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주년 세계 노동절에 부쳐 "2-3년 안에 중국노동자들의 커다란 투쟁이 없다면[중국노동자들의 임금수준이 여전히 낮게 유지된다면], 우리는 다 죽습니다." 어느 엘리베이터 생산업체 노조간부의 말이다. 엘리베이터 생산이 국내외주에 그치지 않고 중국에서의 외주로까지 확대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업체가 중국에서 고용하고 있는 노동자 수가 70만인가 90만인가 하는데, 이 숫자면 한국 실업자 수와 비슷하잖아! 이런 업체가 중국으로 가지 않고 여기에 투자했다면 우리나라 실업문제는 다 해결이 되는 거 아냐? 지금 투자 부진 투자 부진 하는데 그것은 다 노조 투쟁 때문이야! 아, 임금인상 문제도 아니고 이라크 파병 때문에 파업을 할 정도인데 누가 국내에 투자를 하겠어!" 짐짓 노동자들을 염려하는 듯한 어느 중소기업 사장의 노조비판론이다. 우리 모두 알다시피 지금은 자본의 세계화 시대요,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 시대요, 무장한 세계화 시대다. 앞의 노조간부와 중소기업 사장의 발언은 그 일단을 보여주고 있다. 70년대 이후 과잉축적 이윤율 저하로 구조적 위기에 빠진 중심부 자본주의는 노동, 여성, 소농, 환경, 개도국에 대한 착취 강화를 통해 위기를 벗어나려 하였다. 대량 해고와 불안정 노동, 사회복지 축소 등 노동에 대한 공격이 진행되었으며 소농에 대한 보호는 철회되었다. 또한 환경, 생태는 갈수록 파괴되었으며 개도국에서 외환/외채 위기와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은 지속되었고 발전의 권리는 부정되었다. 무역의 자유화와 초민족적 (금융)자본(Transnational Capital; TNC)의 자유로운 투자/투기를 위해 각국의 모든 무역과 투자 장벽이 철거되었다. 다자간, 지역간, 양자간 투자협정·자유무역협정이 체결되었다. 그래서 세계 무역의 3분의 2 가량은 TNC 내부에서 이루어지고 있고, 하루에도 수조달러의 돈이 세계 각국의 외환시장 주식시장을 광속으로 넘나들면서 투자/투기를 진행하고 있다. 이런 세계적인 착취강화와 구조적 위기의 시대에 생존과 발전으로부터 배제된 지역에서의 단말마적 저항을 진압하기 위해, 즉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통치성을 위해 미국은 군사력과 침략전쟁까지 동원하고 있다('무장한 세계화'). 미국을 비롯한 중심부 국가, 세계무역기구(WTO), 국제화폐기금(IMF), 세계은행(WORLD BANK), 반주변-주변의 종속적인 정부들 일체가 신자유주의 집행자가 되고 있다. 레이건과 대처 같은 보수주의자들이 사회복지와 노조를 공격하였고, 클린턴과 블레어 같은 자유주의자들이 신자유주의로 개종하였다('워싱턴 컨센서스'). 심지어는 서유럽의 공산당들마저도 신자유주의로의 개종과 해체의 길을 걸었다. 유일신 신자유주의 이외에 "대안은 없다!" 그래서 유일사상인 신자유주의는 세계 자본주의의 위기를 극복하였는가? 언뜻 보면 그런 것 같기도 하다. 80년대 초반에 최저점에 다다른 미국과 유럽 주요 국가들 자본의 이윤율은 점차 회복되었다. 특별히 미국은 90년대 장기호황을 구가하였으니까. 그러나 이러한 이윤율의 일정한 회복(60년대 중반의 2/3 수준)과 성장은 새로운 축적체제 성립으로 인한 자본의 생산성 증대에서 온 것이라기보다는 앞에서 이야기한 (여성)노동, 소농, 환경, 개도국에 대한 착취 강화를 통해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전 세계 (여성)노동자들은 대량 해고와 불안정 노동, 사회복지 축소에 시달려야 했고, 소농은 붕괴하였고, 환경 생태 재앙은 일반화되었다. 80년대에 남미에서 시작되었던 개도국의 외환/외채 위기는 97년에는 급기야 세계경제의 모범생(?)이었던 아시아 개도국에까지 확산되었다. 게다가 80년대 초반 이후 점차 상승하던 이윤율도 97년을 기점으로 꺾이기 시작했고 미국의 장기호황도 2001년 불황으로 주춤거리고 있다. 2001년 불황이후 새로운 성장 센터로 기능하던 중국도 과잉축적의 징후가 뚜렷이 나타나고 있다. 70년대 이후 세계경제의 구조적 위기 아래서 시작된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는 경제위기를 근본적으로 극복했다기보다는 (여성)노동, 환경, 개도국에 대한 공격을 통해 일부 중심부 자본의 이윤율 회복과 미국경제의 성장을 가져왔지만, 지금에 와서는 그것마저 흔들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세계경제가 지금 당장 급전직하할 것이라고 예단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효험이 애초부터 그다지 없었고, 노동자와 반주변-주변부에게는 고통만을 안겨준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 처방을 우리가 감수할 이유는 전혀 없는 것이다. 당연히 전쟁과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대한 반대운동이 전 세계적으로 태동하고 있다. 각국에서, 특별히 개도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반대운동이 있고, 세계적인 차원에서는 새로운 인터내셔널 세계사회포럼으로 상징되고 있는 '대안세계화'운동[반세계화 또는 아래로부터의 세계화 운동]이 있다. 작년 미국 영국에 의한 이라크 침략 전쟁 전에는 세계사회포럼의 호소로 전 세계 주요도시에서 천 만명 이상이 참가하는 반전시위가 조직되기도 하였다. 그런데 우리들의 이러한 저항에도 불구하고 저들의 물리적 이데올로기적 힘은 막강해서 난공불락처럼 보인다. 그러나 꼭 그렇게 볼 일도 아니다. 달리 보면 전쟁과 신자유주의 세계화는 저들의 위기를 표현하는 것이기도 하다. 무력전쟁을 동원하지 않고서는, 광속으로 움직이면서 세계적으로 금융투기를 하고 거품을 만들어내지 않고서는, 인도나 중국의 저임 노동력을 착취하지 않고서는, 개도국의 외환/외채위기를 착취하지 않고서는 생존이 어려울 정도로 저들의 체제가 위기에 처해 있다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단결해서 전쟁반대와 노동자, 소농, 여성, 환경, 개도국의 최소한의 권리쟁취를 관철시킨다면, 무소불위의 힘을 행사하고 있는 듯이 보이는 저들의 체제도 이내 종말을 고할 것이다. 소농의 권리를 주장한 불과 5000여명의 비아 캄페시나('농민의 길')회원들 중심의 시위로 좌초한 멕시코 칸쿤에서 열린 세계무역기구 회의가 좋은 예가 될 수 있겠다. 한편 노동절을 맞이하는 한국의 노동자들은 민주노동당의 4.15 총선에서의 일정한 선전으로 승리감을 맛보고 있다. 허나, 또 한편으로는 80년대 노동자 민중운동의 성과가 민주노동당의 의회주의나 선거주의로의 일로매진으로 거대한 실패로 귀결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일말의 불안감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관건은 노동자 대중운동인데, 노동자 대중운동이 건강하게 발전한다면 민주노동당이나 새로 당선된 국회의원들도 이러한 노동자 대중운동의 통제로부터 벗어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현재 한국의 노동자 대중운동의 과제는 세계적인 흐름과 정확히 일치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곧 앞에서 이야기한대로 전쟁반대와 신자유주의 세계화 반대 이외의 것일 수 없다. 그리고 심각한 구조적 위기에 처한 자본주의는 앞으로도 전쟁과 신자유주의 세계화 이외의 모습을 띌 수는 없을 것이라는 점에서 이 운동은 자본주의 극복운동의 시작이 될 것이다(전쟁과 신자유주의 세계화 반대와 '자본주의 체제 인정'(민주노총 이수호 위원장)과는 그런 점에서 양립할 수 없는 입장이라 하겠다). 그래서 우리가 구체적으로 해야 할 일은 올 6월에 노무현 정권의 이라크 추가파병을 막아내는 것이고,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동전의 이면인 저임금·무노조·무권리 상태에서 국가와 자본의 물리적 이데올로기적 폭력 앞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는 비정규 불안정 (여성)노동자, 이주노동자들, 저임금 하청노동자들의 투쟁들인 최저임금 77만원 쟁취투쟁, 노동비자 쟁취투쟁, 원하청 공동임투와 노조결성투쟁을 함께 진행해 노동자 내부의 분할을 극복해 내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투쟁에 기초해 국제연대를 이룩하는 것이다. 이런 투쟁에서 비껴선 노동자 운동, 그것이 아무리 스펙타클한 외양을 취한다 할지라도 자신들만의 '울타리' 안에서만 진행되면서 노동자 내부의 분할을 확대재생산하는 대사업장 '민주노조'의 투쟁과 국회 안에서 청원운동의 대리인 역할에 그치는 대중적 지도자의 활동 등은 모두 가짜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자본의 세계화시대에 노동자계급의 전쟁과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대한 전국적 세계적 반대투쟁을 조직하자!
민주노동당이 국회에 진출했다. 민주노동당을 좋아하던 사람들은 물론이거니와 평소에 비판을 많이 했던 사람들조차도 격세지감을 느끼는 건 매한가지인 것 같다. 여기저기서, '혁명'을 위해서든 아니면 그냥 '복지사회'를 위해서든 혹은 다른 시민운동적 과제의 실현을 위해서든 어쨌거나 민주노동당과 함께 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이와 더불어 늘어나는 건, 투쟁 중인 노동조합에서 '국회의원이 왔으면 좋겠다'는 요구와, 먹고살기 힘든 노동자인데 노조도 없는 상황이라 당이 와서 문제를 해결했으면 좋겠다는 요구, 그리고 순전히 '개인적인' 문제를 당이 나서서 해결해달라는 무대뽀 스타일의 민원성 요구들이다. 이런 요구들을 접하면 중앙당 활동가들은 굉장히 곤혹스러워진다. 순전히 개인적인 문제를 해결해 달라는 사람들을, 그렇다고 모른 체 하고 전화를 끊을 순 없기 때문에 "네, 네.."하면서 그냥 열심히 전화를 받을 뿐이다. 이런 전화가 하루에도 수백 통은 족히 오는 것 같고, 중앙당 활동가들은 거의 모든 사람이 '민원 상담'에 매달리고 있다. 가끔은 자기 이야기를 잔뜩 적은 문서를 가지고 와서 '면담'을 요청하는 경우가 있는데, 당에 '민원실'이 없기 때문에 천상 처음 눈이 마주친 사람이 상담원 역할을 할 수밖에 없다. 찍힌 사람은 30분이고 1시간이고, 대부분은 같은 얘기를 서너 차례 씩 하는 민원인들 앞에서 그 얘기를 다 듣고 앉아 있어야 한다. 먹고살기 진짜 팍팍한데 노동조합도 없고 당이 좀 나서줬으면 좋겠다는 사람들의 경우는 그냥 안타깝기만 하다. 전화해서 회사 욕 실컷 하고는 자기 회사가 어딘지는 말하지 못하겠다는 사람들이 대다수다. 전화한 것 알면 잘릴 게 두려워서란다. 그래 놓고는 또 당이 나서달라고 부탁한다. 이렇게 되면 결국, 당이 할 수 있는 거라곤 법제도를 고치거나, 법에 나와 있는 걸 안 지키는 사업장을 전국적으로 몽땅 조사해서 처벌받도록 조치하겠다는 수준의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는데, 그러면 또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리지 않겠냐는 불만을 하곤 한다. 처음에는, 직접 노동조합을 만들고 노동자들이 노조와 함께 단결해서 '투쟁'을 통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이야기도 몇 번했지만, 사람들은 그 이야기를 '당은 못 하겠으니 너희들이 알아서 하라'는 말로 듣는다. 이래저래 참 어려운 일인데, 이런 건 뭐 어차피 활동가가 감당해야 하는 거라 불만은 없다. 이런 것보다 제일 걱정이 되는 것은 투쟁 중인 노동조합에서 국회의원이 왔으면 좋겠다고 요구하는 것이다. 하루에도 몇 군데에서 그런 요청이 들어온다. 특히 오랫동안 투쟁했으면서도 해결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 곳의 경우 국회의원이 한번 와주고, 또 사측과 면담도 한번 하면 문제가 금방 풀리지 않겠느냐는 기대가 많다. 근데 이게 참 난처하다. 우선은 몇 명 안 되는 국회의원들의 일정이 정말 눈 코 뜰 새 없이 빡빡하다는 점이 문제다. 한 일주일 정도 일정은 하루에 30분 단위로 약속이 이미 잡혀 있는 식인데, 마음 급한 노조야 하루 이틀 전에 연락하는 게 보통이고 이러다 보니 당활동가들은 본의 아니게 "안되겠는데요", "조금만 더 일찍 연락하셨어도...", "다른 일정이 있어서.."등의 말을 하게 된다. "국회의원 생기니까 뻣뻣해졌다"는 소리 듣기 딱 좋은 분위기인 것이다. 실제로 국회의원이 가서 사측 면담 한번 하면 문제가 풀리는 곳도 있긴 할테다. 그런데, 걱정되는 건 현안이 해결되느냐 마느냐가 아니라, 국회의원 몇 명 생겼다고 갑자기 바뀌는 사람들의 태도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 사람들의 태도가 문제라기 보다는, 이런 일이 벌어질지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는데도 아무 준비도 하지 못했었던 우리의 태도가 문제다. 그리고 정말 걱정되는 건 이런 상황이 점점 커지면 민중운동 전체에 안 좋은 영향을 미칠 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노동자들이 주체가 되어 열심히 투쟁하고 당은 '연대 투쟁'을 하는 것이다. 당 활동이 대중운동의 발전에 긍정적으로 기여해야 하는 것이고, 그렇게 해서 발전한 대중운동이 당에게 좋은 영향을 주는 그런 식이어야 한다. 이 원칙은 선거전이나 후나 달라질 게 없다. 연대 투쟁의 방식이나 내용이 국회의원이 생긴 상황에서 좀 변할 수는 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함께 싸워야 할 동지가 느닷없이 민원을 요청하는 민원인이 되고, 연대투쟁 해야 하는 당이 갑자기 대민 업무나 보는 꼴이 되어서는 안될 말이다. 안 그래도, 국회의원 배출 이후 의원 세비다, 국고보조금이다, 늘어난 당원들로부터 들어오는 당비다 해서 수입이 대폭 늘어나고 정책보좌관을 100명 가까이 뽑으면서 인력도 당으로 집중되는 상황인데, 이것이 노동운동 혹은 노동자들이 스스로 나서서 투쟁하는 것을 약화시키는 쪽으로 영향을 미쳐서는 절대 안될 일이다. 국회의원이 나왔다고 해서 한국 노동운동이 그 간의 문제를 모두 극복하고 새롭게 성장할 수 있게 되었다고 장담할 수 없는 노릇일 뿐만 아니라 까딱 잘못하면 당의 성장이 노동운동 쇠퇴의 반작용으로 이루어질 가능성도 많다는 것이다. 민주노동당이 기존의 다른 진보정당과 달리 '성공'할 수 있었던 결정적 이유는 '대중운동과 결합'했다는 것일텐데, 이는 앞으로도 마찬가지이다. 이 글을 쓰기 직전에도 어떤 동지가 왔다 가셨는데, 자기들 집회하는데 당에서 '격려사'를 해줬으면 좋겠다는 공문을 들고 왔다. 그 전까지 민주노동당이 가면 주로 '연대사'를 했었는데, 갑자기 '격려사'를 해달란다. 노동절 114주년이 되는 올해 민주노동당의 원내 진출로 노동자 운동의 진전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민주노동당은 그 길에서 당연히 노동운동의 발전에 기여해야 할 것이다. 앞으로도 계속 '연대사'를 해야 한다는 말이다. PSSP
신자유주의와 노동의 불안정화 시대, 여성노동자 투쟁에 관한 일 제언 세계화로 인한 전지구적인 여성의 불안정화 문제 유엔보고서에 따르면 매일 행해지는 노동시간의 66%를 여성이 채우고 있는 반면 여성은 세계 전체 소득의 10% 그리고 전체 부동산의 1%만을 소유하고 있으며 세계 빈곤층 13억 인구 가운데 70%를 차지하고 있다고 한다. 여성은 여전히 남성보다 25% - 50% 더 적은 급여를 받고 있다. 여성노동자의 94%가 비정규, 비조직 부문에서 일하고 있으며, 이들은 사회적, 법적 보호를 받기 힘들고 또한 노동권 단체들의 지원도 기대하기 힘든 형편에 처해 있다 (마야 잔시, 2000). 이제까지 여성은 이중노동에 의해 고통받아왔으며, 세계화 이후 여성노동의 주변화와 빈곤의 심화로 더욱 고통받고 있다. 자본의 세계화란 더 싸고 더‘유연한’노동을 찾는 자본의 속성에 따라 결국 여성들의 상태를 더욱 열악하게 만든다고 볼 수 있다. 자본주의는 '가부장제'를 이용하여 더 많은 여성노동력을 착취하고 자신의 축적구조를 완성시킨다. 기업가들은 여성을 더 순종적이고 덜 조직적이며, 결혼이나 임신 같은 사유로 해고하기 쉬운 존재로 보고 있다. 하청 및 시간제 노동, 계절노동, 성과급 노동 등이 정규직 일자리를 대체해 나가고 있는 세계 경제에서 여성은 특히 불안정하고 더욱 착취적인 상황에 노출되어 있다. 그들의 노동은 부차적으로 간주되기 때문에 쉽게 해고되는 것이다. 여기에 신국제분업이라는 노동자에 대한 새로운 착취 형태는 노동의 불안정화를 가져오는데, 일단 자본은 싼 노동력을 찾아 제3세계로 이전한다. 제3세계에서 여성노동은 남성노동보다 열등하다고 여겨져 최저임금이하의 여성임금은 정당화되었고 젊은 여성은 남성보다 권위에 잘 복종하며 열악한 노동조건을 잘 견뎌내기 때문에 고용주는 젊은 여성을 선호한다. 제3세계에 적용된 노동의 신축화가 중심국에도 형성되는데, 결국 여기서도 이 요구를 만족시키는 것은 여성노동력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제 1세계의 흑인 여성과 제3세계에서 온 이주노동자가 그 요구를 만족시키는 형태로 드러난다. 미국에 이주 여성노동자들을 고용하는 노동착취공장이 어마어마하게 많다는 사실은 이를 잘 보여준다. 멕시코 국경에 위치한 마킬라도라 같은 자유무역지대는 제3세계 여성 노동력을 제1세계가 착취하는 방식이다. 결국 형태는 다를 뿐 제1세계와 제3세계에서 드러나는 여성노동력의 착취는 제 3세계 여성 자체이거나 제1세계로 이주해온 또 다른 제3세계 여성노동자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성을 착취해온 양상은 같지만, 남한사회의 착취형태는 제 1세계와 제3세계와는 다소 다르다. 남한사회는 70·80년대를 지나면서 제3세계와 같이 수출 지향적인 제조업 부문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 여성노동 착취는 많이 사라진 편이다. 그 대신 서비스 부문의 팽창과 기혼 여성의 임시직 노동이 그 자리를 메운다. 다른 나라의 노동자가 그 하위를 채우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가 위계화되어 노동시장을 신축적으로 재구성한 것이다. 이에 따라 새롭게 성장한 여성엘리트 그룹과 비정규직 여성노동자 사이의 위계화가 점점 심화된다. 물론 남한사회도 이주노동자의 문제가 심각하긴 하지만(남성 이주노동자의 경우 불안정노동층을 형성한다), 여성이주노동자의 경우 제 1세계에서 보여지는 것처럼 신축적인 일회용 노동을 담당한다기보다 대다수가 성산업에 종사하거나 식당 등의 요식업에 서비스노동을 담당한다는데 그 차이가 있다. 남한사회에서 신자유주의 여성노동정책 비판 그렇다면 남한의 여성노동정책은 여성노동자의 이러한 현실을 어떻게 반영하고 있을까? 남한사회에서 신자유주의 여성노동정책은 크게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프로그램과 세계적인 여성정책의 흐름인 성주류화전략, 두 축으로 이루어졌다. 외환위기를 통해 나타난 구조조정 프로그램은 노동부문에서 노동의 유연화를 목표로 정리해고, 파견도입, 비공식부문의 확대 등을 포괄한다. 그리고 성주류화 전략이란 모든 정책결정, 실행단계에서 명시적으로 여성을 고려하는 절차와 매커니즘을 요구하는 전략을 지칭하는데, 이렇게 변화해온 세계여성정책의 흐름을 타고 남한 또한 성주류화전략을 도입하고 있다. 이러한 과정에서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바는 여성의 공적영역(노동시장을 포함한)으로의 진출을 보장하는 법·제도적 토대를 마련함과 동시에 여성(노동자)에 대한 정책을 수립, 실행하기 위한 기관을 따로 두었다는 것이다. 실제 이러한 법·제도의 마련에 있어서 구체적인 내용과 신설된 기관의 정책방향은 다음 몇 가지 문제점을 안고 있다. (1) 여성의 노동시장 진출은 증가하고 있으나, 고용의 질은 하락하고 있다. 남한사회는 여성 경제활동참가율이 타국에 비하여 낮은 상황이다. 하지만 3차 산업의 급격한 확장과 3차 산업의 서비스·판매직 등은 감정노동을 수행한다는 점에서 특히 여성노동자 고용을 확대하였다. 6.7%로 실업률이 최고치에 달했던 98년 전후를 제외하고 여성노동자 고용을 확대하고자 하는 정책방향은 일관성 있게 추진되었다. 가사노동을 함께 해야하는 여성노동자의 조건을 고려한다는 취지로 변형시간근로제, 단시간근로제가 도입되었고, 이미 광범위하게 존재하는 파견직을 합법화하여 여성노동자를 보호하겠다는 취지로 파견근로제를 도입하였으며, 재생산노동에 대한 부담을 낮추려는 목표로 유상의 육아휴직제가 시행되었다. 한편 친여성적인 업무환경 조성을 위해 직장내 성희롱 해결을 위한 계획 또한 마련되었다. 그러나 문제는 양적 팽창과 함께 나타나는 질적 하락의 문제다. 비정규직의 70%가 여성으로 채워지고 있다는 사실이 이를 반영한다. 여성의 영역은 가정, 남성은 생계부양자라는 전근대적인 성차별 이데올로기가 21세기 신자유주의 전략의 성공을 책임져 주고 있는 것이다. 남성의 수입이 가족 임금적 성격을 띠고 있다는 것은 여성의 우선적인 역할은 가사노동과 어린이, 노약자의 보호에 있는 것으로 간주하여 여성의 유급노동을 가계 보조적인 활동으로 취급한다. 여성의 직업이 어떤 것이든지, 얼마만큼의 노동시간을 투입하든지 간에 여성노동자는 항상‘영속적인 임시직’으로 간주된다. 결국 노동시장 유연화의 전략은 임시적 노동자로 간주되는 여성노동자의 퇴출과 투입의 극대화로 이어진다. IMF 경제위기 이후 3여 년 동안의 구조조정 과정에서 이루어진 여성우선해고, 정규 여성노동자의 비정규직화는 신자유주의의 가부장적 본질을 보여주기에 충분했다. 농협, 알리안츠 생명 부부사원 우선해고 사례 등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최근 많은 여성노동자들은 생계 부양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정규 노동시장에서 가장 먼저 해고되었다. 구조조정 당시 정리해고 1순위도 여성이지만, 2001년 한국통신 114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비정규직으로의 전환은 여성 집중 직종, 업무에 우선적으로 진행된다. 결국 여성은 비정규직화 되거나 실망 실업자가 되어 가정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이렇게 여성이 집중된 비정규직이나 직종 등에 대해선 법적 보호가 유난히 부족하다. 80년대부터 특수고용형태가 문제되었으나 최근까지도 무대책이고, 학습지교사·보험판매인 등 여성집중화 된 특수고용에 대해 노동자성을 인정하지 않는 방향으로 일관하고 있다. 가사사용인에 대한 근로기준법 적용 제외, 파견법 적용 대상업무가 여성집중 업무에 편중된 것도 이를 보여준다. 결국 이와 같은 과정을 거쳐 임금, 노동시간, 복리후생 면에 있어 여성은 훨씬 열악한 조건에 처하게 된다. 신자유주의는 여성의 희생을 밑거름으로 생존하고 있는 것이다. 신자유주의의 최대 피해자인 여성이 역으로 신자유주의의 생존을 위한 토대로 존재한다는 것은 모순적이지만 이는 전세계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현실이다. (2) 여성노동자 보호조치 삭제 여성의 경제활동인구가 증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성노동자에 대한 보호조치는 오히려 감소하였다. 여성노동자에 대한 보호조치를 삭제하여야한다는 이유는 크게 각종 보호조치가 이미 사문화된 것이 많다는 점, 보호조치로 인하여 기업에서의 여성노동자 고용을 기피한다는 이유, 이제는 보호가 아니라 평등이 되어야 한다는 이유였다. 그러나 출산율의 저하라는 조건에서 임신한 여성노동자에 대한 보호조치는 유지되었고, 출산휴가와 육아휴직의 유급 전환 등은 확대되었다. 대신에 여성노동자의 다른 노동기본권이 후퇴되었다. 2001년 모성보호법 개정 당시 유해 위험 사업 사용 금지조항, 야업 및 휴일근로의 금지조항, 시간외근로 제한 규정, 갱내근로금지 조항 등에 대한 실질적인 축소 및 삭제와 뒤이어 주5일제를 통한 생리휴가 무급화가 이를 잘 보여준다. 이러한 조항의 삭제는 여성노동자의 노동조건 뿐 아니라 전반적인 노동조건을 악화시켜 불안정노동으로 확대하기 위한 조치였다. 여기서도 알 수 있는 것은 자본이 노동조건을 악화시켜 자신의 이윤을 극대화하려는 전략을 펼 때도 1차적인 타겟은 여성노동자에 있다는 점이다. 자본이 보호조항 삭제의 이유로 들었던 '보호가 아니라 평등이 되어야 한다' 는 말을 지키려면 제반 노동조건이 향상되는 방향으로 진행했어야 옳다. 예를 들어 생리휴가가 아니라 노동건강 휴가 등의 방향으로 법개정이 진행됐어야 한다. (3) 여성을 차별하는, 여성을 희생양 삼는 복지체계 경제위기 이후 IMF시기를 경과하며 전반적인 사회서비스·사회복지 예산이 축소되었지만, 오히려 예산과 사업에서 확대된 분야는 실업대책이었다. 그러나 여성에 대한 우선해고가 일반화되었던 시기에 실직한 여성노동자에 대한 실업대책은 미비하였다. 실업대책의 주요사업은 실업급여사업, 공공근로사업, 실업자 직업훈련사업, 실업자 대부사업, 생활보호사업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사업은 참여자격조건, 실제사업내용에서 여성노동자를 배제하여 여성노동자의 복지를 축소하는 경향을 낳았다. 또한, 여성은 5인 미만 사업장 취업률, 가족종사자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은 현황 등의 남녀 취업구조의 차이로 인해 국민연금, 산재보험 적용대상에서 제외되는 경우가 많다. 5인 미만 사업장에 근무하는 대부분의 여성은 보험료 분담이 안 되는 지역건강보험에 가입해야 하고, 국민연금 급여 산정시 여성 무급노동의 가치를 인정해주지 않고 있다. 이처럼 남한사회의 복지체계는 고용구조, 연령계층별 경제활동참가 유형, 임금 구조 등에서 나타나는 성차별을 그대로 반영함으로써, 여성이 남성보다 열악한 독자적 연금 수급권을 갖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 그리고 국민연금제도는 아동양육노동으로 인한 소득손실을 노후에 보전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지 않다. 육아휴직 여성의 보험료 추후 납부 제도가 있긴 하지만, 이는 여성 가입자가 보험료를 직접 부담해야 하기 때문에 아동양육에 근거한 독자적 연금 수급권 확보 개념에 맞지 않는다. 이혼배우자 연금분할수급권 인정은 혼인 기간을 토대로 한 연금소득을 부부공유재산으로 본다는 점에서 진일보한 결과라고 보겠다. 그러나 이혼이 아닌 별거 시, 여성 배우자가 분할연금 수급을 할 수 없는 점이 여전히 개선되고 있지 않다. 또한 재혼시 재혼 기간 동안 분할연금 지급을 정지함으로써 여성은 남성에게 경제적으로 의존적이라는 전제를 여전히 고수하고 있다. 신자유주의가 갖고 있는‘시장중심성 및 시장의 극대화 전략’은 결국 복지비용 및 공공부문의 축소를 가져오고 있다. 효율성 증대를 위한 복지비용 및 공공부문의 축소는 유급 경제에서 무급경제로 비용을 전가하는 것이며, 대신 여성의 무급노동을 활용하려는 것이다. 결국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의 충격을 여성이 무급노동을 통해 흡수하는 것이다. 복지 및 공공부문이 축소될 경우, 여성은 사적 영역으로 넘어 온 가계 복지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유급노동을 시작해야 하는가 하면 더 많은 시간을 보살핌 활동에 투여해야 한다. 결국 여성의 노동시간은 늘어나고 노동강도는 심해져 여성의 삶은 더욱 피폐해지게 된다. 3. 여성노동의 불안정화, 빈곤화에 대항하는 투쟁 (1) 여성의 권리를 위한 이데올로기적인 투쟁이 필요하다. ① 사회와 가정의 공·사 분리 이데올로기를 넘어서는 기획이 필요하다. 전세계적으로도 여성(노동) 문제의 핵심은 '가족'의 문제에서 벗어날 수 없다. 사회의 기본적인 구성단위가 '가족'을 기반으로 하고 있는 상황에서 특히 여성은 이 가족이라는 구성물에 종속되는 형태로 규정받는데, 이는 공·사 분리 이데올로기로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가정과 일터의 분리는 여성을 출산과 양육 역할로만 한정시켰으며, 가정을 사회적 생산의 공적 영역과는 분리된 사적·개인적인 영역으로 변화시키고, 여성과 아이들은 일차적 노동력이라기 보다는 이차적인 산업예비군이라는 전제를 만들어 냈다. 이렇다 보니 이런 형태의 가족은 남성으로 대변되는 가장의 임금으로 부양되어야 한다는 인식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더욱 주목해야 하는 것은 여성이 사회에 진출하여도 여전히 이러한 공·사분리 이데올로기가 작동한다는데 있다. 여성노동의 성격을 케어(care)노동, 감정노동으로 간주하여 직무에서도 이와 같은 분리와 여성직종으로의 편중이 나타난다. 게다가 이는 여성의 노동을 가치절하 하는데 또한 일조 한다. 계속되는 공·사 구분 이데올로기는 사회에 나와서도 여성은 가정 안에서의 일과 유사한 분야에 종사하게 하고, 이에 대한 인식 또한 여전히 '사적인' 영역으로 머무르며 공적으로 나와도 그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는데 있다. 사회와 가정의 공·사 구분을 없애는 것에서 생각을 더 연장하여 본다면, 여성의 호명에 대한 방식 역시 고민되어야 한다. 그것은 단지 언명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회 구조적인 변화를 필요로 한다. 봉건적 생산관계아래서 가구는 생산과 소비의 단위였던 반면, 자본주의 아래 가족은 주로 가정 밖에서 생산된 재화를 소비하는 단위가 되었다. 즉,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족이라는 형태는 남성생계부양자와 그에 의존하는 아내로 구성된 전형적인 부르주아적인 중산층 핵가족 모델을 일반화하여 나타나고 있다. 이 모델에서는 여성은 결코 능동적인 존재로 규명될 수 없다. 영원히 소비자로 존재하는 것이다. 생산자로 존재한다고 해도, 완전한 형태의 생산자가 아닌 보조적인 위치의 생산자로 전락 받는 것이 현실이다. 그런데 문제는 노동운동 진영이 이에 대해 철저하게 비판하면서 적절한 대안을 찾지 못한 채 무비판적으로 이를 수용하고 있고 더 나아가 그러한 핵가족화 모델을 고착화시키는데 일조한다는 데 있다. 역사적 맥락으로 볼 때 남성은 노동자라는 생산자의 위치를 점유함으로써 사회구성원으로서 시민권을 얻어 그들의 존재를 규명했다. 그러나 여성은 아직도 호명되어 위치 지워질 존재가 아닌 것이다. 생산자로서의 '노동자' 역시 남성의 것으로 전유되어 왔다. 몰성적인 노동자의 개념에 여성의 존재를 넣는 것이 정답인지, 여성자체의 권리를 선언하며 나가야 하는 것이 정답인지, 이 두 가지를 뛰어넘는 새로운 권리개념을 만들어 가야 할지는 논쟁의 여지가 있겠으나, 중요한 것은 2등 시민으로 분류되는 여성에게 적절한 호명을 고민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를 해결하기 위한 우리의 요구는 무엇이 될 수 있는가. 한국에서의 가장 기본적인 경제단위는 아직까지 가족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여성과 아동이 보조적인 위치의 2차적 산업예비군으로 위치지어 지고 남성 가장의 임금으로 부양되어야 한다는 전제에서 나온 가족수당 같은 형태가 아닌, 개별 존재에게 인간이 살아갈 수 있는 기본생활 권리로서 수당이 주어져야 한다. 예를 들면 '가족수당'이 아닌 '아동수당'이라거나, 아동 양육의 문제를 사회적으로 책임질 수 있는 보육시설, 교육제도 마련 등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문제는 단지 법제도 개선만으로는 실현될 수 없다. 법제도 개선을 넘어 사회·경제적으로 문제를 해결해 나가려는 노력이 함께 만들어져야 한다. ② 가족(개인)에게 전가하는 것이 아니라 재생산의 사회화가 함께 해결되어야 한다. 지금까지 가족 임금이데올로기에 대한 많은 비판이 있어온 것은 사실이다. 이 이데올로기 는 가부장제를 전제로 하고 있어서 그 비판의 화살을 피할 수 없는데, 자본과 노조 할 것 없이 가부장제 하 일치된 거래라는 점에서도 그 비판의 시선이 따가웠던 것은 사실이다. 이에 대해 더 첨가해야 할 비판의 지점은 가족임금 이데올로기가 가부장적이고 남성적인 것만이 문제가 아니라, 사회 공동의 책임을 가족(개인)에게 전가하고 사회 전체가 책임지려 하지 않는 것이 문제라는 것이다. 실례로 2001년 있었던 모성보호법 투쟁을 보더라도 알 수 있는데, 당시 모성보호법은 특히 새로이 출현하는 여성엘리트와 주변적 여성 사이의 간극이 존재하는 남한 사회에서 대기업에 속해있는 정규직 여성 임금노동자에게만 그 혜택이 주어지도록 만들어졌다. 능력이 되는 여성 개인이 수혜받도록 만들어졌을 뿐 사회 전체가 이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의지는 찾기 힘들다. (기업)임금노동자로 국한된 소수의 여성에게 부여되는 '모성보호법'이 아닌 사회 공동의 책임을 질 수 있는 방안이 마련되어야 했고, 그 수혜대상도 농업, 자영업 등에 종사하는 사람들뿐 아니라 실업자까지 포함한 모든 여성이 되었어야 한다. 결국 여성노동자의 조직화에 있어서 고민되어야 할 지점은 이와 같은 개별 여성에 대한 지원으로의 접근이 아니라 좀더 광범위하고 포괄적인 여성의 집단화 모델 개발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③ 임노동 개념이 갖고 있는 젠더 편향, 인종 편향의 모습들을 넘어야 한다. 노동의 개념의 범위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에 대해 끊임없는 논란이 있지만, 여성노동을 말하기에는 단지 임노동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 사실은 굉장히 많은 부분에서 노동을 수행함에도 불구하고 단지 생산관계에 편입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가치절하되고, 그래서 더더욱 저임금 장시간 노동의 초과 착취아래 놓여져 있는 여성이 많은 상황이다. 이에 임노동 개념이 갖고 있는 젠더 편향적이고 인종 편향적인 모습의 비판이 있어야 한다. 이는 현재 쟁점이 되고 있는 영유아 보육법에서도 알 수 있는데, 개정된 영유아 보육법 '제 14조 (직장보육시설의 설치)' 에는 "상시여성근로자 300인 이상을 고용하고 있는 사업장 (대상 아동을 보육하고 있는 여성노동자가 없는 사업장은 제외한다)"이라는 부분이 있다. 많은 부분 개선이 되었다고 할지라도 보육의 문제를 여전히 여성의 문제로 사고하는 바를 드러내는 데, 게다가 '상시여성근로자 300인 이상을 고용하고 있는 사업장'이라는 부분에서는 현실적으로 5인미만의 중소·영세 사업장에서 일하는 비정규직 여성이 더 많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것이 현실적인 상황을 반영하고 있는 것인지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게다가 이는 아직까지도 영유아 보육에 관한 임노동자만을 대상으로 하고 있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보육의 문제를 사회적으로 책임지기 위해서는 국가 또는 지방자치단체가 설치·운영하는 국·공립보육시설을 설치하거나 사회복지사업법에 의한 사회복지법인이 설치·운영하는 법인보육시설 등을 설치하는 방안을 적극 권장하여 보육의 문제가 사회적 문제임을 드러내는 것이 중요하다. (2) 지역적으로 여성노동자를 조직화하기 위한 방향 여성노동자를 조직하는데 있어서 이전에는 기업별노조로 조직하는 방식을 많이 취했지만, 여성노동자가 생산직에서 비정규직으로 이동하면서 기업별로 조직하는데 한계에 부딪혔다. 또한 기혼여성노동자의 경우 이중노동의 고통을 안고 있고, 현실적으로 이중노동으로 인해 대중활동을 하지 못하는 점을 감안하여, 공동탁아·공동육아를 진행하는 등 재생산노동의 문제를 함께 해결하면서 조직화하는 사례가 많았다. 또한 일하기를 원하는 기혼여성들을 위해 직업훈련이나 자활후견기관을 운영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지역여성들과 함께 육아·급식·복지 등 여러 여성문제의 쟁점들과 결합하고, 전체 여성문제 안에서 노동권을 사고하는 과정은 여전히 유의미하다. 그러나 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조직화에서 염두해야 할 사항이 몇 가지 있다. 먼저 기혼여성노동자에게 전가되고 있는 재생산노동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다각도의 모색이 필요하다. 기혼여성노동자와 이러한 문제의 발본적인 원인이 무엇인지에 대해 토론하는 것을 시작으로 조직 내에서 공동으로 해결하는 방안, 사회적으로 해결을 요구하는 방안, 무엇보다 이 문제를 남성들과 함께 제기하여 성별분업 이데올로기 자체를 전화하기 위한 방안이 고민되어야 한다. 재생산노동이 여성의 역할로만 고착화되지 않는 방식으로, 재생산노동을 여성노동자조직이 감당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화될 수 있는 방식으로 제기하는 것이 필요하다. 또한 지역적으로 여성노동자들의 현실사안에 대한 급진적인 요구가 필요하다. 현재 가장 절실한 사안은 생존권과 직결되어 있는 빈곤문제와 점점 확대되어가는 비공식부문여성노동자의 노동권문제다. 현재 여성들은 구조적으로 빈곤상태에 이르고 있으며, 이러한 빈곤으로 인해 남성에 의한 종속은 지속되며, 폭력에도 쉽게 노출된다. 성폭력에 대한 반대, 자활활동의 확대 등의 요구들은 빈곤의 여성화에 맞서는 행동과 함께 진행되어야 한다. 현실에서 여성노동자들, 특히 기혼여성노동자들이 빈곤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한 일반적인 방도는 비공식부문 여성노동자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비공식부문은 자본주의 생산체계 내에서 공식적으로 노동으로 인정되지 않기 때문에 저임금·고강도 노동강도·빈번한 성폭력이라는 문제를 앉고 있고, 이를 해결할 최소한의 조건도 가지지 못하고 있다. 현실적인 빈곤대책과 비공식부문 노동3권 쟁취를 중심으로 지역여성들이 스스로 발언하고, 행동함으로써 자기 조직화할 수 있는 전략이 고민되어야 한다. (3) 불안정노동철폐투쟁의 관점에서 여성노동권을 사고하여야 한다. 여성노동권은 재생산노동을 자신의 의사에 기반하여 수행할 수 있는(혹은 수행하지 않을) 권리, 노동시장에 진입하는데 있어서 모든 차별이 제거되는 것, 노동과정 전반을 여성의 조건에 따라 변경, 통제할 수 있는 권리이다. 여성노동권은 여성이 경제적인 독립을 토대로 자기해방을 쟁취하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이다. 이렇듯 여성해방의 차원에서 여성노동권은 주요한 과제이지만, 노동의 여성화라는 상황에서도 보듯이 여성노동권은 현재 진행되는 신자유주의반대투쟁, 불안정노동철폐투쟁의 핵심적인 부분을 이루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변혁의 주요한 과제이기도 하다. 즉 여성해방의 조건으로 여성노동권은 요구되지만, 구체적인 여성노동권쟁취투쟁은 자본주의의 현 단계의 특질, 현재의 노동정책의 본질 속에서 고민되어야 한다. 그러나 많은 여성노동운동조직들이 신자유주의 정책개혁과 공명하면서, 비정규직 여성노동자 노동조건 개선을 위한 활동을 진행하고 있다. 그리고 노동조건 개선을 위한 활동방식은 조직화대상에 대한 판단과 조직화사업, 조직된 여성노동자와 함께 제도개선을 진행하는 것이다. 현재 여성노동자의 노동조건은 너무도 열악하기에 일부 여성노동자부터라도 노동조건을 개선해나가는 것은 유의미할 수 있다. 그러나 자본의 위기를 지연시키는 현재의 전략자체가 유지되는 한, 이러한 개선은 항시적인 금융의 불안정화 과정에서 언제라도 무너질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신자유주의 반대투쟁, 불안정노동철폐투쟁의 주체로 여성노동자들을 조직화해내야 한다. 한편 불안정노동철폐투쟁의 관점에서 여성노동권을 사고할 때, 다른 불안정노동 층과의 연대방식을 제대로 평가할 수 있으며, 이후의 최소한의 준거를 가질 수 있다. 현재 불안정노동 층을 이루고 있는 노동자 중 대부분이 여성노동자이며, 이들에 대한 조직화와 노동권쟁취투쟁을 우선 진행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불안정노동 층 모두가 연대하고 단결하여 싸워갈 때, 불안정노동철폐투쟁의 성과를 만들어갈 수 있다. PSSP
1. 비정규직 투쟁에서 최저임금 투쟁으로 1) 비정규직 노동자에 대한 너무나 기초적인 노동기본권, 이미 보장되어 있는 근로기준법상 권리, 나아가 인간으로서의 기본적인 인권침해가 심각한 수준에 와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나 노무현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소위 개선방안은 이와 같은 현실을 개선하기보다는 질적으로 비정규직을 보다 제도화·공고화하고, 양적으로도 보다 확산하는데 기여할 가능성이 농후하다. 2002년 대통령 선거 당시의 공약이나, 소위 인수위 시절 중구난방 노무현 정권에 한발이던 한손이던 걸쳐있던 멤버들의 싸구려 멘트-'립써비스'보다도 훨씬 못한 것이분노의 현실이다. 2) 2002년 대통령 선거와, 이렇게 비교하기가 좀 뭐하지만, 2004년 1월의 민주노총 선거, 그리고 지난 4월15일 17대 국회의원 총선거를 거치면서, 잠복했는지 아니면 우리 스스로가 눈 가리고 아웅인지 모르겠지만, 정규직의 비정규직화, 비정규직을 양산하고 제도화하려는 노동법 개악은 지속적으로 추진되고 있다. 파견업종을 확대하고, 특수고용 노동자를 기만적인 유사근로자로 규정하고, 비정규직의 근본적인 문제인 기간제노동에 있어서 오히려 기간을 확대하려는 등 개악을 넘어 '노동자를 죽이려는' 법제도 '개선'이 추진 중인 것이다. 현장은 이미 상시적 구조조정으로 인해 비정규직이 확산되고 있으며 이를 제도적으로 뒷받침하려는 노동법개악에 대해 총자본은 사활적 이해를 갖고 추진하고 있다. 온갖 차별과 고용불안, 무법천지, 무권리 상태로 인해 벼랑끝으로 내몰린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과 격렬한 저항은 이미 작년 근로복지공단 비정규직 노동자 故이용석 열사와, 올해 현대중공업 사내하청 비정규직 노동자 故박일수 열사의 죽음에서 표출되듯, 너무나 안타까운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는 지금이다. 3) 민주노총에서는 비정규직 관련 정부안 확정시점인 상반기에 "노동법개악 저지"를 기본방향으로 하며, 개악저지, 법제도개선을 위한 총력투쟁을 전개하는 것을 투쟁목표로 상정하고 있다. 상반기에 시기집중 임단협 투쟁과 결합하여 노동법개악 기도를 분쇄하며 최저임금 쟁취투쟁을 공세적으로 전개하고, 하반기 법제도개선을 위한 총력투쟁을 준비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조합원에 대한 교육과 선전, 실천사업을 통하여 조직 내 공유와 결의를 최대한 조직하고자 하고 있다. 기간제, 간접고용, 특수고용 등 비정규직 각 영역별로 나뉘어져 있는 투쟁을 활성화시키되 결집하여 총력투쟁전선을 구축하기 위한 노력 또한 경주하고 있다. 아울러, 민주노동당의 원내진출에 따른 새로운 정치지형을 맞아 대국회·대정당 사업을 활성화하고 다면적 대응을 조직하기 위한 대책을 마련중이다. 4) 이 중에서도 특히, 비정규직 문제의 심각성과 비정규직 투쟁의 중요성에 대해 민주노조운동은 물론 민중운동 진영 전체가 갖고 있는 당위적인 인식을 넘어, 실제 현장투쟁의 직접적인 경험을 통해 정규직-비정규직이 하나되는 투쟁, 대정부-대자본 투쟁의 공통된 실천을 만들기 위한 주요한 과정으로 2004년 최저임금 투쟁이 위치지워질 것이라 판단한다. 2. 최저임금위원회와 민주노총의 투쟁계획 1) 우리나라에서 최저임금제도가 최초로 실시된 것은 1988년이다. 민주노총은 2000년부터 최저임금위원회에 참가하였다. 민주노총은 최저임금위원회에 참가하면서 상반기 임단협 투쟁과 하반기 법제도개선 투쟁의 큰 틀 아래, 최저임금위원회가 당해연도 최저임금을 결정하는 상반기-구체적으로 6월-까지는 최저임금 현실화(인상) 투쟁, 그리고 하반기에는 최저임금 위반사업장 신고 및 법제도개선 투쟁의 흐름을 가져왔다. 이 과정에서, 늘 개선되지 않고 있는 법제도의 문제는 최저임금위원회의 구조적 모순으로 작용하였고, 민주노총 노동자위원들의 참여 여부와는 무관하게, 공익위원(을 가장한 정부위원)의 소위 '공익'이란 가면 아래 결정되어지는 열악한 최저임금 수준에 대한 항변의 권리를 박탈당해 왔다. 급기야 작년, 2003년에는 (신자유주의) 경제학-구조조정-노동시장 유연화 논리로 무장한 최저임금위원회를 끝까지 참여하기가 역겨웠던 민주노총 노동자위원과 소수 공익위원들이 사퇴한 가운데 최저임금위원회에서 당해연도 최저임금을 결정하는 극한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2) 2004년 다시금 2004년 9월부터 2005년 8월까지의 대한민국 최저임금을 결정하는 최저임금위원회 4월29일 1차 전원회의에서 논의된 민주노총의 최저임금 투쟁계획과 목표는 아래와 같다. 민주노동당의 원내진출에 따라 최저임금법 개정안이 의원입법으로 발의되는 것에 조응하여, 최저임금 현실화 및 법제도개선 투쟁이 결합될 최저임금 사업흐름을 보면, 2004년 한 해 동안 최저임금 투쟁의 지속적인 전개를 상정하고 있다. 3) 최저임금제는 국가가 노사간의 임금결정과정에 개입해 임금의 최저수준을 정하고, 사용자에게 그 이상의 임금을 지급할 것을 법률로 강제하는 제도이다. 최저임금제는 일반적으로 저임금 일소, 임금격차 해소, 노동소득불평등도 완화, 소득분배구조 개선 등의 긍정적인 효과를 갖는다. 그러나 대한민국 최저임금은 첫 시행 때부터 지나치게 낮게 결정된 뒤 현재까지 전체 노동자 월평균 임금의 1/3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노동자들의 최소 생계 보장이라는 취지가 무색한 상황이다. 4) IMF 이후 부익부빈익빈 현상과 경제적 불평등이 한국사회 최대 문제라는 사실은 누구도 부정하지 못한다. 이는 그만큼 최저임금제도가 제 기능을 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목표를 달성하기에 현행 최저임금제도는 심각한 문제점을 갖고 있다. 첫째, 최저임금 결정기준이 생계비, 유사 노동자 임금 및 노동생산성(최저임금법 제4조 제1항)으로 명시돼 있음에도 이에 현격히 미치지 못하는 최저임금 수준을 개선할 방법이 없다는 점, 둘째, 최저임금 결정의 실질적 주체인 공익위원을 정부가 추천함에 따라 중립성이 훼손된다는 점, 셋째, 최저임금 적용시기를 9월∼이듬해 8월로 정함에 따라 공공부문 회계연도와 일치하지 않아 최저임금 위반사례가 속출한다는 점, 넷째, 18세 미만 노동자, 양성훈련자, 수습노동자, 감시단속 노동자들에게는 최저임금법조차 적용되지 못한다는 점 등이다. 5) 민주노총은 이같은 최저임금제도의 문제점을 개선하기 위해 다시 한 번 법개정을 추진할 예정이다. 제도개선 방향은 첫째, 최저임금 결정기준을 적어도 전체 노동자 월평균 임금의 50%로 명시해서 저임금 노동자의 생계를 보호할 것, 둘째, 공익위원 선출과 관련 노사단체가 후보군을 제출해 교차 삭제하는 방안으로 민주화를 기할 것, 셋째, 최저임금 적용시기를 현행 '9월-이듬해 8월'에서 '1월-12월'로 전환할 것, 넷째, 최저임금 적용대상에 18세 미만 노동자, 양성훈련자, 수습노동자, 감시단속 노동자들을 포함시킬 것 등이다. 현행 567,260원에 불과한 최저임금에 대해 민주노총은 전체 노동자 평균임금의 50%에 해당하는 기준과 766,140원으로의 인상을 주장하고 있다. 6) 이를 위해 2004년 민주노총은 사회, 시민, 노동단체와 함께 최저임금 투쟁을 지지 엄호하고, 국민적인 여론을 형성하며 사회적 투쟁을 확산하기 위한 단위로 [최저임금연대] 활동을 준비하고 있다. 또한 기존의 비정규직 관련 사업의 영역을 조직내부적으로 확대하여, 민주노총 내부의 조직쟁의실, 정책기획실, 미조직비정규실, 교육선전실 및 민주노총 산하 연맹과 지역본부 및 단위사업장 해당 주체를 아우르는 [최저임금기획회의]를 일찌감치 가동중이다. 5월 1일 노동절 대회에서 발대식을 진행할 [최저임금투쟁실천단]은 해당 비정규직·중소영세 단위사업장은 물론, 관련 연맹과 지역본부, 사회단체들이 참가하여 "최저임금법 개정! 최저임금 77만원 쟁취"를 선봉에서 실천하는 역할을 수행할 예정이다. 교육자료 제작, 배포는 물론, 연맹 및 지역본부와의 간담회를 배치하고, 임단협 포스터와 함께 최저임금투쟁 포스터를 제작, 배포하며, 이미 카세트테이프가 활용되고 있다. 금속산업연맹과 보건의료노조는 산별최저임금을 상정하여 산별교섭 및 투쟁의 주요 사안으로 최저임금 문제를 다루고 있다. 민주노총 상반기 투쟁의 결절점이 될 6월 시기집중 총력투쟁의 핵심 쟁점으로 파견법 개악 저지 투쟁과 더불어 최저임금 쟁취 투쟁 역시 상정되어 있다. 3. 서울에서 진행되는 교섭(?), 서울지역의 실천(!)이 중요하다! 1) 작년 자료이지만, 최저임금 영향률은 1993년부터 매해 추락해 1998년에는 0.4%까지 떨어졌다가 2002년 2.9%까지 겨우 상승했다. 그럼에도 1989년 10.7%에는 아직도 심각하게 부족한 상황이다. 이는 최저임금제도가 겨우 이름만 유지할 뿐 그 기능이 상실됐다는 비판의 근거가 된다. <표1> 연도별 최저임금액과 영향률 추이(단위: 원,명,%) 자료; 최저임금위원회, 최저임금심의·의결경위, 노동연구원(2003),『2003년 최저임금 심의를 위한 생계비산출』 OECD는 저임금 노동자를 상용직 중위임금(median)의 2/3 이하로 정하고 있으며 이 기준을 2002년 8월 통계청 경제활동인구조사 부가조사 결과에 대입할 경우 대한민국 1천3백만 노동자 가운데 저임금 노동자는 663만명(48.6%)에 달한다. 단순 수치상으로도 최저임금 투쟁은 최소 수십만명에 달하는 (최저임금에 직접 해당되는) 노동자들에게 직결되는 임금교섭이자, 수백만명에 이르는 (최저임금에 간접적인 영향을 받는) 노동자들의 실질적인 위임교섭인 셈이다. 수십만에서 수백만명의 노동자들에게 직간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대정부 임금위임교섭이 서울에서 매년 6월 열린다고 할 수 있다. 2) 민주노총 서울본부는 동부, 서부, 남부, 북부, 남동, 중부 등 서울지역 6개 지구협의회와 함께 그동안 비정규직 노동조합들의 조직과 투쟁을 지원하고, 현장과 지역에서부터 미조직 조직화 및 비정규직 정규직화를 위한 투쟁을 전개해 왔다. 더군다나, 계약직·임시직 등 직접고용 비정규직 노동자, 파견·용역 등 간접고용 노동자는 물론이고, 노동법의 사각지대에서 고통받는 중소영세사업장 노동자와 특수고용직 노동자들의 기본권 쟁취를 위해 개별사업장에서의 비정규직 투쟁과 정규직-비정규직 공동투쟁을 해왔다. 또한 최저임금 투쟁의 중요성에 대해서도 그 인식의 폭을 확대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해왔다. 특히나 이번 2004년 최저임금 투쟁에 있어서는 여성연맹 지하철 및 도시철도 청소용역노동자들과, 전북지역일반노조를 비롯한 중소영세사업장 노동자들만의 투쟁으로 최저임금 투쟁이 국한되어 왔던 그동안의 평가를 극복하고자, 최저임금 투쟁에 대해 기존 해당 사업장을 넘어 서울지역 전체 단위노조가 결합할 수 있도록 교육과 선전을 강화하기 위한 사업을 진행중이다. 3) 민주노총 서울본부는 이러한 성과를 바탕으로 [최저임금서울실천단]을 조직하여 최저임금투쟁을 한단계 더 강도높게 전개하고 한다. [최저임금서울실천단]은 최저임금 해당조직인 비정규직·중소영세사업장의 간부 및 조합원들의 참여를 조직하고, 각 연맹 및 6개 지구협의회가 최저임금 비해당(?) 단위사업장(정규직·대공장사업장) 대표자 및 간부들을 적극 조직하는 틀이 될 것이다. 의원입법 발의에 맞춘 최저임금법 개정 서명운동을 전개함에 있어 조합원은 물론, 일상적인 대국민·대시민선전전 실천을 통해 조직하며, 5월19일(수), 6월 2일(수), 6월16일(수) 민주노총 전국동시다발 선전전을 서울 전역에서 집중·분산으로 진행할 계획이다. 이를 통해 6월 최저임금위원회 회의에 맞춘 아침선전전과 집회를 적극 조직하며, 민주노총 시기집중투쟁 및 최저임금위원회 활동의 정점이 될 6월 간부상경투쟁 및 집중투쟁에 선봉에 설 결의를 다지고 있다. 4) 빈곤사회연대 및 불안정노동과 사회빈곤화에 맞서는 여러 연대조직과 함께 최저임금 투쟁을 협소한 의미의 임금노동자의 문제로부터 보다 확장시키기 위한 활동들 역시 적극적으로 요구되는 지금이다. 최저임금 투쟁의 인식을 최저생계비 투쟁으로까지 확대하고, 최저임금 투쟁에 대한 연대와 지원을 넘어서는 反신자유주의 투쟁의 주체형성을 위한 현장과 지역활동의 결합력을 높이기 위해 다양한 기획사업이 배치되어야 할 필요성이 존재하는 것이다. 예를 들자면, 우리 단위·현장·지역·조직에서 이런 실천은 어떨까? ① 각 단위사업장 및 현장·지역·조직별 최저임금투쟁의 결의를 담보할 수 있는 결의서명을 진행한다. ② 최저임금실천단 가입원서를 공개적으로 작성, 조직한다. ③ 최저임금 투쟁 관련 문화단위 및 학생조직과 연대하여 투쟁을 확산하고 강화한다. - 예를 들어, 영세민(?)밀집단위 "최저임금 현실화 게릴라콘서트", 지역 "만국기 게시", 학생들에게 "풍선나눠주기", "야외상담센터" 설치, "신문 간지" 지역 선전물 투입 등 - 학생조직의 경우 최저임금위원회 공익위원 압박 및 학내선전전 등 ④ 최저임금투쟁의 새로운 주체조직화를 시도한다. 예를 들어, 학생조직과 대학 시설관리노동자 실태조사 및 조직, 전교조 서울시지부와 학생 아르바이트 실태조사 및 조직, 사무금융연맹과 고층빌딩 시설관리노동자 실태조사 및 조직 등 ⑤ 무엇보다, 주요 정규직-대공장 사업장에 대한 최저임금 투쟁 결합을 조직하는 것이 관건이다. ⑥ 민주노동당 서울시지부 및 개별 지구당에 서울본부 및 지구협의회 차원에서 최저임금투쟁을 제안하고 조직한다. 조직된 노동자의 힘으로 최저임금 실질화 쟁취하자!PSSP
그녀들의 투쟁이 남긴 것 작년 9월 1일 서울대병원이 간병인 무료소개소를 일방적으로 폐지한 이후 시작된 서울대 간병인 노동자들의 9개월의 긴 투쟁이 4월 23일 병원과 합의해 일단락되었다. 그녀들이 이제 일터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지만, 아직도 해결해야 할 과제는 산적해있다. 나아진 것 없는 간병인들의 노동조건과 간병인들의 노동자성 인정 문제가 있고, 환자 간병에 대한 병원과 국가의 책임성 문제, 해결되지 않은 유료소개소 문제점들이 그러한 과제들이다. 서울대병원이 무료소개소를 폐지한 이유 서울대병원은 88년 4월부터 '서울대학교 간병인 무료소개소'를 설립하고 운영해왔다. 서울대병원에서 간병인의 역사는 30년이 넘지만, 당시 병원장이 부친 때문에 간병인을 채용해보고 그 문제점을 느끼면서 이러한 무료소개소 운영이 추진되었다. 서울대병원에서 일할 간병인도 공개모집하였는데, 공개모집 조건 또한 다른 유료소개소보다 까다로웠다. 중졸이상의 학력, 신원보증서, 이력서, 적십자회 교육수료증, 재정보증서, 사진, 건강검진 증명서 등 15여 가지의 서류를 갖추어야 채용이 되었다. 병원측에서는 무료소개소를 운영할 수 있는 사무실과 전화 그리고 운영관리를 할 간호사 1명을 계약직으로 두었다. 간병인 교육은 간호부 담당으로 년 2회 기본교육과 매월 1회 추가교육을 통해, 병원구조와 환자 간병시 필요한 교육, 인성교육, 친절교육을 포함하였다. 무료소개소에서는 개개 간병인을 파악할 수 있었고, 서울대병원에 적합한 교육이 정기적으로 이루어져 환자가 간병인을 요청할 때 환자 상태에 적절한 간병인을 연결하여 줄 수 있었다. 간병료도 다른 유료소개소(5만원-7만원)보다 낮은 4만 5천원이었는데, 이는 중간착취료가 없는 무료소개소이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이렇듯 무료소개소 운영이 간병인과 환자 모두에게 좋은 역할을 했음에도 병원이 무료소개소를 일방적으로 폐지한 이유는 무엇일까? 첫째는 병원이 간병업무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겠다는 것이다. 현재 우리나라 병원에 환자로 입원을 하게 되는 경우, 단기 입원을 제외하고 대부분 환자들 대부분이 간병인을 필요로 한다. 더욱이 우리나라 의료기관처럼 대부분 법정 간호인력도 채우지 못하는 상황에서 간호인력이 간병까지 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즉, 전인간호가 이루어져야 할 병원에서 환자들에 대한 수발 서비스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간병은 환자와 환자 가족의 책임으로 떠넘겨져 왔고, 이에 소요되는 비용만 대략 연간 2천억 원 이상으로 추산되고 있다. 현재 서울대병원은 하루에 200명의 간병인이 필요하다. 서울대병원 운영에 있어서도 간병인은 필수적인 것이다. 또한 서울대병원은 국립병원으로 국민의 세금에서 매년 수 백억 원의 지원을 받고 있다. 그럼에도 년 2400만원으로 운영되었던 무료소개소 마저 일방적으로 폐지한 것은 간병인의 교육과 관리를 맡아왔던 병원의 최소한의 의무조차 방기하겠다는 것이다. 현재 서울대병원 간병인 지부 조합원들이 일터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지만 이러한 상황은 마찬가지다. 병원은 건전한 경쟁체제를 내세우면서, 무료소개소 2개와 유료소개소 1개를 동시에 선정하였다. 간병인 조합원들은 노조활동 인정과 노조의 자체 운영을 원칙으로 자활에서 운영하는 '약손엄마'란 무료소개소를 통해 현장으로 복귀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같은 무료소개소라고 해도 서울대병원이 운영하는 무료소개소는 결국 사라진 셈이다. 둘째는 서울대병원 무료소개소 간병인들이 노동조합에 가입해 있기 때문이다. 서울대병원 무료소개소 간병인들은 2001년 말부터 보건의료노조에 가입해왔다. 병원은 그 후 200명이던 간병인들을 계속 줄이고 사설유료업체로 대체해서, 무료소개소 폐지 당시에는 50명으로 줄어있었다. 보건의료노조 서울대병원지부는 6월 말부터 보건의료노조 서울지역지부 조합원인 간병인들의 노동조건 개선을 위한 실무협의를 해오고 있었다. 요구는 최저임금에도 못 미치는 임금에 대한 인상(4만 5?원에서 5만원으로 5천원 인상)과 휴게실 문제를 제의한 것이었다. 그러던 중 병원장은 사전논의도 없이 일방적으로 9월 1일자로 무료소개소를 폐지하고, 4일자 우체국 소인으로 간병인들에게 개별적으로 우편통보를 하였다. 서울대병원은 대형병원의 특성상 장기입원환자와 중환자가 많기 때문에 하루 200명의 간병인들이 필요할 정도로 간병인의 수요가 계속적으로 있었다. 그래서 서울대병원 간병인들은 길게는 25년 짧게는 10년 이상 서울대병원에서 일해왔다. 따라서 무료소개소 폐지는 서울대병원 간병인 노동자들에겐 해고통지서나 다름 없었던 것이다. 간병인들이 자신을 노동자로 인식하고, 노동자의 권리를 찾기 위해 노조에 가입하는 것을 서울대병원에선 좌시하지 않았던 것이다. 서울대병원 간병인들은 투쟁 중에 서울대 간병인 지부를 결성하였다. 그러나 여전히 서울대병원은 간병인 노조를 노사협의 대상으로 보고 있지 않다. 4월 21일 서울대병원 은 무료소개소가 간병인 노조 중심으로 운영될 것을 알고 무료소개소 선정을 뒤집기도 했다. 또한 서울대병원은 비정규직화의 선두에 서 있다. 서울대병원은 보수, 경비, 청소, 소아급식까지 이미 용역에 넘겼고, 지금도 서울대병원에서 용역화와 비정규직화가 확대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병원 정책에서 직원의 범위에 있지 않은 간병인들까지 노동조합에 가입하는 것은 눈에 가시였던 것이다. 간병인의 노동조건은 어떠한가 - 고용계약관계에 있는 노동자이면서도 노동법의 사각지대에 있는 여성노동자 최저 임금에도 못미치는 저임금 간병인들은 휴식시간이나 식사시간도 제대로 보장받지 못한 채 24시간을 근무하고 일당 5만원(2003년 8월 1일 이전까지는 4만 5천 원)을 받는다. 이는 일일 8시간으로 환산하면 16,666원으로 최저임금 20,080에도 못 미치며 이를 226시간으로 환산하면 월 50만원에도 못미치는 저임금을 받고 있다. 최악의 장시간 노동시간 간병인 노동자들은 대부분 일요일 오후 2시에 들어와 근무를 시작하면 토요일 오후 2시에 근무를 마치게 되며 주6일을 24시간씩 결국 144시간을 근무한다. 이는 보통 노동자들의 3배가 넘는 시간이다. 대부분의 간병인들은 휴식시간이 따로 없으며 설령 보호자들이 와서 잠시 쉬고 오라고 해도 쉴 공간마저 없다. 밥 먹는 시간외에 환자 곁을 떠날 수가 없다. 6일 근무 후 1일 쉬지만 그마저도 집에 돌아가면 그간에 밀린 6일간의 가사일과 앞으로의 6일 동안의 필요한 일을 준비하고 나와야 하는 여성노동자들이다. 직업병에 시달려도 인정 못 받는 노동자 간병인들은 한 환자가 끝나면 다른 환자를 돌보며 계속 병원 생활을 해 병원의 안 좋은 환경(공기)에 계속 노출되어 있고 아픈 사람을 휴일도 없이 상대해야 함으로 정신적, 육체적으로 몇 배나 힘든 노동을 하고 있다. 대부분의 간병인들이 장기적인 수면장애로 안구건조증을 갖고 있으며, 과체중환자나 무의식환자를 간병하면서 체위변경을 규칙적으로 해줄 때 대부분 혼자 하기 때문에 등이나 허리 근육통이 심하고 심지어는 디스크와 자궁하수증에 걸리며, 장기적인 병원 생활로 햇볕을 보지 못해 칼슘부족으로 관절이 붓고, 병실 실내 건조로 알레르기 비염과 만성인후염을 대부분 앓고 있다. 심지어 환자가 간염, 결핵 등 감염성 질환이어도 간병인에게 알려주지 않는 경우가 많아 감염에 쉽게 노출되어 있다. 이 모든 질병들이 간병일로 인한 직업병이 분명하지만 산재처리를 받는다는 건 상상도 못할 일이다. 서울대병원 간병인 노조의 투쟁은 무료소개소 폐지 철회를 목표로 시작되었지만, 간병인 노동자의 현실을 사회적으로 알려내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간병인들이 대부분 여성들이라는 것을 감안할 때, 이 시대 여성노동자들의 현실과 여성노동자 조직화 방안에 대한 고민을 던져주는 또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 간병인들은 분명히 노동자이면서도 근로기준법이나 최저임금법의 적용을 받지 못하는 여성 노동자들이다. 비공식 노동자는 고용계약관계에 있지 않거나 사업장에 고용되어 있지 않다는 이유로 근로기준법이나 최저임금법 등이 적용되지 않는 법외노동자이다. 이러한 비공식노동자들은 공식적인 통계에 반영되지 않아 전체적인 규모를 알기 어렵지만 최소한 500만여 명이 될 것으로 추정된다. 서울여성노조 정양희 상담센터장은 "근로자파견법에 의하면 파견허용업무는 사무보조원, 전화교환원, 여행안내원, 조리사, 보모, 간병인, 개인보호 근로자, 텔레마케터, 건물 청소원 등 다수가 여성집중직종의 업무이다. 여성노동의 대부분이 노동의 중간 착취를 합법화시킨 파견법의 대상이 되었다는 점은 정부의 노동정책과 법제정이 여성노동자들에게 매우 불리하게 이루어지고 있음을 드러낸다."며 정부의 노동정책을 비판했다. 향후 간병인의 노동자성 인정과 간병인에 대한 근로기준법, 최저임금제 적용을 위한 투쟁은 이러한 비공식 여성노동자와 함께 하는 투쟁이어야 할 것이다. 남겨진 과제 9개월 동안의 간병인 노동자들의 끈질긴 투쟁은 노조가 자율적으로 운영하는 무료소개소를 통한 현장 복귀로 한숨 덜어낸 셈이다. 대부분 50-60대의 여성 가장이었던 간병인 조합원들의 흔들리지 않는 투쟁이 없었다면, 이마저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나 다시 일하게 된 일터의 노동조건이 변한 것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간병인 노조와 함께 했던 이들의 어깨는 여전히 무겁다. '서울대병원 간병인 문제해결 및 공공병원으로서 제자리 찾기를 위한 공동대책위원회'(이하 공대위)는 이번 서울대병원 간병인 문제로 드러난 유료소개소의 문제점을 알려내기 위해 유료소개소 실태조사를 진행중이다. 전국에 20만 명으로 추정되는 간병인 문제가 근본적으로 해결되기 위해선 중간착취를 일삼고 불법공급을 자행하고 있는 유료소개소의 문제점을 알려내고, 장기적으로는 간병인들이 병원의 책임하에 직접 고용되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투쟁을 위해서는 현재 서울대 간병인 노조와 공대위의 힘만으로는 역부족이다. 보건의료노조가 간병인 조직화에 앞장서고, 전국의 간병인 노동자들이 스스로 투쟁의 주체가 되는 과정이 필요하다. 하지만 그전에 우리가 넘어야 할 우리 내부의 과제 또한 있다. 앞서 서술했듯이 서울대 간병인 노동자들은 2001년 말부터 보건의료노조 서울본부에 직가입해 있었다. 투쟁을 진행하면서 간병인들은 간병인 지부 건설의 필요성을 느끼고, 서울대 간병인 지부를 건설했다. 그러나 지부 승인 과정이 순탄하였던 것만은 아니다. 논란은 간병인이 보건의료노조 조직대상이냐는 것이었다. 이 논란은 결국 민주노총 법률위의 자문을 얻어 보건의료노조 본조가 직접 승인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그러나 이것이 대형병원 정규직 노조의 이기주의를 극복하고 노동자의 단결과 연대를 전진시키는 것으로 정리된 것은 아니었다. 지난 3월 25일 서울대병원 간병인 지부장이 참석하지 않은 서울본부 집행위에서 '서울본부 차원에서 서울대병원 간병인지부와 관련한 논의를 더 이상 지속하는 것이 어렵다고 판단되므로 투쟁지원과 관련한 집행위 논의를 중단한다'고 결정하고 각 지부에 공문을 발송했다. 투쟁 8개월을 넘기며 힘들게 싸우고 있는 장기 투쟁사업장에 연대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이었다. 간병인 노조가 싸워온 지난 9개월 동안 이용석 열사를 비롯한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비정규직 차별 철폐를 외치며 산화해갔다. 이러한 비정규직 문제에 대응하는 노동자운동은 노사단체협상에 비정규직 차별 개선을 요구하는 것에 머물러서는 안될 것이다. 60%가 비정규직 노동자라는 현실은 비정규직 문제의 심각성을 드러내는 것만이 아닌 이러한 불안정한 노동조건이 노동자 일반의 조건이 되었음을 의미한다. 하기에 노동자운동의 조직화는 이렇게 일반화된 불안정한 노동조건에 맞서는 투쟁이라는 기본 관점에서 출발해야 할 것이다. 정말 춥고 길었던 투쟁으로 일터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지만, 조합원에 대한 서울대병원의 노동탄압이 계속될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그녀들의 투쟁이 힘을 얻기 위해선 아직도 넘어야 할 산들이 많기에 여전히 우리들의 어깨가 무거워야 하는 게 아닌가 생각한다. PSSP
1. 대량실업 직후 실업운동의 양상과 약평. 1) 대량실업 직후 실업운동의 양상 - 부산 실직자 거리행진 경제 공황 초기인 1998년 4월 부산, 실직자 권리를 선언하는 최초의 실업자 거리 시위가 있었다. '실직자 거리행진 준비위원회'의 주최로 열린 실직자 거리행진에는 부당해고된 파라다이스호텔 노조와 한국노총에서 탈퇴하여 민주노총에 가입한 트롤선 선원노조, 부산지역 건설일용노조, 그리고 일반 실직자들과 시민, 학생들이 참가하였다. 부산의 '실직자 거리행진'은 매월 셋째 토요일을 '실직자 거리행진의 날'로 정하고 거의 1년동안 거리행진을 진행하였다. 수차례의 행진을 통해서 자연스럽게 실업자군이 형성될 것이라고 기대했으나, 실업자들은 행진에 합류하지 않았다. 이후 노숙자들을 우선 조직하기로 하고 '노숙자 자활추진위원회'라는 모임을 만들었으나 주체가 행방불명 되는 등 모임 자체가 흐지부지 되었다. 다양한 시민사회종교단체들이 '행진'을 매개로 결합했으며, 행진초기 실직자의 주체적 결합이라는 점에서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실직자의 특성을 이해하지 못한 상황에서 '행진'만을 지속하는 것은 그들을 결합시키는데 한계가 있었다는 자평을 남겼다. - 일용직·저소득노동자 실업대책협의회 98년 6월에는 정부의 실업대책이 한계계층에 대한 고려가 전혀 없거나 취약하다는 점을 비판하면서 임시직·저소득 노동자의 실업문제대책을 요구하는 집단 움직임이 있었다. 주로 빈민지역에 뿌리를 두고 활동해온 빈민운동단체들이 중심이 돼 결성된 '일용직·저소득노동자 실업대책협의회'는, 일용직·저소득 실업자에 대한 정확한 실태 파악과 복지정책의 토대 구축, 노사정위원회에의 대표 참여, 대규모 공공사업 조기 발주, 원스톱 서비스센터 설립 등을 요구하면서 기자회견과 가두 시위를 벌였다. 건설일용노동자 및 지역빈민운동단체로 구성된 실업대책협의회는 정책단위를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실업대책협의회는 전국적인 실업극복단체의 연계를 제안하며 전국적인 실업정책생산단위로의 '전국실업극복단체연대회의'를 구성하였으며, 서울은 '서울지역실업극복연대'로 전환하게 된다. - 실업자동맹(준) 98년 12월 22일 전국실업자동맹(가칭) 준비위원회가 영등포산업선교회에서 결성식을 갖고 99년 상반기까지 전국실업자동맹을 건설할 것을 결의했다. 결성식을 가진 실업자동맹 준비위원회는 일주일에 27시간 미만으로 일하는 반실업자를 포함한 모든 실업자와 실업운동의 동조자들에게 회원자격을 부여하는 내규를 통과시켰으며, 실업자들의 생존권 확보와 일자리 창출을 위해 자주적 노력을 하기로 결의했다. 실업자동맹 준비위는 이어서 실업자들의 가장 절박한 문제로 △안정된 일자리의 마련 △실업자 지원을 위한 별도의 실업부조금고 등 지원대책 수립 △노숙자에 대한 인간적인 대책 마련 등을 정부에 촉구했다. 실업자동맹은 국민승리21이 중심이 되어 구성되었으나 이후에 독립적으로 활동을 전개하게 된다. 서울역 선전전의 진행해 실직자 주체를 형성하고자 했으며, 구호활동을 중심으로 진행되던 실업극복사업을 강하게 비판했다. 그러나 주체가 불안정하고 지속적인 사업을 진행하지 못하면서 조직이 해산되었다. 실업자동맹(준)은 실직으로 인해 서울역에서 노숙을 하던 주체들이 모여 결성했다는데 의의가 있다. - 실업자대회 98년 4월 23일 1차 실업자대회를 시작으로 10월까지 6차례의 실업자대회가 개최됐으며, 8월 26일엔 전국의 13개 실업운동 단체들이 전국실업운동단체연석회의를 결성하였다. 이는 IMF범국본을 중심으로 진행된 것으로(현재의 민중대회 형태) 실직자들의 실질적인 조직이라기 보다는 운동진영내의 주요과제로 실업의 문제를 부각시켰다는데 의의가 있을 것이다. - 전해투의 '실업자투쟁' 전해투는 '실업자운동'이라는 광범위한 표현보다는 '투쟁'을 조직한다는 것에 전해투 사업을 분명히 하고자 했다. 실업자운동 또는 사업으로써 취업알선, 상담 등의 구제사업은 전개되고 있지만 실제 실업자들의 근본적인 요구를 내걸고 실천적인 행동으로 투쟁하는 것은 소극적이다. 따라서 전해투는 원상회복·고용승계를 요구로 투쟁하는 노동자들을 실업자 군으로 규정하며 이들을 우선 전국적으로 묶어 세워 투쟁을 힘있게 조직하는 것을 중심사업으로 하고 '실업자 주체들의 투쟁'으로 실업문제를 직접 제기해 들어가는 것이다. 전해투는 독자적 계획으로 서울역 노숙자들을 대상으로 한 캠페인과 집회투쟁을 조직했으나 한계가 있었고, 정리해고 저지투쟁, 정리해고노동자의 원상회복투쟁, 고용승계투쟁을 '중앙집중화'시키기 위한 전국순회투쟁을 했다. 전해투는 '실업·해고 없는 세상에 살고 싶다'는 노동자들의 가장 절박한 요구의 함축적 의미인 '완전고용'이라는 공세적 요구를 내걸 때만이 자본과 정권으로부터 양보를 쟁취해 낼 수 있을 것이라는 판단으로 '실업반대! 완전고용!'의 구호속에 1차 순회투쟁을 전개했다. - 청년실업 1) '민중의 기본생활권 쟁취와 청년실업 대책 수립을 위한 전국학생특별위원회' 2) 청년실업운동본부(준) - 민우회, 여성실업자 '희망선언' 한국여성민우회는 전문대 이상을 졸업하고 일자리를 얻지 못하고 있는 여성실업자들로 구성된 [희망선언]을 발족하여 활동했다. 여성청년실업자들의 모임이라고 할 수 있는 [희망선언]은 여성실업자의 실업문제 해결을 위한 요구안 등을 제출하며 활동했으나 조직적 확대를 이루지 못하고 해산하였다. - 사회진보연대 실업정책생산모임 사회진보연대는 99년 2월 '실업정책생산모임'을 구성하여 실업운동에 대한 정책논의모임을 진행하였다. 실업의 원인과 실업운동의 이념과 과제를 밝히고자 했으며, 실업운동에 결합하여 정책적 역할을 담당하고자 했다. 99년 10월 '실업자 운동 어떻게 할 것인가'의 책을 발간하고 이후에도 정책제언 등의 활동을 전개했으나, 논의주체들이 불안정해져서 지속되지 못하고 2001년 해산한다. - 민주노총 고용안정센터 민주노총은 98년 상반기, 고용안정 및 실업대책사업의 인프라 구축을 위한 '취업알선 및 능력개발센타'를 설치할 것을 논의 하고, 민주노총내에 고용안정센터의 건립과 '실업자종합지원센터'의 적극적 결합을 통한 인프라 구축을 추진하게 된다. 민주노총은 99년 실업극복국민운동위원회의 지원을 기반으로 한 '실업자종합지원센터'의 건설과 함께 서울센터 및 전국을 연계하는 지역지원팀의 주관단체가 된다. 민주노총은 실업극복국민운동위원회의 운영위원단체, 실업자종합지원센터 (서울센터)지역지원팀의 주관단체, 전실연 건설이후 전실연 사업의 주관단체(공동대표-민주노총 위원장, 집행위원장-고용안정센터소장, 사무국-고용안정센터 내 설치)로서의 역할을 담당하며 실업극복운동의 주요한 축을 담당하게 된다. - 실업극복국민운동본부 정부 및 한겨레,MBC,종교단체,시민단체,양대노총 등을 중심으로 구성된 민관협력조직이며, 대량실업이후 조성된 실업기금(1,200억)을 운용하는 단위이다. 다양한 실업자구호사업을 민간단체에 위탁하여 진행했다. 실업극복국민운동위원회의 재원을 바탕으로 사업을 전개하고, 사업을 매개로 모인 실업자들을 교육하고 조직하고자 했다. 이후 실업운동의 주된 흐름을 형성하게 되는 이러한 경향은 '구호사업, 취업알선, 민간위탁 공공근로' 등을 통하여 지역의 저소득, 중고령 실업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사업을 진행했다. 실업극복국민운동위원회의 재원은 수많은 종교,시민,지역단체들의 실업극복사업의 참여를 만들어냈을 뿐 아니라 '실업'사업을 위한 새로운 단체들이 만들어지게 된 배경이 되었다. 2) 약평 대량실업 초기에 실업운동은 새로운 운동의 가능성으로 인식되었다. 이는 실업운동이 존재하고 있어서가 아니라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실업자와 사회위협으로 느껴지는 실업의 문제가 새로운 운동기반을 형성할 것이라는 기대에 따른 것이었다. 대량실업 초기 등장했던 '실업자동맹'이나 '실업자 거리행진' 등은 실업문제의 정치적인 성격을 극명하게 드러낸 것이었으나 더 이상의 자기계획을 가지지 못한 채 사라져갔다. 민중진영의 실업문제에 대한 대응은 더욱 단명했다. 대량실업 초기에는 노동사회운동단체를 망라하여 실업문제에 대한 입장과 대응방향이 쏟아져 나왔다. 민주노총이나 진보정당에서는 '실업자 조직화 어떻게 할 것인가'를 논의했고, 사회운동진영에서는 노동, 경제, 여성, 복지, 정보통신, 보건의료 등 각 부문에서 나타나는 실업의 문제를 진단하고 각각의 대응과 총체적인 실업운동이 필요함을 제기했다. 그러나 실업률의 하락과 함께 실업의 문제가 수그러들면서, 실업문제는 경기가 악화되고 있음을 나타나는 사례로, 문서에나 등장할 뿐이었다. '실업운동'은 근본적이고 정치적인 투쟁으로 인식되지 못했다. 조직화에 있어서도 실업자 대중의 상황을 인식하지 못한 채 무조건적인 조직화의 강조는 조직화에 있어서의 철저한 실패로 드러났다. 실업노동자는 행진 대오 안으로 들어오지 않았으며, 정리해고된 노동자들도 뿔뿔이 흩어졌다. 이시기 하나의 쟁점이었던 '실업자 노조가입'의 문제는 현장과 연결되지 못했다. 노동조합이 적극적으로 이를 제기하였으나 노사정위 협상내용의 하나일 뿐 실업자(정리해고자)들이 노조가입을 요구하거나 조직하는데는 실패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실업이 바로 생존의 위협으로 직결되었던 대다수의 실업자를 지원하고 다양한 서비스를 제공하면서 실업자 풀(pool)을 형성, 조직하려는 흐름이 생겨났다. 실업극복국민운동위원회의 재원을 바탕으로 하여 진행된 사업과 센터들이 그것이다. IMF 직후 거리로 쏟아져 나오는 실업자들을 보면서 국민 상당수가 생계에 위협을 받고 있다고 인식하여 출발한 실직자 지원사업은 쌀나누기, 시레기 나누기, 월 15만원지원 등의 지원사업을 펼쳤다. 운동진영의 일부에서 IMF재협상을 주장하고 거리로 나올 때에 민간단체를 중심으로 광범위하게 진행된 구호사업에 대한 평가는 다음 두가지다. 구호사업을 통해 실업노동자와 만나게 되고, 이를 계기로 조직화하는 매개가 되었다는 평가와, 결국 실업노동자들의 분노를 관리하고 잠재우는 역할을 했다는 평가가 제출되었다. 실업자구호사업은 국가의 위기상황에 대해 민간단체가 그 원인을 파악하고 책임과 대책마련을 요구하는 방식이 아닌, 정부나 언론의 '실업극복 캠페인'이나 '금모으기 운동'에 조응하여 민간단체가 앞장서서 근거없는 희망을 유포하고 위기관리를 위한 지원으로 표현되었다. 구호사업의 또다른 영향은 실업단체의 활동이 지원사업을 중심으로 진행되면서 '재정이 뒷받침되어야 하는 사업'을 중심으로 국한되었다는 것이다. 즉, 실업단체에서 진행하는 구호사업이 중단될 경우 실업자를 만날 수 있는 통로자체가 사라진다는 인식이 존재했다. 실업자를 만나려면 사업이 있어야 하고, 사업이 진행되려면 재정과 인력이 있어야 한다는 인식은 실업극복국민운동이나 지자체의 지원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상황을 낳았다. 2. 2000년 ~ 2003년까지의 실업운동 가장 높은 실업률을 기록했던 2000년 2월 이후 실업률은 계속 하락했다. 2000년부터 꾸준히 낮아진 실업률은 '실업'의 문제가 사회적인 관심에서 멀어지는 과정이었다. 정부의 실업대책의 축소 - 공공근로 축소 - 와 실업극복국민운동위원회의 지원으로 문을 연 전국 100개 실업자종합지원센터에 대한 지원중단은 변화된 실업의 양상과는 무관하게 실업의 문제가 사회적 이슈에서 벗어난 상황을 반영했다. 99년 결성된 실업단체의 전국적인 연대체인 '전국실업극복단체연대회의'(이하 전실연)는 거의 유일한 실업운동조직으로 남아 활동하게 되었다. 그러나 실업극복국민운동위원회의 해소 논의는 전실연이 사회적으로 실업운동의 요구를 제기하고 활동하기보다는 실업운동진영내의 재편과 재정지원문제로 국한된 측면이 존재한다. 1) 실업자종합지원센터와 조직화 99년 시범적으로 시행되었던 실업자종합지원센터는 2000년 전국 100개 센터로 확대되었으며, 2001년 실업극복국민운동의 지원중단으로 인해 많은 단체들이 센터사업을 중단했다. 그러나 취업알선, 생활·노동법률상담, 생계비 지원 및 기타 복지지원프로그램들을 수행했던 지원센터는 지원의 중단과 재개 등의 우여곡절을 거쳐 현재도 37개센터가 운영되고 있다. 실업운동에서 지원센터사업은 실업자의 조직화를 위한 유의미한 거점으로 인식되었다. 즉, 센터를 중심으로 실업자들이 모이고 각각의 사업을 통해 교육 및 주체를 조직화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많은 센터들이 공공근로 참여자나 생계비지원대상을 중심으로 상조회 등의 모임을 만들었으며, 취업알선상담을 통해 직종별 모임을 구성하고 노동조합의 구성까지를 논의하기도 했다. 생계비 지원 등 구호사업의 중단 이후에는 취업알선과 수급권 상담을 주요한 조직화의 매개로 판단하고 주요사업으로 배치했다. 취업알선의 경우 실업과 취업을 반복하는 일용직 중심의 실업노동자가 대부분이었기에 이들을 중심으로 직종별 모임을 구성하고, 낮은 임금에 반대하며 최소한의 노동법을 준수하도록 교육을 진행하기도 했다. 그러나 센터운영 자체를 기금에 의존했던 실업단체들은 기금의 중단으로 인해 절반 이상이 센터사업을 중단했으며, 일부 남아있는 상조회 등의 모임도 지역내 소규모 공동체 수준에 머무르고 있다. 모임은 구성되었으나 일자리의 중단이나 지원이 중단되면 해소되는 불안정한 상태가 지속되었다. 그나마 '지역주민 조직화'에 중심을 두고 활동했던 센터들은 지역운동단체들이 대부분이었으며 이러한 지역단체들은 지역내 주민들의 이해와 결합하는 주제로 활동의 중심을 변화하였다. 이는 일상적인 주민의 조직화를 목표로 하기에 조직화의 매개로서의 센터사업은 스스로의 목적과 방향을 정립하지 못한채 지원여부에 따라 운영이 흔들리는 한계가 있었다.. 실업자종합지원센터에 대한 평가는 정부나 기금을 '활용'한다는 입장에서 출발하였으나 결국은 스스로 '관리의 주체'가 되거나 활동의 범위를 오히려 국한시켰다는 측면에서 매우 중요하다. 현재에도 많은 단체들이 정부나 민간기금을 '활용'하여 활동하고 있으며, 지역내 거점으로의 이러저러한 센터의 건립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2) 전국실업극복단체연대회의 전실연은 고실업, 장기실업이 고착화되는 사회적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하기 위한 사업을 전개하였던, 노동, 여성, 시민사회, 종교, 빈민, 장애인 등의 단체들의 전국적 연대기구이다. 또한 전국적으로 개별화된 실업운동의 구심을 세우기 위한 활동을 목적으로 한 기구이기도 하다. 전실연은 사회적으로 상대적 소외계층의 실업문제를 중심으로 사업을 추진하였으며, 궁극적으로는 실업자를 주체로 한 조직화가 목적이었다. 전실연은 전국적 연대의 틀을 마련함으로써 장기적으로 실업자를 포함한 소외계층의 권리를 지켜내고 나아가 삶의 질을 향상하기 위한 영역을 확대하는 사업을 중심에 두었다. 2000년 공공근로 축소와 센터사업의 확대는 전실연의 활동과 기반을 확대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2001년 센터사업의 중단과 실업단체들의 자활후견기관으로의 전화는 전실연으로 하여금 연대기구의 성격과 목표를 분명히 할 것을 강제했다. 전실연은 실업운동의 방향논의를 위한 실업단체 설문과 논의를 통하여 '전실연은 '실업'의 문제를 주제로 하는 단체들의 아니라 '실업운동체'임을 분명히 하고, 전실연의 정체성 및 지향은 실업문제 및 실업운동에 대한 방향제시를 통해 사회운동속에서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는 것임을 확인했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이러한 실업단체의 요구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전실연은 실업단체의 유지·존속을 위한 상층협의에 중심을 두었으며, 전실연의 제도화와 민간고용안정센터 등을 추진하였다. 전실연은 실업운동의 요구와 목표를 설정하고 이를 사회적운동으로 제기하며 투쟁하기보다는 실업단체들을 유지하거나 실업기금을 민간기금화하기 위한 협상기구로 전락하고 말았다. 3) 실업극복국민운동위원회 대량실업 직후 조성된 1,200억의 민간실업기금을 운영하는 민간대책기구가 '실업극복국민운동위원회'이다. 그러나 민간단체들로 구성되어 있다고는 하지만 기금이 근로복지공단에 포함되어 있으면서, 실질적인 기금의 운용은 정부주도로 이루어졌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실업극복국민운동은 대량실업 초기 다양한 구호사업에 기금을 지원했으며, 2000년 전국에 100개의 실업자종합지원센터에 재정을 지원했다. 그러나 2001년 센터사업의 중단과 실업극복국민운동의 해소논의를 거쳐 2003년 해소하게 된다. 운영위원에 민주노총, 여연, 경실련 등이 참여하고 있는 실업극복위원회는 겉으로는 민간운동기구를 표방하고 있으나 사실상 실업단체의 활동을 규제하며 관리하는 역할을 해왔다. 구호사업 이외에 '실업자 조직'사업에 기금을 사용할 수 없다고 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각 센터와는 사업을 '약정'한 관계라는 이유로 실업극복국민운동의 의사결정이나 최소한의 논의결과조차 공개되지 않았다. 실업극복국민운동위원회를 둘러싼 평가의 지점은 크게 두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하나는 국민운동의 사업이 정부의 실업대책에 대한 국민들의 불만을 희석시키는 관리자 역할을 해왔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이러한 관리자의 주도적인 역할을 민간단체들이 담당하거나 혹은 묵인했다는 평가이다. 결국 실업극복국민운동위원회를 민간대책기구로 내세우며 실업자조직운동을 관리하고 실업자대중의 불만을 무마하고자 했던 정부의 의도와 이에 대한 비판보다는 기금을 중심으로 스스로 그 관리주체를 자임했던 민간단체의 문제점인 것이다. 3) 약평 - 실업운동의 과제와 목표 부재 실업운동진영의 활동이 가장 왕성했던 2000년은 '자활'사업에 대한 폭발적인 관심과 집중으로부터 시작되었다. 2월 말 자활후견기관 신청을 앞두고 제 실업단체들은 앞다투어 자활사업에 대한 계획을 제출하였다. 자활후견기관 신청이 마무리되자 국민기초생활보장법 시행령 논의가 진행되었다. 또한 5월말로 들어서면서 실업운동진영의 쟁점은 공공근로 축소반대, 실업예산 확충으로 맞추어졌다. 3단계 공공근로의 대폭적인 축소는 전국의 실업노동자들을 한자리로 모이게하며, 3000명이 모이는 실업자대회를 가능하게 했다. 자활사업·국민기초생활보장법·공공근로의 3대 쟁점사안에 대한 대응과 계획을 중심으로 실업운동진영은 움직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렇나 3대 쟁점을 관통하는 실업운동의 요구는 모호했다. 현안에 대한 구호는 존재했으나, 실업을 제거하기 위한 정치적 구호는 부재했다. 전실연은 2001년 논의를 통하여 실업문제의 사회화와 실업운동의 주체형성, 연대운동의 강화를 목표로 설정했으나, 구체적인 요구나 사업으로 확대되지 못한채 흐지부지 되었다. 대량실업 직후 'IMF 재협상', '구조조정, 정리해고 반대', '노동시간 단축을 통한 일자리 창출'이외에 실업운동진영이 자신의 정치적 요구를 명확히 한적이 한번도 없다. 또한 현재 일자리를 지키고 있는 사람들은 임금인상과 고용안정을 위해 싸우고 이미 실업자가 된 사람들을 위해서는 사회적 안전망을 요구한다는 식의 이분법적 사고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취업자와 실업자가 원하는 것은 "안정적인 일자리"이다. '안정적이고 떳떳한 일자리의 적극적 창출'은 계속적으로 강조되고 확인되어야할 요구임에도 이는 선명하게 제출되지 못했다. - 실업자에서 '실업노동자'로 이시기 실업운동의 유의미함은 그동안의 '실업극복'사업에서 '실업운동'으로의 정체성을 확립해야한다는 요구들이 분출되었다는 것이며, 실업자를 '실업노동자'로 규정하며 주체조직화운동에 대한 고민을 확대했다는 것이다. '실업노동자'라는 언명은 실업자와 노동자가 본질적으로 동일한 조건에 서 있다는 원칙적인 관점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리고 구조조정 상황에서 모든 노동자는 잠재적으로 실업의 위험을 가지며, 실업자들은 영원히 실업상태를 지속할 수 없기 때문에 다양한 방식으로 불안정한 노동의 한 부분을 차지한다. 노동자나 실업자 모두는 자신의 노동을 팔아야만 일용할 양식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실업자와 노동자라는 대립적 개념이 아니라, "실업노동자"라는 인식을 통해서 양자의 동질성을 파악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실업자가 중장년실업자인가 청년실업자인가 정리해고자인가과 무관한 것이며, 노동자라고 하는 규정자체가 '노동조합'이라는 조직형태로 귀결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하고자 했다. - 실업운동/제3섹터운동 실업운동진영이 논의를 돌아보면서 주목할 만한 부분이 있다. 편의상 이름을 붙이자면 실업운동/제3섹터운동의 논의가 그것이다. 실업극복활동의 방향성을 실업자'운동'으로 잡을 것인가, 아니면 지역의 자활사업·제3섹터사업을 통한 지역운동의 영역으로 잡을 것인가 하는 논점이다. 이러한 논의는 표면적으로 활발히 진행되지는 못했으나 둘다 계속적으로 제기되면서 단체 및 활동가들의 주된 고민의 한축이었다. 이는 실업운동에 대한 고민을 활발하게 하는 긍정적 요소를 지녔으나 거꾸로 그 둘을 선택 혹은 다른 지점의 문제로 사고하는 편향을 낳았다고 보여진다. 즉 실업자운동이라는 포괄적 영역과 자활사업 등 하나의 영역의 문제를 동일한 심급으로 보면서 전자에 있어서는 구체성의 결여를, 후자에 있어서는 운동성의 배제를 가져오는 경향이었다. 여기에는 자활사업에 대한 과도한 긍정성 부여, 혹은 이를 통한 대안의 모색에 대한 맹목적 의미부여가 있었음을 부인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이같은 논의를 통하여 암묵적으로 실업극복단체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명확히 할 것을 강제받았다. 지역의 기반과 '선의'를 가지고 정부의 비판적(혹은 경쟁적)협력자로 남을 것인지, 실업의 '제거'를 위하여 실업대중 스스로가 조직하는 길고 지난한 투쟁의 길에 나설 것인지. 그러나 논의는 지속되지 못했으며, 자활사업 및 제3섹터논의는 자활후견기관의 몫으로 넘겨졌다. 실업운동이 지속되면서 실업운동의 방향과 요구를 밝히는 방향이 아니라 오히려 모든 것을 포괄하는 방식으로 활동이 진행되면서 실업운동은 재편되지 못했다. - 사회·민중운동과의 연대의 단절 실업운동진영은 사회·민중운동진영과의 연대를 어디로부터 꾀할지 알지못했거나, 역량의 한계를 이유로 뒤로 밀어놓은 듯 하다. 그러나 실업운동의 목표가 '궁극적'으로 실업의 '제거'에 있다면 실업과 불안정노동을 강요하며 빈곤을 확산시키는 원인이 신자유주의 정책과 구조조정에 있음을 분명히 확인해야 한다. 이는 어느 한 세력의 역량으로 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또한 각각의 차이는 있다할지라도 이에 대해서는 투쟁의 한 괘를 같이 하고 있음을 알 수 있기에 '자주성'을 기반으로 한 '연대성'의 구현에 보다 적극적으로 나서야 하는 것이다. 결국 실업운동진영은 사회적 이슈에 대해서 실업노동자로의 목소리를 내거나 실업의 문제를 제기하지 못하며, 부문의 운동으로 스스로를 국한시켰다. 또한 투쟁하는 주체들의 연대를 통한 실업운동의 제기와 주체의 조직화로서의 실업운동이 아닌 '스스로의 조직'을 위한 활동이 중심이 되며 사회운동으로의 실업운동을 제기해내지 못했다. 3) 2004년 현황 전실연은 상반기 수련회를 통해 법인 총회를 열고 법인 설립을 결정했다. 전실연은 사회적 일자리에 대한 전국적인 사업단을 구성하여 그중 여성일용가사사업단을 브랜드화('우렁각시')하여 발족했다. 전실연은 향후 실업운동의 방향에 대해 실업노동자의 조직을 통한 주체운동으로서의 묘연함과 '실업'을 중심으로 활동하기 어려움을 제기하며 정책적 역량을 강화하고, 모니터링 등을 통한 대정부 정책제안을 제안하고 있다. 실업극복국민운동위원회 해소 이후 남은 기금은 '실업극복국민재단'이 설립되어 운영하고 있다. 실업극복국민재단은 '일자리만들기운동본부'를 제안하여 발족을 앞두고 있다. 3. 실업운동의 평가와 과제 약평을 통해서 실업운동의 시기별로 평가할 지점들을 서술했다. 실업의 원인에 대한 진단을 통해 실업운동의 목표와 요구를 설정하지 못한 것이 가장 큰 문제점이다. 실업운동의 목표와 요구의 부재는 결국 실업운동이 운동으로서의 자기 역할을 수행하기 보다는 '물질화된 조직'으로 화석화되면서, 스스로의 활동을 축소시키는 경향을 낳았다. 그렇다면 실업운동은 무엇인가? 실업운동이 실업노동자가 주체가 되어 '실업'의 원인을 제거하고, 모두가 떳떳하고 안정적인 일자리에서 스스로의 노동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받는 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것이라면 그동안 온전한 의미에서의 실업운동은 존재하지 않았다. 실업노동자들에 대한 관리와 실업자에 대한 구제정책만 있었을 뿐이다. 많은 실업단체들이 있었지만 실업노동자들은 실제로 실업운동에서 주체로 서지 못했다. 실업노동자들은 구호의 대상으로 전락되었고, 자신들의 요구에 근거한 독자적 조직을 꾸리는 데 실패했다. 실업노동자들의 권리를 당연한 권리로 인정하게 하는 데에도 실패했다. 즉, 실업자운동으로의 실업운동은 형성되지 못한 것이다. 대량실업 초기 거리로 밀려나온 실업자들을 조직하거나 정리해고된 노동자의 조직화를 통해 실업운동의 주체를 형성하려던 시도는 실패했다. 그 이후 일상적인 사업을 통해 중고령 장기실업자를 조직하려던 시도는 지금도 진행중이나 아직까지는 긍정적으로 평가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실업노동자'는 누구인가? 노동의 유연화로 인한 노동의 불안정화는 대다수의 노동자들을 실업의 위협에 놓이게 했을 뿐 아니라 일상적으로 실업과 취업을 반복하게 하고 있다. 즉,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는 실업노동자는 거의 없다는 것이다. 다양한 불안정한 일자리를 떠도는 노동자들과 노동시장에서 배제된 중고령장기실업자와 청년실업자. 이러한 실업노동자들의 다양한 군에 대한 구체적인 파악과 계획없이 실업노동자의 조직화는 여전히 어려운 문제이다. 또한 '실업노동자'의 '조직'에 대한 상조차 불분명하다. 그동안의 논의속에서 노동조합(일반노조 혹은 실업자노조)이나 자조모임 등의 상이 제시되었으나, 어떠한 것도 정확한 조직적 상이라고 보기 어렵다. 그동안 실업단체들의 활동은 '실업운동이라기보다는 실업이라는 현실공간에서 다양한 배경과 지향을 갖는 단위들이 운동적 접근을 하고 있는 상황(실업운동의 전망과 과제, 김홍일)'이었다. 이는 '실업문제를 중심으로 다양한 운동의 연대와 결합이라는 긍정적 차원과 함께 실업운동의 단일한 지향과 목표설정의 한계가 존재함을 의미한다. 그러나 실업단체들은 '실업'이라는 문제를 다양한 방식으로 접근해왔으며, 사안적 연대라기 보다는 '실업문제'에 대한 일관된 정책방향을 제시할 것을 요구받았다. 즉, 다양한 요구는 실업운동에 대한 고민으로, 나아가 실업문제 및 실업운동에 대한 방향을 제시하고 이에 따른 일관된 정책제시와 실천을 통해 정체성을 확보, 사회운동으로 자리매김해야 한다는 인식의 발전으로 이어졌다. '실업'의 문제는 이슈화되지 않지만 그렇기 때문에 실업운동이 '실업'만의 문제로는 한계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실업'의 문제를 극명하게 제출하기 위하여 '실업'의 문제가 실업노동자의 삶속에서 어떠한 구체적 문제들로 드러나는지를 보다 폭넓게 바라봐야 한다는 과제를 설정하기도 했다. 그러나 실업단체들은 실업문제의 근본적인 원인을 폭로하고 그 투쟁을 신자유주의 반대투쟁으로 확장시키는 데에 실패했으며, 불안정노동과 빈곤의 문제를 통해 실업의 문제를 제기하는 것도 실패했다. 물론 실업운동을 반신자유주의 운동으로 발전시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실업의 근본적인 원인이 지속적으로 노동자들을 해고하고 노동의 유연화를 촉진시키는 신자유주의 정책에 있다면, 이에 맞서서 고용안정과 안정적인 일자리를 요구하며 정부 정책의 전면적 수정을 제기하고 나아가 신자유주의 반대투쟁에 실업운동이 위치할 수 있도록 해야했다. 실업운동(?)의 대표적 조직인 전실연은 신자유주의 정책에 맞선 투쟁을 조직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스스로의 운동을 합의주의적인 시민운동으로 축소시켜왔다. 주체를 중심으로 하지 않고 돈을 매개로 하는 지원사업이 갖는 한계는 자명하다. 기금을 활용하는 것 자체가 문제라는 것이 아니다. 기금이 '활용'이 되려면 자기 운동에 대한 명확한 방향과 요구가 있을 때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전실연은 오히려 지원을 안정화하기 위해 연대운동기구로의 전실연을 제도화하는 등 우려스러운 행보를 계속하고 있다. 전실연은 스스로의 냉철한 활동평가를 통해 '실업운동체'로서의 역할을 재정립하고, 민중운동진영과 함께 사회운동·주체운동으로서 실업운동의 길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실업운동의 주체는 반신자유주의투쟁의 주체이기도 하다. 민중운동진영 또한 실업운동을 어느 한 영역의 운동으로 국한시키지 않는 신자유주의 반대투쟁의 일 주체로 세워낼 수 있도록 해야 한다.PSS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