심사와 페니니즘의 쟁점은 고의가 아니더라도 담론으로부터 전위되었다. 이중적 전위 가사노동 논쟁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지금까지의 주된 관심사로부터 이중적인 전위가 필요하다. 첫째, 주요한 이론적 대상이 가내영역의 물질적 중요성을 개념화하는 것이라면, 강조점은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수준에서 일정한 사회구성체들과 그것의 재생산 수준으로 이동되어야 한다. 이와 더불어 분석은 더 이상 가사노동에 협소하게 집중하는 대신에, 이러한 구조들 안의 여성의 고유한 위치에 대한 시각을 잃지 않으면서 가족의 더 광범위한 중요성과 [가족보다] 더 폭넓은 사회에 대한 가족 내부의 관계를 고려하도록 유용하게 확장될 수 있다. 둘째, 대신 여성 종속에 관한 이론이 필요하다면, 첫걸음으로서 여성 종속과 경제의 관계라는 문제가 지금까지 논쟁보다 훨씬 일반적인 수준에서 제기되어야 한다. 여성 종속에 대한 이해도,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정치도 가사노동 분석만으로는 도출될 수 없다. 사실 '가사노동 임금'(wages for housework) 캠페인의 제한적인 강령은 여러 가지 방식에서 볼 때 이런[가사노동 분석만으로 치우친] 접근법의 자연스럽고 논리적인 결과다. 여성의 정치경제학은 결정적으로 중요한 연구 영역이지만, 논쟁의 용어는 더 확장되어야 하고 여성의 종속을 매개하는 물질적 관계의 복합적 결합을 분석하려고 시도해야 한다. 이 같은 분석은 가내영역에 대한 검토와 더불어 성적 분업, 재생산, 노동시장, 남녀 노동력 가치의 변화와 차이, 여성을 가족 내부의 의존적 지위에 머물게 하는 국가의 역할에 대한 고찰을 포함해야 한다.17) 그러나 여성 종속에 대한 이해는 오직 경제적이거나 물질적 요인으로 환원될 수 없으며, 이런 요인을 아무리 넓게 이해하더라도 마찬가지다. 또한 여성 종속에 대한 이해는 정신분석학, 성욕, 언어와 이데올로기 영역에서 근래 수행되고 있는 중요한 작업에 대한 고찰을 필요로 한다. 그러므로 그것은 확대하면, 성별간, 가족간 상호관계에 대한 분석을 포함한다. 여성의 종속을 매개하는 관계들의 복합성에 대한 인식은 가사노동에 대한 문헌에서 발견되는 몇 가지 정치적 결론을 제공하는 일종의 경제적 환원주의의 위험을 경고한다. 여성이 사회주의를 위한 투쟁에 가담할 것이냐는 질문에 대한 답변은 자본주의와 가사노동의 관계를 개념화하는 데 달려있지 않다. 그 답변은 여성이 스스로를 발견하는 정치정세에 달려 있으며, 특히 여성 종속의 고유성을 설득력 있게, 정면으로 다루면서 페미니즘의 쟁점을 접합할 수 있는 사회주의 운동의 능력에 달려있다. 이제 남은 문제는 자본주의에서 가사노동의 역할에 관한 세 가지 중심 질문에 대해 최근 어떤 답변이 정식화되었는지를 지적하는 것이다. 이 질문은 다음과 같다. 가족에서 여성의 지위를 어떻게 개념화할 것인가? 가정에서 여성의 지위와 자본주의 경제의 관계는 무엇인가? 그리고 이런 형태의 여성 종속을 끝내기 위해선 어떤 정치적 수단이 필요한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아직까지 상대적으로 발전되지 못했기 때문에, 다음 부분에서는 더 깊은 연구와 탐구가 필요한 영역만을 지적하고자 한다. 여성과 가정 우리는 위에서 여성/가정 관계가 불변이 아니며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재생산에 본질적이라고 간주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대신 이 관계는 일정한 사회구성체의 고유성에 따라 그 효과가 변화하는 결정과정들(determinations)이 복합적으로 결합된 결과로서 이해해야 한다. 이를 주의하면서 이런 결정과정들이 어떻게 현재 선진 자본주의 국가에서 명백히 나타나는지 더욱 일반적인 수준에서 제시할 수 있다. 이 중에서 특별한 언급이 필요한 네 가지 문제를 선별할 수 있다. 1. 임금 형태. 이는 여러 중요한 방식으로 여성의 지위와 가정에서 여성의 상황과 관계를 맺는다. 우리가 주장했던 것처럼 전업주부의 실존은 적정한 남성 임금을 통해 경제적으로 가능해지며, 그보다 비중은 적지만 육아와 결혼 기간 동안 추가되는 국가보조금을 통해 보완된다. '가족임금', 즉 부족하나마 직업이 없는 아내와 아이를 부양할 수 있는 임금수준의 존재는 다른 모든 임금수준과 마찬가지로 갖가지 상이한 결정과정들이 작용한 결과다. 심지어 그것은 이런 형태의 임금 산정을 목표로 하거나, 확대 해석하면 이런 형태의 여성 의존을 목표로 하는 남성노동자의 의식적이거나 전(前)의식적인 투쟁을 포함할 수 있다. 왜냐하면 가족임금의 포기는 노동력 가치의 하락이라는 위험을 무릅쓰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족임금이 수반하는 여성의존의 형태가 대체로 남성에게 유리하고 여성에게 불리하다는 사실은 거의 의심할 여지가 없으며, 앞으로 살펴볼 것처럼 이는 여성의 전반적인 지위에 대해 어떤 중요한 함의를 지닌다. 그러나 이를 고찰하기 전에 특권적인 남성임금이 수반하는 것은 특권 이하의 여성임금이라고 강조해야 할 것이다. 특정 범주의 남성 노동자가 가족임금을 보장받을 수 있더라도, 현재의 성별 분업에서 여성 노동력이 이런 수준의 가치를 획득하는 경우는 드물다. 그리고 남성처럼 여성이 가족임금을 위해 투쟁하는 경우는 더욱 드물다. 이와 반대로 수많은 여성 노동자조차 일반적으로 여성의 임금은 남성소득자의 임금을 보충하는 것이라고 간주한다. 따라서 이 같은 차별이 초래할 수 있는 남녀간의 이해 갈등을 충분히 인식하고, 그에 따른 정치적 실천상의 함의를 밝혀야 한다. 2. 성적 분업. 가족임금을 남성에게 할당하는 것은 성적 분업에 의해 정당화되는 경향이 있다. 전통적으로 성적 분업은 성들 간의 공평한 책임 분배를 달성하여 남녀가 서로 보완적이게 되도록 한다고 간주된다. 그러나 성적 분업은 단순한 기술적 분업 이상인데, 그것이 특권과 차별의 구조를 창출하는 지배와 종속 관계를 강요하는 데 기여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여성에게 가정 내·외부에서 긴밀하게 얽힌 영향을 미친다. 여성에게는 가정에서의 책임이라는 의무가 할당되는데, 이는 여성이 임금부문에서 노동할 때조차 마찬가지다. 그리고 여성이 임금부문에서 노동하더라도 그들 중 다수는 임금이 가장 형편없고 정적인 직업에 배치될 것이다. 가정 내부의 의무와 일할 만한 가치가 없는 고용의 결합은 가정 외부에서 일하는 여성에게 강력한 장애물이고, 가정 외부의 여성 노동을 억제할 수 있다. 따라서 노동시장 그 자체가 가내영역에서 여성의 지위와 가정 외부에서 여성의 존재 사이에 직접적인 고리를 형성하면서, 재생산에서 여성의 역할을 보충하고 강화한다. 따라서 사회에서 여성의 지위가 오로지 가내영역에서 여성의 지위에 의해 결정된다고 보는 것은 잘못이다. 노동시장에서 여성들의 취약한 위치는 가정에서 여성의 종속을 강화하는 효과를 낳는다. 3. 높은 실업률과 특히 높은 여성 실업률. [남녀가 집단적으로] 분리되지 않은 고용 상태에서 불황기 동안 흔히 여성 노동자가 가장 먼저 제거되다. 이는 주로 여성 노동자를 고용하는 기업이 불황기에 가장 살아남기 어렵다는 사실 때문에 종종 더 악화된다. 그러나 남녀 노동력이 함께 고용된 곳에서도 이런 위기 동안 남성보다는 여성이 먼저 해고되는 경향이 있다. 이는 가족소득이 가족의 '수장' 즉 남편의 경제활동에 의해 제공되어야 한다는 근거로 흔히 정당화된다. 달리 말하면 가족임금 형태가 일반화되지 않은 곳에서조차 '가족'임금을 호소함으로써 여성 실업을 부분적으로 정당화한다는 것이다. 4. 여성의 재생산 역할에 대다수 사회가 제시하는 프리미엄. 이는 남성과 동등한 자격으로 노동인구에 진입하는 여성에게 불리하게 작용한다. 단순한 생물학적 분업(육아)은 사회적 관계를 크게 제약하는 복합적 모형 안에 깊숙이 새겨지게 된다. 여성은 어린 시절부터 대중매체, 교육, 가족의 기대에 의해 결혼, 특히 결혼 안에서 어머니의 역할로 곧장 나아가게 된다. 더욱이 노동시장에서 여성의 열등한 지위를 결정하도록 기여하는 것은 '어머니의 보살핌'(mothering)에 관한 가설이며, 자연주의적이거나 본질주의적인 주장은 이를 지지한다. 즉 이러한 이데올로기는 물질적 효력를 지닌다. 여성들은 주부나 어머니, 기껏해야 '용돈'을 버는 파트타임 노동자가 되라는 요구를 받으며, 기술과 장래희망에 관해 여성이 받는 공식·비공식 교육은 일반적으로 이런 전망에 맞춰 있다. 이는 여성을 특정 직업에 할당하는 경향이 있는 성적 분업에 의해 강화된다. 여성에게 할당되는 직업은 그들이 지루하고 섬세하며 성가신 일을 견디는 '본성적인' 능력이 있다고 가정하면서 이런 능력을 활용하려는 목적으로 고안된다. 동시에 이런 직업은 남성들이 수행하는 유사한 작업보다 임금이 더 낮다. 이처럼 불평등한 상황이 발생하는 것은 부분적으로는 여성의 직업이 어머니라는 주된 역할에 비해 부차적인 것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며, 부분적으로는 많은 여성이 가정 내의 책임을 맡고 있는 한에서는 실제로 부차적이기 때문이다. 육아시설의 적절한 공급의 결여는 여성 대부분에게 선택의 요소를 제거한다. 이제 우리는 여성의 관습적 조건이 일반적으로 선진자본주의 국가에게 주는 어떤 효과들을 이익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기능주의적 논증이 제시하는 것처럼 그러한 효과가 모든 자본주의 사회구성체에서 항상 유지된다거나 반드시 이익을 주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가내영역으로 여성의 유폐는 어떤 상황에서는 유익할 수 있지만, 다른 상황에서는 그렇지 않다. 급속한 [자본]축적기나 전시처럼 노동부족이 심각할 때, 국가는 여성 임금노동자를 충분히 시장에 풀어놓기 위해 가사노동을 사회화하도록 간섭하라는 요구를 받을 수 있다. 또 하나 명심해야 할 것은 자본의 '일반 이해'에 충실한 것이 특정한 자본에게는 불리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일정한 사회구성체에서 국가 정책은 여성의 노동력 진입을 억제하지만, 어떤 자본의 생존은 여성이 제공하는 값싼 노동력에 의존할 수도 있다. 가사노동 논쟁이 올바르게 강조했듯이 가족은 소비의 단위지만, 단지 그것만은 아니다. 또한 그것은 노동력의 재생산에 필요한 재화와 용역이란 형태로 사용가치를 생산하는 장소이기도 하다. 이 같은 재생산 노동이 모든 사회에서 필수적이지만 그 장소가 반드시 가족은 아니고, 가족 외부의 행위자가 재생산 노동을 수행할 수도 있다. 자본주의에서 노동력의 일상적 재생산에 필수적인 재화와 용역의 다수는 시장이나 국가기관을 통해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재생산에 대한 가내영역의 기여는 여전히 상당히 중요하며, 일반적으로 두 가지 형태의 활동을 수반한다. 하나는 자본에게 가장 덜 중요한 활동으로, 현존하는 임금노동자의 일상적 요구를 돌보는 것을 포함한다. 또 하나는 미래의 생산자, 즉 아이의 요구를 돌보는 것이다. 이는 어떤 측면에서 보면 임금소득자를 위한 것과 유사한 일을 포함한다. 그러나 그것은 추가적으로 더 많은 노동과 포괄적인 책임을 포함하는데, 특히 대개 여성이 떠맡는 책임인 유아가 있을 때 더욱 그렇다. 다른 측면에서 보면 다음 세대 생산자의 재생산은 기초 교육을 수반한다. 즉 그것은 아이들이 결국 성적·계급적으로 서로 다른 특성을 계발하도록 '사회화'하는 것이며, 이는 그들이 노동시장 안팎에서 차지하게 될 위치와 관련을 맺는다. 여기서 여성의 노동은 교육기관과 같은 다른 행위자들을 보충하는 역할을 맡지만, 여전히 상당한 중요하다. 이 두 가지 재생산 활동(구체적 형태로서 가사노동와 육아) 중에서 여성을 가장 곤경에 빠뜨리는 물질적 관계를 이루며 자본주의 국가에게 가장 유익한 것은 육아 노동이다. 가사노동 부담은 최소치로 축소될 잠재성이 있고 가족의 성인 구성원들 사이에 균등화될 수 있다. 하지만 육아에 관한 해결책은 최소한 적절한 육아기관의 공급을 통한 육아노동의 사회화를 포함하는 중대한 사회적 개조를 요구한다. 따라서 가사노동과 달리 육아에 관한 해결책에는 주요 자원의 할당과 국가나 다른 조직기관의 책임이 필요하다. 국가비용은 의심할 여지없이 자본주의 사회가 육아시설의 제공을 거부하고자 했던 이유 중 하나지만, 이것만이 유일한 이유는 아니다. 높은 실업률이 널리 번지고 있고 있는 선진 자본주의의 조건에서 노동시장은 여성을 수용할 만한 충분한 일자리를 제공하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급진적인 개입주의 국가를 향한 변화가 없다면, 여성을 가내영역에서 해방하는 데 기여할 수 있는 조건을 창출하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문제로 남는다. 이런 의미에서 '가족임금'과 '주부 증후군'은 높은 실업률, 특히 높은 여성 실업률을 은폐하고 일정한 방법으로 그것을 정당화하도록 돕는다. 여성들은 산업예비군의 고유한 층을 구성하는 것으로 간주될 수 있다.18) 여성은 전시나 급격한 축적기에는 [노동시장으로] 불려나오지만, 만일 이런 직업들이 축소되거나 남성들이 되돌아온다면 가족 안의 그들의 '위치'로 되돌아간다. 이런 '위치'가 존재하고, 여성들이 '본성적으로' 이런 위치로 돌아가려는 성향이 있다는 가정 때문에 여성의 실업은 정치·사회적인 문제가 될 잠재성이 적다. 그리고 여성의 실업은 자본주의 국가가 육아 서비스에 최소의 비용을 제공하도록 유용하게 기능한다. 그러나 이것은 여성 종속의 '원인'이라거나 어떤 단순한 의미에서든 자본주의에 기능적이라고 간주되어서는 안 된다. 이는 양날의 칼이기 때문이다. 엄격히 말해 자본의 경제적 이해는 가능한 한 많은 노동자들이 프롤레타리아가 되는 것이다. 이는 노동자가 대량으로 생산에 진입함으로써 자본이 잉여가치양의 증대와 노동력 가치의 하락이라는 이중적 이득을 획득할 수 있게 한다. 따라서 가정에서 여성들의 지위는 일정한 방식으로 어떤 자본주의 국가에게 이득을 주지만, 모순적인 효과를 낳는다. 자본에게는 이런 두 측면에 더하여 세 번째 이익이 있다. 즉 값싼 노동력이 필요한 자본 부문에게나, [자본]축적기 동안 그것을 공급하는 것이다. 남성의 노동력 가치는 가족의 재생산 비용을 포함하는 수준에서 확립될 수 있다. 하지만 여성이 거의 존재하지 않고 차별이 없는 직업이나 노동력의 여성화가 노동력가치를 떨어뜨리지 않은 드문 경우를 제외한다면, 여성이 이런 수준의 노동력 가치를 확보하는 경우는 드물다. 따라서 성적 분업은 임금과 노동 조건뿐만 아니라 직업적 성공을 위한 기회에서도 차별을 결정한다. 이는 다음과 같은 사실에 의해 정당화된다. a) 여성의 노동은 재생산에서 역할에 비해 부차적인 것으로 간주된다. b) 여성의 노동은 특권적인 남성 소득에 종속된 것으로 간주된다. 저임금노동, 파트타임 노동, 출장 노동이라는 현상은 어떤 자본주의 기업에게는 큰 이익을 준다. 이런 현상은 여성의 모순적 위치 때문에 존재한다. 즉 여성은 생산과 재생산 영역 사이에 붙잡혀 있으며, 또한 다른 수입에 의존하는 관계 안에 있다는 가정이 통용되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이 같은 착취 형태에 맞선 성공적인 조직화의 어려움은 여성의 완전한 평등에 대해 남성이 지배하는 노동조합운동의 수동성, 심지어 저항과 결합된다.19) 이러한 어려움은 진보적 입법이 여성 노동자들에 대한 최악의 차별적 관습 일부를 제거하도록 입안되었지만 이런 관습이 흔히 변화된 형태로 지속된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따라서 여성의 종속은 사회구성체의 상이한 수준을 통해 매개되고, 서로 구별되는 수많은 관계 안에 깊이 새겨져 있다. 그것은 단순한 인과관계로 환원되지 않으며, 분명 가사노동의 문제만으로 환원될 수 없다. 여성의 종속을 끝내기 위해서는 어떤 방법이 필요한가? 가내영역과 공적영역이라는 두 개의 주요 전선에서 투쟁해야 하며, 지금 투쟁하고 있다. 그 투쟁은 가정 내부의 억압 구조를 공격하고 가정 외부의 차별적 장벽을 제거하고 있다. 양 영역에서 투쟁은 특히 가내영역과 공적영역의 결합을 보여줌으로써, 다른 무엇보다도 성적 분업과 그 사회적 효과에 맞서는 것을 의미한다. 여성이 고용과 정치에 참여하도록 촉구하는 정통 사회주의와 현존하는 대부분의 사회주의 국가의 입장은 오직 외적 전선에만 집중하고 가정 내부의 관계를 평등의 원리에 입각해 개조하자는 동시적 요구를 무시하기 때문에 부적합하다. 가정 내부에서 평등화가 발생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유형의 수단이 필요하다. 가사노동 부담의 평등화는 아이가 없는 가족에서는 충분히 이뤄질 수 있으며, 이와 더불어 아이가 있는 경우에는 전통적인 가사노동 영역인 이 [육아]부분을 사회화하는 것이 필요하다. 작업장 내·외부에 적절한 육아시설을 공급하는 것은 가장 긴급하고, 명백하며 본질적인 요소다. 나아가 더 크게 필요한 것은 노동시간의 재조직화와 주간 노동시간의 단축을 통해 부모들이 원할 경우 육아 책임을 공유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최근 기술혁신은 자본주의에서 최초로 이를 현실적인 요구가 되게 한다. 물론 여성 차별을 제거하려는 공적부문의 변화를 동반하지 않는다면 이런 수단의 성공은 제한될 것이다. 가내영역의 평등이 필요로 하는 것은 여성이 남성과 평등한 조건에서 노동할 수 있는 것이며, 이는 여성의 고용기회가 확대되고 특권적인 남성임금에 대한 여성 의존이 해소된 결과일 것이다. <끝> [각주] 1) 이 논문의 첫 번째 초안은 1975년 6월 Anglo-French SSRC Women's Group에서 발표되었다. 여기에 도움을 주신 모든 분, 특히 소중한 논평을 해준 해롤드 볼페(Harold Wolpe), 바바라 테일러(Barbara Taylor), 헬렌 크롤리(Helen Crowley)에게 감사를 표한다.본문으로 2) 이러한 '역사'에 대한 설명으로는 Chris Middleton, 'Sexual Inequality and Stratification Theory' in The Sociological Analysis of Class Structure (ed) F. Parkin, London, 1975를 보라. 본문으로 3) 따라서 양자의 분석은 서로 다른 결론을 내리지만, 여성 정치를 토론할 때 경제 환원주의라는 경향을 공유한다. 본문으로 4) [대표적인 마르크스주의 이론인] Harrison 'The Political Economy of Housework' Bulletin of the Conference of Socialist Economists, Winter 1973. [대표적인 비(非)마르크스주의 이론인] C. Delphy, The Main Enemy, Women's Research and Resource Center 1976. 지난 몇 년 동안 가내 생산양식이라는 관념에 대한 관심이 되살아났다. Union of Radical Political Economy에서 여성을 다루는 특집호(Vol.9, No.3, 1997)의 편집자 글은 해리슨을 따라 가사노동을 예속적 생산양식(client mode of production)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입장은 여성의 종속에 대한 최근 회의에 제출된 논문에서도 채택되었다. 본문으로 5) 바렛(M. Barrett)과 맥킨토시(M. McIntosh)는 델피를 날카롭게 비판하면서 '여성이 결혼하지 않는 단순한 방책으로 종속에서 벗어날 수 있냐'고 묻는다. 'Towards a Materialist Feminism', Feminist Review, No. 1, January, 1979. 본문으로 6) 예를 들어 다음을 보라. J. Gardiner et al, 'Women's Domestic Labour', BCSE, Vol. IV, No. 2., S; Himmelweit and S. Mohun 'Domestic Labour and Capital', Cambridge Journal of Economics, Vol. 1, 1977; P. Smith 'Domestic Labour and Marx's Theory of Value' in A. Kuhn and A. M. Wolpe (eds) Towards A Materialist Feminism, London, 1978 (국역: {여성과 생산양식}, 한겨레, 1986). 본문으로 7) P. Brown 'Marx's Capital and Privatised Labour under Capitalism', MA Dissertation Essex University 1977. 본문으로 8) 동일한 방식으로 임금 역시 다양한 요인에 따라 결정된다. 그리고 비록 이론적으로 임금이 노동력을 그 가치대로 구매하는 것을 의미하더라도, 임금과 노동력의 가치 사이의 역사적인 관계는 노동자의 여러 범주 사이의 변화와 편차의 영향을 받는다. 본문으로 9) 나의 이전 논문은 이 문제를 매우 상세히 검토했다. 'Androcentrism in Marxist Anthropology' in Critique of Anthropology No 9/10, November 1977.본문으로 10) 이는 E. Balibar and L. Althusser, Reading Capital NLB, London 1975에서 발전되었다.본문으로 11) 비노동자 개념은 그릇된 인상을 줄 수 있다. 왜냐하면 그것이 착취계급이 생산과정에 참여하지 않는다고 함축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이 생산과정에 참여하는지 여부는(그들 중 다수는 여기에 참여한다) 그들이 해당 생산양식에서 잉여노동을 영유하는 문제와 아무 관련도 없다.본문으로 12) L. Vogel 'The Earthly Family' and I. Gerstein 'Domestic Work and Capitalism' in Radical America, Vol. 7, Nos 4/5 1973.본문으로 13) 이 정식화는 W. Seccombe, 'The Housewife and her labour under capitalism', NLR, No 83, January 1974에서 볼 수 있다. 밈멜바이트와 모훈(op. cit)은 가사노동을 자본주의 생산양식 안으로 통합해야 한다고 주장할 때 비슷한 견해를 표출한다.본문으로 14) 생산양식은 일정한 사회구성체를 지배하는 기본적인 사회적·경제적 관계를 명확히 정의하는 추상적인 분석 개념이고, 사회구성체는 일정한 사회에 조응하는 좀 더 광범위한 실체로 인식된다. 사회구성체는 하나 이상의 생산양식을 포함할 수 있다.본문으로 15) Karl Marx, Capital VolⅠ, pp. 571-573.본문으로 16) J. Gardiner 'Women's Domestic Labour'와 Coulson et al 'The Housewife and her labour under capitalism' NLR 89, 1975는 여성의 임금노동 진입이 지닌 중요성을 강조함으로써 이런 한계를 벗어난다.본문으로 17) 특히 M. MaIintosh 'The State and the Oppression of Women' In A. Kuhn and A. M. Wolpe (eds), Feminism and Materialism, London 1978을 보라. 본문으로 18) 이러한 주장을 정교하게 제시한 것으로는 V. Beechey, 'Female Wage Labour', in Capital and Class No 3 1977을 보라.본문으로 19) 제인 험프리스는 역사적 증거에 입각하여 여성의 고용 진입에 대한 노동조합의 저항이 자본에 대한 노동공급을 제한함으로써 가족임금을 유지하려는 욕망에서 유래한 것으로 볼 수 있다고 주장했다. 여성의 고용 진입은 남성의 노동력 가치를 떨어뜨릴 뿐만 아니라, 일반적으로 노동자계급 생계표준을 낮출 우려가 있다. 이는 문제가 있지만 흥미로운 주장이다. 노동자계급의 어떤 남성들에게는 핵가족의 유지가 이해관계가 걸린 문제일 수 있지만, 이로부터 여성을 고용 외부에 두는 것이 전체 노동자계급에게 반드시 유익하다는 결론이 도출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 같은 견해는 즉 노동자계급 남성과 여성의 이해가 모든 쟁점에 관해 동일하다고 가정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가정은 더 설득력 있게 입증되어야만 한다. J. Humphries, 'Class Struggle and the Persistence of the Working Class Family', Cambridge Journal of Economics, Vol 1 No. 3, 1977. 본문으로

  • 2005-12-16

    가사노동 논쟁을 넘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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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번역>책속의책 번역팀 [편집자주] 이번 호부터 '책 속의 책'은 페미니즘 기획을 시작한다. 신자유주의 시대에 여성운동의 새로운 전망을 토론하는 데 필요한 자료로 구성될 것이다. '가사와 직장의 양립'으로 요약되는 정부의 여성정책과 주류 여성운동의 방향성은 '성주류화' 전략에서 맞닿는다. 이런 전략은 저임금, 장시간 불안정 노동과 빈곤에 내몰린 대다수 여성들의 현실을 정확하게 인식하지 못하고, 따라서 여성의 권리와 해방과는 거리가 멀다. 그러므로 새로운 여성운동의 전망은 현재 여성들이 처한 현실의 문제를 과학적으로 적합하게 인식하는 것에서 시작될 수 있다. 이를 위해 '책 속의 책'은 세계화, 빈곤, 재생산 노동, 캐어(care) 노동, 여성의 성욕, 성매매 등의 쟁점에 대해 검토할 것이다. 이런 기획의 첫 번째로 사회주의 페미니스트들의 가사노동 논쟁을 정리한 논문을 싣는다. 이 글은 여성의 가사노동을 자본주의와 구별되는 '가내 생산양식' 개념으로 이론화하려는 시도의 문제점을 검토하고, 여성 억압에 대한 이론적 초점을 가사노동이나 순전히 경제적 분석에 맞추는 것은 협소한 분석과 그릇된 정치적 결론을 초래한다고 비판한다. 그 대신 성적 분업, 재생산, 노동시장, 국가의 역할 등 사회적 관계의 복합적인 결정과정에 대한 분석과 정치적 실천을 촉구한다. 그리고 여성 종속에 대한 이론적 작업은 정신분석학, 성욕, 언어와 이데올로기 영역에 대한 고찰로 확대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번역대본은 다음과 같다. Maxine Molyneux, Beyond the Domestic Labour Debate, New Left Review, 116, July-August 1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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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의 가사노동 논쟁에서 최초의 글이 나온 지 거의 10년이 지났고, 그 후로 가사노동을 주제로 삼은 논문이 영국과 미국의 사회주의 출판부에서만 50여 편이 넘게 발표되었다.1) 가사노동에 대한 관심은 페미니스트와 마르크스주의자를 비롯해 다양한 방향에서 생겨났다. 하지만 이처럼 방향이 다양하더라도 그들은 모두 하나의 기초적인 가설을 공유했다. 즉 과거에는 무시되었던 이 주제를 연구함으로써 여성의 종속을 이해하고, 이것의 폐지에 적합한 정치를 공식화하도록 기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문헌의 두 가지 주요한 관심사는 다음과 같다. 첫 번째 관심사는 억압, 예속, 착취로 다양하게 묘사되는 여성의 종속이 종종 '경제외적'(extra-economic)인 것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물질적 토대에 기초하며 자본주의 사회의 정치경제와 연결되어 있다고 설명하는 것이다. 이러한 접근법은 가사노동이 노동력의 재생산에 필수적인 노동을 제공함으로써 자본주의 체계의 유지에 경제적으로 기여한다고 설명하고자 했다. 이런 접근법은 자본주의 발전이 어느 정도까지 현재 가내체계, 특히 '가사노동'을 창조하는 데 얼마나 기여했냐는 문제를 제기했다.2) 이러한 관점은 흔히 과거에는 자본주의 경제의 일반적이며 전통적이고 공적인 특징을 분석하는 데 제한되었던 개념들을 가사노동 영역에 적용하려는 시도를 동반했다. 두 번째는 더 직접적인 정치적 관심사로서, 사회주의 투쟁에서 여성의 현실적이며 잠재적인 역할을 규명하는 것이다. 이런 문제에 대한 분석에서는 비관적인 견해와 좀 더 긍정적인 견해가 엇갈렸다. 비관적인 견해는 주부의 정치적 행동에서 보이는 비활동적이고 보수적인 역할을 강조한다. 긍정적인 견해는 주부이든 임금소득자이든 여성의 정치적 잠재력을 강조한다.3) 이러한 좀 더 낙관적인 관점에 따르면 여성과 프롤레타리아는 자본에 의한 일반적인 착취를 공유하며 따라서 착취의 전복이라는 공통의 객관적인 이해를 공유한다. 이러한 접근법들은 여성의 종속에 관한 토론에 중요한 공헌을 했지만, 이 글에서 나는 지금까지 가사노동에 관해 생산된 이론적 작업은 스스로 규명하고자 했던 문제들을 적절히 다루지 못했다고 주장할 것이다. 특히 두 가지 관심사를 분석적으로 다룰 수 있는 여성에 관한 정치경제이론을 생산하려는 시도는 다음과 같은 한계를 하나 이상 드러냈다. 첫째, 경제 환원주의 경향, 둘째, 자본주의와 가사노동의 관계를 구성할 때 기능주의적 논증 양식에 의존한다는 점, 셋째, 가족(familial)/가계(household)라는 더 넓은 맥락을 이론화하지 않고 가내영역에서 수행되는 노동에만 협소하게 초점을 맞춘다는 점. 세 번째 한계는 주부가 수행하는 노동이 남성 임금노동자에게 중요하다는 점을 지나치게 강조하며, 노동자의 다음 세대를 위한 양육 노동을 사실상 무시하는 결과를 낳았다. 따라서 논쟁은 가사노동에서 가장 덜 중요할 수도 있는 한 측면만을 심각하게 고려하고, 문헌에서 가끔 나타나는 '노동력을 재생산하는' 주부에 대한 언급도 이러한 결핍을 극복하지 못한다. 가사노동에 대한 재평가는 주요한 두 부분으로 구성된다. 첫 번째는 논쟁에서 특별하고 도전적인 공헌을 했던 '가내 생산양식'(domestic mode of production) 명제를 평가하는 것이다. 여기서는 서로 대비되는 두 이론, 즉 마르크스주의 이론과 비(非)마르크스주의 이론이 사용한 생산양식 개념을 비판한다.4) 이러한 이론에 특유하면서도, 어떤 경우에는 모든 토론에 공통된 잘못된 개념과 가설을 검토한다. 특히 가사노동은 노동의 가치를 반드시 낮춘다는 공통의 가설에 질문을 제기한다. [이런 공통 가설] 대신에, 자본주의에서 생물학적 재생산의 주요 장소인 가내영역이 유지되기 위해서는 노동력의 가치가 가족의 재생산 비용을 보장하는 임금만큼 충분히 높아야 한다고 주장할 것이다. 이어서 두 번째 부분에서는 두 책이 제시하는 가사노동 명제의 기초를 이루는 다른 가설을 비판한다. 이 부분은 여성과 가내영역의 관계를 더 넓은 토대에서 개념화하면서 끝맺는다. 크리스틴 델피: 여성의 노동은 항상 무급이다 팜플렛, {가장 중요한 적}(The Main Enemy)은 1976년 영국에서 출판되었고, 지금까지 영국과 프랑스 여성운동으로부터 상당한 지지를 얻었다. 이 글에서 크리스틴 델피는 마르크스주의가 전통적으로 여성 억압은 계급투쟁에서 부차적으로 중요하다고 보고, 계급투쟁은 '오로지 자본이 프롤레타리아를 억압하는 것에서 발생한다고 정의하는' 방식을 비판했다. 문제의 뿌리는 마르크스주의가 생산과정에서 계급을 도출하는 것이다. 그녀는 이것이 '여성과 가정 내부의 (비(非)자본주의적인) 생산의 특수한 관계'를 무시한다고 주장한다. 델피에 따르면, 이러한 노동은 보통 가치가 없다고 오인되지만, 본질적인 의미에서 상품부문에 존재하는 가사노동의 사회화된 형태와 다르지 않다. 유일한 차이는 자동세탁소, 식당, 육아시설의 직원은 자신의 노동에 대해 임금을 지불 받지만 주부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따라서 무급으로 가사노동을 수행하는 기혼여성은 이러한 상황의 수혜자인 남편에 의해 착취당한다. 이것은 생산으로서 이해되는 가사노동에 기초해 발생하는 착취양식이며, 자율적인 가내 생산양식이라는 델피의 개념이 나온다. 이러한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해 그녀는 여성의 노동에 관련된 몇 가지 명제를 제출한다. (1) 가족에서 여성의 노동은 인정되지 않더라도, 핵심적으로 경제에 항상 기여한다. 역사적으로 항상 여성은 아무런 대가도 받지 못하면서 가사노동을 포함한 노동을 수행해왔다. 이는 가족이 생산단위인 경우, 예를 들어 소규모 농장, 소매 사업, 가내작업장에서 특히 분명하다. 지금도 프랑스에서는 백만 명의 여성이 '가족 보조원'(family aides), 즉 무급 노동자로 분류되며, 그들 중 대부분은 농업부문에 종사한다. (2) 산업화가 이뤄지고 생계농업이 쇠퇴한 결과로 여성의 노동은 더 이상 가족 단위 내에서 완전히 착취될 수 없었다. 따라서 일부 여성은 교환을 위한 생산에서 배제된 채 전업주부로 남았고 나머지 여성은 임금노동에 흡수되었다. 그러나 여성의 임금노동 진입은 두 가지 이유 때문에 그들의 전반적인 지위를 현저히 변경하지 않았다. 첫째, 모든 여성은 그들이 무엇을 하든 간에 계속 무급으로 가사노동을 수행했다. 둘째, 여성이 임금노동에 진입하더라도 남편이 그들의 임금을 통제하곤 했고, 또 대부분의 경우 여성의 임금은 여성 스스로가 수행했던 서비스(예를 들어 육아와 세탁)를 지불하는 데 소비되곤 했다. 따라서 유일한 차이는 여성이 임금노동을 시작하기 전에는 생계의 대가로 가사노동을 했지만, 이제는 무급으로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임금노동을 하는 여성은 임금부문에서 생계를 유지하기 때문이다. (3) 이런 상황을 유지케 하는 것은 여성 대부분이 생애 어느 시점에 진입하게 되는 결혼 계약이다. 이런 공통의 계약상 지위가 여성 공통의 계급 조건의 토대다. 결혼을 통해 여성은 '자신의 노동을 통제할' 권리를 박탈당하고, 따라서 여성이 자신의 노동을 판매할 자유도 없다. 그리고 여성의 노동과 그 생산물에 대한 통제가 남편의 의지에 종속된다. 따라서 남성은 여성의 노동을 착취함으로써 계급적 압제자가 된다. 델피는 이러한 명제로부터 두 가지 주요한 이론적·정치적 결론을 이끌어낸다. 첫째, 그녀는 현대 사회에는 두 개의 생산양식이 있다고 주장한다. 하나는 자본주의 소유관계와 착취로 정의되는 산업적 생산양식이며 다른 하나는 가부장적/가족적 생산관계와 가부장의 착취(즉 남성에 의한 여성 착취)로 정의되는 가부장제 생산양식이다. 이 생산양식들은 서로 구별되며 자율적이다. 이는 자본주의 관계의 전복이 여성 억압의 폐지를 낳지 않는다는 사실로 입증된다. 나아가 델피는 가부장제 생산양식에서 여성은 자신의 직업이나 남편의 계급적 지위와 무관하게 남성에 의한 공통의 억압으로 인해 통일된 하나의 구별되는 계급을 구성한다고 주장한다. 그녀는 여성이 가부장제와 그것을 배태한 사회를 전복하기 위해 자율적으로 힘을 발휘해야 한다고 결론을 맺는다. 몇 가지 초기 문제 델피의 주장과 관찰의 일부는 일반적인 의미에서 진실이다. 가사노동은 중요하지만 그 활동은 전체적으로 과소 평가되며, 여성 억압의 중심 장소이자 원인으로 남아 있다. 그리고 계급적·문화적으로 상이한 남성들도 가정 내 여성의 노동에서 다소 명백한 방식으로 이득을 얻는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그녀가 자신의 주장을 입증하고 정치적 결론을 발전시키기 위해 구성한 이론 체계는 여러 면에서 부적합하다. 델피의 결론 중 일부는 해리슨의 결론과 비슷하기 때문에 다음절에서 그 내용을 함께 검토할 것이다. 여기서는 델피에게 특유한 접근법에 한정해서 몇 가지 문제들을 다룰 것이다. 우선 여성의 종속에 관한 델피의 이론은 그녀가 결혼 내부에서 일어난다고 규정한 착취, 남성이 여성의 잉여노동을 영유하는 착취에 기초를 둔다. 하지만 이것이 여성 억압의 이론으로서 얼마나 적합한가? 모든 여성이 결혼 관계에 포함되는 것은 아니며, 또 모든 결혼 계약과 결혼 내부의 실천이 동일한 것도 아니다.5) 반대로 다양한 사회에서 여성들간에는 뚜렷한 차이가 있을 수 있으며, 여성과 남성 모두 매우 상이한 노동의무를 지게 된다. 여성 노동의 영유를 다루는 델피의 주장의 대부분은 프랑스 여성이 농장, 가내작업장과 여타 가족기업에서 차지하는 지위에 관한 분석에 기초하며, 이것은 이런 형태의 여성 무급노동이 상대적으로 중요하지 않은 국가와 비교할 수 없다. 따라서 델피가 보편적으로 타당한 이론을 생산했다는 주장은 그녀가 취한 자료의 특수성과 이론의 경험주의적 도출을 고려함으로써 완화되어야 한다. 그녀가 취한 접근법의 더 큰 문제는 여성의 종속을 오직 결혼 관계로 환원함으로써 모성과 노동시장에서 여성 위치의 억압적 측면을 고려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또한 그녀는 결혼 내부에서 노동의 영유에만 협소하게 초점을 맞춤으로써 여성 억압의 문제를 순전히 경제적 문제로 환원한다. 따라서 도대체 왜 결혼이 생겨나는지 이해하는 데 결정적인 이데올로기적·심리적 차원을 고려하지 못한다. 델피의 논문에서 지적해야 할 또 다른 중요한 문제는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비판적인 태도다. 왜냐하면 그녀의 논문은 본질적으로 마르크스주의에 반대하는 논쟁으로 창안된 것이지만, 그녀가 공격하는 마르크스주의 이론은 다소 지나치게 단순화되고 만화처럼 묘사된 판본이기 때문이다. 이는 부분적으로는 {가장 중요한 적}이 1970년에 맨 처음 저술된 사실에서 기인한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 이론의 발전과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 문헌의 개화에 비추어 보면 이제 그녀의 책은 최소한 개정될 필요가 있다. 그녀가 매우 호되게 비난한 통속적인 마르크스주의는 일반적으로 마르크스주의자뿐만 아니라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스트들도 버린 것이지만, 여전히 델피는 마르크스주의 전통의 좀 더 최근 작업보다는 통속적인 마르크스주의를 다루고 있다. 이 때문에 델피는 마르크스주의 이론을 자신의 방식대로 사용한다. 그녀는 마르크스주의가 여성운동을 '가로막는' 장애물이라고 공격하면서도, 비록 주요한 수정을 가할 목적이 있지만 마르크스주의 언어와 개념을 흡수하려고 시도한다. 예를 들어 그녀는 '생산관계', '생산양식', '노동력', '교환가치'와 같은 용어를 사용하지만, 그때마다 이러한 용어를 전통적인 정의와는 매우 다른 경험주의적이며 상식적인 구성물로 변형한다. 일례로 생산관계는 '생계를 유지하는 방식'으로 정의된다. 왜 다른 것이 아니라 이런 개념을 사용해야 하는지, 또는 왜 이런 개념을 본질적으로 다시 정의하는 게 필요한지에 대한 어떠한 이론적 설명도 제시되지 않는다. 델피는 자신이 마르크스주의자라고 주장하지 않으며, 따라서 그녀가 마르크스주의 개념을 사용할 때 생기는 수많은 문제를 열거하는 것은 아마도 부당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가 개념을 수정하는 것은 아무런 의도가 없는 게 아니라 그녀의 주장을 위해 필요한 것이다. 즉, 그녀는 마르크스주의의 몇몇 기본 개념(착취, 생산양식, 가치, 생산)을 다시 공식화함으로써 분리주의적인 정치적 결론을 발전시킨다. 이러한 수정이 없다면 그녀는 남성이 [여성] 계급의 가장 중요한 적이라는 그녀의 주요 명제를 유지할 수 없다. 다시 말해 마르크스주의적 정의를 고수했다면 그녀의 주장은 붕괴되거나 본질적인 변화를 겪었을 것이다. 해리슨: 가사노동, '예속적 생산양식' 존 해리슨은 {가사노동의 정치경제학}(The Political Economy of Housework)에서 세계 자본주의 체계와 자본주의 생산양식을 구별하며, 전체로서 사회구성체와 그 내부의 생산양식을 구분한다. 그는 하나의 주어진 사회구성체 내부에는 지배적이며 구성적인 생산양식과 구별되는 종속적인 생산양식이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이러한 종속적인 생산양식이 이행기의 현상이라고 지적한다. 즉 이행기에는 과거의 유산이 잔존할 수 있는데, 그는 이것을 '퇴화'(vestigial) 생산양식이라고 부른다. 또한 이 시기에 미래를 예견하는 것이 등장하는데, 그는 이것을 '맹아'(foetal) 생산양식이라고 부른다. 그는 여기에 또 다른 종류의 생산양식, 즉 '예속적'(client) 생산양식을 추가한다. 이것은 지배적이지도 않으며 과거의 유산도, 미래의 맹아도 아니다. '예속적 생산양식은 경제적·사회적 체계 내부에서 특정 기능을 충족시키기 위해 지배적인 생산양식이 창조하거나 포섭한 것이다. 이것의 생존은 지배적인 생산양식의 지속적 존재 여부에 달려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지배적인 생산양식의 재생산과 결부되어 있기 때문이다.' 해리슨은 주변부 사회구성체에서 특정한 비자본주의 부문이 이런 범주에 속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사노동과 국가 활동의 많은 부문'이 이 범주에 속한다고 말한다. '가사노동 생산양식'은 여러 점에서 소상품생산과 비슷하다. 양자 모두 분업이 없고, 노동의 사회화 수준이 낮으며, 생산자가 개인적으로 노동한다는 특징이 있다. 그러나 가사노동은 소상품생산과 자본주의와 달리 교환을 위한 사용가치를 생산하지 않는다. 게다가 가사노동은 노동자의 재생산을 위한 사용가치를 제공하지만, 벤스톤(Margaret Benston)과 다른 이들이 주장했듯이 직접적으로 노동력 상품을 생산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가사노동 생산양식의 기능은 우선 임금노동자의 생계에 필요한 사용가치를 제공함으로써 그들의 노동력을 재생산하는 데 기여하는 것이다. 그러나 해리슨은 아내가 자신의 노동의 대가로 오직 생계를 보장받을 뿐이지만, 그녀는 자본주의 부문의 영여가치로 나타나는 잉여노동에 기여한다고 주장한다. '이처럼 가사노동의 잉여노동이 자본주의 부문으로 이전되는 메커니즘은 자본가가 노동력 가치에 미달하는 임금을 지불하는 것이다.' 주부가 자신의 노동을 통해 노동력의 가치를 떨어뜨리기 때문에 이런 메커니즘이 가능하다. 주부는 서비스를 제공하는데, 이런 서비스를 시장에서 구매한다면 생계비용이 늘어나고 따라서 결국에는 임금에도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다. 가사노동 양식의 존재는 자본주의에 다른 영향을 미치지만, 이것은 양면적이다. 한편으로 그것은 여성을 노동인구 외부에 둠으로써 협상에서 남성 노동자의 지위를 개선한다.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여성 산업예비군을 창조하여 협상력을 잠재적으로 약화시킬 수 있다. 해리슨은 여성의 노동이 자본주의 생산양식 외부에서 수행되므로 여성은 분리된 계급을 형성한다고 주장하며 결론을 맺는다. 따라서 주부이자 동시에 임금소득자인 여성은 두 계급에 속한다. 그는 억압의 두 형태, 즉 자본주의의 억압과 가족의 억압에 반대하는 투쟁을 촉구한다. 해리슨은 델피에 비해서 덜 독단적이고 더 정교한 주장을 제기하지만, 그의 분석은 더 큰 이론적 문제를 야기하며, 여기서 검토가 필요한 한 가지 특유한 영역의 문제가 있다. 자본주의와 가사노동의 관계에 대한 그의 개념화가 그것이다. 이 문제는 다른 곳에서 널리 토론되었으므로 여기서는 간단히 다루겠다.6) 가내 잉여노동이 자본주의 영역으로 이전되며, 잉여가치로 나타난다는 해리슨의 주장이 잘못된 전제에 기초한 것이다. 그는 가내영역의 구체노동과 상품생산의 추상노동 시간이 등가이므로 비교 가능하다고 간주한다. 그러나 가사노동은 노동의 일반적인 균등화에 영향을 받지 않으므로 양자를 비교할 수 없다. 따라서 가치법칙을 다시 정의하지 않는다면, 두 영역에서 잉여노동 시간의 이전을 계산할 수 있는 원리가 없다. 가사노동이 비자본주의적라는 해리슨의 지적은 문제를 더 어렵게 한다. 한 저자가 말했듯이 '가치형태를 취하지 않는 비자본주의 양식의 구체노동이 어떻게 자본주의 생산과정의 물질적 토대도 없이 자본주의 부문의 부가 가치로 나타날 수 있는가?'7) 따라서 가사노동과 자본주의의 관계에 대한 해리슨의 이론은 그 핵심부터 금이 가기 시작한다. 가사노동과 노동력의 가치 이런 문제들 외에도, 가사노동이 노동력의 일상적 재생산에 필요한 노동을 ('무급으로') 제공함으로써 노동력의 가치를 떨어뜨린다는 널리 수용되는 명제가 남아 있다. 이 명제에 따르면 무급 가사노동이 없다면 이 노동은 인상된 임금으로 시장에서 구매되어야 한다. 해리슨의 분석은 이러한 전제에 의존하며, 그의 주장은 가사노동 논쟁 전반에서 상당한 지지를 얻었다. 이제 가사노동에서 나오는 '보조금'은 자본주의가 가정 내 여성의 종속적인 지위를 유지하려는 주요한 동기로 간주된다. 이러한 문제제기는 틀림없이 정당한데, 이것이 노동력의 가치를 결정하는 문제를 다루려는 시도를 대표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장을 제시하는 방식과 그것의 기초가 되는 몇 가지 가설 때문에 잘못된 결론에 도달한다. 이는 특히 반드시 구별해야 할 두 요소가 섞여있기 때문이다. 하나는 가사노동이 반드시 노동력의 가치를 떨어뜨리느냐는 질문이다. 다른 하나는 이 때문에 자본주의가 가정 내 여성의 종속적인 지위를 유지하는 데 이해가 걸려있다는 주장이 설득력이 있냐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정당한 것으로 수용되지만, 면밀한 연구가 필요하다. 노동력의 가치는 궁극적으로 노동력의 재생산에 필요한 '상품 묶음'의 가치에 의해 결정된다. 그러나 그것은 이런 경제적 계산만으로 환원되지 않는데 왜냐하면 똑같이 중요한 다른 요인들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가사노동에 대한 모든 문헌은 일반적 용어로 노동력의 가치를 검토할 수 있으며, 가사노동은 노동력의 가치와 불변의 관계를 맺는다고 가정한다. 하지만 사실 노동력의 가치는 오직 특정한 사회와 역사적 시기에 따라 결정될 수 있을 뿐이다. 노동력의 가치는 다양한 문화적·정치적 조건에 따라 결정되며, 그 조건에 따라 상이한 계층과 범주의 노동자계급의 생계표준이 결정된다. 노동력의 가치는 상이한 범주의 노동자(숙련/비숙련, 흑인/백인, 남성/여성)에 따라 다를 뿐만 아니라, 노동력의 공급이나 계급투쟁의 수준과 같이 특정 시기에 협상에서 노동자의 위치에 영향을 끼치는 조건에 따라 다르다. 또한 노동력의 가치는 일반적인 축적 수준이나 축적률, 특정 기업이나 생산부문의 이윤 수준, 1부문과 2부문의 관계, 일반적 기술수준과 같은 다른 요인들의 영향을 받는다.8) 이런 다양한 결정 요인들 중에서 가사노동이 노동력의 가치를 결정하는 데 기여하는 바는 상대적으로 미미하다. 오히려 가사노동이 그것의 결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선험적으로 가정할 수 없다. 가사노동과 노동력의 가치의 관계는 항상 역사적/문화적 변화에 따라 결정된다. 선진 자본주의 국가에서 노동자 대부분의 노동력의 가치가 가사노동이 수행되는 곳, 즉 '가정'을 재생산하는 비용을 보장할 수 있는 수준으로 상승한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만약 일상적 재생산에 필요한 투입물의 시장가격이 높다면, 이데올로기적·문화적 동기가 결합되어 남성이든 여성이든 특정 양의 무급 가사노동(요리, 청소, 빨래)을 수행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가사노동이 노동력의 가치를 모든 노동 투입물이 상품화되는 것보다 낮은 수준으로 유지하는 데 도움을 준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을 공리로 간주될 수 없다. 노동자가 가사노동을 수행하는 것이 시장에서 필요한 것을 구매하는 것보다 비용이 더 적게 든다는 사실을 입증할 경험적 증거가 필요하다. 왜냐하면 이는 최소한의 조건, 즉 저렴한 서비스 시장이 없고, 소비할 때 변형 노동이 거의 또는 전혀 필요 없는 생필품을 소비할 수 없는 조건에서만 성립하기 때문이다. 이런 조건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할 수는 없다. 제3세계는 말할 것도 없고, 선진 자본주의 국가에서도 노동자는 재생산의 욕구를 시장에 상당히 의존하며, 이것이 더 높은 임금을 받는 노동자에게만 들어맞는 것도 아니다. 반대로 노동력의 가치가 가장 낮은 곳에서 흔히 가사노동의 투입이 최소에 머무른다. 여성 가사노동의 이득을 보지 못한 채 노동력이 보통 하루 단위로 재생산되는 독신 노동자, 이주노동자는 항상 평균 이하의 임금을 받는다. 필수적인 살림을 마련할 여유나 의지가 있더라도, 이런 범주의 노동자는 가사노동을 직접 수행하기 어려운 조건(빈민가, 합숙소, 판자집)에서 살고 있다. 따라서 그들은 시장의 서비스와 식품에 의존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상황에서 체결되는 임금협상은 가사노동의 상당한 투입을 전제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기성제품을 구매하는 대신에 노동자가 직접 가정에서 노동한다면 과연 노동력의 가치가 떨어질지는 최소한 열린 문제다. 예를 들어 사적인 소비와 한 가정을 꾸리는 데 필요한 요리와 청소를 가능케 하는 조건을 확보하는 것은 더 높은 노동력 가치에 의존할 수도 있다. 달리 말해 노동력의 가치는 역사적·문화적 변화에 따라 결정되므로 가사노동과 노동력의 가치 사이의 관계가 불변이라고 가정할 수 없다. 이로써 자본주의에서 가사노동이 중요하다는 어떠한 일반적인 주장도 미심쩍게 되며, 가사노동이 어떤 의미에서는 자본주의에 본질적이라는 주장도 침식되고 만다. 두 번째 전통적인 명제는 가사노동이 노동력 가치에 공헌하는 바가 가정 내에서 여성의 지위를 설명하는 데 도움을 준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 역시 노동력의 가치에 관한 지나치게 정적이며 몰역사적인 개념화를 전제로 한다. 많은 저자들처럼 노동력의 가치가 반드시 노동자계급 가족의 재생산 비용을 포함한다고 가정해서는 안 된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그것은 다양한 요인들에 따라 결정되기 때문이다. 최소한, 노동력의 가치는 반드시 임금소득자의 노동력 재생산에 필요한 상품 묶음의 가치와 등가여야 한다. 그러나 선진 자본주의 국가에서 어떤 부문에 속한 노동자의 노동력 가치는 의존적인 가족에 필요한 비용을 포함하는 수준에서 결정되었고 이것은 이른바 '가족임금'이라는 현상을 낳았다. 가족임금은 노동자계급 가족이 특정 생활수준을 유지하는 데 충분한 일인 임금이다. 동시에 상당수의 노동자들에게 노동력의 가치와 임금은 이러한 최저치 이하로 떨어지고 따라서 남성 임금이 가족 생계를 보장하지 않는다. 이러한 두 경우의 차이는 여성의 지위에 극히 중대한 의미가 있다. 만약 임금이 위에서 정의한 의미에서 가족임금이라면 기혼여성이 노동인구 밖에서 전업주부로 남는 것이 가능하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면 가족은 만족스러운 생활수준에서 가족을 재생산하기 위해 추가 소득을 확보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기혼여성의 공통 대응은 노동인구에 진입하는 것이다. 하지만 어떤 경우에도 가사노동의 수행 여부가 가정 내 여성의 지위를 설명할 수 없다. 이런 경우에 아마도 중요한 것은 남성 노동력의 가치가 가족임금 이하로 떨어졌고 노동시장에 진입할 수 없거나 진입할 의지가 없는 의존적인 주부가 가족임금을 보조하기 위해 노력을 배가한다는 사실일 것이다. 이것은 본질적으로 노동력의 가치를 떨어뜨리지 않으며 오히려 이미 주어진 상황에 대한 대응일 뿐이다. 하지만 다른 요인들이 불변이라면 이는 노동력의 가치를 그 수준으로 유지시킬 수 있을지도 모른다. 따라서 어떤 상황에서 가사노동이 노동력의 가치를 떨어뜨릴 수 있다는 사실을 수용더라도, 이것이 가정 내 여성의 지위를 설명할 수 없다. 주장이 옳고 가사노동이 자본에게 유익하다고 해도, 왜 일반적으로 여성이 가사노동을 하는지도 반드시 설명되어야 한다. 물론 현실에서 오직 여성만이 가사노동을 하는 것은 아니다. 독신 남성, 아이, 다른 이들 역시 가사노동을 하며, 때때로 가구 구성원끼리 가사노동을 분담하기도 한다. 그러나 가사노동이 수행되는 한, 그것이 수행되는 사회적 관계와 그것을 수행하는 행위자에 대해 자본이 무관심하다는 것은 분명하다. 전업주부가 가족임금을 지탱하기 위해 더 많은 잉여노동을 수행하고 더 많은 노동시간을 투여하며 더 열심히 노동하므로 전업주부의 존재가 자본에게 가장 유익하다고 여전히 주장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을 일반 법칙으로 주장하는 것은 곤란하다. 왜냐하면 주부의 가사노동이 가족 소득을 보충하는 데 실로 도움을 줄 수 있지만 그녀 역시 가족의 아이들과 더불어 재생산되어야만 하며, 개별적인 가사노동에 필요한 추가적인 가전제품을 구입하고 유지해야 한다는 사실을 고려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주부가 임금소득자라면 이런 비용이 그녀의 임금을 통해 부분적으로 충당될 수 있다. 그러나 그녀가 전업 주부라면 사정은 달라진다. 이 경우에 문제는 주부의 노동이 남편의 노동력의 가치를 떨어뜨려서 자본가에게 숨겨진 이익을 준다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가정살림과 개인의 유지에 필요한 숨겨진 비용이 수반된다는 것이다. 이런 경우에 숨겨진 비용은 남편에게 제공되는 가족임금을 통해 보장된다. 따라서 자본주의 기업이 이득을 얻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따라서 선진 자본주의 국가에서 가사노동에 관련된 중요한 사실은 자본이 '무급' 가사노동에서 경제적 가치를 얻는다는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오히려 가사노동을 수행하는 전업주부의 존재는 주부로 남기에 충분한 임금이 존재하느냐는 사실에 달려있다는 것이다. 이는 노동자계급의 모든 계층은 말할 것도 없고 모든 계급에게 적용되는 게 아니며, 심지어 경제위기가 아니더라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인플레이션이 노동력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경기후퇴기에 많은 수의 여성은 유급 노동을 시작하도록 고무된다. 이는 남편의 임금이 불충분하고 이런 상태에 제공할 수 있는 이득 때문이다. 따라서 단순히 노동력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주부의 가사노동이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주부의 존재조건이 노동력의 가치를 올리거나 최소한 유지하게 하는 정도가 문제다. 따라서 노동력의 가치는 가정에서 여성의 위치와 관련이 있을 수도 있지만, 이것은 해리슨이나 가사노동 논쟁에 참여한 대부분의 논자가 주장한 방식대로는 아니다. 더 설명이 필요한 부분은 이런 관계의 다양한 형태며, 어떤 계급·계층의 구성원에게는 지불되지만 다른 이에게는 지불되지 않으며, 남성에게는 지불되지만 여성에게는 지불되지 않고, 어떤 자본가는 지불하지만 다른 자본가는 지불하지 않는 '가족'임금을 낳는 특수한 정치적·역사적·경제적 원인이다. 유사점과 차이점 이러한 이론의 여러 측면을 각각 검토했으므로 이것들의 유사점과 차이점을 규명할 수 있다. 물론 가장 중요한 차이는 이론적 접근법에 있다. 해리슨의 분석은 착취의 특수한 형태로서 '가내 생산양식'이란 개념을 전통적인 계급 분석에 추가한다는 의미에서 일관되게 가사노동을 마르크스주의 시각으로 포괄하려고 한다. 여기서는 자본주의가 최소한 암시적으로나마 가장 중요한 적으로 남아 있다. 한편 크리스틴 델피는 자본주의를 비난하고 그것의 전복을 주창하지만 마르크스주의 분석에 적대적이다. 해리슨은 자본주의가 가사노동으로부터 어떻게 이익을 얻는지 관심을 두지만, 델피는 (여성의) 가장 중요한 적이 자본주의가 아니라 남성이라고 입증하는 데 관심을 둔다. 또한 델피는 남성과 여성의 관계에 관심이 있지만 해리슨은 가사노동과 노동력의 가치의 관계에 관심이 있다. 게다가 해리슨 논문의 이론적 대상은 여성 억압이라기보다는 자본주의다. 가내 생산양식 명제를 지지하는 두 사람의 근본적 차이는 최소한 이 개념을 적용하는 것만으로는 여성운동의 정치적 실천의 문제를 해명할 수 없음을 보여 준다. 하지만 이러한 근본적 차이를 넘어서 두 이론이 공유하며 더 상세한 토론이 필요한 세 가지 주요 입장이 있다. 첫째는 여성을 계급으로서 분류하는 것이며, 둘째는 가사노동을 비자본주의적라고 규정하는 것이며, 셋째는 가내영역을 생산양식으로 분류하는 것이다. 1. 여성은 계급인가? 대체로 마르크스주의자는 여성이 분리된 계급을 형성한다는 생각을 거부하는 경향이 있다. 이는 부분적으로는 여성에게 고유하며 모든 여성에게 공통된 경제적인 계급 위치를 확고히 정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해리슨과 델피는 이러한 주장을 지지하는 논증에서 큰 차이를 보이지만, 여성을(최소한 여성 일부를) 하나의 계급으로서 개념화할 수 있는 경제적 토대가 존재한다고 설명하고자 한다. 계급에 대한 델피의 주장은 다소 불만족스럽다. 한 페이지에서 여성은 '노예' 관계에 있는 것으로 묘사되기도 하며, '본질적으로 프롤레타리아'라거나 '농노 관계'에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어쨌든 그녀는 결혼 관계 내에서 발생하는 것으로 간주되는 착취에서 계급을 도출한다. 우리는 그녀가 결혼 형태를 보편화하고 그것에 특권을 부여하는 것과 관련된 문제들을 이미 언급했고, 여성과 가사노동의 관계에서 [역사적·문화적인] 중요한 차이를 설명하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여성을 계급으로 간주하는 그녀의 설명에는 또 다른 문제가 있다. 예를 들어 착취에 대한 델피의 개념은 고유한 이론적 함의를 지닌 마르크스주의 담론에서 빌린 것이지만, 그녀는 '노동의 영유'라는 더 느슨한 정의를 이용한다. 마르크스주의 용어법에서 노동의 영유가 등장하더라도, 그것이 계급의 존재를 확증하기에는 불충분하다. 반드시 착취관계를 구성하지 않더라도 모든 사회에서 특정한 개인을 위한 잉여노동이 항상 수행된다. 게다가 단순히 인간 주체 사이의 관계에 대한 경험적 관찰로부터 계급을 도출할 수 없다. 계급 착취는 생산관계 수준의 관계를 수반하며 잉여노동의 '영유'라는 단순한 사실로 환원될 수 없다.9) 계급에 관한 델피의 명제는 이론적 근거가 없으므로 그녀는 자신의 명제를 유지할 수 있는 설득력 있는 논증을 발전시킬 수 없다. 그리고 그녀의 정의가 철저히 적용된다면 우리가 살펴볼 볼 것처럼 그녀의 주요 주장과 모순되는 결론에 도달할 것이다. 여성이라는 보편 계급이 존재한다는 델피의 주장에는 더 큰 문제점이 있다. 그녀는 결혼이 모든 여성의 공통 조건이고, 이것이 결혼계약상의 부와 지위의 차이뿐만 아니라 문화적 차이까지도 무효화하기 때문에 모든 여성이 동일한 계급에 속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녀의 주장을 분석하면 심각한 비일관성이 나타난다. 델피는 여성의 종속에 대한 관념적 이론에 맞서기 위해 모든 여성-주부가 동일한 '생산관계'에서 노동하며 '동일한 직무'를 수행한다고 주장하고, 따라서 여성에게 공통적인 억압의 물질성을 강조한다. 유물론적이라고 가정되는 이러한 강조는 그녀의 주장 전체에서 근본적이다. 하지만 더 특권적인 여성을 그녀의 도식 내에 포함하려고 할 때 그녀의 논증은 설득력을 상실한다. 왜냐하면 여기서 그녀는 가사노동이 수행되는 형태는 중요하지 않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사노동은 프롤레타리아 아내의 육체노동이 될 수도 있고, 오직 부르주아 아내에게 강요되는 '사회적인 과시 활동'이 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여성이 어떤 의미에서 공통의 '생산관계', 즉 '생산'에 기초한 공통의 물질적 착취로 인해 통일된다고 할 수 있는가? 또 '사회적 과시'가 어떤 의미에서 생산인가? 분명히 가사노동과 양육을 위해 하인을 고용하는 부르주아 아내는 특권이 더 적은 여성과 물질적 억압을 공유하지 않는다. 또한 이는 부르주아 아내의 특권이 남편의 부에서 유래한 것이므로 이혼을 통해 그것을 하루아침에 박탈당할 수 있다는 사실과 모순되지 않는다. 물론 그녀는 다른 방식으로 모든 여성에게 공통된 억압과 차별을 경험할 수 있지만(이는 특정한 투쟁의 기초를 형성할 수 있다), 이는 여성 억압의 물질성에 기초해 여성 노동의 착취를 정의하려는 델피의 직접적인 관심사는 아니다. 2. 가사노동과 자본주의의 관계 가사노동과 자본주의의 관계를 분석하면서 두 저자는 가사노동이 자본주의와 구별되며 본질적으로 비자본주의적이라는 데 동의한다. 하지만 자본주의가 가사노동에 허용하는 자율성의 정도에 대해서는 의견이 다르다. 이 점에서 해리슨은 델피보다 좀 더 미묘한 태도를 취한다. 그는 가내 생산양식을 '예속적' 또는 '절단된'(truncated) 생산양식이라는 상당히 어색한 공식으로 제시하면서, 가내 생산양식이 비자본주의적이지만 자본주의에 통합되거나 접합된다고(articulated) 인정한다. 심지어 가사노동 양식은 국가 양식처럼 '특정한 기능을 완수'하기 위해 자본주의가 '창조한'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문제는 이러한 양식들이 매우 우연적이고 의존적인 특성을 지녔지만 생산양식을 구성한다고 말할 수 있는지 여부다. 이 문제는 나중에 검토할 것이다. 하지만 델피는 가족적·가부장적 양식은 [자본주의와] 아무런 이론적 관계도 없는 자율적 실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가사노동이 자본주의에 대해 어느 정도나 자율적인지는 문제로 남는다. 왜냐하면 가사노동과 자본주의의 접합은 전체 가족생계를 제공하는 데까지 확장되며, 가족생계는 자본주의 부문에서 유래하는 소득으로 지불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가사노동, 서비스와 생필품은 자본주의 부문에서 생산되고 구매되는 상품의 이용이나 변형에 의존한다. 노동을 제외한 모든 가사노동 투입물은 자본주의 부문에서 나오므로 만약 가사노동이 자본주의에 대해 자율적이라면 어떤 의미에서 그러한가? 오히려 델피는 이런 자율성을 단언하면서 '여성의 가정 외부 노동을 착취하기 위해 가족적 의무를 확립하는 것'이 자본주의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가부장제가 여성을 억압하기 위해 자본주의와 공모한다면 이런 체계는 어떤 종류의 '자율성'을 지닌 것인가? 이런 모호성은 여성해방을 위해서는 가족적 생산양식의 혁명만으로 충분하지 않으며 오히려 사회 전체의 전복이 필요하다는 델피의 암묵적인 입장에서 가장 분명하게 드러난다. 델피는 왜 이런 이중 혁명이 필요한지 자세히 설명하진 않지만, 그렇게 한다면 그녀가 거부하는 입장에 가까운 주장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해리슨과 델피가 적절하게 다루지 못한 더 큰 문제는 즉 가사노동의 역사적·문화적 특수성이다. 해리슨은 가사노동이 자본주의의 고유한 창조물이라고 암시한다. 반면 델피는 가내 양식의 자율성은 봉건주의, 자본주의, 사회주의와 같은 주요 생산양식의 특수한 발전 단계와 독립적인 것으로 간주되어야한다고 암시한다. 이런 관점은 모두 만족스럽지 못하다. 왜냐하면 가사노동과 가족에 대한 역사적인 설명은 거의 없고 양자를 비교하는 설명은 더 적으며, 가사노동 이론의 일부는 이 쟁점에 대한 증거와 적절한 설명을 제시하지 않기 때문이다. 억압적인 가사노동의 기원을 현대 자본주의의 출발에서, 특히 주요 생산단위로서 가족의 해체에서 찾으려는 시도는 종종 지나치게 단순하다. 가족이 생산단위인 곳에서도 가내 소비(예를 들어 음식준비, 청소, 세탁, 옷감 짜기, 바느질)와 양육를 위한 가사노동은 시장에서의 교환이나 물물교환을 위한 생산과 구별된다. 이런 구별은 기술적으로 가장 덜 발전한 국가에서도 마찬가지다. 즉 (아무리 개별화된 가사노동이라 할지라도) 가사노동과 성별 분업은 자본주의에 이전에도 존재하며, 보편적이지 않다고 하더라도 거의 그런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는 가내영역이 영원불변하다는 의미가 아니다. '노동과정'의 일부는 비슷해 보일 수 있으나 수세기에 걸쳐 중요한 변화가 일어났으며 그러한 변화의 일부는 지배적인 생산양식의 변화와 관계를 맺었다. 예를 들어 델피가 인정하는 것처럼 자본주의 농업으로 이행에 의해 가족이 생산한 식량을 스스로 소비하는 양보다 구매하는 양이 증대했다. 금세기 동안 가내생활 영역 대부분이 변화를 겪었다. 더 나은 주택의 개발로 인해 더 많은 서비스를 가정 내로 통합되었고(난방, 물, 조명), 동시에 시장에서 다른 서비스가 성장했다. 가공식품 냉동과 통조림과 같은 기술의 발전이나 노동절약 설비의 활용은 가사노동의 변화를 낳거나 그런 잠재력을 지닌다. 또한 국가는 보건, 교육, 육아의 책임 일부를 떠맡았다. 이런 발전이 보여주는 것은 가사노동이 자율적인 실체를 구성한다는 사실이 아니라, 가사노동과 관련된 노동과정과 사회적 관계가 지배적인 생산관계의 경제적 조직화의 변화에 따라 여러 방식으로 영향을 받는다는 사실이다. 물론 이는 가사노동이 단지 생산관계에 의해 결정된다는 의미는 아니다. 이런 변화가 가사노동과 여성의 지위에 미치는 효과는 한편으로는 부분적이며 또 한편으로는 모순적이기 때문이다. 가사노동의 어떤 측면은 변화에 저항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러나 가사노동에 역사가 있지만, 이것이 자율적인 역사는 아니다. 3. 가내 생산양식이 존재할 수 있나? 가사노동이 '비자본주의적'이라고 정확하게 규정하는 것에는 한 가지 중요한 의미가 있다. 즉 가사노동이 본연의 상품생산 영역 밖에 있고, 따라서 가치법칙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는 것이다. 해리슨은 이를 인정했기 때문에 가사노동이 분리된 생산양식을 구성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우리가 지금부터 문제로 삼으려는 것은 바로 이런 결론이다. 모든 생산양식 이론의 출발점은 생산양식이 무엇이냐는 것이어야 한다. 델피는 정의를 제시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용어를 '생산방식'의 유비로 사용하면서, 더 이상의 정의를 시도하지 않는다. 따라서 그녀는 '생산양식' 개념을 마르크스주의 맥락에서 분리하고, 그 대신에 가사노동의 특징들을 요약하는 설명구조를 덧붙인다. 반면 해리슨은 알튀세르의 개념화로 볼 수 있는 생산양식 개념을 채택한다. 이 개념에는 자연의 변형양식(또는 노동과정), 생산물의 영유양식, 그리고 경제적 소유의 일정한 분배라는 세 가지 요소가 결합된다.10) 해리슨의 생산양식 개념은 발리바르가 정교화한 개념을 토대로 한 것이므로, 우리는 해리슨의 적용이 그것에 부합하는지 살펴볼 것이다. 마르크스주의 용어법에서 '생산양식' 개념은 일반적으로 두 가지 분석 수준과 관련된다. 하나는 생산적 구조의 요소들(즉 생산력과 생산관계)이고, 다른 하나는 해당 생산양식의 운동 법칙이다. 양자는 마르크스의 자본주의 경제 분석의 이론적 대상을 형성한다. 여기서 우리는 한편으로 자본주의에 고유한 일군의 요소들과 사회적 관계(노동과정, 소유 형태, [노동자와 소유의] 분리 형태)를, 또 한편으로 자본주의 경제의 통일성에 대한 개념인 재생산 이론을 발견한다. 그것은 자본유통, 분배관계와 생산관계, 기업들 간의 결합 형태가 하나의 통합된 생산체계의 일부분을 형성하는 체계로서 인식된다. 이처럼 이중적 의미로 인식된 생산양식은 일정한 경제체계와 사회적 관계에 관한 고도로 추상적인 개념이다. 일반적 개념으로 명기할 수는 없지만 주어진 생산양식의 재생산을 보증하기 위해서 필수적인 생산양식의 존재조건은 다른 분석수준, 즉 사회구성체라는 분석수준에 속한다. 이러한 조건은 해당 생산양식의 추상적 개념에서 추론될 수 있지만, 이것은 매우 일반적인 용어로 표현될 수 있을 뿐이다. 왜냐하면 특정한 사회구성체에서 그런 조건을 보증하는 양식은 상당히 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발리바르의 마르크스 독해에 따르면 '생산양식' 개념은 두 가지 방식으로 기능한다. 하나는 마르크스의 용어로 말하면 시기구분의 단위로서, 사회의 경제적 발전 시대(자본주의, 봉건주의, 사회주의)에 따라 역사를 구별하는 것이다. 또 하나는 특정한 사회구성체에 대한 우리 지식의 기초를 이루는 개념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생산양식의 구성적인 경제적·사회적 관계에 관한 이론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내 생산양식은 생산양식의 이런 필요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한다. 가내 생산양식의 '예속적' 특성에 대한 해리슨의 강조는 정의상 그것이 존재하는 사회구성체에 관한 지식의 토대를 제공하는 것이 불가능해지도록 한다. 실로 그의 용어법에서 가내 생산양식에 대한 지식은 자본주의 생산양식에 대한 지식을 조건으로 한다. '가내 생산양식의 재생산은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재생산에 의존하며, 그것은 자본과 대단히 복잡한 공생관계를 맺는 절단된 생산양식과 같은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운동법칙에 따라 결정되며, 자신의 운동법칙이 없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가내 생산양식은 어떤 의미에서 일정한 사회구성체에 대한 지식을 제공할 수 있는가? 가사노동 생산양식이 다른 기준, 즉 시기구분의 단위로 기능할 수 있는지를 고찰할 때 동일한 문제가 발생한다. 해리슨은 '예속적' 양식이란 개념을 정식화하면서, 사회구성체는 내부에 하나 이상의 생산양식을 포함할 수 있다고 지적한다. '퇴화' 양식이나 '맹아' 양식이란 그의 개념은 이런 분석에 부합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같은 종속적 양식들은 '예속적' 양식과 하나의 결정적인 측면에서 차이가 있다. '퇴화' 양식이나 '맹아' 양식은 과거에 일반화될 수 있었거나 미래에 일반화될 수 있지만, 가내 생산양식 같이 의존적 양식들은 결코 사회구성체의 경제적·사회적 토대를 구성할 수 없으므로 결코 일반화될 수 없다. 달리 말해 예속적 양식은 자신의 생산적 토대가 없다. 가사노동 생산양식이 지배하는 어떤 사회구성체나 그것의 일부조차도 존재한 적 없거나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이처럼 가내 생산양식 안에 생산적 토대가 없고 어떤 사회적 생산도 없기 때문에 이런 맥락에서 '생산'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 자체가 문제가 된다. 가내 생산양식의 구성 요소를 규명하려고 시도할 때 더 큰 문제가 생긴다. 노동자(주부)가 있고 노동대상이 있다. 그러나 그 안에 어떤 사회적 생산도 없고, 생산물이 주부의 잉여노동의 어떤 형태를 취하는 생산양식에서 무엇이 생산수단인가? 요리든 원예든 간에, 사적 소비를 위한 사용가치의 창조가 이 활동에 사용되는 도구를 가리키려고 '생산수단' 개념을 이용하는 것을 정당화하는지 의심스럽다. 가사노동이 사회적으로 중요하다고 인정하는 것이 가사노동이 사회적 생산이나, 심지어 마르크스가 일반적으로 제시하는 의미에서 생산과 동등하다는 뜻은 아니다. 해리슨에 따르면 가내 생산양식의 '생산관계'는 노동자와 생산수단의 통일이라는 특성을 지닌다. 그러나 설사 우리가 그의 개념 사용을 받아들이더라도, 그의 개념이 생산물(여기서는 주부의 잉여노동)의 영유양식과 어떻게 연관되는지, 또는 어떻게 주부가 이 같은 사회적 착취관계에 종속되는지는 분명치 않다. 또한 '생산양식' 개념은 발리바르가 명명한 (그릇된 인상을 줄 수도 있는)11) '비(非)노동자'를 포함하는데 여기에 더 큰 어려움이 따른다. '비노동자'는 잉여노동이나 잉여생산물을 영유하는 행위자다. 따라서 해리슨과 델피의 정의에 따르면 여성이 자신의 필요를 넘는 가사노동을 할 때 이러한 '잉여노동'을 영유하는 행위자가 누구냐는 문제가 발생한다. 크리스틴 델피의 답변은 명확하다. 잉여노동을 영유하는 자는 남성이다. 그러나 이것이 사실이라면 아이 역시 주부 노동의 많은 부분을 '영유'한다. 하지만 아이는 성인 남성의 일부가 될 수 없으며, 아이를 독립적인 비노동 착취계급으로 간주하는 것도 이치에 맞지 않다. 남성이 착취자라는 엄격한 페미니즘의 주장은 1개월 된 남자아이는 착취자일 것이고, 1개월 된 여자아이는 아닐 것이라는 식으로 아이를 구별해야 한다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결론으로 사실상 귀결된다. 남편이 영유계급이라고 설명하는 델피를 따른다면 추가적인 어려움이 있다. 경험을 볼 때 대부분의 결혼에서 남편이 가사에 관한 한 '비노동자'라는 점은 분명하다. 그러나 가정 밖에서 남편은 대개 노동자인데, 자신의 노동력을 판매함으로써 그 역시 가족 생계에 기여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델피의 용어로 말하면 남편 역시 아내와 아이가 '영유'하는 어떤 '잉여노동'을 수행한다. 이것이 아내와 아이를 남편의 착취자로 전환시키는가? 이처럼 받아들이기 어려운 결론은 델피의 착취에 대한 정의를 따른다면 피할 수 없다. 해리슨은 가족적 생산양식에서 남성의 위치를 사실상 전혀 논하지 않음으로써 이 문제를 교묘히 피해간다. 남성이 가내 생산양식의 계급구조에 포함되는지는 분명치 않지만, 그는 가내 생산양식이 단지 하나의 계급, 즉 주부 계급만을 포함한다고 암시한다. 그러나 만일 여성이 두 계급들에 속할 수 있다면, 남성은 왜 그럴 수 없는가? 아마도 해리슨이 이 문제를 피하는 이유는 가내 생산양식 안에 남성의 위치를 정하면 그는 델피의 결론과 너무 가까워질 것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남성과 자본주의의 관계보다는 남성과 가사노동, 남성과 여성의 관계라는 질문을 즉각 제기하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 문제에 대한 해리슨의 침묵은 성들 간의 관계라는 쟁점을 대체로 회피하려는 징후다. 해리슨이 볼 때 여성의 잉여노동을 영유하는 행위자는 자본이고 따라서 가내양식 바깥에 있다. 그러나 이는 발리바르의 개념과 좀 더 멀어진다. 왜냐하면 엄격히 말하면 발리바르에게 비노동자는 이런 외적 영유를 허용하지 않는 생산양식 개념의 불변요소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우리가 종속적 생산양식의 특징은 외부 행위자의 영유라고 받아들이더라도 무엇이 영유되는지, 영유의 창출이 생산을 구성하는지는 여전히 문제로 남아 있다. 우리가 살펴본 것처럼 가사노동의 사례에서 이 개념을 적용하는 것에는 문제가 있고, 최소한 문헌에서 제시한 것 이상의 이론적 실증이 필요하다. 가사노동 논쟁의 문제점 가내 생산양식 명제 덕분에 델피와 해리슨은 수많은 가사노동 문헌에서 자주 반복되는 두 가지 오류를 피한다고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제 우리는 이러한 오류를 살펴볼 것이다. 하나는 가사노동을 자본주의 생산양식 내로 흡수하려는 오류고, 다른 하나는 가사노동이 자본주의와 완전히 기능적인 관계를 맺는다고 보는 오류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작업에는 여성의 가사노동에 대한 체계적 분석이 없기 때문에 그들을 대신해 이 이론을 정교하게 만드는 게 필요하다는 근거로 가사노동을 자본주의 생산양식 내로 흡수하려는 시도가 흔히 정당화되었다. 몇몇 저자는 가사노동과 자본주의의 관계에 관한 이론이 없는 것이 역사유물론 창시자들의 성차별적 태만 탓이라고 주장했다.12) 다른 이들은 역사유물론 이론의 중심 주제에서도 마르크스의 많은 개념이 미발전된 채로 남아 있고 더욱 정교화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특히 가사노동의 분석에 관한 개념에 적용된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 이론을 발전시키기 위한 막대한 작업이 남아있는 것이 사실이더라도,『자본』에서 불충분하게 이론화되거나 전혀 이론화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는 모든 것이 자본주의 생산 이론으로 통합될 수 있거나 통합되어야 한다고 곧장 가정해선 안 된다. 특히 한 저자가 희망에 차서 기록한 것처럼 가사노동이 자본주의 생산양식 개념과 '조화'를 이룰 수 있다고 가정하기보다는 여기에 의문을 품는 것이 필요하다.13) 한 가지 주요 문제는 수많은 저자가 생산양식이라는 추상수준을 사회구성체 추상수준과 혼동한다는 점이다. 이 문제는 가사노동 사례에서 우리가 어떤 추상 수준을 다루고 있는지를 먼저 확립한다면 벗어날 수 있다.14) 왜냐하면 가사노동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 분석을 생산하는 것과 가사노동을 자본주의 생산양식 개념과 자본주의 경제의 운동 법칙으로 흡수하려는 것은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이 개념들은 특히 상품생산과 가치증식과정과 관련을 맺기 때문에, 가치법칙을 따르지 않는 사적인 개별 노동으로서 가사노동은 자본주의 생산양식 이론의 외부에 있다. 마르크스의 친숙한 정식화처럼, 노동자는 '스스로에게 속하고, 생산과정 외부에서 필수적인 생명 활동을 하기' 때문에 자본가는 '안전하게 (노동자의 재생산을 노동자의) 자기보존과 증식 본능에 내맡긴다'.15) 즉 이런 추상수준에서 자본은 가사노동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러나 다른 수준, 즉 구체적인 사회구성체 수준에서는 가내영역의 조직화 형태와 가내영역 내부의 사회적 관계가 일정한 사회구성체의 재생산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사회적 재생산의 필요조건과 가내영역의 관계가 무엇이든 간에 이러한 관계는 단순히 자본주의 기능 때문에 확립되는 것은 아니다. 이는 직접적으로 두 번째 문제, 즉 기능주의의 문제로 이어진다. 가사노동과 가족에 관한 논쟁에는 기능주의 가설이라는 평가가 가장 적합한 것으로 가득 차 있었다. 예를 들어 가사노동은 자본주의에 '결정적', '필연적' 또는 '본질적'이라고 다양하게 언급된다. 자본주의 편에서 보면, 때로는 자본주의가 가사노동을 '창조'했다고 간주되며, 어떤 정식화에서는 심지어 자본주의가 생존을 위해 가사노동에 '의존'한다. 우리는 이미 가사노동이 자본주의에 결정적이라는 통념에 반대한다고 언급했고, 가족 조직의 현재 형태에 관해서도 같은 유보조항을 달아야만 한다. 가사노동에 대한 문헌은 가족 조직 역시 기능적이라고 간주하고, 가내영역이 특정한 국면에서 아무리 유익하더라도 자본주의 팽창이나 계급투쟁의 결과로서 심원한 변화를 겪을 수도 있고 또한 자본에게 모순적 효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고 인정하지 않는다. 몇몇 저자가 제안한 것처럼 자본주의가 가사노동과 가족에 의존한다는 가설이 수반하는 논리적 결론은 가사노동과 가족의 폐지는 자본주의의 몰락을 낳는다는 것이다. 이 같은 묵시록의 관점은 이론적으로 잘 실현되지 않지만, 다른 주의 깊은 분석(예컨대 벤스톤의 분석)의 결론에 자주 따라다닌다. 이는 아마도 여성운동을 반자본주의 투쟁의 일부로 명확히 정의함으로써 여성운동의 혁명적 성격을 입증하려는 욕망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그러나 여성의 종속이 자본주의 생존에 필수적이고 프롤레타리아에 대한 착취와 동등하다고 주장하지 않더라도 이것은 틀림없이 논증될 수 있다. 일원론과 경제주의 비록 델피와 해리슨이 전반적으로 위 문제들을 비켜가지만, 그들이 가사노동 논쟁과 공유하는 하나의 중요한 한계가 있다. 그것은 가사노동에 대한 경제적 분석을 배타적으로 강조하는 것이다. 논쟁이 다룬 주요 문제는 가사노동이 가치를 창조하는지, 노동력 상품을 생산하는지, 가치법칙에 따라 결정되는지, 생산적 노동인지 비생산적 노동인지 등등이었다. 이는 논쟁이 마르크스주의 안에서 발전됨에 따라 최초의 관심사가 '여성노동에 대한 유물론적인 분석'에 입각해 여성 억압을 분석하려고 했기 때문에 아마도 불가피했다. 처음에 이것은 보편적이고 몰역사적인 '가부장적 억압'을 가정했던 일부 페미니즘 분석의 관념론을 반대하고, 가족을 순전히 이데올로기 관계로 이해했던 일부 마르크스주의 분석의 관념론을 반대하는 데 필요하다고 환영받았다. 그러나 가사노동에 대한 이런 접근법은 경제주의라는 한계뿐만 아니라, 여성의 경제적(·비경제적) 활동 전체와 그것이 이뤄지는 관계들에 대한 분석을 희생하면서 협소하게도 가사노동과 주부에 집중했다는 한계가 있었다. 따라서 그것은 제한된 조건에서조차 여성의 대한 포괄적인 정치경제학 이론을 제시하는 데 실패했다.16) 이처럼 경제주의와 결합된 협소한 초점은 가사노동에 대한 페미니즘 비판이 [이론적] 분석으로부터 전적으로 전위되는 결과를 낳았다는 사실을 지적해야 한다. 이것은 가사노동이 노동력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효과가 있다는 주장에서 가장 분명히 입증된다. 이 주장은 오직 가사노동이 자본에게 어떻게 이득을 주는지 보이는 데에만 관심을 둔다. 정말로 그것은 아마 더욱 중요한 무언가를 전혀 보여줄 수 없다. 즉 왜 가사노동을 가정주부[여성]가 수행하는지, 어떻게 가사노동이 여성 종속의 구조와 연결되는지를 보여주지 못한다. 더욱이 자본에게 결정적으로 중요한 노동은 예컨대 여성의 육아 활동보다는 (남성) 노동자의 일상적 재생산과 관련된 노동이라고 대개 간주된다. 결국 이 이론은 왜 이런 노동이 여성과 남성 사이에서 정말로 동등해질 수 없는지, 심지어 독신 임금노동자 스스로 이런 노동을 수행할 수 없는지 전혀 설명하는 않는다. 그것의 피할 수 없는 결론은 여성의 책임으로서 가사노동의 종식과 이런 형태의 여성 억압의 제거가 자본에게 어떤 손실도 입히지 않은 채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델피의 주목할 만한 예외가 있지만, 가사노동 논쟁에 기여한 많은 문헌이 성들 간의 관계 전반에 대한 논의를 회피했다는 점을 주의해야 한다. 이런 문헌이 어쨌든 서로 대립한다고는 거의 생각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 목적이 여성의 종속으로부터 이득을 얻는 것이 예컨대 남성이라기보다는 일차적으로 자본이라고 설명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요약하면 가사노동이 자본에게 경제적으로 기여하는 것만을 배타적으로 조명함으로써, 페미니즘의 관점에서 발전한 관심사와 페니니즘의 쟁점은 고의가 아니더라도 담론으로부터 전위되었다. 이중적 전위 가사노동 논쟁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지금까지의 주된 관심사로부터 이중적인 전위가 필요하다. 첫째, 주요한 이론적 대상이 가내영역의 물질적 중요성을 개념화하는 것이라면, 강조점은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수준에서 일정한 사회구성체들과 그것의 재생산 수준으로 이동되어야 한다. 이와 더불어 분석은 더 이상 가사노동에 협소하게 집중하는 대신에, 이러한 구조들 안의 여성의 고유한 위치에 대한 시각을 잃지 않으면서 가족의 더 광범위한 중요성과 [가족보다] 더 폭넓은 사회에 대한 가족 내부의 관계를 고려하도록 유용하게 확장될 수 있다. 둘째, 대신 여성 종속에 관한 이론이 필요하다면, 첫걸음으로서 여성 종속과 경제의 관계라는 문제가 지금까지 논쟁보다 훨씬 일반적인 수준에서 제기되어야 한다. 여성 종속에 대한 이해도,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정치도 가사노동 분석만으로는 도출될 수 없다. 사실 '가사노동 임금'(wages for housework) 캠페인의 제한적인 강령은 여러 가지 방식에서 볼 때 이런[가사노동 분석만으로 치우친] 접근법의 자연스럽고 논리적인 결과다. 여성의 정치경제학은 결정적으로 중요한 연구 영역이지만, 논쟁의 용어는 더 확장되어야 하고 여성의 종속을 매개하는 물질적 관계의 복합적 결합을 분석하려고 시도해야 한다. 이 같은 분석은 가내영역에 대한 검토와 더불어 성적 분업, 재생산, 노동시장, 남녀 노동력 가치의 변화와 차이, 여성을 가족 내부의 의존적 지위에 머물게 하는 국가의 역할에 대한 고찰을 포함해야 한다.17) 그러나 여성 종속에 대한 이해는 오직 경제적이거나 물질적 요인으로 환원될 수 없으며, 이런 요인을 아무리 넓게 이해하더라도 마찬가지다. 또한 여성 종속에 대한 이해는 정신분석학, 성욕, 언어와 이데올로기 영역에서 근래 수행되고 있는 중요한 작업에 대한 고찰을 필요로 한다. 그러므로 그것은 확대하면, 성별간, 가족간 상호관계에 대한 분석을 포함한다. 여성의 종속을 매개하는 관계들의 복합성에 대한 인식은 가사노동에 대한 문헌에서 발견되는 몇 가지 정치적 결론을 제공하는 일종의 경제적 환원주의의 위험을 경고한다. 여성이 사회주의를 위한 투쟁에 가담할 것이냐는 질문에 대한 답변은 자본주의와 가사노동의 관계를 개념화하는 데 달려있지 않다. 그 답변은 여성이 스스로를 발견하는 정치정세에 달려 있으며, 특히 여성 종속의 고유성을 설득력 있게, 정면으로 다루면서 페미니즘의 쟁점을 접합할 수 있는 사회주의 운동의 능력에 달려있다. 이제 남은 문제는 자본주의에서 가사노동의 역할에 관한 세 가지 중심 질문에 대해 최근 어떤 답변이 정식화되었는지를 지적하는 것이다. 이 질문은 다음과 같다. 가족에서 여성의 지위를 어떻게 개념화할 것인가? 가정에서 여성의 지위와 자본주의 경제의 관계는 무엇인가? 그리고 이런 형태의 여성 종속을 끝내기 위해선 어떤 정치적 수단이 필요한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아직까지 상대적으로 발전되지 못했기 때문에, 다음 부분에서는 더 깊은 연구와 탐구가 필요한 영역만을 지적하고자 한다. 여성과 가정 우리는 위에서 여성/가정 관계가 불변이 아니며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재생산에 본질적이라고 간주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대신 이 관계는 일정한 사회구성체의 고유성에 따라 그 효과가 변화하는 결정과정들(determinations)이 복합적으로 결합된 결과로서 이해해야 한다. 이를 주의하면서 이런 결정과정들이 어떻게 현재 선진 자본주의 국가에서 명백히 나타나는지 더욱 일반적인 수준에서 제시할 수 있다. 이 중에서 특별한 언급이 필요한 네 가지 문제를 선별할 수 있다. 1. 임금 형태. 이는 여러 중요한 방식으로 여성의 지위와 가정에서 여성의 상황과 관계를 맺는다. 우리가 주장했던 것처럼 전업주부의 실존은 적정한 남성 임금을 통해 경제적으로 가능해지며, 그보다 비중은 적지만 육아와 결혼 기간 동안 추가되는 국가보조금을 통해 보완된다. '가족임금', 즉 부족하나마 직업이 없는 아내와 아이를 부양할 수 있는 임금수준의 존재는 다른 모든 임금수준과 마찬가지로 갖가지 상이한 결정과정들이 작용한 결과다. 심지어 그것은 이런 형태의 임금 산정을 목표로 하거나, 확대 해석하면 이런 형태의 여성 의존을 목표로 하는 남성노동자의 의식적이거나 전(前)의식적인 투쟁을 포함할 수 있다. 왜냐하면 가족임금의 포기는 노동력 가치의 하락이라는 위험을 무릅쓰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족임금이 수반하는 여성의존의 형태가 대체로 남성에게 유리하고 여성에게 불리하다는 사실은 거의 의심할 여지가 없으며, 앞으로 살펴볼 것처럼 이는 여성의 전반적인 지위에 대해 어떤 중요한 함의를 지닌다. 그러나 이를 고찰하기 전에 특권적인 남성임금이 수반하는 것은 특권 이하의 여성임금이라고 강조해야 할 것이다. 특정 범주의 남성 노동자가 가족임금을 보장받을 수 있더라도, 현재의 성별 분업에서 여성 노동력이 이런 수준의 가치를 획득하는 경우는 드물다. 그리고 남성처럼 여성이 가족임금을 위해 투쟁하는 경우는 더욱 드물다. 이와 반대로 수많은 여성 노동자조차 일반적으로 여성의 임금은 남성소득자의 임금을 보충하는 것이라고 간주한다. 따라서 이 같은 차별이 초래할 수 있는 남녀간의 이해 갈등을 충분히 인식하고, 그에 따른 정치적 실천상의 함의를 밝혀야 한다. 2. 성적 분업. 가족임금을 남성에게 할당하는 것은 성적 분업에 의해 정당화되는 경향이 있다. 전통적으로 성적 분업은 성들 간의 공평한 책임 분배를 달성하여 남녀가 서로 보완적이게 되도록 한다고 간주된다. 그러나 성적 분업은 단순한 기술적 분업 이상인데, 그것이 특권과 차별의 구조를 창출하는 지배와 종속 관계를 강요하는 데 기여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여성에게 가정 내·외부에서 긴밀하게 얽힌 영향을 미친다. 여성에게는 가정에서의 책임이라는 의무가 할당되는데, 이는 여성이 임금부문에서 노동할 때조차 마찬가지다. 그리고 여성이 임금부문에서 노동하더라도 그들 중 다수는 임금이 가장 형편없고 정적인 직업에 배치될 것이다. 가정 내부의 의무와 일할 만한 가치가 없는 고용의 결합은 가정 외부에서 일하는 여성에게 강력한 장애물이고, 가정 외부의 여성 노동을 억제할 수 있다. 따라서 노동시장 그 자체가 가내영역에서 여성의 지위와 가정 외부에서 여성의 존재 사이에 직접적인 고리를 형성하면서, 재생산에서 여성의 역할을 보충하고 강화한다. 따라서 사회에서 여성의 지위가 오로지 가내영역에서 여성의 지위에 의해 결정된다고 보는 것은 잘못이다. 노동시장에서 여성들의 취약한 위치는 가정에서 여성의 종속을 강화하는 효과를 낳는다. 3. 높은 실업률과 특히 높은 여성 실업률. [남녀가 집단적으로] 분리되지 않은 고용 상태에서 불황기 동안 흔히 여성 노동자가 가장 먼저 제거되다. 이는 주로 여성 노동자를 고용하는 기업이 불황기에 가장 살아남기 어렵다는 사실 때문에 종종 더 악화된다. 그러나 남녀 노동력이 함께 고용된 곳에서도 이런 위기 동안 남성보다는 여성이 먼저 해고되는 경향이 있다. 이는 가족소득이 가족의 '수장' 즉 남편의 경제활동에 의해 제공되어야 한다는 근거로 흔히 정당화된다. 달리 말하면 가족임금 형태가 일반화되지 않은 곳에서조차 '가족'임금을 호소함으로써 여성 실업을 부분적으로 정당화한다는 것이다. 4. 여성의 재생산 역할에 대다수 사회가 제시하는 프리미엄. 이는 남성과 동등한 자격으로 노동인구에 진입하는 여성에게 불리하게 작용한다. 단순한 생물학적 분업(육아)은 사회적 관계를 크게 제약하는 복합적 모형 안에 깊숙이 새겨지게 된다. 여성은 어린 시절부터 대중매체, 교육, 가족의 기대에 의해 결혼, 특히 결혼 안에서 어머니의 역할로 곧장 나아가게 된다. 더욱이 노동시장에서 여성의 열등한 지위를 결정하도록 기여하는 것은 '어머니의 보살핌'(mothering)에 관한 가설이며, 자연주의적이거나 본질주의적인 주장은 이를 지지한다. 즉 이러한 이데올로기는 물질적 효력를 지닌다. 여성들은 주부나 어머니, 기껏해야 '용돈'을 버는 파트타임 노동자가 되라는 요구를 받으며, 기술과 장래희망에 관해 여성이 받는 공식·비공식 교육은 일반적으로 이런 전망에 맞춰 있다. 이는 여성을 특정 직업에 할당하는 경향이 있는 성적 분업에 의해 강화된다. 여성에게 할당되는 직업은 그들이 지루하고 섬세하며 성가신 일을 견디는 '본성적인' 능력이 있다고 가정하면서 이런 능력을 활용하려는 목적으로 고안된다. 동시에 이런 직업은 남성들이 수행하는 유사한 작업보다 임금이 더 낮다. 이처럼 불평등한 상황이 발생하는 것은 부분적으로는 여성의 직업이 어머니라는 주된 역할에 비해 부차적인 것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며, 부분적으로는 많은 여성이 가정 내의 책임을 맡고 있는 한에서는 실제로 부차적이기 때문이다. 육아시설의 적절한 공급의 결여는 여성 대부분에게 선택의 요소를 제거한다. 이제 우리는 여성의 관습적 조건이 일반적으로 선진자본주의 국가에게 주는 어떤 효과들을 이익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기능주의적 논증이 제시하는 것처럼 그러한 효과가 모든 자본주의 사회구성체에서 항상 유지된다거나 반드시 이익을 주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가내영역으로 여성의 유폐는 어떤 상황에서는 유익할 수 있지만, 다른 상황에서는 그렇지 않다. 급속한 [자본]축적기나 전시처럼 노동부족이 심각할 때, 국가는 여성 임금노동자를 충분히 시장에 풀어놓기 위해 가사노동을 사회화하도록 간섭하라는 요구를 받을 수 있다. 또 하나 명심해야 할 것은 자본의 '일반 이해'에 충실한 것이 특정한 자본에게는 불리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일정한 사회구성체에서 국가 정책은 여성의 노동력 진입을 억제하지만, 어떤 자본의 생존은 여성이 제공하는 값싼 노동력에 의존할 수도 있다. 가사노동 논쟁이 올바르게 강조했듯이 가족은 소비의 단위지만, 단지 그것만은 아니다. 또한 그것은 노동력의 재생산에 필요한 재화와 용역이란 형태로 사용가치를 생산하는 장소이기도 하다. 이 같은 재생산 노동이 모든 사회에서 필수적이지만 그 장소가 반드시 가족은 아니고, 가족 외부의 행위자가 재생산 노동을 수행할 수도 있다. 자본주의에서 노동력의 일상적 재생산에 필수적인 재화와 용역의 다수는 시장이나 국가기관을 통해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재생산에 대한 가내영역의 기여는 여전히 상당히 중요하며, 일반적으로 두 가지 형태의 활동을 수반한다. 하나는 자본에게 가장 덜 중요한 활동으로, 현존하는 임금노동자의 일상적 요구를 돌보는 것을 포함한다. 또 하나는 미래의 생산자, 즉 아이의 요구를 돌보는 것이다. 이는 어떤 측면에서 보면 임금소득자를 위한 것과 유사한 일을 포함한다. 그러나 그것은 추가적으로 더 많은 노동과 포괄적인 책임을 포함하는데, 특히 대개 여성이 떠맡는 책임인 유아가 있을 때 더욱 그렇다. 다른 측면에서 보면 다음 세대 생산자의 재생산은 기초 교육을 수반한다. 즉 그것은 아이들이 결국 성적·계급적으로 서로 다른 특성을 계발하도록 '사회화'하는 것이며, 이는 그들이 노동시장 안팎에서 차지하게 될 위치와 관련을 맺는다. 여기서 여성의 노동은 교육기관과 같은 다른 행위자들을 보충하는 역할을 맡지만, 여전히 상당한 중요하다. 이 두 가지 재생산 활동(구체적 형태로서 가사노동와 육아) 중에서 여성을 가장 곤경에 빠뜨리는 물질적 관계를 이루며 자본주의 국가에게 가장 유익한 것은 육아 노동이다. 가사노동 부담은 최소치로 축소될 잠재성이 있고 가족의 성인 구성원들 사이에 균등화될 수 있다. 하지만 육아에 관한 해결책은 최소한 적절한 육아기관의 공급을 통한 육아노동의 사회화를 포함하는 중대한 사회적 개조를 요구한다. 따라서 가사노동과 달리 육아에 관한 해결책에는 주요 자원의 할당과 국가나 다른 조직기관의 책임이 필요하다. 국가비용은 의심할 여지없이 자본주의 사회가 육아시설의 제공을 거부하고자 했던 이유 중 하나지만, 이것만이 유일한 이유는 아니다. 높은 실업률이 널리 번지고 있고 있는 선진 자본주의의 조건에서 노동시장은 여성을 수용할 만한 충분한 일자리를 제공하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급진적인 개입주의 국가를 향한 변화가 없다면, 여성을 가내영역에서 해방하는 데 기여할 수 있는 조건을 창출하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문제로 남는다. 이런 의미에서 '가족임금'과 '주부 증후군'은 높은 실업률, 특히 높은 여성 실업률을 은폐하고 일정한 방법으로 그것을 정당화하도록 돕는다. 여성들은 산업예비군의 고유한 층을 구성하는 것으로 간주될 수 있다.18) 여성은 전시나 급격한 축적기에는 [노동시장으로] 불려나오지만, 만일 이런 직업들이 축소되거나 남성들이 되돌아온다면 가족 안의 그들의 '위치'로 되돌아간다. 이런 '위치'가 존재하고, 여성들이 '본성적으로' 이런 위치로 돌아가려는 성향이 있다는 가정 때문에 여성의 실업은 정치·사회적인 문제가 될 잠재성이 적다. 그리고 여성의 실업은 자본주의 국가가 육아 서비스에 최소의 비용을 제공하도록 유용하게 기능한다. 그러나 이것은 여성 종속의 '원인'이라거나 어떤 단순한 의미에서든 자본주의에 기능적이라고 간주되어서는 안 된다. 이는 양날의 칼이기 때문이다. 엄격히 말해 자본의 경제적 이해는 가능한 한 많은 노동자들이 프롤레타리아가 되는 것이다. 이는 노동자가 대량으로 생산에 진입함으로써 자본이 잉여가치양의 증대와 노동력 가치의 하락이라는 이중적 이득을 획득할 수 있게 한다. 따라서 가정에서 여성들의 지위는 일정한 방식으로 어떤 자본주의 국가에게 이득을 주지만, 모순적인 효과를 낳는다. 자본에게는 이런 두 측면에 더하여 세 번째 이익이 있다. 즉 값싼 노동력이 필요한 자본 부문에게나, [자본]축적기 동안 그것을 공급하는 것이다. 남성의 노동력 가치는 가족의 재생산 비용을 포함하는 수준에서 확립될 수 있다. 하지만 여성이 거의 존재하지 않고 차별이 없는 직업이나 노동력의 여성화가 노동력가치를 떨어뜨리지 않은 드문 경우를 제외한다면, 여성이 이런 수준의 노동력 가치를 확보하는 경우는 드물다. 따라서 성적 분업은 임금과 노동 조건뿐만 아니라 직업적 성공을 위한 기회에서도 차별을 결정한다. 이는 다음과 같은 사실에 의해 정당화된다. a) 여성의 노동은 재생산에서 역할에 비해 부차적인 것으로 간주된다. b) 여성의 노동은 특권적인 남성 소득에 종속된 것으로 간주된다. 저임금노동, 파트타임 노동, 출장 노동이라는 현상은 어떤 자본주의 기업에게는 큰 이익을 준다. 이런 현상은 여성의 모순적 위치 때문에 존재한다. 즉 여성은 생산과 재생산 영역 사이에 붙잡혀 있으며, 또한 다른 수입에 의존하는 관계 안에 있다는 가정이 통용되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이 같은 착취 형태에 맞선 성공적인 조직화의 어려움은 여성의 완전한 평등에 대해 남성이 지배하는 노동조합운동의 수동성, 심지어 저항과 결합된다.19) 이러한 어려움은 진보적 입법이 여성 노동자들에 대한 최악의 차별적 관습 일부를 제거하도록 입안되었지만 이런 관습이 흔히 변화된 형태로 지속된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따라서 여성의 종속은 사회구성체의 상이한 수준을 통해 매개되고, 서로 구별되는 수많은 관계 안에 깊이 새겨져 있다. 그것은 단순한 인과관계로 환원되지 않으며, 분명 가사노동의 문제만으로 환원될 수 없다. 여성의 종속을 끝내기 위해서는 어떤 방법이 필요한가? 가내영역과 공적영역이라는 두 개의 주요 전선에서 투쟁해야 하며, 지금 투쟁하고 있다. 그 투쟁은 가정 내부의 억압 구조를 공격하고 가정 외부의 차별적 장벽을 제거하고 있다. 양 영역에서 투쟁은 특히 가내영역과 공적영역의 결합을 보여줌으로써, 다른 무엇보다도 성적 분업과 그 사회적 효과에 맞서는 것을 의미한다. 여성이 고용과 정치에 참여하도록 촉구하는 정통 사회주의와 현존하는 대부분의 사회주의 국가의 입장은 오직 외적 전선에만 집중하고 가정 내부의 관계를 평등의 원리에 입각해 개조하자는 동시적 요구를 무시하기 때문에 부적합하다. 가정 내부에서 평등화가 발생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유형의 수단이 필요하다. 가사노동 부담의 평등화는 아이가 없는 가족에서는 충분히 이뤄질 수 있으며, 이와 더불어 아이가 있는 경우에는 전통적인 가사노동 영역인 이 [육아]부분을 사회화하는 것이 필요하다. 작업장 내·외부에 적절한 육아시설을 공급하는 것은 가장 긴급하고, 명백하며 본질적인 요소다. 나아가 더 크게 필요한 것은 노동시간의 재조직화와 주간 노동시간의 단축을 통해 부모들이 원할 경우 육아 책임을 공유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최근 기술혁신은 자본주의에서 최초로 이를 현실적인 요구가 되게 한다. 물론 여성 차별을 제거하려는 공적부문의 변화를 동반하지 않는다면 이런 수단의 성공은 제한될 것이다. 가내영역의 평등이 필요로 하는 것은 여성이 남성과 평등한 조건에서 노동할 수 있는 것이며, 이는 여성의 고용기회가 확대되고 특권적인 남성임금에 대한 여성 의존이 해소된 결과일 것이다. <끝> [각주] 1) 이 논문의 첫 번째 초안은 1975년 6월 Anglo-French SSRC Women's Group에서 발표되었다. 여기에 도움을 주신 모든 분, 특히 소중한 논평을 해준 해롤드 볼페(Harold Wolpe), 바바라 테일러(Barbara Taylor), 헬렌 크롤리(Helen Crowley)에게 감사를 표한다.본문으로 2) 이러한 '역사'에 대한 설명으로는 Chris Middleton, 'Sexual Inequality and Stratification Theory' in The Sociological Analysis of Class Structure (ed) F. Parkin, London, 1975를 보라. 본문으로 3) 따라서 양자의 분석은 서로 다른 결론을 내리지만, 여성 정치를 토론할 때 경제 환원주의라는 경향을 공유한다. 본문으로 4) [대표적인 마르크스주의 이론인] Harrison 'The Political Economy of Housework' Bulletin of the Conference of Socialist Economists, Winter 1973. [대표적인 비(非)마르크스주의 이론인] C. Delphy, The Main Enemy, Women's Research and Resource Center 1976. 지난 몇 년 동안 가내 생산양식이라는 관념에 대한 관심이 되살아났다. Union of Radical Political Economy에서 여성을 다루는 특집호(Vol.9, No.3, 1997)의 편집자 글은 해리슨을 따라 가사노동을 예속적 생산양식(client mode of production)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입장은 여성의 종속에 대한 최근 회의에 제출된 논문에서도 채택되었다. 본문으로 5) 바렛(M. Barrett)과 맥킨토시(M. McIntosh)는 델피를 날카롭게 비판하면서 '여성이 결혼하지 않는 단순한 방책으로 종속에서 벗어날 수 있냐'고 묻는다. 'Towards a Materialist Feminism', Feminist Review, No. 1, January, 1979. 본문으로 6) 예를 들어 다음을 보라. J. Gardiner et al, 'Women's Domestic Labour', BCSE, Vol. IV, No. 2., S; Himmelweit and S. Mohun 'Domestic Labour and Capital', Cambridge Journal of Economics, Vol. 1, 1977; P. Smith 'Domestic Labour and Marx's Theory of Value' in A. Kuhn and A. M. Wolpe (eds) Towards A Materialist Feminism, London, 1978 (국역: {여성과 생산양식}, 한겨레, 1986). 본문으로 7) P. Brown 'Marx's Capital and Privatised Labour under Capitalism', MA Dissertation Essex University 1977. 본문으로 8) 동일한 방식으로 임금 역시 다양한 요인에 따라 결정된다. 그리고 비록 이론적으로 임금이 노동력을 그 가치대로 구매하는 것을 의미하더라도, 임금과 노동력의 가치 사이의 역사적인 관계는 노동자의 여러 범주 사이의 변화와 편차의 영향을 받는다. 본문으로 9) 나의 이전 논문은 이 문제를 매우 상세히 검토했다. 'Androcentrism in Marxist Anthropology' in Critique of Anthropology No 9/10, November 1977.본문으로 10) 이는 E. Balibar and L. Althusser, Reading Capital NLB, London 1975에서 발전되었다.본문으로 11) 비노동자 개념은 그릇된 인상을 줄 수 있다. 왜냐하면 그것이 착취계급이 생산과정에 참여하지 않는다고 함축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이 생산과정에 참여하는지 여부는(그들 중 다수는 여기에 참여한다) 그들이 해당 생산양식에서 잉여노동을 영유하는 문제와 아무 관련도 없다.본문으로 12) L. Vogel 'The Earthly Family' and I. Gerstein 'Domestic Work and Capitalism' in Radical America, Vol. 7, Nos 4/5 1973.본문으로 13) 이 정식화는 W. Seccombe, 'The Housewife and her labour under capitalism', NLR, No 83, January 1974에서 볼 수 있다. 밈멜바이트와 모훈(op. cit)은 가사노동을 자본주의 생산양식 안으로 통합해야 한다고 주장할 때 비슷한 견해를 표출한다.본문으로 14) 생산양식은 일정한 사회구성체를 지배하는 기본적인 사회적·경제적 관계를 명확히 정의하는 추상적인 분석 개념이고, 사회구성체는 일정한 사회에 조응하는 좀 더 광범위한 실체로 인식된다. 사회구성체는 하나 이상의 생산양식을 포함할 수 있다.본문으로 15) Karl Marx, Capital VolⅠ, pp. 571-573.본문으로 16) J. Gardiner 'Women's Domestic Labour'와 Coulson et al 'The Housewife and her labour under capitalism' NLR 89, 1975는 여성의 임금노동 진입이 지닌 중요성을 강조함으로써 이런 한계를 벗어난다.본문으로 17) 특히 M. MaIintosh 'The State and the Oppression of Women' In A. Kuhn and A. M. Wolpe (eds), Feminism and Materialism, London 1978을 보라. 본문으로 18) 이러한 주장을 정교하게 제시한 것으로는 V. Beechey, 'Female Wage Labour', in Capital and Class No 3 1977을 보라.본문으로 19) 제인 험프리스는 역사적 증거에 입각하여 여성의 고용 진입에 대한 노동조합의 저항이 자본에 대한 노동공급을 제한함으로써 가족임금을 유지하려는 욕망에서 유래한 것으로 볼 수 있다고 주장했다. 여성의 고용 진입은 남성의 노동력 가치를 떨어뜨릴 뿐만 아니라, 일반적으로 노동자계급 생계표준을 낮출 우려가 있다. 이는 문제가 있지만 흥미로운 주장이다. 노동자계급의 어떤 남성들에게는 핵가족의 유지가 이해관계가 걸린 문제일 수 있지만, 이로부터 여성을 고용 외부에 두는 것이 전체 노동자계급에게 반드시 유익하다는 결론이 도출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 같은 견해는 즉 노동자계급 남성과 여성의 이해가 모든 쟁점에 관해 동일하다고 가정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가정은 더 설득력 있게 입증되어야만 한다. J. Humphries, 'Class Struggle and the Persistence of the Working Class Family', Cambridge Journal of Economics, Vol 1 No. 3, 1977.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