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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11 제46호

베네수엘라 경제 붕괴와 차베스의 유산

  • 김태훈
올해 초 ‘마두로 다이어트’가 인기 검색어에 올랐다. 차베스를 계승한 마두로가 집권한 2013년 이후 베네수엘라의 경제위기는 계속되었다. 그 결과 지난 2017년 한 해 동안 국민들의 평균 체중이 11kg 줄었다고 한다. 천문학적 수준의 인플레이션으로 휴짓조각이 되어버린 베네수엘라 자국 화폐도 자주 쟁점이 되었다. 

평가도 극단적이다. 한쪽에서는 경제 위기가 방만한 복지의 결과라고 비판하고 있고, 다른 쪽에서는 베네수엘라를 고립시키는 미국 제국주의를 비판한다. 보수진영의 사실 왜곡과 과도한 비난을 소극적으로 비판하는 데 머물거나, 막연히 베네수엘라 정부를 옹호하는 건 사회운동의 진전에 도움이 되는 방식은 아니다.

차베스 집권 당시부터 제기된, 차베스-베네수엘라의 ‘볼리바리안 혁명’이 직면할 수밖에 없는 구조적 제약과 차베스 정권이 대응해 온 역사를 평가해보며 교훈을 찾아야 한다. 정치, 행정, 노동자 통제 등 다양한 측면의 평가가 필요하지만, 여기서는 차베스 정부의 석유 정책을 역사적 맥락에서 평가하며 경제위기의 원인을 살펴본다. ≪라틴아메리카 퍼스펙티브(Latin American Perspectives)≫에 실린 논문 중 일부(Daniel Hellinger, 2017; Fernando and Juan, 2017)의 내용을 소개한다.
 
 

채굴권 시대에서 국유화로

채굴권 시대(1922년~1975년)는 빈센트 고메즈 독재기(1908년~1935년)에 시작된다. 이 시기에 베네수엘라 정부는 정치체제의 성격과 상관없이 석유 지대 획득 능력이 점진적으로 개선되었다. 차베스의 석유 정책은 이 시기의 심토(표토 아래에 깔린 토양층)에 대한 정부의 통제를 복구하는 것이었다.

1943년 석유법으로 베네수엘라 정부의 석유 로열티 하한선은 18.5퍼센트로 정해졌고, 채굴권 계약에서 공개입찰이 의무화되었다. 1945년에는 로열티가 석유 이윤의 60퍼센트에 달했다. 전후 석유 가격이 하락하자 정부의 이윤 분배 몫도 하락했다. 군사쿠데타로 1945~1948년에 집권한 베탄쿠르는 스탠다드 오일과 협상하여, 이윤을 50대50으로 나누되 사전 협의 없이 세금을 올리지 않기로 했다. 공산주의자 살바도르 데 라 플라자는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로열티는 ‘민족국가 소유의 심토에서 자본이 자원을 채취하는 것’에 대한 보상이라며, 베탄쿠르의 온건한 합의를 비판했다.

1960년 미국 시장 수출과 관련한 새로운 무역협정에 미국이 동의하지 않자, 베네수엘라는 사우디아라비아를 설득해 석유수출국기구(OPEC) 설립을 끌어냈다. 석유 지주 국가의 카르텔인 석유수출국기구는 다른 석유 생산국에 비해 더 유리한 지질학적 조건으로부터 차액지대를 영유했을 뿐 아니라, 생산량 제한을 통한 가격 방어로 절대지대를 추구했다.

국제 석유 자본은 생산 규모와 가격 결정권을 상실하자, 1970년대 베네수엘라의 석유 회사 국유화를 수용했다. 1975년 국유화법이 통과되고, 베네수엘라 석유공사(PDVSA, 이하 석유공사)가 세 개의 국제 석유 자본(스탠다드 오일, 쉘, 걸프)에 상응하는 세 자회사의 지주회사로 설립되었다. 베네수엘라인이 세 자회사의 최고 경영진을 차지했다. 석유공사의 경영진은 애초 국유화에 열정적이지 않았는데, 국제 석유 자본의 승진 사다리를 올라갔기 때문이다. 

1973년부터 1983년까지의 호황으로 지대 수입이 급격하게 증가하자, 석유공사는 성공적인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석유 생산을 위한 기술발전은 정체되고 있었다. 지대 수입으로 공공·민간 소비가 급증했고, 이것은 세계시장의 조건 변화에 적응하기 위한 국가 실패를 은폐했다. 정부는 석유 가격이 높을 것으로 가정하면서 국가부채를 늘려왔다. 1980년대 초 베네수엘라는 은행에 200억 달러를 빚지고 있었다. 1983년 국제유가가 급락하자 인플레이션이 발생했고, 경제 위기가 시작됐다. 
 

신자유주의적 석유 개방

석유 가격이 하락하자 국제 수요가 증가했다. 석유공사는 ‘국제화’를 명분으로 국가통제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1983년 독일기업인 베바 오일의 지분 50퍼센트를 구매하는 것이 그 시작이었다. 1989년~1993년, 페레즈 대통령은 석유생산에 외국인투자를 수용할지 말지 망설였다. 그러나 1989년의 카라카소(가솔린 가격, 교통 요금의 인상 등에 반발해 수도 카라카스에서 일어난 일련의 시위·폭동. 진압과정에서 2000명 이상의 사상자가 발생했다)는 페레즈 대통령에게 큰 타격을 주었고, 그는 외국인투자를 수용했다.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에 맞선 투쟁이 역설적으로 석유 기업의 신자유주의적 공세를 돕게 되었다. 

석유공사는 표면적으로는 낡은 유전의 수명을 연장하지만 실제로는 채굴권 임대에 가까운 서비스 계약을 시작한다. 다음으로 초민족 석유 기업과 합자회사를 설립하기 위한 법적, 재정적 구조를 창출하고자 했다. 채무 때문에 외환이 절실한 베네수엘라 석유부는 석유공사와 합의에 도달했다. 

1994년에 집권한 칼데라 대통령은 석유산업의 중심부인 탐사, 경질유와 중질유 생산에서 외국 자본 합자회사 모델 승인의 건을 의회에 제출했다. 이 계약에서 베네수엘라 자본은 하위 파트너로서 이윤은 공유하지만, 경영과 생산에는 거의 통제권을 행사하지 못할 수도 있었다. 로열티는 표면적으로 16.67퍼센트로 고정되지만, 초중질유의 경우 1퍼센트까지 축소될 수 있었다. 국가이윤참여 명목의 초과이윤 과세가 부과될 수 있지만, 비용을 공제한 후에야 적용될 수 있었다. 

이러한 석유개방이 사유화(privatization)의 서막이라는 주장도 있으나, 외국인 투자자의 입장에서 석유공사를 국유회사로 유지하는 데는 이점이 있었다. 운영 약정, 이윤 분배 약정, 서비스에 관한 계약은 전형적으로 다음과 같은 조항을 포함했다. ①향후 정부가 도입하는 어떤 변화에 대해서도 베네수엘라 석유공사가 법적 책임을 진다. ②분쟁은 국제중재재판을 거친다. (석유공사의 해외자산이 분쟁에 따라 압수될 수 있다. 실제로 엑손-모빌과 코노코-필립스는 차베스의 재국유화에 저항하기 위해 이런 시도를 한다.) 
 

차베스의 석유 정책

석유개방 정책은 1997년~1998년에 정점을 기록했다. 석유수출은 최고치를 기록했으나 국가 석유 수입은 지난 10여 년의 절반 이하를 기록했다. 재정 수입 감소는 투자 유인을 위한 일시적 필요악, 지대추구 경제를 극복할 장기 전략으로 간주됐다. 그러나 1998년 경제위기와 베네수엘라 재정위기가 닥치자 다시 로열티 수입을 되찾기 위한 전쟁이 시작되고, 이는 1999년부터 시작된 차베스 임기 동안 더욱 심해졌다. 

차베스의 5공화국 운동은 석유산업의 국제화를 재평가하고, 석유수출국기구를 다시 강화하며, 탄화수소 세금 법을 개혁하고, 과세에 관한 전문성을 강화하자고 주창했다. 2001년 재계약의 조건을 극적으로 변화시키는 새로운 석유법을 포고했고, 석유 엘리트의 반발이 발생한다. 2002년의 쿠데타는 (친 차베스 시위로 인해 단명했지만) 석유공사의 ‘정치화’에 항의하는 행진에서 시작되었다. 이후 경영진, 전문기술직 노동자에 의해 편향적으로 수행된 3개월의 조업 정지도 있었다. 

로열티를 재조정하고, 국가 소유 지분을 높이는 차베스의 석유 정책은 2006년까지 지속된다. 또한 세금 개혁 외에도 직접 사회적 지출과 국가개발펀드에 투자하도록 했다. 이 방식의 기여 비중은 점점 더 증가해 2012년에는 439억 볼리바르(베네수엘라 화폐)에 이르렀는데, 당시 로열티 수입은 200억 볼리바르였다. 여기에 국내시장에서 생산비용 이하의 가격으로 판매된 석유생산의 비용도 고려해야 한다. 차베스는 석유공사를 “국가 안의 국가”라고 불렀다. 

이러한 변화는 석유 개방 과정에서 거의 얻지 못했던 지대를 다시 국가가 가져갈 수 있게 했다. 브릭스(BRICs) 등 신흥국의 성장에 기반한 국제석유시장의 고유가도 이를 뒷받침했다. 2008년 석유지대는 지대를 제외한 베네수엘라 국내총생산의 절반 수준에 육박했다. 

차베스의 재정개혁은 자본이 생산을 지속하기 위한 인센티브를 제거하지는 않았다. 비석유 부문의 수익률을 바탕으로 다른 석유 가격에서 국가와 외국인 기업이 가져가는 수익, 다시 말해 지대와 이윤의 배분을 추정해 볼 수 있다. 외국기업의 수익률은 가격이 낮은 경우에도 베네수엘라 기업의 수익률보다 높고, 가격이 높을 때는 전형적인 국제수익률보다 높다. 

차베스 반대파들의 과장된 비판이 있지만, 석유 생산량의 감소는 미미하다. 그러나 석유 생산증가라는 목적은 실패했다. 생산량 확대를 위한 투자는 오직 외국인 투자에 의존했고, 베네수엘라 석유산업의 생산성은 미국보다 한참 뒤처져 있다. 채무는 미래 지대를 담보로 했고, 빌린 돈의 상당 부분은 환율 고평가에 사용되거나, 석유공사의 사회경제적 프로그램에 사용되었다.

환율 고평가는 베네수엘라 국내 산업이 석유지대를 영유하는 기본 메커니즘으로 베네수엘라 역사에서 반복되어 왔다. 볼리바르화를 달러로 바꿔야 하는 수입업자, 특히 해외자본은 많은 이익을 보았다. 2013년 기준 수입업자들은 89퍼센트의 구매대금을 사실상 공짜로 지급했다.(Fernando and Juan, 2017) 정부는 싼 달러를 구해 이득을 보는 것을 막고자 달러를 할당했다. 그러자 비공식 시장과 비공식 환율이 생겼다. 2015년 기준 비공식 시장 환율은 880볼리바르였지만 공식 환율은 6.3볼리바르에 불과했다. 공식 환율로 달러를 구할 수 있는 경제주체만이 석유지대를 영유할 수 있었다. 
 
 

경제적 한계와 차베스주의의 전망

차베스 정권의 경제정책은 역사적으로 형성되어 온 베네수엘라 자본주의의 고유한 취약성을 극복하지 못했다. ‘볼리바르 혁명’에 대한 여러 평가가 있다. 토머스 퍼셀(2013)은 ‘국가자원(지대)’을 ‘정상적, 생산적 자본’으로 변형하기 위해서는 급진적 조치가 필요한데, 예를 들어 “사적 소유의 철폐, 대중 참여조직의 형성을 위한 새로운 경로”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차베스의 인기가 정점에 있을 때도, 베네수엘라인들은 사적 소유나 자유주의 국가의 철폐를 향한 경향을 거의 보이지 않았다. 니콜라스 그린버그(2010)의 평가도 비슷하다. “자연자원의 지대와 결합한 수입대체 정책과 인민주의 체제는 교역 조건의 악화와 같은 외부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발전 모델을 형성하는 데 실패했다.” 석유 가격의 하락이 또다시 실질임금의 하락과 빈곤의 증가를 낳으리라는 건 분명하다. 야권 세력이 선거나 다른 방법을 통해 집권할 경우 차베스 석유 정책의 유산은 위기에 빠질 것이다. 

어떤 이들은 본래의 차베스주의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협동조합과 사회적 생산기업의 진보를 믿고 있으나, 석유지대 감소로 인해 그것이 실행 불가능하다는 사실은 애써 외면한다. 다른 대안은 석유지대를 영유하는 투기꾼과 자본가에게 ‘경제적 전쟁’을 선포하고 무역을 국유화하자고 한다. 그러나 고립적 대안은 석유지대를 더욱 감소시킨다. 또한 무역 중개 과정과 그로 인한 지대 영유 과정에 대한 통제가 없다면 문제는 또다시 발생해, 이번엔 베네수엘라 내부에서 ‘전쟁’이 벌어질 것이다. 이는 국유화의 한계를 드러낸다. 베네수엘라 노동자 계급의 정치적 요구는 국유화나 협동조합이 되어서는 안 된다. 석유 지대를 통해 소규모 해외, 민족 자본의 비효율성을 보상해주고 있는 자본가와 국가의 정책을 극복해야 한다. 생산을 조직화하는 더 나은 방법을 찾고 이를 뒷받침할 국제연대에 힘써야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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