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여성
- 2019/02/제49호
인구정책이 웬 말? 재생산 권리가 필요하다!
백영경 외, ≪배틀그라운드: 낙태죄를 둘러싼 성과 재생산의 정치≫
2018년 대한민국에서는 성관계 경험이 있는 가임기 여성 5명 중 1명, 임신경험자의 41.9퍼센트가 낙태를 선택했다. 낙태는 음지에서 불법으로 이뤄지므로 사실상 이보다 더 많은 수치일 것이다. 한국은 낙태를 엄격히 규제하는 국가 중 하나이기 때문에, 낙태하려는 여성 중 오직 1퍼센트만이 법의 보호를 받는다. 여전히 낙태죄의 부담과 책임은 오롯이 여성의 몫이며, 낙태죄는 여성의 선택을 존중하지 않으며, 낙태 규제는 여성들에게 위험한 선택을 강제한다.
낙태는 오래된 난제다. 한국에서는 2012년 낙태죄에 대해 헌재가 합헌 판결을 내렸다. 2017년에 다시 헌법소원이 제기되었지만 아직 현재진행형이다. 2018년, 낙태죄 폐지와 미프진(먹는 인공 임신 중절 약) 도입을 요구하는 청와대 국민청원이 있었다.
낙태죄에 대한 헌법 논쟁과 그에 대한 여성운동의 이슈는 전 세계에서 끊임없이 떠올랐다. 2016년 폴란드 여성의 ‘검은 시위’는 낙태 전면금지 개악 안을 좌절시켰다. 2017년 멕시코시티에서는 어떤 경우에도 면책이 인정되는 여성의 임신 중지 권리를 포함한 주 헌법이 제정되었으며, 도미니카 공화국에서는 임신 중지 비범죄화를 가능하게 하는 법안이 부결되었고, 칠레에서는 임신 중지의 예외적 허용을 막아달라는 보수진영의 헌법소원을 헌재가 기각했다. 2018년 아일랜드에서는 국민투표로 낙태 금지 헌법 조항이 폐지 결정되었으며, 폴란드에서는 의회에서 임신 중지 제한을 더욱 강화하는 개정안을 검토했고, 아르헨티나에서는 임신 중지 합법화를 요구하는 여성 시위대 100만 명이 모였다.
세계 곳곳에서 ‘임신을 중단할 권리’를 외치는 목소리는 끊이지 않고 있다. ‘낙태죄를 둘러싼 성과 재생산의 정치’라는 부제목을 달고 출간된 성과재생산포럼의 《배틀그라운드》는, 국가와 사회가 관리하고 간섭해 온 우리의 몸이 바로 ‘배틀그라운드’이며, 그에 맞서야 하는 우리가 있는 이곳이 전장(戰場)이라는 선언의 의미다. ‘낙태의 죄’ 이면에 숨어 있는 성과 재생산권의 주요 맥락들을 법·정책·종교·문화·보건의료·인권 등 다방면에 걸쳐 분석했다.
낙태죄 폐지가 시대의 상식이 되기까지
이 책은 우선 낙태죄 폐지 운동의 정치적 의미와 국가의 관계를 짚어본다. 역사적으로 여성운동 내부에서 낙태 문제를 다룰 때 낙태죄 폐지를 주장하면서도 사회경제적 사유에 의한 인공 임신중절을 합법화하는 수준에 머무르는 경우가 많았다. 정부의 인구정책에 대한 비판과 정부에 대한 낙태 및 저출산 정책 지원 요구 사이에서 확실한 입장을 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는 낙태죄 폐지 운동이 이러한 논의와 단절하고, 인구정책의 틀에서 재생산권을 바라보는 것에 대해 비판을 시작하며 성과 재생산 권리의 보장 그 자체를 추구하게 된 과정을 설명한다. 여성이 정부의 정책에 따라 출산을 강요받거나 낙태를 강요받아서는 안 되며, 국가가 원하는 방식의 출산과 성의 통제가 편의적인 지원 정책과는 교환될 수 없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낙태와 가족계획 정책
책은 재생산권과 재생산 정치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이 결여된 채 단순히 ‘내 몸의 주인은 나’라고 외치는 자유주의적인 재생산권 담론 역시 문제가 되며, 재생산권이 자기 결정권의 문제로만 환원될 수는 없음을 분명히 한다. 임신과 출산이 오로지 ‘내 몸, 내 선택, 내 일’이라면, 임신 중지가 공적 부조(건강보험)의 지원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오기 때문이다.
낙태죄가 논쟁의 대상이 된 2010년 이전에는 오히려 인구 조절을 위해 낙태가 광범위하게 시행되었던 가족계획 운동의 역사가 있었다. 사실상 한국에서는 낙태를 하는 게 그리 어렵지 않은 상황이었다. 낙태라는 행위에 ‘태아의 생명’이 적극적으로 기재되기 시작한 것은 인구의 필요에 대한 국가의 이해관계 변화의 시기와 겹쳐진다. 2010년 낙태죄 논쟁이 촉발된 배경의 한 축은 프로라이프 의사회의 결성이었고, 다른 축은 이명박 정부의 저출산 정책 기조였다. 2010년 당시 여성운동이 낙태하는 이유 중 대표성을 부여한 것은 ‘사회경제적 사유’로 인한 낙태였으나, 이는 형법상 낙태죄를 계속 인정한다는 점에서 한계를 갖는다. 구체적으로 따져 보면, 모자보건법에 규정되어 있는 △피임 중 임신한 경우 △유전성 질환의 가족력이 있는 경우 △초음파로 확인된 태아 기형이 있는 경우 △이전 출생아 중 유전질환이 있는 경우 △양수 검사에서 염색체 이상이 확인된 경우 △태아 기형이 있어 출생 후 모자의 생존에 치명적인 경우 △산모나 태아가 전염성 질환에 걸린 상태인 경우 △임신 중 약물이나 방사선에 노출된 적이 있는 경우 △신용 불량, 파산 등 경제적 사유로 양육할 수 없는 경우다. 낙태죄 자체를 인정한다면 ‘우생학에 가까운’ 사유와 국가의 재생산 통제를 묵과하는 문제가 생긴다.
책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재생산권의 틀에 기반한 낙태 비범죄화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국가가 저출산 극복이라는 기조 아래 임신과 출산을 강제하고 있는데, 이러한 상황을 벗어나려면 재생산 권리를 실질적으로 보장해야 한다는 것이다.
인권과 보건의료의 관점에서 본 임신 중지
전 세계적으로 한 해 5600만 건의 유산이 일어나며 이 중 2500만 명이 비과학적이고 안전하지 못한 낙태 시술을 받고, 700만 명이 인공유산 합병증이 발생한다고 한다. 때문에 책은 여성의 건강에 대한 권리의 일환으로 낙태가 보건의료 체계 내에서 공식 논의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흔히 임신 중지가 쉬워지면 임신 중지율이 높아지리라 생각하지만, 통계적으로 임신 중지의 합법화 정도와 임신 중지율은 상관관계가 없음이 밝혀져 있다. 실제로도 전 세계에서 임신 중지율이 가장 낮은 곳은 북미와 북서부 유럽인데 둘 다 임신 중지가 합법적으로 허용되는 지역이다.
또 임신 중지를 건강권으로 접근해야 하는 이유는 개발도상국의 높은 모성 사망(산모가 임신 또는 임신 관리로 인해 임신 중, 분만 중 사망하는 경우) 때문만이 아닌데, 의료 기술의 최첨단을 달리는 미국에서도 최근 임신 중지로 인한 모성 사망이 늘고 있으며 이는 의료보험에 가입하지 못한 사람들, 히스패닉이나 흑인과 같은 유색인종에서 안전하지 못한 임신 중지가 점점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법과 현실의 부조리, 빈부 격차, 불평등과 같은 사회적 조건 때문에 좌지우지되는 임신 중지의 불평등에 대해 건강을 추구하기 위한 임신 중지권이 필요하다.
흔히 낙태 이슈를 말할 때 태아의 생명권 대 여성의 선택권(자기 결정권)의 이분법으로 바라보는 경우가 많다. 물론 ‘생명의 존엄성’이 너무도 강력한 가치이기는 하다. 그러나 책에서는 본인과 가족의 삶과 건강을 누구보다도 치열하게 고민하고, 가장 적절한 답을 내릴 수 있는 것은 여성 자신이며, 그 결정은 생명과 선택의 이분법으로 전부 설명되지는 않는다고 말한다.
모두를 위한 낙태죄 폐지 운동
국가가 낙태를 용인하다 다시 단속을 강화한 것은 여성의 재생산을 인구조절 정책의 대상이자 도구라는 관점을 그대로 유지한 채, 인구조절정책을 출산 억제에서 출산장려로 전환한 것이다. 노동력의 양적, 질적 관리를 위해 여성의 몸은 피임 아니면 임신을 강요받아왔다. 그러나 출산율 저하 현상은 노동자들이 더 낮은 임금, 더 긴 노동시간, 더 높은 노동 강도 속에서 경쟁해야 하는 현실과 무관하지 않다. 이것을 무시한 채 국가와 사회는 더 강력하게 노동력 재생산 관리를 시도하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여성의 재생산권 없는 저출산 정책은 중단되어야 한다.
낙태 사례들을 보면 여성이 사회에서 겪는 수많은 문제가 함께 드러난다. ‘낙태는 범죄이자 살인’이라는 구도 하에서는 여성들이 왜 낙태를 하게 되는지, 여성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여성들이 입을 다물 수밖에 없게 된다. 여성이 처한 문제가 무엇인지를 드러내고, 공론화하는 것이 필요하다. 지금 필요한 것은 여성들의 목소리로 여성의 몸과 재생산에 대한 논의를 시작하는 것이다. 여성의 임신 및 출산과 아이의 양육을 둘러싼 사회 현실 전체의 변화가 동반될 때 낙태죄 폐지가 가능하다. 때문에 낙태죄 폐지 투쟁은 전체 사회운동의 과제가 되어야 한다.
이러한 과제를 실현하기 위해 2017년부터 ‘모두를위한낙태죄폐지공동행동’이 발족해 활발히 활동 중이다. 2019년이 된 지금에도 여전히 낙태죄가 폐지될 수 있을지, 요원하기는 하다. 하지만 여성들은 계속해서 싸워나갈 것이다. 국가에서 허용한 ‘제한적 낙태’가 아닌 ‘모두’를 위한 낙태죄 폐지를 위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