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 아닌 사회주의 논쟁과 정세적 역설 사회주의가 논란이다. 진보통합 논쟁 과정에서 녹색사회주의와 반자본주의가 복지국가 사민주의 등과 각축을 벌이고, 사회주의노동자정당 건설을 추진 중인 계급현장 좌파 진영은 최근 사회주의 강령논쟁으로 조직 분열을 경험하기도 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이런 논란이 좌파 운동 진영의 활성화를 의미하지 않는다. 정작 민중운동의 다수파격인 민주노동당은 올해 정책당대회에서 기존의 “사회주의 이상 계승” 관련 당 강령을 폐기했다. 민주노동당은 사회민주주의와 사회주의를 비판하면서 이른바 ‘진보적 민주주의’를 새로운 이념 노선으로 채택했다. 민주노동당은 대중운동의 위기를 빌미로 신자유주의 구집권 세력들과의 선거연합과 공동 집권이라는 정치적 망상에 빠졌고, 좌파 진영은 다양한 사회주의들로 분화하는 양상이다. 세계 금융위기로 인해 자본주의를 넘어서기 위한 대안 전략이 관심을 얻게 되었고 신자유주의 지배체제의 위기는 심화되었지만, 위기의 효과는 운동의 전반적 우경화와 좌파의 분열이라는 부정적인 결과로 나타나는 것이다. 신자유주의는 위기에 빠졌지만 새로운 대안이 부재한 가운데 신자유주의 정책과 정치세력들은 여전히 건재한 반면, 생존적인 위기에 빠진 계급 대중운동은 위기 심화의 효과로 분할되고 반복된 패배를 경험하며 쇠퇴 일로에 접어들었다. 급기야 대중운동의 쇠퇴 흐름을 역전시키기 위한 운동 전망은 포기되고, 이른바 “운동의 위기를 정치로 돌파하자!”는 식의 선거정치 전략이 힘을 얻게 되었다. 객관적인 계급투쟁의 조건은 악화되었지만, 신자유주의의 위기를 정치공학적으로 이용할 수 있다는 환상이 정치계급화한 민중운동의 상층을 사로잡았다. 노동자민중진영의 운동역량은 아래로부터 급속히 무너져서 지리멸렬한 상태에 처했지만, 2012년을 앞둔 정치적 기획들은 진보적 집권이라는 장미빛 꿈에 부풀어있는 것이다. 이러한 정세적 역설은 현재와 같은 자본의 구조적 위기의 시기에 왜 사민주의와 ‘진보적 민주주의’와 같은 개량주의적 정치 전략들이 활개를 치는지를 설명해주는 중요한 단서다. 사민주의와 진보적 민주주의론에 대한 당위적인 비판을 넘어서, 실천적 극복을 위한 대안전략 모색을 위한 출발점 역시 이러한 정세적 역설이 어떻게 일어나게 되었는지에 대한 분석으로부터 시작된다. 덧붙여 다음의 기본 관점을 확인하며 논의를 시작해보자.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이념과 조직이 해체된 현 시대의 과제는 사회주의·공산주의 운동과 이념을 재건하는 것이지, 이전 시기에 존재했던 사회주의·공산주의 교리를 방어하는데 머무르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또 현 시기에 개량주의를 비판하는 목적이 임박한 혁명을 실행하는 데 방해가 되기 때문이라고 보기도 어렵다. 그렇다면 운동 재건의 관점에서 볼 때, 오늘날의 사민주의, 개량주의는 무엇이 문제인가? 어떻게 비판할 수 있는가? 나아가 오늘날의 사민주의, 개량주의에 대한 비판은 과연 얼마나 필요한 일인가? 현재와 같은 수세기에는 혹시 그들과의 연합이 필요한 것은 아닌가? 신자유주의 시대 사민주의, 개량주의의 문제점은 무엇인가? 20세기 초 제국주의 시대에 마르크스 레닌주의가 취했던 사민주의, 개량주의 비판의 운동적 함의는 중간파에 대한 타격과 견인을 통해 지배계급을 고립시키고 압도하기 위한 노동자 농민의 계급동맹전략에 있었다. 여기서 논쟁점은 누가 타격 견인해야 할 중간파이고, 해당 시기에는 비판 타격이 우선인가 견인이 우선인가였다. 그에 비교해 볼 때 2010년대를 맞이하는 현재의 신자유주의 시대의 사민주의, 개량주의 비판은 어떤 의미를 가질까? 가장 크게 바뀐 조건은 이전까지 타격, 견인해야 할 대상이었던 자유주의 좌파와 사민주의가 이전 어느 시기보다 불안정하고 동요하면서도, 단순한 중간파가 아니라 주도적인 지배분파가 되었다는 점이다. 신자유주의는 워싱턴 컨센서스라는 명칭에서도 드러나는 바와 같이 본성상 보수주의와 자유주의(및 사민주의)의 수렴체이고, 이는 기존의 중도좌파격인 구 자유주의와 사민주의가 (신자유주의와 사회 자유주의로) 보수화되고 타락한 결과이다. 정치 공학적인 의미에서 볼 때, 좌우대립전선에서 상대적으로 중도파적인 위치를 점하는 세력은 여전히 존재하지만, 오늘날 자본주의 세계의 일반적이고 계급적인 맥락을 이해하기 위한 관건은 불안정과 불확실성이다. (전위정당이 해체된 상황에서) 새로운 주체와 이념의 형성 없이 기존의 정치전선 지도 위에 지정학적으로 그려지던 일면적인 좌우 세력구분은 더 이상 현실적이지 않은 관념적인 정세인식과 엉뚱한 대응결과를 낳을 수 있다. 민주당이 때때로 한나라당보다 왼쪽에 위치하고, 한나라당의 우익적 공세가 거센 국면에서는 (이전의 방식대로 사고한다면) 민주당과의 연합이 가능한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잊혀지지 않는 그들의 과거행적으로 인한 상식적인 거부감은 차치하더라도, 극도로 불안정한 남한 자본주의의 구조적 조건과 불확실한 정세적 특성상, 그들 신자유주의 구 집권세력들에게 신뢰할만한 정책 이념적 전환을 기대하기 어렵고, 그러한 전환이 유지되리란 생각은 한낱 환상에 불과할 뿐이다. 사민주의 비판도 역시 비슷한 맥락에서 강조점을 가진다. 구조적인 장기 불황이라는 경제적 조건은 장기 구조적인 계급타협의 토대를 허물어버린다. 그러나 강력한 우익적 공세와 노동자 대중의 악화된 생존권적 어려움 속에서 이전 시기에 무너진 계급 타협적 모델에 대한 환상들이 끊임없이 재생산된다. 그렇기 때문에 신자유주의 시대의 계급타협적 시도는 실질적인 타협의 성과를 제대로 얻지 못하면서도, 사라지지 않으면서, 때때로 성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은 결과적으로 노동자계급의 위계화와 배제에 기반한 허구적인 형태의 사회적 합의로 전락하고 만다. 그러므로 (존재하지 않는 혁명적 전위당의 이념과 지도를 벗어난) 반혁명적 전망, 개량주의적 노선이라는 규정으로 오늘날의 사민주의를 비판하는 것은 정확한 비판은 아니다. 단순한 혁명 대 개량의 규정만으로는 불충분하다. 신자유주의 시대의 사민주의와 계급타협 모델은 근본적인 혁신을 지체시키고 위기를 봉합하여 심화시키는 시대착오적이고 부적합한 운동양식이라는 점에서 실천적으로 극복되어야한다. 또한 사민주의는 일국 수준의 국민경제적 성장모델을 그 경제적 토대로 성립된 체제라는 점을 유의해서 보아야 한다. 계급타협의 물질적 토대가 되는 일정한 성장을 위해서는 국가가 나서서 거대 법인기업의 성장을 지원해야 하고, 여기에는 노동의 동의가 필수적이다. 국민경제의 성장을 뒷받침하기 위한 일국적인 법제도적 보호 장치는 물론이려니와, 각종 사회간접자본 투자나 거대법인기업이 민간차원에서 단독으로 할 수 없는 연구기술 관련 지원들이 추가된다. 그 과정에서 생산은 사회화하는데 반해 소유는 사적인 형태로 묶여있는 자본주의의 기본모순이, 성장을 위한 비용은 사회화하지만 이윤은 사적으로 영유되는 모순으로 심화한다. 이것은 국가의 재정지출을 늘리고, 그것은 인플레이션, 스테그플레이션의 형태로 다시금 노동자 민중의 부담을 증가시킨다. 그런데 1970년대 경제위기 이후 자본이 급격하게 초민족화 되고 국민경제(민족경제)적인 성장모델은 금융세계화로 수렴, 재편되기 시작한다. 그 결과 일국적인 보호 장치 속에서 유지되어온 사민주의적 계급타협 체제는 경제적인 토대를 잃고 위기에 빠지게 된다. 이때 국가는 기존의 타협에 기초한 복지 지출의 일부를 삭감하고 재정균형을 중시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신자유주의 시대에 국가재정은 더욱 악화되는데, 경제위기를 관리하기 위한 지출이 급격하게 늘어나기 때문이다. 경제 붕괴를 피하기 위해서는 파산한 기업과 금융기관에 막대한 공적자금을 투여하고, 파괴적인 구조조정으로 인한 사회적 위험을 관리하기 위한 사회안전망을 구비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위기 비용-손실이 사회화하고, 초민족화된 금융자본의 이윤은 사적으로 보장되는 것이다. 이것이 사민주의 체제의 내적인 모순이다. 사민주의가 가지는 두 번째 모순이자 취약점이 있다. 신자유주의 시대의 사민주의, 복지국가를 중심으로 하는 정치-운동은 계급적 통합력을 높이기보다는 계급 내부 분배에 치우침으로써, 결과적으로는 계급 내 분할과 갈등을 확대 재생산하는 고유한 문제점을 가진다. 사민주의적 복지정책은 항상 복지의 수혜자와 부담자를 분리시키는 경향이 있고, 이는 계급 내부 분할과 갈등에 매우 취약하다. 정규직-비정규직, 실업자-취업 노동자, 노동빈민-상위계층 노동자 사이에서 수혜계층과 부담계층이 분리된다. 근본적인 원인은 정치가 생산을 변혁하기보다는 국민경제적 분배를 개선하는 데 골몰하기 때문이다. 반면 사민주의 복지 정책은 거대 법인기업과 국가가 주도하는 국민경제적 성장모델과 생산양식을 바꾸는 데는 관심이 적거나, 그러한 체제의 강화를 동반하는 타협을 추구한다. 그렇기 때문에 기존 지배체제가 구조적인 경제위기에 빠질 때마다 사민주의는 동시적인 위기에 빠지면서, 계급투쟁을 약화시키고 계급분할을 강화하는 것이다. 사민주의에 고유한 계급타협은 지배체제가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못하고, 약속된 타협의 성과물을 분배해주지 못하게 되면서 위기에 빠지게 되고, 그것이 노동자 계급내부의 분할을 확대하게 되는 메커니즘이다. 그 때마다 노동자계급 내부의 분할은 그저 계급 내 분할을 확대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자본가 내부의 갈등에 손쉽게 동원되어, 노동-자본-국가가 연합하여 다른 노동계급 집단을 공격하는데 이르기도 한다. 예컨대 스웨덴에서 1950년대 인플레이션이 일어나자 수출중심의 금속산업 자본들이 고전을 면치 못했고, 이 와중에 상대적으로 고임금을 받던 건설노동자들과 수출기업 소속의 저임금 금속노동자들이 갈등을 빚었다. 그리고 이런 갈등 국면은 나중에는 수출기업 자본가 그룹과 금속노동자들이 노동-자본 연합을 맺고, 전투적인 건설-고임금노동자들을 공격하는 데까지 나아가게 된다. 1980년대에는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고용을 보장받던 공공부문에 대한 신자유주의적 개혁의 요구가 자본과 국가로부터 강력하게 제기되는 가운데, 민간부문 남성 노동자들이 민간부분 사용자협회(SAF) 및 사민당정권과 연합하여 공공부문 여성노동자들을 공격하기에 이른다. 사건의 발단은 생산성이 낮은 공공부문 노동자들이 생산성이 높은 금속노조와 동일한 수준의 임금인상을 요구하자, 스웨덴 총연맹인 LO의 금속노조(Metall)가 민간부문 사용자협회(SAF)-사민당 정권과 손을 잡고 공공부문 노조를 민간부문에 기생하는 집단으로 공격한 것이다. 아울러 이러한 취약성은 사민주의적인 정치가 사회운동을 기술 관료적으로 접근하는 가장 대표적인 경향이라는 사실로부터 비롯되는 측면도 있다. 선거득표를 위한 공약이나 상층 국가 관료의 입장에서 제시하는 정책론을 사회운동으로 착각하는 태도가 특징적이다. 이러한 운동 풍조는 대중을 대상화하고, 운동주체 스스로 운동성을 포기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사회운동은 사람들이 일상적 의식을 스스로 비판·극복하고 스스로를 자율적인 정치적·사회적 주체로 변형시키는 활동이다. 사회를 근본적으로 바꾸는 것은 노동자 민중의 분배 몫을 산술적으로 최대화한다고 달성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특정 정치세력의 집권전략이나 권력 장악으로 변혁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사회변혁은 노동자들의 자기통치와 통제력을 증대하는 과정을 통해서만 달성된다. 사회운동과 정치를 사회를 어떻게 통치하고, 대중을 어떻게 통제할 것이냐는 관점은 '사회운동'과 '정치적인 것'을 '정책'으로, 또 다시 심지어는 '경찰의 통제'로 변질시킨다. 진보적 민주주의는 무엇인가? 민주노동당이 “사회주의적 이상을 계승한다”는 강령을 삭제하고, 이른바 진보적 민주주의를 새로운 이념으로 채택했다. 민주노동당은 분당 전인 2002년경에도 진보적 민주주의 강령논란을 벌인바 있다. 당시에 사회주의 강령 삭제를 추진했던 세력들이 이번에도 비슷한 내용의 개정을 주도했다. 그러나 막상 진보적 민주주의가 과연 어떤 이념인지는 강령 개정안만으로는 제대로 알 길이 없다. 그나마 정책당대회를 앞두고 민주노동당 부설 새세상연구소에서 발간한 『21세기 진보적 민주주의』라는 책자 정도가 주요한 참고자료다. 새세상연구소는 이 책자에서 사회주의와 사회민주주의, 자유주의를 비판하는 대안이념 전략으로 진보적 민주주의를 주장한다. 그런데 새세상연구소는 설명도 없이 사회주의와 사민주의는 좌편향이고, 자유주의는 우편향이라는 식으로 진보적 민주주의론의 이념적 정당성을 강변한다. 그런 뒤에 21세기 진보적 민주주의 체제라는 이름으로 정치, 경제, 복지, 평화통일과 사회적 평등과 관련된 강령적 정책들을 나열한다. 아무리 이 책자의 내용을 꼼꼼히 살펴봐도 진보적 민주주의론은 뚜렷한 내용이 없다. 진보적 민주주의론은 해마다 열리는 민중대회 때 작성되는 민중요구안을 자세하게 설명하고 재정리한 수준에 불과하다. 한 가지 특징적으로 언급된 내용이 있다면, 차베스의 베네수엘라 모델을 진보적 민주주의의 주요 사례로 꼽는 대목이다. 하지만 차베스의 개혁모델을 뭐라고 규정하건 그 핵심은 막대한 석유자원과 차베스 자신의 카리스마적 정치지도력을 기본토대로 삼아, 국가가 주도하는 위로부터의 급진적인 분배, 지원정책을 펼치는 데 있다. 이런 개혁모델을 한국 자본주의의 강령적 대안으로 삼기에는 많은 곤란점이 있을 것이다. 더욱이 차베스에 대한 자세한 평가는 그만두더라도, 차베스 스스로가 내세운 베네주엘라 개혁의 모토는 '21세기 사회주의'다. 그리고 차베스의 개혁이 나름의 긍정적인 측면을 가진다고 평가하는 많은 사람들이 주목하는 부분은 (많은 한계에도 불구하고) 석유산업의 국유화나 독점자본에 대한 통제를 도입한 급진적 요소가 존재한다는 점이다. 그런데 새세상연구소는 오히려 거꾸로 차베스가 자본주의적 소유관계나 경제 질서의 기본을 부정하지 않는 민주적 개혁을 점진적으로 추진한다는 면을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그런 면에서 보더라도 진보적 민주의론은 사회주의 및 사민주의를 비판하면서 자본주의적 소유구조, 경제 질서를 부정하지 않는 진보 민주정권을 수립해야 한다는 주장 정도가 유일한 내용이다. 사회주의 강령 구절을 삭제하고, 자유주의 개혁분파들과의 선거연합과 공동 집권을 정당화하기 위해 만들어진 이념인 것이다. 진보적 민주주의는 사민주의적 후퇴라고 평가하기도 어렵다. 왜냐하면 사민주의라고 평가하기에도 이념적으로나 정책적으로 크게 미달하기 때문이다. 진보적 민주주의는 그야말로 그 명칭 그대로 진보적인 민주주의다. 애매하게 개량적인 민주주의 정책들의 나열에 불과하다. 특히 진보적 민주주의론은 한국 자본주의를 신자유주의적으로 종속된 후진적 자본주의로 규정한다. 그럼으로써 당면한 반신자유주의적 개혁의 성격을 종속성과 후진성의 극복을 위한 민주주의적 과제로 규정한다. 즉 반신자유주의를 민족자주의 과제, 반봉건 (자본주의적)선진화의 과제로 뒤바꿔버리는 것이다. 그 결과 반신자유주의는 당면한 과제이고, 반자본주의적 과제는 먼 훗날의 과제로 서로 구분된다. 당면한 민족자주와 민주 개혁적 과제를 추월해서 반자본주의적 과제를 앞세우는 것을 좌편향이라고 비판한다. 하지만 현실에 존재하는 신자유주의는 종속성과 후진성을 의미하는 무엇이 아니다. 신자유주의는 1, 2, 3세계의 정책적 차별성이 사라지는 세계적인 보편적 수렴점으로 존재한다. 신자유주의는 국민경제적 단위를 넘어서, 그 틀을 해체시키는 금융·군사세계화로의 세계적인 통합을 의미한다. 신자유주의적인 포섭과 배제는 국민국가, 국민경제 단위의 종속과 등급화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국민국가 내부를 분할하면서 세계적인 통합을 추진하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세계1류 삼성과 노동시장에서조차 배제된 반실업 비정규직 노동빈곤층이 동시에 존재하는 것이다. 이렇게 변화한 자본주의를 극복하기 위한 과제는 오늘날 신자유주의를 극복하기 위한 과제로 특징지어 지는 것이지, 그 둘이 대립되는 선후관계가 아니고, 하물며 신자유주의를 종속성과 후진성으로 협소하게 규정할 수는 없다. 결국 민주노동당이 주장하는 반신자유주의는 1980년대 주장되던 반제반봉건적 민족자주의 과제를 다시 반복하는데 불과하다. 당시 논쟁과정에서 반제반자본주의(반봉건) 민족해방혁명론(NLR)은 반제반독점 민중민주주의 혁명론(PDR)이 반제국주의적 과제를 외면한다는 억지 주장을 펼친바 있다. 이에 대해 민족해방 민중민주주의 혁명론, 즉 NLPDR론을 제기한 PD진영의 NL 비판의 핵심은 (사회주의 혁명에 대한) 기약 없는 단계론적인 부르주아 혁명론이라는 점이었다. 이와 비교해 진보적 민주주의론은 사회주의 혁명에 대한 기약은 물론 없으려니와, (1980년대 스스로 주장했던) 부르주아 혁명론도 아닌 진보적 (선거연합) 집권론에 불과하다. 우선은 진보적 민주정부를 만들고, 그 이후에 더 진보적인 개혁과 구조적 변화를 도모하자는 단계론적인 운동론은 주관주의의 극치이고, 우경적인 정치 전략의 사후 정당화론이다. 자본가도 보수정권 지지가 아니고 재벌이 아니라면 민중이라는 기괴한 주장이 버젓이 활자화되어 출판되고, 위장된 신자유주의 세력이나 비독점 부르주아, 자유주의 정치세력들과의 무분별한 연합정치를 사후적으로 정당화하는 도구로 사용될 뿐이다. 운동과 과학에 대한 ‘정치우선’과 인민주의적 정치의 위험 진보적 민주주의론은 중소 부르주아 계급과의 연합과 공동 집권을 주장하면서도, 민중적 진보적 주도권이 관철되는 한 진보적 개혁을 심화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실제 내용은 자본주의 생산 지배체제를 전혀 손상시키지 않는 자유주의적인 부르주아적 개혁이면서, 어떻게 민중적 진보적 개혁을 심화한다는 것인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진보적 민주주의론이 가지는 유일한 근거는 “우리가 집권하면 다르다”는 의지뿐이다. 한편, 진보적 민주주의와는 조금 다른 맥락에서 보다 직접적으로 “정치우선!”이라는 선동적인 구호를 내세우면서 운동정당을 정책정당으로 바꾸고, 복지국가동맹을 새로운 정치노선으로 삼자는 본격적인 사민주의 정치그룹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진보적 민주주의나 이런 사민주의적 흐름들은 서로 강조하는 바가 약간씩 다르지만, 신자유주의적인 금융위기와 재정위기에 대한 과학적 분석과 비판보다는 손쉬운 선동적 언사와 주관적인 의지만을 앞세우는 운동방식을 공유한다. 어려워진 사회운동, 노동운동보다는 정치공학적인 선거연합의 기획으로 정치에서 성과를 얻자는 개량주의적 문제의식도 동일하다. 이들의 논리를 생각 없이 듣고 있다 보면, 어떤 투쟁도 이렇다 할만한 성과를 보기 어려운 상황이지만, ‘생각을 조금만! 바꾸면’, 집권의 환상적인 전망이 눈앞에 펼쳐진다! 그리고 이런 허황된 정치기획은 어찌되었건 진보적인 성향의 정치세력이 권력을 분점 한다면, 커다란 변화가 이루어지지 않겠느냐는 소박한 낙관론으로 치장되곤 한다. 물론 친 자본가적인 정치인들이 공직선거에서 많이 당선되고 정권을 잡아서 국가를 자본에게 더 유리한 방향으로 이끄는 것은 객관적인 현실이다. 그러나 국가와 자본 간의 그러한 경험적인 관계의 일부분을 수정한다고 국가와 자본축적의 관계가 변화되는 것은 아니다. 비자본가 계급출신의 진보적인 국가 관료나 정치지도자들이 설령 집권에 성공한다 하더라도, 자본과 자본축적을 뒷받침하는 국가의 구조적 특성은 바뀌지 않는다. 국가는 친자본가 정치집단이 손에 쥐면 자본주의 국가가 되고, 반자본주의 정치집단이 일시적으로 집권을 하면 비자본주의 국가가 되는 단순한 도구가 아니기 때문이다. 국가는 어느 누구라도 손에 쥐고 휘두를 수 있는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스스로 자본축적의 핵심을 컨트롤하는 장치다. 이 국가라는 장치는 한두 번의 선거결과나, 심지어는 집권세력의 일시적인 변화에 의해서는 어떤 근본적인 변화도 용납하지 않는다. 오히려 집권세력이 국가장치에 순응해야 한다. 소위 ‘책임 있는 정치세력의 고뇌’로 표현되는 우경화가 필연적으로 강요된다. 근본적인 계급관계, 즉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의 변혁을 추동하는 구체적인 실천의 보증이 없는 한 “내가 하면 다를 것”이란 다짐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부질없는 다짐이다. 더군다나 우리가 직면한 구조적 위기는 단순한 경제위기가 아니라 매우 특수한 정치위기를 동반한다. 오늘날의 정치위기는 단순한 정권의 위기, 특정 정치세력의 위기로 국한되지 않는다. 국가라는 도구에 대한 장악력이 문제가 아니라 국가기구 자체의 모순이 진행 중이라는 게 문제다. 특정 정치세력이 아니라 정치자체가 위기에 빠졌다는 말은 억압적 국가기구뿐만 아니라 이데올로기적 국가기구들과 심지어는 피지배계급의 대중운동 및 조직들의 위기가 동시에 진행되고 있다는 말이다. 가족, 학교, 정당, 노조, 미디어 등과 같은 이데올로기적 기구들이 위기에 빠지면서 대중들은 국가 또는 공동체의 위기를 경험하고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이는 단순히 경제적인, 노동의 불안정성을 넘어서는 극도의 불안정성을 창출한다. 또한 이데올로기적 기구의 위기는 대중들 내부에서(국가가 아니라) 폭력을 통제하는 이데올로기적 형태의 위기를 낳기 때문에 일상적인 물리적·상징적 폭력은 증폭된다. 이런 상황에서 과학적 인식을 결여하거나 거부하는 인민주의적 선동은 그 의도가 좋고 나쁘고를 떠나 결과적으로는 좌파진영 전체를 보수주의적 공격, 혹은 우파적 인민주의적 공세에 취약하게 몰아넣는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자본주의와 그에 맞서는 반체제운동의 동시적인 위기가 지속되는 과정에서 좌우파를 막론하고 범람하는 인민주의 정치가 보다 극단적인 파시즘적 변종으로 나타났던 역사적 교훈에 대해 진지하게 재평가해보아야 한다. 1930년대 고인플레이션과 대량실업의 위기 속에서 독일 국가사회주의노동당(나치)의 어느 선동가는 다음과 같이 연설했다. 우리는 국가가 황금의 악마, 세계(개방, 자유)경제, 유물론과 결별하고, 정직한 노동이 정직한 보상을 받는 사회를 재확립하도록 요구합니다. 이 거대한 반자본주의적 열망은 우리가 위대하고 비범한 새 시대의 문턱에 와 있다는 증거입니다. 즉 자유주의가 극복되고 새로운 종류의 경제사상과 국가에 대한 새로운 태도가 출현하는 시대 말입니다. 절대 다음과 같이 물어서는 안 됩니다. “그것에 필요한 돈이 있는가?” 오직 다음과 같은 단 하나의 질문만이 가능합니다. “돈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 일자리 창출을 위한 돈은 언제나 존재합니다. 그리고 최후의 수단으로서 생산적 신용창조, 즉 적자지출 또한 사용할 수 있으며, 그것은 완전히 정당한 것입니다. 언뜻 들어보면, 이 연설이 왜 극우 나치당의 연설인지 구분이 잘 되지 않는다. 문제의 핵심은 자본주의냐 아니냐가 아니었다. 자본주의가 붕괴되는 상황은 누구나 알 수 있는 객관적인 현실이었다. 문제는 그런 상황에서 새로운 대안은 무엇이고, 그 주체는 누구인지였다. 좌파의 대안이 노동자대중이 주체로 서는 자본주의 위기의 혁명적 전환이었다면, 나치의 대안은 세계전쟁이었고, 그 주체는 새로운 민족의 지도자를 중심으로 재조직화한 국가였다. 하지만 나치의 등장에 관해 사람들이 가장 흔히 오해하는 것은 나치가 민중운동을 탄압하면서 집권했을 거라는 가정이다. 그렇지만 나치가 집권했을 당시에 나치의 집권을 방해할만한 좌파 정치세력이나 노동자민중운동 진영은 이미 빈사상태에 처한 지 오래된 뒤였다. 나치는 어떤 방해도 받지 않고 평화적인 선거를 통해 조용히 집권했다. 극우테러와 대학살은 그 이후의 일이다. 1919년 독일 혁명부터 1933년 나치 집권 전야에 이르기까지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아래로부터의 대중주체 형성과 사회변혁에 힘쓰던 공산주의자들을 제거하고 평의회 운동을 해체시켰던 장본인은 오히려 바이마르 공화국의 가장 주요한 진보정치세력이었던 집권 사민당이었다. 집권 사민당은 죽어가던 자본주의의 상속자가 되려는 혁명적인 생각을 대중들에게 숨기는데 급급했고, 상속자는커녕 빈사상태의 자본주의의 생명을 연장시키는 의사노릇에 골몰했다. 그러면서 그들은 정치를 우선시했다. 그들의 ‘정치우선’은 사회운동과 과학에 대한 우선이었다. 자기 완결적인 노동 친화적 분배, 복지 헌법체제인 바이마르 공화국의 통치를 앞세웠던 반면 노동자 평의회의 정치는 수단을 가리지 않고 억압했다. 혁명이 아니라 선거와 의회가 정치의 모든 것이 되도록 생산현장의 정치, 거리의 정치를 하나하나 제거해버렸다. 그러한 진보적 집권정치, 개혁정치는 결과적으로 자본주의의 구조적 위기가 심화되면서, 자본주의를 부활시키지도 못했고 점진적인 사회 개혁의 효과를 보지도 못했다. 진보 공화국의 개혁정치는 계급내부 분할과 경쟁을 심화시킨 결말을 보게 되었다. 대중운동적인 토대를 잃어버린 노동자계급은 경제위기가 닥치자 각 부문별, 계층별로 끊임없이 분열된 것이다. 계급 대중운동과 과학적 이념의 결합이 해체된 이후, 각각의 이익집단화된 계급집단들에게 행정적으로 이익을 분배하는 것으로 정치를 변질시킨 뒤에 벌어진 일이었다. 이런 정치적 위기가 심화되는 와중에도 바이마르 공화국은 ‘사회운동에 대한 정치우선’의 의회정치, 경제위기에 대한 과학적 분석 없는 탈이념화된 분배(행정) 정치우선을 추구했다. 대중들은 점점 더 정치자체를 불신하게 되고, 위기는 악순환에 빠졌다. 나치는 이런 정치 경제적 토양위에서 등장한 것이다. '경제위기 비판'이니 '변혁'이니 하는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제거가 완료된 뒤에야, 이제는 돈이 없으면 전쟁을 해서라도 돈을 마련해주겠다는 식의 진짜 ‘정치 우선’주의가 등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또 아래로부터의 대중운동과 그것의 생산체계이자 권력기관인 평의회운동이 철저히 조롱받고 제거된 뒤에야, 사회운동에 대한 확실한 우위에 입각한 강한 정치 지도자가 등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국가사회주의노동자당, 나치가 독일제국을 장악한 것이다. 과학적인 경제 분석에 대한 정치 우선, 사회운동에 대한 국가(정당) 정치 우선론이 나치에게 길을 열어준 것이나 다름없었던 것이다. 다만 부족했던 것은 카리스마 있는 지도자였고, 국가 관료주의를 대신할 국가사회주의노동당의 지도력이었을 따름이다. 어짜피 이런 투쟁도 저런 투쟁도 어려운 형편이니 별다른 수가 없다면, 신자유주의 반대라는 완고한 원칙을 조금만 버리면 정치공학적인 편법으로 진보적 정치권력을 얻을 수 있다는 둥, 운동의 위기를 정치로 돌파하자는 둥, 어쨌든 진보적 집권은 민중의 삶에 좋은 일이 될 거라는 소박한 호소는 자기 스스로 책임지지 못할 선동에 불과하다. 대안 좌파전략의 모색 우리는 자본주의의 구조적 위기와 노동자민중운동의 우경화, 쇠퇴가 동시에 진행되는 역설적인 정세를 맞닥뜨리고 있다. 당면한 민중운동 재편 과정에서 노동자 민중운동의 급격한 우경화를 막고 좌파운동의 자기 파괴적인 분열을 제어해야 할 과제가 시급하다. 시대착오적인 사민주의나 진보적 민주주의론과 같은 우경적 이념을 비판하고, 무원칙한 신자유주의 선거연합을 저지해야할 과제는 노동자민중운동의 정체성이 달린 일이다. 하지만 변화한 시대적 조건에서 사민주의나 우경적 개량주의는 단순한 혁명 배신이라는 규정만으로는 극복하기 어렵게 변화했다. 지배체제의 구조적 위기가 심화될수록 별다른 성과가 없는데도 수그러들지 않는 허구적인 코포러티즘, 독자화하는 정치계급의 단기적인 선거 정치공학이 민중운동 재편을 좌지우지하는 상황, 다양한 양상으로 진행 중인 정치의 위기와 인민주의적 위험의 증대 등과 같은 정세적 조건들에 대한 보다 면밀한 분석들을 수행해야한다. 결국 근본적인 대안은 마르크스주의적 변혁이념과 운동의 해체를 갈음할 이념의 재건과 대안좌파의 형성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오늘날 대안좌파가 정치공학적인 이합집산과 가상의 정치지도 위에 그려진 지정학적인 기준만으로 손쉽게 형성되지는 않는다. 유일한 기준은 전쟁에 대한 발본적 반대와 신자유주의 정책의 총체적 기각이고, 그 성패는 반전 대안세계화 사회운동의 대중적 실체가 형성되는 과정을 통해 판가름 날 따름이다. 또한 대안좌파의 새로운 정치적 전망을 세우는 일은 곧 금융세계화와 심화하는 세계 경제위기의 특수한 결과인 정치 위기에 대한 근본적인 대안을 마련하는 차원의 과제이다. 지배계급의 무능과 통치 불가능성, 초민족적 자본의 정치적 사보타주에 맞서야 하는 시대적 과제가 요구된다. 노동자 대중운동을 재활성화 함으로써 정치를 재건하는 것만이 대안좌파 형성의 기본 토대다. 새로운 노동자 대중운동이 없는 정치는 어떤 진보적인 정책 공약으로 치장을 한다하더라도, 뿌리를 잃고 끊임없이 부르주아 정치로 흡입될 뿐이기 때문이다. 대중이 집단적 실천을 통해 유효한 성과들을 얻어 주체화하는 변혁적인 자기해방의 프로세스를 되살리는 것이 그 첫출발일 것이다. 그럼으로써 대중의 집단적 행동을 다시금 유효하게 만들어, 정치자체를 부활시키는 새로운 비전을 밝힐 수 있다. 셋째, 대중운동이 나날이 우경화하는 조건에서, 좌파는 단순한 분리만으로는 소수파적인 지위를 벗어날 수 없다. 물론 대안적인 정치세력으로 정립하기 위해서는 원칙 있는 비판과 독자세력화의 포지셔닝이 강하게 형성되어야 한다. 하지만 새로운 대중운동의 형성을 위해 노력하되 현실적으로 우리는 상당기간동안 우경화된 대중운동과 무리하게 분립하여 고립되는 상황을 피할 수 있어야 한다. 최대한 대중운동과의 결합을 유지 확대하면서, 좌익적인 활동가들의 교육훈련 구조를 강화하는 방식의 활동전략을 마련해야 한다. 이를 통해 좌익적인 활동가들은 대중운동의 재활성화에 힘쓰는 한편, 노동자 사회운동 재건에 대한 확고한 의지와 실질적인 투자(자원 배분의 우선성), (강령적인 개방성을 유지하되) 인민주의에 휩쓸리지 않는 마르크스주의적 원칙을 조직적으로 고수해야 한다. 넷째, 사민주의적 복지국가 동맹전략이나 무원칙한 계급타협 전략은 위로부터의 정책개혁을 정치의 모든 것으로 착각하게 한다. 현재와 같은 구조적 위기시기에 그러한 개량주의적 장미빛 청사진들은 잘해야 계급내 분배에 골몰하여 계급적 단결을 해치거나, 자본에 의한 계급분할에 편승하는 결과를 낳을 뿐이다. 우경화된 운동 이념 전략에 대한 현 시기 실천적인 비판의 핵심은 바로 이 지점이다 반면 우리에게 필요한 최대강령이나 이행강령은 통치정당의 집권정책이 아니다. 사회운동의 목표와 원칙은 대안사회라는 건물의 도면을 그린 청사진 같은 것이 아니다. 만약 사회운동에게 새로운 이행강령이 필요하다면 (혹은 굳이 이행강령이라는 용어를 쓰지 않고도 변혁적인 이행전략을 지속적으로 사고해야 한다면) 그것은 해당시기 사회운동의 근본적 난관이 무엇인지를 파악하고, 그것을 돌파하기 위한 대안전략을 수립하는 것이다. 또한 그것은 이념적 대안과 정세적 실천을 결합시키는 핵심 고리를 찾고, 그것에 적합한 실천전략을 수립하는 일이 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현 시기 좌파의 대안전략은 실업과 취업, 복지와 임금의 분할과 갈등, 취업노동자 내부의 분할을 통합시키고 새로운 노동계급의 단결을 형성시키는 데 전략적 초점을 맞춰야 한다. 예컨대 연대임금 전략과 같은 실천전략을 중장기적으로 실행해가면서, 계급적 단결의 재형성을 노동자운동의 핵심 목표로 세우고 전략적으로 실천해가는 것이다.
금속노조 유성기업지회 파업 투쟁을 마무리하며 유성기업 투쟁이 한 고비를 넘었다. 금속노조 유성기업지회는 지난 8월 16일 법원이 제시한 ‘8월 31일까지 전원 복귀’하는 조정안에 합의했다. 유성지회는 사측의 직장폐쇄로 인해 타의로 석 달 간 파업 투쟁을 진행하며 수많은 난관을 뚫어야 했다. 많은 조합원들이 사측의 탄압과 회유로 개별 복귀했으며 어용 복수노조가 등장하기도 했다. 최근 수년간 수차례 반복된 금속노조 파괴 시나리오가 유성에서도 예외 없이 벌어졌다. 하지만 민주노조는 쓰러지지 않았다. 현대차가 사전 사후 노조 파괴 공작을 총괄 지휘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대통령까지 득달같이 달려들어 자본을 거들고 공권력을 투입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유성기업지회는 건재하다. 이것이 유성기업 투쟁의 중간 결과이다. 정권과 자본의 노조 파괴 시나리오는 유성기업지회와의 싸움에서만은 결론이 어긋났다. 민주노조를 깨기 위해서는 뭐든지 할 수 있다 5월 18일, 유성지회가 단체협약에 명시된 2시간 총회를 진행하고 난 뒤 사측은 갑자기 직장폐쇄를 단행했다. 납득할 수 없는 상황에 조합원들은 의아해하며 아산공장으로 모였다. 다음 날 새벽, 공장 앞에 모여 있던 조합원들에게 용역깡패의 차량이 돌진했다. 13명 부상. 이렇게 용역깡패의 대포차 테러사건으로 유성기업지회는 언론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사측은 당황한 나머지 용역업체의 우발적인 실수로 일어난 사건이라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이 사건은 이어지는 자본의 폭력을 예고하는 것에 불과했다. [표 ] 유성지회 투쟁 경과 2009 2011부터 주간연속 2교대제 도입 합의 2010 11차례 교섭 중 사측 제시안 없음 2011.5.13 조정중지 5.17 쟁의행위 찬반 투표. 78%가결 5.18 직장폐쇄, 용역깡패 대포차 테러 5.24 공권력 투입 5.27 유성기업 아산지회장 등 구속 6.22 이구영 영동지회장과 엄기한 아산부지회장 조계사 농성 돌입 8.5 직장폐쇄 1차심리 8.12 직장폐쇄 2차심리 8.16 직장폐쇄 3차심리. 조정안 수용 8.22 현장복귀 시작 8.31 현장복귀 완료 예정일 8월 3일 열린 ‘직장폐쇄 폭력행위 증언대회’에 따르면 5·18 직장폐쇄는 사전에 철저히 기획된 일이었다. 당시 현장에 있던 한 조합원은 19일 새벽 벌어진 용역경비의 대포차 뺑소니 사건은 ‘테러’였다고 증언했다. “차가 지나가면서 아수라장이 되고 처참했어요. 만약 경찰이 이야기 하는 대로 그것이 운전자의 실수였으면 차가 그 자리에서 섰어야 하는데··· 그걸 누가 실수라고 보겠어요.” 또 다른 조합원도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들었던 사측의 수상한 행동들은 직장폐쇄를 염두에 둔 것이었다고 증언했다. “직장폐쇄 전에 회사가 관리직원들에게 여행용 가방을 나눠줬는데, 그 안에는 런닝 5장, 팬티 5장, 세면도구 등이 들어 있었어요. 처음에는 그게 뭔지 몰랐는데 나중에 생각해보니 사측이 직장폐쇄를 준비하고 있었다는 증거였죠.” 무엇보다도 공장 안에 있던 현대자동차 총괄이사의 차량 안에서 노조 파괴 시나리오가 담긴 대외비 문건이 발견된 점, 현대차 직원이 유성기업에 상주한 점, 노무관리 지원부서가 깔고 잘 스티로폼이 미리 준비되었던 점 등을 볼 때, 상급단체(?)와 농성을 먼저 예비한 것은 사측이었다. 민주노조를 파괴하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불사하는 사측의 행동은 가관이었다. 이름만 들어도 지긋지긋한 용역경비업체 CJ씨큐리티, 노무관리업체 창조컨설팅, 그들을 비호하기 위해 신속히 투입된 공권력 등 사측은 노동조합을 궁지에 몰기 위해 사력을 다했다. 사측의 지시로 생산물품까지 사용하며 폭력을 휘두른 용역은 물론, “연봉 7천만 원을 받는 근로자들이 불법 파업을 벌이는” 운운하며 유성기업지회 탄압을 진두지휘한 이명박 대통령은 조합원들의 심리적 압박을 가중시켰다. 자본과 정권은 언제나처럼 공고한 연대를 자랑했다. 연대 대오에 대한 경찰의 도를 넘는 수사, 조사도 우리를 위축시키려는 시도였다. 태풍을 뚫고 연대가 도착하다 날씨만 궂은 것은 아니었다. 건설기계 충남지부의 강력한 연대투쟁 이후 검경은 혈안이 되었다. 수배와 영장이 남발되었고 유성기업 노동자들에 대한 연대를 끊으려는 시도도 날로 거세졌다. 하지만 궂은 날씨도, 거센 탄압도 연대의 물결을 막지 못했다. 유성기업 공장으로 들어가는 굴다리 아래에는 올빼미들의 둥지가 꾸려졌다. 올빼미 둥지란 연대 대오의 투쟁 거점을 뜻한다. 아산공장 앞 비닐하우스에는 찾아오는 사람들로 넘쳐났다. 같은 금속노조 소속 투쟁 사업장들이 찾아와 조언과 힘을 더했다. 연대 온 동지들은 굴다리에서 떠날 줄을 몰랐다. 대학생들이 찾아오고 문화 예술인들이 방문했다. 농성장은 힘든 와중에서도 외로운 적은 없었다. 누군가 복귀하지 않고 하루를 더 농성할 수 있었던 것은 연대의 힘이었다. ‘물심양면으로 이 투쟁을 지지한다’는 표현들이 얼마나 큰 힘이 되었는지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노동자든 자본가든 서로의 실력을 뻔히 알고 있는 단위 사업장에서 사측이 예상하지 못하는 것은 오로지 연대의 힘이다. 민주노총 충북지역본부는 매 주말의 집회를 주관했다. 충북 지역의 노동조합들은 모두 유성기업지회의 연대투쟁에 참여하고 기억하고 있다. 일례로 수 천만원이 모금되어 유성기업 노동자들의 투쟁에 전달되었고 투쟁하는 동지들에게 힘을 불어 넣었다. 유성기업지회는 건재하다! 창조컨설팅이 작성한 문서의 마지막에 ‘발레오 사례를 맹신하지 말 것’이라는 문구가 들어가 있다. 이전의 금속노조 탄압 사례와는 다르게 유성기업지회는 조직력을 상당부분 유지하며 현장으로 복귀했다. 법원 조정안 수용 이후 수련회를 거치고 현장에 돌아갈 채비도 단단히 하고 있다. 조합원들 스스로 사측의 탄압을 예상하고 대응하는 계획을 논의하기도 하였다. 실제로 조합원들이 예상했던 일들이 현장에서 일어나고 있고, 조합원들은 지혜롭게 대처하고 있는 중이다. 100일 가까이 공장 밖에서 버틴 240명의 조합원들이 있다. 어떤 민중가요 가사처럼 단련된 강철 같은 동지들이다. 유성기업지회 선배 조합원들은 90년의 파업투쟁과 공권력 투입을 경험한 세대다. 그 뒤를 이어 이번 투쟁을 거치며 새로운 세대들이 생겨났다. 실제 유성기업지회는 투쟁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노조를 굳건히 이끌고 나갈 수많은 활동가들을 단련시켰다. 평소의 평가가 무색하게 누군가는 개별 복귀하였지만 묵묵하게 비닐하우스를 지킨 동지들이 이제 민주노조를 사수하기 위해 우뚝 서게 되었다. 요구와 대응 투쟁 진행 과정에서 많은 쟁점들이 제기되었다. 인간답게 살기 위한 야간노동 철폐, 사측의 공격적 직장폐쇄의 위법성, 용역 폭력, 원청의 하청 노무관리, 사측이 개입한 어용 복수노조. 어느 하나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다. 주간연속 2교대제 요구와 공격적 직장폐쇄 규제는 금속노조의 2011년 중앙교섭과 대정부 요구안에 포함되는 사안이었다. 하지만 그에 걸맞은 연대를 조직하고 투쟁을 배치하였는지는 검토해볼 문제다. 금속노조 주최 집회의 횟수나 기조 등 여러 가지 지점을 돌아볼 때, 금속노조의 투쟁의지에 대해 조합원들이 불만과 불신을 가질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다. 이전 금속노조 탄압 사례와도 비교해 볼 지점들이 있다. 정치권의 개입을 촉구한 뒤 그것을 매개로 중재안을 받아들이고 복귀한 사업장들과 이번 유성기업지회 투쟁을 과정과 결과 측면에서 비교, 평가할 필요가 있다. 물론 개별 전술은 시기와 역량에 따라 판단할 수 있는 문제이기는 하나 그동안 소위 정치권의 중재로 현장으로 복귀한 노동조합들은 요구안에서 후퇴할뿐더러 현장에서 받는 탄압이 거세진 것이 사실이다. 결국 정치권의 개입 문제도 투쟁을 지속해 나갔을 때 부분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것이지 그 자체로 문제해결을 도모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미 여러 사례들이 증명하는 잘못된 길을 굳이 다시 갈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이제 조합원들은 속속 현장으로 복귀하고 있다. 하지만 사측은 치졸한 대응들로 민주노조를 지속적으로 탄압하려 하고 있다. 원직에 배치하지 않으려는 시도, 합의되지 않은 교육을 진행하려는 시도 등등. 모두 현장으로 들어가기 전 예상됐던 부분들이다. 이런 사측의 탄압에 절대 굴할 수 없다. 앞서 논의한 것처럼 조합원들은 노동조합을 중심으로 의연한 대응을 해내리라 믿는다. 또 복수노조라는 문제가 남아 있다. 160여 명이라는 만만찮은 숫자이지만 유성기업지회가 금속노조 파괴시나리오에 굴하지 않은 것처럼 복수노조 대응에서도 훌륭한 선례를 남기는 투쟁을 진행할 것을 기대해본다. 앞으로도 사측의 상시적 탄압과 우발적 폭력 유발 등 민주노조를 깨기 위한 갖은 시도가 있을 것이다. 우리가 100여 일간 배운 그대로, 노동자는 개인이 아니라 조직으로 뭉칠 때에만 노동자일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노동조합을 중심으로 힘찬 투쟁을 해나가야 한다. 바야흐로 금속노조 선거가 시작되었다. 우리가 유성기업지회의 투쟁에서 배운 것들을 기억하고 이어나가야 하는 시기이다. 유성기업지회 투쟁 이후 조합원들은 일상적 연대투쟁과 단단한 현장통제력의 중요성을 실감했다고 한다. 우리가 단절해야 할 것은 경제위기를 틈탄 협조주의나 실리주의지 손가락이 아니다. 언제든 틈만 보이면 치고 들어올 자본의 공격에 대비해 탄탄한 대비를 하자.
간병 요양 노동의 실태와 조직화 방향 저출산 고령사회에 접어들며 정부는 중고령 여성에게 일자리를 제공하는 한편, 환자와 노인에 대한 돌봄을 국가가 책임지겠다며 간병과 요양 등 사회서비스 관련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간병과 요양 분야의 정부 지원과 혜택이 전무했던 한국에서 정부 정책은 국민들로부터 많은 호응을 받는 듯 했다. 그러나 정부의 정책은 민간 시장을 활성화시키고, 값싼 일자리를 찍어 내는 데 초점이 맞춰져있었다. 때문에 정부의 사회서비스 제도는 보편적 제도로 기능하지 못함은 물론 간병, 요양 노동을 하는 노동자들의 열악한 노동 조건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본 글에서는 정부의 화려한 수사 뒤에 가려진 간병, 요양 노동자들의 노동실태를 살펴보고, 이들이 노동의 주체가 되기 위한 조직화 방향을 제언으로 담고자 한다. 간병 요양 노동의 등장과 제도화 간병이란 환자의 일상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신체수발, 식사영양, 이동 지원, 가사지원 등 기본적인 활동을 영위할 수 있도록 하는 노동을 가리킨다. 간병은 가족 간병과 유료 간병노동이 있는데, 여기서 논의 대상이 되는 것은 직업으로서 제공되는 유료 간병에 대한 노동이다. 보수를 받고 환자나 노인을 돌보는 ‘간병인’이 언제 등장했고 언제부터 이 명칭이 사용되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1980년 ‘간병인복지회’가 창설되면서 ‘간병인’이라는 용어가 일반화되고, 간병인이라는 직종이 등장한 것으로 본다. 당시 간병인은 ‘대한적십자’ 등 비영리 단체와 유·무료 소개소들을 통해 활동했고 신분 보장이나 역할, 임무가 법 제도적으로 규정되어 있지 않았다. 이후 1998년 경제위기가 닥치면서 각 지방자치단체(각 시,구청 부녀복지과, 여성복지과)가 저소득 여성의 일자리 창출을 위한 인력개발의 일환으로 간병교육을 실시하여 유·무료 간병인 사업을 실시·알선하기도 하였다. 2000년대 들어 제도 밖의 비공식부문으로 머물러 있던 간병노동을 사회서비스로 제도화하는 논의가 시작되었다. 나아가 2006년 노무현 정부가 <사회서비스 확충 전략>을 발표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간병, 요양 등의 돌봄 서비스가 제도화되기 시작했다. 그 후 2008년 7월부터 노인장기요양보험제도가 시행된다. ‘이제 국가가 효도하겠다’며 시작한 이 제도는 극소수의 서비스 이용대상(전체 국민의 1% 미만, 노인인구의 3%만이 서비스 혜택을 받을 수 있다)과 협소한 급여 범위의 한계로 많은 비판을 받았다. 서비스를 제공받는 이들 또한 본인부담금을 추가로 지출해야 하고, 장기요양보험제도가 보장해주지 못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별도로 민간보험에 가입해야 했다. 노인장기요양보험제도는 건강보험료, 서비스이용료, 민간보험료까지 삼중의 부담을 떠안기는 제도로서 보편적인 건강권의 확장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2009년에는 보건복지가족부에서 △2010년부터 병원 내 간병서비스를 비급여 대상에 포함시켜 공식적 서비스로 전환 △2011년 이후 건강보험 급여화 검토 등의 내용을 담은 ‘간병서비스 제도화 방안’을 마련하겠다고 업무 보고에서 밝혔다. 현재 우리나라 국민건강보험법상 비급여 서비스는 모두 고시 형태로 법에 명시되어 있지만 간병서비스는 비급여항목에 포함되어 있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병원에서는 현재의 법 체계 내에서 병원이 주체가 되어 간병 서비스를 제공하고 대가를 청구하면 불법이 된다. 이 때문에 대부분의 병원은 형식적으로 간병 서비스에 개입하지 않는 모양새를 취하고, 간병서비스 제공자와 환자 및 보호자와의 일대일 계약관계에 의한 사적 형태로만 서비스가 제공되고 있다. 실제로는 없어서는 안 될 필수적인 서비스이지만 비공식적으로 이루어지면서 간병 서비스 노동자와 이용자 모두에게 많은 부담을 지우고 있던 간병서비스를 제도화하겠다고 밝힌 것은 환영할 만한 일이다. 하지만 간병서비스를 건강보험 급여항목이 아닌 비급여대상에 포함하고 재원을 민간에서 끌어오겠다는 계획은 많은 문제점을 가지고 있었다. 이로 인해 간병서비스 제도화 방안은 현재 재검토 중에 있다. 국가가 돌봄 서비스 제공자의 역할을 한 역사가 없는 한국에서 돌봄 노동을 사회서비스로 제도화하는 방안이 급물살을 타는 이유는 신자유주의 위기관리 전략에 있다. 신자유주의로 인해 가속화된 불안정 노동의 일반화, 빈곤 심화 속에서 가족의 해체와 사회 불안정이 야기되자 국가는 이를 관리하기 위해 적극 개입하고 있다. 그 개입의 방향은 보편적 권리와 복지의 실질적 확대와는 거리가 멀다. 정부의 사회서비스 정책은 사회서비스를 시장화하여 그 비용을 민중들에게 전가하고, 저임금의 불안정한 일자리를 확산하는 방식으로 귀결되고 있다. 간병노동의 실태 “우리 간병사들은 거의 다가 가정이 잘못 되었거나 가정을 책임져야 하거나 자식들 교육에 의해서 꼭 벌어야하는 사람들이 참 많단 말이에요. 아빠들보다도 우리 한국사람들이 모성애가 참 강하기 때문에 엄마들이 취해야하는 이런 태도는 감히 다른 분들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진짜 눈물 나는 일들이 많습니다.” “뭔 일을 할까..애들은 다 컸고 교회 가서 식당에 봉사 좀 할까.. 근데 그거는 드러내야 되잖아 막 오만 사람들 다 보고 쳐다보고... 그런게 싫어 가지고.. 근데 그 교회 권사님이 이걸 하신데요. 그래서 전화를 해서 이걸 시작했어요. 난 그래서 참 감사하드라고 참 이런 일이 있다는게 감사하드라고. 그런데 지금은... 보수관계도 얘기해두 돼요? (연구원이 답한다 “네 얘기..굉장히 중요한 거예요”) 그래서 항상 우리 그게 불만이 뭐냐 하면은 첨에는 5만원 했잖아요? (중략) 우리나라에 최저임금이라는게 있는데 24시간하면서 6만원이잖아요 지금.” - 김미정(민주노총 정책연구원), 「돌봄 노동과 간병 노동자의 현황」, 여성노동자의 일‘자리’ 무엇이 필요한가? 토론회 자료집(주최: 민주노총 여성위원회, 민주노총 정책연구원) 간병, 요양 노동은 사회를 재생산해내는 필수적인 노동임에도 불구하고 개별 가정이 그 책임과 비용을 지고 주로 가족 내 여성이 무급으로 수행해온 노동이다. 그런데 경제 위기가 지속되며 여성들이 가계 수입을 보충하기 위해 경제활동에 참여해야 하고, 가족이 환자를 부양하거나 간병할 수 있는 여력이 축소되면서 간병·요양 서비스에 대한 필요가 증가했다. 사회적으로는 여성인력활용이 경제성장의 주요한 동력으로 인식되면서 여성 일자리 창출이 전 세계적으로 중요한 의제가 되었다. 또한 산업구조의 변화에 따라 서비스 산업이 발달하면서 사회서비스 분야가 여성 유휴 인력을 활용하기 위한 일자리로 주목되었다. 하지만 여성의 1차적 역할은 가사노동이라는 인식과 함께 돌봄 노동이 집안일의 연장에 있는 미숙련 노동으로 평가받으면서 저임금의 불안정한 일자리로 양산되었다. 이 속에서 여성들은 다시 장시간 고강도의 노동을 하면서도 가사 노동과 돌봄 노동까지 수행해야 하는 이삼중의 부담을 다시 고스란히 떠안게 되었다. 간병 노동자의 현황부터 살펴보면 다수는 병원(급성기 병원, 요양병원)이나 의료기관에서 근무하고, 이 외 재가 근무 형태도 있다. 간병 서비스는 공식화, 제도화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정확한 규모 추정이 어려우나 <2010년 국민건강보험공단 보고서>에 따르면 급성기병원 1일 평균유료활동 간병인수는 27,842명, 요양병원 간병인수는 17,831명으로 추산되고, 공공노조 의료연대에서는 전체 간병노동자 규모를 약 24만 명으로 추정하고 있다. 일일 노동시간은 매우 긴데, 전체 간병인의 68.8%가 24시간 상주 간병을 하고 있고, 26.8%는 12시간 노동을 하는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고용형태는 특수고용(환자와의 일대일 간병), 파견업체를 통한 간접 고용과 직접 고용으로 나뉜다. 동 보고서에 따르면 상급종합병원은 직접고용한 곳이 없고, 종합병원 11개소 간병인 7,997명 중 1.7%, 병원 간병인 15,300명 중 1.8%만이 직접 고용되어 있으며, 간병인의 70% 이상은 간병소개업체의 알선으로 간병 노동을 수행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24시간 근무를 하고 토요일 날 나와서 하루 쉬어요. 제 얘기는 토요일 날 나왔으면 월요일 날 아침에 들어가야 되는데 왜 주일날 3시에 들어가냐 이 얘기예요 그것 좀 고쳐줬으면 좋겠어 다른 직장 대한민국전체를 다 돌아다녀 봐도 토요일 날 오후까지 일하고 월요일 날 출근하지 그 주일날 3시에 들어가는 거 간병인 밖에 없다니까요.” “24시간이 너무 짧아요. 나가서 시장보고 가야 가족들 먹을 것을 해 놓잖아요. 또 내가 먹을 거 뭐 좀 싸가지고 와야 되잖아요, 사먹지 않으려면. 또 우리 유니폼 빨아서 다림질해 가야지 일주일 입어요. 매일 빨아가지고 와야 되요. 일주일 입고. 어떻게 집안 청소는 못하더라도 나가면 너무 피곤해요. 어떤 때는 병원에 있을 때가 더 편해요.” - 김미정(민주노총 정책연구원), 「돌봄 노동과 간병 노동자의 현황」, 여성노동자의 일‘자리’ 무엇이 필요한가? 토론회 자료집(주최: 민주노총 여성위원회, 민주노총 정책연구원) 전체 간병노동자의 70% 이상, 사실상 대부분의 간병 노동자는 간병 소개소를 통한 일대일 간병 등 특수고용 형태로 일하고 있으며 노동자성 조차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이에 따라 간병노동자는 노동3권은 물론 근로기준법 등 노동법의 보장을 받지 못한다. 법정노동시간, 휴일, 휴가, 퇴직금, 법정 수당(연장근로수당, 휴일근로수당), 최저임금 등이 법적으로 보장되지 않고, 이는 간병노동자들이 저임금 장시간 노동을 강요받는 원인으로 작용한다. 대부분의 간병노동자들은 주 6일, 일일 24시간씩 근무한다. 주당 노동시간은 144시간인데, 이는 간병노동자들이 주 40시간 노동에 비해 3배 이상의 장시간 노동을 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게다가 간병 노동자들은 집에 돌아와서도 가사를 책임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므로, 사실 주 7일 쉬지 않고 노동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축 쳐져요. 환자를 보면 긴장하구 자야 되요. 여기서 24시간 일하는데 잠자는 시간 한 시간. 2시간, 3시간이면 많이 자거든요. 내가 보니까 잘 수가 없어 길게 못자.” “어느 환자 예를 들면 그분이 의정부 사시는데 105킬로예요 침대사이드에 배가 딱 닿아요. 그러니까 한번 체위변경하려면 올라가서 갖은 애를 다 써야 돼요. 갖은 애를 다 쓰는데 이 양반 사고방식이 어떤 방법이냐면 저녁에 잠을 못 자게 해요. 주위에 앞에 있는 환자 한 분이 보다보다 못해가지고 시옷자를 넣어가면서 맘보를 곱게 써야 병두 낫는 거지 맘보를 그 따우로 써가지고 병이 낫냐고. 환자 둘이 싸워 그러니까 내 돈주고 내가 부리는데 니가 뭔 상관이냐고 아니 일꾼도 밥을 먹이고 잠을 재워서 일을 시켜야지 잠도 못 자게 하고 밥 먹을 시간도 안주고 너는 돼지가 된다구 그러면서 둘이 붙어 가지구 싸워 아주 별별 희한한 일들이 많습니다. (연구원이 질문한다 “왜 안재우는 거예요”) 내 돈줘서 밤새 그러니까 자기는 자더라도 할 일없으면 다리라도 주물러라 이거예요.” - 김미정(민주노총 정책연구원), 「돌봄 노동과 간병 노동자의 현황」, 여성노동자의 일‘자리’ 무엇이 필요한가? 토론회 자료집(주최: 민주노총 여성위원회, 민주노총 정책연구원) 게다가 요양병원의 경우 간병노동자는 1인 평균 9.8명의 환자를 공동간병하고 있고, 많게는 30명까지 간병을 맡고 있다. 이처럼 살인적인 노동 강도에 시달리다보니 간병인들은 장기적인 수면장애로 인해 안구건조증, 병원성 감염질환, 근골격계질환 등 산재직업병에 시달리고 있다. 그러나 노동자성을 인정받지 못하고 있어 산재 적용을 받지 못하는 열악한 상황에 놓여 있다. “가장 힘든 거는요. 식사 문제가 힘들어요. 솔직히 그거 밥 일일이해서 한 끼씩 싸서 냉동실에 얼려 가지구 가가지구. 또 병원에서도 냉동실에 쳐박아놨다가. 고것도 끼니 때마다 꺼내서 전자렌지에 덥혀서 반찬 꺼내서 먹어요. 그것도 눈치 봐야지 밥 먹을 장소가 없어요. 배선실이라는데가 있는데요 수간호사들이 못 먹게 하는 경우가 있어요. 저희는 천상 어디 의자가 있는 것두 아니구 식탁이 있는 것두 아니구 서서 먹어요 (창문쪽을 가리키며) 저런 턱에다 놓고서서먹구 그거 자체두 좀 저기하는 간호사들도 있죠.” “밤에 잠을 못 잘때요. 보호자들이 “조금 쉬고 오십시오” 그러면 쉴 공간이 없어요. 저흰 그런 공간이 하나두 없어요. 의자에 좀 앉아서 쉬는 거지 쉴 만한 곳이 하나두 없어.” - 김미정(민주노총 정책연구원), 「돌봄 노동과 간병 노동자의 현황」, 여성노동자의 일‘자리’ 무엇이 필요한가? 토론회 자료집(주최: 민주노총 여성위원회, 민주노총 정책연구원) 2010년 국민건강보험공단 <급성기병원의 간병서비스 실태조사>에 따르면 상급종합병원의 90%는 간병인 식비보조가 없고, 탈의실과 휴식시간은 아예 없는 것으로 나타나 있다. 24시간 내내 주 6일을 병원에서 생활하는 간병노동자에게 탈의 및 휴게 공간은 매우 절실하다. 하지만 간병노동자들은 쉴 때도 환자 옆에서 쉬어야 하고, 옷은 화장실이나 병실 커튼을 쳐놓고 갈아입거나 보호자가 방문하여 자리를 비워줘야 할 경우에는 갈 곳이 없어 배선실이나 병원복도를 배회하며 서성일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정해진 식사 시간도 없기 때문에 환자 상태에 따라 잠깐 시간을 내어 먹을 수밖에 없는데, 대부분의 간병 노동자는 환자용 냉동실에 얼려 둔 밥을 전자레인지에 데워 배선실 창틀에 놓고 서서 먹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이렇게 장시간에 열악한 환경에서 고강도 노동을 하지만 간병 노동자가 받는 간병료(시급)는 식대, 교통비 포함 2,292원~2,708원으로 최저임금에도 훨씬 못 미치는 수준이다. 게다가 간병소개업체를 통해 일자리를 알선 받고 있는 대부분의 간병노동자들은 간병소개소에 등록비, 교육이수비용, 월회비를 지불하고 있다. 간병노동자의 70% 이상이 약 10만 원의 등록비와 교육이수비용을 지불하고 있고, 월회비는 6만 원 미만이 61.9%, 6만 원 이상이 37.7%이어서 유료소개소로부터 심각한 중간착취를 당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요양노동의 실태 그렇다면 간병 노동자와 거의 같은 일을 하면서 2008년부터 노인장기요양법에 따라 제도화되어 있는 요양보호사들의 노동 조건은 좀 더 나을까. 요양 보호사는 직접고용(정규직과 계약직. 정규직은 전체의 47.3%, 사회공공연구소)과 간접고용(파견) 형태로 근무하고 있다. 고용 규모를 살펴보면 2010년 상반기 현재 자격증을 취득한 요양보호사는 948,221명이며, 국민건강보험공단 보고서(2010)에 의하면 간병인 중 83.2% 이상이 요양보호사 자격증을 소지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 중 취업한 요양보호사는 233,600명(재가 200,228명, 시설 33,372명)으로 취업한 비중은 26.5%에 불과하다. 정부가 여성을 위한 일자리라며 적극 선전한 결과 ‘100만대군’ 요양보호사를 배출했지만 취업률은 1/4 정도에 불과한 것이다. 노동조건을 살펴보면, 재가요양보호사의 61%는 월 60만 원 이하의 임금을 받고 있고 절반 정도는 한 달에 10일 미만으로 일하고 있으며 4대 보험 혜택도 받지 못하고 있다. 시설 요양보호사는 12시간 맞교대 혹은 24시간 격일제로 근무하거나 심지어 거주형 시설에서 24시간 연속으로 근무하고 있고, 현행 법률기준으로 요양보호사 1인이 입소자 10명을 담당하게 되어 있다. “병원이 치료 해 가지고는 그 분이 치료가 안돼. 다른 병원을 선택할 수 있는 환자한테 권리를 주는데, 우리한테는 권리가 없는 거예요. 그면 어떻게 해. 그때 직장 상실이 되는거지. 대상자가 돌아 가셔 버렸어. 그러면 90시간이 없어지는 거야. 나타 날 때까지 대기 하구 있어야 돼. 기한이 없어. 사람이 나와야 되거든요. 또 이 사람이 너무너무 아파서 재가나 병원으로 장기 입원을 가. 우리는 병원을 따라 갈 수가 없어요. 너무 심해서 가족들이 볼 수가 없다 그러면 요양원으로 보내. 그럼 우리는 손님이 끊기는 거예요. 그러니까 대상자가 없다 보니까 이게 고용불안이 되는 거야” “저는 요양보호사 하기 전에 가사 간병으루 한 1년여 동안 한 댁이 있었어요. 그 부인께서 중풍으루, 뇌졸중으루 5년 정도 와상 환자루 누워 계신 분이었는데, 남편 분이 병간호하셨고 제가 없는 사이에는 하고 계시는 댁인데, 언젠가는 하루는 갔더니 할아버지가 자꾸 주방에서 그 할머니 식사 설거지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제 등을 막 겹치면서 참 이상하게 신체 접촉 할라는 거 있죠? 황당해 가지고 이걸 어떻게 처리해야 되나 당황을 했었거든요. 그래서 그때는 교육 받으면서 어떻게 해야 된다는 것을 알았어요. 그때는 다급하게 그 자리에서 침을 주라는 거야. 따끔한 일침을 주라는거야.... 할아버님, 저 이렇게 하면 저 여기에 못 옵니다. 그리구 이렇게 행동하실 경우에는 기관에 전화 할 수도 있어요. 그래도 나름대로 대처 방법이 순간적으로 생각이 나더라구요. 그랬더니 그 다음날 갔더니, 할아버지가 조금 순해졌더라구. 그런 경우가 있었어요. 저한테는..” “이용자가 무심코 환자 목욕을 시키고 있는데, 빠는 김에 이것도 빨아요. 휙 던져 줄때 기분은 분명 틀리거든요. 그랬을 때 저는 이거는 이런 대우를 받기 위해서 이 분한테 이렇게 하는 게 아닌데, 그래서 한번 얘기를 드려야 겠다 생각을 했었어요. 이건 아닙니다. 하고 정중하게 얘기를 드려야 되는데, 기회가 놓쳐졌어요. 그랬을 때는 그러면 일 자체가 힘들어져요. 마음이 힘드니까 일 하는 자체가 의욕이 상실되는 면도 있고.” - 김미정(민주노총 정책연구원), 「돌봄 노동과 간병 노동자의 현황」, 여성노동자의 일‘자리’ 무엇이 필요한가? 토론회 자료집(주최: 민주노총 여성위원회, 민주노총 정책연구원) 현재 장기요양기관은 2008년 복지부에서 애초 예상했던 수요의 8배가 넘게 과잉 양산되어 난립해있고, 이로 인해 이용자 확보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요양기관에서는 과다 경쟁을 하며 불법적 행위들을 자행하고 있다. 민간 요양 시설들은 운영비용을 삭감한다는 명분으로 노동자의 임금을 낮추고 장시간 노동을 강요하며 인력을 줄여온 반면 5대 보험에는 가입하지 않는 등 요양 보호사의 노동권을 침해하고 있다. 이는 요양기관 서비스의 질을 하락시키는 원인으로 작용한다. 뿐만 아니라 요양 보호사들은 본래 업무 외 가사지원 등 부당한 업무에 시달리고 있고 법정 수당, 퇴직금, 주휴수당, 연차수당 등을 지급받지 못하는 등 근로기준법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 또 산재 직업병 및 성희롱에 시달리고 있다. 비공식 영역의 간병 노동자에 비해 노동 강도, 노동 시간 그리고 노동 조건이 개선되어있다고 보기 어려운 형편이다. 2008년 노인장기요양보험 제도가 시행될 당시부터 이러한 결과는 예상되어왔다. 시장의 문을 활짝 열어주면서 누구나 쉽게 장기요양기관을 설립하고, 사업량에 따라 돈을 벌 수 있도록 설계한 것이 시설 난립과 과다 경쟁의 원인이다. 노인장기요양보험 제도의 토대를 형성하고, 민간요양기관을 견인해야 할 공공요양기관은 단 1.5%밖에 되지 않는다. 폐지를 모아 하루를 살아가는 노인들, 부양자 없이 방치된 노인들도 수혜를 받을 수 있는 보편적 사회서비스가 되어야 한다는 바람과는 달리 고령화를 새로운 수익 시장으로 파악하여 의료, 사회서비스 영역의 시장화, 금융, 보험 상품 활성화에 주력하면서 시행된 제도가 가져온 필연적 결과인 것이다. 이 속에서 보험재정은 복지재원이 아니라 ‘눈먼 돈’이 되고 있고, 요양 보호사들은 국가인정 자격증을 딴 전문인처럼 등장했으나 여전히 저임금과 산업재해, 근로기준법 위반 등에 시달리고 있다. 그러나 정부는 이러한 문제점에 대해서 시행초기에는 ‘아직 정착되지 않아서’라고 이야기하다가, 지금은 ‘이해관계자들의 다양한 의견 때문’에 발생한 문제라며 근본적인 개선방안을 고려하지도 책임지지도 않고 있다. 간병·요양 노동자 노동권 확보를 위한 시도들과 평가 앞서 살펴보았듯 정부의 여성일자리 확충 전략의 일환인 사회서비스 일자리는 노동권이 보장되는 안정적인 일자리가 아니다. 그렇다면 민중에게 제공되는 보편적인 서비스로서 간병, 요양 노동이 제공되고, 더불어 간병 요양 노동자들의 노동권이 보장되기 위해 요구해야 할 것은 무엇일까. 앞서 살펴보았듯이 간병서비스는 필수적인 의료서비스이지만 국가와 병원이 책임지지 않고 있어 사적 영역으로 방치되고, 모든 책임은 환자와 간병인에게 전가되어 왔다. 또한 간병 인력의 공급과 관리를 직업소개소나 파견업체가 담당하게 되면서 의료서비스의 질과 간병노동자의 노동조건에 대한 책임을 누구도 지고 있지 않다. 이러한 조건에서 간병 노동자의 경우 간병제도화에 있어서 ‘건강보험 급여화’와 ‘간병노동자 직접 고용’을 핵심 요구로 꼽을 수 있다. 보건복지부는 2010년 주요 업무 추진 계획(2009.12)으로 “병원 내 간병서비스를 비급여 대상에 포함, 사적거래가 아닌 ‘병원을 통한 공식적 서비스’로 전환하겠다”고 밝혔다. 이러한 구상은 총체적, 포괄적 간호간병서비스 중 간병서비스만을 따로 떼어 이에 대한 급여만을 민간의료보험으로 해결하려 한다는 점에서 많은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이는 민간의료보험이 보장하는 급여 범위에 혼란과 포괄적 간호간병서비스 제공 체계와의 부조화를 유발하게 될 것이다. 민간의료보험으로 간병서비스를 제공하게 된다면 보험료 부담을 할 수 있는 이들만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게 되고, 결국 경제적 능력에 따라 차별적으로 간병 서비스가 제공되는 결과로 이어지게 된다. 뿐만 아니라 민간의료보험사는 이윤 극대화를 위해 까다로운 조건을 걸어 간병서비스 수급자격을 관리하려할 것이고, 간병서비스 제공 기간 등에 엄격한 제한을 둘 가능성이 높아 서비스 수급 장벽이 생길 수 있다. 또한 의사, 간호사 등 의료서비스를 제공하는 필수적인 인력은 파견이 허용되어 있지 않은 현 상황에서 간병 서비스의 급여를 민간의료보험으로 해결한다는 것은 간병서비스만은 파견과 간접 고용을 용인, 더욱 확대하겠다는 의미이다. 지금도 병원에서는 인건비 절감과 산업재해 발생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고, 일상적 교육, 훈련, 지도 비용을 회피하기 위해 직접 고용을 거의 하지 않고 있는데 이럴 경우 병원이 직접 간병서비스를 제공하는 형태보다는 제 3의 인력 파견 업체에 의한 외주 형태를 선호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이렇게 되면 간병서비스 질 하락과 더불어 간병인의 노동권 문제가 더욱 증폭될 것이다. 또한 간병서비스를 비급여로 제도화하여 민간의료보험으로 해결하게 되면 행정 당국의 적절한 개입과 관리가 어렵게 된다. 현재 대부분의 건강보험 비급여 서비스에 대해서 행정당국이 개입할 수단을 가지지 못한 것이 현실이다. 간병서비스 역시 마찬가지로 간병서비스 질 관리를 위한 정책적 개입이 어려워질 경우 서비스 질 하락과 간병 노동자의 노동권 후퇴는 더욱더 막을 수 없게 될 것이다. 이렇듯 간병서비스를 건강보험 비급여화로 제도화하는 것은 기존의 병원 서비스 문제점(간호간병 서비스 제공과 관련하여 지도, 감독 체계 부실, 서비스 공급 인력의 질 문제, 총체적, 포괄적 간호·간병서비스 제공 부재 등의 문제점)을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증폭시키는 형태이다. 이런 상황에서 간병 노동자들은 장시간 저임금의 열악한 노동조건에서 벗어나기 힘들며, 간병서비스의 질 역시 보장하기 어려운 상황에 놓이게 된다. 이는 결과적으로 환자나 간병 노동자 모두에게 피해가 돌아가는 구조이다. 그렇기 때문에 비공식적 노동으로 간주되고 있는 간병 노동을 제도화하면서 ‘건강보험급여화’와 ‘간병노동자 직접 고용’을 핵심으로 하여 간병 서비스 이용에 있어서 형평성 문제를 해소하고, 간병 노동자의 노동권과 서비스의 질 향상을 보장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지금까지 간병 노동자들의 노동권과 간병서비스 제도화를 위해 각계에서 여러 활동들이 전개되었다. 한 축은 법률적·제도적 대응이고, 다른 한 축은 간병 노동자 당사자들을 투쟁의 주체로 조직해내는 활동이다. 우선 법·제도적 대응 쪽으로는 여성 단체, 간병단체, 노동단체 등이 함께 구성한 돌봄 연대의 활동을 살펴볼 수 있다. 2010년 5월 구성된 ‘돌봄서비스 노동자 법적 보호를 위한 연대’(이하 돌봄연대)는 간병인, 가사도우미, 산후관리사, 육아도우미 등을 돌봄 노동 종사자로 보고 이들에 대한 법적 보호장치 마련을 위한 활동을 하고 있다. 특히 돌봄 노동자에게 고용보험과 산재보험이 시급한 것으로 보고 고용·산재 보험 적용 특례조항을 통해 우선적으로 적용될 수 있도록 하자는 입장이다. 돌봄연대는 개정법안 마련 외에도 법 개정을 촉구하는 온라인 행동과 캠페인, 언론 활동 등을 벌이고 있다. 그러나 고용보험과 산재보험 특례조항 요구는 돌봄 노동자들의 노동기본권 확보에 있어 필요한 부분이지만 가장 시급한 요구라고 보기는 어렵다. 장애인활동보조인, 산모신생아도우미, 노인돌보미 등 돌봄 노동자들은 근로기준법과 사회보험법의 적용을 받고 있지만, 적용을 받지 못하는 노동자들과 노동조건에서 큰 차이가 없다는 점은 이를 잘 보여준다. 또한 돌봄연대의 활동은 그 방향에 있어 돌봄 노동자 스스로의 조직화와 투쟁이 상대화되는 경향이 있다는 점에서 한계를 보이고 있다. 또 다른 흐름으로 간병 노동자 노동조합 활동이 있다.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는 전국 각지에 있는 약 700여 명의 간병인 노동자를 조직해 활동하고 있다. 2001년 서울대병원 간병인 노조가 설립되고, 2003년 서울대병원의 일방적인 간병인무료소개소 폐쇄에 대한 대응투쟁이 벌어지면서 본격적인 조직 활동이 시작되었다. 이후 경북대병원 투쟁이 이어졌고 대구, 군산, 익산, 충북, 제주, 강원 지역의 병원 및 시설에서 실태조사, 공청회 등의 활동을 펼쳐왔다. 요양보호사의 경우 노동조합으로 조직된 인원은 많지 않지만 산재적용과 체불임금 지급 등의 요구를 가지고 지속적인 활동을 하고 있다. 간병인과 요양보호사의 노동권 쟁취를 위한 투쟁은 2011년 현재 따끈따끈 캠페인단 활동으로 이어지고 있다. 2003년 서울대병원 무료소개소 폐지에 맞선 투쟁의 결과, 그 성과는 노동조합에서 직접 무료소개소를 운영하는 것으로 수렴되었다. 간병노동자가 무료소개소를 통해 직업 알선을 받으려면 간병 분회 조합원으로 가입하는 방식이다. 무료소개소의 가장 큰 장점은 다른 소개소와 같은 중간착취(알선료)가 없다는 점이다. 또한 무료소개소를 통해 조합원으로 만난 간병인들이 스스로를 조직하고 상호 교육하는데 있어서도 용이한 이점이 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중간 소개소라는 구조적 위치에서 올 수 있는 위험에 대해서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 현재 정부는 ‘직업안정법’을 ‘고용서비스 활성화 등에 관한 법률’로 개악하는 등 중간착취 시장 확대 시도를 하고 있다. 직업 소개뿐만이 아니라 직업 훈련, 파견을 패키지로 제공할 수 있는 ‘복합고용서비스 기업’을 도입하여 민간고용서비스 기관의 육성과 대형화를 유도하고, 이를 합법화하는 것이 정부의 목표다. 이렇게 되면 민간고용서비스 기관들이 대량 양산될 것으로 예상할 수 있는데 노동조합이 운영하는 소개소가 병원과의 협약을 맺거나 유지하기 위해서는 민간기관과의 경쟁을 피하기 어렵게 될 것이다. 민간기관과의 비용 절감 경쟁은 직업소개를 매개로 한 노동조합의 활동을 난감하게 만들 가능성이 있다. 한편, 정부는 고용서비스의 공공성을 포기한다는 세간의 비판을 무마하는 방패막이로서 사회적 기업을 적극 활용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노동조합의 무료소개소는 비영리단체로서 국가의 사업비 지원 대상에 포함되어 활용되기 쉽다. 노동조합에서 직업 알선을 통한 조직화 사업을 할 때 이러한 점들을 고려해야하고, 아울러 직업 알선 외에 주체 조직화의 다양한 경로를 모색할 수 있어야 한다. 간병·요양 노동자가 노동과 삶의 주체가 되기 위하여 간병·요양 노동자는 비공식 영역에 속해 있거나 시설 별로 흩어져있어 조직화가 쉽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물리적 조직화뿐만이 아니라 간병·요양 노동자 스스로가 자신이 처한 현실을 바꿔낼 수 있는 운동주체로 조직되는 것 역시도 어려운 과제이다. 현 시점에서 간병·요양 노동자를 비롯한 돌봄 노동자 조직화 방향을 재확인할 필요가 있다. 우선, 간병·요양 노동자의 조직화는 그 노동에 종사하는 노동자가 대부분 여성이라는 점에 주목하는 가운데 이뤄져야 한다. 신자유주의는 보육, 의료, 교육, 노인부양과 같은 재생산의 책임과 비용을 가족에게 전가하는 한편 그것에 대한 사회적 책임은 시장화의 방식으로 해결함으로써 자본주의와 재생산의 위기를 관리하고자 한다. 위기 비용이 민중에게 전가될수록 개별 가족의 생존 전략은 여성의 이중노동을 강화하는 악순환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여성이 제공할 수 있는 무급노동이 무한히 탄력적일 수는 없기 때문에, 재생산의 위기가 발생할 수밖에 없었다. 여성 노동은 자본주의의 위기 속에 저임금 노동과 무급의 재생산 노동의 책임이 집중되는 지점이다. 그리고 정부의 사회서비스 시장화정책은 저평가되어 있는 여성의 재생산 노동을 노동시장에 유입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여성이 집안에서 하는 일과 크게 다르지 않으니 저임금이라도 감사히 받고 일하라는 것이다. 간병·요양 노동자들은 이러한 신자유주의적 여성인력 활용 전략의 핵심에 놓여있는 주체들이다. 정부와 자본의 전략에 대응하는 간병·요양 노동자 조직화가 여성노동권을 핵심적으로 사고해야 하는 이유다. 다음으로, 정부의 불안정 노동 확산 정책에 대한 전면적인 대응이 동반되어야 한다. 노동유연화 정책이 재생산 위기의 근본적 원인의 하나임에도 정부와 자본은 그에 대한 해법을 또다시 일·가정 양립이 가능한 유연한 일자리를 창출하는데서 찾고 있다. 그런 점에서 간병·요양 노동자 운동은 중간 착취 시장 확대를 목표로 하는 정부와 자본의 공세에 대해 주의 깊게 사고하고 판단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직업 안정법 개정, 기간제 노동자 사용기한 제한 예외대상 확대, 상용형 시간제 일자리 활성화, 근로시간저축휴가제도 등 간접 고용과 노동 신축화를 전면 확대하기위한 시도를 막아내는 투쟁 역시 간병·요양 노동자의 노동권과 직결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마지막으로 간병·요양 노동자 스스로의 주체화가 가장 중심적인 과제가 되어야 한다. 무엇보다 간병·요양 노동자들이 스스로 본인의 노동에 대한 인식을 변화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간병·요양 노동자들은 자신이 하는 일이 ‘노동’이 아니라 사랑과 희생정신으로 임하는 봉사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일을 하는데 불만은 있지만, 집단적으로 노동권을 주장하거나 노동조합 활동 하는 것을 부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보기도 한다. 그러나 간병·요양 노동이 사회에 필수적인 노동이며 노동의 권리를 제기하는 것은 당연한 것임을 인식해야 한다. 동시에 중고령 여성이 수행하는 노동에 대한 저평가에 대해 문제제기 할 수 있는 집단으로 주체화되어야 한다. 중고령 여성이 선택할 수 있는 일자리가 많지 않은 상황에서 열악한 노동조건을 감수하고서라도 노동하는 것을 다행으로 여기는 것이 대다수의 생각이다. 이는 나이든 여성이 일하는 것이 소일거리라는 사회적 인식에 기반 한 것이다. 작년 한 해 사회적 이슈가 되며 당당히 노동권을 주장했던 청소노동자 투쟁은 중요한 참고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사회서비스 시장화, 간접 고용과 노동 신축화가 확산되고 있는 지금, 간병·요양 노동자, 여성 노동자들이 주체가 되어 권리와 요구를 제기하고 노동자 간 연대를 강화하며 함께 투쟁해나가는 것이 시급한 때이다.
공공운수노조 사회보험지부 경인지회 권영규 정책부장 인터뷰 권영규 | 공공운수노조 사회보험지부 경인지회 정책부장 인터뷰어, 정리: 공성식 | 노동자운동연구소 연구원 공공운수노조 사회보험지부 경인지회 정책부장이자 현장조직인 현장노동자회 의장을 맡고 계신 권영규 동지를 만나 2011년 임·단협 투쟁의 현황과 사회보험지부의 상황을 함께 진단해 보고, 사회보험지부를 비롯하여 공공부문 노동자운동의 혁신의 방향에 대한 생각을 들어 보았다. 사회운동: 먼저 본인 소개를 부탁드린다. 권영규 사회보험지부 경인지회 정책부장(이하 권영규): 건강보험공단 경기도 광주지사에서 일하고 있고 노조에서는 사회보험지부 경인지회 정책부장을 맡고 있다. 사회보험지부 내 현장조직인 현장노동자회의 의장이기도 하다. 90년에 입사했고 첫 발령지는 서울 관악지사였다. 그곳에서 계속 일하며 노동조합 활동도 하였고 99년에는 서울본부 사무국장으로 활동을 했다. 2005년 공단이 114명을 부당 원거리 전보를 내렸고 나도 포함되었다. 평소 공단의 정책에 대해 불만이 많다는 것이 사유였다. 누가 봐도 말이 안 되는 전보 사유가 많았다. 상급자에게 인사를 안 했다고 전보를 받은 사람도 있었다. 나중에 지노위에서 어떤 지노위원이 사측 노무사에게 건강보험공단 수준이 이거 밖에 안 되냐며 뭐라 했을 정도였다. 원거리 전보는 사보와 같은 전국 사업장에서 노동조합 활동을 탄압하기 위해 사측이 활용하는 주요한 무기이기도 하다. 노동조합 지침에 따라 114명은 원거리 전보를 거부하고 지명파업에 들어갔고 사측은 전보 거부를 사유로 114명을 해고했다. 이후 파업 등 투쟁이 계속되었으나 조합에서 사측과 재심의를 거쳐 복귀하는 것으로 합의했다. 재심의에 서면으로 진술서를 내야 했는데 나를 포함하여 일부는 이를 거부했다. 조합은 지침을 따르지 않았다며 희생자로 인정하지도 않았다. 노사합의 내용이 순차적으로 생활권으로 다시 복귀시킨다는 거였는데 나는 1년 정도 가 있다가 이후 안양, 성남 등 조금씩 생활권으로 다시 들어오게 되어 지금 근무처인 광주로 온 지 1년 정도 지났다. 나는 그래도 비교적 잘 풀린 경우이고 2년도 넘게 원거리에 나가 있던 사람들도 있다. 최근에도 사측은 원거리 전보를 무기로 쓰고 있다. 노사협의회에서 전보 원칙을 합의하기도 하는데 그나마 경인지회는 노사협의회에서 전보가 가능한 지역을 정해서 생활권 전보가 이루어지도록 하고 있다. 직장노조와의 힘있는 공동투쟁으로 연봉제를 저지하고 실질임금 인상 쟁취해야 한다 사회운동: 2011년 임금투쟁의 주요 이슈가 연봉제 도입 저지인 것으로 알고 있다. 2011년 임금투쟁의 주요 이슈와 요구안은 무엇인가? 권영규: 연봉제 도입을 저지하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 사측은 3급 이상에 대해 연봉제를 요구하고 있다. 또한 임금이 4년째 동결되었다. 실질임금이 엄청나게 하락한 셈이다. 따라서 물가 인상 수준을 뛰어 넘는 실질임금 인상이 필요하다. 또한 임금격차 축소와 동일직종 동일임금도 중요한 과제다. 임금이 동결되는 와중에 1급이나 2급[주: 3급까지 조합원 자격이 있음]의 임금은 오히려 올라서 임금격차가 커졌다. 최근 신입사원의 경우 삭감된 임금을 받고 있는데 이를 원상 복귀시켜야 한다. 징수업무 통합에 따라 연금에서 넘어 온 조합원과 원래 사회보험 조합원들과도 임금의 차이가 있다. 연금 쪽에서 넘어 온 조합원들이 조금 높은데 연금 수준으로 임금을 맞춰야 한다. 올해 임금투쟁에서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가 한국노총 소속인 직장노조와의 공동투쟁이다. 직장노조는 작년에 단체협약을 체결해서 올해는 임금협상밖에 없다. 연봉제를 막아 내고 임금 투쟁을 힘 있게 하기 위해서는 직장노조와의 공동투쟁이 중요하다. 수도권의 여러 지회와 많은 조합원들이 직장노조와의 공동투쟁의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끼고 있고 공동투쟁을 요구하고 있다. 그런데 오히려 지도부가 공동투쟁에 소극적이다. 그동안 공동투쟁을 해 본 경험도 없고 상호간에 갈등만 계속되다보니 불신이 크다. 현장노동자회는 공동투쟁본부를 구성해서 힘 있게 공동투쟁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지부 집행부는 이를 아직까지는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사회운동: 지난 6월 총회 이후 밖에서 볼 때는 별 다른 투쟁 흐름이 없어 보인다. 8월 말 9월 초부터 부분 파업을 들어간다는 이야기도 있던데. 앞으로의 지부 투쟁 계획은 무엇이고 현장 분위기는 어떠한가? 권영규: 6월 총회 때 분위기가 매우 좋았다. 94%라는 역대 최고의 파업 찬성율을 보였다. 당시 총회 시기가 납부 기간이었는데 사측은 납부 기간에 총회를 한다며 총회 방해를 했지만 조합원들은 이러한 탄압을 뚫고 총회를 성사시켰다. 그런데 이후 지도부가 투쟁의 흐름을 상승시키지 못하고 투쟁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사측이 총회참석자에 대해 보복을 하겠다고 했는데 이에 대한 현장투쟁을 조직하지 않고 법적으로 싸우겠다며 투쟁을 회피했다. 7-8월 투쟁계획에 “하계 휴가기간” 여섯 글자 밖에 없더라. 지도부가 9월 17일에 이사장이 갈리기 때문에 신임 이사장에 관심을 두고 있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지도부가 투쟁을 조직하지 않으면서 현장 분위기도 조금씩 소강상태에 빠졌다. 그러다 최근 갑자기 지명 파업을 하겠다고 한다. 투쟁을 하겠다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좀 답답하다. 분위기를 만들고 투쟁 수위를 높여 나가야 하는데 아무것도 안 하다가 갑자기 지명파업을 한다고 하니 현장에서 당혹스러워 한다. 지금 지부 지도부는 뭐라고 해야 하나 하여튼 답답하다. 사회운동: 12월 11일에 단체협약이 만료되고 연금 등의 사례를 봤을 때 사측에서 강도 높은 단협 개악안을 들고 나오면서 무단협 상태로 몰고 가며 연봉제 도입 등을 협박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임투가 늦어지면서 임투와 단협투쟁이 겹치게 되면 상당히 힘겨운 싸움이 예상된다. 권영규: 직장노조는 올해 단협이 없어서 단협에 들어가면 전선이 더욱 교란될 수도 있다. 그래서 단협 갱신 압박에 시달리기 전에 투쟁의 수위를 높여서 연봉제 저지를 분명히 해야 한다. 그런데 지부 집행부는 벌써부터 내년 이야기를 하고 있다. 내년 총선에 투쟁을 집중시키겠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그러면 안 된다. 이번 지명파업을 계기로 투쟁 수위를 계속 높여 가야 한다. 사보조합원들은 지도부가 결의하면 언제라도 파업에 들어 갈 수 있는 저력을 여전히 가지고 있다. 사회운동: 지난 7월 요양직 노동자가 장기요양신청 가정을 방문했다가 스패너로 폭행을 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요양직 노동자들을 비롯한 건강보험공단 노동자들의 노동강도와 인력부족 문제가 심각한 수준인 것 같다. 권영규: 인력 부족 문제가 정말 심각하다. 요양 쪽 인력 부족 문제도 심각하고 올해 통합된 징수 부문도 인력이 부족해서 노동강도가 더 심해질 것 같다.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2000년 공단 출범 이후 일은 계속 늘어나는데 인력은 오히려 줄어들었다. 얼마나 인력이 부족하고 노동강도가 어느 정도로 심각한지 노동조합에서 연구사업을 해서 보다 객관적인 자료를 마련하면 좋을 것 같다. 사회운동: 노동강도가 강화는 인력 부족 문제 때문이기도 하지만 공단이 경영 효율화, 선진화라는 명분으로 근태관리, 실적관리 등 각종 통제를 강화하고 개별 성과급을 도입하여 노동자들 사이의 경쟁을 유도하는 등 노동통제와 상호 경쟁 유도의 결과이기도 할 것이다. 공단의 노동 통제 실태와 이것이 현장에 미치는 영향은 어떠한가? 권영규: ERP(Enterprise Resources Planning, 전사적 자원관리)가 도입되면서 우리 업무의 일거수 일투족이 수치화되어 관리되고 통제받고 있다. 징수 업무의 경우 누가 하루 몇 건 처리했는지 다 자료로 남고 서로 비교가 된다. 개인 뿐 아니라 팀별 실적 목표와 요구는 자연스럽게 실적 저하에 책임있는 노동자들이 소외되는 상황을 만든다. 또 지사별 평가를 통해 성과급을 연계하여 개인별, 팀별, 지사별 경쟁을 유도하고 있다. 성과급의 경우 아직 사회보험은 균등분배의 전통이 지켜지고 있기는 하다. 성과급이 나오면 중간 등급을 기준으로 균등하게 나눈다. 아직 과거의 공동체성이 남아 있는 부분이다. 사회운동: 인력부족, 노동강도 강화 등으로 조합원의 피로도와 불만이 엄청나게 쌓여 있을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보험지부는 과거 1980-1990년대와 같은 투쟁력은 보이지 못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공공부문의 신자유주의 개혁의 결과 조합원들이 보수화되고 단체행동에 대한 피로도가 높고 노조를 중심으로 한 투쟁에 대해 별로 신뢰하지 않고 개별적으로 살아남으려는 성향이 강해졌다고 분석하고 있다. 현장에서 보시기에 이러한 진단이 타당하다고 보시는가? 권영규: 물론 과거에 비해 조합원들이 노동조합 활동에 대한 관심과 열의가 떨어진 것은 사실이다. 업무도 많고 사측의 노동통제 때문이기도 하고 그 동안 노동조합에서 투쟁을 제대로 하지 못한 탓이기도 하다. 노조 사이트의 경우 과거에 이슈가 되는 게시물의 경우 조회수가 5-6천 건이나 되었는데 지금은 1천 건도 안 된다. 일이 바쁘다보니 노조 사이트에 들어가기가 쉽지가 않다. 조합원들이 나이가 들기도 했다.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89년, 90년 입사자들이 지금 40대 후반에서 50대 초반이다. 10년 후면 대부분 퇴직한다. 나이가 들다 보니 아무래도 보수화되는 경향도 있다. 하지만 나는 우리 사보 조합원들은 여전히 노동조합을 중심으로 투쟁할 각오가 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89년, 90년 공채로 입사하여 아무런 ‘빽’도 없는 상태에서 오직 옆에 동지만이 나의 ‘빽’이라는 생각들을 여전히 가지고 있다. 이런저런 투쟁을 겪으면서 같이 살아 왔는데 이제 와서 조합을 등지는 것은 동지를 배신하는 것이라 다들 생각한다. 성과급 균등분배 처럼 여전히 공동체성이 남아 있기도 하다. 조합원들은 지도부가 분명하게 결의하고 이끌면 언제라도 파업에 들어갈 각오가 되어 있다. 사회운동: 2000년대 이후 입사한 조합원들은 어떤가. 초창기 입사자들과 차이가 클 것 같다. 권영규: 최근 입사한 조합원들과 이야기를 해 보면 자신의 노동조건에 대한 불만을 노동조합을 통해서 풀려고 하는 것이 약하다. 지난 선거 때 지방에서 요양보험 업무를 하는 한 젊은 조합원을 만났었다. 출장을 많이 다니는데 지금 나오는 출장비로는 기름값도 안 나온다고 해서 요구사항이 뭐냐고 물었더니 경차를 사달라고 하더라. 업무에 문제가 있으면 인력을 충원한다거나 현장을 바꿔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못하고 회사에 내 업무를 위해 이러이러한 것을 지원해달라고 생각한다. 아무래도 지금 한국 사회가 취업이 워낙 어렵다보니 더 회사에 의존하는 경향이 크고 세대적 특성 때문인지 개별적인 욕구가 크고 개인주의도 강하다. 업무가 분할되어 있다보니 다른 업무를 하는 사람들의 고충을 잘 모르기도 한다. 학생운동 경험도 없고 그러다보니 노동조합 활동에 익숙하지 않다. 또한 사측에서도 치밀하게 노동조합에 가입하지 못하도록 작업을 한다. 그래도 끊임없이 신규 입사자를 계속 만나고 챙기면서 노력을 하고는 있다. 젊은 세대들이 한번 큰 투쟁을 통해서 노동조합 활동을 경험해야 변할 수 있을 것 같다. 지난 10년의 실리주의, 협조주의는 공공부문의 신자유주의 개혁을 막아내는데 실패했다 사회운동: 지부나 공공노조, 공공운수노조가 조합원의 저력을 모아 내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겠는데, 2000년 이후 사회보험지부(노조)를 평가한다면 어떤가? 권영규: 2000년 84일 파업 투쟁 이후 노동조합 내에서 투쟁파가 고립되었고 실리주의, 협조주의가 득세하기 시작했다. 이후 대부분의 선거에서 이러한 방향을 내세운 사람들이 당선되었다. 하지만 지난 10년의 실리주의, 협조주의의 결과가 무엇인가. 결국 인력감축, 상시적 구조조정, 노동통제 강화로 이어졌을 뿐이다. 노무현 정부가 들어서면서 노무현 정부와 민변 출신의 이성재 이사장이 노동조합에 우호적인 정책을 가지고 있다고 판단한 당시 집행부는 공단 이사장과 협조관계를 유지하면서 업무영역을 확대하여 구조조정을 막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 결과 업무가 확대되었지만 인력 충원은 없었고 결국 노동강도만 강화되는 꼴이 되었다. 그 사이에 민변 출신 이사장은 각종 신경영기법을 도입하여 노동통제를 강화해 나가고 노동조합의 활동을 위축시키는 단협 개악을 시도했다. 인력 충원이 기본 전제가 되고 그 다음에 필요한 업무를 확대해야 하는데 거꾸로 접근한 것이다. 지도부는 조합원과 함께 투쟁하려고 하지 않고 정부와 정치권을 상대로 우호적인 정책을 통과시키기 위해 로비하는데 바빴다. 로비로 노동자의 권리를 지켜 낼 수는 없다. 이게 가능하다면 돈 모아서 실력 있는 의원에게 몰아주면 되지 노동자들에게 노동조합이 왜 필요하겠는가. 그게 안 되니까 노동조합이 필요하고 투쟁을 해야 하는 것이다. 사회운동: 2012년 총대선을 앞두고 '건강보험 하나로' 운동을 비롯하여 건강보험 개혁에 대한 요구를 여기저기서 많이 하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듣고 싶다. 권영규: '하나로'는 문제가 심각하다. '하나로'는 결국 노동자가 의료보험비를 더 내고 이를 가지고 정부를 설득해서 국가 지원도 늘려서 건강보험 보장성을 더욱 확대하자는 것이다. 노동자가 돈을 더 내서 구걸하자는 꼴인데 그런다고 정부가 국가 지원을 늘리겠는가. 만약 의료보험비가 인상되면 민원이 엄청나게 빗발칠 것이다. 그런데 '하나로'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사회보험노동자들의 인력부족 문제는 언급하지도 않는다. '하나로'는 노동자의 구체적인 상황에는 관심이 없는 탁상공론이며 반계급적 정책이다. 건강보험은 국가가 책임진다는 원칙이 중요하다. 노인장기요양보험 같은 경우도 국가의 책임을 더 높여야 한다. 노인 요양은 인권의 차원에서 접근해서 무조건 국가가 책임지고 요양기관도 국가가 직접 운영해야 한다. 예방적 차원에서 4-50대의 건강관리에 집중할 필요도 있다. 4-50대가 쓰러지면 가정이 파탄난다. 이들 세대의 건강을 체계적으로 관리하는 것이 전체 사회적 비용을 줄이는 길이다. 병원의 영리적 행위에 대해 통제를 제대로 해야 하는데 지금 잘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병원의 의료비 청구를 심사하고 평가하는 기능은 건강보험공단이 아니라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이 가지고 있다. 공단은 자판기 역할만 하고 있다. 여타의 보험사와 달리 보험자로서 지출에 대한 평가 기능이 없다. 병원이나 약국의 부당한 의료비 청구나 부당한 진료를 막기 위해서는 이러한 평가 기능이 잘 되어야 하는데 지금 잘 안 되고 있고 대안 모색이 필요하다. 사회운동: '하나로'와 같은 정책 대안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사람들은 정부의 탄압과 구조조정의 공세가 심각하고 현장의 조직력과 투쟁력이 약화된 상황에서 노동조합에 우호적인 제도를 만들고 우호적인 여론을 형성해야 조합원들이 투쟁에 나설 수 있지 않겠는가라고 이야기한다. 사회보험의 경우 2000년 이후 몇 번 투쟁을 중시하는 집행부가 등장하기도 했지만 실제 의미 있는 투쟁을 조직하지는 못하고 중도하차하곤 했다. 현장을 중심으로 노동조합과 투쟁을 복원해야 한다는 원칙이 힘을 얻으려면 구체적인 대안과 실천계획이 필요한 것 같다. 권영규: 2000년 84일 파업 이후 선거에서 현장노동자회가 추천한 후보가 당선되었었다. 당시 지도부의 활동에 대해서는 보다 냉정하게 평가되고 현장노동자회도 반성할 부분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선거에서는 승리했지만 당시에는 이미 투쟁파가 고립되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지역본부 등이 지도부의 뜻에 맞게 움직여주지 않았다. 그러다보니 투쟁을 조직하는데 많은 어려움을 겪었었다. 2004년-2005년 집행부는 투쟁을 표방하고 당선되기는 했지만 실제로는 투쟁을 하지 않았다. 당선 되고 얼마 지나서 바로 투쟁을 포기했고 관료화된 모습을 보이며 현장의 목소리를 들으려 하지 않았다. 이 집행부를 투쟁파 집행부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대안을 물어 보았다. 단순한 것이 진리일 수 있다. 2000년 이후 노동조건이 계속 후퇴하면서 조합원들의 불만은 엄청나게 쌓여 있다. 지도부가 분명하게 투쟁을 결의하고 조직한다면 조합원들은 언제라도 투쟁에 나설 것이다. 물론 노동자가 투쟁을 한다고 해서 항상 이기는 것은 아니다. 10번이면 1번 이길까 말까 한 것이 노동자의 투쟁이다. 진다고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조직이 강해지고 조합원들이 단련된다. 지도부가 투쟁에 지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일상적으로 현장에서 투쟁을 만들어 가야 한다. 지금도 잘 되는 분회는 부당한 업무지시 등이 있을 때 현장 투쟁을 해서 막아내기도 한다. 그런데 이러한 사례들이 분회 밖으로는 잘 알려지지 않는다. 이런 사례들을 발굴해서 알려내고 현장 활동가들이 현장에서 일상적으로 투쟁을 조직하면서 큰 투쟁을 준비해 나가야 한다. 2012년에 정권을 상대로 한 공공운수노조 차원의 공동 임금투쟁을 대차게 해보자 사회운동: 공공산별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가 보자. 최근 공공운수노조가 오랜 산고 끝에 마침내 출범하기는 했다. 지난 수년간의 산별 전환 과정에서 조직형식적인 통합을 넘어 공동투쟁이 강화되는 화학적 결합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더 큰 문제는 이와 맞물려 공공부문의 많은 노동조합들이 후퇴를 거듭해 왔고 실리 중심의 기업별 노조로 돌아가려는 경향이 더욱 커지고 있다는 점이다. 권영규: 원래 산별노조는 조합원들이 연대투쟁을 하면서 산별의 필요성을 느끼고 그 힘으로 건설되었어야 하는데 공공산별은 위로부터 졸속적으로 추진되었다. 당시 사보 지도부들도 산별 만능주의자들이었다. 내가 중앙운영위에서 산별무능론을 이야기했더니 “지금 시대가 산별의 시대인데 죽은 별을 이야기하고 있다”며 바보 취급을 하더라. 그렇다고 지금에 와서 “해보니까 안 되니까 없던 걸로 하자”라고 하면 조합원들은 노동조합 자체에 심각한 체념을 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무슨 수를 써서라도 공동투쟁을 만들어야 한다. 특히 공공기관 사업장들을 중심으로 대정부 공동 임투를 해야 한다. 노조 위원장이 좌파 우파를 막론하고 각 사업장을 만나서 설득을 하고 시기를 정해서 공동투쟁에 돌입해야 한다. 올해는 힘들더라도 내년에 반드시 공동투쟁을 해야 한다. 내년은 정권 말기이고 총선도 있는 만큼 이러한 국면을 최대한 활용해서 내년 1월부터 사보, 연금, 가스 등 주력 부대가 임투에 들어가고 발전, 철도도 함께 한다면, 공공운수노조가 차기에 세상을 바꾸는 힘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올 연말부터 준비를 해야 한다. 이상무 위원장이 자신의 결의를 분명히 밝히고 솔직하게 현재 상황을 같이 돌파하자고 사업장을 돌아다니면서 읍소도 하고 협박도 하고 했으면 좋겠다. 내가 나를 버리겠다는 각오가 필요하다. 또한 개별 단위에서 투쟁이 벌어지면 산별노조 차원에서 집중을 해 줘야 한다. 그런데 연금이 투쟁을 할 때 그렇게 하지 못했다. 사보도 그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다른 단위들이 투쟁에 함께 해서 “너희들이 흔들리면 우리가 다 죽는다”라는 메시지를 주었어야 했다. 조합원들이 냉정하게 판단해서 연봉제 합의가 부결되었지 만약에 가결되었으면 다른 사업장에서도 사측의 연봉제 도입이 강력하게 추진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공동투쟁을 만들기 위해서는 사무처에 현장 출신 활동가들이 많아질 필요도 있다. 활동가들이 전임이 아니더라도 지도부 옆에서 현장의 상황을 전달하며 도움을 줘야 한다. 김진숙 지도위원이 참 대단하다. 크레인에 올라가서 꿋꿋이 버티면서 이만한 투쟁을 만들었다. 그런데 민주노총이 이 투쟁을 책임지지 못하고 있다. 민주노총이 책임을 지고 투쟁을 이끌어가야 하는데 민주주의니, 광장이니 하면서 뒤로 숨기만 한다. 2008년 촛불 때도 그랬다. 민주노총이 뒤로 숨는데 누가 시청광장을 열어 주겠는가. 정말 이렇게 가면 안 된다. 노동조합으로 포괄되지 않았던 민중들은 오히려 깨어 있는데 노동조합이 책임을 지고 이들을 이끌지 못하고 있다. 투쟁을 조직해야 하는데 위원장은 단식이나 하고 앉아 있다. 노동조합 활동은 혼자서 득도하기 위해 활동하는 것이 아니다. 요새 노조 간부들이 단식을 많이 하는데 단식은 정말 투쟁을 하다가 더 이상 어찌할 수 없을 때 택할 수 있는 마지막 수단이다. 민주노총이 뒤로 빠지면서 오히려 손학규, 유시민에게 판을 만들어주고 있다. 손학규, 유시민이 어떻게 당당하게 그 자리에 앉아 있을 수 있냐. 무릎 꿇고 사죄를 해도 모자란 판에. 이번 무상급식 투표도 오세훈이 졌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승리했다고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그만큼 민중들은 깨어 있지만 운동권이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운동권이 노무현을 못 넘어서고 노무현을 따라가고 있다. 노무현이 누구냐. 배달호 열사가 돌아가셨을 때 “더 이상 죽음으로 항거하지 말라”고 하면서 노동운동을 엄청나게 탄압을 한 장본인 아닌가. 노무현을 따라 갈 것이 아니라 명확한 노동자의 관점에서 투쟁을 해 나가야 민중들의 지지도 얻을 수 있다. 조끼를 벗고 시민인 척 하는 것이 아니라 조끼를 입고 투쟁에 나서야 한다. 사회운동: 사회보험지부 활동가들이 사업장 내부에만 갇히고 다른 사업장의 투쟁에 대한 연대나 다른 사업장에 대한 관심과 일상적인 교류가 부족하다는 비판도 있다. 권영규: 맞다. 현장노동자회 내부에서도 그러한 비판이 많다. 우리만 잘 싸운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고 다른 현장도 자신의 현장으로 바라보고 활동을 해야 한다는 각성, 자기 반성이 부족했다. 이를 할 수 있도록 교육하고 역량을 쌓아 나가야 했는데 그렇게 하지 못했고 많이 반성하고 있다. 소위 대공장으로서 사보가 자기 역할을 하지 못했다. 그런데 내부에서 사측의 탄압도 심각하고 내부의 분란도 많다보니 더 밖의 일에 신경을 못 쓰기도 했다. 그 잘 나가던 KT도 결국 내부 현장을 지키지 못하니까 순식간에 무너지지 않았는가. 사보는 지도부가 잘못된 방향으로 가면 비판하고 끌어내리면서 계속 내부 투쟁에 집중해왔다. 그러다보니 외부 활동의 비중이 적어진 점도 있다. 그렇다고 해도 내부에만 갇혀 있다는 지적은 타당하고 동의한다. 사회운동: 끝으로 하고 싶으신 말씀이 있으시다면 한 말씀 해 달라. 권영규: 노동자들은 자본주의 사회가 존재하는 한 계급적으로 투쟁해야 한다. 그런데 노동조합은 지도부가 아무리 뛰어나도 조합원들을 뛰어 넘기는 어렵고 조합원을 기반으로 활동할 수밖에 없다. 조합원의 요구에 기반하며 싸우기도 하고 그래서 함께 그 한계를 넘어 서게 되면 다른 세계에 대한 전망도 고민하고 그러한 세계를 만들기 위한 싸움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내년에 공공운수노조에서 공동 임금투쟁 대차게 해봤으면 한다. 사보에서도 한번 정권을 상대로 제대로 싸우고 그래서 후배들에게 정말 제대로 된 노동조합의 전통을 남겨 주고 싶다. ※ 바쁜 와중에도 성심성의껏 인터뷰에 응해주신 권영규 정책부장님께 다시 한 번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40년 만의 민주노조 전환, 나대진 삼화고속지회장 인터뷰 나대진 |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민주버스본부 삼화고속지회 지회장 인터뷰어: 한재영 | 인천지부 집행위원 사진: 한종현 | 인천지부 회원 2011년 5월 18일 삼화고속지회는 임시대의원대회를 통해 한국노총에서 민주노총으로 조직전환을 결의했다. 600여 명의 조합원들이 10년이 넘는 노조민주화투쟁을 통해 어용노조의 역사에 종지부를 찍고 새롭게 민주노조를 건설한 것이다. 나대진 지회장은 이번 인터뷰를 통해 민주노조 운동이 어렵고 힘들수록 원칙으로 돌아가야 함을 보여주었다. 본인은 햇병아리 지회장이라고 겸손하게 말하지만 12년간의 노조민주화투쟁을 바탕으로 자본의 탄압에 맞선 현장활동, 지역운동과 민주노조운동의 발전 방향, 자본과 조합원을 대하는 지도부의 자세 등 노동자운동의 과제들에 대해 생생하게 전해주었다. 삼화고속, 회사와 노조 소개 사회운동: 삼화고속은 인천시민들에게는 잘 알려져 있지만 『월간 사회운동』을 구독하는 다른 지역 분들에게는 생소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간단하게 삼화고속 회사 현황에 대해서 소개 부탁드린다. 나대진 삼화고속지회장(이하 나대진): 삼화고속은 1966년에 설립되어 45년이 된 회사이다. 삼화고속은 고속버스와 시외버스 노선에 150여 대의 버스와 150여 명의 조합원이 있고, 경기광역노선 2개, 인천광역버스 20개 노선 250여 대의 버스와 450여 명의 조합원이 일하고 있다. 인천과 서울을 잇는 광역버스 노선의 78%를 삼화고속이 독점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삼화고속 노동조합은 1967년도에 설립되어서 45년 역사를 갖고 있는 노조이다. 사회운동: 다른 무엇보다 지난 10년간 임금이 동결됐다는 사실만으로도 엄청난 충격이었다. 지난 10년간 임금 및 노동조건에 대해서 설명 부탁드린다. 나대진: 현 집행부에서 10년 동안 임금이 동결됐다고 주장하는 것은 회사 측에서 시급을 올리는 대신 상여금을 삭감하는 방법으로 시급인상분을 상쇄시켰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기본급을 4% 정도 약간 올리고 심야시간 상여금 산출수당을 300%에서 200%로 삭감하는 방식이었다. 광역버스의 경우 새벽 첫차 5시부터 시작해서 심야근무까지 마치면 새벽 평균 3시 30분쯤 끝난다. 격일제로 하루 20시간씩 일을 한다. 삼화고속의 경우 노사간 합의한 소정근로시간이 5시부터 24시까지(19시간)인데 사측은 편법으로 근로기준법에도 없는 심야수당 1만 원을 지급하면서 평균 2시간 일을 더 시킨 것이다. 조합원들은 새벽 평균 2시에 끝나고 집에 가면 3시다. 거기다 맞벌이 부부가 많다. 그러면 이튿날 10시쯤 일어나서 빨래도 하고, 아이들과 아내가 밥 먹은 거 설거지하면 12시쯤 된다. 잠깐 개인 일도 보고, 모여서 회의하고 그러면 4-5시까지는 집에 들어가야 한다. 집에 가서 저녁하고, 7-8시에 자야 다음 날 3-4시에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5시까지 나오려면 집에서 최소한 4시에는 일어나야 한다. 영업소 가까이에 사는 직원에게도 정말 열악한 상황이다. 현재 삼화고속 노동자들은 인천 시내버스 노동자보다 근무일수 근무시간도 더 많고 월급은 58여 만 원 정도가 적은 상황이다. 이는 10년 전과 역전된 상황이다. 보통 1년에 평균 100명 정도가 이직한다. 사회운동: 지난 10년 동안 열악한 근무조건을 강요해온 사측과 어용집행부의 탄압이 굉장히 심했을 것 같다. 이들은 어떻게 조합원들의 불만을 관리하고 탄압했나? 나대진: 조합원들이 부성운수를 비롯해 인천지역 민주노총 버스사업장의 근로조건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지난 12년 동안 4번의 선거를 치를 때마다 어용세력은 ‘민주노총으로의 조직전환’과 ‘현실적인 근로조건 개선’을 늘 머리 공약으로 내걸었다. 하지만 당선이 되고 나면 사측과 결탁, 노무2과로 전락해서 늘 조합원들을 앞장서서 탄압해왔다. 그래서 말도 안 되는 근로조건 악화가 가능했던 것이다. 여기에 저항하는 조합원들은 탄압했다. 예를 들면 연수동이 집이면 반대편인 마전으로 출근을 시키며 불이익을 줬다. 출근 40분 전에 일어나 준비하면 될 것을 1시간 반 전에 일어나야 되고, 출퇴근 비용의 경우 6만 원 정도면 한 달 왕복 기름값이 되는데 25~35만 원 정도 기름값이 들게 만들었다. 숨도 못 쉬게 하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조합원들은 다른 일자리를 구하기도 어려워 울며 겨자 먹기로 10년 넘게 참고 있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민주노조 건설투쟁과 교섭 사회운동: 불만이 많더라도 10년의 침묵을 깨고 새롭게 민주노조를 건설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민주노조 건설을 위해 해왔던 노력들, 조직전환의 결정적인 원동력, 그 과정에서 있었던 사측의 탄압에 대해서 말씀해주시면 좋겠다. 나대진: 우리는 사측과 어용노조가 결탁 근로기준법을 위반하고 있다는 것을 꾸준히 홍보해왔다. 현재 통상임금 소송이 진행 중에 있고, 주휴일가산수당을 지급하지 않은 것도 소송을 하고 있다. 또 최저임금 위반한 것을 노동청에 고소해서 111명이 받아낸 적도 있다. 그리고 회사와 결탁한 어용노조의 행태를 꾸준히 비판해왔다. 똑같이 사고를 내도 어용노조의 간부조합원은 그냥 넘어가고, 민주노조 활동가는 승무정지 두 달, 심하면 해고하는 등 차별이 많았다. 꾸준히 회사와 노동조합을 상대로 홀로 투쟁하던 조합원이 2006년 노동조합으로부터의 징계를 계기로 뜻있는 조합원 9명이 함께 뭉쳤고, 여명회라는 친목단체로 시작해서 선거 때는 40명까지 회원이 늘어났다. 회원 중에 사측과 노동조합을 비판하다가 노동조합의 제명징계와 회사로부터 승무정지나 해고를 당한 조합원도 있었다. 나 또한 이번 선거에 나서면서 민주노조로 조직 변경해서 인간답게 살 수 있고, 노동한 만큼 대가를 받아야 노조가 곧게 설 수 있다고 주장해왔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당선의 원동력은 꾸준한 활동을 보아온 조합원들의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2011년 3월 1일부터 현 집행부가 임기를 시작했고, 5월 18일에 조직형태 변경을 했다. 사측은 일부대의원 개개인들을 불러 회유했다. 하지만 대의원들은 민주노총으로의 조직전환 의지가 강했다. 대의원들 중에는 노조민주화 활동을 해왔던 분들도 있다. 뿐만 아니라 회사 눈 밖에 날까 봐 선전물 돌릴 때 만 원, 2만 원을 주기도 하고 인쇄비에 보태라고 통장으로 부쳐줬던 사람들도 있었다. 사회운동: 파업집회에서 지켜본 조합원들의 분노가 10년의 설움이 폭발하듯 강력했고, 사측에서 민주노조를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파업투쟁은 불가피했다고 본다. 하지만 공공성이 강한 버스의 특징과 10년간 지속된 회사의 탄압 때문에 파업이 쉽지만은 않았을 것 같다. 파업을 조직할 때 조합원들의 분위기가 어땠는지, 그리고 어떻게 파업을 준비해 오셨는지 궁금하다. 나대진: 조합 선거 공약이 조직형태 변경을 통한 민주노조 건설이었지만, 대의원대회에서 결의할 때까지도 조합원들이 긴가민가했다. 실제 조직형태가 변경되고 나니까 그때부터 조합원이 믿기 시작했다. ‘민주노총이 회사를 말아먹으려고 한다’는 사측의 악선전에도 현 집행부가 파업 찬반투표 했는데 85.3%의 높은 찬성률이 나왔다. 그래도 ‘설마 파업까지 가겠느냐’는 의견이 간부들과 일부 조합원들 빼놓고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간부들이 선봉에서 파업투쟁에 돌입했다. 집행부 투쟁행동을 보고 조합원이 파업투쟁에 많이 동참했다. 사회운동: 쟁의행위에 돌입한 후 회사 측의 방해, 보수언론의 공격 등 여러 장애물들이 나타났을 텐데 부분·전면 파업과 준법투쟁은 물리적인 측면에서나, 여론적인 측면에서 매우 성공적이었다고 보인다. 이러한 투쟁들이 위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었나? 나대진: 노조는 시민들의 불편을 최소화하기 위해 사전 기자회견을 통해 시민들에게 파업 일정을 알렸다. 그리고 6월 25,26일 시한부 파업에 들어갔다. 노조는 그동안 임금교섭요구를 11번이나 했으나 사측은 단 한 차례도 협상 장소에 나오지 않았다. 그런 것들을 시민들에게 많이 홍보해왔다. 시민들이나 언론들도 사측에 정당한 임금교섭을 요구하며 이틀 시한부 파업을 하고 근무에 복귀하니까 노조를 나쁘게 보지 않은 것이다. 쟁의행의 찬반투표에서 찬성률이 85.3%가 나왔는데도 노동조합이 40년 만의 첫 파업이어서 걱정을 많이 했다. 하지만 걱정은 개인적인 우려였고 조합원들의 호응이 너무 좋았다. 파업 첫날 구사대와 부딪혔을 때도 그동안의 울분이 지도부와 간부들 중심으로 선봉에 서서 차가 나가지 못하게 차바퀴 아래 들어가고, 차 뒤에 드러눕게까지 만들었다. 또한 주차장이 일곱 군데인데 차가 못 드나들게 조합원 승용차로 출입구를 원천봉쇄하고, 심지어 간부조합원은 주차장에 있는 버스 키를 다 빼 와서 노조 사무실에 갖다놓기도 했다. 업무방해로 고소당하기도 했다. 이렇게 조합원들에게 강건한 의지를 행동으로 보여주니까 무전기, 핸드폰, 트위터 등을 통해 관망했던 동료들에게 시시각각 파업투쟁소식이 알려지면서 동참 조합원들이 많이 늘어났다. 사회운동: 민주노조 건설과 40년 만의 파업투쟁을 거치면서 조합원들의 변화가 많을 것 같다. 구체적으로 어떤 변화가 있는지 말씀해주시면 감사하겠다. 나대진: 파업을 통해서 자신감이 붙은 거다. ‘아~ 우리도 뭉쳐서 하면 되는구나’라고 첫 파업을 통해서 배운 것이다. 사측이 ‘파업하면 무노동 무임금이다 회사는 민주노조와 끝까지 교섭하지 않을 것이니 착각하지 말아라’라고 해도 조합원들은 개의치 않고 ‘그래도 우리는 집행부와 함께 간다’며 파업투쟁에 적극적으로 동참했다. 또한 현 집행부는 조합예산의 50%를 교육에 할당할 정도로 집중 편성하고, 교육을 꾸준히 진행했다. 조합원 90%가 솔직히 팔뚝질도 못해봤는데 팔뚝질, 노동가, 우리는 왜 투쟁을 해야 하는가를 교육을 통해서 알게 됐다. 첫 정기대의원 대회 때에는 노동가요를 잘 몰랐다. 임시 대의원대회 때는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고, 국민의례 대신 민중의례로 대신하게 되기도 했다. 나는 ‘버스협의회’라는 노동활동가 단체에서 꾸준히 활동하며 민주노조에 대한 강한 신념을 가지게 되었다. 그곳에서 근로기준법을 학습하면서 ‘우리가 권리를 모르고 노예처럼 살아왔구나’라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노조가 발전해야 지역(운동)이 발전하고, 지역(운동)이 발전해야 지역 주민들이 깨어나서 자본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됐다. 아무튼 나는 지금도 지난 석 달간의 교육이 파업투쟁에 큰 원동력이 되지 않았나 생각한다. 조합원들의 분노에 교육을 더해 길을 열었던 것이다. 나는 조합원들 원동력과 함께할 뿐이다. 법/제도와 삼화고속 투쟁의 의미 사회운동: 세 번의 파업을 통해 삼화고속지회는 7월 10일 사측에게서 성실교섭을 약속하는 ‘노사 기본 합의서’를 받아냈다. 하지만 사측은 ‘복수노조 창구단일화’와 어용세력을 악용해 교섭을 지연시켜왔었는데 그 과정은 어땠나? 나대진: 사측은 공문을 통해서 ‘교섭창구단일화로 교섭에 임할 것이다’라며 교섭을 해태해왔다. 처음에는 노조가 무리한 요구를 한다고 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교섭창구단일화를 들먹이면서 교섭을 해태해 온 것이다. 파업을 통해서 불편을 겪는 시민들에게 압박을 많이 받은 인천시가 나서서 사측에 ‘노조는 정당한 절차를 통해서 요구를 하는데 왜 응하지 않느냐’며 계속 중재를 서고 노동청도 중재를 섰다. 그래서 억지로 회사가 교섭에 나오게 된 것이다. 첫 교섭은 무산됐는데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어용 세력이 회사와 짜고 사측 교섭위원들을 교섭장소 출입구 앞에서 가로막은 것이다. 어용 세력이 교섭장 입구를 막아서고 있으니까 사측은 이게 웬 떡이냐 하고 10분 동안 출입을 시도하는 척하다가 가버리게 된 것이다. 사회운동: 교섭창구단일화’라는 악법에도 불구하고, 전국의 사업장에서 복수노조를 활용해 새롭게 민주노조를 건설하는 흐름이 형성되고 있고, 삼화고속 노동자들의 투쟁이 그 중심에서 많은 주목을 받고 있다. 삼화고속 투쟁은 복수노조 시대의 버스노동자들에게 어떤 의미라고 생각하시는지? 나대진: 이번 파업투쟁은 생존권을 위해 반드시 승리해야 하는 절박한 투쟁이며, 반드시 우리의 요구를 쟁취하여 ‘버스노동자들이 뭉치면 할 수 있다’라는 자신감 회복을 회복하기 위한 투쟁이기도 하다. 그래서 일부 조합원들이 파업 첫날 운행 나갔다가 못 하겠다며 다시 집으로 많이 돌아갔다. 사회운동: 열악한 노동조건 개선과 교통 공공성 확대를 위해 ‘교통제도 개혁’은 중요한 과제라고 생각한다. 버스의 경우 준공영제가 각 지자체에서 시행되고 있는데, 인천에서 시행하고 있는 버스 준공영제에 대한 의견은 어떠한가? 나대진: 버스준공영제의 경우 시민단체가 참석해서 운송원가 조사에 공동으로 참여해 공정성을 보장해야 하는데 인천시는 사용자측하고만 의논해서 운송원가를 결정하고 있는 실정이다. 사측이 자료 제시하면 사측 이야기만 듣고 논의해서 결정하는데 그게 무슨 준공영제냐. 시민단체가 참여를 하고, 노동자도 단체도 참여해서 정확한 운송원가를 책정해서 완전공영제가 되어야 한다. 그래서 우리도 연구소에 준공영제 조사용역을 줘서 8월 31일에 보고서가 나올 예정이다. 참고로 6대 도시에서 인천이 제일 먼저 준공영제를 발의했지만 제일 늦게 시행을 한 도시이기도 하다. 현 교섭국면의 상황과 과제 사회운동: 다시 삼화고속 현장으로 돌아와 보겠다. 현재 사측이 파업관련 고소고발 취하 등 선결조건을 받아들이면서 교섭국면에 접어들었다. 교섭국면에서는 투쟁국면과 달리 조합원들의 긴장감이 이완되어 또 다른 과제가 지도부에게 주어졌을 것이다. 본격적으로 시작한 교섭에서 사측의 분위기는 어떤지, 현재 조합원들의 분위기는 어떤지, 교섭국면을 돌파하기 위한 지도부의 전략은 무엇인지 궁금하다. 나대진: 계속되는 전면파업과 부분파업에 사측은 8월 12일 2차 고소고발취하, 조합비 지급 등 선결조건을 수용하고, 성실교섭에 임하겠다는 합의를 한 상황이다. 하지만 역시 (5차 교섭이 이뤄진 8월 22일) 최근까지도 선결조건에 대해서 조합비 입금을 제외하고 이행을 안 하고 있다. 소정근로시간 축소, 시급인상, 법정 수당 근로기준법 적용 등의 본협상도 쉽지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사측이 교섭하려는 자세를 조금은 보이지만 그것을 100% 다 믿을 수는 없다. 언제든 합의서를 뒤집으려는 것이 자본의 생각이고 속성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계속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있다. 예를 들어 첫 파업투쟁에서 미숙했던 파업물품을 꾸준히 준비하고 있다. 지금도 대나무 만장기 500개, 등벽보 1,500장을 준비하고 있다. 그리고 쟁의기금도 모금하고 있는데 벌써 80% 정도가 동참해서 상당금액을 확보하고 있다. 집행부가 달콤한 말로 조합원을 속이지 않고 약속에 대해서 행동 실천하면서 아직까지 파업 동력이 떨어지지 않았다. 또 현장의 파업 동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조합원 교육을 통해 투쟁방침과 교섭 위반 시 바로 파업에 돌입하겠다는 결의를 하고 있다. 화물연대 파업동영상도 보며 교육도 하고, 하종강 선생님도 초빙하고, 노동가수들을 불러서 노동가요도 계속 배우고 선봉대 교육, 조반장 교육 프로그램을 통해 계속 긴장감을 놓치지 않게 노력하고 있다. 그래서 하루하루가 집행부에게는 긴장의 연속이다. 투쟁하는 노동자들과 나누고 싶은 이야기 사회운동: 삼화고속지회의 민주노조로의 전환과 위력적인 파업투쟁은 침체되어 있던 인천지역 노동자운동에 많은 활력을 불어넣어 주었다. 민주노조를 건설하면서 지회장님이 가장 보람있었던 경험이 무엇이었는지 말씀해주시면 좋겠다. 그리고 투쟁하는 노동자들에게 전하고 싶으신 말씀을 들으면서 인터뷰를 마치려고 한다. 나대진: 이제 갓 나온 햇병아리 지회장이고, 경험도 없어 선배님들 자문 받아가면서 배우고 있는데 민주노조 선배들에게 무슨 말을 하겠나. 투쟁의 현장이야 다 똑같겠지만 어쨌든 세 번 파업의 경험으로, ‘파업은 곧 학습’이다. 그 말만 드리고 싶다. 파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준 조합원들에게 정말 너무 고맙게 생각한다. 이 파업 최고의 결과물은 조합원들이 자신감을 가지고 있다는 것, ‘우리가 민주노조로 뭉치면 뭐든 해낼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게 최고의 결과물이라고 생각한다. 그동안 어용노조만을 겪다가 ‘이런 것이 민주적인 노동조합이구나, 노동조합의 권력은 우리 현장 조합원들한테 있구나’라고 알아가는 것. 그것이 제일 큰 성과라고 본다. 좀 일찍 장가를 가서 큰 애가 30살, 작은 애가 26살, 막내가 22살이다. 파업과정이 언론에 보도되면서 파업 중에 아내로부터 문자가 온 적이 있다. 힘내라고. TV 인터뷰를 봤나 보다. 그리고 애들이 아버지가 그렇게 힘들게 일하는지 몰랐고 아버지가 자랑스럽다고 문자가 왔다. 문자를 보고 순간적으로 가슴 뭉클해지며 피곤이 싹 가시더라. 정말 힘이 많이 됐다. 조합원들도 나에게 힘을 주고, 희망을 줬지만 가족들이 ‘아, 나를 이렇게까지 생각하고 있었구나’, 51세 됐지만 처음으로…… 뭐라 표현은 못 하겠다. ‘아, 내가 올바른 삶을 살고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아내가 바가지만 긁고, 돈만 밝히는 줄 알았는데, 자식들한테는 미안하다고만 생각했는데 무형의 재산을 남겨주고 간다는 자부심과 긍지를 느꼈다. ※ 바쁜 와중에도 성심성의껏 인터뷰에 응해주신 나대진 지회장님 그리고 삼화고속지회 동지들에게 다시 한번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울산노동뉴스 이종호 편집국장 초청, 노동자운동연구소 3차 월례 워크숍 워크숍의 취지 노동자의 도시 울산에서 벌어지는 일은 언제나 노동운동에 초미의 관심사가 되곤 했다. 민주노조 운동이 폭발한 87년 노동자 대투쟁에서부터, 노동법 개악 이후 정리해고 문제가 본격적으로 제기된 98년 현대차 점거 파업, 그리고 작년 말 불법 파견 문제를 전국적 쟁점으로 다시 만들어낸 현대차 비정규직 지회의 1공장 점거 파업까지 당대의 핵심 노동 의제들이 울산에서 투쟁으로 만들어졌다. 하지만 동시에 울산의 노동운동은 한국 민주노조 운동의 가장 곤란한 문제들이 공존하고 있기도 하다. 울산에서는 실리주의 노동운동, 비정규직과 연대하지 못하는 정규직 운동 등 98년 이후 본격화 된 민주노조 운동의 핵심 문제점들이 가장 첨예하게 나타나고 있다. 노동자운동연구소에서는 경주 노동운동, 구미 노동운동에 이어 5월 27일 3번째 워크숍으로 울산 노동운동의 현황과 쟁점을 살펴보았다. 발표는 1988년부터 현재까지 울산 지역에서 노동운동을 하고 있는 울산노동뉴스 편집국장 이종호 동지가 해주었다. 울산 노동운동 역사 이종호 동지가 울산에 내려간 것은 1988년 5월이었다고 한다. 당시 울산은 이미 전국의 수많은 활동가들이 공장과 지역사회단체에서 들어가 있었다. 심지어 교수도 노동 문제 조사를 위해 위장취업을 하던 분위기였다고 한다. 울산 민주노조 운동은 1987년 7월 5일 현대엔진에서 노동조합 설립과 이후 6만이 넘는 노동자들이 거리로 몰려나오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현대중공업, 현대자동차, 풍산금속 등에서는 어용노조를 급조하여 민주노조 설립을 막았지만 어용노조퇴진과 민주노조설립을 위한 투쟁으로 이를 돌파해내었다. 하지만 경험이 부족한 신규 노조가 자본의 탄압과 회유를 극복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대부분의 사업장에서는 1988-1989년 노민추 등의 조직을 통해 노조 민주화 투쟁을 벌였다. 1988년 6월 현대차 이상범 집행위 불신임 투표나 1988년 임투에서 위원장의 직권조인을 불인정하며 파업지도부를 중심으로 128일간 진행된 현대중 파업투쟁이 대표적이었다. 이종호 동지는 이 부분에서 현장 활동가 조직의 역할에 대해 강조했다. 당시 현장 활동가 조직은 현재와 같은 선거 조직이 아니라 현장 대중투쟁조직이었다는 것이다. 87년 투쟁 이후 선출된 노조가 민주노조 역할을 하지 못함에 따라 현장 활동가 조직들이 파업지도부를 꾸려 공식 지도부를 무력화하거나, 노민추를 꾸려 현장을 장악해나갔다. 일종의 현장의 이중 권력 상태가 88년부터 이어졌다는 것이다. “1988-1989년 현대중공업 128일 파업지도부, 1991년 현대자동차연합투쟁위원회(현연투), 1995년 현대차 양봉수동지 분신공동대책위원회(분신공대위) 등이 바로 대표적인 현장대중투쟁조직들이다. 1988-1989년 현대중공업 128일 파업투쟁 당시 파업지도부는 어용 집행부에 맞서 부단히 현장의 이중권력을 만들어내면서 투쟁하는 대중들의 목소리와 의지를 직접 반영하고 그 지도력을 즉각적으로 검증받았던 명실상부한 아래로부터의 대중투쟁기관이었다. 1991년 현연투는 노민추, 구속해고동지회(구해동), 공동소위원회(공소위), 민주연합대의원회(민대), 풍물패연합 등 당시 현대자동차 민주세력이 총결집하여 만들어졌다. 현연투는 1991년 5월 투쟁에서 노동조합을 제낀 채 연일 4,000-5,000명의 조합원들을 직접 이끌고 공장 안 대규모 집회와 시내 거리행진을 감행한 후 격렬한 반민자당·반노태우정권 거리투쟁을 벌여냈다. 1995년 현대자동차 양봉수 동지 분신투쟁 당시 현장활동가들이 사업부별로 즉각 투쟁대오를 꾸리고 전공장에 걸쳐 분신공대위를 결성함으로써 노동조합과는 무관하게 바로 파업투쟁을 벌였던 것도 노동조합을 뛰어넘는 대중투쟁의 한 전형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이런 현장대중투쟁조직과 노동자들의 분출하는 투쟁을 바탕으로 1990년대 초 내내 울산에서는 쉬지 않고 투쟁이 펼쳐진다. 1990년 4월 25일 현대중공업에서 골리앗 투쟁이 펼쳐지고 28일에 현대차 노동자들은 정권의 미포만 작전(경찰과 군인 1만 5천 명이 미포만에서 육해공으로 골리앗을 진압하려 했던 작전)을 지연시키기 위해 수천여 명이 가두 투쟁을 진행했고, 마창노련의 동맹파업을 시작으로 전노협은 5월 총파업을 조직했다. 그리고 이런 분위기 속에서 한국노총 사업장들마저 임금 인상을 내걸고 투쟁에 돌입하기 시작했다. 현대중공업에서 시작된 투쟁이 정치 투쟁으로 발전해 나갔다. 1991년 현연투는 대중투쟁을 통해 그해 9월 3대 노조 선거에서 이현구 집행부를 탄생시켰다, 하지만 이현구 집행부는 출범과 동시에 3중고에 부딪히게 되는데, 집행경험은 없는 상태에서, 조합원들의 기대는 매우 컸고, 자본은 청와대까지 나서 집행부를 압박해왔다. 3대 집행부는 1991년 말 성과급 투쟁을 벌이며 자본과 정면으로 부딪혔다. 공장점거까지 시도했지만 다음해 1월 21일 공권력과 대치 중 퇴각하게 되고 이후 500여 명이 구속 수배 징계되며 노조 집행부가 사실상 와해되었다. 사측은 대의원회의실까지 폐쇄했다. 하지만 현장 활동가들은 부산대에 수배자들을 중심으로 장외 집행부를 꾸리며 조직을 정비했고, 1992년 8월 4대 윤성근 집행부를 출범시켰다. 4대 집행부는 김영삼 정권의 긴급조정권을 돌파하지 못하고 임투를 마무리하며 집행부를 내려와야 했다. 93년 5대 임원선거에서는 최초로 민주노조 진영이 정갑득과 김강희 후보 진영으로 나뉘어졌으며, 그 결과 이영복 어용 집행부가 들어섰다. 1991년 대량 구속 수배 사태 이후 1992년부터 93년까지는 현대차와 현대중공업 모두 지리한 노조 정상화 작업이 펼쳐지던 시기다. 노조 정상화 과정과 이후 투쟁방향을 둘러싸고 논쟁하며 현재와 비슷한 형태의 현장 정파가 탄생했다. 이영복 집행부는 현장조직에 대해 갖가지 탄압을 벌였고, 현장조직들은 ‘노동자의 길’(노길)을 창간해 상호 소통했다. 95년 이영복 집행부가 재선에 성공하며 현장탄압이 더욱 거세졌고, 그 와중에 양봉수 열사가 분신으로 이에 항의하는 투쟁이 펼쳐졌다. 침체되어 있던 현장활동가들은 6월 대책위를 조직하고 비공인 파업을 벌이기 시작했다. 이러한 투쟁의 성과로 8월 ‘현대자동차 민주노동자 투쟁위원회’(민투위)를 결성함으로써 오랜 공백을 뚫고 현장민주조직을 재건했다. 그리고 그 해 6대 집행부 선거에서 정갑득 집행부를 출범시키게 된다. 하지만 민투위는 이후 여러 계기를 거치며 계속 분화했다. 96-97년 총파업은 한국 노동운동에서 역사적인 투쟁이었으며, 울산 노동운동에도 그러했다. 울산지역 민주노총 사업장의 파업 참가율은 거의 100%에 육박했었다. 이종호 동지는 96-97년 총파업이 보여주었던 노동자 정치의 가능성을 높게 평가했다. 하지만 동시에 그것이 대선 정치로 수렴된 문제점을 놓치지 않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87년 노동자 대투쟁이 ‘인간선언’이었다면 96-97년 총파업투쟁은 한국 노동자계급의 ‘정치선언’이었다. 민주노총은 이 투쟁으로 합법화를 뛰어넘는 지위를 얻어냈고 한국 노동조합운동의 대표성을 인정받았다. 총파업투쟁으로 한국노총 산하 노동조합들의 한국노총 탈퇴와 민주노총 가입이 늘어났으며 이름만 있고 활동이 없던 ‘휴면노조’들이 상당수 정상화됐다. 미조직 노동자들 또한 이 투쟁으로 노동조합 결성의 필요성을 자각하기 시작했고 자신감을 갖게 됐다. 뿐만 아니라 한국 민주노조운동은 세계 노동자들에게 자본과 정권의 신자유주의 공세에 대한 투쟁의 가능성과 희망을 보여줬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투쟁으로 민주노총을 중심으로 한 노동자계급이 국민들 사이에서 새로운 사회세력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96-97년 총파업투쟁은 1953년 한국전쟁 종전 이후 최초의 정치총파업이었고 노동자정치, 총파업정치의 힘과 가능성을 보여준 투쟁이었다. “1990년의 정치적 총파업이 노동운동탄압분쇄, 전노협 사수를 위한 방어적 투쟁이었다면 1996-97년 정치총파업은 노동법 개악과 재개정을 둘러싼 공세적 투쟁이었다. 1991년 5월 투쟁에서 거리정치와 현장정치가 분리됐고 거리정치를 현장정치로 전환하는 데 실패했다면, 1996-97년 총파업은 이 둘을 역동적으로 통일시켰다. 하지만 이러한 성과는 노동자 정치가 아니라 1997년 대선 정치로 수렴되는 비극으로 끝나버렸다.” 이렇게 투쟁이 끝나버린 후과는 1998년 대규모 정리해고로 이어졌다. 현대중공업은 1991년 이후 계속 무쟁의 상태였고, 결국 현대차에서 대규모 정리해고에 맞선 투쟁이 7월에 펼쳐졌다. 1997년 7대 집행부 선거 준비 과정에서 정갑득 전 집행부 측이 실노회를 결성해 나간 상태에서 선거가 치뤄졌으나 민투위가 승리하고 김광식 집행부가 출범했다. 김광식 집행부는 36일 간 점거파업을 이어갔지만 결국 정리해고를 받아들이며 파업을 종료시켰다. 5천 명 이상의 조합원들이 결사 항쟁 분위기를 이어갔고, 경찰 병력도 진입을 쉽사리 결정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에서 집행부가 정리해고를 받아들인 것이다. 한편 당시 무급 휴직자가 대규모로 발생했는데, 이들 중 장사하다 파산한 경우도 많았다. 그리고 이들이 복직된 이후 정리해고에 대한 두려움을 바탕으로 보수화되는 경우가 많았다. 1997년부터 1998년 정리해고 투쟁 이후까지 민투위는 계속 분화했다. 1997년 선거 준비 과정에서 정갑득 전 집행부 진영이 실노회를 꾸렸고, 1998년 점거 파업 평가를 둘러싼 논쟁에서 김광식 집행부 진영이 미래회를 꾸렸다. 이후 박유기 등도 이탈하며 현재 형태의 현장조직 구도가 만들어졌다. 이러한 현장 조직들은 이른바 정파 갈등을 일으키기도 했지만 현장조직 간 경쟁으로 현장 활력의 한 요소로 작용하기도 했다. 2001년 초에는 울산에서 처음으로 조직된 사내하청 노조인 INP중공업 사내하청 노조 투쟁이 벌어졌다. 노조 설립 후 노조 간부에 대한 탄압 및 조합원에 대한 대규모 계약해지가 이어졌고, 현장조직대표자회의, 지역사회단체 등이 연대 투쟁을 지속했다. 그리고 곧이어 효성, 고합, 태광 화섬 3사 투쟁이 진행되었다. 효성에서 시작된 투쟁은 대규모 용역깡패와 공권력 투입 이후 6월 12일 지역 화섬 공동 투쟁으로 발전했다. 한편 현대차 이상욱 집행부는 7월 총파업을 약속했지만 결국 지키지 못했다. 2003년 3월에는 현대차 근골격계 투쟁이 진행되었는데, 현장조직이 집행부 선거 외에 오래간만에 대중적 사업을 전개한 투쟁이었다. 민투위 간부들이 대우조선에서 교육받은 내용을 토대로 진행한 이 투쟁은 현장 교육, 현장 선전 작업을 현장조직이 직접 진행하였으며, 부산에서 의사를 모셔와 직접 현장 검진을 하기도 했었다. 이후 집단 요양 투쟁과 3명이 구속된 근로복지공단 점거 투쟁으로 이어지며 산재 인정을 받아내었다. 같은 해에는 비투위가 구성되어 현대차 사내하청 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도 했다. 비투위는 내부에서 1사1조직 형태로 갈 것인지 아니면 독자노조를 유지할 것인지를 두고 내부 논쟁이 있기도 했다. 당시 대의원대회에서 정규직 대의원들이 비정규직 조직에 대한 이해가 별로 없어 역설적으로 1사1조직이 통과될 수도 있었는데, 비투위 내부 결정으로 결국 그렇게 되지 못했다. 이종호 동지는 이 대목에서 몇 가지 의견을 피력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당시 1사1조직하고, 비투위는 현장대중조직으로 남았어야 했다는 것이다. 비투위는 오히려 공동소위원회연합(공소위)을 참조해 볼 수 있지 않았겠느냐는 것이다. “공소위는 규약상 노동조합 공식체계에 포함되어 있기는 하지만 노동조합의 공식 의사결정과정에서 아무런 권리와 의무를 행사할 수 없고 집행에서의 권한 또한 없다. 그래서 실제 공소위는 스스로 부서별, 사업부별, 전공장 체계를 꾸리고 출범식도 독자적으로 해왔다. 노동조합의 맨 밑바닥에 있으면서 동시에 노동조합 바깥에 있는 셈이다. 공소위는 주요 시기에 자신의 입장을 대중적으로 표명하여 현장 여론을 형성하기도 하고 대의원회와 대립하여 소위원회 독자적 목소리를 내기도 한다. 소위원회는 활동가를 발굴하고 훈련하는 풀이고, 많은 현장활동가들이 소위원회를 통해 활동에 입문해왔다. 공소위는 노동조합 대의원체계와는 달리 현장 대중들로부터 자신들의 일부로 인식되고 그만큼 소위원과 대중의 관계는 직접적이다. 소위원이 현장 대중들 안에서 투표를 통해 선출되고 있지는 않지만 전공장 공소위는 노동조합의 다른 체계들과는 달리 현장의 직접성을 담보로 커다란 대중적 힘을 행사할 수 있다.” 울산에서는 이후 2006년 울산과학대 투쟁을 지역연대투쟁을 통해 승리로 이끌며 오래간만에 지역에서 승리 분위기를 만들었고, 2008-2009년 미포조선 용인기업 투쟁을 거치며 울산 민주노조 운동 진영의 무너진 연대를 복원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이후 울산 노동운동의 과제 이종호 동지는 울산노동운동 역사를 반추하며 현재 생각해봐야 할 화두 중 하나로 ‘과소비-과노동 체제’ 를 지적했다. 소비 수준을 맞추기 위해 초장시간 노동을 감내하고 살아가는 울산 노동자들의 의식 변화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과소비와 과노동의 악순환을 끊어내지 않고서는 현재 울산 노동자들이 변화할 계기를 찾기 힘들다고 진단했다. 노동자운동의 과제에 대한 이종호 동지의 말로 결론을 대신하고자 한다. “심야노동 철폐와 주간연속2교대제 쟁취를 넘어 주35시간으로 노동시간을 더 단축시켜야 한다. 시간급제를 없애고 월급제를 정착시켜야 한다. 비정규직과의 차별을 줄이는 데서 더 나아가 비정규직 없는 공장, 비정규직 없는 사무실을 만들어야 한다. 노동운동의 사회적 확장과 재구성을 위해 지역사회운동과의 연대와 소통을 강화해야 한다. 퇴직 이후의 삶을 집단적으로 준비해야 한다. 젊은 활동가들을 키워내야 한다. 대공장 정규직 남성 노동자의 시각에서 벗어나 비정규직 여성 노동자의 처지에서 세상을 바라볼 때 노동운동의 미래를 제대로 설계할 수 있다. 최저임금도 못 받고 일을 해야 하는 청소년 아르바이트 노동자의 처지에서 미래를 바라볼 때 자기 세대와 자식 세대를 위해 노동운동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가 분명해진다. 정규직 노동자들이 비정규직 노동자의 고통을 외면하고 자신의 현재의 이익만을 좇아갈 때 자식 세대는 점점 더 비정규직으로 내몰리게 된다. 내 자식만은 비정규직 노동자로 만들지 않으려고 휴일도 없이 밤샘 노동해 번 돈을 사교육비로 쏟아붓는 ‘악순환’은 이제 그만둬야 한다. 1987년 우리는 한낱 기계의 부속품이기를 거부하고 인간임을 선언했다. 자본의 노예가 아니라 역사와 사회의 주인임을 자각했고, 1996-97년 우리 노동자가 정치의 주체임을 역사에 알렸다. ‘노동해방’과 ‘인간해방’은 빛바랜 깃발이 아니라 여전히 우리 노동자들의 가슴 속에 살아 숨 쉬고 있다. 자본주의를 넘어 우리 노동자의 힘으로 새로운 세상을 건설해가고자 하는 꿈은 자본주의가 노동자·민중의 삶을 옥죄면 옥죌수록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의 가슴 속에서 커져갈 것이다. 여럿이 꾸는 꿈은 현실이 되고, 함께 걷는 걸음 하나하나가 뒷 사람의 길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