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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10 제45호

“우리 민족끼리 만나야 통일이다”를 넘어서

한반도 평화를 위한 남한 노동자 운동의 과제

  • 김진영
북미 간 비핵화 협상이 어떻게 진행될지는 아직 불투명하다. 싱가포르 성명 이후 3개월 이상이 지났지만, 비핵화프로세스에 있어서는 진전된 바가 많지 않다. 여기에 직결된 대북 제재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남북공동선언의 이행과 자주 교류는 현실적으로 어려워진다.

현재 민주노총 지도부의 행태는 이러한 객관적 조건에 비해 다소 앞서나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현실에 대한 판단보다 더 우려가 되는 점은 민주노총 평화·통일사업 계획의 기조와 실천에서 드러나는 근본적인 방향이다. (종족적) 민족주의의 문제, 그리고 문재인 정권과의 관계 문제가 그것이다.

이 글은 최근 민주노총의 주요 평화·통일 사업의 기조를 돌아보면서, 노동자 운동이 종족적 민족주의적 담론이나 문재인 정부의 행보에 기대지 않고 한반도에서의 노동자 단결, 노동권 표준을 중심으로 한반도 평화를 위한 노동자의 과제를 설정할 것을 제안한다.
 
 

우리 민족은 우수하고 강인하다?

9월 19일, 문재인 대통령은 평양 능라도 5.1경기장에서 다음과 같은 연설을 했다. “평양 시민 여러분, 동포 여러분, 우리 민족은 우수합니다. 우리 민족은 강인합니다. 우리 민족은 평화를 사랑합니다. 그리고 우리 민족은 함께 살아야 합니다.”

8월 11일 상암 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남북노동자 통일축구대회’에서도 “우리 민족끼리”, “조국 통일” 같은 구호가 끊임없이 울려 퍼졌다. 그런데 ‘우리 민족’, ‘조국’(祖國, fatherland)이라는 구호들이 과연 한반도 평화로 나아가는 길에 부합하는 것일까. 그것이 노동자의 입장으로 충분할까.

이른바 자주·민주·통일(이하 자민통) 진영의 민족주의에 대한 전통적인 입장은 ‘한민족’의 언어적·문화적 단일성, 나아가 유전적·육체적 단일성(그리고 우수성)을 강조한다. ‘종족적 민족주의’에 기대는 방식이다. 종족적 민족주의는 민족의 신화나 상징의 공통성에 기초해 ‘민족주의 이전에 민족이 존재했다’는 관점을 지지한다. 그러나 민족주의 자체가 등장한 지 몇백 년 되지 않은, 근대 국가의 산물이다. 전 세계를 통틀어 봐도 어떠한 민족의 단일한 기원이라는 것은 본질적으로 허구적이며 역사에 대한 왜곡이다.

그런데 이게 뭐가 문제냐고? 종족적 민족주의가 강력하게 작동하는 상황에서는 여성·이주민 같은 시민적 권리를 제기하는 것이 어려워질 수 있다. 시민의 자유롭고 평등한 권리는 근대에 출현한 정치이념지만, 초월적·유기체적 존재로 상정된 민족공동체(이는 보수주의와의 공통점이다)는 시민 개인의 권리를 뛰어넘어 ‘한민족 5000년’과 같은 엄청난 역사에 근거를 둔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결국 대회 직후 민주노총과 북한의 조선직업총동맹(이하 직총)이 낸 공동합의문의 표현이 문제가 되었다. 남북 노동자를 ‘민족의 맏아들’로 호명한 것이다. 당연히 여성 노동자·이주노동자를 배제한 표현이라는 비판이 거세게 제기되었다.  물론 ‘남과 북이 공유하는 전통적인 표현’이라며 옹호하는 의견도 있었다. 결국 민주노총은 정정 공지를 내어 “성 평등하지 않고, 가부장적 위계를 함의하는 ‘맏아들’이라는 표현을 미처 확인하고 수정하지 못했”으며, 이 표현을 ‘민족의 대들보’로 정정하겠다고 공지하였다. 문제 제기의 일부만을 수용한 것이다. 

그런데 이 표현은 이번 합의문에서만 등장한 것이 아니다. 8월 10일 주영길 직총 위원장도 방명록에 “민족의 맏아들인 북과 남의 로동자들이 어깨 걸고 평화 번영의 종착역을 향해 자주통일의 기관차를 힘차게 몰아가자”고 적었다. 2014년 5·1절 남북노동자 공동결의문에도 “남과 북의 우리 노동자들은 민족의 맏아들이며 자주통일과 평화번영의 새 시대를 열어나가는 기수”라는 표현이 등장했다. 단순히 한 번 실수해서 나온 표현이 아니라는 것이다.

민족의 맏아들이라는 표현은 북한의 주체사상에 입각한 사회주의 대가정론(사회주의 북한은 하나의 대가족 공동체와 같고, 수령·당·인민의 관계를 아버지와 어머니, 자녀의 관계와 같다고 보는 개념)과 연관이 있다. 국가를 하나의 혈연적 가족으로 보는 관점은 ‘우리 민족’이라는 종족적 민족주의와 쉽게 융합한다. 이러한 결합은 북한 정권의 강력한 사회통제 정책의 근간이 된다.
 

‘판문점 선언 이행’하면 통일이다?

다른 문제도 있다. ‘판문점 선언 이행’이 노동자의 요구가 될 수 있는가. 그 판단을 위해 과거 ‘6·15, 10·4 공동선언 이행’에 대한 논쟁을 참고할 수 있다. 이 논쟁은 2010년대 초반, 민주노총이 제안했던 상설연대체 건설 논의의 주요 쟁점으로 부상하기도 했다. 당시 6·15, 10·4 선언은 남한의 자본을 중심으로 북한의 경제통합을 유도하며, 또 한미 동맹 강화 및 현대화 구상과 맞물려있기에 한반도의 근본적 평화를 실현하는 데에 한계가 있다는 비판이 많았다. 지금의 판문점 선언 역시 10년 전 선언을 확대·강화한 것이기에 지금에서도 유효한 비판이다.

당시에는 공동선언 이행 요구가 민주당을 비롯한 보수 야당과 민주노총의 전략적 연대로 나아갈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되었다. 이 역시 지금도 되풀이되는 쟁점이다. 판문점 선언과 9월 평양 공동선언을 조건 없이 환영하고 (국제정세에 영향받지 않는) 남북 정상의 자주적 결단을 지지한다는 입장 속에서는 ‘거리 두기’가 사실상 불가능하다. 

문재인 정부의 한반도 정책을 온전히 옹호할 수는 없다. 올해 9월 UN 총회에 참석한 문 대통령은 미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평화협정 또는 한반도 통일 이후에도 주한미군은 주둔할 것이라 강조했다. 문 대통령은 “주한미군은 남북관계에서 평화를 만들어내는 대북 억지력으로서도 큰 역할을 하지만 나아가서는 동북아 전체의 안정과 평화를 만들어내는 균형자 역할을 하고 있다”며 “이것은 한국의 안보에 도움이 되는 것은 물론이지만, 동시에 미국의 세계전략하고도 맞닿아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문재인 정부는 사드 문제도 해결할 의지가 없다. 오히려 지난 4월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의 첫 정상회담을 불과 며칠 앞둔 상황에서 불법적 사드 기지 공사를 강행하기도 했다. 한미군사동맹이나 ‘국방력 강화·현대화’ 문제들에서도 문재인 대통령의 입장은 지금까지 평화운동의 입장과 매우 다르다.

문재인 정부가 ‘경제는 못 해도’, ‘노동정책은 약속을 안 지켜도’ 한반도 문제에 있어서만큼은 잘하고 있다는 여론이 우세하다. 운동 진영에서도 그런 것 같다. 남한과 미국 양자에서 주요 야당들이 남북, 북미 정상 간 대화를 공격하는 상황이기에 한반도 평화를 위해서는 문재인 정부(나아가 미국 트럼프 정부까지도)를 더 지켜보고 밀어줘야 한다는 주장도 많이 제기된다. 그러나 아무리 남북대화가 중요하다고 하더라도, 사드 철회·주한미군 철수·전반적 군축과 같은 과제들은 평화운동의 입장에서 우회하거나 부차화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니다. 오히려 이 투쟁들이야말로 한반도 평화의 실질적이고도 물질적인 토대를 만들 수 있다.

물론 운동 진영이 문재인 정부의 행보를 드러내놓고 옹호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평화운동이 비판적 목소리를 내기보다는 판문점 선언 이행을 외치고 민간 교류 사업에만 집중한다면 옹호하는 것과 마찬가지 효과를 낼 공산이 크다. 
 
 

남한 노동자 운동의 과제

물론 남북노동자 교류 자체는 감동적인 사건이기는 하다. 그러나 또 한편에서는 ‘만나야 통일이다’라는 기조와 이벤트성 사업들만으로 조합원과 시민들을 충분히 열광시키지 못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교류를 위한 교류’가 계속된다면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노동자다운’ 교류 사업을 위해서는 허구적인 민족주의 입장을 강조하는 대신 어떠한 정치이념과 목표로 교류의 내용을 채울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심지어 이번 통일축구대회에 미국의 노동조합(전쟁반대노조협의회)도 참여하지 않았던가. 한반도 평화의 문제는 세계 노동자와 연대해야 하는 ‘노동자 국제주의’의 과제임을 잘 보여준 사례다.

남한 노동자 운동의 역할이 과연 무엇인지를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노동자 운동의 실천적 과제가 문재인 정부와 북한 개혁개방에 대한 장밋빛 환상이나, 민족주의적 수사나 이벤트에 기대서는 장래가 어둡다. 현재 국제정세와 남북한의 현실적 조건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한반도에서의 노동자 단결, 노동권 표준을 높여내기 위한 장기적 관점과 전략을 준비하는 것이 우선이다. 한반도 비핵화는 이제 첫 단계에 들어갔다. 남한과 세계 경제는 여전히 어려운 상황이며 북한의 경제 성장 가능성도 미지수다. 안개 속의 상황에서 남한의 노동자 운동이 정말로 ‘평화, 통일, 번영의 새 시대’를 위한 준비를 하고 있는가? 이것이 무엇보다 우선시되어야 할 질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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