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공운수노조 사회보험지부 경인지회 권영규 정책부장 인터뷰 권영규 | 공공운수노조 사회보험지부 경인지회 정책부장 인터뷰어, 정리: 공성식 | 노동자운동연구소 연구원 공공운수노조 사회보험지부 경인지회 정책부장이자 현장조직인 현장노동자회 의장을 맡고 계신 권영규 동지를 만나 2011년 임·단협 투쟁의 현황과 사회보험지부의 상황을 함께 진단해 보고, 사회보험지부를 비롯하여 공공부문 노동자운동의 혁신의 방향에 대한 생각을 들어 보았다. 사회운동: 먼저 본인 소개를 부탁드린다. 권영규 사회보험지부 경인지회 정책부장(이하 권영규): 건강보험공단 경기도 광주지사에서 일하고 있고 노조에서는 사회보험지부 경인지회 정책부장을 맡고 있다. 사회보험지부 내 현장조직인 현장노동자회의 의장이기도 하다. 90년에 입사했고 첫 발령지는 서울 관악지사였다. 그곳에서 계속 일하며 노동조합 활동도 하였고 99년에는 서울본부 사무국장으로 활동을 했다. 2005년 공단이 114명을 부당 원거리 전보를 내렸고 나도 포함되었다. 평소 공단의 정책에 대해 불만이 많다는 것이 사유였다. 누가 봐도 말이 안 되는 전보 사유가 많았다. 상급자에게 인사를 안 했다고 전보를 받은 사람도 있었다. 나중에 지노위에서 어떤 지노위원이 사측 노무사에게 건강보험공단 수준이 이거 밖에 안 되냐며 뭐라 했을 정도였다. 원거리 전보는 사보와 같은 전국 사업장에서 노동조합 활동을 탄압하기 위해 사측이 활용하는 주요한 무기이기도 하다. 노동조합 지침에 따라 114명은 원거리 전보를 거부하고 지명파업에 들어갔고 사측은 전보 거부를 사유로 114명을 해고했다. 이후 파업 등 투쟁이 계속되었으나 조합에서 사측과 재심의를 거쳐 복귀하는 것으로 합의했다. 재심의에 서면으로 진술서를 내야 했는데 나를 포함하여 일부는 이를 거부했다. 조합은 지침을 따르지 않았다며 희생자로 인정하지도 않았다. 노사합의 내용이 순차적으로 생활권으로 다시 복귀시킨다는 거였는데 나는 1년 정도 가 있다가 이후 안양, 성남 등 조금씩 생활권으로 다시 들어오게 되어 지금 근무처인 광주로 온 지 1년 정도 지났다. 나는 그래도 비교적 잘 풀린 경우이고 2년도 넘게 원거리에 나가 있던 사람들도 있다. 최근에도 사측은 원거리 전보를 무기로 쓰고 있다. 노사협의회에서 전보 원칙을 합의하기도 하는데 그나마 경인지회는 노사협의회에서 전보가 가능한 지역을 정해서 생활권 전보가 이루어지도록 하고 있다. 직장노조와의 힘있는 공동투쟁으로 연봉제를 저지하고 실질임금 인상 쟁취해야 한다 사회운동: 2011년 임금투쟁의 주요 이슈가 연봉제 도입 저지인 것으로 알고 있다. 2011년 임금투쟁의 주요 이슈와 요구안은 무엇인가? 권영규: 연봉제 도입을 저지하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 사측은 3급 이상에 대해 연봉제를 요구하고 있다. 또한 임금이 4년째 동결되었다. 실질임금이 엄청나게 하락한 셈이다. 따라서 물가 인상 수준을 뛰어 넘는 실질임금 인상이 필요하다. 또한 임금격차 축소와 동일직종 동일임금도 중요한 과제다. 임금이 동결되는 와중에 1급이나 2급[주: 3급까지 조합원 자격이 있음]의 임금은 오히려 올라서 임금격차가 커졌다. 최근 신입사원의 경우 삭감된 임금을 받고 있는데 이를 원상 복귀시켜야 한다. 징수업무 통합에 따라 연금에서 넘어 온 조합원과 원래 사회보험 조합원들과도 임금의 차이가 있다. 연금 쪽에서 넘어 온 조합원들이 조금 높은데 연금 수준으로 임금을 맞춰야 한다. 올해 임금투쟁에서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가 한국노총 소속인 직장노조와의 공동투쟁이다. 직장노조는 작년에 단체협약을 체결해서 올해는 임금협상밖에 없다. 연봉제를 막아 내고 임금 투쟁을 힘 있게 하기 위해서는 직장노조와의 공동투쟁이 중요하다. 수도권의 여러 지회와 많은 조합원들이 직장노조와의 공동투쟁의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끼고 있고 공동투쟁을 요구하고 있다. 그런데 오히려 지도부가 공동투쟁에 소극적이다. 그동안 공동투쟁을 해 본 경험도 없고 상호간에 갈등만 계속되다보니 불신이 크다. 현장노동자회는 공동투쟁본부를 구성해서 힘 있게 공동투쟁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지부 집행부는 이를 아직까지는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사회운동: 지난 6월 총회 이후 밖에서 볼 때는 별 다른 투쟁 흐름이 없어 보인다. 8월 말 9월 초부터 부분 파업을 들어간다는 이야기도 있던데. 앞으로의 지부 투쟁 계획은 무엇이고 현장 분위기는 어떠한가? 권영규: 6월 총회 때 분위기가 매우 좋았다. 94%라는 역대 최고의 파업 찬성율을 보였다. 당시 총회 시기가 납부 기간이었는데 사측은 납부 기간에 총회를 한다며 총회 방해를 했지만 조합원들은 이러한 탄압을 뚫고 총회를 성사시켰다. 그런데 이후 지도부가 투쟁의 흐름을 상승시키지 못하고 투쟁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사측이 총회참석자에 대해 보복을 하겠다고 했는데 이에 대한 현장투쟁을 조직하지 않고 법적으로 싸우겠다며 투쟁을 회피했다. 7-8월 투쟁계획에 “하계 휴가기간” 여섯 글자 밖에 없더라. 지도부가 9월 17일에 이사장이 갈리기 때문에 신임 이사장에 관심을 두고 있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지도부가 투쟁을 조직하지 않으면서 현장 분위기도 조금씩 소강상태에 빠졌다. 그러다 최근 갑자기 지명 파업을 하겠다고 한다. 투쟁을 하겠다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좀 답답하다. 분위기를 만들고 투쟁 수위를 높여 나가야 하는데 아무것도 안 하다가 갑자기 지명파업을 한다고 하니 현장에서 당혹스러워 한다. 지금 지부 지도부는 뭐라고 해야 하나 하여튼 답답하다. 사회운동: 12월 11일에 단체협약이 만료되고 연금 등의 사례를 봤을 때 사측에서 강도 높은 단협 개악안을 들고 나오면서 무단협 상태로 몰고 가며 연봉제 도입 등을 협박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임투가 늦어지면서 임투와 단협투쟁이 겹치게 되면 상당히 힘겨운 싸움이 예상된다. 권영규: 직장노조는 올해 단협이 없어서 단협에 들어가면 전선이 더욱 교란될 수도 있다. 그래서 단협 갱신 압박에 시달리기 전에 투쟁의 수위를 높여서 연봉제 저지를 분명히 해야 한다. 그런데 지부 집행부는 벌써부터 내년 이야기를 하고 있다. 내년 총선에 투쟁을 집중시키겠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그러면 안 된다. 이번 지명파업을 계기로 투쟁 수위를 계속 높여 가야 한다. 사보조합원들은 지도부가 결의하면 언제라도 파업에 들어 갈 수 있는 저력을 여전히 가지고 있다. 사회운동: 지난 7월 요양직 노동자가 장기요양신청 가정을 방문했다가 스패너로 폭행을 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요양직 노동자들을 비롯한 건강보험공단 노동자들의 노동강도와 인력부족 문제가 심각한 수준인 것 같다. 권영규: 인력 부족 문제가 정말 심각하다. 요양 쪽 인력 부족 문제도 심각하고 올해 통합된 징수 부문도 인력이 부족해서 노동강도가 더 심해질 것 같다.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2000년 공단 출범 이후 일은 계속 늘어나는데 인력은 오히려 줄어들었다. 얼마나 인력이 부족하고 노동강도가 어느 정도로 심각한지 노동조합에서 연구사업을 해서 보다 객관적인 자료를 마련하면 좋을 것 같다. 사회운동: 노동강도가 강화는 인력 부족 문제 때문이기도 하지만 공단이 경영 효율화, 선진화라는 명분으로 근태관리, 실적관리 등 각종 통제를 강화하고 개별 성과급을 도입하여 노동자들 사이의 경쟁을 유도하는 등 노동통제와 상호 경쟁 유도의 결과이기도 할 것이다. 공단의 노동 통제 실태와 이것이 현장에 미치는 영향은 어떠한가? 권영규: ERP(Enterprise Resources Planning, 전사적 자원관리)가 도입되면서 우리 업무의 일거수 일투족이 수치화되어 관리되고 통제받고 있다. 징수 업무의 경우 누가 하루 몇 건 처리했는지 다 자료로 남고 서로 비교가 된다. 개인 뿐 아니라 팀별 실적 목표와 요구는 자연스럽게 실적 저하에 책임있는 노동자들이 소외되는 상황을 만든다. 또 지사별 평가를 통해 성과급을 연계하여 개인별, 팀별, 지사별 경쟁을 유도하고 있다. 성과급의 경우 아직 사회보험은 균등분배의 전통이 지켜지고 있기는 하다. 성과급이 나오면 중간 등급을 기준으로 균등하게 나눈다. 아직 과거의 공동체성이 남아 있는 부분이다. 사회운동: 인력부족, 노동강도 강화 등으로 조합원의 피로도와 불만이 엄청나게 쌓여 있을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보험지부는 과거 1980-1990년대와 같은 투쟁력은 보이지 못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공공부문의 신자유주의 개혁의 결과 조합원들이 보수화되고 단체행동에 대한 피로도가 높고 노조를 중심으로 한 투쟁에 대해 별로 신뢰하지 않고 개별적으로 살아남으려는 성향이 강해졌다고 분석하고 있다. 현장에서 보시기에 이러한 진단이 타당하다고 보시는가? 권영규: 물론 과거에 비해 조합원들이 노동조합 활동에 대한 관심과 열의가 떨어진 것은 사실이다. 업무도 많고 사측의 노동통제 때문이기도 하고 그 동안 노동조합에서 투쟁을 제대로 하지 못한 탓이기도 하다. 노조 사이트의 경우 과거에 이슈가 되는 게시물의 경우 조회수가 5-6천 건이나 되었는데 지금은 1천 건도 안 된다. 일이 바쁘다보니 노조 사이트에 들어가기가 쉽지가 않다. 조합원들이 나이가 들기도 했다.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89년, 90년 입사자들이 지금 40대 후반에서 50대 초반이다. 10년 후면 대부분 퇴직한다. 나이가 들다 보니 아무래도 보수화되는 경향도 있다. 하지만 나는 우리 사보 조합원들은 여전히 노동조합을 중심으로 투쟁할 각오가 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89년, 90년 공채로 입사하여 아무런 ‘빽’도 없는 상태에서 오직 옆에 동지만이 나의 ‘빽’이라는 생각들을 여전히 가지고 있다. 이런저런 투쟁을 겪으면서 같이 살아 왔는데 이제 와서 조합을 등지는 것은 동지를 배신하는 것이라 다들 생각한다. 성과급 균등분배 처럼 여전히 공동체성이 남아 있기도 하다. 조합원들은 지도부가 분명하게 결의하고 이끌면 언제라도 파업에 들어갈 각오가 되어 있다. 사회운동: 2000년대 이후 입사한 조합원들은 어떤가. 초창기 입사자들과 차이가 클 것 같다. 권영규: 최근 입사한 조합원들과 이야기를 해 보면 자신의 노동조건에 대한 불만을 노동조합을 통해서 풀려고 하는 것이 약하다. 지난 선거 때 지방에서 요양보험 업무를 하는 한 젊은 조합원을 만났었다. 출장을 많이 다니는데 지금 나오는 출장비로는 기름값도 안 나온다고 해서 요구사항이 뭐냐고 물었더니 경차를 사달라고 하더라. 업무에 문제가 있으면 인력을 충원한다거나 현장을 바꿔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못하고 회사에 내 업무를 위해 이러이러한 것을 지원해달라고 생각한다. 아무래도 지금 한국 사회가 취업이 워낙 어렵다보니 더 회사에 의존하는 경향이 크고 세대적 특성 때문인지 개별적인 욕구가 크고 개인주의도 강하다. 업무가 분할되어 있다보니 다른 업무를 하는 사람들의 고충을 잘 모르기도 한다. 학생운동 경험도 없고 그러다보니 노동조합 활동에 익숙하지 않다. 또한 사측에서도 치밀하게 노동조합에 가입하지 못하도록 작업을 한다. 그래도 끊임없이 신규 입사자를 계속 만나고 챙기면서 노력을 하고는 있다. 젊은 세대들이 한번 큰 투쟁을 통해서 노동조합 활동을 경험해야 변할 수 있을 것 같다. 지난 10년의 실리주의, 협조주의는 공공부문의 신자유주의 개혁을 막아내는데 실패했다 사회운동: 지부나 공공노조, 공공운수노조가 조합원의 저력을 모아 내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겠는데, 2000년 이후 사회보험지부(노조)를 평가한다면 어떤가? 권영규: 2000년 84일 파업 투쟁 이후 노동조합 내에서 투쟁파가 고립되었고 실리주의, 협조주의가 득세하기 시작했다. 이후 대부분의 선거에서 이러한 방향을 내세운 사람들이 당선되었다. 하지만 지난 10년의 실리주의, 협조주의의 결과가 무엇인가. 결국 인력감축, 상시적 구조조정, 노동통제 강화로 이어졌을 뿐이다. 노무현 정부가 들어서면서 노무현 정부와 민변 출신의 이성재 이사장이 노동조합에 우호적인 정책을 가지고 있다고 판단한 당시 집행부는 공단 이사장과 협조관계를 유지하면서 업무영역을 확대하여 구조조정을 막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 결과 업무가 확대되었지만 인력 충원은 없었고 결국 노동강도만 강화되는 꼴이 되었다. 그 사이에 민변 출신 이사장은 각종 신경영기법을 도입하여 노동통제를 강화해 나가고 노동조합의 활동을 위축시키는 단협 개악을 시도했다. 인력 충원이 기본 전제가 되고 그 다음에 필요한 업무를 확대해야 하는데 거꾸로 접근한 것이다. 지도부는 조합원과 함께 투쟁하려고 하지 않고 정부와 정치권을 상대로 우호적인 정책을 통과시키기 위해 로비하는데 바빴다. 로비로 노동자의 권리를 지켜 낼 수는 없다. 이게 가능하다면 돈 모아서 실력 있는 의원에게 몰아주면 되지 노동자들에게 노동조합이 왜 필요하겠는가. 그게 안 되니까 노동조합이 필요하고 투쟁을 해야 하는 것이다. 사회운동: 2012년 총대선을 앞두고 '건강보험 하나로' 운동을 비롯하여 건강보험 개혁에 대한 요구를 여기저기서 많이 하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듣고 싶다. 권영규: '하나로'는 문제가 심각하다. '하나로'는 결국 노동자가 의료보험비를 더 내고 이를 가지고 정부를 설득해서 국가 지원도 늘려서 건강보험 보장성을 더욱 확대하자는 것이다. 노동자가 돈을 더 내서 구걸하자는 꼴인데 그런다고 정부가 국가 지원을 늘리겠는가. 만약 의료보험비가 인상되면 민원이 엄청나게 빗발칠 것이다. 그런데 '하나로'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사회보험노동자들의 인력부족 문제는 언급하지도 않는다. '하나로'는 노동자의 구체적인 상황에는 관심이 없는 탁상공론이며 반계급적 정책이다. 건강보험은 국가가 책임진다는 원칙이 중요하다. 노인장기요양보험 같은 경우도 국가의 책임을 더 높여야 한다. 노인 요양은 인권의 차원에서 접근해서 무조건 국가가 책임지고 요양기관도 국가가 직접 운영해야 한다. 예방적 차원에서 4-50대의 건강관리에 집중할 필요도 있다. 4-50대가 쓰러지면 가정이 파탄난다. 이들 세대의 건강을 체계적으로 관리하는 것이 전체 사회적 비용을 줄이는 길이다. 병원의 영리적 행위에 대해 통제를 제대로 해야 하는데 지금 잘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병원의 의료비 청구를 심사하고 평가하는 기능은 건강보험공단이 아니라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이 가지고 있다. 공단은 자판기 역할만 하고 있다. 여타의 보험사와 달리 보험자로서 지출에 대한 평가 기능이 없다. 병원이나 약국의 부당한 의료비 청구나 부당한 진료를 막기 위해서는 이러한 평가 기능이 잘 되어야 하는데 지금 잘 안 되고 있고 대안 모색이 필요하다. 사회운동: '하나로'와 같은 정책 대안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사람들은 정부의 탄압과 구조조정의 공세가 심각하고 현장의 조직력과 투쟁력이 약화된 상황에서 노동조합에 우호적인 제도를 만들고 우호적인 여론을 형성해야 조합원들이 투쟁에 나설 수 있지 않겠는가라고 이야기한다. 사회보험의 경우 2000년 이후 몇 번 투쟁을 중시하는 집행부가 등장하기도 했지만 실제 의미 있는 투쟁을 조직하지는 못하고 중도하차하곤 했다. 현장을 중심으로 노동조합과 투쟁을 복원해야 한다는 원칙이 힘을 얻으려면 구체적인 대안과 실천계획이 필요한 것 같다. 권영규: 2000년 84일 파업 이후 선거에서 현장노동자회가 추천한 후보가 당선되었었다. 당시 지도부의 활동에 대해서는 보다 냉정하게 평가되고 현장노동자회도 반성할 부분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선거에서는 승리했지만 당시에는 이미 투쟁파가 고립되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지역본부 등이 지도부의 뜻에 맞게 움직여주지 않았다. 그러다보니 투쟁을 조직하는데 많은 어려움을 겪었었다. 2004년-2005년 집행부는 투쟁을 표방하고 당선되기는 했지만 실제로는 투쟁을 하지 않았다. 당선 되고 얼마 지나서 바로 투쟁을 포기했고 관료화된 모습을 보이며 현장의 목소리를 들으려 하지 않았다. 이 집행부를 투쟁파 집행부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대안을 물어 보았다. 단순한 것이 진리일 수 있다. 2000년 이후 노동조건이 계속 후퇴하면서 조합원들의 불만은 엄청나게 쌓여 있다. 지도부가 분명하게 투쟁을 결의하고 조직한다면 조합원들은 언제라도 투쟁에 나설 것이다. 물론 노동자가 투쟁을 한다고 해서 항상 이기는 것은 아니다. 10번이면 1번 이길까 말까 한 것이 노동자의 투쟁이다. 진다고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조직이 강해지고 조합원들이 단련된다. 지도부가 투쟁에 지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일상적으로 현장에서 투쟁을 만들어 가야 한다. 지금도 잘 되는 분회는 부당한 업무지시 등이 있을 때 현장 투쟁을 해서 막아내기도 한다. 그런데 이러한 사례들이 분회 밖으로는 잘 알려지지 않는다. 이런 사례들을 발굴해서 알려내고 현장 활동가들이 현장에서 일상적으로 투쟁을 조직하면서 큰 투쟁을 준비해 나가야 한다. 2012년에 정권을 상대로 한 공공운수노조 차원의 공동 임금투쟁을 대차게 해보자 사회운동: 공공산별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가 보자. 최근 공공운수노조가 오랜 산고 끝에 마침내 출범하기는 했다. 지난 수년간의 산별 전환 과정에서 조직형식적인 통합을 넘어 공동투쟁이 강화되는 화학적 결합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더 큰 문제는 이와 맞물려 공공부문의 많은 노동조합들이 후퇴를 거듭해 왔고 실리 중심의 기업별 노조로 돌아가려는 경향이 더욱 커지고 있다는 점이다. 권영규: 원래 산별노조는 조합원들이 연대투쟁을 하면서 산별의 필요성을 느끼고 그 힘으로 건설되었어야 하는데 공공산별은 위로부터 졸속적으로 추진되었다. 당시 사보 지도부들도 산별 만능주의자들이었다. 내가 중앙운영위에서 산별무능론을 이야기했더니 “지금 시대가 산별의 시대인데 죽은 별을 이야기하고 있다”며 바보 취급을 하더라. 그렇다고 지금에 와서 “해보니까 안 되니까 없던 걸로 하자”라고 하면 조합원들은 노동조합 자체에 심각한 체념을 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무슨 수를 써서라도 공동투쟁을 만들어야 한다. 특히 공공기관 사업장들을 중심으로 대정부 공동 임투를 해야 한다. 노조 위원장이 좌파 우파를 막론하고 각 사업장을 만나서 설득을 하고 시기를 정해서 공동투쟁에 돌입해야 한다. 올해는 힘들더라도 내년에 반드시 공동투쟁을 해야 한다. 내년은 정권 말기이고 총선도 있는 만큼 이러한 국면을 최대한 활용해서 내년 1월부터 사보, 연금, 가스 등 주력 부대가 임투에 들어가고 발전, 철도도 함께 한다면, 공공운수노조가 차기에 세상을 바꾸는 힘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올 연말부터 준비를 해야 한다. 이상무 위원장이 자신의 결의를 분명히 밝히고 솔직하게 현재 상황을 같이 돌파하자고 사업장을 돌아다니면서 읍소도 하고 협박도 하고 했으면 좋겠다. 내가 나를 버리겠다는 각오가 필요하다. 또한 개별 단위에서 투쟁이 벌어지면 산별노조 차원에서 집중을 해 줘야 한다. 그런데 연금이 투쟁을 할 때 그렇게 하지 못했다. 사보도 그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다른 단위들이 투쟁에 함께 해서 “너희들이 흔들리면 우리가 다 죽는다”라는 메시지를 주었어야 했다. 조합원들이 냉정하게 판단해서 연봉제 합의가 부결되었지 만약에 가결되었으면 다른 사업장에서도 사측의 연봉제 도입이 강력하게 추진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공동투쟁을 만들기 위해서는 사무처에 현장 출신 활동가들이 많아질 필요도 있다. 활동가들이 전임이 아니더라도 지도부 옆에서 현장의 상황을 전달하며 도움을 줘야 한다. 김진숙 지도위원이 참 대단하다. 크레인에 올라가서 꿋꿋이 버티면서 이만한 투쟁을 만들었다. 그런데 민주노총이 이 투쟁을 책임지지 못하고 있다. 민주노총이 책임을 지고 투쟁을 이끌어가야 하는데 민주주의니, 광장이니 하면서 뒤로 숨기만 한다. 2008년 촛불 때도 그랬다. 민주노총이 뒤로 숨는데 누가 시청광장을 열어 주겠는가. 정말 이렇게 가면 안 된다. 노동조합으로 포괄되지 않았던 민중들은 오히려 깨어 있는데 노동조합이 책임을 지고 이들을 이끌지 못하고 있다. 투쟁을 조직해야 하는데 위원장은 단식이나 하고 앉아 있다. 노동조합 활동은 혼자서 득도하기 위해 활동하는 것이 아니다. 요새 노조 간부들이 단식을 많이 하는데 단식은 정말 투쟁을 하다가 더 이상 어찌할 수 없을 때 택할 수 있는 마지막 수단이다. 민주노총이 뒤로 빠지면서 오히려 손학규, 유시민에게 판을 만들어주고 있다. 손학규, 유시민이 어떻게 당당하게 그 자리에 앉아 있을 수 있냐. 무릎 꿇고 사죄를 해도 모자란 판에. 이번 무상급식 투표도 오세훈이 졌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승리했다고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그만큼 민중들은 깨어 있지만 운동권이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운동권이 노무현을 못 넘어서고 노무현을 따라가고 있다. 노무현이 누구냐. 배달호 열사가 돌아가셨을 때 “더 이상 죽음으로 항거하지 말라”고 하면서 노동운동을 엄청나게 탄압을 한 장본인 아닌가. 노무현을 따라 갈 것이 아니라 명확한 노동자의 관점에서 투쟁을 해 나가야 민중들의 지지도 얻을 수 있다. 조끼를 벗고 시민인 척 하는 것이 아니라 조끼를 입고 투쟁에 나서야 한다. 사회운동: 사회보험지부 활동가들이 사업장 내부에만 갇히고 다른 사업장의 투쟁에 대한 연대나 다른 사업장에 대한 관심과 일상적인 교류가 부족하다는 비판도 있다. 권영규: 맞다. 현장노동자회 내부에서도 그러한 비판이 많다. 우리만 잘 싸운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고 다른 현장도 자신의 현장으로 바라보고 활동을 해야 한다는 각성, 자기 반성이 부족했다. 이를 할 수 있도록 교육하고 역량을 쌓아 나가야 했는데 그렇게 하지 못했고 많이 반성하고 있다. 소위 대공장으로서 사보가 자기 역할을 하지 못했다. 그런데 내부에서 사측의 탄압도 심각하고 내부의 분란도 많다보니 더 밖의 일에 신경을 못 쓰기도 했다. 그 잘 나가던 KT도 결국 내부 현장을 지키지 못하니까 순식간에 무너지지 않았는가. 사보는 지도부가 잘못된 방향으로 가면 비판하고 끌어내리면서 계속 내부 투쟁에 집중해왔다. 그러다보니 외부 활동의 비중이 적어진 점도 있다. 그렇다고 해도 내부에만 갇혀 있다는 지적은 타당하고 동의한다. 사회운동: 끝으로 하고 싶으신 말씀이 있으시다면 한 말씀 해 달라. 권영규: 노동자들은 자본주의 사회가 존재하는 한 계급적으로 투쟁해야 한다. 그런데 노동조합은 지도부가 아무리 뛰어나도 조합원들을 뛰어 넘기는 어렵고 조합원을 기반으로 활동할 수밖에 없다. 조합원의 요구에 기반하며 싸우기도 하고 그래서 함께 그 한계를 넘어 서게 되면 다른 세계에 대한 전망도 고민하고 그러한 세계를 만들기 위한 싸움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내년에 공공운수노조에서 공동 임금투쟁 대차게 해봤으면 한다. 사보에서도 한번 정권을 상대로 제대로 싸우고 그래서 후배들에게 정말 제대로 된 노동조합의 전통을 남겨 주고 싶다. ※ 바쁜 와중에도 성심성의껏 인터뷰에 응해주신 권영규 정책부장님께 다시 한 번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40년 만의 민주노조 전환, 나대진 삼화고속지회장 인터뷰 나대진 |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민주버스본부 삼화고속지회 지회장 인터뷰어: 한재영 | 인천지부 집행위원 사진: 한종현 | 인천지부 회원 2011년 5월 18일 삼화고속지회는 임시대의원대회를 통해 한국노총에서 민주노총으로 조직전환을 결의했다. 600여 명의 조합원들이 10년이 넘는 노조민주화투쟁을 통해 어용노조의 역사에 종지부를 찍고 새롭게 민주노조를 건설한 것이다. 나대진 지회장은 이번 인터뷰를 통해 민주노조 운동이 어렵고 힘들수록 원칙으로 돌아가야 함을 보여주었다. 본인은 햇병아리 지회장이라고 겸손하게 말하지만 12년간의 노조민주화투쟁을 바탕으로 자본의 탄압에 맞선 현장활동, 지역운동과 민주노조운동의 발전 방향, 자본과 조합원을 대하는 지도부의 자세 등 노동자운동의 과제들에 대해 생생하게 전해주었다. 삼화고속, 회사와 노조 소개 사회운동: 삼화고속은 인천시민들에게는 잘 알려져 있지만 『월간 사회운동』을 구독하는 다른 지역 분들에게는 생소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간단하게 삼화고속 회사 현황에 대해서 소개 부탁드린다. 나대진 삼화고속지회장(이하 나대진): 삼화고속은 1966년에 설립되어 45년이 된 회사이다. 삼화고속은 고속버스와 시외버스 노선에 150여 대의 버스와 150여 명의 조합원이 있고, 경기광역노선 2개, 인천광역버스 20개 노선 250여 대의 버스와 450여 명의 조합원이 일하고 있다. 인천과 서울을 잇는 광역버스 노선의 78%를 삼화고속이 독점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삼화고속 노동조합은 1967년도에 설립되어서 45년 역사를 갖고 있는 노조이다. 사회운동: 다른 무엇보다 지난 10년간 임금이 동결됐다는 사실만으로도 엄청난 충격이었다. 지난 10년간 임금 및 노동조건에 대해서 설명 부탁드린다. 나대진: 현 집행부에서 10년 동안 임금이 동결됐다고 주장하는 것은 회사 측에서 시급을 올리는 대신 상여금을 삭감하는 방법으로 시급인상분을 상쇄시켰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기본급을 4% 정도 약간 올리고 심야시간 상여금 산출수당을 300%에서 200%로 삭감하는 방식이었다. 광역버스의 경우 새벽 첫차 5시부터 시작해서 심야근무까지 마치면 새벽 평균 3시 30분쯤 끝난다. 격일제로 하루 20시간씩 일을 한다. 삼화고속의 경우 노사간 합의한 소정근로시간이 5시부터 24시까지(19시간)인데 사측은 편법으로 근로기준법에도 없는 심야수당 1만 원을 지급하면서 평균 2시간 일을 더 시킨 것이다. 조합원들은 새벽 평균 2시에 끝나고 집에 가면 3시다. 거기다 맞벌이 부부가 많다. 그러면 이튿날 10시쯤 일어나서 빨래도 하고, 아이들과 아내가 밥 먹은 거 설거지하면 12시쯤 된다. 잠깐 개인 일도 보고, 모여서 회의하고 그러면 4-5시까지는 집에 들어가야 한다. 집에 가서 저녁하고, 7-8시에 자야 다음 날 3-4시에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5시까지 나오려면 집에서 최소한 4시에는 일어나야 한다. 영업소 가까이에 사는 직원에게도 정말 열악한 상황이다. 현재 삼화고속 노동자들은 인천 시내버스 노동자보다 근무일수 근무시간도 더 많고 월급은 58여 만 원 정도가 적은 상황이다. 이는 10년 전과 역전된 상황이다. 보통 1년에 평균 100명 정도가 이직한다. 사회운동: 지난 10년 동안 열악한 근무조건을 강요해온 사측과 어용집행부의 탄압이 굉장히 심했을 것 같다. 이들은 어떻게 조합원들의 불만을 관리하고 탄압했나? 나대진: 조합원들이 부성운수를 비롯해 인천지역 민주노총 버스사업장의 근로조건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지난 12년 동안 4번의 선거를 치를 때마다 어용세력은 ‘민주노총으로의 조직전환’과 ‘현실적인 근로조건 개선’을 늘 머리 공약으로 내걸었다. 하지만 당선이 되고 나면 사측과 결탁, 노무2과로 전락해서 늘 조합원들을 앞장서서 탄압해왔다. 그래서 말도 안 되는 근로조건 악화가 가능했던 것이다. 여기에 저항하는 조합원들은 탄압했다. 예를 들면 연수동이 집이면 반대편인 마전으로 출근을 시키며 불이익을 줬다. 출근 40분 전에 일어나 준비하면 될 것을 1시간 반 전에 일어나야 되고, 출퇴근 비용의 경우 6만 원 정도면 한 달 왕복 기름값이 되는데 25~35만 원 정도 기름값이 들게 만들었다. 숨도 못 쉬게 하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조합원들은 다른 일자리를 구하기도 어려워 울며 겨자 먹기로 10년 넘게 참고 있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민주노조 건설투쟁과 교섭 사회운동: 불만이 많더라도 10년의 침묵을 깨고 새롭게 민주노조를 건설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민주노조 건설을 위해 해왔던 노력들, 조직전환의 결정적인 원동력, 그 과정에서 있었던 사측의 탄압에 대해서 말씀해주시면 좋겠다. 나대진: 우리는 사측과 어용노조가 결탁 근로기준법을 위반하고 있다는 것을 꾸준히 홍보해왔다. 현재 통상임금 소송이 진행 중에 있고, 주휴일가산수당을 지급하지 않은 것도 소송을 하고 있다. 또 최저임금 위반한 것을 노동청에 고소해서 111명이 받아낸 적도 있다. 그리고 회사와 결탁한 어용노조의 행태를 꾸준히 비판해왔다. 똑같이 사고를 내도 어용노조의 간부조합원은 그냥 넘어가고, 민주노조 활동가는 승무정지 두 달, 심하면 해고하는 등 차별이 많았다. 꾸준히 회사와 노동조합을 상대로 홀로 투쟁하던 조합원이 2006년 노동조합으로부터의 징계를 계기로 뜻있는 조합원 9명이 함께 뭉쳤고, 여명회라는 친목단체로 시작해서 선거 때는 40명까지 회원이 늘어났다. 회원 중에 사측과 노동조합을 비판하다가 노동조합의 제명징계와 회사로부터 승무정지나 해고를 당한 조합원도 있었다. 나 또한 이번 선거에 나서면서 민주노조로 조직 변경해서 인간답게 살 수 있고, 노동한 만큼 대가를 받아야 노조가 곧게 설 수 있다고 주장해왔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당선의 원동력은 꾸준한 활동을 보아온 조합원들의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2011년 3월 1일부터 현 집행부가 임기를 시작했고, 5월 18일에 조직형태 변경을 했다. 사측은 일부대의원 개개인들을 불러 회유했다. 하지만 대의원들은 민주노총으로의 조직전환 의지가 강했다. 대의원들 중에는 노조민주화 활동을 해왔던 분들도 있다. 뿐만 아니라 회사 눈 밖에 날까 봐 선전물 돌릴 때 만 원, 2만 원을 주기도 하고 인쇄비에 보태라고 통장으로 부쳐줬던 사람들도 있었다. 사회운동: 파업집회에서 지켜본 조합원들의 분노가 10년의 설움이 폭발하듯 강력했고, 사측에서 민주노조를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파업투쟁은 불가피했다고 본다. 하지만 공공성이 강한 버스의 특징과 10년간 지속된 회사의 탄압 때문에 파업이 쉽지만은 않았을 것 같다. 파업을 조직할 때 조합원들의 분위기가 어땠는지, 그리고 어떻게 파업을 준비해 오셨는지 궁금하다. 나대진: 조합 선거 공약이 조직형태 변경을 통한 민주노조 건설이었지만, 대의원대회에서 결의할 때까지도 조합원들이 긴가민가했다. 실제 조직형태가 변경되고 나니까 그때부터 조합원이 믿기 시작했다. ‘민주노총이 회사를 말아먹으려고 한다’는 사측의 악선전에도 현 집행부가 파업 찬반투표 했는데 85.3%의 높은 찬성률이 나왔다. 그래도 ‘설마 파업까지 가겠느냐’는 의견이 간부들과 일부 조합원들 빼놓고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간부들이 선봉에서 파업투쟁에 돌입했다. 집행부 투쟁행동을 보고 조합원이 파업투쟁에 많이 동참했다. 사회운동: 쟁의행위에 돌입한 후 회사 측의 방해, 보수언론의 공격 등 여러 장애물들이 나타났을 텐데 부분·전면 파업과 준법투쟁은 물리적인 측면에서나, 여론적인 측면에서 매우 성공적이었다고 보인다. 이러한 투쟁들이 위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었나? 나대진: 노조는 시민들의 불편을 최소화하기 위해 사전 기자회견을 통해 시민들에게 파업 일정을 알렸다. 그리고 6월 25,26일 시한부 파업에 들어갔다. 노조는 그동안 임금교섭요구를 11번이나 했으나 사측은 단 한 차례도 협상 장소에 나오지 않았다. 그런 것들을 시민들에게 많이 홍보해왔다. 시민들이나 언론들도 사측에 정당한 임금교섭을 요구하며 이틀 시한부 파업을 하고 근무에 복귀하니까 노조를 나쁘게 보지 않은 것이다. 쟁의행의 찬반투표에서 찬성률이 85.3%가 나왔는데도 노동조합이 40년 만의 첫 파업이어서 걱정을 많이 했다. 하지만 걱정은 개인적인 우려였고 조합원들의 호응이 너무 좋았다. 파업 첫날 구사대와 부딪혔을 때도 그동안의 울분이 지도부와 간부들 중심으로 선봉에 서서 차가 나가지 못하게 차바퀴 아래 들어가고, 차 뒤에 드러눕게까지 만들었다. 또한 주차장이 일곱 군데인데 차가 못 드나들게 조합원 승용차로 출입구를 원천봉쇄하고, 심지어 간부조합원은 주차장에 있는 버스 키를 다 빼 와서 노조 사무실에 갖다놓기도 했다. 업무방해로 고소당하기도 했다. 이렇게 조합원들에게 강건한 의지를 행동으로 보여주니까 무전기, 핸드폰, 트위터 등을 통해 관망했던 동료들에게 시시각각 파업투쟁소식이 알려지면서 동참 조합원들이 많이 늘어났다. 사회운동: 민주노조 건설과 40년 만의 파업투쟁을 거치면서 조합원들의 변화가 많을 것 같다. 구체적으로 어떤 변화가 있는지 말씀해주시면 감사하겠다. 나대진: 파업을 통해서 자신감이 붙은 거다. ‘아~ 우리도 뭉쳐서 하면 되는구나’라고 첫 파업을 통해서 배운 것이다. 사측이 ‘파업하면 무노동 무임금이다 회사는 민주노조와 끝까지 교섭하지 않을 것이니 착각하지 말아라’라고 해도 조합원들은 개의치 않고 ‘그래도 우리는 집행부와 함께 간다’며 파업투쟁에 적극적으로 동참했다. 또한 현 집행부는 조합예산의 50%를 교육에 할당할 정도로 집중 편성하고, 교육을 꾸준히 진행했다. 조합원 90%가 솔직히 팔뚝질도 못해봤는데 팔뚝질, 노동가, 우리는 왜 투쟁을 해야 하는가를 교육을 통해서 알게 됐다. 첫 정기대의원 대회 때에는 노동가요를 잘 몰랐다. 임시 대의원대회 때는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고, 국민의례 대신 민중의례로 대신하게 되기도 했다. 나는 ‘버스협의회’라는 노동활동가 단체에서 꾸준히 활동하며 민주노조에 대한 강한 신념을 가지게 되었다. 그곳에서 근로기준법을 학습하면서 ‘우리가 권리를 모르고 노예처럼 살아왔구나’라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노조가 발전해야 지역(운동)이 발전하고, 지역(운동)이 발전해야 지역 주민들이 깨어나서 자본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됐다. 아무튼 나는 지금도 지난 석 달간의 교육이 파업투쟁에 큰 원동력이 되지 않았나 생각한다. 조합원들의 분노에 교육을 더해 길을 열었던 것이다. 나는 조합원들 원동력과 함께할 뿐이다. 법/제도와 삼화고속 투쟁의 의미 사회운동: 세 번의 파업을 통해 삼화고속지회는 7월 10일 사측에게서 성실교섭을 약속하는 ‘노사 기본 합의서’를 받아냈다. 하지만 사측은 ‘복수노조 창구단일화’와 어용세력을 악용해 교섭을 지연시켜왔었는데 그 과정은 어땠나? 나대진: 사측은 공문을 통해서 ‘교섭창구단일화로 교섭에 임할 것이다’라며 교섭을 해태해왔다. 처음에는 노조가 무리한 요구를 한다고 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교섭창구단일화를 들먹이면서 교섭을 해태해 온 것이다. 파업을 통해서 불편을 겪는 시민들에게 압박을 많이 받은 인천시가 나서서 사측에 ‘노조는 정당한 절차를 통해서 요구를 하는데 왜 응하지 않느냐’며 계속 중재를 서고 노동청도 중재를 섰다. 그래서 억지로 회사가 교섭에 나오게 된 것이다. 첫 교섭은 무산됐는데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어용 세력이 회사와 짜고 사측 교섭위원들을 교섭장소 출입구 앞에서 가로막은 것이다. 어용 세력이 교섭장 입구를 막아서고 있으니까 사측은 이게 웬 떡이냐 하고 10분 동안 출입을 시도하는 척하다가 가버리게 된 것이다. 사회운동: 교섭창구단일화’라는 악법에도 불구하고, 전국의 사업장에서 복수노조를 활용해 새롭게 민주노조를 건설하는 흐름이 형성되고 있고, 삼화고속 노동자들의 투쟁이 그 중심에서 많은 주목을 받고 있다. 삼화고속 투쟁은 복수노조 시대의 버스노동자들에게 어떤 의미라고 생각하시는지? 나대진: 이번 파업투쟁은 생존권을 위해 반드시 승리해야 하는 절박한 투쟁이며, 반드시 우리의 요구를 쟁취하여 ‘버스노동자들이 뭉치면 할 수 있다’라는 자신감 회복을 회복하기 위한 투쟁이기도 하다. 그래서 일부 조합원들이 파업 첫날 운행 나갔다가 못 하겠다며 다시 집으로 많이 돌아갔다. 사회운동: 열악한 노동조건 개선과 교통 공공성 확대를 위해 ‘교통제도 개혁’은 중요한 과제라고 생각한다. 버스의 경우 준공영제가 각 지자체에서 시행되고 있는데, 인천에서 시행하고 있는 버스 준공영제에 대한 의견은 어떠한가? 나대진: 버스준공영제의 경우 시민단체가 참석해서 운송원가 조사에 공동으로 참여해 공정성을 보장해야 하는데 인천시는 사용자측하고만 의논해서 운송원가를 결정하고 있는 실정이다. 사측이 자료 제시하면 사측 이야기만 듣고 논의해서 결정하는데 그게 무슨 준공영제냐. 시민단체가 참여를 하고, 노동자도 단체도 참여해서 정확한 운송원가를 책정해서 완전공영제가 되어야 한다. 그래서 우리도 연구소에 준공영제 조사용역을 줘서 8월 31일에 보고서가 나올 예정이다. 참고로 6대 도시에서 인천이 제일 먼저 준공영제를 발의했지만 제일 늦게 시행을 한 도시이기도 하다. 현 교섭국면의 상황과 과제 사회운동: 다시 삼화고속 현장으로 돌아와 보겠다. 현재 사측이 파업관련 고소고발 취하 등 선결조건을 받아들이면서 교섭국면에 접어들었다. 교섭국면에서는 투쟁국면과 달리 조합원들의 긴장감이 이완되어 또 다른 과제가 지도부에게 주어졌을 것이다. 본격적으로 시작한 교섭에서 사측의 분위기는 어떤지, 현재 조합원들의 분위기는 어떤지, 교섭국면을 돌파하기 위한 지도부의 전략은 무엇인지 궁금하다. 나대진: 계속되는 전면파업과 부분파업에 사측은 8월 12일 2차 고소고발취하, 조합비 지급 등 선결조건을 수용하고, 성실교섭에 임하겠다는 합의를 한 상황이다. 하지만 역시 (5차 교섭이 이뤄진 8월 22일) 최근까지도 선결조건에 대해서 조합비 입금을 제외하고 이행을 안 하고 있다. 소정근로시간 축소, 시급인상, 법정 수당 근로기준법 적용 등의 본협상도 쉽지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사측이 교섭하려는 자세를 조금은 보이지만 그것을 100% 다 믿을 수는 없다. 언제든 합의서를 뒤집으려는 것이 자본의 생각이고 속성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계속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있다. 예를 들어 첫 파업투쟁에서 미숙했던 파업물품을 꾸준히 준비하고 있다. 지금도 대나무 만장기 500개, 등벽보 1,500장을 준비하고 있다. 그리고 쟁의기금도 모금하고 있는데 벌써 80% 정도가 동참해서 상당금액을 확보하고 있다. 집행부가 달콤한 말로 조합원을 속이지 않고 약속에 대해서 행동 실천하면서 아직까지 파업 동력이 떨어지지 않았다. 또 현장의 파업 동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조합원 교육을 통해 투쟁방침과 교섭 위반 시 바로 파업에 돌입하겠다는 결의를 하고 있다. 화물연대 파업동영상도 보며 교육도 하고, 하종강 선생님도 초빙하고, 노동가수들을 불러서 노동가요도 계속 배우고 선봉대 교육, 조반장 교육 프로그램을 통해 계속 긴장감을 놓치지 않게 노력하고 있다. 그래서 하루하루가 집행부에게는 긴장의 연속이다. 투쟁하는 노동자들과 나누고 싶은 이야기 사회운동: 삼화고속지회의 민주노조로의 전환과 위력적인 파업투쟁은 침체되어 있던 인천지역 노동자운동에 많은 활력을 불어넣어 주었다. 민주노조를 건설하면서 지회장님이 가장 보람있었던 경험이 무엇이었는지 말씀해주시면 좋겠다. 그리고 투쟁하는 노동자들에게 전하고 싶으신 말씀을 들으면서 인터뷰를 마치려고 한다. 나대진: 이제 갓 나온 햇병아리 지회장이고, 경험도 없어 선배님들 자문 받아가면서 배우고 있는데 민주노조 선배들에게 무슨 말을 하겠나. 투쟁의 현장이야 다 똑같겠지만 어쨌든 세 번 파업의 경험으로, ‘파업은 곧 학습’이다. 그 말만 드리고 싶다. 파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준 조합원들에게 정말 너무 고맙게 생각한다. 이 파업 최고의 결과물은 조합원들이 자신감을 가지고 있다는 것, ‘우리가 민주노조로 뭉치면 뭐든 해낼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게 최고의 결과물이라고 생각한다. 그동안 어용노조만을 겪다가 ‘이런 것이 민주적인 노동조합이구나, 노동조합의 권력은 우리 현장 조합원들한테 있구나’라고 알아가는 것. 그것이 제일 큰 성과라고 본다. 좀 일찍 장가를 가서 큰 애가 30살, 작은 애가 26살, 막내가 22살이다. 파업과정이 언론에 보도되면서 파업 중에 아내로부터 문자가 온 적이 있다. 힘내라고. TV 인터뷰를 봤나 보다. 그리고 애들이 아버지가 그렇게 힘들게 일하는지 몰랐고 아버지가 자랑스럽다고 문자가 왔다. 문자를 보고 순간적으로 가슴 뭉클해지며 피곤이 싹 가시더라. 정말 힘이 많이 됐다. 조합원들도 나에게 힘을 주고, 희망을 줬지만 가족들이 ‘아, 나를 이렇게까지 생각하고 있었구나’, 51세 됐지만 처음으로…… 뭐라 표현은 못 하겠다. ‘아, 내가 올바른 삶을 살고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아내가 바가지만 긁고, 돈만 밝히는 줄 알았는데, 자식들한테는 미안하다고만 생각했는데 무형의 재산을 남겨주고 간다는 자부심과 긍지를 느꼈다. ※ 바쁜 와중에도 성심성의껏 인터뷰에 응해주신 나대진 지회장님 그리고 삼화고속지회 동지들에게 다시 한번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울산노동뉴스 이종호 편집국장 초청, 노동자운동연구소 3차 월례 워크숍 워크숍의 취지 노동자의 도시 울산에서 벌어지는 일은 언제나 노동운동에 초미의 관심사가 되곤 했다. 민주노조 운동이 폭발한 87년 노동자 대투쟁에서부터, 노동법 개악 이후 정리해고 문제가 본격적으로 제기된 98년 현대차 점거 파업, 그리고 작년 말 불법 파견 문제를 전국적 쟁점으로 다시 만들어낸 현대차 비정규직 지회의 1공장 점거 파업까지 당대의 핵심 노동 의제들이 울산에서 투쟁으로 만들어졌다. 하지만 동시에 울산의 노동운동은 한국 민주노조 운동의 가장 곤란한 문제들이 공존하고 있기도 하다. 울산에서는 실리주의 노동운동, 비정규직과 연대하지 못하는 정규직 운동 등 98년 이후 본격화 된 민주노조 운동의 핵심 문제점들이 가장 첨예하게 나타나고 있다. 노동자운동연구소에서는 경주 노동운동, 구미 노동운동에 이어 5월 27일 3번째 워크숍으로 울산 노동운동의 현황과 쟁점을 살펴보았다. 발표는 1988년부터 현재까지 울산 지역에서 노동운동을 하고 있는 울산노동뉴스 편집국장 이종호 동지가 해주었다. 울산 노동운동 역사 이종호 동지가 울산에 내려간 것은 1988년 5월이었다고 한다. 당시 울산은 이미 전국의 수많은 활동가들이 공장과 지역사회단체에서 들어가 있었다. 심지어 교수도 노동 문제 조사를 위해 위장취업을 하던 분위기였다고 한다. 울산 민주노조 운동은 1987년 7월 5일 현대엔진에서 노동조합 설립과 이후 6만이 넘는 노동자들이 거리로 몰려나오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현대중공업, 현대자동차, 풍산금속 등에서는 어용노조를 급조하여 민주노조 설립을 막았지만 어용노조퇴진과 민주노조설립을 위한 투쟁으로 이를 돌파해내었다. 하지만 경험이 부족한 신규 노조가 자본의 탄압과 회유를 극복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대부분의 사업장에서는 1988-1989년 노민추 등의 조직을 통해 노조 민주화 투쟁을 벌였다. 1988년 6월 현대차 이상범 집행위 불신임 투표나 1988년 임투에서 위원장의 직권조인을 불인정하며 파업지도부를 중심으로 128일간 진행된 현대중 파업투쟁이 대표적이었다. 이종호 동지는 이 부분에서 현장 활동가 조직의 역할에 대해 강조했다. 당시 현장 활동가 조직은 현재와 같은 선거 조직이 아니라 현장 대중투쟁조직이었다는 것이다. 87년 투쟁 이후 선출된 노조가 민주노조 역할을 하지 못함에 따라 현장 활동가 조직들이 파업지도부를 꾸려 공식 지도부를 무력화하거나, 노민추를 꾸려 현장을 장악해나갔다. 일종의 현장의 이중 권력 상태가 88년부터 이어졌다는 것이다. “1988-1989년 현대중공업 128일 파업지도부, 1991년 현대자동차연합투쟁위원회(현연투), 1995년 현대차 양봉수동지 분신공동대책위원회(분신공대위) 등이 바로 대표적인 현장대중투쟁조직들이다. 1988-1989년 현대중공업 128일 파업투쟁 당시 파업지도부는 어용 집행부에 맞서 부단히 현장의 이중권력을 만들어내면서 투쟁하는 대중들의 목소리와 의지를 직접 반영하고 그 지도력을 즉각적으로 검증받았던 명실상부한 아래로부터의 대중투쟁기관이었다. 1991년 현연투는 노민추, 구속해고동지회(구해동), 공동소위원회(공소위), 민주연합대의원회(민대), 풍물패연합 등 당시 현대자동차 민주세력이 총결집하여 만들어졌다. 현연투는 1991년 5월 투쟁에서 노동조합을 제낀 채 연일 4,000-5,000명의 조합원들을 직접 이끌고 공장 안 대규모 집회와 시내 거리행진을 감행한 후 격렬한 반민자당·반노태우정권 거리투쟁을 벌여냈다. 1995년 현대자동차 양봉수 동지 분신투쟁 당시 현장활동가들이 사업부별로 즉각 투쟁대오를 꾸리고 전공장에 걸쳐 분신공대위를 결성함으로써 노동조합과는 무관하게 바로 파업투쟁을 벌였던 것도 노동조합을 뛰어넘는 대중투쟁의 한 전형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이런 현장대중투쟁조직과 노동자들의 분출하는 투쟁을 바탕으로 1990년대 초 내내 울산에서는 쉬지 않고 투쟁이 펼쳐진다. 1990년 4월 25일 현대중공업에서 골리앗 투쟁이 펼쳐지고 28일에 현대차 노동자들은 정권의 미포만 작전(경찰과 군인 1만 5천 명이 미포만에서 육해공으로 골리앗을 진압하려 했던 작전)을 지연시키기 위해 수천여 명이 가두 투쟁을 진행했고, 마창노련의 동맹파업을 시작으로 전노협은 5월 총파업을 조직했다. 그리고 이런 분위기 속에서 한국노총 사업장들마저 임금 인상을 내걸고 투쟁에 돌입하기 시작했다. 현대중공업에서 시작된 투쟁이 정치 투쟁으로 발전해 나갔다. 1991년 현연투는 대중투쟁을 통해 그해 9월 3대 노조 선거에서 이현구 집행부를 탄생시켰다, 하지만 이현구 집행부는 출범과 동시에 3중고에 부딪히게 되는데, 집행경험은 없는 상태에서, 조합원들의 기대는 매우 컸고, 자본은 청와대까지 나서 집행부를 압박해왔다. 3대 집행부는 1991년 말 성과급 투쟁을 벌이며 자본과 정면으로 부딪혔다. 공장점거까지 시도했지만 다음해 1월 21일 공권력과 대치 중 퇴각하게 되고 이후 500여 명이 구속 수배 징계되며 노조 집행부가 사실상 와해되었다. 사측은 대의원회의실까지 폐쇄했다. 하지만 현장 활동가들은 부산대에 수배자들을 중심으로 장외 집행부를 꾸리며 조직을 정비했고, 1992년 8월 4대 윤성근 집행부를 출범시켰다. 4대 집행부는 김영삼 정권의 긴급조정권을 돌파하지 못하고 임투를 마무리하며 집행부를 내려와야 했다. 93년 5대 임원선거에서는 최초로 민주노조 진영이 정갑득과 김강희 후보 진영으로 나뉘어졌으며, 그 결과 이영복 어용 집행부가 들어섰다. 1991년 대량 구속 수배 사태 이후 1992년부터 93년까지는 현대차와 현대중공업 모두 지리한 노조 정상화 작업이 펼쳐지던 시기다. 노조 정상화 과정과 이후 투쟁방향을 둘러싸고 논쟁하며 현재와 비슷한 형태의 현장 정파가 탄생했다. 이영복 집행부는 현장조직에 대해 갖가지 탄압을 벌였고, 현장조직들은 ‘노동자의 길’(노길)을 창간해 상호 소통했다. 95년 이영복 집행부가 재선에 성공하며 현장탄압이 더욱 거세졌고, 그 와중에 양봉수 열사가 분신으로 이에 항의하는 투쟁이 펼쳐졌다. 침체되어 있던 현장활동가들은 6월 대책위를 조직하고 비공인 파업을 벌이기 시작했다. 이러한 투쟁의 성과로 8월 ‘현대자동차 민주노동자 투쟁위원회’(민투위)를 결성함으로써 오랜 공백을 뚫고 현장민주조직을 재건했다. 그리고 그 해 6대 집행부 선거에서 정갑득 집행부를 출범시키게 된다. 하지만 민투위는 이후 여러 계기를 거치며 계속 분화했다. 96-97년 총파업은 한국 노동운동에서 역사적인 투쟁이었으며, 울산 노동운동에도 그러했다. 울산지역 민주노총 사업장의 파업 참가율은 거의 100%에 육박했었다. 이종호 동지는 96-97년 총파업이 보여주었던 노동자 정치의 가능성을 높게 평가했다. 하지만 동시에 그것이 대선 정치로 수렴된 문제점을 놓치지 않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87년 노동자 대투쟁이 ‘인간선언’이었다면 96-97년 총파업투쟁은 한국 노동자계급의 ‘정치선언’이었다. 민주노총은 이 투쟁으로 합법화를 뛰어넘는 지위를 얻어냈고 한국 노동조합운동의 대표성을 인정받았다. 총파업투쟁으로 한국노총 산하 노동조합들의 한국노총 탈퇴와 민주노총 가입이 늘어났으며 이름만 있고 활동이 없던 ‘휴면노조’들이 상당수 정상화됐다. 미조직 노동자들 또한 이 투쟁으로 노동조합 결성의 필요성을 자각하기 시작했고 자신감을 갖게 됐다. 뿐만 아니라 한국 민주노조운동은 세계 노동자들에게 자본과 정권의 신자유주의 공세에 대한 투쟁의 가능성과 희망을 보여줬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투쟁으로 민주노총을 중심으로 한 노동자계급이 국민들 사이에서 새로운 사회세력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96-97년 총파업투쟁은 1953년 한국전쟁 종전 이후 최초의 정치총파업이었고 노동자정치, 총파업정치의 힘과 가능성을 보여준 투쟁이었다. “1990년의 정치적 총파업이 노동운동탄압분쇄, 전노협 사수를 위한 방어적 투쟁이었다면 1996-97년 정치총파업은 노동법 개악과 재개정을 둘러싼 공세적 투쟁이었다. 1991년 5월 투쟁에서 거리정치와 현장정치가 분리됐고 거리정치를 현장정치로 전환하는 데 실패했다면, 1996-97년 총파업은 이 둘을 역동적으로 통일시켰다. 하지만 이러한 성과는 노동자 정치가 아니라 1997년 대선 정치로 수렴되는 비극으로 끝나버렸다.” 이렇게 투쟁이 끝나버린 후과는 1998년 대규모 정리해고로 이어졌다. 현대중공업은 1991년 이후 계속 무쟁의 상태였고, 결국 현대차에서 대규모 정리해고에 맞선 투쟁이 7월에 펼쳐졌다. 1997년 7대 집행부 선거 준비 과정에서 정갑득 전 집행부 측이 실노회를 결성해 나간 상태에서 선거가 치뤄졌으나 민투위가 승리하고 김광식 집행부가 출범했다. 김광식 집행부는 36일 간 점거파업을 이어갔지만 결국 정리해고를 받아들이며 파업을 종료시켰다. 5천 명 이상의 조합원들이 결사 항쟁 분위기를 이어갔고, 경찰 병력도 진입을 쉽사리 결정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에서 집행부가 정리해고를 받아들인 것이다. 한편 당시 무급 휴직자가 대규모로 발생했는데, 이들 중 장사하다 파산한 경우도 많았다. 그리고 이들이 복직된 이후 정리해고에 대한 두려움을 바탕으로 보수화되는 경우가 많았다. 1997년부터 1998년 정리해고 투쟁 이후까지 민투위는 계속 분화했다. 1997년 선거 준비 과정에서 정갑득 전 집행부 진영이 실노회를 꾸렸고, 1998년 점거 파업 평가를 둘러싼 논쟁에서 김광식 집행부 진영이 미래회를 꾸렸다. 이후 박유기 등도 이탈하며 현재 형태의 현장조직 구도가 만들어졌다. 이러한 현장 조직들은 이른바 정파 갈등을 일으키기도 했지만 현장조직 간 경쟁으로 현장 활력의 한 요소로 작용하기도 했다. 2001년 초에는 울산에서 처음으로 조직된 사내하청 노조인 INP중공업 사내하청 노조 투쟁이 벌어졌다. 노조 설립 후 노조 간부에 대한 탄압 및 조합원에 대한 대규모 계약해지가 이어졌고, 현장조직대표자회의, 지역사회단체 등이 연대 투쟁을 지속했다. 그리고 곧이어 효성, 고합, 태광 화섬 3사 투쟁이 진행되었다. 효성에서 시작된 투쟁은 대규모 용역깡패와 공권력 투입 이후 6월 12일 지역 화섬 공동 투쟁으로 발전했다. 한편 현대차 이상욱 집행부는 7월 총파업을 약속했지만 결국 지키지 못했다. 2003년 3월에는 현대차 근골격계 투쟁이 진행되었는데, 현장조직이 집행부 선거 외에 오래간만에 대중적 사업을 전개한 투쟁이었다. 민투위 간부들이 대우조선에서 교육받은 내용을 토대로 진행한 이 투쟁은 현장 교육, 현장 선전 작업을 현장조직이 직접 진행하였으며, 부산에서 의사를 모셔와 직접 현장 검진을 하기도 했었다. 이후 집단 요양 투쟁과 3명이 구속된 근로복지공단 점거 투쟁으로 이어지며 산재 인정을 받아내었다. 같은 해에는 비투위가 구성되어 현대차 사내하청 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도 했다. 비투위는 내부에서 1사1조직 형태로 갈 것인지 아니면 독자노조를 유지할 것인지를 두고 내부 논쟁이 있기도 했다. 당시 대의원대회에서 정규직 대의원들이 비정규직 조직에 대한 이해가 별로 없어 역설적으로 1사1조직이 통과될 수도 있었는데, 비투위 내부 결정으로 결국 그렇게 되지 못했다. 이종호 동지는 이 대목에서 몇 가지 의견을 피력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당시 1사1조직하고, 비투위는 현장대중조직으로 남았어야 했다는 것이다. 비투위는 오히려 공동소위원회연합(공소위)을 참조해 볼 수 있지 않았겠느냐는 것이다. “공소위는 규약상 노동조합 공식체계에 포함되어 있기는 하지만 노동조합의 공식 의사결정과정에서 아무런 권리와 의무를 행사할 수 없고 집행에서의 권한 또한 없다. 그래서 실제 공소위는 스스로 부서별, 사업부별, 전공장 체계를 꾸리고 출범식도 독자적으로 해왔다. 노동조합의 맨 밑바닥에 있으면서 동시에 노동조합 바깥에 있는 셈이다. 공소위는 주요 시기에 자신의 입장을 대중적으로 표명하여 현장 여론을 형성하기도 하고 대의원회와 대립하여 소위원회 독자적 목소리를 내기도 한다. 소위원회는 활동가를 발굴하고 훈련하는 풀이고, 많은 현장활동가들이 소위원회를 통해 활동에 입문해왔다. 공소위는 노동조합 대의원체계와는 달리 현장 대중들로부터 자신들의 일부로 인식되고 그만큼 소위원과 대중의 관계는 직접적이다. 소위원이 현장 대중들 안에서 투표를 통해 선출되고 있지는 않지만 전공장 공소위는 노동조합의 다른 체계들과는 달리 현장의 직접성을 담보로 커다란 대중적 힘을 행사할 수 있다.” 울산에서는 이후 2006년 울산과학대 투쟁을 지역연대투쟁을 통해 승리로 이끌며 오래간만에 지역에서 승리 분위기를 만들었고, 2008-2009년 미포조선 용인기업 투쟁을 거치며 울산 민주노조 운동 진영의 무너진 연대를 복원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이후 울산 노동운동의 과제 이종호 동지는 울산노동운동 역사를 반추하며 현재 생각해봐야 할 화두 중 하나로 ‘과소비-과노동 체제’ 를 지적했다. 소비 수준을 맞추기 위해 초장시간 노동을 감내하고 살아가는 울산 노동자들의 의식 변화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과소비와 과노동의 악순환을 끊어내지 않고서는 현재 울산 노동자들이 변화할 계기를 찾기 힘들다고 진단했다. 노동자운동의 과제에 대한 이종호 동지의 말로 결론을 대신하고자 한다. “심야노동 철폐와 주간연속2교대제 쟁취를 넘어 주35시간으로 노동시간을 더 단축시켜야 한다. 시간급제를 없애고 월급제를 정착시켜야 한다. 비정규직과의 차별을 줄이는 데서 더 나아가 비정규직 없는 공장, 비정규직 없는 사무실을 만들어야 한다. 노동운동의 사회적 확장과 재구성을 위해 지역사회운동과의 연대와 소통을 강화해야 한다. 퇴직 이후의 삶을 집단적으로 준비해야 한다. 젊은 활동가들을 키워내야 한다. 대공장 정규직 남성 노동자의 시각에서 벗어나 비정규직 여성 노동자의 처지에서 세상을 바라볼 때 노동운동의 미래를 제대로 설계할 수 있다. 최저임금도 못 받고 일을 해야 하는 청소년 아르바이트 노동자의 처지에서 미래를 바라볼 때 자기 세대와 자식 세대를 위해 노동운동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가 분명해진다. 정규직 노동자들이 비정규직 노동자의 고통을 외면하고 자신의 현재의 이익만을 좇아갈 때 자식 세대는 점점 더 비정규직으로 내몰리게 된다. 내 자식만은 비정규직 노동자로 만들지 않으려고 휴일도 없이 밤샘 노동해 번 돈을 사교육비로 쏟아붓는 ‘악순환’은 이제 그만둬야 한다. 1987년 우리는 한낱 기계의 부속품이기를 거부하고 인간임을 선언했다. 자본의 노예가 아니라 역사와 사회의 주인임을 자각했고, 1996-97년 우리 노동자가 정치의 주체임을 역사에 알렸다. ‘노동해방’과 ‘인간해방’은 빛바랜 깃발이 아니라 여전히 우리 노동자들의 가슴 속에 살아 숨 쉬고 있다. 자본주의를 넘어 우리 노동자의 힘으로 새로운 세상을 건설해가고자 하는 꿈은 자본주의가 노동자·민중의 삶을 옥죄면 옥죌수록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의 가슴 속에서 커져갈 것이다. 여럿이 꾸는 꿈은 현실이 되고, 함께 걷는 걸음 하나하나가 뒷 사람의 길이 된다.
화물연대 심동진 조직국장 초청, 노동자운동연구소 4차 월례 워크숍 2003년 ‘물류를 멈춰 세상을 바꾸자’는 기치를 들고 폭풍처럼 등장한 화물연대는 스스로가 당당한 노동자임을 선언했다. 자본과 정권을 상대로 위력적인 투쟁을 벌인 결과 화물연대가 결성 된지 1년도 채 되지 않아 천 삼백 명으로 출발한 조직이 2만이 넘는 규모로 확대되었다. 그 조직화의 중심에 심동진 화물연대 조직국장이 있었다. 노동자운동 연구소는 7월 23일 현장에서 대중조직화에 헌신해온 심동진 조직국장을 초청하여 조직가로서의 자세와 원칙에 대해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그의 구수하고 재치 있는 말솜씨 덕분에 강연장에는 시종일관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그러나 삶의 무게가 고스란히 담긴 이야기를 듣는 참가자들의 태도는 사뭇 진지했다. 왜 조직화에 나서는지 답하라 심동진 조직국장은 뜻밖의 이야기로 워크숍을 시작했다. 조직가로서 산전수전 겪으면서 잔뼈 마디마디가 굵은 그의 첫마디는 ‘조직화란 슬픈 것’이라는 것이었다. 조직화란 결국 사람의 마음을 얻는 문제인데, 사상이나 이념만으로 해결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조직한 사람을 책임져야 하는 일이라 쉽지 않다는 얘기였다. 한 마디로 각오가 필요하다는 메시지였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의 경험을 옛날 얘기처럼 술술 풀어냈다. 하나의 사례를 들어보자. 화물연대 활동을 열심히 하던 동지가 있었는데 집안 생계부터 아픈 동생의 병원비까지 책임지고 있었다고 한다. 활동하면서 수입이 줄고 가족들에게 돈도 못 보낼 형편이 되자, 여동생은 스스로 짐이 된다고 여겼는지 그만 자살하고 말았다. 동생을 잃은 활동가는 심동진 조직국장을 원망했고 그도 미안함에 마음이 무거웠다고 한다. 극단적인 사례이기는 하지만 수많은 활동가들이 투쟁에 나서면서 경제적인 문제나 가족과의 갈등 등 크고 작은 어려움에 부딪히고 있다. 심동진 조직국장은 그러한 어려움 속에서 괴로워하고 원망하는 동지를 감당하고 책임질 수 있는 것이 조직가의 자세라고 말한다. 괜한 사람 같이하자고 했다가 고통스럽게 만들었다는 자책으로 흔들리는 것이 아니라 버텨낼 수 있어야 한다는 얘기인데, 말처럼 쉽지 않은 일이기에 조직화가 슬프다고 하는 것이리라. 이어서 그는 고통이 반복된다고 해서 무뎌지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사람들을 조직하면서 마음 아프고 괴로운 일이 계속 생겨나겠지만 그게 반복된다고 해서 익숙해지지만은 않더라는 것이다. 그는 어떤 선배의 경험담을 예로 들었다. 그 선배는 빨치산 활동을 하면서 죽을 고비를 숱하게 넘겼지만 용감해 지기보다는 겁이 더 났다고 한다. 사회과학 서적에는 용감해지자고 했지 겁이 날 거라는 얘기는 없었던 것처럼, 조직화도 책에 나오지 않는 인간사의 굴곡을 헤쳐 나가는 일이기에 슬픔에 무뎌지기 쉽지 않다는 얘기다. 그래서 심동진 조직국장은 조직화를 하는 이유에 대해 본인 스스로가 분명한 답을 가져야 흔들릴 때 중심을 잡을 수 있다며, 바쁜 와중에도 자기 생각을 정리할 수 있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심동진 조직국장은 조직화란 고난의 길이니 마음을 단단하게 먹어야 한다고 당부하면서도 자신감을 잃지 말라고 조언했다. 그는 중국공산당도 창당 당시 13명으로 미미하게 시작했지만 결국 혁명에 성공하여 창대한 결과를 낳았다며 조직가들은 포부를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심동진 조직국장 본인이 화물연대를 50여 명의 발기인들과 함께 시작했지만 2만이 넘는 규모로 조직을 확대해 보았기에 더욱 확신하는 것이리라. 운동이 어려운 시기에 주류화 전략을 택하며 청산주의로 흘러가지 않고 묵묵히 현장 조직가의 길을 걷는 동지들의 노력이 반드시 결실을 맺길 바란다는 격려였다. 조직화의 삼박자 심동진 조직국장은 대중을 조직하기 위해서는 삼박자가 맞아야 한다고 했다. 노동자들의 상태와 행동, 조직가의 능력, 그리고 조직가의 의지가 맞아 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우선 대중들은 정체된 상태에 있다가도 행동에 나서기도 하고, 투쟁이 고조되었다가 퇴각하기도 하며, 폭발하기 직전의 상태에서 기회를 노리기도 하는 등 변화무쌍하다. 그러한 가운데 조직가는 대중들의 상태를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을 가져야 한다. 합창단을 지휘하는 지휘자처럼 말이다. 합창단의 상태를 보고 반 박자 빠르거나 느리게 지휘하는 것처럼 대중들의 상태를 파악해서 구체적인 방침을 실행하는 것이 조직가의 능력이라고 그는 강조했다. 예를 들어 대중들이 위축되고 내부 경쟁하는 시기에 토론이나 교육 없이 성급히 투쟁을 호소한다면 외면당할 뿐이다. 대중들의 행동이 정체된 시기에는 조직화의 속도를 조금 늦추고 소모임이라도 만들어가면서 차근차근 확대해야 한다고 한다. 반대로 87년 투쟁 같은 임계상태에는 급진적이고 선명하게 입장을 제출하고 투쟁할 수 있어야 한다고 한다. 이어서 그는 최근 희망버스에 사람들의 관심이 왜 모이고 있는지 나름의 이유를 들어 설명했다. 현재 이명박 정권은 노동자들의 투쟁을 짓밟으면서 협박의 수위를 높이고 있는 상황이다. 저항에 나서기만 하면 앞선 사례처럼 탄압할 테니 잠자코 있으라는 식이다. 하지만 대중들은 협박에 움츠러들지 않겠다, 복수하고 싶다는 심리가 점차 쌓여서 역전을 노리는 상태로 이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진중공업 투쟁은 탄압 속에서 숨죽이고 있던 대중의 흐름을 변화시키는 계기인 만큼 대중들이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도록 구체적인 사업을 제안하고 조직노동자들이 함께 나설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다양하게 뒤섞여 있는 대중의 상태를 파악하고 구체적인 방침을 추진하는 것과 함께 필요한 게 바로 조직가의 의지다. 심동진 조직국장은 눈물을 세 번쯤 흘려봐야 한다고 말했다. 감동의 눈물, 배신의 눈물, 허무의 눈물이 그것이다. 그가 감동의 눈물을 흘렸던 것은 무일푼이던 화물연대 초창기였다. 남의 사무실 창고 같은 데서 먹고 자면서 노조를 조직했는데, 정성이 갸륵했던지 매일 아침 찾아와 복지리 사주면서 해장시켜주던 사람, 겨울엔 전기담요 사주면서 챙기던 사람들이 있었다고 한다. 배신의 눈물은 삼성에서 노조 결성시도 하면서 겪었던 일이다. 노조 만드는 일보다 교섭하는 일이 가장 두려웠다고 한다. 고생고생해서 노조 만들고 나서 교섭에 들어가면 매수가 되든지 뭐가 되든지 사측에 의해 깨지기 때문이다. 삼성조직화 사업에 닥치는 대로 뛰어들어봤지만 너무 배신당하는 일이 많아서 심지어 이건희보다 삼성노동자들이 더 미웠던 적도 있다고 했다. 세 번째 허무의 눈물은 문제가 있을 때에는 찾아와서 상담하다가 해결되면 떠나가거나, 위기에 처한 조직을 천신만고 끝에 복원하니까 외면당하는 경우다. 이럴 때에는 마음을 비워야 한다. 조직화가 자기 세력 만들기는 아니니까 세상에 조직할 노동자들이 많다는 생각으로 다른 곳을 찾아 떠나야 한다는 것이다. 심동진 조직국장은 조직가의 강인한 의지와 능력, 그리고 대중들의 상태가 들어맞아야 조직화 사업이 성과를 거둘 수 있다고 다시 한 번 강조했다. 조직가의 활동지침 계속해서 심동진 조직국장은 조직가로서 명심해야 할 활동지침에 대해 이야기했다. 첫 번째는 투쟁에 나설 때 자신의 몸에 맞는 무기를 지니고 기술을 연마해야 한다는 점이다. 남을 따라 해도 좋지만 자기 처지에 맞지 않으면 독이 될 수도 있다. 1993년 현총련 투쟁의 경우 위원장이 직권조인하고 날라버린 상황이었지만 조합원들이 파업에 돌입하면서 멋지게 승리한 사례다. 정말 교과서에 나올법하게 단계별로 투쟁 수위를 높여가면서 싸워서 이겼고 사람들을 고무시켰다. 그러나 문제는 조건이 다른 사업장에서 같은 전술을 쓴다고 해서 이길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가령 600여 명 있는 사업장인데 조합원 200명이고 그중에서 적극적인 조합원이 50명이라면, 현총련처럼 부서별 파업 돌입은 불가능하다. 투쟁이 확대 상승되는 것이 아니라 앞서나간 단위만 탄압받을 것이 자명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총련 투쟁처럼 해야 승리한다고 주장하며 우를 범하는 사람들이 많다. 다윗이 골리앗을 상대할 때 왕이 쓰던 갑옷과 칼을 거절하고 돌팔매를 선택한 것이 거인을 쓰러뜨린 비결인 것처럼 자기 조건에 맞는 방식을 찾아야 한다. 둘째, 물이 흐를 때 웅덩이를 만나면 채우고 다시 흐르듯, 어디를 조직하면 조직하던 사람이 떠나도 그 단위가 굴러갈 수 있도록 전천후 활동가를 양성해야 한다. 심동진 조직국장은 활동가들이 조직화를 시작한 곳에서 떠나려면 “본인을 복제할 수 있는 확실한 세포를 구축해 놓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최근 전주 버스 사업장에서 민주노조 건설 투쟁이 비교적 잘 되고 있는데, 조합원 가운데 화물연대 투쟁을 경험했던 사람들이 많은 역할을 담당했다고 한다. 지금 당장 성과가 없더라도 그런 사람들을 만들어 놓아야 나중에 기회를 만나면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는 설명이다. 세 번째는 현장에 있는 다양한 모임들을 잘 활용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한 사람씩 늘려가는 방식도 중요하지만 기존의 조직을 활용하는 것도 중요하다. 처음에는 내가 하는 얘기를 귓등으로 들어도 그 사람들을 배척해서는 안 되고, 충분히 친해지기 전에는 느슨하고 넉넉하게 대해야 한다. 좌파들의 고질적 맹점이 처음부터 원칙을 들이미는 것인데 조급하게 굴면 일을 그르친다는 지적이다. 물론 친해지고 나서도 원칙과 규율을 세우지 못하면 어용과 다를 바 없다는 점도 잊지 말아야 한다. 이러한 노력을 통해 현장에서 영향력이 큰 기존 조직을 포섭하는 것이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공동투쟁은 ‘퍼펙트 스톰’처럼 해야 한다. 영화 제목이기도 한 ‘퍼펙트 스톰’은, 위력적이지 않던 소용돌이가 합쳐지면서 엄청난 규모의 파괴력을 지닌 폭풍이 된다는 뜻인데, 공동투쟁 역시 그와 같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화물연대가 철도, 덤프와 공동투쟁을 기획했던 사례를 들면서 공동투쟁의 원칙을 설명했다. 가장 중요한 원칙은 자력갱생이다. 공동투쟁에 돌입하면 적들은 우리를 분할, 각개격파하려 드는데, 공동투쟁을 제안한 조직이 나서서 ‘우리가 계속 남을 테니 제안 받은 단위는 성과를 얻어가라’라는 마음가짐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조합원들이 그런 마음가짐으로 투쟁에 임해야 공동투쟁의 성과를 만들 수 있다. 대부분의 공동투쟁이 수세적이고 품앗이 투쟁에 그치곤 하는데, 여기서 그치지 않고 공동투쟁을 위력적으로 만들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세 번의 눈물 그 후 강연 뒤에는 참가자들이 질문하고 토론하는 시간을 가졌다. 참석자들은 세 번의 눈물을 흘린 다음에 어떻게 극복할 수 있었는지 궁금해했다. 그는 감동의 눈물을 흘릴 때에는 자만하면 안 되고, 배신과 허무의 눈물을 흘릴 때에는 다른 일을 찾아 운동을 지속해야 한다고 답했다. 그리고 배신의 눈물을 흘린 뒤에는 자다가도 벌떡 깰 정도로 힘겨웠다고 회고한다. 하지만 활동을 망설이던 사람들 엄청 꼬드겨서 같이 활동하면서 돈 때려 박게 하고 감옥에도 보내고 했는데 내가 배신당했다고 떠날 수 없는 노릇이라는 것이다. 힘들어도 함께해온 동지들에 대한 책임감으로 스스로를 붙들 수 있었다고 말했다. 다음 질문은 구체적인 조직화 사례에 관한 것이었다. 심동진 조직국장은 2003년 화물연대 파업 당시 조합원들은 임계상태에 있었다고 회고한다. 개별 사업장별로 싸움이 수없이 벌어질 수 있었지만 하나씩 대응하다가는 진이 빠지는 수가 있기 때문에 ‘큰 놈을 쓰러뜨리고 작은 놈을 굴복시키자’는 원칙을 세웠다고 한다. 그래서 2002년부터 꼬박 1년간 준비해서 대정부 투쟁에 나선 것이 2003년 파업이었다. 그는 당장 나서자는 조합원들을 진정시켜 가면서 준비했기 때문에 위력적인 투쟁이 가능했다고 평가했다. 또한 남의 손을 빌린 것이 아니라 자력갱생을 기본 원칙으로 세웠던 것도 중요했다. 맨바닥, 무일푼에서 시작해 사람 모으고 돈 모았으며, 투쟁에 나설 때에도 독자적으로 돌파할 수 있을 정도로 힘을 키웠다고 한다. 그는 화물연대가 2003년에 위력적인 힘을 발휘하며 투쟁했지만, 처음부터 쉬웠던 것은 아니라고 했다. 하지만 어렵다고 해서 투쟁 목표를 근시안적으로 세울 것이 아니라 길게 봐야 한다. 화물연대 출범식을 앞두고 우리가 왜 노동자인지 모르겠다고 해서 교육을 잡아야 할 정도로 정체성이 모호했지만 지속적인 토론과 교육을 통해 노동자로서의 계급의식을 자각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노동기본권 쟁취를 목표로 정부에게 제도개선을 요구하는 투쟁을 만들어 갔다고 한다. 그가 말한 대중운동의 원칙들이 조직화 사례 구석구석에서 빛을 발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달은 져도 하늘을 떠나지 않고 노련한 베테랑 활동가라면 두려움도 없고 흔들림도 없을 것이란 생각과 다르게, 고뇌하고 흔들리면서도 중심을 잡아가고 있음을 보여준 심동진 조직국장. 본인의 경험이 하나하나 묻어나는 이야기라 참가자들에게 더욱 호소력 있게 와 닿았다. 마지막으로 그는 마음을 다잡아 줄 무엇인가가 필요하다고 말하며 시 한수를 소개했다. 梅不賣香(매불매향) - 신흠(申欽) 桐千年老恒藏曲(동천년로항장곡) 梅一生寒不賣香(매일생한불매향) 月到千虧餘本質(월도천휴여본질) 柳經百別又新枝(유경백별우신지) 그가 풀이하기를, 사상이념이 분명해야 오동나무처럼 천년이 지나도 후회 없이 아름다운 노래가 흐르고, 향기를 팔지 않는 매화처럼 힘들다고 변절해서는 아니 되고, 달의 모습이 바뀐다고 해서 본질이 변치 않듯 계급투쟁의 본질도 바뀌지 않으며, 버드나무 가지가 꺾여도 새로 돋아나듯이 노동자는 투쟁에 패배해도 다시 투쟁에 나선다. 그는 평소 이 시를 되새기며 마음을 다잡는다고 한다. 참석자들에게는 그의 삶 자체가 마음을 다잡아 주는 시간이었다.
한 해에 두 번, 정확히 말하면 만 1년 안에 두 번 임금인상을 한 회사가 있다. 서울 구로구에 있는 세일엠텍이라는 사업장에서 있었던 일이다. 노동조합과의 임금교섭으로 2010년 6월에 한 번, 최저임금 인상 적용으로 1월에 또 한 번. 하지만 이런 임금인상을 두 번씩 하는 일은 좋은 일이 아니다. 노동자들은 그게 참 싫었다. 최저임금 간당간당한 저임금의 삶도 싫었다. 그래서 올해는 결의했다. 최저임금(내년)을 넘겨보자! 그리고 살짝 아쉬운 승리를 거뒀다. 최저임금보다 낮은 임금을 받던 세일엠텍 노동자들 세일엠텍은 2009년에 금속노조에 가입했다. 조합원 약 60명, 남부지역지회 사업장치고는 조합원수가 많은 편이었다. 자동차 카시트커버를 생산하는 미싱공장이었고 조합원 대부분이 여성이었다. 현장은 당연히(!) 열악했다. 고개를 숙인 채 하루 종일 서서 미싱을 돌려야 했고 잔업, 특근은 일상이었다. 없을 땐 억지로 연차 쓰고 쉬어야 했다. 버티다 못한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에 가입했고 몇 차례 교섭 끝에 임단협을 마무리했다. 교섭결과가 만족스럽지는 못했지만 일단 노동조합의 안정화가 중요했다. 이듬해인 2010년 임단협 역시 큰 폭의 임금인상을 이뤄내지 못하고(임금 15,000원 인상) 마무리되었다. 조합원들의 불만은 커져만 갔다. 잔업, 특근을 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현실이 원망스러웠고, 어렵다는 말만 되풀이하는 회사가 분노스러웠다. 2011년 임단협은 그렇게 조합원들의 분노에서 시작되고 있었다. 남부지역지회는 올해 2월 출범한 남부지역 전략조직화사업단 ‘노동자의 미래’ 사업에 조직의 사활을 걸고 뛰어들었다. 중소영세사업장의 저임금 비정규노동자들이 밀집한 구로공단에서 미조직노동자 조직화의 전형을 만들어내는 것은 이 지역에 둥지를 틀고 있는 남부지역지회의 사명이었다. 지역에서 사업을 시작하며 올해 제일 중점에 두었던 것은 역시 최저임금문제였다. 최저임금을 받는 사업장이 많았고, 교묘한 위반사업장 역시 존재하는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핵심적 목표는 지역에서 최저임금을 받는 당사자들을 최저임금 인상투쟁의 주체로 세워내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지역에서는 실태조사와 선전전, 페스티발 사업 등이 연이어 진행되었다. 동시에 다른 한축에서는 이미 조직된 노동자들 중 최저임금의 영향을 받는 노동자들을 재조직하기 위한 활동이 진행되었다. 주되게는 세일엠텍, A사업장, B사업장 등이 있었다. 이 사업장의 활동가들과 집담회 등을 진행하며 임단협 시 공동의 대응을 만들어 나가려 했으나, 안타깝게도 여러 사정으로 인해 임단협 공동대응은 힘들어지고 말았다. 이런 상황에서 세일엠텍은 올해 무조건 최저임금선을 돌파하기 위한 투쟁을 진행하게 되었다. 조합원들의 관심도 여기에 쏠려 있었고, 지역에서 하나의 전형을 만들어야 한다는 고민도 있었다. 세일엠텍 내에서 교섭이 몇 차례 진행되었고 회사측 태도는 분명했다. 임금 3만원(그것도 2010년 임금 기준, 2011년 최저임금 인상분 포함)인상. 투쟁에 돌입해야 했다. 7월 4일 4시간동안 경고 파업을 했다. 세일엠텍 분회 결성 이후 첫 파업이었다. 팔뚝질도 어색하고 구호외치기도 힘겨웠다. 아는 노래? 하나도 없었다. 그래도 노동자들은 투쟁에 돌입했고 회사 앞마당에서 파업 집회를 하며 대의원들은 머리띠를 둘렀다. 7월 6일 이날은 금속노조 파업 지침이 내려온 날이었고 서울지부 확대간부들이 세일엠텍 앞으로 왔다. 지역의 여러 사업장과 단체에서도 투쟁에 함께 했다. 조합원들은 이날도 밥 먹고 나와서 4시간 파업을 진행했다. 이번엔 회사 앞 인도. 파업 두 차례 만에 현장 밖으로 나왔다. 조합원만큼 모인 연대대오에 조합원들은 놀랐고 좋아했다. 신나게 파업투쟁을 진행했다. 회사는 난리가 났고, 앰프 줄여달라, 교섭하자며 지회장, 부지회장을 붙잡았다. 일단 이날 이후 집중교섭을 하기로 했고 약 2주간 교섭이 몇 차례 진행되었다. 파업은 노동자들의 학교 7월 22일 교섭을 앞두고 지회 임원들이 모여 앉았다. 최저임금은 날치기로 통과된 상황, 22일 교섭에서도 안이 안 나오면 교섭 결렬을 선언하고 전면적 투쟁에 돌입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상상을 했다. 최저임금이 날치기로 통과된 것에 대해, 최저임금만큼 올리자는 요구 때문에 파업을 해야 하는 현실에 대해 남부지구협 의장(남부지역지회 지회장)이 노동부 관악지청 앞에서 단식농성을 한다면 어떻게 될까? 현장에서는 최저임금 날치기에 대한 분노가 나오고 있었다. 날치기 직후 KBS에서 진행한 최저임금 설문조사에서 70%이상이 날치기된 최저임금에 대해 불만족스럽다고 했다. 노동자의 미래에서 진행한 최저임금 만족도 조사에서도 90%이상의 지역노동자들이 불만족스럽다는 답변을 했다. 날치기로, 턱없이 낮은 수준으로 결정된 최저임금에 대한 지역 노동자들의 분노를 모아낼 수 없을까? 남부지구협 의장이 노동부 관악지청 앞에서 단식농성을 하면서 노동부의 날치기 통과에 항의하고 최저임금도 안주려는 사업장을 고발하고, 지역의 최저임금 현실에 대해 매일 알려낸다면 뭔가 되지 않을까? 지회 임원 셋이 모여 이런 상상을 했다. 그리고 상상을 현실로 만들어보기로 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여러 가지 사정으로 인해 노동부 앞 단식은 무산되었다. 남부지회장은 세일엠텍 회사 안에서 단식에 돌입했다. 잠은 지회 봉고차에서 잤다. 노동부 앞에서의 투쟁이 무산됐지만 사업장에서라도 투쟁을 승리로 만들어야 했다. 조합원들은 왜 단식까지 하냐며 말렸고, 안타까워했다. 하지만 지회는 이미 세일엠텍만의 투쟁이 아닌 상황에서 끝까지 한번 가봐야 했다. 22일 오후 8시까지 이어진 교섭에서도 회사측 안은 나오지 않았으나 회사가 교섭을 한 번 더 하자고 했다. 결렬선언은 한차례 미루기로 하고 25일 다시 교섭이 열렸다. 지회장은 주말 내내 굶었다. 월요일 교섭에서도 회사는 안을 내지 않았고 오후 5시 교섭 결렬을 선언했다. 현장에서 조합원들 간에 토론이 벌어졌다. 이쯤 됐으면 그만하자는 의견도 있었다. 하지만 다시 한 번 찬반투표를 했고 전면투쟁에 찬성하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26일 아침, 조합원들은 출근하자마자 일손을 놓았다. 전면파업은 안 될 거라고 봤던 회사가 몸이 달았다. 아침부터 교섭하자고 졸라서 결국 12시부터 교섭에 들어갔다. 조합원들은 현장에서 신나게 파업하고 놀았다. 영화도 보고 구호도 배우고 노래도 배웠다. 파업은 노동자의 학교가 맞았다. 26일 저녁 결국 회사와 합의를 만들어냈다. 임금 4만원 인상, 일시금 20만원 지급, 11년 최저임금 인상분(130원) 전 직원에게 적용, 내년 1월 임금 15,000원 인상. 한 10%정도 부족한 합의였다. 하지만 조합원들이 그 정도면 됐다 했다. 수고했다고 눈시울을 붉히는 조합원도 많았다. 교섭보고를 하는 지회장도 목이 맸다. 조합원들의 단결이 고마웠고, 부족한 안에 만족해준 것이 감사했다. 최저임금이 최고임금인 비참한 현실을 바꾸자, 바꿀 수 있다! 최저임금은 현실에서 최저임금이 아니다. 많은 중소사업장들에서 최저임금은 임금의 하한선이 아니고, 말그대로 최고임금이다. 노동조합이 최저임금선을 돌파하기 위해 싸워야 하는 현실은 이를 방증한다. 최저임금을 진짜 ‘최저’임금으로 만들려면 여기저기서 최저임금선을 돌파해야 한다. 또한 최저임금으로 인해 동일한 처지-임금의 하향평준화?-에 놓이게 된 노동자들의 단결과 연대를 조직해야 한다. 올해 남부지역지회는 노동자의 미래와 함께 지역 미조직사업, 지역 최저임금 투쟁을 하면서 애초부터 임단협때 최저임금문제를 결합시켜 투쟁을 만들어가려 했었다. 지역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공중전과 조직사업장에서의 지상전의 아름다운 결합. 애초 의도했던 것만큼의 성과는 이루어내지 못했지만 최소한 사업장에서의 승리는 거두었다. 최소한의 희망을 본 것이다. 최저임금 대상자가 최저임금 투쟁의 주체로 나설 수 있는 기획이 필요하다는 점은 분명 옳았다. 최소한 올해 지역지회와 노동자의 미래의 실천은 이를 증명해주었다. 그렇다면 이제 필요한 것은 보다 적극적인 실천이다. 조직 노동자들이 나서고 미조직 노동자들이 함께 할 수 있는 길을 틔워준다면 뭔가 달라져도 달라지긴 할 것이다. 가리봉역, 독산역에서 쏟아져 나오는 수많은 노동자들, 최소한 그들이 최저임금 인상을 위한 서명이라도 해야 한다. 그럴 수 있는 투쟁을 만들어내야 한다. 그러면 바꿀 수 있다.
2011년 7월 30일. 부산의 길목 길목들에서는 그야말로 비상식적인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다. 경찰은 영도로 들어가는 모든 버스를 통제했고 이미 탑승한 승객마저 강제로 끌어내려졌다. 승용차는 물론 오토바이까지 검문 받았고 심지어 걸어가는 사람도 신분증 검사를 하여, 영도주민이 아니면 통과하지 못하게 하였다. 희망의 버스를 ‘절망의 버스’라고 외치며 가만둘 수 없다는 ‘어버이연합’도 이에 가담했다. 용역깡패와 어버이연합은 희망버스 참가자나 시민들에게 무차별적으로 폭력을 휘둘렀다. 하지만 공권력은 이를 방관하다가 시민들이 항의하면 느릿느릿 나타나 “이러시면 안 됩니다” 라고 거들 뿐이었다. 이런 난리통을 거치며 겨우겨우 희망버스가 도착한 영도 안의 상황은 더욱 가관이었다. 2차 희망버스에서 시민과 경찰이 대치하던 도로는 여전히 경찰의 차벽에 의해 막혀있고, 그토록 가고 싶던 85호 크레인이 있는 한진중공업과 3차 희망버스의 집결지인 청학성당으로 가는 모든 골목까지 경찰에 의해 차단되어 있었다. 심지어 한두 명이 통과할만한 골목에도 경찰을 배치하여 영도를 원천봉쇄 하고 있었다. 경찰은 7,000여명의 경찰을 배치하여 그야말로 영도의 모든 길을 꽁꽁 틀어막았다. 한진중공업 정리해고와 김진숙 지도위원의 고공농성 이 모든 사건은 2011년 1월 한진중공업이 400여 명의 정리해고 명단을 발표하면서 시작되었다. 한진중공업은 3년 동안 수주를 하지 못하여 경영상의 위기가 왔다는 이유로 400여 명을 정리해고 할 수밖에 없다면서 노동자들의 일방적인 희생을 강요하였다. 민주노총 부산지역본부의 지도위원이자 한진중공업의 해고자인 김진숙 동지는 “나는 한진 조합원이 없으면 살 이유가 없는 사람이다.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해서 조합원을 지키겠다”는 편지를 남기고 2011년 1월 6일 새벽 85호 크레인에 올라 고공농성을 시작하였다. 한진중공업의 85호 크레인은 단순한 크레인이 아니다. 2003년 129일 농성끝에 김주익 열사를 떠나보내야만 했던 자리이다. 그리고 그 때 그 참혹했던 자리로 김진숙 지도위원이 다시 오른지 벌써 230일이 지났다. 한진중공업 조합원들은 지금까지 정리해고 철회 투쟁을 계속 이어오고 있다. 한진중공업은 정리해고를 철회하고 김진숙 지도위원을 크레인에서 내려오게 해야 한다는 수많은 사람들의 목소리에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다. 사측의 구사대와 용역들로부터 공장 밖으로 끌려나온 금속노조 한진중공업지회 조합원은 정리해고철폐투쟁위원회(정투위)를 조직하여 지금도 85호 크레인이 보이는 공장 건너편에서 투쟁을 이어가고 있다. 희망버스의 출발 희망버스에 지금처럼 많은 사람이 모이게 될 것이라고는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다. 희망버스를 만들었던 것은 주류언론이 통제할 수 없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의 영향이 적지 않았다. 트위터로 전해지는 한진중공업의 소식은 그 어느 언론사의 신문보다 더 빠르고 정확했다. 사측과 언론에서 정리해고가 정당하다는 논리를 만들어냈지만 정리해고의 부당함을 알리는 목소리는 더욱 커져갔다. 그리고 외국에서도 한진중공업의 정리해고의 문제를 알게 되었다. 1차 희망버스가 부산에 도착하는 날. 한진중공업 조합원과 연대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은 한진중공업 조선소 안에 있었다. 한진중공업은 희망버스가 영도조선소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기 위해 몇 가지 조치를 끝낸 상황이었다. 용역을 동원하여 사수대가 지키고 있던 동, 서, 정문을 침탈했고 컨테이너 벽을 쌓아 외부의 출입을 통제하였다. 게다가 85호 크레인마저도 침탈하려는 시도가 있었기에, 조선소 안은 긴장감이 감돌았다. 조선소 안에 있던 사람들은 적은 숫자로 용역과 어렵게 대치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희망버스 참가단이 조선소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하나 둘 모여든 사람들은 점차 많은 숫자가 되었고 결국 전세는 역전되었다. 상황이 크게 바뀌면서 조선소 안에 있던 용역들은 밖으로 쫓겨나게 되었다. 이후 2차 희망버스는 경찰의 최루액, 물대포, 살수차 등 폭력진압에 가로막혀 한진중공업까지 닿지 못했다. 그러고 나서 밤새 도로에서 경찰과 대치가 있었다. 3차 희망버스 때는 경찰이 아예 영도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려 했다. 그리고 8월 27일, 4차 희망의 버스가 서울에서 진행되었다. 한진중공업 정리해고 철회 투쟁 1, 2, 3차 희망버스와 한진중공업의 정리해고가 전국적인 문제가 되면서 한진중공업의 조남호 회장이 마지못해 8월 18일 청문회에 출석하게 되었다. 하지만 많은 이들의 간절한 기대를 비웃기라도 하듯, 오전부터 밤까지 이어졌던 청문회에서 조남호 회장은 답변자세, 화법, 자세, 표정 등을 적어놓은 '청문회 대응문건'을 준비하고, 8월 초 기자회견과 마찬가지로 정리해고는 절대 철회할 수 없다는 입장만을 되풀이할 뿐이었다. 청문회에서도 확인했듯이, 정리해고를 철회할 생각이 전혀 없는 사측에 맞서서 정리해고 철회를 외치는 김진숙 지도위원과 한진중공업 정투위의 투쟁은 더 장기화될 것으로 보인다. 지금도 매일 저녁 7시 30분 한진중공업 길 건너편에서는 한진중공업 정리해고 철회를 요구하는 집회가 이어지고 있다. 앞으로의 희망버스 4차 희망버스는 영도가 아닌 서울로 떠났다. 앞으로도 희망버스는 한진중공업이 정리해고를 철회할 때까지 계속 이어질 것이라고 다짐하고 있다. 희망버스가 조금 더 발전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개인적인 바람을 적어본다. 무엇보다도 먼저 희망버스가 한진중공업을 향하여 출발하던 그 본래의 의미를 잃지 않아야 한다. 희망버스는 주식배당금 등의 기업과 임원의 이익은 다 챙기면서도 경영위기라는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정리해고를 고집하는 한진중공업에 대한 분노와, 정리해고를 철회시키고 조합원을 지키기 위해 35미터 상공의 크레인에 올라간 김진숙 지도위원을 살려야 한다는 마음으로 부산 영도를 향해 시동을 걸었다. 희망버스에 어떤 사람이 참가를 하든 간에 이 목적을 잃어서는 안 된다. 희망버스는 정당에서도 많은 참가를 하고 있으며, 시간이 흐를수록 유명정치인의 참가가 많이 조명되고 있다. 물론 더욱 많은 사람이 한진중공업의 정리해고 철회 투쟁에 참가하는 것은 매우 반가운 일이다. 하지만 이 정치인들에게 한진중공업 조합원들의 투쟁이 가려져서는 안 된다. 한진 정리해고 철회 투쟁이 내년 선거에서 또다시 무원칙한 반MB 신자유주의 선거연합에 한 소잿거리로 이용되는 것은 아닌지 많은 이들이 우려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김진숙 지도위원은 한진중공업 조합원들이 산자와 죽은 자로 갈라지지 않고, 하나로 살아가기를 바라며 크레인에 올랐다. 그리고 한진중공업 조합원들이 절망하지 않고, 85호 크레인 밑을 지켜왔기 때문에 지금의 투쟁이 계속될 수 있는 것이다. 지금 어디를 봐도 대중투쟁은 힘들고 지친 상태다. 누구도 이렇다 할 투쟁의 대안을 제시하지 못한 채 고개를 떨구고 있다. 그런 와중에 희망버스로 이름 지어진 한진투쟁은 말 그대로 우리의 희망이다. 우리는 희망버스로 모아지고 있는 노동자 민중의 요구를 한진중공업을 넘어, 전국의 정리해고 철회 투쟁으로 확대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정리해고 문제뿐만 아니라 저임금 장시간 노동, 간접고용 철폐 등 기본적인 노동권 쟁취를 위한 목소리도 함께 녹여낼 수 있어야 한다. 그 길만이 한진 투쟁을 전국적인 연대의 힘으로 지켜내는 일이고, 고개를 떨구고 있는 노동자 민중에게 한진 투쟁이 희망이 되는 길일 것이다. 정리해고 철회하라! 김진숙 지도위원의 외침은 절절한 외침에 맞서는 자본 측의 역공세는 참으로 터무니없고 치졸한 양상이다. ‘사회의 갈등과 분열’을 조장한다느니, 해고자 한명이 ‘한진중공업을 망하게 한다’, ‘나라 망할 일이다’는 둥. 하지만 한진중공업 정리해고가 부당하다는 것은 이미 <추적 60분> 등의 언론 보도와 청문회를 통해서 만천 하에 드러났다. ‘긴박한 경영상의 이유’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노동자를 정리해고 하는 것은 엄연한 불법이다.(물론 정리해고 자체가 부당하다.) 노동자를 정리해고 하면서 임원의 임금을 인상하거나, 3년간 못 받은 수주를 정리해고 다음에 발표하는 모습들만 봐도 정리해고의 부당함을 알 수 있다. 적자가 난 부분은 조선부분이 아니라 건설부분이다. 또 수빅 조선소 등에 과도한 투자를 벌여 발생한 막대한 이자 부담이 문제가 되고 있는데, 이것은 명확히 영업외 비용 적자이다. 이런 이유를 들어 정리해고를 합리화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 해고문제는‘경영자의 권리’와 같이 사고된다. ‘회사에서 나가라고 하면 나가는 것이지 어쩌겠냐’는 식이다. 그렇다면 정말 이유를 불문하고 해고는 어쩔 수 없는 것으로 정당화되어야 하는 것일까? 사장님, 회장님이 짜르면 노동자들은 그냥 포기해야하는가? 해고는 신성불가침인가? 2009년, 쌍용자동차 투쟁에서 노동자들은 ‘해고는 살인이다’라고 외치며 77일 동안 옥쇄파업을 벌였다. 그 힘겨운 투쟁의 끝에 얻어낸 합의안이 461명의 무급휴직이었다. 하지만 1년의 무급휴직을 거쳐 노동자들을 순차적으로 복직시키겠다는 약속은 전혀 지켜지지 않았다. 결국 지금까지 15명의 노동자와 그 가족이 차례로 죽었다. 우리들은 이미 알고 있다. 해고가 개인을 넘어 가정까지 파탄 내는 사실상의 살인행위라는 것을 말이다. 사람의 목숨까지 앗아가는 정리해고는 ‘더 이상 어쩔 수 없는 것’이어선 안 된다. 우리 주변에는 너무나도 많은 해고가 발생하고 있다. 10대부터 60대 이상까지 수많은 노동자들이 비정규직으로 고용되며 해고는 일상적인 것이 되었다. 사측은 언제나 기업의 이익, 경영의 위기, 유연성과 효율성을 내세우며 손쉽게 해고를 자행한다. 때로는 계약만료, 업체 변경 등을 이유로 명백한 해고마저 해고가 아닌 것으로 둔갑시킨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 사회에서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현 사회는 ‘너무나 경직되어서, 효율적이지 않아서’ 문제가 발생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자본의 막대한 이윤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희생을 강요받고, 생존권과 노동권 같은 기본적인 권리조차 가질 수 없기 때문에 문제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정리해고 문제를 단지 개인의 희생으로 바라봐야 하는가? 한진중공업 정리해고 철회 투쟁은 우리에게 ‘아니’라고 대답한다. 김진숙 지도위원의 절절하지만 단순한 외침, ‘정리해고 철회하라’. 이것은 한진중공업 노동자들만을 위한 외침이 아니다. 그것은 정리해고를 일삼는 이 땅의 자본과 그것에 저항하고자 하는 노동자 민중을 향한 외침이다. 그래서 한진중공업 정리해고 투쟁을 우리는 희망이라고 이름 지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