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텔리베라노조가 처음 투쟁을 시작한 것은 지난 해 5월 17일이었다. 따뜻한 봄 햇살아래 모여 출정식을 가졌던 300여명의 조합원들. 깔끔한 유니폼 대신 투쟁복을 입었는데도 그렇게 단정해 보였던 서비스 노동자들. 그녀들과 연대한지 벌써 8개월이 지났다. 어느덧 나는 제법 호텔 노동자들이 겪는 남다른 소외감을 공감하게 되었다. 지하 4층 노조사무실, 지하 5층 전기 설비실, 허름한 탈의실, 세탁물 더미를 실어 나르는 직원용 엘리베이터... 이 '노동자만의 공간'은 번듯한 지상과 너무 다른 세계이다. 그곳은 호텔에 가본 적이 없는 일반 사람들은 물론 호텔을 이용하는 고객들도 상상하기 어려운 공간이다. 그렇게 모든 서비스를 마치 공기처럼 의식하지 못할 만큼 편안하게 만드는 것이 호텔노동자들의 노동이다. 그런 '지하세계 사람들'이 2003년 8월 6일 전면파업 선언과 함께 지상으로 나왔다. 번듯한 호텔 앞에 천막을 쳐 새로운 그들만의 공간을 만들었다. 고급 승용차를 타고 와 자기 손으로 차 문 하나 여닫지 않는 고객들에게 '우리의 고충을 알아주었으면'하는 간절한 눈길을 보내는 조합원들. 그러나 그 둘 사이의 교감은 쉽지 않아 보였다. 휘양 찬란한 로비에 앉아 외치는 '비정규직 정규직화', '민주노조 사수' 구호는 어떤 투쟁 현장 보다 공허하게 메아리쳤다. '비정규직 정규직화'에서 '민주노조 사수'로 호텔리베라노조는 87년에 설립되어 제법 긴 역사를 가진 노조이고, 비교적 원만한 노사관계를 유지해 왔다. 서울과 유성에 각각 노동조합 본조직와 지부를 두고 있는 호텔리베라노조의 파업은 이번이 두 번째다. 첫 번째 파업은 2001년이었는데, 시설 용역화 저지를 위한 투쟁으로 단 9일 동안의 파업으로 승리를 거두었다. 그리고 당시 계약직 직원들을 정규직으로 전환시키는 데도 일정한 성과를 거뒀다. 그런 노력으로 유난히 비정규직이 많은 호텔에서 그나마 계약직 직원이 전면적으로 확대되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또한 이번 파업엔 12명의 비정규직이 참여하여 정규직과 함께 투쟁하기도 했다. 평화로운 호텔이 술렁거리기 시작한 것은 건설, 철강, 골프장 등 십여 개의 계열사가 있는 신안그룹이 2000년 말 호텔리베라를 인수하고 현재 호텔의 총지배인이자 대표이사인 박길수 사장이 대표 이사가 되면서부터다. 박순석 신안그룹 회장은 노동조합의 기본 권리를 인정하지 않는 사용자이다. 무노조 경영도 아니다. 그가 바라는 노조 위원장의 역할은 우습지만 ‘회장의 친위대장’이다. 호텔 사측은 끊임없이 민주노조의 영향력을 축소시키기 위해 끊임없이 시도했다. 박길수 대표이사는 노조 간부를 부당 강등, 전직시키는 것은 물론이고 인사권 남용과 부당노동행위를 수 차례 자행했다. 급기야 작년 1월부터 시작된 2003년 임금․단체교섭에서 노조전임자 축소안을 제출하였다. 15년의 역사를 가진 노동조합에 전임자 축소를 요구한 것은 그야말로 민주노조에 대한 전면적인 공격이었던 셈이다. 같은 해 4월 비정규직 정규직화, 임금인상 등 노조의 주요 요구안이 일정하게 반영된 중앙노동위원회의 조정안을 노조가 수용하겠다고 했는데도, 사측이 거부하는 극히 보기 드문 사태가 발생했던 것도 이와 같은 맥락이다. 영업손실이 수억 원에 이르더라도 노조의 요구를 수용하지 않겠다고 작정한 듯 사측은 사실상 노조의 파업을 유도하였다. 청담동 한복판은 연일 폭력의 아수라장으로 5월 17일 노조가 부분파업에 돌입하여 불과 십여 차례 하루파업과 집회를 한 것이 전부였지만 사측은 7월 5일, 8월 6일 서울과 유성에 직장폐쇄를 단행했다. 그것도 파업에 열성적으로 참가한 조합원들이 있는 사업장에 한에서만 벌어진 공격적 직장폐쇄였다. 이에 노조는 유성리베라 직장폐쇄가 이루어진 8월 6일을 기해 전면파업에 돌입하였고, 그 파업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 동안 사측이 저지른 노조탄압 사례는 가히 백화점 수준이다. 서울, 유성 노조간부 재산 가압류 액이 6억 8천만 원 이르렀고, 지난 11월에는 조합원 개개인에게 손배가압류 협박을 하여 서울 조합원 중 다수가 파업대오에서 이탈했다. 아예 노조를 대화상대로 인정하지 않는 많은 장기투쟁사업장과 다르게 호텔리베라 사측은 항상 상황을 극한 대립으로 몰고 간 다음, 구사대와 복귀한 조합원들을 동원하여 물리적인 폭력을 행사하는 수법을 사용했다. 호텔 앞 천막 농성장을 3번이나 침탈했고, 평화적인 1인 시위와 사업장내 합법적인 집회를 방해하여 아수라장을 만든 것도 수 차례다. 작년 12월 마지막 날에는 사측의 만행이 극에 달하였는데, 조합원들은 술 냄새를 풍기는 구사대에게 둘러 쌓여 집단폭행을 당했고, 연대 투쟁한 사람들이 크게 다치기도 했다. 교섭에 나와서는 노조 지도부가 사퇴해야 한다, 일단 복귀하지 않으면 협상할 수 없다는 등 단체교섭 내용과는 무관한 주장만 반복하며 사실상 민주노조가 사라질 때까지 밀어붙이겠다는 의지를 천명하고 있다. 한편으로는 직원들을 선동하여 노조의 정당성을 훼손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대표이사가 조장하는 노-노 갈등은 마치 노-사간 대리전의 양상을 띠면서 복귀자와 파업 참가자들 모두를 지치게 하고 있다. 사용자는 무엇하나 거칠 것이 없다 이렇듯 호텔리베라의 노사관계를 극단적으로 악화시키는 주범은 신안그룹의 박순석 회장이다. 그가 지난해 굿모닝시티 사건에 깊숙이 개입하였고, 김대중정권 때부터 한화갑 등 민주당 중진세력과 끈끈한 유착관계를 갖고 있다는 것은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이다. 그런데도 그는 썬엔문 사건 등 작년과 올해 정신 없이 터져 나온 각종 부정부패 스캔들을 비껴가며 여전히 법 집행의 사각지대에 안전히 착륙해 있다. 민주노조를 인정하기 않으려는 박순석 회장의 고집 때문에 파업이 장기화되고 있는 것을 알면서도 노동부와 경찰이 어떤 기대할만한 노력을 하지 않는 것은 이와 같은 사정 탓이다. 노동부와 경찰은 명명백백한 부당노동행위에도, 코앞에서 벌어지는 폭력에도 그저 눈을 감고 있을 뿐이다. 얼마전 노조를 취재한 한 기자의 말처럼 '노무현 시대 노사관계의 자화상'을 보여주고 있는 곳이 바로 호텔리베라이다. 노무현 정권 1년 동안 이 나라 민주노조의 조합원들은 인간으로 대접을 받을 권리도 없는 국민으로 내몰렸다. 작년 한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5명의 노동자, 그러나 살아도 살아있는 것 같지 않은 또 다른 열사들이 민주노조 곳곳에서 신음하고 있다. 더욱이 이른바 '노사관계 로드맵'을 법제화해 노조의 최소한의 기반마저 무너뜨리겠다는 노무현 대통령의 호언장담 덕에 박순석 회장을 비롯한 수많은 악질 사용자들의 사기(?)는 하늘 무서운 줄 모르고 치솟고 있다. "아직도 카드 되는 사람이 있어?" 가끔 술자리를 가질 때 조합원들이 주고받는 말이다. 파업대오에 남아있는 21명의 조합원의 대부분은 작년 7월 직장폐쇄부터 지금까지 월급한푼 못 받으며 싸운 사람들이다. 또 그중 대부분이 여성이고, 다수가 아주머니들이다. 사측의 도를 넘어선 물리적인 폭력 때문에 자기 몸뚱이 하나 지키기도 벅찬 게 지금 조합원들의 현실이다. 오십이 넘은 한 아주머니는 폭력 사태가 일어날 때마다 다치고 실신하여 병원에 실려가기를 수 차례, 온 몸에 남아있는 기운이 없다며 한숨을 내쉰다. 2003년의 마지막 날 열린 집회에서 부하직원으로 일했던 계약직 사원에게 폭행을 당하고 몇 시간 동안 울음을 그치지 않았던 한 여성조합원의 모습도 잊을 수 없다. 이렇게 어이없는 일을 당하면서도 우리가 지키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조합원들은 여전히 '민주노조 사수'를 곱씹으며 다음 투쟁을 준비하고 있다. 노동자로서 자존심을 지키기 위한 싸움만은 아니다. 불평등한 노사관계, 더러운 정경유착이 판을 치는 우리 사회 한복판에서 투쟁을 멈추지 않고 있는 스스로가 바로 희망이라는 것을 그들은 너무 잘 알고 있다. PSSP
김호중 서부건설노조위원장을 만나다 서부건설노조의 천막 농성은 현재 53일차(1월30일)로 접어들었다. 아마 이대로라면 이 인터뷰가 실릴 즘에는 두 달이 넘어설 것이다. 그 만큼 이 투쟁이 검찰의 조직적인 수사에 의해 왜곡되었고, 건설일용노동자들을 조직하는데 물러설 수 없음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건설노동자들이 명동성당에 처음 도착했을 당시에는 명동성당 측에서 텐트 치는 것을 반대해서, 수 주일을 노숙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건설노동자들의 탄압분쇄에 대한 의지와 먼저 와서 농성하고 있는 이주 농성투쟁단의 적극적인 지원, 사회단체들의 연대에 힙 입어 지금은 텐트를 치고 농성이 이어지고 있다. 작년 10월, 검찰이 앞서 말한 것처럼 건설노조활동가들이 사측과 교섭을 통해 전임비를 확보했는데, 이를 사용자에 대한 금품갈취와 협박이라고 사실을 날조했다. 이 날조된 사실을 근거로 건설노조를 탄압하고, 현장활동가들을 구속?수배하는 과정이 이 투쟁의 발단이다. 이 투쟁은 이른바 노가다로 불리는 200만명에 가까운 건설일용노동자들이 자본의 상시적인 임금체불과 산업재해 무방비에 저항하는 투쟁이고, 비정규직 투쟁을 조직화할 때, 자행되는 정권의 탄압에 대항하는 투쟁이기도 하다. 우리는 이 싸움의 깊이를 알기 위해 명동성당 들머리에서 투쟁을 전개하고 있는 동지들을 방문하고, 그 중 한 분과 인터뷰를 진행했다. 다음은 이 투쟁을 처음부터 계속해서 전개하고 있는 서부건설노조 김호중위원장과의 인터뷰이다. ◎ 건설노동자들의 노동조건과 현황 건설일용노동자들은 현재 200만명정도로 추정된다. 정부에서 의료보험 대상자가 240만명, 고용보험 대상자가 180만명정도라고 하는데, 이렇게 보면 약 200만명정도 된다고 본다. 그중 80%인 160-170만명 정도가 일용노동자인 비정규노동자이다. 건설현장은 잘 알려져 있듯이 다단계 하도급구조이다. 우선 임금체불이 가장 많이 발생하고, 이로 인해 일용노동자들은 가장 고통을 받고 있다. 구조적인 하도급구조의 최저입찰제에서 업체들은 이윤을 확충하기 위해 인건비 착복을 다반사로 한다. 또한 일용노동자들은 다단계 하도급구조에서 고용이 어떻게 되어 있는 모르는 경우가 많은데 사용자들은 고용에 대하여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다. 따라서 고용불안은 일상적이고 실업이 항시적으로 일어난다. 또한 일용노동자들이 산업재해를 당해도 회사에서 은폐하기 일쑤고, 공상처리를 해도 십장에게 떠넘기기 일쑤고 책임을 안 지려 한다. 또한 노동시간이 일정하지 않다. 보통은 10시간 이상을 노동한다고 보면된다. ◎ 건설노조의 조직화경로와 현장사업은 어떻게 전개 건설회사는 건설현장을 개설하면 주변의 일용노동자들을 끌어당긴다. 그러면 현장활동가들은 건설현장에 가서 임금체불, 근로조건, 복지시설 등을 상담하고, 이 문제 해결에 앞장선다. 외국의 경우, 건설현장이 개설되기 이전에 교섭을 체결하는 데 반해, 한국의 경우 20-30%의 공사가 진행되었을 때 현장을 방문하여 교섭을 진행하다. 건설회사를 상대로 협약을 체결하는데 그 내용은 용역 사용을 금지하고, 노조나 노동부 시청에서 소개하는 무료취업알선센타를 통 할 것을, 근로기준법을 준수하고, 해고제한, 전임자임금, 식수, 샤워장, 화장실 등의 복지시설, 노동조합교육, 노사협의회 등을 협의한다. ◎ 건설노조의 탄압의 배경 건설현장만큼 사용자들의 비리와 부조리가 일상화되어 있는 곳도 없다. 또한 현장에서는 열악한 근로조건과 근로기준법조차 대부분 지켜지지 않는다. 하지만 건설현장이 몇 년 전부터 바뀌기 시작했다. 건설일용노동자들의 집단적 투쟁이 시작되고, 조직화되어 가고 있다. 이번 탄압은 건설현장의 일용노동자들이 바뀌는 흐름에 대한 제동의 시도이고, 일용노동자들의 조직화에 대한 두려움의 반증이다. ◎ 건설노조의 원청교섭(시공사)의 의미 한국의 건설회사는 자본력과 기술면에서 굴지(대림, 두산, 롯데, 포스코, 현대, LG, SK 등)의 원청기업과 취약한 하청기업이 공존하고 있다. 그럼에도 취약한 하청업체는 다시 하도급을 준다. 이 하도급은 다시 팀별로 일용노동자를 고용한다. 하도급을 최종에 받은 업체가 맨 마지막에 관할하지만 고용보험과 휴게실, 화장실 등 복지문제, 노조의 현장출입교육 등은 원청의 관할이기 때문에 원청과의 교섭은 피할 수 없다. 건설노조의 조사에 의하면 원청과 검찰은 현장소장이나 관리과장들에게 현장활동가들로부터 협박 압력을 받았다고 자백하라고 요구했다고 한다. ◎ 비정규노동조합의 대표적인 노동조합으로서 비정규직노조와 연대의 고리 건설현장의 일용노동자 중 60-70%가 기능공이며, 30-40%가 비기능공이다. 비기능공들은 건설현장과 타산업, 청소용역으로 이동하면서 노동을 하고 있다. 우선 내부적으로는 이들의 문제를 풀고, 조직화하면서 안?밖으로 연대를 추진해야 한다. ◎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눈물을 닦아주겠다는 노무현대통령의 공안탄압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2003년 한해 수많은 탄압을 자행하였지만, 결국 자본측은 (대)기업노조와 많은 부분 협상을 했다. 하지만 중소?비정규직노조에는 그야말로 탄압일변도였다. 일례로 안산시화공단에 있는 금창공업은 사용자들의 비리와 노조탄압에 대한 조직적 개입이 드러났음에도 현재 3명의 노동자들을 구속하고, 단호하게 대처하고 있다. 화물연대는 또 얼마만큼의 노동자들이 구속되었던가. 정책적으로 보면 대사업노조에게 비난의 말을 많이 했음에도 당근까지 섞어서 주는 꼴이고, 비정규직에 대해서는 비정규직의 대거양산과 무권리로써 자본의 입장을 철저히 보호한 한해였다고 본다. ◎ 공안탄압에 대한 향후 투쟁계획은? 첫째는 자본과 정권이 이 기회에 현장활동가들을 건설현장에서 ?아 내려고 하는데, 우리는 꾸준히 현장사업을 진행할 것이다. 두 번째로 천막투쟁 농성은 지속될 것이고, 세 번째는 건설자본을 분리해서 집중적으로 타격 할 것이며, 네 번째로는 건설(지역)노조의 과제이며 목표인 것이기도 한데 전국에 산개해 있는 노조들을 통합해서 산별노조를 추동하는 것이며, 마지막으로 탄압의 핵심인 원청업체의 사용자 책임을 기필코 밝힐 것이다. ◎ 현장활동가 활동을 개시한 노조로서 이제까지의 의미 이전까지 노조는 상담활동과 일자리 알선, 친목을 통해 일용노동자들을 주로 조직해왔다. 하지만 현재는 현장활동가들과 함께 현장내에서 발생한 문제들을 사회적으로 고발하고, 투쟁을 통해 건설일용노동자들이 조직화되고 있다. 이미 여수, 포항, 전남동부지역은 파업을 통해 지역을 마비시킨 경험을 갖고 있으며, 그러한 경향은 향후에도 계속될 것이라 본다. ◎ 천막농성을 전개하면서 느끼는 점 현장사업들을 정리하고, 새로운 현장사업을 준비하려고 했는데 늦어지고 있는 상황이다. 천막이라는 공간이 농성하기는 괜찮을지 모르나, 정리하고 작업 할 수 있는 공간은 되지 못한다. 현재는 평균 10명 이내의 노동자들이 농성에 결합하고 있다. ◎ 마지막으로 연대단체에게 하고 싶은 말 처음에는 공안탄압 분쇄에 초점을 맞춰 투쟁하고, 원청업체는 비켜가면 되는 것 아니냐는 의견도 있었다. 건설현장 내에는 (하도급)일용노동자가 원청업체를 노조의 협상대상으로 포함시키지 않으려는 경향이 존재한다. 하지만 좀 전에도 말했듯이 교섭의 대상은 원청업체라는 것이 분명하다. 이러한 관점을 올바르게 유지할 수 있도록 원청업체의 사용자 책임성 문제를 명확히 해주고, 지지연대투쟁 바란다. PSSP
담은 글 -기획: 03년 열사투쟁 평가 -초점: 이주노동자투쟁 -현장: 기아자동차, 도시철도, 노동해방학생연대 -쟁점: 비정규직 조합주의와 대공장 하청활동가의 임무 *첨부파일을 열어보세요. 읽기전용입니다. B4(타블로이드)로 편집되어 있으니 A4 출력하실 때는 80% 축소 인쇄하 시면 됩니다.
지난 2월 2일 사회진보연대 워크샵에 제출된 발제문입니다. 이날 정책워크샵은 사회진보연대 박상현 전 집행위원께서 발제를 해주셨습니다. 발제문 제목은 '사회운동 노조주의의 이론적, 역사적 배경과 의미'이고, 참고문서로 '현재의 정치상황에 관한 단상'을 제출해 주셨습니다. 참고로 당일 논의정리는 회의자료 게시판에 올려놓겠습니다.
지난 민주노총 선거는, 민주노총의 향후 3년의 향방을 결정하는 계기라는 점에서 많은 이들의 관심을 모았다. 선거는 이수호-이석행 후보조(2번 진영)의 승리로 마무리되었다. 이들의 당선은 같은 후보조로 출마한 다른 네 명의 부위원장 후보의 당선과 함께 이루어졌고, 경쟁하던 유덕상-전재환 후보조(1번 진영)의 후보는 한 명도 당선되지 않았다. 게다가 '어느 진영의 후보이냐'라는 것으로 환원할 수 없는 문제들도 있다. 기간 민주노총 내부에서 비정규직 사업을 진지하게 고민해왔고, 이후 비정규직 투쟁을 더욱 확산시킬 고민을 가지고 있었던 '비정규직 후보'들이 모두 낙선했다. 그리고 여성할당제를 통한 여성부위원장 선출 또한 여성노동자들의 조직화나 여성운동의 고민보다는 철저하게 양분된 선거구도의 영향을 받았다. 사실 당장 눈에 보이는 선거 결과만을 두고 이번 선거를 민주노총 조합원들이 투쟁보다는 협상이나 타협을 통한 자기 이해의 확보를 선택했다고 단정해버리는 것은 상당히 한계적인 평가이다. 이번 선거 결과는 신자유주의 하에서 노조운동이 처한 위기 상황을 반영하는 것이며, 더불어 그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진정한 혁신이 없다면 민주노총으로 대표되는 노동자운동의 위기는 더욱 심화될 것이라는 점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번 민주노총의 선거 결과에 대한 평가는 좀 더 깊은 숙고와 분석을 필요로 한다. 구조조정 이후, 노동자운동의 현실을 반영한 선거결과 이번 선거결과는 직접적으로는 정파간의 대립구도 속에서 철저한 조직선거로 진행된 결과로 나온 것이다. 이런 점에서 많은 사람들이 '부동표'가 어디에 쏠렸는지, 정파간의 연합이 어떠한 효과를 불러왔는지에 주목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번 선거결과는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이후, 남한 노동자운동의 현실을 반영하는 것으로 봐야한다. 구조조정 이후 전체 노동자들이 경험하고 있는 위기의식은 전반적인 노동의 불안정화에서 기인한다. 노동의 불안정화 속에서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는 비정규직은 말할 나위 없고, 정규직조차 비정규직에 대해 '상대적인' 안정감만을 가질 뿐, 실질임금의 하락, 노동강도의 강화, 고용의 불안정성 등으로 인한 위기감이 고조되고 있다. 그러나 이에 대응하는 노동자들의 투쟁이 수세적인 타협으로 마무리되는 패배의 과정을 겪으면서,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 사이에서는 "짤리기 전에 많이 벌자"는 태도가 확산되었고, 비정규직을 상대적인 고용안정을 위한 방패막이로 인식하는 경향이 늘어났다. 일부 대기업 노조의 어용화도 이런 효과 속에서 가능했던 것이지만, 이들만이 문제가 아니다. 이른바 '민주노조' 안에도 이러한 정규직 조합원들의 태도는 노사-노정 관계에 대한 노조의 행보에 분명한 영향을 주고 있다는 점에 있어서는 이번 선거에 출마한 양진영 모두가 자유롭지 못하다. 상대적으로 전투적인 입장을 밝힌 1번 진영조차도 2기 지도부 이후 3기 지도부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의 변화에 그대로 휩쓸려왔다. 1번 진영의 후보들조차 이제까지 대기업 정규직 노조에 과도하게 의존해온 상황에서 여전히 이들에 의존한 '힘있는 민주노총'이란 선언에 그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결국 민주노총 2기와 3기 지도부를 구성했던 1번 진영의 기간의 투쟁과 활동이 정규직이던 비정규직이던 전체 노동자들이 처한 위기를 극복하는 노동운동을 만들지 못했다는 점이 지적되어야 한다. 이번 선거의 결과는 이 상황에 대한 노동자들의 불만을 드러내주는 것이다. 하지만 이번 선거는 이 불만을 해소하는 방식으로 정규직 노동자들의 중심성을 택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물론 이것이 민주노총 내부에서 '과잉대표'되고 있는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의 실리적인 선택의 결과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번 선거의 과정에서 좀 더 '전투적'임을 자임하던 1번 진영조차 현재의 노동자들의 위기가 노동자 내부의 분할을 가속화시키면서 이를 통해 전반적인 노동의 불안정화를 꾀하는 신자유주의에 대한 혁신된 투쟁이 없이는 극복할 수 없다는 입장을 가지지 않았다. 선거 과정에서 그 누구도 지금의 노동자운동이 처해있는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혁신이 무엇인지를 말하지 않았으며, 그 실내용으로 노동자들을 조직하지도 않았던 것이다.(민주노총은 그간 위기 시마다 해당 지도부를 교체하는 식으로 사태를 마무리하곤 하였다. 1998년 노사정합의 때도 그러하였고, 2002년 발전총파업 철회 때도 그러하였다. 그럴 때마다 민주노조운동은 위기의 담론에 휩싸였지만, 그 위기를 근본적으로 전화할 수 있는 민주노조운동의 변혁적 이념과 사상의 재구축, 새로운 주체형성과 같은 근본적인 반성과 혁신으로 나아가지 못했던 점을 기억해야 한다.) 더구나 이번 선거결과는 2003년 하반기에 분출한 노동자들의 극렬한 투쟁이 노동자운동 전체 방향에 의미있는 영향을 주지 못했음을 보여주었다. 2003년 하반기 투쟁이, 민주노총 차원의 정세인식에 근거해서 전체노동자들의 투쟁으로 진행되었다기 보다는 '열사'를 낳은 지역과 연맹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던 상황에서 어느 정도 예견된 것이기도 했다. 민주노총은 11월9일 노동자대회 이후 이 투쟁을 전국적, 전계급적 투쟁으로 도저히 더 이상 밀고 나가지 못했다. 정권과 언론의 공세를 받자 곧 후퇴하기 시작했는데, 결국 이 투쟁은 "우리도 아직 이 정도는 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려 한 것 이상이 아니었다는 점이 드러났다. 개별 투쟁들은 모두 '적절한 선에서' 타협이 이루어졌다. 각각의 투쟁에 가시적인 소득이 있었다는 자평들이 있지만, 하반기 정세에서 계급역관계에 어떠한 영향을 주었는지는 아무도 말할 수 없는 상황에서 투쟁들은 정리되었다. 가혹한 노동탄압에 시달릴뿐더러, 대규모 노조처럼 이를 혼자 힘으로는 분쇄할 수 없는 노조, 비정규직 노조의 투쟁은 '열사'들을 낳으면서까지 전개되었으나 이들 투쟁에 연대한 단위들은 매우 제한적이었다. 민주노총의 '총파업 남발'을 비판한 2번 진영의 주장이 오히려 총파업에 결합하지 않았던 노조에 더 호소력이 있었다는 것은 예상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들은 총파업에 동참할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민주노총의 총파업 결의에 부담을 가졌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에 적합한 새로운 노동체제의 구축은 성공할 것인가? 노무현 정권은 2003년 한해동안 좌충우돌하면서도 "타협하지 않는 세력에게는 탄압뿐이다"라는 메시지를 분명히 전달해왔다. 2003년 하반기 투쟁에 있어서도 이 투쟁이 전국적인 연대투쟁으로 전개되지 않도록 '관리'하면서 같은 내용의 경고를 계속했다. 이번 민주노총 선거가 이러한 정권의 태도의 효과 아래 있었다는 것도 주목해야한다. 정권은 신자유주의에 적합한 새로운 노동체제를 구축하기 위한 노동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이들은 이제까지 신자유주의자들이 추진해왔던 노동정책을 충실히 계승하면서 새로운 국면을 열어가고 있다. 이제까지 신자유주의자들은 개별적 노동관계제도(노동시장)의 유연화를 촉진하면서 집단적 노동관계의 제도화를 완성해왔다. 노무현 정권은 집단적 노동관계에 있어서 노동운동과 정권, 노동운동과 자본, 즉 노사정 차원의 새로운 제도화라는 단계로 나가고 있다. 노무현 정권은 노사정위원회를 중심으로 노동조합 상층에 사회적 합의를 강제하는 한편 전투적인 현장 투쟁을 더욱 제어하는 방향으로 제도개선을 추진하고 있다. "노사관계 선전화방안"은 이러한 맥락에서 집단적 노동관계에 대해서도 '글로벌스탠더드'를 적용, 제도의 경직성을 줄이고 유연화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낸다. '사회적 합의'를 강제하는 명분은 '전국민적' 관심사인 실업/고용 대책에 대한 합의이다. 정부는 구조조정 이후 실리주의에 경도된 대기업 정규직 노조를 비롯한 노조운동 상층을 코포러티즘적으로 포섭하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있다. 이 과정에서 조직된 노동자운동을 순치하고, 터져나오는 불안정노동자들의 투쟁을 분쇄하면서 노동의 불안정화를 더욱 밀고 나갈 것이다. 이번 선거결과로 인해 이러한 '사회적 합의'를 만들기 위한 여러 시도가 있을 것이라 예상할 수 있다. 이수호-이석행 당선자 진영은 노사정위원회 참가를 (약간의 단서를 붙이고 있기는 하지만) 기정 사실화하고 있으며, '일자리 창출'이라는 '국민적 요구'에 노동운동도 적극적으로 기여해야한다는 입장을 밝혀왔다. 그러나 정부의 실업/고용 대책이라는 것은 노조에는 고용 증진을 위한 효과가 뚜렷하지 않은 일련의 양보를 요구하는 것일 뿐이다. 더구나 정부의 대책 자체도 노동의 불안정화를 더욱 심화시키는 방안일 것이 명확한 상황이다. 정부는 또한 실업/고용 대책이라는 '거부할 수 없는' 사안으로 노사정위에 민주노총을 포섭한 후 노사정위 차원의 합의로 "노사관계 선진화방안"에 대한 합의를 만들어낸다는 구상을 갖고 있다. 이런 점에서 굳이 코포러티즘 반대의 입장까지도 갖지 않아도 실업/고용 대책을 매개로 한 노사정위 참가가 가지는 한계를 지적하기는 어려운 일이 아니다. 정부의 구상은 민주노총을 중심으로 하는 노동자운동의 주류는 새로운 차원에서 제도화되는 과정에서 노동자 대중에 대한 정부의 사회적 관리망의 일부로 포섭하는 것이다. 그러나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 속에서 국내 생산기지의 해외이전, 노동의 불안정화 증가로 인한 노동자들의 삶의 위기를 이러한 제도화로 계속 억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민주노총을 중심으로 하는 기존의 노동자 운동을 이러한 관리에 포섭하려는 노력은 쉽게 성공할 수 없다. 노동자운동이 내부의 분열과 분할을 심화하고 민주노총의 대표성의 위기를 심화시키는 이러한 포섭을 거부하고, 억압 불가능한 삶의 위기를 해결하기 위한 자주적인 투쟁을 만들 수 있느냐가 관권이다. 노동자운동의 사회운동적 개조와 새로운 노동자운동 주체형성으로 매진하자! 이번 선거결과는 남한노동자운동의 현실에 대해 발본적인 반성을 할 계기를 만들어주고 있다. 경제위기와 구조조정을 겪으면서 남한노동자운동의 주력을 형성해왔던 대기업 정규직 노동조합과 조합원들 사이에 퍼지던 실리주의를 극복하지 못하고 오히려 이에 영합해온 결과는 타협주의의 확산으로 드러나고 있다. 구조조정 이후 노동자운동의 대응이 현재의 결과에 이르게된 과정에 대한 평가를 통해서 두 가지 방향에서 노동자운동의 새로운 시작을 위한 투쟁을 전개해야한다. 우선 여전히 민주노총을 중심으로 하는 기존의 노동자운동을 혁신하기 위한 방향을 도출해야한다. 또한 새로운 노동자운동의 주체를 형성하기 위한 투쟁을 시작해야한다. 구조조정 이후 현장에 만연한 실리주의를 극복하는 것이 다시 중요한 과제다. 대기업 정규직을 중심으로 한 노동자운동의 제도화를 통해 노조운동이 국가에 포섭되는 것에 대한 적극적인 반경향을 창출할 필요가 있다. 민주노총은 개별 노조의 실리주의에 영합하거나 이의 확대판인 정권의 합의주의에 포섭되는 것이 아니라 계급적 원칙을 견지한 가운데 노동자운동을 개조할 수 있는 투쟁을 만들어가야 한다. '상반기 임단협과 시기집중 파업 - 하반기 제도개혁 투쟁'이라는 고착화된 싸이클을 극복하는 문제는 그 출발점이다. 이는 단순히 싸이클을 바꾸는 문제를 넘어서는 것이다. 이는 노동자운동이 노동의 권리를 자신들만의 갇힌 권리가 아닌, 신자유주의가 야기하는 빈곤, 실업, 배제의 문제와 연관된 보편적인 권리로 쟁취할 수 있는 투쟁의 요구와 방식을 해명하고, 받아안아야 한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과정은 노동자운동에 새로운 주체형성과 동시에 진행되어야 한다. 우리는 이미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의 효과로서 노동자 대중의 불안정화에 주목하고 여성/이주/중소영세비정규 노동자등 불안정노동자들이 새로운 주체로 형성되고 있음을 강조해왔다. 민주노총 선거를 거치면서 이러한 불안정노동자 운동이 가지는 정세적인 중요성은 더욱 커지고 있다. 특히, 올해도 작년에 이어 수많은 투쟁사안이 우리의 눈앞에 놓여져 있다. 올해 말로 협상시효가 다가오는 WTO 개방화반대투쟁, 경제특구지역 설치로 인한 노동권 생활권 파괴, 노사간계선진화방안이란 탈을 쓰고 나타난 노사관계로드맵과 비정규보호방안 등의 노동법개악저지투쟁, 카드사 유동성위기와 제조업 생산기지 해외이전과 매각, 철도 등 공공부문도 대규모의 비정규직 도입과 외주화를 발표하고 있어, 그 어느 한해보다도 강도높은 구조조정 저지투쟁이 진행될 예정이다. 하지만 이미 구조조정 대응과정에서 계속해서 패배해온 남한 노동자운동이 향후 합의주의와 제조업공동화 등의 자본과 정권의 공세에 밀려 더욱더 고용과 임금문제 등에 방어적인 투쟁의 위치에 몰릴 것임이 자명하다. 이미 은행과 제조업 일부에서는 노조의 동의 하에 임금피크제가 시행되고 있어 노동자운동에서 노동유연화를 기업별로 수용하는 곳도 여러 곳 된다. 이렇게 고립분산적으로 투쟁을 전개하고, 방어적인 투쟁을 전개한다면 노동자운동은 혁신은 커녕, 그 기회마저 잃어버려 계속적인 패배를 맞이하던가 정권과 자본에 관리되는 노동자운동이 진행될 것이다. 따라서 현 단계 노동자투쟁의 방향은 노동자운동의 고립분산성을 극복하면서도 노동자운동의 사상이념의 혁신과 노동자운동의 새로운 주체를 발굴하여 노동자운동이 새로운 변혁적 토양을 일굴 수 있는 출발점에 다시 서야 한다. 올해 투쟁은 이 과정에 위치 지워져야 한다. 구조적 경제위기 시에 노동자운동이 방어적 투쟁과 실리적 태도를 일관한다면 일반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교훈을 되새겨야 한다. 이것은 금융세계화로 인한 세계적 경향임과 동시에 외환위기 이후 겪어온 남한 노동자운동의 계속적인 실패에서도 일맥상통한다. 따라서 현재 투쟁의 승패의 갈림길은 준비된 파업을 했느냐, 그렇지 않느냐가 아니라 정세를 명확히 인식하고 변혁적 전망을 갖는 노동자운동으로 재출발하느냐에 따라 달려있음을 인식해야 한다.
사회운동의 이념을 개조하자! '참여정부'의 악순환 노무현 정권이 '서로 다른 집단들을 모두 기쁘게 하겠다'는 약속의 핵심에는 '참여정부'라는 구호가 있었다. 즉 정부가 나서서 정책을 완성하고 집행하기보다는 각 사안에 대해 이해당사자들이 정부의 공식·비공식 기관에 참여해 문제를 해결해 나가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각 이해 당사자들이 적극적인 대화와 타협의 자세로 임해야 하며, 정부는 공정하게 적절한 가이드라인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는 논리다. 그리고 이런 방식으로 결정된 정책이야말로 힘을 갖고 추진될 수 있다는 말이다. 이처럼 노무현 정권이 내건 참여정부는 '민간'의 참여를 장려하는 민주적인 외양을 띠었다. 게다가 노무현 캠프에 '386세대', 운동권 인사가 가담하면서, 이러한 방식은 실제로 작동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낳았다. 그러나 그 본질은 오히려 행정관료나 미디어가 선호하는 갈등조정의 방식일 뿐이거나, 문제의 책임을 정부의 밖으로 돌리는 데 있었다. 정부는 그 자체로는 아무런 내용도 없는 '참여'를 주장하면서 각각의 사안에 관해 개혁법안이나 '사회적 협약'을 추구한다. 하지만 행정관료나 미디어가 선호하는 대화와 타협은 사실 절충적인 미봉책에 머물고 만다. 따라서 모두를 기쁘게 하기는커녕 아무도 만족시킬 수 없는 결론에 도달하곤 한다. 오히려 종종 갈등을 더 증폭시키거나, 서로가 서로의 발목을 잡아 문제 해결이 고착되는 효과를 낳을 뿐이다. 마지막에는 정부가 이해당사자의 '집단 이기주의'를 운운하며, 그 책임을 정부 밖으로 전가하게 된다. 결국 악순환이 성립된다. 특히 노동자에게 그 참여의 경계는 명확하다 (이미 노무현 대통령은 인수위 시절부터 노동운동 지도자들과의 자리에서 '안되는 것은 안되는 것이다'라고 분명히 못을 박았다.). 더군다나 광범위한 실업-반실업, 빈곤 대중은 '참여'의 대상에서 사라지는 경향이 있다 (곧 '시민'에서 배제되는 경향이 있다). 정부가 포괄하려는 참여의 범위는 다양한 직업적 집단이나 NGO, 전문가 집단이다. NGO가 불안정한 노동자 대중을 대체하여, 이들 집단의 '관리의 주체'로 승인된다. 신자유주의 경제개혁의 정치적 모순 물론 정부 정책의 기본 방향은 존재한다. 하지만 한국정부의 고유한 정책 방향이란 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오늘날 한국사회의 개혁방향은 이미 '글로벌 스탠다드'라는 이름으로 이미 주어진 것으로 간주된다. 이미 다양한 초민족적 국제기구들은 각종 경제·사회 정책을 고안하는데 온 힘을 기울이고 있다. 국제화폐기금(IMF), 세계은행,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등의 국제기구는 정부재정, 금융 정책을 비롯해 거시·미시 경제정책, 노동, 교육, 여성, 사회복지, 인구 노령화 등 다루는 사회이슈를 끊임없이 확대해 나가며 정책연구 보고서들을 쏟아내고 있다. 이러한 기구들이 제시하는 정책들이 신자유주의 개혁의 각론들을 구성한다. 물론 이러한 정책의 궁극적인 목표는 자본투자에 안정적이며 우호적인 방향으로 사회를 개조해 나간다는 것이다. 특히 노무현 정부는 한국 사회의 '성장 잠재력의 고갈'을 내세우며 신자유주의 개혁을 거스를 수 없는 대세로 추진하고 있다. 새로운 성장동력을 구축하기 위해서는 선택과 집중이 필요하며, 기업집단간, 개인간 경쟁을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당연히 각종 사회적 위기의 지표들이 출현하고 있다 - 실업의 만연('고용없는 성장'), 가계대출과 개인신용불량자 급증, 출산율 저하, 중소기업 붕괴, 농업 해체, 이민열풍과 두뇌유출 등등. 물론 몇몇 특화된 산업과 기업이 선두를 달리며 초민족 기업으로 자태 변환을 시도하고 일부의 엘리트집단이 세계화된 생활양식을 영유한다. 그러나 대다수의 인민은 하향 평준화되거나 사회불안을 제거하기 위한 '관리'의 대상이 된다. (금융)투자에 우호적인 환경을 창출하라는 신자유주의 경제개혁의 지상명령와 노동권-시민권의 보편적 요구는 근본 모순을 낳는다. 개혁과 정치의 슬림화 하지만 신자유주의 개혁이 동반하는 정치개혁은 근본적 모순을 비켜 간다. 그 목적은 오히려 단순하다. 행정의 효율성을 높이고 정치 비용을 경량화하자는 것이다. 결국은 정치 자체를 행정적 관리로 대체하고 슬림화하자는 것이다. 신자유주의 개혁은 어느 때 못지 않게 강한 '리더쉽'을 요구한다. 하지만 정당과 의회의 역할은 계속 축소된다. 정당들이 전통적인 정치 이념과 지지 기반에 따라 정책을 결정하고 입법활동을 펼친다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것으로 간주된다. 이미 다방면에 걸친 개혁안은 '글로벌 스탠다드'로 주어진 것이다. 실질적인 정책결정의 장소는 행정부고, 행정부는 수완을 부려서 해결사의 노릇을 해야한다. 정당성의 위기, 대중들의 불안과 불만, 사회운동들의 저항을 헤쳐나가기 위해 정부의 권력은 증대된다. 따라서 신자유주의 개혁은 결코 '강한' 정부를 포기하지 않는다 (DJ정권이나 노무현 정권은 '작지만 강한 정부'라는 구호를 항상 주장했다). 물론 과거 군사독재의 폭압적인 동원 체제를 대체할 방법을 찾는데, 문제는 효율적인 위기관리, 갈등조정 체제다. 이에 따라 정당의 역할도 변형된다. 정당에 소속된 정치인들은 마치 학계나 NGO의 전문가들처럼 정책적 전문성을 갖추어 그러한 흐름에 부합하는 게 가장 우수한 활동인 것처럼 평가된다 (NGO가 정치인을 욕할 때 가장 먼저 나오는 말은 '무식하다'는 것이다). 이미 정당들은 스스로 '국민정당'이나 '무지개정당'으로 탈바꿈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어떤 이념보다는 사회갈등을 행정적인 방식으로 조정하는 데 자기 역할을 찾아야 한다는 말이다. 따라서 정치개혁의 중요한 목적은 정당과 의회의 역할을 재조정하는데 있다. 또한 정치자금의 투명화와 그 결과로 정치비용의 경량화도 중요한 요구다 (최근 전경련의 행보에서 볼 수 있듯이 대자본의 요구이기도 하다). 개인적 부패스캔들에 휘말린 정치인이 공정한 조정자의 역할을 자임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덧붙여 한국에서 정치개혁의 주요 이슈에는 각 정당들의 '당략'적인 목적이 담긴 내용들도 포함되어 있다. 보통 '지역구도 타파'로 선전이 되는 간선제 국회의원의 확대, 선거구 재조정 등은 한나라당의 의석 비율을 잠식하여 정당들의 세력관계를 바꾸자는 것이다. 이는 정치개혁의 성패가 달린 문제인 것처럼 선전되지만, 최종적인 목적지가 다른 것은 아니다. 다만 정치계급 또는 지배엘리트들에게는 지분이 걸린 생사의 문제다. 오늘날 한국사회의 미디어들은 효율적인 행정의 중요성과 무능부패한 국회의 문제를 대비시키며, 거듭하여 대립을 인위적으로 조장하고 있다. 행정부는 대통령의 지도력을 인정하고 그것을 충실히 따라야 한다 (이견을 제시하는 것은 공무원의 할 일이 아니다), 국회에서의 논란은 대부분 불필요한 것이고 개혁에 힘을 실어주어야 한다 - 이것이 미디어의 요구다. 참여정부와 코포라티즘 '참여정부'의 이데올로기가 사회운동에 끼치는 심각한 효과는 '참여'라는 허구적인 쟁점을 놓고 대중운동들을 분할한다는 점이다. '참여'는 사실 대중운동에게 매우 부분적인 타협의 가능성을 흘려주지만, 그 악순환의 끝은 부분적인 포섭과 배제다. '참여정부'의 이데올로기가 사회운동에 끼치는 효과는 결코 무시할 수 없다. 정부가 특정한 분야나 사안별로 '참여'의 경로를 제공함으로써 사회운동은 실제로 '참여냐 비타협적 투쟁이냐'고 하는 의도된 쟁점에 휘말리게 된다. 또는 각자 자기의 몫을 챙기기 위해 공식적, 비공식적 경로로 대화에 참여하거나 정부의 개혁안 수립에 참여하게 된다 (오히려 '빠지면 나만 손해다'라는 생각을 불러일으킨다). 그 결과로 사회운동의 활동은 공통의 연대를 추구하기보다는 각 부문이나 분야별로 분산된다. 그리고 주요한 활동이 정부와 '정부개혁안'을 수립하는 데 참여하거나 여러 형태의 '사회적 협약'을 맺는 데 주력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활동이 애초 목표를 이루지 못할 경우, 최후의 수단으로 국회통과를 저지하거나 또는 관철시키기 위한 활동에 돌입하게 된다 (개별 국회의원에 대한 로비 활동을 벌이고, 이 때 특히 총선에서 당선 또는 낙천·낙선운동을 무기로 삼게 된다). 사실 이미 이러한 방식의 활동이 사회운동에서 대체로 정형화되고 있다. 이러한 방식의 운동은 효율성과 편의성이라고 하는 '덕목'을 내세우고 있다. 가시적인 성과를 따낼 수 있다는 기대, 단일 이슈에 집중성을 발휘할 수 있다는 효율성, 그래서 직접적으로 상관이 없어 보이는 문제에 대한 무관심의 정당화, 코포라티즘적인 동원에서의 편의성 등등. 이는 많은 운동단체들에게 큰 유혹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패턴의 활동은 종종 운동 주체화 과정이 제거된 협상과 동원 체계로 전환된다.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구속력을 갖는 협상을 원하게 되고 따라서 제도화를 추구하게 된다. 또한 협상이 성사될 경우에는 그것을 사회운동 내부에서 관철시켜야 한다. 오히려 정부의 어려움을 먼저 헤아려야 하고, 그것을 대중에게 설득해야 한다? 이는 사회운동이 '국가의 이데올로기적 장치'로 흡수되는 경로다. 문제는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특정 부문이나 분야를 이슈로 하는 운동은 사회운동의 주체를 형성하는데 근본적 난점을 갖는다. 물론 특정 분야 개혁에서 미디어의 여론 조사 결과는 그것을 추진하는 세력에게 우호적으로 나타날 수 있다. 그러나 어떤 단일한 이슈, 협소한 쟁점이 개인들을 일시적인 관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어도 장기적인 운동 주체화의 과정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단일 이슈 운동은 끊임없이 새로운 이슈, 정책아이템을 찾아 부유한다. 사회의 해체와 이데올로기적 국가기구의 위기 그러나 이것이 운동 방식의 문제만은 아니다. 광범위한 실업-반실업, 빈곤 대중은 '참여'의 대상에서 사라지는 경향이 중대한 문제다. 신자유주의 개혁은 기존의 국가장치가 과거와 동일한 방식으로 작동될 수 없는 조건이다. 정당과 노동조합과 같은 기관들만이 문제가 아니다. 가족의 해체, 학교의 붕괴와 같은 이데올로기적 국가기구의 위기는 노동의 불안정화와 중첩되는 현상이다. 이는 신자유주의 개혁의 참여세력에서 배제된 집단들에게는 삶의 고통을 극단적으로 증폭시키는 직격탄이다 (해고나 카드 빚이 자살의 직접적인 이유인가? 그에 따른 가족의 파탄, 기존 공동체로부터 배제된다는 공포가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간다). 사회적 노동과 정치에 대한 참여가 전제되지 않은 교육은 존재할 수 없다. 그러나 노동과 연계된 교육의 위계화와 실업의 공포는 교육을 붕괴시킨다. 또한 빈곤의 여성화는 중산층 핵가족 모델을 해체하는 하나의 중요한 계기다. 이러한 현상은 기존의 생활양식을 파괴하고, 사회로부터의 배제라는 개인들의 극단적인 불안을 형성한다. 이러한 문제는 대중들의 일상적인 삶에서는 가장 중요한 문제이지만, 종종 개인들의 '사적'인 문제처럼 여겨진다. 신자유주의 정부의 사회정책은 파편적인 미봉책을 제시할 뿐이다. 사회운동은 이를 뚜렷한 정치 쟁점으로 전환하지 못하지만, 기존의 방식으로도 그 괴리를 따라 잡지 못한다 ('최대한의 임금상승'과 '고용안정'으로 가족과 학교를 매개로 하는 기존의 생활양식을 유지하는 게 가장 간편한 해결책으로 인식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 해결책이 적용 가능한 범위는 단지 일부일 뿐이다). 또는 종종 정부와 유사한 방식으로 부분적인 정책공약으로 이를 대체하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들은 실로 기존 공동체의 붕괴를 의미하므로 고통을 완화시키려는 몇 가지 대증요법으로 해결할 수 없다. 사회운동이 기존 제도들의 붕괴로 인해 현재 대중들이 겪고 있는 직접적인 고통들에 대해 적합하게 대응하지 못하는 것은 과연 어디서부터 운동을 출발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 적합하게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 그것은 사태의 원인이 무엇인가 적합하게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사회운동의 이념을 개조하자! 이 즈음하여 우리가 '사회운동 노조주의'를 토론하게 된 맥락을 다시 한번 짚어볼 필요가 있다. 사회운동 노조주의는 1990년대 말 IMF 경제개혁과 민주노총 위기논쟁이 불거졌을 때 우리의 화두였다. 이는 새로운 국면에서 사회운동의 공통의 과제를 '노동자운동의 새로운 주체형성'(계급형성적 노동운동)으로 설정하자는 제안이었다. 특히 노동자대중 내부의 광범위한 실업-반실업-빈곤 대중 문제, 노동자운동 내의 성차별주의와 인종주의 문제를 자율적인 노동자운동을 통해 극복해나가야 한다는 것과 노동자운동의 전망이 평의회에 대한 지향(코포라티즘이 아닌 노동자통제)으로 전환되어야 한다는 것이 문제였다. 특히 빈곤, 성, 인종의 문제는 필연코 공동체의 문제를 낳는 것이었다 (새로운 공동체의 형성). 따라서 사회운동 노조주의는 무엇보다 노동자운동의 이념을 어떻게 개조할 것인가의 문제인 것이다. 현재 노동조합의 많은 활동가들이 어려움을 호소하는 것은 이러한 이념적 지향과 관성화된 사업 패턴 사이의 괴리를 어떻게 풀어나갈 수 있을 것인가에 있을 것이다 (오히려 새로운 운동방식을 개척하지 못함으로 인해, 대중들이 기존의 '안전한' 방식을 요구하고 있는가?) 노동조합의 활동이 '상반기 임단협과 시기집중 파업-하반기 사회개혁투쟁'으로 고착화되고, 민주노총의 활동가들이 '사실 남아 있는 우리의 무기는 시기집중 파업이 유일할 뿐'이라고 자조하고 있다. 또한 대부분의 활동가들이 '지도부 교체로 바뀔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말하고 있으며, 이는 분명한 사실이다. 물론 당장 어떤 활동으로도 상황이 크게 변화하지 않을 것이라고 인식하는 것은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러한 조건을 인식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출발점은 없을 것이다. 노무현정권의 '억압의 관용' 우리는 지난해 노무현 대통령의 재신임 선언이 오히려 정부의 권위주의적 성격을 강화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재신임 선언은 이미 실패한 정권의 '국민협박극'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었다. '이래도 자신을 지지하지 않는다면 국가를 위기에 빠뜨리겠다'는 정말로 거대한 협박. 이는 대통령의 강력한 지도력을 승인하라는 위협이었다. 그러나 사회운동이 코포라티즘적인 지향과 활동 방식을 체화한다면 대통령의 강력한 리더쉽은 달가운 일이 된다. 그가 사회운동의 특정한 부위의 '후견인' 역할을 자인하는 한에서. 오히려 억압이 일상화된다면 '관용'은 보호자가 베푸는 큰 혜택이 된다 (그야말로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이다). 노무현 정부의 '참여정부'와 '억압의 관용'은 사실 백지 한 장 차이다. 참여정부의 논리가 대중운동의 동원과 무력화를 동시에 수반하기 때문이다. 노무현 정부가 구조적 위기에 직면해 있는 한, 억압의 관용은 그들의 가장 매력적인 수단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