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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12 제47호

세계 운수 노동자, 노동조합으로 POWER UP!

제44차 국제운수노련(ITF) 총회 참가기

  • 박연수
국제운수노련(International Transport Workers’ Federation, ITF)은 전 세계 146개국 658개 가맹조직으로 구성되고, 2000만 명의 조합원을 대표하는 국제 산별 조직이다. 도로 운수(31퍼센트), 철도(26퍼센트), 민간항공(14퍼센트), 해운(17퍼센트), 항만(7퍼센트), 내륙 수운(1퍼센트), 수산(2퍼센트), 관광(1퍼센트)의 8개 업종분과와 아프리카, 아랍, 북·남미, 아시아·태평양, 유럽 등 5개 지역조직으로 구성되어 있다.
 
 
지난 10월 14일부터 20일까지 싱가포르에서 ‘운수 노동자의 힘 강화(Transport Workers Building Power)’라는 슬로건으로 제44차 국제운수노련 총회가 개최되었다. 여성 운수 노동자와 청년 운수 노동자의 주체화, 기술 발전(변화) 대응이라는 큰 강조점이 찍혔다. 또 국제운수노련의 공급사슬 장악 전략, 전 세계 노동조합의 조직화 및 투쟁 사례를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자리였다.

이 글에서는 지난 6박 7일 동안 보고 느낀 점을 간략하게 전하고자 한다. 세부적이고 구체적인 내용은 이번 호의 플랫폼 노동자 조직화 사례와 다음 호에 실릴 공급사슬 장악에 관한 글에서 이어나간다.


안전운임 국제표준 쟁취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화물연대본부는 지난 3월 30일 안전운임제 법제화를 쟁취했다. 품목 제한(컨테이너, 시멘트 운송에만 적용)과 일몰제(일정 기간이 지나면 자동으로 효력이 사라짐)라는 한계가 있지만, 화물노동자의 권리와 국민의 안전이 맞닿아 있다는 핵심 문제 의식을 실현하기 위한 중요한 첫걸음이었다. 이는 화물연대본부가 2013년부터 교류해온 호주운수노조(TWU)의 안전운임 투쟁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번 국제운수노련 총회에서 화물연대와 호주운수노조는 <동의안: 안전운임제 도입과 화주의 책임 강제를 위한 세계적 투쟁 강화>를 공동발의하고 통과시켰다. 이 동의안은 전 세계 대부분 국가에서 열악한 노동환경에 처해 있는 화물노동자들의 노동조건을 개선하고 안전운임을 국제적인 표준으로 세우는 투쟁의 토대가 될 것이다. 한국의 화물연대와 호주운수노조가 그랬듯, 세계 각 나라 운수 노동자들의 투쟁의 성과와 승리는 서로의 투쟁의 근거로 모이고 활용될 수 있다. 또한 공급사슬의 최정점에 있는 사용자(경제적 사용자, 진짜 사장)에게 안전운임의 책임을 물음으로써, 수많은 사용자를 거쳐 일을 받게 되는 화물노동자들의 조건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것이다.  
 
31호 동의안 핵심내용

1. 안전운임 도입과 안전운임 국제표준 쟁취를 위한 세계 투쟁 강화

2. 안전운임 도입과 화주의 책임 강제를 위한 호주와 한국의 투쟁에 연대
3. 각 나라 주요 화주 압박 사업과 노동기준 보장 투쟁에 지속적인 지원 (특히 유럽 국제운전 기사 조직사업)
4. 도로 운수 산업 안전과 세계 공급사슬 내 양질의 일자리에 관한 새로운 국제기준 쟁취를 위해 주요 국제노동기구 토론 참여 및 개입
5. 안전운임을 지지하는 사용자와 관계를 형성하고 안전운임제 도입과 시행을 위한 협력 지속
6. 국제운수노련 차원의 충분한 인력과 재정 배정 및 차기 총회 전 아시아태평양 지역 안전운임 국제심포지엄 개최
 

노동조합이 주도하는 기술변화

 
색다른 경험도 했다. 인도 국경 지역 히말라야 산맥을 운행하는 열차 운전석에 타보았고, 항만에서 작업하는 컨테이너 크레인도 조작해보았다. 일정 내내 싱가포르 선텍 시티 근처를 벗어나진 못했지만 국제운수노련에서 준비한 가상현실 체험을 통해 가능한 일이었다.

4차 산업혁명과 관련한 논란이 많다. 특히 자율주행 차량이나 군집 운행과 같이 노동자를 대체하는 기술은 운수 노동자들에게 치명적이다. 이런 기술은 일자리를 직접 위협하고 운수 노동자들에 대한 노동 통제를 더 쉽게 만든다. GPS를 통해 운행 위치는 물론, 운전 습관 조절이라는 명목으로 브레이크 밟는 횟수까지 사용자가 통제할 수 있게 된다. 정보가 곧 권력이 되는 사회에서 노동조합은 기술 변화에 어떤 견해를 가져야 할까?
 

국제운수노련에서는 4차 산업혁명과 기술 변화에 주목하고 있다. 기술 발전 자체를 반대하기보다, 노동조합이 기술 변화를 통제하고 노동자와 사회에 유리하게 주도해갈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국제운수노련의 핵심 문제 의식이다. 가상현실 체험을 통해 지구 반대편에서 일했던 노동자의 노동을 체험해 볼 수 있었던 경험은 이런 문제 의식을 아주 낮은 수준에서 실현해 본 사례일 것이다. 디지털화와 자동화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생산수단에 대한 소유라는 메시지가 강렬하게 남았다.
 

“This is our world too.” “여성 노동자의 세상이기도 하다!”

총회 장소를 가득 채우고 있는 화면에는 트럭 운전대를 잡고 있는 여성 운수 노동자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 리비아 항만 선원노조 위원장인 네르민 알 샤리프 동지의 여성리더십에 대한 열성적인 발언은 여성 노동자들의 폭발적인 지지를 끌어냈다. ‘세계 운수 산업에서 젠더에 따른 직업분할과 여성 운수 노동자에 대한 폭력을 종식하기 위한 노동조합 역량 강화’라는 문제의식은 거창한 보고서가 아니라 몇 가지 사진과 장면으로 설명할 수 있다.
 
 
“This is our world too!(이것은 우리의 세상이기도 하다!)”라는 슬로건으로 진행된 여성 운수 노동자 총회는 미투 운동과 페미니즘이 뜨거운 쟁점이었던 올해 한국 사회에서 노동운동과 페미니즘 운동이 적극적인 공동 행동을 하지 못했던 이유를 고민하게 했다. 여성이 삶에서 마주하게 되는 폭력과 문제를 노동조합은 어떤 관점으로 해결하고 연대하고 조직화할 것인지, 또 이를 위해 노동조합이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지 다양한 노동조합의 투쟁사례를 통하여 확인했다.
 

청년 운수노동자, 노동조합과 미래를 그리다

 
국제운수노련 총회는 청년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계속해서 강조했다. 특히 전 세계적으로 대두되는 ‘긱 경제(Gig economy, 노동의 대가를 바로 현금으로 지급하는 임시직 경제)’와 플랫폼 노동자의 조직화 흐름은 한국 노동운동도 반드시 주목해야 한다. 청년노동자는 이중적인 정체성을 가지게 되는데, 열악한 노동조건에서 노동하는 비공식·미숙련 노동자라는 정체성과 노동운동의 새로운 세대이자 새 노조 리더로서의 정체성이다. 이 융합되기 어려워 보이는 두 가지 정체성은 한국 사회에서 청년세대를 바라보는 관점과 매우 닮아있다.
 
 

네덜란드 FNV 노동조합 활동가는 이 양면적인 정체성이 노동조합을 통해 어떻게 결합하는지를 얘기해주었다. 화물 운송 부분은 너무 열악한 노동조건으로 청년세대가 기피하는 산업이 되어버렸다. 노동조합의 적극적인 요구로 노동조건이 개선되면, 청년 고용도 확대된다. 노동조합은 또 사회적 기금을 마련하여 청년고용에 대한 방안을 찾고 개선하는 데 활용한다. 청년 운수 노동자의 미래를 가장 올바르고 적극적으로 고민할 수 있는 주체는 노동조합이라는 당연한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다.
 

공급사슬을 장악하는 힘

 
국제운수노련은 1896년 런던에서 파업 분쇄에 대항하기 위한 국제조직의 필요성을 인식한 유럽의 선원노조와 항만노조 지도자에 의해 결성되었다. ‘파업 분쇄’에 ‘대항’하기 위한 ‘국제조직의 필요성’은 현재 국제운수노련의 핵심 문제의식인 ‘공급사슬 장악’ 개념과 크게 다르지 않다. 더 많은 자본축적을 위하여 개발된 기업의 공급사슬 관리 전략들은 아이러니하게도 운수 노동자가 타격할 수 있는 더 많은 초크포인트(부두나 거점 창고와 같이 세계 상품 사슬을 연결하는 운송체계의 취약점)를 만든다.

가치의 생산은 제조업에서 일어나지만, 가치의 실현은 물류 유통에서 일어난다. 때문에 운수 노동자들은 단결하면 상대적으로 강력한 파업 파급력과 교섭력을 발휘할 수 있다. 운수 노동자들이 공급사슬의 초크포인트를 타격하고 공급사슬을 지배하는 최정점 기업을 굴복시킬 수 있다면, 전체 공급사슬을 조직할 기회를 확보하고 노동조합의 힘을 강화할 수 있다. 공급사슬은 점점 더 세계적 차원으로 연장되고 확대되고 있기 때문에 운수 노동자들은 자연스럽게 국제주의를 지향하게 된다.

이제 우리는 운수 노동자에게 주어지는 이 유리한 지점들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지 답해야 한다. 신자유주의 정책의 실패와 세계 경제의 균열이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지금, 노동운동이 마주한 도전 역시 그 어느 때보다 크고 힘들다. 세계 자본주의의 미래에 노동자·민중의 자리가 어느 곳이어야 하는지는 아직 결론이 나지 않았다.
 
 
그렇지만 국제운수노련 총회에서 만난 멋진 활동가들과 세계 각국의 노동조합들은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기술변화가 만들어내는 긱 경제의 젊은 주체들, 젠더에 따른 직업 분할에 도전하는 여성노동자에게 문을 열어주고, 세계 공급사슬을 장악하기 위해 국제적 연대를 강화하는 것이다. 한국으로 돌아와 우리 사회 여러 문제와 노동운동의 과제를 마주하니 제44차 국제운수노련 총회 개회식에서부터 가장 많이 외쳐졌던 구호의 의미가 더 선명하게 다가왔다. “UNION! POWER! (노조가 힘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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