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선결과 분석 1/ 불안정한 양당체제의 등장과 신자유주의 정치개혁의 모순 -총선은 지배정치의 위기를 해소했는가? 17대 총선은 외형적인 양당체제를 낳았다. 과반 의석을 확보한 열린우리당은 탄핵심판의 민의를 확보했다며 압승을 선언했고, 121석을 확보하여 기사회생한 한나라당은 그들 나름대로 자축 분위기다. 언론은 이 같은 결과를 두고 안정적인 국정운영과 생산적 견제의 황금분할이라 평하고 있다. 우선 과반 의석을 확보한 열린우리당은 이번 선거를 당연한 탄핵심판의 승리라고 평가하고 있다. 그러나 막상 실제 선거결과를 놓고 보면, 탄핵선두라 할만한 김기춘, 정형근, 박희태 같은 인물들이 모두 살아남았고, 한나라당은 무려 121석을 확보했다. 그럼에도 이번 선거를 탄핵심판론의 압도적 승리라고 평가할 수 있으려면, 호남의 지역주의는 개혁적이지만 영남의 지역주의는 수구보수적이라고 매도해야만 한다. 그러나 지역주의적 투표 행태의 실제를 어느 정도 인정한다하더라도 영남대중 전체를 수구보수로 매도하거나, 어떤 지역주의가 이념적으로 구분된다는 논리는 지나치게 사후적인 비약이고 억측이다. 호남 지역주의가 열우당을 선택하고 민주당을 버린 것이 수구보수 한나라당에 대한 정서적 거부의 결과라면, 영남 지역주의는 노무현 정권의 국정수행 1년에 대한 거부를 정서적인 형태로 표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지역주의는 복잡다단하게 얽힌 현실의 불만이 합리적 대안을 가지지 못한 가운데, 정서적이고 감정적인 형태로 표출되는 이데올로기적(모든 이데올로기는 왜곡된 이데올로기다) 투표 행태다. 지역주의적 형태를 띤 투표결과를 호남과 영남에서 누가 얼마만큼 당선되었는지의 사후적 결과로만 평가한다면, 성격상 무한히 변태가능하고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는 지역주의는 스스로 '모든 지역에서의 각 정당의 균등한 득표'라는 불가능하고 제거할 수 없는 목표의 함정에 빠진다. 더욱이 영남에 출마한 수구보수적인 지역수장들이 선거과정에서 "그래 나 수구꼴통이고, 계속 차때기할테니 찍어 달라"며 선거를 했을 리 없고, 열린우리당이 호남에서 신자유주의 정책개혁과 햇볕정책의 한계를 어떻게 넘어설 것인지를 설득하여 당선되지 않았다. 한편 한나라당의 자축분위기는 훨씬 기만적인데, 이들이 내놓은 주된 평가는 '국민의 놀라운 균형감각'이 표현됐다는 것이다. 정말 놀랍도록 뻔뻔한 해석이다. 하지만 152:121:10:9라는 분명한 양당 구도가 확정되자마자 노무현과 정동영은 '상생과 통합의 정치'를 운운하기 시작했고, 언론들은 진보가 가미된 '중도(수구)보수 vs 중도(보수)개혁 간의 황금분할'이라는 평가를 내놓았다. 이를 통해 한나라당의 아전인수격 평가는 어떤 현실적인 근거를 얻은 듯이 보인다. 그러나 17대 총선의 의미는 "정치를 바꿔 경제를 살리자"는 모토로 요약되는 정치개혁의 기만성과 '안정적인 위기관리'라는 지배계급의 모순적 과제가 가지는 고유한 난점을 통해서만 옳게 파악할 수 있다. "정치를 바꿔 경제를 살리겠다"는 신자유주의 여야정당의 약속은 피착취 대중의 인내가 한계에 도달했고 동시에 지배계급 또한 더 이상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 통치할 수 없음이 분명해진 상황을 "이전과 다른 방식으로 통치하겠다"는 읍소로 모면하려는 하나의 기만에 다름 아니다. 그리고 이 기만 속에는 집권여당의 통치력 위기를 넘어 지배정치일반(국가)의 위기로 변태중인 경제위기를 오로지 여야 간, 국가기구 간의 책임전가를 통해 관리해야하는 극복할 수 없는 모순이 존재한다. 즉 지배체제의 위기를 봉합하기 위해서는 지배정치 스스로 지배체제의 정치적인 안정을 허물어야한다. 때문에 보수정당들 간의 차별성이 없어지고, 이들 간의 중도주의적인 수렴이 진행될수록, 지배계급 내 정치적 대결은 경제위기를 호도하기 위한 '다른 정치 수단'(부패 비리수사와 각종 스캔들, 정치이미지 마케팅)이 총동원되는 가운데 점점 더 극단적인 양상으로 진행될 수밖에 없는 역설적인 현상이 벌어진다.(대통령 탄핵은 그 정점이었다) 그로 인해 17대 총선은 전적으로 탄핵심판론과 거여견제론이라는 네거티브 선거게임전략에 의해 치러지게 된 것이다. 실제로 이번 선거에서 여야 각 정당은 상대를 배제하고 내부 숙청을 단행해야 자신이 살아남는 절박한 지경에서,(막상 서로 간의 정책-이념적 차별성이 없었기 때문에 인기몰이에 성공한 뉴리더를 내세워) 그저 울고, 사과하거나, 엄살 이벤트를 벌이며 서로의 다수의석 확보를 저지하자는 읍소(게임전략 대 게임전략)로 일관했다. 이러한 양상의 선거캠페인은 결국 여야 서로를 향해 책임을 몰아 묻는 투표행위로 표현되었고, 외형적인 양당체제가 등장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번 총선의 의석배분 결과는 여야가 분할한 '두개의 승리'라기보다는 서로에게 떠넘겨진 '두개의 패배'에 더 가깝다. 다시 말해 대중적 불신과 분노에 편승한 선거 캠페인의 결과, 대혼란과 무능에 빠진 위기관리체제는 스스로의 기반을 무너뜨리는 방식으로 또 다른 대립과 붕괴를 잠시 보류시킨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끓어오르기 시작한 분노한 민심 위에 얹어진 '상생과 통합의 정치'라는 이름의 살얼음판과 같은 운명일 것이다. 총선결과 분석 2/ 신자유주의 정치개혁 전망 지난 김대중 정권 말기, 1,2차 구조조정과 상시 구조조정 시스템이 별다른 효과를 보지 못한 채로 집권세력의 통치력 상실을 불러온 이후로 여야를 막론한 신자유주의 정치세력에게 남겨진 대안은 정치개혁뿐이었다.(그리고 그와 긴밀히 연관된 언론, 교육, 가족개혁) "깨끗한 정치, 일하는 정치로 경제를 살리자", "사회적 정치적 통합과 참여개혁"이라는 선동을 누가 더 효과적으로 연출하느냐가 선거 승패의 관건이었고, 결국 '노무현의 눈물'이 '엘리트 이회창'을 제압했다. 그러나 노무현의 승리는 채 1년을 지속하지 못했다. 지지율은 나날이 곤두박질 치고 측근비리가 줄줄이 터져 나왔다. 더 높은 강도와 더 많은 베팅만이 탈출구였고, 그것은 재신임과 연계된 전면적인 대선자금 비리수사, 그리고 그에 뒤이은 대통령 탄핵사태와 '총선 올인'전략으로 나타났다. 그 결과 선거가 끝난 뒤에도 크고 작은 부패비리수사와 정치이미지 마케팅과 같은 '다른 정치 수단'들에 의한 무한캠페인이 계속되는 기이한 정치 행태를 낳았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치루어진 총선은 변형된 정치캠페인을 제도화하는 개정된 선거법으로 치러진 최초의 선거였고, 17대 국회는 개정된 정치관계법에 의해 운영되는 최초의 국회가 될 것이다. 이 개정된 선거법과 정치관계법의 핵심은 금권-부패정치를 청산한다는 명분 아래 대중동원 선거를 봉쇄하고 미디어-정책 선거를 강제하며, 원외 법정지구당 폐지를 골자로 하는 원내 정책정당화를 추진하는 것에 있다. - 주어진 정책적 합의와 정치개혁 우리는 우선 이번 총선 이후 보다 분명한 형태로 나타날 '정책'(국가행정)과 '정치'간의 역전된 위계관계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20세기적인 행정혁명과는 또 다른) 신자유주의시대에 위기관리적 국가기구 내에서 다루어지는 대부분의 정책은 세계화된 시장의 신호와 그에 대한 행정기구의 반응, 또 그 역의 과정을 통해 결정된다. 그리고 점차적으로 의회와 정치정당은 이 정책 형성 결정과정으로부터 지속적으로 분리되는 과정에 있다. 이미 대부분의 주요 정책들은 의회나 각 정당들의 정치적 판단의 대상이 아니고, 의회의 법안심의와 의결이란 기껏해야 이미 결정된 정책들을 대중적으로 알리고 이해를 구하는 역할(시행시점과 집행순서, 속도, 강약 조절의 방법으로)에 그치고 있다. 신자유주의 정책개혁의 주요 집행자는 의회나 정당이 아니라 행정이고, 행정은 언제나 차악의 선택을 강요하며, 공익의 이름으로 스스로 효율적인 차선과 차악의 선택조정체계 안에 머문다. 반면 치열한 보수정쟁으로 일관했던 야대여소의 16대 국회(여야정당들이 민생법안이라 부르는)조차 주요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관련 안건에 관해서 만큼은 철저하게 통법부(通法府)로서의 역할만을 수행했을 따름이었고, 하물며 17대 국회는 여대야소로(근소한 차이의) 의석비율이 바뀐 처지다. 더욱이 그나마 여야정당과 의회에 주어진 그 같은 역할의 많은 부분은 보다 전문적인 매스미디어 기관과 NGO로 이전되었다. 한편으로는 '작지만 강한 국가'의 사회 정책적 기능을 '국가와 사회의 시너지 효과'를 위해 또 다른 위기관리기구인 NGO에 넘기고, 대표성과 정당성을 상실한 정당정치를 매스미디어 기관(주로 TV와 인터넷)의 역할을 극대함으로써 보완토록 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들 NGO와 지배적 매스미디어 매체야말로 오늘날의 지배정당이다.(뉴스앵커를 그만 두고 여당대표로 자리를 옮긴 정동영이 아니라) 이에 따라 행정부-정당-미디어-NGO로 이어지는 불안정하지만 효과적인 제휴/갈등관계가 신자유주의적 위기관리체제의 기본 골격을 이루게 된다. 더 이상 용인할 수 없는 착취의 한계에 내몰린 노동자 민중의 격렬한 저항은 이 위기관리체제의 내부적인 갈등과 제휴관계로 흡입됨으로써, 주어진 '정책'의 실행을 위한 효율적 행정적 관리와 협소한 집단적 이익의 조정이 '정치'라는 이름으로 진행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여야정당이 총선이후 내놓은 '상생의 정치'란 '싸움 않고 일하는 정치', '대화합의 정치'가 아니라(앞서 살펴본 대로 이들 간의 대립은 더욱 치열해질 수밖에 없다) 결국 주어진 '정책'에 대한 예정된 합의의 충실한 이행을 지칭하는 것일 테고, 이 합의의 대전제는 IMF협약의 형태로 직수입된 '워싱턴 컨센서스'(1990년대 이후 자유주의와 보수주의간의 정책개혁에 대한 세계적 합의로 신자유주의의 다른 이름)와 글로벌 스탠다드인 것이다. - 원내 정책정당화 : 정치의 미디어화, 정당의 운동적 요소 제거, 의사(擬似)정치의 일반화 정책정당화가 정당정치의 탈이념화, 실용주의화, 미디어화를 표현하는 것이라면, 원내정당화는 그나마 존재해온 정당조직의 운동적 요소들을 조직적 법적으로 제거하는 신자유주의 정치개혁의 핵심적인 정책과제이다. 원내정당은 한마디로 국회의원이 중심이 되는 정당체제를 말한다. 법정 지구당은 모두 폐지되고, 당의 이름을 건 일상적인 지역-현장의 원외사업은 모두 불법이다.(광역단위 시도지부 정도가 소규모의 연락사무소정도를 유지한다) 나아가 열우당은 휴가철을 제외하고 연중 국회가 열리는 상시국회제도 도입을 국회개혁안으로 제시했으며, 중앙당을 대폭 축소하거나 폐지하고 당의 모든 주요 기능을 국회 안으로 옮기자는 식의 안도 내놓았다. 그런데 이 정책정당화에서 말하는 정책이란 앞서 서술한 주어진 '정책'이 아니라, 주어진 정책들의 틀 내에서 다루어지는 부분적인 이슈들을 법안으로 손질한 것들을 의미하거나, 주어진 정책들의 실행을 위한 법안과 선전방안들을 말하는 매우 제한적인 범위의 정책이다. 오히려 정책정당에서 말하는 정책의 주요한 측면은 인구의 특정 계급계층을 대표하고 그러한 대표성에 맞는 정당성의 원천인 이념을 폐기하고, 이를 정책(이슈)중심으로(그것도 여론조사결과와 표심에 따라 춤을 추는 주요 이슈) 대체하는 것에 있다. 이에 따라 정당은 당의 이념을 원자화된 유권자들의 표심에 맞춘 정책-이슈파이팅 정당, '모두를 위한 정당(Catch all Party)'으로 또 모든 계급계층, 모든 이념을 포괄하는 '무지개 정당'으로(혹은 담합Cartel정당) 재편된다.(계급이념정당, 대중정당의 폐기) 결국 '정치'는 정치연예인과 전문가-관료출신 정치인들의 원내 활동을 TV, 인터넷을 통해 지켜보거나(비추어지거나), 이들이 수시로 던지는 설문과 물음에 답하고 그 결과 수치를 확인하는 의사(擬似)정치로 대체되어 버리는 것이다. 금권 부패 보스정치의 폐해를 청산한다는 미명아래 '개혁'의 이름으로 도입된 원내 정책정당화란 더욱 축소된 의회의 정책적 영향력과 탈냉전시대에 약화된 보수이념정당의 일반적 위기를 표현하는 의회주의 쇠퇴, 대중 조작적 민주주의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총선결과 분석 3/ 민주노동당의 의회진출의 운동사적 의의와 쟁점 민주노동당의 의회진출은 91,92년 투쟁이후 본격화된 정치세력화(진보정당)운동 10년의 한 순환을 매듭지은 일대 사건이다. 87년 6월과 노동자 대투쟁, 91/92년 패배가 그렇듯이 우리는 아직 2004년의 이 사건의 의미를 온전한 역사로서 파악할 수 없을지 모른다. 그러나 다음의 몇 가지 쟁점들은 이후 평가의 놓칠 수 없는 출발점들이다. - '진보 vs 보수'로의 역사적 진화라는 관념의 오류를 통해 본 민주노동당 의회진출의 운동사적 의의 민주노동당의 의회진출은 분명 지난 민주화 운동과 특히 10여 년간 지속되어온 반신자유주의 운동의 성과 위에 위치해있다. 그러나 그것은 (일부) 민주화운동세력의 신자유주의적 타락과 반신자유주의 운동의 반복되어온 패배의 성과라는 운동사적 특이점을 갖는다. 87년 민주항쟁 이후 이번 총선에 이르는 운동사에는 91,92년 계급투쟁 패배와 신자유주의 개혁의 정치적 실행조건인 문민정부라는 단절점이 존재한다. 논란의 핵심은 이 단절의 의미를 어떻게 받아들이는가에 있다. 민주노동당의 우경화 문제에 관해 상반된 입장을 가지는 민주노동당 당권파와 민주노총의 좌파는 이 단절에 대한 판단에 있어서는 묘한 공감을 형성하고 있다. '민주-반민주' 전선이 '보수 vs 진보'구도, 혹은 '총자본 vs 총노동'으로 진화한 것으로 보는 어떤 초역사적인 진보주의적 관념이 그것이다. 93-95년 문민정부와 민주노총의 출범은 91-92년의 패배-붕괴의 속편에 해당하는 것으로, 이것은 진보주의적 역사관으로는 인정되거나 포착하기 어려운 '운동사적인 역행'이었다. 좌측이 무너진 냉전체제의 반공-발전독재 세력이 문민화를 통해 뒤늦은 신자유주의의 전면도입을 꾀했다면, 냉전의 붕괴를 세계사적 패배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냉전적 좌파(당-좌파)는 피지배 계급대중운동으로부터 이탈하거나 배제되었으며, 대중운동은 국가를 지렛대로 조직대오의 실리적 동원과 방어를 추구하는 코포러티즘적인 체계로 재편되었던 것이다. 더욱이 자본의 금융화와 노동의 불안정화 경향으로 인한 잇따른 패배는 노동자 운동의 대중적 토대를 심각하게 위협했고, 이 과정에서 민주노총의 코포러티즘적인 전략과 체계(진보정당을 통한 정치세력화와 산별노조건설)는 더욱더 공고화되었다. 이러한 운동사 인식에 입각해 볼 때, 2004년에 거두어진 민주노동당의 성과는 87년에 뿌리를 두고 이로부터 진화해온 것이 아니라, 운동사적인 역행에 다름 아니었던 (93-95년의) 역사적 단절의 진화이며, 역전된 운동사의 진보라는 것이 우리의 관점이다. 이 역사적 단절의 의미를 보지 않을 때에만, '민주 vs 반민주'전선의 소멸이 '진보 vs 보수'로 전진했다고 평가할 수 있으며, 전선 해체의 반성과 혁신, 복구의 과제(재편이 아니라)를 '패배의 성과'의 열광에 묻힌 부차적이고 열등한 쟁점으로 치부할 수 있을 것이다. - 민주노동당의 틈새진출 전략의 문제점 이번 선거의 양대 구도를 이룬 탄풍과 거대여당 견제론인 박풍은 여론조사를 유일한 객관적 근거로 하는 바람정치라는 점에서 동일하고, 대중의 민주화와 생존권적 요구를 오로지 이번 선거에서 누가 얼마만큼의 의석을 획득하느냐의 문제로 가두어 놓는다는 점에서 동일한 선거 게임전략에 불과하다. 탄풍과 박풍이 구분될 수 있다면, 그 구분점은 바람의 주역이 노무현이냐 박근혜냐, 즉 정당정치를 갈음하게 된 여론-미디어정치에 사용된 장식물이 더 이상 자신의 과업을 잃고(대통령직선제로 봉쇄된 채) 타락한 민주화의 기억이냐, 아니면 IMF위기로 무너진 박정희식 반공발전주의냐에 있다. 현 시기 제기되는 사회운동적인 쟁점들을 대의하기보다는 이미지적으로 착취하기에 급급한 정당정치가 가지는 유일한 진실은 여론조사 결과에 따른 정략적 해석과 이를 통한 의석경쟁 캠페인이다. 내건 장식물의 색채가 어떤 이념적 정책적 내용을 가지느냐는 장식물로 치장된 이념과 정책의 이미지로만 판단되는 구조인 것이다. 실제로 이번 선거기간 중에 정동영은 과거 개발독재의 발전을 재연하기 위해서는 그 원동력이었던 과반여당을 열우당에게도 허용해줄 것을 호소했고, 동시에 박근혜는 한국정치의 정통성은 발전주의세력과 4·19, 5·18 민주화세력에게 있다면서 보수세력의 혁신의사를 표명했다. 그런데 이러한 지경에 접어든 보수정치를 심판해야하는 위치에 있는 민주노동당은 막상 이번 총선에서 탄핵심판론, 거여견제론에 뒤이은 또 다른 선거게임전략인 야당교체론 혹은 진보야당론을 총선전략으로 삼았다. 이것은 민주노동당의 정치가 대중의 요구를 운동이 아니라 정책공약을 통해 대리(대변)하는 한계를 뛰어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며, 좌파정치의 근본적 곤란에 대한 대안창출이 아니라 지배정치의 위기진행과정에서 만들어진 틈새를 분점하는 원내진출 전략의 틀에 머물렀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 같은 원내진출 전략은 전선복구와 운동재개라는 보다 근본적이고 절박한 운동적 과제들의 현실적인 착수를 계속 지체시키고, 부차적인 쟁점으로 억압한다는 것이다. 한편 이번 선거과정 평가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입장하나는 바로 탄핵무효운동이 오히려 민주노동당 지지의 폭을 넓혔다는 아전인수격인 주장이다. 이는 탄핵무효투쟁에 대한 비판의 대안을 민주노동당 지지로 사고했던 입장에 대한 반비판으로는 유효하다. 또 사실 민주노동당은 '탄핵무효범국민행동'에 공식참여하지 않았다.(NGO중심의 범국민행동은 정치정당이 참여할 수도 없었다) 그러나 열우당을 타격-견인의 대상, 좀더 분명하게 말하자면 (큰 틀에서) 하나의 파트너로 보는 기본적인 태도의 동일함이 유지된다는 의미에서 촛불과 진보야당론이 서로 수렴되는 것은 나름의 논리적 전략적 일관성을 지닌다. 이로써 탄풍 속에서 보수정치 심판, 민생정치라는 소극적이고 모호한 형태의 틈새전략을 택했던 민주노동당이 공식선거전 개시이후, 탄핵무효 촛불에 동원되었던 다수파와 탄핵심판론에 비판적이었던 당권파가 진보야당론을 접점으로 제휴하는 길로 나갔던 것이다. (탄핵에 대한 민주노동당 당권파의 입장은 헌재에서의 조속한 기각요구, 국회개원이후 탄핵취소였다) - 신자유주의 세계화 시대, 진보정당의 원내진출의 쟁점 일반적으로 서구에서 사민주의 정당이 주요한 정치 행위자로 부상하게된 것은 세계대전 등 '국가의 위기'를 매개로 하여 노동자대중을 민족국가로 통합하는데, 매개 역할을 함으로써 가능했다. 이른바 '사회 민족적 국가'의 형성과 '자유주의의 쇠퇴'라는 역사적 조건이 그것인데, 이러한 역사적 조건과 경향에 따라 사민주의 정당의 의회진출은 피지배계급운동의 성과를 정치적인 형태로 표현하는 양상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의 신자유주의 세계화는 이러한 20세기적인 역사적 경향과 조건을 역전시켰고, 사민당-정부는 1980-90년대 들어 (현실사회주의의 붕괴와 구분되는) '대안강령'의 일반적 실패 속에서 해체되거나, 위기관리 국가의 또 다른 관리자로 역할을 재조정하고 있다. 또한 민주노총과 전농 등의 계급대중조직이 주축이 되어 건설된 현재의 민주노동당은 1980년대 남미의 좌파운동들(특히 전선체들)이 군부독재의 종식과 '민주화 이행'(신자유주의 정책개혁의 실행조건으로 타락한) 이후 합법정당으로 이전하는 양상과 유사한 길을 걸어왔다. 1990년대 초반 일부 국가에서 이들 정당들은 부분적인 성공(중앙의회 진출, 지방정부 장악 등)을 거둠으로써 열광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정치정당이 대중운동 또는 사회운동과의 결합이 곤란해지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고 있다. 또한 정당이 노동자운동과의 역할분담 관계 속에서 인적-조직적 연계망을 형성함으로써, 신자유주의 시대에 쇠퇴하는 노동자운동의 곤란과 모순을 그대로 반영하는 방식으로 성장하는 악순환 관계를 이루는 현실에 직면했다. 이때 이제 막 의회진출이라는 부분적인 성공을 이룬 민주노동당이 정당과 사회운동의 관계를 과연 이들 서구 사민주의 정당이나 남미의 진보정당들과 달리 어떻게 전진적으로 사고하고 실천할 수 있는가야말로 이후 민주노동당의 성패를 가름할 핵심쟁점이다. - 신자유주의적 정치위기와 정치개혁의 흐름 속에서 원내진출에 성공한 민주노동당의 몇 가지 현실적인 딜레마 원외 운동조직으로부터 성장하여 독자적인 힘으로 원내 진출에 성공한 외생 정당의 사례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적으로 그리 흔치않은 경우이다.(독일녹색당과 브라질PT정도다) 그러나 이들 외생 정당들은 거의 비슷한 패턴과 과정을 통해 원외 운동조직으로서 고수해왔던 '근본적 반대파로서의 원칙'을 점진적이긴 하지만 원천적으로 폐기해왔다. 이러한 결과는 단순한 옷 입기와 말투 같은 라이프스타일 상의 사소한 문제로부터 원외 대중운동과의 관계, 근본적인 운동철학과 양식, 이행전략과 이념에 이르기까지 그간 체계화되지 못하고, 구체적인 쟁점으로 사고되지 못했던 운동의 근본 문제들이 다양한 형태로 재생산되고 강제되는 부르주아적 규율과 사상에 부지불식간에 침식당해온 결과다. (현재 이 규율지도의 가장 엄하고 부지런한 교사는 장기화된 구조적 경제위기와 전쟁, 그리고 방송기자들이다.) 이러한 결과는 지배체제의 통제범위 외곽에서 성장해온 반체제적인 사회운동세력이 사회운동과의 전진적인 관계를 확보하지 못한 채 체제내부, 그것도 그 핵심부위에 진입했을 때 피치 못하게 겪을 수밖에 없는 매우 당연한 결과였으며, 비록 적은 규모이나마 최초의 성공을 이룬 민주노동당으로서도 피해갈 수 없는 시험코스일 것이다. 1> 우선 민주노동당은 거대 여야정당간의 짧은 밀월이 깨지고 이들 간의 정쟁이 본격화될 경우, 원내에서 독자적인 의제설정능력이 없는 소수정당의 고역을 겪을 수 있다. 짜여진 의제 안에서 최선의 답안을 제출하는 것으로는 진정한 진보를 달성할 수 없다. 그것은 보수와 한 쌍을 이루는 체제적 위험요소들을 거세한 '관리된 변화'이다. 그런 의미에서 민주노동당이 짜여진 원내 대립구도 안에서 진보적인 정책(공약) 개발에 주력하는 것은 반체제적인 의제를 독자적으로 세팅하여 제기할 수 있는 힘의 원천을 스스로 제거하는 것에 다름 아닐 것이다. 예컨대 탄핵찬반이나 경제성장(분배)론에 종속된 민생-경제법안과 (예산분배정책심의) 같은 의제로 짜여진 여야 간의 대립구조 속에서 민주노동당은 NGO를 버퍼로 하는 보수개혁 여당과의 사안별 공조를 (안팎으로) 강요당할 위험이 크다. 2> 그동안 민주노동당의 조직 골간을 이루고 있던 지역 지구당이 폐지된 상황에서, 민주노동당의 원내정책정당화가 현재와 같은 속도로 아무런 대안 없이 진행될 경우, 민주노동당은 운동정당적인 성격을 잃고 중앙당 혹은 의원단 차원의 민원창구로 전락할 위험을 안고 있다. 이러한 위험은 당 발전 전략상의 노선적 대립을 넘어서는 운동성 자체의 존폐위기이며, 당의 민원해결능력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는 주객관적 요인들을 감안해 보았을 때도 운동성을 제거하지 않고는 결코 성공할 수 없는 막다른 길임을 직시해야한다. 그동안 당의 골간이었던 지역당 조직들이 하루아침에 붕괴되고, 당 외곽의 대중조직들과의 코포라티즘적인 상층연대만이 강화되는 퇴행적인 사태를 막아야 한다. 지역 지구당조직들이 다양한 사회운동조직으로 갱생할 수 있는 실질적인 여건이 마련되어야하며, 이러한 재편을 지속가능한 운동으로 뒷받침할 수 있는 근본적인 노선과 이념의 개조가 뒤따라야 할 것이다. 3> 민주노동당, NGO, 개혁주의적 집권여당과의 사안별 '정치적 연대'와 노-정(勞-政) 및 노사정의 '사회적 합의'의 역할이 증대될 경우, 전국민중연대가 상층연대기구라는 한계 속에서나마 고수해왔던 공동투쟁연대 대표체로서의 독자적 지위와 통합력은 상당한 정도로 손상될 위험이 있다. 4/ 이후 사회운동의 전망과 과제 수립을 위하여 2004년 총선으로 변화한 사회운동의 조건은 무엇인가? 한국사회의 보수적인 정치지형이 전반적으로 좌로 이동하여 중도화되는 현실은 어떻게 이해되어야 하는가? 또 역으로 변혁지향적인 사회운동이 우경화되어 중도화되는 현실은 어떻게 극복되어야 할 것인가? 이 글에서 앞서 살펴본 총선결과에 관한 몇 가지 쟁점들은 주로 의회 내 의석분배 결과에 관련된 것이었고, 그것은 이후 사회운동의 변화된 조건을 분석하기에는 매우 불충분하고 협소한 판단의 근거들이다. 더욱이 이러한 변화는 신자유주의적인 '위기관리'와 '관리된 변화'를 진보로 보는 착시효과와 직접적으로 맞닿아 있다. 자신의 과업을 잃어버린 채 운동하지 않는 정지된 과거는 단지 하나의 '기억에 대한 신앙심'일뿐이다. 즉 역사의 전진을 이루어갈 피어린 전투의 발판은 어느새 전투의 기억에 대한 편협한 신앙과 틀에 박힌 보수주의로 썩어버리기 마련이다. 이로써 신자유주의 개혁의 정치적 실행조건으로 등장한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의 문민정부들은 각기 자신의 이해관계와 처지에 맞는 방식으로 87년의 정지된 스냅사진을 팔아, 민중의 민주주의를 향한 전투의 기억을 편협한 신자유주의적 신앙과 틀에 박힌 보수주의로 전락시켰다. 이번 총선결과, 외형적인 양당체제의 등장으로 지배계급 내 정쟁은 일시적으로 봉합됐으나 그 내적 불안정성은 증대되었고, 보수개혁세력의 의회권력이 교체되고 진보정당의 원내진출이 성사됨으로써 진보적인 사회운동의 일정한 여건이 확보되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반파쇼민주화 전선 해체 이후 지체되어온 반신자유주의 전선복구와 혁신의 과제가 '관리된 변화'와 '사회적 합의'의 틀로 봉쇄될 위험 또한 존재한다. 지난해 말 재신임-열사투쟁국면 이후 정세는 대선 자금 비리-정치개혁, 노동조합탄압-민중생존권, 이라크 추가파병과 같은 핵심사안들이 각각 (대선 자금 수사와 재신임, 탄핵을 둘러싼) 지배계급 내부갈등과 노동자 농민의 생존권/반미반전투쟁으로 이루어진 피지배계급투쟁의 양편으로 분리되어 전개되었다. 더 내줄 것이라곤 목숨밖에 남지 않은 피지배계급의 절망적인 생존권적 저항과 통치 정당성의 한계에 다 달은 지배계급 내 정쟁이 대통령 탄핵이라는 극단적인 형태로 동시에 진행되었던 정세는 일종의 이행기적 상황을 떠올릴 법한 비상시국이 분명했다. IMF위기 이후 한국사회는 바야흐로 피지배계급과 지배계급 양자가 공히 더 이상 이전과 같은 형태로는 통치할 수 없고,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 지배받으며 살아갈 수 없는 일종의 준이행기적 상황에 돌입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당면정세의 위기적인 소시기 국면은 4·15 총선을 통한 지배계급 내 파워시프트(권력변동)와 재편으로 외형적으로나마 재안정화되어 점차 닫혀 가고 있으며, 체제이행(위기의 혁명적 전화)을 예비하게 될 새로운 주객관적 조건의 창출을 억압하고 있다. 지배체제의 위기심화가 피지배계급의 주체적 태세 없이 계급투쟁의 폭과 수위, 그 역동적 발전방향의 진폭을 크게 확장시켰다는 사실만으로는 이후 계급투쟁의 양상이 매우 격렬해질 것이라는 점을 확인할 수 있을 뿐, 그 외에 어떤 것도 확정된 것은 없었던 것이다. 또한 광범위한 대중의 불만과 기존 지배질서의 내적 붕괴가 배제된 자들의 절망과 포섭된 자들의 불안감속에서 대중 간 연대의 파괴와 무너진 중산층적인 생활양식에 대한 허구적 동경으로 귀결되고 만다면, 위기의 심화는 오히려 새로운 이행조건의 등장을 억압하는 주역이 되고 말 것이었다. 말 그대로 "무엇도 가능하지만 어느 것도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이때 2004 총선에서 누가 어떻게 안정적 다수파를 형성하여 혼란에 빠진 위기관리시스템을 수습해낼 것인가, 아니면 어떻게든 현재의 혼란과 사회적 갈등을 자본주의 지배체제의 위기로 발전시켜낼 것인가의 갈림이야말로 본모습을 드러나지 못한 채 묻혀버린 당면 정세의 계급대립핵심지점이었다. 그러나 당시 정세를 구성했던 개개의 핵심사안들은 각각의 참여주체와 쟁점들로 분할되어있었고, 지배계급 내 권력분쟁이 정치개혁의 이름으로 피지배계급투쟁의 의제들을 압도했다. 이 과정에서 노동자 민중의 사활적인 생존권적 저항은 지배계급의 정치적 위기로 인한 균열을 통로로 삼아 독자적인 역사적 행위로 분출되기보다는 (주어진 정치 일정 상에 존재하는) 개개의 핵심현안들에 대한 격렬하지만 방어적인 요구행위의 형태로 계급대립지점의 갈림길에서 동요하다 소멸되었고, 조기 레임덕에 빠졌던 노무현 정권은 재신임 선언과 전면적인 대선 자금 비리 수사를 거쳐, 일정한 정세적인 주도권을 복구해내는데 성공했다. 더욱이 지난해 말의 재신임-열사투쟁은 이후 별다른 평가와 계승 없이 탄핵-촛불시위로 휩쓸리고, 다시 야당교체론으로 표현된 총선국면으로 빠르게 순치되어 갔다. 그 과정에서 (자본주의 위기비판의 관점에 입각한) 노동자 민중생존권과 반전-반신자유주의적인 운동의 의제들은 '정치'에 의해 억압되거나, 자기과제를 '정치'에 위탁하여 스스로 비정치적인 쟁점으로 제한된 가운데 자기 검열되고, 분열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사태를 냉정히 직시해본다면, 이제까지의 반신자유주의 투쟁은 지배체제의 위기로 인한 작금의 생존권적 민주주의적 위기를 정상화하고 수습해야할 '비정상국면'으로 규정하고 있는 한에서, (그 외적 격렬함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지배계급과의 대척점으로부터 멀찌감치 물러선 양상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정권과 자본은 시시때때로 분출되는 노동자 민중의 생존권 투쟁을 반미반전투쟁과 집요하게 분리시키고, 반신자유주의적 생존권투쟁 속에 녹아있는 투쟁의 보편적 성격들을 폭력/비폭력, 합법/비합법, 정치/경제의 지배이데올로기를 동원하여 교묘하게 분할 타격하는 성공적인 방식으로 관리할 수 있었던 것이다. 나아가 이번 촛불-총선 국면에서 여실하게 드러난 바와 같이 정당성과 대표성을 상실한 지배 정당정치는 사회운동적인 쟁점들, 피착취계급 대중운동의 의제들을 정치적으로 배제하고 법적 물리적으로 억압할 뿐만 아니라, 사회운동의 정당성을 자신들의 정치캠페인의 도구로 착취하기 시작했다.(정치수사적인 좌익화) 결국 또다시 관건은 '닫힌 정세'를 열어낼 대중의 정치적 통합과 행동의 전망일 것이며, '열린 정세'를 결정짓게 될 대중운동의 발본적 혁신과 아래로부터의 사회운동의 대중적 기반 형성, 그리고 이를 통한 반신자유주의 전선복구는 더욱 현실적이고 사활적인 과제가 될 것이다. 사회운동의 이념을 전쟁과 경제위기로 점철된 이행의 시대이념으로 개조해야 할 것이며, 코포러티즘적인 당과 노조를 사회운동기관으로 개조해야한다. 이로써 노동자 민중의 새로운 연합과 자기통치로 가는 교두보들이 확보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과제 수행의 현실적인 착수는 총선 이후 본격화될 것으로 보이는 '사회적 합의'의 외곽에서 ('사회적 합의'의 일각이면서, 동시에 운동의 대중적 표상인) 민주노총과 민주노동당을 관통하는 별도의 대중적인 운동의 흐름을 형성해내는 일로부터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여기서 민주노총과 민주노동당을 관통한다는 것의 의미는 이 흐름이 기존 노조-정당의 다수파(지도부)와 대립하는 소수파연합이나 분리주의가 아니면서, 기존 운동질서를 관통하여 그 권위와 체계를 상대화시킬 수 있는 대안적인 운동형태의 맹아가 되어야한다는 의미이다. 지난 10여 년간 민중운동을 지배해온 코포라티즘적인 산별-진보정당 노선은 점차로 증대한 노동자 대중운동과 노동자운동 조직사이의 괴리, 노동자운동 조직과 진보정당 사이의 괴리를 해결하기보다는 이에 부합하는 대응방식이었다.(실리적 동원과 실용적 역할분담, 나아가 의사擬似동원 구조로 진화중이다) 극한의 생존 위기 속에서 수동화된 대중은 날로 우경화되는 노동조합의 알리바이가 되었고, 다시 우경화된 노조는 진보정당의 우경화의 알리바이다. 그리고 점차 이러한 연쇄의 탈운동적인 결과가 대중적인 비판의 대상이 됨으로써 대중, 운동, 조직, 정당 사이의 불신과 괴리는 더욱 더 깊어지는 끊기지 않는 악순환의 구조를 만들어내었다. 그러므로 이러한 사태 해결의 방식은 역전된 운동사적인 진행방향을 아래로부터 역주행하는 역전전략이어야 한다. 우선은 지역, 업종, 당, 노조, 사회단체를 막론한 반전-반신자유주의 운동, 사상에 입각한 다양한 지역적 소모임 들의 구축이 시도되어야 한다. 이러한 운동-조직 형태들은 잠정적으로는 '완성된 사상적 통일을 전제하지 않는 공동행동', 완성된 형태의 행동통일 없는 사상적 토론과 공유가 가능한 '자발적인 사상학습 소모임', 혹은 그들 간의 자발적인 연계망의 형태일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 이러한 혁신의 흐름이 복구되지 않는 대중운동의 침체와 패배를 (다른 정파의) 지도부의 책임으로 돌리면서 대중의 정치/대의제 자체에 대한 불신에 영합하면서, 당과 노조의 소수파연합이나 분리주의로 귀결될 경우, 이는 노동자 운동의 대중적 표상을 변화시키기보다는 그것과 부당 대립(고립)하거나 내부의 즉자적인 정파적 갈등을 넘어서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그동안 (지배정치는 물론이거니와) 기존의 운동조직 내에서 지체되어온 페미니즘적 문제와 환경 (지역 간 불평등과 결합된), 문화적 갈등 등의 첨예한 사회적 쟁점들이 (기존 대중조직과 당내에서) 분리주의적인 형태로 표출될 경우, 사태는 (전진적인 혁신의 방향과는 동떨어진) 자기 파괴적인 '르 상티망의 정치'(약자의 강자에 대한 원한의 정치)의 양상으로 진행될 위험이 크다. 이러한 양상의 진행은 착취와 차별의 조건과 원인에 대한 투쟁을 착취/차별의 효과 및 결과에 대한 부인과 거부, 이탈로 머물게 하여 더 이상의 전진을 봉쇄하는 자멸의 길이다. 소수자 운동의 관점에서 다수자 운동의 관점으로, 문제 해결자-대변자의 관점에서 억압된 다수대중의 이해와 요구의 목소리를 스스로의 힘으로 발언하고 행동하여 사태를 변화시킬 수 있는 운동으로 나가야하며, '관리된 변화'의 틀을 개방시켜내려는 노력, 즉 '봉기의 정치'적인 관점 전환이 필요하다. PSSP
그녀들의 투쟁이 남긴 것 작년 9월 1일 서울대병원이 간병인 무료소개소를 일방적으로 폐지한 이후 시작된 서울대 간병인 노동자들의 9개월의 긴 투쟁이 4월 23일 병원과 합의해 일단락되었다. 그녀들이 이제 일터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지만, 아직도 해결해야 할 과제는 산적해있다. 나아진 것 없는 간병인들의 노동조건과 간병인들의 노동자성 인정 문제가 있고, 환자 간병에 대한 병원과 국가의 책임성 문제, 해결되지 않은 유료소개소 문제점들이 그러한 과제들이다. 서울대병원이 무료소개소를 폐지한 이유 서울대병원은 88년 4월부터 '서울대학교 간병인 무료소개소'를 설립하고 운영해왔다. 서울대병원에서 간병인의 역사는 30년이 넘지만, 당시 병원장이 부친 때문에 간병인을 채용해보고 그 문제점을 느끼면서 이러한 무료소개소 운영이 추진되었다. 서울대병원에서 일할 간병인도 공개모집하였는데, 공개모집 조건 또한 다른 유료소개소보다 까다로웠다. 중졸이상의 학력, 신원보증서, 이력서, 적십자회 교육수료증, 재정보증서, 사진, 건강검진 증명서 등 15여 가지의 서류를 갖추어야 채용이 되었다. 병원측에서는 무료소개소를 운영할 수 있는 사무실과 전화 그리고 운영관리를 할 간호사 1명을 계약직으로 두었다. 간병인 교육은 간호부 담당으로 년 2회 기본교육과 매월 1회 추가교육을 통해, 병원구조와 환자 간병시 필요한 교육, 인성교육, 친절교육을 포함하였다. 무료소개소에서는 개개 간병인을 파악할 수 있었고, 서울대병원에 적합한 교육이 정기적으로 이루어져 환자가 간병인을 요청할 때 환자 상태에 적절한 간병인을 연결하여 줄 수 있었다. 간병료도 다른 유료소개소(5만원-7만원)보다 낮은 4만 5천원이었는데, 이는 중간착취료가 없는 무료소개소이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이렇듯 무료소개소 운영이 간병인과 환자 모두에게 좋은 역할을 했음에도 병원이 무료소개소를 일방적으로 폐지한 이유는 무엇일까? 첫째는 병원이 간병업무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겠다는 것이다. 현재 우리나라 병원에 환자로 입원을 하게 되는 경우, 단기 입원을 제외하고 대부분 환자들 대부분이 간병인을 필요로 한다. 더욱이 우리나라 의료기관처럼 대부분 법정 간호인력도 채우지 못하는 상황에서 간호인력이 간병까지 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즉, 전인간호가 이루어져야 할 병원에서 환자들에 대한 수발 서비스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간병은 환자와 환자 가족의 책임으로 떠넘겨져 왔고, 이에 소요되는 비용만 대략 연간 2천억 원 이상으로 추산되고 있다. 현재 서울대병원은 하루에 200명의 간병인이 필요하다. 서울대병원 운영에 있어서도 간병인은 필수적인 것이다. 또한 서울대병원은 국립병원으로 국민의 세금에서 매년 수 백억 원의 지원을 받고 있다. 그럼에도 년 2400만원으로 운영되었던 무료소개소 마저 일방적으로 폐지한 것은 간병인의 교육과 관리를 맡아왔던 병원의 최소한의 의무조차 방기하겠다는 것이다. 현재 서울대병원 간병인 지부 조합원들이 일터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지만 이러한 상황은 마찬가지다. 병원은 건전한 경쟁체제를 내세우면서, 무료소개소 2개와 유료소개소 1개를 동시에 선정하였다. 간병인 조합원들은 노조활동 인정과 노조의 자체 운영을 원칙으로 자활에서 운영하는 '약손엄마'란 무료소개소를 통해 현장으로 복귀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같은 무료소개소라고 해도 서울대병원이 운영하는 무료소개소는 결국 사라진 셈이다. 둘째는 서울대병원 무료소개소 간병인들이 노동조합에 가입해 있기 때문이다. 서울대병원 무료소개소 간병인들은 2001년 말부터 보건의료노조에 가입해왔다. 병원은 그 후 200명이던 간병인들을 계속 줄이고 사설유료업체로 대체해서, 무료소개소 폐지 당시에는 50명으로 줄어있었다. 보건의료노조 서울대병원지부는 6월 말부터 보건의료노조 서울지역지부 조합원인 간병인들의 노동조건 개선을 위한 실무협의를 해오고 있었다. 요구는 최저임금에도 못 미치는 임금에 대한 인상(4만 5?원에서 5만원으로 5천원 인상)과 휴게실 문제를 제의한 것이었다. 그러던 중 병원장은 사전논의도 없이 일방적으로 9월 1일자로 무료소개소를 폐지하고, 4일자 우체국 소인으로 간병인들에게 개별적으로 우편통보를 하였다. 서울대병원은 대형병원의 특성상 장기입원환자와 중환자가 많기 때문에 하루 200명의 간병인들이 필요할 정도로 간병인의 수요가 계속적으로 있었다. 그래서 서울대병원 간병인들은 길게는 25년 짧게는 10년 이상 서울대병원에서 일해왔다. 따라서 무료소개소 폐지는 서울대병원 간병인 노동자들에겐 해고통지서나 다름 없었던 것이다. 간병인들이 자신을 노동자로 인식하고, 노동자의 권리를 찾기 위해 노조에 가입하는 것을 서울대병원에선 좌시하지 않았던 것이다. 서울대병원 간병인들은 투쟁 중에 서울대 간병인 지부를 결성하였다. 그러나 여전히 서울대병원은 간병인 노조를 노사협의 대상으로 보고 있지 않다. 4월 21일 서울대병원 은 무료소개소가 간병인 노조 중심으로 운영될 것을 알고 무료소개소 선정을 뒤집기도 했다. 또한 서울대병원은 비정규직화의 선두에 서 있다. 서울대병원은 보수, 경비, 청소, 소아급식까지 이미 용역에 넘겼고, 지금도 서울대병원에서 용역화와 비정규직화가 확대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병원 정책에서 직원의 범위에 있지 않은 간병인들까지 노동조합에 가입하는 것은 눈에 가시였던 것이다. 간병인의 노동조건은 어떠한가 - 고용계약관계에 있는 노동자이면서도 노동법의 사각지대에 있는 여성노동자 최저 임금에도 못미치는 저임금 간병인들은 휴식시간이나 식사시간도 제대로 보장받지 못한 채 24시간을 근무하고 일당 5만원(2003년 8월 1일 이전까지는 4만 5천 원)을 받는다. 이는 일일 8시간으로 환산하면 16,666원으로 최저임금 20,080에도 못 미치며 이를 226시간으로 환산하면 월 50만원에도 못미치는 저임금을 받고 있다. 최악의 장시간 노동시간 간병인 노동자들은 대부분 일요일 오후 2시에 들어와 근무를 시작하면 토요일 오후 2시에 근무를 마치게 되며 주6일을 24시간씩 결국 144시간을 근무한다. 이는 보통 노동자들의 3배가 넘는 시간이다. 대부분의 간병인들은 휴식시간이 따로 없으며 설령 보호자들이 와서 잠시 쉬고 오라고 해도 쉴 공간마저 없다. 밥 먹는 시간외에 환자 곁을 떠날 수가 없다. 6일 근무 후 1일 쉬지만 그마저도 집에 돌아가면 그간에 밀린 6일간의 가사일과 앞으로의 6일 동안의 필요한 일을 준비하고 나와야 하는 여성노동자들이다. 직업병에 시달려도 인정 못 받는 노동자 간병인들은 한 환자가 끝나면 다른 환자를 돌보며 계속 병원 생활을 해 병원의 안 좋은 환경(공기)에 계속 노출되어 있고 아픈 사람을 휴일도 없이 상대해야 함으로 정신적, 육체적으로 몇 배나 힘든 노동을 하고 있다. 대부분의 간병인들이 장기적인 수면장애로 안구건조증을 갖고 있으며, 과체중환자나 무의식환자를 간병하면서 체위변경을 규칙적으로 해줄 때 대부분 혼자 하기 때문에 등이나 허리 근육통이 심하고 심지어는 디스크와 자궁하수증에 걸리며, 장기적인 병원 생활로 햇볕을 보지 못해 칼슘부족으로 관절이 붓고, 병실 실내 건조로 알레르기 비염과 만성인후염을 대부분 앓고 있다. 심지어 환자가 간염, 결핵 등 감염성 질환이어도 간병인에게 알려주지 않는 경우가 많아 감염에 쉽게 노출되어 있다. 이 모든 질병들이 간병일로 인한 직업병이 분명하지만 산재처리를 받는다는 건 상상도 못할 일이다. 서울대병원 간병인 노조의 투쟁은 무료소개소 폐지 철회를 목표로 시작되었지만, 간병인 노동자의 현실을 사회적으로 알려내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간병인들이 대부분 여성들이라는 것을 감안할 때, 이 시대 여성노동자들의 현실과 여성노동자 조직화 방안에 대한 고민을 던져주는 또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 간병인들은 분명히 노동자이면서도 근로기준법이나 최저임금법의 적용을 받지 못하는 여성 노동자들이다. 비공식 노동자는 고용계약관계에 있지 않거나 사업장에 고용되어 있지 않다는 이유로 근로기준법이나 최저임금법 등이 적용되지 않는 법외노동자이다. 이러한 비공식노동자들은 공식적인 통계에 반영되지 않아 전체적인 규모를 알기 어렵지만 최소한 500만여 명이 될 것으로 추정된다. 서울여성노조 정양희 상담센터장은 "근로자파견법에 의하면 파견허용업무는 사무보조원, 전화교환원, 여행안내원, 조리사, 보모, 간병인, 개인보호 근로자, 텔레마케터, 건물 청소원 등 다수가 여성집중직종의 업무이다. 여성노동의 대부분이 노동의 중간 착취를 합법화시킨 파견법의 대상이 되었다는 점은 정부의 노동정책과 법제정이 여성노동자들에게 매우 불리하게 이루어지고 있음을 드러낸다."며 정부의 노동정책을 비판했다. 향후 간병인의 노동자성 인정과 간병인에 대한 근로기준법, 최저임금제 적용을 위한 투쟁은 이러한 비공식 여성노동자와 함께 하는 투쟁이어야 할 것이다. 남겨진 과제 9개월 동안의 간병인 노동자들의 끈질긴 투쟁은 노조가 자율적으로 운영하는 무료소개소를 통한 현장 복귀로 한숨 덜어낸 셈이다. 대부분 50-60대의 여성 가장이었던 간병인 조합원들의 흔들리지 않는 투쟁이 없었다면, 이마저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나 다시 일하게 된 일터의 노동조건이 변한 것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간병인 노조와 함께 했던 이들의 어깨는 여전히 무겁다. '서울대병원 간병인 문제해결 및 공공병원으로서 제자리 찾기를 위한 공동대책위원회'(이하 공대위)는 이번 서울대병원 간병인 문제로 드러난 유료소개소의 문제점을 알려내기 위해 유료소개소 실태조사를 진행중이다. 전국에 20만 명으로 추정되는 간병인 문제가 근본적으로 해결되기 위해선 중간착취를 일삼고 불법공급을 자행하고 있는 유료소개소의 문제점을 알려내고, 장기적으로는 간병인들이 병원의 책임하에 직접 고용되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투쟁을 위해서는 현재 서울대 간병인 노조와 공대위의 힘만으로는 역부족이다. 보건의료노조가 간병인 조직화에 앞장서고, 전국의 간병인 노동자들이 스스로 투쟁의 주체가 되는 과정이 필요하다. 하지만 그전에 우리가 넘어야 할 우리 내부의 과제 또한 있다. 앞서 서술했듯이 서울대 간병인 노동자들은 2001년 말부터 보건의료노조 서울본부에 직가입해 있었다. 투쟁을 진행하면서 간병인들은 간병인 지부 건설의 필요성을 느끼고, 서울대 간병인 지부를 건설했다. 그러나 지부 승인 과정이 순탄하였던 것만은 아니다. 논란은 간병인이 보건의료노조 조직대상이냐는 것이었다. 이 논란은 결국 민주노총 법률위의 자문을 얻어 보건의료노조 본조가 직접 승인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그러나 이것이 대형병원 정규직 노조의 이기주의를 극복하고 노동자의 단결과 연대를 전진시키는 것으로 정리된 것은 아니었다. 지난 3월 25일 서울대병원 간병인 지부장이 참석하지 않은 서울본부 집행위에서 '서울본부 차원에서 서울대병원 간병인지부와 관련한 논의를 더 이상 지속하는 것이 어렵다고 판단되므로 투쟁지원과 관련한 집행위 논의를 중단한다'고 결정하고 각 지부에 공문을 발송했다. 투쟁 8개월을 넘기며 힘들게 싸우고 있는 장기 투쟁사업장에 연대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이었다. 간병인 노조가 싸워온 지난 9개월 동안 이용석 열사를 비롯한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비정규직 차별 철폐를 외치며 산화해갔다. 이러한 비정규직 문제에 대응하는 노동자운동은 노사단체협상에 비정규직 차별 개선을 요구하는 것에 머물러서는 안될 것이다. 60%가 비정규직 노동자라는 현실은 비정규직 문제의 심각성을 드러내는 것만이 아닌 이러한 불안정한 노동조건이 노동자 일반의 조건이 되었음을 의미한다. 하기에 노동자운동의 조직화는 이렇게 일반화된 불안정한 노동조건에 맞서는 투쟁이라는 기본 관점에서 출발해야 할 것이다. 정말 춥고 길었던 투쟁으로 일터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지만, 조합원에 대한 서울대병원의 노동탄압이 계속될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그녀들의 투쟁이 힘을 얻기 위해선 아직도 넘어야 할 산들이 많기에 여전히 우리들의 어깨가 무거워야 하는 게 아닌가 생각한다. PSSP
지난 4월19일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420장애인차별철폐공동기획단'의 노숙투쟁 해단식이 진행되었다. '420장애인차별철폐의 날' 결의대회 전날 진행된 해단식은, 계속되는 경찰의 협박과 침탈에도 흔들림 없이 지켜낸 25일간의 노숙투쟁을 마무리하는 시간이었다. 25일간의 노숙투쟁 노숙투쟁을 시작한 3월26일은 최옥란 열사가 세상을 떠난 지 2주기가 되는 날이었다. 그 날은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장애인 차별철폐'를 선언하며 2년 동안 열지 못한 노제를 추모 문화제와 함께 진행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경찰은 노제는커녕 추모 문화제 조차 불법이라며 막무가내로 막다가 저녁 무렵에는 300여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문화제에 참가하고 있던 사람들 82명을 폭력적으로 연행해갔다. 하지만 그런 탄압에도 불구하고, 기획단에 함께 하는 모든 사람들은 돌아가며 함께 농성장을 사수하였고, 노동권/교육권/이동권/자립생활/장애여성의 권리등 장애인의 삶 모든 영역에 걸친 요구안들을 중심으로 매일 곳곳에서 장애인의 사회적 차별을 철폐하기 위한 투쟁을 만들어나갔다. 재개관한 세종문화회관 앞에서는 농성 내내 묘한(?) 구도가 형성되었다. 계단을 사이에 두고 세종문화회관에서는 다양한 프로그램들로 연일 많은 사람들이 오고가고, 계단아래 보도에서는 노숙농성이 진행되는 동안 매일 저녁 어김없이 차별철폐를 위한 문화제가 진행되었다. 매일 저녁 진행된 "차별철폐를 위한 문화제"는 무대와 관객이 따로 없이 모두의 자발적인 의지와 열기로 가득해, 장애운동의 문화와 양식을 구축하는데 있어서 의미 있는 시도가 되었다. 고속철도 개통과 장애인 좌석 2개 이동할 수 없다면 사회적 관계와 모든 활동영역에서 배제되며, 관계의 단절을 경험할 수밖에 없다. 집에 조용히 처박혀 있을 수밖에 없었던 현실을 바꾸고 더 많은 사람들과 관계 맺고 소통하며, 운동의 힘들을 만들어내기 위해 이동권과 접근권은 최소한의 조건이라고 할 수 있다 2001년부터 계속되어온 장애인 이동권 투쟁을 통해서 (굉장히 제한적인 수준이지만) 저상버스가 시범 운영되기 시작하고, 지하철역에 엘리베이터 설치가 이루어지는 등의 성과를 낳았다. 하지만, 지난 4월1일 고속철도탑승을 거부당한 일은 여전히 차별의 벽이 굳건하게 버티고 서 있음을 확인시켜주었다. 고속철도가 개통되면서 하루 반나절 생활권이라는 모토가 현실화된다고 하지만, 10여년이 넘는 준비기간과 수십조원의 예산을 들여 준비했다는 고속철도 9백35석 중 휠체어용 좌석이 특실에 마련된 두개밖에 없다. 또한 장애인용 화장실 역시 제일 앞쪽에 위치한 특실 한 칸에만 설치되어 있으며 그나마 형식적으로 만들어져서 전동휠체어가 들어가면 문도 닫을 수 없고 몸을 돌릴 수조차 없다. 이 사회는 장애인들에게 결코 '반나절 생활권'이 될 수 없다. 미리 예약해 놓은 승차권을 갖고 고속철도를 타려는 행위조차 물리력을 동원해 거부하고 이에 항의하는 장애인들에게 "자꾸 이렇게 집단으로 몰려오면 그나마 장애인들에게 적용되었던 50% 할인마저도 없애 버리겠다"고 엄포를 놓는 고속철도 관계자의 모습에서 여전히 기본적인 이동과 접근의 권리조차 보장받을 수 없는 현실을 다시 한번 각인했다. 올해 420 장애인차별철폐투쟁의 의미 올해는 탄핵국면과 총선이라는 정세 속에서 상대적으로 투쟁의 흐름들이 묻혀버릴 수도 있는 조건들이 존재했지만, 서울지역에 국한되지 않고 충북, 대구, 경남, 부산, 광주 등 5개 지역에서도 장애인 차별철폐 투쟁을 함께 하며 전국적으로 더욱 조직적인 투쟁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각 부문별 따로 전개해왔던 투쟁들을 공동의 요구로 모아내기 위한 연대의 틀을 더욱 강화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무엇보다 장애인 당사자에 국한되지 않고 이주노동자,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연대하며, 장애인 차별철폐투쟁을 차별 받는 민중들의 분노를 함께 담아낼 수 있는 투쟁으로 만들어가기 위한 노력을 보여주었다. 4월20일, 올해로 3년째를 맞는 "420장애인차별철폐의 날" 투쟁이 진행되는 순간에도 어김없이 올림픽공원 한켠에서는 정부가 주최하는 장애인의 날 행사가 열렸다. 그동안 정부는 1년 365일 장애인을 야만적으로 차별하는 사회구조적 모순은 그대로 존속시키면서 1년에 단 하루, 장애인들을 체육관에 동원하여 떡을 주고 공연을 보여주는 전시적인 행사에 몇 천 만원의 돈을 쏟아 붓는 작태를 반복해왔다. 그 날 행사에서도 올해의 '장애극복상'을 시상하였다. 장애를 개인적 책임에 기반한 '극복'의 대상으로 간주하며, 사회적 관계 속에서 발생하는 차별의 문제임을 은폐시키고자 했다. 한편 장애인콜택시 운전자들의 노동자성을 부정하고 운전봉사자의 신분으로 규정하며 장애인 이용객들을 봉사의 대상자로서 전락시키려는 서울시에서는, 20일 하루동안만 장애인콜택시를 무료로 이용하게 하였다. 420 장애인 차별철폐투쟁은 그렇게 마무리되었지만, 1년의 단 하루를 위한 '장애인의 날'이 아닌 365일 단 하루라도 차별 받지 않는 날을 위해 장애인 차별철폐투쟁은 계속 될 것이다. PSSP
지난 4월 15일 제60차 유엔인권위원회는 북인권결의안을 채택했다. 모든 사람은 누구나 자유롭고 평등해야 하며, 지구상의 어느 사회든 인권 신장을 위한 공동의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 것은 마땅한 일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와 동시에 인권을 정치적으로 악용하고 특정 사회를 옭죄는 수단으로 삼는 시도에 대해서도 경계해야 한다. 그렇다면, 이번 북인권결의는 어디에 위치해 있는가. 북에 존재하는 인권 문제의 실질적인 개선을 도울 수 있을 것인가? 아니면, 북을 압박하고 국제사회로부터 고립시키는 또 한 가지 수단으로 기능할 것인가? 미리 답부터 말하자면, 후자에 가깝다. 북인권 결의안, 무엇이 문제인가 먼저, 이번 결의문의 내용을 짚어보자. 가장 특징적인 것은 북 인권 문제만을 전담하는 특별보고관 신설이다. 결의문에 따르면, 특별보고관은 북을 방문하는 등 북 인민들과의 직접 연락망을 구축하고 북의 인권상황을 조사해 그 결과를 차기 유엔총회 및 인권위원회에 보고해야 한다. 지난 해 결의문에서는 고문, 식량권, 여성 폭력 등 기존에 있는 주제별 특별보고관과의 협력이 북 정부에 대한 요청사항이었다면, 올해는 여기에 덧붙여 북에 대한 전담 보고관까지 신설되어 그 내용의 강도가 한층 높아진 것이다. 지난 1년 동안 북 정부는 사회권규약 및 아동권협약에 따른 보고서를 제출하고 관련 심사회의에 참석하는 등 유엔인권기구들과의 협력 의지를 보여주었다. 그런데, 유엔인권위원회는 이번에 더 강경한 결의안을 채택함으로써, 북 정부의 반발을 부르고 유엔과 북 당국의 협력 속에 인권 개선을 도모할 수 있는 여지를 오히려 축소했다. 내용의 편향성도 문제다. 대북인권결의문은 북 인권 문제를 묘사하는 단락에서 수용소의 문제 및 자유권의 억압 등에 상당한 비중을 둔 반면, 북 인민 전반에 걸쳐 고통을 호소하고 있는 식량권·생존권·평화권의 문제는 무척 소홀히 다루고 있다. 또한 식량 지원과 관련 분배의 투명성을 지나치게 강조해, 시급한 인도적 지원마저도 도외시하는 결과가 우려된다. 일부에서는 식량권과 평화를 인권과 별개의 문제로 바라보는데, 식량권과 평화권은 인권의 중요한 일부이자 정치적 자유의 신장을 가능케 하는 기본적 조건이기도 하다. 이번 결의안을 주도한 유럽연합, 미국, 일본 등이 인권적 정당성을 갖추지 못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이들 국가들은 이라크 침략 전쟁의 가해자이거나 방조자였고, 수십 년 동안 체계적인 인권침해를 자행하고 있는 이스라엘 규탄 인권 결의안에 대해서는 반대표를 던지거나 기권하였다. 결의안은 북 정부를 상대로 국제인권조약의 비준과 이행을 촉구하고 있다. 북 당국이 이러한 요구에 응해야 하는 것은 마땅한 일이지만, 여러 국제인권조약의 가입을 거부하면서 국제형사재판소의 설립을 훼방 놓았던 미국 등이 결의안을 주도한 국가 중 하나라는 사실은 이번 결의가 이중 잣대에 기초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그러나 사실 더 큰 문제는 결의문 내용 그 자체보다 현재 북 인권 문제가 제기되는 맥락에 있다. 북인권결의안의 채택을 주도했던 영국의 한 관계자는 북 문제를 '이라크와 같은 방식으로 해결'하는 것도 가능하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인권을 빌미로 군사 침략이 정당화될 수도 있다는 이야기이다. 전쟁이 아니더라도, 미국 등 제국주의 세력에 의한 북 정권교체 전략을 정당화시키는 강력한 요소로 '인권'이 공공연히 이야기되고 있다. 인권, 미국의 대북압박 정책에 포섭되다 민간단체의 틀을 빌어 과거 CIA가 하던 일의 일부를 하고 있는 NED의 2002년 전략 문서는 세계 전략의 일부로 대북 프로그램을 제시되고 있다. 북 내의 정치범 수용소와 노동교화소의 상황을 폭로하며 대북 제재를 비롯한 모든 가능한 조치를 취하는 것, 북 정부가 기아를 정치적 무기로 사용하고 있음을 기록하고 북에 책임을 묻는 것, 탈북자 문제로 중국을 압박하는 것이 NED 의장 칼 거쉬만이 내세운 대북 프로그램의 목표다. 리차드 루거 미 상원외교위원장은 2003년 7월 워싱턴 포스트에 기고한 글을 통해, "우리는 일부 탈북자들이 미국에 재정착하는 것을 허가하고 동맹국들도 그렇게 하도록 압력을 가해야 한다"며 "… (이런 조치는) 1989년 동독의 대규모 탈출사태가 동독을 무너뜨린 것처럼 평양 정권의 붕괴를 재촉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밝힌 바 있다. 그리고 2003년 11월엔 미 상하 양원에 북한자유법안이 상정됐다. 법안은 한반도의 대량살상무기 문제 해소 민주정부 하의 한반도 통일 지원 북 주민의 인권 향상을 목표로 내세웠다. 인권 문제를 앞의 정치적 목적과 접목한 것은 이미 인권 문제 그 자체의 옹호와 개선에 목적이 없음을 분명히 드러낸 것이다. 한반도 핵 문제의 평화적 해결에도 의지가 별로 없음을 보여주고 있다. 민주정부 하의 한반도 통일 지원이란 곧 남한 정부에 의한 흡수통일을 떠올리게 된다. 구체적인 내용을 보면, 탈북자들의 입국 관리를 국토안보부로 이관하고, 탈북을 지원하며, 국토안보부 주관하에 대량살상 무기 정보를 제공하는 탈북자들에게 미국 비자를 발급하도록 했다. 또 북한 민주화 향상 조치란 제목 아래, 대북라디오 방송 시간을 연장하고, 북 주민에게 라디오를 살포하는 데 예산을 배정한다. 올해 초엔 미 하원에 북한인권법안이 상정됐다. 미 워싱턴 정가에서는 북한자유법안보다 내용이 다소 완화된 이 법안을 중심으로 앞으로의 논의가 진행될 것이란 이야기가 흘러나오고 있다. 북한인권법안은 대량살상무기 문제의 해결을 법안의 목적에서 제외했고, 자유법안이 대북 지원에 있어 지나친 전제 조건들을 부과하는 데 비해 대통령의 재량권을 인정하는 일정한 융통성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북한인권법안 역시 목적 중 하나로 '민주정부 하의 통일'을 언급하고 있으며, 북에 대한 압박과 고립을 통해 북 인권을 개선할 수 있다는 기본 인식을 깔고 있다. 위험성이 감소됐다고 하지만, 기본인식과 목적이 완전히 바뀌지 않는 한 북한인권법안 역시 미국의 북 침략을 정당화하는 근거로 이용될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할 수 없다. 미국의 과거 대 이라크 정책은 이러한 우려가 과한 것이 아님을 말해 준다. 럼스펠드 미 국방장관은 지난 3월 25일 ABC 방송 시사프로그램의 인터뷰에서 이라크 침략이 9.11 이전부터 계획된 것이냐는 질문에 "그것은 미국의 상, 하 양원에서 통과됐던 이라크 정권교체법안(의 내용)과 밀접한 것이며, 미 행정부 정책의 일환이었다"고 답한 바 있다. 여기서 럼스펠드가 언급하고 있는 법안은 1998년의 이라크 해방법으로 짐작된다. 이라크 해방법은 미국의 대 이라크 정책을 "이라크에서 사담후세인 체제를 제거하고 민주정부를 창출하는 활동을 지원"하는 것이라고 개괄하며, 이라크 반정부세력의 방송 송출과 군사 원조 및 인도적 원조 등에 예산을 배정했다. 그렇다면, 북 인권 문제 어떻게 접근해야 하나?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가 봉착하게 되는 질문은 어떻게 하면 북 인권 문제가 제국주의적 공세의 빌미가 되지 않도록 할 것인가, 대안적인 접근은 어떻게 가능한가이다. 진보운동 일부에서는 북에 인권문제가 있다는 말조차 기피해 온 것이 사실이지만, 북에 인권 문제가 있다는 것조차 부인한다면 문제의 해답을 찾기란 불가능하다. 다시 말하자면, 인권을 빌미로 한 대북 공세를 막아내기 위해서, 북 인민들의 호소를 외면하지 않기 위해서, 나아가 한반도 인권의 미래를 위해 우리는 대안적 인권 담론을 만들어나가야 한다. 물론, '인권의 질서=자본주의'라는 잘못된 등식을 뛰어넘어야 한다는 점은 기본 전제이다. 흔히 우파들이 북 인권 문제의 원인을 북 체제의 문제로 환원시켜버리는 오류와 편견도 극복해야 할 점이다. 결국에 인권과 민주주의의 신장은 외부에 의해 주입되는 것이 아니라, 안으로부터 쟁취되고 구성되어야 한다는 점도 결코 놓쳐서는 안 되는 지점이다. 이러한 점들을 유념하며, 북 인권 문제에 대한 진보적 접근을 찾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 보일 정도로 무척 어려운 일이지만, 해야만 할 일이다. 우선 북 인민들이 가장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생존권(기아와 궁핍으로부터의 자유)과 평화권(전쟁 위협으로부터의 자유)을 중요한 인권 문제로 제기해야 할 것이다. 북 인민들이 식량 부족으로 고통받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올해 초에도 북에 식량을 지원하고 있는 세계식량계획과 유니세프 등에서 국제사회의 대량의 인도적 지원을 호소했다. 식량배급체제의 와해 등으로 인해 일종의 도시빈민이 생겨나고, 그들의 식량권 문제도 새롭게 대두되고 있다고 한다. 국제사회의 대량의 인도적 지원을 촉구하는 동시에, 북 정부는 경제구조조정 과정에서 사회적 약자층이 배제되는 일이 없도록 우선적으로 배려할 것을 요구해야 할 것이다. 북에 자본이 진출함으로써 새롭게 발생할 수 있는 인권 문제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식량난의 해소와 더불어 한반도의 전쟁 위협을 제거하고 인민들이 평화를 누릴 수 있도록 하는 일도 절박한 과제다. 이 점에선 한반도에 전쟁 위협을 가하고 있는 미국이 한반도 인민의 평화권을 침해하는 가해자이다. 전쟁이 곧 인권의 절멸 상태를 초래한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사실이다. 준전시 상태 역시 과도한 군사비 지출과 사회의 군사화를 통해 인권을 억압하는 조건을 만든다. 전쟁 위협이 곧 인권 침해를 낳는다는 점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경제 상황, 안보 상황을 내세워 자국 내의 다른 인권이 유보되거나 제한되어서도 안 된다. 이런 점에서 북 당국은 인민들의 자주성과 창조성이 최대한 발현될 수 있도록 민주주의를 강화하고, 비판을 허용해야 할 것이다. 오랜 외적 위협과 분단체제 속에서 고착화된 억압적 법제와 관행이 있다면, 내부적으로 개혁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한편, 남한에서 인권운동을 하는 우리들은 북 인권 문제에 대한 대안적 접근을 모색하면서 장기적으로 북과 남이 함께 만들어나가야 할 한반도 인권 보장의 체계를 구상해 나가야 할 것이다. 인권을 수단화하는 정치 공세를 막아내면서, 한반도의 인민들이 진정으로 인권을 누릴 수 있는 길은 저절로 오지 않는다.PSSP
지옥문이 열린 이라크, 학살자 미군 3월 31일 팔루자에서 미국인 4명이 죽고 그 주검이 훼손당한 사건 이후 -사실 그들은 군인역할을 대신하는 사설 용병들이다- 4월 내내 이라크는 이라크인 들의 말처럼 "지옥문이 열린 것"과 같았다. 점령군의 학살과 이라크인들의 저항이 연일 계속되면서 보도 상으로도 미군은 100여명, 이라크 인은 1000명 이상이 사망하였다고 한다. 통계에 잡히지 않은 숫자까지 포함하면 사망자는 이를 훨씬 초과할 것이며 부상자는 짐작하기조차 어렵다. 심지어 어린이와 노약자, 여성이 사망자의 다수를 차지한다. 팔루자를 봉쇄한 미군은 F-16 폭격기와 코브라헬기, 탱크, 저격수, 해병대를 동원하여 마치 사냥하는 것처럼 이라크인들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하였다. 이슬람사원이 폭격 당했고 거리는 피바다가 되었으며 병원은 시신과 부상자로 넘쳐났다. 시신을 묻을 곳이 없어 축구장이 거대한 묘지가 되었다. 마치 팔루자는 80년 한국의 광주를 떠올리게 했다. 미군은 미국인 주검훼손사건을 빌미로 노골적이고 의도적인 살기(殺氣)와 적개심을 가지고 대학살에 나섰고, 팔루자가 끈질기게 저항하자 그 강도를 더욱 높였다. 미군은 이라크인들을 사람으로 보지 않았고 총을 든 이라크인과 그렇지 않은 이들을 구별하지 않고 움직이는 모두에게 총과 폭탄을 퍼부었다. 그러나 팔루자의 저항은 부시가 말하는 고립된 소수 극단주의자들에 의한 것이 아니라 일반 시민들에 의한 것이었다. 그들은 직장인, 상인, 젊은이였으며 심지어 이라크 경찰복을 입은 이들도 있었다. 미군이 저지른 끔찍한 학살은 생업에 종사하는 평범한 이라크 인들이 칼리쉬니코프 총을 들게 만든 것이다. 더욱이 미군은 봉쇄한 팔루자 외곽도로에서 팔루자를 탈출하는 시민들에게마저 총구에 불을 뿜었다. 미군의 학살은 팔루자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4월 초 이라크인 다수를 차지하는 시아파의 강경 지도자 알-사드르의 신문발행을 점령행정관 폴 브레머가 중지시키고, 그의 측근들을 체포하고 살해하자 이에 항의하는 평화시위가 발생하였다. 그러자 미군이 이에 대해 발포하였고 이에 사드르는 즉각 무장저항을 촉구하고 나섰다. 그 직후 바그다드, 사드르시티, 나자프, 카르발라 등 이라크 중남부에서 광범위한 저항이 발생하였고 사드르를 지지하는 마흐디 민병대는 무장저항에 돌입하였다. 미군은 즉각 학살로 대응하였다. 그들은 주택가와 상점, 거리, 심지어 앰뷸런스에도 미사일과 총탄을 쏟아 부었다. 브레머가 도발한 이 전투로 인해 이라크 전역이 전쟁상태에 돌입하였다. 제2의 베트남, 수렁에 빠진 미국 애초 미국은 팔루자를 중심으로 한 수니파의 무장저항을 간단히 제압할 수 있을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팔루자 학살에 대한 이라크의 민심이 악화되고 팔루자를 돕기 위한 행진이 시작되는 등 저항의 중심으로 떠오른 팔루자를 쉽게 진압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또한 알-사드르를 중심으로 하는 강경 시아파의 저항 역시 무장한 민병대를 기반으로 하고 있고 그들이 총을 든 민간인이라는 측면에서 이들을 모조리 학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사드르가 농성하고 있는 나자프는 시아파 2대 성지 가운데 하나로서, 인근 이란 정부조차 나자프를 공격하고 사드르를 살해한다면 이슬람 전체가 미국에 등을 돌릴 것이라고 경고하고 나섰다. 미군의 민간인 학살과 성지에 대한 공격은 점령군에 대항하여 시아파와 수니파가 공동전선을 펼치게 되는 상황을 초래했다. 사실상 이라크 전역에서 미군을 포함한 점령군은 '반미', '점령반대' 무장봉기라는, 이라크 점령이후 최대의 저항에 부닥친 것이다. 이에 대해 부시는 철수예정이던 2만 명의 미군귀환을 90일 동안 연장하였고 군대를 더 보낼 수도 있다는 뜻을 밝혔다. 그러나 이미 스페인, 온두라스, 도미니카공화국, 노르웨이, 태국 등 파병국가들이 속속 파병철수 의사를 밝히고 있고 폴란드도 파병인원을 대폭 감축하기로 하였다. 여기에 이라크의 저항이 전국적으로 장기화하는 상황이어서 미군 증강은 이라크를 '제2의 베트남'으로 만들어 미국을 끝없는 수렁에 빠지게 만들 것이 뻔하다. 6월 30일로 예정된 주권이양 계획도 불투명하다. 물론 미국의 구상은 미국식 민주주의-복수정당과 연방제-에 기반을 둔 친미정부를 수립하여 중동민주화 구상의 발판으로 삼는다는 것이지만 이러한 내용의 임시헌법에 대해 시아파는 반대하고 있다. 누가 임시정부를 구성하고 주권을 이양 받을 것인지도 불분명하다. 또한 미국은 주권이양 이후에도 미국 대사관이 184억 달러의 재건자금을 관리하게 될 것이라고 하였는데 이는 향후 이라크 정부가 이라크 재건사업에 관여할 수 없게 됨을 의미한다. 미군 역시 이라크 내 14개 기지에 11만 명이 계속 주둔할 예정이다. 이라크 군대가 미군의 명령에 따라야 한다는 행정명령과 미국이 이라크에 국가안보보좌관을 임명한다는 계획도 발표되었다. 즉 6월 30일 이후 주권을 이양하여 임시정부를 수립하더라도 미국은 세계 최대규모의 대사관과 주둔군을 통해 이라크를 통제하겠다는 것이다. 이것이 미국이 그리는 '자유 이라크'의 모습이다. 그러나 결국 이는 '피를 부르는 미국식 민주주의'임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부시의 대선가도에서 이라크는 끔찍한 악몽이다. 미국 내에서 이라크 미군을 철수시켜야 한다는 여론이 40%를 넘어서고, 군인가족이 부시 지지를 철회하고 케리의 지지율이 따라붙는 등 부시의 '내우외환'은 가중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 대해 부시는 주권이양 이후 현재의 이라크 과도통치위원회(IGC)를 해체한 뒤 총리 및 3명의 대통령위원회로 구성되는 임시정부를 유엔 주도로 출범시키자는 브라히미 유엔 이라크특사의 제안을 수용했다. 이는 이라크 주권 이양 후 유엔이 미국과의 협의를 거쳐 새 임시정부 각료를 지명하며, 시아파 대표를 대통령으로, 쿠르드족과 수니파 대표를 각각 부통령으로 하는 임시정부를 구성해 2005년 1월 총선거를 실시하자는 것이다. 유엔을 끌어들여 임시정부의 정당성을 확보하면서 미국은 한발 빼겠다는 모양새다. 그러나 유엔의 깃발을 달더라도 점령군의 역할은 변하지 않는 것이고 미국이 신설 이라크군 및 재건 지원금을 통제하는 상황에서 이라크 임시정부는 별다른 역할을 할 수 없다. 오히려 미국은 유엔을 이용하여 이라크에 대한 통제력을 계속 유지하고자 하는 것이고 새 유엔결의안을 통과시켜 더 많은 나라의 군대를 이라크에 파병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이는 '이라크를 이라크인에게로'를 외치며 저항하는 이라크 민중들에게는 또 다른 점령과 억압으로 받아들여질 것이다. 이라크 사회운동 - 이라크의 민주주의와 자주적 단결의 흐름 이라크 내의 사회운동은 국내에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이라크에도 다양한 운동세력과 정치정당이 존재한다. 미군의 침략과 점령은 이라크의 정치담론을 이분법적으로 나눴는데, 점령에 반대하면 사담주의자이고 사담에 반대하면 미국에 연계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에 이러한 '점령이냐 독재냐'의 이분법을 넘어서고자 하는 그룹들이 조직되었는데 이 그룹은 수니파나 시아파 같은 민족주의 이슬람 진영과 투르크멘, 쿠르드, 자유주의, 좌파, 기독교, 정당 등 50여 개의 다양한 정치적 경향을 대표하고 있다고 한다. 이들은 민주적 이라크와 정의, 자유, 평등, 평화에 의해 통치되는 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제일 조건으로 점령 종식을 요구하고 있다. 정치적 조직화를 위해 이들은 대규모 회합을 가져왔다. 첫 회합은 2003년 12월 19일에 열렸는데 금요일에 열렸다고 하여 '단결의 금요일(Friday of Unity)'이라 불린다. 참가자들은 지금 가장 위험한 약점을 분열주의로 보고 이라크의 단결을 호소했다. 두 번째 회합은 2004년 1월 2일에 열렸다. 여기서는 시아파와 수니파의 단결이 강조되었고 "단결과 정의가 우리가 열망하는 국가의 기초"라는 슬로건 하에 전국회의(National Conference)를 개최하자고 하였다. 이슬람 사이언티스트 사무총장 알 다리는 점령과 그에 협력하여 노예시장에 스스로를 파는 이들에 맞서 이라크의 단결을 위해 노력하자고 호소했고 셰이크 (이슬람지도자) 알 칼리시 역시 아랍과 쿠르드, 투르크멘을 분열시키는 시도를 비난했다. 그 외에도 나자프를 대표하여 셰이크 아흐메드, 이라크 구원전선의 수장인 모하메드 알리, 아랍민족주의운동을 대표하는 압둘 카림 하니 등이 이라크의 해방과 단결을 강조하였다. 또한 알 시스타니 진영, 알 사드르 진영을 대표하는 이들도 분파갈등을 극복할 것과 점령당국과 협력을 중단할 것, 단결을 위한 회합을 계속할 것 등을 호소했다. 한편 앞의 전국회의 흐름과 동일한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은데, 국제적으로 '이라크의 자주적 민중회의(Independent Assembly)를 지지하는 국제 호소문' 서명운동이 4월 초부터 진행되고 있다(www.focusweb.org/int-call 에 들어가서 누구나 서명할 수 있다). 이는 점령 중단을 요구하고 이라크 민중들의 주권과 자치의 권리를 지지하는 큰 틀에서 이라크인들이 "점령군의 간섭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상태에서 국가의 미래를 자유롭게 토론하고 제안할 수 있는" 회의를 개최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자유선거를 실시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내용은 2003년 자카르타에서 열린 평화회의와 2004년 뭄바이 세계사회포럼 반전총회에서 토론하고 확인된 바 있다. 세계사회포럼 반전총회에는 이라크민주연합(Iraqi National Democratic Coalition, 약칭 Condi)에서 토론자로 참여하였는데 이라크민주연합은 민주적 이라크를 위한 사회운동연대체인 듯하다. 이 서명에는 찰머스 존슨, 크리스토프 아귀통, 임마뉴엘 월러스틴, 제임스 페트라스, 제레미 코번, 마르타 아르네케르, 나오미 클라인, 노암 촘스키, 사미르 아민, 수잔 조지, 월든 벨로, 파우스토 베르니토니 등 이름난 사회운동가와 진보학자들이 다수 동참하였다. 이라크 사회운동의 흐름이 어떠한 수준과 범위인지 아직 확실하게 판단할 수는 없지만 이라크 사회운동이 국제적 운동과 연계되어 있으며 이라크의 해방과 민주주의, 단결과 평화를 추구하는 활동을 펼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전 민중의 힘으로 학살과 점령, 파병을 중단시키자. 이렇듯 미군의 이라크 점령에 대항하여 이라크 민중들과 운동단체들이 이라크의 해방과 자주를 염원하는 상황에서 한국정부가 이라크에 군대를 보내겠다는 것은 미국에 의한 학살과 점령에 동참하는 것일 뿐이다. 지난해 국민의 대다수가 반대하는 파병을 노무현대통령이 전격적으로 결정하고 이를 아펙 회담에서 부시에게 선물로 안긴 이후 국회는 정부의 '파병 백지위임장'에 찬성으로 손을 들어주었다. 그러나 국익을 위해 평화·재건군을 파병한다는 지배계급의 논리는 정작 파병지역 선정에서 스스로의 모순을 폭로했다. 당초 예정지였던 북부 키르쿠크에 대해 미군은 잔류하겠다고 하면서 한국의 전력보강을 주문했다. 국방부는 이를 은폐하다가 뒤늦게 파병일정 연기를 흘렸고, 급기야 파병지역 재검토 입장을 발표했다. 그리고 스페인 군이 철수하는 남부 나자프가 유력하게 거론되었다. 그러다가 다시 북부 에르빌과 슐라이마니야로 돌아섰다. 이리 저리 갈팡질팡하면서 정부는 미국의 침략과 점령에 동참하는 점령군에게 안전한 지역은 애초에 없다는 것을 자인한 셈이다. 두 차례에 걸친 이라크 합동조사단도 미군에 의한 안내와 부실한 조사, 미리 내려진 결론에 짜 맞춘 형식적 결과발표로 일관했다. 보도에 따르면 한국군 예상사망률은 0.8%인 1천명 당 8명 꼴인데 이는 베트남전 사망율의 절반이라고 한다. 정부는 곧 아르빌과 슐라이마니야 가운데 한곳을 4월 말 NSC(국가안전보장회의)에서 파병예정지로 결정한다고 하지만 이 두 곳은 쿠르드 자치지역으로서 전쟁피해가 적어서 정부가 말하는 소위 '평화·재건' 요소가 별로 없다. 더구나 쿠르드 지역은 이란, 터키와 마주보고 있고 쿠르드민족의 독립문제가 아랍족에게 매우 민감한 사안이어서 지난 3월에도 쿠르드민주당사에 폭발사건이 일어나는 등 치안 상으로도 결코 안전한 곳이 아니다. 자칫하면 종족갈등에 휘말릴 여지가 큰 것이다. 결국 무슨 이유를 갖다 대도 한국군 파병은 부당한 것이 아닐 수 없다. 그동안 한국의 반전운동은 다양한 스펙트럼에서 이라크 점령과 파병에 대해 반대해왔다. 그러나 지난 2월 파병 동의안이 국회에서 통과된 이후 3.20 국제반전행동을 제외하면 이렇다할 투쟁의 파고를 만들어내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총선시기에도 파병철회 문제는 쟁점이 되지 못했고, 도리어 ‘국가 정책적 판단을 선거 시기에 쟁점으로 삼을 수 없다’는 지배세력의 이데올로기 조작을 넘어서지 못했다. 이런 상황을 타개하고 투쟁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기 위해서는 팔루자를 비롯한 이라크민중 학살과 미국의 이라크 점령 구상을 정확히 폭로해야 한다. 이라크에서 미국의 학살 만행이 오늘날 미국이 주도하는 신자유주의 세계화와 군사주의 때문임을 분명히 드러내야 한다. 따라서 한미동맹은 신자유주의 세계화와 군사주의 동맹이며 이를 깨뜨리지 않으면 침략전쟁에 학살자로 동참해야 하고, 노동자 민중은 세계화가 강요하는 경쟁과 빈곤, 불안정노동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는 것을 광범위하게 선전해야 한다. 이에 세계화와 군사주의의 문제를 결합시켜서 '반전 반세계화' 투쟁의 기조를 의식적으로 추구하면서 그러한 계기를 만들어내야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오는 6월 13~15에 서울에서 열리는 '세계경제포럼(WEF) 동아시아정상회의'에 반대하는 투쟁은 매우 중요하다. 세계적인 자본가, 지배정치인 수백명이 모여서 '아시아의 비즈니스와 안정'을 논의하는 회의에 대항해서 민중의 전쟁·파병반대, 신자유주의 세계화 반대 의지를 분명히 보여줌으로써 반전 반세계화 투쟁을 강화할 수 있을 것이다. 마침 6월 12일에는 파병반대 국민행동 차원에서 대규모 파병반대 시위가 예정되어 있어 시기적으로도 좋다. 이와 같이 아래로부터 대중의 힘에 바탕하여 파병반대 투쟁을 조직하고 광범위한 대중을 실질적으로 결집시킬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이를 기반으로 실질적으로 파병을 철회시키자. 그 출발로 5월 1일 메이데이에서 노동자들이 반전과 파병반대 목소리를 높여나가자. 이라크 민중들이 자주적으로 자신의 사회를 건설하려는 노력에 대해 굳건히 연대하자. PSSP
1. 대량실업 직후 실업운동의 양상과 약평. 1) 대량실업 직후 실업운동의 양상 - 부산 실직자 거리행진 경제 공황 초기인 1998년 4월 부산, 실직자 권리를 선언하는 최초의 실업자 거리 시위가 있었다. '실직자 거리행진 준비위원회'의 주최로 열린 실직자 거리행진에는 부당해고된 파라다이스호텔 노조와 한국노총에서 탈퇴하여 민주노총에 가입한 트롤선 선원노조, 부산지역 건설일용노조, 그리고 일반 실직자들과 시민, 학생들이 참가하였다. 부산의 '실직자 거리행진'은 매월 셋째 토요일을 '실직자 거리행진의 날'로 정하고 거의 1년동안 거리행진을 진행하였다. 수차례의 행진을 통해서 자연스럽게 실업자군이 형성될 것이라고 기대했으나, 실업자들은 행진에 합류하지 않았다. 이후 노숙자들을 우선 조직하기로 하고 '노숙자 자활추진위원회'라는 모임을 만들었으나 주체가 행방불명 되는 등 모임 자체가 흐지부지 되었다. 다양한 시민사회종교단체들이 '행진'을 매개로 결합했으며, 행진초기 실직자의 주체적 결합이라는 점에서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실직자의 특성을 이해하지 못한 상황에서 '행진'만을 지속하는 것은 그들을 결합시키는데 한계가 있었다는 자평을 남겼다. - 일용직·저소득노동자 실업대책협의회 98년 6월에는 정부의 실업대책이 한계계층에 대한 고려가 전혀 없거나 취약하다는 점을 비판하면서 임시직·저소득 노동자의 실업문제대책을 요구하는 집단 움직임이 있었다. 주로 빈민지역에 뿌리를 두고 활동해온 빈민운동단체들이 중심이 돼 결성된 '일용직·저소득노동자 실업대책협의회'는, 일용직·저소득 실업자에 대한 정확한 실태 파악과 복지정책의 토대 구축, 노사정위원회에의 대표 참여, 대규모 공공사업 조기 발주, 원스톱 서비스센터 설립 등을 요구하면서 기자회견과 가두 시위를 벌였다. 건설일용노동자 및 지역빈민운동단체로 구성된 실업대책협의회는 정책단위를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실업대책협의회는 전국적인 실업극복단체의 연계를 제안하며 전국적인 실업정책생산단위로의 '전국실업극복단체연대회의'를 구성하였으며, 서울은 '서울지역실업극복연대'로 전환하게 된다. - 실업자동맹(준) 98년 12월 22일 전국실업자동맹(가칭) 준비위원회가 영등포산업선교회에서 결성식을 갖고 99년 상반기까지 전국실업자동맹을 건설할 것을 결의했다. 결성식을 가진 실업자동맹 준비위원회는 일주일에 27시간 미만으로 일하는 반실업자를 포함한 모든 실업자와 실업운동의 동조자들에게 회원자격을 부여하는 내규를 통과시켰으며, 실업자들의 생존권 확보와 일자리 창출을 위해 자주적 노력을 하기로 결의했다. 실업자동맹 준비위는 이어서 실업자들의 가장 절박한 문제로 △안정된 일자리의 마련 △실업자 지원을 위한 별도의 실업부조금고 등 지원대책 수립 △노숙자에 대한 인간적인 대책 마련 등을 정부에 촉구했다. 실업자동맹은 국민승리21이 중심이 되어 구성되었으나 이후에 독립적으로 활동을 전개하게 된다. 서울역 선전전의 진행해 실직자 주체를 형성하고자 했으며, 구호활동을 중심으로 진행되던 실업극복사업을 강하게 비판했다. 그러나 주체가 불안정하고 지속적인 사업을 진행하지 못하면서 조직이 해산되었다. 실업자동맹(준)은 실직으로 인해 서울역에서 노숙을 하던 주체들이 모여 결성했다는데 의의가 있다. - 실업자대회 98년 4월 23일 1차 실업자대회를 시작으로 10월까지 6차례의 실업자대회가 개최됐으며, 8월 26일엔 전국의 13개 실업운동 단체들이 전국실업운동단체연석회의를 결성하였다. 이는 IMF범국본을 중심으로 진행된 것으로(현재의 민중대회 형태) 실직자들의 실질적인 조직이라기 보다는 운동진영내의 주요과제로 실업의 문제를 부각시켰다는데 의의가 있을 것이다. - 전해투의 '실업자투쟁' 전해투는 '실업자운동'이라는 광범위한 표현보다는 '투쟁'을 조직한다는 것에 전해투 사업을 분명히 하고자 했다. 실업자운동 또는 사업으로써 취업알선, 상담 등의 구제사업은 전개되고 있지만 실제 실업자들의 근본적인 요구를 내걸고 실천적인 행동으로 투쟁하는 것은 소극적이다. 따라서 전해투는 원상회복·고용승계를 요구로 투쟁하는 노동자들을 실업자 군으로 규정하며 이들을 우선 전국적으로 묶어 세워 투쟁을 힘있게 조직하는 것을 중심사업으로 하고 '실업자 주체들의 투쟁'으로 실업문제를 직접 제기해 들어가는 것이다. 전해투는 독자적 계획으로 서울역 노숙자들을 대상으로 한 캠페인과 집회투쟁을 조직했으나 한계가 있었고, 정리해고 저지투쟁, 정리해고노동자의 원상회복투쟁, 고용승계투쟁을 '중앙집중화'시키기 위한 전국순회투쟁을 했다. 전해투는 '실업·해고 없는 세상에 살고 싶다'는 노동자들의 가장 절박한 요구의 함축적 의미인 '완전고용'이라는 공세적 요구를 내걸 때만이 자본과 정권으로부터 양보를 쟁취해 낼 수 있을 것이라는 판단으로 '실업반대! 완전고용!'의 구호속에 1차 순회투쟁을 전개했다. - 청년실업 1) '민중의 기본생활권 쟁취와 청년실업 대책 수립을 위한 전국학생특별위원회' 2) 청년실업운동본부(준) - 민우회, 여성실업자 '희망선언' 한국여성민우회는 전문대 이상을 졸업하고 일자리를 얻지 못하고 있는 여성실업자들로 구성된 [희망선언]을 발족하여 활동했다. 여성청년실업자들의 모임이라고 할 수 있는 [희망선언]은 여성실업자의 실업문제 해결을 위한 요구안 등을 제출하며 활동했으나 조직적 확대를 이루지 못하고 해산하였다. - 사회진보연대 실업정책생산모임 사회진보연대는 99년 2월 '실업정책생산모임'을 구성하여 실업운동에 대한 정책논의모임을 진행하였다. 실업의 원인과 실업운동의 이념과 과제를 밝히고자 했으며, 실업운동에 결합하여 정책적 역할을 담당하고자 했다. 99년 10월 '실업자 운동 어떻게 할 것인가'의 책을 발간하고 이후에도 정책제언 등의 활동을 전개했으나, 논의주체들이 불안정해져서 지속되지 못하고 2001년 해산한다. - 민주노총 고용안정센터 민주노총은 98년 상반기, 고용안정 및 실업대책사업의 인프라 구축을 위한 '취업알선 및 능력개발센타'를 설치할 것을 논의 하고, 민주노총내에 고용안정센터의 건립과 '실업자종합지원센터'의 적극적 결합을 통한 인프라 구축을 추진하게 된다. 민주노총은 99년 실업극복국민운동위원회의 지원을 기반으로 한 '실업자종합지원센터'의 건설과 함께 서울센터 및 전국을 연계하는 지역지원팀의 주관단체가 된다. 민주노총은 실업극복국민운동위원회의 운영위원단체, 실업자종합지원센터 (서울센터)지역지원팀의 주관단체, 전실연 건설이후 전실연 사업의 주관단체(공동대표-민주노총 위원장, 집행위원장-고용안정센터소장, 사무국-고용안정센터 내 설치)로서의 역할을 담당하며 실업극복운동의 주요한 축을 담당하게 된다. - 실업극복국민운동본부 정부 및 한겨레,MBC,종교단체,시민단체,양대노총 등을 중심으로 구성된 민관협력조직이며, 대량실업이후 조성된 실업기금(1,200억)을 운용하는 단위이다. 다양한 실업자구호사업을 민간단체에 위탁하여 진행했다. 실업극복국민운동위원회의 재원을 바탕으로 사업을 전개하고, 사업을 매개로 모인 실업자들을 교육하고 조직하고자 했다. 이후 실업운동의 주된 흐름을 형성하게 되는 이러한 경향은 '구호사업, 취업알선, 민간위탁 공공근로' 등을 통하여 지역의 저소득, 중고령 실업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사업을 진행했다. 실업극복국민운동위원회의 재원은 수많은 종교,시민,지역단체들의 실업극복사업의 참여를 만들어냈을 뿐 아니라 '실업'사업을 위한 새로운 단체들이 만들어지게 된 배경이 되었다. 2) 약평 대량실업 초기에 실업운동은 새로운 운동의 가능성으로 인식되었다. 이는 실업운동이 존재하고 있어서가 아니라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실업자와 사회위협으로 느껴지는 실업의 문제가 새로운 운동기반을 형성할 것이라는 기대에 따른 것이었다. 대량실업 초기 등장했던 '실업자동맹'이나 '실업자 거리행진' 등은 실업문제의 정치적인 성격을 극명하게 드러낸 것이었으나 더 이상의 자기계획을 가지지 못한 채 사라져갔다. 민중진영의 실업문제에 대한 대응은 더욱 단명했다. 대량실업 초기에는 노동사회운동단체를 망라하여 실업문제에 대한 입장과 대응방향이 쏟아져 나왔다. 민주노총이나 진보정당에서는 '실업자 조직화 어떻게 할 것인가'를 논의했고, 사회운동진영에서는 노동, 경제, 여성, 복지, 정보통신, 보건의료 등 각 부문에서 나타나는 실업의 문제를 진단하고 각각의 대응과 총체적인 실업운동이 필요함을 제기했다. 그러나 실업률의 하락과 함께 실업의 문제가 수그러들면서, 실업문제는 경기가 악화되고 있음을 나타나는 사례로, 문서에나 등장할 뿐이었다. '실업운동'은 근본적이고 정치적인 투쟁으로 인식되지 못했다. 조직화에 있어서도 실업자 대중의 상황을 인식하지 못한 채 무조건적인 조직화의 강조는 조직화에 있어서의 철저한 실패로 드러났다. 실업노동자는 행진 대오 안으로 들어오지 않았으며, 정리해고된 노동자들도 뿔뿔이 흩어졌다. 이시기 하나의 쟁점이었던 '실업자 노조가입'의 문제는 현장과 연결되지 못했다. 노동조합이 적극적으로 이를 제기하였으나 노사정위 협상내용의 하나일 뿐 실업자(정리해고자)들이 노조가입을 요구하거나 조직하는데는 실패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실업이 바로 생존의 위협으로 직결되었던 대다수의 실업자를 지원하고 다양한 서비스를 제공하면서 실업자 풀(pool)을 형성, 조직하려는 흐름이 생겨났다. 실업극복국민운동위원회의 재원을 바탕으로 하여 진행된 사업과 센터들이 그것이다. IMF 직후 거리로 쏟아져 나오는 실업자들을 보면서 국민 상당수가 생계에 위협을 받고 있다고 인식하여 출발한 실직자 지원사업은 쌀나누기, 시레기 나누기, 월 15만원지원 등의 지원사업을 펼쳤다. 운동진영의 일부에서 IMF재협상을 주장하고 거리로 나올 때에 민간단체를 중심으로 광범위하게 진행된 구호사업에 대한 평가는 다음 두가지다. 구호사업을 통해 실업노동자와 만나게 되고, 이를 계기로 조직화하는 매개가 되었다는 평가와, 결국 실업노동자들의 분노를 관리하고 잠재우는 역할을 했다는 평가가 제출되었다. 실업자구호사업은 국가의 위기상황에 대해 민간단체가 그 원인을 파악하고 책임과 대책마련을 요구하는 방식이 아닌, 정부나 언론의 '실업극복 캠페인'이나 '금모으기 운동'에 조응하여 민간단체가 앞장서서 근거없는 희망을 유포하고 위기관리를 위한 지원으로 표현되었다. 구호사업의 또다른 영향은 실업단체의 활동이 지원사업을 중심으로 진행되면서 '재정이 뒷받침되어야 하는 사업'을 중심으로 국한되었다는 것이다. 즉, 실업단체에서 진행하는 구호사업이 중단될 경우 실업자를 만날 수 있는 통로자체가 사라진다는 인식이 존재했다. 실업자를 만나려면 사업이 있어야 하고, 사업이 진행되려면 재정과 인력이 있어야 한다는 인식은 실업극복국민운동이나 지자체의 지원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상황을 낳았다. 2. 2000년 ~ 2003년까지의 실업운동 가장 높은 실업률을 기록했던 2000년 2월 이후 실업률은 계속 하락했다. 2000년부터 꾸준히 낮아진 실업률은 '실업'의 문제가 사회적인 관심에서 멀어지는 과정이었다. 정부의 실업대책의 축소 - 공공근로 축소 - 와 실업극복국민운동위원회의 지원으로 문을 연 전국 100개 실업자종합지원센터에 대한 지원중단은 변화된 실업의 양상과는 무관하게 실업의 문제가 사회적 이슈에서 벗어난 상황을 반영했다. 99년 결성된 실업단체의 전국적인 연대체인 '전국실업극복단체연대회의'(이하 전실연)는 거의 유일한 실업운동조직으로 남아 활동하게 되었다. 그러나 실업극복국민운동위원회의 해소 논의는 전실연이 사회적으로 실업운동의 요구를 제기하고 활동하기보다는 실업운동진영내의 재편과 재정지원문제로 국한된 측면이 존재한다. 1) 실업자종합지원센터와 조직화 99년 시범적으로 시행되었던 실업자종합지원센터는 2000년 전국 100개 센터로 확대되었으며, 2001년 실업극복국민운동의 지원중단으로 인해 많은 단체들이 센터사업을 중단했다. 그러나 취업알선, 생활·노동법률상담, 생계비 지원 및 기타 복지지원프로그램들을 수행했던 지원센터는 지원의 중단과 재개 등의 우여곡절을 거쳐 현재도 37개센터가 운영되고 있다. 실업운동에서 지원센터사업은 실업자의 조직화를 위한 유의미한 거점으로 인식되었다. 즉, 센터를 중심으로 실업자들이 모이고 각각의 사업을 통해 교육 및 주체를 조직화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많은 센터들이 공공근로 참여자나 생계비지원대상을 중심으로 상조회 등의 모임을 만들었으며, 취업알선상담을 통해 직종별 모임을 구성하고 노동조합의 구성까지를 논의하기도 했다. 생계비 지원 등 구호사업의 중단 이후에는 취업알선과 수급권 상담을 주요한 조직화의 매개로 판단하고 주요사업으로 배치했다. 취업알선의 경우 실업과 취업을 반복하는 일용직 중심의 실업노동자가 대부분이었기에 이들을 중심으로 직종별 모임을 구성하고, 낮은 임금에 반대하며 최소한의 노동법을 준수하도록 교육을 진행하기도 했다. 그러나 센터운영 자체를 기금에 의존했던 실업단체들은 기금의 중단으로 인해 절반 이상이 센터사업을 중단했으며, 일부 남아있는 상조회 등의 모임도 지역내 소규모 공동체 수준에 머무르고 있다. 모임은 구성되었으나 일자리의 중단이나 지원이 중단되면 해소되는 불안정한 상태가 지속되었다. 그나마 '지역주민 조직화'에 중심을 두고 활동했던 센터들은 지역운동단체들이 대부분이었으며 이러한 지역단체들은 지역내 주민들의 이해와 결합하는 주제로 활동의 중심을 변화하였다. 이는 일상적인 주민의 조직화를 목표로 하기에 조직화의 매개로서의 센터사업은 스스로의 목적과 방향을 정립하지 못한채 지원여부에 따라 운영이 흔들리는 한계가 있었다.. 실업자종합지원센터에 대한 평가는 정부나 기금을 '활용'한다는 입장에서 출발하였으나 결국은 스스로 '관리의 주체'가 되거나 활동의 범위를 오히려 국한시켰다는 측면에서 매우 중요하다. 현재에도 많은 단체들이 정부나 민간기금을 '활용'하여 활동하고 있으며, 지역내 거점으로의 이러저러한 센터의 건립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2) 전국실업극복단체연대회의 전실연은 고실업, 장기실업이 고착화되는 사회적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하기 위한 사업을 전개하였던, 노동, 여성, 시민사회, 종교, 빈민, 장애인 등의 단체들의 전국적 연대기구이다. 또한 전국적으로 개별화된 실업운동의 구심을 세우기 위한 활동을 목적으로 한 기구이기도 하다. 전실연은 사회적으로 상대적 소외계층의 실업문제를 중심으로 사업을 추진하였으며, 궁극적으로는 실업자를 주체로 한 조직화가 목적이었다. 전실연은 전국적 연대의 틀을 마련함으로써 장기적으로 실업자를 포함한 소외계층의 권리를 지켜내고 나아가 삶의 질을 향상하기 위한 영역을 확대하는 사업을 중심에 두었다. 2000년 공공근로 축소와 센터사업의 확대는 전실연의 활동과 기반을 확대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2001년 센터사업의 중단과 실업단체들의 자활후견기관으로의 전화는 전실연으로 하여금 연대기구의 성격과 목표를 분명히 할 것을 강제했다. 전실연은 실업운동의 방향논의를 위한 실업단체 설문과 논의를 통하여 '전실연은 '실업'의 문제를 주제로 하는 단체들의 아니라 '실업운동체'임을 분명히 하고, 전실연의 정체성 및 지향은 실업문제 및 실업운동에 대한 방향제시를 통해 사회운동속에서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는 것임을 확인했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이러한 실업단체의 요구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전실연은 실업단체의 유지·존속을 위한 상층협의에 중심을 두었으며, 전실연의 제도화와 민간고용안정센터 등을 추진하였다. 전실연은 실업운동의 요구와 목표를 설정하고 이를 사회적운동으로 제기하며 투쟁하기보다는 실업단체들을 유지하거나 실업기금을 민간기금화하기 위한 협상기구로 전락하고 말았다. 3) 실업극복국민운동위원회 대량실업 직후 조성된 1,200억의 민간실업기금을 운영하는 민간대책기구가 '실업극복국민운동위원회'이다. 그러나 민간단체들로 구성되어 있다고는 하지만 기금이 근로복지공단에 포함되어 있으면서, 실질적인 기금의 운용은 정부주도로 이루어졌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실업극복국민운동은 대량실업 초기 다양한 구호사업에 기금을 지원했으며, 2000년 전국에 100개의 실업자종합지원센터에 재정을 지원했다. 그러나 2001년 센터사업의 중단과 실업극복국민운동의 해소논의를 거쳐 2003년 해소하게 된다. 운영위원에 민주노총, 여연, 경실련 등이 참여하고 있는 실업극복위원회는 겉으로는 민간운동기구를 표방하고 있으나 사실상 실업단체의 활동을 규제하며 관리하는 역할을 해왔다. 구호사업 이외에 '실업자 조직'사업에 기금을 사용할 수 없다고 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각 센터와는 사업을 '약정'한 관계라는 이유로 실업극복국민운동의 의사결정이나 최소한의 논의결과조차 공개되지 않았다. 실업극복국민운동위원회를 둘러싼 평가의 지점은 크게 두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하나는 국민운동의 사업이 정부의 실업대책에 대한 국민들의 불만을 희석시키는 관리자 역할을 해왔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이러한 관리자의 주도적인 역할을 민간단체들이 담당하거나 혹은 묵인했다는 평가이다. 결국 실업극복국민운동위원회를 민간대책기구로 내세우며 실업자조직운동을 관리하고 실업자대중의 불만을 무마하고자 했던 정부의 의도와 이에 대한 비판보다는 기금을 중심으로 스스로 그 관리주체를 자임했던 민간단체의 문제점인 것이다. 3) 약평 - 실업운동의 과제와 목표 부재 실업운동진영의 활동이 가장 왕성했던 2000년은 '자활'사업에 대한 폭발적인 관심과 집중으로부터 시작되었다. 2월 말 자활후견기관 신청을 앞두고 제 실업단체들은 앞다투어 자활사업에 대한 계획을 제출하였다. 자활후견기관 신청이 마무리되자 국민기초생활보장법 시행령 논의가 진행되었다. 또한 5월말로 들어서면서 실업운동진영의 쟁점은 공공근로 축소반대, 실업예산 확충으로 맞추어졌다. 3단계 공공근로의 대폭적인 축소는 전국의 실업노동자들을 한자리로 모이게하며, 3000명이 모이는 실업자대회를 가능하게 했다. 자활사업·국민기초생활보장법·공공근로의 3대 쟁점사안에 대한 대응과 계획을 중심으로 실업운동진영은 움직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렇나 3대 쟁점을 관통하는 실업운동의 요구는 모호했다. 현안에 대한 구호는 존재했으나, 실업을 제거하기 위한 정치적 구호는 부재했다. 전실연은 2001년 논의를 통하여 실업문제의 사회화와 실업운동의 주체형성, 연대운동의 강화를 목표로 설정했으나, 구체적인 요구나 사업으로 확대되지 못한채 흐지부지 되었다. 대량실업 직후 'IMF 재협상', '구조조정, 정리해고 반대', '노동시간 단축을 통한 일자리 창출'이외에 실업운동진영이 자신의 정치적 요구를 명확히 한적이 한번도 없다. 또한 현재 일자리를 지키고 있는 사람들은 임금인상과 고용안정을 위해 싸우고 이미 실업자가 된 사람들을 위해서는 사회적 안전망을 요구한다는 식의 이분법적 사고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취업자와 실업자가 원하는 것은 "안정적인 일자리"이다. '안정적이고 떳떳한 일자리의 적극적 창출'은 계속적으로 강조되고 확인되어야할 요구임에도 이는 선명하게 제출되지 못했다. - 실업자에서 '실업노동자'로 이시기 실업운동의 유의미함은 그동안의 '실업극복'사업에서 '실업운동'으로의 정체성을 확립해야한다는 요구들이 분출되었다는 것이며, 실업자를 '실업노동자'로 규정하며 주체조직화운동에 대한 고민을 확대했다는 것이다. '실업노동자'라는 언명은 실업자와 노동자가 본질적으로 동일한 조건에 서 있다는 원칙적인 관점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리고 구조조정 상황에서 모든 노동자는 잠재적으로 실업의 위험을 가지며, 실업자들은 영원히 실업상태를 지속할 수 없기 때문에 다양한 방식으로 불안정한 노동의 한 부분을 차지한다. 노동자나 실업자 모두는 자신의 노동을 팔아야만 일용할 양식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실업자와 노동자라는 대립적 개념이 아니라, "실업노동자"라는 인식을 통해서 양자의 동질성을 파악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실업자가 중장년실업자인가 청년실업자인가 정리해고자인가과 무관한 것이며, 노동자라고 하는 규정자체가 '노동조합'이라는 조직형태로 귀결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하고자 했다. - 실업운동/제3섹터운동 실업운동진영이 논의를 돌아보면서 주목할 만한 부분이 있다. 편의상 이름을 붙이자면 실업운동/제3섹터운동의 논의가 그것이다. 실업극복활동의 방향성을 실업자'운동'으로 잡을 것인가, 아니면 지역의 자활사업·제3섹터사업을 통한 지역운동의 영역으로 잡을 것인가 하는 논점이다. 이러한 논의는 표면적으로 활발히 진행되지는 못했으나 둘다 계속적으로 제기되면서 단체 및 활동가들의 주된 고민의 한축이었다. 이는 실업운동에 대한 고민을 활발하게 하는 긍정적 요소를 지녔으나 거꾸로 그 둘을 선택 혹은 다른 지점의 문제로 사고하는 편향을 낳았다고 보여진다. 즉 실업자운동이라는 포괄적 영역과 자활사업 등 하나의 영역의 문제를 동일한 심급으로 보면서 전자에 있어서는 구체성의 결여를, 후자에 있어서는 운동성의 배제를 가져오는 경향이었다. 여기에는 자활사업에 대한 과도한 긍정성 부여, 혹은 이를 통한 대안의 모색에 대한 맹목적 의미부여가 있었음을 부인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이같은 논의를 통하여 암묵적으로 실업극복단체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명확히 할 것을 강제받았다. 지역의 기반과 '선의'를 가지고 정부의 비판적(혹은 경쟁적)협력자로 남을 것인지, 실업의 '제거'를 위하여 실업대중 스스로가 조직하는 길고 지난한 투쟁의 길에 나설 것인지. 그러나 논의는 지속되지 못했으며, 자활사업 및 제3섹터논의는 자활후견기관의 몫으로 넘겨졌다. 실업운동이 지속되면서 실업운동의 방향과 요구를 밝히는 방향이 아니라 오히려 모든 것을 포괄하는 방식으로 활동이 진행되면서 실업운동은 재편되지 못했다. - 사회·민중운동과의 연대의 단절 실업운동진영은 사회·민중운동진영과의 연대를 어디로부터 꾀할지 알지못했거나, 역량의 한계를 이유로 뒤로 밀어놓은 듯 하다. 그러나 실업운동의 목표가 '궁극적'으로 실업의 '제거'에 있다면 실업과 불안정노동을 강요하며 빈곤을 확산시키는 원인이 신자유주의 정책과 구조조정에 있음을 분명히 확인해야 한다. 이는 어느 한 세력의 역량으로 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또한 각각의 차이는 있다할지라도 이에 대해서는 투쟁의 한 괘를 같이 하고 있음을 알 수 있기에 '자주성'을 기반으로 한 '연대성'의 구현에 보다 적극적으로 나서야 하는 것이다. 결국 실업운동진영은 사회적 이슈에 대해서 실업노동자로의 목소리를 내거나 실업의 문제를 제기하지 못하며, 부문의 운동으로 스스로를 국한시켰다. 또한 투쟁하는 주체들의 연대를 통한 실업운동의 제기와 주체의 조직화로서의 실업운동이 아닌 '스스로의 조직'을 위한 활동이 중심이 되며 사회운동으로의 실업운동을 제기해내지 못했다. 3) 2004년 현황 전실연은 상반기 수련회를 통해 법인 총회를 열고 법인 설립을 결정했다. 전실연은 사회적 일자리에 대한 전국적인 사업단을 구성하여 그중 여성일용가사사업단을 브랜드화('우렁각시')하여 발족했다. 전실연은 향후 실업운동의 방향에 대해 실업노동자의 조직을 통한 주체운동으로서의 묘연함과 '실업'을 중심으로 활동하기 어려움을 제기하며 정책적 역량을 강화하고, 모니터링 등을 통한 대정부 정책제안을 제안하고 있다. 실업극복국민운동위원회 해소 이후 남은 기금은 '실업극복국민재단'이 설립되어 운영하고 있다. 실업극복국민재단은 '일자리만들기운동본부'를 제안하여 발족을 앞두고 있다. 3. 실업운동의 평가와 과제 약평을 통해서 실업운동의 시기별로 평가할 지점들을 서술했다. 실업의 원인에 대한 진단을 통해 실업운동의 목표와 요구를 설정하지 못한 것이 가장 큰 문제점이다. 실업운동의 목표와 요구의 부재는 결국 실업운동이 운동으로서의 자기 역할을 수행하기 보다는 '물질화된 조직'으로 화석화되면서, 스스로의 활동을 축소시키는 경향을 낳았다. 그렇다면 실업운동은 무엇인가? 실업운동이 실업노동자가 주체가 되어 '실업'의 원인을 제거하고, 모두가 떳떳하고 안정적인 일자리에서 스스로의 노동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받는 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것이라면 그동안 온전한 의미에서의 실업운동은 존재하지 않았다. 실업노동자들에 대한 관리와 실업자에 대한 구제정책만 있었을 뿐이다. 많은 실업단체들이 있었지만 실업노동자들은 실제로 실업운동에서 주체로 서지 못했다. 실업노동자들은 구호의 대상으로 전락되었고, 자신들의 요구에 근거한 독자적 조직을 꾸리는 데 실패했다. 실업노동자들의 권리를 당연한 권리로 인정하게 하는 데에도 실패했다. 즉, 실업자운동으로의 실업운동은 형성되지 못한 것이다. 대량실업 초기 거리로 밀려나온 실업자들을 조직하거나 정리해고된 노동자의 조직화를 통해 실업운동의 주체를 형성하려던 시도는 실패했다. 그 이후 일상적인 사업을 통해 중고령 장기실업자를 조직하려던 시도는 지금도 진행중이나 아직까지는 긍정적으로 평가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실업노동자'는 누구인가? 노동의 유연화로 인한 노동의 불안정화는 대다수의 노동자들을 실업의 위협에 놓이게 했을 뿐 아니라 일상적으로 실업과 취업을 반복하게 하고 있다. 즉,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는 실업노동자는 거의 없다는 것이다. 다양한 불안정한 일자리를 떠도는 노동자들과 노동시장에서 배제된 중고령장기실업자와 청년실업자. 이러한 실업노동자들의 다양한 군에 대한 구체적인 파악과 계획없이 실업노동자의 조직화는 여전히 어려운 문제이다. 또한 '실업노동자'의 '조직'에 대한 상조차 불분명하다. 그동안의 논의속에서 노동조합(일반노조 혹은 실업자노조)이나 자조모임 등의 상이 제시되었으나, 어떠한 것도 정확한 조직적 상이라고 보기 어렵다. 그동안 실업단체들의 활동은 '실업운동이라기보다는 실업이라는 현실공간에서 다양한 배경과 지향을 갖는 단위들이 운동적 접근을 하고 있는 상황(실업운동의 전망과 과제, 김홍일)'이었다. 이는 '실업문제를 중심으로 다양한 운동의 연대와 결합이라는 긍정적 차원과 함께 실업운동의 단일한 지향과 목표설정의 한계가 존재함을 의미한다. 그러나 실업단체들은 '실업'이라는 문제를 다양한 방식으로 접근해왔으며, 사안적 연대라기 보다는 '실업문제'에 대한 일관된 정책방향을 제시할 것을 요구받았다. 즉, 다양한 요구는 실업운동에 대한 고민으로, 나아가 실업문제 및 실업운동에 대한 방향을 제시하고 이에 따른 일관된 정책제시와 실천을 통해 정체성을 확보, 사회운동으로 자리매김해야 한다는 인식의 발전으로 이어졌다. '실업'의 문제는 이슈화되지 않지만 그렇기 때문에 실업운동이 '실업'만의 문제로는 한계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실업'의 문제를 극명하게 제출하기 위하여 '실업'의 문제가 실업노동자의 삶속에서 어떠한 구체적 문제들로 드러나는지를 보다 폭넓게 바라봐야 한다는 과제를 설정하기도 했다. 그러나 실업단체들은 실업문제의 근본적인 원인을 폭로하고 그 투쟁을 신자유주의 반대투쟁으로 확장시키는 데에 실패했으며, 불안정노동과 빈곤의 문제를 통해 실업의 문제를 제기하는 것도 실패했다. 물론 실업운동을 반신자유주의 운동으로 발전시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실업의 근본적인 원인이 지속적으로 노동자들을 해고하고 노동의 유연화를 촉진시키는 신자유주의 정책에 있다면, 이에 맞서서 고용안정과 안정적인 일자리를 요구하며 정부 정책의 전면적 수정을 제기하고 나아가 신자유주의 반대투쟁에 실업운동이 위치할 수 있도록 해야했다. 실업운동(?)의 대표적 조직인 전실연은 신자유주의 정책에 맞선 투쟁을 조직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스스로의 운동을 합의주의적인 시민운동으로 축소시켜왔다. 주체를 중심으로 하지 않고 돈을 매개로 하는 지원사업이 갖는 한계는 자명하다. 기금을 활용하는 것 자체가 문제라는 것이 아니다. 기금이 '활용'이 되려면 자기 운동에 대한 명확한 방향과 요구가 있을 때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전실연은 오히려 지원을 안정화하기 위해 연대운동기구로의 전실연을 제도화하는 등 우려스러운 행보를 계속하고 있다. 전실연은 스스로의 냉철한 활동평가를 통해 '실업운동체'로서의 역할을 재정립하고, 민중운동진영과 함께 사회운동·주체운동으로서 실업운동의 길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실업운동의 주체는 반신자유주의투쟁의 주체이기도 하다. 민중운동진영 또한 실업운동을 어느 한 영역의 운동으로 국한시키지 않는 신자유주의 반대투쟁의 일 주체로 세워낼 수 있도록 해야 한다.PSS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