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는 옮긴이주 인도 뭄바이에서 개최된 활동가총회(Activists Assembly)에 모인 우리 사회운동들은 인도와 모든 아시아인이 벌이는 투쟁에 함께 한다. 우리는 경제, 사회, 환경 위기를 일으키고 전쟁을 낳는 신자유주의 체제에 대한 반대를 다시 한번 주장한다. 전쟁과 심각한 사회경제적 불평등을 반대하는 우리의 운동은 신자유주의의 진면목을 폭로하는 데 일조해 왔다. 우리는 자본주의를 반대하고 새로운 대안을 모색하기 위하여 여기에서 단결하였다. 우리의 저항은 치아파스와 시애틀, 제노아에서 시작하였고, 2003년 2월 15일 미국정부와 그 동맹국들이 자행한 전지구적이며 지금도 진행 중인 전쟁전략을 규탄하기 위한 전세계적인 대규모 시위를 조직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이러한 저항을 기반으로 칸쿤에서 WTO에 대한 승리를 이끌어냈다. 이라크 점령은 군사주의와 초국적 기업의 경제지배 간 연관성을 전 세계에 보여 주었다. 또한 우리가 투쟁하는 이유가 정당함을 보여줬다. 사회운동과 대중조직으로서 우리는, 신자유주의 세계화, 제국주의, 전쟁, 인종주의, 카스트 제도, 문화제국주의, 빈곤, 가부장제도, 그리고 성적 지향과 성정체성을 포함한 모든 종류의 차별 - 경제, 사회, 정치, 민족, 성별, 성적 지향에 대한 차별 - 에 맞서 투쟁하겠다는 결의를 다시 한번 확인한다. 또한 서로 다른 능력을 보유하고 있거나 에이즈와 같은 불치병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모든 종류의 차별에 대해서도 반대한다. 우리는 사회정의와, 천연자원(토지, 물, 종자)에 대한 접근권, 인간과 시민의 권리, 참여민주주의, 국제조약에서 보장하고 있는 남녀 노동자 모두의 권리, 여성의 권리, 그리고 모든 인간의 자기결정권을 위하여 투쟁한다. 우리는 평화와 국제협력을 지지하며, 공공 서비스와 기본생활이 보장되는 지속가능한 사회를 증진시킨다. 동시에 여성에 대한 모든 사회적․가부장적 폭력을 반대한다. 우리는 3월 8일 국제여성의 날 대중투쟁을 촉구한다. 우리는 국가테러리즘을 포함한 모든 종류의 테러리즘에 투쟁한다. 동시에 대중운동을 범죄화하고 시민행동을 제한하기 위하여 테러리즘을 이용하는 것에도 반대한다. 소위 테러방지법은 전 세계적으로 시민의 권리와 민주적 자유를 제한하고 있다. 우리는 농민, 노동자와 도시빈민의 투쟁, 그리고 가정과 일자리, 토지와 자신의 권리를 박탈당할 위험에 있는 모든 이들의 투쟁을 옹호한다. 또한 예컨대 유럽의 연금과 사회보장제도가 현재 직면한 사유화를 전복하고 만인의 공적 재산을 보호하기 위한 투쟁을 옹호한다. 천연자원과 민주주의, 그리고 주권을 방어하기 위해 볼리비아인들이 성공적으로 전개한 대규모 투쟁은 우리 운동의 힘과 잠재력을 증명해 준다. 동시에 세계 곳곳에서 농민들은 식량주권과 민주적 토지개혁을 요구하면서, 초국적 기업 및 신자유주의적 농업정책에 투쟁하고 있다. 4월 17일, 국제 농민투쟁의 날 모든 농민들이 단결할 것을 촉구한다. 우리는 인도의 사회운동 단체와 대중조직들이 벌여 온 투쟁을 함께 한다. 이들과 함께 우리는, 종교와 민족에 근거하여 폭력과 종파주의, 배제와 민족주의를 낳는 정치적․이데올로기적 권력을 규탄한다. 전지구적 정의를 위해 지역사회를 조직화하는 활동가들을 협박하고 구속, 고문, 암살하는 것을 규탄한다. 또한 우리는 카스트, 계급, 종교, 성별, 성적 지향과 성정체성을 이유로 한 차별을 비판한다. 나아가 문화적, 종교적, 전통적 차별관행을 통해 여성에게 가해지는 폭력과 억압의 영속화를 규탄한다. 우리는 정의와 평등, 인권을 위하여, 특히 달리트[불가촉천민]와 아디바시[인도 토착민] 그리고 가장 학대받고 억압받는 사회계층의 권리를 위하여 투쟁하고 있는 인도와 아시아의 사회운동과 대중조직의 노력을 지지한다. 인도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신자유주의적 정책은 달리트가 과거부터 고통 받아 온 사회적 억압과 배제를 더욱 악화시켰다. 이러한 모든 이유로, 우리는 전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소외계층의 투쟁을 지지하며, 달리트가 호소하는 사회적 지위 획득을 위한 행동의 날에 세계 모든 이들이 동참할 것을 촉구한다. 정당성의 위기에서 탈출하기 위해, 반민중적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세계 자본주의는 전쟁과 폭력을 사용하고 있다. 우리는 각 정부들이 제국주의와 전쟁, 군비지출을 멈추어야 한다고 요구한다. 또한 인류와 지구상 모든 생명에 위험이자 위협인 미군기지의 폐쇄를 요구한다. 우리는 비에께스에 있는 미군기지를 폐쇄시킨 푸에르또리꼬 민중들의 모범을 따라야 한다. 전쟁을 반대하는 것은 전 세계에 걸친 우리 운동의 중요한 투쟁의 목표이다. 우리는 3월 20일 미국과 영국, 그 동맹국들에 의한 이라크 침공과 점령에 반대하는 국제행동의 날에 세계 모든 시민이 동참할 것을 호소한다. 가장 광범위한 참여와 대중투쟁을 위하여 각국의 모든 반전운동이 자체적으로 합의와 전술을 만들어내고 있다. 우리는 점령군의 즉각 철수를 요구한다. 또한 경제제재조치와 전쟁으로 인한 모든 피해를 스스로 복구할 권리뿐만 아니라 자기결정권과 주권을 이라크 민중이 가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테러리즘과의 전쟁은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 일어나고 있는 전쟁과 점령을 계속 유지하려는 구실일 뿐만 아니라, 지구촌을 협박하고 공격하기 위한 명분으로 이용되고 있다. 동시에 미국은 쿠바에 대해 불법적인 경제제재조치를 지속하고 있으며, 베네수엘라를 불안정하게 만들고 있다. 올해 이스라엘의 인종분리 정책에 저항하기 위한 3월 30일 팔레스타인 민중의 투쟁에 모든 사람이 최대한의 지지를 보내줄 것을 촉구한다. 우리는 자신들의 이익을 위하여 종교적․민족적․인종적 갈등과 종족간 충돌을 일으키고 있는, 또한 민중의 고통을 증대시키고 증오와 폭력을 증폭시키고 있는 제국주의 세력을 규탄한다. 전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분쟁의 80% 이상이 국내적인 것이며, 특히 아프리카와 아시아에 악영향을 미치고 있다. 세계 빈곤국가의 지속 불가능한 상태에 이른 외채와 이를 이용한 정부, 초국적 기업과 국제금융기구의 강제력을 비판한다. 우리는 제3세계의 부당한 외채에 대한 완전하면서도 조건 없는 탕감과 거부를 강력하게 요구한다. 기본적인 경제․사회․문화․정치권의 충족을 위한 전제조건으로서 제3세계에게 가해진 오랜 수탈을 상환할 것을 요구한다. 특히 우리는 아프리카 민중과 사회운동조직의 투쟁을 적극 지지한다. 다시 한번 우리는, 전 인류에 대한 수탈에 가장 큰 책임을 지고 있는 G8, IMF, 세계은행을 반대한다. 우리는 FTAA[미주대륙자유무역지대], NAFTA[북미자유무역협정], CAFTA[중미자유무역협정], AGOA[아프리카성장및기회법], NEPAD[아프리카개발을위한새로운파트너쉽], 유럽지중해경제통합, AFTA[아시아자유무역협정], ASEAN[동남아시아국가연합]과 같은 지역간, 양자간 자유무역협정을 거부한다. 우리는 공동의 적인 WTO에 대한 투쟁 속에서 단결한 수백만의 사람들이다. 토착민들은 모든 생명체에 대한 특허, 생물다양성과 물, 토지에 대한 노략질에 저항하며 싸우고 있다. 우리는 공공서비스와 공적 재산의 사유화에 반대하며 단결한다. 결코 사유화될 수 없는 삶의 원천인 물에 대한 권리를 위해 모든 사람들이 투쟁할 것을 호소한다. 우리는 이미 사유화되었거나 초국적 기업이나 사적 영역으로 이전된 공공 서비스와 공적 재산, 그리고 천연자원을 통제할 수 있는 권리를 회복하기 위하여 노력하고 있다. 우리가 칸쿤에서 승리한 가운데, 이경해 열사의 죽음은 “자유시장” 질서에서 배제당하고 있는 전 세계 수백만 농민, 민중들의 고통을 상징한다. 그의 자결은 WTO를 반대하는 우리의 투쟁을 상징한다. 이것은 WTO를 부활시키려는 어떠한 노력에도 반대해야 한다는 우리의 결의를 증명하는 것이다. 농업과 식량, 건강, 물, 교육, 천연자원과 공적 재산으로부터 WTO는 손을 떼어라! 이러한 결의 속에서 WTO 각료회의가 열리게 될 홍콩이든 다른 어느 장소이든 세계의 사회운동과 대중조직들이 반대투쟁에 동참할 것을 호소한다. 사유화 반대투쟁에, 공적 재산과 환경, 농업, 물과 건강, 공공 서비스와 교육을 옹호하기 위하여, 우리의 모든 노력을 결집하자. 우리의 목적을 이룩하기 위하여, 사회운동네트워크와 우리의 투쟁역량을 강화해야 함을 다시 한번 주장한다. 투쟁을 지구화하라! 희망을 지구화하라!
현재의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노무현 정권은 어떤 길을 택할 것인가? 미래에 대한 전망과 대안의 부재는 노무현 정권의 조건이다. ‘참여적 발전(참여와 발전의 결합)’이란 참여라는 이데올로기에 근거하여 대중을 동원하고, 전망과 정책의 부재를 참여로 대체하려는 노무현 정권의 전략이다. 노무현 정권의 정책은 동북아 중심으로 성장, 번영한다는 구상으로 수렴된다. 이의 핵심은 자본유치이다. 그러나 지난 해 극심한 경기침체와 가계파산, 생계형 자살 증가와 같은 삶의 불안은 노무현의 구상의 실효성에 의구심을 낳았다. 자본도 노동도 강력한 불만을 제기했으며, 사회적 갈등이 증폭되었다. 결국 노무현은 자신의 재신임을 내걸고, 일정정도의 정국주도력을 장악했지만 각종 사회갈등과 지배세력 내의 갈등을 관리해야 하는 과제를 안았다. 이제 노무현은 “투자활성화를 통한 성장잠재력 창출 - 일자리 창출”이라는 정책 방향을 내놓고, 위기관리를 유지하고자 한다. 적극적인 외자유치와 기업의 투자 활성화를 위한 제반 여건을 조성하기(대외개방, 노동 유연화, 금융시장 안정화 등) 위해 모든 경제․사회 정책이 구상되었다. 이러한 정책은 대중의 기본권과 양립하기 어려운 것들이다. 따라서 갈등과 저항은 필연적이다. 하지만 이를 관리하기 위한 사회통합 정책은 미봉책에 불과하다. 게다가 지금의 위기는 경제위기로 국한되지 않는 사회의 해체, 이데올로기적 국가기구의 위기를 동반하고 있다. 가족의 해체, 교육의 붕괴는 노동의 불안정화와 중첩되는 현상이면서 동시에 대중의 삶의 고통과 불안을 가중시키는 원인이다. 더군다나 가족과 교육은 대중의 삶에 매우 중요한 문제이지만, 대부분 ‘사적인’ 문제로 치부된다. 자신의 삶과 자신의 공동체 자체가 파괴될지도 모른다는 공포는 대중의 실리주의를 더욱 자극한다(포섭에 대한 기대와 배제에 대한 공포). 실리적 요구를 중심으로 한 코퍼러티즘적인 협약에 대한 대중의 선호-행정기구와 각각의 대중의 실리(소위 이익집단)가 직접 갈등을 조율하고 타협하는 방식-가 일반화된다. 이러한 상황에선 정당의 역할에 대한 의문이 제기된다. 정당정치는 행정부의 관리 방식의 효율성에 미달하는 무능력한 것이고, 대중은 자신의 삶에서 의회정치의 중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하지만 정치적 안정성의 확보는 지배세력들에게 사활적인 과제이다. 따라서 ‘정치개혁’이 중요한 쟁점이 된다. 정치개혁의 목적은 효율적인 위기관리, 갈등조정의 체제를 구축할 수 있도록 정당의 역할을 조정하는 것이다. 정당은 기존의 이념지향을 벗어나서 전국정당, 무지개 정당이 되어야 한다. 모든 국민을 아우를 수 있어야 위기관리와 갈등 조절도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노무현 정권의 ‘참여적 발전’은 대중을 동원하고 동시에 대중들의 불만과 갈등이 급진적으로 전화될 수 있는 능동적 요소를 무력화하는 전략이지만, 이 역시 모순과 갈등의 여지가 많다. 참여 이데올로기를 근거로 대중을 동원하고, 이러한 동원이 대안과 전망의 부재를 메꾸어 사회의 통합을 이뤄내고자 한다. 하지만 참여의 논리가 극도의 실리주의에 기초하기 때문에(참여한 자만이 수혜를 얻을 수 있다는), 참여를 통한 합의는 누구도 만족시킬 수 없는 결론을 낳을 뿐이다. 오히려 갈등은 증폭되고, 다양한 요구들이 충돌하며 문제는 해결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 그렇지만 정권에게는 ‘참여’ 자체가 중요한 것인데, 이미 참여는 책임을 전제로 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상황에서 민중운동은 어떻게 할 것인가? 민중운동이 노무현 정권의 ‘참여적 발전’의 동원 대상에서 제외가 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민중운동 내부, 노동자 대중 내부의 분할을 심화시키고, 일부를 포섭하는 것은 정권에게 중요한 과제다. 좋았던(?) 옛날을 미래의 전망으로 갖는 것은 정권과 지배세력의 관리방식과 공명하는 것이다. 대중의 실리적인 요구에 기반을 둔 이런 대응은 대중의 운동에 대한 불신과 대중의 수동성을 증가시킬 뿐이다. 현재의 위기가 이러한 실리적 요구를 만족시킬 수 없는 상황을 의미한다는 것을 정확하게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다면 현재 대중이 겪고 있는 고통과 삶의 해체가 운동에게 어떤 의미를 주는지, 어떻게 이들의 불만을 능동적으로 조직할 것인지를 차분히 고민해야 한다. 노무현 정권의 정치과정 2002년 대선 당시, 노무현은 이질적인 지지층들을 일시적으로 규합해서 수권에 성공했다. 이는 서로 다른 집단들의 이해와 요구를 두루 만족시킬 수 있는 사람은 노무현 자신이라는 희망의 조작을 통해 가능했다. 하지만 노무현 정권의 비전과 정책방향은 이미 정해져있었다. 철저히 신자유주의 개혁 방향에 자신의 조타수를 맞출 수밖에 없는 것이 그 조건이다. ‘글로벌 스탠다드’의 진정한 의미는 바로 이것이다. 신자유주의 정책을 추진하는 과정은 국민의 갈등과 불만을 야기했지만, 노무현 정권은 그들의 정책을 포기할 수 없었으며 국민들의 불만과 불안에서 비롯되는 혼란을 수습할 수도 없었다. 게다가 당선 직후 터져 나온 대통령 측근 비리 문제는 대선자금 문제, 불법정치자금 문제로 일파만파 되었다. 물론 이런 무능과 부정부패는 노무현만의 문제는 아니다. 자본주의의 구조적 위기라는 현 상황에서 위기를 봉합하고, 지연시키는 것을 제외하고는 어떠한 대안이나 비전도 제시할 수 없는 지배세력 전반이 직면한 문제이다. 이 문제의 근간에는 삶의 파탄과 사회의 해체에 직면한 노동자 대중의 불만이 놓여있으며, 따라서 핵심은 어떻게 이 불만을 관리(혹은 조직화)할 것인가이다. 이러한 노무현 정권의 대응의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국민들에게) 재신임을 묻겠다”는 대통령의 발언으로 비롯된 소위 ‘재신임 사태’다. 경제위기와 이로부터 다양한 갈등과 불만들이 드러나고 동시에 지배계급 내부의 각 분파간의 갈등 또한 첨예해진 상황에서 노무현은 ‘재신임 국민투표’를 제시했다. 재신임 선언은 “대통령 자신과 국가의 위기, 둘 중 하나를 택하라”는 협박에 다름 아니었다. 허나 이 ‘국민협박극’은 역설적이게도 ‘국민투표’라는 대의제 민주주의 체제에서는 가장 민주적인 기제를 통해 이루어질 판이었으니, 이만큼 노무현 정권이 말하는 ‘참여’의 본질을 보여주는 사례도 없을 것이다. 결국, 노무현이 말하는 ‘참여’란 비전과 대안이 없는 지배계급의 무능을 참여를 통해 국민과 대중에게로 전가하는 것일 뿐이다. 사람들을 참여시켜 합의를 도출하는 것, 이 합의로 비전과 대안의 부재를 대체하는 것이 ‘참여’ 논리의 핵심이다. 그리고 참여정부의 참여에는 경계가 이미 정해져있다. 당연히도 ‘신자유주의 정책 개혁을 어떻게 잘 추진할 수 있을 것인가?’가 그 기준이며, 이에 동의하지 않는, 혹은 동의할 수 없는 수많은 사람들은 배제된다. ‘참여’를 매개로 한 노무현 정권의 정치과정은 이후 더욱 강화될 것이다. 17대 총선에는 노무현의 재신임 문제가 달려있다. 정권의 사활이 걸린 이번 총선에서 알맹이 없는 선심성 공약이 쏟아져 나오겠지만, 그것이 결국 ‘공약’일 뿐인 조건에서 ‘참여’는 더욱 강조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정부가 말해온 ‘노사관계 선진화 방안’은 요즘 ‘일자리 창출을 위한 사회적 협약 체결’이라는 내용을 부각시키고 있다. 이는 현재 대중들의 삶의 문제가 되고 있는 실업의 문제를 노동자들을 참여시키는 가운데 해결하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기업하기 좋은 나라’라는 구상 속에서 도출되는 것이라는 점이 문제다. 그리고 현재 있는 일자리를 쪼개는 방식은 궁극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지만, 정권과 지배세력은 이 이상의 방안을 제시할 수 없는 상황이다. 이로부터 또 다시 갈등은 촉발되겠지만, 정권은 계속해서 ‘참여’를 통한 합의를 강조할테고,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 세력들에겐 폭력과 배제가 남겨질 것이다. 한국 사회가 처해있는 조건과 노무현 정권의 정책 전망 자본투자에 우호적인 환경을 창출하기 위해 지속적인 신자유주의 개혁은 이미 주어진 방향성이다. 지난 1년 노무현이 갈팡질팡하는 행보 속에서도 계속해서 제출했던 각종 로드맵은 한국사회 전반에 걸쳐 이 개혁을 실행하기 위한 기본 구상이다. 애초에 노무현은 ‘동북아 중심 국가 실현’을 한국 사회 발전 전략으로 내세우고, 이를 실현하기 위한 조건을 창출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동북아 중심 국가의 핵심에는 외국인 자본 유치가 필수적인 바, 자본투자에 우호적인 환경을 창출하는 것이 그 조건이 된다. 그리고 이는 끊임없이 민중들의 기본권(생존권, 민주주의 등)과 충돌할 수밖에 없었으며 그로 인한 갈등이 다양하게 폭발했다. 게다가 지난 해 지표상의 경제성장률이 2%로 하락하면서 경제가 악화되었다는 평가들이 주를 이루었는데, 현실에서 체감되는 위기는 훨씬 심각했다(경제위기를 넘어선 사회적 위기라 할 만하다: 생계형 자살 급증, 개인신용불량자 급증, 출산율 저하 등). 물론 이러한 현실이 세계화된 시대의 한국경제의 발전전략으로서 ‘자본유치형 국가’라는 방향을 바꾸지는 못한다. 이는 DJ 정권의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을 거치면서 형성된 한국 사회의 기본 방향이다. 문제는 이러한 갈등과 불안 요소들을 제어하면서 신자유주의 개혁을 지속적으로 추진할 것인가이다. 올해 경제전망에 대해서는 부르주아 학자들은 4%~5%의 경제성장률을 예상하면서 대체적으로 회복세에 진입할 것이라는 전망을 제시하고 있다. 그 근거로는 세계경제(미국을 비롯한 중국과 유럽 경제)의 성장이라는 대외여건의 개선을 제시하고 있지만, 세계경제의 성장이 수출 증가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추측일 뿐, 구체적인 근거는 없다. 오히려 이를 전제로 회복세에 접어든 경제를 발판으로 동북아 중심국가를 실현하기 위해서 전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를 위해서는 성장동력을 확충하는 문제가 시급하다는 요구가 주를 이루는데, 그들이 성장잠재력의 장애로 꼽고 있는 것은 다음과 같다: 고용 없는 성장(만연된 실업), 경제 시스템의 낙후성(노사분규, 기업의 투명성 등), 소극적인 대외개방(FTA, 서비스 시장 개방 등), 사회의 양극화로부터 비롯된 사회적 갈등(서민들의 생활 안정). 최근 화두가 되고 있는 ‘고용 없는 성장’은 경제가 성장함에도 고용이 증가하지 않는 현상을 말한다. 이의 원인으로는 그나마 수출 증대에 기여하고 있는 IT 산업의 고용흡수 능력이 그다지 크지 않다는 것, 제조업의 중국진출로 인한 공동화 현상과 투자 부진으로 인한 신규채용 미비 등을 들고 있다. 그러나 이는 한국경제의 위기를 신자유주의 개혁을 통해 지연시키려는 시도 속에 이미 예정되어있던 결과이다. 이미 97년 외환위기 이후로 추진된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은 만연된 실업과 불안정한 고용을 노동시장의 일반적인 조건으로 만들어왔다. 그리고 한국경제가 (금융, 자본 시장에) 자본투자를 유치하여 성장하겠다는 전략을 취하는 바, 제조업 부문이 성장동력일 수 없다는 점은 전제된 바이다. 그럼에도 최근 고용/실업의 문제가 새삼스레 부각되고 있다면, 그것이 가지는 효과에 주목해야 한다. 재정경제부는 2004년 연두 업무보고에서 ‘투자활성화를 통한 일자리 창출’을 최우선 정책으로 꼽았으며, 이를 올해 경제정책의 기본 방향성으로 삼고 있다. 그러나 현재 상황에서 이전과 같은 안정적인 일자리를 공급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유연한 노동시장은 국내 기업뿐만 아니라 초민족적 자본의 요구이며, 신자유주의 개혁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유일한 길은 “기간제 고용에 대한 규제 완화, 해고관련 규제 완화 등 노동시장 유연화 정책을 계속 추진함으로써 다양한 고용행태를 보편화시켜 잠재적인 노동수요가 고용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정책적인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다. 이는 지금까지 추진해온 고용, 실업 정책의 맥락과 다를 바 없다. 동시에 이 말은 지금 재경부가 말하는 '일자리 창출' 정책이 실효성이 없다는 뜻이다. 실제로 정부가 솔선하여 고용창출에 앞장서겠다며 생색을 내고 있는 공공부문 일자리 창출과 청년실업대책도 그 대부분이 임시직, 직업훈련, 해외연수와 같은 단기처방일 뿐이다. 하지만 이 사실은 누구보다도 정권 스스로가 잘 알고 있으며, 따라서 고용 없는 성장의 구조적 원인을 해결해야 한다는 논리 하에 기업의 투자활성화가 중요해진다(일자리 확충의 주체는 기업이고, 기업의 투자가 증가해야 일자리도 늘릴 수 있다). 결국 일자리 창출 정책의 핵심은 일자리가 아니라 투자이다(기업하기 좋은 나라). 모든 경제․사회적 정책의 방향성은 투자를 활성화하기 위한 쪽으로 맞춰진다. 자본의 자유로운 이동과 투자의 안정성을 보장하기 위해 양자간․다자간 자유무역협정과 WTO 협상은 필수적이고 확대되어야 하며, 교육과 의료 등의 사회서비스 산업에 있어서 지나치게 공공성을 강조하는 것은 자본의 투자처를 축소시키는 일이다. 포섭의 기대와 배제의 공포 여기서 핵심적으로 보아야할 부분은 신자유주의 개혁이 필연적으로 동반하는 불안정한 삶과 만연한 실업이라는 민중의 불만을 다시금 자본의 투자를 위한 최적조건을 형성하기 위한 근거와 동력으로 삼는 역설이다. 우선 ‘동북아 경제중심 국가’라는 비전이 제시되었다. DJ의 경제개혁을 통해 한국 경제는 초민족적 자본들에게 매력적인 투자처가 되어 자본을 유치하는 것 외에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 하에서 살아남을 방도가 없게 되었다. 하지만 이미 지적했듯이 자본의 자유로운 이동을 보장하고, 수익을 보장하기 위한 개혁은 끊임없이 민중의 기본권과 충돌한다. 노무현 정권은 출범 이후 외자 유치를 위한 조건을 갖춘 한국의 미래로서 ‘동북아 경제 중심’을 제시했지만, 이를 진전시키는 데에는 어려움을 겪었다. 경제자유구역법 저지 투쟁, 화물연대의 파업, FTA 체결 반대 투쟁 등 노동자 민중의 저항이 끊이지 않았다. 모두를 행복하게 해주겠다는 그의 약속에 대한 기대는 누구도 만족할 수 없는 조건에서 더욱 커다란 불만과 갈등을 가져왔다. 하지만 노무현 정권이 택할 수 있는 다른 길은 없다. 남은 것은 이 갈등과 불만이 체제의 위기로 전화하지 않도록 사활을 걸고 관리하는 수밖에 없다. 하반기 노무현이 제시한 “소득 2만불 시대로 나아가자!”는 구호는 그 내용에서는 동북아 중심 국가 구상과 전혀 다른 것이 없는 수사에 불과하지만, 나름의 이데올로기적 효과가 있었다. ‘소득 2만불’이라는 표현은 동북아 중심 국가보다 훨씬 직설적이며, 그만큼 실리적인 기대를 자극할 수 있었다. 이는 한국경제가 “마의 1만불 벽을 넘어서 선진국으로 진입하느냐, 지금 이 상태에서 주저앉느냐”하는 기로에 서있다는 의식을 확산시켰고, 경제위기 상황과 맞물려 더욱 커다란 위기감을 자극했다. 누구도 지금과 같은 고통스러운 상황에 주저앉고 싶지 않다. 소득 2만불 시대를 실현하고, 동북아 중심 국가로서 번영을 누리는 것은 위기감 속에서 합의된 한국 경제의 유일한 미래가 되었다. 그리고 이에 저항하거나, 반대하는 세력은 ‘나라를 망치는’ 세력으로 가차없이 짓밟아야 했다(작년 하반기 노동자, 민중의 투쟁에 대한 탄압을 기억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노무현 정권은 이와 같은 강요된 합의를 기반으로 본격적인 관리 방식을 실행에 옮기고자 한다. ‘투자활성화를 통한 일자리 창출’과 ‘성장잠재력 배양과 경쟁력 강화’라는 정책 목표의 핵심은 ‘투자’에 있지만, ‘고용과 실업’ 그리고 나아가 성장과 발전이라는 전 국민적인 의제를 매개로 하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노동자운동을 비롯한 민중의 저항과 운동에는 매우 위험한 것이다. 일례로 노무현 정권은 이 정책 과제 중의 하나로 일자리 창출을 위한 사회적 협약 체결 선언을 제시했다. 고용과 실업은 노동자운동 일부가 사회적 협약에 참가하는(혹은 거부할 수 없는) 명분이 될 수 있다. 하지만 협약의 결과, 현재의 불안정한 노동은 제거되지 않고, 오히려 심화된다. 노동의 불안정화가 심화되는 것 자체도 커다란 문제지만, 더욱 심각한 문제는 이러한 사회적 협약이 ‘포섭과 배제’라는 정권의 위기관리방식의 더욱 강력한 계기가 된다는 점이다. 삶과 사회가 위기에 처한 고통스러운 현실은 불안과 공포를 가중시킨다. 이런 상황에서 지금 자신이 가진 것이라도 지켜야한다는 실리주의의 등장은 당연한 현상이다.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층-중산층과 화이트칼라 노동자 일부-은 자신의 안정을 지키려할 것이다. 이들은 포섭과 참여의 대상이 된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다수-광범위한 빈곤층, 실업과 반실업 상태에 놓인 대중(이들의 대다수는 불안정 노동층이다), 이주노동자, 여성, 농민-는 배제된다. 게다가 이들의 저항은 용납할 수 없는데, 포섭된 대상들의 안정을 위협하기 때문이다. 노동자 대중 내부의 분할은 극심해지고, 결과적으로 (포섭된) 대중이 (배제된) 대중의 투쟁과 저항을 억압하는 비극을 낳을 수 있다. 게다가 이미 만연한 실업의 문제를 국정 가장 우선 과제로 내세우고 있는 지금의 상황을 엄밀히 보아야 한다.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이후 문제가 되어왔던 실업과 고용의 불안정이 방치되었을 때 그 자체로 커다란 사회적 위험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위에서 지적한 전반적인 맥락을 보았을 때, 오히려 노무현 정권의 노동자에 대한 포섭과 관리의 적극적인 의지를 드러내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자본의 투자에 걸림돌이 되어온 노동자 대중의 저항을 순치하겠다는 강력한 구상이다. 만일 노동자운동이 사회적 협약을 거부한다면(이미 실리주의가 만연한 상황에서 노동자운동이 이를 거부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지만), 이는 전 국민적인 의제를 거부하고, 한국사회의 미래를 망치는 것이 된다. 그 결과 노동자운동은 이데올로기 공세와 물리적 탄압에 직면할 것이며, 이는 또 다시 노동자 대중 내부의 분할을 심화시켜 운동의 가능성을 점차 어렵게 만들게 된다. 정당정치의 위기와 정치개혁 신자유주의 개혁 하에서 정당정치는 사회적인 갈등과 위기를 조정하지 못하고, 정치 자체가 위기에 빠진다. 정당은 더 이상 국가행정에 대해 계급적 이익을 정치적으로 조직하고 대표하는 역할을 맡고있지 못하다. 정당은 이미 정책결정에 실질적인 관여를 못하고 있으며, 정당간에 정책적 차별성도 거의 없다. 국회의 입법활동이란 행정을 보조하는 역할을 넘지 못하는 수준이다. 정책의 큰 방향은 ‘글로벌 스탠다드’로 이미 주어져있는 것이다. 실질적인 정책결정은 행정부를 통해서 이루어지고, 행정부는 사회적 갈등을 조정하고 해결하면서 신자유주의 개혁을 실행해야 한다. 정책의 정당성 확보는 대의제 민주주의 기관인 국회를 통해서가 아니라 행정부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이로부터 정당과 의회정치의 역할을 축소되고, 행정기구의 역할과 권력은 증대된다. 더욱 효율적이고 강력한 위기관리체제가 요구되기 때문이다. 위기를 관리하는 행정적이고 기술관료적인 방식이 정치를 갈음한다. 따라서 정당의 역할도 조정되어야 하는데, 그 핵심은 전문성과 효율성을 갖추는 것이다. 이를 위해 정당 외부의 다양한 동원기구, NGO 등과 파트너쉽을 형성하며 이들을 활용한다. 정당 또한 행정부처럼 정책적 전문성을 갖추고, 어떤 이념보다는 사회적 갈등을 행정적인 방식으로 조정할 수 있어야 한다. 따라서 이렇게 정당의 역할을 조정하기 위해선 정치개혁이 중요한 쟁점이 된다. 17대 총선을 앞두고 정치개혁 논의는 한층 가열되고 있다. 정치개혁이라는 쟁점은 이미 지난 대선 시기부터 수면 위로 부상한 문제지만, 현재는 가히 ‘정치의 과잉’이라 부를 수 있을 정도로 정치개혁이 핵심적인 화두가 되었다(흡사 정치가 바뀌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처럼). 하지만 이는 외양면에서 부풀어있는 측면이 크다. 실제 대중은 의회를 중심으로 한 정치가 자신의 삶에서 중요하다고 여기지 않는다. 최근 정당의 지지도를 묻는 각종 여론조사에서 나타나는 바, 지지정당이 없다고 말한 부동층이 40~45%에 달하고 있으며, 투표율은 더욱 낮아질 것이란 예상이 우세하다. 게다가 각 정치세력들의 정치개혁 의제나 정책에서도 별 차이점을 찾아볼 수 없다. 비례대표제 확대, 선거구 조정과 같은 문제가 정치개혁의 성패가 달린 문제처럼 선전되고 그에 대한 입장이 각 당의 차이 같지만, 이는 각 정당이 자신에게 유리한 지분확보를 위한 사활적인 과제이지 정치개혁 자체의 핵심은 아니다. 한편 현재 달아오르고 있는 정치개혁 논의는 ‘인적청산과 세대교체’가 주류를 형성하고 있다. 열린우리당, 한나라당 모두에게 이번 총선의 모토는 “일하는 정치(전문성 강화), 깨끗한 정치(정치자금 투명화)로 경제를 되살리자(신자유주의 개혁)!”로 요약된다. 시민운동진영의 이번 총선대응의 주된 흐름인 ‘총선시민연대’의 낙천낙선운동과 ‘2004 총선 물갈이 국민연대’의 당선운동 흐름도 이 맥락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대중의 삶에서 정치의 중요성이 사라진 상황은 몇몇 참신하고 전문성 있는 인물교체로 극복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부패청산, 젊은 정치, 일하는 정치라는 쟁점이 국민을 인입하고 있다면, 이는 순전히 이데올로기적인 상황만은 아니고, 이러한 정치개혁을 통한 현실적인 실리가 존재한다는 말이다. 대선 당시 노무현 정권의 핵심 지지층이었던 386세력은 현실적 실리의 최우선 이해당사자이다. 정치적으로 이들은 길었던 ‘3김 시대’를 거치며 본격적인 정치적 진출이 지체되었던 계층이다. 게다가 이제 386들은 이제 40대에 접어들었으며, 계층으로 보자면 대졸중산층(상대적으로 안정적인)이다. 자신의 안정적인 생활을 유지하려는 경향을 가지며, 포섭될 희망이 강력한 계층이다. ‘세대교체’는 3김 시대의 구태의연한 세력들로부터 자신들에게로 정치적 발언력과 권한이 이전되는 강력한 계기이다. 그리고 정치개혁은 자신들의 안정된 생활을 지키는 길(사회적 갈등을 조정하는 행정적 방식으로 정당의 역할을 조정하는 길)이기도 하다. 그리고 정치개혁 쟁점이 부각되는 또 하나의 원인으로 미디어의 조작을 꼽을 수 있다. 이들은 매일같이 부패하고 무능한 정치권의 행태를 비판하면서 정치권의 반성과 개혁을 요구하고 있다. 정치개혁에 관한 각종 토론회와 전문가 진단 프로그램을 구성하며 정치개혁의 상을 제시한다. 게다가 한국사회의 미디어들은 계속해서 효율적인 행정의 중요성과 무능한 국회를 대비시키며 대립을 조장해왔다. 미디어는 행정부는 대통령의 지도력에 따라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며, 정책개혁과 갈등조정의 역할을 다 해야하고, 국회는 당략에 사로잡혀 행정부의 효율성을 저해하지 말아야한다고 비판해왔다. 이는 현재의 정치개혁의 방향과 정확히 일치하는 바이다. 한국 사회의 고질적인 문제 중 하나로 꼽히는 지역감정을 해결하는 것도 정치개혁의 과제 중 하나다. 이는 신자유주의 개혁 세력이 확보하고자 하는 전국정당, 무지개 정당을 실현하는데 있어서 핵심적인 과제이다. 지금의 지역감정은 이전 3김 시대와 달리 성장으로부터의 지역배제와 이에 따른 지역경제 침체라는 조건이 존재한다. 이는 (민족)국가 전체가 아니라 특정한 지역을 선별 포섭하는 세계화 과정에서 동반되는 것이지만, 뒤집어 말하자면 (민족)국가 차원이 아니라 지역별로 자율적이고 독자적인 발전전망을 가지고 포섭될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한국의 경우 신자유주의 개혁을 거치면서 수도권을 제외한 여타 지역은 극심한 배제를 경험했다. 이 속에서 실리주의적인 지역발전 이데올로기는 지역감정의 새로운 조건을 낳았다. 더 이상 지역감정은 영․호남의 지역적 분할선을 타고 균일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정치개혁의 과제로서 지역감정 타파는 모든 지역에 골고루 발전의 전망을 약속해야 한다(실제 지난 대선에서 노무현 당선의 중요한 전략은 지역별로 발전을 약속한 것이었다.). 영․호남을 넘어서 모두를 만족시키겠다는 약속(열린우리당의 총선전략이기도 하다.). 그러나 모두를 만족시키려면 누구도 만족시키지 못한다. 배제와 포섭의 논리는 계속 지역발전의 전망과 공존한다. 게다가 지역 내부의 불평등과 배제가 더욱 문제다. 한 지역의 발전이 그 구성원 모두의 발전을 의미하지 않는다(어떤 지역도 노동의 불안정화와 빈곤의 심화를 없앨 수는 없다.). 하지만 지역발전 이데올로기는 내부의 배제를 쟁점에서 사라지게 한다. 정확한 현실의 인식으로부터 출발하자. 회복될 기미를 보이지 않는 경제위기는 이제 사회의 해체로 나아가고 있다. 가족과 학교 등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한 이데올로기적 국가기구의 위기가 나타난다. 위기와 그 극복전략을 둘러싼 치열한 이데올로기적 대치가 심화된다. 지배세력은 ‘참여’ 이데올로기에 근거하여 포섭과 배제의 메커니즘을 작동시키며, 위기를 관리하고자 한다. 배제의 공포 속에서 대중은 내가 아닌 다른 희생양을 찾는다. 희생양이 되지 않기 위해 경쟁해야 한다는 논리가 극심해진다. 누군가는 ‘수건돌리기’라고 표현했다. ‘나의 뒤에 수건이 놓이지 않기를 바란다. 하지만 만약 놓인다면 내가 살기 위해서 그 수건을 다른 사람에게 넘겨야 한다.’ 위기의 해결이 아닌 지연의 악순환. 그렇다면 우리는 어디에서 출발할 것인가? 정확한 현실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한국사회의 객관적 조건과 현실에 대한 인식, 대중의 불만과 고통의 현실에 대한 정확한 인식. 갈등을 조정하고 위기를 관리하며, 경쟁과 희생의 이데올로기로 대중을 동원해내는 지배세력의 방식에 조응하는 것은 운동이 처한 위기를 더욱 심화시킬 뿐이다. ‘참여의 수혜와 관용’을 받는 것은 어려움에 처한 운동에게 매우 매력적인 것일 수 있다. 하지만 사회적 위기는 해결되지 않는다. 이것이 현실이다. 위기가 해결되지 않는 고통스러운 현실과 이에 적합하게 대응하지 못하는 운동 사이의 괴리는 커지고, 이 괴리는 더욱 큰 대중의 절망을 낳는다. 대중을 수동적으로 동원할 것인가, 대중을 능동적으로 조직할 것인가의 문제는 지배세력과 우리가 맞서야 하는 결정적인 지점이다. 대중이 처한 현실을 객관적으로 적확하게 인식하는 것이 이 문제에 맞서는 우리의 출발점이다.PSSP
'참여정부'의 악순환 노무현 정권이 '서로 다른 집단들을 모두 기쁘게 하겠다'는 약속의 핵심에는 '참여정부'라는 구호가 있었다. 즉 정부가 나서서 정책을 완성하고 집행하기보다는 각 사안의 이해당사자들이 정부의 공식․비공식 기관에 참여해 문제를 해결해 나가자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각 이해 당사자들이 적극적인 대화와 타협의 자세로 임해야 하며, 정부는 공정하게 적절한 가이드라인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는 논리다. 그리고 이런 방식으로 결정된 정책이야말로 힘을 갖고 추진될 수 있다는 말이다. 이처럼 노무현 정권이 내건 참여정부는 '민간'의 참여를 장려하는 민주적인 외양을 띠었다. 게다가 노무현 캠프에 '386세대', 운동권 인사가 가담하면서, 이러한 방식은 실제로 작동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낳았다. 그러나 그 본질은 오히려 행정관료나 미디어가 선호하는 갈등조정의 방식일 뿐이거나, 문제의 책임을 정부 밖으로 돌리는 데 있었다. 정부는 그 자체로는 아무런 내용도 없는 '참여'를 주장하면서 각각의 사안에 관해 개혁법안이나 '사회적 협약'을 추구한다. 하지만 행정관료나 미디어가 선호하는 대화와 타협은 사실 절충적인 미봉책에 머물고 만다. 따라서 모두를 기쁘게 하기는커녕 아무도 만족시킬 수 없는 결론에 도달하곤 한다. 오히려 종종 갈등을 더 증폭시키거나, 서로가 서로의 발목을 잡아 문제 해결이 고착되는 효과를 낳을 뿐이다. 마지막에는 정부가 이해당사자의 '집단 이기주의'를 운운하며, 그 책임을 정부 밖으로 전가하게 된다. 결국 악순환이다. 특히 노동자에게 그 참여의 경계는 명확하다 (이미 노무현 대통령은 인수위 시절부터 노동운동 지도자들과의 자리에서 '안되는 것은 안되는 것이다'라고 분명히 못을 박았다.). 더군다나 광범위한 실업-반실업, 빈곤 대중은 '참여'의 대상에서 사라지는 경향이 있다 (곧 '시민'에서 배제되는 경향이 있다). 정부가 포괄하려는 참여의 범위는 다양한 직업적 집단이나 NGO, 전문가 집단이다. NGO가 불안정한 노동자 대중을 대체하여, 이들 집단의 '관리의 주체'로 승인된다. 신자유주의 경제개혁의 정치적 모순 물론 정부 정책의 기본 방향은 존재한다. 하지만 한국정부의 고유한 정책 방향이란 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오늘날 한국사회의 개혁방향은 이미 '글로벌 스탠다드'라는 이름으로 간주된다. 이미 다양한 초민족적 국제기구들은 각종 경제․사회 정책을 고안하는데 온 힘을 기울이고 있다. 국제화폐기금(IMF), 세계은행,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등의 국제기구는 정부재정, 금융 정책을 비롯해 거시․미시 경제정책, 노동, 교육, 여성, 사회복지, 인구 노령화 등 다루는 사회이슈를 끊임없이 확대해 나가며 정책연구 보고서들을 쏟아내고 있다. 이러한 기구들이 제시하는 정책들이 신자유주의 개혁의 각론들을 구성한다. 물론 이러한 정책의 궁극적인 목표는 자본투자에 안정적이며 우호적인 방향으로 사회를 개조해 나간다는 것이다. 특히 노무현 정부는 한국 사회의 '성장 잠재력의 고갈'을 내세우며 신자유주의 개혁을 거스를 수 없는 대세로 추진하고 있다. 새로운 성장동력을 구축하기 위해서는 선택과 집중이 필요하며, 기업집단간, 개인간 경쟁을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당연히 각종 사회적 위기의 지표들이 출현하고 있다 - 실업의 만연('고용없는 성장'), 가계대출과 개인신용불량자 급증, 출산율 저하, 중소기업 붕괴, 농업 해체, 이민열풍과 두뇌유출 등등. 물론 몇몇 특화된 산업과 기업이 선두를 달리며 초민족 기업으로 자태 변환을 시도하고 일부의 엘리트집단이 세계화된 생활양식을 영유한다. 그러나 대다수의 인민은 하향 평준화되거나 사회불안을 제거하기 위한 '관리'의 대상이 된다. (금융)투자에 우호적인 환경을 창출하라는 신자유주의 경제개혁의 지상명령과 노동권-시민권의 보편적 요구는 근본 모순을 낳는다. 개혁과 정치의 슬림화 하지만 신자유주의 개혁이 동반하는 정치개혁은 근본적 모순을 비켜 간다. 그 목적은 오히려 단순하다. 행정의 효율성을 높이고 정치 비용을 경량화하자는 것이다. 결국은 정치 자체를 행정적 관리로 대체하고 슬림화하자는 것이다. 신자유주의 개혁은 어느 때 못지 않게 강한 '리더쉽'을 요구한다. 하지만 정당과 의회의 역할은 계속 축소된다. 정당들이 전통적인 정치 이념과 지지 기반에 따라 정책을 결정하고 입법활동을 펼친다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것으로 간주된다. 이미 다방면에 걸친 개혁안은 '글로벌 스탠다드'로 주어진 것이다. 실질적인 정책결정의 장소는 행정부고, 행정부는 수완을 부려서 해결사의 노릇을 해야한다. 정당성의 위기, 대중들의 불안과 불만, 사회운동들의 저항을 헤쳐나가기 위해 정부의 권력은 증대된다. 따라서 신자유주의 개혁은 결코 '강한' 정부를 포기하지 않는다 (DJ정권이나 노무현 정권은 '작지만 강한 정부'라는 구호를 항상 주장했다). 물론 과거 군사독재의 폭압적인 동원 체제를 대체할 방법을 찾는데, 문제는 효율적인 위기관리, 갈등조정 체제다. 이에 따라 정당의 역할도 변형된다. 정당에 소속된 정치인들은 마치 학계나 NGO의 전문가들처럼 정책적 전문성을 갖추어 그러한 흐름에 부합하는 게 가장 우수한 활동인 것처럼 평가된다 (NGO가 정치인을 욕할 때 가장 먼저 나오는 말은 '무식하다'는 것이다). 이미 정당들은 스스로 '국민정당'이나 '무지개정당'으로 탈바꿈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어떤 이념보다는 사회갈등을 행정적인 방식으로 조정하는 데 자기 역할을 찾아야 한다는 말이다. 따라서 정치개혁의 중요한 목적은 정당과 의회의 역할을 재조정하는데 있다. 또한 정치자금의 투명화와 그 결과로 정치비용의 경량화도 중요한 요구다 (최근 전경련의 행보에서 볼 수 있듯이 대자본의 요구이기도 하다). 개인적 부패스캔들에 휘말린 정치인이 공정한 조정자의 역할을 자임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덧붙여 한국에서 정치개혁의 주요 이슈에는 각 정당들의 '당략'적인 목적이 담긴 내용들도 포함되어 있다. 보통 '지역구도 타파'로 선전이 되는 간선제 국회의원의 확대, 선거구 재조정 등은 한나라당의 의석 비율을 잠식하여 정당들의 세력관계를 바꾸자는 것이다. 이는 정치개혁의 성패가 달린 문제인 것처럼 선전되지만, 최종적인 목적지가 다른 것은 아니다. 다만 정치계급 또는 지배엘리트들에게는 지분이 걸린 생사의 문제다. 오늘날 한국사회의 미디어들은 효율적인 행정의 중요성과 무능부패한 국회의 문제를 대비시키며, 거듭하여 대립을 인위적으로 조장하고 있다. 행정부는 대통령의 지도력을 인정하고 그것을 충실히 따라야 한다 (이견을 제시하는 것은 공무원의 할 일이 아니다), 국회에서의 논란은 대부분 불필요한 것이고 개혁에 힘을 실어주어야 한다 - 이것이 미디어의 요구다. 참여정부와 코포라티즘 '참여정부'의 이데올로기가 사회운동에 끼치는 심각한 효과는 '참여'라는 허구적인 쟁점을 놓고 대중운동들을 분할한다는 점이다. '참여'는 사실 대중운동에게 매우 부분적인 타협의 가능성을 흘려주지만, 그 악순환의 끝은 부분적인 포섭과 배제다. '참여정부'의 이데올로기가 사회운동에 끼치는 효과는 결코 무시할 수 없다. 정부가 특정한 분야나 사안별로 '참여'의 경로를 제공함으로써 사회운동은 실제로 '참여냐 비타협적 투쟁이냐'라는 의도된 쟁점에 휘말리게 된다. 또는 각자 자기의 몫을 챙기기 위해 공식적, 비공식적 경로로 대화에 참여하거나 정부의 개혁안 수립에 참여하게 된다 (오히려 '빠지면 나만 손해다'라는 생각을 불러일으킨다). 그 결과로 사회운동의 활동은 공통의 연대를 추구하기보다는 각 부문이나 분야별로 분산된다. 그리고 주요한 활동이 정부와 '정부개혁안'을 수립하는 데 참여하거나 여러 형태의 '사회적 협약'을 맺는 데 주력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활동이 애초 목표를 이루지 못할 경우, 최후의 수단으로 국회통과를 저지하거나 또는 관철시키기 위한 활동에 돌입하게 된다 (개별 국회의원에 대한 로비 활동을 벌이고, 이 때 특히 총선에서 당선 또는 낙천․낙선운동을 무기로 삼게 된다). 사실 이미 이러한 방식의 활동이 사회운동에서 대체로 정형화되고 있다. 이러한 방식의 운동은 효율성과 편의성이라고 하는 '덕목'을 내세우고 있다. 가시적인 성과를 따낼 수 있다는 기대, 단일 이슈에 집중성을 발휘할 수 있다는 효율성, 그래서 직접적으로 상관이 없어 보이는 문제에 대한 무관심의 정당화, 코포라티즘적인 동원에서의 편의성 등등. 이는 많은 운동단체들에게 큰 유혹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패턴의 활동은 종종 운동 주체화 과정이 제거된 협상과 동원 체계로 전환된다.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구속력을 갖는 협상을 원하게 되고 따라서 제도화를 추구하게 된다. 또한 협상이 성사될 경우에는 그것을 사회운동 내부에서 관철시켜야 한다. 오히려 정부의 어려움을 먼저 헤아려야 하고, 그것을 대중에게 설득해야 한다.(?) 이는 사회운동이 '국가의 이데올로기적 장치'로 흡수되는 경로다. 문제는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특정 부문이나 분야를 이슈로 하는 운동은 사회운동의 주체를 형성하는데 근본적 난점을 갖는다. 물론 특정 분야 개혁에서 미디어의 여론 조사 결과는 그것을 추진하는 세력에게 우호적으로 나타날 수 있다. 그러나 어떤 단일한 이슈, 협소한 쟁점이 개인들을 일시적인 관심으로 불러일으킬 수 있어도 장기적인 운동 주체화의 과정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단일 이슈 운동은 끊임없이 새로운 이슈, 정책아이템을 찾아 부유한다. 사회의 해체와 이데올로기적 국가기구의 위기 그러나 이것이 운동 방식의 문제만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광범위한 실업-반실업, 빈곤 대중이 '참여'의 대상에서 사라지는 경향이다. 신자유주의 개혁은 기존의 국가장치가 과거와 동일한 방식으로 작동될 수 없는 조건이다. 정당과 노동조합과 같은 기관들만이 문제가 아니다. 가족의 해체, 학교의 붕괴와 같은 이데올로기적 국가기구의 위기는 노동의 불안정화와 중첩되는 현상이다. 이는 신자유주의 개혁의 참여세력에서 배제된 집단들에게는 삶의 고통을 극단적으로 증폭시키는 직격탄이다 (해고나 카드 빚이 자살의 직접적인 이유인가? 그에 따른 가족의 파탄, 기존 공동체로부터 배제된다는 공포가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간다). 사회적 노동과 정치에 대한 참여가 전제되지 않은 교육은 존재할 수 없다. 그러나 노동과 연계된 교육의 위계화와 실업의 공포는 교육을 붕괴시킨다. 또한 빈곤의 여성화는 중산층 핵가족 모델을 해체하는 하나의 중요한 계기다. 이러한 현상은 기존의 생활양식을 파괴하고, 사회로부터의 배제라는 개인들의 극단적인 불안을 형성한다. 이러한 문제는 대중들의 일상적인 삶에서는 가장 중요한 문제이지만, 종종 개인들의 '사적'인 문제처럼 여겨진다. 신자유주의 정부의 사회정책은 파편적인 미봉책을 제시할 뿐이다. 사회운동은 이를 뚜렷한 정치 쟁점으로 전환하지 못하지만, 기존의 방식으로도 그 괴리를 따라 잡지 못한다 ('최대한의 임금상승'과 '고용안정'으로 가족과 학교를 매개로 하는 기존의 생활양식을 유지하는 게 가장 간편한 해결책으로 인식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 해결책이 적용 가능한 범위는 단지 일부일 뿐이다). 또는 종종 정부와 유사한 방식으로 부분적인 정책공약으로 이를 대체하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들은 실로 기존 공동체의 붕괴를 의미하므로 고통을 완화시키려는 몇 가지 대증요법으로 해결할 수 없다. 사회운동이 기존 제도들의 붕괴로 인해 현재 대중들이 겪고 있는 직접적인 고통들에 적합하게 대응하지 못하고 있다. 이것은 과연 어디서부터 운동을 출발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 적합하게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 그것은 사태의 원인이 무엇인가 적합하게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사회운동의 이념을 개조하자! 이 즈음하여 우리가 '사회운동 노조주의'를 토론하게 된 맥락을 다시 한번 짚어볼 필요가 있다. 사회운동 노조주의는 1990년대 말 IMF 경제개혁과 민주노총 위기논쟁이 불거졌을 때 우리의 화두였다. 이는 새로운 국면에서 사회운동의 공통과제를 '노동자운동의 새로운 주체형성'(계급형성적 노동운동)으로 설정하자는 제안이었다. 특히 노동자대중 내부의 광범위한 실업-반실업-빈곤 대중 문제, 노동자운동 내의 성차별주의와 인종주의 문제를 자율적인 노동자운동을 통해 극복해나가야 한다는 것과 노동자운동의 전망이 평의회에 대한 지향(코포라티즘이 아닌 노동자통제)으로 전환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특히 빈곤, 성, 인종의 문제는 필연코 공동체의 문제를 낳는 것이었다 (새로운 공동체의 형성). 따라서 사회운동 노조주의는 무엇보다 노동자운동의 이념을 어떻게 개조할 것인가의 문제이다. 현재 노동조합의 많은 활동가들이 어려움을 호소하는 것은 이러한 이념적 지향과 관성화된 사업 패턴 사이의 괴리를 어떻게 풀어나갈 수 있을 것인가에 있다 (오히려 새로운 운동방식을 개척하지 못함으로 인해, 대중들이 기존의 '안전한' 방식을 요구하고 있는가?) 노동조합의 활동이 '상반기 임단협과 시기집중 파업-하반기 사회개혁투쟁'으로 고착화되고, 민주노총의 활동가들이 '사실 남아 있는 우리의 무기는 시기집중 파업이 유일할 뿐'이라고 자조하고 있다. 또한 대부분의 활동가들이 '지도부 교체로 바뀔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말하고 있으며, 이는 분명한 사실이다. 물론 당장 어떤 활동으로도 상황이 크게 변화하지 않을 것이라고 인식하는 것은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러한 조건을 인식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출발점은 없을 것이다. 노무현정권의 '억압의 관용' 우리는 지난해 노무현 대통령의 재신임 선언이 오히려 정부의 권위주의적 성격을 강화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재신임 선언은 이미 실패한 정권의 '국민협박극'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었다. '이래도 자신을 지지하지 않는다면 국가를 위기에 빠뜨리겠다'는 정말로 거대한 협박. 이는 대통령의 강력한 지도력을 승인하라는 위협이었다. 그러나 사회운동이 코포라티즘적인 지향과 활동 방식을 체화한다면 대통령의 강력한 리더쉽은 달가운 일이 된다. 그가 사회운동의 특정한 부위의 '후견인' 역할을 자인하는 한에서. 오히려 억압이 일상화된다면 '관용'은 보호자가 베푸는 큰 혜택이 된다 (그야말로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이다). 노무현 정부의 '참여정부'와 '억압의 관용'은 사실 백지 한 장 차이다. 참여정부의 논리가 대중운동의 동원과 무력화를 동시에 수반하기 때문이다. 노무현 정부가 구조적 위기에 직면해 있는 한, 억압의 관용은 그들의 가장 매력적인 수단이 될 것이다.PSSP
2003년 노동자투쟁은 쉼 없이 진행되었다. 손배가압류․노동운동탄압은 벽두부터 배달호 열사를 만들었고 하반기 수많은 노동자들이 분신하는 원인이 되었으며, 이는 노동자 투쟁의 국면을 여는 계기가 되었다. 경제자유구역법 폐기투쟁, 철도노조와 화물연대의 2차례 파업투쟁, 전교조의 네이스 폐기투쟁이 벌어졌다. 또한 현대자동차 아산과 울산공장, 현대중공업, 금호타이어 사내하청노동자들의 단결권쟁취 투쟁, 최저임금․최저생계비 쟁취투쟁, 근로복지공단 비정규직 노조와 현재의 이주노동자 투쟁까지 비정규직 불안정노동자들의 투쟁도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수치상으로 보아도 1991년 이후 최고의 쟁의건수를 기록했고, 보수언론에서는 남한을 ‘파업공화국’이라 냉소적으로 칭하였을 정도였다. 하지만 비정규직 투쟁이 늘어나고 쟁의건수가 증가했다고 해서 남한 노동자운동이 전진했다고 보기 어렵다. 주된 이유는 남한 노동자운동의 혁신의 주체이자 대상이라고 할 수 있는 정규직․남성․대공장 노동자운동이 여전히 변화의 모습을 보이지 못했으며, 전체 민주노조운동이 지난 몇 년간 부침을 겪으면서도 전화시켜 나아가는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특히 작년에 출범한 노무현 정권은 지난 몇 년간 혁신이 지체되었던 민주노조운동 진영을 지속적으로 타격하고 교란․포섭해 왔다. 2003년 노무현 정권의 등장과 연이은 노동운동에 대한 공격 주지하듯이 노무현정권의 개혁은 실패한 김대중 정권과의 연속선상에 있으면서도, 그것과는 차별화되고 전진된 남한 자본주의의 청사진을 제출하고 추진할 것을 요구받았다. 동북아중심국가건설 구상이 가지는 의미는 여기에 있다. 특히 이의 실현을 위해서는 안정된(관리될 수 있는) 노동자집단-이른바 국민통합적 노사관계구축-을 형성하는 한편 자본의 자유로운 활동에 반하는 각종 규제를 없애고, 노동유연화를 제도화하는 글로벌 스탠다드(국제적 규범) 확립이 필요했다. 전자는 대기업 정규직노동자에 대한 도덕적 공격과 전투적 노동자운동 부위에 대한 폭력탄압으로 이어져 노동자운동을 분할․교란․순치시키고 있다. 후자 역시 정규직 노동자들의 임금․고용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공격과 더불어 주5일제를 빌미로 한 노동법개악, 화물연대의 단결권행사를 저지하기 위한 업무복귀명제, 이주노동자를 통제․관리하기 위한 고용허가제 등으로 나타났다. 이뿐만 아니라 노사관계선진화방안이란 탈을 뒤집어쓰고 노사관계로드맵과 비정규보호방안이 제출되었는데 노동자들의 커다란 저항에 부딪칠 것이 예상되자 올해 상반기에 논의하고 총선이후 하반기에 노사정 대통합을 이루어보겠다는 의도로 올해로 넘겨버리는 기만적인 작태를 보이고 있다. 노무현정권은 경제자유구역법 시행에 이어 인천, 광양, 부산을 경제자유구역으로 지정하고 외국자본을 유치하기 위한 작업을 한창 진행 중이며, 의료․교육 등에 있어서도 더욱더 외국자본의 돈벌이에 맞는 조건을 형성하기 위한 법제도를 정비하고 있다. 이는 결국 노동자들의 노동권․생활권 파괴로 드러날 것이다. 그러나 노동자운동은 이러한 정권과 자본의 이데올로기적 공격과 폭력적 탄압으로부터 스스로를 방어해 내기 힘든 허약함을 드러냈다. 이렇게 일년이 지나는 사이 대기업 정규직노조 중심의 민주노총은 남한 사회에서 기득권층으로 인식되었고, 저들의 표현에 의하면 이미 기득권을 누리고 있어 개혁해야 할 대상으로 올라있다. 이러한 노무현 정권에 대해 민주노조운동은 철저한 태도를 취하지 못했다. 정권초기 개혁성에 기대어 노사정위 참여에 대한 모호한 태도를 보여주었던 것이나 정책협의를 추진하였다가 철회하는 모습은 오늘날 민주노조운동의 한 단면을 여실히 드러낸다. 민주노조운동의 대표성, 정당성 위기와 지체되고 있는 혁신 이미 민주노조운동은 지난 수 년 전부터 위기 담론에 휩싸여왔고, 그때마다 주로 지도부 교체를 통하여 혁신의 수술을 무마하였다. 1998년에 정리해고제와 파견법제도화를 위한 노사정합의, 2002년 발전노조 투쟁 연대총파업 철회 때 그러하였다. 여기에 남한 노조운동의 조직률 하락-현재 11%수준-과 계속되는 정권과 자본의 구조조정에 대한 수세적 대응은 민주노조운동의 위기를 절감케 하였다. 더욱이 불안정노동자층의 급증한 증가 속에서 이들을 노동운동의 주체로 만들어내지 못하는 상황은 민주노조운동의 대표성과 정당성마저 상실하게 하고 있다. 대표성과 정당성을 상실한다는 것은 운동이 자기만의 틀에 박혀 실리적이고 수세적으로 변해간다는 의미이며, 이는 민중연대투쟁과 변혁 운동에서 점점 더 멀어져 감을 의미하는 것이다. 오늘날 민주노조운동은 바로 이 자리에 위치해 있다. 이미 몇 년 전부터 남한 노동자운동은 비정규직․여성․이주 등 불안정노동자들에 대한 조직화를 제기하였지만, 제기한 것에 비하면 조직의 수준은 아직 걸음마 단계라 할 수 있다. 더군다나 민주노조운동은 혁신의 문제를 산별노조 건설이라는 조직건설 문제에 중심을 두는 경향이 있고, 불안정노동자의 문제를 주체화나 연대의 입장이 아니라 조직화 중심의 관점으로 본 문제점 또한 노정 하였다. “지난해 수많은 열사들을 만들게 한 장본인이 바로 우리, 민주노조 하는 사람들”이라는 한 활동가의 외침은 어떻게 보면 정확하다. 노동자들의 분신과 자결은 바로 민주노조 사수에 있었다. 그리고 이들의 자결은 전체 노동자들이 단결하고 민주노조운동이 거듭나길 촉구하는 절규였다. 이미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임금과 근로조건의 격차가 점점 더 벌어져 노동계급의 분할의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으며, 이미 남한의 노동자운동은 다른 계급에 대한 연대(민중연대투쟁)가 취약하고 계급 내에서도 스스로 비정규직/정규직, 여성/남성, 이주/내국인 등으로 분절화 되어 단결에 약하며 앞으로 나아가는 혁신의 노력이 지체되고 있다. 이는 노동자 사이의 분할을 막고 계급적 단결을 도모하며 연대의식을 강화하는 주체를 형성하는 관점이 가장 관건적임을 반증하는 것이다. 비정규직․불안정노동자 투쟁의 새로운 흐름 그럼에도 엄동설한의 한복판을 뚫고 나오는 새싹처럼 현재 민주노조운동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투쟁은 계속되고 있다. 다만 전체노동자들이 단결하고, 새로운 기풍을 세울 만큼 이 새싹이 자랄 수 있을 것이냐의 문제이다. 작년에는 정권의 노동탄압에 맞선 투쟁뿐만 아니라 수많은 비정규직과 여성․이주노동자 등 불안정노동자들의 투쟁이 전개된 한해였다. 이제까지 숨 죽여 지냈던 대공장 사내하청 노동자-현대아산․울산자동차의 하청노동자, 현대중공업, 금호타이어 사내하청-와 근로복지공단과 직업상담원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정권과 자본의 탄압을 뚫고 노동조합을 결성하면서 비정규직노동자들을 주체화하고, 정규직과의 단결과 연대를 모색하고 있다. 또한 특수고용직 노동자들의 투쟁도 활발하였다. 화물연대의 두 차례의 파업은 정권의 폭력적인 탄압으로 40여명의 구속자를 발생시켰고, 정권은 화물노동자들에 대한 조직화를 끊임없이 방해하면서 업무복귀명령제를 제도화하여 이들의 단결을 원천적으로 봉쇄하려 하고 있지만, 어찌되었건 전국의 물류를 멈춰 자본과 정권으로 하여금 교섭에 나서게 하고, 물러섬이 없었던 화물연대의 투쟁은 지난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저지투쟁 과정에서 보였던 수세적인 민주노조운동의 대응에 하나의 활력을 제공하였음이 분명하다. 또한 골프장도우미, 학습지노동자 등 여성노동자들이 밀집되어 있는 사업장에서 지속적인 쟁의가 일어나고 있는 것도 여성노동자 스스로 자신의 노동권을 찾기 위한 길을 걷고 있음일 것이다. 그리고 미약하지만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으로 인하여 구조적으로 고착화된 빈곤에 맞선 불안정노동자들의 최저임금․최저생계비 실질화 투쟁은 향후 빈곤에 맞선 투쟁과 주체화의 가능성에 또 다른 활로를 모색하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2004년 노동자운동의 과제 최근 민주노총은 새로운 임원진을 선출하였다. 새로운 임원진의 선택은 올해, 아니 향후 남한 노동자운동의 향방에 많은 영향을 미칠 것으로 예상된다. 그러한 만큼 민주노총은 올해 노동자운동에서 핵심이슈로 부상할 가능성이 높은 대정부 관계문제, 노사정위 참가여부문제에 대한 계급적 원칙을 확고히 견지하며, 남한 노동자운동의 새로운 계급주체형성과 사회운동적 혁신으로 거듭나는 한해를 만들어가야 할 것이다. -당면한 현안투쟁은 민주노조운동 혁신의 출발점으로 자리매김 되어야 한다. 민주노조운동진영은 다가올 2007년 복수노조, 노조전임자 문제에 대한 장기적 대응뿐 만 아니라 현재의 노동자운동 내부의 실리주의를 극복하고, 전체노동자의 단결을 꾀하여 다시금 노동자운동의 대표성과 정당성을 곧추세워야 하는 과제가 있다. 올해 말로 협상시효가 다가오는 WTO 개방 협상문제, 특히 농업, 의료, 교육시장개방에 대한 압력, 경제자유구역 설치로 인한 노동권 생활권 파괴가 바로 눈앞에 있다. 뿐만 아니라 노동3권을 근저에서 허무는 노사관계로드맵과 비정규보호방안 등이 총선이전에 논의하든, 이후에 논의하든 시기적으로 별로 달라질 것 없는 내용들이 노사정 협력틀 구축이라는 공세로 노동자운동의 내부를 더욱더 교란할 가능성이 농후하다. 또한 올해는 카드사 부실문제를 인력감축과 (외국)금융자본 유입을 통해서 해결하려는 금융부문, 제조업 생산기지 해외이전과 공동화문제와 매각문제, 대규모의 비정규직 도입과 외주화를 추진하고 있는 공공부문(예를 들어 철도) 등의 사업장들에서 정권은 자본의 이해를 보장하고 노동의 유연화를 확장한다는 차원에서 더욱더 강도 높은 공격을 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미 외환카드노조와 쌍용자동차 노조처럼 파업으로 대응하는 곳도 있지만, 은행과 제조업 일부에서는 노조의 동의 하에 임금피크제가 시행되고 있어 노동유연화를 기업별로 수용하는 곳도 등장하고 있는 실정이다. 우리는 지난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과정에서 개별기업(노동자)의 경제적 이득 확보라는 수세적이고 방어적인 투쟁, 대기업 사업장의 양보교섭과 다른 한편의 합의주의에서 나타났던 경험을 극복해야 한다. 그리고 올해의 현안투쟁이 단사 노동자들의 대응만으로 시작되어 끝나는 것이 아니라 지역적, 전국적 수준의 시야를 확보하고 전체노동자 계급의 단결을 촉구하는 방향으로 구축되어야 함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불안정노동자의 확산과 빈곤에 맞선 노동자계급 주체형성에 온힘을 기울여야 한다. 특히 경제위기와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으로 발생하는 불안정노동자들의 확대와 빈곤은 더 이상 운동사회에서 선언적 수준이나 관심을 환기시키는 정도로는 안 되는 구조적인 문제이다. 이미 남한은 절대 빈곤계층이 150만 명 수준에 이르렀고, 노동하며 빈곤할 수밖에 없는 이른바 ‘차상위계층’ 이미 300만 명이 넘는다는 보도가 정부기관으로부터 보고 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정부연구기관의 보고서에 관계없이, 이미 남한 사회는 한 달에 평균 85만원을 받고 살아가는 800만여 명의 비정규직과 불안정노동층으로 가득하며, 이들은 실업과 취업을 반복하며 빈곤을 재생산하는 구조에 얽매여 있다. 이러한 지점에서 우리는 빈곤 문제가 개인의 나태함과 능력부족이 아닌 사회경제적인 문제임을 부각시키고, 주체들을 형성하기 위한 투쟁을 만들어가야 한다. 특히 지난 몇 년간 청소용역과 시설관리 등 저임금노동자들의 투쟁에 의존해온 최저임금 현실화투쟁과 장애, 노숙인 등 극빈층을 중심으로 벌여온 최저생계비 실질화투쟁의 한계를 벗어나야 한다. 또한 최저임금․최저생계비 투쟁이 제도를 보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남한의 빈곤실태를 사회적으로 고발하고, 불안정노동자들이 이 투쟁을 통하여 남한 노동자운동의 새로운 주체가 될 수 있도록 노동자운동의 적극적인 연대 투쟁이 되어야 한다. 이미 지난 몇 년 동안 이루어진 최저임금, 최저생계비 보장을 위한 투쟁을 바탕으로 올해는 기본생활 보장이라는 차원에서 더욱더 강화된 공동투쟁을 벌일 필요가 있다. 올해 불안정노동과 빈곤에 맞선 공동투쟁은 바로 이 지점에서 출발 할 수 있을 것이다. 노동자들이 스스로의 이익을 위해 다른 노동자를 희생시키거나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계급 내적으로 분할된 상황을 극복하기 위한 연대의식을 강화함으로써 노동자계급 주체를 형성하는 투쟁에 온 힘을 기울여야 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작년에 노동조합을 결성하기 시작한 대규모 사내하청 노동자, 두 차례 파업과 이로 인한 정권의 집중적인 탄압을 겪은 화물연대 노동자들과 경기도우미, 학습지노동자, 레미콘기사노동자와 같은 특수고용노동자들은 노동3권 쟁취와 기존 노동자 운동의 혁신에 복무할 새로운 주체형성에 끊임없이 매진해 들어가야 한다. 민주노조운동이 한계에 부딪친 것은 기본적으로 노동자들의 주체 형성이 미약했기 때문이라 파악된다. 따라서 노동자간 분할을 막고 연대의식과 헌신성을 강화하는 주체 형성의 관점이 당장의 영향력 행사보다 오히려 더 긴급한 시점이다. 당장 눈앞의 해고와 노동조건 악화를 조금이나마 저지하는 것에도 급급한 상태에서 지나치게 장기적이고 근본적인 문제 제기라고 생각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되지 않는 한, 노동자의 직접적인 이익을 위해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 자체가 극히 어렵다는 것은 분명하다. 더군다나 노동자의 이익을 위한 영향력 행사를 하지 말자는 이야기도 전혀 아니다. 실제로 노조가 노동자들의 이익을 수호하는 결과를 가져올 때 노동자들의 헌신성과 연대의식도 높아진다. 따라서 대중투쟁을 동원하거나 현안투쟁을 중시하지 말자는 의미가 아니다. 문제는 그 과정에서 어떠한 관점을 가지는가 하는 것이다. 제도화든 대중투쟁이든 그 과정이 바로 노동자의 주체 형성에 이바지해야 한다. 이를 위해 우선 노조의 교육적 기능에 주목할 필요가 있고, 또한 어떠한 단위의 교섭에서도 노조의 내용은 노동자간 연대와 바텀-업(bottom-up, 하후상박)을 기본으로 해야 한다. 불안정노동 투쟁은 노동운동이 주체 형성의 전망으로 나아갈 수 있는지에 대한 시금석이다. 구체적으로는 민주노총(과 산하 연맹과 노조)이 불안정 노동자들의 투쟁에 대해 어떤 전망을 제시해 줄 수 있을 것인지, 나아가 미조직·비정규직 노동자의 조직화를 어떠한 관점으로 접근할 것인지, 이를 아우르는 전체적인 전략을 개발하고 시행할 수 있을 건지가 남한의 노동운동의 미래를 가늠할 관건이 될 것이다. -여성노동자에 대한 차별을 철폐하고 여성이 주체로 설 수 있는 기풍이 세워져야 한다. 노동조합이 여성노동자의 문제를 자기 과제로 받아 안을 수 있도록 노조 자체의 변화가 필요하다. 기존의 노조들이 남성 편향적이었다는 점을 인정하고 이를 개조하기 위한 강력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특히 현재 여성의 대표성과 노조 조직률이 1970년대 이후 최저, 민주노조운동이 본격화된 87년 이후부터 살펴보더라도 최저라는 사실은 다시 강조하지 않아도 될 듯 하다. 성별분업의 폐지와 그에 따른 노동시장에 진입에 있어서의 차별을 해소하는데 앞장서야 한다. 가족과 노동시장으로부터의 이중적 억압을 해소하는데 주력해야 한다. 가족형태를 전제로 역사적으로 성별 분업화 된 노동시장은 여성들의 노동시장진입에 있어서 어려움을 만들고 있다. 또한 결혼, 가족과 연결되어 여성들이 가진 불리한 조건은 단순․미숙련 업종에 여성노동력이 집중되게 만들며, 남성노동을 대체하는 성격을 갖게끔 한다. 이러한 조건들은 산업구조와 경제에 따라 항상적인 고용불안, 불안정한 고용형태, 실업과 취업이 반복되는 등 여성노동의 불안정화와 여성노동력에 대한 초과착취를 만들고 있음을 인식하고 알려내야 한다. 또한 노조의 활동방식, 대의체계, 노조의 단체교섭요구 등에 있어서 여성배제적인 요소를 찾아내고 이를 정정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각급 노조 안에서 여성조합원의 독자적인 조직(여성위원회 등)이 활성화되어야 한다는 과제도 함께 제기 할 수 있는데 여성들의 독자적인 조직화는 노조의 이러한 변화를 더욱 추동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속에서 여성들에게 노조를 개조하기위한 적극적인 권한이 부여되어야 하는 것은 물론이다. 여성할당제는 여성노동자들이 주체화되는 근본적인 고민 하에서는 한계가 존재하겠지만 하나의 계기로서 충분히 활용되어야 한다. “노동조합은 성차별적인 생산, 재생산 영역에서의 여성노동문제에 눈감아 왔다. 여성노동자들은 노조가 잇는 경우(31.6%)가 없는 경우(24.4%)보다 더 성차별적인 퇴직이 많이 이루어졌다. 고용불안감도 노조가 있는 경우가 더 커서(60.1%, 노조가 없는 경우 48.7%) 성차별적 퇴직에 노조가 도움이 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 분명히 확인되고 있다. - 여성민우회의 실태조사 참고, [여성독자노조의 출범이 한국노동조합운동에 주는 의미] 민주노동과 대안 99.2(서정영주)에서 재인용” -민중연대투쟁강화․사회적 합의주의 분쇄 등 사회운동적 과제를 실천해야 한다. 앞서 노동의 불안정화는 정규직을 중심으로 조직된 기존 노조조직의 계급 대표성과, 정당성의 위기를 불러오고 있다고 진단한 바 있다. 한편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에 대한 사회적 합의주의(코포라티즘)적 대응은 고립과 실패를 거듭해 왔음을 기억해야 한다. 지난 1998년 총연맹 수준에서 대정부 정책협상에 주력해왔던 결과로 정리해고제와 근로자파견법 노사정합의를 했던 치욕스러운 기억을 잊어서는 안 된다. 노무현정권은 올해에도 민주노조운동진영에 끊임없는 분할과 배제․고립․포섭․타격을 가할 것이다. 특히 노사관계로드맵에 관한 노사정 협의틀 구성에 힘을 기울일 것으로 예상된다. 연초 노무현이 ‘올해 노사정 대타협을 통해 국민들에게 한국의 희망을 보여주겠다’고 신년사에서 밝힌 것은 이러한 의미가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또한 노조가 자신의 위기를 극복함은 물론 신자유주의공세를 저지하기 위해서는 신자유주의 세계화와 군사화에 반대하는 투쟁을 ‘구호 끼워 넣기’ 수준에서가 아니라 실질적으로 수행해야 하고, 자신의 요구를 계급적인 일반원칙 속에서 도출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 노조는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사회운동에 열려있어야 할 뿐만 아니라 스스로도 그러한 사회운동적 과제를 자신의 임무로 수용할 수 있도록 변화해야 한다. 경제위기 시에 노동자운동이 방어적 투쟁과 실리적 태도로 일관한다면 일반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교훈을 되새겨야 한다. 이것은 금융세계화로 인한 세계적 경향임과 동시에 외환위기 이후 겪어온 남한 노동자운동의 계속적인 실패의 원인과도 일맥상통한다. 따라서 현재 투쟁의 승패의 갈림길은 준비된 파업을 했느냐, 그렇지 않느냐가 아니라 정세를 명확히 인식하고 변혁적 전망을 갖는 노동자운동 개척에 달려있음을 새삼 강조하는 바이다.PSSP
새로운 운동, 파병반대 반전평화운동 2003년 주목해야 할 운동이 무엇이냐 물으면 누구라도 파병반대 반전평화운동을 손꼽을 것이다. 2003년 한 해 가장 떠들썩했던 뉴스가 미국의 이라크 침략이고 이에 대한 대중적 저항이라는 점에서 파병반대 반전평화운동이 손꼽히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겠지만, 여기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멀리 베트남 전까지 갈 필요도 없이 1990년 이라크 전쟁에서 다국적군은 물론, 동티모르 사태의 UN평화유지군까지 한국군 파병을 반대하는 대중운동이 이렇게 오랜 시간 전개된 역사가 없었기 때문이다. 파병반대운동이 대중들에게 그리 익숙한 쟁점이 아닌데도, 이 새로운 반전평화운동이 전개되었던 데는 다음과 같이 적어도 두 가지 이유만큼은 들 수 있을 것이다. 9․11 테러 보복전쟁으로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고 대량살상무기를 빌미로 이라크를 침공하는 등 미국의 군사적 패권주의가 드러나면서 대중들이 강하게 반발했다는 사실을 첫 번째 이유로 들 수 있을 것이고, 둘째로는 효순이․미선이 살인사건 이후 불평등한 한미관계를 개선하자는 대중적 요구가 강하게 일던 중에 미국의 부당한 파병요구가 제기되자 이를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는 사실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들 운동을 각각 이끌었던 ‘전쟁반대 평화실현 공동실천’과 ‘미군장갑차 여중생 고 신효순․심미선 살인사건 범국민대책위’ 두 공동 투쟁체가 합동운영위원회를 구성하여 2003년 상반기 파병반대운동을 주도했다. 한편, ‘7․27 정전 50년, 한반도 평화를 동아시아 평화의 중심으로’와 ‘반전평화 8․15 통일대행진’에서 확인할 수 있듯 주한미군의 장기 주둔에 따른 피해를 고발하는 운동과 미국의 북한 고립 책동을 반대하며 민족통일을 염원하는 운동들 역시 앞서의 여중생 범대위 사례처럼 반전평화운동의 대열에 합류하였다. 이는 미국의 냉전 전략의 상흔이 깊숙이 남은 지역의 특수성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겠지만, 역으로 전통적인 반미운동이 변화를 모색해야 하는 시점에 이르렀음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다. 전쟁이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데 한반도에서만 평화로우면 되는가라는 (조금은 조잡한) 일차원적인 질문은 논외로 하더라도, ‘군사적 긴장을 완화하는 것만이 반전평화운동의 궁극적인 목표가 될 수 있는가’라는 본질적인 질문에 이 운동은 충분히 답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후 설명하겠지만 파병반대운동을 조금만 다른 시각에서 보아도 오늘날 반전평화운동의 성격은 사뭇 다른 양상임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이는 상당히 중요한 문제기도 하다. 그렇다고 파병반대 반전운동이 내적으로 순탄했던 것만은 아니다. ‘자주’ 혹은 ‘반전평화’라는 묘한 대립과 함께 ‘한반도 위기에 맞서는 투쟁을 조직할 것인가’ 아니면 ‘이라크 점령 중단 투쟁을 계속할 것인가’라는 격한 논란 또한 전개되었기 때문이다. 4월 2일 국회의 이라크 파병 결정, 4월 9일 미국의 이라크 종전 선언이후 파병반대운동이 새로운 전망을 찾아야 하는 시점에서 제기된 이 논란은 ‘한반도 위기를 문제삼지 못하는 파병반대운동의 공허함’과 ‘이라크 전쟁 반대에 대한 민족주의 운동의 소극성’을 비난하는 양상으로까지 나아갔다. 민족주의 운동에 대한 지나친 피해의식과 새 운동세력의 출현을 못마땅해 하는 감정들의 충돌에 가까웠던 이 논란은 결국 각자 제기했던 ‘자주평화연대’와 ‘반전평화공동실천’ 구상이 좌초되면서 마무리되었다. 결과는 다소 허탈한 것이었으나 역으로 이는 반전운동의 중요성을 드러낸 것이기도 하다. 향후 반전운동 전망을 둘러싼 논란이 각자가 제기하는 연대조직의 구상차이로 드러났다는 것은 반전평화운동이 새로운 주체형성과정을 위한 실천으로서 유력한 매개고리가 될 것임을 뜻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도 물론 뒤에서 짚어야 할 문제가 있다. 동아시아에서 미국의 군사주의 반전평화운동의 기반이 약한 남한에서 파병문제가 왜 첨예한 쟁점이 되는지를 이해하려면 (북핵을 매개로 전개되는) 한반도 위기를 인식하는 것만으론 충분하지 않다. 자유주의자들은 국익/실리를 이야기하면서 파병을 북핵 문제의 평화적 해결과 연계시켜야한다고 주장(한반도 전쟁 발발 시 이를 국제적으로 호소할 경우에 대비해서라도 파병을 막아야 한다는 주장 포함)한다. 그리고 냉전적 사고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보수주의자들은 주한미군의 역할 감소를 막기 위해서는 파병을 해야 한다는 식으로 주장(공산 괴뢰로부터 자신을 구원해준 데 대한 보은의 논리 포함)하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이 날조된 거짓말이거나 대중운동과 무관한 쟁점이다. 잘 아는 것처럼 미국이 전쟁을 벌일 때마다 한국에게 번번이 전후복구지원과 파병 문제를 언급하는 것은 강력한 한․미(․일) 군사동맹을 믿고서다. 하지만, 한미군사동맹의 근간이 되는 정전협정, 상호방위조약 그리고 합의의사록에서조차 군사동맹의 범위는 한반도에서 군사적인 위험이 초래될 때로 한정되어 있다. 역의 경우까지 그러니까 한반도․동북아시아를 넘어서는 미국의 군사적 대치상태까지를 포괄하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물론, 한국전 혈맹을 근거로 한미동맹을 확대 해석할 수도 있지만 이것은 지배세력이 국내정치의 역관계를 유지 관리하려는 차원이고, 미국의 정치․군사적 행동에서 한․미 동맹이 언급되는 것은 한․미(․일) 동맹의 역사적 특수성 때문이다. 이 역사적 특수성은 2차 대전 이후 미국의 냉전구도 아래 진행된 일본․한국의 전후복구 및 고도성장과 정치․외교적 관계에 바탕을 둔다. 미국의 냉전 구상은 일제의 식민지 경험을 겪었던 나라들(특히 한국, 대만)과 일본의 불편한 관계를 완충시켜 왔고, 그 아래 일본을 정점으로 동아시아 각 국이 묶이는 수직적 경제질서가 형성되었다. 이 우산아래에서 남한이 성장한 것이다. 이때 남한은 냉전의 최전선에 있는 자본주의적 발전 전망의 쇼케이스를 의미하는 것이고, 더불어 동북아의 지정학적 요충지에 자리잡아 미국에 순종하는 절대적인 협력국가(식민지 종속국가)로서 미국의 정치․군사적 이해를 보존하는 의미를 갖는다. 냉전이 해체된 이후에도 한․미․일 3국 동맹은 굳건했고 오히려 공동의 전망을 더 가속하였다. 미국은 이와 같은 특수성에 기반해서 새로운 헤게모니 전략을 구상하였다. 미국은 이러한 역사적 특수성을 기화 삼아 동아시아에서 더더욱 (미국식) 번영을 구가하여 미국의 경제적 이해를 강화하는 한편, 강력한 한․미․일 군사(정치)동맹을 전제로 동아시아에서 정치․군사적 안정을 꾀하여 자신의 이해를 보호한다는 것이다. 이상이 냉전이후 미국의 동아시아 구상에 있어서 기본 개요다. 9․11 테러 이후 미국의 전쟁 억지력 구상은 더욱 호전적이 되었다. 불특정대상에게 예측 불가능한 방법으로 공격받을 수 있기 때문에, 이러한 비대칭적 위협을 완전히 제거하는 방향으로 군사전략을 수립한 것이다. 미국은 이를 가능하다고 보았다. 첫째, 군사기술의 혁신(첨단기술, 정보전)은 이것의 기술적 토대가 되는데 미국은 여기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는 것이고, 둘째, 이 목표에 대해 미-유럽은 물론 미-동아시아 역시 공동의 이해(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가 형성되어 있기 때문에 충분히 협력과 공조태세를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미국의 군사 전략의 재편방향의 기본 얼개는 다음처럼 그려진다. 정치․군사적 불안정성이 금융세계화 중심으로 전이되지 않도록 미국 군사안보의 경계를 확장한다는 목표 아래 첫째, 효율적인 군사적 응징이 가능하도록 작전부대를 경량화하고 기동력을 강화하는 한편, 둘째, 기존의 군사동맹(한․미․일)을 지역동맹으로 확장하고 정치․군사적 안정성을 유지하는데 군사동맹국(한․일)의 책임을 강조하는 것, 셋째, 군사적 위험을 제거하는데 있어서 동맹국의 역할(전비 지원, 파병)을 확대하는 것. 한반도의 주한미군재배치, 한미동맹의 현대화와 한국군 역할의 강화, 일본의 재무장은 ‘새로운 전쟁’을 수행하려는 미군의 신축성 확보 차원에서 전개되는 것이고, 미국의 ‘대테러 전쟁’에서 한국과 일본의 역할이 재차 강조되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다. 사실, 이 같은 구상은 그 자체로서는 완전할 수 없다. 소말리아의 실패, 아프가니스탄․이라크 전쟁의 장기화, 북한의 강한 반발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군사 기술적인 우위 같은 것으로 미국이 원하는 목표를 간단히 달성할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또 UN․유럽 동맹국들의 지원을 손쉽게 얻어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물론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의 경계 밖에서 ‘폭력의 지속’, ‘항구적인 내전’, ‘폭력의 순환’ 자체가 목표가 될 수 있고, 이를 관리하는 것이 초점이 될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문제가 여기서 그치는 것도 아니다. 지역동맹을 확장하고, 한국․일본 등 동맹국의 군사적 역할을 강조하는 것은 무기 이용의 주체를 늘림과 동시에 군비지출을 (경쟁적으로) 비가역적으로 늘리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해당지역의 군사적 긴장을 높이게 된다는 사실이 문제다. 미국의 중동정책은 이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다. 이스라엘은 빈발하는 총성 한 가운데 있으며, 중동지역의 정치․군사적 통치를 위해 키워온 이라크가 느닷없이 쿠웨이트를 침략하여 군사적 모험을 감행하기도 하고, 소련의 남하를 저지하려고 가르쳐온 테러리스트들이 9․11 테러에서처럼 되려 미국 본토를 향해 총을 겨누기도 했던 것이다. 이런 위험이 동반하는 것은 이스라엘, 이라크, 일본 등 하위-제국주의(sub-imperialism) 국가들을 동원하는 과정이 지배세력의 배타적인 민족주의를 동반하기 일쑤고, 퇴행적인 이데올로기를 동원하여 자국의 무장을 합리화하고 주변을 긴장관계로 몰아넣어, 군사적인 경쟁을 자극하기 때문이다. 일본 군국주의의 부활과 남한의 자주국방론이 바로 여기에 해당한다. 이것이 동북아시아에서 북한․중국과 군사적 경쟁을 가속하고 위기상황에 빠뜨릴 것임은 너무도 자명한 것이다. 그리고 이슬람에서뿐만 아니라 동남아시아에서도 드러나고 있듯이, 무기 이용 주체를 늘리는 과정에서 진행되는 무기의 사유화(사유화된 무장)는 폭력 자체를 아예 제어 불가능한 상황으로 빠지게 한다(테러와 폭력의 악순환). 뿐만 아니라 군사적인 행동을 뒷받침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재원이 필요한데, 미국이 이 때 필요한 재원을 어떻게 마련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과거 호황기 때처럼 막대한 생산성이 뒷받침하는 것도 아니요, 옛날 영국 제국주의처럼 식민지에게서 공물을 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전리품을 정부재정으로 직접 귀속시킬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만성적자에 시달리는 정부재정에서 전비지출 비율을 대폭 늘리는 방법밖에 없는데, 이는 사회복지예산의 대폭 삭감으로 귀결된다. 사실 이 같은 분배 정의의 왜곡은 미국만의 문제가 아니고, 지역의 정치․군사적 안정을 떠맡은 미국의 동맹국들에게도 적용된다. 자주국방이라는 이데올로기를 앞세워 군비지출을 대폭 늘리고, 사회복지 지출은 실질적으로 감소하려는 남한의 현실은 이를 잘 보여준다. 무엇보다도 심각한 문제는 폭력의 악순환 속에서 보이지 않는 적을 예비하겠다는 (사전에 제거하겠다는) 안보 논리가 정치를 근본적으로 제약한다는 사실이다. 이는 두 가지 점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냉전시대 안보란 소련이라는 ‘실제’하는 적을 경계하는 것이지만, 냉전 이후 안보란 언제 어디서 누가 강력한 적이 될지 알 수 없는 ‘가상’의 적에 대한 경계를 뜻한다. 이런 상황에서는 예전과 같은 방식 즉, 냉전구도를 전제로 미국의 핵우산 아래 자국의 헤게모니를 유지하고 이에 기반해서 통치를 하는 방식의 부르주아 통치는 사실상 불가능해지게 된다. ‘가상’의 적이란 적이 누군지 정확히 알 수 없다는 말이기도 하고, 동시에 우리가 아닌 남은 모두 적이라는 말이기도 한다. 그리고 동시에 이 모든 것은 언제 어떻게 폭력이 출현할 지도 모른다는 ‘공포’이기도 하다. 적합한 인식을 할 수 없는 조건에서 지배세력은 반복되는 폭력의 원인을 호도하기 일쑤이고, 그리하여 이 반복되는 폭력을 ‘테러리즘’으로 뭉뚱그려서 정의한 것이다. 지배세력의 호언과 달리 이를 기술적으로 해결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결국 모두가 적일 수 있다는 전제 아래 정치를 근본적으로 제약하는 방향으로 수렴하게 된다. 정치를 근본적으로 제약하는 것이란 시민의 기본권을 제약하는 것과 같은 의미다. 이렇게 해서 지배세력 스스로 자신이 약속한 민주주의마저 배신하는 일이 현실로 드러난다. 이 현상은 미국은 물론 동맹국 - 미국의 식민지 종속국에서 더 분명하게 드러난다. 평화헌법 아래 유사법제를 만드는 일본, 국민들의 의사에 반하고 헌법마저 무시하면서까지 파병을 강행하는 한국, 테러방지법의 제정, 집시법의 개악들로 드러나는 일련의 과정 말이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이 가상의 적이라는 말과 달리 ‘공포’는 실재한다는 점이다. 폭력의 무한한 반복과 실재하는 공포는 대중으로 하여금 사태의 원인을 근본적으로 사고하지 못하게 할 수 있는데, 이것이 정치를 불가능하게 하고 대중들을 매우 수동적인 상태로 몰아 넣을 수 있다. 계속되는 테러리즘과 자신의 사회적 재생산의 기반을 상실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시달리다 민주주의가 파괴되는 과정을 보고만 있거나 정치를 거부할 수 있다는 뜻이다(물론 역의 가능성도 있지만). 미국에서 이라크 침략전쟁을 지지하는 대중이나 한국에서 민주주의 파괴과정에 침묵하는 대중, 정치에 무심한 대중의 문제를 분명히 다른 시각에서 보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서 비롯한다. 이 때 가장 관건인 문제는 이 모든 모순과 위기감을 인민들이 참고 견딜 수 있는가 이다. 미국의 군사적 패권, 군사적 긴장 고조, 재정분배의 불균형과 이에 따른 사회적 위기의 심화, 정치적 민주주의의 위협 들 앞에서 말이다. 사태가 이렇다면 우리는 2003년 반전평화운동을 다른 시각에서 바라보고 평가해야 한다. 바로 미국의 동아시아 군사적 패권전략 - 무장한 세계화에 맞서는 민중들의 투쟁이라는 시각에서 말이다. 2003년 반전평화 운동을 어떻게 볼 것인가 Ⅰ - 파병반대 반전평화운동의 난관 : 한미동맹과 반공발전주의 자, 이제 반전평화운동의 현실을 되돌아보자. 남한의 반전운동은 대단히 더디게 시작했던 것은 사실이다. 2003년 2․15 국제반전행동에서 전 세계적으로 1000만에 가까운 대중들이 이라크 침략위협에 맞서는 행동을 벌이는 사이 한국에서는 2000여명의 대중들이 집회를 벌였던 것이다. 하지만 미국의 이라크 침략전쟁이 개시되고 한국군 파병이 불거지면서 반전평화운동의 쟁점은 좀 더 구체적이 되었고, 이것은 3월 한달 내내 대중들 사이 주요 쟁점이었다. 3월 22일 서울에서만 7~8,000여 규모의 대중적인 집회가 진행되는 등 전쟁반대, 파병반대 운동의 물결은 상승세를 타는 듯 했다. 하지만, 주한미군 철수 가능성이 제기되고 노무현 정권이 ‘국익’ 이라는 쟁점을 제기하면서 이 운동은 급격히 소강상태에 빠져들었다. 전쟁은 반대하지만 한국군 파병에는 국익이 중요할 수 있다는 모호한 선택이 지속된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의 파병결정 이후 국회 앞에서 벌어진 투쟁은 이런 소강상태를 결정짓는 국면이었고, 파병결정이 최종으로 확정되면서 파병반대 운동은 한숨을 고르게 된다. 반전평화운동이 더디게 진행되었던 이유를 우리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리고, 기세 좋게 성장하던 반전평화운동이 왜 주춤거리게 되었을까? 일단, 전 세계적인 2․15 반전운평화운동은 우리와 달리 사회운동의 네트워크에서 상당히 체계적으로 준비되어 온 운동이라는 사실부터 확인해야 할 것이다. 이것의 교훈으로 목적 의식적인 준비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당시 남한의 반전운동은 (유럽처럼) 전체운동의 핵심으로 자리잡을 만큼 중요한 위치에 있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해야 한다. 우리나라 민중운동은 상당히 위축되어 있었던 데다가 그나마 반전평화라는 쟁점은 한국의 민중운동에게 낯선 쟁점이었다. ‘전쟁반대’는 신사회운동의 쟁점에 불과했거나 중심운동(노동운동, 통일운동)에 비해 부차적인 쟁점이었고, 기층 대중운동에게 이것은 사안별 연대의 대상으로서 부문운동의 지위에 머물렀던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더욱 주의해야 할 문제는 더디게라도 시작했던 반전평화운동이 파고를 그리다 ‘한미동맹이 위험수준’이라는 지배세력의 협박 앞에서 주춤거렸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우리는 반전평화운동의 첫 번째 난관을 발견할 수 있는데, 바로 한미동맹과 반공발전주의다. 한국의 반전평화운동이 한미동맹을 넘어서기란 그리 간단치 않다. 주한미군 철수 가능성을 운운하며 대중을 위협하는 수구반동세력의 공세도 문제지만, 한․미 공조를 통해서만 경제가 성장할 수 있고 정치․군사적으로 안정을 누릴 수 있다는 신화가 지난 50여 년 동안 형성되어 왔고 이는 아무도 도전할 수 없는 성역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바로 반공발전주의 이데올로기다. 1960~70년대 고도 성장이 노동자 민중의 처참한 희생으로 가능했음은 이제 누구에게나 알려졌지만, 이곳에 한․미 공조아래 발전이 가능하다 신화도 함께 자리한다. 이것이 오늘 우리의 현실이다. IMF 경제위기는 대중의 이율배반적인 면을 더욱 강화했다. 한편으로는 불안정한 일자리와 장시간 노동, 저임금으로 더 이상 자신의 삶을 지탱할 수 없게되자 이에 대해 분노를 표출하기도 하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경기침체의 종식과 신화의 재현을 더더욱 갈구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동요가 부당한 파병압력에 대한 대중의 불쾌감과 동아시아 경제적 번영과 정치․군사적 안정이라는 미국의 구상에 대한 희망이 공존하는 상황으로까지 이어온 것이다. 반전평화운동을 가로막은 벽은 외재한다기보다는 대중 안에 내재했던 것이다. 상반기 파병반대운동이 미국의 군사패권전략의 야만성을 폭로하고 이라크 파병을 저지하는 데만 초점을 두었다는 것은 결국 한미동맹의 암초 앞에서 반전평화 운동의 동력이 급격히 위축될 수 있는 위험성을 내재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미국의 동아시아 구상(경제적 번영, 정치 군사적 안정)에 대한 대중의 허구적지지 - 즉, 반공발전주의 이데올로기를 미국의 야만성/전쟁의 야만성을 폭로하는 데만 초점을 둔 운동으로 깨트릴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2003년 반전평화 운동을 어떻게 볼 것인가 Ⅱ - 파병반대 반전평화운동의 난관 : 신자유주의 반대 운동(생존권 사수운동)과 연대의 곤란 대량살상무기의 부재, 막대한 전비, 그리고 이라크 개전 이후보다 종전 선언 이후 더 많이 발생한 미국 사망자, 이라크 저항세력의 지속적인 저항들로 미국은 교착 상태에 빠졌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미국은 이라크 점령에 대한 국제사회의 책임을 강조했고, UN의 이라크 재건 결의를 배경으로 동맹국들에게 전비지원과 추가파병을 요청하였다. 한국 역시 이를 따랐고, 추가파병을 결정하였다. 이것이 하반기 파병반대 운동의 조건이 되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하지만, 파병을 반대한다는 여론이 비등했고 많은 활동가들이 적지 않게 노력했음에도 정작 파병반대 반전평화운동은 좀처럼 다시 불붙을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범국민대회라고 명명하고도 2,000 ~ 3,000 규모의 시위대를 조직하는 것 이상의 투쟁을 전개하지 못했다. 하반기 노무현 재신임을 전후하여 대중운동들이 곳곳에서 격렬하게 일어났음에도 말이다. 이때를 전후하여 반전평화운동이 또 다른 난관에 봉착했다. 바로 미국의 군사주의에 반대하는 반전운동과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반대하는 생존권 사수운동이 분리된 계기를 통해서 드러나다 매번 서로 미끄러지면서 종결되더라는 사실이다. 2003년 한해 각자의 계기를 통해서 전개되는 대중운동들은 무엇 하나 예외 없이 거기에서만 멈추었다. 극한적인 삶의 위기에 내몰린 노동자들이 목을 메고 분신하며 노동자 운동의 촉발을 호소했지만, 노동자 운동은 자신의 분노를 한번 드러내는 것으로 이후를 기약했다. WTO 시장 개방에 맞선 농민운동 역시 멀리 칸쿤에서 산화한 열사를 상여에 메고 투쟁에 나섰지만 농업시장 개방을 항의하는 투쟁을 대규모로 조직해보는 것으로 2003년 한해 투쟁을 마감하였다. 핵폐기장 건설을 반대하는 부안의 투쟁은 대중의 민주주의를 향한 새로운 시도들만 보아도 주목되어야 하는 투쟁이었지만, 2003년 내내 부안지역의 문제에서 벗어나지를 못하였다. 그리고 이들 운동들은 반전평화운동과 별개의 운동으로 간주되었고, 또 그렇게 진행되었다. 우리는 이 문제를 어떻게 인식해야 할 것인가? 여기서 민중운동의 상설적 공동투쟁체로서 전국민중연대의 위상이 모호했다는 점을 지적하며 공동투쟁을 위한 네트워크의 부재를 지적할 수도 있겠지만, 설사 그런 네트워크가 형식적으로 존재했다 할지라도 사안별 연대투쟁에만 무게중심이 쏠려있던 이들 운동이 공동투쟁으로 나가기는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다. 문제를 연대 틀의 부재로 돌리기에는 무언가 석연치 않은 이유도 이 때문이다. 사실, 2003년 하반기 파병반대운동은 상반기와 달리 미국의 침략전쟁을 규탄하는 것보다는 이라크 추가 파병을 저지하는 데만 관심을 기울였던 것이 사실이다. 상반기 투쟁에서는 적어도 미국의 이라크 침략을 규탄하면서 한국군 파병을 저지하는 투쟁을 벌였던 것에 비해, 하반기 투쟁은 오히려 쟁점의 폭이 좁았다는 뜻이다. 종전선언 이후 이라크 점령에 무심하다 한국군 파병이 제기되자 그제야 파병반대 국민행동이 출발했다는 상황 자체가 이를 조건 지운 것이다. 물론 이렇게 출발했다는 것 자체가 문제가 될 수는 없다. 문제는 이 운동이 지속적으로 파병을 막는 데만 관심을 기울였고, 대단히 기술적인 방식을 중시 여기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지배세력 내 분파 갈등의 활용, 재 신임 국면의 활용, 국민투표 방식의 활용, 그리고 끝내는 낙선운동마저 활용하자는 일련의 전술들은 파병을 막아내는 것만이 이 운동의 궁극적인 목적이었음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이런 운동은 단기적인 목적달성이 최선이었기 때문에 대중들의 의식화․조직화보다는 시민운동가들 - 이른바 국회 국방위 전문가들, 정당정치 전문가들, 법률 전문가들 등 테크노크라트들의 능력에 많은 것을 의지하고, 이슈를 부각시키는 데 유력한 수단인 미디어에 거의 전적으로 의존한다. 결국 이익집단들의 운동방식 혹은 자기 중심적 실리주의 운동으로서 코포라티즘적 운동과 유사한 모양새를 띄면서 파병반대운동은 연대의 가능성을 스스로 차단했던 것이다. 2003년 11월 격렬했던 노동자운동과 접점을 찾지 못하고 끝내 거리를 유지했던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물론, 일부 시민단체들이 노동자운동의 폭력성, 반전평화운동의 참가자와 노동자운동의 참가자가 다르다는 식으로 반발하며 이들 운동의 연대를 가로막았고 노무현 정권에 대한 모호한 입장으로 반전평화운동을 급진적이지 못하게 했다는 점에서 이들의 정치적 오류를 비판하는 것도 필요하다. 하지만, 파병반대운동이 연대 지향적으로 성장하지 못한 원인을 단지 시민운동진영 탓이라고 돌릴 수만은 없는 문제가 있다. 좀 더 근본적으로 성찰해야 하는데, 이렇게 사안별 이슈에만 집중하여 운동의 궁극적인 목적을 자신의 계기에서만 찾는 방식의 운동 즉, 연대를 스스로 제한하는 운동은 파병반대운동 뿐만 아니라 손배가압류 철회를 위한 노동자운동, 그리고 FTA 국회비준 저지를 위한 농민 운동도 비슷한 경향을 띄었기 때문이다. 파병반대 운동이 노동자운동, 농민운동과 거리를 둔 만큼 이들 노동자운동, 농민운동도 파병반대 운동과 거리를 두었다는 것이다. 반전평화운동의 출발점 2003년 한해동안 반전평화운동의 흐름은 파병반대운동에서만 보였던 것은 아니다. 국방비 증액 반대운동, 한미미래동맹/SCM 규탄 등, 자주국방과 한미동맹의 군사적 현대화를 비판하는 다양한 운동들이 출현하였다. 또 두 여중생의 죽음을 애도하며 주한미군 장기 주둔에 따른 피해를 비판하는 운동이 2003년에도 광범위하게 전개되었고, 이 운동이 반전평화운동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그리고 전통적인 민족자주 통일운동이 한반도 위기에 맞서 평화를 염원하는 운동으로 전화를 모색하고, 반전평화운동과 접점을 모색하는 시도들도 있었다. 이 운동들이 광범위한 대중적인 운동으로 전개되지 못했다는 점에서 구체적으로 평가하기에는 제한적이지만, 적어도 이로부터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미국의 동아시아 군사패권전략에 맞서는 반전평화운동이 파병은 물론이고 그밖에도 다른 여러 가지 계기로 등장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문제는 반전평화운동이 2003년에 부딪힌 난관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이다. 가장 핵심적인 초점은 어떻게 해야 한미동맹에 균열을 낼 수 있는가이다. 앞서 지적한 것처럼 한미동맹은 정치․외교․군사적 동맹뿐만 아니라 경제공동체로서 특수한 한미관계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바로 이 사실을, 즉 군사동맹으로서 뿐만 아니라 경제공동체로서 특수한 한미관계가 한반도 민중에게 무엇을 뜻하는 지를 정확히 비판할 수 있어야 한다. 기업지배구조를 개혁하고 투자여건을 확보한다는 미명아래 남한 정부는 구조조정을 진행해왔다. 그 결과의 참혹 상을 분명히 폭로할 수 있어야 한다. 수 조원의 돈이 초국적 자본의 이동과 함께 해외로 빠져나갔고, 그 사이 남한 민중은 삶의 위기에 내몰려 자신의 목숨을 내놔야 했다는 사실을 폭로해야 한다. 한미관계에 균열을 내기 위해선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에 대한 비판이 동반되어야 한다. 이러한 운동과 더불어 우리는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와 강력한 군사력에 기반한 통치성의 구축 곧, 무장한 세계화에 맞서는 민중들의 투쟁, 반전평화운동을 조직할 수 있어야 한다. 미국의 무장한 세계화 전략은 또한 경제위기와 통치성의 위기를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반전평화운동이 다양한 계기로 촉발되듯이 대중운동의 새로운 개시를 위한 객관적 조건이 존재함을 뜻한다. 문제는 대중들이 반공발전주의라는 허망한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히지 않고, 반전평화운동의 정치적 주체로 설 수 있겠는가이다. 또 이슈 파이팅으로서 운동의 지위를 넘어서 자신의 정치적 연대의 지점을 확보하고 반전평화운동의 새로운 주체를 도모할 수 있겠는가이다. 운동의 성장은 대중의 정치적 각성(의식화)과 운동주체의 형성(조직화)에 의해 가능하다고 했다. 이 고전적인 정식이 매우 적합한 대답이다. 왜냐하면, 이 말은 대중들이 과학적 인식에 기반해서 실천을 벌일 때에야 자신이 처한 위기의 원인을 분명히 볼 수 있다는 것이고, 정념에 빠지지 않고 수동적인 모습에서 벗어나 반전평화운동의 주체로 성장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2003년 반전평화운동은 정치를 다시 가동하려는 인민들의 노력이라는 측면만 보아도 그 역사적 의미가 온당하게 평가되어야 한다. 물론 현실에서 많은 난관(한미동맹과 반공발전주의, 노동자/농민/빈민운동과 연대의 곤란)에 부딪히면서 급격하게 소강했지만, 여전히 반전평화운동을 매개로 정치가 다시 작동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점은 유의 깊게 살펴야 한다. 이상이 바로 반전평화운동이 새로운 운동으로서 가능성을 구성하는 핵심이다. 미국의 무장한 세계화에 맞서는 민중들의 반전평화운동은 이제 한 걸음을 내딛었다. 남은 것은 어떻게 이것이 보편적인 이념적 지향 아래 대중운동으로서 자신의 가능성을 키우는가이다. 우리가 깊이 숙고해야 하는 것은 반전평화운동은 곧 새로운 운동의 시작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운동 자체의 복원으로서 가능성을 의미한다. 이를 진실로 깨닫는 것, 이것이 무엇보다 소중하다.PSSP
2002년 ILO에서 “인간다운 노동과 비공식 경제”에 대한 전반적인 토론이 진행된 이후, 2003년 12월 3일부터 6일까지 인도의 아흐메다바드에선 세와(SEWA), 에와(EWA), 국제노점상연합(StreetNet), 가나 노동조합 총연맹(Ghana Trade Union Congress), 나이지리아 노동조합 총연맹(Nigerian Labour Congress), 태국 가내노동자 네트워크(HomeNet Thailand)의 공동개최로 “비공식부문 조직 활동”관련 국제회의가 진행되었다. 23개국 47개 단체가 이 자리에 참가했다. 아흐메다바드 회의는 다음과 같은 상황을 주목했다. - 개발도상국의 노동자들은 대부분 비공식 부문에 속해 있고 선진국의 경우에도 이러한 노동자들이 증가하고 있다. 비공식부문 노동자들은 지위가 불안하고 보호받지 못하며 대부분 빈민이다. 최근 자유화시대에 공식 산업이 줄어들고 비공식 경제가 빨리 성장하고 있으며 노동자들의 상황은 악화되고 있다. 여성이 비공식 경제의 다수이며 가장 빈곤하고 가장 차별받고 있다. - 대부분의 사람들이 선택해서가 아니라 생존하기 위해 비공식 경제에 들어간다. 비공식 경제에 속한 노동자들은 임금을 받는 노동자들과 자가(self) 영업 노동자들 모두를 포함한다. 대부분의 자가 영업 노동자들이 임금을 받는 노동자들과 마찬가지로 불안한 지위에 있고 타격을 입기 쉽다. 그리고 계속 상황이 바뀔 수밖에 없다. 보호받거나 권리와 의견 개진이 취약하기 때문에 이러한 노동자들은 종종 빈곤의 수렁에 빠져있다. - 비공식부문 노동자들은 경제에 지대한 공헌을 하고 있지만 노동 법률과 사회적 보호의 면에서 인정되지 못하고 보호받지 못한다. 사회적 보호의 취약함은 비공식부문 노동자들이 사회적으로 배제되는 극단적 측면이다. 아흐메다바드 대회는 2002년 국제 노동 회의에서 비공식 경제에서의 “인간다운 노동”과 관련한 결의를 통과시킨 것에 주목한다. 이 결의의 결과에 비추어 아흐메다바드 대회는 모든 노동자들이 충분히 노동자로서 권리, 특히 단결권을 가져야 함을 느꼈다. 즉 지역적, 전국적, 국제적 조직을 스스로 구성할 권리와 이를 통해 생활․노동 환경을 개선할 가능성을 갖도록 하기 위함이다. 아흐메다바드 대회는 아래 주요 다섯 주제에 주목했으며 그 결론과 각각에 대한 권고사항을 확립하였다. 1) 조직적 지속성과 경험 축적: 많은 비공식 노동자 단체들이 신생 조직이거나 작다. 그렇기 때문에 조직적으로 유지되기 위해 중요한 경험 축적이 필요하다. 지속 가능한 조직을 만들과 강화하기 위해 우리는 권고한다 - 민주적이고 투명하며 회원중심인 조직 구조 - 조직화, 지도력, 기술적/관리 능력을 포함한 다양한 경험 축적 - 회원들의 회비, 서비스에 대한 대가, 저축과 신용, 생산과 판매 혹은 그 외 혁신적인 재정 마련 방법 등을 통한 안정된 재정 - 정책 결정과 실행에 있어 비공식 노동자들의 참여 및 의사개진 2) 노동 법 : 많은 나라들에서의 노동 법률이 일정 기간 반추되지 못하였고 분산된 채로 방치되어 왔으며 비공식 노동자들을 포함하지 않고 있다. 좀 더 근본적으로, 대부분의 노동 법률이 ‘노동자-자본가 관계’를 전제로 되어 있으며 이로 인해 노동관계를 충분히 다루지 못하고 있다. 이런 단점을 다루기 위해 우리는 권고한다 - 비공식 노동자들의 단체들까지 포함하여 모든 사회적 파트너들이 현 노동 법률을 반추해야 한다. 법률들을 일치시키고 가능한 많은 고용 관계를 다룰 수 있도록 확장시키기 위함이다. - 동등한 지위로 비공식 노동자들의 조직을 세워야 한다. 어떤 법적 기구와 보호를 통해 노동 법률을 바라볼지 알기 위함이다. - 다양한 영역의 비공식 노동자들을 다룬 혁신적인 법안들을 문서화해야 한다. - 비공식 노동 단체들이 어떻게 활동을 보호하기 위해 법을 활용해왔는지를 문서화해야 한다. - 어떻게 자본가들이 법의 취약점을 이용하여 고용 관계를 변칙적으로 이용하거나 비공식화 했는지를 문서화해야 한다. 3) 단체 교섭 : 비공식 부문 노동자들을 위한 단체 교섭 테이블은 많지 않다. 그러므로 단체들이 이를 이끌어내야 한다. 짧게 말하면 특별(임시) 교섭에서 관에 압력을 가하고 협상에 임하도록 해야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법적(정식) 교섭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권고한다. - 비공식 노동자들을 위한 법적(정식) 교섭과 특별(임시) 교섭 등 현 단체 교섭 구조를 문서화해야 한다. - 3개(관/경/단체) 혹은 그 이상 단체 교섭 포럼을 이끌어내야 한다. - 노동조합과 비공식 노동자 단체들을 포함하기 위해 현 법들을 개정해야 한다. - 단체 교섭에 압력을 행사할 수 있도록 비공식 노동자들의 강력한 단체들을 세워내야 한다. 4) 사회적 보호: 대부분의 비공식 노동자들이 보호받지 못하고 감당할 수 있고, 적당하며, 시의 적절한 사회적 보호 제도의 혜택을 받지 못하고 있다. 노동조합들과 그 밖의 다른 회원중심 단체들은 비공식 노동자들이 기본적 권리와 권리부여 등 사회적 보호를 받을 수 있도록 하고자 활동하고 있다. 우리의 경험에 기반을 두고 우리는 권고하는 바이다. - 사회적 보호의 책임자로서 주정부와 연계하고 협력을 구해야 한다. - 사회적 보호를 위해 비공식 노동자들을 이 노동자들의 단체를 통해 끊임없이 조직해야 한다. 노동자, 주/관, 고용주에 기반해서 말이다. - 필요한 서비스이자 비공식 노동자들을 조직하는 방법으로서 보험을 촉진해야한다. - 전체 노동자들의 사회적 보호 정책, 규정, 법률, 프로그램들을 마련하기 위해 조합, 협회, 회원중심 단체들과 NGO들 사이에 연합조직에 함께 하거나 연결시켜야 한다. 5) 고용 창출과 기술 함양: 자연적/사회적 재앙뿐만 아니라 기업과 경제 구조조정, 기술의 급격한 변화 과정으로 고용 및 고용기회가 줄어들고 있다. 더 나아가 노동하는 사람들 특히 여성들이 사회적/자원의 한계 때문에 기술을 함양할 가능성으로부터 차단되고 있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권고한다. - 비공식부문 노동자, 특히 여성들에게 그들의 기술을 다양화하고 향상시킬 기회에 대한 접근도를 높여야 한다. - 단체들과 정부가 비공식부문 노동자들의 기술수준을 다양화하고 향상시킬 수 있도록 훈련 기관을 설립해야 한다. - 대륙, 국제적 수준뿐만 아니라 나라들 차원에서 경험을 교류하기 위하여 비공식부문 노동자들의 단체들이 정기적으로 협의해야 한다. - 협조라든지 다른 구조를 통해 생활 가능성을 세울 수 있도록 비공식부문 노동자들이 다양한 수단에 접근할 수 있도록 높여야 한다. - 고용 창출과 판매 접근을 위해 국제적/대륙간 ‘국제 무역 네트워크’ 같은 기관에 대해 지원해야 한다. - 비공식부문 노동자들을 위한 고용창출과 기술 함양을 위해 국가적/국제적 수준에 따른 분명한 정책을 개발해야 한다. 더 나아가 아흐메다바드 대회는 요구하는 바이다. - 정부에게 요구한다. 안정하고 인간다운 노동의 광범위한 창출을 위해 경제적, 사회적, 법적, 정치적 골간을 제공하라. 비공식 고용을 경제적/사회적 개발 정책의 중심에서 고려하라. 빈곤 완화를 위해 보호 법률과 사회적 보호를 신분/지위 여하의 구별 없이 확장하라. - 다양한 단체들에 요구한다. 빈곤문제를 근본적으로 없애는 면에서 비공식 노동자들을 단체 정책과 프로그램에서 중심적으로 다루라. - 노동조합들에게 요구한다. 비공식 부문에 대한 조직 활동을 강화하고 공식/비공식 노동자들 모두를 전체적으로 바라보면서 구조를 변화하거나 창출하라. 이는 비공식 노동자들, 특히 여성들의 구체적 요구를 받아 안을 수 있도록 참여와 의사개진을 권장하기 위함이다. 그리고 교육, 법적 도움, 의료 보험 기구, 신용, 대출과 같은 서비스를 제공할 것을 요구한다. 그리고 단체교섭의 기본적 책임을 다하여 이를 구성하라. 본 대회는 아흐메다바드에서 시작된 이 과정이 계속되어야 함을 결정했다. 이는 향후 몇 년간 이러한 국제대회를 꾸준히 개최하기 위함이다. - 국제 노동 회의에서 비공식 부문 노동자들의 문제에 대한 토론, 의사개진을 강화하기 위함이다. - 국제적 노동조합, 국가적 노동조합과 협력하여 비공식 노동자들의 그룹들의 국제적 만남을 가져오고 개최하기 위함이다. - 쓰레기 수집, 가내 노동자들과 같은 타격받기 쉬운 부문 노동자들의 조직을 강화하기 위함이다. - 비공식부문 노동자 조직 활동의 경험을 문서화하고 나누며 지속적으로 공유하기 위함이다. - 교환 방문, 여행 등등의 방법으로 연계를 강화하기 위함이다. - 다른 비공식 부문 활동을 하고 있는 단체들 사이의 연계를 강화하기 위함이다. - 이 결의에 의거하여 캠페인을 진행하기 위함이다. - 대륙 회의를 세우기 위함이다. - 결정된 활동을 추진해나가기 위해 재정을 마련하기 위함이다. 본 대회는 국제 조직위에 본 자리에서 채택된 활동 계획을 향후 추진할 것을 요구한다. 그리고 아메리카와 유럽의 참여를 이끌어낼 것 또한 요구한다.PSS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