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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6-11-03

    인간 시민권의 철학은 가능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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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스1%] 인간 시민권(Human Civic Rights)의 철학은 가능한가? 평등한 자유에 관한 새로운 반성 나는 여기서 평등한 자유(아이쿠아 리베르타스, aequa libertas)라는 통념에 관한 "새로운 반성들"을 제시하고 싶은데, 이 통념은 고대(키케로)부터 존 롤스와 아마르티아 센의 작업을 둘러싸고 벌어진 당대 논쟁들에 이르는 공화주의 정치 전통 전체에 걸쳐 존속해 왔으며, 나는 이전의 연구에서 이 통념을 평등한 자유(equaliberty, galibert , igualibertad, Gleiche Freiheit, or Gleichheit/Freheit 등)라는 압축된 혼성어 형태로 제시한 바 있다.2) 이 반성들을 통해 정치 철학의 고전적 문제 곧 시민권(rights of the citizen)의 민주적 정초(定礎, foundation)를 토론하는 데 기여하려는 것이 나의 의도다. 철학에서 정초는 원리 특히 구성(構成, constitutive) 원리의 해명을 뜻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시민권" 자체가 입헌(入憲, constitutional) 질서의 핵심이자 목표를 이룬다 성문적이든 불문적이든, 형상적이든 질료적이든, 규범적이든 구조적이든 고 상정할 때 여기서 문제는, 우리 역사에 깊이 뿌리박힌 철학적-정치적 언어유희를 따라 말하자면, 헌법의 구성(constitution of constitution) 같은 것이다(하지만 언어마다 외양은 다양하다: 프랑스어로는 constitution de la constitution이지만, 독일어로는 Konstitution der Verfassung이다.). 여기서 나는 이 구성의 구성을 '해체'(deconstruction, 탈-구축)의 정신에 따라 다루고 싶은데, 이는 파괴라거나 순전한 자격박탈이 아니라 탈-구축(Ab-bau)3), 전제에 대한 비판적 분석으로 이해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해체는 문제적인 요소들과 부정적, 이율배반적 또는 아포리아적 측면들을 끌어냄으로써, 개작이나 전위 심지어 역전(나는 결론 부분에서 이런 제안을 하고 싶은데, 이는 한나 아렌트의 일부 고찰에서 나름대로 영감을 얻은 것이다.)의 필연성을 이해할 수 있게 해 준다.4) 우리가 다루고 있는 문제를 파악하기 위해서 내가 간략히(그리고 희망컨대 논란의 소지가 없는 방식으로) 상기하고 싶은 것은, 본질적으로 민주주의적인 근대 시민권(citizenship)에 내재한 철학 혁명을 구성하는 것은 무엇이며, 그것이 왜 원리상의 난점을 제기하는가 하는 점이다. 근대 시민권, 곧 고전주의 시기에 시작하여 17~19세기의 인민 봉기와 헌법 개혁을 통해 이루어진 정치 변혁에 의해 전진적으로 설립되었으며, 무한한 과제를 구성한다고 널리 인정받는 근대 시민권을, 고대, 중세, 그리고 르네상스의 시민권과 구별 짓는 것은 사실 민주주의 원리의 발명이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와 키케로가 이미 말했듯, 폴리테이아(polliteia, 정치체)나 키비타스(civitas, 도시국가)의 원리는 본질적으로 민주주의적인 이우스 코뮤니스(ius communis, 공동의 법)와 콘센수스 포풀리(consensus populi, 인민의 동의)에 준거했다. 근대 시민권을 뚜렷하게 특징짓는 것은, 적어도 권리상 또는 원리상으로 본다면, 시민 지위의 보편화다. 즉 시민 지위는 특권이기를 멈추고 대신 정치에 대한 보편적 권리, 보편적 접근의 견지에서 파악되기에 이른다. 정치적 권리에 대한 권리(아렌트가 말했듯 "권리를 가질 권리")일 뿐만 아니라, 실질적인 정치 참여에 대한 권리가 바로 그것이다.5) 우리 근대인에게는 이론의 여지가 없는, 하지만 또한 동시에 불편한, 근대성의 유산을 대표하는 이러한 관점에서 쟁점이 되는 것은 우선 외연적(extensive) 보편성이다. 즉 세계정치적(cosmopolitical) 지평이 그것으로, 다양한 민족적, 연방적 시민권들, 또는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민족적 시민권과 국제법의 절합이 상이한 정도로 이러한 지평에 근접하고 있다. 하지만 내가 내포적(intensive) 보편성이라 부르려는 것이 훨씬 중요한데, 이는 공통의 인간성, 헤겔이나 포이어바흐 식으로 말하면 가퉁스베젠(Gattungswesen) 또는 "유적(類的) 존재"인 특성 없는 인간 고유성(properties)을 결여한 인간이라고까지 말할 수는 없겠지만 을 정치 참여의 지주 또는 "주체/기체"(基體, subject)로 제시한다. 이 내포적 보편성은 조건이나 지위, 본성을 이유로 한 시민권의 부인을 금지하고, 배제를 배제한다. 우리는 보편성의 개념화에 본래적인 이 부정성 또는 "부정의 부정"의 요소에 주목해야 한다. 근대적 시민권은 이상적으로(또는 이렇게 말하길 원한다면, 규범적으로) 인간성이라는 술어와 시민성이라는 술어의 동연성(同延性, coextensivity), 두 관점의 상호성, 등식을 설립한다. 유명한 철학 정식을 빌려 말하자면, 호모 시베 키비스(Homo sive Civis, 인간 즉 시민)다. 정치적 근대성을 기초 지었으며 우리의 헌법 전문 대부분에서 그 흔적이 발견되는 위대한 선언들에, 진술적이면서 동시에 수행적으로 표현되어 있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내가 다른 학자들을 따라 다른 곳에서 논증한 것처럼 이들 선언의 핵심 골자는, 이보다 시기적으로 앞서고 영미권의 입헌 전통에서 유사한 위치를 차지하는 『권리 장전』과 마찬가지로, 평등한 자유(equal liberty) 또는 "평등 자유"(equaliberty) 명제로 구성되어 있음이 밝혀진다.6) 이 명제는 특유의 이중 부정 또는 동시 부정 형태로, 평등은 자유 없이 불가능하고 자유 역시 평등 없이 불가능하다는 점, 따라서 자유와 평등은 상호 함축 관계에 있다고 정립한다. 그리하여 이 명제는 유적(類的) 인간과 시민권을 원리상 동치로 만들며, 이는 "인간의 권리"와 "시민의 권리"의 법적 일치(adequation)를 함축한다. 따라서 이는 근대에 전형적인 보편주의적 관점에 따라 헌법을 민주적으로 구성하는 원리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난점은 어디에서 비롯하는가? 집요하고 해결 불가능하기 십상인 난점, 민주적 보편주의를 포기하거나 와해시키는 방향으로 가서는 안 되며, 민주적 보편주의의 구성에 대한 비판을 발전시키는 방향으로 인도해야 할 그 난점은 어디서 나오는가? 내가 볼 때 이러한 난점을 낳는 이유들의 원천 또는 집합을 최소한 세 가지 정도는 제시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나는 민주주의적 헌정을 구성하는 명제 자체를 재고하거나 재정식화할 수 있게 해 주는 방식으로 이것들을 소묘해보고 싶다. 첫째(여기서 나는 물론 독창성을 주장하고 싶은 생각이 없다), 이 난점들은 민주주의적인 권리 구성/헌정(democratic constitution of rights)이라는 관념을 이중적으로 해석하는 데서 나오는데, 이는 기본권(게랄트 슈트르츠(Gerald Stourzh)의 주저 제목에서 환기된 기본권 민주주의(Grundrechtsdemokratie))라는 통념과 인민 주권 또는 입법적이고 입헌적인 "일반 의지"라는 통념 사이의 경합에서 표현된다.7) 둘째 나는 이 측면이 사실 첫 번째 측면과 무관하지 않을뿐더러, 추상적으로 규범적인 관점과 역사적·정치적으로 구체적인 관점 간의 대립보다 훨씬 더 만족스러운 해석을 제공해 줄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고 싶다 난점은 보편주의적 정초가 준거하는 인간 개념이 근본적으로 다의적인 개념이라는 사실에서 온다. 우리는 우주론적(cosmological)이거나 신학적인(또는 우주신학적인) 관점을 인간학적인 관점으로 바꾸는 역사적 대체 이는 근대성을 고유하게 특징짓는 대체다 의 결과 과거 신이나 세계로 형상화되던 최종적 준거점의 지위를 차지하게 된 인간이라는 용어가 두 가지 대립된 의미작용 또는 이해방식으로 즉시 분할된다는 "형이상학적 사실"을 상기함으로써 이를 표현할 수 있다. 공동체적 인간은 소유자로서의 인간과 동일하지 않으며, 내가 도입하고 싶은 용어법에 따르자면 "주체"로서의 인간은 "개인"으로서의 인간과 동일하지 않다. 비록 양자 모두 유적이며, 둘 다 시민과 일치하고 시민의 권리 구성을 내부로부터 결정하게 되어 있지만, 그렇다고 양자가 동일한 것은 아니다. 현실에서 이 이중성은 정치를 실질적으로 민주화하려는 또는 평등한 자유를 제도적으로 실현하려는, 항상 갈등적인 시도와 절차들 안에서 한 시도 그치지 않고 작동해 왔다. 셋째, 마지막으로 난점은 "정초"는 그 관념만이 아니라 과정 자체가 본질적이고 돌이킬 수 없이 이율배반적이라는 사실, 즉 자기 자신과 모순을 빚고 그 자신이 설립하는 원리를 부정할 수밖에 없다는 데서 온다. 여기서 나는 얼마간 구성/입헌 권력(constituent power)이라는 통념의 고전적 이율배반을 염두에 두고 있는데, 잘 알려진 것처럼 그 신학적 뿌리는 법이나 질서를 설립하는 궁극적 지점이 또한 필연적으로 모든 질서와 적법성이 해소되는 지점, 법질서의 보편성에 관한 예외 지점이자 그 법적 제약에 관한 해방의 지점 역시 표상하게 만든다는 데 있다(이 문제에 관해서는 후술하겠다). 하지만 내가 또한 염두에 두고 있는 점은 보편화 자체가 배제, 또는 심지어 내적 배제 절차와 분리할 수 없어 보이는 것 같다는 점이다. 이는 원리를 실현하는 데서 겪게 되는 우연한 난점들이나 역사적 상황에 따른 원리들의 단순한 경험적 제한 내지 특수화 같은 것들과는 사뭇 다른 것을 표상한다. 이는 구성/입헌이나 [헌법의] 재정초라는 관념 그 자체를 내부로부터 변용한다. 여기서 우리가 반드시 제기해야 하는 질문은 명백히 역설적인 것으로서, 이는 보편성 자체에 고유한 "유한성"의 종류는 무엇인지, "민주주의" 또는 "시민권"이라는 정치적 이름을 지닌 해방 과정의 무한한 또는 미완적 성격에 고유한 "유한성"은 무엇인지 하는 질문이다. 내가 방금 환기시킨 각각의 점들을 도식적이고 부분적으로나마 다시 살펴보기로 하자. 이 세 가지 경우에서 내 목표는 우리가 지도 원리로 삼는 권리의 민주적 구성/입헌이라는 관념에 본래적인 아포리아적 요소들을 각각 다른 관점에서 강조하는 것이 될 것이다. 내가 환기시킨 첫 번째 난점은, 모두 알다시피 정치적·철학적 담론과 분리할 수 없는 메타법적인 담론 안에서, 민주적 구성/입헌 질서의 지속적인 "정초"가 어떻게 가능한지, 따라서 그러한 질서에 대한 보증이 어떻게 제공될 수 있는지 그려볼 수 있는 두 가지 전망[기본권의 관점 대 인민 주권의 관점] 사이의 긴장과 관련된다. 여기 있는 여러분 모두가 잘 알고 있는 역사적 이유 때문에 이 난점은 1945년 이후 독일의 상황에서 특히 뚜렷하고 명료한 형태로 정식화되었다. 또한 우리는 그것이 제기하는 문제가 오늘날 각별한 함의를 지닌다는 점 역시 알고 있는데, 왜냐하면 권력과 공적 권위에 관한 입헌적 전망, 가능하다면 민주주의적인 구성/입헌의 전망을 탈(post)민족적이거나 상위(supra)민족적 공간, 특히 유럽 공간으로 확장하는 문제를 우리가 직면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실을 말하자면 이 두 측면(외연적 측면 상위민족체로의 이행 과 내포적 측면 공적 권력들의 민주화)은 분리할 수 없다. 나는 두 명의 동시대 독일 저자들에게서 몇 가지 정식화를 빌려올 생각인데, 그 중 한 명은 철학자 위르겐 하버마스(Jurgen Habermas)고, 다른 한 명은 법학자 에른스트-볼프강 뵈켄회르데(Ernst-Wolfgang B ckenf rde)로, 이들은 이러한 난점을 서로 다른 방식으로 해결하지만, 적어도 내 생각에는, 상당히 비슷한 용어로 이러한 난점을 제기하고 있다. 최근작인 『사실성과 타당성』의 핵심 장에서 하버마스는, 정치 질서를 내적으로 규제하는 "권리 체계"는 두 방향 중 하나로 "재구성"될 수 있다고 제안한다. 그는 "실정법이라는 수단에 따라 자신들의 공동의 삶을 규제"8)할 것을 합법적으로 지향하는 시민들 사이의 상호 인정 과정 안에서 작동하는 [권리 체계의 두 방향 사이의] "내적 긴장"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이 "양가적인 법적 타당성(validity)"을 한 편으로는 루소주의적인, 다른 한 편으로는 칸트주의적인 계보에 따라서 (이 점이 중요하다) 자율(성)의 원리를 이해하는 두 가지 서로 다른 방식에 철학적으로 준거 짓는다(여기서 논쟁을 벌일 수는 없지만, 사실 이는 하버마스에게는 루소와 칸트의 담론이 서로에 대해 단순히 외재적이지 않음을 의미한다). 권리 체계의 토대에 관한, 따라서 법적 측면, 도덕적 측면(주체적인 자기결정과 주체성들 사이의 상호 인정이라는 관념과 연결되어 있는)과 고유하게 정치적 측면 간의 내적 관계에 관한 하버마스의 논의 전체는 그가 관점들 사이의 "암묵적인 경합" 관계라고 부르는 것 쪽으로 나아가는 경향이 있는데, 여기서 두 가지 경합하는 관점은 입헌 질서가 기본권(Grundrechte)으로 간주되는 인권에 기초한다고 보는 관점과, 인민 주권 원리에 기초한다고 보는 관점이다.9) 하버마스는 이 두 가지 관점이 "근대 법을 정당화할 수 있는 유일한 관념들"이라고 본다.10) 과연 이 두 관점은 그것을 수단으로 합의, 또는 하버마스의 인상적인 정식화를 따르자면 "일인칭 복수"(us, nous, wir)11) - 이는 자기결정이나 권리들의 상호 인정이라는 실질적 과정에 의해 전제된다 - 를 생산함과 동시에 그것에 규범을 주거나 조절할 수 있는 유일한 두 가지 관념이다. 하지만 이 두 가지 관념은 보완적이기보다는 경합적인데, 특히 민주주의에 관한 "자유주의적"이고 "시민 공화주의적"(civic republican) 개념화 사이에서 되풀이되는 토론이 잘 보여주거니와, 이 두 관념은 각각 도식적으로 칸트주의적 표상(비록 나 자신은 로크주의적 요소를 강조해두고 싶지만)과 루소주의적 표상으로 귀속될 수 있다. 전자는 주관적 권리들12) 사이의 상호성과 합의, 또는 이러한 상호성의 본질적 내용을 이루는 평등한 자유를 규범의 보편성 위에 기초 짓는 경향이 있는데, 이러한 보편 규범은, 고유한 의미의 정치-법률 질서의 "상류"(upstream)에서, 즉 개인들이 이상적으로 서로서로를 대체할 수 있고 따라서 견해의 차이나 이해의 갈등을 중화할 수 있는 도덕적 영역에서 발견되어야 한다. 후자는 보통 "일반 의지"라 불리는 평등주의적 규범을 구체적(하버마스는 이를 "실존적"이라고까지 부른다.13))인 정치 행위 안에 통합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 정치 행위는 개인들의 사회화를 실현한다. 즉 개인들을 역사적 사회의 제도들 안에 통합시키는데, 이 때 국가의 강제력을 동원하거나 동원하지 않으면서, 개인에게 다시 한 번 적어도 이상적으로는 일반적인 공적 이해 안에서 사적이고 특수한 이해를 초월하도록 강제하기까지 한다. 주지하듯이 하버마스가 이 딜레마 그에 따르면 이는 근대 입헌 전통 전체와 동연적이다 에 대한 답변으로 제시하는 해법은 초월론적 형태를 취하는데, 여기서 그는 도덕화나 정치화의 방향으로 옮겨가지 않으면서도 정확히 권리 구성/입헌의 수준에 머무를 수 있게 해 주는 제 3의 통념을 도입한다. 하버마스는 이 용어가 "의사소통"(communicational) 영역 또는 "의사소통 행위의 영역"에서 발견된다고 보는데, 여기서는 "상호 이해를 지향하는 언어 사용의 발화수반적(illocutionary)인 구속력이 이성과 의지를 화합시키는 데 봉사하며," 이는 "합리적 담론의 참여자로서 공동의 법주체들은 논란이 되는 규범이 그것에 영향을 받을 가능성이 있는 모든 이들의 합의에 부합하는지, 또는 부합할 수 있는지 여부를 검토할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14) 따라서 평등한 자유는 단순히 강제되거나 또는 준칙화되지 않으며, 그것을 자신의 주권성의 표현으로 보는 어떤 정치체(body politic)에 의해 도구화되지도 않는다. 우리는 자연히 이러한 "해법"이 실제로는 순환적이지 않은가 하는 의문을 가질 만한데, 왜냐하면 의사소통 절차는 사실 상호 인정이나 "합의"의 원천이라기보다는 효과인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우리는 하버마스의 해법이 실제로는 인민 주권이나 집단의 자율성이라는 견지에서 [법·정치 체계] 정초를 바라보는 공화주의적이고 루소주의적인 전망보다는, 기본권이나 개별적인 권리 보장의 보편화의 견지에서 정초를 보는 칸트주의적인 도덕적 전망에 훨씬 가깝다는 느낌을 가지게 된다. 에른스트-볼프강 뵈켄회르데가 제시하는 관점에서는 사태가 사뭇 달라지고, 실천적 목적 면에서 본다면 정반대가 된다.15) 여기서 자세하게 논의할 수 없는 것이 유감스럽지만, 뵈켄회르데가 민주주의 전통에 본래적인(사실은 그 전통에 고유하게 속하는) "구성/입헌 권력"이라는 관념의 난점들과 기본권(Grundrechte) 또는 개인의 근본적 자유의 즉각적 타당성이라는 관념이 제기하는 문제들을 차례로 검토한다는 점을 상기시켜두고 싶다(기본권의 즉각적 타당성이라는 관념은, 인민 주권의 표현이 약소자들을 말살하거나 심지어 배제하게 되는 근대성의 보편주의와 합리주의에게는 치명적인 점이지만 가능성을 설명하고 그에 맞서기 위해 탈(脫)전체주의 헌법들이 다시 한 번 크게 힘주어 강조했던 점이다). 구성/입헌 권력이 완전한 의미를 갖는 것은 오직 그것이 주권을 기초 지음에 있어, 직접적인 정치 참여를 통해, 특히 해방적 봉기의 고유하게 구성적/입헌적인 순간에 능동적으로 구성되는, 집합적 전체로 간주되는 "인민" 뿐만 아니라, 뵈켄회르데가 미조직 인민이라고 부르는 이들, 권리 보장 및 헌법적 통제 체계로 온전히 통합되지 못한 채, 또는 이렇게 말하는 편이 더 낫다면 (예컨대 보통 선거권의 행사에서 볼 수 있듯이) 헌정의 단순한 한 기관으로 변형되지 못한 채 항상 그 아래에 머물러 있는 이들까지 자신의 토대로 삼는 한에서다. 다른 한 편, 기본권의 즉각적 타당성이라는 관념은 모든 시민들 사이에서 이 권리들을 분배한다는 관념, 그리고 이 분배의 실질적 실현이라는 관념과 분리할 수 없어 보인다. 나 자신은 이 후자의 관념 안에서 평등한 자유라는 관념의 강력한 표현을 읽고 싶다. 이제 이 분배라는 문제가 가동시키는 것은, 정치적 권리를 사회적 권리와 동일시하는 경향 뵈켄회르데는 이 양자 사이의 일치라는 질문이 불가피하게 제기될 것임을 인정하면서도 이 같은 경향을 명시적으로 거부한다 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기본권에 대한 규범적 개념화가 제도에 관한 또는 가치론에 관한 이론이나 개념화를 향해 나아가게 만드는 통제할 수 없는 운동(말하자면 "전방으로의 탈출(fuite en avant)"16)이다. 뵈켄회르데는 이 과정을 "기능적 민주주의"(functional democracy)라고 부르는데, 여기서 권리 및 의무의 분배를 지배하는 것은 추상적 규범이 아니라 기본적으로 정치적인 과정으로서 민주주의적 과정 자체다.17) 결국 뵈켄회르데가 두 가지 정초 그 역시 두 가지가 존재함을 인정한다 간 반정립의 초월을 파악하는 방식은 하버마스와 반대 방향으로 움직이거니와, 이는 그가 도덕적 차원에 비해 정치적 차원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이 정치적 차원을 인민의 구성/입헌 권력의 자기 규제 또는 자기 제한 과정으로 파악한다. 이 때문에 그는 "권력"(또는 "에너지"18)의 단계에서 규범(norm)과 정상성(normativity)의 단계로 이동할 수 있는데, 이는 정확히 그가 구성/입헌 권력 행사의 규칙 또는 조건에 관한 자신의 정의 안에 (그리고 그 행사 안에) "기본권"의 견지에서 정식화된 처방과 보장을 통합하는 한에서이며, 이는 최종 분석에서 보편주의적인 문화 전통에서 유래한다.19) 따라서 우리는 여기서 다시 두 가지 원리 사이의 균형의 탐색, 또는 (인민적) 구성/입헌 권력이라는 민주주의적 관념과 "기본권"이라는 (전자와는 약간 다른 의미를 지닌) 민주주의적 관념 간의 상호 한정에 대해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상호 한정에서 구성/입헌 권력 또는 인민 주권이라는 관념은 우선권을 보유하면서 결정적인 역할을 계속하는데, 이는 시민권의 민족적 성격20), 즉 시민권과 인류 사이의 차이에 관한 그의 고찰에서 특히 잘 나타난다. 그에 따르면 이러한 차이는, 추상적 개인주의나 세계시민주의에서 정식화될 수 있는 것처럼, 자신들이 선택한 권위에 통치 받고 그 권위의 통제 아래 있겠다는 요구의 단순한 담지자로서 개인들 다수(multitude)로 인민이 해체되지 않고, "인민"이나 더 나아가 "미조직" [인민이] 계속 정치적 주체로 남아 소속의 공동체를 이루기 위해서는 실제로 반드시 존속해야 한다. 내가 널리 알려진 이러한 입장들을 자세히 설명한 것은 이중의 가설을 제시하기 위해서다. 한 편으로, 고유하게 법적인 수준에서는 민주적 질서 또는 내가 평등한 자유라 부른 것을 일의적으로 정초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설사 평등한 자유가 의심의 여지없이 법적인 개념 내지 관념, 하나의 "권리 형태"라고 할지라도 그렇다. 하지만 어떤 의미에서 이는 조금도 놀라운 사실은 아닌데, 왜냐하면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바로 법질서가 자신을 정초할 수 있을 만한 "형이상학적 점"을 지정할 수 있는 가능성이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모든 자기정초는 내부로부터 불가피하게 타자성의 출현, 권리의 본질적인 불순성을 초래하거니와, 이는 반드시 도덕적이거나 역사-정치적인 기원에 따라 뒷받침되어야 하며, 양자 모두 어느 정도 불가피하게 이상화된다. 우리가 민주주의 질서를 고찰하고 있다고 해서 난점이 사라지지는 않으며, 오히려 이는 이러한 난점을 순수한 형태로 제시하여 그것과의 대결을 피할 수 없게 만든다. 이런 의미에서 뵈켄회르데처럼 "구성/입헌 권력"은 한계 개념이라고 말해야 할 뿐만 아니라, "기본권" 역시 어느 모로 보나 한계 개념이며, 따라서 항상 규정된 내용과 공식화를 찾아내야 한다고 말해야 옳을 것이다. 이 같은 한계들의 한계는 바로 이 두 가지 전망들의 합치 내지 일치다. 하지만 다른 한 편으로, 원리의 문제로 간주될 경우 이러한 일치는 엄밀히 말해 획득할 수 없는 것이라면, 또는 무한한 탐색의 대상이라면, 귀결 문제로 간주된다면, 이는 즉각 주어진 것으로, 곧 평등한 자유 그 자체로 나타난다. 평등한 자유는 서로에 대한 배제 없는 인민 주권과 자율성에 대한 요구와 다르지 않으며, 이는 그것이 보편적 상호성의 원리 또는 규칙에 따라 생겨난다는 것을 함의한다.21) 평등한 자유가 요구하는 것은 정치 참여와 의사 결정에 대한 개인들의 기본권의 실현이며, 구체적으로 본다면 여기에는 바로 표현과 양심의 자유라는 권리, 법적 보장만이 아니라 심지어 교육과 직업적 지위에 대한 "사회적 권리"도 포함된다. 이런 의미에서 평등한 자유는 이중 구속의 이름이다. 평등한 자유는 해방의 관념 또는 민주주의 관념의 서로 다른 표현[곧 인민 주권과 개인의 기본권] 사이에서 선택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것의 이름일 뿐만 아니라, 개인과 공동체 간의 정치적 연결을 해체시키지 않고서는 개인과 공동체 양자 사이에서 선택하는 것을 부당하게 만드는 것의 이름이기도 하다. 그것은 인류의 지평 내부에서 정립(되고 선언)된 원리들의 보편성과 동시에 "인민 주권"으로 설립된 결정의 자율성을 지칭한다. 내가 예고했던 마지막 두 가지 점에 관해서는 훨씬 소략하게, 심지어 전보를 치듯이 논해야만 할 상황이라서, 개략적인 정식화로 논의를 국한하도록 하겠다. 첫째(이것이 나의 두 번째 테제였다), 나는 이 두 가지 "정초적" 담론들의 감축할 수 없는 이원성과 근대적인 "인간" 문제의 역사 전체와 동연적인 철학적 이원성을 관련지어 볼 수 있다고 믿는다. 최소한 우리는 두 가지 이원성을 활용하여 서로를 해명하려고 시도해 볼 수 있다. 각각의 담론들, 또는 차라리 민주주의 담론의 두 측면인 "자유주의적"이고 "공화주의적"인 측면, 또는 원한다면 "개인주의적"이고 "공동체주의적"인 측면은, 어떤 의미에서 자신의 고유한 인간학을 함축한다. 다시 루소가, 그리고 칸트보다는 로크가 여기서 준거점의 역할을 할 수 있으며, 로크는 문제의 기원에, 루소는 문제의 이행점에 각각 자리 잡고 있다. 한 편에는 주체의 인간학 쪽으로의 경향이 있는데, 그 지평은 공동체를 "간주관성"으로 구성하는 것이며, 그 중심 문제는 루소의 작업에서 눈부실 정도로 분명한 것처럼 법에 대한 관계의 문제로서, 이는 뗄 수 없이 개인적이면서 집단적이고, "특수"하면서도 "일반"적인 문제다. 만일 모든 "세속화"에도 불구하고 주권이라는 신학 정치적 개념의 지울 수 없는 흔적이 근대 인간학의 한 복판에 남아 있다면, 이는 정치의 내재성 안에 법의 초월성을 통합하려는 처음 보기에는 불가능해 보이는 기획, 또는 [근대적] "주체"가 그 자신은 복종에서 면제되어 있는 외적이고 절대적이며 숭고한 권위22)에 종속된 수브

  • 2006-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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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스1%] 인간 시민권(Human Civic Rights)의 철학은 가능한가? 평등한 자유에 관한 새로운 반성 나는 여기서 평등한 자유(아이쿠아 리베르타스, aequa libertas)라는 통념에 관한 "새로운 반성들"을 제시하고 싶은데, 이 통념은 고대(키케로)부터 존 롤스와 아마르티아 센의 작업을 둘러싸고 벌어진 당대 논쟁들에 이르는 공화주의 정치 전통 전체에 걸쳐 존속해 왔으며, 나는 이전의 연구에서 이 통념을 평등한 자유(equaliberty, galibert , igualibertad, Gleiche Freiheit, or Gleichheit/Freheit 등)라는 압축된 혼성어 형태로 제시한 바 있다.2) 이 반성들을 통해 정치 철학의 고전적 문제 곧 시민권(rights of the citizen)의 민주적 정초(定礎, foundation)를 토론하는 데 기여하려는 것이 나의 의도다. 철학에서 정초는 원리 특히 구성(構成, constitutive) 원리의 해명을 뜻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시민권" 자체가 입헌(入憲, constitutional) 질서의 핵심이자 목표를 이룬다 성문적이든 불문적이든, 형상적이든 질료적이든, 규범적이든 구조적이든 고 상정할 때 여기서 문제는, 우리 역사에 깊이 뿌리박힌 철학적-정치적 언어유희를 따라 말하자면, 헌법의 구성(constitution of constitution) 같은 것이다(하지만 언어마다 외양은 다양하다: 프랑스어로는 constitution de la constitution이지만, 독일어로는 Konstitution der Verfassung이다.). 여기서 나는 이 구성의 구성을 '해체'(deconstruction, 탈-구축)의 정신에 따라 다루고 싶은데, 이는 파괴라거나 순전한 자격박탈이 아니라 탈-구축(Ab-bau)3), 전제에 대한 비판적 분석으로 이해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해체는 문제적인 요소들과 부정적, 이율배반적 또는 아포리아적 측면들을 끌어냄으로써, 개작이나 전위 심지어 역전(나는 결론 부분에서 이런 제안을 하고 싶은데, 이는 한나 아렌트의 일부 고찰에서 나름대로 영감을 얻은 것이다.)의 필연성을 이해할 수 있게 해 준다.4) 우리가 다루고 있는 문제를 파악하기 위해서 내가 간략히(그리고 희망컨대 논란의 소지가 없는 방식으로) 상기하고 싶은 것은, 본질적으로 민주주의적인 근대 시민권(citizenship)에 내재한 철학 혁명을 구성하는 것은 무엇이며, 그것이 왜 원리상의 난점을 제기하는가 하는 점이다. 근대 시민권, 곧 고전주의 시기에 시작하여 17~19세기의 인민 봉기와 헌법 개혁을 통해 이루어진 정치 변혁에 의해 전진적으로 설립되었으며, 무한한 과제를 구성한다고 널리 인정받는 근대 시민권을, 고대, 중세, 그리고 르네상스의 시민권과 구별 짓는 것은 사실 민주주의 원리의 발명이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와 키케로가 이미 말했듯, 폴리테이아(polliteia, 정치체)나 키비타스(civitas, 도시국가)의 원리는 본질적으로 민주주의적인 이우스 코뮤니스(ius communis, 공동의 법)와 콘센수스 포풀리(consensus populi, 인민의 동의)에 준거했다. 근대 시민권을 뚜렷하게 특징짓는 것은, 적어도 권리상 또는 원리상으로 본다면, 시민 지위의 보편화다. 즉 시민 지위는 특권이기를 멈추고 대신 정치에 대한 보편적 권리, 보편적 접근의 견지에서 파악되기에 이른다. 정치적 권리에 대한 권리(아렌트가 말했듯 "권리를 가질 권리")일 뿐만 아니라, 실질적인 정치 참여에 대한 권리가 바로 그것이다.5) 우리 근대인에게는 이론의 여지가 없는, 하지만 또한 동시에 불편한, 근대성의 유산을 대표하는 이러한 관점에서 쟁점이 되는 것은 우선 외연적(extensive) 보편성이다. 즉 세계정치적(cosmopolitical) 지평이 그것으로, 다양한 민족적, 연방적 시민권들, 또는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민족적 시민권과 국제법의 절합이 상이한 정도로 이러한 지평에 근접하고 있다. 하지만 내가 내포적(intensive) 보편성이라 부르려는 것이 훨씬 중요한데, 이는 공통의 인간성, 헤겔이나 포이어바흐 식으로 말하면 가퉁스베젠(Gattungswesen) 또는 "유적(類的) 존재"인 특성 없는 인간 고유성(properties)을 결여한 인간이라고까지 말할 수는 없겠지만 을 정치 참여의 지주 또는 "주체/기체"(基體, subject)로 제시한다. 이 내포적 보편성은 조건이나 지위, 본성을 이유로 한 시민권의 부인을 금지하고, 배제를 배제한다. 우리는 보편성의 개념화에 본래적인 이 부정성 또는 "부정의 부정"의 요소에 주목해야 한다. 근대적 시민권은 이상적으로(또는 이렇게 말하길 원한다면, 규범적으로) 인간성이라는 술어와 시민성이라는 술어의 동연성(同延性, coextensivity), 두 관점의 상호성, 등식을 설립한다. 유명한 철학 정식을 빌려 말하자면, 호모 시베 키비스(Homo sive Civis, 인간 즉 시민)다. 정치적 근대성을 기초 지었으며 우리의 헌법 전문 대부분에서 그 흔적이 발견되는 위대한 선언들에, 진술적이면서 동시에 수행적으로 표현되어 있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내가 다른 학자들을 따라 다른 곳에서 논증한 것처럼 이들 선언의 핵심 골자는, 이보다 시기적으로 앞서고 영미권의 입헌 전통에서 유사한 위치를 차지하는 『권리 장전』과 마찬가지로, 평등한 자유(equal liberty) 또는 "평등 자유"(equaliberty) 명제로 구성되어 있음이 밝혀진다.6) 이 명제는 특유의 이중 부정 또는 동시 부정 형태로, 평등은 자유 없이 불가능하고 자유 역시 평등 없이 불가능하다는 점, 따라서 자유와 평등은 상호 함축 관계에 있다고 정립한다. 그리하여 이 명제는 유적(類的) 인간과 시민권을 원리상 동치로 만들며, 이는 "인간의 권리"와 "시민의 권리"의 법적 일치(adequation)를 함축한다. 따라서 이는 근대에 전형적인 보편주의적 관점에 따라 헌법을 민주적으로 구성하는 원리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난점은 어디에서 비롯하는가? 집요하고 해결 불가능하기 십상인 난점, 민주적 보편주의를 포기하거나 와해시키는 방향으로 가서는 안 되며, 민주적 보편주의의 구성에 대한 비판을 발전시키는 방향으로 인도해야 할 그 난점은 어디서 나오는가? 내가 볼 때 이러한 난점을 낳는 이유들의 원천 또는 집합을 최소한 세 가지 정도는 제시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나는 민주주의적 헌정을 구성하는 명제 자체를 재고하거나 재정식화할 수 있게 해 주는 방식으로 이것들을 소묘해보고 싶다. 첫째(여기서 나는 물론 독창성을 주장하고 싶은 생각이 없다), 이 난점들은 민주주의적인 권리 구성/헌정(democratic constitution of rights)이라는 관념을 이중적으로 해석하는 데서 나오는데, 이는 기본권(게랄트 슈트르츠(Gerald Stourzh)의 주저 제목에서 환기된 기본권 민주주의(Grundrechtsdemokratie))라는 통념과 인민 주권 또는 입법적이고 입헌적인 "일반 의지"라는 통념 사이의 경합에서 표현된다.7) 둘째 나는 이 측면이 사실 첫 번째 측면과 무관하지 않을뿐더러, 추상적으로 규범적인 관점과 역사적·정치적으로 구체적인 관점 간의 대립보다 훨씬 더 만족스러운 해석을 제공해 줄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고 싶다 난점은 보편주의적 정초가 준거하는 인간 개념이 근본적으로 다의적인 개념이라는 사실에서 온다. 우리는 우주론적(cosmological)이거나 신학적인(또는 우주신학적인) 관점을 인간학적인 관점으로 바꾸는 역사적 대체 이는 근대성을 고유하게 특징짓는 대체다 의 결과 과거 신이나 세계로 형상화되던 최종적 준거점의 지위를 차지하게 된 인간이라는 용어가 두 가지 대립된 의미작용 또는 이해방식으로 즉시 분할된다는 "형이상학적 사실"을 상기함으로써 이를 표현할 수 있다. 공동체적 인간은 소유자로서의 인간과 동일하지 않으며, 내가 도입하고 싶은 용어법에 따르자면 "주체"로서의 인간은 "개인"으로서의 인간과 동일하지 않다. 비록 양자 모두 유적이며, 둘 다 시민과 일치하고 시민의 권리 구성을 내부로부터 결정하게 되어 있지만, 그렇다고 양자가 동일한 것은 아니다. 현실에서 이 이중성은 정치를 실질적으로 민주화하려는 또는 평등한 자유를 제도적으로 실현하려는, 항상 갈등적인 시도와 절차들 안에서 한 시도 그치지 않고 작동해 왔다. 셋째, 마지막으로 난점은 "정초"는 그 관념만이 아니라 과정 자체가 본질적이고 돌이킬 수 없이 이율배반적이라는 사실, 즉 자기 자신과 모순을 빚고 그 자신이 설립하는 원리를 부정할 수밖에 없다는 데서 온다. 여기서 나는 얼마간 구성/입헌 권력(constituent power)이라는 통념의 고전적 이율배반을 염두에 두고 있는데, 잘 알려진 것처럼 그 신학적 뿌리는 법이나 질서를 설립하는 궁극적 지점이 또한 필연적으로 모든 질서와 적법성이 해소되는 지점, 법질서의 보편성에 관한 예외 지점이자 그 법적 제약에 관한 해방의 지점 역시 표상하게 만든다는 데 있다(이 문제에 관해서는 후술하겠다). 하지만 내가 또한 염두에 두고 있는 점은 보편화 자체가 배제, 또는 심지어 내적 배제 절차와 분리할 수 없어 보이는 것 같다는 점이다. 이는 원리를 실현하는 데서 겪게 되는 우연한 난점들이나 역사적 상황에 따른 원리들의 단순한 경험적 제한 내지 특수화 같은 것들과는 사뭇 다른 것을 표상한다. 이는 구성/입헌이나 [헌법의] 재정초라는 관념 그 자체를 내부로부터 변용한다. 여기서 우리가 반드시 제기해야 하는 질문은 명백히 역설적인 것으로서, 이는 보편성 자체에 고유한 "유한성"의 종류는 무엇인지, "민주주의" 또는 "시민권"이라는 정치적 이름을 지닌 해방 과정의 무한한 또는 미완적 성격에 고유한 "유한성"은 무엇인지 하는 질문이다. 내가 방금 환기시킨 각각의 점들을 도식적이고 부분적으로나마 다시 살펴보기로 하자. 이 세 가지 경우에서 내 목표는 우리가 지도 원리로 삼는 권리의 민주적 구성/입헌이라는 관념에 본래적인 아포리아적 요소들을 각각 다른 관점에서 강조하는 것이 될 것이다. 내가 환기시킨 첫 번째 난점은, 모두 알다시피 정치적·철학적 담론과 분리할 수 없는 메타법적인 담론 안에서, 민주적 구성/입헌 질서의 지속적인 "정초"가 어떻게 가능한지, 따라서 그러한 질서에 대한 보증이 어떻게 제공될 수 있는지 그려볼 수 있는 두 가지 전망[기본권의 관점 대 인민 주권의 관점] 사이의 긴장과 관련된다. 여기 있는 여러분 모두가 잘 알고 있는 역사적 이유 때문에 이 난점은 1945년 이후 독일의 상황에서 특히 뚜렷하고 명료한 형태로 정식화되었다. 또한 우리는 그것이 제기하는 문제가 오늘날 각별한 함의를 지닌다는 점 역시 알고 있는데, 왜냐하면 권력과 공적 권위에 관한 입헌적 전망, 가능하다면 민주주의적인 구성/입헌의 전망을 탈(post)민족적이거나 상위(supra)민족적 공간, 특히 유럽 공간으로 확장하는 문제를 우리가 직면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실을 말하자면 이 두 측면(외연적 측면 상위민족체로의 이행 과 내포적 측면 공적 권력들의 민주화)은 분리할 수 없다. 나는 두 명의 동시대 독일 저자들에게서 몇 가지 정식화를 빌려올 생각인데, 그 중 한 명은 철학자 위르겐 하버마스(Jurgen Habermas)고, 다른 한 명은 법학자 에른스트-볼프강 뵈켄회르데(Ernst-Wolfgang B ckenf rde)로, 이들은 이러한 난점을 서로 다른 방식으로 해결하지만, 적어도 내 생각에는, 상당히 비슷한 용어로 이러한 난점을 제기하고 있다. 최근작인 『사실성과 타당성』의 핵심 장에서 하버마스는, 정치 질서를 내적으로 규제하는 "권리 체계"는 두 방향 중 하나로 "재구성"될 수 있다고 제안한다. 그는 "실정법이라는 수단에 따라 자신들의 공동의 삶을 규제"8)할 것을 합법적으로 지향하는 시민들 사이의 상호 인정 과정 안에서 작동하는 [권리 체계의 두 방향 사이의] "내적 긴장"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이 "양가적인 법적 타당성(validity)"을 한 편으로는 루소주의적인, 다른 한 편으로는 칸트주의적인 계보에 따라서 (이 점이 중요하다) 자율(성)의 원리를 이해하는 두 가지 서로 다른 방식에 철학적으로 준거 짓는다(여기서 논쟁을 벌일 수는 없지만, 사실 이는 하버마스에게는 루소와 칸트의 담론이 서로에 대해 단순히 외재적이지 않음을 의미한다). 권리 체계의 토대에 관한, 따라서 법적 측면, 도덕적 측면(주체적인 자기결정과 주체성들 사이의 상호 인정이라는 관념과 연결되어 있는)과 고유하게 정치적 측면 간의 내적 관계에 관한 하버마스의 논의 전체는 그가 관점들 사이의 "암묵적인 경합" 관계라고 부르는 것 쪽으로 나아가는 경향이 있는데, 여기서 두 가지 경합하는 관점은 입헌 질서가 기본권(Grundrechte)으로 간주되는 인권에 기초한다고 보는 관점과, 인민 주권 원리에 기초한다고 보는 관점이다.9) 하버마스는 이 두 가지 관점이 "근대 법을 정당화할 수 있는 유일한 관념들"이라고 본다.10) 과연 이 두 관점은 그것을 수단으로 합의, 또는 하버마스의 인상적인 정식화를 따르자면 "일인칭 복수"(us, nous, wir)11) - 이는 자기결정이나 권리들의 상호 인정이라는 실질적 과정에 의해 전제된다 - 를 생산함과 동시에 그것에 규범을 주거나 조절할 수 있는 유일한 두 가지 관념이다. 하지만 이 두 가지 관념은 보완적이기보다는 경합적인데, 특히 민주주의에 관한 "자유주의적"이고 "시민 공화주의적"(civic republican) 개념화 사이에서 되풀이되는 토론이 잘 보여주거니와, 이 두 관념은 각각 도식적으로 칸트주의적 표상(비록 나 자신은 로크주의적 요소를 강조해두고 싶지만)과 루소주의적 표상으로 귀속될 수 있다. 전자는 주관적 권리들12) 사이의 상호성과 합의, 또는 이러한 상호성의 본질적 내용을 이루는 평등한 자유를 규범의 보편성 위에 기초 짓는 경향이 있는데, 이러한 보편 규범은, 고유한 의미의 정치-법률 질서의 "상류"(upstream)에서, 즉 개인들이 이상적으로 서로서로를 대체할 수 있고 따라서 견해의 차이나 이해의 갈등을 중화할 수 있는 도덕적 영역에서 발견되어야 한다. 후자는 보통 "일반 의지"라 불리는 평등주의적 규범을 구체적(하버마스는 이를 "실존적"이라고까지 부른다.13))인 정치 행위 안에 통합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 정치 행위는 개인들의 사회화를 실현한다. 즉 개인들을 역사적 사회의 제도들 안에 통합시키는데, 이 때 국가의 강제력을 동원하거나 동원하지 않으면서, 개인에게 다시 한 번 적어도 이상적으로는 일반적인 공적 이해 안에서 사적이고 특수한 이해를 초월하도록 강제하기까지 한다. 주지하듯이 하버마스가 이 딜레마 그에 따르면 이는 근대 입헌 전통 전체와 동연적이다 에 대한 답변으로 제시하는 해법은 초월론적 형태를 취하는데, 여기서 그는 도덕화나 정치화의 방향으로 옮겨가지 않으면서도 정확히 권리 구성/입헌의 수준에 머무를 수 있게 해 주는 제 3의 통념을 도입한다. 하버마스는 이 용어가 "의사소통"(communicational) 영역 또는 "의사소통 행위의 영역"에서 발견된다고 보는데, 여기서는 "상호 이해를 지향하는 언어 사용의 발화수반적(illocutionary)인 구속력이 이성과 의지를 화합시키는 데 봉사하며," 이는 "합리적 담론의 참여자로서 공동의 법주체들은 논란이 되는 규범이 그것에 영향을 받을 가능성이 있는 모든 이들의 합의에 부합하는지, 또는 부합할 수 있는지 여부를 검토할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14) 따라서 평등한 자유는 단순히 강제되거나 또는 준칙화되지 않으며, 그것을 자신의 주권성의 표현으로 보는 어떤 정치체(body politic)에 의해 도구화되지도 않는다. 우리는 자연히 이러한 "해법"이 실제로는 순환적이지 않은가 하는 의문을 가질 만한데, 왜냐하면 의사소통 절차는 사실 상호 인정이나 "합의"의 원천이라기보다는 효과인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우리는 하버마스의 해법이 실제로는 인민 주권이나 집단의 자율성이라는 견지에서 [법·정치 체계] 정초를 바라보는 공화주의적이고 루소주의적인 전망보다는, 기본권이나 개별적인 권리 보장의 보편화의 견지에서 정초를 보는 칸트주의적인 도덕적 전망에 훨씬 가깝다는 느낌을 가지게 된다. 에른스트-볼프강 뵈켄회르데가 제시하는 관점에서는 사태가 사뭇 달라지고, 실천적 목적 면에서 본다면 정반대가 된다.15) 여기서 자세하게 논의할 수 없는 것이 유감스럽지만, 뵈켄회르데가 민주주의 전통에 본래적인(사실은 그 전통에 고유하게 속하는) "구성/입헌 권력"이라는 관념의 난점들과 기본권(Grundrechte) 또는 개인의 근본적 자유의 즉각적 타당성이라는 관념이 제기하는 문제들을 차례로 검토한다는 점을 상기시켜두고 싶다(기본권의 즉각적 타당성이라는 관념은, 인민 주권의 표현이 약소자들을 말살하거나 심지어 배제하게 되는 근대성의 보편주의와 합리주의에게는 치명적인 점이지만 가능성을 설명하고 그에 맞서기 위해 탈(脫)전체주의 헌법들이 다시 한 번 크게 힘주어 강조했던 점이다). 구성/입헌 권력이 완전한 의미를 갖는 것은 오직 그것이 주권을 기초 지음에 있어, 직접적인 정치 참여를 통해, 특히 해방적 봉기의 고유하게 구성적/입헌적인 순간에 능동적으로 구성되는, 집합적 전체로 간주되는 "인민" 뿐만 아니라, 뵈켄회르데가 미조직 인민이라고 부르는 이들, 권리 보장 및 헌법적 통제 체계로 온전히 통합되지 못한 채, 또는 이렇게 말하는 편이 더 낫다면 (예컨대 보통 선거권의 행사에서 볼 수 있듯이) 헌정의 단순한 한 기관으로 변형되지 못한 채 항상 그 아래에 머물러 있는 이들까지 자신의 토대로 삼는 한에서다. 다른 한 편, 기본권의 즉각적 타당성이라는 관념은 모든 시민들 사이에서 이 권리들을 분배한다는 관념, 그리고 이 분배의 실질적 실현이라는 관념과 분리할 수 없어 보인다. 나 자신은 이 후자의 관념 안에서 평등한 자유라는 관념의 강력한 표현을 읽고 싶다. 이제 이 분배라는 문제가 가동시키는 것은, 정치적 권리를 사회적 권리와 동일시하는 경향 뵈켄회르데는 이 양자 사이의 일치라는 질문이 불가피하게 제기될 것임을 인정하면서도 이 같은 경향을 명시적으로 거부한다 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기본권에 대한 규범적 개념화가 제도에 관한 또는 가치론에 관한 이론이나 개념화를 향해 나아가게 만드는 통제할 수 없는 운동(말하자면 "전방으로의 탈출(fuite en avant)"16)이다. 뵈켄회르데는 이 과정을 "기능적 민주주의"(functional democracy)라고 부르는데, 여기서 권리 및 의무의 분배를 지배하는 것은 추상적 규범이 아니라 기본적으로 정치적인 과정으로서 민주주의적 과정 자체다.17) 결국 뵈켄회르데가 두 가지 정초 그 역시 두 가지가 존재함을 인정한다 간 반정립의 초월을 파악하는 방식은 하버마스와 반대 방향으로 움직이거니와, 이는 그가 도덕적 차원에 비해 정치적 차원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이 정치적 차원을 인민의 구성/입헌 권력의 자기 규제 또는 자기 제한 과정으로 파악한다. 이 때문에 그는 "권력"(또는 "에너지"18)의 단계에서 규범(norm)과 정상성(normativity)의 단계로 이동할 수 있는데, 이는 정확히 그가 구성/입헌 권력 행사의 규칙 또는 조건에 관한 자신의 정의 안에 (그리고 그 행사 안에) "기본권"의 견지에서 정식화된 처방과 보장을 통합하는 한에서이며, 이는 최종 분석에서 보편주의적인 문화 전통에서 유래한다.19) 따라서 우리는 여기서 다시 두 가지 원리 사이의 균형의 탐색, 또는 (인민적) 구성/입헌 권력이라는 민주주의적 관념과 "기본권"이라는 (전자와는 약간 다른 의미를 지닌) 민주주의적 관념 간의 상호 한정에 대해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상호 한정에서 구성/입헌 권력 또는 인민 주권이라는 관념은 우선권을 보유하면서 결정적인 역할을 계속하는데, 이는 시민권의 민족적 성격20), 즉 시민권과 인류 사이의 차이에 관한 그의 고찰에서 특히 잘 나타난다. 그에 따르면 이러한 차이는, 추상적 개인주의나 세계시민주의에서 정식화될 수 있는 것처럼, 자신들이 선택한 권위에 통치 받고 그 권위의 통제 아래 있겠다는 요구의 단순한 담지자로서 개인들 다수(multitude)로 인민이 해체되지 않고, "인민"이나 더 나아가 "미조직" [인민이] 계속 정치적 주체로 남아 소속의 공동체를 이루기 위해서는 실제로 반드시 존속해야 한다. 내가 널리 알려진 이러한 입장들을 자세히 설명한 것은 이중의 가설을 제시하기 위해서다. 한 편으로, 고유하게 법적인 수준에서는 민주적 질서 또는 내가 평등한 자유라 부른 것을 일의적으로 정초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설사 평등한 자유가 의심의 여지없이 법적인 개념 내지 관념, 하나의 "권리 형태"라고 할지라도 그렇다. 하지만 어떤 의미에서 이는 조금도 놀라운 사실은 아닌데, 왜냐하면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바로 법질서가 자신을 정초할 수 있을 만한 "형이상학적 점"을 지정할 수 있는 가능성이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모든 자기정초는 내부로부터 불가피하게 타자성의 출현, 권리의 본질적인 불순성을 초래하거니와, 이는 반드시 도덕적이거나 역사-정치적인 기원에 따라 뒷받침되어야 하며, 양자 모두 어느 정도 불가피하게 이상화된다. 우리가 민주주의 질서를 고찰하고 있다고 해서 난점이 사라지지는 않으며, 오히려 이는 이러한 난점을 순수한 형태로 제시하여 그것과의 대결을 피할 수 없게 만든다. 이런 의미에서 뵈켄회르데처럼 "구성/입헌 권력"은 한계 개념이라고 말해야 할 뿐만 아니라, "기본권" 역시 어느 모로 보나 한계 개념이며, 따라서 항상 규정된 내용과 공식화를 찾아내야 한다고 말해야 옳을 것이다. 이 같은 한계들의 한계는 바로 이 두 가지 전망들의 합치 내지 일치다. 하지만 다른 한 편으로, 원리의 문제로 간주될 경우 이러한 일치는 엄밀히 말해 획득할 수 없는 것이라면, 또는 무한한 탐색의 대상이라면, 귀결 문제로 간주된다면, 이는 즉각 주어진 것으로, 곧 평등한 자유 그 자체로 나타난다. 평등한 자유는 서로에 대한 배제 없는 인민 주권과 자율성에 대한 요구와 다르지 않으며, 이는 그것이 보편적 상호성의 원리 또는 규칙에 따라 생겨난다는 것을 함의한다.21) 평등한 자유가 요구하는 것은 정치 참여와 의사 결정에 대한 개인들의 기본권의 실현이며, 구체적으로 본다면 여기에는 바로 표현과 양심의 자유라는 권리, 법적 보장만이 아니라 심지어 교육과 직업적 지위에 대한 "사회적 권리"도 포함된다. 이런 의미에서 평등한 자유는 이중 구속의 이름이다. 평등한 자유는 해방의 관념 또는 민주주의 관념의 서로 다른 표현[곧 인민 주권과 개인의 기본권] 사이에서 선택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것의 이름일 뿐만 아니라, 개인과 공동체 간의 정치적 연결을 해체시키지 않고서는 개인과 공동체 양자 사이에서 선택하는 것을 부당하게 만드는 것의 이름이기도 하다. 그것은 인류의 지평 내부에서 정립(되고 선언)된 원리들의 보편성과 동시에 "인민 주권"으로 설립된 결정의 자율성을 지칭한다. 내가 예고했던 마지막 두 가지 점에 관해서는 훨씬 소략하게, 심지어 전보를 치듯이 논해야만 할 상황이라서, 개략적인 정식화로 논의를 국한하도록 하겠다. 첫째(이것이 나의 두 번째 테제였다), 나는 이 두 가지 "정초적" 담론들의 감축할 수 없는 이원성과 근대적인 "인간" 문제의 역사 전체와 동연적인 철학적 이원성을 관련지어 볼 수 있다고 믿는다. 최소한 우리는 두 가지 이원성을 활용하여 서로를 해명하려고 시도해 볼 수 있다. 각각의 담론들, 또는 차라리 민주주의 담론의 두 측면인 "자유주의적"이고 "공화주의적"인 측면, 또는 원한다면 "개인주의적"이고 "공동체주의적"인 측면은, 어떤 의미에서 자신의 고유한 인간학을 함축한다. 다시 루소가, 그리고 칸트보다는 로크가 여기서 준거점의 역할을 할 수 있으며, 로크는 문제의 기원에, 루소는 문제의 이행점에 각각 자리 잡고 있다. 한 편에는 주체의 인간학 쪽으로의 경향이 있는데, 그 지평은 공동체를 "간주관성"으로 구성하는 것이며, 그 중심 문제는 루소의 작업에서 눈부실 정도로 분명한 것처럼 법에 대한 관계의 문제로서, 이는 뗄 수 없이 개인적이면서 집단적이고, "특수"하면서도 "일반"적인 문제다. 만일 모든 "세속화"에도 불구하고 주권이라는 신학 정치적 개념의 지울 수 없는 흔적이 근대 인간학의 한 복판에 남아 있다면, 이는 정치의 내재성 안에 법의 초월성을 통합하려는 처음 보기에는 불가능해 보이는 기획, 또는 [근대적] "주체"가 그 자신은 복종에서 면제되어 있는 외적이고 절대적이며 숭고한 권위22)에 종속된 수브

  • 2006-11-03

    '보여지는 나'와 '바라보는 나'를 일치시키기 위한 성장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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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삶이 내게 별반 호의적이지 않다는 것을 알았기에 열두 살에 성장을 멈췄다'고 읊조릴 줄 아는 열두살짜리 주인공이 등장하는 은희경의『새의 선물』은 나에겐 참으로 상콤한 충격이었다. 내가 지금까지 주로 봐왔던 성장소설에는 사내 아이들의 주먹다짐이 있었고, 주먹다짐을 통해 우정을 확인한 사내 아이들은 옆집 누나나 사촌 누나 등등의 몸을 몰래 훔쳐보는 과정을 통해 몽정을 경험하며, 그 아이들이 성장하는 과정에는 언제나 푸근하고 한결같은 사랑을 나누어줄 주 아는 어머니가 든든하게 서 있는 모습이 전부였던 것이다. 그러나『새의 선물』에는 어머니의 한결 같은 사랑도, 남자 아이들의 시선과 입장에서 다루어지는 性도 존재하지 않았다. 생각해보면 왜 그토록 많은 성장소설들은 ‘여자아이들의 성장’을 주제로 한 글쓰기에 인색했던 것일까? 작가들이 여자아이들의 성장을 다루는 것에 조금만 더 관심을 기울였더라도, 여성들의 삶을 이해할 수 있는 토대가 더 탄탄하게 만들어질 수 있지 않았을까? 라면서 엉뚱하게 나는 작가들을 탓해보기도 한다. 소설 속에서 주인공 진희는, 자신의 감정을 조절하기 위해 상대 또는 외부가 느낄 수 있는 ‘보여지는 나’와 자기 자신의 내면을 스스로 바라볼 때 느껴지는 모습인 ‘바라보는 나’를 분리한다. 이 부분에서 나는 소설과는 다른 의미에서의 두개의 자아를 경험 한다. 바로 상대 또는 외부가 느낄 수 있는, 그리고 이성적으로 판단했을 때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말할 수 있는 ‘보여지는 나’와 내 스스로의 내면과 감정에 충실한 ‘바라보는 나’. 이 ‘보여지는 나’와 ‘바라보는 나’ 서로 끊임없이 충돌하고 있기 때문에 한 몸뚱아리에서 이 두개의 자아를 경험하는 것은 언제나 고통스러운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내 안에 존재하는 ‘보여지는 나’와 ‘바라보는 나’는 나의 감정을 조절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궁극적으로 그 두개를 합치시키는 과정인 것이다. 그런데 합치되지 않으니까, 그러니까 그 게 참 괴로운 거다. 그렇다면 내 안의 이 두개의 자아가 가장 극심하게 대립하는 순간은 언제인가? 그 것은 아마도 운동을 하는 순간, 그 중에서도 ‘페미니즘’을 말하는 순간 일 것이다. 과격한 몸싸움을 하는 순간이면 내 안의 두개의 자아들은 서로 삐질삐질 엉겨붙어 있는데 ‘보여지는 나’는 “여자들은 모두 뒤쪽으로 비키세요.”라는 언행에 대해서는 정치적으로 부당하다고 한 치의 주저함도 없이 말하고 있지만, ‘바라보는 나’는 그런 언행에 보란 듯이 악착같이 싸우지 않고 울상을 짓고 서 있다. 서로 모르는 사람들끼리 몸이 부대끼는 그 순간과 후덥지근한 공기, 그 팽팽한 긴장감과 전경과의 기 싸움, 그리고 전선은 꼭 공권력 그 하나에만 맞춰져 있다는 것이 아님을 잊지 않고 일깨워주는 남성 동지들의 행태까지. 이런 것들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은 비단 나 혼자만 느끼는 것은 아닐 지언데, ‘바라보는 나’는 두렵더라도, ‘보여지는 나’는 이런 굴절된 현실에 맞서서 정말 그 남들 보란 듯이 싸울 수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보여지는 나’는 가족은 여성에게 가장 억압적인 것이다 라고 말하지만, ‘바라보는 나’는 가족이라는 구조를 스스로 해체할 용기를 조금도 갖고 있지 못하고 있다. 아직도 ‘바라보는 나’는 엄마의 희생으로 인해 이루어지는 세탁, 집안청소, 요리 등을 날로 먹는 것이 굉장히 익숙하고도 편한 거다. 아직도 아주 많은 경우 ‘보여지는 나’와 ‘바라보는 나’는 일치하고 있지 못하다. 그렇다면 ‘보여지는 나’와 ‘바라보는 나’가 일치될 수 있는 페미니스트의 삶이란 무엇일까? 페미니즘을 고민하면서 꼭 해결해야 할 과제인 연애, 결혼, 가족문제 등에 있어서 ‘보여지는 나’와 ‘바라보는 나’가 분리되는 나를 보면서 앞으로 스스로를 여성주의자, 페미니스트라고 쉽사리 호명하지 말자고 생각했던 적도 많았다. 우리의 운동은, 그리고 페미니즘은 어떠해야 하는가? 그 것은 ‘보여지는 나’와 ‘바라보는 나’를 일치시키는 과정이 아닐까라는 고민을 해본다. 또한 그 것은 단순히 개인의 문제만으로 치환될 수 없을 것이다. ‘보여지는 나’와 ‘바라보는 나’가 분리될 수 밖에 없는 구조는 무엇인지, 또한 그 두개의 자아가 화해하고 하나가 될 수 있기 위한 조건은 무엇인지. 또한 ‘보여지는 나’와 ‘바라보는 나’를 일치시키는 것을 통해서 운동에 남길 수 있는 성과는 무엇인지. 두개의 분리된 자아의 격렬한 부대낌으로 인해 아직도 깊디 깊은 성장통을 앓고 있는 나는, 이 두개가 일치되는 순간을 종종 상상하곤 한다. 어쩌면 나는 이 것들이 일치되는 순간을 끝끝내 맞이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두개의 자아를 일치시키기 위한 내 노력 그 자체가 투쟁의 과정이기 때문에, ‘보여지는 나’와 ‘바라보는 나’를 일치시키기 위한 긴 여정에 나는 계속 도전할 작정이다.

  • 2006-11-03

    '보여지는 나'와 '바라보는 나'를 일치시키기 위한 성장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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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삶이 내게 별반 호의적이지 않다는 것을 알았기에 열두 살에 성장을 멈췄다'고 읊조릴 줄 아는 열두살짜리 주인공이 등장하는 은희경의『새의 선물』은 나에겐 참으로 상콤한 충격이었다. 내가 지금까지 주로 봐왔던 성장소설에는 사내 아이들의 주먹다짐이 있었고, 주먹다짐을 통해 우정을 확인한 사내 아이들은 옆집 누나나 사촌 누나 등등의 몸을 몰래 훔쳐보는 과정을 통해 몽정을 경험하며, 그 아이들이 성장하는 과정에는 언제나 푸근하고 한결같은 사랑을 나누어줄 주 아는 어머니가 든든하게 서 있는 모습이 전부였던 것이다. 그러나『새의 선물』에는 어머니의 한결 같은 사랑도, 남자 아이들의 시선과 입장에서 다루어지는 性도 존재하지 않았다. 생각해보면 왜 그토록 많은 성장소설들은 ‘여자아이들의 성장’을 주제로 한 글쓰기에 인색했던 것일까? 작가들이 여자아이들의 성장을 다루는 것에 조금만 더 관심을 기울였더라도, 여성들의 삶을 이해할 수 있는 토대가 더 탄탄하게 만들어질 수 있지 않았을까? 라면서 엉뚱하게 나는 작가들을 탓해보기도 한다. 소설 속에서 주인공 진희는, 자신의 감정을 조절하기 위해 상대 또는 외부가 느낄 수 있는 ‘보여지는 나’와 자기 자신의 내면을 스스로 바라볼 때 느껴지는 모습인 ‘바라보는 나’를 분리한다. 이 부분에서 나는 소설과는 다른 의미에서의 두개의 자아를 경험 한다. 바로 상대 또는 외부가 느낄 수 있는, 그리고 이성적으로 판단했을 때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말할 수 있는 ‘보여지는 나’와 내 스스로의 내면과 감정에 충실한 ‘바라보는 나’. 이 ‘보여지는 나’와 ‘바라보는 나’ 서로 끊임없이 충돌하고 있기 때문에 한 몸뚱아리에서 이 두개의 자아를 경험하는 것은 언제나 고통스러운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내 안에 존재하는 ‘보여지는 나’와 ‘바라보는 나’는 나의 감정을 조절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궁극적으로 그 두개를 합치시키는 과정인 것이다. 그런데 합치되지 않으니까, 그러니까 그 게 참 괴로운 거다. 그렇다면 내 안의 이 두개의 자아가 가장 극심하게 대립하는 순간은 언제인가? 그 것은 아마도 운동을 하는 순간, 그 중에서도 ‘페미니즘’을 말하는 순간 일 것이다. 과격한 몸싸움을 하는 순간이면 내 안의 두개의 자아들은 서로 삐질삐질 엉겨붙어 있는데 ‘보여지는 나’는 “여자들은 모두 뒤쪽으로 비키세요.”라는 언행에 대해서는 정치적으로 부당하다고 한 치의 주저함도 없이 말하고 있지만, ‘바라보는 나’는 그런 언행에 보란 듯이 악착같이 싸우지 않고 울상을 짓고 서 있다. 서로 모르는 사람들끼리 몸이 부대끼는 그 순간과 후덥지근한 공기, 그 팽팽한 긴장감과 전경과의 기 싸움, 그리고 전선은 꼭 공권력 그 하나에만 맞춰져 있다는 것이 아님을 잊지 않고 일깨워주는 남성 동지들의 행태까지. 이런 것들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은 비단 나 혼자만 느끼는 것은 아닐 지언데, ‘바라보는 나’는 두렵더라도, ‘보여지는 나’는 이런 굴절된 현실에 맞서서 정말 그 남들 보란 듯이 싸울 수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보여지는 나’는 가족은 여성에게 가장 억압적인 것이다 라고 말하지만, ‘바라보는 나’는 가족이라는 구조를 스스로 해체할 용기를 조금도 갖고 있지 못하고 있다. 아직도 ‘바라보는 나’는 엄마의 희생으로 인해 이루어지는 세탁, 집안청소, 요리 등을 날로 먹는 것이 굉장히 익숙하고도 편한 거다. 아직도 아주 많은 경우 ‘보여지는 나’와 ‘바라보는 나’는 일치하고 있지 못하다. 그렇다면 ‘보여지는 나’와 ‘바라보는 나’가 일치될 수 있는 페미니스트의 삶이란 무엇일까? 페미니즘을 고민하면서 꼭 해결해야 할 과제인 연애, 결혼, 가족문제 등에 있어서 ‘보여지는 나’와 ‘바라보는 나’가 분리되는 나를 보면서 앞으로 스스로를 여성주의자, 페미니스트라고 쉽사리 호명하지 말자고 생각했던 적도 많았다. 우리의 운동은, 그리고 페미니즘은 어떠해야 하는가? 그 것은 ‘보여지는 나’와 ‘바라보는 나’를 일치시키는 과정이 아닐까라는 고민을 해본다. 또한 그 것은 단순히 개인의 문제만으로 치환될 수 없을 것이다. ‘보여지는 나’와 ‘바라보는 나’가 분리될 수 밖에 없는 구조는 무엇인지, 또한 그 두개의 자아가 화해하고 하나가 될 수 있기 위한 조건은 무엇인지. 또한 ‘보여지는 나’와 ‘바라보는 나’를 일치시키는 것을 통해서 운동에 남길 수 있는 성과는 무엇인지. 두개의 분리된 자아의 격렬한 부대낌으로 인해 아직도 깊디 깊은 성장통을 앓고 있는 나는, 이 두개가 일치되는 순간을 종종 상상하곤 한다. 어쩌면 나는 이 것들이 일치되는 순간을 끝끝내 맞이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두개의 자아를 일치시키기 위한 내 노력 그 자체가 투쟁의 과정이기 때문에, ‘보여지는 나’와 ‘바라보는 나’를 일치시키기 위한 긴 여정에 나는 계속 도전할 작정이다.

  • 2006-10-10

    성차의 정치적 실천을 통한 권리의 재형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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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위 있는 여성 대담자가 있는 것이 인정된 권리를 갖는 것보다 더욱 중요하다. 누군가가 자신의 삶을 자유의 기획에 따라 분명히 표현하고 여성 되기(being a woman)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권위 있는 대담자가 필요하다.[…] 권리 주장의 정치는 그것이 얼마나 정당하고 심오한지에 상관없이 부차적인 정치다. - 밀라노 여성서점 31 이 놀라운 주장이 등장하는 것은 『당신이 어떤 권리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지 마라: 여성 집단의 사고와 변천에서의 여성적 자유의 발생』(Non Credere di avere dei diritti: la generazione della liberta`femminile nell’idea e nelle vicende di un gruppo di donne)에서다. 이 책은 1987년 <밀라노 여성서점>(Liberteria delle Donne di Mliano)이 집단적으로 집필했고, 1990년 『성적 차이』(Sexual difference)라는 제목으로 영역본이 출판되었다. 지금은 절판된『성적 차이』는 매우 도발적인 저작이어서 미국 페미니스트 사이에서 거의 주목을 끌지 못했고 1990년대 소위 “여성” 범주 논쟁에서도 사실상 누락되었다..1) 이와 같은 부재는 의미심장하다. 이 책의 공동 역자이자 편집자인 라우레티스(Teresa de Lauretis)는 다음과 같이 간단명료하게 설명한다. “역설적으로 여성의 권리, 법 앞에서의 평등한 권리의 옹호가 아닌 여성에 대한 완전하고 정치적이며 개인적인 책임성을 요구하는 자유는 서구적 사고 속에서 출현한 다른 어떤 통념에도 뒤지지 않는 급진적인 개념이다”(12)..2) 자유가 동등한 권리를 요구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여성에 대한 정치적·개인적 책임성을 발전시키는 데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리고 이런 실천이 과연 서구 사상사에서 찾을 수 있는 어떤 것 못지 않게 급진적이라면, 왜 미국 페미니스트 이론가들은『성적 차이』를 다소 무시했는가? 이러한 질문을 반성하려면, 페미니스트들은 서구적 전통에서 상속받은 자유의 개념화, 즉 의지의 현상, 주체의 소유, 주권이라는 이름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이라는 개념화에 그녀들 자신이 연루되어 있다는 사실을 관찰해야 할 것이다. 이런 이유로, 우리 자신의 체제와 같은 자유 민주주의를 지배하는 이 같은 설명에 따르면, 자유는 매우 개인주의적인 용어로 정의되고, 헌법적으로 보장된 권리 안에 거주하며, 정치가 종결되는 곳에 존재하는 무엇으로 경험된다..3) 그러나 <밀라노 여성서점>은 자유를 이와 다르게 사고한다. 이들에게 자유는 새로운 세계를 건설하기 위한 창조적·집단적인 실천이자 근본적으로 창시적인 특성을 가진 [실천으로서], 환원할 수 없을 만큼 우연적이[지만] 정치적으로 의미심장한 성적 존재로서의 여성들 간의 관계를 구축한다. 즉 이 여성들은 이런 실천이 없었다면 남성적 교환 경제 안에서의 위치를 제외한다면 아무 것도 가지지 못한다. 밀라노 여성들은 1·2 세대 페미니스트들이 자유를 주장해온 틀을 거부하며 남성과의 유사성(동일, sameness) 또는 일반적인 사회 복리에 대한 여성으로서의 특별한 기여(차이)라는 식으로 자유에 대한 여성의 요구를 정당화하기를 거부했다. 실제로 밀라노 여성들은 [서구적 전통에서] 상속받은 자유에 대한 이해를 특징짓는 주권이라는 환상뿐만 아니라, 자유를 향한 여성의 요구를 여성들의 사회적 기능의 봉사 안으로 밀어 넣는 유용성이나 편의의 논리 역시 거부한다. 그들의 관점에서 보면 이는 여성 문제와 여성권에 대한 논변의 역사적 반복을 운명적으로 지배해 온 논리다. 즉, 여성의 쓸모는 무엇인가? 내가 다른 곳에서 페미니즘의 사회적 문제라고 칭했던 것의 논리는 제쳐두고, <밀라노 여성서점>의 “정치를 행하는 비범한 방법”(Milan 50)은 “여성들 간의 자유로운 관계를 [발생시키는] 실천”(79), 또는 밀라노 여성들이 “성차의 정치”라 부르는 것의 관점에서 서구 페미니즘의 전체 기획을(145) 개작한다..4) 나는 미국의 페미니스트들이 <밀라노 여성서점>의 글을 눈여겨보지 않은 것은 자유를 주권으로 보는 문제적인 관점에 우리가 연루했기 때문일 수 있다는 견해를 밝혔다. 그러나 이는 너무 나간 것이다. 이탈리아어본 부제(여성 집단의 사고와 변천에서의 여성적 자유의 발생)에도 불구하고, 미국 페미니스트는『성적 차이』를 여성의 자유에 관한 정치적 선언으로 받아들인 적이 없다. 그렇기 보다는, (“여성” 범주 논란의 맥락에서) 성들 간의 감축할 수 없는 차이에 관한, 그리고 계급, 인종, 섹슈얼리티, 국적 관계를 압도하는 남성성과 여성성 간의 상징적 비대칭성에 관한 주장으로 받아들였다..5) (대부분 유럽적 기원의) 페미니즘 저작을 “근본주의적”인 것으로 간주하여 성급히 기각하는 것을 반대하는 목소리에도 불구하고,.6) 미국 페미니스트들은 대체로 성적 차이에 대해 주장하는 것이, 위티그(Monique Wittig)가 신랄하게 비판한 것처럼 “우리를 여성의 신화로 후퇴시키”는 것 까지는 아니더라도, 사회적 차이의 범주들, 이들의 정치적 기원과 효과에 관한 진지한 토론의 가능성을 차단한다고 생각해 왔다(13). 이 글에서 나는 성적 차이에 관한 페미니스트들의 설명에 대하여 찬성하거나 반대하는 익숙한 논변을 다시 반복하려는 것이 아니다..7) 우리(페미니스트)가 이 논쟁에서 이미 지쳤다면―기초에 관한 논쟁에서는 확실히 그랬다―, 이는 적지 않게 성적 차이를 주체의 문제가 아닌 문제로 사고하는 데에 우리가 진정한 곤란을 겪고 있기 때문이다. 주체 문제의 틀 내에서는, 이성애를 강요하는 사회적 모체 내에서 주체 형성의 조건 자체를 규정하는 남성성과 여성성 사이의 불가능한 선택 이외의 것으로 성적차이를 보기는 힘들다. 따라서 우리는 성적 차이를 사회를 구성하는 것이거나 (즉, 준 형이상학적인) 사회에 의해 구성되는 것(즉, 역사적으로 우연적인)으로 여겨왔다..8) 페미니즘 기획을 다루면서 세계를 건설하는 문제에 초점을 둔 자유-중심적 틀 내에서, <밀라노 여성서점>은 우리로 하여금 성적 차이를 정치적인 것으로 사고하게 만든다. 즉 이는 분명히 표현되어야 하는, 즉 공적 공간에서 이 같은 다른 주장들과 공적 관계에 진입해야 하는 성적 존재에 대한 주장[으로 사고하게 만든다]. 성적 차이라고 불리는 자유의 실천이 부과한 난제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밀라노 여성들의 정치의 중심에 있는 세계 건설의 임무에서 비껴나지 않아야 한다..9) 이러한 임무는 여성들이 남성적인 문화 안에서 겪는, <밀라노 여성서점>이 여성을 약화시키는 (상징적인) 무차별 상태라고 부르는 것, 즉 ‘모든 여성은 동일하다.’는 언명에 대한 대응이다. 이러한 동일성은 보부아르(Simon de Beauvoir)의 성/성별 차이에 대한 강력한 비판에서 초점이 되는 여성의 이미지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그녀의 유산에 동반된 성/성별 평등의 원칙을 둘러싸고 조직된 페미니스트 정치에도 도입된다. <밀라노 여성서점>이 말하기를 페미니즘 내에서 평등은 “성별에 근거를 둔 공통성을 향한 여성들의 요구”(“당신이 모든 다른 여성들과 같은 여성이라는 점을 잊지 말라.”)를 강화하지만, 각각의 여성들이 “자신의 개인적인 특색/구별을 필요로 한다.”는 점(137)과, 한 집합의 등가적 구성원 이상으로 취급받고자 하는 욕망, 다시 말해 그녀의 특수성을 무시한다. “중립적인 정의는 여성으로 하여금 자신을 다른 여성과 비교하지 말고, 남성과의 평등을 기다리라고 명한다. 그 결과 여성들의 경험은 자기 자신 안에 감금된 채 사회적으로 번역되지 않는다.”(113) 다양한 경험을 인정하고, 평가하고, 매개할 수단이 결핍되어 있는 것이다. “여성들이 자리 잡을 시-공간”이 없는 상태에서 각각의 여성은 자신만의 경험에 갇혀있고, 이는 철저하게 주관적이다. “어쨌거나, 누구와 [기호를] 주고받을 수 있는가?”(25) 대담자와 매개(현세적인 사이 공간)의 상징적 구조를 이름붙이는 것은 “사회 계약의 성별화된 토대에 이르게 되며”, 첫째로 “남성과 여성간의 사회 계약은 없다.”는 사실과, 둘째로 “여성은 상징적인 수준에서는 무리이지만”, “사회생활에서는 […] 대부분 서로 고립되어 있다.”는 사실을 수반한다. (129, 134). 남성적인 사회 계약의 이면은 단지 페이트먼(Carol Pateman)이 설득력있게 주장하고 <밀라노 여성서점>이 동의했을.1) 것처럼 남성의 여성 소유뿐만 아니라, 여성이 기술과 “사회 교환의 규칙”을 누리지 못하는(134) “여성 인류의 야만적 상태”(137)이기도 하다. 여성들 간의 관계는 남성들의 관계의 규범을 해치는 예외적인 관계가 있기는 하지만, <밀라노 여성서점>이 “남성의 정치적 사고에서의 맹점”이라고 부르는 것을 구성한다(136). “여성들이 개인적 특색/구별을 지니고 싶어 하는 자신의 욕망과 그녀가 여성의 공통성을 떠나지 않아야 한다는 자매들의 요구를 화해시키는 과정에서 접하게 되는 문제에 대한 대답을 개인과 집단성 간의 관계에 관한 오래된 남성들의 선언들 사이에서 탐색해” 봐야 소용이 없다(136). <밀라노 여성서점>의 주장에 따르면 남성적 사회 계약은 여성들 간의 자유로운 관계의 모델이 될 수 없는데, 왜냐하면 평등이라는 그 중심적인 원칙은 이리가레(Luce Irigaray)가 “무엇에 대한 평등인가?”(“Equal” 32)라는 간단한 질문을 통해 드러낸 실패한 논리 속에 페미니즘을 가둬버리기 때문이다. 이런 남성적 기준이 평등한 권리를 위한 여성들의 역사적 투쟁 이면의 공공연한 표준이라는 점은 누구나 알고 있다..11) 이 표준이 그들에게 평등이냐 차이냐 라는 불가능한 선택을 강요한다는 것이 초기부터 페미니즘을 괴롭혀왔던 문제다..12) 이것은 페미니즘을 상반된 진영(평등 페미니스트 대 차이 페미니스트)으로 분할하는 문제며, 이는 화해가 불가능해 보인다..13) 그리고 이는 아마 사실이다. 평등과 차이라는 분명하게 모순되는 원칙을 둘러싸고 조직된 페미니즘의 틀 내에서, 우리의 유일한 선택지는 (1) 두 진영 중 한쪽을 따르거나, 즉 불가능한 선택을 하거나, (2) 불가능한 선택을, 스콧(Joan Scott)의 표현대로 “페미니즘의 구성적인 조건”으로 받아들이는 것 둘 중 하나다..14) 그러나 아마도 또 다른 선택지가 있을 것이다. 평등이나 차이(또는 양쪽 모두)의 깃발 아래서 페미니즘을 사고·실천하는 대신, 자유의 깃발 아래서 페미니즘을 사고·실천한다면 어떨까? 페미니즘이 전혀 앞으로 나아가지 않고 불가능한 선택의 무게감으로 부서질 것이라고 확신하면서, <밀라노 여성서점>은 평등보다 자유를 앞에 내세워 페미니즘적 부등(disparity)이라는 실천을 만들어냄으로써 자신을 엄청난 위험과 서구 페미니즘의 상식과의 불화에 빠뜨린다. <밀라노 여성서점>은 평등을 향한 페미니즘의 역사적 열망을 실현하려는 기나 긴 시도를 실패하고 나서야 이러한 결론에 도달했다. <밀라노 여성서점>이 페미니스트들은 그래야 한다고 지나칠 만큼 주장한 바대로 평등의 원칙을 자유의 이름으로 억압하는 것은 “사회 계약을 찢어버리고 그것의 정치적 형태를 거부하는 것을 의미한다”(Milan 143). 그러나 왜 페미니스트들은, 평등이라는 원칙을 문제 삼는 것이 당연하다고 가정하면서, 어쨌거나 마찬가지로 자유에 대한 호소였던 사회 계약을 찢어버리기를 원하는가? 이탈리아 [페미니스트들]은 사회 계약 이념의 중심을 차지해 온 자유라는 수사를 모르지 않았지만, 이는 그들이 본 뜰 만한 가치가 있는 자유의 모델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이것이 (일부) 남성들의 자유로서의 역사적 정식화라는 점은 별도로 하더라도, 이는 주권의 환상으로 해석된 자유다. 이 환상은 많은 1·2세대 페미니스트들이 무비판적으로 수용했으며, 페미니즘을 사회 계약의 특정한 형태(자유주의)에 고정시켰는데, 이는 정치적 자유를 소극적 자유 및 헌법적으로 보장된 개인의 권리로 축소시켰다 (Milan 136~137). 여성들 간의 자유롭고, 수평적이며, 사회적-상징적인 관계의 실천과 상징이 부재한 가운데, 자유주의는 자신의 성별화 된 육체 및 여성들의 제휴를 부정함으로써 남성과의 평등 및 자유를 추구하라는 “끔찍한 초대”를 불러일으켰다. 이렇듯 성적 존재이기를 거부하는 것은 여성의 자유를 북돋기는커녕 이를 파괴한다. <밀라노 여성서점>이 주장하기를 “공통성을 떠나기를 원하는 여성, 동료 여성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모르고, 이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여성”은 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프로세르피나와 마찬가지로 “남성 권력의 마비된 상징의 범위에 갇혀, 다른 여성들을 필요로 하지만 그들과 자신이 원하는 것을 협상할 자격이 없는 상태”에 놓이게 된다(135,137). 자유를 주권으로 인식하는 것은 공허하며, 가능성 없는 의지일 뿐이며, <밀라노 여성서점>이 주장하기를, 만약 여성이 자유롭기를 원한다면, 아렌트(Hannah Arendt)가 말했듯, 그들이 포기해야 하는 것은 바로 주권이다(“What Is” 165). “사회 계약을 찢어버린다.”는 것은 주권으로서의 자유를 거부하는 것을 뜻할 뿐만 아니라 여성의 자유를 공동체나 더 높은 선(善)에 대한 기여라는 견지에서(예를 들어 사회적 문제의 견지에서) 정당화 하려는 모든 시도를 거부하는 것이다. “여성 정치는 이런 태도, 즉 자원봉사를 한다거나 약자를 보살피고 폭력적 수단을 회피하는 등 남성적이지 않은 여성적 행동으로 체현된 가치에 호소함으로써 사회 질서를 변화시킬 것을 계획하는 정치와 접목되었다.”(Milan 125) 여성의 자유가 “윤리적 본성의 내용”이나 “다른 내용”에 의존해야 한다는 관념을 거부하면서 <밀라노 여성서점>은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우리의 정치는 사회를 개선하는 것을 목표로 하지 않고, 여성과 그들의 선택을 자유롭게 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즉, 자신의 차이를 정당화해야 하는 의무와 이러한 의무가 수반하는 모든 종류의 사회적 예속으로부터 여성들을 자유롭게 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126) 여성적 자유는 무조건적인 것이다. 근본적이거나 결과주의적인 측면에서가 아니라 그것의 유일한 이유는 그 자신이다. <밀라노 여성서점>이 제시한 여성적 자유에 대한 과감한 설명은 “1966년~1986년 사이, 주로 밀라노에서 나타난” 자발적 연합의 발전을 상술하는 일련의 삽화 속에서 출현했는데, 여기서 무언가 새로운 것이 나타났다. 즉, 남성적 교환 경제 내에서의 전통적인 기능을 제외하면 서로 아무런 사회적 관계도 형성하지 않았던 개인들 간의 자유로운 관계의 무근거적 실천..15) 이러한 연합은 서구 페미니즘의 역사에서 대단히 중요하거니와, 권리의 영역으로 소진되지 않는 여성들의 공적 자유의 실천과 영역의 구성에 결정적이다. <밀라노 여성서점>은 이러한 연합, 그리고 그들의 성공과 실패에 관한 혼합된 이야기를 언급하면서, 실질적인 정치적 자유를 경험하지 않고서도 형식적 평등 및 헌법적으로 보장된 권리를 갖는 것이 가능하다는 점을 보여준다. 실제로, 민주주의와 페미니즘이 정치적 자유의 구성과 실천을 형식적인 평등 및 권리의 제도화와 혼동하는 것은 대단히 문제적이다. 정치적 자유의 실천은 근본적으로 창시적인 특성을 갖는다. 이러한 실천은, 발언과 행동을 통해 차이를 드러내고 때로는 평등한 권리의 제도적 공간을 초과하는 주관적인 사이 공간을 창조한다. 그러나 다소 성급하게 덧붙이자면, 이렇게 말하는 것이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는 실천이 자유의 실천이 될 수 없다는 것은 아니다. (평등이냐 차이냐의 선택지처럼) 권리와 자유를 놓고 다시 한 번 잘못된 선택지를 설치하기보다는 차라리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져야 한다. 정치적 자유의 창조적이고 전복적인 특성, 세계 건설을 위한 일상적인 실천, 새로운 사회 계약은 평등한 권리를 위한 투쟁 또는 그의 행사와 어떤 식으로 연관되는가? 이 질문, 그리고 성적 차이의 정치가 내놓는 비범한 답변으로 넘어가자. 보상에 대한 욕망 <밀라노 여성서점>은 자유의 문제를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으로 제한하지 않고, 새로운 형태의 정치적 연합을 건설할 역량으로 이해되는 자유에 주로 관심을 갖는다. 그러나 이탈리아 [페미니스트들의] 관점에서 이러한 형태는 성적 차이와 동떨어져서 사고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여성으로 태어나는 것은 삶 전체를 조건 짓는 사건이기 때문이다.”(Milan128) 필연의 힘을 지닌 우연적 사실, 즉 성적 차이는 파괴되거나 초월되지 않고, “부자유의 원인에서 우리[여성의] 자유의 원칙으로” 재상징화, 변형된다. (122) 이러한 변형은 항상 “여성(female sex)의 인간적 조건에 의해 어느 정도 제약된다.”(119~20) 반드시 바뀌어야 하지만 그러나 회피하거나 의지로 사라지거나 폭력적으로 파괴될 수 없는 인간 조건, 곧 성적 차이는 새로운 문제를 제시하며, 오직 이 “새로움만이 강제로 생겨나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회 혁명은 새로운 것을 사고하도록 강제하기 위해 파괴한다. 그러나 파괴는 여성적 사고의 혁명에 아무런 소용이 없다. 왜냐하면 사고해야 할 새로운 것은 차이(difference)기 때문이다. 전복은 어떤 사물들이 배열되어 있는 방식, 즉 그것의 의미와 관련된다. 이미 주어진 진실을 의미 없는 것으로 만들고, 따라서 그것을 악화시킴으로써 바꾸는 새로운 배열이 있다. 물리적 파괴는 효과적이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파괴되더라도 그 의미를 보존하며, 누구나 그것이 다시 출현할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는 배열이 존재하기 때문이다.(120) 앳킨슨(Ti-Grace Atkinson)이 유명하게 선언한 바와 같이 “여성이 인간으로 태어날 시도를 할 작정이라면, 그녀들은 자살을 해야 한다.”는 관념은 이탈리아 여성들의 자유 기획과는 철저하게 이질적이다(49). 만약 과거의 상태가 현재의 상태 및 자신의 존재의 조건이라면, 파괴하고자 하는 소망은 퇴행을 의지하는 불가능한 소망, 그리고 니체가 무기력하고 자기혐오적인 특성이라고 진단한바 있는 것으로 이끌 수 있다. 니체에 따르면, “과거의 상태”는 압도적인데, 왜냐하면 과거는 양보하지 않기 때문이다. 지나간 것과 의지의 관계는 다음과 같다. “나는 의지한다. 그리고 할 수 없다.” 왜냐하면 과거는 잊혀지거나 바뀔 수 없고, 구원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과거를 구원하기 위해서는 그것과 자신의 관계를 바꾸어야만 한다. “지나간 것을 구원하고 ‘…였다’를 ‘나는 그것을 가질 것이다!’로 변형하는 것 바로 그것이 내가 구원이라고 여기는 것이다.(179)” 니체와 마찬가지로, 이탈리아 [페미니스트들]은 과거를 구원하는 것은 자신에게 가치를 부여하는 것, 새로운 가치를 창조해내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페미니즘적인 자유의 실천, 성적 차이의 정치의 맥락에서 구원은 어떤 식일까? 페미니스트들은 위티그가 “성의 범주”라고 불렀던 것을 복귀시키지 않고 성적 차이를 어떻게 확증할 수 있을까? 성적 차이에 대한 확증이 우리를 ‘여성은 아름답다.’라는 익숙한 수렁에 가두거나 브라운(Wendy Brown)이 “상처입은 집착”, 즉 “부자유에 대한 집착”이라고 불렀던 것이 최초에 여성적 동일성을 구성했던 역사적 상처[에 대한 집착에] 숨어들지 않을까 (xii)? 주체 문제의 틀을 통해 읽는다면 『성적 차이』는 페미니즘과 같은 자유를 위한 근대적 투쟁과의 “역설적인” 연루라고 브라운이 불렀던 것을 “자유가 대항하여 출현한 바로 그 억압적인 구조”의 안에서 예로 제시한다 (Brown 7)..16) 브라운이 정의한 자유의 역설은 주체 형성의 역설적인 성격에 대한 비판적인 설명을 반영하는데, 이는 주체는 그것을 주체로/종속시킨 사회적 규범자체를 반복하도록 강제까지는 아니더라도 깊이 제약된다. 이러한 반복이 없다면 주체는 자신의 실재성이나 및 사회적 존재감을 전혀 갖지 못할 것이다. 브라운은 반응적이고 반영적인 동일성의 구조에 대한 니체의 생각을 끌어와 다음과 같이 쓴다. 주변화 혹은 종속에 대한 항의로 출현하는 과정에서 정치화된 동일성은 자신의 배제에 집착하게 된다. 왜냐하면 이것은 동일성으로서의 자신의 존재 자체를 이러한 배제라는 전제 위에 놓여 있고 배제의 장소에서 동일성을 형성하는 것은 그것을 비난할 장소를 찾음으로써 종속과 주변화에 수반된 “고통의 방향을 바꾸거나” 이를 증대시킨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서 그것을 구원받지 못한 역사 동안의 고통을 정치적 주장의 기초 자체, 동일성으로서의 인정에 대한 요구 안에 장착시킨다. (73~74) 인정 및 보상에 대한 주체의 정치적 요구는 악순환에 사로잡혀 동일한 주체를 예속시키는 (또한 구성하는) 상처의 경험 자체를 강박의 형태로 반복한다. 밀라노의 페미니스트들은 보상에 대한 욕망에 포함된 위험을 보고 다음과 같이 쓴다. “여성이 보상을 요구하는 한, 그녀가 무엇을 획득하는지에 관계없이, 그녀는 자유를 알지 못할 것이다.”(128) 브라운과 마찬가지로, <밀라노 여성서점>은 보상에 대한 요구가 어떤 식으로 과거를 구원받지 못한 상태로 내버려둔 채, 여성을 자신의 고통에 대한 사회적 인정의 끝없는 추구에 가두고, 역으로 “여성”을 피해의 동일성으로 구성할 뿐인지를 보았다. <밀라노 여성서점>은 다음과 같이 썼다. 사회는 여성이 부당함의 피해자라는 점을 받아들이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 사회가 자신의 기준에 따라 그들이 얼마만큼 보상받아야 하는지를 결정할 권리를 보유하고, 이렇게 게임이 영원히 지속되겠지만 말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요구가 불확정적이고, 상실감이 깊어서, 영원히 되풀이해 비난할 권리가 존재하지 않는 한 만족이란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안다. (128~29) 이것이 2세대 페미니즘을 “피해자화의 정치”로 만든 것이다. 이는 “가정주부, 낙태 문제를 겪는 여성, 강간당한 여성 욕망하고 판단하는 살아있는 여성이 아니라 억압받는 여성(female sex)의 형상, 그 자체로 여성적인 것의 화신을 필요로 한다.”(103) 이것이 바로 “상처 입은 집착”이 의미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밀라노 여성서점>이 보상을 요구하는 것이 상처를 동일성으로 재설정한다는 점에 동의하더라도, 이탈리아 [페미니스트들]은 페미니즘의 피해자화의 정치에 관해 뭔가 신기한 것을 발견한다. 바로, 살아있는 여성이 피해자의 위치를 차지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과 같다는 점이다. 따라서 “여성(female gender)의 비참함”을 형상화하는 것은 항상, 적어도 자신의 어머니를 포함하여 자신보다 먼저 태어난 여성을 포함한 “다른 여성”이다..17) “다른 여성에게 투사된, 어떤 여성도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없는 형상”은 2세대 페미니즘의 핵심적인 상징이며, 이는 “틀에 박힌 가정주부, 낙태문제를 겪는 여성, 강간당한 여성”을 필요로 한다. 따라서 <밀라노 여성서점>의 관점에서 브라운이 이야기한 “상처받은 집착”은 아무에게도 깃들지 않은 피해자 동일성이며 “누군가의 고통과의 대중적 동일화처럼 보인다.”(Milan 102) 밀라노 여성들에 따르면, 자유를 동시에 부인하고 확언하는 경향은 상징적 실천이 지닌 정치적 문제다. 즉, “여성들 간의 자유로운 관계는 아무런 상징적 형상화를 거치지 못한다.”(70) 따라서 <밀라노 여성 서점>은, “여성운동이 결여했던 것은 [여성의 예속]에 대한 의식에 선행하며 그것을 가능케 만드는 것으로 사고되는 자유로운 여성의 표상이다. [대신] 자유가 의식에서 유래한다고 믿었다.”(103) 달리 말하면, 여성이 억압을 의식하도록 만드는 것은 억압의 진실이나 날 것의 사실이 아니라 여성적 자유의 상징적 표현이다. 그러나 모든 자유의 형상이 동일하게 페미니즘을 북돋은 것은 아니다. 2세대 페미니즘에서 중요했던, 여성 자유의 잃어버린 대상으로서의 고대 모계제라는 관념을 생각해보자. 이러한 대상이 자유에 대한 욕망을 자극한 결과는 오직 퇴행을 의지하는 불가능한 소망 내에서 이 욕망이 자신에게 반하도록 하는 것일 뿐이다..18) 어떤 것도 과거의 절대적인 자유에 비견할 수 없으며, 과거로의 회귀만이 이러한 절대적 자유를 되찾을 수 있다. 현재는 초월되거나 파괴되어야 한다. 이 같은 고대적 과거라는 관념은, 일부 이탈리아 페미니스트들로 하여금 “집단을 형성하고 공동의 사업을 진행하는 데 있어서 몇몇 여성이 수행했던 결정적 역할과 같은 가장 최근의 잘 알려진 사건에 대한 평가를 왜곡하도록” 만들었다고 <밀라노 여성서점>은 평가한다. 이러한 역할은 침묵 속에서 간과되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는 개별 여성의 자유를 완전히 확장하는 것을 방해하는 장애물이라는 원망을 샀을 것이다”(104). 다시 말하면, 여성의 자유로운 행동은 고대 여성들의 절대적인 자유와 비교해 한참 떨어지는 것으로 부인되었거나, 주권의 견지에서 파악되었을 것이다. 즉 다수에 반하는 일인 혹은 소수의 자유. 따라서 빠져 있는 것은 이탈리아 페미니즘의 자유의 경험(예를 들어, 행동과 발언을 통해 다른 이들과 새로운 정치적 연합을 형성하는 실천)이 아니라 그것의 상징적 형상화였다. 이러한 형상화가 부재한 가운데, 자유의 경험은 항상 도달할 수 없는 것이었고, 미래 혁신의 원천으로 봉사할 수 없었다. 이러한 여성적 자유의 상징적 형상은 중요하다. “여성”을 간단히 피해자 동일성으로 규정하는 것은, <밀라노 여성서점>의 말을 빌면, “한 범주의 여성, 즉 가장 불리한 위치에 처해있는 여성 범주의 문제의 윤곽을 그리고 나서, 이를 여성적 조건의 일반적 전형으로 제시하는 것이다. 이는 여성의 조건을 그들의 최소공배수로 평준화하며, 사람들로 하여금 여성의 다양한 선택과 스스로 상황을 개선해야 하기 위해 가지는 실질적인 기회를 지각하지 못하도록 만들고, 이로써 여성(female gender)의 존재를 부인한다. 오직 아무도 동일화할 수 없는 ‘여성의 조건’만 존재할 뿐이다”(Milan 68). 더욱 나쁜 것은, 이 같은 아무것도 거처할 수 없는 주체 위치의 상징적 형상화가 헤게모니적이라는 점이다. 피해자로서 여성이라는 틀에 박힌 이미지에 대한 대안이다. 그렇다면 페미니즘을 보상의 논리에 가두는 것은 모든 구성원들이 공유하는 피해자 동일성이 아니라, 여성적 자유의 형상이 부재하다는 사실이다. 이 때문에 피해자로서의 여성이 정치적 동원을 가능케 하는 유일한 형상을 제공한다. 여성을 부당함의 피해자로 인정함으로써 게임이 영원히 지속될 수 있게 하는 이 사회는, 여성을 보상이 아닌 사회적 기명(inscription)을 추구하는 욕망의 담지자로 인정하는 것은 별로 달가워하지 않는다. 그리고 부당한 피해자로서 여성이라는 상을 제시해 온 페미니즘은 여성 욕망의 대안적 상징을 제공하지 못하는 한, 게임이 계속 유지되는 역할을 한다. 다시 말해, 빠져있는 것은 서로를 되풀이 해 비난하지 않는 욕망 자체가 아니라 주어진 시점에서 일부 여성이 이러한 욕망을 지니고 있지 않을 수도 있지만, 모든 여성이 항상 그러한 것은 아니다. “이러한 부정적 형태로만 상징화하지 않는” 여성 욕망의 “상징적 권위부여”다..19) 피해자 동일성의 문제가, 전체 사회 집단의 실질적인 욕망이라고 전혀 믿을 수 없는, 또는 ― 그것만이 아니라 ― 먼 일차원적인 정치적 표상의 문제라면, 이것이 요청하는 것은 주체에 대한 작업이 아니라 이탈리아 페미니스트들이 “상징에 대한 정치적 연구”라고 부르는 것이다(Milan 106)..20) 이탈리아 페미니스트들은 브라운처럼 피해에 선행하는 주체성이 발전하는 순간으로 돌아갈 것을 요구하기보다는 새로운 상징적 실천, “[보상을 요구하는] 다른 이의 부당함이 아닌 여성이 되고자 하고, 될 수 있는 더 이상의 무엇 안에서 윤곽이 그려져 있음을 보는 실천의 창출을 부정한다.”(101) 이 “이상의 무엇”은 단지 남성과의 평등에 대한 욕망이 아니며, 따라서 피해에 대해 보충받으려는 욕망도 아니다. 이탈리아 페미니스트들은 페미니즘 정치는 피해라기보다는 자유의 형상, 평등보다는 “이상의 무엇”에 대한 욕망 아래서 형성될 수 있는 것이라고 확신한다. 차별의 형태를 제거하기 위한 반작용으로서의 대응(남성에게 건네지는)은 새로운 사회 계약을 창조하기 위한 순향(順向)적인 실천(여성에게 건네지는)으로 전화될 수 있다. 이제 이 “여성들 간의 자유로운 관계의 실천”이 무엇인지 살펴보도록 하자..21) 평등에 얽힌 문제 <밀라노 여성서점>이라는 이름이 드러내듯 『성적 차이』에 담긴 이야기들은 주로 1975년 10월 밀라노에서 개장한 여성 서점이라는 공간과의 관련 속에서 전개된다. <밀라노여성서점은> “하기의 실천(the practice of doing)”을 발의했다고 설명되는데, 이 실천은 1970대 초반에 Autocoscienza(자기고백)의 실천을 둘러싸고 형성된 “말하기 그룹”을 토대로 세워졌다. 초기 2세대 미국 페미니즘의 ‘의식 고양’운동과 유사하게, “Autocoscienza의 실천”은, “완벽한 상호 동일화를 전제로 하며, 또 이를 추동한다. 나는 너고, 너는 나다. 즉 우리 [여성] 중 누군가가 사용하는 언어는 여성의 언어이며, 그녀의 언어이자 나의 언어다.”(42)라고 <밀라노 여성서점>은 언급했다. Autocoscienza는 의심할 여지없이 서로를 고양시켰지만, 그 힘은 또한 그 한계이기도 했다. 즉, “그것은 여성들 간의 차이를 보여줄 수 없었다”(45). 비록 이러한 실천을 시작한 많은 여성들이 지속되고 넘쳐나는 성차별에 대응하면서 남성들과의 평등의 가능성에 등을 돌렸지만 (40), Autocoscienza는 비록 여성들 사이에서이긴 하지만 평등의 논리를 유지했다. 즉 “차이가 발생하면, 이러한 차이가 상호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한에서 주목받아왔는데, 그래야 상호 동일화가 다시 설치될 수 있다”(44). 무차이의 문제―모든 여성은 똑같다―와 초기 페미니즘에서 나타났던 이것의 재생산은 ‘하기의 실천’의 출발점이다. 이는 “말하기 생활의 물질적 측면”을 정교화하고 페미니즘을 자매애로써, 즉 정치에 앞서 공통성들이 주어진 친족 양식으로서 실천하는 경향에 대항한다. “왜냐하면 ‘하기의 실천’은 반드시 애정과 친밀성으로 묶이거나 간단명료한 슬로건으로 규합되지 않고, 공동의 기획에 의해 단결하는 여성들을 한데 모은다. 이들은 자신의 이성, 자신의 욕망과 능력을 위해 이러한 공동의 기획에 전념하면서 그들을 집단적 이행의 시험에 부친다.”(Milan 86) 이탈리아 페미니스트들이 초기부터 “하기”라는 관념을 자신들의 정치의 중심에 놓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개인적 경험 교류의 중요성을 거부하지는 않는데, 이는 최초의 말하기 그룹, 또는 Autocoscienza의 첫 번째 정치적 가치, 즉 “여성의 공통적인 동일성”의 확증을 특징짓는 것이었다(42). 또한 그들은 자신들의 역사 속에서 한 순간을 형성했던 환상이나 정신적 고찰의 문제, “무의식의 실천”에 대한 고찰을 거부하지 않았다..22) 그러나 점차 출현하는 것은 평등의 정치와 주체에 대한 작업 양자의 한계에 대한 깨달음이다. 그들은 피해자 동일성의 문제가 요구하는 것은 여성으로 하여금 자신들의 차이를 상징화하지 못하도록 하는 현세적 조건의 변화라고 보았다. ‘하기의 실천’에 “새로운 주제가 도입되었다. 여성 정치라는 주제는 더 이상 의식과 발언 [즉, 언어]에 대한 접근에 중심을 둘 수 없다[…]. 새로운 용어는 창조변형―주어진 사회적 현실을 변형하기 위해 여성의 사회적 공간을 창조하는 것―이다”(84). 이러한 창조와 변형은 여성들 간의 차이를 다루는 정치적 기술을 발전시킴으로서 시작하는데, 이는 지금까지 평등의 원칙과 여성의 공통의 동일성을 둘러싸고 조직된 형태의 페미니즘을 위협하는 것으로 간주되어 거부되었던 것이다. 페미니즘의 가장 큰 문제가 “페미니즘이 여성들을 분할하는 차이에 익숙해지는 것을 원하지 않거나, 어떻게 해야 할 지 모르는 것”이라는 사실을 주장하는 것은 전혀 새로울 것이 없다. 하지만 이탈리아 [페미니스트]들은 유일하게, 여성들 간의 차이는 그것들을 서로 관련짓고, 평가하거나 판단할 모종의 방법이 없다면 무의미하다는 점을 발견했다. 그들의 관점에서 보면, 차이를 인정하기를 원치 않는 것은 이를 인정하는 방법을 모른다는 문제다. 그 방법을 배우려면 여성들 사이의 차이를 관련짓고 판단할 정치적 능력의 발전이 요구되며, 이는 또 다른 정치적 기술을 필요로 한다. 성적 차이에 대한 페미니즘적 상징화가 그것이다. 미국 페미니스트들은, 이탈리아 페미니스트들처럼 여성들 간 차이의 상징화를 의식고양 및 초기 페미니즘과 연관된 동일성의 정치에 필요한 중화제로 여겨왔다. 미국 페미니스트들이 대체로 성적 차이의 상징화를 여성들 간 차이의 소거와 연관짓는 경향이 있는 반면, <밀라노 여성서점>은 성적 차이의 정치적 상징화가 부재하다면 이러한 차이가 소거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밀라노의 여성들은 성적차이의 정치를 <밀라노 여성서점>의 공간 자체에서 [벌어지는] 일상적인 ‘하기의 실천’으로서 발전시킨다. ‘하기의 실천’의 중심적인 기획으로서 <밀라노 여성서점>은 여성들 간의 자유로운 관계가 형성될 수 있는 “물리적이고 상징적인” 여러 페미니스트 공간(loughi delle femministe) 중 하나로 여겨졌다(Milan 96)..23) <밀라노 여성서점>은 개점을 알리는 포스터에 다음과 같이 쓴다. “서점은 거리로 열린 공간입니다[…]. 누구나 들어올 수 있습니다. 서점은 여성들을 위해, 여성의 손으로 설립했습니다. 여기에 들어오는 여성에게 아무도 당신은 누구며, 무엇을 믿는지 질문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여성들은 자신이 원한다면 다른 이들과 관계를 구축할 수 있습니다.” 서점은 정치적인 공간이다. 왜냐하면 여성들은 이 안에서 공적으로, 그리고 자유롭게 만나기 때문이다. “여성들 사이에 있다는 것이[…] 우리의 정치의 출발점이다”(92). 바로 이곳에서 “새로운 실천[…]이 정교화되었다. 이는 여성들 간 관계의 실천이라고 불렸다”(50). 이 실천은 “정치를 행하는 비범한 방법이다. 이는 많은 여성들에게 사회적 관계의 체계는 ― 우리가 가능하다고 배운 바대로, 추상적으로 변화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에너지를 사용하는 새로운 방법을 창안하면서 구체적으로 ― 변화할 수 있다는 점을 밝혀 왔다”(51). 유사한 관심사(예를 들어, 문헌, 작가, 장르, 비평 등)를 공유하는 여성들이 함께 모일 수 있는 공간인 <밀라노 여성서점>은 처음으로 정치의 최소 조건으로 기능했다. 이는, 아렌트의 설명대로, 공유된 현세적 관심사(interest)로, “이는 문자 그대로의 의미에서, 사이에(inter)-놓여있는(est) 무엇, 즉 사람들 사이에 놓여 그들을 서로 연계시키고 또, 묶어주는 무언가를 구성한다”(Human 182). 아렌트의 행동 중심적인 정치에 관한 견해에서, 이러한 사이 공간은 “절합적 방식으로 사람을 함께 묶으면서 또한 이들을 분리시키는 이중의 역할을 항상 수행한다”(181). 이러한 “물리적이고 현세적인 사이 공간은 관심사에 따른 행위와 언어로 구성되어 있고 인간들의 직접적인 행동과 말하기에 전적으로 기원을 두는 완전히 다른 사이 공간으로 덮여 있고, 그 위에서 성장한다. “이 두 번째의 주관적인 사이 공간은 만질 수 없다.” 왜냐하면 행동하고 말하는 과정은 어떤 결말과 결과물을 남겨둘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같은 무형성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사이 공간은 가시적으로 공유하는 사물들의 세계 못지 않게 실재적이다. 우리는 이러한 현실을 인간관계의 ‘그물망’이라고 부른다(182-83). 밀라노 여성들은 이를 “여성들 간 관계의 실천”이라고 부른다. 아렌트의 관찰에 따르면, 주관적인 사이 공간, 정치적 관계 자체는 “인간들의 직접적인 행동과 말하기에 전적으로 기원을 두고 있다(human 183).” 이는 간단하지만 매우 중요한 점인데, 그 중 하나를 우리는 항상 시야에서 놓칠 위험에 처한다.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당연하게도, 다른 사람이 있어야 한다. 이것이 또 하나의 간단한 점인데, 즉 대담자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대담자는 나와 다른 견지에서 보는 사람이다. 대담자는 인류의 복수성(plurality)이라는 조건에서만 가능하다. 미국 페미니즘의 맥락에서, 이러한 복수성은 “여성들 간의 차이”로 생각되었다. 복수성에 대한 이러한 이해에서, 사람들은 정치적으로 분명히 표현하는 것에 우선하여 중요한 인구통계학적 요소로 보이는 사회적 차이(예를 들어, 계급, 인종, 섹슈얼리티 등)를 인정함으로써 대담자를 찾을 수 있다. 이탈리아 페미니스트들도 사회적 차이를 인정하는 것이 페미니즘의 동일성의 정치에 대한 반응이라고 생각했다. 이는 “하기의 실천” 뒤에 놓여있는 전반적인 요점이었다. 그러나 “하기의 실천”, 즉 여성들 간 차이를 다룰 방법을 습득하는 것은 실패했다. 왜? <밀라노 여성서점>은 이런 질문을 던지면서 다른 “하기의 실천”인, <파르마 여성 도서관>을 참조하여, 이것의 창립 문서를 다음과 같이 분석했다. “<파르마 여성 도서관>의 창립자들은 그들의 기획을 좀 더 분명하게 설명하기 위해서 ‘모든 여성의 의견을 녹취하는’ 그들의 모험적 시도를 제시할 ‘문서’로 이어지는 논쟁의 일부분을 보고하는 방식을 택했다.” 이러한 선택의 근거는 [파르마 여성들의 표현을 빌면] “우리 모두의 관점을 반영할 수 있는 정치적 문서를 구성”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논쟁 과정에서 한 여성이 이야기 한 것처럼 “집단 내에서의 여성의 다양성과 비동질성은 아무도 말소되지 않을 것이며 모두가 ‘존재’할 것이라는 정치적 보장이기 때문이다.”(94) 그러나 이 기획을 구성하는 평등주의적인 방법은 문제에 봉착했다. 이 보장은 실패했다. <밀라노 여성서점>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바로 여기서 복잡한 문제가 출현하다. 이론에 따르면 차이는 여성(female sex)의 존재에 필수적이지만, 판단을 내리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94)..24) 판단에 대한 무언의 금기는 특정한 차이가 발언되도록 허용하지만 이를 의미 없는 상태로 내버려둔다. <밀라노 여성서점>은 사실 <파르마 여성 도서관>의 문서(그리고 동종의 다른 문서들)는 “여성들 간 차이의 가치에 관한 다량의 발언에 불과한 것으로 환원된다” (99). 이러한 차이를 평가·접합·연결하는 방법인 판단이 부재한 가운데, 이 차이들은 아무것도 아니게 된다. 알맞게 기록되고 심지어 칭송되지만 판단을 거치지 않는 차이는, 차이를 무시하거나 부인했던 Autocoscienza의 실천에서 의미가 없었던 것처럼 “하기의 실천”으로서의 페미니즘에도 의미가 없다. 여기서 그들은 무시되거나 부인되었다. “여성들 간의 차이”가 미국 페미니즘에서처럼 어떻게, 비록 역설적이지만, “진정 중요한 차이”를 숨기는 공허한 슬로건이 되었는지, 그렇게 해서 이것이 “죄책감의 근원”이 되었는지를 인지하면서, 이탈리아 페미니스트들은 하기의 실천이 지니는 한계를 대면한다. 즉, 여성이 “자신을 제외한 다른 여성과의 관계를 갖지 못하며 여성적 욕망은 대담자를 갖지 못한다”(99). 여기서는 처음부터 대담자의 존재에 필수적인 복수성을 구성하는 것이 여성들 간의 사회적 차이가 아니다. 복수성은 인구통계학적, 또는 실존적인 사실이 아니라 사회적 차이에 대한 정치적 관계이다. 따라서 내가 이러한 차이와 관련된 무언가를 하는 것, 이를 무언가 정치적으로 중요한 방식으로 셈하는 것이 필요하다. 여성 대담자의 존재는 모든 여성의 의견을 무차별적으로 기록하는 것으로 환원될 수 없다. 이러한 기록은 차이를 고려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이러한 차이를 압도적인 평등에 붙들어 놓는다. 파르마의 페미니스트들이 생각한 것처럼, 모든 여성의 의견을 [판단하지 않고] 녹취하는 것은 “아무도 말소되지 않을 것이며 모두가 존재할 것이라는 정치적 보장”을 제공하기는커녕, 이러한 실존이 현실성을 획득할 공간, 즉 페미니즘 정치 자체의 현세적 사이 공간을 파괴한다. <밀라노 여성서점>은 “여성은 다른 여성을 판단할 수 있고 그래야 한다. 여성은 다른 여성의 판단을 대면할 수 있고 그래야 한다.”(142)고 선언한다. 초기 페미니즘(예를 들어, Autocoscienza, 하기의 실천) 의 판단 유예는 전혀 해방적이지 않다. 이와 반대로, 인가(approval)의 욕구가 우세하다면, 여성이 자신의 욕망을 다른 여성의 판단에 종속시키려 들지 않는다면, 여성의 욕망은 시들 것이다. 다양한 의견을 판단할 수 없었기에, 파르마의 페미니스트들은 왜 <여성 서점>이 다른 기획에 비해 더 좋은 하기의 기획이었는지 말할 수 없었다. <밀라노 여성 서점>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기초로 남아있는 것은 우리가 이렇게 하기를 좋아한다는 것이다”(95). 이러한 기초가 욕망(즉 잘 근거지어진 논변이라기 보다)에 불과하다는 사실은 <밀라노 여성서점>이 관련되어 있는 한, 정치적인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판단 내리고 판단 당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함께 표현되는 욕망은 [욕망이라는] 기초에 손상을 입히는 여분의 감정을 발생시킨다.” 남아있는 것은 자신을 다른 것에 결부시키지 못한 채 여기 저기 존재하는 여성의 욕망에 지나지 않는다”(95). “여성의 욕망을 침묵에서 꺼내고 위험에 처하도록 유도할 수 없다면”, 자신을 판단에 노출시키지 못한다면, 하기의 정치는 다양한 욕망이 원칙적으로 판단에 대한 금기로 평준화된 채로만 표현될 수 있는 공간을 창조했다. 이러한 실패는 이탈리아 페미니스트들이 무언가를 여기에 걸게 만들었다. 즉, 그들은 평등의 논리와 단절하고 부등의 정치적 가치를 발견했다. 부등을 발견하다 『성적 차이』의 4장은 <밀라노여성서점>의 역사에서 전환점을 묘사하고 있다. 그 장은 “여성문학에서 자유의 첫 번째 형상(figures)”이라는 제목의 절로 시작되며 “『노란 일람』(Catalogo giallo, Yellow Catalogue)―이것은 <밀라노 여성서점>과 <파르마 도서관>이 1982년 출판하고 『우리 모두의 어머니들』(Le madri di tutti noi)이란 제목의 소책자 표지 색깔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의 이야기”를 말하고 있다. 이 소책자는 “부등에 관한, 모든 여성들이 그녀들 사이에서조차 동일하지 않다는 단순한 사실에 관한, 그리고 이 사실에 관한 여성들 자신의 사회적 해석에 관한 것이다.”(108) 그 기획 면에서 “『노란 일람』은 이런 류의 다른 책들과는 달랐다. 왜냐하면 그 책은 특히 소설과 같은 문학적 기록을 특권화하고 독자들 편에 서기 때문이다.”(109) 즉, 그것은 창작물을 생산하는 예술적 천재가 아니라 그 창작물을 판단하는 독자에게 초점을 두었다. 여성문학에 대한 이런 개입이 독특한 문학적 형태를 보여줄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지만, 사실 “여성들이 인류 문화에 기여한 사례”로 간주될 수 있었던 것들이 아무런 흥미도 없었음이 드러났다. 그 탐구는 정의될 수 없었던, 이름이 없었던 어떤 것, 즉 “인류 문화가 알지 못했던, 여성되기에서의 차이에 관한 것”(109)을 밝히기 위한 것이었다. “우리에게 가장 직접 관련되는 것들의 의미를 찾을 필요성”과 “여성 작가들이 여러 방식으로 우리를 도울 수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느낌만을 가진 채로 <밀라노 여성서점>은 다음과 같이 썼다. 우리는 읽혀야 할 여성 작가들과 소설을 선택하는 것에서 시작했다. 우리는 바로 우리가 가장 좋아하는 것들을 읽기로 결정했다. 좀 더 객관적인 기준 [즉, 심미적 판단의 규칙]이 없었기 때문에, 그것이 유일하게 가능한 결정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가 당시 생각했던 것처럼 결백한 결정이 아니었다. […] 사랑이나 우정 관계를 벗어나 다른 여성을 선호할 수 있다는 사실은 우리가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109) 반대로, 그런 선호들은 잠재적으로 금지되었는데, 그것들이 집단의 동일성을 해칠 수 있는 차이들을 드러낼 것이기 때문이다. “선호 행위는, 그 잠재적 ‘유해함’ 때문에, 모든 여성적 욕망을 마치 박해받는 것처럼 고통스러운 평형 상태에 가두었던 여성적 정치의 도식을 뒤흔들 운명이었다.” 모든 독자가 같은 선호를 갖는 것도 아니고, 일부는 선호가 없었으며, 또 일부는 매우 강한 선호를 갖기도 했다. “위기를 야기한 것은 바로 이런 상황이었는데, 이는 사람들이 전혀 고려하지 않으려 했던 것이다”(110). 위기가 터져 나온 것은 제인 오스틴이라는 인물에 관해 논쟁하던 때였다. 제인 오스틴을 반대하는 한 사람이 그녀가 다시 한 번 소수로 몰린 토론에서 […] 논쟁을 멈추고 관찰자처럼 말했다. “[딸의 자유를 방해하는] 어머니들은 작가들이 아니다. 우리는 여기서 전혀 동등하지 않기 때문에 그런 어머니들은 사실 여기 우리 사이에 있다.” 이 단순한 진실이 처음 말로 표현되었을 때, 그 말은 끔찍하게 들렸다. […] 하지만 그 말의 의미는 수정처럼 분명했다. 누구도 그 말이 진실이라는 점을 의심하지 않았다. […] 우리가 눈앞에 대면하고 있었으나 수년 동안 전혀 기록하지 않았던 것들을 받아들이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우리는 동등하지 않았고, 동등한 적도 없었다. 우리는 동등했다고 생각할 까닭이 없다는 점을 즉시 발견했다. 첫 순간의 공포는 좀 더 자유로워진다는 어렴풋한 느낌으로 바뀌었다. (110~11) 여성들 사이의 불평등을 발견하자 자유로운 느낌이 생겨나는 까닭은 무엇일까? 게다가 만약 그렇다 하더라도 이것이 심미적 판단을 내리는 실천과는 무슨 관계가 있는가? <밀라노 여성서점>은 좀 더 자유로워지는 순간이 “우리의 역사에서 생겨나지도 않았고 우리의 이해에 부합하지도 않는 평등이라는 이상”에서 해방되는 것과 일차적으로 연관이 있다고 말한다.(111) 이 평등이라는 이상은 억압받는 집단의 일원이라는 점에 기초한 공통성을 명목으로, 상호반목하지 않는 모든 여성적 욕망(즉 피해의 동일성으로 표현되지 않는)과 차이의 분명한 표현을 뭉개버렸다. 이런 중성적이고 무성적인 이상 때문에, “우리는 존재하지 않던 것을 상상하도록 우리 자신을 괴롭혔고, 존재했던 것의 활용을 스스로에게 금지했다. 마치 우리의 문제가 강력하게 경쟁하는 욕망들 사이에서 있을 법한 경합의 치료제를 찾는 것이라도 되는 양 말이다. 하지만 반대로 우리의 문제는 우리의 욕망이 불확실하고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이고, 이는 소위 여성들 사이의 권력 갈등 이면에서 그런 갈등을 고통스럽고 끝없게 만드는 것으로 인식될 수 있었다.”(111) 존재했던 것은 여성들 사이의 재능, 능력, 사회적 지위의 차이며, 만약 페미니스트들이 이를 다룰 만한 정치적 능력이 있었다면 이는 여성들의 실천을 풍부하게 만들 수 있었을 것이다. 비록 가끔은 그런 실천을 위기에 빠뜨리기도 했겠지만 말이다. 존재했던 것은 기호의 차이였고, 그것은 사회적 차이로 환원될 수 없었다. 모든 여성들이 비슷하지 않은 까닭은 그녀들이 서로를 분할하는 각기 다른 사회적 집단의 일원이기 때문일 뿐만 아니라(이것이 최근 미국 페미니즘이 차이라는 사상을 이해하는 전형적인 방식이다.), 그녀들이 각기 다른 호오(好惡)를 가졌기 때문인데, 이는 그녀들이 어떤 특수한 사회적 집단에 속해있다 하더라도, 비록 약간은 연관이 되기야 하겠지만, 소모되지 않는다. 오스틴을 둘러싼 논쟁은 사회적 차이(즉, 성별, 인종, 계급, 섹슈얼리티)로 환원할 수 없고 하기의 실천(practice of doing)에서는 가려졌던 차이의 형태를 드러냈다. “하기의 실천”은 여성의 보편적 비참함이라는 표상에 어떤 대안도 만들어내지 못했다. 이는 페미니스트들이 이런 차이를 보지 못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이런 차이를 다루는 방법, 평가하고 판단하는 방법을 알지 못해서다. 이런 정치적 기술의 부족 때문에 그들은 의견의 깊은 갈등과 차이를 억누르는 경향이 있었다. <밀라노 여성서점>에 따르면, 그들이 이런 기술을 전혀 발전시키지 못한 것은 그들이 여성적인 차이를 나타내고 남성에 동화되지 않기 위해서 모든 여성이 다른 모든 이들과 같아야 한다고, 더 정확히는 운동하는 다른 모든 여성들과 같아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런 방식으로 여성들 사이에서 다양성, 언쟁, 각기 다른 의식수준이 존재할 수 있었지만, 이것은 모순이나 “나는 낙태의 문제를 처리해야 하는 여성들과는 상관없다.”는 식의 근본적인 반대는 아니었다. (69) 격렬한 갈등이나 불화의 공간이 없다면, 강렬한 욕망을 위한 공간이나 진정성 있는 정치의 가능성도 없다. 그 당시 ― “그녀 말고는 다른 이들과 아무런 관계도 없는” 각각의 여성들과 “대담자 없는 여성적 욕망”이 있었던 때 ― <밀라노 여성서점>은 “페미니즘적 관점”, 즉 “더 이상 현실과 관계가 없는 미리 구성된 이데올로기나 진부한 담론”에 따른 판단의 필요성을 제외시켰다(85). 이데올로기는 판단의 규칙을 제공했다. 하지만 삼단 논법의 추론에서 예증된 규칙을 따르는 것은 심미적이거나 정치적인 판단에 아무 소용이 없는데, 여기서 우리가 직면하는 것은 특수로서의 특수(particular qua particular)이기 때문이다. 아렌트가 주장한 것처럼, “당신이 ‘아름다운 장미다!’라고 말할 때, 이런 판단에 도달하기 위해 우선 ‘모든 장미는 아름답다, 이 꽃은 장미다, 그러므로 이 장미는 아름답다’고 말하지 않는다.”(Lectures 13~14) 반대 방향으로도 마찬가지인데, 당신은 이를테면 “이 장미는 아름답다”는 판단에서 다른 장미나 모든 장미에 대한 일반적인 주장으로 가는 것도 아니다. 정치적 영역에서도 같은 일이 발생한다는 것이 아렌트의 주장인데, 여기서 우리는 대상과 사건의 독특성에 직면한다. <밀라노 여성서점>이 문학 작품에 눈을 돌린 다음에야 여성들 사이의 부등이 발견된 것은 우발적인 것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의미심장한 것일 수도 있다. 오스틴과 같은 작가들에 관해 의견을 교환하고 선호를 표현하면서, 각자는 “그것이 나를 기쁘게 하거나 불쾌하게 한다.”는 점을 발견하는데, 이는 진리(또는 진리 담론, 이데올로기)에 고정점을 갖지 않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 동의를 강요할 수 없다는 의미다. “고유한” 페미니즘적 관점의 독백과 더불어 집단의 통일성을 보장하는 이데올로기적(삼단 논법의) 추론(즉, 모든 여성 작가는 훌륭하다, 이 작가는 여성이다, 따라서 이 여성 작가는 훌륭하다)과는 다르게, 기호의 판단은 하나의 규칙 아래 포섭될 수 없는 의견의 차이를 드러낸다. (심미적이거나 반성적인) 판단을 실행할 때, 사람들은 여성들 사이에 의미심장한 차이가 존재함을 깨닫게 된다. 이런 깨달음은 타인들을 진정한 대담자의 위치에 놓는다. 나와 유사하거나 유사하지 않은 선호를 가지고, 나의 관점과 동일하지 않은 관점에서 보며, 자신의 의견에 대한 판단을 나에게 청하거나 내가 고이 간직해 온 의견을 판단하고 아마 뒤흔들어 위기의 지점으로 몰아세우기까지 할 것이다. 하나의 규칙에 의해 판결될 수 없는 의견의 차이를 발견하면서 <밀라노 여성서점>은 부등을 발견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서로 동등하지 않다는 것을 발견했다. 하지만 부등을 발견하는 것과 그것을 실천하는 것은 별개의 일이다. 어쨌거나 수많은 형태의 사회적 부등이 있고, 그런 부등 중 많은 것이 부당하다. 그들은 “부등의 실천이 필수적인 시험”이라고 주장한다. “그것은 부등의 부당한 형태들을 어떤 경우에도 불가피한 다른 형태의 부등과 구별하게 해 줄 것이다.”.25) 부등의 실천은 “차이가 자유로운 사회적 형태 속에서 발언하게 하는”데 필수적인 첫 번째 단계다.(Milan 132) 우리가 아직 이 부등의 실천이 어떤 식일지 모르긴 하지만, 그것이 페미니즘의 민주적 이상에 어떻게 일치할 수 있을지는 궁금해 할 수 있다. 평등의 문제로 돌아가 보자. 밀라노의 페미니스트들은 많은 서구 3세대 페미니스트들이 지지하는 평등에 대해 굉장히 회의적인 관점을 가졌다. 여기에는 권리에 기초한 법적 사회변화 전략을 대체로 수용했던 미국의 페미니스트들이 포함된다. 평등의 이상과 만연한 차별의 현실 사이에 존재하는 명백한 괴리는 차치하더라도, 평등이라는 원리는 남성과 다른 여성들과의 관계 모두에서, 동일함을 여성의 정치적·사회적 권리의 조건으로 확립하는 것 같다. 역사적인 실천 속에서 정치적 평등이라는 원칙은 모든 사회적·성적 차이를 평준화하고 여성들에게 중립과 보편을 가장한 남성적 기준으로 동화될 것을 강요하는 경향이 있었다..26) 하지만 평등에 대한 이런 사고방식은 게르하르트(Ute Gerhard)가 우리에게 상기시킨 바, “같은 것을 같게 취급하기”(treating likes alike)라는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원칙에 기초한다. 게르하르트는 우리가 평등을 동일함이나 동일성(a=a)으로 생각하기보다는 관계적인 개념(a=b)로 생각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평등이 고정되거나 정적인 것이 아니라 관계적인 것으로 간주되면, 평등은 차이를 부정(오직 같은 것만 같게 취급될 수 있다.)하기는커녕, 차이들을 구체적인 목표에 따라 특정한 종류의 관계에 도입되어야만 하는 것(다른 것이 같게 취급되어야 한다.)으로 당연시하는 정치적 원칙이 된다. “누가 그리고 무엇이 어떤 특징이나 특수성을 비교하고 동등하게 다루자는 것을 결정하는가?”(Gerhard 8) 이것이 중요한 질문이 된다. 이 단순하지만 결정적인 이동은 관점의 변화를 수반하는데, 왜냐하면 이제 우리는 비교되는 (사회적) 대상(즉, a와 b, 남성들과 여성들)에 초점을 맞추는 것―마치 그 대상들 혼자서 비교의 기준을 결정하는 것처럼―이 아니라 비교를 하는 주체들과 그 판단의 사회역사적 맥락에 초점을 맞출 것을 요구받기 때문이다. 즉, 평등에 대한 페미니즘적 설명에서 관점과 맥락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은 어떤 요구가 제기되는 구체적인 상황과 함께 그 요구를 하는 사람들과 비교의 기준으로 간주되어야 할 것을 결정하는 사람들 양자의 사회적인 위치도 고려하는 것이다. 만약 그 기준이 대상 그 자체에 내재한 것이 아니라면, 평등에 대한 모든 요구는 정치적 판단, 즉 특수성(같지 않은 것들)에 관한 판단을 요구한다. 그러므로 페미니즘적인 평등 실천은 제 3항(third term) 또는 제 3자, 즉 비교점(tertium comparationis)을 필요로 한다. 게르하르트가 말한 것처럼, “그 비교점은 결코 단순히 ‘남성’이나 남성의 지위일 수 없다. 그것은 양성에 공평한 기준이어야만 한다.”.27) 평등의 실천을 3항을 요구하는 것으로 사고하면, 우리는 그렇지 않았을 때 완전히 반(反)평등주의적 부등의 실천처럼 보일 수 있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이탈리아 [페미니스트들이] 동일함으로 환원되지 않도록 평등을 재형상화하는 가능성을 실제로 발견하지는 못했지만, 그녀들의 부등의 실천이 달성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그것은 앞서 언급된 3항의 발전을 가능케 한다. 이탈리아 페미니즘의 설명에 따르면, 3항은 오스틴과 같이 “‘원형’이라 칭해진” 여성 작가들과의 관계에서 출현하기 시작한다. 이런 원형의 목표는 “우리보다 선행하여 우리에게 스스로를 알고 차이화할 수 있는 수단을 제공하는 것의 위치를 특징짓는”(Milan 112) 것이었다. 원형을 현실의 어떤 여성도 접근을 시도할 수 없는 지위를 가진 틀에 박힌 여성적 형상으로 간주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이 문제를 날카롭게 인식하면서 이탈리아 페미니스트들은 우수한 여성의 형상이 틀에 박힌 피해자 형상의 이면으로서, 현실의 어떤 여성도 동일화할 수 없으며, 양자 모두 잃어버린 “여성적 사회 경제(social economy)”의 징후라는 점을 관찰했다. 여성들 사이의 (수평적이고 수직적인) 관계를 상징화하는 두 가지 방식 모두 전혀 실재적인 관계가 아니고, 동일한 것(과 비참한 것) 또는 다른 것(과 우수한 것)에 대한 무매개적인 연계일 뿐이다. 이런 도해상의 지위(피해자 또는 우수한 여성)는 둘 다 현실의 여성들 자신에게는 알맞지 않다. 그러므로 이상화의 경향은 페미니즘에게 힘을 북돋아주지 않는 부등의 한 실천이다. 스스로에게 가치를 부여할 수 있으려면 다른 여성들과 차이나는 여성 개인과 여성적 성별(젠더) 모두를 가치화하는 권력, “여성적인 잉여(female plus)”(Milan 127)가 필요했다. 이탈리아 페미니스트들이 찾던 것과 원형들에서 처음에 발견했던 것은 하나의 규칙(또는 이념형)보다는 특수성들을 연관시키는 사례라고 이해하는 편이 낫다. 역설적이게도 평등의 정치가 탄생시킨 우수한 여성들과 다르게, 원형들은 그 원형들에 권위를 부여하는 여성들에게 권위를 부여한다. “세상에 관하여 권위와 가치를 또 다른 여성에게 돌리는 것은 스스로에게 권위와 가치를 부여하는 수단이었다. […] ‘스타인(Gertrude Stein)을 옹호할 때 나는 스스로를 옹호하는 것이다.’”(112) <밀라노 여성서점>이 주장하듯이, 만약 페미니즘적인 자유의 실천에 권위를 부여하는 것이 여성들 자신일 뿐이라면, 그런 형상은 실천의 한 부분으로 머물러, 판단과 논증과 토론에 종속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 형상은 자유를 부인하는, 초월적인 권위의 원천이 되는 위험에 처한다. 그런 위험이 최소화되는 것은 수없이 많은 원형들(오스틴, 스테인, 모랭(Elsa Morante), 울프(Virginia Woolf), 바흐만(Ingeborg Bachman) 등)에 이를 때다. 하지만 “성별화된 기원의 형상”과 자유가 “상징적 어머니”로 불릴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얼핏 보기에 잃어버린 여성적 권위의 형상으로서 “상징적 어머니”는 “남성적 기원에서 나온 권위의 여성적 복제물”처럼 보일 수 있다. 어떻게 어머니의 형상이 페미니즘적 자유의 실천을 조직할 수 있는가? 이런 형상은 처음부터 페미니즘을 무력화했던 친족 관계를 상징화하는 것 아닌가? 남성적 문화 내부에서 어머니들과 딸들의 관계는 사라졌다(“어머니는 언제나 팔에 아들을 안고 있다.”)는 이리가레의 주장을 받아들이면서, <밀라노 여성서점>은 “여성과 그녀보다 더 위대한 여성, 즉 그녀의 어머니 사이의 상징적 유대의 형태란 전혀 없다. 둘 사이에는 정서로 다양하게 덧씌워진 오직 자연적인 관계만이 존재할 뿐 상징적인 해석은 없다.”(127)고 주장했다. 따라서 상징적 어머니라는 바로 그 생각은 급진적―남성적 문화 속의 어떤 어머니도 결코 상징적이지 않다.―인 동시에 일반적(ordinary)일 수 있다. 상징적 어머니는 그를 둘러싸고 페미니즘적인 자유의 실천, 즉 새로운 사회 계약을 조직할 성별화된 기원의 형상이다. 이탈리아 페미니스트들이 식별한 핵심 문제는 “여성이 모종의 여성적 미덕을 가장하지 않고서는 사회에 대한 완전한 통찰력으로 솔직하게 밀고 나갈 도리가 없는 욕망의 무한함을 인정할 때 맞닥뜨리는 현실적인 어려움”(Milan 115)이라는 점을 기억하자. 정치에서 이런 가장은 사회를 개선하는 요구의 형태를 띤다. 이런 요구는 사회 문제라는 더 큰 틀 내에서 공명을 일으키는데, 여기에서 여성들은 자신의 정치적 요구를 사회적 효용이나 편의라는 언어로 표현할 것을 요구받는다. 예를 들어 일부 이탈리아 페미니스트들은 “여성적 차이에 대한 새롭고 보다 자유로운 해석”을 “사회적 선과 조화를 이루는” 것과 구별할 수 없었다. “다르게 되기와 더 좋아지기”를 혼동함으로써 그들은 “이런 잉여가 자격을 얻는 것을 반대했다. 그것은 실정적인 가치를 표현하지 않으며, 따라서 여성적 차이나 여성적 정치에 자격을 부여할 수 없고, 가치를 줄 수 없다.”(124) 유용성의 경제(the economy of use)에 사로잡혀, 그들은 여전히 여성적 성(female sex)과 여성적 자유의 존재이유, 즉 사회 개선과 같은 이유를 제시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그들은 여성의 자유에 “어떤 실정적인 사회적 가치”(125)를 부여하지 않으면서 여성의 자유를 추구하는 사회적 실천을 상상할 수 없다. <밀라노 여성서점>은 다음과 같이 답한다. “여성적인 잉여는 감축할 수 없는 차이라는 개념을 표현하는 것과 다르지 않은데, 이 때문에 여성되기는 남성되기에 종속되지도 동화되지도 않는다.”(124) 즉, 그것은 어떤 사회적 가치, 사회적 효용도 표현하지 않으며, 보상을 추구하지 않고 평등이라는 기치 아래 포섭될 수 없는 자유에 대한 욕망을 말할 뿐이다. 페미니즘이라 불리는 새로운 사회 계약은 “여성의 자유를 위한 기초를 놓아야 한다.”고 <밀라노 여성서점>은 선언한다. (32) 이 기초는 페미니즘 공동체의 모든 구성원이 동의해야만 하는 합리적 전제로 구성된 근거가 아니다. 상징적 어머니라는 수사 주위에 조직되는 이 계약은 합리성이나 영구적인 원칙에 호소하지 않고 “일상의 언어와 몸짓을 통한 정치적 실천의 맥락 속에서, 한 여성의 다른 여성과의 관계 속에서, 욕망의 태동 속에서, 일상적 사물에 근접하여”자유를 욕망하는 여성들에게 권위를 부여할 것이다.(111) 원시적 아버지 같은 토템과 ― 이 아버지는 사회 계약의 “다른” 이야기에서 살해되어야만 하는데, 그의 살해는 남성들 사이의 정치적 평등 관계의 조건이며 그의 내재적인 회귀는 그들을 괴롭힌다. ― 다르게 상징적 어머니는 “세상에 맞서 여성의 욕망을 지지하고 유효하게 하는 여성들에 의해 한 여성으로 구체적으로 체현된 여성적 차이의 사회적 정당성의 근원을 가리키게” 된다. 이는 이 같은 성별화된 매개의 형상이 절대적일 수 없다는 것을 다른 식으로 말하는 것이다. 그것은 여성들 사이의 자유로운 관계라는 물질적이고 상징적인 실천과 분리되어서는 존재할하지 않을 것이다. 성적 차이 실천하기 상징적 어머니, 즉 여성적 기원의 잉여를 순환시켜 그것이 집합적 부가 되게 하는 실천의 이름은 <아피다멘토> 또는 수탁(entrustment)이다. 여성들 사이의 전형적인 관계들 중에서 성경의 룻과 나오미의 이야기, 시인 힐다 두리틀(Hilda Doolittle)과 브라이허(필명이다.)의 그리스에서의 관계(힐다의 『프로이드에 대한 헌사』(Tribute to Freud)에 묘사되어 있는 것처럼), 버지니아 울프와 비타 색빌웨스트(Vita Sackville-west)의 우정과 같은 수탁의 사례(규칙이 아니다.)를 발견하면서 <밀라노 여성서점>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다른 여성에 대한 한 여성의 수탁은 정치적 투쟁의 소재다.”(31) 가장 결정화된 형태 속에서 여성들이 스스로를 그녀에게 수탁하는 여성은 수탁하는 이의 자유에 대한 욕망을 지지하는 여성(또는 여성들)로서 그녀(들)은 “전진해(Go ahead)”라고 말한다..28) <밀라노 여성서점>은 “그것[이 경험]은 H.D에게 그녀가 시적 재능을 지녔다는 느낌을 주었고, 이와 함께 이 모든 것이 가능했던 것은 그녀 곁에 있으면서 결정적인 순간에 ‘전진해’라고 말해 준 여성 때문이라는 확신을 주었다.”고 언급한다.(33~34) “분명히 우리는 스스로에게 권위를 부여하는 것이 개인적인 행위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권위는 원래 그것을 줄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 그것을 줄 수 있는 권위가 있는 사람으로부터 부여된다. 하지만 만약 그것을 받아야 하는 사람이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녀는 권위를 가질 수 없다. ‘전진해’라고 브라이허는 H.D에게 대답하면서 H.D가 그녀에게 의존함으로써 그녀에게 부여한 모성적 권위를 상징적 권위부여의 형태로 그녀에게 되돌려준다.”(126) 초기 페미니즘의 이상화된 형상과는 반대로, 수직적인 수탁이라는 관계는 수평적, 상호적 관계이기도 하다. 여성의 욕망들을 적법화하는 권위는 그것을 수여하는 인정 없이는 아무 것도 아니다. (게다가 “확립된 위계를 진정으로 존중하는 여성은 […] 그녀 자신을 남성 또는 남성적 기획에 수탁한다.”[Milan 133]).29) 수탁은 사적인 문제가 아니다. “우리가 여성적 수탁의 관계가 사회적 관계라고 말하고, 그것을 정치적 기획의 내용으로 만들려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어머니[즉, 우리의 욕망을 지지하는 여성들]에 대한 상징적 빚은 모든 이들의 눈앞에서 가시적·공적·사회적인 방식으로 지불되어야 한다.”(Milan 130) 수탁은 자매애가 아니다. “스스로를 수탁하는 것은 거울 안에서처럼 그녀 안에서 자신의 현실적 본질을 확인하기 위해서 다른 여성에게 기대하는 것이 아니다. 수탁의 관계 속에서 여성은 다른 여성에게 그녀가 할 수 있는 것과 그녀의 욕망 안에서 나타나는 것에 대한 척도를 제공한다.”(149) 수탁은 규칙이나 영구적인 정치적 형태가 아니다. “그 문제에 관한 가능한 다른 답들, 더 좋은 답들이 틀림없이 존재하고, 존재하게 될 것이다.”(121) 수탁은 우연적인 정치적 실천으로, 1966년부터 1988년까지 밀라노에서 여성에게 상징적 거처가 없고 그들 사이의 관계가 결핍되어 있는 것에 대한 가능한 하나의 대응으로서 발전했다. 그것은 우연적으로 필연적인 실천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다른 식으로 나타날 수도 있었지만, 필연적인 것으로 경험된 욕구에 대한 응답이었기 때문이다. 즉, 권위 있는 대담자의 부재가 그것이다. 만약 “페미니즘이 여성들의 자유에 대한 [일종의] 기초를 제공해야만 한다면,”(32) 하지만 그것이 자유에 대한 합리적이거나 사회적인 정당화(즉, 사회 개선 등)가 아니라면, 수탁이 바로 그런 기초다. 수탁의 실천에서 “여성적 자유는 여성들 자신에 의해서[만] 보장된다.”(142) 그러므로 여성의 행동과 요구에 권위를 부여하는 것은 그 권위가 자명하고 자신의 편에서는 어떤 동의나 행동도 필요로 하지 않는 절대적 형상도 아니고 (2세대 페미니즘이 전제하려 했던) 정치적 인식론, 즉 진리 주장으로 정치적 주장을 옹호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자신의 자유에 대한 욕망에 권위를 부여받고, 역으로 스스로의 욕망을 매번 권위부여 하는 여성들, “전진해”라고 말하는 여성들이다. 이 문구는, 그 완전한 단순성 그리고 복합적이고 일상적인 표현 속에서, 페미니즘적인 의지의 자유가 처한 궁지의 탈출구를 겸손하게나마 상징화한다. 그것은 “나는 할 것이다.”라는 공허한 자유가 “나는 할 수 있다.”는 현세적 자유로 변형되는 것을 상징한다. “전진해”라고 말하거나 이 말을 듣는 것, 그리고 이 문장에 부합하게 공적으로 행위하는 것은 페미니즘의 피해자 동일성, 즉 피해자화의 정치에서 벗어나면서도 여성들이라 불리는 집단의 소속을 부인하지 않는 것이다. 돌이켜보면, 스스로가 “사회적으로 억압받는 동질적 집단”의 심상 안에서 대표될 수 없었던 여성은 그런 부인에 쉽게 이끌려 주권의 환상에 사로잡힌다. “그녀에게 동료 여성이 필요하다는 점을 알거나 인정하려 들지 않는”(135) 여성은 종국에 “남성적 권력이라는 경직된 상징의 영역에 갇혀 다른 여성들이 필요하지만 그녀가 원하는 것을 놓고 다른 여성들과 협상할 수 없게”(137) 된다. 지금 이 문장을 다시 읽으면, 인정한다는 것 안다는 것의 단순한 동의어가 아니라는 점을 알 수 있다. (카벨(Stanley Cavell)을 알기 쉽게 바꾸어 말하자면) 내가 빚지고 있음을 안다고 해서 내가 빚지고 있다는 것을 저절로 인정하는 것은 아니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여성들 사이의 관계는 지금과는 달랐을 것이다. “어떤 이는 [카벨을 인용하며] 말할 수 있다. 인정은 앎을 넘어선다. (넘어선다는 것은 말하자면 앎의 질서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 앎에 기초해서 무언가를 하거나 드러내야 한다는 요구 안에 있다.)” (Cavell, 257) 다른 여성들에 대한 빚을 가시적이고 공적인 방법으로 갚아야 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내 머리 속에 그 부채에 대한 무언(無言)의 앎을 담고 다니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 사고만으로는 현실이라는 직물을 바꿀 수 없고, 행동만이 그럴 수 있다. 따라서 <밀라노 여성서점>은 대담하게도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여성들 사이의 관계 속에서 꾸밈없는 감사는 여성적 자유가 실천적으로 기반을 둔 곳이다. 이론에서나 실천에서나 다른 모든 것은 그것의 결과가 아니면 자유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 자신에게 무언가를 준 다른 여성에게 감사하는 한 여성은 그런 감사를 잃어버린 집단이나 페미니즘 운동 전체 보다 여성적 성의 해방에 더 가치가 있다.”(130) 감사는 위계의 표현이 아니라 상호성의 표현이다. 그것은 여성적 자유의 비주권적인 조건에 대한 상호 인정이다. 성적 차이가 여성들의 계보에 소속되는 것에 대한 정치적 요구로 읽힐 때, 성적 차이는 그것이 주어진 방식을 전혀 속죄하지 않으면서 주어진 것과 스스로를 화해시키는 수단이 된다. 그것은 스스로에게서 “여성되기의 ‘인과적’ 소여(datum)”를 제거하여 퇴행적으로 의지하려는 소망을 따라다니는 원한에서 탈출하려는 시도다. “남성들이 발명해 낸 사회적인 상징 질서 속에서, 여성으로 태어난다는 것은 인생의 모든 것을 조건 짓는 사건이다. 그녀의 인생에 개인적 운명이란 없다. 그녀가 자유와 필연(necessity)을 일치하게 만들 방법은 없다. 그녀에게 필연이란 자신의 해부체(an anatomy)의 사회적 사용(모성, 처녀성, 성매매 …)에 순종하는 것을 의미하며, 그녀의 자유는 이 모든 것에 대한 회피를 의미한다.”(Milan, 128) 성적 차이는 “우리가 사회생활에 소속되는 것이 사회생활의 여성적 구성부분에 우리가 소속되는 것에 따라 결정된다는 사실적 전제”가 아니다. 성적 차이는 “부자유의 원인으로부터 나온 이 사실적 전제를 우리 자유의 원칙으로 변형시키는 정치적 실천”(122)이다. “즉, 여성이 자유로운 것은 그것이 선택의 대상이 아님은 잘 알고 있으면서 자신이 여성적 성에 속한다는 것을 뜻하는 선택을 할 때다. (138) 그러므로 이탈리아 페미니스트들이 이해하는 식의 성적 차이의 정치는 필요성에 속박되고 자기-주권의 환상에 사로잡히고 원한으로 가득 찬 상태에 머무르는 “나는 할 것이다.”를 조건 지어지고 선택된 공동체, 즉 “다른 여성에 대한 감사와 교환이라는 원칙에 입각한 […] 사회 계약”(142) 안에서 자유를 경험하는 “나는 할 수 있다.”로 변형시킬 것이다. 이 새로운 사회 계약은 합리적으로 동의된 원칙들의 접합이 아니라 약속(빚을 인정할 것)과 형상(원형과 상징적 어머니)에 기초한다. 이 계약은 서명자와 그들의 후손을 영원히 속박하고, 계약의 정당성을 사회 계약 이론가들이 재치 있게 “암묵적 동의”라 부른 것과 다를 바 없는 것으로 감축시키는 계약과는 다르다. 성적 차이는 그녀보다 먼저 와서 “전진해”라고 말하는 여성들을 가시적이고 공적인 방식으로 인정하는 일상적 실천과 떨어져서는 아무런 실존도 보증도 갖지 못한다. 자신이 아는 것을 인정하는 것(즉, 비주권은 자신이 이 세상에서 성취한 것과 페미니즘 자체의 조건이라는 것)은 “여성들 사이의 차이”라는 날 것의 사실을 정치적으로 의미 있는 무언가, 즉 “권위 있는 대담자”로 변형시킨다. 그것은 “여성들 사이의 불운한 거울놀이”에 입각한 평등의 통념을 더 위험하지만 더 실체 있는 무언가, 즉 상호성으로 변형시킨다. 페미니스트는 자신이 아는 것을 자신이 인정하는 것으로 변형시킨다고 주장하면서, <밀라노 여성서점>은 당당하게 단언했다. “권위 있는 대담자를 갖는 것이 인정된 권리를 갖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 이것이 일단 권위 있는 매개자를 창조하고 나면 페미니즘은 더 이상 권리에 관심을 갖지 말아야 한다는 의미인가? 권리를 재형상화하기 이 글의 서두에서 나는 미국의 페미니스트들이 『성적 차이』를 무시했던 것은, 아마 동일성(또는 동일성의 실패)의 렌즈를 통해 읽었을 때 그 글은 본질적인 성별화된(sexed) 차이에 관한 주장으로 쉽게 오독되기 때문일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제 우리는 그런 비판이 왜 과녁에서 빗나간 것인지를 더 잘 알 수 있는 위치에 있다. 이탈리아 페미니스트들이 제기한 단호한 정치적 정식화에서, 성적 차이는 동일성의 생산이나 파괴가 아니라 수탁과 인정에 중점을 둔 자유의 실천이다. 세계 건설(world-building)과 새로운 사회 계약으로서 페미니즘에 초점을 맞추면서 성적 차이의 정치적 실천이 추구하는 것은 현세적인 실재의 직물에 변화를 야기하는 것이다. 성적 차이가 정치적 공간의 창조, 즉 멀고 가까움의 관계에 의해 정의되고, 새롭게 생각될 수 있는 형상(즉, “상징적 어머니”) 주위에서 조직되며, 재조직화와 판단에 종속된 현세적인 중간에 낀 공간(worldly in-between)의 창조로 이해될 때, 성적 차이는 여성들로서 모든 여성(all women qua women)(그 계급에 대한 소속을 어떤 식으로 정의하든 간에)에 전면적으로 적용되지 않는다. 그것은 오직 여성의 계보에 대한 정치적 주장과 판단을 제시하는 개인들에게 적용될 뿐이다. 그런 정치적 요구는 빚에 대한 인정, 즉 공적이고 가시적인 방법으로 여성적 자유의 비주권적 조건을 의미화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성적 차이』를 본질주의적인 문헌―또는 최소한 단순히 그런 것―이 아니라고 인정한다 해도, 그 글의 가치를 폄하하는 방향으로 우리를 이끌 수 있는 다른 쟁점이 있다. 바로 평등권을 쟁취하기 위한 페미니즘의 역사적인 투쟁을 통째로 거부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 그것이다. 사실 권리에 기반을 둔 우리의 틀 내에서 『성적 차이』는 ― 본질주의의 공포는 차치하더라도 ― 바람직하지 못한(non grata) 페미니즘 저작으로 받아들여질 운명이었다. 자유의 정치(성적 차이) 대 평등의 정치(성적 비차이/무관심)는 쉽사리 평등한 권리냐 아니면 여성적 자유냐 하는 제로섬 게임으로 읽힐 수 있다. 전자에 매우 비판적이었던 <밀라노 여성서점>은 후자를 택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로써 양자 [모두가 실현될] 가능성을 제거했다. 하지만 이 글을 읽는 다른 방식이 있다. 즉, 권리 요구의 조건으로서 자유의 실천, 그리고 자유의 실천으로서 권리 요구를 전면에 내세우는 방식이다. “성적 차이의 정치는 성들 간의 평등이 달성된 후에 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 너무나 추상적이고 때때로 모순적인 평등의 정치를 대체하려는 것은 여성들 사이의 사회적 관계에 기초하여 성취된 여성적 자유의 장소로부터 모든 종류의 성차별적 억압에 맞서 싸우기 위해서다.”(Milan 145. 두 번째 강조는 필자가.) 이 문장을 평등의 정치는 페미니즘에게 막다른 골목이라는 뜻으로 볼 수도 있지만, 우리는 이 문장을 다음처럼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성적 차이의 정치가 성들 간의 평등이 달성된 후에 온다는 믿음은 잘못된 것이다. 이는 평등의 정치가 성적 차이의 정치로 대체되어야만 하기 때문이 아니라, 후자가 없다면 전자는 현실의 실천에서 본질적으로 묘연한 상태에 머물 것이기 때문이다. 주체의 문제라는 렌즈를 통해 읽는다면, 이 대안적인 해석은 성적 차이를 법에 기입할 필요성에 관한 주장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리고 이탈리아 페미니스트들에게 가장 중요한 페미니즘 사상가임에 틀림없는 이리가레가 바로 그것을 주장했다..30) 하지만 이리가레나 <밀라노 여성서점> 모두 다른 특성의 권리들, 즉 권리들은 자유의 실천과 연결고리를 상실할 때 죽은 법적의 인공물이나 심지어 위험한 정치적 도구로 타락하는 경향이 있다는 점을 환기시킨다..31) 과연 미국 사회의 페미니즘이 대체적으로 그런 것처럼, 대부분의 동시대 페미니즘의 뿌리 깊은 사법적 제도적 점향은 어떻게 우리가 급진적인 권리 요구가 한 때 약호화한 정치적 자유라는 사상과의 접촉을 상실할 수 있는지 보여준다. 만약 이리가레의 주장처럼 여성들이 성별화된 시민적 권리(civil rights)를 주장한다면, 그것은 평등한 권리들과 마찬가지로 참여(단순한 정치적 사법적 대의가 아니라)와 시민들 서로에 대한 수탁(“남성이든 여성이든 어떤 지도자에 대해서가 아니라” [Democracy, 174]), 양자에 대한 요구이기 때문이다. 권리들이 제도화될 때, 우리는 그 권리들의 기원이 자유, 비(非)지배, 공적업무에서의 평등한 참여에 대한 급진적이고 비(非)근거적인(ungrounded) 요구에 있다는 점을 잊곤 한다. 우리는 애초에 그 권리들을 창조했던, 종종 덜 안정적인 실천에 투자를 지속하기보다는 그 권리들을 그 자체로 보장하는 데 사로잡히는 경향이 있다. 시민적 권리로 회귀하자는 요구는 그런 기원을 상기시키는 것이다. 이리가레는, 페미니즘과 같은 정치적 투쟁은 “권리에 대한 변화를 요구하면서 법적인 판단도 국가 대표의 판단도 기다리지 않았다.”(Democracy, 175)고 쓴다. 자유는 권리에 대한 요구에서 발원할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말과 행동을 교환하는 데 있다. 자유는 그런 요구의 성공적인 제도화에 뒤따라오는 정치적 대의에는, 그 자체로는 있지 않다. 이리가레와 <밀라노 여성서점>은 모두 권리들이 보증하는 정치적 대의와 정치적 자유 사이에는 제거할 수 없는 긴장이 있다고 주장한다. 페미니즘은 “다양하고 풍부한” 성별을 둘러싸고 조직되는 심원하게 다양한 정치 운동으로, 이는”여성 일반”이라는 통념으로는 결코 대의될 수 없다. (Milan, 74) 이는 권리에 반대하는 논변이 아니듯 대의에 반대하는 논변도 아니며, 다만 페미니스트들이 자유의 경험을 권리의 제도화나 대의와 혼동하는 것은 심각한 잘못이라는 점을 날카롭게 상기시키려 할 뿐이다. 이탈리아 페미니스트들은 여성들에게 있어 진정한 정치적 자유 없이 대의와 제도화된 권리를 갖는 대가가 무엇인지를 보여주었다. 자유가 부재하다면, 평등한 권리를 위해서는 동화 또는 이리가레가 “동일자의 법(law of the same)”이라 부른 것을 대가로 치러야 한다. 하지만 아렌트가 우리에게 상기시키듯이, 평등은 정치적인 따라서 인간적으로 구성된 원칙으로, 이는 인간 복수성의 경험, 즉 동무들 사이에서 자유롭게 움직이며 다른 관점을 듣고 판단하는 경험을 지탱해야 한다. 아렌트와 <밀라노 여성서점> 모두가 각자 다른 방식으로 그렇게 하는 것처럼, 자유와 그것을 지지하는 주체적인 중간에 낀 공간을 전면에 내세우는 것은 평등한 대의나 평등한 권리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고, 동일성을 요구하는 것 같은 양자의 통념을 거부하는 것인데, 왜냐하면 이는 점차 추상적인 원칙이나 규칙으로 굳어져 자유의 실천들 안에 있는 그 기원으로부터 분리되었기 때문이다. 자유의 실천들 안에 있는 자신들의 기원과의 관계로 되돌려질 때, 권리들은 이미 우리인 을 승인하는 것 이상으로 사용될 수 있다. 권리들은 더 이상의 무언가가 되려는 우리의 욕망을 승인할 수 있고, 해야 한다. 이런 방식으로 이해된 권리들은 “전진해”라고 말하는 자유의 정치적 도구다. “권위 있는 여성적 대담자를 갖는 것이 인정된 권리보다 중요한” 것은 권리가 중요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오직 우리가 그것을 주장하고, 사용하고, 그것을 넘어 새로운 요구와 새로운 자유로 나아갈 수 있는 한에서만 중요성을 갖기 때문이다. 권리들이 중요한 것은 마치 권위 있는 여성적 대담자들처럼 오직 그것들이 우리가 전진하도록 영감을 주는 한에서다. 사실 게르하르트가 주장한 것처럼 권리들은 “수입되거나 명령받을 수 없다. 그것들은 연관된 사람들이 권리로서 그것을 주장하거나 옹호하는 위치에 있을 때에만 적용된다.”.32) (176) <밀라노 여성서점>이 보여준 것처럼, 그런 위치의 창조는 자유의 실천, 현세적인 중간에 낀 공간, 권위 있는 대담자를 전제한다. “만약 어떤 이가 자유의 기획에 따라 스스로의 삶을 분명히 표현하고 자신의 여성으로서 존재[우연한 사실]를 이해하고자[즉, 의미를 부여하고자] 한다면, 권위 있는 대담자는 필수적이고,” 그것은 “어떤 권리나 법도 줄 수 없는” 것이다.(Milan, 31) 즉, 국가에게 청원하는 권리 요구는 페미니스트들이 서로에게 건네는 정치적 요구를 결코 대체할 수 없다..33) 그것의 기원적 고향이자 열망인 자유의 실천을 통해 읽힐 때, 권리에 대한 요구는 현재 자신인 (what one is)을 인정(recognition)하라는 요구가 아니라 자신은 누구인가(who one is), 그리고 더욱 중요하게는 자신은 누가 될 수 있는가(who one might become)에 대한 인정(acknowledgement)의 요구다. 그렇게 이해되면 평등권은 특정한 동일성 범주로 분류된 모든 주체들에게 규칙처럼 적용될 수 있는 법적 인공물이 아니다. 권리는 위로부터 분배되는 것이 아니고, 아래로부터 만들어진 더 이상의 무엇(something more)에 대한 요구다..34) 권리는 사물이 아니라 관계다. 따라서 권리는 우리가 가지는 무엇이 아니고 우리가 하는 것이다. 권리는 우리와 타인의 관계 속에서 우리를 제한할 뿐만 아니라 힘을 북돋는다. 이런 방식으로 권리를 사고하는 것은 자유의 실천보다 평등에 대한 요구를 전면에 내세운 평등한 권리에 대한 여성들의 역사적 요구의 가치에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다. 아마도 페미니스트들은 이야기의 방향을 바꿔 자유에 대한 급진적인 요구에 있는 권리의 기원을 회상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이런 요구는 여성 해방 투쟁으로 환원할 수 없는데, 이는 사회적인 용어법 속에서, 권리가 약호화한 무언가로 전형적으로 해석되기 때문이다. 여성들과 같이 권리를 빼앗긴 집단에게 권리를 확장하는 것은 전혀 불가피하지 않은데, 왜냐하면 자유의 실천으로서 권리에 대한 요구가 반드시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에서 솟아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자유는 권리와 마찬가지로 그것을 요구하는 사람들에 의해서만 보장될 수 있는 것이다. <밀라노 여성서점>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여성적 자유가 독자적으로 보장되기 위해서는 ― 이것이 없다면 이는 자유가 아니라 해방이라고 부르는 게 옳을 것이다. ― [여성의] 해방을 외부에서 도왔던 역사적 환경이 말하자면 불필요하게 되는 것이 필수적이다. 즉 그것들이 단위생식에 의해 스스로 재생산하고 자신의 실행을 위한 물질적 조건을 생산하는 자유로 해석되거나 대체되는 것이 필수적이다. 이미 쓴 것처럼, 만약 우유의 저온 살균이 “여성참정권 옹호자들”의 투쟁보다 여성들에게 자유를 주는 데 더 기여했던 것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않도록 행동해야만 한다. 영아 사망률을 감소시키고 피임을 발명했던 의학에서도 마찬가지고, 남성이 더 이상 여성을 열등한 존재로 취급하지 못하게 한 사회생활의 진보에서도 마찬가지다. 저온 살균된 우유에 도달한 이런 자유는 어디서 왔는가? 나에게 우월한 문명의 표기로 제공된 그 꽃은 어떤 뿌리를 갖고 있는가? 만약 누군가 내 손에 쥐어준 이 병과 이 꽃에 나의 자유가 있다면 나는 누구인가? (144, 강조는 필자) 자유는 증여된 것도, 상속받은 것도 아니며, 오직 여성들 스스로에 의해서만 요구될 수 있다. 그렇다면 무엇이 자유를 보증하고, 근거 짓고, 정당화할 것인가? “여성적 자유는 여성들 스스로에 의해 보장된다.”(142).35) 권리와 대의의 정치에 대한 노골적인 거부까지는 아니더라도 <밀라노 여성서점>의 지독한 회의주의처럼 보이는 것 덕분에, 우리는 같은 것을 같게 취급하고 자유 실천의 일부가 아닌 평등 원칙의 한계를 알 수 있게 되었다. 여성들이 권리를 위한 투쟁과 실행에서 얻을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에 대해 우리의 눈―정치적 문제에 대한 사법적이고 국가 중심적인 대답 때문에 점차 맹목적이 되어가는―을 열기 위해 아마 <밀라노 여성서점> 페미니스트들은 그렇게 비타협적인 용어로 그들의 주장을 진술할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권리가 그런 실천의 일부일 수 있는지 여부는 권리가 쟁점이 되는 사례의 특수성의 맥락과 관계에서 결정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권리가 요구하는 것은 우리의 맹목적인 수용이나 거부가 아니고, 오히려 우리의 정치적 판단이다. 이것은 성적 차이의 정치적 실천이 요구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판단에 대한 요청으로 인해 <밀라노 여성서점>의 문헌은 차이에 대한 요구를 포기하지 않고서도 평등에 대한 요구와 권리를 재형상화하려는 3세대 페미니스트들에게 충분히 재생시킬 가치를 지니게 되었다. 참고문헌 Arendt, Hannah. The Human Condition.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89. --------------------. Lectures on Kant’s Political Philosophy. Ed. Ronald Beiner.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82. --------------------. “What is Freedom?” Between Past and Future: Eight Exercises in Political Thou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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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6-10-10

    성차의 정치적 실천을 통한 권리의 재형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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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위 있는 여성 대담자가 있는 것이 인정된 권리를 갖는 것보다 더욱 중요하다. 누군가가 자신의 삶을 자유의 기획에 따라 분명히 표현하고 여성 되기(being a woman)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권위 있는 대담자가 필요하다.[…] 권리 주장의 정치는 그것이 얼마나 정당하고 심오한지에 상관없이 부차적인 정치다. - 밀라노 여성서점 31 이 놀라운 주장이 등장하는 것은 『당신이 어떤 권리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지 마라: 여성 집단의 사고와 변천에서의 여성적 자유의 발생』(Non Credere di avere dei diritti: la generazione della liberta`femminile nell’idea e nelle vicende di un gruppo di donne)에서다. 이 책은 1987년 <밀라노 여성서점>(Liberteria delle Donne di Mliano)이 집단적으로 집필했고, 1990년 『성적 차이』(Sexual difference)라는 제목으로 영역본이 출판되었다. 지금은 절판된『성적 차이』는 매우 도발적인 저작이어서 미국 페미니스트 사이에서 거의 주목을 끌지 못했고 1990년대 소위 “여성” 범주 논쟁에서도 사실상 누락되었다..1) 이와 같은 부재는 의미심장하다. 이 책의 공동 역자이자 편집자인 라우레티스(Teresa de Lauretis)는 다음과 같이 간단명료하게 설명한다. “역설적으로 여성의 권리, 법 앞에서의 평등한 권리의 옹호가 아닌 여성에 대한 완전하고 정치적이며 개인적인 책임성을 요구하는 자유는 서구적 사고 속에서 출현한 다른 어떤 통념에도 뒤지지 않는 급진적인 개념이다”(12)..2) 자유가 동등한 권리를 요구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여성에 대한 정치적·개인적 책임성을 발전시키는 데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리고 이런 실천이 과연 서구 사상사에서 찾을 수 있는 어떤 것 못지 않게 급진적이라면, 왜 미국 페미니스트 이론가들은『성적 차이』를 다소 무시했는가? 이러한 질문을 반성하려면, 페미니스트들은 서구적 전통에서 상속받은 자유의 개념화, 즉 의지의 현상, 주체의 소유, 주권이라는 이름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이라는 개념화에 그녀들 자신이 연루되어 있다는 사실을 관찰해야 할 것이다. 이런 이유로, 우리 자신의 체제와 같은 자유 민주주의를 지배하는 이 같은 설명에 따르면, 자유는 매우 개인주의적인 용어로 정의되고, 헌법적으로 보장된 권리 안에 거주하며, 정치가 종결되는 곳에 존재하는 무엇으로 경험된다..3) 그러나 <밀라노 여성서점>은 자유를 이와 다르게 사고한다. 이들에게 자유는 새로운 세계를 건설하기 위한 창조적·집단적인 실천이자 근본적으로 창시적인 특성을 가진 [실천으로서], 환원할 수 없을 만큼 우연적이[지만] 정치적으로 의미심장한 성적 존재로서의 여성들 간의 관계를 구축한다. 즉 이 여성들은 이런 실천이 없었다면 남성적 교환 경제 안에서의 위치를 제외한다면 아무 것도 가지지 못한다. 밀라노 여성들은 1·2 세대 페미니스트들이 자유를 주장해온 틀을 거부하며 남성과의 유사성(동일, sameness) 또는 일반적인 사회 복리에 대한 여성으로서의 특별한 기여(차이)라는 식으로 자유에 대한 여성의 요구를 정당화하기를 거부했다. 실제로 밀라노 여성들은 [서구적 전통에서] 상속받은 자유에 대한 이해를 특징짓는 주권이라는 환상뿐만 아니라, 자유를 향한 여성의 요구를 여성들의 사회적 기능의 봉사 안으로 밀어 넣는 유용성이나 편의의 논리 역시 거부한다. 그들의 관점에서 보면 이는 여성 문제와 여성권에 대한 논변의 역사적 반복을 운명적으로 지배해 온 논리다. 즉, 여성의 쓸모는 무엇인가? 내가 다른 곳에서 페미니즘의 사회적 문제라고 칭했던 것의 논리는 제쳐두고, <밀라노 여성서점>의 “정치를 행하는 비범한 방법”(Milan 50)은 “여성들 간의 자유로운 관계를 [발생시키는] 실천”(79), 또는 밀라노 여성들이 “성차의 정치”라 부르는 것의 관점에서 서구 페미니즘의 전체 기획을(145) 개작한다..4) 나는 미국의 페미니스트들이 <밀라노 여성서점>의 글을 눈여겨보지 않은 것은 자유를 주권으로 보는 문제적인 관점에 우리가 연루했기 때문일 수 있다는 견해를 밝혔다. 그러나 이는 너무 나간 것이다. 이탈리아어본 부제(여성 집단의 사고와 변천에서의 여성적 자유의 발생)에도 불구하고, 미국 페미니스트는『성적 차이』를 여성의 자유에 관한 정치적 선언으로 받아들인 적이 없다. 그렇기 보다는, (“여성” 범주 논란의 맥락에서) 성들 간의 감축할 수 없는 차이에 관한, 그리고 계급, 인종, 섹슈얼리티, 국적 관계를 압도하는 남성성과 여성성 간의 상징적 비대칭성에 관한 주장으로 받아들였다..5) (대부분 유럽적 기원의) 페미니즘 저작을 “근본주의적”인 것으로 간주하여 성급히 기각하는 것을 반대하는 목소리에도 불구하고,.6) 미국 페미니스트들은 대체로 성적 차이에 대해 주장하는 것이, 위티그(Monique Wittig)가 신랄하게 비판한 것처럼 “우리를 여성의 신화로 후퇴시키”는 것 까지는 아니더라도, 사회적 차이의 범주들, 이들의 정치적 기원과 효과에 관한 진지한 토론의 가능성을 차단한다고 생각해 왔다(13). 이 글에서 나는 성적 차이에 관한 페미니스트들의 설명에 대하여 찬성하거나 반대하는 익숙한 논변을 다시 반복하려는 것이 아니다..7) 우리(페미니스트)가 이 논쟁에서 이미 지쳤다면―기초에 관한 논쟁에서는 확실히 그랬다―, 이는 적지 않게 성적 차이를 주체의 문제가 아닌 문제로 사고하는 데에 우리가 진정한 곤란을 겪고 있기 때문이다. 주체 문제의 틀 내에서는, 이성애를 강요하는 사회적 모체 내에서 주체 형성의 조건 자체를 규정하는 남성성과 여성성 사이의 불가능한 선택 이외의 것으로 성적차이를 보기는 힘들다. 따라서 우리는 성적 차이를 사회를 구성하는 것이거나 (즉, 준 형이상학적인) 사회에 의해 구성되는 것(즉, 역사적으로 우연적인)으로 여겨왔다..8) 페미니즘 기획을 다루면서 세계를 건설하는 문제에 초점을 둔 자유-중심적 틀 내에서, <밀라노 여성서점>은 우리로 하여금 성적 차이를 정치적인 것으로 사고하게 만든다. 즉 이는 분명히 표현되어야 하는, 즉 공적 공간에서 이 같은 다른 주장들과 공적 관계에 진입해야 하는 성적 존재에 대한 주장[으로 사고하게 만든다]. 성적 차이라고 불리는 자유의 실천이 부과한 난제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밀라노 여성들의 정치의 중심에 있는 세계 건설의 임무에서 비껴나지 않아야 한다..9) 이러한 임무는 여성들이 남성적인 문화 안에서 겪는, <밀라노 여성서점>이 여성을 약화시키는 (상징적인) 무차별 상태라고 부르는 것, 즉 ‘모든 여성은 동일하다.’는 언명에 대한 대응이다. 이러한 동일성은 보부아르(Simon de Beauvoir)의 성/성별 차이에 대한 강력한 비판에서 초점이 되는 여성의 이미지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그녀의 유산에 동반된 성/성별 평등의 원칙을 둘러싸고 조직된 페미니스트 정치에도 도입된다. <밀라노 여성서점>이 말하기를 페미니즘 내에서 평등은 “성별에 근거를 둔 공통성을 향한 여성들의 요구”(“당신이 모든 다른 여성들과 같은 여성이라는 점을 잊지 말라.”)를 강화하지만, 각각의 여성들이 “자신의 개인적인 특색/구별을 필요로 한다.”는 점(137)과, 한 집합의 등가적 구성원 이상으로 취급받고자 하는 욕망, 다시 말해 그녀의 특수성을 무시한다. “중립적인 정의는 여성으로 하여금 자신을 다른 여성과 비교하지 말고, 남성과의 평등을 기다리라고 명한다. 그 결과 여성들의 경험은 자기 자신 안에 감금된 채 사회적으로 번역되지 않는다.”(113) 다양한 경험을 인정하고, 평가하고, 매개할 수단이 결핍되어 있는 것이다. “여성들이 자리 잡을 시-공간”이 없는 상태에서 각각의 여성은 자신만의 경험에 갇혀있고, 이는 철저하게 주관적이다. “어쨌거나, 누구와 [기호를] 주고받을 수 있는가?”(25) 대담자와 매개(현세적인 사이 공간)의 상징적 구조를 이름붙이는 것은 “사회 계약의 성별화된 토대에 이르게 되며”, 첫째로 “남성과 여성간의 사회 계약은 없다.”는 사실과, 둘째로 “여성은 상징적인 수준에서는 무리이지만”, “사회생활에서는 […] 대부분 서로 고립되어 있다.”는 사실을 수반한다. (129, 134). 남성적인 사회 계약의 이면은 단지 페이트먼(Carol Pateman)이 설득력있게 주장하고 <밀라노 여성서점>이 동의했을.1) 것처럼 남성의 여성 소유뿐만 아니라, 여성이 기술과 “사회 교환의 규칙”을 누리지 못하는(134) “여성 인류의 야만적 상태”(137)이기도 하다. 여성들 간의 관계는 남성들의 관계의 규범을 해치는 예외적인 관계가 있기는 하지만, <밀라노 여성서점>이 “남성의 정치적 사고에서의 맹점”이라고 부르는 것을 구성한다(136). “여성들이 개인적 특색/구별을 지니고 싶어 하는 자신의 욕망과 그녀가 여성의 공통성을 떠나지 않아야 한다는 자매들의 요구를 화해시키는 과정에서 접하게 되는 문제에 대한 대답을 개인과 집단성 간의 관계에 관한 오래된 남성들의 선언들 사이에서 탐색해” 봐야 소용이 없다(136). <밀라노 여성서점>의 주장에 따르면 남성적 사회 계약은 여성들 간의 자유로운 관계의 모델이 될 수 없는데, 왜냐하면 평등이라는 그 중심적인 원칙은 이리가레(Luce Irigaray)가 “무엇에 대한 평등인가?”(“Equal” 32)라는 간단한 질문을 통해 드러낸 실패한 논리 속에 페미니즘을 가둬버리기 때문이다. 이런 남성적 기준이 평등한 권리를 위한 여성들의 역사적 투쟁 이면의 공공연한 표준이라는 점은 누구나 알고 있다..11) 이 표준이 그들에게 평등이냐 차이냐 라는 불가능한 선택을 강요한다는 것이 초기부터 페미니즘을 괴롭혀왔던 문제다..12) 이것은 페미니즘을 상반된 진영(평등 페미니스트 대 차이 페미니스트)으로 분할하는 문제며, 이는 화해가 불가능해 보인다..13) 그리고 이는 아마 사실이다. 평등과 차이라는 분명하게 모순되는 원칙을 둘러싸고 조직된 페미니즘의 틀 내에서, 우리의 유일한 선택지는 (1) 두 진영 중 한쪽을 따르거나, 즉 불가능한 선택을 하거나, (2) 불가능한 선택을, 스콧(Joan Scott)의 표현대로 “페미니즘의 구성적인 조건”으로 받아들이는 것 둘 중 하나다..14) 그러나 아마도 또 다른 선택지가 있을 것이다. 평등이나 차이(또는 양쪽 모두)의 깃발 아래서 페미니즘을 사고·실천하는 대신, 자유의 깃발 아래서 페미니즘을 사고·실천한다면 어떨까? 페미니즘이 전혀 앞으로 나아가지 않고 불가능한 선택의 무게감으로 부서질 것이라고 확신하면서, <밀라노 여성서점>은 평등보다 자유를 앞에 내세워 페미니즘적 부등(disparity)이라는 실천을 만들어냄으로써 자신을 엄청난 위험과 서구 페미니즘의 상식과의 불화에 빠뜨린다. <밀라노 여성서점>은 평등을 향한 페미니즘의 역사적 열망을 실현하려는 기나 긴 시도를 실패하고 나서야 이러한 결론에 도달했다. <밀라노 여성서점>이 페미니스트들은 그래야 한다고 지나칠 만큼 주장한 바대로 평등의 원칙을 자유의 이름으로 억압하는 것은 “사회 계약을 찢어버리고 그것의 정치적 형태를 거부하는 것을 의미한다”(Milan 143). 그러나 왜 페미니스트들은, 평등이라는 원칙을 문제 삼는 것이 당연하다고 가정하면서, 어쨌거나 마찬가지로 자유에 대한 호소였던 사회 계약을 찢어버리기를 원하는가? 이탈리아 [페미니스트들]은 사회 계약 이념의 중심을 차지해 온 자유라는 수사를 모르지 않았지만, 이는 그들이 본 뜰 만한 가치가 있는 자유의 모델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이것이 (일부) 남성들의 자유로서의 역사적 정식화라는 점은 별도로 하더라도, 이는 주권의 환상으로 해석된 자유다. 이 환상은 많은 1·2세대 페미니스트들이 무비판적으로 수용했으며, 페미니즘을 사회 계약의 특정한 형태(자유주의)에 고정시켰는데, 이는 정치적 자유를 소극적 자유 및 헌법적으로 보장된 개인의 권리로 축소시켰다 (Milan 136~137). 여성들 간의 자유롭고, 수평적이며, 사회적-상징적인 관계의 실천과 상징이 부재한 가운데, 자유주의는 자신의 성별화 된 육체 및 여성들의 제휴를 부정함으로써 남성과의 평등 및 자유를 추구하라는 “끔찍한 초대”를 불러일으켰다. 이렇듯 성적 존재이기를 거부하는 것은 여성의 자유를 북돋기는커녕 이를 파괴한다. <밀라노 여성서점>이 주장하기를 “공통성을 떠나기를 원하는 여성, 동료 여성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모르고, 이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여성”은 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프로세르피나와 마찬가지로 “남성 권력의 마비된 상징의 범위에 갇혀, 다른 여성들을 필요로 하지만 그들과 자신이 원하는 것을 협상할 자격이 없는 상태”에 놓이게 된다(135,137). 자유를 주권으로 인식하는 것은 공허하며, 가능성 없는 의지일 뿐이며, <밀라노 여성서점>이 주장하기를, 만약 여성이 자유롭기를 원한다면, 아렌트(Hannah Arendt)가 말했듯, 그들이 포기해야 하는 것은 바로 주권이다(“What Is” 165). “사회 계약을 찢어버린다.”는 것은 주권으로서의 자유를 거부하는 것을 뜻할 뿐만 아니라 여성의 자유를 공동체나 더 높은 선(善)에 대한 기여라는 견지에서(예를 들어 사회적 문제의 견지에서) 정당화 하려는 모든 시도를 거부하는 것이다. “여성 정치는 이런 태도, 즉 자원봉사를 한다거나 약자를 보살피고 폭력적 수단을 회피하는 등 남성적이지 않은 여성적 행동으로 체현된 가치에 호소함으로써 사회 질서를 변화시킬 것을 계획하는 정치와 접목되었다.”(Milan 125) 여성의 자유가 “윤리적 본성의 내용”이나 “다른 내용”에 의존해야 한다는 관념을 거부하면서 <밀라노 여성서점>은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우리의 정치는 사회를 개선하는 것을 목표로 하지 않고, 여성과 그들의 선택을 자유롭게 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즉, 자신의 차이를 정당화해야 하는 의무와 이러한 의무가 수반하는 모든 종류의 사회적 예속으로부터 여성들을 자유롭게 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126) 여성적 자유는 무조건적인 것이다. 근본적이거나 결과주의적인 측면에서가 아니라 그것의 유일한 이유는 그 자신이다. <밀라노 여성서점>이 제시한 여성적 자유에 대한 과감한 설명은 “1966년~1986년 사이, 주로 밀라노에서 나타난” 자발적 연합의 발전을 상술하는 일련의 삽화 속에서 출현했는데, 여기서 무언가 새로운 것이 나타났다. 즉, 남성적 교환 경제 내에서의 전통적인 기능을 제외하면 서로 아무런 사회적 관계도 형성하지 않았던 개인들 간의 자유로운 관계의 무근거적 실천..15) 이러한 연합은 서구 페미니즘의 역사에서 대단히 중요하거니와, 권리의 영역으로 소진되지 않는 여성들의 공적 자유의 실천과 영역의 구성에 결정적이다. <밀라노 여성서점>은 이러한 연합, 그리고 그들의 성공과 실패에 관한 혼합된 이야기를 언급하면서, 실질적인 정치적 자유를 경험하지 않고서도 형식적 평등 및 헌법적으로 보장된 권리를 갖는 것이 가능하다는 점을 보여준다. 실제로, 민주주의와 페미니즘이 정치적 자유의 구성과 실천을 형식적인 평등 및 권리의 제도화와 혼동하는 것은 대단히 문제적이다. 정치적 자유의 실천은 근본적으로 창시적인 특성을 갖는다. 이러한 실천은, 발언과 행동을 통해 차이를 드러내고 때로는 평등한 권리의 제도적 공간을 초과하는 주관적인 사이 공간을 창조한다. 그러나 다소 성급하게 덧붙이자면, 이렇게 말하는 것이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는 실천이 자유의 실천이 될 수 없다는 것은 아니다. (평등이냐 차이냐의 선택지처럼) 권리와 자유를 놓고 다시 한 번 잘못된 선택지를 설치하기보다는 차라리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져야 한다. 정치적 자유의 창조적이고 전복적인 특성, 세계 건설을 위한 일상적인 실천, 새로운 사회 계약은 평등한 권리를 위한 투쟁 또는 그의 행사와 어떤 식으로 연관되는가? 이 질문, 그리고 성적 차이의 정치가 내놓는 비범한 답변으로 넘어가자. 보상에 대한 욕망 <밀라노 여성서점>은 자유의 문제를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으로 제한하지 않고, 새로운 형태의 정치적 연합을 건설할 역량으로 이해되는 자유에 주로 관심을 갖는다. 그러나 이탈리아 [페미니스트들의] 관점에서 이러한 형태는 성적 차이와 동떨어져서 사고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여성으로 태어나는 것은 삶 전체를 조건 짓는 사건이기 때문이다.”(Milan128) 필연의 힘을 지닌 우연적 사실, 즉 성적 차이는 파괴되거나 초월되지 않고, “부자유의 원인에서 우리[여성의] 자유의 원칙으로” 재상징화, 변형된다. (122) 이러한 변형은 항상 “여성(female sex)의 인간적 조건에 의해 어느 정도 제약된다.”(119~20) 반드시 바뀌어야 하지만 그러나 회피하거나 의지로 사라지거나 폭력적으로 파괴될 수 없는 인간 조건, 곧 성적 차이는 새로운 문제를 제시하며, 오직 이 “새로움만이 강제로 생겨나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회 혁명은 새로운 것을 사고하도록 강제하기 위해 파괴한다. 그러나 파괴는 여성적 사고의 혁명에 아무런 소용이 없다. 왜냐하면 사고해야 할 새로운 것은 차이(difference)기 때문이다. 전복은 어떤 사물들이 배열되어 있는 방식, 즉 그것의 의미와 관련된다. 이미 주어진 진실을 의미 없는 것으로 만들고, 따라서 그것을 악화시킴으로써 바꾸는 새로운 배열이 있다. 물리적 파괴는 효과적이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파괴되더라도 그 의미를 보존하며, 누구나 그것이 다시 출현할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는 배열이 존재하기 때문이다.(120) 앳킨슨(Ti-Grace Atkinson)이 유명하게 선언한 바와 같이 “여성이 인간으로 태어날 시도를 할 작정이라면, 그녀들은 자살을 해야 한다.”는 관념은 이탈리아 여성들의 자유 기획과는 철저하게 이질적이다(49). 만약 과거의 상태가 현재의 상태 및 자신의 존재의 조건이라면, 파괴하고자 하는 소망은 퇴행을 의지하는 불가능한 소망, 그리고 니체가 무기력하고 자기혐오적인 특성이라고 진단한바 있는 것으로 이끌 수 있다. 니체에 따르면, “과거의 상태”는 압도적인데, 왜냐하면 과거는 양보하지 않기 때문이다. 지나간 것과 의지의 관계는 다음과 같다. “나는 의지한다. 그리고 할 수 없다.” 왜냐하면 과거는 잊혀지거나 바뀔 수 없고, 구원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과거를 구원하기 위해서는 그것과 자신의 관계를 바꾸어야만 한다. “지나간 것을 구원하고 ‘…였다’를 ‘나는 그것을 가질 것이다!’로 변형하는 것 바로 그것이 내가 구원이라고 여기는 것이다.(179)” 니체와 마찬가지로, 이탈리아 [페미니스트들]은 과거를 구원하는 것은 자신에게 가치를 부여하는 것, 새로운 가치를 창조해내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페미니즘적인 자유의 실천, 성적 차이의 정치의 맥락에서 구원은 어떤 식일까? 페미니스트들은 위티그가 “성의 범주”라고 불렀던 것을 복귀시키지 않고 성적 차이를 어떻게 확증할 수 있을까? 성적 차이에 대한 확증이 우리를 ‘여성은 아름답다.’라는 익숙한 수렁에 가두거나 브라운(Wendy Brown)이 “상처입은 집착”, 즉 “부자유에 대한 집착”이라고 불렀던 것이 최초에 여성적 동일성을 구성했던 역사적 상처[에 대한 집착에] 숨어들지 않을까 (xii)? 주체 문제의 틀을 통해 읽는다면 『성적 차이』는 페미니즘과 같은 자유를 위한 근대적 투쟁과의 “역설적인” 연루라고 브라운이 불렀던 것을 “자유가 대항하여 출현한 바로 그 억압적인 구조”의 안에서 예로 제시한다 (Brown 7)..16) 브라운이 정의한 자유의 역설은 주체 형성의 역설적인 성격에 대한 비판적인 설명을 반영하는데, 이는 주체는 그것을 주체로/종속시킨 사회적 규범자체를 반복하도록 강제까지는 아니더라도 깊이 제약된다. 이러한 반복이 없다면 주체는 자신의 실재성이나 및 사회적 존재감을 전혀 갖지 못할 것이다. 브라운은 반응적이고 반영적인 동일성의 구조에 대한 니체의 생각을 끌어와 다음과 같이 쓴다. 주변화 혹은 종속에 대한 항의로 출현하는 과정에서 정치화된 동일성은 자신의 배제에 집착하게 된다. 왜냐하면 이것은 동일성으로서의 자신의 존재 자체를 이러한 배제라는 전제 위에 놓여 있고 배제의 장소에서 동일성을 형성하는 것은 그것을 비난할 장소를 찾음으로써 종속과 주변화에 수반된 “고통의 방향을 바꾸거나” 이를 증대시킨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서 그것을 구원받지 못한 역사 동안의 고통을 정치적 주장의 기초 자체, 동일성으로서의 인정에 대한 요구 안에 장착시킨다. (73~74) 인정 및 보상에 대한 주체의 정치적 요구는 악순환에 사로잡혀 동일한 주체를 예속시키는 (또한 구성하는) 상처의 경험 자체를 강박의 형태로 반복한다. 밀라노의 페미니스트들은 보상에 대한 욕망에 포함된 위험을 보고 다음과 같이 쓴다. “여성이 보상을 요구하는 한, 그녀가 무엇을 획득하는지에 관계없이, 그녀는 자유를 알지 못할 것이다.”(128) 브라운과 마찬가지로, <밀라노 여성서점>은 보상에 대한 요구가 어떤 식으로 과거를 구원받지 못한 상태로 내버려둔 채, 여성을 자신의 고통에 대한 사회적 인정의 끝없는 추구에 가두고, 역으로 “여성”을 피해의 동일성으로 구성할 뿐인지를 보았다. <밀라노 여성서점>은 다음과 같이 썼다. 사회는 여성이 부당함의 피해자라는 점을 받아들이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 사회가 자신의 기준에 따라 그들이 얼마만큼 보상받아야 하는지를 결정할 권리를 보유하고, 이렇게 게임이 영원히 지속되겠지만 말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요구가 불확정적이고, 상실감이 깊어서, 영원히 되풀이해 비난할 권리가 존재하지 않는 한 만족이란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안다. (128~29) 이것이 2세대 페미니즘을 “피해자화의 정치”로 만든 것이다. 이는 “가정주부, 낙태 문제를 겪는 여성, 강간당한 여성 욕망하고 판단하는 살아있는 여성이 아니라 억압받는 여성(female sex)의 형상, 그 자체로 여성적인 것의 화신을 필요로 한다.”(103) 이것이 바로 “상처 입은 집착”이 의미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밀라노 여성서점>이 보상을 요구하는 것이 상처를 동일성으로 재설정한다는 점에 동의하더라도, 이탈리아 [페미니스트들]은 페미니즘의 피해자화의 정치에 관해 뭔가 신기한 것을 발견한다. 바로, 살아있는 여성이 피해자의 위치를 차지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과 같다는 점이다. 따라서 “여성(female gender)의 비참함”을 형상화하는 것은 항상, 적어도 자신의 어머니를 포함하여 자신보다 먼저 태어난 여성을 포함한 “다른 여성”이다..17) “다른 여성에게 투사된, 어떤 여성도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없는 형상”은 2세대 페미니즘의 핵심적인 상징이며, 이는 “틀에 박힌 가정주부, 낙태문제를 겪는 여성, 강간당한 여성”을 필요로 한다. 따라서 <밀라노 여성서점>의 관점에서 브라운이 이야기한 “상처받은 집착”은 아무에게도 깃들지 않은 피해자 동일성이며 “누군가의 고통과의 대중적 동일화처럼 보인다.”(Milan 102) 밀라노 여성들에 따르면, 자유를 동시에 부인하고 확언하는 경향은 상징적 실천이 지닌 정치적 문제다. 즉, “여성들 간의 자유로운 관계는 아무런 상징적 형상화를 거치지 못한다.”(70) 따라서 <밀라노 여성 서점>은, “여성운동이 결여했던 것은 [여성의 예속]에 대한 의식에 선행하며 그것을 가능케 만드는 것으로 사고되는 자유로운 여성의 표상이다. [대신] 자유가 의식에서 유래한다고 믿었다.”(103) 달리 말하면, 여성이 억압을 의식하도록 만드는 것은 억압의 진실이나 날 것의 사실이 아니라 여성적 자유의 상징적 표현이다. 그러나 모든 자유의 형상이 동일하게 페미니즘을 북돋은 것은 아니다. 2세대 페미니즘에서 중요했던, 여성 자유의 잃어버린 대상으로서의 고대 모계제라는 관념을 생각해보자. 이러한 대상이 자유에 대한 욕망을 자극한 결과는 오직 퇴행을 의지하는 불가능한 소망 내에서 이 욕망이 자신에게 반하도록 하는 것일 뿐이다..18) 어떤 것도 과거의 절대적인 자유에 비견할 수 없으며, 과거로의 회귀만이 이러한 절대적 자유를 되찾을 수 있다. 현재는 초월되거나 파괴되어야 한다. 이 같은 고대적 과거라는 관념은, 일부 이탈리아 페미니스트들로 하여금 “집단을 형성하고 공동의 사업을 진행하는 데 있어서 몇몇 여성이 수행했던 결정적 역할과 같은 가장 최근의 잘 알려진 사건에 대한 평가를 왜곡하도록” 만들었다고 <밀라노 여성서점>은 평가한다. 이러한 역할은 침묵 속에서 간과되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는 개별 여성의 자유를 완전히 확장하는 것을 방해하는 장애물이라는 원망을 샀을 것이다”(104). 다시 말하면, 여성의 자유로운 행동은 고대 여성들의 절대적인 자유와 비교해 한참 떨어지는 것으로 부인되었거나, 주권의 견지에서 파악되었을 것이다. 즉 다수에 반하는 일인 혹은 소수의 자유. 따라서 빠져 있는 것은 이탈리아 페미니즘의 자유의 경험(예를 들어, 행동과 발언을 통해 다른 이들과 새로운 정치적 연합을 형성하는 실천)이 아니라 그것의 상징적 형상화였다. 이러한 형상화가 부재한 가운데, 자유의 경험은 항상 도달할 수 없는 것이었고, 미래 혁신의 원천으로 봉사할 수 없었다. 이러한 여성적 자유의 상징적 형상은 중요하다. “여성”을 간단히 피해자 동일성으로 규정하는 것은, <밀라노 여성서점>의 말을 빌면, “한 범주의 여성, 즉 가장 불리한 위치에 처해있는 여성 범주의 문제의 윤곽을 그리고 나서, 이를 여성적 조건의 일반적 전형으로 제시하는 것이다. 이는 여성의 조건을 그들의 최소공배수로 평준화하며, 사람들로 하여금 여성의 다양한 선택과 스스로 상황을 개선해야 하기 위해 가지는 실질적인 기회를 지각하지 못하도록 만들고, 이로써 여성(female gender)의 존재를 부인한다. 오직 아무도 동일화할 수 없는 ‘여성의 조건’만 존재할 뿐이다”(Milan 68). 더욱 나쁜 것은, 이 같은 아무것도 거처할 수 없는 주체 위치의 상징적 형상화가 헤게모니적이라는 점이다. 피해자로서 여성이라는 틀에 박힌 이미지에 대한 대안이다. 그렇다면 페미니즘을 보상의 논리에 가두는 것은 모든 구성원들이 공유하는 피해자 동일성이 아니라, 여성적 자유의 형상이 부재하다는 사실이다. 이 때문에 피해자로서의 여성이 정치적 동원을 가능케 하는 유일한 형상을 제공한다. 여성을 부당함의 피해자로 인정함으로써 게임이 영원히 지속될 수 있게 하는 이 사회는, 여성을 보상이 아닌 사회적 기명(inscription)을 추구하는 욕망의 담지자로 인정하는 것은 별로 달가워하지 않는다. 그리고 부당한 피해자로서 여성이라는 상을 제시해 온 페미니즘은 여성 욕망의 대안적 상징을 제공하지 못하는 한, 게임이 계속 유지되는 역할을 한다. 다시 말해, 빠져있는 것은 서로를 되풀이 해 비난하지 않는 욕망 자체가 아니라 주어진 시점에서 일부 여성이 이러한 욕망을 지니고 있지 않을 수도 있지만, 모든 여성이 항상 그러한 것은 아니다. “이러한 부정적 형태로만 상징화하지 않는” 여성 욕망의 “상징적 권위부여”다..19) 피해자 동일성의 문제가, 전체 사회 집단의 실질적인 욕망이라고 전혀 믿을 수 없는, 또는 ― 그것만이 아니라 ― 먼 일차원적인 정치적 표상의 문제라면, 이것이 요청하는 것은 주체에 대한 작업이 아니라 이탈리아 페미니스트들이 “상징에 대한 정치적 연구”라고 부르는 것이다(Milan 106)..20) 이탈리아 페미니스트들은 브라운처럼 피해에 선행하는 주체성이 발전하는 순간으로 돌아갈 것을 요구하기보다는 새로운 상징적 실천, “[보상을 요구하는] 다른 이의 부당함이 아닌 여성이 되고자 하고, 될 수 있는 더 이상의 무엇 안에서 윤곽이 그려져 있음을 보는 실천의 창출을 부정한다.”(101) 이 “이상의 무엇”은 단지 남성과의 평등에 대한 욕망이 아니며, 따라서 피해에 대해 보충받으려는 욕망도 아니다. 이탈리아 페미니스트들은 페미니즘 정치는 피해라기보다는 자유의 형상, 평등보다는 “이상의 무엇”에 대한 욕망 아래서 형성될 수 있는 것이라고 확신한다. 차별의 형태를 제거하기 위한 반작용으로서의 대응(남성에게 건네지는)은 새로운 사회 계약을 창조하기 위한 순향(順向)적인 실천(여성에게 건네지는)으로 전화될 수 있다. 이제 이 “여성들 간의 자유로운 관계의 실천”이 무엇인지 살펴보도록 하자..21) 평등에 얽힌 문제 <밀라노 여성서점>이라는 이름이 드러내듯 『성적 차이』에 담긴 이야기들은 주로 1975년 10월 밀라노에서 개장한 여성 서점이라는 공간과의 관련 속에서 전개된다. <밀라노여성서점은> “하기의 실천(the practice of doing)”을 발의했다고 설명되는데, 이 실천은 1970대 초반에 Autocoscienza(자기고백)의 실천을 둘러싸고 형성된 “말하기 그룹”을 토대로 세워졌다. 초기 2세대 미국 페미니즘의 ‘의식 고양’운동과 유사하게, “Autocoscienza의 실천”은, “완벽한 상호 동일화를 전제로 하며, 또 이를 추동한다. 나는 너고, 너는 나다. 즉 우리 [여성] 중 누군가가 사용하는 언어는 여성의 언어이며, 그녀의 언어이자 나의 언어다.”(42)라고 <밀라노 여성서점>은 언급했다. Autocoscienza는 의심할 여지없이 서로를 고양시켰지만, 그 힘은 또한 그 한계이기도 했다. 즉, “그것은 여성들 간의 차이를 보여줄 수 없었다”(45). 비록 이러한 실천을 시작한 많은 여성들이 지속되고 넘쳐나는 성차별에 대응하면서 남성들과의 평등의 가능성에 등을 돌렸지만 (40), Autocoscienza는 비록 여성들 사이에서이긴 하지만 평등의 논리를 유지했다. 즉 “차이가 발생하면, 이러한 차이가 상호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한에서 주목받아왔는데, 그래야 상호 동일화가 다시 설치될 수 있다”(44). 무차이의 문제―모든 여성은 똑같다―와 초기 페미니즘에서 나타났던 이것의 재생산은 ‘하기의 실천’의 출발점이다. 이는 “말하기 생활의 물질적 측면”을 정교화하고 페미니즘을 자매애로써, 즉 정치에 앞서 공통성들이 주어진 친족 양식으로서 실천하는 경향에 대항한다. “왜냐하면 ‘하기의 실천’은 반드시 애정과 친밀성으로 묶이거나 간단명료한 슬로건으로 규합되지 않고, 공동의 기획에 의해 단결하는 여성들을 한데 모은다. 이들은 자신의 이성, 자신의 욕망과 능력을 위해 이러한 공동의 기획에 전념하면서 그들을 집단적 이행의 시험에 부친다.”(Milan 86) 이탈리아 페미니스트들이 초기부터 “하기”라는 관념을 자신들의 정치의 중심에 놓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개인적 경험 교류의 중요성을 거부하지는 않는데, 이는 최초의 말하기 그룹, 또는 Autocoscienza의 첫 번째 정치적 가치, 즉 “여성의 공통적인 동일성”의 확증을 특징짓는 것이었다(42). 또한 그들은 자신들의 역사 속에서 한 순간을 형성했던 환상이나 정신적 고찰의 문제, “무의식의 실천”에 대한 고찰을 거부하지 않았다..22) 그러나 점차 출현하는 것은 평등의 정치와 주체에 대한 작업 양자의 한계에 대한 깨달음이다. 그들은 피해자 동일성의 문제가 요구하는 것은 여성으로 하여금 자신들의 차이를 상징화하지 못하도록 하는 현세적 조건의 변화라고 보았다. ‘하기의 실천’에 “새로운 주제가 도입되었다. 여성 정치라는 주제는 더 이상 의식과 발언 [즉, 언어]에 대한 접근에 중심을 둘 수 없다[…]. 새로운 용어는 창조변형―주어진 사회적 현실을 변형하기 위해 여성의 사회적 공간을 창조하는 것―이다”(84). 이러한 창조와 변형은 여성들 간의 차이를 다루는 정치적 기술을 발전시킴으로서 시작하는데, 이는 지금까지 평등의 원칙과 여성의 공통의 동일성을 둘러싸고 조직된 형태의 페미니즘을 위협하는 것으로 간주되어 거부되었던 것이다. 페미니즘의 가장 큰 문제가 “페미니즘이 여성들을 분할하는 차이에 익숙해지는 것을 원하지 않거나, 어떻게 해야 할 지 모르는 것”이라는 사실을 주장하는 것은 전혀 새로울 것이 없다. 하지만 이탈리아 [페미니스트]들은 유일하게, 여성들 간의 차이는 그것들을 서로 관련짓고, 평가하거나 판단할 모종의 방법이 없다면 무의미하다는 점을 발견했다. 그들의 관점에서 보면, 차이를 인정하기를 원치 않는 것은 이를 인정하는 방법을 모른다는 문제다. 그 방법을 배우려면 여성들 사이의 차이를 관련짓고 판단할 정치적 능력의 발전이 요구되며, 이는 또 다른 정치적 기술을 필요로 한다. 성적 차이에 대한 페미니즘적 상징화가 그것이다. 미국 페미니스트들은, 이탈리아 페미니스트들처럼 여성들 간 차이의 상징화를 의식고양 및 초기 페미니즘과 연관된 동일성의 정치에 필요한 중화제로 여겨왔다. 미국 페미니스트들이 대체로 성적 차이의 상징화를 여성들 간 차이의 소거와 연관짓는 경향이 있는 반면, <밀라노 여성서점>은 성적 차이의 정치적 상징화가 부재하다면 이러한 차이가 소거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밀라노의 여성들은 성적차이의 정치를 <밀라노 여성서점>의 공간 자체에서 [벌어지는] 일상적인 ‘하기의 실천’으로서 발전시킨다. ‘하기의 실천’의 중심적인 기획으로서 <밀라노 여성서점>은 여성들 간의 자유로운 관계가 형성될 수 있는 “물리적이고 상징적인” 여러 페미니스트 공간(loughi delle femministe) 중 하나로 여겨졌다(Milan 96)..23) <밀라노 여성서점>은 개점을 알리는 포스터에 다음과 같이 쓴다. “서점은 거리로 열린 공간입니다[…]. 누구나 들어올 수 있습니다. 서점은 여성들을 위해, 여성의 손으로 설립했습니다. 여기에 들어오는 여성에게 아무도 당신은 누구며, 무엇을 믿는지 질문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여성들은 자신이 원한다면 다른 이들과 관계를 구축할 수 있습니다.” 서점은 정치적인 공간이다. 왜냐하면 여성들은 이 안에서 공적으로, 그리고 자유롭게 만나기 때문이다. “여성들 사이에 있다는 것이[…] 우리의 정치의 출발점이다”(92). 바로 이곳에서 “새로운 실천[…]이 정교화되었다. 이는 여성들 간 관계의 실천이라고 불렸다”(50). 이 실천은 “정치를 행하는 비범한 방법이다. 이는 많은 여성들에게 사회적 관계의 체계는 ― 우리가 가능하다고 배운 바대로, 추상적으로 변화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에너지를 사용하는 새로운 방법을 창안하면서 구체적으로 ― 변화할 수 있다는 점을 밝혀 왔다”(51). 유사한 관심사(예를 들어, 문헌, 작가, 장르, 비평 등)를 공유하는 여성들이 함께 모일 수 있는 공간인 <밀라노 여성서점>은 처음으로 정치의 최소 조건으로 기능했다. 이는, 아렌트의 설명대로, 공유된 현세적 관심사(interest)로, “이는 문자 그대로의 의미에서, 사이에(inter)-놓여있는(est) 무엇, 즉 사람들 사이에 놓여 그들을 서로 연계시키고 또, 묶어주는 무언가를 구성한다”(Human 182). 아렌트의 행동 중심적인 정치에 관한 견해에서, 이러한 사이 공간은 “절합적 방식으로 사람을 함께 묶으면서 또한 이들을 분리시키는 이중의 역할을 항상 수행한다”(181). 이러한 “물리적이고 현세적인 사이 공간은 관심사에 따른 행위와 언어로 구성되어 있고 인간들의 직접적인 행동과 말하기에 전적으로 기원을 두는 완전히 다른 사이 공간으로 덮여 있고, 그 위에서 성장한다. “이 두 번째의 주관적인 사이 공간은 만질 수 없다.” 왜냐하면 행동하고 말하는 과정은 어떤 결말과 결과물을 남겨둘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같은 무형성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사이 공간은 가시적으로 공유하는 사물들의 세계 못지 않게 실재적이다. 우리는 이러한 현실을 인간관계의 ‘그물망’이라고 부른다(182-83). 밀라노 여성들은 이를 “여성들 간 관계의 실천”이라고 부른다. 아렌트의 관찰에 따르면, 주관적인 사이 공간, 정치적 관계 자체는 “인간들의 직접적인 행동과 말하기에 전적으로 기원을 두고 있다(human 183).” 이는 간단하지만 매우 중요한 점인데, 그 중 하나를 우리는 항상 시야에서 놓칠 위험에 처한다.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당연하게도, 다른 사람이 있어야 한다. 이것이 또 하나의 간단한 점인데, 즉 대담자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대담자는 나와 다른 견지에서 보는 사람이다. 대담자는 인류의 복수성(plurality)이라는 조건에서만 가능하다. 미국 페미니즘의 맥락에서, 이러한 복수성은 “여성들 간의 차이”로 생각되었다. 복수성에 대한 이러한 이해에서, 사람들은 정치적으로 분명히 표현하는 것에 우선하여 중요한 인구통계학적 요소로 보이는 사회적 차이(예를 들어, 계급, 인종, 섹슈얼리티 등)를 인정함으로써 대담자를 찾을 수 있다. 이탈리아 페미니스트들도 사회적 차이를 인정하는 것이 페미니즘의 동일성의 정치에 대한 반응이라고 생각했다. 이는 “하기의 실천” 뒤에 놓여있는 전반적인 요점이었다. 그러나 “하기의 실천”, 즉 여성들 간 차이를 다룰 방법을 습득하는 것은 실패했다. 왜? <밀라노 여성서점>은 이런 질문을 던지면서 다른 “하기의 실천”인, <파르마 여성 도서관>을 참조하여, 이것의 창립 문서를 다음과 같이 분석했다. “<파르마 여성 도서관>의 창립자들은 그들의 기획을 좀 더 분명하게 설명하기 위해서 ‘모든 여성의 의견을 녹취하는’ 그들의 모험적 시도를 제시할 ‘문서’로 이어지는 논쟁의 일부분을 보고하는 방식을 택했다.” 이러한 선택의 근거는 [파르마 여성들의 표현을 빌면] “우리 모두의 관점을 반영할 수 있는 정치적 문서를 구성”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논쟁 과정에서 한 여성이 이야기 한 것처럼 “집단 내에서의 여성의 다양성과 비동질성은 아무도 말소되지 않을 것이며 모두가 ‘존재’할 것이라는 정치적 보장이기 때문이다.”(94) 그러나 이 기획을 구성하는 평등주의적인 방법은 문제에 봉착했다. 이 보장은 실패했다. <밀라노 여성서점>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바로 여기서 복잡한 문제가 출현하다. 이론에 따르면 차이는 여성(female sex)의 존재에 필수적이지만, 판단을 내리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94)..24) 판단에 대한 무언의 금기는 특정한 차이가 발언되도록 허용하지만 이를 의미 없는 상태로 내버려둔다. <밀라노 여성서점>은 사실 <파르마 여성 도서관>의 문서(그리고 동종의 다른 문서들)는 “여성들 간 차이의 가치에 관한 다량의 발언에 불과한 것으로 환원된다” (99). 이러한 차이를 평가·접합·연결하는 방법인 판단이 부재한 가운데, 이 차이들은 아무것도 아니게 된다. 알맞게 기록되고 심지어 칭송되지만 판단을 거치지 않는 차이는, 차이를 무시하거나 부인했던 Autocoscienza의 실천에서 의미가 없었던 것처럼 “하기의 실천”으로서의 페미니즘에도 의미가 없다. 여기서 그들은 무시되거나 부인되었다. “여성들 간의 차이”가 미국 페미니즘에서처럼 어떻게, 비록 역설적이지만, “진정 중요한 차이”를 숨기는 공허한 슬로건이 되었는지, 그렇게 해서 이것이 “죄책감의 근원”이 되었는지를 인지하면서, 이탈리아 페미니스트들은 하기의 실천이 지니는 한계를 대면한다. 즉, 여성이 “자신을 제외한 다른 여성과의 관계를 갖지 못하며 여성적 욕망은 대담자를 갖지 못한다”(99). 여기서는 처음부터 대담자의 존재에 필수적인 복수성을 구성하는 것이 여성들 간의 사회적 차이가 아니다. 복수성은 인구통계학적, 또는 실존적인 사실이 아니라 사회적 차이에 대한 정치적 관계이다. 따라서 내가 이러한 차이와 관련된 무언가를 하는 것, 이를 무언가 정치적으로 중요한 방식으로 셈하는 것이 필요하다. 여성 대담자의 존재는 모든 여성의 의견을 무차별적으로 기록하는 것으로 환원될 수 없다. 이러한 기록은 차이를 고려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이러한 차이를 압도적인 평등에 붙들어 놓는다. 파르마의 페미니스트들이 생각한 것처럼, 모든 여성의 의견을 [판단하지 않고] 녹취하는 것은 “아무도 말소되지 않을 것이며 모두가 존재할 것이라는 정치적 보장”을 제공하기는커녕, 이러한 실존이 현실성을 획득할 공간, 즉 페미니즘 정치 자체의 현세적 사이 공간을 파괴한다. <밀라노 여성서점>은 “여성은 다른 여성을 판단할 수 있고 그래야 한다. 여성은 다른 여성의 판단을 대면할 수 있고 그래야 한다.”(142)고 선언한다. 초기 페미니즘(예를 들어, Autocoscienza, 하기의 실천) 의 판단 유예는 전혀 해방적이지 않다. 이와 반대로, 인가(approval)의 욕구가 우세하다면, 여성이 자신의 욕망을 다른 여성의 판단에 종속시키려 들지 않는다면, 여성의 욕망은 시들 것이다. 다양한 의견을 판단할 수 없었기에, 파르마의 페미니스트들은 왜 <여성 서점>이 다른 기획에 비해 더 좋은 하기의 기획이었는지 말할 수 없었다. <밀라노 여성 서점>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기초로 남아있는 것은 우리가 이렇게 하기를 좋아한다는 것이다”(95). 이러한 기초가 욕망(즉 잘 근거지어진 논변이라기 보다)에 불과하다는 사실은 <밀라노 여성서점>이 관련되어 있는 한, 정치적인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판단 내리고 판단 당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함께 표현되는 욕망은 [욕망이라는] 기초에 손상을 입히는 여분의 감정을 발생시킨다.” 남아있는 것은 자신을 다른 것에 결부시키지 못한 채 여기 저기 존재하는 여성의 욕망에 지나지 않는다”(95). “여성의 욕망을 침묵에서 꺼내고 위험에 처하도록 유도할 수 없다면”, 자신을 판단에 노출시키지 못한다면, 하기의 정치는 다양한 욕망이 원칙적으로 판단에 대한 금기로 평준화된 채로만 표현될 수 있는 공간을 창조했다. 이러한 실패는 이탈리아 페미니스트들이 무언가를 여기에 걸게 만들었다. 즉, 그들은 평등의 논리와 단절하고 부등의 정치적 가치를 발견했다. 부등을 발견하다 『성적 차이』의 4장은 <밀라노여성서점>의 역사에서 전환점을 묘사하고 있다. 그 장은 “여성문학에서 자유의 첫 번째 형상(figures)”이라는 제목의 절로 시작되며 “『노란 일람』(Catalogo giallo, Yellow Catalogue)―이것은 <밀라노 여성서점>과 <파르마 도서관>이 1982년 출판하고 『우리 모두의 어머니들』(Le madri di tutti noi)이란 제목의 소책자 표지 색깔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의 이야기”를 말하고 있다. 이 소책자는 “부등에 관한, 모든 여성들이 그녀들 사이에서조차 동일하지 않다는 단순한 사실에 관한, 그리고 이 사실에 관한 여성들 자신의 사회적 해석에 관한 것이다.”(108) 그 기획 면에서 “『노란 일람』은 이런 류의 다른 책들과는 달랐다. 왜냐하면 그 책은 특히 소설과 같은 문학적 기록을 특권화하고 독자들 편에 서기 때문이다.”(109) 즉, 그것은 창작물을 생산하는 예술적 천재가 아니라 그 창작물을 판단하는 독자에게 초점을 두었다. 여성문학에 대한 이런 개입이 독특한 문학적 형태를 보여줄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지만, 사실 “여성들이 인류 문화에 기여한 사례”로 간주될 수 있었던 것들이 아무런 흥미도 없었음이 드러났다. 그 탐구는 정의될 수 없었던, 이름이 없었던 어떤 것, 즉 “인류 문화가 알지 못했던, 여성되기에서의 차이에 관한 것”(109)을 밝히기 위한 것이었다. “우리에게 가장 직접 관련되는 것들의 의미를 찾을 필요성”과 “여성 작가들이 여러 방식으로 우리를 도울 수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느낌만을 가진 채로 <밀라노 여성서점>은 다음과 같이 썼다. 우리는 읽혀야 할 여성 작가들과 소설을 선택하는 것에서 시작했다. 우리는 바로 우리가 가장 좋아하는 것들을 읽기로 결정했다. 좀 더 객관적인 기준 [즉, 심미적 판단의 규칙]이 없었기 때문에, 그것이 유일하게 가능한 결정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가 당시 생각했던 것처럼 결백한 결정이 아니었다. […] 사랑이나 우정 관계를 벗어나 다른 여성을 선호할 수 있다는 사실은 우리가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109) 반대로, 그런 선호들은 잠재적으로 금지되었는데, 그것들이 집단의 동일성을 해칠 수 있는 차이들을 드러낼 것이기 때문이다. “선호 행위는, 그 잠재적 ‘유해함’ 때문에, 모든 여성적 욕망을 마치 박해받는 것처럼 고통스러운 평형 상태에 가두었던 여성적 정치의 도식을 뒤흔들 운명이었다.” 모든 독자가 같은 선호를 갖는 것도 아니고, 일부는 선호가 없었으며, 또 일부는 매우 강한 선호를 갖기도 했다. “위기를 야기한 것은 바로 이런 상황이었는데, 이는 사람들이 전혀 고려하지 않으려 했던 것이다”(110). 위기가 터져 나온 것은 제인 오스틴이라는 인물에 관해 논쟁하던 때였다. 제인 오스틴을 반대하는 한 사람이 그녀가 다시 한 번 소수로 몰린 토론에서 […] 논쟁을 멈추고 관찰자처럼 말했다. “[딸의 자유를 방해하는] 어머니들은 작가들이 아니다. 우리는 여기서 전혀 동등하지 않기 때문에 그런 어머니들은 사실 여기 우리 사이에 있다.” 이 단순한 진실이 처음 말로 표현되었을 때, 그 말은 끔찍하게 들렸다. […] 하지만 그 말의 의미는 수정처럼 분명했다. 누구도 그 말이 진실이라는 점을 의심하지 않았다. […] 우리가 눈앞에 대면하고 있었으나 수년 동안 전혀 기록하지 않았던 것들을 받아들이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우리는 동등하지 않았고, 동등한 적도 없었다. 우리는 동등했다고 생각할 까닭이 없다는 점을 즉시 발견했다. 첫 순간의 공포는 좀 더 자유로워진다는 어렴풋한 느낌으로 바뀌었다. (110~11) 여성들 사이의 불평등을 발견하자 자유로운 느낌이 생겨나는 까닭은 무엇일까? 게다가 만약 그렇다 하더라도 이것이 심미적 판단을 내리는 실천과는 무슨 관계가 있는가? <밀라노 여성서점>은 좀 더 자유로워지는 순간이 “우리의 역사에서 생겨나지도 않았고 우리의 이해에 부합하지도 않는 평등이라는 이상”에서 해방되는 것과 일차적으로 연관이 있다고 말한다.(111) 이 평등이라는 이상은 억압받는 집단의 일원이라는 점에 기초한 공통성을 명목으로, 상호반목하지 않는 모든 여성적 욕망(즉 피해의 동일성으로 표현되지 않는)과 차이의 분명한 표현을 뭉개버렸다. 이런 중성적이고 무성적인 이상 때문에, “우리는 존재하지 않던 것을 상상하도록 우리 자신을 괴롭혔고, 존재했던 것의 활용을 스스로에게 금지했다. 마치 우리의 문제가 강력하게 경쟁하는 욕망들 사이에서 있을 법한 경합의 치료제를 찾는 것이라도 되는 양 말이다. 하지만 반대로 우리의 문제는 우리의 욕망이 불확실하고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이고, 이는 소위 여성들 사이의 권력 갈등 이면에서 그런 갈등을 고통스럽고 끝없게 만드는 것으로 인식될 수 있었다.”(111) 존재했던 것은 여성들 사이의 재능, 능력, 사회적 지위의 차이며, 만약 페미니스트들이 이를 다룰 만한 정치적 능력이 있었다면 이는 여성들의 실천을 풍부하게 만들 수 있었을 것이다. 비록 가끔은 그런 실천을 위기에 빠뜨리기도 했겠지만 말이다. 존재했던 것은 기호의 차이였고, 그것은 사회적 차이로 환원될 수 없었다. 모든 여성들이 비슷하지 않은 까닭은 그녀들이 서로를 분할하는 각기 다른 사회적 집단의 일원이기 때문일 뿐만 아니라(이것이 최근 미국 페미니즘이 차이라는 사상을 이해하는 전형적인 방식이다.), 그녀들이 각기 다른 호오(好惡)를 가졌기 때문인데, 이는 그녀들이 어떤 특수한 사회적 집단에 속해있다 하더라도, 비록 약간은 연관이 되기야 하겠지만, 소모되지 않는다. 오스틴을 둘러싼 논쟁은 사회적 차이(즉, 성별, 인종, 계급, 섹슈얼리티)로 환원할 수 없고 하기의 실천(practice of doing)에서는 가려졌던 차이의 형태를 드러냈다. “하기의 실천”은 여성의 보편적 비참함이라는 표상에 어떤 대안도 만들어내지 못했다. 이는 페미니스트들이 이런 차이를 보지 못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이런 차이를 다루는 방법, 평가하고 판단하는 방법을 알지 못해서다. 이런 정치적 기술의 부족 때문에 그들은 의견의 깊은 갈등과 차이를 억누르는 경향이 있었다. <밀라노 여성서점>에 따르면, 그들이 이런 기술을 전혀 발전시키지 못한 것은 그들이 여성적인 차이를 나타내고 남성에 동화되지 않기 위해서 모든 여성이 다른 모든 이들과 같아야 한다고, 더 정확히는 운동하는 다른 모든 여성들과 같아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런 방식으로 여성들 사이에서 다양성, 언쟁, 각기 다른 의식수준이 존재할 수 있었지만, 이것은 모순이나 “나는 낙태의 문제를 처리해야 하는 여성들과는 상관없다.”는 식의 근본적인 반대는 아니었다. (69) 격렬한 갈등이나 불화의 공간이 없다면, 강렬한 욕망을 위한 공간이나 진정성 있는 정치의 가능성도 없다. 그 당시 ― “그녀 말고는 다른 이들과 아무런 관계도 없는” 각각의 여성들과 “대담자 없는 여성적 욕망”이 있었던 때 ― <밀라노 여성서점>은 “페미니즘적 관점”, 즉 “더 이상 현실과 관계가 없는 미리 구성된 이데올로기나 진부한 담론”에 따른 판단의 필요성을 제외시켰다(85). 이데올로기는 판단의 규칙을 제공했다. 하지만 삼단 논법의 추론에서 예증된 규칙을 따르는 것은 심미적이거나 정치적인 판단에 아무 소용이 없는데, 여기서 우리가 직면하는 것은 특수로서의 특수(particular qua particular)이기 때문이다. 아렌트가 주장한 것처럼, “당신이 ‘아름다운 장미다!’라고 말할 때, 이런 판단에 도달하기 위해 우선 ‘모든 장미는 아름답다, 이 꽃은 장미다, 그러므로 이 장미는 아름답다’고 말하지 않는다.”(Lectures 13~14) 반대 방향으로도 마찬가지인데, 당신은 이를테면 “이 장미는 아름답다”는 판단에서 다른 장미나 모든 장미에 대한 일반적인 주장으로 가는 것도 아니다. 정치적 영역에서도 같은 일이 발생한다는 것이 아렌트의 주장인데, 여기서 우리는 대상과 사건의 독특성에 직면한다. <밀라노 여성서점>이 문학 작품에 눈을 돌린 다음에야 여성들 사이의 부등이 발견된 것은 우발적인 것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의미심장한 것일 수도 있다. 오스틴과 같은 작가들에 관해 의견을 교환하고 선호를 표현하면서, 각자는 “그것이 나를 기쁘게 하거나 불쾌하게 한다.”는 점을 발견하는데, 이는 진리(또는 진리 담론, 이데올로기)에 고정점을 갖지 않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 동의를 강요할 수 없다는 의미다. “고유한” 페미니즘적 관점의 독백과 더불어 집단의 통일성을 보장하는 이데올로기적(삼단 논법의) 추론(즉, 모든 여성 작가는 훌륭하다, 이 작가는 여성이다, 따라서 이 여성 작가는 훌륭하다)과는 다르게, 기호의 판단은 하나의 규칙 아래 포섭될 수 없는 의견의 차이를 드러낸다. (심미적이거나 반성적인) 판단을 실행할 때, 사람들은 여성들 사이에 의미심장한 차이가 존재함을 깨닫게 된다. 이런 깨달음은 타인들을 진정한 대담자의 위치에 놓는다. 나와 유사하거나 유사하지 않은 선호를 가지고, 나의 관점과 동일하지 않은 관점에서 보며, 자신의 의견에 대한 판단을 나에게 청하거나 내가 고이 간직해 온 의견을 판단하고 아마 뒤흔들어 위기의 지점으로 몰아세우기까지 할 것이다. 하나의 규칙에 의해 판결될 수 없는 의견의 차이를 발견하면서 <밀라노 여성서점>은 부등을 발견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서로 동등하지 않다는 것을 발견했다. 하지만 부등을 발견하는 것과 그것을 실천하는 것은 별개의 일이다. 어쨌거나 수많은 형태의 사회적 부등이 있고, 그런 부등 중 많은 것이 부당하다. 그들은 “부등의 실천이 필수적인 시험”이라고 주장한다. “그것은 부등의 부당한 형태들을 어떤 경우에도 불가피한 다른 형태의 부등과 구별하게 해 줄 것이다.”.25) 부등의 실천은 “차이가 자유로운 사회적 형태 속에서 발언하게 하는”데 필수적인 첫 번째 단계다.(Milan 132) 우리가 아직 이 부등의 실천이 어떤 식일지 모르긴 하지만, 그것이 페미니즘의 민주적 이상에 어떻게 일치할 수 있을지는 궁금해 할 수 있다. 평등의 문제로 돌아가 보자. 밀라노의 페미니스트들은 많은 서구 3세대 페미니스트들이 지지하는 평등에 대해 굉장히 회의적인 관점을 가졌다. 여기에는 권리에 기초한 법적 사회변화 전략을 대체로 수용했던 미국의 페미니스트들이 포함된다. 평등의 이상과 만연한 차별의 현실 사이에 존재하는 명백한 괴리는 차치하더라도, 평등이라는 원리는 남성과 다른 여성들과의 관계 모두에서, 동일함을 여성의 정치적·사회적 권리의 조건으로 확립하는 것 같다. 역사적인 실천 속에서 정치적 평등이라는 원칙은 모든 사회적·성적 차이를 평준화하고 여성들에게 중립과 보편을 가장한 남성적 기준으로 동화될 것을 강요하는 경향이 있었다..26) 하지만 평등에 대한 이런 사고방식은 게르하르트(Ute Gerhard)가 우리에게 상기시킨 바, “같은 것을 같게 취급하기”(treating likes alike)라는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원칙에 기초한다. 게르하르트는 우리가 평등을 동일함이나 동일성(a=a)으로 생각하기보다는 관계적인 개념(a=b)로 생각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평등이 고정되거나 정적인 것이 아니라 관계적인 것으로 간주되면, 평등은 차이를 부정(오직 같은 것만 같게 취급될 수 있다.)하기는커녕, 차이들을 구체적인 목표에 따라 특정한 종류의 관계에 도입되어야만 하는 것(다른 것이 같게 취급되어야 한다.)으로 당연시하는 정치적 원칙이 된다. “누가 그리고 무엇이 어떤 특징이나 특수성을 비교하고 동등하게 다루자는 것을 결정하는가?”(Gerhard 8) 이것이 중요한 질문이 된다. 이 단순하지만 결정적인 이동은 관점의 변화를 수반하는데, 왜냐하면 이제 우리는 비교되는 (사회적) 대상(즉, a와 b, 남성들과 여성들)에 초점을 맞추는 것―마치 그 대상들 혼자서 비교의 기준을 결정하는 것처럼―이 아니라 비교를 하는 주체들과 그 판단의 사회역사적 맥락에 초점을 맞출 것을 요구받기 때문이다. 즉, 평등에 대한 페미니즘적 설명에서 관점과 맥락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은 어떤 요구가 제기되는 구체적인 상황과 함께 그 요구를 하는 사람들과 비교의 기준으로 간주되어야 할 것을 결정하는 사람들 양자의 사회적인 위치도 고려하는 것이다. 만약 그 기준이 대상 그 자체에 내재한 것이 아니라면, 평등에 대한 모든 요구는 정치적 판단, 즉 특수성(같지 않은 것들)에 관한 판단을 요구한다. 그러므로 페미니즘적인 평등 실천은 제 3항(third term) 또는 제 3자, 즉 비교점(tertium comparationis)을 필요로 한다. 게르하르트가 말한 것처럼, “그 비교점은 결코 단순히 ‘남성’이나 남성의 지위일 수 없다. 그것은 양성에 공평한 기준이어야만 한다.”.27) 평등의 실천을 3항을 요구하는 것으로 사고하면, 우리는 그렇지 않았을 때 완전히 반(反)평등주의적 부등의 실천처럼 보일 수 있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이탈리아 [페미니스트들이] 동일함으로 환원되지 않도록 평등을 재형상화하는 가능성을 실제로 발견하지는 못했지만, 그녀들의 부등의 실천이 달성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그것은 앞서 언급된 3항의 발전을 가능케 한다. 이탈리아 페미니즘의 설명에 따르면, 3항은 오스틴과 같이 “‘원형’이라 칭해진” 여성 작가들과의 관계에서 출현하기 시작한다. 이런 원형의 목표는 “우리보다 선행하여 우리에게 스스로를 알고 차이화할 수 있는 수단을 제공하는 것의 위치를 특징짓는”(Milan 112) 것이었다. 원형을 현실의 어떤 여성도 접근을 시도할 수 없는 지위를 가진 틀에 박힌 여성적 형상으로 간주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이 문제를 날카롭게 인식하면서 이탈리아 페미니스트들은 우수한 여성의 형상이 틀에 박힌 피해자 형상의 이면으로서, 현실의 어떤 여성도 동일화할 수 없으며, 양자 모두 잃어버린 “여성적 사회 경제(social economy)”의 징후라는 점을 관찰했다. 여성들 사이의 (수평적이고 수직적인) 관계를 상징화하는 두 가지 방식 모두 전혀 실재적인 관계가 아니고, 동일한 것(과 비참한 것) 또는 다른 것(과 우수한 것)에 대한 무매개적인 연계일 뿐이다. 이런 도해상의 지위(피해자 또는 우수한 여성)는 둘 다 현실의 여성들 자신에게는 알맞지 않다. 그러므로 이상화의 경향은 페미니즘에게 힘을 북돋아주지 않는 부등의 한 실천이다. 스스로에게 가치를 부여할 수 있으려면 다른 여성들과 차이나는 여성 개인과 여성적 성별(젠더) 모두를 가치화하는 권력, “여성적인 잉여(female plus)”(Milan 127)가 필요했다. 이탈리아 페미니스트들이 찾던 것과 원형들에서 처음에 발견했던 것은 하나의 규칙(또는 이념형)보다는 특수성들을 연관시키는 사례라고 이해하는 편이 낫다. 역설적이게도 평등의 정치가 탄생시킨 우수한 여성들과 다르게, 원형들은 그 원형들에 권위를 부여하는 여성들에게 권위를 부여한다. “세상에 관하여 권위와 가치를 또 다른 여성에게 돌리는 것은 스스로에게 권위와 가치를 부여하는 수단이었다. […] ‘스타인(Gertrude Stein)을 옹호할 때 나는 스스로를 옹호하는 것이다.’”(112) <밀라노 여성서점>이 주장하듯이, 만약 페미니즘적인 자유의 실천에 권위를 부여하는 것이 여성들 자신일 뿐이라면, 그런 형상은 실천의 한 부분으로 머물러, 판단과 논증과 토론에 종속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 형상은 자유를 부인하는, 초월적인 권위의 원천이 되는 위험에 처한다. 그런 위험이 최소화되는 것은 수없이 많은 원형들(오스틴, 스테인, 모랭(Elsa Morante), 울프(Virginia Woolf), 바흐만(Ingeborg Bachman) 등)에 이를 때다. 하지만 “성별화된 기원의 형상”과 자유가 “상징적 어머니”로 불릴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얼핏 보기에 잃어버린 여성적 권위의 형상으로서 “상징적 어머니”는 “남성적 기원에서 나온 권위의 여성적 복제물”처럼 보일 수 있다. 어떻게 어머니의 형상이 페미니즘적 자유의 실천을 조직할 수 있는가? 이런 형상은 처음부터 페미니즘을 무력화했던 친족 관계를 상징화하는 것 아닌가? 남성적 문화 내부에서 어머니들과 딸들의 관계는 사라졌다(“어머니는 언제나 팔에 아들을 안고 있다.”)는 이리가레의 주장을 받아들이면서, <밀라노 여성서점>은 “여성과 그녀보다 더 위대한 여성, 즉 그녀의 어머니 사이의 상징적 유대의 형태란 전혀 없다. 둘 사이에는 정서로 다양하게 덧씌워진 오직 자연적인 관계만이 존재할 뿐 상징적인 해석은 없다.”(127)고 주장했다. 따라서 상징적 어머니라는 바로 그 생각은 급진적―남성적 문화 속의 어떤 어머니도 결코 상징적이지 않다.―인 동시에 일반적(ordinary)일 수 있다. 상징적 어머니는 그를 둘러싸고 페미니즘적인 자유의 실천, 즉 새로운 사회 계약을 조직할 성별화된 기원의 형상이다. 이탈리아 페미니스트들이 식별한 핵심 문제는 “여성이 모종의 여성적 미덕을 가장하지 않고서는 사회에 대한 완전한 통찰력으로 솔직하게 밀고 나갈 도리가 없는 욕망의 무한함을 인정할 때 맞닥뜨리는 현실적인 어려움”(Milan 115)이라는 점을 기억하자. 정치에서 이런 가장은 사회를 개선하는 요구의 형태를 띤다. 이런 요구는 사회 문제라는 더 큰 틀 내에서 공명을 일으키는데, 여기에서 여성들은 자신의 정치적 요구를 사회적 효용이나 편의라는 언어로 표현할 것을 요구받는다. 예를 들어 일부 이탈리아 페미니스트들은 “여성적 차이에 대한 새롭고 보다 자유로운 해석”을 “사회적 선과 조화를 이루는” 것과 구별할 수 없었다. “다르게 되기와 더 좋아지기”를 혼동함으로써 그들은 “이런 잉여가 자격을 얻는 것을 반대했다. 그것은 실정적인 가치를 표현하지 않으며, 따라서 여성적 차이나 여성적 정치에 자격을 부여할 수 없고, 가치를 줄 수 없다.”(124) 유용성의 경제(the economy of use)에 사로잡혀, 그들은 여전히 여성적 성(female sex)과 여성적 자유의 존재이유, 즉 사회 개선과 같은 이유를 제시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그들은 여성의 자유에 “어떤 실정적인 사회적 가치”(125)를 부여하지 않으면서 여성의 자유를 추구하는 사회적 실천을 상상할 수 없다. <밀라노 여성서점>은 다음과 같이 답한다. “여성적인 잉여는 감축할 수 없는 차이라는 개념을 표현하는 것과 다르지 않은데, 이 때문에 여성되기는 남성되기에 종속되지도 동화되지도 않는다.”(124) 즉, 그것은 어떤 사회적 가치, 사회적 효용도 표현하지 않으며, 보상을 추구하지 않고 평등이라는 기치 아래 포섭될 수 없는 자유에 대한 욕망을 말할 뿐이다. 페미니즘이라 불리는 새로운 사회 계약은 “여성의 자유를 위한 기초를 놓아야 한다.”고 <밀라노 여성서점>은 선언한다. (32) 이 기초는 페미니즘 공동체의 모든 구성원이 동의해야만 하는 합리적 전제로 구성된 근거가 아니다. 상징적 어머니라는 수사 주위에 조직되는 이 계약은 합리성이나 영구적인 원칙에 호소하지 않고 “일상의 언어와 몸짓을 통한 정치적 실천의 맥락 속에서, 한 여성의 다른 여성과의 관계 속에서, 욕망의 태동 속에서, 일상적 사물에 근접하여”자유를 욕망하는 여성들에게 권위를 부여할 것이다.(111) 원시적 아버지 같은 토템과 ― 이 아버지는 사회 계약의 “다른” 이야기에서 살해되어야만 하는데, 그의 살해는 남성들 사이의 정치적 평등 관계의 조건이며 그의 내재적인 회귀는 그들을 괴롭힌다. ― 다르게 상징적 어머니는 “세상에 맞서 여성의 욕망을 지지하고 유효하게 하는 여성들에 의해 한 여성으로 구체적으로 체현된 여성적 차이의 사회적 정당성의 근원을 가리키게” 된다. 이는 이 같은 성별화된 매개의 형상이 절대적일 수 없다는 것을 다른 식으로 말하는 것이다. 그것은 여성들 사이의 자유로운 관계라는 물질적이고 상징적인 실천과 분리되어서는 존재할하지 않을 것이다. 성적 차이 실천하기 상징적 어머니, 즉 여성적 기원의 잉여를 순환시켜 그것이 집합적 부가 되게 하는 실천의 이름은 <아피다멘토> 또는 수탁(entrustment)이다. 여성들 사이의 전형적인 관계들 중에서 성경의 룻과 나오미의 이야기, 시인 힐다 두리틀(Hilda Doolittle)과 브라이허(필명이다.)의 그리스에서의 관계(힐다의 『프로이드에 대한 헌사』(Tribute to Freud)에 묘사되어 있는 것처럼), 버지니아 울프와 비타 색빌웨스트(Vita Sackville-west)의 우정과 같은 수탁의 사례(규칙이 아니다.)를 발견하면서 <밀라노 여성서점>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다른 여성에 대한 한 여성의 수탁은 정치적 투쟁의 소재다.”(31) 가장 결정화된 형태 속에서 여성들이 스스로를 그녀에게 수탁하는 여성은 수탁하는 이의 자유에 대한 욕망을 지지하는 여성(또는 여성들)로서 그녀(들)은 “전진해(Go ahead)”라고 말한다..28) <밀라노 여성서점>은 “그것[이 경험]은 H.D에게 그녀가 시적 재능을 지녔다는 느낌을 주었고, 이와 함께 이 모든 것이 가능했던 것은 그녀 곁에 있으면서 결정적인 순간에 ‘전진해’라고 말해 준 여성 때문이라는 확신을 주었다.”고 언급한다.(33~34) “분명히 우리는 스스로에게 권위를 부여하는 것이 개인적인 행위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권위는 원래 그것을 줄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 그것을 줄 수 있는 권위가 있는 사람으로부터 부여된다. 하지만 만약 그것을 받아야 하는 사람이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녀는 권위를 가질 수 없다. ‘전진해’라고 브라이허는 H.D에게 대답하면서 H.D가 그녀에게 의존함으로써 그녀에게 부여한 모성적 권위를 상징적 권위부여의 형태로 그녀에게 되돌려준다.”(126) 초기 페미니즘의 이상화된 형상과는 반대로, 수직적인 수탁이라는 관계는 수평적, 상호적 관계이기도 하다. 여성의 욕망들을 적법화하는 권위는 그것을 수여하는 인정 없이는 아무 것도 아니다. (게다가 “확립된 위계를 진정으로 존중하는 여성은 […] 그녀 자신을 남성 또는 남성적 기획에 수탁한다.”[Milan 133]).29) 수탁은 사적인 문제가 아니다. “우리가 여성적 수탁의 관계가 사회적 관계라고 말하고, 그것을 정치적 기획의 내용으로 만들려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어머니[즉, 우리의 욕망을 지지하는 여성들]에 대한 상징적 빚은 모든 이들의 눈앞에서 가시적·공적·사회적인 방식으로 지불되어야 한다.”(Milan 130) 수탁은 자매애가 아니다. “스스로를 수탁하는 것은 거울 안에서처럼 그녀 안에서 자신의 현실적 본질을 확인하기 위해서 다른 여성에게 기대하는 것이 아니다. 수탁의 관계 속에서 여성은 다른 여성에게 그녀가 할 수 있는 것과 그녀의 욕망 안에서 나타나는 것에 대한 척도를 제공한다.”(149) 수탁은 규칙이나 영구적인 정치적 형태가 아니다. “그 문제에 관한 가능한 다른 답들, 더 좋은 답들이 틀림없이 존재하고, 존재하게 될 것이다.”(121) 수탁은 우연적인 정치적 실천으로, 1966년부터 1988년까지 밀라노에서 여성에게 상징적 거처가 없고 그들 사이의 관계가 결핍되어 있는 것에 대한 가능한 하나의 대응으로서 발전했다. 그것은 우연적으로 필연적인 실천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다른 식으로 나타날 수도 있었지만, 필연적인 것으로 경험된 욕구에 대한 응답이었기 때문이다. 즉, 권위 있는 대담자의 부재가 그것이다. 만약 “페미니즘이 여성들의 자유에 대한 [일종의] 기초를 제공해야만 한다면,”(32) 하지만 그것이 자유에 대한 합리적이거나 사회적인 정당화(즉, 사회 개선 등)가 아니라면, 수탁이 바로 그런 기초다. 수탁의 실천에서 “여성적 자유는 여성들 자신에 의해서[만] 보장된다.”(142) 그러므로 여성의 행동과 요구에 권위를 부여하는 것은 그 권위가 자명하고 자신의 편에서는 어떤 동의나 행동도 필요로 하지 않는 절대적 형상도 아니고 (2세대 페미니즘이 전제하려 했던) 정치적 인식론, 즉 진리 주장으로 정치적 주장을 옹호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자신의 자유에 대한 욕망에 권위를 부여받고, 역으로 스스로의 욕망을 매번 권위부여 하는 여성들, “전진해”라고 말하는 여성들이다. 이 문구는, 그 완전한 단순성 그리고 복합적이고 일상적인 표현 속에서, 페미니즘적인 의지의 자유가 처한 궁지의 탈출구를 겸손하게나마 상징화한다. 그것은 “나는 할 것이다.”라는 공허한 자유가 “나는 할 수 있다.”는 현세적 자유로 변형되는 것을 상징한다. “전진해”라고 말하거나 이 말을 듣는 것, 그리고 이 문장에 부합하게 공적으로 행위하는 것은 페미니즘의 피해자 동일성, 즉 피해자화의 정치에서 벗어나면서도 여성들이라 불리는 집단의 소속을 부인하지 않는 것이다. 돌이켜보면, 스스로가 “사회적으로 억압받는 동질적 집단”의 심상 안에서 대표될 수 없었던 여성은 그런 부인에 쉽게 이끌려 주권의 환상에 사로잡힌다. “그녀에게 동료 여성이 필요하다는 점을 알거나 인정하려 들지 않는”(135) 여성은 종국에 “남성적 권력이라는 경직된 상징의 영역에 갇혀 다른 여성들이 필요하지만 그녀가 원하는 것을 놓고 다른 여성들과 협상할 수 없게”(137) 된다. 지금 이 문장을 다시 읽으면, 인정한다는 것 안다는 것의 단순한 동의어가 아니라는 점을 알 수 있다. (카벨(Stanley Cavell)을 알기 쉽게 바꾸어 말하자면) 내가 빚지고 있음을 안다고 해서 내가 빚지고 있다는 것을 저절로 인정하는 것은 아니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여성들 사이의 관계는 지금과는 달랐을 것이다. “어떤 이는 [카벨을 인용하며] 말할 수 있다. 인정은 앎을 넘어선다. (넘어선다는 것은 말하자면 앎의 질서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 앎에 기초해서 무언가를 하거나 드러내야 한다는 요구 안에 있다.)” (Cavell, 257) 다른 여성들에 대한 빚을 가시적이고 공적인 방법으로 갚아야 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내 머리 속에 그 부채에 대한 무언(無言)의 앎을 담고 다니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 사고만으로는 현실이라는 직물을 바꿀 수 없고, 행동만이 그럴 수 있다. 따라서 <밀라노 여성서점>은 대담하게도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여성들 사이의 관계 속에서 꾸밈없는 감사는 여성적 자유가 실천적으로 기반을 둔 곳이다. 이론에서나 실천에서나 다른 모든 것은 그것의 결과가 아니면 자유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 자신에게 무언가를 준 다른 여성에게 감사하는 한 여성은 그런 감사를 잃어버린 집단이나 페미니즘 운동 전체 보다 여성적 성의 해방에 더 가치가 있다.”(130) 감사는 위계의 표현이 아니라 상호성의 표현이다. 그것은 여성적 자유의 비주권적인 조건에 대한 상호 인정이다. 성적 차이가 여성들의 계보에 소속되는 것에 대한 정치적 요구로 읽힐 때, 성적 차이는 그것이 주어진 방식을 전혀 속죄하지 않으면서 주어진 것과 스스로를 화해시키는 수단이 된다. 그것은 스스로에게서 “여성되기의 ‘인과적’ 소여(datum)”를 제거하여 퇴행적으로 의지하려는 소망을 따라다니는 원한에서 탈출하려는 시도다. “남성들이 발명해 낸 사회적인 상징 질서 속에서, 여성으로 태어난다는 것은 인생의 모든 것을 조건 짓는 사건이다. 그녀의 인생에 개인적 운명이란 없다. 그녀가 자유와 필연(necessity)을 일치하게 만들 방법은 없다. 그녀에게 필연이란 자신의 해부체(an anatomy)의 사회적 사용(모성, 처녀성, 성매매 …)에 순종하는 것을 의미하며, 그녀의 자유는 이 모든 것에 대한 회피를 의미한다.”(Milan, 128) 성적 차이는 “우리가 사회생활에 소속되는 것이 사회생활의 여성적 구성부분에 우리가 소속되는 것에 따라 결정된다는 사실적 전제”가 아니다. 성적 차이는 “부자유의 원인으로부터 나온 이 사실적 전제를 우리 자유의 원칙으로 변형시키는 정치적 실천”(122)이다. “즉, 여성이 자유로운 것은 그것이 선택의 대상이 아님은 잘 알고 있으면서 자신이 여성적 성에 속한다는 것을 뜻하는 선택을 할 때다. (138) 그러므로 이탈리아 페미니스트들이 이해하는 식의 성적 차이의 정치는 필요성에 속박되고 자기-주권의 환상에 사로잡히고 원한으로 가득 찬 상태에 머무르는 “나는 할 것이다.”를 조건 지어지고 선택된 공동체, 즉 “다른 여성에 대한 감사와 교환이라는 원칙에 입각한 […] 사회 계약”(142) 안에서 자유를 경험하는 “나는 할 수 있다.”로 변형시킬 것이다. 이 새로운 사회 계약은 합리적으로 동의된 원칙들의 접합이 아니라 약속(빚을 인정할 것)과 형상(원형과 상징적 어머니)에 기초한다. 이 계약은 서명자와 그들의 후손을 영원히 속박하고, 계약의 정당성을 사회 계약 이론가들이 재치 있게 “암묵적 동의”라 부른 것과 다를 바 없는 것으로 감축시키는 계약과는 다르다. 성적 차이는 그녀보다 먼저 와서 “전진해”라고 말하는 여성들을 가시적이고 공적인 방식으로 인정하는 일상적 실천과 떨어져서는 아무런 실존도 보증도 갖지 못한다. 자신이 아는 것을 인정하는 것(즉, 비주권은 자신이 이 세상에서 성취한 것과 페미니즘 자체의 조건이라는 것)은 “여성들 사이의 차이”라는 날 것의 사실을 정치적으로 의미 있는 무언가, 즉 “권위 있는 대담자”로 변형시킨다. 그것은 “여성들 사이의 불운한 거울놀이”에 입각한 평등의 통념을 더 위험하지만 더 실체 있는 무언가, 즉 상호성으로 변형시킨다. 페미니스트는 자신이 아는 것을 자신이 인정하는 것으로 변형시킨다고 주장하면서, <밀라노 여성서점>은 당당하게 단언했다. “권위 있는 대담자를 갖는 것이 인정된 권리를 갖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 이것이 일단 권위 있는 매개자를 창조하고 나면 페미니즘은 더 이상 권리에 관심을 갖지 말아야 한다는 의미인가? 권리를 재형상화하기 이 글의 서두에서 나는 미국의 페미니스트들이 『성적 차이』를 무시했던 것은, 아마 동일성(또는 동일성의 실패)의 렌즈를 통해 읽었을 때 그 글은 본질적인 성별화된(sexed) 차이에 관한 주장으로 쉽게 오독되기 때문일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제 우리는 그런 비판이 왜 과녁에서 빗나간 것인지를 더 잘 알 수 있는 위치에 있다. 이탈리아 페미니스트들이 제기한 단호한 정치적 정식화에서, 성적 차이는 동일성의 생산이나 파괴가 아니라 수탁과 인정에 중점을 둔 자유의 실천이다. 세계 건설(world-building)과 새로운 사회 계약으로서 페미니즘에 초점을 맞추면서 성적 차이의 정치적 실천이 추구하는 것은 현세적인 실재의 직물에 변화를 야기하는 것이다. 성적 차이가 정치적 공간의 창조, 즉 멀고 가까움의 관계에 의해 정의되고, 새롭게 생각될 수 있는 형상(즉, “상징적 어머니”) 주위에서 조직되며, 재조직화와 판단에 종속된 현세적인 중간에 낀 공간(worldly in-between)의 창조로 이해될 때, 성적 차이는 여성들로서 모든 여성(all women qua women)(그 계급에 대한 소속을 어떤 식으로 정의하든 간에)에 전면적으로 적용되지 않는다. 그것은 오직 여성의 계보에 대한 정치적 주장과 판단을 제시하는 개인들에게 적용될 뿐이다. 그런 정치적 요구는 빚에 대한 인정, 즉 공적이고 가시적인 방법으로 여성적 자유의 비주권적 조건을 의미화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성적 차이』를 본질주의적인 문헌―또는 최소한 단순히 그런 것―이 아니라고 인정한다 해도, 그 글의 가치를 폄하하는 방향으로 우리를 이끌 수 있는 다른 쟁점이 있다. 바로 평등권을 쟁취하기 위한 페미니즘의 역사적인 투쟁을 통째로 거부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 그것이다. 사실 권리에 기반을 둔 우리의 틀 내에서 『성적 차이』는 ― 본질주의의 공포는 차치하더라도 ― 바람직하지 못한(non grata) 페미니즘 저작으로 받아들여질 운명이었다. 자유의 정치(성적 차이) 대 평등의 정치(성적 비차이/무관심)는 쉽사리 평등한 권리냐 아니면 여성적 자유냐 하는 제로섬 게임으로 읽힐 수 있다. 전자에 매우 비판적이었던 <밀라노 여성서점>은 후자를 택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로써 양자 [모두가 실현될] 가능성을 제거했다. 하지만 이 글을 읽는 다른 방식이 있다. 즉, 권리 요구의 조건으로서 자유의 실천, 그리고 자유의 실천으로서 권리 요구를 전면에 내세우는 방식이다. “성적 차이의 정치는 성들 간의 평등이 달성된 후에 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 너무나 추상적이고 때때로 모순적인 평등의 정치를 대체하려는 것은 여성들 사이의 사회적 관계에 기초하여 성취된 여성적 자유의 장소로부터 모든 종류의 성차별적 억압에 맞서 싸우기 위해서다.”(Milan 145. 두 번째 강조는 필자가.) 이 문장을 평등의 정치는 페미니즘에게 막다른 골목이라는 뜻으로 볼 수도 있지만, 우리는 이 문장을 다음처럼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성적 차이의 정치가 성들 간의 평등이 달성된 후에 온다는 믿음은 잘못된 것이다. 이는 평등의 정치가 성적 차이의 정치로 대체되어야만 하기 때문이 아니라, 후자가 없다면 전자는 현실의 실천에서 본질적으로 묘연한 상태에 머물 것이기 때문이다. 주체의 문제라는 렌즈를 통해 읽는다면, 이 대안적인 해석은 성적 차이를 법에 기입할 필요성에 관한 주장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리고 이탈리아 페미니스트들에게 가장 중요한 페미니즘 사상가임에 틀림없는 이리가레가 바로 그것을 주장했다..30) 하지만 이리가레나 <밀라노 여성서점> 모두 다른 특성의 권리들, 즉 권리들은 자유의 실천과 연결고리를 상실할 때 죽은 법적의 인공물이나 심지어 위험한 정치적 도구로 타락하는 경향이 있다는 점을 환기시킨다..31) 과연 미국 사회의 페미니즘이 대체적으로 그런 것처럼, 대부분의 동시대 페미니즘의 뿌리 깊은 사법적 제도적 점향은 어떻게 우리가 급진적인 권리 요구가 한 때 약호화한 정치적 자유라는 사상과의 접촉을 상실할 수 있는지 보여준다. 만약 이리가레의 주장처럼 여성들이 성별화된 시민적 권리(civil rights)를 주장한다면, 그것은 평등한 권리들과 마찬가지로 참여(단순한 정치적 사법적 대의가 아니라)와 시민들 서로에 대한 수탁(“남성이든 여성이든 어떤 지도자에 대해서가 아니라” [Democracy, 174]), 양자에 대한 요구이기 때문이다. 권리들이 제도화될 때, 우리는 그 권리들의 기원이 자유, 비(非)지배, 공적업무에서의 평등한 참여에 대한 급진적이고 비(非)근거적인(ungrounded) 요구에 있다는 점을 잊곤 한다. 우리는 애초에 그 권리들을 창조했던, 종종 덜 안정적인 실천에 투자를 지속하기보다는 그 권리들을 그 자체로 보장하는 데 사로잡히는 경향이 있다. 시민적 권리로 회귀하자는 요구는 그런 기원을 상기시키는 것이다. 이리가레는, 페미니즘과 같은 정치적 투쟁은 “권리에 대한 변화를 요구하면서 법적인 판단도 국가 대표의 판단도 기다리지 않았다.”(Democracy, 175)고 쓴다. 자유는 권리에 대한 요구에서 발원할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말과 행동을 교환하는 데 있다. 자유는 그런 요구의 성공적인 제도화에 뒤따라오는 정치적 대의에는, 그 자체로는 있지 않다. 이리가레와 <밀라노 여성서점>은 모두 권리들이 보증하는 정치적 대의와 정치적 자유 사이에는 제거할 수 없는 긴장이 있다고 주장한다. 페미니즘은 “다양하고 풍부한” 성별을 둘러싸고 조직되는 심원하게 다양한 정치 운동으로, 이는”여성 일반”이라는 통념으로는 결코 대의될 수 없다. (Milan, 74) 이는 권리에 반대하는 논변이 아니듯 대의에 반대하는 논변도 아니며, 다만 페미니스트들이 자유의 경험을 권리의 제도화나 대의와 혼동하는 것은 심각한 잘못이라는 점을 날카롭게 상기시키려 할 뿐이다. 이탈리아 페미니스트들은 여성들에게 있어 진정한 정치적 자유 없이 대의와 제도화된 권리를 갖는 대가가 무엇인지를 보여주었다. 자유가 부재하다면, 평등한 권리를 위해서는 동화 또는 이리가레가 “동일자의 법(law of the same)”이라 부른 것을 대가로 치러야 한다. 하지만 아렌트가 우리에게 상기시키듯이, 평등은 정치적인 따라서 인간적으로 구성된 원칙으로, 이는 인간 복수성의 경험, 즉 동무들 사이에서 자유롭게 움직이며 다른 관점을 듣고 판단하는 경험을 지탱해야 한다. 아렌트와 <밀라노 여성서점> 모두가 각자 다른 방식으로 그렇게 하는 것처럼, 자유와 그것을 지지하는 주체적인 중간에 낀 공간을 전면에 내세우는 것은 평등한 대의나 평등한 권리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고, 동일성을 요구하는 것 같은 양자의 통념을 거부하는 것인데, 왜냐하면 이는 점차 추상적인 원칙이나 규칙으로 굳어져 자유의 실천들 안에 있는 그 기원으로부터 분리되었기 때문이다. 자유의 실천들 안에 있는 자신들의 기원과의 관계로 되돌려질 때, 권리들은 이미 우리인 을 승인하는 것 이상으로 사용될 수 있다. 권리들은 더 이상의 무언가가 되려는 우리의 욕망을 승인할 수 있고, 해야 한다. 이런 방식으로 이해된 권리들은 “전진해”라고 말하는 자유의 정치적 도구다. “권위 있는 여성적 대담자를 갖는 것이 인정된 권리보다 중요한” 것은 권리가 중요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오직 우리가 그것을 주장하고, 사용하고, 그것을 넘어 새로운 요구와 새로운 자유로 나아갈 수 있는 한에서만 중요성을 갖기 때문이다. 권리들이 중요한 것은 마치 권위 있는 여성적 대담자들처럼 오직 그것들이 우리가 전진하도록 영감을 주는 한에서다. 사실 게르하르트가 주장한 것처럼 권리들은 “수입되거나 명령받을 수 없다. 그것들은 연관된 사람들이 권리로서 그것을 주장하거나 옹호하는 위치에 있을 때에만 적용된다.”.32) (176) <밀라노 여성서점>이 보여준 것처럼, 그런 위치의 창조는 자유의 실천, 현세적인 중간에 낀 공간, 권위 있는 대담자를 전제한다. “만약 어떤 이가 자유의 기획에 따라 스스로의 삶을 분명히 표현하고 자신의 여성으로서 존재[우연한 사실]를 이해하고자[즉, 의미를 부여하고자] 한다면, 권위 있는 대담자는 필수적이고,” 그것은 “어떤 권리나 법도 줄 수 없는” 것이다.(Milan, 31) 즉, 국가에게 청원하는 권리 요구는 페미니스트들이 서로에게 건네는 정치적 요구를 결코 대체할 수 없다..33) 그것의 기원적 고향이자 열망인 자유의 실천을 통해 읽힐 때, 권리에 대한 요구는 현재 자신인 (what one is)을 인정(recognition)하라는 요구가 아니라 자신은 누구인가(who one is), 그리고 더욱 중요하게는 자신은 누가 될 수 있는가(who one might become)에 대한 인정(acknowledgement)의 요구다. 그렇게 이해되면 평등권은 특정한 동일성 범주로 분류된 모든 주체들에게 규칙처럼 적용될 수 있는 법적 인공물이 아니다. 권리는 위로부터 분배되는 것이 아니고, 아래로부터 만들어진 더 이상의 무엇(something more)에 대한 요구다..34) 권리는 사물이 아니라 관계다. 따라서 권리는 우리가 가지는 무엇이 아니고 우리가 하는 것이다. 권리는 우리와 타인의 관계 속에서 우리를 제한할 뿐만 아니라 힘을 북돋는다. 이런 방식으로 권리를 사고하는 것은 자유의 실천보다 평등에 대한 요구를 전면에 내세운 평등한 권리에 대한 여성들의 역사적 요구의 가치에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다. 아마도 페미니스트들은 이야기의 방향을 바꿔 자유에 대한 급진적인 요구에 있는 권리의 기원을 회상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이런 요구는 여성 해방 투쟁으로 환원할 수 없는데, 이는 사회적인 용어법 속에서, 권리가 약호화한 무언가로 전형적으로 해석되기 때문이다. 여성들과 같이 권리를 빼앗긴 집단에게 권리를 확장하는 것은 전혀 불가피하지 않은데, 왜냐하면 자유의 실천으로서 권리에 대한 요구가 반드시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에서 솟아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자유는 권리와 마찬가지로 그것을 요구하는 사람들에 의해서만 보장될 수 있는 것이다. <밀라노 여성서점>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여성적 자유가 독자적으로 보장되기 위해서는 ― 이것이 없다면 이는 자유가 아니라 해방이라고 부르는 게 옳을 것이다. ― [여성의] 해방을 외부에서 도왔던 역사적 환경이 말하자면 불필요하게 되는 것이 필수적이다. 즉 그것들이 단위생식에 의해 스스로 재생산하고 자신의 실행을 위한 물질적 조건을 생산하는 자유로 해석되거나 대체되는 것이 필수적이다. 이미 쓴 것처럼, 만약 우유의 저온 살균이 “여성참정권 옹호자들”의 투쟁보다 여성들에게 자유를 주는 데 더 기여했던 것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않도록 행동해야만 한다. 영아 사망률을 감소시키고 피임을 발명했던 의학에서도 마찬가지고, 남성이 더 이상 여성을 열등한 존재로 취급하지 못하게 한 사회생활의 진보에서도 마찬가지다. 저온 살균된 우유에 도달한 이런 자유는 어디서 왔는가? 나에게 우월한 문명의 표기로 제공된 그 꽃은 어떤 뿌리를 갖고 있는가? 만약 누군가 내 손에 쥐어준 이 병과 이 꽃에 나의 자유가 있다면 나는 누구인가? (144, 강조는 필자) 자유는 증여된 것도, 상속받은 것도 아니며, 오직 여성들 스스로에 의해서만 요구될 수 있다. 그렇다면 무엇이 자유를 보증하고, 근거 짓고, 정당화할 것인가? “여성적 자유는 여성들 스스로에 의해 보장된다.”(142).35) 권리와 대의의 정치에 대한 노골적인 거부까지는 아니더라도 <밀라노 여성서점>의 지독한 회의주의처럼 보이는 것 덕분에, 우리는 같은 것을 같게 취급하고 자유 실천의 일부가 아닌 평등 원칙의 한계를 알 수 있게 되었다. 여성들이 권리를 위한 투쟁과 실행에서 얻을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에 대해 우리의 눈―정치적 문제에 대한 사법적이고 국가 중심적인 대답 때문에 점차 맹목적이 되어가는―을 열기 위해 아마 <밀라노 여성서점> 페미니스트들은 그렇게 비타협적인 용어로 그들의 주장을 진술할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권리가 그런 실천의 일부일 수 있는지 여부는 권리가 쟁점이 되는 사례의 특수성의 맥락과 관계에서 결정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권리가 요구하는 것은 우리의 맹목적인 수용이나 거부가 아니고, 오히려 우리의 정치적 판단이다. 이것은 성적 차이의 정치적 실천이 요구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판단에 대한 요청으로 인해 <밀라노 여성서점>의 문헌은 차이에 대한 요구를 포기하지 않고서도 평등에 대한 요구와 권리를 재형상화하려는 3세대 페미니스트들에게 충분히 재생시킬 가치를 지니게 되었다. 참고문헌 Arendt, Hannah. The Human Condition.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89. --------------------. Lectures on Kant’s Political Philosophy. Ed. Ronald Beiner.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82. --------------------. “What is Freedom?” Between Past and Future: Eight Exercises in Political Thou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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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6-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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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여성으로 산다는 것은’을 청탁받고 약간 심란했었다. 하고 싶은 얘기가 있었지만 정리가 되지 않아 이 얘기를 어떻게 풀어나가야 하나 하는 부담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직 고민이 완결되지는 않았다. 다만 이 글을 시작으로 나의 고민을 정리하고 다른 사람들과 이 고민을 나누고 싶을 따름이다. 그래서 글이 두서가 없더라도 차근히 읽어주길 바라면서 글을 시작해 본다. 나는 어떤 고객인가? 실제 우리는 많은 곳에서 서비스노동을 받는다. 밥을 먹으로 간 식당에서, 술을 먹으로 간 술집에서, 가끔은 가전제품의 문제를 고치기 위해 하는 전화 상담서비스 등에서 우리가 매일 만나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그런 서비스노동을 받을 때마다 나는 순간순간 고민이 든다. 나에겐 별 필요도 없는 각종 금융상품을 판매하려는 전화가 올 때도 그렇다. 전화한 텔레마케터에게 짜증을 낼 수도 없고, 시간도 없는데 그 얘기를 다 듣고 있기도 갑갑하고. 텔레마케터의 노동현실을 뻔히 아는 상황에서 어찌해야 할까를 한참 고민하다가 ‘제가 지금 회의 중이라 통화를 할 수 없습니다,’라거나 ‘저는 그 상품이 필요 없는 데요’ 라고 미안한 듯 얘기하며 전화를 끊는다. 그러면서도 찝찝함이 남는다. 식당이나 술집에서도 그렇다. 어쩌다 활동을 하지 않는 친구들을 만날 때면 더욱 그렇다. 우리가 들어간 식당에서 종업원들이 그다지 친절하지 않을 때 친구들은 그런 문제를 따지고 든다. ‘내 돈 내고 이용하는데 왜 불친절까지 받아야 하는가? 내가 내는 돈에는 친절한 서비스를 받을 권리까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 그 이유다. 참으로 난감해지는 상황이다. 합리적으로(?) 따진다면 그 말이 틀린 것이 아닐 수도 있겠지만, 나에게는 과연 그 상품에 서비스 비용까지 포함되는 것이 맞는가하는 생각이 남는다. KTX 승무원 투쟁, 그리고 서비스노동 벌써 7개월이 넘게 파업 투쟁하는 KTX 승무원들을 바라보면서 참 많은 생각이 들었지만 정리가 되지 않아 공개적인 글에는 한 번도 얘기를 한 적이 없었다. 그 만큼 여러 생각이 들어 나중에 한꺼번에 엉켜있는 생각을 정리해봐야겠다는 심산인데, 뭐랄까 쉬운 문제는 아니다. 얼마 전 여행을 다녀오느라 비행기를 타게 되었다. 내가 탄 외국항공기에는 아줌마 승무원도 많았고, 화장도 거의 하지 않았다. 한국의 항공기와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다. 물론 다른 나라에도 여성에 대한 성차별 문제는 늘 존재하지만, 한국과 같이 외모 지상주의가 심하고 여성의 노동에 심하게 섹슈얼리티를 붙여서 판매(?)하는 나라도 드물 것이다. 여성의 노동은 자꾸 그런 식으로 구성이 된다. 그래서 여성은 서비스노동만 하는 존재로 여겨진다. 실제 항공기에 승무원이 존재하는 이유는 비상시 발생할 안전문제를 담당하기 위해서다. 그렇기 때문에 젊고 예쁘고 화장을 해야 하고 이런 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언제 발생할지 모르는 안전문제를 항상 체크하고 있어야 한다. KTX 승무원도 마찬가지다. 그런데도 이 여성들을 자꾸만 예쁘게 포장하려고 하니, 사람들도 이 여성노동자들이 할 일 없이 웃고만 있는 존재인줄 안다. 실제 KTX 승무원 파업 투쟁 동안 KTX 승무원 없이 타보니 불편한 것도 없는데 아예 없애라는 네티즌들의 말도 있었다. 자본이 만들어 놓은 기묘한 논리가 네티즌들에게 먹힌 것이다. 승무원만이 아니다. 제조업을 제외하고는 간병, 유통 등 여성들이 주로 종사하는 많은 부문이 여성노동자들에게 친절을 강요하고 있다. 이들이 친절하지 않으면 사람들은 막 화를 낸다. 내가 내는 비용에 친절이 들어있는 거라면서. 그러면서도 그녀들이 노동의 권리를 얘기하면 그 노동은 그다지 중요한 노동이 아니라고 폄하한다. 활동가들도 크게 다르지 않다. 실제 서비스노동에 종사하는 여성노동자들이 파업을 할 때 눈요기 거리로 바라보는 경우도 많다. 2000년 롯데호텔 파업 당시 잘 차려입은(?) 여성조합원들이 집회에 나올 때마다 실실 웃으며 그들을 바라보던 시선들은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KTX 승무원 투쟁 때도 그렇다. KTX 승무원들이 집회에 나오면 좋다고 하면서도, 뒤에서는 그녀들의 집회 때 차림새를 흠 잡으며 투쟁성이 없느니, 주체적이지 못하느니 뭐라고들 해댄다. 그래서 우리는 서비스노동을 어떻게 얘기해야 할까? 성매매를 둘러싼 논쟁 속에서 정말 많은 생각이 들었다. 성노동자를 인정할 것이냐, 말 것이냐 하는 문제에서부터 사람들은 저마다 입장도 달랐고, 그 근거도 역시 다양하게 나타났으며, 쉽게 정리될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는 이 서비스노동을 바라보며 비슷한 생각이 들었다. 이 노동의 문제를 어떻게 바라보고 우리는 어떻게 얘기해야 하는지, 난감한 부분이 많기 때문이다. 단순하게 생각해서, 자본주의가 발달할수록 서비스노동이 늘어나고 신자유주의가 여성의 노동을 더욱 서비스노동으로 몰고 가는 상황에서, 여성의 서비스노동은 가사노동의 연장선에 있는 노동인 경우가 많고, 따라서 더욱 저임금과 차별적인 처우를 받는다. 그런데 여기까지 말하고 나서도 속 시원히 풀리는 문제가 없다. 당장 고민은 그거다. 당장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 식당에 가서 불친절했을 때, 전화상담원이 전화를 했을 때, 비행기든 KTX든 승무원이 필요 없다고 말하는 네티즌들의 글을 봤을 때,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 더 나아가 그럼 거기에 종사하는 여성노동자들을 어떻게 볼 것인가? 그 여성노동자들이 노동권을 얘기하고 생존권을 얘기할 때 당신은 뭐라고 할 것인가? 투쟁하는 여성노동자에게 화장하고 나오지 말라고 할 것인가? 사람들에게 친절을 강요하는 것은 문제이니 ‘국민여러분, 친절을 강요하지 마십시오.’라는 캠페인이라도 벌일 것인가?… 한번쯤 생각해봤으면 한다.

  • 2006-10-10

    서비스노동에 대한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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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여성으로 산다는 것은’을 청탁받고 약간 심란했었다. 하고 싶은 얘기가 있었지만 정리가 되지 않아 이 얘기를 어떻게 풀어나가야 하나 하는 부담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직 고민이 완결되지는 않았다. 다만 이 글을 시작으로 나의 고민을 정리하고 다른 사람들과 이 고민을 나누고 싶을 따름이다. 그래서 글이 두서가 없더라도 차근히 읽어주길 바라면서 글을 시작해 본다. 나는 어떤 고객인가? 실제 우리는 많은 곳에서 서비스노동을 받는다. 밥을 먹으로 간 식당에서, 술을 먹으로 간 술집에서, 가끔은 가전제품의 문제를 고치기 위해 하는 전화 상담서비스 등에서 우리가 매일 만나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그런 서비스노동을 받을 때마다 나는 순간순간 고민이 든다. 나에겐 별 필요도 없는 각종 금융상품을 판매하려는 전화가 올 때도 그렇다. 전화한 텔레마케터에게 짜증을 낼 수도 없고, 시간도 없는데 그 얘기를 다 듣고 있기도 갑갑하고. 텔레마케터의 노동현실을 뻔히 아는 상황에서 어찌해야 할까를 한참 고민하다가 ‘제가 지금 회의 중이라 통화를 할 수 없습니다,’라거나 ‘저는 그 상품이 필요 없는 데요’ 라고 미안한 듯 얘기하며 전화를 끊는다. 그러면서도 찝찝함이 남는다. 식당이나 술집에서도 그렇다. 어쩌다 활동을 하지 않는 친구들을 만날 때면 더욱 그렇다. 우리가 들어간 식당에서 종업원들이 그다지 친절하지 않을 때 친구들은 그런 문제를 따지고 든다. ‘내 돈 내고 이용하는데 왜 불친절까지 받아야 하는가? 내가 내는 돈에는 친절한 서비스를 받을 권리까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 그 이유다. 참으로 난감해지는 상황이다. 합리적으로(?) 따진다면 그 말이 틀린 것이 아닐 수도 있겠지만, 나에게는 과연 그 상품에 서비스 비용까지 포함되는 것이 맞는가하는 생각이 남는다. KTX 승무원 투쟁, 그리고 서비스노동 벌써 7개월이 넘게 파업 투쟁하는 KTX 승무원들을 바라보면서 참 많은 생각이 들었지만 정리가 되지 않아 공개적인 글에는 한 번도 얘기를 한 적이 없었다. 그 만큼 여러 생각이 들어 나중에 한꺼번에 엉켜있는 생각을 정리해봐야겠다는 심산인데, 뭐랄까 쉬운 문제는 아니다. 얼마 전 여행을 다녀오느라 비행기를 타게 되었다. 내가 탄 외국항공기에는 아줌마 승무원도 많았고, 화장도 거의 하지 않았다. 한국의 항공기와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다. 물론 다른 나라에도 여성에 대한 성차별 문제는 늘 존재하지만, 한국과 같이 외모 지상주의가 심하고 여성의 노동에 심하게 섹슈얼리티를 붙여서 판매(?)하는 나라도 드물 것이다. 여성의 노동은 자꾸 그런 식으로 구성이 된다. 그래서 여성은 서비스노동만 하는 존재로 여겨진다. 실제 항공기에 승무원이 존재하는 이유는 비상시 발생할 안전문제를 담당하기 위해서다. 그렇기 때문에 젊고 예쁘고 화장을 해야 하고 이런 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언제 발생할지 모르는 안전문제를 항상 체크하고 있어야 한다. KTX 승무원도 마찬가지다. 그런데도 이 여성들을 자꾸만 예쁘게 포장하려고 하니, 사람들도 이 여성노동자들이 할 일 없이 웃고만 있는 존재인줄 안다. 실제 KTX 승무원 파업 투쟁 동안 KTX 승무원 없이 타보니 불편한 것도 없는데 아예 없애라는 네티즌들의 말도 있었다. 자본이 만들어 놓은 기묘한 논리가 네티즌들에게 먹힌 것이다. 승무원만이 아니다. 제조업을 제외하고는 간병, 유통 등 여성들이 주로 종사하는 많은 부문이 여성노동자들에게 친절을 강요하고 있다. 이들이 친절하지 않으면 사람들은 막 화를 낸다. 내가 내는 비용에 친절이 들어있는 거라면서. 그러면서도 그녀들이 노동의 권리를 얘기하면 그 노동은 그다지 중요한 노동이 아니라고 폄하한다. 활동가들도 크게 다르지 않다. 실제 서비스노동에 종사하는 여성노동자들이 파업을 할 때 눈요기 거리로 바라보는 경우도 많다. 2000년 롯데호텔 파업 당시 잘 차려입은(?) 여성조합원들이 집회에 나올 때마다 실실 웃으며 그들을 바라보던 시선들은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KTX 승무원 투쟁 때도 그렇다. KTX 승무원들이 집회에 나오면 좋다고 하면서도, 뒤에서는 그녀들의 집회 때 차림새를 흠 잡으며 투쟁성이 없느니, 주체적이지 못하느니 뭐라고들 해댄다. 그래서 우리는 서비스노동을 어떻게 얘기해야 할까? 성매매를 둘러싼 논쟁 속에서 정말 많은 생각이 들었다. 성노동자를 인정할 것이냐, 말 것이냐 하는 문제에서부터 사람들은 저마다 입장도 달랐고, 그 근거도 역시 다양하게 나타났으며, 쉽게 정리될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는 이 서비스노동을 바라보며 비슷한 생각이 들었다. 이 노동의 문제를 어떻게 바라보고 우리는 어떻게 얘기해야 하는지, 난감한 부분이 많기 때문이다. 단순하게 생각해서, 자본주의가 발달할수록 서비스노동이 늘어나고 신자유주의가 여성의 노동을 더욱 서비스노동으로 몰고 가는 상황에서, 여성의 서비스노동은 가사노동의 연장선에 있는 노동인 경우가 많고, 따라서 더욱 저임금과 차별적인 처우를 받는다. 그런데 여기까지 말하고 나서도 속 시원히 풀리는 문제가 없다. 당장 고민은 그거다. 당장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 식당에 가서 불친절했을 때, 전화상담원이 전화를 했을 때, 비행기든 KTX든 승무원이 필요 없다고 말하는 네티즌들의 글을 봤을 때,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 더 나아가 그럼 거기에 종사하는 여성노동자들을 어떻게 볼 것인가? 그 여성노동자들이 노동권을 얘기하고 생존권을 얘기할 때 당신은 뭐라고 할 것인가? 투쟁하는 여성노동자에게 화장하고 나오지 말라고 할 것인가? 사람들에게 친절을 강요하는 것은 문제이니 ‘국민여러분, 친절을 강요하지 마십시오.’라는 캠페인이라도 벌일 것인가?… 한번쯤 생각해봤으면 한다.

  • 2006-09-07

    국제에이즈회의 참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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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캐나다에서 에이즈를 말하다 너무 먼 당신, 에이즈 [%=박스1%] 미국에서 최초로 에이즈가 게이(gay)에게서 발견되었을 때 이를 '게이 돌림병'이라고 불렀다. 미국은 가족주의와 가부장제를 옹호하기 위해 정상적인(?) 성정체성을 갖고 있지 않은 게이에게 '성적으로 문란하여' 결국에는 '천벌'을 받은 것이라고 에이즈 발병원인을 규정했다. 이러한 미국의 정책은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어 에이즈에 걸리기 쉬운 집단을 '부도덕한 이들'이기 때문에 천형이 내려졌다는 식으로 공격했다. 부도덕하지 않은 나, 성적으로 문란하지 않은 나, 역시 성적으로 문란하지 않을 것이 확실한(?) 배우자, 애인. 그래서 나는 에이즈와 무관하다고 생각하고, 에이즈에 걸린 이들을 비난하는데 동참하고 있지는 않은지. 질병은 환자가 처한 사회적 조건과 살아온 모습을 반영한다. 하지만 흔히 개인이 '몸관리를 잘 못해서'라고 단정짓는 경우가 많고, 환자가 되면 ‘보호와 지원’이 아닌 '정상'생활에서의 ‘퇴출’을 당한다. 직장검진 전에 노동자가 혈압이 높게 나올까봐 청심환을 먹고 가는 것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여기에 더해 전염성질병의 경우 '세균, 바이러스를 나에게 옮길 수 있는'이라는 비과학적인 의심은 바이러스와 감염인을 동일시한다. 몇몇 전염성질병에는 도덕성을 결부시킨다. 한센병, 결핵, 에이즈=더러운, 천한, 가난한, 성적으로 문란한 자. 그래서 이들을 격리시키고 비난하는 것을 당연하다고 여기게 된다. 특히 에이즈의 경우 사회적으로 열악한 위치에 있는 이들을 공격하는 수단이다. 성소수자, 이주노동자, 여성, 성노동자, 흑인들이다. 캐나다에 간 이유 16차 국제에이즈회의가 8월 13일~18일간 캐나다 토론토에서 개최되었다. 2년마다 개최되는 국제에이즈회의에는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어있는 에이즈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부관료, 국제기구 관계자, 제약회사, 과학자, 연구자, 정책가들이 모인다. HIV/AIDS 감염인들은 이 회의를 그들만의 잔치가 되도록 내버려두지 않고 감염인의 관점에서 에이즈문제를 해결하도록 촉구하면서 투쟁의 장으로 만들어왔다. 이번 16차 회의의 주제는 '결정하고 실천할 때 Time to deliver'이다. 지금까지의 논의와 해결책을 실행하기 위해 책임을 져야할 때라고 주제가 결정된 것은 에이즈가 발견된 지 25년이 된 지금 에이즈확산이 심각하기 때문이다. 이번 국제에이즈회의에서는 주요 의제 5가지에 대한 전시, 토론, 심포지움, 영화제 등의 프로그램이 진행되었다. 주요 의제는 에이즈 확산을 중단시키기 위한 연구 촉진, 치료와 예방을 확대하기 위한 인적자원의 유지와 증대, 감염인 개인과 공동체의 결합 증대, 답변을 진척시키기 위한 새로운 지도력 형성, 현장으로부터 배우기이다. 한국에서는 나프(Nopi Narara HIV/AIDS people)공동체, HIV/AIDS 인권연대 나누리+, 한국 HIV/AIDS 감염인연대, 한국 HIV/AIDS감염인협회 등의 단체 및 개인이 최초로 공동의 목표를 설정하고 참여하였다. 우리는 토론토에 오기 전 한달 반 동안 에이즈를 확산시키는 주범이 무엇인지를 토론했다. 에이즈는 의학적으로 수혈, 성행위를 통해서, 그리고 에이즈에 걸린 산모에서 태아에게 인체면역결핍바이러스(HIV)가 감염되어 면역력이 약해지는 질병이고 사회적으로는 성차별, 인종차별, 성소수자 차별, 빈곤,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의해 확산되고 있는 전 세계적인 질병이다. 따라서 이런 사회적인 요건들에 의해 가장 피해가 심한 아프리카와 동남아시아에서 에이즈발병률이 높다. 에이즈문제를 종식시키기 위해 요구하고 싸워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결정하는 것에서부터 우리의 토론은 시작되었다. 그래서 에이즈를 둘러싼 수많은 문제점들이 있지만 우리는 우선적으로 자유무역협정과 한국의 에이즈예방법의 문제를 제기하기로 하였다. 이것은 국내문제로 한정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감염인의 관점에서 감염인의 방식으로 에이즈 확산을 막기 위해 외국의 에이즈환자와 활동가들의 목소리를 듣고, 그들과 함께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사진1%] 예방과 치료 사이에서 국제사회는 에이즈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예방과 치료를 두고 오랜 공방을 벌였다. 세계지도자라고 불리는 이들과 선진국 정부는 정치적 의도를 가지고 '예방'이 우선이라고 주장했다. 반면 에이즈환자들은 G8국에 '당장 아프리카를 치료하라, 당장 에이즈를 치료하라'고 주장했다. 왜냐면 선진국 정부는 성소수자, 흑인, 외국인, 여성, 성노동자, 가난한 자들을 위해 돈을 쓰기 싫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의 예방정책은 국내거주자만을 관리하고, 에이즈에 걸린 이들을 보호하고 지원하기 위해서 치료를 하는 것이 아니라 바이러스를 퍼트리지 않도록 통제하기 위한 수준만큼 치료를 하는 것이다. 예방과 치료사이의 공방은 마치 ‘예방은 비감염인을 에이즈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국가적, 개인적 조치이고’, ‘치료는 에이즈환자를 위한 것처럼’ 예방과 치료가 분리되어있는 것처럼 보인다. 즉 에이즈를 예방하는 것과 에이즈환자를 치료하는 것이 반비례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들의 예방정책은 '국민'의 안전을 위해 에이즈환자의 인권을 침해하도록 했고, 그들이 유지하고자 하는 사회를 굳건히 하는데 적절히 이용되었다. 그들은 정치적으로 성공했다. 그들의 예방정책은 두 가지 공통점을 가진다. 첫째, 에이즈는 사스나 조류독감처럼 전 세계적인 질병이지만 국내거주자만 관리하려 한다. 대표적인 예로 우리나라뿐 아니라 여러 국가에서 외국인에게 HIV검사를 강요하고 있다. 장기체류외국인이 입국할 때 HIV양성반응이 나오면 입국할 수 없고, 국내에 거주하던 외국인이 HIV양성이 되면 강제출국을 당하게 된다. 둘째, 한국정부를 포함한 많은 국가에서는 성노동자, 마약사용자, 성소수자, 이주노동자, 여성 등을 비정상적이고 비도덕적인 존재로 규정을 하고 이들을 타깃으로 이들을 차별을 하는 예방정책을 펼치고 있다. 부시대통령의 에이즈예방정책이 대표적으로 비난을 받고 있는데, '금욕, 순결, 그래도 안되면 콘돔을 사용하라'이다. 한국의 예방법에는 대표적으로 감염인이 콘돔을 사용하지 않고 성행위를 했을 경우 처벌하게 하는 전파매개행위금지조항, 감염인을 실명관리와 감시하게 하는 신고·보고 조항, 외국인, 성노동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강제검진조항이 있다. 여러분이 성행위를 할 때 콘돔을 사용하는지 아닌지를 검사하고 콘돔을 사용하지 않았을 때 처벌받을 수 있는 법이 존재한다면 어떻겠는가? 콘돔만으로 에이즈확산을 막을 수 없는 증거들 '개인의 잘못된 행위'나 '안전한 성행위를 하지 않은 개인의 실수(?)'만으로 에이즈의 확산을 설명할 수 없다. 그렇다면 남녀노소, 인종, 동성애자와 이성애자, 남반구와 북반구의 구분 없이 비슷한 비율로 에이즈가 발병되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실제 흑인이 더 많이 감염되고, 인도와 아프리카에서 더 많이 감염되고, 비율로 따졌을 때 동성애자의 감염 비율이 높고, 여성이 감염의 온상지로 여겨진다. 흑인이, 동성애자가, 인도와 아프리카의 가난하고 덜 문명한 이들이, 성노동자들이 덜 윤리적이고, 덜 똑똑하고, 더 분별력이 없고, 덜 합법적이고, 비정상적인가? 2004년 7월 14일 UN에서 '여성과 HIV/AIDS: 위기에 직면' 보고서를 발표했다. 그 보고서는 아프리카에서 결혼한 젊은 여성이 결혼하지 않은 비슷한 연배의 여성보다 더욱 위험에 처해있다고 전했다. 이것은 성불평등과 차별 때문이다. 특히 더 나이 많은 남편에게 콘돔을 사용할 것과 여성이 원하는 성행위를 요구하기가 쉽지 않다. 그리고 문화적으로 남편이 있는 여성보다 과부가 치료에 관한 정보를 찾기가 더 쉽다고 한다. 발표자는 부시의 에이즈정책 '금욕, 순결, 콘돔을 사용하라(Abatain, Be faithful, Comdomise)'를 비판하면서 성평등과 여성에 초점을 맞춘 정책이 없다면 국제적으로 에이즈에 대항할 수 없다고 말했다. 미국의 활동가는 부시의 정책에 대해 ’내 남편이 제일 위험하다‘고 표현했다.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에서는 감염인의 58%가 여성이고, 15~24세의 젊은 여성은 같은 나이의 남성보다 HIV에 감염될 위험이 2.5배나 높다. 대부분 재산권이 없는 그녀들은 에이즈치료제를 사먹을 수 없다. 그녀들에게 재산권과 성평등이 보장되지 않는 한 그녀들의 안전은 보장되지 않는다. 아프리카에서 여성운동진영이 에이즈운동을 하고, 에이즈운동이 여성에 의해 주도되고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유니세프는 'Children on brink 2004' 보고서를 통해 에이즈로 인해 고아가 된 어린이가 2%(1990년)에서 28%이상(2003년)으로 급격히 증가하고 있다고 발표했다. 그 보고서에 따르면 사하라 이남지역에서 2000년 이후 380만 명의 어린이가 에이즈로 부모를 잃었고, 2010년까지 1850만 명의 어린이가 에이즈로 인해 고아가 될 것이라고 한다. 아시아는 아프리카에 비해 전체 감염률은 낮지만 전체고아의 수는 두 배이다. 2003년에 아시아에서 고아는 8760만 명이고,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에서는 4340만 명이다. 임신 중 에이즈치료제를 먹으면 수직감염을 예방할 수 있지만, 치료제가 공급되지 않아서 많은 아이들이 감염된 채로 태어나고, 이후에도 기본적인 진단과 치료가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유엔보고서에 따르면 어린이에게 필수적인 지원을 제공하기 위한 정책을 세우고 있는 국가는 매우 희박하다. 개발도상국에는 감염된 어린이의 치료를 위한 간단한 가이드라인도 없다. 뿐만 아니라 어린이 용량에 맞춰 어린이가 먹기 쉽도록 에이즈치료제를 생산하는 제약회사도 없다. 태국 <국경없는의사회>의 활동가는 '제약회사는 감염된 어린이에게 흥미가 없다'고 말했다. UNAIDS(유엔에이즈계획, the United Nations Programme on HIV/AIDS)에 따르면 감염된 어린이는 2003년 기준으로 북미에 500명, 유럽에 500명이다. 따라서 거대제약사들은 어린이 에이즈치료제가 선진국시장에서 큰 이윤을 남기지 못하기 때문에 관심이 없다. 활동가들은 어린이에 대한 치료와 지원은 기술적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재정적 문제라고 말한다. 어린이 감염이 점점 증가하는 것이 그들 부모가 무지하고 부도덕한 행위를 해서인가? 에이즈를 확산시키는 FTA, 당장 에이즈를 치료하라 애보트는 아프리카를 아예 배제하고 에이즈치료제를 만들었다. 애보트가 생산하는 에이즈치료제 로피나비어가 냉장보관 형태로 만들어졌고, 로피나비어와 리토나비어의 가격이 비쌌기 때문이다. 수 년 전부터 에이즈환자와 의사는 에이즈치료제를 열에 안정한 형태로 만들 것과 약값을 인하할 것을 요구해왔다. 2004년 방콕에서 있었던 15차국제에이즈회의에서 애보트는 열에 안정한 형태로 만들 것을 약속했다. 그래서 애보트는 열에 안정한 알약형태의 알루비아 Aluvia를 출시했고, 8월 13일에 '개발도상국에서 로피나비어와 리토나비어에 대한 접근을 확대하기 위해 새로운 시도'라는 제목의 성명을 발표했다. 그 내용은 저소득국가와 중진국에서 연간 환자당 가격을 2200달러로, 아프리카와 최빈국에서는 연간 환자당 500달러로 인하하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애보트의 약속은 공허하다. 하루 1달러 미만으로 살아가는 아프리카 지역의 환자에게 연간 500달러는 죽음을 부르는 가격이다. 에이즈치료제는 글락소스미스클라인, 로슈, 애보트, 브리스톨마이어스스큅, 길리어드 등 몇 개의 초국적제약회사에 의해 판매되고 있고, 이들은 특허권을 통해 생산, 판매에 있어 독점적 권한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가격 또한 유럽과 미국에서 팔릴 수 있는 최대의 가격을 요구를 한다. 이들 제약회사 외에는 에이즈치료제를 만들 수 있는 능력이 아무 곳에도 없냐면 그것은 아니다. 인도, 브라질, 남아공, 태국,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짐바브웨 등 많은 국가에서 에이즈치료제를 국내에서 싸게 생산할 수 있는 조치들을 취하고 있다. 공공제약회사를 통해서 혹은 강제실시를 통해서 혹은 인도의 복제약 수입을 통해서 말이다. 그런데 초국적제약회사는 FTA를 통해 특허권과 정보독점권을 더욱 강화하여 값싼 약을 공급하고자 하는 정부, 국제기구의 노력과 환자들의 투쟁을 무력화시키려 한다. 우리나라는 에이즈치료제를 무상으로 공급하고 있다. 그런데 2000년 이후에 세상에 나온 약들이 많이 들어와 있지 않다. 대표적인 예가 로슈의 푸제온이다. 푸제온은 2004년에 보험등재가 되었지만 로슈가 요구한 가격에 못 미치게 보험약가가 결정이 되어 아직까지 판매를 하고 있지 않다. 아프리카와 동남아지역에는 1차 치료제조차 충분히 공급되고 있지 않다. 아프리카와 동남아지역은 에이즈환자의 수는 엄청나지만 돈 없는 대륙이기 때문에 제약회사가 버린 땅이다. 따라서 아프리카, 동남아시아, 한국 등 수준의 차이는 있겠지만 제약회사의 이윤에 의해 생명을 좌지우지 당하는 문제는 같은 맥락을 가지고 있다. 에이즈치료제의 필요성에 대한 결정을 환자나 의사가 하는 것이 아니라 제약회사가 하는 시스템이기 때문이다. 에이즈 치료는 초국적제약회사의 이윤을 충족시켜 줄 것인가 말 것인가에 달려있다. 그리고 초국적제약회사를 상대로 하는 싸움은 한 국가내에서만 하기는 힘들다. 그런 점에서 에이즈치료제에 대한 환자들의 투쟁은 국제적이어야 하고, 국제연대가 중요하다. 그리고 FTA는 의약품의 공급, 약가에만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라 의료시스템에도 영향을 미칠 것이기 때문에 언제까지나 에이즈치료제가 무상공급이 될 것이라고 안심할 수도 없다. 민간보험이 활성화되면 에이즈환자는 더욱 의료의 사각지대로 내몰리게 된다. 지금도 에이즈환자는 민간보험에 가입할 수 없다. 감염인 인권증진이 에이즈예방이다 에이즈를 '게이 돌림병' 혹은 부도덕한 이들에 대한 천형으로 여기는 인식은 에이즈문제를 에이즈에 걸린 개인의 문제로 치부하기 때문에 사회적 책임을 묻지 않고, 에이즈환자에 대한 응징을 해야 하고 혹은 바이러스를 퍼트리는 주범을 통제해야한다는 식으로 해결책을 제시하게 된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나는 에이즈와 무관하다는 생각을 갖게 만들고, 에이즈에 걸린 사람들을 비난하는데 동참하게 만들었다. 결국 한국정부를 비롯하여 많은 국가에서 에이즈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예방정책을 펼치고 있다. 에이즈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답은 이미 에이즈환자들에 의해 제시되었다. 성평등과 여성에 초점을 맞춘 정책이 없다면 국제적으로 에이즈에 대항할 수 없다. 성노동자에게 인권과 노동권을, 마약사용자에게는 깨끗한 주사기공급과 인권을 보장해야 한다. 당장에는 모든 이에게 의약품 접근권을 보장하기 위해 값싼 복제약을 자체적으로 생산하여 무상공급하도록 해야 한다. 에이즈환자에게 어떤 치료제가 필요한지 결정하고 국제적으로 공동의 연구개발을 하여 그 결과를 함께 나눌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 전 세계의 에이즈환자들은 에이즈위기를 감염인의 관점으로 감염인의 방식으로 해결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감염인 인권과 에이즈예방이 반비례한다는 입장은 에이즈를 더욱 확산시킬 뿐이다. 이제는 'HIV가 아니라 제약자본의 탐욕이 우리를 죽인다'고 외치는 감염인의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 '예방'의 사전적 의미는 탈이 나는 원인을 미리 제거하여 탈을 막는 것이다. 그러면 탈이 나는 원인을 무엇으로 보느냐에 따라 예방조치의 방향은 달라진다. 에이즈는 전 세계적으로 성차별, 인종차별, 성소수자차별, 빈곤, 신자유주의 세계화를 통해 확산되고 있다. 이런 원인 때문에 에이즈환자에 대한 차별과 낙인, FTA 문제, 초국적제약자본에 의한 생명권박탈 등의 문제가 전 세계 에이즈환자의 공통의 문제이다. 우리는 에이즈확산의 원인을 제거하는 것을 감염인 인권증진이라고 부른다. 즉 감염인 인권증진운동은 에이즈를 확산시키는 사회구조와 차별을 바꾸는 투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