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세계
- 2018/12 제47호
하나로 연결되는 아시아, 국경을 넘어서는 노동운동
마르코 아리스테오 잘란도니 거우졸 필리핀노총(SENTRO) 활동가 인터뷰
민주노총이 2007년 시작한 아시아 노동조합 활동가 교육교류 프로그램(LEAP)이 올해로 10회를 맞았다. 홍콩,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캄보디아, 필리핀, 태국, 동티모르, 몽골의 젊은 노동조합 활동가 80여 명이 이 프로그램을 거쳐 갔다.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민주노동조합들이 초국적 자본 중심의 경제통합에 맞서 공동의 노동운동 전략을 만들고 연대를 강화하려는 목표에서다. 아시아(특히 동남아시아) 노동조합의 젊은 활동가들을 초청하여 각국의 시도를 공유하고, 아시아의 민주노조 운동이 공동으로 처한 문제를 해결하려는 방안을 함께 모색해왔다.
올해는 11월 5일에서 10일까지 일주일간 한국 민주 노동조합운동 역사 교육, 아시아 각국 노동조합의 주요 투쟁 의제와 전략 공유, 글로벌 공급사슬을 중심으로 초국적 자본에 대한 대응력 구축 논의, 마석 모란공원 참배와 전국노동자대회 참여 등 다양한 일정이 진행되었다. 이 중 필리핀노총(SENTRO) 마르코 아리스테오 잘란도니 거우졸 활동가를 만나 필리핀의 정치·경제 상황과 사회운동의 과제를 들어보았다.
오늘보다 SENTRO는 어떤 곳인지, 그리고 마르코 씨는 어떤 활동을 하고 있는지 소개해 주세요.
마르코 필리핀에는 노동조합총연맹(내셔널 센터)이 13개나 됩니다. 그 중 SENTRO는 필리핀어로 ‘센터’라는 뜻으로, ‘단결한 진보적 노동자의 센터’의 줄임말입니다. 다양한 정치적 스펙트럼의 여러 노총 중에서 SENTRO가 채택하고 있는 ‘사회운동노조주의’를 드러내는 이름이라고 할 수 있죠. 저는 SENTRO 가맹조직인 NUWHRAIN(전국 호텔레스토랑 및 관련 산업 노동조합)에서 조직과 교육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저는 올해로 27살인데, 노동운동을 시작한 지는 9년 차입니다. 상당히 일찍 시작한 셈이죠? SENTRO가 청년과 지역 공동체들을 적극적으로 조직한 덕분입니다. 저는 지역 공동체와 대학에서 SENTRO가 제공하는 노동운동 교육들을 받았습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난 뒤, SENTRO에서 하는 일들은 내 인생을 바쳐 볼 만한 일이겠다는 생각이 들어 노동조합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오늘보다 필리핀 노동운동에서 가장 중요한 과제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노동조합은 어떤 활동을 하고 있나요?
마르코 필리핀은 노총이 여러 개인데 반해, 전체 노동조합 조직률은 낮습니다. 4300만 노동자 중에서 노동조합으로 조직된 노동자는 230만 명, 전체의 5.5퍼센트 수준입니다. 이러한 낮은 조직률과 노동운동의 분열이 필리핀 노동운동의 가장 큰 문제입니다. 극우·보수에서부터 자유주의, 실리주의, 그리고 마르크스·레닌주의까지, 필리핀 노동조합의 정치적 입장은 매우 다양합니다. SENTRO는 좌파를 표방하지만, 극좌와는 구별 짓고 있습니다.
우리는 분열을 넘어 공동의 투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2012년부터 5개 주요 노총을 포함해 여러 노동조합이 모여 NAGKAISA(필리핀어로 ‘단결’)란 연대체를 결성하여 활동 중인데, 필리핀 노동운동 내 연대체 중 가장 큰 규모입니다. 연대체의 주된 이슈는 불안정 노동입니다. 필리핀에서 불안정 노동은 주로 계약직 관행(contractualization)의 형태로 나타나는데, 기업들이 노동자의 정규직화를 피하고자 6개월 미만 노동계약을 반복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관행을 철폐할 것과 하청 노동자, 단기 계약직 노동자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한 ‘종신 노동권 보장’(security of tenure) 법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 공동 투쟁을 통해서 올해 노동절 집회는 거의 모든 그룹이 함께 개최했는데, 1989년 이후로 가장 크고 단합된 규모였습니다. 불안정 노동에 맞선 공동 투쟁을 통해 연대를 확장하고 있는 것은 필리핀 노동운동에 무척 중요한 진전이라고 생각합니다.
노동조합 조직률을 높이기 위한 노력도 사활적으로 진행하고 있습니다. 현재 SENTRO의 핵심 조직화 전략은 산업 부문에 따른 조직화입니다. 한국의 노동운동은 그러한 전략에 이미 익숙하다고 들었지만, 필리핀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조직에 체계가 없어 산업에 효과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기 어려웠습니다. 산업에 따라 노동조합의 체계를 세워 산업 전반에 노동조합의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목표가 SENTRO의 차별점입니다. 또 다른 전략 중 한 가지는 미조직 산업 부문에서의 조직 확대인데 최근에는 콜센터(BPO) 노동자 조직화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오늘보다 필리핀은 인구 중 청년의 비율이 매우 높기 때문에 SENTRO가 청년 노동자 조직화에 힘쓴다고 들었습니다. 어떤 식으로 진행하고 있나요?
마르코 SENTRO의 특징은 ‘청년 노동자’만이 아니라 청년 일반을 조직한다는 점입니다. 학교, 지역 공동체, 일터 등에서 청년들을 조직합니다. 학생회나 각 정당의 학내 위원회 등을 통해서 학생들을 지원합니다. 학생들에게 노동권과 사회 이슈에 대해 교육을 진행하여, 졸업한 뒤 노동자로서 자신의 권리를 인식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필리핀은 ‘바랑가이’라는 지역 자치 공동체가 일상생활에서 매우 중요한데, SENTRO는 바랑가이 내 교육을 통해 시민들의 투쟁 동력을 조직하고 있습니다.
청년 비중이 높은 산업 부문 조직화에도 주목하고 있는데, 예를 들면 패스트푸드 노동자 조직화 사업이 있습니다. 패스트푸드 산업 전반과 지역 정부에 영향력을 행사하게 될 수 있을 때까지 여러 패스트푸드 체인의 노동자들을 동시다발적으로 조직하며, 이들과 연대하고자 하는 대학 내 학생 활동가들을 이어주고 있습니다.
오늘보다 SENTRO가 필리핀 안에서 일하는 노동자뿐만 아니라 국외에 있는 노동자들을 위해서도 싸우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마르코 네. 해외에 있는 필리핀 사람이 무려 천만 명에 달하는데, 대부분은 노동을 위해 이주한 것이고 상당수는 가사노동자입니다. 각국으로 이주한 필리핀 노동자들이 가사노동자 노동조합을 결성하고 SENTRO에 가맹하는데, 홍콩,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마카오, 대만 등에 가맹 노동조합들이 있습니다. SENTRO는 각국에서의 노동조합 결성과 가입을 지원하고, 이주한 국가와 관계없이 이들을 아우르는 하나의 가사노동자 산별노조를 건설하고 있습니다. 이는 필리핀 국내 가사노동자 조직화 사업과도 연결됩니다.
얼마 전 작지만 의미 있는 승리가 있었습니다. SENTRO가 조직한 말레이시아 내 필리핀 가사노동자들이 말레이시아 정부와 교섭을 하게 된 것입니다. 이전에는 말레이시아 내 필리핀 노동자에 대한 사안을 주말레이시아 필리핀 대사관에서 담당했습니다. 그러다 노동조합 결성을 통해 노동자들이 직접 주체로 나서게 된 것입니다. 최근에는 필리핀 노동자들이 말레이시아에 도착했을 때부터, 노동조합이 이들을 맞이하고 이들의 권리와 주의 사항이 무엇인지 교육합니다. 이를 통해 노동조합 가입이 늘고 있습니다.
오늘보다 ‘마약과의 전쟁’으로 유명한 두테르테 대통령의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필리핀 노동운동은 두테르테 대통령을 ‘독재자’로 묘사하고 있는데, 그런데도 두테르테가 어떻게 대통령으로 선출될 수 있었을까요?
마르코 필리핀은 1970~1980년대에 걸쳐 마르코스 대통령의 독재를 경험했습니다. 그러나 이에 맞선 민주화 투쟁을 통해 들어선 정권들은 경제 부흥이라는 약속을 실현하지 못했고 전통적인 부패 정치를 답습한다는 비난을 피하지 못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두테르테의 등장은 상당히 극적이었습니다. 그는 20년 동안 다바오 시 시장을 하며 지금과 다름없는 폭력적 정책들(사법절차 없이 마약범 처형 등)을 펼쳤는데, 이러한 경력이 오히려 사람들에게 “그는 다르다, 실제적인 변화를 만들 사람이다.”란 ‘희망’을 주었습니다. 기존 정치인들이나 사법체계에 대한 불신이 두테르테에 대한 기대의 바탕이 되었습니다.
오늘보다 두테르테 정권이 사회운동에 미친 영향과, 거기에 대한 대응은 어떠한가요?
마르코 두테르테는 사탕발린 공약을 많이 내놓았습니다. 취임하면 ‘6개월 안에’ 계약직 관행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약속했는데, 이 때문에 많은 노동자가 그를 지지하게 되었습니다. 두테르테는 사회운동 그룹들을 포섭하기 위해 ‘나는 사회주의자’라고 하기도 했습니다. 대놓고 지지하지는 못해도 우파 성향의 노동조합들은 두테르테에게 우호적인 태도를 보입니다. 예를 들어 SENTRO와 진보적 그룹들은 올해 노동절 집회를 준비하면서 ‘불안정노동 철폐, 임금 인상’에 더해 ‘정권에 의한 시민 살해 중단’도 집회 기조로 걸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이들의 반대에 부딪혔습니다.
두테르테 정권의 반노동, 반민중적 성격이 운동에 도움이 되는 면도 있습니다. 두테르테 정권의 인권 탄압이 워낙 극심하기 때문에 전부 단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두테르테는 사회 전반에 매우 큰 변화들을 시도하고 있고, 이것이 사회운동에도 악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습니다. ‘마약과의 전쟁’과 더불어 두테르테의 핵심 공약은 ‘개헌을 통한 연방제 도입’이었습니다. 그러나 연방제로의 전환은 지역 정치를 좌지우지하는 몇몇 가문들이 각 지역에 행사하는 영향력을 더욱 강화해 비민주적 정치 행태와 불평등을 심화시키는 결과를 낳을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보다 이번 아시아 노동조합 활동가 교육교류 프로그램 참여 소감이 궁금합니다.
마르코 필리핀과 해외 노총들과의 교류 프로그램은 많지 않습니다. 심도 있게 교육받고 교류할 기회는 정말 드물기 때문에 이번 프로그램은 무척 좋은 기회였습니다. 11월 10일 전국노동자대회에 함께한 것이 제일 인상 깊었습니다. 손에 근로기준법 책을 들고 몸에 불을 붙인 전태일 열사의 이야기는 충격적이었는데, 엄청난 비극이지만 많은 노동자에게 충격을 주고 함께 뭉쳐 싸우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리는 계기는 필리핀에도 절실하게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늘보다 앞으로 필리핀 노동운동이 어떻게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하시나요?
마르코 우리는 조직화에서 희망을 찾고 있습니다. 필리핀의 노동조합 조직률이 낮은 이유 중 하나는 비정규직 노동자의 조직률이 매우 낮기 때문입니다. 아직 제대로 된 비정규직 조직화 사업이 많지 않은데, 계약 해지를 염려하기 때문입니다. ‘종신 노동권 보장’ 법 통과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유입니다. 이 법이 통과되면 필리핀 노동자들의 정규직 비율이 급격히 상승할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에 노동조합 조직화에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내년 1월에 통과될 것으로 기대합니다.
필리핀에서는 용역회사를 통한 고용 형태가 너무나 많아서, 여론 압박보다는 노동자들이 직접 투쟁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특히 제가 조직하는 호텔 노동자 중 정규직과 비정규직은 똑같은 노동을 하지만 임금과 복지의 차이는 엄청납니다. 우리는 호텔 노동 실태를 조사해서, 실제로 정규직 노동자와 비정규직 노동자가 동일 업무를 하고 있기 때문에 정규직화되어야 한다고 투쟁했고 승리했습니다. 사실 대부분의 필리핀 비정규직 노동자가 마찬가지로 법에 따르면 정규직이 될 자격이 있습니다. 그러나 싸우지 않고서는 쟁취할 수 없고 혼자서는 싸울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노동조합의 역할은 이들이 싸울 수 있도록 함께 하는 것이겠지요. 저는 이러한 활동 속에서 큰 희망을 봅니다.
대다수 아시아 노동자들은 초국적 기업의 글로벌 공급사슬에 연결되어 바닥을 향한 경쟁에 내몰리며 저임금·장시간·불안정 노동에 시달리고 있다. 문재인 정부 역시 ‘신남방정책’이라는 이름으로 한국 기업들의 진출을 확대하려고 한다. 그러나 아시아 국가들에 진출한 한국 기업들의 무책임한 사업 관행, 특히 노동조합 적대 관행이 문제가 된 지도 이미 오래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아시아 노동조합 간의 교류와 연대는 더욱 중요해지고 있다. 이주노동자 조직화, 아시아 지역에 진출한 한국계 초국적기업의 인권·노동권 탄압에 대한 공동대응을 넘어 아시아 노동자운동의 연대를 강화해나가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