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이상 죽이지 마라 너희 칼 쥐고 총 가진 자들 싸늘한 주검 위에 찍힌 독재의 흔적이 검붉은 피로, 썩은 살로 외치는구나 더 이상 욕되이 마라 너희 멸사봉공 외치는 자들 압제의 칼바람이 거짓 역사 되어 흘러도 갈대처럼 일어서며 외치는구나 여기 한 아이 죽어 눈을 감으나 남은 이들 모두 부릅뜬 눈으로 살아 참 민주, 참 역사 향해 저 길 그 주검을 메고 함께 가는구나 - 정태춘, 「일어나라 열사여」中 1. 들어가며 - 국가폭력과 학살의 역사 헌법 제1조에 따르면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그리고 국사교과서에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 60년대∼80년대 '산업화', 90년대 '민주화', 이 모두가 찬란한 민족번영의 역사로 기술되어 있다. 그러나 필자가 바라보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 아니다. 그리고 대한민국의 역사는 민족번영의 역사가 아니다. 1946년 9월 총파업, 10월 인민항쟁, 1948년 4.3항쟁, 여순 사건, 1950년 보도연맹사건, 한국전쟁 처리 과정, 1960년 4·19 혁명, 1980년 광주민중항쟁을 통해서 수십만의 양민들과 민주통일인사들이 경찰과 미군, '국군'에 의해서 학살되었다. 여운형, 김구 선생은 암살되었고, 조봉암 진보당 당수, 조용수 민족일보 사장, 최백근 사회당 조직부장, 세칭 '인혁당 재건위 사건'과 관련된 이수병 등 8명의 민주통일인사들은 재판 과정을 거쳐서 사법살해 되었다. 전태일 열사를 비롯한 수많은 노동, 빈민 열사들이 분신하였고, 박종철, 이한열 열사들이 고문과 최루탄으로 사망하였다. 60년대, 70년대 경제개발이라는 찬란한 미명 아래 국토개발단과 광주대단지에서 수없이 많은 양민과 빈민들이 인권유린을 당하고 죽었다. 장기수 선생들은 강제전향 과정에서 고문당하고 살해당했으며, 녹화사업, 삼청교육대에 의해서 각각 1000여명 이상의 학생들과 4만 여명 이상의 시민들이 인권을 유린당하고 많은 수가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 80년대에는 사인도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은 정치적 의문사가 수십 여건 발생했고, 고문으로 피해 입은 사람들은 측량할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그리고 2002년에도 검찰에서 피의자가 고문치사 당하였고, 시위자가 폭력진압으로 큰 부상을 입고 있으며, 노동자들이 계속 분신하고 있다. 국가기구에 의해서 수십만의 민중이 조직적으로 학살되었고, 여전히 많은 민중들이 폭력 속에서 희생되는 곳, 이곳이 대한민국이다. 대한민국의 역사는 '국가폭력과 학살의 역사'였고,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은 이런 역사를 바로 잡아야 하는 의무 아래 살아가는 것이다. 2. 의문사 유가족들의 투쟁의 역사 의문사는 여운형, 김구 선생 암살 등과 같이 1945년 이후에도 존재하였다. 그리고 국가권력에 의한 생명권 침해까지 해석의 범주를 넓히면 사법살인과 양민학살까지 포함될 수 있다. 그러나 '공권력의 개입 가능성이 높은 의문의 죽음'이라는 일반적인 의미의 의문사는 1970년대, 특히 1980년대에 집중적으로 발생했다. 그리고 이 당시 의문사한 자의 유가족들이 중심이 되어서 1988년 10월에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이하 '유가협'이라 한다) 산하 의문사 지회를 결성하였고 지금까지 지난한 투쟁을 해왔다. 의문사 유가족들은 1988년 10월 17일부터 135일 동안 기독교 회관에서 농성을 하면서 의문사 문제를 사회화하려고 노력했다. 그 결과 국회에 5공 청문회에서 의문사 문제가 다루어졌다. 그러나 진상규명은 전혀 이루어지지 못한 채 의문사 관련 청문회가 중단되었다. 또한 1990년에는 10만 명 서명을 받아서 국회에 진상조사 요구를 하였으나 이 역시 폐기되었다. 한편 유가족들은 이철규, 이내창, 박창수 열사 등 새로운 의문사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진상규명을 위해서 투쟁을 하였고, 이외에도 각 의문사 사건의 분석, 정리, 국가기구에 청원, 진정, 고소 등의 방법을 동원하여서 계속 진상규명 노력을 하였으나 이 역시 김상원 열사를 제외하면 별 다른 성과가 없었다. 유가족들의 투쟁은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면서 더욱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 유가협은 1998년 4월 서울역에서 '민족민주열사 명예회복과 의문사진상규명을 위한 캠페인'을 시작하였고 1998년 11월부터 국회 앞에서 422일 동안 천막농성을 진행하였다. 그 결과 의문사진상규명특별법(이하 '의문사법')과 민주화운동관련자명예회복및보상심의법(이하 '명예회복법')이 제정되었다. 그 이후 유가족들은 의문사법의 올바른 시행령 제정을 위해서 투쟁하였고, 마침내 2000년 10월 17일 대통령 소속으로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이하 '의문사위원회'라 한다)가 출범하였다. 의문사위원회에서는 이후 2002년 9월 16일까지 83건의 사건을 조사하였다. 그러나 의문사위원회에서는 63건의 사건을 기각과 진상규명불능으로 결정하였고, 이에 의문사 유가족들은 철저한 진상규명을 위한 조사권한 강화, 조사기간 연장을 주장하면서 여의도 한나라당사 앞에서 10월 10일부터 11월 14일까지 36일간 노숙농성을 하였다. 3.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성과와 한계 의문사위원회는 1948년 반민특위 이후 처음으로 구성된 과거청산 국가기구다. 물론 그 배경에는 의문사 유가족들의 처절한 투쟁이 있었다. 이런 면에서 본다면 의문사위원회의 구성과 활동 자체만 해도 상당한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의문사진상규명운동의 발전을 위해서 성과와 한계를 더욱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우선 성과부터 확인해 보자. 의문사위원회는 과거 권위주의 정권이 벌인 국가폭력의 진상을 일부 규명함으로써 사회에 경종을 울렸다. 대표적으로 5공의 관제 프락치 공작인 녹화사업, 유신정부에서 정권보위 차원으로 조작한 인혁당 재건위 사건, 장기수에 대한 고문살해 사건, 삼청교육대의 진상을 상당 부분 규명하여서 박정희 정부와 전두환 정부의 반인간성을 폭로하였다. 또한 허원근 일병 사건의 진실을 밝혀냄으로써 군수사의 문제점과 군의문사 사건의 재조사 필요성에 대한 사회적 문제제기를 하였고, 노동자 문용섭에 대한 구사대 폭력 살인, 최종길 교수에 대한 중앙정보부(이하 '중정')의 고문 살해, 한총련 투쟁국장이었던 김준배에 대한 폭행 살인들을 밝혀냄으로써 민주발전에 기여하였다. 한편 의문사위원회는 김준배 사건을 밝혀내면서 국가기구로는 처음으로 국가보안법의 개정(폐지)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활동보고서를 통해서 반인륜적 범죄 또는 국가의 인권 침해 범죄에 대한 공소시효 배제를 정부에 권고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의문사위원회는 무시할 수 없는 성과를 남겼지만 활동의 한계 역시 두드러졌다. 첫째, 의문사의 범위가 상당히 제한적이다. 의문사법에 따르면 의문사위원회는 민주화운동 관련성이 상당한 경우에만 의문사로 인정된다. 따라서 경찰이나 정보기관으로부터 아무리 심하게 고문을 당하소 살해당한 사건이라 해도 민주화관련성이 없으면 조사가 불가능하게 되었다. 즉, 국가폭력에 의한 생명권유린의 진상을 규명하여서 과거청산을 하겠다는 애초의 취지가 민주화운동 관련성이라는 '문구'로 심하게 퇴색해 버린 것이다. 또한 의문사법에서 준용하고 있는 명예회복법 민주화운동 정의를 보면 민주화운동을 1969년 삼선개헌 이후의 행위로 국한하고 있다. 이 규정에 의해서 의문사위원회의 조사대상 사건은 1969년 이후에 발생한 사건으로 국한되었다. 둘째, 의문사위원회에는 수사권이 없고 그 결과 국정원, 기무사 등 관련기관의 비협조적인 태도를 넘지 못했다. 현재 임의수사에 해당하는 출석요구, 출석요구 거부자에 대한 동행명령, 진술청취, 자료제출 요구, 실지조사 정도만 의문사위원회가 취할 수 있는 조사의 권한이다. 그러나 참고인이나 특정 기관이 동행명령, 실지조사, 자료제출을 거부하거나 허위 자료를 제출하여도 과태료 1,000만원을 부과하는 것말고는 의문사위원회에서 취할 수 있는 조치가 없다. 그러므로 돈만 있으면 모두가 의문사위원회의 조사를 빠져나갈 수 있는 것이다. 실제로 검사들과 전직 대통령들은 의문사위원회의 동행명령을 거부하였다. 그리고 국정원과 기무사에서는 의문사위원회에서 요구하는 자료 중에서 일부만 회신하였고, 자료 존안 여부를 투명하게 확인하기 위해서 자료실 열람을 요청하여도 1∼2사건을 제외하고 모두 거절하였다. 당시 기관 근무자의 인적사항을 확인하려고 하여도 아예 회신을 하지 않거나 자체적으로 범위를 최소화해서 회신하였고, 실지조사를 요구하여도 모두 거절하였다{{) 한진중공업 노조위원장으로 1991년에 서울구치소에 수감 중이다가 안양병원에서 의문사한 박창수 사건의 경우 당시 의문사위원회에서 안기부 부산지부 직원 A씨에 대한 국정원의 감찰 기록 제출을 계속 요청하였으나 국정원에서는 관련 자료가 없다고 반복 회신하였다. 이에 의문사위원회에서 A씨를 조사한 결과 국정원에서 세 차례에 걸쳐서 감찰조사를 받았다는 진술을 얻었고 이에 의문사위원회에서 다시 국정원에 자료 요청을 하자 가장 최근의 감찰 자료 1건만 조사종료 이틀 전인 9월 14일에 의문사위원회에 회신하였다. 또한 1989년에 조선대학교 교지 민주조선 편집장으로 근무하다가 광주 청옥동 소재 4수원지에서 사망한 상태로 발견된 이철규 사건의 경우 의문사위원회에서 당시 안기부 광주지부 직원의 인적사항을 몇 차례 요청했으나 국정원에서는 '국정원이 이철규 사건과 관련이 없다'는 내용만 회신하였다. 그러다가 조사 종료 3개월 가량 이전에 단 1명 B씨의 인적사항만 회신하였다. 그리고 의문사위원회에서 B씨를 조사한 결과 안기부에서 간첩단 사건 관련해서 이철규 배후 수사를 했을 가능성이 포착되었다. 그러나 국정원에서는 그 이후 의문사위원회의 인적사항 요청에 대해서 일체 자료를 회신하지 않았다. 이것들은 국정원의 비협조 사례 중 일부에 불과하다. 또한 기무사에서는 의문사위원회에서 실지조사를 요구했을 때 '하늘이 무너져도', '대통령이 와도' '들여보낼 수 없다'는 식으로 오만함의 극치를 보인 일도 있다. }}. 의문사 사건은 일반 변사사건과 다르게 자료의 확보가 절대적으로 중요하기 때문에 관련 기관에서 자료를 제출하지 않는다면 많은 사건들의 진상규명이 한계에 부딪힌다{{) 의문사 사건은 짧게는 5년 이전, 보통은 10∼20년 이전, 길게는 30년 이전에 발생한 사건으로 조사의 출발점인 변사현장이나 사체, 유류품 등이 보존되어 있지 않다. 또한 변사자료, 부검사진 조차 존재하지 않는 사건도 여러 건 있다. 따라서 경찰, 국정원, 기무사, 국방부, 검찰에서 보관하고 있는 정보보고, 내사자료, 수사자료의 확보가 의문사진상규명에 있어서 관건이다. }}. 아울러 의문사 사건의 경우 수사기관과 정보기관이 사건 발생, 사후 조작, 은폐에 조직적으로 개입하였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의문사위원회에 수사권이 반드시 확보되어야 한다. 구체적인 방식으로는 현재 의문사위원회의 위원이 특별검사로 임명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 중론이다. 셋째, 피진정인으로 의문사위원회에 출석한 과거(또는 현직) 수사기관, 정보기관 직원들이 허위진술을 하여도 의문사위원회에서는 처벌할 수 없다. 의문사 사건은 앞서 기술한 것처럼 발생 시간이 오래 지난 관계로 자료가 극히 부족하다. 피진정인들은 위원회의 이런 미약한 법적 권한을 이용하여 허위 진술을 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부천 '수영기계'에서 노동운동을 하다가 시흥역에서 사망한 박태순 사건(실종사건으로 의문사위원회에서 사체를 발견)의 경우 박태순이 사망하는 장면을 목격한 기무사 핵심 참고인 C씨가 시종일관 진술을 번복하였다. 허위 진술을 계속하다가 의문사위원회에서 기무사 자료를 일부 확보하여서 근거를 제시하면 다시 진술을 번복하였던 것이다. 또한 장석구 사건(인혁당 사건)의 경우 1974년 사건 당시 조사를 받았던 피해자들 다수가 고문을 가했던 특정인 이름을 정확하게 지목하고 당시 구체적 상황을 진술하였다. 그리고 당시 고문 장면 목격 경찰의 진술 역시 존재하는데도 주요 고문수사관으로 실명이 거론된 경찰들과 중정 수사관은 극구 고문 사실을 부인하고 있다. 이런 사례는 셀 수 없이 많다. }}. 의문사 사건은 증거가 보존되지 않았으며 자료가 대부분 폐기되었고 관련 참고인이 다수 사망한 관계로 검찰에서 수사하는 사건보다 훨씬 진상을 규명하기 어렵다. 따라서 현재의 형사소송법에 근거해서 검찰이나 경찰처럼 허위진술 처벌이 불가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그런데 현재 검찰에서도 피의자 고문치사 사건 이후 인권보호 차원에서 허위진술 처벌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 기존의 법체계는 정의로운 국가, 정부, 경찰, 검찰을 전제로 하고 제정된 것이지만 의문사 사건은 이미 전제가 무너진 사건이라는 것이 반드시 확인되어야 한다. 따라서 이런 관점에서 허위 진술을 처벌할 수 있는 권한이 도입되어야 하며, 그러한 방향으로 현재 국회에서 적용되는 청문회가 의문사위원회에도 도입되어야 한다{{) 「국회에서의 증언, 감정에 관한 법률」에 의하면 참고인이 출석을 거부하거나 청문회에서 선거를 거부하는 경우, 그리고 허위 진술을 하는 경우 형사처벌을 하게 되어 있다. }}. 넷째, 범죄에 대한 공소시효가 지나서 처벌할 수 없다. 의문사 사건은 일부를 제외하면 대부분 공소시효가 지났다. 따라서 조사 결과 범죄사실이 확인되어도 처벌이 불가능하다. 기소를 하고 처벌을 할 수 있어야 정의가 바로 설 수 있으며, 처벌이 가능할 때에만 양심선언자들을 사면할 수 있다. 따라서 국제법이나 독일, 프랑스의 경우와 같이 의문사 사건을 비롯한 반인륜적 범죄 또는 국가폭력에 의한 범죄의 경우 진상이 밝혀지기 전까지는 공소시효를 적용해서는 안 된다. 다섯째, 조사 기간이 턱없이 짧다. 지난 9월 26일, 대구 와룡산에서 개구리 소년의 사체가 발견되었다. 그리고 현재 43명의 수사전담반이 수사를 하고 있다. 물론 전문인력까지 포함하면 수사참여 인력이 100명을 훨씬 넘는다. 개구리 소년 사건은 의문사위원회에서 조사하는 사건들과 유사성이 있다. 자·타살 여부(법의학 감정 결과 발표 이전), 범행 동기, 용의자{{) 의문사 사건의 경우 용의기관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가 불분명하고 사회적 관심사가 높으며, 사건 발생 시점이 11년 전이라는 것들을 고려해 보면 의문사위원회는 그동안 개구리 소년과 같은 사건을 83건이나 조사한 셈이다. 그런데 개구리 소년 사건은 유골이 발견되고 본격적으로 수사를 진행한지 2개월이 지나도 범인을 잡지 못하고 있다. 무려 43명이나 되는 수사인력이 동원되었는데도! 의문사 사건처럼 조사관 2명이 조사했다고 가정하면 경찰은 벌써 40개월을 소비하고도 사건 하나 해결하지 못한 무능한 기관이 되는 것이다. 물론 경찰을 탓하려고 이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아니다. 의문사 사건 해결에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는 것을 이야기하려는 것이다. 지난 22개월 동안 의문사위원회에서는 한 명의 조사관이 평균 2∼3건의 의문사 사건을 조사하였고, 어떤 민간 조사관들의 경우 책임감과 사건에 대한 열정이 높다 보니 6∼7건의 사건을 조사하기도 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33건이 불능으로 결정되고 30건의 사건이 기각으로 결정된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결과이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2인 1조로 하나의 사건을 조사해야 한다면, 현재 개정된 1년 연장 법안으로 63건의 사건을 해결하는 것은 다시 한번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진정으로 의문사진상규명을 하려면 조사기간을 4∼5년 연장하던가 아니면 진상규명이 될 때까지 조사기간 자체를 삭제해야 한다. 국회에서는 이런 현실을 정확하게 직시해야 한다. 지금까지 법적 한계 중에서 중요한 부분만 몇 가지 살펴보았다. 즉, 법적 한계가 더 많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외에도 민간 조사관들의 자질이나 파견 조사관들의 의문사법에 대한 이해와 열정, 조사 지휘와 사건 평가·점검 및 조사지원 체계, 조직의 민주적 운영, 국민참여사업 및 언론사업 등 많은 부분에서 문제점을 지적할 수 있다. 그러나 본 글에서는 지면 관계상 상술을 피하도록 하겠다. 4. 의문사진상규명운동, 어떻게 볼 것인가? 앞에서 간략하게 의문사진상규명운동 과정에서 유가족들이 어떻게 투쟁해 왔고, 의문사위원회의 22개월 동안의 활동 성과와 한계가 무엇인지 살펴보았다. 그런데 여기에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하는 것은 지난 3년 여 시간 동안 각 급의 계급대중조직, 민주사회단체, 진보정당 등 노동자·민중운동 진영에서 의문사진상규명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현재 민주화운동정신계승국민연대에는 51개 단체가 결합하고 있다. 그러나 이중 민족민주열사·희생자 추모(기념)단체 연대회의와 유가협 산하 의문사 유가족들이 주도적으로 결합하였고, 민주노총에서 노동사건을 중심으로 위원회 외부에서 지원을 한 것을 제외하면 다른 조직의 활동은 미약했다. 여기에는 각 조직별 내부 상황 문제도 있을 것이고 의문사진상규명운동, 크게 봐서는 과거청산운동을 바라보는 관점의 문제도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는 이중 후자의 문제를 다뤄보고자 한다. 의문사진상규명운동은 과거청산운동이다. 과거청산운동의 범위는 의문사 사건 이외에도 앞에서 다루었던 국가폭력과 학살의 역사 일반을 극복하고자 하는 것 모두 포함된다. 그렇다면 과거청산운동의 의미는 무엇인가? 일차적으로 과거 사건의 진상을 정확하게 규명하고 피해자와 유족의 명예가 회복되어야 하며, 유족들에게 국가의 사과와 배상이 이루어져야 한다. 그리고 재심을 통해서 무죄임이 확인되어야 한다. 즉, 기본적인 진상규명과 국가적 진실 인정, 피해자 구제책이라고 할 수 있다. 다음으로는 역사를 올바르게 정립하는 것이다. 정부기관과 군, 경에 의한 무고한 양민학살과 정권보위를 위한 민주화운동에 대한 탄압의 역사를 국가가 기억하고 교과서에 수록하여서 후세에 끊임없이 교육을 해야 한다. 대한민국의 정당성이 허울좋은 명분에 불과하다는 것을 국민 모두가 인정하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또한 민초들의 저항의 역사를 복권시킴으로서 이 사회의 민주화와 인권 신장이 민중들에 의해서 가능했다는 것을 4,800만 동시대인의 뇌리에 정확하게 인식시켜야 한다. 그 다음으로는 과거의 불행했던 역사가 다시는 반복되지 않도록 법령과 사회제도, 사회관행을 개선하는 것이다. 국가보안법, 사회보호법 따위의 악법을 철폐하고 수사기관의 고문관행을 종식시키는 것들이 여기에 포함된다. 필자는 여기에 보다 정세적으로 과거청산 문제를 바라봐야 한다는 생각을 더하고 싶다. 첫 번째, 한국사회에서 과거청산 문제는 중요한 이데올로기 투쟁의 과제이다. 21세기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국민들 다수는 대한민국의 '산업화'와 '민주화'의 신화를 인정하는 가운데 살아가고 있다. IMF 구제금융 사태 이후 버스에서 만나는 장년, 노년층의 국민들은 박정희와 전두환 시대가 더 살기 좋았다고 회고하고 있다. 그리고 여전히 이승만 '박사'를 그리워하는 사람도 있다. 박근혜, 김종필은 이러한 '국민정서' 아래에서 계속 생명력을 유지했고 보수세력은 이러한 정서를 계속 활용하면서 대중을 기만하고 있다. '대한민국'은 정말 비참한 '민주공화국'이다. 과거청산운동은 이러한 관념, 즉 현재의 한국사회가 구성된 조건에 대한 문제제기다. 필자는 한국사회의 과거와 현재를 체계적으로 폭로하고 여러 경험 속에서 복합적으로 구성된 민중의 의식과 관념을 변화시키는 것이 정치활동이라고 생각한다. 대중저항주체의 형성은 결코 단일한 정치활동만으로 구성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역사와 경험에 대한 체계적인 폭로가 분명한 정치활동의 과제라면 노동자·민중운동 진영은 더 이상 과거청산운동에 소극적이어서는 안 된다{{) 일례로 의문사위원회에서 발표한 사건 중에서 인혁당 재건위 사건을 검토해 보자. 유신헌법은 반민주 악법이며 유신체제는 박정희로 국가시스템이 집중되는 극단적인 독재체제다. 그러나 국민들은 유신 이전의 박정희를 기억할 뿐이다. 인혁당 재건위 사건이 유신정부에서 정권보위 차원에서 조작한 사건이고 그 결과 수많은 사람들이 살해되었다는 사실을 접한 국민들은 놀라움을 표명하고 있다. 그리고 그 순간 박정희에 대해서 '조국근대화의 아버지'와 '국민을 학살한 독재자'라는 두 개의 이미지가 부딪히게 된다. 공식화된 폭로의 효과는 여기까지다. 그러나 노동자·민중운동 진영은 구체적으로 밝혀지는 사실을 더욱 체계적으로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 }}. 두 번째, 과거청산운동은 신자유주의 사회에 만연한 국가폭력을 비판하고 보수화된 정치세력을 비판하는 계기임이 분명하다. 한국사회에서 폭력과 학살의 역사는 신자유주의의 이름 아래 반복되고 있다. 금융화된 카지노 자본주의, 국가기간산업의 사유화, 대량 실업 사회, 비정규직화된 노동구조, 노동기본권의 후퇴 등 IMF 이후 한국 자본주의는 민중이 참을 수 있는 최저한도를 계속 침범하고 있다. 그만큼 민중의 저항은 필연적이고 이를 막으려는 국가폭력도 필연적이다. 2001년 대우 자동차 노조원에 대한 폭력진압, 올해 여중생 살해에 분노하는 시민들에 대한 폭력진압은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또한 미선이와 효순이의 죽음, 미군의 니노와 워커에 대한 무죄판결과 여기에 뒤이은 심상명 법무부 장관의 '미군 재판이 공정했다'는 발언을 보더라도 신자유주의의 대부 미국에 철저히 종속된 한국사회에서 제국주의와 이를 옹호하는 국가폭력은 끊이지 않을 것이다. 원인과 형태는 과거와 조금씩 달라지고 있지만 국가폭력은 신자유주의 사회에서 계속 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런 현실에 비추어 볼 때 폭력과 학살의 과거를 청산하는 것은 신자유주의 아래 자행되는 국가폭력을 비판하는 것과 불가분의 관계에서 접근해야 한다. 한편 과거청산이라는 과제는 필연적으로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정권의 모순과 대한민국의 '정통성'이 가지고 있는 한계를 드러낼 수밖에 없다. 그런데 현재 70∼80년대를 거치면서 형성된 보수 이데올로기가 사회적 주류를 이루고 있는 상황에서 소위 민주당류의 '개혁주의' 세력과 집권중심의 진보정당운동은 타협의 유혹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만큼 철저한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은 애매하게 절충될 가능성이 크다. 이것은 외국의 사례에서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아르헨티나 등 남미에서는 군사정권 시기를 종식하고 민간정부가 들어서도 정부가 군부와 타협하여서 군부의 학살에 의한 실종 사건에 대한 진상규명을 철저하게 하지 않고 있다. 특히 책임자들은 공무를 수행하였다는 이유로 처벌하지 않고 있다. }}. 그리고 국정원, 기무사, 검찰, 경찰, 국방부 등의 권력기관은 과거청산 운동을 방해하고 있고 이러한 권력기관을 필요로 하는 정부는 과거청산을 외면하고 있다. 이런 면에서 보면 철저한 과거청산은 생산공간과 생활공간에서 민중들이 전선을 형성하고 노동자·민중의 정치세력화를 이루어낼 때 가능하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이런 조건 속에서 과거청산운동은 단순히 과거를 '청산'하는 운동이 아니라 현재의 한국사회 모순을 분명히 드러내는 운동인 것이다. 5. 통합적인 과거청산운동의 전망 현재 의문사위원회는 1년의 생명을 수혈 받았다. 하지만 수사권과 기소권 등 법적 권한은 극히 미약하고 한나라당과 민주당 등 정치권도 철저한 진상규명에 전혀 관심이 없다{{) 의문사유가족들이 한나라당사 앞에서 노숙농성을 하고 있는 동안 한나라당 국회의원들은 의문사위원회에 특별검사제도와 청문회 제도 도입을 비롯한 여러 개혁적 내용을 부여하는 것에 부정적이었다. 그리고 민주당 국회의원들 역시 의문사법 개정을 당론으로 정하기는 하였으나 국회 법사위 법안심사소위에서 의문사법을 통과시킬 때는 정작 참여도 하지 않았다. }}. 이런 가운데 이회창이나 노무현 어느 쪽이 당선되더라도 2기 의문사위원회에서 분명한 성과를 낳을 것이라는 보장은 거의 없다. 그러나 과거의 국가폭력을 진상규명하고자 하는 운동이 새로운 출발을 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리고 이후 1년 동안 운동주체들은 보다 확실한 경험과 인식을 얻게 될 것 역시 분명한 사실이다. 현재 제주 4·3 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 위원회가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 진상규명과 처벌을 요구하는 운동이 진행되고 있다. 군의문사 가족들은 군의문사 진상규명과 군 폭력 근절을 위한 가족협의회를 구성해서 활동하고 있고 삼청교육대 피해자들은 삼청교육대 인권운동연합을 구성해서 진상규명운동을 하고 있다. 그리고 과거 고문의 피해자들이 속속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의문사진상규명운동이 새로운 실험이었다면 이제는 이러한 구체적인 운동의 흐름들과 결합해서 그동안의 성과를 보다 확장시켜야 한다. 즉, 해방 이후 자행된 국가폭력에 대한 통합적인 과거청산 운동을 차분히 준비할 시점이다. 현재의 의문사진상규명운동과 이후 통합적인 과거청산 운동의 준비 과정에 노동자·민중운동 진영의 참여가 반드시 필요하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과거 국가폭력의 처절한 피해자들이 올바르게 과거를 청산하고 현재의 국가폭력의 적극적 반대자로 나설 수 있도록 지지·엄호해야 한다. PSSP
4. 노동계약, 위기, 그리고 조직화 평의회 운동 및 평의회 이론가들에게 제기된 가장 심각한 비난들은 노동 이데올로기다, 공장에 지나치게 관심을 갖는다, 프루동주의다 라는 것들이었다. 아마도 마르크스는 끝까지 프루동주의자가 아니었다는 이유로 그들을 비난했을 것이다. 이것은 역설이 아니다. 혁명적 과정 동안 상품으로서 노동을 폐지하려는 객관적인 가능성이 존재하고 (그러나 이것은 이행 국면을 제거할 것이다) 혹은 노동을 모든 상품에 대한 일반적 등가물로 변형시키는 것이 분명히 가능하기 때문이다. 마르크스는 프루동이 유토피아주의자라고 비난한 것이 아니라 그가 자본의 점진적인 사회화를 사회주의와 혼동했기 때문에 비난했다.84) 노동력의 비용과 사회적 노동의 가치를 매개할 하나의 근본적 요소 속에서 화폐의 금으로, 노동화폐로의 점진적 변형은 경제학의 역사적 장에 서술된 바는 없지만, 두 상쟁하는 계급들 간의 권력관계 의 진동하는 사건들 속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것은 자본의 발전 사에서 자본이 노동계급운동을 정치적으로 완전히 통제하고, 노동대중에게 이데올로기적-제도적 헤게모니를 행사할 수 있을 때에만 취하는 자본의 필수적 경로이다. 이 때 형태 지배의 물신화된 표현으로서 화폐는 자본과 노동의 교환에서 ― 국가의 통제기능의 출현과 관련하여 ― 문제시되지 않는, 권위주의적인 중재자가 되는 경향이 있다. 오직 이때에만 화폐와 임노동의 교환은 경향적으로 총체가 된다. 다시 말해 형태의 헤게모니는 "현실의 추상"(법률적 추상과 실질적 포섭 간의 이분법 속에서 표현되는) 과정 속에서 분리를 실행한다. 한편으로 생산자들은 "시민"(이를 통해 계급의 종별성은 보편적 평등으로 용해된다)으로 변형되며, 다른 한편으로 자본은 모든 시민들을 생산자로, 수행된 사회적 노동으로 측정된 소득의 수령자로 변형시킨다.85) 노동(공장의 맥락에서뿐만 아니라 일반적인 사회적 노동으로 이해되는)에 대한 통제와 명령은 화폐적 안정성의 결정적 요소이자 유일한 보증자가 된다. 뮐러와 도위믹이 바라마지 않은 생산자와 소비자의 공동체는 오직 노동자 계급의 정치적 통제 하에 있는 이러한 아주 일반적인 도식을 예견하고 배치할 때만 구체적 의미를 가질 수 있었다. 그것은 "권위주의 국가" 형태의 제도적 수준에서 표현되는 자본의 당연한 지배 신호 하에서 뉴딜부터 오늘날까지 작동해 왔다. 독일에서 1921년과 1923년 사이의 기간에 평의회 운동은 종종 이러한 역전을 수행하는 지점에 도달했다. 마르크의 붕괴 기간 동안 화폐와 노동을 연결시킴으로써 ― 동시에 명심해야 할 것은 복합적인 사회-정치적이고 경제적인 제도적 상호관련이다 ― 양자를 평행하게 통제하는 데 초점을 맞추는 것은 프루동에 친화적인 운동으로의 이동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케인즈86)를 예상하는 것, 즉 자본주의적인 반격에 대한 예상을 의미하는 것이었으리라. 그러나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노동운동 내에서 정치의 사실상의 우위를 실현하는 데 진정한 장애물로 드러났던 "정치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 사이의 분리를 피함으로써 그 과정에 대한 보편적인 사회적 지도의 계기를 실천적으로 강조하는 것이 불가피했을 것이다. 이미 지적되었듯이, 루드비히는 노조와 평의회 각각의 임무들을 반복하여 말함으로써, 평의회 이론가들이 제안한 노조의 "혁명화" 계획을 공격했다. 노조는 주어진 생산관계의 영역에서 노동자들을 보호하고 프롤레타리아트의 특수한 이익들 ― 상이한 업종과 "숙련"에 따라 분할되는 ― 을 대표하며 실천을 통해 자본이 지배하는 영역의 오직 극한까지만 이끌 수 있다. 반면 평의회는 이미 자본주의를 폐지하고 새로운 사회를 구성하는 방향으로 이동한 프롤레타리아의 대항권력 기관이었다.87) 그러나 도이믹과 뮐러가 제기한 문제는 독일혁명에 종별적인 실천적이고 조직적인 문제와 관련된 것이었다. 모호하다 할지라도 그들은 자본주의적 위기의 심화와 더불어 주체성이 혁명적 성장의 결정적 요인으로 출현했다고 경고했다. 적절히 해석하면 평의회의 입장에서 볼 때, 이것은 임금을 통해 자본과 노동의 권력관계 를 조절하는 노조의 특권을 문제삼기 위해 스스로를 정치적 역량으로 변형시킬 수 있다. 다 시 말해 그것은 신생공화국의 불확실한 권력 균형을 지탱해 온 1919년 6월 뉘른베르크 노조 대회의 신중함을 폭발시키는 문제였다. 노동계약은 공장에서 노동자들의 헤게모니와 영토에 대한 자본주의적 힘의 거의 총체적인 지배 ―전적으로 분해된 중간 계급들의 자금과 처분권 을 여전히 통제할 수 있었던 금융 메커니즘에 대해 이러한 힘들이 행사한 통제에 의해 가능 하게 된 지배 ― 간의 권력과 중재의 결정적 지점들 중 하나였다. 1923년 위기의 전야에 칼 코르쉬는 공장 통제에서 영토에 대한 헤게모니(봉기주의적 지름길 뿐만 아니라 사민주의적인 "권력으로의 도정" 역시 비현실적인 것으로 판명된 이상)로의 이론적이며 조직적인 도약을 위해 노동조직과 노동계약과 같은 근본적 개념들에서 출발했다. 공장평의회를 위한 노동입법을 다룬 1922년의 글들에서 평의회에 관한 이론은 1919-1920년의 글들에 여전히 현존하던 급진 자유주의적 전통과의 최종적 연계를 절단한 듯했다. 그러나 이것은 코르쉬의 평의회-노조 기획의 기초를 이루는 반(反)국가주의를 없애기는커녕 보다 강화했다. 공장 문 안에 있는 루소적 자유들은 그것들이 역사적으로 부상한 배경이 된 계급 현실들을 배신했다. 이것의 전형적 사례는 노동의 자유였다. 정확히 이 자유의 적용(파업 파괴)은 그것이 임금을 낮추기 때문에 보편적인 계급 이익을 거스르게 되었다. 따라서 이 "자유"를 거부하는 것은 계급적 연대를 위해 필수적이었다. 헌법이 공장을 등재하지 않았던 것은 바로 계급적 이익 때문이었다. "자유로운" 노동계약은 노동자가 자신의 자유를 임금과 교환하여 상실했음을 의미했다.88) 그러므로 "산업 민주주의"의 확장은 오직 노동자들이 자본주의적 생산의 체계 자체를 기초짓는 노동계약을 자신들의 중심적 투쟁으로 배치할 때에만 의미가 있는 것이었다. 산업 민주주의와 노동계약은 공장 안에서 서로 대립했다. 자유로운 노동계약의 법률적이고 부르주아적인 형태가 지속되는 한, 평의회들은 착취의 결정적 형태를 공동으로 관리하는 것으로 한정되었다. 노동계약은 공장 안에서 게토화된 노동자 계급과 시민사회 사이의 제방이다. 코르쉬에 따르면 위기 속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일반적인 물질적 이익들을 대표하는 것은 그 제방을 부수는 것 ― 바이마르가 승인한 입헌적 합법성을 파괴하는 것을 함축했다.89) 이행 과정을 관리하는 새로운 임무와 관련하여 노조 조직화의 지배적 형태인 "숙련 연합"은 프롤레타리아 계급 조직의 요구에 부적합해 보였다. 노조는 "숙련 연합"에서 "산업적 연합", 즉 개별 노동자의 "숙련" 자격에 근거해서가 아니라 오직 특정한 공장이나 산업 조직에의 소속에 근거하여 노동자들을 받아들이는 형태로 "혁명화"될 필요가 있었다. 이러한 변형은 또한 노조와 평의회간의 관계를 심원하게 변화시킬 것이었다. "공장평의회는 이제 더 이상 현존하는 자본주의적 계급사회 안에서 '노동의 판매자'의 생활조건 방어 투쟁을 벌이는 노조의 단순하고 순수한 '보조 조직'이 아니라 아직은 계급의 적의 손아귀에 있지만 혁명적 투쟁을 통해 탈환되어 통제 및 결국에는 경제적·정치적으로 조직된 노동 계급의 배타적 관리 하에 두어야 할 기업과 산업분야들에 노조가 발판을 획득할 수 있게 하는 '전진적 위치'가 되어야 한다."90) 따라서 그것은 코르쉬에게 있어 노동 계약을 대체하는 새로운 "사회 계약"을 산출하는 문제였다. 이번에는 국가의 입헌적 정점에서부터가 아니라 공장의 세포조직으로부터 시작하면서 말이다. 이번에도 그는 역시 (그의 소연한 정치적·이론적 발전 속에서 종종 그랬듯이) 정치 이론에서 조직적 실천으로 나아가는 해결책에 관한 핵심 요점을 거의 놓치지 않았다. 그의 특출한 경험주의를 통해 그가 이해한 결정적 문제의 해결에 필요한 방법론적인 핵심이 없는 채로 그는 그것의 중요성에 거의 다다랐다. 공장 차원의 전략적 속성에 대한 강조(사민주의 내에서 암묵적인 위로부터의 정치에 대한 염려를 고려할 때 역사적으로 이해할 법한)는 그로 하여금 형태 지배의 사회적으로 총체화하는 특성, 상품의 물신숭배로부터 전혀 독립적이지 않으면서 재생산의 일반 과정에 대한 국가의 실재적 연관을 표현하는 동시에 은폐하고 신비화하는 법률적 추상의 복합적 구조에 눈멀게 했다. 결과적으로 코르쉬가 루소의 "사회계약"과 마르크스주의적 "시민사회" 개념을 종합함으로써 오히려 가치 이론 및 위기의 이론을 생산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1923년의 사회-경제적 위기 속에서 코르쉬의 평의회 이론은 국가와 정치의 문제(이행적 국면에서 중심적 지위를 점하는 경향이 있는)를 단순한 "외양"91)으로 폄하했는데, 당시 공산당은 유사한 내적 분할92), 의도에 관한 동일한 혼동, 그리고 당이 1921년 "3월 봉기"을 수행할 때와 동일한 전술적·전략적 준비부족 상태 속에서 태풍의 눈에 진입했다. 그럼에도 1923년 5월에서 11월까지 평의회 운동은 평의회 이론가들이 위기의 와중에 기대했었던 가장 낙관적인 것보다 더 성취하는데 성공했다. 즉 그것은 대규모 파업의 조직화에서 노조 지도부를 대체하는 데 성공했다.93) 일반화된 사회적 위기의 상황은 노동운동에 즉각적인 반향을 일으켰다.94) 노조 안에서, 평의회 이론가들이 제안한 그 어떤 것보다 더 불안정하고 급진적인 혁명이 발생했다. 노조 기부금의 가치를 소멸시킨 인플레이션은 조직의 모든 보조적이고 보복적인 능력을 박탈했다. 더욱이 인플레이션은 노조의 모든 계약적 권력을 빼앗았다. 고용주들과 함께 작성한 임금 계약은 급속한 통화가치 절하로 인해 불과 며칠 사이에 효력을 상실했다. 그 결과 노조의 탈퇴와 독일사민당(SPD)의 마비가 이어졌다. 사민주의의 실패는 계급에 기반한 정치적 기획을 정교화하지 못하는 무능력, 그리고 노조 전술에의 전적인 의존을 확인시켰다. 가장 거대한 서구 노동당이었던 것이 프롤레타리아트들의 자율적인 조직적 수단들에 대한 스스로의 무관심과 적대감의 대가를 톡톡히 치르기 시 작했다. 1923년에 평의회는 선거와 반란의 실패 후 다시금 그것의 생명력과 유효성을 증명했다. 쿠노(Cuno) 정권95)에 대항하여 평의회가 조직한 정치적 총파업은 그 운동의 정점을 표상했다. 정권은 퇴진해야만 했다. 위기의 시기 동안 투쟁의 발전은 노동계약의 법률적-부르주아적 형태 및 제도적 틀 내에서의 상대적 균형에 대한 평의회의 공세라는 코르쉬의 가설을 확증하는 듯 했다.96) 임금 조정과 일상적인 계약협상들의 사례들에서처럼 자본에 대한 노동의 종속이 끝나자, 화폐 체계의 위기는 잉여가치를 실현하는 과정이 지속되지 못하는 정치적 위기가 되는 경향이 있었다. 낡은 물물교환 체계가 짧은 기간 동안 상품 유통에서 화폐를 대체할 수 있었지만, 자본과 노동의 "등가 교환"에서 화폐-형태를 대체할 수 있었던 물물교환의 형태는 존재하지 않았다. "상품을 수단으로 한 상품생산"은 치명적으로 교란되었다. 마르크스가 {요강}에 썼던 것처럼 "부르주아 사회의 기본적 전제는 노동이 무매개적으로 교환가치, 즉 화폐를 생산한다는 것이다."97) 자본주의 체계의 종별적 산물은 화폐형태를 취하는 가치이다. 자본주의 체계의 전반적인 정치적-제도적 틀의 기초를 흔드는 것은 정확히 화폐형태와 위기 사이의 관계이다. 그러나 독일의 노동 계급 편에서의 진정한 "동궁(冬宮) 점령" 이 객관적으로 지척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부르주아적 질서는 재수립되었다. 노동과 자본 사이의 교환메커니즘, 화폐형태의 복권, 그리고 이것들에 의한 (재)생산 과정에 대한 어떤 통제와 관련해서도 국가와 타협하지 않는 것으로 충분했을 것이다. 대안적인 사회 정치적 방향의 문제는 진동하는 이행 국면을 뚫고 나아가기 위해 이러한 용어들로 의제에 놓였어야 했다. 그러나, 1921년 "3월 봉기"에서처럼, 독일 공산주의자들은 대중적인 정치적 대안 속에서가 아니라, 기괴하고 파멸적인 함부르크 봉기98) 속에서 동궁을 얻으려 했다. 함부르크 봉기는 국가장치의 개조의 시작과 동시에 일반적인 자본주의적 반격의 시작을 특징지었다. 다른 수준에서 볼 때, 계급 운동과 정당 양자 모두 그들이 파악하지 못한 내재적 논리를 지닌 사건 들의 폭발적인 핵심 부분이었다. 경제적, 정치적 현실로 인해 당과 대중운동은, 새로운 혁명 적 전망을 결합하고 산출하는 것처럼 보이는 매 시점마다, 각자의 "영역"으로의 고립되고 헛된 "이데올로기적인 휴식처"로 내몰렸다. 그러나, 이들 이데올로기를 후진성의 순수하고 단순한 표현으로 간주하는 것은 심각한 오류일 것이다. 후진성은 독일 혁명의 실패가 궁극적으로 설명되어야 하는 용어인 것이다. 종종 "노동(자) 이데올로기"로 잘못 정의된 것을 통해, 독일의 노동자들은 이미 자본의 주도권에 의해 제거된 전문적인 계층화보다는 자신들의 현실적 존재조건들과 스스로의 객관적인 정치적 가능성("정치적인" 것과 "사회적" 수준을 연결시킬 수 있는 대안적인 대중 조직의 부재 속에서)을 표현했다.99) 물론 "생산력주의"와 "자기관리"는 오늘날 납득할 수 있는 모호함과 의혹을 유발하는 용어들이다. 그러나 본질적 모순 및 이데올로기적 결점뿐만 아니라 서방 노동운동사에서 전례가 없는 권력에의 의지와 능력을 표출했던 계급적 요구와 조직적 형태에 대한 왜곡된 역사적 독해를 통해 현재의 위험을 몰아내려고 시도하는 것은 옳지 않다.100) 1920년대 독일에서, "통제"와 "자치"는 생산과정의 실현과 계획을 관통하고 다른 사회 집단들에 대해 헤게모니 계급으로 강화되어 생산과정으로부터 출현하고자 하는 노동 계급의 의지를 표현했다. 평의회운동은 이같은 야심찬 전망 속에서 운영되었다. 이러한 요구를 정치학과 조직이론으로 변형하는 것은 불가피한 만큼이나 어려운 시도였다. 독일 프롤레타리아트의 운명의 견지에서뿐만 아니라 ― 레닌 스스 로 지적했듯 ― 전체 국제 노동운동에 대해서 말이다. 이 기획에 대한 대안은 확실히 "최소강령으로서 공산주의"가 아니라 스탈린의 5개년 계획이었고 뉴딜이었으며 나치즘이었다.101) 이 시점에서, 독일 노동운동이 1923년의 결정적 해에 노동, 화폐, 분배와 수입에 대한 현실적인 정치적 통제력을 발휘했을 실질적인 가능성에 대한 냉정하고 엄격한 분석이 필수적이다. 그러나 이는 여기에서 다뤄질 수 없는 자료들에 대한 상세한 연구가 필요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미 잘 알려진) 몇 가지 주된 요소만을 제안하는 데 그칠 것인데, 이것들은 본 작업의 맥락 안에서 전통적으로 그것에 부여되어 왔던 것과 다소 다른 의미를 가질 것이다. (1) 위기의 혹독함에 비하면, 실업자의 수는 상대적으로 적었다. 1930년 당시 6,000,000 이상에 비해 약 600,000 정도. 그러므로 상품의 가격결정에서 결정적 요인은 주로 가변적이고 非고정적 자본인 노동자들의 노동이었다.102) (2) 마르크화를 안정화하려는 전략적 조치 속에서 중앙은행은 아래로부터 시작된 질서를 재구축했다. 그것은 더 이상 사적으로 발행된 화폐의 유통을 승인하지 않았다.103) (3) 그리하여 더 이상 중앙의 권력을 신뢰할 수 없게 된 산업자본가들은 점차로 상점과 공기업에서 통용되는 화폐 교환권을 발행함으로써 현장에서(in loco) 노동과 자본간의 교환을 조절해야만 했다. 화폐가 지나치게 폭락했기 때문에 관성적으로 노동자의 수중으로 떨어질 위험을 무릅써야 했다. (4) 자본가들은 즉시 이 같은 현상에서 잠재적인 위험을 알아차린 반면, 전반적으로 노동운동은 그들이 접수할 수도 있었던 사회적·정치적 틀을 통제할 수 있는 지렛대가 어떤 것이었는지를 이해할 수 없었다. 정치경제학 비판은 당의 편에서 어떤 혁명적 기획으로부터도 엄격히 금지됐다.104) (5) 외국 통화에 대한 마르크의 조절에 관한 한, 중앙은행은 힐퍼딩의 오랜 공식을 따랐다: 1 달러 대 42억 마르크. 패배하고 거부당한 국가로서 독일은 이런 식으로 명백한 자본주의적 체제를 가지고 민족들의 공동체에 진입했는데, 이로써 구제받을 가치가 있음을 보였다. 독일은 두 가지 가능한 길 중 하나로 거칠고 지난한 "이행 국면"을 해결했다. 5. '마르크스로의 회귀'와 '자본주의의 치명적인 위기': 바이마르에서 뉴딜까지 1920-1930년 "위대한 민중 혁명을 위한 모든 요인들"105)이 독일에서 재등장했을 때, 계급운동과 노동조직 사이의 간극은 매우 심대했다. 바이마르 공화국의 역동적인 최후 몇 년 사이에 노동운동의 비극은 정확히 그 과정을 밟았고 사회 경제적 이론에 유용한 지표들을 제공했다. 제국주의와 붕괴에 관련된 프리쯔 스턴베르크(Fritz Sternberg)와 헨릭 그로스만(Henryk Grossmann) 간의 논쟁을 고려해 보라. 특히 자본주의 발전에 내재한 모순에 관한 분석을 정치경제학 비판에 근거하여 범주적 구조와 재연결하려는 그로스만의 방법론적 시도를. 또한 프리드리히 폴록(Friedrich Pollock)106) 같은 경제학자들이 수행한 소련과 "계획 경제" 같은 위기의 형태학에 관한 여러 작업, 혹은 막스 호르크하이머(Max Horkheimer)와 테오도르 아도르노(Theodor W. Adorno)처럼, Zeitschrift f r Sozialforschung에서 Archiv fur die Geschishte des Sozialismus und der Arbeiterbewegung의 칼 그륀버그(Carl Grunberg)와 함께 20여년 동안 중요한 작업을 지속적으로 수행해 온 사회철학자들의 근본적 분석들 역시 고려해보라. 이들 작업의 유효한 "분리"를 단순하게 비난함으로써 이것들을 쓸모 없는 현학적 작업으로 기각하려 드는 것은 난폭할 뿐만 아니라, 진부하다.107) 이들 작업의 "분리"는 사람들이 말하듯 그들의 '학문적 습성' 때문이 아니라, SPD와 KPD 간의 점증하는 분열이 야기한 정적 도식주의에 사로잡혀 이론과 운동의 관계에 치유할 수 없는 분열을 낳은 노동운동의 일반적인 정치적 파산 때문이다. 노동운동은 뒤이어 스스로 이론적 반성으로 움츠러들었다. 바로 이런 상황 때문에 방법론적으로나 인식론적으로 높은 수준의 자기반성이 초래된 것이다.108) "평의회 좌파"의 관심이 전에는 생산과정 내에서의 자기-조직화에 놓이면서, (코르쉬의 예에서 봤던 것처럼) 위기에 대한 이론적 분석을 간과했다면, 이제는 정반대다. 위기와 체계의 붕괴로 이어지는 경제 법칙에 대한 "객관적 분석"이 (특히 당시 가장 중요한 경제학자, 그로스만의 작업에서) 노동과정의 분석과 그 안에 함축되어 있는 자주-관리 테마를 대체하는 경향이 있었다. 하지만, 이들 경향이 운동의 정체(그리고 이후의 결정적인 패배)가 초래한 수동적 태도, 즉 "경제주의적" 혹은 "파국론적" 변형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것은 강력한 방법론적 자각에 의해 지지됐다.109) 축적의 법칙과 자본주의 체계의 붕괴에 관한 주요 작업에서 그로스만은 다음과 같이 썼다. "마르크스 작업의 위대한 의미는 정확히 그가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모든 현상을 가치법칙에서 출발하여 설명할 수 있다는 사실에 있다."110) "붕괴에 관한 마르크스주의 이론은 ... 위기에 관한 마르크스주의 이론을 이해하는 데 있어 필수적 전제고, 위기이론은 내재적으로 붕괴이론에 연관된다. 양 문제에 대한 해법은 {자본}의 핵심 사상을 구성하는 마르크스의 축적 법칙에 나타나는데, 따라서 가치 법칙에 기초한다."111) 룩셈부르크가 개시한 "마르크스로의 회귀"는 더욱 견고한 방법론적 기초에 근거를 두었는데, 이는 위기에 관한 일반이론이 수정에 내재하는 위험을 피하도록 했다. 그로스만의 두 가지 근본적 기여는 다음과 같다. 위기 이론을 축적 이론과 가치이론에 직접 연결하고, 범주적 추상 과정을 "분리방법"으로 정의한 것이다. 붕괴 경향에 대한 경제적("객관적") 설명은 실재적 운동의 순수하고 단순한 "반영"으로 제시되지 않고, 범주적 전개의 수준에서 체계의 자기-모순적인 성격에 대한 연속적 근사치112)의 이해라는 추상적 표상으로 제시됐다. 그로스만의 설명 방법론이 가지는 변증법적 성격은 "붕괴 이론"과 혁명적 주체성에 관한 폴 마틱(Paul Mattick)과 판네쿠크(Pannekoek) 사이의 논쟁에서 폴 마틱에 의해 열렬히 옹호되었고, "평의회 공산주의자"의 이론적 기관인 R tekorrespondenz에서 실행되었다. 요컨대 판네쿠크는 그로스만에게 본질적으로 두 가지 비판을 가했다. (그로스만의 작업이) "순수히 경제적인 관점에서" 자본주의의 종말을 추론하려 들면서 "인간의 개입과 상관없이"113) 붕괴를 가상한 근거없는 시도라는 것, 그리고 계급투쟁을 "경제주의적 논쟁"으로 환원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마틱은 분명한 반비판을 통해, 판네쿠크가 어떻게 그로스만의 절차가 갖는 변증법적 성격을 포착하는 데 실패했는지를 지적했다. 이는 정확히 (판네쿠크가) 스스로 경제학의 제한된(부르주아적) 개념에 갇혔기 때문이다. 마르크스적인 정치경제학 비판의 방법론에 내재한 변증법은 "대립물들의 종합"이라는 기준의 극히 단순화된 적용 안에 있지 않고, 오히려 자본주의 사회의 운동법칙을 정의할 수 있는 근본적 계기를 추상적으로 분리하는 데 있다. 따라서 마틱은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심지어 그로스만에게도 '순수히 경제적인' 문제란 없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축적 법칙에 대한 분석에서 그는 방법론적 근거로 순수히 경제적인 전제조건 및 따라서 체계의 객관적 한계 지점을 이론적으로 이 해하는 데 이르는 정의로 스스로를 제한했다. 내적 모순으로 인해 자본주의 체계가 필연적으로 붕괴한다는 이론적 인식이, 실재적 붕괴가 자동적인 과정이며 인간과 독립적이라는 주장을 수반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114) 생산과 재생산, 경제와 정치의 상호작용에 의해 정의되는 단일한 맥락은 자본주의 변형이 진행되는 주요 과정에서 핵심이 될 뿐 아니라, 혁명을 조직하는 모든 토론 혹은 기획의 불가피한 객관적 기초로 드러났다. 바이마르 독일에서 벌어진 이론적 논쟁의 마지막 번득임은 독일 공화국이 와해된 후에야 의미가 있게 되었고, 실질적으로 이미 전-유럽의 차원으로 투영되었다. 그들은 더 이상 운동의 조직적 문제를 겨냥하거나 그에 맞게 기능화되지 않았고, 오히려 미국 뉴딜과 전제적인 파시스트 국가의 리바이어던 같은 구조에 직면했다. 이것이 수행된 분석의 주춧돌로서, 이제는 유명해진 Institut f r Sozialforschung에 결합한 일국의 지식인들을 포함하여, 마르크스주의 잡지 International Marxist Correspondence (훗날 Living Marxism 그리고 New Essay라 불린)에서 폴 마틱의 지도 아래 (코르쉬, 륄레, 그리고 판네쿠크를 포함한) 미국과 유럽의 많은 좌익 투사들과 이론가들의 정치적 작업과 연구를 협력, 조정하였다.115) 유럽에서 혁명의 패배 이후, 분석의 "객관주의"는 ― 다소간의 의식적인 방법론적 상대화를 통해 ― 당시부터 진행된 것인데, 이는 오늘의 우리에게 있어서는 훨씬 값지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론의 범주적·분석적 틀 안에서 동일한 동요와 양가성의 움츠림의 표현이었는데, 이는 심지어 1933년 이전까지 노동운동을 자기-파괴로 내몰았던 것이다. 운동이 공세적인 국면에 전술적·조직적 계기를 강조하는 것과 패배에 뒤이어 (자본주의의 발전과 경향들의 국지화에 대한 분석이라는) 과학적·이론적 계기를 강조하는 것 사이에는 어떤 연결선도 없다. 수립된 관계는 단일하고 연속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반전된 것이었다. 하지만 연관이 있긴 하며, 전제주의적 파시스트 국가의 코포러티즘적 특성에 의해 심히 왜곡되고 뒤얽혔다 해도 동일한 측면을 보존했다. 계급투쟁과 제도, "평의회", 그리고 "국가" 간의 관계 말이다. 독일 노동운동의 파국은 이론과 운동의 재전환 문제를 극적으로 제기했는데, 이는 후세들에게 종별적인 정치적(이고 이론적) 대답에 의해 충족된 종별적인 역사적 요구라기보다 하나의 유령 ― 10월의 비극적 역상 ― 을 남겨 두었다. 1929년 위기를 잇는 경제의 거대한 구조 변형에 직면하면서 노동운동은 오늘날이 되어서야 이 연관을 이해하기 시작했고, 정치경제학 비판과 위기 이론 그리고 (계급의식과 조직에 대한) "구성"의 이론을 결합하는 문제의 종별적인 형태를 가정하기에 이른 것은 그저 우연만은 아니다. 관련된 첫 번째 두 요소들에 관심을 집중하는 가운데, 그로스만과 마틱은 의식적으로 경제 분석의 객관적 측면을 추상적 분석으로(그러므로, 실물운동에 대한 단순한 경험적 기술이 아닌) 분리하면서, 당연한 귀결로 계급의식과 조직의 이론적 문제는 젖혀 두었다. 이것이 그들 노력의 역사적·정치적 한계로 보인다면, 이 문제(계급의식과 조직의 이론적 문제)를 해결한다고 해서 "싸늘하고 황폐한 추상화"를 회피할 수 있는 손쉬운 지름길이 있다고 믿는 것 역시 완전한 환상이다. 만일 방법론적으로 자기-중심적이고 스스로의 "분리"를 의식하고 있는 이론이 무용하다면 (다시 말해) 그것이 정치의 물질성과 계급 조직의 실천으로 전환될 수 없다면, 이론에 의해 "개념화되지" 않은 실천 역시 혁명을 유발하는 것과 관련하여 완전한 역효과를 불러일으킬 것이다. 이론(과학적이고 분석적인, 맹목적으로 행동주의적이거나 교조주의적이지 않은)과 실천 관계가 통일성을 갖추면, 질문에 대한 일반적인 구걸을 그치고 위기의 위협적 진행에 직면했을 때 자신의 긴급한 역사적·형태학적인 종별성 속에서 출현할 것이다. 마틱이 재도입한116) "사회주의인가 야만인가" 하는 룩셈부르크적 대안은 계급투쟁의 파국적 본질을 표현했을 뿐만 아니라, 오늘의 우리에게 일련의 이론적·정치적 문제(와 임무)를 알려준다. 정치경제학 비판(자본주의 발전의 분석을 갱신하는)에 대한 일반적 재고(再考)로부터 경제와 정치, 계급투쟁과 제도, 그리고 대중운동의 역사적이고 주체적인 수준에서 벌어지는 실질적 상호작용의 복합성에 조응하는 조직적 형태의 차원으로 말이다. 이는 다음과 같은 표현으로 종합될 수 있다: 정치의 과학적 근거를 마련하는 것. 독일 혁명의 비극적 궤적은 조직의 문제에 대한 실용적 구체화가 어떻게 계급운동 안에서 불가피하게 자본주의적 주도권과 패배에 종속되는 무기력한 파멸로 귀결되는지를 보여주는 사례 ― 아직까지도 우리에게 극히 밀접한 ― 이다. 미주> 84) 1850년 프루동은 그의 친구 다리몽에게 "사회주의 이념 안에 부르주아지를 위한 어떤 것이 있음을 보여줄 때가 왔다. 부르주아적 관점에서 사회주의, 이것은 현 시점에서 반드시 완수되어야 하는 것이다."라고 썼다. P. J. Proudhon, Che Cos' la Propriet ? (Bari, 1967)에 부치는 Umberto Cerroni의 서문, p. ⅹⅵ. 85) Karl Marx, Grundrisse der Kritik der politischen Oekonomie (Berlin, 1953), p. 65. 86) 케인즈의 개념과 프루동의 그것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는, Dudley Dillard, "Keynes and Proudhon," Journal of Economic History (May, 1942)를 보라. 87) 루드비히의 형식은 노조운동과 공장평의회에 관한 코민테른 2차대회의 결의안을 예상했다. Cf. Ⅱ Congress del l'Internazionale Communista (Rome, 1970), pp 51-63 참조. 88) 그리하여 Arbeitsrecht f r Betriebsr le (1922) (Frankfurt am Main and Vienna, 1968)의 32페이지에서 칼 코르쉬는 다음과 같이 쓴다. "{자본} 1권 4장 말미에서 마르크스는 '경제 거래'의 맥락으로부터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용어로는, '단순 유통이나 상품 교환의 영역으로부터') 우리가 상점, 공장, 혹은 그 안에서 궁극적으로 실재적 '생산'이나 상품의 창조가 발생해야만 하는 또다른 기업으로 변화할 때 우리 눈앞에서 벌어지는 장면의 변화를 능숙하게 묘사했다; 여기에서 참가자들 간의 관계는 더 이상 자유, 평등, 정의의 이념에 따라 전혀 조절되지 않고, 대신 전혀 다른 양상을 갖는다." 89) 같은 책, pp. 95-97: "[빌헬름 독일에서] 반동적인 기업주는 '기업 외부'로부터 노조 지도자와 교섭하는 것을 철저히 거부하는 반면, '자신의' 노동 위원회와 교섭하고 싶어했다... 그러므로, 노동 공동-참여에 대한 권리의 직접적 형태가 즉각적인 혁명 과정의 관점에 따라 가정하는 특정한 의미로부터 물러날 때까지, 우리는 '공장 평의회'를 노조 투쟁의 단순한 '보조 기관'으로 엄격히 종속시키려는 노조의 안간힘을 반드시 인지해야 한다... 오로지 평의회의 특정한 의미를 자본가와 노동자계급 간의 권력 투쟁의 결정적 국면에서의 생산에 대한 통제 기관으로 생각할 때에만, 그리고 평의회를 미래의 사회화된 경제의 책임있는 중심으로 볼 때에만, 사물을 이런 식으로 보는 방식은 전복될 것이다." 90) 같은 책, p. 97. 91) 코르쉬, Arbeitsrecht..., 위의 책, p 39: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 계급 간의 투쟁은 이제 다만 외관상으로만 국가 통제(그리고 사회적 삶의 존속하는 상부구조에 대한 통제)를 그것의 목적으로 갖는다: 실질적으로는 경제 즉 노동의 조직화에 대한 통제가 목적이다." 92) 브랜들러의 지도력은 탈만, 피셔, 마슬로로 구성된 당의 좌익 반대파로부터 강한 저항을 받았다. Cf. Hajek, 위의 책, pp. 65-73. 93) 로젠베르그는 다음과 같이 쓴다. "근대 독일의 역사에서, 1923년 여름만큼 사회주의 혁명에 적합했던 순간은 없었다. 평가절하의 소용돌이 안에서 질서, 소유권이나 합법성 따위의 모든 전통적 통념은 사라졌고, 루르 점령 이래 전개된 끔찍한 상황에 대해 사회주의자나 공화주의자들을 비난하는 사람은 아무 데도 없었다... 전반적으로 이러한 형국이 참을 수 없다는 것, 그리고 전체 체계가 공포 속에서 종말을 맞을 것임을 아주 분명하게 느낀 것은 노동자계급만이 아니었다. 심지어 중간계급조차, 인플레이션 때문에 빈털터리가 된 후, 혁명적 흥분에 젖어들었고 자본가들의 폭리를 최종정산하길 바랬다. 경찰을 포함한 공무원들의 경우 그들 자신 인플레이션의 희생자로서, 현존 체계에 대항하는 결정적 중요성을 갖는 대중운동에 대해 거의 역량을 쏟으려 들지 않았다 ― 그러므로 Reichswehr의 군인들이 투기꾼들을 지키기 위해 그들의 굶주린 프롤레타리아 동지들에게 발포하려 들었다는 것은 매우 의 심스럽다." Rosenburg, 위의 책, pp. 143-144. 94) 로젠베르그에 따르면, "1923년을 거치면서 SPD의 힘은 꾸준히 감소했고, 당은 1919년의 위기를 떠올리게 하는 위기를 통과했다... 1922년 말까지 새로운 USPD가 여전히 독일 노동자들의 대다수를 사로잡았음에도, 대중들은 급격하게 공산당으로 이동했다. 그리하여 이어지는 반년 동안 관계는 완전하게 뒤집어져 1923년 여름에 이르면 KPD는 의심의 여지 없이 대다수 독일 프롤레타리아트의 지지를 받았다." 같은 책, p. 145. 95) 구노의 중도 우파 정부는 사민주의자들의 지지를 받는 슈트레스만의 정부로 대체되었다. Cf. 로젠베르그, 같은 책, pp. 148ff. 96) 이는 샤흐트 박사의 위선적 관측에 의한 계급적 관점의 이면에 의해서도 입증되는 것 같았다. "1923년 가을에 예상치 못한 화폐의 평가절하가 독일의 사회구조 전체의 붕괴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사정이 나았던 노동자 부인들은 자포자기 상태에 빠졌다. 쇼핑을 할 때 그녀들은 마르크화의 평가절하와 보조를 맞춰보려 했지만 헛수고였다. 남자들이 노동을 통해 번 돈은 심지어 봉급이 그날그날 맞춰지는 상황에 이르러서조차 주부들의 손에서 사라졌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나는 평가절하를 중단하고 화폐를 안정화하라는 요구를 받았다. 나는 그같은 권유를 거절하지 않았다. 나는 유리한 직업과 안정된 지위를 포기했다." Cf. Hialmar Schacht, Account Settled (London, 1949). 97) Marx, Grundrisse, 위의 책, p. 137. 여기에서 우리는 화폐형태의 외관상의 무매개성 때문에 발생하는 유혹을 반드시 뿌리쳐야 한다, 즉 우리는 화폐-위기 관계에 관한 정치적인 혁명적 강조를 피해야 한다. 그것은 화폐-형태의 과잉팽창을 통한 전복적 극복이 가능하다는 환상으로 이끌 것이기 때문이다. 차라리, 화폐적 형태학은 물신숭배 ― 사회적 생산관계에 대한 형태의 지배 ― 의 일반적 문제틀에 연관되어야 한다. 이는 필연적으로 매개된 방식으로, 정치적 주제를 도입한다. 반면, 같은 페이지에서 마르크스는 이렇게 쓴다. "화폐(교환가치) 안에서 개인의 대상화는 자연적 결정 속에서 제시되었다는 의미에서 그의 것이 아니고, 사회적 결정 (관계) 속에서 제시되었다는 의미에서 그의 것이며, 이는 이미 그에게 내재적이다." 98) 함부르크 봉기에 대해서는 A. Neuberg, Armed Insurrection (London 1970) pp. 81-104 를 보라. 99) 1924년 이후에야 자본은 계급구성에서 주요한 변형을 수행할 수 있었다. Cf. Arndt, 위의 책, pp. 32-38. 100) Cf. Olaf Ihlau, Die rote K mpfer. Ein Beitrag zur Geschichte der Arbeiterbewegung in der Weimarer Republik und im Dritten Reich (Meisenheim am Glan, 1969) pp. 85ff. 101) "금 통화의 포기와 함께, 독일에서는 새로운 통화 체계가 점차로 형성되었는데 퓌러는 ― 중요한 연설에서 ― 그것의 본질이 노동 통화라고 지적했다... 노동-통화의 단순하고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원칙은 다음과 같다: 화폐는 민족적 생산에 의해 충당된다. 나는 내가 생산할 수 있는 만큼의 화폐를 만들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노동-통화는 금-통화만큼의 안정성을 요구한다. 그것은 민족경제의 질서에 기초한다... 명백하게 신용과 생산, 화폐와 상품 사이의 균형은 노동-통화의 기초적 원칙이 아니다." J. Winschuh, Construzione della Nuova Europa (Florence, 1941) pp. 55-63 참조. 그러나 나치의 노동-통화의 원칙은 Winschuh가 지적했던 것보다 훨씬 단순했다. 1933년 5월 2일 ADGB에 소속된 "자유노조들"은 해산되었다. 5월 5일 노동전선의 대표 레이는 국가사회주의 운동이 라이히의 모든 노동력에 대한 완전한 통제를 행사하고 있다는 견해를 퓌러에게 표명했다. 나치 하에서 노동계급에 대해서는 K. H. Roth, Die "andere" Arbeiterbewegung (Munich, 1974) pp. 101-156 를 보라. 102) 1922년은 전후 기간에 가장 낮은 실업을 기록했다. 1923년에 실업이 증가한 것은 주로 프랑스 점령군에 맞서 루르에서 수행한 "수동적 저항" 때문이었다. Cf. G. Albrecht, W rterbuch der Volkswissenschaft, Vol. 1 (Jena, 1931), pp. 171-181. 1924년이 지나서야 구조조정된 공장으로부터 노동자들이 점진적으로 배제되기 시작했다. 1923년이 되면, 독일 자본은 단지 테일러주의의 보다 "합리적"인 사용을 통해 노동에 대한 내포적 착취를 할 수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테일러주의는 노동자들의 숙련을 단지 감소시킬 뿐이다 ― 제거하는 것이 아니고 말이다. 노동자 평의회와 테일러주의의 관계에 대해서는 C. Petrid, "Il sistema Taylor e i Consigli dei produttori," in Ordine Nuovo (October 25, 1919) p. 178. 103) Schacht 위의 책, p.7 104) 도즈 플랜(1924년 4월)의 수립 이후 독일에서 미국 자본의 성공적인 투자에 대해서는 Sydney Brooks, America and Germany 1918-1925 (New York, 1925)를 보라. 105) Rosenberg. 앞의 책, p.211. 106) Cf. Giacomo Marramao가 편집한 {Teoria e Prassi dell'Economia di Piano} 선집 (Bari, 1973)에서 선택한 에세이들 참고. 107) 이들 피상적이고 조급한 자세는 N. Moszkowski에게 자신을 소개하는 Sergio Bologna에 의해 옹호되었다. Per la Critica delle Teorie Moderne delle Crisi(Turin,1974), p.v. 108) Cf. Giacomo Marramao, "Political Economy and Critical Theory," Telos, 24 (Summer,1975), pp.56-80. 109) 그로스만의 가장 중요한 방법론적인 저작으로는 Archiv fur die Geschichle des Sozialismus und der Arbeiterbewegung, ⅩⅣ(1929), pp.305-338 에 있는 "Die Aenderung des ursprunglichen Aufbauplans des Marxschen Kapital und ihre Ursachen"과 "Die Wert-Preis-Trasformation bei Marx und des Krisenproble." Zeitschrift fur Sozialforschung,Ⅰ(1932), pp.55-84 을 보라. 110) 헨릭 그로스만, Das Akkumulation-und Zusammenbruchsgesetz des kapitalistischen Systems (Leipzig, 1929), p.608. 111) 같은 책, P. 60. 112) Cf. 그로스만, "Wert-Preis-Transformation…",앞의 책, P.57 과 "Die Aenderung…",앞의 책, P.337 참고. 113) Anton Pannekoek, "Die Zusammenbruchstheorie des Kapitalismus." in Ratekorrespondenz, 1 (1934), 지금 재출간되고 있는 Korsch, Mattick, Pannekoek, [Zusammenbruchstheorie des Kapitalismus oder revolutionares Subjekt] (Berlin,1974), pp. 28 and 20. 114) Paul Mattick, "Zur Marxschen Akkumulation- und Zusammenbruchstheorie." in Ratekorrespondenz, 4 (1934), Korsch, Mattick, Pannekoek, 앞의 책 , pp.47-48. 115) 이 주제에 대해서는 Gabriella M. Bonacchi, "Teoria Marxista e Crisi : I Communisti dei Consigli tra New Deal e Fascismo." 를 보라. Karl Korsch, Hans Langerhaus and Paul Mattick 에 대한 소개로 Gabriella M. Bonacchi 와 Claudio Pozzoli가 편집한 [Capitalismo e Fascismo verso la Guerra],(Florence, 1976) 참고. 116) Cf. Paul Mattick, Marx e Kyunes(Bari,1972), P.433, 또한 Problemi del Socialismo, ⅩⅢ:1 (January-February, 1961), pp.95-104에 있는 Michale Lowy, "Il Significato Metodologico della Parola d'Ordine 'Socialismo o Barbarie'." 참고.
광화문 촛불시위에서의 논쟁에 대해 반미열풍이 거세다. 두 여중생의 무참한 죽음이 있은지 6개월만의 일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네티즌들의 자발적인 제안과 참여로 시작된 광화문 촛불시위가 있고, 소위 '깃발논쟁'으로 불리는 약간은 낯선 논란이 진행중이다. 외형만으로 이 논란은 깃발을 든 운동조직대오와 일반 네티즌 참여자들간의 사소한 정서적 불일치일 뿐이다. 그러나 막상 시위현장에서 빚어진 이질적인 두 집단간의 어색한 만남과 사소한 정서적 불일치가 가지는 의미와 그 파장은 생각해 보면 볼수록 현장에서의 갈등이 반복되면 반복될수록 그리 간단치않은 문제다. 범국민대책위 등의 웹게시판에 이 촛불시위를 최초로 제안했던 '앙마'라는 인터넷아이디의 네티즌은 이 논란에 대해 양쪽의 자성을 촉구하고 각 시위 참여자들 사이의 차이를 존중하는 가운데, 열려진 광화문이라는 공간을 '더많은 민주주의'의 광장으로 만들어갈 것을 호소하였다. 우리는 이같은 진심어린 호소에 전적으로 동감하면서, 소위 깃발대오로 분류되는 촛불시위 참가자의 일원으로서 제안자의 자성촉구에 화답하고, 더불어 현재의 광화문 촛불시위와 반미운동에 대한 우리의 바램을 피력하고자한다. 광화문과 미대사관, 깃발과 대중 광화문 촛불시위가 벌어지는 종로 교보문고 앞 광장은 현행 집시법상 집회금지장소다. 외국대사관 반경 100m이내 집회금지라는 반민주적 규정 때문이다. 지난주 12월7일 촛불시위대가 점령한 미 대사관 앞은 해방후 한번도 집회가 허락(!)된 적이 없는 성역이었다. 더구나 현행법상 모든 야간집회는 불법이다. 이런 점에서 광화문 촛불시위는 행사의 성사 자체만으로도 민주주의의 큰 진전으로 볼 수 있는 사건인 것이다. 하물며 이 모임은 단순한 추모로 그치지 않는 반미라는 대의아래 이루어지는 집단적인 정치행동이며, '소파개정과 부시사과', '살인미군 무죄판결 무효와 한국법정 처벌'이라는 요구사안 또한 명확한 반미집회였다. 다만 논쟁의 발단이 된 발화점은 깃발로 표상되는 운동조직대오의 생경한 몸짓과 말투, 문화로부터 조직되지 않은 참가자들이 느꼈을 법한 소외감과 위화감인데, 이는 매우 갈등적인 쟁점인 동시에 그 해결책이 너무나 명확하기 때문에 일견 부차적일 수 있는 문제다. 단지 앞이 보이지 않아 '깃발을 내리라'는 외침은 여느 운동조직들의 집회에서나 벌어지는 풍경이다. 깃발을 내리면 그만이다. 그리고 이른바 운동권 사투리로 대표되는 운동집단의 운동문화는 '깃발대오' 스스로 반성하고 시급히 고쳐야할 숙제이다. 또 선두 연단에 한정된 발언권의 분산과 집회참여자들 사이의 자유로운 소통 또한 이른바 '깃발대오'들 또한 언제나 고민하고 해결하고자 노력해온 주제다. 깃발을 내리고 말고가 문제가 아님은 분명하다. 진정한 문제는 집단적인 정치행동 형식을 띨 수밖에 없는 이같은 모임이 가지는 집단성과 개인성의 모순과 모임의 중심 대의인 '반미'를 둘러싼 집회참가자들간의 의식적이고 무의식적인 갈등과 그로 인한 불편함이다. 깃발은 단지 이 두 주제에 관한 깊고 넓은 갈라짐의 경계가 된 상징적인 매개물에 불과한 것이다. 집단적 정치행동의 조건과 집단성과 개인성의 모순 둘 이상의 사람이 모여 그들 자신의 이해를 넘는 대의를 실현하려고 공동의 행동을 실천한다면, 이는 이미 하나의 정치적 집단행동이다. 그리고 그같은 집단행동에는 집단을 형성한 각 개인들 서로간에 대의를 공유할 수 있는 상호 교통의 조건이 필수적일 것이다. 물론 그 대의를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방식과 결론은 상이할 수 있을지언정 말이다. 우리는 이같은 정치적이고 집단적인 실천의 조건으로서 '합리적인 이성'을 중시하며, 이는 곧 형식적인 합리성에 그치지 않는 일정한 역사인식과 '공통개념'에 기반한 개인의 능동성과 집단적 실천을 결합할 수 있게 하는 조건이다. 이로써 필연적으로 집단적이면서 동시에 개인적일 수 밖에 없는 정치적 실천이 가능한 유일한 길이 열리는 것이며, 어떤 집단적인 강제속에서 (자발적이건 비자발적이건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냐에 상관없이) 개인은 자신을 잃고 소외됨을 피할 수 있는 것이다. 이같은 관점에서 볼 때, 광화문에 운집한 깃발대오와 네티즌들간의 오고간 '깃발을 드냐 내리냐'는 식의 협소한 교통관계는 이들 두 대오 자체와 각 대오로 나뉜 시위참가자 (개인)자신들이 어떤 집단적 강제속에서 스스로를 잃어버린 결과라고 밖에 볼 수없다. 즉 네티즌은 자발적인 참여자이고 깃발대오는 개인참여자를 소외시킨 집단이라는 평가는 잘못된 사실에 기초해 있으며, 깃발대오와 비운동권대오라는 허구적으로 조작된 집단성이 사실인 듯 주어진 구분관념 때문에 어느 한편으로 그 성격을 제한당한 광화문 시위참여자 개개인 모두가 어느 만큼 스스로를 잃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시위참여자들 자신들이 자신을 잃어버린 그만큼 광화문 시위의 정치적 실천은 실패했고, 그렇지 않은 만큼 성공했던 것이다. 우선 어느 깃발에도 속하지 않고 자발적으로 시위에 참여한 네티즌들의 자발적인 '반미'(집회의 대의)는 과연 그 개인참여자만의 순수한 결정이었을리 만무하며, 어떤 깃발에 속했던 개인도 그 깃발의 집단성에 자신을 완전히 내주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같은 사실을 소위 [비정치적인 반미]라는 아이러니를 통해 보다 구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비정치적인 반미(反美)]라는 아이러니 한국사회에서 '반미'만큼 정치적인 문제는 없다. 반미는 남한의 성립과 더불어 현재에 이르기까지 이어져온 가장 첨예한 정치적 쟁점중의 하나다. 그러니 도무지 우리로서는 [비정치적인 반미]란 이해할 길이 없는 아이러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피해갈 도리없이 노도와 같이 몰아닥친 반미열풍사태를 수습·교정의 대상으로 몰아가는 친미냉전적 정치세력과 보수언론의 이데올로기적 개입이 엄존함을 간과할 수 없는 현실이 있다. 이들은 한결같이 반미와 소파개정은 별개의 문제라느니, 네티즌들의 자발적인 반미정서를 이념적으로 불순하게 이끄는 세력이 있다느니 하는 이데올로기 공세의 고삐를 한시도 늦추지 않고 있다. 더욱이 이들은 한계상황에 다다른 대중의 정치불신을 가장 적절히 이용함으로써, "정치는 싫어하지만, 반미는 좋아한다"는 이른바 '월드컵 반미세대'라는 조작된 반미정서를 탄생시켜냈다. 결국 그 자체로 한국 현대사에 대한 첨예한 쟁점을 내포하며, 하나의 역사적이고 과학적인 이념일 수밖에 없는 반미는, 불순하고 구시대적인 '정치적 반미'와 반정치적 정서에 한없이 영합하는 정서적이고 신세대적인 '비정치적인 반미'로서 현실적으로 분열되기에 이른 것이다. 그리고 이같은 분열은 추모의 촛불로 하나됨에 부족함이 없던 광화문에서조차, 운동조직대오의 깃발과 폐쇄적인 운동문화 및 정치적 발언들을 매개로 대중들의 무의식적인 심리적 한계선을 자극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한계선을 돌파하기 위해서조차 오히려 현재 반미투쟁의 과제를 지속적으로 제기하고 확장하는 것이 필요하다. 소파개정과 주한미군 철수 현재 투쟁의 요구는 네가지다. 살인미군 무죄판결 무효와 한국법정 처벌, 부시의 공개사과와 소파 전면개정이다. 이러한 요구를 관철시키는 것이 이번 투쟁의 목표임은 두말할 나위 없으며 이를 위해 모두가 나서고 있다. 지난 번 소파개정시에 주권을 침해하는 핵심적인 조항들은 그대로 둔 채 몇몇 지엽적인 개정과 법적 효력이 없는 선언적 문구를 집어넣는 기만적인 개정으로 그치고 말았고, 그나마 주고 받기식 개정으로 미국이 부분적으로 양보하는 듯 하면서 핵심부분에서는 오히려 개악된 내용으로 개정됨으로써 불평등성이 더 심화되었다는 것을 기억한다면 민중의 힘으로 이번에는 기어이 소파를 전면 개정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앞서 말한 묘한 심리적 한계선 때문인지 주한미군 철수의 요구는 대중적으로 나오고 있지 못하다. 물론 소파가 개정되는 것은 이번 사건과 유사한 사건이 발생하였을 때 합리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발판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는 미군이 장기 주둔하는 상황이 변화하지 않는한 유사한 사건은 언제든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 따라서 미군의 주둔 자체에 대해 근본적으로 대중적인 물음을 던질 수밖에 없다. 주한미군 철수가 이번 투쟁의 직접적인 목표가 될 수는 없겠지만, 이것이 본질적인 문제라는 것이 충분히 드러날 수 있도록 논쟁과 토론이 되어야 할 것이다. 더 많은 민주주의와 반미를! 작금의 반미정서에 관해 우리가 가지는 또하나의 우려점은 민족적 자존심 회복에 국한되고있는 반미정서의 협소함이다. 미국처럼 힘있는 나라가 되고 싶지만, 발전의 전망을 상실한 위기의식의 탈출구로서 '반미'가 위치지어져서는 곤란하기 때문이다. 전세계적인 미국의 금융 제국주의와 군사 패권전략이 전세계 인민의 삶을 얼마나 파괴하고 있는지 똑똑히 보아야 한다. 라틴아메리카에서, 동남아에서, 중동에서, 동구에서, 가까이는 아프가니스탄에서 자국의 이해만을 위해 수많은 인민을 전쟁과 폭력으로 몰아 넣었는지 상기한다면, 그리고 지금도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미명하에 이라크 침공을 일촉즉발 일으키려 하고 있고 북한에 대해 강경 일변도로 치닫는 것을 상기한다면, 반미는 반도의 '자존심'으로 그쳐서는 안될 국제주의적인 인권과 평화의 새로운 진전을 이루기 위한 피할 수 없는 출발점이 되어야 할 것이다. 12월 14일 시청 앞 10만 범국민 평화대행진이 개최된다. 우리는 더욱 더 많은 민주주의와 반미를 결합시켜야 한다. 서로가 가지고 있는 생각과 주장을 발표하고 소통하면서, 정치의 공간을 더 크게 열어야 한다. 모두가 반미 행동의 주체가 되어 힘을 모으자. SO-LA
대한상의 노동정책 건의와 매일경제의 '한국은 노조공화국인가' 기획기사를 보며 그들의 요구 여야 정당들의 대통령 후보가 노동자의 표를 얻고자 하기에 차마 이야기 할 수 없는 정책들을, 그들을 대신하여 당당하게 이야기하는 조직이 있다. 대한상의, 경총, 전경련 등의 자본가 단체들과 매일경제신문 등의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그들이 그들이다. 그들은 이회창, 노무현이 가슴 속 깊이 숨겨두었던 비밀을 누설함으로서, 대통령 후보들이 당선 후에 수행해야 할 '자본가들과의 약속'을 잊지 않도록 주의를 주었다. 지난 11월 28일 대한상공회의소는 파업기간 대체근로 허용, 부당해고시 형사처벌 규정 삭제, 노동조합에 대한 부당노동행위 적용 등의 내용이 담긴 노동정책 과제를 정부에 건의했다. 이 내용들은 이미 10월 8일 한국경영자총협회가「대선공약 경영계 정책건의서, 경쟁력 있는 국가건설을 통한 국민 삶의 질적 개선」라는 문건을 통해 공개한 것을 다시 한 번 반복한 것으로, 김대중 정부에 정책 건의를 한다는 명분으로 대통령 후보들에게 다음 정부의 과제가 무엇인지를 다시 한 번 강조한 것이었다. 정책건의서는 이에 대해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금년에 치러지는 대선에서 각 후보의 공약은 단기적 인기를 얻기 위해 정치논리에 치중된 공약이 되어서는 안되며, 시장경제원리를 철저히 준수하고 경제의 효율성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추진 … 유념해야 함." 또한 이에 앞서 매일경제 신문은 한국 노동운동을 21세기 한국 사회의 비합리적 반사회적 모습으로 규정한 '한국은 노조공화국인가'라는 기획기사를 11회 분량으로 11월 26일부터 연재하였다. "한국 국가 이미지가 노사관계 후진국으로 고착될 위기에 처했다. … 주한상공회의소는 한국경제가 도약하기 위한 결정적 걸림돌로 노사관계 후진성을 매년 꼽는다" 로 시작하는 기획기사는 노조 전임자 문제, 노조의 비도덕성, 노-노 갈등, 명분없는 파업, 잘 사는 노동자만을 위한 이익단체 민주노총, 노조간부의 정책 부족-비합리성, 노조 없는 기업의 성장가능성 등등 한국 노동자운동의 문제점을 현장 인터뷰를 중심으로 (원인에 대한 분석이 아니라, 결과에 대해)해석하였다. 그리고 기획기사는 결론으로 "강력한 노조와 이를 부추기는 노동관련법 … 이 한국 기업의 최대 약점이다. … 노동자가 아니라 노조 문제인 것이다"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즉 강력한 노조를 부추키는 노동관련법을 바꾸어야 한다는 것이고, 이는 파업기간 대체근로 허용, 노동조합에 대한 부당노동행위 적용 등 경총이 제안하고 대한상의가 강조한 그것을 즉각 실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매일경제는 대통령선거가 시작되는 묘한 시점에 자본가 단체들의 정책을 중립적인 듯 보이는 기사 형식으로 다시 한 번 강조한 것이다. 그렇다. '경쟁력 있는 국가'를 만들기 위한 이들의 가장 시급한 과제는 바로 이것이다.: 노동유연화를 더욱 강화하기 위해 노동운동을 무릎꿇게 하라! 김대중 정권 5년간의 노동정책, 그리고 자본가들의 다음 목표 우리는 15대 대선을 앞두고 자본가 이데올로그들이 주장하는 내용을 통해 차기 정권에서 어떠한 노동정책을 펼칠 것인지를 가늠해 볼 수 있다. 김영삼 정권은 정권 말기에 국회 날치기를 통해서 정리해고제, 근로자파견제, 변형근로시간제를 법제화하고 노동유연화 정책의 골간을 마련하였다. 김대중 정권은 이를 경제위기라는 상황을 명분으로, 그리고 노사정위라는 사회적합의기구를 형식으로 하여 한국사회에 뿌리내리게 하였다. 그리고 더욱 중요하게 김대중은 노동유연화를 신자유주의 시대에 걸맞는 노동시장, 노동과정, 노동력재생산에 걸쳐 체계화 제도화하는데 성공한다. 용역 외주화 아웃소싱 등의 노동력 외부화, 구조조정을 명분으로 한 정규직 노동자의 비정규직 전환, 임시직 계약직 일용직 등을 통한 신규채용 전략을 일반화하였으며, 연봉제 성과급제 스톡옵션 등을 통해 임금을 유연화하였고 변형근로시간제를 확대 적용하여 실질적인 장시간 노동 구조를 정착시켰다. 또한 BK21, 7차 교육과정으로 대표되는 교육 서열화, 학생에 대한 핵심/주변 분할 체제를 정착시킴으로서 노동유연화 구조에 걸맞는 노동자 재생산 시스템을 구축하였다. 그리고 생산적 복지 정책을 통해 실업 빈곤을 관리하며, 이 밖에도 주식시장의 활성화, 카드 가계대출 등을 통해 노동자들을 금융 시장에 종속시킴으로서 노동 유연화 정책에 대한 2중 3중의 보호막을 구축했다. 이제 자본은 향후 노동유연화 정책을 꾸준하게 추진할 수 있는 기초를 다진 셈이다. 실재 경총의 노동유연화 요구를 보아도 정리해고 요건 완화, 근로계약기간 상한선 확대, 의무고용규제 개선 등 기존 정책의 각론을 고치는 수준이다. 그리고 지난 5년간 노동유연화의 기초가 다져졌으니, 이를 더욱 확대해나가는 핵심 걸림돌은 이제 노동운동의 저항이다. (경총의 공약제안의 첫 번째 목차는 "산업평화 달성-유지를 위한 노동법 제도의 합리적 개선"이다. 그리고 정권 초기 정부의 신자유주의 정책에 대한 이념적 지표를 선동하는 데 앞장섰던 매일경제가 지금 제시하는 것은 비합리적 반사회적 노동운동에 대한 처방이다.) 차기 정부에 대한 이들의 가장 강력한 요구는 대한상의가 선언하였듯이 이제 법적 제도적으로 노동운동을 '처벌하라'는 것이다. 자본가들의 술책 아군의 취약점은 적군의 가장 좋은 공격 지점이 된다. 자본가들의 첫 번째 표적이 되는 것은 현재의 노동운동 활동가들과 노동자들간의 괴리이다. 매일경제 기획기사는 이에 대해 '노조전임자' 문제로 시작한다. "2000년 기준 노조원 212명당 전임자 1명이 있을 정도로 일하지 않는 전임자가 판을 친다. … 현대중공업 노조는 사무국장 수뢰사건으로 총사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 관료화된 노조가 비윤리적인 자본가보다 못하다" 그리고 곧이어 노동조합의 파업 현실을 폭로한다. "50%를 간신히 넘는 투표율로 찬반투표를 가지고 파업에 들어갔다가 조합원들은 모두 떠나고 노조 간부들만 남아 파업을 계속하는 우리나라의 실정" 이에 대한 경총은 '근로자의 단결하지 아니할 권리와 단결선택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해 유니온 샾 조항을 삭제하라'는 것이며, '파업찬반투표 용지에 파업으로 인한 임금상실 가능성 및 불법파업시 책임발생 가능성을 경고하는 문구가 삽입된 법정투표용지를 사용하도록 하며, 노조원이 공정하고 소신있게 의사표현 할 수 있도록 우편투표화가 이루어져야 함' 이라는 정책을 제시하고 있다. 두 번째 표적은 노동운동이 신자유주의 반대의 정치적 목표 아래 전국적 전선을 구축하는 것에 대한 비판이다. 매일경제 기획기사는 먼저 단결을 주장하며, 그에 배반하는 노동운동의 내적 모순을 지적한다. "하도급 노동자는 정규직 방패막이 … 울산 현대자동차 하도급 노동자로 근무했던 C씨는 회사가 어려워져 인력을 감축해야 할 때 정규직 대신 해고될 만큼 하도급 노동자 비율을 유지해야 한다는 논리 … 정규직이 비정규직을 폭행 … 캐리어 비정규직은 정규직한테 집단폭행 당한 아픔이 있다" 그리고 이어 민주노총의 전국적 투쟁 뒤에는 많은 노동자들의 희생이 뒤따른 다는 것을 강조한다. "그 수많은 주장과 요구는 일반국민은 물론 노동자들에게도 외면당했다. …대안없는 민영화 반대 … 결국 노조원 350명이 해고되고 복귀자는 모든 손해배상을 감수하겠다는 서약서를 쓰면서 끝났다. " 이에 대해 경총은 '단체교섭사항의 명확한 규정', '노사관계를 악화시키는 3자 개입의 합리적 제한' '폭력 사용 개연성이 큰 개인 및 단체의 집회 참가 제한, 시위방법 제한 등을 골자로 하는 집시법 개정' 등을 제안하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저들은 노동운동 자체를 원천적으로 무력화하려는 속내를 드러낸다. 매일경제는 인용을 통해 "반복적으로 일어나는 파업문화를 장기적으로 저지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형사적 접근보다 손배소 가압류 등 민사적 접근이 유리하다"라고까지 이야기하고 있다. 그리고 노동조합의 개선 방향으로 LG 전자, 미국자동차연합노조, 독일금속노조 등을 예로 들며 회사와 협력하여 구조조정과 효율화에 매진할 것을 제안하고 있다. 경총은 좀 더 노골적으로 '직권중재 가능한 필수공익사업장 확대', '파업 중 대체근로 허용' 등을 주장하고 있다. 전국적 민중연대 전선의 강화를, 다시 한 번 전민중적 민주화 투쟁을 지난 시기를 되돌아보면 언제나 허황된 협박 같았던 자본가들의 정책 제안이 결국 현실에서 시행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미 한국노동연구원은 정부의 의뢰를 받아 '기업존속이 위태롭거나 또는 법원의 쟁의행위금지 가처분이 있거나 공익이 제한될 때 이를 허용하고, 대체인력 투입을 방해할 경우 업무방해죄를 적용하는 방안'을 연구하고 있다. 또한 대한상의 회장이기도 한 두산중공업 사용주는 매일경제가 '노동자들의 지지 없는 산별건설' '산별교섭을 이유로 한 명분 없는 파업'이라 하고, 경총이 제안한 "산별노조 산별교섭을 이유로 한 연대 동정파업의 금지" 정책을 현실화시켜 임단협에서 '집단교섭 삭제'를 관철시킴으로서 두산중공업 노동조합의 산별노조를 통한 투쟁을 무력화시켰다. 축적 위기에 빠져 구조조정을 반복 획책하는 자본가에게 노동유연화의 확대 강화는 사활을 건 과제이며, 이러한 절박함만큼 저들은 더욱 집요하고 철저하게 노동운동을 괴멸시키려 할 것임이 자명하다. 2002년 발전노조투쟁과 11월 총파업에서 볼 수 있었듯이 노동자들의 분노와 저항이 더욱 거세저가는 상황에서, 자본가들은 이 분노를 관리하기 위해서 더욱 노동운동을 분할 탄압하며, 노동운동이 노동자들의 분노를 반신자유주의 운동으로 모아나가는 것을 막으려 할 것이다. 특히 이번 대한상의의 선언에서도 볼 수 있듯이 이 탄압은 정치적 대응으로서의 공권력에 의한 것만이 아닌, 법적 제도적, 그리고 노동운동을 고립화하기 위한 이데올로기적 대응을 강화해 나가는 것이다. 저들이 획책하는 것은 노동운동에 대한 법적 제도적 대응과 이데올로기적 공세를 통해 민주주의의 기본적 권리인 '노동권'을 말살시키는 것이다. 이제 신자유주의에 대항한 싸움은 고용 임금 등의 생존권 요구를 넘어 노동자 민중이 민주주의의 기본적 권리를 지켜낼 수 있는가, 시민의 최소한의 존엄을 사수할 수 있는가로 나아가고 있다. 자본가들은 '노동운동', '노동조합'이라는 대상을 싸우고 있는 듯 하지만, 실상은 노동운동 노동조합운동이 가리키고 있었던 '노동에 대한 권리'에 집중적으로 싸움을 걸고 있는 것이다. 노동운동을 관리하겠다는 저들의 정책이 결국 시민의 저항 일반- 바로 정치-을 제한하는 것임은 그들의 정책이 결국 집시법 개정, 3자 개입 금지, 단체협약 제한 등으로까지 나아가는 것으로도 확연히 알 수 있다. 자본가들이 획책하는 노동권 말살 정책에 대한 싸움은 한국 사회 모든 시민들의 투쟁이다. 차기 정권이 노무현이 되던 이회창이 되던 정부의 정책 변화는 크게 변화하지 않을 것이다. 이는 금융 세계화 시대 자본의 생존을 위한 몸부림이며, 김대중의 '민주주의와 인권'이 결국 공장 문 앞에서 멈추어 섰듯이 신자유주의를 부정하지 않는 모든 정권의 필연적 선택이다. 이제 신자유주의 시대의 국가의 역할은 보다 분명하게 모든 국민들 앞에 등장하고 있으며,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자본가들의 태도 역시 선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대통령 선거를 10여일 앞두고,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어느 후보를 찍을 것인가'에 쏠려있는 지금, 과연 어느 누가 이 민주주의의 파산을 막을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 보아야 할 것이다. 이미 차기 정권이 누가 되던지 수행해야 할 협약을 제시하고 있는 자본가들의 행동에서 볼 수 있듯이, 우리가 고민하고 준비해야 할 것은 민주주의를 지켜내고, 노동권을 사수하기 위한 노동자 민중의 전국적 연대, 전민중적 저항을 어떻게 조직할 수 있을 것인가가 아닐까 한다. 이제 자본가의 대노동 전쟁은 마지막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so-la
후보단일화 논의에 부쳐 농민대회였다. 정몽준과 노무현은 각각 돌과 계란세례를 맞고 물러났다. 농민들은 더 이상 지배정치의 사탕발림을 믿지 않는다. 하지만 그뿐이다. 분노를 모아 더 이상 전진할 수 없는 것 또한 지금의 비정한 현실이다. 정치에 대한 무관심과 보수화를 넘어 스스로 대안을 만들어내는 흐름은 지체되고 있다. 30만 농민대회의 뼈아픈 진실은 여기에 있다. 후보 단일화 그리고 개혁세력의 붕괴 노무현 정몽준의 후보단일화 논의가 진통을 겪고 있다. 일단 후보 단일화에는 공감한다는 입장을 표명하고 있으나 단일화 과정에 대한 잡음이 만만치 않다. 현재까지 진행된 경과로미뤄보면 정몽준에게는 단일화의 의지가 없어 보인다. 단일화 결과 노무현이 된다면 노무현이 당선된다는 보장이 없을뿐더러 단일화를 둘러싼 지형이 정몽준에게 그다지 유리하지 않기 때문이다. 단일화에 대해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는 정몽준과 마찬가지로 노무현 역시 단일화에 대해 소극적이다. 노무현으로서는 최초의 국민경선을 통해 창출된 후보라는 점을 내세워 당내 기반을 다지려 했다. 그러나 대통령의 세 아들 비리를 계기로 터져 나온 민주당에 대한 불신으로 인해 노무현의 지지도 역시 급격히 하락하기 시작했다. 김민석을 비롯하여 개혁세력이라 자칭하는 민주당의 쇄신파들은 후보단일화가 구국의 결단인양 정몽준의 비싼 우산 밑으로 줄을 섰다. 후보단일화를 주장하던 몇몇 의원들은 심지어 아예 한나라당으로 둥지를 옮기기도 했다. 민주당과 386으로 상징되는 개혁세력이 완전히 붕괴하고 있는 것이다. 개혁세력 내부의 붕괴와 지지율 하락에 직면하여 노무현과 정몽준 모두 자신을 중심으로 반 이회창 전선의 결집을 주장하고 있다. 물론, 이들이 어떠한 방식으로든 후보단일화를 언급할 수밖에 없는 속내가 있다. 단순히 수권전략으로서 후보단일화를 넘어서는 또 다른 이유 말이다. 후보단일화 논의는 개혁세력의 목숨을 구걸하는 구차한 연명에 불과하다 지방선거 패배 이후 몰락의 임계 상황에 몰린 개혁세력은 화려한 흔적을 남긴 월드컵과 붉은 악마에 기대어 자신의 부활을 꿈꾸었지만, 축구 열풍이 사라지자마자 붉은 악마는 자취를 감췄고, 이제는 어디에서도 개혁의 상징이 출현하기를 기대하기 어렵게 되었다. (정몽준의 화려한 등장과 정치인들의 줄서기, 그리고 점점 몰락하는 지지도) 한편으로 이같은 기대의 상실은 과거 개혁세력의 정치적 표상이었던 민주당으로의 기대 반등 효과를 낳았고, 노무현은 이때를 틈타 대선 대열을 정비한다. 개혁세력들의 불행은 여기에서 시작한다. 이제 어느 누구도 이 상황을 주도할 수 없게 되었고, 이들은 우왕좌왕하게 된다. 개혁세력들에게 어떤 선거 전략도 유효하지 않은 상황이 되었다는 뜻이다. 어떤 바람도 기대할 수 없는 대중들의 정치적 무관심 앞에서 개혁세력은 어떤 형태로든 더 이상 지지기반을 확장할 수 없었고, 이렇게까지 몰리자 결국, 정몽준과 노무현 모두 단일화라는 카드를 쥐고 서로 몸집 불리기에 몰두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이는 현재 단일화 논의의 성격을 알려주는 중요한 지점이다. 후보 단일화를 매개하는 몸집 불리기의 배후에는 보수-개혁 전선을 유지하며 이들의 구차한 목숨을 연명하려는 치열한 생존전략이 숨어있다. 즉 단일화가 추진되는 배경은 내부로부터 붕괴하는 개혁세력의 자기 수습차원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들이 외치는 맹목적인 개혁세력 결집론(반창)은 신자유주의 정치개혁의 주체였던 개혁세력들이 자신의 생명을 연명하기 위해서다. 그것이 수권전략이 되었든 생존전략이 되었든 중요한 것은 아니다. 마땅한 대안도 없는 개혁세력에게는 단일화를 향한 이합 집산 만이 국회 의석의 과반수를 차지하고 있는 한나라당에 맞서는 대선 대응의 유력한(지금 상황에서 유일한!) 방도이기 때문이다. 개혁세력의 생존 근거, 개혁/보수 전선 개혁세력의 결집을 통한 반 이회창 연대의 실내용은 존재치 않는다. 왜냐하면 이들에게 있어 이회창 반대의 명분은 한편에서는 민주화운동이라는 고답적 쟁점으로 다른 한편에서는 미래의 리더쉽이라는 가상적 쟁점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들을 반 이회창 전선으로 이끌 수 있는 유일한 것은 다만 이미 실패로 판명된 개혁이라는 허구적 이데올로기뿐이다. 개혁세력이 추진한 일련의 신자유주의적 정치개혁이 파산한 지금, 지배분파들이 신자유주의를 적극적으로 동의하고 있는 한 개혁세력과 이회창-한나라당과의 차이는 존재하지 않는다. 가장 선명한 입장의 차이를 보이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것은 대북정책이지만 이는 철저히 북-미 관계에 종속된 현재 국면에서 자신의 과거 정체성을 호명하는 단순한 수사에 그칠 뿐이다. 또한 금융세계화에 종속된 남한에서 부르주아들의 전략은 IMF위기극복의 방향이 쟁점이 된 97년의 상황과 다르다. 현시기 남한 부르주아들이 바라는 것은 현재 체제의 안정화와 효율적인 관리이다. 그리고 이에 대한 부르주아 정치권의 입장은 동일하다. 이상이 현재 이루어지고 있는 정치권의 무원칙적이며 놀라울 정도인 온갖 합종연횡을 설명하는 핵심이다. 이런 상황에서 개혁세력의 결집(생존)은 보수/개혁이라는 허구적 전선이 전체 정치적 쟁점을 주도할 때에만 가능하다. 유령처럼 되살아나는 보수/개혁 전선이 반창-후보단일화를 매개로 부활하고 있고, 이것이 다시 개혁세력의 생존 근거로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이것이 민중운동 진영의 정치적 입지를 더욱 축소시키고, 대중들의 정치전선을 오히려 이완시키며, 대중들의 정치적 수동성에 일조 한다는데 있다. 이들이 상징하는 개혁이란 사실 신자유주의를 향한 개혁에 불과하고, 이 사실을 대중들은 DJ 정권아래에서 불안하고 곤궁한 삶과 피폐한 노동으로 확인해왔다. 따라서, 개혁세력의 붕괴로 인한 보수/개혁 구도의 해체와 정치의 위기는 진보정당과 일련의 민중운동에게 공간을 열어준 듯 하지만 상황은 그리 만만치 않다. 대중은 여전히 지속되고 있는 보수/개혁의 허구적 전선 속에 지역주의, 보수주의로 회귀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이회창의 지지율이 영남을 중심으로 또 노무현 지지가 여전히 호남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은 이를 뒷받침하기에 충분하다. 노무현과 정몽준 그리고 '개혁국민신당'(이하 개혁신당)이라는 개혁세력의 존재 자체가 가지는 치명성은 바로 여기에 있다. 이는 신자유주의 정치의 위기에서 민중적 대안과 전망 그리고 투쟁을 촉발시키는 것을 저해한다. 또한 대중이 반신자유주의 전선으로 결집하는 것을 교란하는 효과를 낳을 것이다. 이들의 몰락 앞에 동정이란 있을 수 없다! 노무현과 정몽준이 농민대회를 찾았던 이유는 개혁세력의 표상을 재획득하는데 있다. 하지만 계란세례로 확인했던 바와 같이 개혁과 보수의 구도는 이미 아래로부터 그 시효를 상실했다. 노무현과 정몽준을 위시한 개혁세력의 결집은 현재 상황에서 어떠한 긍정적 효과도 낳지 않는다. 다만 우리가 창출해야하는 전선을 교란시키고 대중의 보수화를 부채질할 뿐이다. 하기에 개혁세력의 결집과 세력화라는 것에 대해 단호한 입장을 가져야 한다. 이번 대선에서 보수/개혁의 전선의 보수세력이 집권을 하던 개혁세력이 집권을 하던 변화할 것은 없다. 문제는 현재 대중의 정치적 보수(수동)화를 추동하는 보수/개혁이라는 허구적인 전선을 끝장내는 것이다. 다시 한번 반제/ 반신자유주의의 기치를 들고 민중적 대안과 세력화를 이룰 수 있는 투쟁을 전개해야 한다. 반제/반신자유주의 전선으로 허구적인 개혁/보수의 전선을 넘어서자. 농민대회가 남겨준 과제는 바로 이것이다. SO-L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