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보다

  • 여는글
  • 2019/01 제48호

발전소의 하얀 불빛은 그렇게 쓸쓸했지요

  • 이준혁
내 사랑 외로운 사랑 /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인가요
사랑의 노래를 불러보고 싶지만 / 마음 하나로는 안 되나 봐요
공장의 하얀 불빛은 / 오늘도 그렇게 쓸쓸했지요
밤하늘에는 작은 별 하나가 / 내 마음같이 울고 있네요
 
10년도 더 전이다. 어느 날 후배가 노래를 하나 추천해줬다. 내가 좋아할 것 같다며. 김광석의 <외사랑>이라는 노래다. 이 자릴 빌려 하는 말이지만, 그땐 그다지 맘에 와 닿진 않았다. (미안하다, ○○아.) 이 노래의 쓸쓸함을 이해할 만큼 철이 들지 않았었던 모양이다. 그저 ‘공장의 하얀 불빛’이라는 가사만 어렴풋하게 기억에 남았다.

이 노래가 다시 떠오른 건 태안 서부발전에서의 그 사건 때문이었다. 구의역 김 군이 그랬던 것처럼, 故 김용균 님도 컵라면과 과자를 남기고 떠났다. 부족한 식사 시간 탓에 늘 끼고 살던 것들이다. 숙련된 노동자도 감당하기 어려워한다는, 컨베이어 벨트에서 떨어진 석탄을 치우는 일을, 24세 청년노동자는 홀로 감당해야 했다.

기억이 이 노래를 다시 끄집어낸 건, 고인이 생에 마지막에 보았을 법한 광경이 겹쳐졌기 때문이다. 달도 그리 밝지 않았던 그 날, 12월 11일 새벽 3시 23분. 발전소의 하얀 불빛은 별빛을 가릴 정도로 강렬했을 게다. 일이 시작되고 떠나는 순간까지 고인은 혼자였다.

그 새벽, 고인의 감정이 어떠했는지 우리가 헤아릴 길은 없다. 다만 그 죽음을 바라보는 우리야말로 죽음보다 더한 쓸쓸함에 휩싸여있는 건 아닐까. 근 4~5년만 해도 많은 노동자가 일터에서 목숨을 잃었다. 그때마다 우리들은 고인의 죽음을 잊지 말자며 몇 가지 다짐을 해왔다. 위험한 업무는 최소한 2인 1조 근무를 지켜야 한다. ‘위험의 외주화’가 아닌 원청이 책임져야 한다. 생명·안전 분야 비정규직은 정규직으로 전환해야 한다. 하지만 여전히 허탈한 죽음은 반복되고 남은 우리는 쓰라림에 몸부림친다.

누군가는 위선이라 부를지 모른다. 관련 보도는 한 자도 내지 않는 몇몇 기성 언론들이 우리를 바라보며 그렇게 부를지도 모른다. 어떻게 ‘내 자식, 내 일’처럼 생각이 되냐며. 하지만 많은 이들은 이 사건을 굳이 기억하려 할 것이다. 비록 위선적일지라도, 다시는 노동자들의 외로운 죽음을 반복하는 사회를 만들지 않기 위해서라도.

고인은 발전소 공기업 취업을 준비했었단다. 그래서 하청 비정규직으로라도 굳이 발전소에서 일하는 경험을 쌓고 싶었던 게 아닐까. 그 마음이 그를 태안으로, 서부 발전으로, 그리고 죽음으로 이끌었다고 생각하면 참담하기만 하다.

사실 지금도 많은 청년이 생계나 미래 경험을 위해 구직 사이트를 뒤적이고 있다. 그리고 불법, 엉터리 파견업체들이 들러붙어 그런 청년들의 고혈을 빼먹고 있다. 하청, 비정규직이 첫 사회 경험인 것이 당연한 사회. 인용한 가사처럼, 안정된 삶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인가 싶다. 이런 ‘파견 코리아’에서 또 다른 김용균이 생기지 말라는 보장도 없다.

이번 호 《오늘보다》는 파견 노동시장의 실태와 문제점을 짚어본다. 많은 이들이 반년 넘게 직접 파견업체 면접을 보거나 전화를 하면서 모은 소중한 자료와 분석을 담았다. 많이 모자라지만, 파견·하청노동자의 고혈을 빨아먹는 한국 사회가 조금이라도 나아지는 데에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다시 한번 고인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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