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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9 제44호

이슬람 혐오를 넘어서

김동문, 《우리는 왜 이슬람을 혐오할까?》

  • 조유리
예멘 난민을 반대하는 집회가 전국 곳곳에서 이어지고 있다. 인도주의적 책임은 질 수 없으며, 분단국가 한국이 현실적으로 난민법을 지켜야 할 의무가 없다는 주장들도 많다. 하지만 ‘무슬림을 배척하는 것은 인종차별이 아니며, 이슬람교는 배척해야 한다’는 논리가 가장 눈에 띈다. 이슬람 혐오와 배제는 정당하다는 것일까?
 
 

장님 코끼리 말하기

저자 김동문은 근 30년을 이슬람 세계와 이웃해 살았단다. 1990년부터 이집트와 요르단에 정착해 살았고, 이후에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시리아, 레바논, 이라크, 예멘, 아랍에미리트를 오가며 이슬람 국가들과 관계를 이어왔다. 이슬람 세계의 목격자로서 한국인들의 이슬람 종교에 대한 무지와 편견을 참을 수가 없었단다. 이 책이 나오게 된 배경이다.

저자는 신학을 공부했다. 심지어는 스스로 보수 교단 소속이라 밝히고 다니기도 한다. 그러나 저자는 우리에게 익숙한 ‘종교’라는 틀에 이슬람을 끼워 맞추지 말 것을 제안한다. 우리 사회에서 종교는 개인의 선택이지만, 아랍 국가들에서 이슬람이라는 종교는 공동체 구성원으로서의 정체성 표현으로 여겨진다. 태어나서 어느 정도 자란 후 종교적 절차에 따라 교인이 되는 다른 종교들과는 차이가 있다. 무슬림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이슬람이라는 공동체이자 문화권에 귀속되고, 무슬림으로 인정받는다. 공동체의 관습에 의해 다른 신을 섬기지 않으며, 관습에 따라 무슬림의 다섯 기둥인 신앙고백, 라마단 금식, 자카트(수입의 40분의 1 헌금), 하루 5회 기도, 메카 성지순례를 해야 한다고 배운다. 이들에게 무슬림 정체성은 공동체, 사회, 집단에 의해 자동으로 부여되기 때문에, 이슬람 사원들은 ‘출석 교인’이나 ‘재적 교인’을 관리하지도 않는다.

저자의 말에 따르면 한국 사회에서의 이슬람교와 무슬림은 장님이 말하는 코끼리에 가깝다. 한국 사람들은 이슬람 이전에 존재했던 지역의 관습을 이슬람교에서 기인했다고 오해하기도 하고, 일부 이슬람 집단의 소행을 이슬람 전체를 대표하는 것으로 착각하기도 한다. 《우리는 왜 이슬람을 혐오할까?》는 그 무지와 편견에서 비롯된 오해들을 집요한 팩트체크로 반박한다.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이다.
 

이슬람은 여성 억압을 가르치지 않는다

문명 발생 이후, 여성 억압과 착취 없이 돌아가는 사회는 없었다. 이것으로 여성을 억압하는 이슬람 문화들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 다만 여성에 대한 억압과 차별이 이슬람의 고유문화라거나, 이슬람 때문에 발생했다고 볼 수는 없다. 오히려 이슬람교를 창시한 무함마드는 이전의 악습을 철폐하고, 여성의 권리를 존중하라고 가르쳤다.

모든 이슬람 여성들이 ‘이슬람 종교에 의해’ ‘얼굴을 가릴 것을 강요’당하는 건 아니다. 우선 여성의 머리 덮개는 이슬람 종교가 만들어지기 전부터 중동 지역에 존재했다. 중앙아시아에서도 여성의 머리 덮개가 지금까지 전통으로 이어지고 있다. 물론 이슬람 내부에는 히잡이나 니깝의 착용을 강요하는 집단도 있다. 그러나 머리 덮개는 종교적 의무와 무관하며, 여성의 자유를 존중해야 한다는 이슬람 집단도 존재한다. 이집트나 튀니지처럼 공공장소에서 니깝 착용을 금지하는 국가에서는 오히려 여성들이 반발하기도 한다.

무슬림 남성에 의해 여성에 대한 명예 살인이 발생하거나, 일부 남성이 여러 명의 부인을 두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많은 이슬람 국가들은 명예살인을 범죄로 규정하고 없애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일부다처가 법적으로 허용되는 이슬람 국가라 하여도 일부다처제가 일반적인 것은 아니며, 도덕적으로 수용하는 비율이 높은 일부 국가에서도 모든 남성이 다처를 두는 것은 아니다. 대다수의 무슬림 여성들은 일부다처를 부정적으로 생각하며, 젊은 세대일수록 기존의 가족제도를 비판적으로 생각한다.

무엇보다도 이슬람 종교는 변화하고 있다. 여성을 착취하고 종속을 재생산하는 제도에 맞서 싸우는 무슬림들이 있다. 말랄라 유사프자이는 탈레반의 타깃이 되어 머리에 총을 맞기도 했으나, 그에 굴복하지 않고 모든 여성과 어린이에게 교육권이 필요하다고 외쳤다. 타와쿨 카르만은 2011년 예멘 민주화 투쟁을 이끌었고, 여성의 안전과 인권, 또 여성이 평화를 위한 활동에 참여할 권리를 위해 싸우고 있다. 시린 에바디는 여성 법률가로서 여성과 아동의 권리증진에 힘쓰고 있다. 이들은 그저 대표적인 사례에 불과하다.
 

무슬림은 테러리스트가 아니다

한편 저자는 ‘이슬람 원리주의’와 ‘이슬람 극단주의’를 구별할 것을 제안한다. 이슬람 원리주의는 초대 이슬람 공동체 정신을 회복하려는 ‘이슬람 정신 회복 운동’이라는 의미가 있어, 급진적이고 과격한 무장 저항운동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극단주의자들이 이슬람 원리를 강조하는 것은, 이슬람이 대다수인 사회에서 대중적인 지지를 얻기 위함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무슬림은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을 경계하고, 그들이 무슬림이 추구하는 보편적 가치관을 따르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모든 테러가 이슬람 극단주의자 때문에 일어나는 것도 아니다. 저자는 1970년부터 2011년 사이 미국 내 테러 사건을 분석한 미국 국가안보부 국가테러리즘연구소 정보를 인용한다. 이에 따르면 종교적 극단주의로 인한 테러는 7퍼센트에 불과하다. 7퍼센트의 종교적 극단주의 안에는 유대교 극단주의자 등도 포함되어있다. 또한 2011년에서 2015년 사이 유럽연합에서 일어난 사건의 2퍼센트만이 종교적 극단주의자들에 의한 테러였다. 2007년부터 추산하면 유럽 내 이슬람 극단주의자에 의한 테러의 비중은 더욱 감소한다.

그럼에도 저자는 사람들이 무슬림과 연관한 총기 난사만을 테러라고 생각한다고 지적한다. 무슬림과 연관되지 않은 총기 난사나 인질극은 테러가 아닌 그저 불행한 사건 정도로 기억된다. 여기서 저자는 언론의 편파성을 꼬집는다. 대부분의 범죄 용의자는 ‘학생’, ‘주민’ 등으로 묘사하지만, 무슬림인 경우는 그가 학생이나 주민이라기보다는 ‘무슬림’이라는 ‘종교적 정체성’을 강조한다. 이슬람의 종교성과 연관 지어 ‘무슬림은 잠재적인 테러리스트’라는 고착된 편견을 드러내거나 직·간접적으로 그렇게 생각하도록 영향을 준다.
 

 

배제와 혐오를 넘어 ‘무엇’을?

중동의 권력 가문이 세력 확장을 위한 전쟁을 펼쳤던 적이 있었다. 굳이 ‘이슬람 포교’를 위해서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런데도 서구의 지식인들은 이를 ‘이슬람 포교 전쟁’으로 규정하고 ‘문명 충돌’의 문제를 제기해왔다. 서방 국가들은 중동인들을 폭력적이고 극단적인 종교주의자로 이미지화하면서, 중동 국가들을 적대시했다. 중동지역·이슬람에 대한 무지와 맞물려, 이슬람에 대한 잘못된 정보는 진실로 여겨지고 있다.

≪우리는 왜 이슬람을 혐오할까?≫는 합리적 의심을 바탕으로 한 포용과 사랑을 주장한다. 이슬람 문화에 대한 무지에서 발생한 오해와 편견을 넘어서고, 무슬림을 포용하자는 것이다. 무슬림 내부적 자성의 필요성도 덧붙인다. 이슬람이 절대적인 지역에서 오랜 시간 살아온 무슬림들의 ‘이슬람 중심주의’가 다른 세계와의 공존을 방해한다는 것이다.

이슬람포비아적 편견에 대한 꼼꼼한 팩트체크에 비해 저자의 원인 진단과 대안은 다소 아쉽다. 중동의 석유 이권을 장악하기 위한 서방 국가들의 제국주의적 침략이 있었고, 서방 국가들은 자신의 이권에 반발하는 중동 시민들을 ‘극단적’이며 ‘비합리적’인 세력으로 매도해왔다. 적어도 이 책만 보면 저자는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무시하고 있다. ‘테러와의 전쟁’을 명분으로 한 영·미의 침략에 대해서도 언급하지 않은 채, 테러집단에 대한 국제사회의 개입을 정당화하고 있다. 그러한 전쟁이 극단주의가 자라날 토양을 제공했음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무슬림에 대한 차별과 배제는 극단적 폭력을 불러일으킬 뿐이다. 고립되고 배제된 사람들이 SNS로 접한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에게 동조했던 것처럼 말이다. IS로 떠난 한국의 김 군이 그랬고, IS와 일면식도 없이 IS에 충성을 맹세하며 미국 올랜도에서 테러를 자행한 오마르 마틴이 그랬다. 이들을 실질적으로 포용하기 위해선 사랑만으로는 부족하다. 차별과 배제를 낳고 전쟁을 일으킨 서구와 그 동맹국들의 뼈아픈 반성과 사과가 더해져야 한다. 대안 세계를 위한 사회운동과 결합하기보다 종교로의 회귀를 선택한 중동 시민들의 내부적 자성도 필요하다. 이슬람포비아를 양산하는, 미국 중심의 국제질서에 함께 맞서기 위한 전략이 필요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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