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정규악법에 맞서 승리하기 위하여 [%=사진1%]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반격이 시작되다 법안이 상정될 때부터 충분히 예상되었듯 비정규악법 시행을 앞두고 대규모 해고, 계약해지 와 외주용역화 사태가 번지고 있다. 7월부터 시행될 ‘비정규직 보호 법안’이 결코 보호 법안이 아니라 희대의 악법임은 더 이상 말할 필요조차 없다. 이미 현실에서는 전체 규모를 파악조차 하지 못할 정도로 엄청난 수의 노동자들이 임의로 계약해지를 당하고 있는 실정이다. 당장 정권과 자본의 공세에 맞서 투쟁을 전개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과제임을 또다시 강조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비정규노동자들 스스로가 그 사실을 알고 있으며 전면적인 투쟁을 개시했기 때문이다. 이미 이랜드 일반노조와 뉴코아 노조는 현장 노동자들의 극심한 고용불안, 해고와 외주화에 맞서 투쟁을 전개하고 있고 10일 공동총파업에 돌입한다. 0개월 근로계약서까지 나도는 마당에 유통노동자들이 단결해 투쟁전선을 구축하지 않고서는 결코 인간다운 삶을 보장받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또한 특수고용노동자들이 노동3권 보장을 요구하며 총력 투쟁을 준비 중이다. 그리고 공공부문, 각종 민간 서비스부문 노동자들이 비정규악법의 문제가 자신의 문제임을 인식하고 투쟁의 대열에 동참하고 있다. 게다가 건설노동자들도 타워크레인 노동자들이 건설 현장의 70%를 마비시키며 6월 투쟁의 포문을 연 것을 필두로 덤프, 레미콘 노동자들도 파업투쟁을 결의하였다. 사무금융의 코스콤 비정규 노동자들도 불법파견을 철폐하고 직접고용을 요구하며 투쟁하고 있다. 이러한 비정규직 주체들의 투쟁을 중심으로 6월 비정규직 악법에 대한 저항이 커지고 있다. 비정규악법으로 인해 그야말로 벼랑끝으로 몰리고 있는 비정규 노동자들이 스스로 투쟁의 주체로 나서고 전선을 구축하고 있는 것이다. 비정규악법 철폐 투쟁전선을 구축하자 비정규직 문제가 전사회적인 문제가 된 것은 오래지만 지금 당면하고 있는 문제는 비정규 악법으로 인한 비정규직 노동권 말살과 비정규직 양산이다. 2년의 기간 내에서 계약직과 파견직을 무한정 쓸 수 있도록 하는 비정규악법 시행을 앞두고, 사용자는 해고를 자행하고 정부는 현실을 외면하며 이를 부추기고 있다. 지금도 이러한데 7월 이후 이 법이 시행된다면 더욱 광범위한 해고사태가 발생할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따라서 노동자운동은 비정규악법 투쟁전선을 구축하는데 주저해서는 안된다. 시행령 개입에만 몰두해 비정규악법 자체를 폐기하는 전선을 제대로 세우지 못한다면 시행령 통과 이후 투쟁을 확대하기 힘들 것이다. 특히 비정규악법이 정규직의 비정규직화를 노리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지금부터 이에 대한 대응을 시작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노동자운동은 6월에 비정규직 악법 철폐투쟁을 중심으로 비정규 노동자들을 조직하고 비정규 투쟁을 강화하며 투쟁주체를 확대해야 한다. 비정규악법에 맞서 승리하기 위해 첫째, 우선 비정규 악법의 실체를 끊임없이 알려내고 투쟁을 더욱 확대해야 한다. 정부는 무기근로계약 전환, 비정규직보호대책 등의 기만적인 선전을 통해 정부가 마치 비정규 노동자들을 정규직으로 전환해 주는 양 행세하고 있다. 실제 생활에서 불안정한 노동에 시달리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자신들이 처한 현실이 비정규악법 때문이라는 점을 서서히 알아가고 있지만, 여전히 정부의 각종 대책이 발표될 때마다 그 대책들의 좋은 이름들 때문에 쉽게 현혹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 맞서 비정규직악법이 실제 노동현장에서 노동의 불안정화를 더욱 심화하고 있음을 폭로해야 한다. 또한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를 신봉하고 있는 노무현 정권이 비정규직을 양산하고 노동자 생존권을 말살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내고 이러한 상황에 맞서 싸워야 함을 선전해야 한다. 둘째, 대량계약해지, 외주용역화 되고 있는 노동자들을 투쟁의 주체로 세워야 한다. 최대한 지지 지원 투쟁을 전개하는 것과 동시에 투쟁하고 있거나 투쟁을 준비 중인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모아내 공동 투쟁으로 투쟁을 집중해야 한다. 뉴코아노조와 이랜드노조 공동투쟁과 같은 연대 투쟁을 활성화시키고 공동의 전선을 구축하며 이를 전체 노동자 투쟁으로 확대시켜야 한다. 여기저기에서 비정규직 노동자 투쟁을 만들어내고 투쟁의 기운을 북돋우고 연대의 분위기를 형성하면 전반적인 노동자 투쟁의 사기를 높일 수 있고, 그러한 활발한 투쟁들을 악법 폐기 투쟁으로 모아낼 수 있을 것이다. 셋째, 산별임단투 투쟁에서 비정규직 노동기본권을 쟁취하고 정규직-비정규직이 실질적인 연대 투쟁을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금속산별을 필두로 하여 산별노조는 비정규 노동자 조직화와 노동권 쟁취를 중심에 놓고 투쟁을 조직하여 비정규 악법 폐기 투쟁전선 구축에 복무할 때 더욱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다. 이를 위해 무엇보다도 현장과 지역의 활동가들이 나서야 할 것이다. 비정규직 문제는 단지 쪽수가 많은 하층 노동자들의 문제만이 아니다. 비정규직 노동자운동의 승패는 현 노동자운동의 혁신과 새로운 주체 형성을 가늠할 수 있는 리트머스 시험지와도 같다. 노동자운동 주체들이 비정규악법에 대해 공통된 인식과 실천과제를 갖고 투쟁전선을 구축해 나갈 때 노동자운동의 단결과 연대를 강화하고 계급형성에 복무할 수 있을 것이다. 뜨거운 6월, 비정규 투쟁을 강화하고 투쟁주체를 확대하자!
* 6월 9일(토) 개최된 민주노총 6월 총력투쟁 결의대회에 배포한 사회화와 노동 특별호 2007년 2호 입니다. [내용] - 비정규악법 폐기! 투쟁주체를 확대하자 - 무기계약 전환요구는 대안이 아니다 - 한미 FTA 체결저지 할수있다 - 자이툰부대 철군을 위한 반전행동
6월 2일, 故 허세욱 열사의 49재 집회가 열렸다. 연단에 오른 많은 이들이 죄스럽다는 얘기를 했고 나 역시 그랬다. 메이데이나 5·18 집회 등이 있긴 했지만, 허세욱 열사의 장례식을 치르고 난 후 한미 FTA 반대를 내걸고 개최한 사실상 최초의 대중 집회였기 때문이다. 협상이 어떤 식으로든 타결되고 나면, 이미 지난 일인데 시비를 가려봐야 뭐하느냐 하는 분위기 때문에 투쟁의 파고가 일시적으로 잦아드는 것은 당연한 일일 수도 있다. 정부가 협상문 공개를 차일피일 미루는 상황에서, 협상문이 공개될 때까지 본격적인 논쟁이 벌어지지 못한 것 역시 어쩔 수 없는 일이었을 수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객관적 이유를 헤아린 다음에도 죄책감은 사라지지 않는다. 우리가 어떻게 해 볼 수 없는 일이었으니 우리에게는 책임이 없다는 식의 논리로 빠져나갈 수 있는 죄책감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무엇이건, ‘한미 FTA 폐기, 노무현 정권 퇴진’이라는 열사의 유지를 실현하지 못하는 우리 운동의 가난함, 그 무력함에 대한 서러움이 이 죄책감의 원천이기 때문이다. 그 뿐이 아니다. 한미 FTA를 둘러싼 갈등과 민중의 몫소리가 정치적 논쟁의 장에서 밀려난 다음, 청와대와 보수언론이, 노무현과 한나라당이, <참평포럼>과 ‘중도통합세력’이 권력을 둘러싸고 벌이는 이전투구만이 연일 언론을 뒤덮으면서, 발본적이고 정치적인 갈등에 대한 동참과 선택의 기회를 박탈당하는 대중들에게도 우리는 무거운 책임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이번 『사회운동』 75호에서는 74호에 이어 FTA와 신자유주의의 경제학에 대한 비판을 실었다. 이번 호에서는 특히 사례를 중심으로 한 비판을 담았다. 특집에서는 5월말 6월초에 산별 출범 이후 최초의 임단투를 앞두고 있는 산별 노조의 현실과 쟁점을 다뤘다. 이번 호부터 몇몇 꼭지가 신설되었다. 다른 사회운동들과의 대화와 토론을 적극적으로 벌이는 공간으로 <기획>을 신설했고, 그 첫 번째 순서로 농민운동의 전망과 식량 주권 문제를 다뤘다. 또 독자들이 『사회운동』의 글에 관해 발언할 수 있는 공간의 하나로 <독자평>을 신설했으며, 지금까지 주로 집행위원들 중심으로 작성되었던 <갈월동 기행>도 회원들이 『사회운동』과 <사회진보연대>, 그리고 민중운동 전반에 대한 의견을 담는 꼭지로 성격을 변경하였다. <책과 나> 역시 회원들이 기획하는 꼭지로 재출발하고, <사회진보연대>의 일상적 활동을 보고하는 <갈월동 통신>을 신설하였다. 이와 함께 조만간 그동안 요구가 많았던 교육 관련한 꼭지를 신설할 예정이니 많은 관심과 참여를 부탁드린다. 협상문은 공개되었고, 6월 말 부시와 노무현의 정상회담이 예정되어 있으며, 한미 FTA 반대를 핵심 기치로 하는 금속노조 파업과 한미 FTA 전면 무효화 총궐기 등 대중투쟁 계획이 채 한 달도 남지 않았다. 다시 전열을 가다듬고 논쟁과 투쟁을 일으킬 때다. “민주주의의 정통은 노사모에 있었다.”는 오만방자한 노무현과 지배계급에게서 민주주의를 되찾아 오자. 그리고 이 과정에서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사회운동들, 그리고 시민들 간의 너른 대화와 토론 공간을 만들어 내자. 그 길에서 『사회운동』이 자그마한 몫이라도 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며, 그를 위해 열심히 노력할 것을 약속한다. 장 진 범 | 편집부장
20년 전 6월 10일, 명동성당 청년단체 연합회 소속 조그만 단체의 회원이자 증권회사에 다니는 회사원이었던 나는 시청에서 열리기로 했던 6·10 국민대회(5월 27일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국본) 결성 이후 첫 국민대회)에 참가하려 했다가 하루 종일 최루탄과 백골단을 피해 이리저리 쫓겨 다녔다. 물론 국민대회는 보지도 못했다. 당시엔 오늘날처럼 합법적으로 집회신고를 하고 성대하게 국민대회를 할 수 있는 시대는 아니어서, 중간에 성공회교회 안에서 국본 주요 지도자들 몇 분이 모여 국민대회를 치렀다는 소식을 듣고 그래도 대회는 치렀으니 다행이다 싶었다. 날이 어둑어둑해질 무렵 을지로 입구 근처에서 텅 빈 거리를 보며 오늘 투쟁도 이걸로 끝나나 하며 아쉬워하고 있던 차, 퇴계로에선 아직 싸움이 진행 중이라는 얘기를 전해 듣고 급히 퇴계로로 달려갔다. 깨진 돌과 돌을 실어 나르는 데 쓰인 리어카들, 그리고 자신이 해야 할 바를 찾아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는 많은 시위대들로 거리는 어지러웠지만 퇴계로는 말 그대로 해방구였다. 그리고 날은 이미 어두워지고 있었지만 진압경찰을 격퇴시키기 위해 여기저기서 날아다니는 화염병으로 거리는 오히려 환했다. 여길 못 들르고 집에 갔으면 얼마나 억울했을까 하는 생각이 스쳤다. 그 뒤 시위대는 조금 더 싸운 뒤 자연스럽게 명동성당 안으로 들어가 농성을 시작했다. 명동성당이 퇴계로와 거리도 가까운 까닭도 있겠지만, 당시만 해도 명동성당과 천주교회는 민주주의를 옹호하는 발언과 행동을 곧잘 했기 때문에 시위대가 명동성당을 자연스럽게 농성 장소로 선택한 듯하다. 내가 어려서부터 다니던 복음주의적 개신교회를 대학에 온 후 어렵게 작파하고 교회를 한동안 다니지 않다가 군대에서 ‘졸병’의 권유가 있었긴 하지만 부대 근처 가까운 천주교회인 명동성당엘 나가기 시작한 데에도 천주교회와 명동성당의 이런 모습이 적지 않게 영향을 미쳤다. 6월 항쟁의 시작은 이랬다. 물론 이 날이 있기까지는 광주항쟁 이후 야당과 재야 및 학생운동 세력의 지속된 투쟁이 있었다. 굵직굵직한 것만 꼽아보아도 김영삼 26일 단식사건, 미 문화원 점거 투쟁, 신민당 결성 및 2·12 총선 투쟁과 개헌현판식 투쟁, 인천 대우자동차 투쟁, 구로 동맹파업 투쟁, ‘서울대 연합시위 사건’, ‘인천 사태’와 이에 대한 조사과정에서 일어난 권인숙씨 성고문에 대한 규탄 투쟁, 대학생 전방입소 거부 투쟁, ‘건대 사태’, ‘박종철 고문치사 은폐조작 규탄 투쟁’ 등 무수하다. 이런 투쟁이 있을 때마다 정권이 텔레비전 특집 프로그램 등을 통해 ‘공장과 학원가에 침투한 좌경용공 세력’ 운운하며 반공이데올로기를 전 국민에게 주입시켜도 투쟁은 연이어 일어났다. 그리고 많은 조직이 생겼으며, 꼭 열혈 활동가가 아니더라도 많은 사람들이 투쟁 과정에서 경찰서와 감옥엘 들락거려야 했다. 박종철 고문치사 은폐조작 규탄 투쟁은 두 차례(1987년 2월 7일, 3월 3일) 열렸는데 이 때 경찰에 잡혀 들어간 시위대 숫자가 각각 3~4천 명을 족히 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당시 내가 운동조직에서 어떤 역할을 하면서 조직내외를 오가는 중요한 정보들을 접할 수 있는 위치는 아니어서 정확한 이야기는 아닐 수 있겠으나, 명동성당 농성은 요즘의 농성처럼 사전에 치밀한 계획을 세우고 진행된 것은 아니었다고 판단한다. 물론 농성자들 중에 일부 그런 생각을 가진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없었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당시에는 심야 투쟁이 일반적이어서 그 자연스러운 연장으로 농성 투쟁을 생각했을 것이고, 그리고 이후 중요한 투쟁 시기까지 투쟁 에너지를 이어간다는 정도로 농성 투쟁을 생각하지 않았나 싶다. 나도 농성 첫날을 함께 했는데, 선전홍보나 농성단 뒷바라지 등을 명동성당 청년단체 연합회원들이 분담했던 것만 보아도 농성 주체들이 사전에 튼튼히 준비된 것은 아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명동성당 농성을 지속하여 전두환의 4·13 호헌조치를 철회시키겠다고 생각한 사람은 거의 없지 않았나 싶다. 당연히 국본 주요 관계자들이 결합하거나 결합하게 하려는 노력조차 별로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리고 농성 시작 초기에는 성당 출입이 자유롭지 못하긴 했지만 들어오려고 마음만 먹으면 들어올 수는 있었고, 명동성당 안에 들어온 사람들도 ‘문화관’에서 농성을 하는 농성대오를 중심으로 움직였던 것은 아니었다. 지나가는 이야기이지만, 명동성당 농성 대오에서 한 명의 ‘스타’를 배출했는데, 바로 아직도 활동을 하고 계시는 ‘명동 할아버지’ 이천재 선생이시다. 그는 젊은 사람들 속에 있는 몇 안 된 나이 드신 분이었고 머리가 하해서 쉽게 눈에 띄었지만, 무엇보다 그의 연설 솜씨나 발언 내용이 빼어나 농성단 안에서 유명해졌다. 그 분은 농성단 첫날 회의에서부터 매우 조리 있고 내용 있는 발언으로 좌중을 사로잡았는데, 초자 활동가인 나에겐 매우 인상적이었다. 명동성당 청년단체에서 배정받은 선전홍보팀의 일원으로 밤에 잠깐 인터뷰를 하기도 하였다. 난 첫날 농성을 하고 아침에 명동성당을 나와 을지로 입구 근처 회사에 출근했다가 퇴근 후 비밀스러운 길을 따라 명동성당 안으로 다시 들어갔다. 그런데 여기서 아직도 내 머리 속에 선명한 사진으로 박혀있는 장면이 하나 있다. 당시 명동성당 주변 을지로 등지에는 명동성당으로 들어가려는 시위대와 경찰 사이에 낮부터 공방이 있었고 최루탄 연기가 자욱했다. 당연히 길거리에는 사람들도 평소보다 적었다. 그런데 어렵게 성당 안으로 들어갔더니 성당 마당의 하얀 돌과 벽돌들 위로는 아직 채 지지 않은 6월의 햇볕이 따사롭게 내리쬐고 있었고, 꽤 많은 사람들이 여기저기 무리를 지어 앉거나 혹은 서거나 각자 자유로운 포즈로 약간의 승리감에 젖어 이런 저런 담소를 나누고 있는 게 아닌가. 거기다 여기저기서 지원을 해서인지 성당 마당 여기저기 빵이 널려 있거나 쌓여 있거나 했다. 자욱하고 매캐한 최루탄 연기로 뒤덮인 바깥 거리와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성당 안의 평화롭고 안온한 분위기. 한마디로 명동성당은 또 다른 해방구였던 것이다. 황석영의 『오래된 정원』에서 오현우와 한윤희가 숨어살던 갈뫼의 분위기와 비교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시끄러운 세상과 격해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 지극한 평화와 안온이라는 면에서 말이다. 아무튼 투쟁으로 쟁취한, 그리고 투쟁열기가 가득했던 해방구 퇴계로와 명동성당 안의 평화로운 해방구, 둘 다 87년 투쟁에서 잊지 못할 장면이다. 앞에서도 약간 비쳤지만, 당시의 투쟁은 요즘처럼 몇 시에 시작해서 몇 시에 정리 집회를 하는 식의, 일정한 조직에 속한 사람들이 의식(儀式)처럼 진행하는 박제화된 집회나 투쟁이 아니었다. 밤늦게까지 경찰과 숨바꼭질을 하면서 싸웠고, 을지로에서 싸우는 사람들은 ‘퇴계로나 종로에서도 열심히 싸우고 있겠지’ 하며 싸웠고, 퇴계로나 종로에 있는 사람들은 ‘을지로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있겠지’ 하고 싸웠다. 그리고 결의에 차 있었지만 신나게 싸웠다. 멀리 있는 백골단에 돌을 던지는 모습을 보노라면 흡사 멋들어진 춤사위였고, 얼굴 표정은 자기가 세운 계획에 따라 열심히 일하는 사람의 표정, 즉 결의와 성취감이 교차하는 표정 딱 그것이었다. 그렇게 오랜 시간을 신나게 열심히 싸울 수 있었던 것은 역설적이긴 하지만 확실히 최루탄과 백골단의 공이 컸다. 싸우다 운이 없으면 잡히기야 하겠지만 앞에서 날 호시탐탐 노리는 적들과 그 책임자인 파쇼 전두환을 그냥 두고 뒤돌아 집에 갈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런 면에서 87년 이후 도입된, 신고만으로 합법집회가 가능하게 된 집회신고제, 백골단 해체, 최루탄 미사용 등의 제도 변화나, 문민정권의 등장과 같은 일들은 민주적 공간을 넓힌 계기이기도 하지만 운동세력을 순치시키는 효과도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오히려 후자의 측면이 훨씬 더 커 보인다. 그런데도 운동세력은 ‘좋은 게 좋은 거지’라는 분위기 속에서 별 생각 없이 순치의 길을 달려온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또한 당시의 집회나 투쟁은 이렇다 할 의식(儀式)이 별로 없었고 그래서 의식을 모르는 일반 시민들이 이질감을 느끼지 않고 거리낌 없이 참여할 수 있었다. 요즘, 조직원만의 모임이 아니라 대중 집회나 대중투쟁이 의식(儀式)처럼 진행되는 것은 문제다. 의식(儀式)이 새로운 사람들과의 소통을 가로막는 수단이 되지는 않는지 되돌아 볼 일이다. 연단, 연설, 노래, 동작, 행진, 깃발, 투쟁방식 등 모든 부면에서. 대중 집회나 대중투쟁이 의식을 집전하고 의식을 이해하는 사람들만의 행사가 되어서는 안 되지 않겠는가! 명동성당은 촛불집회, 점심시간을 이용한 인근 지역 직장인들의 방문, 명동 일대에서 벌어진 화이트칼라의 시위, 농성단 해산, 6월 18일 대규모 2차 국민대회 등으로 이내 뚫렸다. 인천 답동 성당과 부산의 어디에선가도 농성이 진행되었지만 국면은 분명 농성 국면은 아니었다. 6월 18일과 6월 26일의 2, 3차 국민대회에서는 전국 방방곡곡에서 민중들의 대거 진출이 있었던 것이다. 6월 18일 대회에서도 지금까지 잊히지 않는 장면 두 개가 있다. 하나는 신세계 앞 분수대 사건. 신세계 앞 분수대를 사이에 두고 남대문 시장과 신세계 앞 일대의 시위대와 최루탄 발사기로 무장한 채 소공동 쪽에 포진해 있던 전경들 사이에 돌과 최루탄으로 일진일퇴의 공방이 있었는데, 순간 전경들이 분수대까지 밀고 들어오자 시위대들이 일제히 달려들어 돌과 육탄전을 이용해 상당히 많은 수의 전경들을 고립시켜 장비도 회수하고 전경들을 분수대에 빠뜨려 버렸다. 그 때까지 만날 전경들에게 쫓겨 다니기만 했던 시위대들은 분수대에 빠진 전경들을 보고 무척 통쾌해 했다. 우리가 이길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조금 있다가 더 많은 전경들이 와서 다시 쫓겨나긴 했지만 말이다. 또 하나는 부산 시위 소식. 한참 이리저리 쫓겨 다니다가 저녁 네다섯 시 무렵이었을까? 식사를 하러 들어간 것은 아니었는데, 어느 식당 안 텔레비전에서 전국 각 지역에서 일어난 노도와 같은 시위대의 모습을 비춰주었다. ‘어디 몇 천, 어디 몇 만’ 하는 보도가 이어졌는데, 부산 시위대를 보고 깜짝 놀랐다. 규모도 10만 명으로 가장 많았을 뿐만 아니라 더욱 인상적인 것은 화면으로 전해진 시위대의 분노와 결의에 찬 모습이었다. 부산 시위대의 모습을 보고 ‘이 정도면 이제 우리가 승기를 잡은 것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서울 신세계 앞 분수대에서의 일시적이나마 작은 승리와 부산의 노도와 같은 시위대로 인해, 6월 18일은 6월 항쟁의 결정적인 날이 되었다. 6월 18일 이후 6월 26일에 다시 한 번 대규모 시위가 있었고, 마침내 지배세력이 6·29를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연이어 7월에서 9월 사이에 세계 역사상 그 유례가 드문 대규모 노동자 파업투쟁이 일어났다. 그러면 당시 민중들은 왜 그렇게 떨쳐 일어났을까? 지금은 한나라당 윤리위원장 인명진 목사가 대변인이었던 국본이 결성되자마자, 국민대회를 몇 번 개최하지도 않았는데도 지배세력이 후퇴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민중들이 대대적으로 진출한 이유를 허약하디 허약한 국본의 지도력과 조직력에서 찾을 수는 없다. 국본은 대대적으로 진출할 결의에 차 있는 민중들에게 판을 열어주었을 뿐이다. 민중들은 분명히 그 이전부터 움직이고 있었다. 이는 2·12 총선과 개헌 현판식에 몰려든 민중들, 그리고 경찰서에 끌려가는 것을 불사하고 박종철 고문치사 규탄 투쟁에 몰려든 민중들을 보면 알 수 있다. 이 이유로는 우선 전두환 등 지배 세력의 파쇼 통치를 꼽지 않을 수 없다. 정치적 자유는 전혀 없었고, 오로지 최루탄, 경찰력, 군대, 정보기관의 사찰 등 억압적 국가기구에 의해 정권이 유지되었고, 정권이 불러주는 내용을 앵무새처럼 떠벌이는 관제 언론 및 어용 지식인만 활개를 치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숱한 사람들이 군대에서, 학원가에서, 공장에서 소리 소문도 없이 죽어나가고 있었다. 민중들은 박종철 고문치사 은폐 사건을 계기로 더 이상 이런 파쇼 통치를 참을 수 없다고 선언했던 것이다. 둘째로는 경제적 모순의 심화를 들지 않을 수 없다. 사실 파쇼통치의 많은 부분도 이 경제적 원인과 연관이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1970년대 말, 1980년대 초 한국 자본주의는 이윤율이 하락하고 심각한 경제위기를 겪게 된다. 광주학살을 자행한 뒤 등장한 전두환 정권은 강력한 경제위기 극복책을 시행해나간다. 노동법 개악, 정부 부문에서 대규모 해고 단행, 퇴직금 제도 개악, 임금 억제 정책과 같은 노동에 대한 공격을 진행하였고, 물가를 강력히 통제하였다(전두환 정권이 벌인 ‘3대 부정심리 추방운동’ 목록에는 ‘물가오름세 심리’도 들어있었다). 1986~7년에는 이런 공격과 1986년부터 불어 닥친 3저로 인해 자본의 이윤율이 급격히 개선되고 있었는데도, 이전부터 진행된 노동에 대한 공격과 임금 억제책은 지속되고 있었다. 내수침체로 자영업자들의 상태는 매우 안 좋았고, 수출대기업은 조출, 잔업, 노동 강도 강화로 노동자들을 혹사시켜 컬러텔레비전과 VCR을 계속 실어내 떼돈을 버는데 정작 그것을 만든 노동자는 빈털터리였다. 자영업자들과 사무 관리직들이 시위에 참가하였고, 노동자들도 7월~9월에 작업장에서 노조를 결성하고 파업투쟁을 벌이기 전, 6월 항쟁 거리시위에도 개별적으로 참여했다. 당시 민중들의 대대적인 진출에는 이런 정치적·경제적 배경이 있었고, 1986년 2월 진행된 필리핀 민중혁명과 마르코스 축출도 한국 민중들에게 자신감을 심어주었을 것이다. 그런데 1987년 투쟁에서 민중들은 무엇을 원했는가? 그리고 그것을 쟁취했는가? 부산 시위대의 투쟁에서부터 얘기를 풀어보기로 하자. 우선 1987년 6월 항쟁에서 부산 시위대 규모가 커진 것은 김영삼과 연결해서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 김대중을 빼고 광주 개헌 현판식에 몰려든 사람들을 설명할 수 없는 것처럼. 그런데 이 부산 시위대들이 김영삼을 지지하고 ‘호헌철폐’, ‘독재타도’를 통해 김영삼을 대통령 시키려고 대거 시위에 나섰을까? 난 그랬을 수 있었다고 본다. 아니 그랬다고 이야기하는 게 사태를 더 정확히 보는 것일 테다. 여기서 한 발만 더 나아가 보자. 그러면 이들은 단지 김영삼을 대통령을 시키는 것 그 자체을 목적으로 삼았을까? 여기에 대해서는 도저히 양보할 수 없다. 답은 ‘아니오’다. 그들은 김영삼을 통해서 자신들의 특정한 요구를 실현시키려 했던 것이다.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파쇼 세력과 기구의 일소를 비롯한 민주주의의 신장 및 제 권리의 확대와 경제적 형편의 개선과 억압과 착취의 제한 및 철폐 등이었을 것이다. 김영삼은 이들의 요구에 부응했는가? 그 이후 정치적 과정을 보면 김영삼은 이들의 요구에 제대로 부응하지 못했다. 물론 김대중도 6월 항쟁에 적극적으로 참가했던 자신의 지지자들의 요구에 부응하지 못했다. 그들은 한국 자본주의의 위기라는 상황 속에서 전두환의 정책과 크게 다를 바 없는 정책을 실시했고, 민중 생활의 어떤 측면에서는 전두환 때보다 더 못해지기까지 했다. 경제위기 상황에서 그들이 가지고 있던 유일한 카드는 노동자 민중들의 희생 하에 자본의 이윤율을 회복시키자는 ‘신자유주의’라는 카드뿐이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6월 항쟁에 참여하였을 민중들은 김영삼에게 실망한 뒤에는 김대중을 지지하고, 김대중에게 실망한 뒤에는 노무현을 지지하고, 이젠 노무현에 실망하고 이명박을 지지하려 하고 있다. 왜 민중들은 계속해서 배반당하면서도 비슷한 정치인을 계속해서 지지하고 있는가? 혹은 속을 줄 알면서도 지지하고 있는가? 다시 말해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는 왜 그렇게 생명력이 강한 것인가? 이에 대한 확실한 답을 알면 이 글의 제목에 넋두리라는 단어가 들어가진 않았을 것이다. 넋두리삼아 몇 마디 해 본다면 그 이유는 대안적 이데올로기, 즉 사회주의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의 실질적 부재 때문이 아닐까? 이번 프랑스 선거를 보면서 사회주의 공산주의 정치세력의 몰락은 그 끝이 어디인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그 강력하던 프랑스 공산당이 2%의 지지도 못 얻었으니…. 임시변통은 전혀 통하지 않았던 것이다. 다가오는 선거에서 민주노동당 후보 또는 다른 좌파 후보가 일정한 지지를 얻고 더 나아가서 그 이후 선거에서 오늘날 이명박의 자리를 넘겨받을 수도 있을지라도, 그것이 대수는 아닐 것이다. 문제는 민중들의 해방의 열망을 제대로 담아낼 수 있는 그릇이 없다면 민중들의 봉기를 맞이해서도 민중들의 해방의 열망을 여기저기로 흘려버릴 것이라는 점이다. 그러면 1987년 6월의 퇴계로와 명동성당의 해방구를 다시 만들어내기 위해서 내가 지금 해야 하고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사회주의 공산주의 체제의 붕괴 즈음에 1987년을 경험한 ‘87년의 자식들’ 중의 하나로 ‘운동’에 뛰어들어 20여 년이 흐른 지금, 답답해 자문해 본다.
산별 제도화인가 계급주체 형성인가 [좌담]산별노조와 지역운동, 시작과 경로를 찾아
들어가며 2007년은 작년 산별전환 투표를 통해 대규모 사업장을 산별체계로 전환시킨 ‘전국금속산업노동조합(금속노조)’의 첫해다. 그만큼 노동운동 내외적으로 많은 주목과 기대, 우려가 교차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금속노조는 전노협 시절부터 민주노조운동의 주력부대 역할을 해 왔기 때문에, 그 성과와 한계가 민주노조운동 전반의 산별운동을 평가할 수 있는 가늠자로 여겨지는 것이다. 그런데 최근 우려할 만한 상황이 연달아 발생했다. 하나는 하이닉스 사내하청 노동자투쟁에 관해 사측과 교섭하는 과정에서 금속노조 중앙이 과도하게 개입하여 위로금을 받는 것으로 합의한 사건이다. 이는 즉각 활동가들의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노동자의 자존심을 돈받고 팔아넘겼다”, “금속노조 중앙의 일방적인 직권조인이다” 등의 비판이 쏟아졌다. 또한 비정규직 노동조합과 활동가들을 중심으로 대책위까지 만들어져 현장에서 ‘하이닉스 직권조인 합의서 폐기 서명’에 들어가는 등 비판과 항의가 지속되고 있다. 이 사건은 금속노조 집행부의 핵심이라고 할 수석부위원장의 직권조인 때문에 불거진 것으로, 산별노조로서 금속노조의 협약체결 원칙과도 전혀 어긋나는 행동이다. ‘산별교섭’을 강조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산별교섭을 위한 최소한의 내부적인 절차를 어기는 이중성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이 사건은 현 금속노조 집행부가 몰두하는 “산별교섭”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 돌아보게 한다. 다른 하나는 대표적인 투쟁사업장인 이젠텍 문제로 개최된 ‘민주노조 사수, 이젠텍 자본 응징 금속노동자 결의대회’에서 금속노조 정갑득 위원장이 투쟁방침을 바꾼다며 “앞에서 열심히 싸우고 뒤에서는 노동부와 정례회의를 통해 하나하나 풀어가겠다”, “평화집회에 걸림돌이 될 수 있는 모든 행위에 대해 금속노조 위원장으로서 엄벌하겠다” 등의 발언을 한 것이다. 그 이유는 “금속노조가 임단협을 수행하고 있고 총파업을 준비하고 있는 만큼, 노동조합이 사소한 것에 발목 잡혀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즉, 충돌을 벌이게 되면 산별교섭에 부담이 되니 행동은 자제해야 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도 “조합원들의 투쟁의지를 꺾었다”, “금속노조 투쟁의 역사를 부정했다” 등 여러 가지 비판이 이어졌다. 이 두 가지 사례는 통합 금속노조 지도부가 지향하는 바에 대한 우려를 낳기에 충분하다. 현재 산별노조 운동 과정에서 지속적으로 확인되어야 할 쟁점들, 즉 산별노조는 무엇을 위한 것인가, 산별은 어떻게 투쟁해야 하는가, 산별에서 비정규직 조직화와 투쟁은 어떻게 달라져야 하는가 등의 문제가 좋지 않은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는 것 아니냐는 것이다. 또한 산별노조가 지나치게 교섭에만 치중하여 투쟁성, 변혁성을 고취하는데 소홀한 것 아니냐는 비판도 많다. 산별전환 과정의 문제 2006년 말 현재 민주노총의 산별 조직률은 76.7%이고, 조합원 769,218명 가운데 589,637명이 산별노조 소속이라고 한다. 작년과 올해에 걸쳐 통합금속노조, 공공노조, 운수노조, 건설노조 등 속속 산별전환 노조가 생겼다. 그리고 올해 임단협 과정에서 화학섬유, 민간서비스 등 미전환 조직을 중심으로 6월 18일~29일 사이에 산별전환 총투표를 추진할 예정이며 이 과정에서 민주노총 90% 이상의 조합원이 산별노조 조합원이 될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양적인 전환과는 달리 질적인 운동의 발전은 아직 더디다고 할 수 있다. 산별전환이 촉진된 배경에는, 지배계급의 신자유주의 공세에 대한 투쟁이 패배해온 상황(실질적인 총파업 투쟁을 조직하지 못하는 상태의 지속, 사회적 타협주의의 유혹, 지배계급의 여론 공세, 민주노총 계급 대표성의 위기 등)과 복수노조 및 전임자 문제에 대해 기업별 노조 체계가 가지는 위기감이 있다. 이러한 지난 몇 년의 산별추진 과정을 돌아보면 여러 가지 문제점을 발견할 수 있다. 첫째, 산별을 ‘규모 확대’ 중심으로 접근한 점이다. 복수노조나 노사관계로드맵 도입 등으로 인한 노동조합의 환경변화로 인한 불안과 신자유주의 세계화 공세로 인한 산업구조조정과 산업공동화 등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노조가 덩치를 키워 교섭력을 키워야 한다는 것이었다. 즉, 고용에 대한 노동자의 전반적인 불안감에 기반하여, 규모를 확대하자는 논리로 산별전환을 성사시킨 것이다. 물론 노동자는 하나라는 관점에서 볼 때 하나의 단일한 노조로 조직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할 수 있지만, 규모를 키우는 것이 곧바로 투쟁력의 확대와 운동성의 상승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는 것을 고려하면 어떠한 투쟁과 운동을 할 것인가에 더 큰 무게중심이 있어야 했던 것이다. 둘째, 산별의 상에 대한 인식의 차이, 조직 내 민주주의 문제 등이 드러났다. 이는 보건의료노조 산별협약 ‘10장 2조’의 문제로 드러나기도 했는데, 사업장 교섭에서 산별협약 이상의 수준을 요구하지 못하도록 하는 내용이어서 커다란 논란이 되었다. 또한 문제제기 된 내용이 내부에서 토론을 통해 해결되지 못했고 결국 조직이 분리되었다. 셋째, 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운동 체계를 만드는 데 미흡했다. 이는 기업지부 인정 문제로 드러났다. 연대운동을 활성화하고 노동자들이 기업의 담장을 넘어 사회운동과 결합하기 위해서는 지역을 거점으로 하는 것이 필요하다. 또한 미조직․비정규직 노동자를 조직하기 위해서는 지역이 중심이 되어 주변의 노동자들을 조직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금속노조에서는 한시적인 기업지부를 인정하는 것으로 조직체계가 만들어졌고, 공공노조에서도 업종본부와 지역본부로 이원화하는 체계가 만들어졌다. 넷째, 미조직․비정규직 조직화에 대한 계획이 부족했다. 기업별 노조의 한계를 넘어 보편적인 노동자의 이해를 대변하고 계급대표성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조직화에 우선적인 중심을 두어야 하는 것이 마땅하다. 더욱이 한국의 노조 조직률이 낮고, 그마저도 정규직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조직되어 있기 때문에 조직화는 사활적인 과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산별전환 과정에서 전환 자체에 초점이 대부분 맞춰진 까닭에 새로운 조직화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은 제대로 논의되지 않았다. 오히려 산별전환을 하면서 재정이 줄어 활동가들을 줄이는 경우도 있었다. 제도화 전략의 위험성 현재 민주노총은 산별교섭의 법제도적 보장과 사용자단체와의 교섭 성사를 실질적 목표로 설정하는 것으로 보인다. 총연맹의 경우 이를 ‘입법과 협상’ 양 측면에서 동시에 접근해야 한다며 산별노사관계의 안착과 산별교섭의 제도화를 위한 민주노총 차원의 총괄적 제도화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즉, 노사간 또는 노사정간 협상을 통해서 산별교섭의 제도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다. 민주노총은 산별교섭 제도화와 관련하여 △산별교섭 및 교섭대표단 구성 의무화, △단협 효력 확장제도 개선, △산별협약의 최저기준 명시 등을 요구하고 있다. 그리고 이를 6월 임시국회에 입법안으로 제출하여 사회적 논의를 추진할 계획이다. 민주노총은 또한 국회 입법 추진과 함께 노정, 노사, 노사정 협상을 추진하고 있다. 제도화를 우선적으로 내세우는 이유는 법제도적으로 사용자들을 산별교섭에 나서게 할 아무런 강제장치가 없어서, 사용자들이 산별교섭을 거부하면 노조가 실력행사로 압박하는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더욱이 현대자동차 같은 대사업장이 교섭을 거부하면 기아, 쌍용, 대우 등 다른 자동차 사용자들도 교섭에 나오지 않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산별교섭 자체가 흐지부지될 수 있기 때문에 제도화를 더욱 사활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제도화 전략, 이를 달성하기 위한 협상 중심 전략은 문제가 있다. 한편으로 이는 산별노조의 존재 목적에 대한 것인데, 즉 산별노조가 산별 중앙교섭 달성을 최대의 과제로 삼아야 하는지에 대한 문제다. 물론 노조가 교섭과 협상을 진행하는 것은 필요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 혹은 교섭과 협상 자체의 목적은 노동자간 연대와 단결을 통해 노동자를 계급으로 형성하는 것이다. 제도화된 틀, 제도적 공간 확보를 중심으로 사고하는 순간 노동자운동의 역동성과 운동성을 강화하는 것은 부차화되고 교섭을 중심으로 조합원들을 동원하는 경향이 커질 수밖에 없다. 특히 산별 중앙교섭 쟁취를 절대적 과제로 부각하는 논리가 이러한 제도적 공간의 확보를 현 시기 노동운동의 최대목표로 잡는 입장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더욱 위험하다 할 것이다. 안정적인 제도적 공간을 확보하는 것은 언제나 자본과 정권의 공세에 취약한 노동조합운동으로서는 매력적인 노선으로 여길 수 있지만, 계급주체 형성전략의 뒷받침 없이 심지어 그것과 반대로 진행되는 제도화는 노동조합운동을 쇠퇴시킬 가능성이 크다. 다른 한편으로, 제도화를 위한 협상 중심성의 문제가 있다. 노동자운동에 있어 노동자와 사용자, 정부 간의 힘 관계가 가장 근본적인 지점이라는 점은 모두가 동의한다. 아무리 작은 요구를 쟁취하기 위해서도 노동자들은 단결하고 연대하여 스스로의 힘을 극대화시켜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산별교섭에 별다른 관심이 없고, 갈등만 적절히 관리하려고 하는 정부나 사용자들에게 협상을 통하여 산별의 당위성과 필요성을 설득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도 가능성이 적다. 또한 그러한 설득 논리라는 것도, 산별체계를 정착시키면 파업이 줄어들고 노사관계 비용이 적게 든다는 것 따위이다. 그러나 이는 지난 시기 비정규직 법안과 노사관계 로드맵을 둘러싼 노사정 협상에서도 확인했듯이 상층 중심의 타협적 과정이 될 우려가 높다. 특히 민주노총 위원장이 올 초 파업을 남발하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대정부 협상창구 마련에 골몰하는 가운데, 언론에서는 이로 인해 파업건수가 작년에 비해 39% 감소하고 근로손실일수도 59% 감소했다고 보도하고 있다. 게다가 노사화합선언도 132건이나 된다고 한다. 산별교섭 성사가 최대 목표? 금속노조, 보건의료노조 등 대표적인 산별노조의 2007년 최대 목표는 사용자단체 구성과 산별교섭 성사인 것으로 보인다. 금속노조 위원장은 한 인터뷰에서 “중앙 산별교섭을 이끌어내는 것이 가장 큰 목표”라고 밝히고 있고, “현대차가 올해 실질적으로 중앙산별교섭에 처음부터 결합하기는 대단히 어려운 조건”이므로 “현대차 임단협에 직접 내려가서 사측으로부터 최소한 내년에는 산별 중앙교섭에 결합하겠다는 약속을 받을 것”이라고 말했다. 교섭 성사와 교섭구조 마련이라는 형식적인 측면에 집중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산별교섭이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다. 기업별 교섭을 통해서 기업 내 제한된 범위의 조합원들의 이해를 배타적으로 옹호하는 것을 넘어서, 미조직노동자까지 포함하는 요구로 노동조합의 요구를 일반화하고 쟁취하는 투쟁을 한다는 데 의미가 있다. 이러한 목적을 위해서 노동조합의 교섭구조를 바꾸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산별교섭 쟁취는 이러한 운동적 목표를 실현하는 투쟁 과정의 일부가 되어야 한다는 점을 재차 강조할 필요가 있다. 산별교섭 성사를 절대적 목표로 앞세우는 것은 걱정스러운 점이 많다. 이러한 사고와 사업방식은 목표와 수단을 전도하게 되기 때문이다. 예컨대 금속노조의 경우 산별교섭에 참여하지 않는 대사업장에 대한 압박이 우선시되어 대사업장 중심의 임단협이 될 수도 있다. 또한 중앙교섭 성사를 위해 지부나 지회의 투쟁이 봉쇄될 가능성도 존재한다. 하이닉스나 이젠텍을 둘러싼 문제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타결 가능한 교섭을 위해서 요구안의 수준도 조정될 수 있다. 예컨대 지난 금속노조 대의원대회에서는 △사내하청노조 단체교섭 체결 당사자가 원청사용자임을 명시 △총고용인원 유지와 결원 시 조합원 우선채용 △성과급 축소와 임금피크제 도입 저지 △실노동시간을 2008년부터 2,500시간으로 제한 △사내하청노동자에 기업지부, 지회의 단협 동일적용 △장기투쟁사업장 관련 민형사상 소송 금지와 부당해고 판정 시 즉각 복직 등을 교섭 요구안에 넣자는 수정안들이 부결된 바 있다. 결국 산별교섭을 물신화하거나 교섭 성사 자체에 최대의 방점을 찍다 보면 정작 중요한 지역과 현장이 소외될 수 있는 것이다. 계급주체 형성 전략으로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의 공세와 노동의 불안정화, 이에 대한 기존 노조운동의 대응 실패는 광범위한 혁신의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산별노조가 조직적 대안으로 대세가 되었다. 그러나 조직 자체가 대안이라기보다는 그러한 대안적 혁신으로 나아갈 수 있는 최소한의 틀거리를 갖추는 데 의의가 있다고 할 때, 미조직․비정규 노동자 조직화와 계급적 단결, 불안정노동 철폐 투쟁, 노조운동의 사회운동적 성격 복원 등이 혁신의 중심 과제가 되어야 할 것이고 산별노조 역시 이러한 과제를 수행하는 데 복무해야 할 것이다. 특히 노조운동의 본령은 노동자의 단결이므로, 기존 노조로 조직된 정규직 중심의 노동자를 넘어 미조직․비정규 노동자를 조직하기 위한 목적의식적인 계획 수립과 실천이 강조되어야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는 제도화보다는 계급주체 형성 전략을 지향해야 할 것이다. 자본의 권력에 대항하여 노동자들이 권리를 실현하고 나아가 노동해방의 주체가 될 수 있는 밑바탕은 바로 단결에 기반한 집단적 조직화다. 따라서 산별교섭 체계를 구축하는 것이 산별노조의 완성이 아니며, 교섭 모델 중심은 노동자 사이의 연대 강화와 계급형성이라는 의미를 가리게 된다는 것을 확인해야 한다. 구체적으로 이러한 과제는 미조직․비정규직 조직화와 투쟁, 지역 연대운동의 강화, 사회운동과의 결합 등으로 나눠서 볼 수 있을 것이다. 미조직․비정규직 조직화와 투쟁 사실 산별전환의 가장 큰 대의명분이 되었던 것은 날로 심각해지고 있는 비정규직 문제였다. 실제로 작년에 통과된 비정규 악법이 오는 7월 1일 시행을 앞두고 있는 상황에서 현장에서는 비정규직들에 대한 광범위한 해고와 계약해지가 늘어나고 있고, 이에 대한 다양한 저항과 투쟁이 전개되고 있다. 따라서 산별노조가 비정규직에 대해서 이전 기업별 노조와는 뭔가 다른 형태의 운동을 보여주기를 원하는 바도 크다. 이에 사실상 “비정규직 관련 활동이 산별노조의 ‘산별성’을 테스트하는 리트머스 시험지가 될 전망”, “미조직․비정규 노동자 조직화가 산별노조의 계급적 대표성을 가늠하는 문제” 등의 분석이 많다. 금속의 경우 160만 금속노동자 가운데 양노총으로 조직된 노동자가 30만 명이 안 되고 비율로도 20%가 안 된다. 이에 금속노조는 500인 이상의 지회에 반드시 담당자를 두게 하고, 중앙에 미조직․비정규 특위를 구성하여 지역과 중앙사업을 전개한다는 계획이다. 또한 지역의 공단을 중심으로 전략조직화를 추동하고 삼성과 LG 등 무노조사업장에 대한 조직화 방안을 세운다. 보건의료노조와 공공노조 역시 각 산업의 비정규직 정규직화, 차별철폐, 노동기본권 보장을 주요한 과제로 앞세우고 있다. 민주노총의 2007년 산별의제에도 비정규직 정규직화, 임금 및 근로조건 균등처우, 비정규 노동자에 대한 불법행위 근절, 산별 최저임금 등이 주요하게 제시되어 있고 그 방안으로 산업별 실태조사, 차별철폐 3개년 계획 수립, 비정규직의 산별노조 가입운동 등을 내놓고 있다. 산별의 비정규직 문제는 세 가지 방향에서 접근 가능하다. 첫째, 비정규직 조직화이다. 기존의 노조활동에서 미조직․비정규직 조직화를 위해 전략조직화를 시도하고 있지만, 관건은 노조활동의 무게중심을 이 방향으로 옮기도록 체질을 개선하는 것이다. 조직화는 단지 몇몇 활동가들과 집행부만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산별이 기존 기업별 노조의 통합 수준을 넘어 노동자의 단결과 연대를 촉진하기 위해서는 노조활동의 비중, 사업의 중심성에 있어 조직화 사업이 확장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인력과 재정의 투입, 적절한 전략조직화 사업, 지부 차원의 지역적 일상적 조직화 활동이 필요하다. 둘째, 조직된 비정규직의 조직편제 문제다. 금속노조 방침으로는 1사 1노조를 원칙으로 하되, 해당 단위(비정규노조)의 결정에 따른다고 되어 있다. 기본적으로는 비정규직 지회를 따로 두는 것보다는 같은 사업장에 포함시키는 것이 정규직 노동자들로 하여금 비정규직 문제를 자기 노조의 문제로 인식하게 만들 것이라는 이해가 일반적이지만, 같은 노조로 편제되었을 때 비정규직의 독자성이 침해되거나 발언력이 줄어들 것이라는 우려도 있고 정파에 따른 견해 차이도 있어서 쉽게 정리되지 않고 있다. 이런 현실 사정이 반영된 결과로 금속노조 방침에도 1사 1노조 원칙 외에 위와 같은 단서가 붙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또한 노동자 간 단결을 최대한 고취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예컨대 비정규직의 독자성을 살리면서 정규직과 통합하는 방안, 당분간 비정규직 지회 체제에서 공동사업을 하면서 점진적으로 통합하는 방안 등이 모색될 수 있다. 셋째, 산별노조의 비정규직 관련 정책과 요구 측면이다. 금속노조의 경우 중앙교섭 요구에 비정규 노동자 조합활동 및 고용보장, 불법파견 및 용역사용 금지, 임시직 정규직화, 사내하청 처우개선, 사내하청 노동자의 산업안전, 산별최저임금(936,320원) 등을 요구하고 있다. 보건의료노조도 비정규 노동자의 산별노조 가입, 비정규직 사유제한과 정규직화, 차별철폐, 고용안정, 정규직과 동일한 임금인상, 산별최저임금 등을 요구하고 있다. 그리고 공공노조는 비정규악법 폐기, 공공부문 민간위탁과 외주용역 제한, 공공부문 비정규직 철폐, 감시단속노동자에 대한 근로기준법과 최저임금법 완전적용 등을 요구하고 있다. 이러한 요구에서 있어서도 노동자 간 격차를 줄이고 단결을 확대할 수 있는 방향이 중심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지난 금속노조 대의원대회에서 중앙교섭 요구 가운데 원청 사용자성 인정 요구, 사내하청 노동자에 대한 동일 단협 적용 등이 부결된 것은 한계가 아닐 수 없다. 결국 미조직․비정규 노동자 조직화와 계급 내 단결을 위한 운동과 투쟁이 관건이다. 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연대운동 활성화 산별전환에서 노동자 단결과 연대의 정신을 실현하기 위한 중심 방안으로 업종이나 기업 체계를 넘어서는 지역 중심 체계가 제기되고 논쟁되었다. 금속노조는 지역지부로의 재편을 결의했지만 결국 기업지부를 한시적으로 인정하는 안을 수용했다. 그 과정에서 논쟁도 컸다. 이러한 한시적 기업지부 인정은 현재의 단결 수준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2009년까지 대사업장 기업지부를 해소하기 위해 금속노조는 조직발전전략위원회를 구성하여 기업지부가 지역지부 사업에 결합하게 하고 기업지부 해산 계획을 제출하도록 했다. 지역을 중심으로 하자는 것은 첫째, 여러 사업장이 포함된 지역지부가 지역의 중소영세 미조직․비정규 노동자를 조직하는 데 유용하고 더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미조직된 지역의 공단 등 밀집지역에 대한 조직화 논의도 진행 중이다. 특히 공공노조의 경우 지역의 환경미화, 청소용역, 시설관리 등 공공부문, 지자체의 비정규직을 조직화하면서 지역 공공서비스노조 투쟁을 활발히 벌이고 있다. 최저임금 쟁취투쟁 역시 이러한 맥락에서 지역의 저임금 불안정노동 철폐투쟁으로 자리매김될 수 있다. 둘째, 지역 차원의 공동투쟁의 질을 높이는 것이 연대를 강화할 수 있다. 물론 지역 중심으로 조직구조를 가져간다고 해서 연대가 잘 되는 것은 아니고, 산별로 전환했는데 오히려 지역 차원의 연대투쟁에 잘 나오지 않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같은 생활적 지리적 조건을 공유하면서 노동자 연대를 실현하는 것은 기업 단위에 갇힌 노동자 의식을 넘어설 수 있는 유력한 계기이다. 금속 지역지부에서 공동투쟁, 지역파업 등의 경험은 이에 근거한 것이었다. 또한 각 지역에서 자본유치를 명분으로 노동조건의 바닥을 향한 경쟁을 벌이고 있는 상황에서 이에 대한 반대투쟁을 조직하는 것이 중요해지고 있다. 셋째, 지역 민중들의 보편적 이해에 기반한 투쟁으로 운동성을 강화하는 것이다. 특히 개발이데올로기에 편승한 지역 환경파괴와 오염, 상수도 사유화 등 지역적 사안에 대한 대응을 통해 지역의 민중운동, 사회운동과 결합하고 지역 민중의 지지를 이끌어 낼 수 있다. 이러한 운동을 위해서는 산별의 지역지부 뿐 아니라 민주노총의 지역본부가 일차적으로 강화되는 것이 필요하다. 또한 지역차원에서의 노동자 공동교육, 학습 역시 중요하다. 무엇보다도 기존의 기업별 체계를 넘어서서 정규직 대사업장 노동자들을 단위사업장 내의 이슈만이 아니라 더 확장되고 더 사회적인 운동과 투쟁으로 이끌어 내고 변화를 모색해야 한다는 측면에서 지역운동의 강화가 강조되어야 할 것이다. 사회적 투쟁, 사회운동과의 결합 산별노조의 투쟁, 파업은 사회적인 투쟁과 결합되었을 때 더 위력적인 무기가 될 수 있다. 산별이 노동자의 단결을 추구하고 계급형성을 지향해야 한다고 했을 때, 전반적인 사회변혁 투쟁과 동떨어져 생각할 수는 없다. 갈수록 신자유주의 공세가 격화되고 한․미 FTA 등 노동자 민중의 기본적인 권리와 생존을 위협하는 정권과 자본의 압박이 강화되고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금속노조에서 한․미 FTA 총파업을 현장 대의원들의 발의로 결의한 것은 큰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투쟁은 금속 뿐 아니라 다른 모든 노조에서 받아안고 조직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사회운동과의 결합에 있어 현재 서울지역을 중심으로 추진되고 있는 ‘사회운동포럼’도 하나의 유력한 형태다. 노조조직과 당 지역조직을 비롯하여 사회운동 단체, 학생운동 단체 등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광범위한 운동의 소통과 교류를 통해 연대의 질을 한 단계 상승시키고 운동을 혁신하려는 시도가 추진되어야 한다. 노동운동 차원에서 보아도 현장의 노동자, 활동가들이 노동운동의 폭과 깊이를 확장하고 노동자들을 새로운 운동의 주체로 성장시키기 위해서 이러한 계기를 적극적으로 모색할 수 있다. 그 과정에서 상호 교육과 운동의 활성화를 도모할 수 있을 것이다. 미조직․비정규 노동자 조직화와 투쟁에 있어서도 사회운동과의 결합이 요구된다. 지역의 단체, 당의 지역조직, 노조 등이 연합하여 지역 민중의 지지를 이끌어내고 연대의 힘을 발휘하면서 조직화를 확장하는 것이 성과를 낳는 경우가 많다. 노동자운동의 전환을 위하여 산별에 거는 기대만큼이나 우려가 많은 것이 사실이다. 그만큼 새로운 운동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요구가 있는 것이다. 앞서 언급하였듯이 산별전환이 운동을 바꿔주는 것은 아니며 근본적인 혁신이 있어야 운동이 전환될 수 있을 것이다. 산별노조 전환은 단지 하나의 운동의 조건을 만드는 과정에 불과하다. 산별전환이 자동적으로 기업의 울타리에 갇힌 노조운동을 산업으로 지역으로 계급적 연대로 끌어내는 것은 아닌 만큼 더 많은 노력이 산별전환 과정과 별도로 진행되어야 한다. 노동자의 단결과 연대, 비정규직 조직화와 투쟁, 사회적 투쟁과 사회운동과의 결합 등은 산별이라는 형식을 떠나서 노동자 운동의 본령으로서 제기되는 것으로, 모두 노동자 운동이 사회변혁을 지향하는 운동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의미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제도화 전략보다는 계급형성 전략을, 노조의 생존을 위한 제도적 공간을 확보하기 위한 교섭을 우선하기 보다는 운동중심을 지향하는 방향이 더욱 강조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