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보다

  • 특집
  • 2019/02/제49호

포퓰리즘의 득세, 좌파는 어디로 가야 하나

2019년 세계 정치 전망

  • 이준혁
2017년 4월, 프랑스 대선에서 중도 노선을 대표했던 엠마뉘엘 마크롱이 국민전선의 마린 르 펜을 누르고 승리를 거뒀다. 일부 논자들은 포퓰리즘 정치가 하락세로 돌아섰다는 낙관적인 전망을 하기 시작했다.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거둔 성과는 대단치 않았고, 그 역시 인기를 잃고 있었던 때였다. 유럽의 인민주의 정당이나 극우 인사의 명성도 쇠락할 것이라는 기대감이 커졌다.

반년도 지나지 않아 낙관론은 붕괴했다. 같은 해 9월 독일 총선과 10월 오스트리아 총선에서 극우 정당이 약진했다. 2018년 3월 이탈리아 총선에서는 ‘좌파 포퓰리즘’으로 평가되는 오성운동이 1위를 차지했으나 ‘극우 정당’인 북부 동맹과 연립 정부를 구성했다. ‘좌·우파  대립’이라는 전통적인 틀에서 보자면 매우 아이러니한 상황인 셈이다. 뒤이어 7월 멕시코에서도 베네수엘라의 차베스에 비견될만한 ‘좌파 정당’인 국가재건운동의 오브라도르가 대권을 잡았고, 10월 브라질 대선에서는 극우 포퓰리즘으로 ‘브라질의 트럼프’라 불리는 보우소나루가 집권에 성공했다.

세계는 끊임없는 분열과 갈등의 소용돌이로 빠져들 것인가. 여기서는 좌·우파 의 여러 분석을 소개하며 2019년 세계 정치를 전망해본다.
 

트럼프는 파시스트인가

 
미국 내에서는 트럼프를 파시즘으로 규정할 수 있다는 시각까지 퍼지고 있다. 당선 초기만 해도 트럼프를 이념적, 운동적으로 신실한 포퓰리스트라기보다는 전략적 포퓰리스트로 보는 시각이 많았다. 선거 캠페인 목적으로 과격한 언사를 내뱉었을 뿐, 전통적인 공화당의 보수주의 정책으로 회귀하는 실용주의적 면모를 보일 거라는 예측이었다.

집권 2년이 지난 현재, 트럼프는 예상을 뛰어넘어 정치적으로 독주하고 있다. 신자유주의적 긴축정책을 지지하는 공화당 주류는 멕시코와의 국경 장벽 건설을 줄곧 반대해왔으나 트럼프는 끝까지 이를 관철하고자 했다. 이로 인해 작년 12월 21일 이후 거의 한 달간 연방정부가 폐쇄되기도 했다.
 

2018년 11월 미국 의회 중간선거 결과도 트럼프의 패배라고 보기 어렵다. 연방 하원에서 민주당은 235석으로 44년 만의 최고 성적을 거두며 다수당의 지위를 되찾았으나 상원에서는 여전히 공화당이 52석으로 민주당의 47석에 비해 우위를 지킬 수 있었다. 주지사 선거에서도 공화당은 27명으로 민주당의 23명을 앞질렀다. 투표율도 49퍼센트로 최근의 추세(2010년 42퍼센트, 2014년 37퍼센트)에 비춰보았을 때 높은 편이었다. 대다수 언론이 민주당 지지층의 투표 참여 의사가 커지면서 덩달아 트럼프 지지층도 결집했기 때문이라는 진단을 내놓았다.

트럼프는 역대 어느 대통령보다 심각하게 미국 사회를 양분시키고 있다. 많은 분석가가 지적하듯, 이는 동질적이고 적대적인 두 개의 집단(순수한 국민 대 부패한 엘리트)으로 분리하고 갈등을 유발하여 ‘우리 집단’의 지지를 호소하는 포퓰리즘적 정치 행태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제도나 민주적 절차를 통해 ‘통합’을 선호하는 전통적 자유민주주의적 정치와는 완전히 다른 양상이다. 그러자 미국에서는 신보수주의적 우파나 자유주의 주류에서부터 마르크스주의자, 아나키스트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스펙트럼의 분석가들이 트럼프를 파시즘으로 규정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이들 대부분은 트럼프가 과거 2차 세계대전을 일으켰던 히틀러나 무솔리니와 같지는 않지만, 파시즘의 ‘원형적 요소’를 지닌다고 분석한다.

냉전적 자유주의자인 티모시 스나이더는 “아직 양자 간에 차이는 있지만”, “이민자를 성폭력과 연결하고, 지속해서 저널리스트를 ‘적’으로 규정하는 것에서 … 파시즘적 요소가 있다”고 지적했다. 생태 마르크스주의자인 존 벨라미 포스터도 “역사적으로 구별되는 특징”이 있음을 전제하면서도 “트럼프는 체계적인 네오파시스트이며, 그의 전간기 조상과 마찬가지로 노동력의 억압을 목표로 삼는다”고 보았다.

파시즘의 핵심은 지도자와 인민의 직접적인 결합이라는 명분으로 대의제를 부정, 즉 의회 폐쇄로 나타난다. 이에 비춰볼 때 트럼프는 의회를 무시하고 비난하기는 하지만 아직 폐쇄하지는 않았다. 트럼프의 미국을 파시즘으로 규정하기에는 아직 무리가 있다. 게다가 1930년대의 파시즘이 실제 집단적이고 대중적인 ‘운동’의 형태를 띠었고, 이에 따라 조직과 간부가 있고 이데올로기가 있었지만, 트럼프는 이런 게 없다는 분석도 있다. 파시즘에서는 이데올로기와 조직, 간부를 통해 기존 지도자를 완전히 대체하는 새로운 지도자가 나타날 수 있지만, 트럼프는 그런 메커니즘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기존 공화당의 조직에 기댈 수밖에 없었다는 지적이다.

그럼에도 이러한 논의는 트럼프의 정치가 우리와 적의 구분, 적의 악마화, 원한의 정치, 어떤 문제도 해결할 수 있는 카리스마적 지도자에 대한 맹신 등 파시즘의 원형적 요소를 가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특히 이러한 규정이 현재 정세에서 좌파에게 더 도움이 된다는 주장도 있다. 앞서 언급한 포스터는 트럼프를 포퓰리스트로 모호하게 규정하기보다는 명확하게 네오-파시즘으로 규정해야 비로소 민주당 주류가 트럼프의 대안이라는 사고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주류로 진출하는 유럽 포퓰리즘

 
유럽의 상황은 좀 더 복잡하다. 서두에도 언급했듯 독자적인 포퓰리즘 정당이 유럽 곳곳에서 약진하고 있다.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체코슬로바키아 등에서는 극우 정당이 연립정부를 구성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가장 의미심장한 것은 독일이다. 그간 유럽 국가 중 유일하게 독일만이 극우 정당의 의회 입성을 허용하지 않았었다. 나치 독일이 일으켰던 전쟁과 인종 청소에 대한 뼈저린 평가와 반성 덕분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옛말이 되었다. 2018년 9월 총선에서 유럽연합 탈퇴와 반이슬람, 반유대인, 인종차별을 주장하는 독일대안당이 전체 득표수 3위(12.6퍼센트)를 기록했다. 90석의 연방의회 의석도 획득했다.
 

포퓰리스트의 약진과 더불어 기존 정당의 몰락이 가속화되고 있다. 전후 유럽 정치는 그야말로 ‘좌·우파의 조화’라 불러도 무방한 양상이었다. 나라마다 조금씩 양상은 다르지만 대체로 사민주의 정당과 보수당이 좌파와 우파 각각을 대표하며 정권을 잡아 왔다. 그러나 극우 정당이 부상하며 이들의 자리를 잠식하고 있다. 사민주의 정당의 몰락이 더욱 두드러진다. 작년 독일 총선에서 사민당은 전후 최저 득표율인 20.5퍼센트를 기록하는 데 그쳤다. 사민당은 울며 겨자 먹기로 메르켈의 기민당·기사당 연합과 연립정부를 구성하는 데에 만족해야 했다. 프랑스, 네덜란드, 체코, 그리스, 오스트리아, 스페인, 포르투갈, 스웨덴, 핀란드도 상황은 비슷하다. 오직 노르웨이와 영국에서 사민주의 정당이 지지율을 적당히 유지하고 있다. 나머지 나라들에서는 한동안 사민주의 정당이 집권할 가능성이 매우 희박해 보인다.
 
유럽에서 특징적인 것은 포퓰리즘 정당의 부상만이 아니다. 극우 정당과 이른바 ‘좌파 포퓰리즘’을 표방해온 정당이 서로 연합하는 양상이 나타나려 한다. 몇 년 전만 해도 우파 포퓰리즘과 좌파 포퓰리즘은 집중하는 정치적 소재, 주장의 차이가 있기에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평가가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작년 이 탈리아 총선 직후 좌파 포퓰리즘 정당인 오성운동과 극우 포퓰리즘 정당인 북부동맹이 연립정부를 구성했다. 좌파 포퓰리즘 정당은 점점 더 민족과 주권에 대해 호소하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다.

앞으로 주목할 것은 2019년 5월로 예정된 유럽의회 선거다. 최근의 경향을 보건대 그동안 비주류로 여겨졌던 포퓰리즘 정당이 중심부에 진입하는 계기가 될 가능성이 크다. 유럽연합의 붕괴 가능성이 종종 언급되고 있고, 많은 문제가 동시에 얽혀있다. 미국과의 격차 확대, 중부유럽의 반(反) 자유주의 확대, 이탈리아 재정정책을 둘러싼 유럽연합과의 갈등, 프랑스에서의 정치적 불만의 고조 등이 그렇다. 반면 유럽연합을 지키려는 정치세력의 힘은 약화하고 있다.
 

차분히 대안 세력으로 성장해야

 
포퓰리즘의 득세에 가장 큰 우려를 표하는 이들은 현존 질서를 만들어낸 자유주의 엘리트들이다. 많은 자유주의적 분석가들이 온갖 책을 쏟아내고 있다. 이들은 대체로 신자유주의 세계화로 불평등이 확대되고 주류 엘리트 기업인과 정치인의 부패가 심각해졌다고 지적한다. 이러한 분석이 함의하는 것은 신자유주의 엘리트들의 자기반성이 필요하다는 주장일 테다. 그러나 이들의 해결책은 대부분 ‘새로운 뉴딜’이나 ‘포용적 민주주의’ 등 과거로 회귀하는 것에 머물고 만다. 새로운 자본주의의 성장 동력이 보이지 않는 가운데, 이를 실현할 수단은 엘리트들에 대한 강력한 통제밖에 없다. 그러나 대중의 힘이 지나치게 커지는 것을 두려워하는 자유주의자들이 스스로 반성해서 자신을 통제한다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얘기다.
 
정치의 위기가 심각해질수록 좌파의 고민은 더욱더 깊어질 것이다. 아래로부터의 힘으로 기존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한계를 짚으면서도 포퓰리즘 세력의 국수주의적 주장과는 거리를 둬야 한다. 쉽지 않은 과제다. 그러나 지금 수준에서 분명한 과제가 딱 하나 있다면, 좌파의 역량을 좀 더 키워내는 일이다. 조직적 수준에서, 그리고 이념적으로 말이다. 구체적으로 위기에 처한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대안적 사회경제구조를 고민하는 한편, 전 세계 민중의 단결을 고취하는 대안 이념과 운동, 예컨대 국제주의, 평화주의, 페미니즘을 더욱 확장해 나가야 한다. 바꿔 말하면 노동자·민중의 자기 통치 역량을 강화하는 것이다. 좌파가 이러한 비전과 운동을 통해 ‘대안 세력’으로 인정받아야 조금이라도 앞으로의 희망이 보일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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