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보다

  • 특집
  • 2019/02/제49호

“투쟁하는 두 계급의 공멸”, 이제 마르크스의 길을 가야할 때

  • 한지원
오늘날 정세를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투쟁하는 계급들의 공멸’이라 할 만하다. 마르크스는 《공산주의자 선언》에서 “억압자와 피억압자는 항상 서로 대립하면서 때로는 숨겨진, 때로는 공공연한 싸움을 벌였다. 그리고 각각의 싸움은 그때마다 사회 전체의 혁명적 재구성 또는 투쟁하는 계급들의 공멸로 끝났다.”라고 썼다. 지금 한국의 상황을 말해주는 것 같다.
 

자본의 혁명

 
사회를 혁명적으로 재구성하는 데에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첫째는 자본의 혁명이고, 둘째는 노동자계급의 혁명이다.

자본의 혁명은 산업혁명이다. 산업혁명은 하락하는 이윤율을 상승세로 반전시키며 자본의 지배를 공고히 한다. 산업혁명은 노동과 자본을 동시에 절약하는 생산 과정의 진보와 상승한 노동생산성을 상품소비로 실현시킬 수 있는 사회제도의 진보를 동시에 필요로 한다. 20세기 초 포드주의 컨베이어벨트 대량생산 시스템도 대량 소비와 금융의 비생산적 투자를 규제한 케인즈주의라는 제도와 결합해서 비로소 ‘산업혁명’이 될 수 있었다.

그런데 최근 이야기되는 4차 산업혁명은 기술적 진보에서나, 사회제도의 진보에서나 이전의 변화에 한참 미달한다. 인공지능이나 디지털 기술의 선전에도 불구하고 노동생산성 증가 속도는 이전 어느 때보다 둔화되고 있다. 제도적 변화는 오히려 위기를 키우고 있다. 세계 금융위기 이후 양적완화·재정완화가 지속되면서 재정 위기, 민간부채 위기가 심각해지고 있다.

한국은 어떠한가. 산업혁명은커녕 추격성장의 한계만 드러나고 있다. 한국 자본주의는 추격 성장 전략을 택한 1970년대 이후 40여 년 간 일본을 열심히 따라잡았다. 하지만 그 이후의 성장 전략은 부재하다. 조선업의 해양플랜트 도전 실패, 현대차의 미래형 자동차 부진, 철강·석유화학 등 소재산업의 고도화 지체 등이 그 사례다. 삼성전자 반도체를 제외하면, 한국 기업이 기술 선도자가 되는 경우는 없다.

더군다나 한국은 고등교육기관이 몰락해 지식 기반마저 크게 약화된 상태다. 미국 유학 알선기관이 되어버린 한국의 대학에서는 독립적인 지식 축적이 불가능하다. 1980년대 이후 대학 정원이 확대되면서 추격성장 시기 양질의 노동력을 공급해왔지만, 기술 선도를 이끌 인력을 키우는 데에는 한계를 보여왔다. 서유럽이나 일본 같은 선진국들은 추격성장 이후에는 해외 유학이 감소하며 민족경제 차원의 지식 축적이 이뤄졌었다. 하지만 한국은 정반대다. 해외 유학(특히 미국)은 오히려 계속 증가하고 있다. 민족경제의 독립적 지식 축적이 없다보니 기술 선도를 목표로 하는 개별 기업은 삼성전자처럼 독자적으로 천문학적인 연구개발비를 지출하는 수밖에 없다. 삼성전자가 메모리 반도체 연구비에만 20조 원을 쓰고 있다. 이 정도 여유가 없는 개별 기업은 기술 경쟁에서 밀릴 수밖에 없다.
 

노동의 혁명

 
노동자계급의 혁명은 자본주의를 지양하는 사회혁명이다. 20세기 초 러시아 혁명이 대표적 사례다. 그런데 자본의 산업혁명과 달리 노동자계급의 혁명은 지금까지는 모두 실패했다. 러시아 혁명은 1920년대 신경제계획이 실패한 이후, 노동자계급이 아닌 당 독재의 국가자본주의로 나아갔다. 러시아 혁명과 다른 방식으로 아래로부터의 경제 재건을 목표했던 서유럽의 노동자운동도 결국에는 빛을 보지 못했다. 1970년대 이탈리아 평의회 운동은 세계적 불황과 신자유주의적 재편의 영향으로 그 기획을 철회할 수밖에 없었고, 2000년대 신자유주의와 전쟁을 비판하는 대안세계화 운동 역시 국제주의적 대안을 시도했으나, 세계금융위기 이후 그 자리를 유럽과 미국의 포퓰리즘 운동에 내주고 말았다.

노동자계급의 혁명적 운동이 실패한 것은 마르크스주의의 결함과 관계가 깊다. 실제 역사에서 마르크스주의는 마르크스가 말했던 개인적 소유의 재건을 국가 소유로 대체해버렸고, 생산자연합 또는 평의회를 통한 아래로부터의 경제적 변혁을 위로부터 당이 주도하는 계획으로 대체해버렸다.
 
 
그런데 사실 마르크스적 관점에서 이행이란, 노동자계급이 평의회를 건설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드는 것이다. 계급적 단결의 수준, 경영·생산 과정에 대한 집단적 지식의 수준, 화폐 경제를 밀어낼 수 있는 협동조합(평의회)의 생산과 분배 수준을 높이는 것이 곧 이행이다. 국유화는 노동자 간 경쟁을 제한하고, 노조의 기업통제권을 넓히며, 시장 경제를 제한하는 측면에서는 도움이 될 수 있으나, 결국 소련처럼 국가단일기업 내에서 당이라는 새로운 자본가가 만들어지거나, 중국처럼 소유만 국영일 뿐 민간기업과 전혀 다르지 않은 형태로 경영과 생산이 조직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노동자계급의 혁명이 다시 일어날 수 있을까? 한국 사회에서? 오늘날 노동자운동의 상황을 보면 힘들어 보인다. 단적으로 지금의 노동자운동은 문재인 취임 이후 거의 모든 문제를 정부더러 해결해달라며 청원에 열을 올리는 중이다. 이제는 최저임금, 비정규직 정규직화, 산업재해, 노조탄압, 정리해고 등 제도적 문제만이 아니라 단위 사업장 문제까지 모조리 대통령을 찾는다. 민주노총 위원장은 당선과 함께 대통령 면담을 요청하고, 대통령 일정 중에 잠깐 만나 노동현안을 해결해달라고 부탁한다. ‘만납시다. 문재인 대통령’이 투쟁구호로 사용되는 시대다. 정부를 총자본의 대리인으로 규정하고 투쟁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개혁적 제도를 설계해 정부에 실행을 요구하는 것도 아니다. 노동자운동은 사회변화의 대안세력이 되지 못하고 있다.
 

투쟁하는 계급의 공멸

 
위기에 대처하는 자본가의 무능, 대안이 되지 못하는 노동자운동. 그야말로 마르크스가 말한 ‘투쟁하는 계급들의 공멸’이다.

대개 이러한 계급들의 공멸 뒤에 오는 것은 극단적 포퓰리즘이다. 포퓰리즘은 사회 변화에 관한 과학적 비전이나 역사적 맥락보다, 기득권에 대한 악무한적 비난, 영웅적 정치인, 대중의 정념에 근거한 정치를 의미한다. 1930년대 독일에서는 바이마르 정부의 몰락, 공황에 대처하는 자본의 무능, 노동운동의 지리멸렬이 이어지다 히틀러가 반유대주의와 전체주의를 앞세워 대중을 조직했다. 2010년대 미국에서는 기성 정치인의 부패, 일자리나 빈부격차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자본의 무능, 민주당지지 이상의 대안이 없는 노동운동의 한계를 배경으로 인종주의와 무역전쟁을 공약으로 내건 트럼프가 등장했다. 세계 금융위기 이후 유럽에서 발흥하는 인종주의 극우 정당들도 같은 흐름 속에 있다.

일각에서는 포퓰리즘 시대가 좌파가 대중을 조직하고 세력화할 수 있는 기회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더욱 관건인 것은 좌파가 사회 변화의 과학적 대안을 갖췄느냐다. 그렇지 않은 상황에서 좌파가 포퓰리즘에 올라타는 것은 결국 우울한 미래로 가는 급행열차를 탄 것이나 마찬가지다. 좌파 포퓰리즘의 사례로 인용되는 베네수엘라나 그리스의 현재를 보면 이를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지금과 같은 상황이 이어지면 우리나라도 결국 비슷한 비극을 맞이할 공산이 크다. 현재 문재인이 겪고 있는 딜레마가 이를 방증한다. 문재인 정부는 소위 말하는 진보진영의 개혁 의제들을 상당수 받아들였다. 그리고 정부의 힘으로 실제 실행을 추진했다. 하지만 그 결과는 역설적이다.

재벌개혁은 문재인 정부가 수용했고 진보개혁진영이 오랫동안 주장해왔다. 그 내용은 대체로 지배구조 개선, 원·하청불공정거래 개선, 재벌로부터의 골목상권 보호다.
 

지배구조 개선의 경우 족벌 경영을 대체할 대안적 세력이 없다면 오히려 독이 될 수 있음이 드러났다. 엘리엇 같은 초국적 사모펀드는 삼성그룹과 현대차그룹의 지배구조 변화 과정에 개입해 막대한 차익을 얻었고, 재벌은 주주를 달래기 위해 외국인들에게 어마어마한 배당을 줬다. 초국적 사모펀드가 내세운 논리가 바로 ‘주주의 권리’였다. 그런데 주주의 권리를 위해, 그리고 주주의 행동을 통해 족벌 지배를 규제하자는 주장은 진보개혁진영의 재벌 개혁론이기도 하다. 과연 이것이 한국의 노동자들에게 득이 되는 것일까? 아니다. 재벌개혁의 관건은 사회의 어떤 세력이 재벌을 통제하고 경영할 수 있느냐다.

원·하청 불공정거래도 마찬가지다. 중소기업이나 자영업자의 어려움은 재벌대기업의 하청 쥐어짜기가 영향을 미치는 것은 사실이나, 보다 근본적 문제는 중소기업이 대기업을 상대할만한, 또는 독립적으로 영업을 할 만한 경쟁력을 갖추고 있지 못하다는 점이다. 유통재벌의 사업영역을 제한해 골목상권을 보호하자는 정책도 그렇다. 우리나라의 자영업은 노동시장에서 배제된 노동자들이 향하는 마지막 피난처다. 그래서 일부 학자들은 자영업을 노동시장의 배수통이라 부르기도 한다. 골목 상권 보호가 목표가 아니라 골목상권으로 더 이상 노동자들이 내몰리지 않도록 좋은 일자리를 늘리는 것이, 자영업자가 좀 더 자본을 집적할 수 있도록 대책을 세우는 것이 중요하다. 골목 상권 보호식의 대책은 노동시장의 배수통을 더 키워 노동시장에서 내몰릴 더 많은 노동자를 자영업에 가둬두자는 것에 다름 아니다. 자영업자의 삶이 나아지지도 않는다.

마지막으로 최저임금 1만 원은 제대로 실행되지도 않았지만 되었더라도 큰 문제가 됐을 가능성이 크다. 시장의 수요·공급 법칙을 넘어설 대책이 없었기 때문이다. 저임금 문제는 복합적이다. 저 생산성·저 수익 부문에서는 최저임금 제도로 인해 고용이 감소할 수밖에 없다. 저 생산성 부문의 구조개혁과 고 생산성 부문의 새로운 고용 창출이 동반되지 않는 상황에서 최저임금의 급격한 인상은 고용문제를 야기할 수밖에 없다. 더군다나 한국 경제는 단기간의 수요 확대를 기대할 수 없는 저성장 상태이기에 문제는 더욱 심각하다. 진보개혁 진영은 수 년 째 최저임금 1만 원을 주장하고 있는데, 최저임금 인상분만큼 고 생산성·고 임금 부문에서 일자리를 늘릴 방안은 내놓지 않는다. 정부가 알아서 해결하란 식이다. 노동조합도 고임금 부문에서의 연대임금·연대고용에 대해서는 침묵하기 일쑤다.
 

다시 변혁을, 마르크스의 대안을!

 
진보진영이 이렇게 자기모순적인 주장을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변혁적 지향을 내버린 상태로 분배 문제 해결책을 제시하려다보니, 그리고 노동자 내부의 심각한 격차와 조직 노동의 배타적 이익을 추구하는 행동을 우회하려다보니 그런 게 아닐까 싶다. 사실 진보진영의 해결책들은 자본도, 노동자도, 대공장 정규직 노동자도, 최저임금 노동자도, 모두가 불편해 하지 않을 것들이다. 그대로만 실현된다면 모두가 행복할 수 있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런 건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다. 계급 갈등은 투쟁 없이, 한 계급의 패배 없이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이 마르크스의 주장이었다.

마르크스가 사회주의를 이야기한 문제의식을 다시 생각해보자.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근대의 약속인 평등, 자유, 풍요의 공동체를 끝까지 추구할 수 없다고 비판했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봉건제에 비해 훨씬 풍요로운 체제임은 인정하지만 딱 거기까지다. 기회의 평등, 거래의 자유, 이윤을 통한 풍요는 스스로 모순을 가지고 있으며, 자본주의적 발전과 함께 그 모순이 심화된다. 우리 공동체의 모든 개인들이 충분하게 평등, 자유, 풍요를 누리려면, 자본주의는 반드시 지양되어야 한다. 그리고 마르크스는 당대 노동자에게 평등한 생산수단 소유(사회화), 자유로운 노동(노동권), 풍요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한 생산(협동조합)을 지향하는 운동을 만들자고 제안했다. 우리가 보통 사회주의라고 부르는 그것이다.
 
 
이런 사회주의적 지향에 따르면 진보진영은 스스로 생산을 어떻게 조직할지, 그리고 그런 조직화를 위해 노동자 내부의 갈등을 어떻게 해결할지 구상해야 한다. 소득 분배만 해주면 나머지는 시장이 알아서 해결해준다는 환상은 집어치우고 말이다.

족벌 경영이 싫다고 주주나 펀드에게 경영을 감시하라고 요구하기보다, 노동자가 거대한 재벌을 통제하기 위해 필요한 게 무엇인지 찾아야 한다. 노동자들이 경영과 생산에 관한 지식을 집단적으로 축적할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 저임금이 문제라고 정부더러 법정 최저임금을 크게 올리라고 요구하기보다, 임금소득 상위 15퍼센트에 속한 노동자들이 어떻게 자신들의 단체협약과 투쟁으로 저임금노동자를 살릴 수 있을지, 대기업·중소기업, 수출산업·내수산업, 정규직·비정규직으로 나뉜 노동시장을 노동자가 주도하는 어떤 제도로 통제할 수 있을지 연구해야 한다. 회사 청산 위험이나 구조조정에 처한 노동자들이 정부 지원으로 상황을 모면하기보다, 그 기업을 자신이나 사회가 어떻게 경영할 수 있을지 답해야 한다. 4차 산업혁명 같은 기술변화가 문제라면, 일자리를 보장하라고 요구하기보다, 그 사회에 필요한 지식을 달라고, 대학 교육에 준하는 유급 교육시간을 단체협약으로 요구해야 한다. 사회주의적 지향은 노동자가 생산을 재조직하는 주체가 되는 것이지, 분배의 객체로 소외시키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이 시대 진보진영의 위기는 이명박근혜 식 탄압이 아니다. 오히려 문재인처럼 ‘공정한 시장’을 지지하다가 정권과 함께 몰락하는 것이 진짜 위기다. 오늘날 진보세력에게는 마르크스가 이야기했던 혁명적 아이디어가 필요하다. ●
 
덧붙이는 말

이 글은 필자의 매일노동뉴스 칼럼 <왜 사회주의는 없는가>, <문재인의 왼쪽 초심은 문제가 없었는가>, <투쟁하는 계급들의 공멸>을 보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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