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노총 총력투쟁에 대한 제언 노동자들에게 한여름은 뜨거운 투쟁의 계절이다. 대부분 봄부터 시작되는 사업장별(혹은 산업별) 임금 및 단체협상 투쟁이 서서히 무르익어 급기야 거리로 분출되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매년 그래왔다. 이글거리는 아스팔트 위, 혹은 날선 전경방패 앞에서 '노동자'는 다시 태어났다. '옆 공장 근로자'는 '동지'가 됐다. 반도의 동남부, 공업도시 울산에서 87년 대투쟁의 시동을 걸었던 현대엔진노조가 공설운동장으로 향하며 앞세운 덤프트럭에 걸린 현수막에는 '임금 25% 즉각 인상하라'고 적혀있었다. 94년 서울 종묘공원에서 열린 전지협 공동투쟁 결의대회 무대 왼편에는 '승리 94년 임투'라고 쓰인 세로 현수막이 자리잡고 있었다. 물론, 임단투의 종착역은 '임금인상'이 아니었다. 그들의 머리띠에 서툰 글씨로 선명하게 박힌 '노동해방'이 이를 웅변했다. 노동자는 '계급투쟁'으로 전진했다. 원하던 원하지 않던, 당연한 일이었다. 모두가 아는 상식이지만, 여름을 달구는 노동자 투쟁은 계급의 학교이자 연대 그 자체였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여기까지 왔다. 올해에도 임단투는 본궤도에 올랐다. 6월10일 보건의료노조 산별파업을 신호탄으로 택시(16일)가 이미 파업을 진행했고, 금속 (29일)-궤도(7월 중순)로 꼬리에 꼬리를 문 파업이 이어질 전망이다. 따지고 보면 이번 총력투쟁은 매년 펼쳐오던 '임단협 시기집중 투쟁'의 성격을 갖고 있지만, 그렇다고 예년과 같은 시선으로 봐서는 곤란하다. 과거와는 구분되는 몇 가지 조건과 쟁점들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2004년 임단투 주요쟁점 민주노총의 이번 상반기 투쟁은 이수호 위원장 체제가 들어선 뒤 치러지는 첫 전국차원의 집중투쟁이라는 점뿐만 아니라, 탄핵사태 뒤 더욱 강력해져 돌아온 노무현의 자유주의 정부와의 승부라는 점에서 눈길을 끌고 있다. 주5일제가 본격적으로 시행되는 때도 7월1일이다. 보건의료노조와 금속노조, 공공연맹 등 대부분의 투쟁사업장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주5일제 시행에 따른 노동조건 유지와 인력충원 문제도 피해갈 수 없는 지점이다. 특히 보건의료노조는 주5일제를 두고 노사정 대리전 양상마저 띠고 있다. 특히 올해에는 '산업공동화 저지' '노동연대기금(산업발전기금 혹은 지역사회발전기금)' 등과 같이 이전엔 찾아보기 힘들었던 의제들이 주요 요구로 자리잡고 있다. 비정규직 차별철폐·정규직화도 여전히 중요한 쟁점이다. 민주노총은 '원·하청 공동임단투를 통한 사업장내 차별철폐' 등을 올 임단투 지침으로 내린 상태다. 특히 민주노총의 입장에선, 최근 시작된 '노사정 대표자회의'가 신경 쓰이지 않을 수 없다. 청와대가 주최한 노사정 토론회에서 전격 합의돼 꾸려진 '노사정 대표자회의'는 8월까지 시한부 운영되지만 '노사정 대화틀 재편' 하나만을 의제로 하고 있는 만큼, 8월 민주노총 대의원대회와 맞물려 공식적인 사회적 합의기구로 다시 출범할 가능성이 높다. 민주노총으로선 상반기 투쟁을 통해 노사정 대화틀 내 주도권을 쥘 수 있다고 판단할 여지도 있기 때문이다. 민주노동당 원내진출 뒤 처음 치러지는 총력투쟁이란 점도 예년과 색다르다. '10석에 불과한 소수정당인 민주노동당이 원내에서 제 힘을 발휘하기 위해선 민주노총의 대중투쟁이 필수'라는 입장을 여러 차례 확인해 온 민주노총으로선, 주5일제 등 주요 현안에 대해 가두투쟁을 통한 쟁점화를 이룬 뒤 공을 국회의원들에게 넘겨 법·제도개선으로 나아가는 고민도 있는 듯 하다. 2004년 민주노총 총력투쟁의 쟁점 총력투쟁이 이제 막 시작된 단계인 만큼 섣부른 판단이나 평가를 내리긴 어렵다. 하지만 '관찰'이 아닌 '연대'의 관점에서 본다면, 몇 가지 평가할만한 지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이른바 '총력투쟁'이란 이름의 싸움에서 민주노총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전국적인 투쟁전선을 형성하는 것이다. 여기서의 '전국전선'이란 물론 지역적 의미만을 담고 있는 것은 아니다. 전산업과 부문이 '단일한' 전선에 서는 것은 임단투가 '임금인상'에 만족하지 안도록 하는 핵심이다. 모두가 경험으로 알다시피, 이 같은 전국전선이 자연스레 그냥 생기진 않는다. 중앙지도부의 역할은 관건 중의 관건이다. 하지만 민주노총 스스로도 <6∼7월 세부투쟁계획(안)> 문건에서 '지금 드러나고 있는 양상을 보면, 연맹별 각계약진 양상이 우려되고 있으며, 요구에 있어서도 백화점식 나열현상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고 평가하고 있다. 민주노총은 그 이유로 '민주노총 차원의 대중적인 목표제시가 뚜렷하지 못하고, 전반 상황을 총괄적으로 파악-분석-대책수립-집행으로 이어지는 집행체계가 원활치 못한 것'을 들고 있다. 민주노총은 이번 상반기 총력투쟁을 맞아 '전략지원단'을 꾸려 대응에 나서고 있다. 임원과 사무총국 일부로 구성된 전략지원단은 △당면투쟁 △산업공동화 △공공부문 △제도개혁 등 네 개의 팀을 구성해, '총연맹을 중심으로 통일단결된 투쟁대열을 구축해 상반기 투쟁을 승리로 이끈다'는 게 목표다. 이전 투쟁시기 때 각 산별연맹 위원장 등으로 구성됐던 '투쟁본부' 보다는 축소된 형태다. 다만 중앙임원과 사무총국 일부의 권한과 역할을 높여 대응하겠다는 취지로 해석된다. 기존 골간 체계가 아닌, 중앙지도부가 직접 현장을 장악할 수 있는 새로운 통로를 만든 셈이다. 민주노총도 위 문건을 통해 '연맹별 투쟁상황을 총연맹이 장악하고 있어야 한다. 한마디로 손바닥 들여다보듯이 해야 한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현실에서 드러나는 양상은 (민주노총 스스로도 평가하고 있듯이) 성공적이라고 보기 어렵다. 투쟁이 이뤄지고 있는 산별노조·연맹에 많은 인원이 달려들어 '총력지원'에 나서다 보니, 당연히 해당 투쟁현장의 쟁점이 최대현안으로 떠오른다. 이를테면 보건의료노조의 '주5일제'가 그런 형국이다. 그러나 민주노총이 보다 중심을 둬야 하는 것은 노동·자본 사이의 전국전선을 형성할 수 있는 쟁점을 투쟁으로 기획하고, 이를 중심으로 대오를 형성하려는 노력이다. 예컨대 지난해부터 불거지기 시작해 올해 입법이 추진될 '노사관계 로드맵' 등이 그것이다. 비정규직 차별철폐·정규직화 투쟁의 경우, 민주노총의 핵심지침 중 하나는 '원·하청 공동임단투'다. 이 경우 금속·화학 사업장을 중심으로 이뤄질 수밖에 없다. 이 두 단위가 아직 본격적인 쟁의국면으로 넘어가지 않아 관련 투쟁이 아직 눈에 띠는 수준으로 발전하진 않았다. 그러나 형국을 보면, 지난주의 파업에 들어갔었던 금호타이어와 앞으로 파업에 돌입할 현대자동차 이외에 내용상의 공동 임단투를 기획하고 있는 단위는 아직까지 찾아보기 힘들다. 더구나 '공동투쟁본부' 등을 구성하고 있는 사업장은 지금까지 단 곳도 없다. '원하청 공동투쟁'은 그 특질 상 제조업 대기업에서 문제가 될 수밖에 없다. '현대자동차노조'로 상징(?)되는 우리나라 대기업 노조는 지난 2003년 임단투를 거치며 '귀족 노동자'로 낙인 찍혀 왔다. 물론 이 같은 정권과 자본의 공격은 노동자 분할통치 전략의 일환이다. 정규직·비정규직 사이의 차별은 사회의 구조적 문제이자, 신자유주의 확산에 따른 노동유연화의 결과다. 경총이 주장하는 것처럼 "정규직 임금은 노조가 결정하는 독점임금이고, 비정규직 임금이야말로 진정한 시장임금"이라는 말은 이 같은 원인을 제대로 읽어내지 못한 오류다. 그러나 날로 확대되는 기업규모간·고용형태간 임금격차로 노동자 사이의 생활격차가 벌어지고 이것이 노동자들 사이의 연대 의식을 해쳐온 것 역시 사실이다. 이 같은 추세가 계속될 경우, 우리는 노동자 연대성이 점차 훼손되는 것을 막아낼 수 없다. 기업규모·고용형태간 차별해소를 위해서는 정부의 경제정책과 산업정책을 뒤엎어 독과점 위주의 경제구조와 원·하청 불공정 거래 등을 바로잡아야 한다. 그러나 이런 투쟁이 가능할 때까진 만만치 않은 시간이 소요될 것이기 때문에 나온 고민이 바로 '원·하청 불공정 거래 개선과 임단협 공동투쟁'이다. 따라서, 이번 투쟁은 노동계급 내 침투해 있는 '정규직·비정규직 신분의식'을 깨부수고, 이런 투쟁을 통해 한국사회를 전변시켜 내기 위한 큰 싸움으로 나아가는 과정이다. 이길 수도 있고, 질 수도 있다. 하지만 이기든 지든, 공동투쟁의 기획과 수행 자체가 '연대성의 회복'이다. '대기업노조를 향한 정권·자본의 공격에 대한 방어책'으로서의 공동투쟁을 넘어, 노동자 스스로 계급내부의 단결과 연대를 확인하는 과정이 돼야 한다. 민주노총의 '원·하청 공동 임단투' 지침이 과거와 같이 '협상 막판 슬그머니 포기할 수 있는 카드'로 전락해선 안 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연대성의 회복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최근 벌어지고 있는 최저임금현실화투쟁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미 금속노조와 보건의료노조의 각 산별노조는 올해 임단투의 주요내용으로 산별최저임금을 요구하고 있다. 비록 많은 단위노조나 산별연맹에서는 최저임금현실화의 요구를 내세우고 있지 않지만, 현재의 노동자내부의 위계화와 분절화를 극복할 수 있는 주요 원동력이 될 수 있는 만큼 확산의 여지는 충분히 있다. 또한 최근에 '조직된 노동자의 힘으로 최저임금현실화 쟁취하자'라는 슬로건 하에 최저임금심의위원회 앞 아침집회에 결합하는 투쟁사업장은 비록 투쟁과정에서 한두번의 결합이지만, 최저임금투쟁의 인식을 확산시킨다는 의미에서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 하지만 아직까지 많은 노동자들이 최저임금투쟁은 저임금·비정규노동자들이 하는 것이고, 시혜적이며 동정하는 것으로 바라보는 시선 또한 존재한다. 이러한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현재의 집회동원이나 제도개선의 내실화뿐만 아니라 조합원이 직접 참여할 수 있는 통로를 열어주는 총연맹과 각 연맹의 비상한 노력 또한 요구된다. 최저임금현실화 투쟁은 연대성의 회복과 더불어 불안정노동철폐투쟁의 주체를 발굴한다는 또 하나의 의미가 있다. 최근 벌어지고 있는 최저임금·최저생계비 현실화를 위한 공동투쟁은 최저임금·최저생계비 결정방식에 대하여 문제제기를 하고 있으며, 최저임금산정기준 또한 최저생계비에 기반하여 최저임금 산정을 모색하고 있는 측면에서 향후 최저임금현실화 투쟁의 내용과 폭을 넓힐 것으로 보인다. '연대기금' 문제도 관심거리다. 노동연대기금(보건의료노조), 산업발전 및 사회공헌기금(완성차 4노조), 지역사회발전기금(화학섬유연맹 여수산단) 등의 이름으로 나타나고 있는 각종 '연대기금'은 타결여부는 물론, 타결 과정에서 구체화될 기금의 내용과 성격 등도 중요하다. 일단 보건의료노조의 경우 주5일제를 둘러싸고 노사가 팽팽한 입장 차이를 보이고 있는 가운데, 노동연대기금에 대해선 상당부분 의견접근을 이룬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완성차 4사 노조의 경우, 사용자 쪽에서 "사회공헌기금은 받아들이되, 산업발전기금은 추후에 논의한다"는 내부입장을 정한 것으로 전해졌다. 일단 '연대기금'은 최근 민주노총 이수호 체제 들어 본격화되기 시작한 노사정 합의주의를 뒷받침하는 든든한 물적 조건이 될 우려가 높다. 그 용도의 범위가 너무 넓어 하나하나 지적할 순 없지만, 일단 비정규직 문제와 맞물려 정규직 노조와 사용자에는 '면죄부'를, 민주노총에는 '사회적 합의주의'를 줄 수도 있다. 이는 민주노총의 의지와 상관없이, 한국의 노사정 관계에서 기인하는 어쩔 수 없는 효과다. 중요한 것은 조성될 기금의 내용과 성격이다. 민주노총이 밝힌 것처럼 '주택구입자금 보조 등 노동자 재산형성 지원' '자녀 학자금 보조' '지역탁아소 설립' 등도 중요할 수 있지만, 비정규직 관련한 문제를 '연대기금'을 통해서만 해결하려 해선 안 된다. 민주노총이 '사회적 합의주의'의 혐의에서 자유롭기 위해선 더더욱 그렇다. 또 연대기금을 노동운동의 새로운 상으로 격상시키기보다는, 사용자와 정부를 압박하고 관련 법·제도 개선과 비정규직 투쟁주체 조직화 등의 유의미한 경로로 파악하는 것이 더 낫다. 이 과정에서 비정규직 문제가 '구조적 문제'임을 늘 확인해야 한다. 비정규직 차별철폐가 '노사가 함께 기금을 출연해 해결해야 하는 문제'로 인식돼선 곤란하다. 전진을 위하여 우리는 앞서 올해 민주노총에서 제기한 '원·하청공동임단협', '연대기금', '산별최저임금요구와 법정최저임금개선'등을 연대지향적이며 계급주체형성의 측면에서 살펴보려 하였다. 다른 차원에서 보면 총연맹에서 내세웠던 데로 '투쟁과 교섭의 병행'기치아래 투쟁과 더불어 '사회적(?) 교섭'을 위한 줄타기가 계속되고 있다. 이후 많은 사업장에서 파업을 예고하고 있고 보건의료노조는 그 어느 때보다도 선두에 서서 싸우고 있다. 여기에 진정으로 연대하는 것은 노동자들을 조직화하고 지원하는 것이지, 직권중재시 노사정위참여 여부를 전면 재검토한다는 협박(?)이 아닐 것이다. 물론 정부와의 기싸움에서 기선을 잡기 위한 강경 발언일 수 있지만, 이미 노사정위에 참여하는 것을 기정사실화 하는 것 같아 안타깝기만 하다. 지난 시기 노사정위가 어떠한 역할을 했고, 민주노총과 불안정노동자들에게 어떠한 존재였는지 잊었단 말인가? 경험했듯이 반-신자유주의 투쟁과 합의주의는 함께 갈 수 없는 것 아닌가? 민주노총은 한국사회에 존재하는 가장 규모 있고 투쟁력 있는 대중조직이다. 민주노총이란 이름의 거함이 어느 방향으로 돛을 올리느냐에 따라 우리 사회의 운동이 크게 달라질 수 있다. 임단투 시기에 어떤 쟁점과 과정을 거쳐 전국적인 투쟁전선을 만드는지 여부가 중요한 것도 이 때문이다.
조금 상관없는 얘기. 주말 늦은 밤, 버스는 만원이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보니 왠지 엉덩이 쪽이 따뜻하다. 고개를 획 돌리니 옆에 서있는 남자의 손이 재빨리 사라진다. 기분은 더럽지만 그냥 가기로 한다. 그 남자도 취한건지 꾸벅꾸벅 존다. 어랍쇼 졸고 있는 건지 조는 척 하는 건지, 이 남자 하반신이 좌석에 앉은 젊은 여자 무릎 쪽으로 향한다(버스는 바퀴 부분의 좌석이 높다). 한참을 노려보다 “야, 좋냐?”라고 큰소리로 말해버릴까 하다가 가만보니, 앉아있는 여자는 창가쪽 남자가 자리를 너무 많이 차지하는 바람에 좌석의 1/3 정도밖에 차지하지 못한 채 왼쪽 다리가 통로 쪽으로 한참 삐져나와있다. 서있던 남자가 내리고, 잠시후 앉아있던 여자도 내리고 나니 모든 것이 정상으로 돌아왔다. 그 남자가 다리풀린 취객이었고 여자의 다리가 삐져나와있었기 때문이라고까지 생각되기도 한다. 남자가 정말 졸고 있었는지, 의도적으로 제 몸뚱이를 여자에게 밀착시켰는지는 이제 확인할 바가 없다. 모든 것이 풍문처럼 떠돌 뿐이다. 창가에 앉은 남자와 서있던 남자 사이에 끼어있던 그 여자는 무엇이 진실이었는지 확인할 바 없는 풍문이 지난 후, 심야버스를 타지 말자고 집에 일찍일찍 들어가자고 마음을 먹었을지도 모른다. 남성 일반에 대한 불쾌감과 두려움이 앙금처럼 깔려있을지 모른다. 떠도는 소문이 사건이 되고, 사건을 겪지 않는 사람에게까지 이해와 공감을 유발하는 보편적인 역사가 되는 과정이란, 객관적 사실관계의 조사에 선행하는 주체의 발견이다. 화자가 누구냐에 따라 이야기는 달라지게 마련이니까. 앞서의 남자가 화자인 상황을 가정했을 때, 좌석에 앉아있던 여성에 대해 불쾌감을 표시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리 싫어하지 않았다라거나, 오히려 즐기고 있었다라는 서술까지 가능해진다. (그게 대부분의 강간포르노 신화의 줄기) 객관적 사실의 규명이란, 문제의 원인을 밝혀내는 과정과 별개일 수도 있으며, 역시 이야기의 주체가 누구이냐에 따라 진실은 달라지게 마련이다. 노동하는 여성에 대한 풍문. 지난 5월 11일 사회진보연대 여성위원회 월례포럼이 진행되는 동안, 우리는 여전히 여성노동자에 대한 풍문들에 의거한 토론을 진행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휩싸였다. 간병인 노동자가 토론 자리를 함께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야기는 돌고돌고 허공을 맴돌았다. 전 세계 소득의 10%, 전체 부동산의 1%만을 소유하고 있고, 전 세계 빈곤층 13억 인구 가운데 70%를 차지하고 있는 여성. 하청, 파견, 성과급, 시간제 노동 등이 정규직 일자리를 대체해나가고 있는 노동유연화 과정의 최대 희생자인 여성, 여성노동자의 94%가 비정규직, 비조직 부문에서 일하며 극도의 불안정성과 착취에 그대로 노출되어 있다. 등등의 일련의 서술은, 물론 현실을 반영하는 객관적인 지표들이다. 우리는 이러한 객관적 사실을 통해 여성노동자의 처지에 대한 이해의 기반을 마련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객관적 사실을 인식함과 더불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여성노동자에 대한 억압의 현실을 서술하는 화자, 즉 주체의 문제이다. 객관적 사실의 나열은 한편, 떠도는 소문들에 불과하다. 그 자체로 개조되어야 할 원인들이 규명되지 않는다. 예컨대, 전체 노동자에게 가해지는 억압과 착취가 왜 여성 노동자들에게 극대화되어 나타나는가? 왜 여성노동의 대부분이 비정규, 비공식부문 노동으로 대체되고 있는가? 왜 여성노동의 대부분이 평가절하되고 있는가?(이는 자본가들에 의해서 뿐만 아니라 노동자 내부에서도 빈번히 일어나는 현상이라고 했을 때) 노동하는 여성에 대한 여성노동자에 대한 온갖 떠도는 풍문이 진실이 되고, 변화되어야 할 현실의 조건으로 규명되기 위해서는 관점의 이동, 즉 숱한 ‘주체화’ 과정이 요구되는 것이리라. 주체화 과정을 통한 여성노동자들의 현실과 과제에 대한 일인칭 서술 시점으로의 전환이 이루어지지 이전에 관찰자 시점의 객관적 관점으로는 차별과 불평등을 정당화하는 사회적 통념을 뛰어넘을 수 없을 것이다. 간병인 노/동/자/ 그러나 이 텀의 서술을 시작하는 순간 괴로움에 빠진다. 이 글이 3인칭 시점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할 것이라는 비관적 전망 때문이다. 하지만 간병 일을 하는 아줌마에서 간병인 노동자로 자기정체성을 발견해나가는 과정을 통해, 나 스스로, 그녀들을 아줌마(지하철에서 자리가 나면 냅다 가방을 던지고 달려가는 것으로 묘사되는 무성적 존재)에서 여성노동자로 인식하게 되기까지의 변화를 경험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은 있다. 내가 겪은 혹은 보았던 간병의 경험은 환자인 가족 구성원 누군가에 대한 다른 가족 구성원의 보살핌, 그 자체였다. 그것의 여의치 않을 때 어쩔 수 없이 돈을 들여 고용하는 사람이 바로 간병인이었고, 이 관계에서, 간병인은 노동자로서 고용된 사람도 간호보조업무를 수행하는 전문가도 아닌, 어쩔 수 없이 돈주고 부르는 아줌마들에 불과했다. 이 간병인 아줌마 들이란 화장실 등에 붙어있는 스티커의 전화번호로 연락하면(유료소개소) 아무 때나 불러올 수 있는 존재들이며, 가족들의 몫을 대체하는 보살핌과 감정노동의 전담자여야 했다. 모든 노동이 귀중하다는 전제는 보살핌과 감정노동에 시달리는 비공식부문의 여성노동에는 해당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러한 노동은 사회적 가치를 지닌 노동이 아니라, 잡스러운 일들이지만 어쩔 수없이 돈주고 사야하는 부차적인 노동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 간병인 아줌마들이 데모를 했다. 요구조건은 병원 내 유료소개소를 폐지하고 무료소개소 운영을 다시 하라는 것이었다. 24시간 근무 후 받는 5만원에서 5천원을 유료소개소에 빼앗기는 것을 막는 것이 근본적인 투쟁의 목표는 결코 아니었다. 피고용관계에 있으면서도 노동자로서의 지위와 노동에 대한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하는 상황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제기였던 것이고, 간병인도 노동자라는 일종의 선언이었다. 비공식 부문 여성들이 수행하는 노동이 평가절하되는 근거는, 그것이 사회적 가치를 지니지 않고 있으며,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부차적 노동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환자를 24시간 간호하는 간병인의 노동이 부차적인 것일까? 학습지, 보험설계사 등의 특수고용 노동자들의 노동은 사회적 가치가 없는 노동이기 때문에 노동자성을 인정받지 못하는 것일까? 노동하고 있는 당사자들이 존재하고 있다면(간병인 노동자 전체 수는 약 20만으로 추산된다) 그 노동자를 고용하고 있는 누군가가 존재하고, 그 노동의 결과물을 향유하는 누군가가 존재한다는 당연한 상식이 어째서 통하지 않는 것일까? 간병인 노동자들은 오랜 근무시간과 저임금에 시달리면서도 오로지 일이 끊기지 않기에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일자리라 위안하며 간병 업무를 지속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껏 쉬고 싶어도 쉴 땅 한 평을 제공받지 못했으며, 간병 업무 중 사고(환자로부터의 감염, 부상 등)의 책임은 오로지 스스로가 감내해야 할 몫이었다. 무엇보다도 견디기 힘들었던 것은, 병원 측으로부터 고용된 노동자도 아니고, 그렇다고 병원 서비스를 제공받는 환자 가족도 아닌, 유령같은 자신의 존재가치였을 것이다. 서울대병원 간병인 지부의 투쟁의 과정에서 많은 논란이 있었다고 한다. 궁극적으로 간병인은 없어지고, 간호보조인력이 충원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냐, 간호보조인력을 국가에 요구해야 하지 당장 있는 간병인들의 지위를 조금 개선한다고 달라질 게 무어냐는 논리가 존재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지금껏 간병인 업무를 수행해왔던 간병인 노동자들이 국가에 의해, 혹은 병원에 의해 재고용되면 안되는가? 바로 그 간병인 노동자들이 간병에 관한 교육을 받음으로써 간병 서비스를 제도화하는 것은 안되는가? 현존하는 비공식부문 노동의 폐해는 현재 힘겹게 노동하고 있는 해당 노동자들의 존재를 부정함으로써 사라지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출발은, 현재의 비공식 부분 노동자들의 제도화, 노동자로서의 정체성 형성과 자기요구의 수립이어야 할 것이다. 그것이 여성이 임금인상과 처지개선을 요구하는 것보다 가족임금의 보장을 요구해야 한다는 식의 논리와 단절할 수 있는 출발일 것이다. 수많은 아줌마들(수입은 보잘 것 없으면서 괜히 삶만 팍팍한 여성 노동자)이 당당한 여성노동자로 인식되어가는 과정, 당당한 여성노동자로서 투쟁의 역사를 서술해가는 과정이 필요하다. 간병인 노동자들의 투쟁이 무료소개소 인정에서 멈추지 않고 지속되어야 할 이유는 여기에 있다. 엄연히 존재하고 있지만 사회적 가치를 인정받고 있지 못하는 수많은 여성노동자들의 노동을 국가 혹은 기업이 책임져야 할 사회적 노동으로 만들어내야 한다. 여성노동자들의 노동자로서의 자기정체성 형성이라는 투쟁이 촉발되어야 한다. 기존의 조직화 관점에서의 접근은 조직화 대상인가 아닌가, 혹은 조직화가 쉬운가 어려운가의 판단만을 허락할 뿐이다. 노동하고 있는 여성들의 주체화가 문제라고 했을 때, 조직화 관점의 채택은 기존 노동자 운동의 틀 안에 변화된 노동의 양태와 노동자들의 처지를 가두고 재단하는 일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여성노동자의 주체화 노동자들의 계급투쟁의 역사는 해결이 가능하다는 믿음이 없었다면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 아니었을까. 그것은 물론 부르주아 계급의 위기, 부르주아가 지배하는 자본주의 질서의 위기를 조건으로 할 수 있고, 조건으로 해왔던 것이 분명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억압과 착취의 당사자인 노동자계급의 발견이었을 것이다. 수많은 그/녀들의 자각의 과정과 동지들과의 연대의 과정이었을 것이다. 오늘 노동하는 여성들 자신이 처한 조건에 대한 투쟁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기존의 노동자운동의 관념과 운동의 방식으로 여성노동자들을 “조직”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숱하게 떠도는 여성동자에 대한 풍문이 개조되어야 할 현실이 되고, 오늘날 여성노동자가 처한 모순적 현실의 원인을 밝히기 위해서는, 여성노동자들이 주체가 되는 투쟁이 확장되어야 한다. 여성노동의 역사를 써나가는 서술의 주체로서 오늘의 여성노동자들이 서야 한다. 따라서 여성노동자를 조직화하는 방식은, 여성노동자라는 새로운 주체형성의 과제로 명명되어야 할 것이다. 여성노동자들의 주체형성의 과정은 여성노동자를 불안정한 일자리로 유인해내는 그리고 평등 개념을 핑계삼아 여성노동자에 대한 보호조치를 삭제하고, 복지를 축소하는 차이의 삭제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이 이미 판명되었으며, 떠도는 풍문 같은 객관적 사실의 나열만으로 진전이 불가능하다는 것 또한 분명하다. 훗날 누군가에 의해, 21세기의 여성들은 가정에서의 가사의 부담 때문에 적은 액수의 단기적인 일자리를 선호했다라는 식의 역사의 왜곡을 막기 위해서라도, 여성노동자들의 투쟁이 남성노동자 나아가 전체노동자 임금과 근로조건의 저하를 낳을 수도 있을 것이며, 비공식부문의 노동의 제도화 요구가 정규직 노동자의 지위를 위협할 지도 모른다는 일각의 두려움이 전혀 근거없는 기우에 불과했음을 현실에서 보여주기 위해서라도 여성 노동자들의 주체적 관점에 입각한, 역사의 서술, 즉 투쟁의 역사가 새롭게 쓰여져야 한다. 그 숱한 여성노동자들의 주체화 과정에서 올바른 역사관과 서술의 양식을 함께 모색하기 위하여 사회진보연대 여성위원회가 보다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라 생각된다. 모두들 파이팅!! PSSP
특집은 6월을 뜨겁게 달굴 WEF반대투쟁과 아시아 민중·사회운동회의를 소개하고, 그 쟁점을 소개하고 있다. 박하순은 현 시기 경제상황을 분석하면서 현재의 위기는 금융세계화가 원인이라고 지적하고 문제의 해결은 위기의 지연이 아닌 전혀 다른 대안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일본의 다나카 태츠지는 지금까지 일본의 운동을 평가하면서 현재 작지만 소중한 성과인 "탈WTO 풀뿌리 캠페인 운동"을 소개하고 있다. 더불어 "탈WTO풀뿌리 캠페인 2기"를 중심으로 일본에서의 사회운동뿐만이 아니라 아시아적 운동을 제안하며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맞서는 아시아 차원의 공동행동을 제안한다.
'불안정노동과 빈곤에 저항하는 공동행동'출범 과장된 위기? 최근 노무현 대통령은 국회연설에서 "현 시기는 경제위기 상황이 아니다.", "임기 내 계속 6%이상 경제성장 할 것" 이라며 "불안해서 위기를 얘기하는 것은 이해할 수 있지만 정치적인 이유로, 또는 필요한 개혁을 저지하기 위해 불안을 증폭시키고 위기를 부추겨서는 안 된다." 고 했다. 확실히 탄핵 시기를 거치면서 노 대통령의 현실 인식은 보다 더 반동화 된 것 같다. 아니, 어쩌면 신자유주의자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이전보다 더 노골적으로 표현했을 뿐인 것일지도 모른다. "고용 없는 성장"과 "노동의 빈곤화"라는 이 시대의 화두를 외면하고 싶은 것일까, 아니면 그것은 그/들로서는 결코 인식할 수 없는 것인가, 아니면 그들은 악당인가. 신용불량자가 400만에 달하고 있어 정상적인 사회, 경제생활을 영위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해 있을 지라도, 2,30대 혈기왕성한 젊은이들 중 10%가 실업상태에 놓여 있을지라도, 이들의 반 이상이 비인간적인 대우를 감내하며 비정규직이란 처지에 놓여 있을지라도, 노동의 불안정화로 야기되는 삶의 권리의 약화, 생존의 위협 등 사회적 빈곤의 어려움을 겪는 '가난한 노동자'계층이 점점 늘고 있을지라도, 그에게는, 신자유주의자들에게는 이 모든 것이 과장된 것이고 잠재워야 할 것이며 "무역수지 흑자 2백억 달러, 외환보유액 1천 6백억 달러 / 세계 4위" 가 사활적 과제일 뿐이다. 악화되는 '삶의 질' 노무현 정권은 "자본운동에 대한 규제를 완화시켜야 하며, 정규직 노동자의‘이기주의’로 인해 노동자내부의 비정규직 노동자의 임금과 삶의 권리가 약화되고 있다"고 한다. 한마디로 "다같이 못살자" 는 것이다. 물론 '다같이'에는 정권과 자본과 소득 상위 10%의 저들은 포함되지 않을 것이다. 정규직 노동자의 양보를 주장하며 노동유연화로 '일자리 만들기'에 주력했던 결과는 어떠한가? 통계청이 발표한 ‘4월 고용동향’에 따르면 실업률은 3.4%로 1년 전보다 나아진 게 없으며, 청년실업률은 7.6%로 1년전 보다 0.3%로 오히려 늘었다. 또한 임금노동자 가운데 상용노동자 비중이 지난 1월 51.2%에서 4월 50.5%로 0.7% 포인트 하락했으며 임시노동자는 1월 34.5%에서 4월 34.8%로 0.3% 포인트 확대됐다고 밝히고 있다. 아울러 일용노동자도 14.3%에서 14.7%로 0.3% 포인트 증가하는 등 고용의 질이 악화되고 있는 실정임을 정부통계도 입증하고 있다. 또한 '가난이라는 굴레'는 더 이상 극소수의 사회적 부적응, 일할 능력이 없는 개인에게만 국한된 문제가 아니다. 800만이 절대적 빈곤상태에 놓여 있다는 조사결과도 제출되어 왔고, 노동을 하는 인구 중 50%이상이 비정규직으로서 항상적으로 불안정한 고용상태에 놓여 있으며, 이들의 임금 수준이 최저생활을 유지할 수 있는 수준이라는 것은 이미 밝혀진 바가 있다. '가난한 노동자'는 이제 보편화되어 가고 있다. 특히 여성에게 있어 이러한 고통은 더욱 가중되어 '빈곤의 여성화'라는 용어는 일반화되었다. 또한 신용불량자는 400만에 달하고 있어 정상적인 사회, 경제생활을 영위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해 있다. 그리고 2,30대 혈기왕성한 젊은이들 중 10%가 실업상태에 놓여 있으며, 설사 고용된 처지에 놓여 있다 하더라도 이들의 반 이상은 비정규직이란 처지에 놓여 있다. 대중의 직접참여와 행동에 기반 한 운동이 필요하다. 현 시기 불안정노동과 사회적 빈곤에 맞서는 운동이 최우선적으로 고민해야 하는 것은 ‘빈곤구제를 위한 운동’,‘불안정한 저임금의 일자리 만들기 운동’,‘세련된 정책대안을 만드는 운동’이 아니다. 왜냐하면 불안정노동과 사회적 빈곤은 이 사회체제에서 구조적으로 양산되고, 사회적으로 확대되고 있기 때문에 ‘결과’에 대한 투쟁이 아니라 ‘원인’에 대한 투쟁이 필요하다. 이 요구는 국가의 시혜나 빈곤구제가 아니라 사회구성원의 기본적 권리라는 관점을 분명히 하고, 여러 경제지표나 예산제약으로 인한 ‘정책교섭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해야 한다. 당장 제도적 개선에 단순 동원되는 방식을 탈피해서 민중역량을 축적할 수 있는 조직전략을 위해서는 개혁세력의 연대가 아닌, 근본적 변화에 대한 지향을 분명히 하는 민중세력의 연대가 필요하다. 또한 단체간 연대를 넘어서서 불안정 노동자 대중의 직접참여와 주체적 행동으로 국가에 대하여 직접 요구하는 운동이 조직되어야 한다. 이런 점에서 5월 말부터 시작된 '불안정노동과 빈곤에 저항하는 공동행동'(이하 공동행동)은 매우 소중하다. 공동행동은 단지 '불만과 저항'을 표현하는 것만이 아니라, 이러한 빈곤과 불안정노동을 철폐하기 위한 불안정노동자와 빈민들의 공동의 실천이다. 기본적인 생활을 보장할 최저임금·최저생계비의 확보’,‘안정적 일자리 확충’이라는 요구를 가지고 정부와 자본에 직접 요구하고 행동하는 불안정노동자의 자발적 연대 속에서 대중의 물결과 힘을 만들어내는 것이 이 운동의 목표다. 불안정노동과 빈곤에 저항하는 공동투쟁으로 결집하자! 이 운동은 전체 민중의 삶을 파괴하는 신자유주의에 맞선 투쟁일 수밖에 없기에 이를 위해 공통의 요구를 정식화해야 하고 이러한 문제의식이 민중운동 전체에 확산되도록 해야 한다. 기계적인 ‘공동투쟁’으로 당장 묶어서 이를 강제하기보다는 보다 장기적인 전망 하에 각각의 투쟁이 충분히 발전할 수 있도록 지지 연대하고 그러한 성과를 바탕으로 공동의 틀을 형성할 수 있는 방향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또한 대중조직들의 공동투쟁이 회복되어야 한다. 주체들의 요구와 내용은 정치적인 상징성을 갖고 통일되어야 하고, 그 공동의 요구에 입각한 공동행동을 복원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불안정노동의 문제와 빈곤의 문제를 동시에 사고해야 한다. 신자유주의 시대의 빈곤의 문제는 더 이상 ‘노동’과 분리되어 접근할 수 없다. 지속적인 노동의 불안정화로 인해 예전처럼 “고용=생활의 안정”이라는 등식은 성립하지 않는다. 신자유주의는 노동의 빈곤화를 낳고, 이것은 신자유주의의 의도이기도 하다. 빈곤화와 복지의 축소를 통해 노동자들을 위계화하고, 자본에 복속되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하도록 경쟁시킨다. 이런 구조를 통해 신자유주의는 재생산된다. 그런 점에서 빈곤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투쟁은 신자유주의 반대투쟁의 중요한 전선으로 사고되어야 한다. 내부의 위계를 정규직과 불안정노동층의 대립으로 만드는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 불안정노동철폐 공동투쟁을 위한 민주노조운동의 혁신이 필요하다. 비정규직과 정규직, 이주노동자와 한국국적 노동자, 여성과 남성, 장애인과 비장애인, 영세사업장과 대기업노동자 할 것 없이 노동의 불안정화는 모두가 공통으로 직면하게 되는 상황이며 불안정노동철폐투쟁은 모두의 과제이다. 한 축으로는 민주노조운동의 관성을 떨쳐버리고 조직된 노동자들이 혁신해야 하며, 또 다른 한 축으로는 투쟁을 통해 자신을 성장시키는 불안정노동층 노동자들이 만나 말 그대로 ‘전체 노동자 총단결’ 기치를 세워야 한다. 개별 사업장이나 개별 부문이 처해있는 요구를 뛰어넘어 노동자와 민중의 권리를 제기하고, 이것을 ‘신자유주의 반대’라는 대중투쟁전선으로 확장해가야 한다. 최저임금실질화투쟁/최저생계비현실화투쟁을 불안정노동과 빈곤에 저항하는 투쟁으로 현재 공동행동은 3가지 방식으로 투쟁을 예비하고 있다. 하나는 '불안정노동자와 빈민들의 인권선언' 두 번째는 '불안정노동자와 빈곤에 저항하는 이들의 행진(이하 행진)', 세 번째는 비정규개악입법저지와 노동권쟁취를 위한 공동행동'이다. 불안정노동자와 빈민들의 인권선언은 현재 선언참가자를 모집중이며, 6월초 인권선언주간을 진행하고 향후 인권선언에 참여한 사람들의 진정총회와 토론회를 거쳐 인권보고서와 인권선언문을 발표할 계획이다. 또한 행진은 파견법, 비정규직철폐, 노동허가제쟁취, 최저생계비 보장, 청년실업해결과 여성노동권쟁취 등의 주제로 매달 진행될 예정이며, 특히 6월 중순 3박4일간 최저임금 최저생계비보장 공동행진을 통해 더욱더 연대의 지평을 넓힐 것이다. 또한 공동행동은 3월에 '사회적 일자리와 참여복지5개년 비판 토론회'와 총선시기 청년실업해결과 비정규직철폐의 내용을 담은 공동행동을 진행하기도 하였다. 공동행동은 향후 최저임금현실화와 최저생계비보장 공동투쟁을 실천하는 빈곤사회연대(준)과 최저임금실천단 등이 연대하여 노동자계급과 민중의 단결과 혁신을 도모하고 새로운 운동주체 형성에 매진해야 할 것이다. 이 투쟁에 대한 연대와 적극적 참여/행동으로부터 공동행동의 첫 발걸음을 내딛고 불안정노동과 빈곤에 저항하는 투쟁의 유의미한 계기로 만들어 가자. 이는 노동을 하거나 하지 않거나 사회구성원으로서 기본적 생활을 보장받을 권리가 있다”는 점을 분명히 밝히는 가운데 “기본생활이 보장되는 최저임금 / 최저생계 보장”의 요구를 전면에 내걸어야 한다. 그리고 이것은 국가로부터 ‘시혜’를 얻어내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최저임금이나 최저생계비 계측에 있어서의 정부와 자본 논리의 비현실성을 폭로하면서, 신자유주의 정책이 어떻게 빈곤을 양산하고 심화시키고 있는가를 고발/폭로하면서 운동주체를 형성하는 과정이어야 할 것이다. 이 가운데 지난 시기 투쟁의 한계를 극복한 대중적 공동행동이 복원될 수 있을 것이고 마침내 삶의 나락에서 고통받고 있는 민중들이 반신자유주의 투쟁 전선에 우뚝 설 수 있을 것이다.PSSP
들어가며 숨가쁜 총파업이 끝나고 뒷정리 작업이 만만치 않다.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수십 여건의 해고 사건들, 잉크가 마르기도 전 임단협 거부사태와 수백 건의 고소고발 사건, 집행부 사법처리 문제 등 그야말로 일에 치여 숨돌릴 겨를조차 없다. 그나마 이 글을 쓰면서 파업기간을 되짚어 볼 수 있어서 다행이다. 아직도 내부 평가 작업이 이루어지지 않아서 다소 거친 부분도 있고 이 글에 쓰인 입장이 조직내부의 공식적인 입장이 아니라는 것을 밝혀둔다. 노동 운동판에서 기웃거린지 어느덧 십 수년이 흘렀건만, 이번 파업투쟁을 거치면서 가슴을 짓누르는 부분이 있었다. 이번 파업투쟁의 핵심 요구 사항은 근로계약서 체결이다. 아마도 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에, 노동조합이 핵심 요구 사항으로 근로계약서 체결을 요구하며 파업 투쟁을 감행(?)한 사례는 아마도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70년대 선배노동자들이 공돌이 공순이로 불리던 시절에나 나왔을법한 요구 사항이 21세기에도 여전히 유효하며 노동조합의 핵심 쟁점으로 떠올라 구속, 수배를 각오하며 죽기살기로 파업 투쟁을 벌어야 하는 것이 이 땅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현실이다. 근로계약서 체결을 위해 지리산 자락 남원 민주노동당 연수원 맨땅 위에서 추위와 싸워가며 침낭하나로 오들오들 떨며 밤을 지새우고, 서울 한복판에서 각 대학을 전전하며, 강의실 복도에서, 심지어 자리가 비좁아 화장실 문 앞 에 까지 자리을 펴고 새우잠을 자야만 하는 현실, 그것도 모자라 80미터 상공에서 목숨걸고 농성까지 해야만 하는 야만적인 현실 앞에서 그저 말문이 닫힐 뿐이다. 이번 파업기간에 부산에 있는 여성조합원이 3 살배기 딸아이와 함께 총파업에 참여했다. 조합원들 사이에서 철없이 뛰어노는 아이의 해맑은 모습을 보면서, 복도에서 엄마 품에 안겨 잠자는 이쁜 아이의 모습을 보면서 가슴속에서 끓어오르는 분노을 삭히느라 너무 힘이 들었다. 타워크레인노동자들 현실은? 무심코 하늘을 보다가 건설현장 주변에 아찔할 정도로 우뚝 솟은 타워크레인을 본적이 있을 것이다. 과연 저 높은 곳에서 어떤 노동자들이 작업을 하고 어떻게 생활을 하는가를 고민하기보다는 과연 저 높은 장비을 어떻게 세웠을까 하는 정도의 의문이 드는 것이 고작일 것이다. 타워크레인기사노동자들은 보통 70-80미터 정도의 고공에서 0.3평도 안 되는 좁은 공간에서 기본적인 인간의 생리현상마저도 참아가며 하루 10시간 이상 장시간 노동에 시달린다. 불과 1년 전까지만 해도 일요일에도 당연히 근무를 해야만 하였고, 4대 보험, 연·월차, 각종수당, 퇴직금 등은 남에 나라 이야기일 뿐이었다. 평균임금은 220만원 정도이다. 모든 것이 포함된 포괄임금제 방식이다. 대부분이 현장 계약직이기 때문에 아파트 공사 등이 끝나면 곧바로 실업 상태에 빠져든다. 요즘같이 건설경기가 바닥일 경우 5-6개월 실업상태에 빠지는 것은 예사일이다. 고용보험에 가입하지 않았기 때문에 실업급여조차 받을 수가 없는 것이 대부분의 타워크레인기사노동자들의 현실이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노동조합을 결성하고 지난 4년 동안 지속적인 투쟁을 전개해 왔다. 2003년도 임단협 투쟁 과정 속에서 엄청난 성과(?)를 거두기도 하였다. 일요일 휴무 투쟁을 전개해서 건설현장에서도 일요일은 쉬자는 요구가 마침내 관철이 된 것이다. 아마도 남들이 보면 정말 웃음거리밖에 안 될 것이다. 당연히 쉬어야 하는 일요일 휴무투쟁을 벌어야 한다는 것 자체가 웃음거리일수도 있다. 이 땅에 일제 식민지하에서 건설업이 도입된 지 130년 만이 지난 후에야 건설현장에서도 일요일은 쉬어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이 된 것이다. 이러한 투쟁의 성과와 맞물려 본격적으로 사용자들의 조직적인 탄압행위들이 발생한다. 각종 부당노동행위는 물론이거니와 불법용역, 소사장과 고용 계약을 체결토록 고용 관계를 전환하는 등 현장에 대한 본격적인 탄압행위가 발생하게 된다. 노동조합 결성이전에는 그야말로 자본의 천국이었다. 조금만 마음에 들지 않으면 곧바로 해고다. 해고를 당해도 항의조차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항의하다가 사용자들 불랙리스트에 올라가면 영원히 취업을 못하고 업계을 떠나야하는 것이 현실이었기 때문이다. 그저 시키면 시키는대로 주면 주는대로 아무생각조차도 하지말고 귀 막고 입 막고 로봇이 되어야 하는 것이 현실이었다. 총파업을 준비하면서--- 비정규직노동자 조직화 사업에 있어 가장 어려운 부분이 정규직노동자들과는 달리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경우는 대개 고립분산적으로 흩어져 있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불법 파견노동자들의 경우 파견업체 한곳에서 수 십 개의 현장으로 인력을 보내기 때문에 개별적인 노동자들을 모아내기란 쉽지가 않다. 전국타워크레인기사노동조합의 조합원들의 경우 전국의 각 건설현장에 철저하게 고립분산되어 있었다. 조합원들이 어느 현장에 누가 있는지 조차 파악하는 일도 쉽지가 않다. 또한 현장이 끝나고 다음 현장에 취업을 할 경우 이동성이 심하다. 이러한 특성으로 인해 노동조합의 일상활동마저도 쉽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전국타워크레인기사노동조합은 전국을 6개 권역으로 나누어 지부로 편재되어 있다. 지부 아래는 각 시군별로 지회 분회로 나뉘어져 있다. 지회, 분회도 몇 개의 시군이 합쳐진 경우가 많이 있기 때문에 회의 한번하는 것조차도 버거운 일이다. 지회, 분회가 구성이 되었지만 일상활동이 활발한 곳도 있지만 대부분이 미약한 편이다. 저녁에 작업이 끝나고 각 건설현장의 조합원들이 한곳에 모이기란 만만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동안 지속적인 간부 교육을 통해서 중간간부 육성에 중점을 두었지만 조합원들의 교육은 그야말로 전무할 정도였다. 조합원들은 1400여명 정도였지만 교섭대상 업체가 184업체였다. 184개 업체에 공문을 발송하고 단협 요청을 하고 사용자들은 모아내는 일조차도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가장 시급한 것은 조합원 교육이었다. 2월 25일 대의원대회를 개최해서 임, 단협 투쟁 전술, 전략을 확정하고, 조합원 전국 순회 교육을 실시하였다. 총파업에 돌입하며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문제는 결국 그 사회가 않고 있는 모순구조의 농축액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업장만의 문제도 아니고 건설현장 울타리 안에서 해결될 수 있는 문제도 아니다. 전국타워크레인기사노동조합의 총파업은 담장 안을 넘어 거리로 그리고 사회 속으로 행진하는 총파업이었다. 총파업을 시작하면서 먼저 전국에 있는 조합원들을 현장의 울타리을 벗어나 한곳으로 모으는 일이 시급한 과제였다. 전국 각 건설현장에 대체 근로를 감시할 현장 인력을 남겨놓고 전원 남원 민주노동당중앙당연수원으로 집결하라는 지시가 내려졌다. 집행부도 무척이나 초조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남원 연수원에 현장감시단 400여명을 제외한 전국 각 지역 조합원들 천 여명이 모여들었다. 마침내 전국에 건설현장이 48%가 마비되는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1400여명의 조합원 전체가 총파업에 돌입했다. 모래알처럼 흩어져 있던 조합원들이 마침내 하나가 된 것이다. 전국에 타워크레인 3천 여대 중에서 절반이 멈춰선 것이다. 현장을 멈추어 세상을 바꾸자는 구호가 현실로 다가왔다. 2박3일 동안 전체 조합원을 대상으로 집중 교육에 돌입을 하였다. '왜 투쟁을 해야만 하는 것인지! 투쟁하지 않는 노동자는 노동자가 아니다!' 라는 것을 서서히 몸으로 깨닫기 시작했다. 교육 중에서 가장 커다란 교육은 스스로가 현장을 박차고 나와 하나로 뭉쳤다는 “눈앞에 펼쳐진 현실”이었다. 비 온 뒤 축축한 운동장 한가운데에서 달랑 침낭하나만 가지고 추위와 싸워가며 새우잠을 잘 수 있었던 것도 동지들이 내 옆에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4월 30일 서울 진격투쟁이 시작되었다. 노동부, 삼성, 건설현장, 악덕 사업주, 불법용역업체 여러 곳을 집중 타격 하였지만, 역시 자본에 힘은 막강했다. 하루 50여 만원씩 일당을 지급하며 불법대체근로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고, 명백한 불법대체근로임에도 불구하고 노동부는 수수방관하고, 오히려 사용자들 편에 서서 노동자 탄압에 열을 올리고, 악덕 사용주들은 조합원을 해고하는 등 각종 부당노동행위들이 판을 치고 시간이 흐를수록 내부의 불안감들은 증폭을 더해갔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위원장은 총파업투쟁을 감당할 수 없어 간부들의 설득에도 불구하고 사퇴하는 최악의 상황이 발생했다. 결국 이대로 물러서야만 하는 것인가 하는 위기감이 내부에서 싹트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는 것이었다. 아무런 성과없이 현장으로 돌아가 불법용역, 소사장 밑에서 노예로 살수는 없는 것이었다. 조합원 총회을 소집했다. 역시 조합원들의 판단은 현명했다. 타워고공농성 전술을 결정했다. 요구안이 관철되지 않으면 절대 타워 위에서 내려오는 일은 없다. 굶어서 허기진 배을 부여잡고 쓰러지더라도 파업투쟁이 승리하기 전에는 두발로 걸어서 내려오지는 않는다는 것이 결정 사항이었다. 비장함마저 들었다. 이윽고 5월 4일 저녁 6시부터 조합원 500여명이 머리띠 풀고 조끼를 벗고 5인 1조가 되어서 어둠 속으로 삼삼오오 흩어져서 5시간에 걸쳐 서울대를 빠져 나왔다. 12:30분 마침내 전체 조합원들이 현장에 도착을 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타워고공농성 돌입! 수도권에 있는 타워 87대 483명의 조합원들이 타워를 점거하였다. 총파업을 마치며--- 표준근로계약서 체결 불법용역, 소사장 계약해지 파주교육원 폐쇄 2003년도 임단협 준수 최저임금 125,000원 인상 이번 파업투쟁의 성과물들이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성과물은 조합원들의 자신감과 의식의 변화이다. 역시 파업은 노동자의 학교였다. 그 어떠한 교육보다도 가장 큰 교육은 투쟁이었다. 정부, 언론이 어떤 곳인지, 또한 사용자들의 간교함에 혀를 내둘렀지만, 역시 노동자들이 믿을 거라고는 투쟁밖에 없었다. 투쟁하지 않는 노동자들은 “노동자가 아니다”라는 것을 글로서 말로서 깨달은 것이 아니라 몸으로 깨달았다. 이제 시작일 뿐이다. 현장에서 또다시 부당노동행위가 판을 치고 부당 해고가 판을 친다. 이제는 안다. 제아무리 부당노동행위가 판을 쳐도 이제는 절대 가만있지 않을 것이다. 오늘도 집회신고 내고 준법투쟁에 돌입한다는 전화가 여기저기서 걸려온다. PSSP
5월 11일 진행한 여성위원회 월례포럼 발제문입니다. 발제는 총 4개였습니다. 그 중 서울대 병원 간병인 노동자 투쟁 사례에 대 한 발제는 서울대 병원 간병인 지부 최정남 부지부장님께서 해주셨는데, 구두 발제였던 관계로 자료에 포함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전국불안정노 동철폐연대 구미영 동지가 <서울대 병원 간병인지부 투쟁이 주는 시사점 - 비공식화된 여성노동을 제도화하고자 하는 순간 무엇이 문제가 되는가>라 는 발제문을 제출하셨는데, 이 글도 완성되지 않은 초안이라 외부에 공개 하기 곤란하다는 구미영 동지의 요청에 따라 자료에서 뺐습니다. 이 글은 이후 철폐연대에서 발간하는 책에 완성본이 실릴 것이라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