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사회운동
- 2019/03 제50호
저항과 시혜의 위험한 불륜
한국의 사회정책과 포퓰리즘
책을 읽으면 돈을 준다? 경기도 성남시는 만 19세가 되는 해에 관내 공립도서관에서 책을 여섯 권 이상 빌리면 지역 상품권(성남사랑상품권) 2만 원어치를 제공하는 ‘첫 출발 책드림 사업’으로 논란을 빚었다. 책을 빌린다고 반드시 읽는 것도 아니며, 하필 선거권을 가지게 되는 만 19세에만 제공한다는 것도 근거가 없었기 때문이다. 논란이 되자 상품권을 도서 교환증으로 바꿨다.
‘독서 수당’에 이어 2월 말에는 ‘어르신 수당’이 논란이 되었다. 서울시 중구는 관할 지역에 사는 65세 이상 기초생활 수급자와 기초연금 대상자에게 매월 10만 원 상당의 지역 화폐를 주는 ‘어르신 공로 수당’을 신설했다. 정부는 “현재 25만 원인 기초연금 최대 지급액을 2021년까지 30만 원으로 높이기로 계획 중인 점”, “기초연금과 비슷한 급여·수당을 지급하는 지방자치단체에 대해 국가보조금을 깎을 수 있게 돼 있는 기초연금법 시행령의 입법 취지” 등을 근거로 중구와 협의했으나 막을 수 없었다. 중구청은 저소득 독거노인 비율이 서울시에서 가장 높고, 당장 생계 문제가 걸려있다고 호소한다.
독서 수당과 달리, 어르신 수당에 대해서는 참여연대가 성명을 냈다. 중앙정부의 개입이 복지 긴축의 근거로 이어진다고 주장한다. 박근혜 정부 때 개정된 사회보장기본법에 따르면 지방자치단체가 사회보장제도를 신설 혹은 변경하고자 할 때 중앙정부와 협의해야 하는데, 당시 이 협의를 근거로 지자체의 각종 복지사업을 축소·폐지시킨 사례가 있다. 그러나 현재의 쟁점은 복지사업의 ‘폐지’가 아니라 신설되는 수당의 ‘난립’이다.
사회수당의 난립
최근 사회보험, 공공부조와 구별되는 사회수당이 증가하고 있다. 지난 대선 시기 ‘기본소득’ 공약 경쟁이 결국 사회수당 정책으로 수렴된 상황이다. 사회수당은 사회보험, 공공부조의 사각지대 대책의 일환으로 주로 아동(부모), 청년, 노인 등 노동시장 내 취약계층을 대상으로 한다. 그런데 2018년만 해도 6월 이전까지 260건에 머물렀던 지방자치단체의 복지 확대 사업은 지방선거를 치르는 과정에서 많이 증가해 연말에는 1022건에 이르렀다. 이제는 2020년 총선을 앞두고 지자체의 각종 수당 제공 경쟁이 치열하다. 현금·지역상품권·체크카드를 지급하는 방식이 경쟁적으로 늘어나고 있다.
각종 아동·청년 수당이 그 대표적인 사례다. 2019년 현재 정부는 아동과 어린 자녀를 양육하는 부모에게 수당을 제공한다. 아이를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에 보내지 않고 집에서 직접 돌보는 부모는 아이가 만 84개월이 될 때까지 월 10~20만 원의 양육수당을 받을 수 있다. 0세부터 만 6세 미만의 아동은 부모 소득과 무관하게 아동수당 월 10만 원을 받을 수 있다. 그런데 지자체도 신생아수당(강원도, 0~3세, 월 30만 원), 아기 수당(충청남도, 0~1세, 월 10만 원), 어린이 수당(부산 사상구, 0~6세, 월 10만 원) 등 비슷한 사회수당을 제공한다.
청년을 대상으로 한 수당도 마찬가지다. 정부는 졸업·중퇴 후 2년 이내 만 34세 이하의 청년을 대상으로 최대 6개월간 청년 구직활동지원금 월 50만 원을 지원한다. 중소기업에 취업해 2년~3년간 일정 금액을 적립하면 청년내일채움공제를 통해 정부가 900~1800만 원을 추가 지원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와 별도로 청년을 대상으로 한 지방자치단체의 각종 수당은 경쟁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경기도는 만 24세 청년에게 청년 배당 연 100만 원을 제공하고, 인천시는 19~39세 청년이 최대 6개월간 쓸 수 있는 드림 체크카드(월 30만 원)를 제공한다. 대전시(청년취업희망카드, 18~34세, 최대 6개월, 월 50만 원), 경상북도(청년복지카드, 15~39세, 연 100만 원)에도 비슷한 제도가 있다. 경상남도는 여성위생 수당 명목으로 여성, 청소년에게 12만 6천 원을 지원한다.
이런 각종 현금성 수당의 난립은 일견 복지 사각지대 해소를 위한 지자체의 자율적 조치로 보이지만, 그 기준이 지나치게 자의적이고, 복지제공 수준도 예산에 맞춰서 주먹구구로 결정된다. 또한 사회적 갈등이 표출되는 근본 원인을 분석하지 않고, 일시적으로 불만을 잠재우려 한다는 점에서 한계적이다. 예컨대 청년을 위한 구직활동 지원금은 청년실업의 원인을 해결하는 근본적인 대책이 될 수 없고, 여성에 대한 이중 착취의 해법도 아니다.
후견주의 사회정책
오히려 이런 사회정책들은 사회적 연대와 통합을 만들기보다 다양한 사회집단의 분할과 갈등, 생존경쟁을 강화할 수 있다. 정치인과 생존경쟁 집단 간 경쟁과 공생 과정에서 사회정책의 후견주의적 성격이 짙어지기 때문이다. 후견주의(Clientelism)란 남미, 아프리카 등 제3세계 국가에서 나타나는 취약한 민주주의를 설명할 때 자주 사용되는 개념이다. 국가자원을 활용할 수 있는 권력자가 후원자(Patron)가 되어 시민들에게 정치적 지지를 대가로 자원을 주며 이들을 수혜자(Client)로 만들어 권력을 유지하는 행위를 말한다.
저소득 국가에서 전통적으로 나타나는 후견주의적 행태는 금품선거처럼 개인적 차원에서 작동하는 모델이다. 이런 행태는 경제가 발전할수록 약화한다고 하지만,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는다. 더욱 새로운 형태는 조직화한 집단과 정치인 간의 후견주의다. 특수한 이익집단이 의회, 행정부와 같은 국가기구를 상대로 자신들의 배타적 이익을 협상하는 과정에서 ‘저항’이 일종의 관습처럼 배치된다. 정부나 지자체는 이들의 요구에 정확히 조응하지는 않지만, 정책을 통해 반응을 보인다. 특정한 정치적 행동에 대한 대가로 사회경제적 혜택을 제공하는 것이다.
이러한 후견주의는 개인이나 특수한 집단의 이익을 공익보다 앞세우기 때문에 민주주의를 약화한다. 앞서 살펴본 ‘독서 수당’이나 ‘어르신 수당’처럼 지자체 차원에서 재량권이 있고, 특정 선호에 따라 정책을 수행한다고 해서 그것이 오용이거나 불법은 아니다. 그러나 보편적인 원리와 상충하는 부분이 있고, 정치에 있어서 불분명하고 불확실한 공간을 형성한다는 점에서 정치인들의 부패행위와 높은 상관성이 생긴다.
또한 해당 정책의 대상자들은 자신의 소득에 있어서 국가에 의존하는 비중이 높아진다. 정책의 대상이 모호하고 자의적이기 때문에, 때로는 저항을 통해 정치인에게 호소할 수도 있으나, 주기적인 선거 정치에 동원되는 과정에서 적극적 지지행위나 순종을 통해 호소할 수도 있다. 이렇게 일관적이지 않은 모순적 행태로 인해 정책 대상자들은 자율적 사회운동의 전망보다는 국가의 온정주의적 시혜에 대한 의존, 혹은 그런 시혜를 ‘쟁취해 줄’ 카리스마적 지도자에 대한 의존을 강화한다.
공정성의 역습
최근 사회운동의 외양을 띠지만 대안사회의 전망이 부재한 집단행동들이 증가하고 있다. 특히 래디컬·워마드·터프처럼 새롭게 등장한 집단행동들이 ‘가해자’들에게 폭력의 부당함을 항의하고 설득하기보다 ‘피해자’ 여성들이 가진 문화적 역량을 조직하고 표출하고 행동하는 식의 정치적 방향성을 보이는 것에 주목해볼 수 있다. 이러한 방향성은 구조 변혁이나 대안적 공동체 규범의 마련을 통해 새로운 세계로 이행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여기는 청년들의 삶의 감각을 반영하고 있다. 차별, 폭력, 배제, 소외의 시대에 개개인의 생존을 위한 대응으로서의 성격을 지니는 것이다.
생존전략으로서 정치적 행동주의는 문재인 정부에게 부메랑으로 돌아온 ‘공정성의 역습’에도 적용해 볼 수 있다. 지난해 남북 아이스하키 단일팀, 비정규직 정규직화, 비트코인 규제 등에서 정부의 정책은 청년 세대의 예상치 못한 반대에 부딪혔는데, 공정성에 대한 시비에 근거해 있었다. 여기서 공정성은 문재인 정부가 내걸었던 핵심 가치다. 정유라 부정입학·학사 비리 사태는 박근혜 탄핵의 도화선이었고, 문재인과 민주당은 노력에 따른 보상, 공정한 경쟁을 호소하며 박근혜·새누리당에 실망한 보수층까지 분열시켜 포섭했다. 경제정책에서도 소득주도성장과 혁신성장을 연결하는 개념이 공정경제다. 그런데 새롭게 등장한 집단행동은 너도나도 문재인 정부의 ‘공정한’ 보상을 달라고 호소하고 있다.
그러나 이 호소들은 모호하고 모순적이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하는 일이 같다면 비정규직 차별을 없애고 정규직과 같게 대우해야 한다.”는 주장도 공정함에 호소하지만, “어렵게 취업을 준비해 정규직으로 입사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비정규직의 차등 대우는 불가피하다”는 것도 공정함을 호소한다.
문재인 정부는 자본주의 시장질서를 긍정하면서도 동시에 약한 집단에 대해 국가가 개입해서 불평등을 바로잡고자 한다. 정부의 힘으로 공정한 시장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생산수단을 사적 소유하는 자본가가 이윤과 이자(지대)의 형태로 잉여가치를 전유하는 자본주의의 모순은 공정한가? 그렇지 않은가? ‘공정성의 역습’은 자본주의를 근본적으로 비판하기는커녕 경제학적 근거도 없는 소득주도성장을 앞세운 문재인 정부의 자충수일 뿐이다.
사회운동은 정부의 후견주의적 사회정책에 대한 의존을 경계해야 한다. 두 가지 측면에서 그러한데, 첫째로 청년실업, 노인 빈곤, 성별 격차, 이주·난민의 문제 등은 정부가 해결할 수 없는 구조적 문제에서 기인한다. 문재인 정부는 국가가 다 해결할 것처럼 기만하지만, 그 기만에 넘어가 막연히 정부를 지지하기만 한다면 오히려 문재인 정부의 실패와 함께 사회운동도 공멸할 것이다. 둘째로 “약속을 실현하지 못하는” 문재인 정권에 대한 비판으로만 일관할 경우 오히려 자유한국당과 같은 보수진영을 강화할 것이다. 현 정세의 구조적 제약을 인식하지 못한다면, 사회운동은 문재인 정부의 길에서 벗어날 수 없다. 사회운동은 다른 길을 걸어가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