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필름X정치
- 2018/08 제43호
천황 군대의 후예는 어디로 가는가
영화 <천황 군대는 진군한다>
일본이 태평양 전쟁에서 항복을 선언한 1945년, 일본 야마구치현에서 하라 카즈오라는 인물이 태어났다. 그는 사진전문학교에 입학했지만 금세 그만두었다. 대신 장애인 문제에 관심이 생겨 도쿄의 한 특수학교에서 활동보조인으로 일했다. 몇 년 뒤에는 장애인을 주제로 삼은 <바보 취급하지마!>라는 개인 사진전을 개최했다. 그 후로도 하라 카즈오는 평범한 길을 걷지 않았다. 우연히 읽은 다큐멘터리 저서에 열광한 그는 다큐멘터리 제작을 시작했다. 무작정 다큐멘터리 제작자들을 찾아다니며 영상과 다큐멘터리를 배워나갔다.
1972년, 그는 자신이 특수학교에서 일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뇌성마비 장애인들의 자립 운동을 그린 <굿바이 CP>를 연출했다. 2년 후에는 자신의 전 동거 상대이자 페미니스트인 연인의 이야기를 독특하게 그려낸 다큐멘터리 <극사적 에로스>로 더욱 많은 주목을 받았다. 하지만 그 후 10년 동안 새로운 작품을 발표하지 않았다. 조금씩 그의 이름은 잊히고 있었다.
하라 카즈오가 잠시 숨을 죽이던 때, 전혀 다른 영역에서 자신의 이름을 강렬하게 알린 인물이 있었다. 오쿠자키 겐조다. 하라 카즈오보다 25년 일찍 태어난 그는 1940년 태평양 전쟁에 징집되어 당시 영국의 식민지였던 파푸아뉴기니의 전선으로 파견되었다. 전황은 점차 암울해지고 있었다. 많은 이들이 전사했고 식량도 제대로 지급되지 않았다. 부대 안에는 말라리아가 창궐했다. 어느새 부대에는 오쿠자키를 비롯해 30여 명 만이 살아남았다. 배고픔을 견디지 못한 그는 1944년 연합군 기지에 몰래 들어가 식량을 훔치다 체포되어 포로가 되었다. 1년 뒤 일본은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다. 오쿠자키 겐조는 1946년에야 그리운 고향에 돌아올 수 있었다.
오쿠자키는 상당 기간 전쟁의 후유증에 시달린 것 같다. 그는 문제가 생길 때마다 극단적인 방법을 사용했다. 전쟁이 끝나고 연합군의 배를 타고 일본으로 돌아갈 때, 식량이 제대로 지급되지 않자 분노하여 선장을 두들겨 팬 뒤 가위로 배를 찔렀다는 이야기를 자랑스럽게 증언하기도 했다. 고향으로 돌아와 자동차 정비소를 하던 오쿠자키는 1956년 점포 임대 계약을 놓고 부동산 업자와 다투다 실수로 그를 살해하여 징역 10년형을 살았다. 1969년에는 히로히토 천황에게 파칭코(일본의 도박 기구)에 쓰는 쇠구슬을 쏘았다가 폭행죄로 1년 6개월 동안 교도소에 수감되었다. 1976년에는 포르노 사진에 천황 일가의 얼굴을 합성해 백화점 옥상 위에서 뿌리다 체포되어 외설죄로 1년 2개월의 형기를 보내야 했다. 그 뒤에도 공공연히 다나카 가쿠에이 전 총리를 살해하겠다고 선전하며 경찰의 수사를 받기도 했다.
1982년 오쿠자키 겐조는 자신의 주장과 행보를 영화로 만들어 달라며 <나라야마 부시코>로 유명한 감독 이마무라 쇼헤이를 찾아갔다. 이마무라는 자신이 직접 카메라를 드는 대신, 자신의 작품에서 조감독으로 활동하던 하라 카즈오에게 작품 연출을 맡겼다. 독특한 주제로 강렬한 감각을 선사하는 감독과 폭력을 사용하면서까지 자신이 겪은 전쟁을 고발하려는 전직 군인의 기묘한 만남이자, 1987년에 개봉한 다큐멘터리 <천황의 군대는 진군한다>가 태어나는 순간이었다.
오쿠자키의 분노가 향하는 곳
영화는 상영을 시작하고 작품이 끝나는 순간까지 다큐멘터리의 주인공인 오쿠자키와의 긴장감을 놓치지 않는다. 오쿠자키는 자신이 전쟁에서 극적으로 살아온 것을 신의 뜻으로 여기고, 자신을 ‘신군(神軍)’으로 지칭하며 뒤틀린 방식으로 움직인다. 그의 가게나 자동차에는 자신의 주장이 담긴 문구가 덕지덕지 붙어 있고, 그는 경찰이 보는 와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다나카 가쿠에이 전 총리를 죽여야 한다며 확성기로 소리를 내지른다. 하라 카즈오는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그의 행보를 꾸준히 뒤쫓아 다니지만, 카메라는 끊임없이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다.
대신 영화는 오쿠자키 겐조의 주장과 움직임을 철저히 담아내며 관객으로 하여금 조금씩 그의 입장을 고민할 수 있도록 여지를 둔다. 오쿠자키의 행보는 철저하게 자신이 겪은 전쟁의 지옥도에 기초한다. 목숨은 건졌지만 아무도 자신이 겪었던 정신적인 고통에는 이렇다 할 사죄나 보상을 하지 않는다.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의 최고 권력자였던 히로히토 천황은 물론 군인, 정치인들도 입을 다물기에 바쁘다. 오쿠자키는 신의 뜻을 빌어 그들에게 자신만의 처벌을 내린다. 비록 번번이 실패하고 체포될지라도.
대신 영화는 오쿠자키 겐조의 주장과 움직임을 철저히 담아내며 관객으로 하여금 조금씩 그의 입장을 고민할 수 있도록 여지를 둔다. 오쿠자키의 행보는 철저하게 자신이 겪은 전쟁의 지옥도에 기초한다. 목숨은 건졌지만 아무도 자신이 겪었던 정신적인 고통에는 이렇다 할 사죄나 보상을 하지 않는다.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의 최고 권력자였던 히로히토 천황은 물론 군인, 정치인들도 입을 다물기에 바쁘다. 오쿠자키는 신의 뜻을 빌어 그들에게 자신만의 처벌을 내린다. 비록 번번이 실패하고 체포될지라도.
영화의 중후반부 본격적으로 오쿠자키가 태평양 전쟁 시기 같은 부대에 있던 상관들을 만나는 모습에선 그의 트라우마가 어디에 근거하는지 더욱 명징하게 드러난다. 그는 상관들에게 직접 따진다. 왜 패전 직후 자신의 동료 두 명이 사살되었는지. 연합군의 포로가 된 오쿠자키는 같은 부대의 동료였던 이들이 탈영 혐의로 사형되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것이다. 집념어린 자세로 사건을 추적하던 오쿠자키는 두 병사의 죽음 뒤에 무언가 석연치 않은 점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억울하게 죽음을 당한 이들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오쿠자키는 다큐멘터리 제작진과 병사의 유족들을 대동하고 상관들을 찾아다닌다.
오쿠자키는 옛 상관들을 향해 때로는 윽박지르기도 하고, 거침없이 폭력을 행사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관객을 경악케 하는 것은 오쿠자키의 동료들이 사형당한 이유가 밝혀지는 순간이다. 배고픔과 질병에 시달리던 상관들이 계급이 낮아 가장 만만한 둘을 살해한 뒤, 그들의 살점으로 허기를 채웠던 것이다. 쉽게 잊을 수 없는 중대한 증언을 앞두고 오쿠자키는 침착한 자세로 당시의 상세한 정황을 설명할 것을 상관들에게 요구한다. 오쿠자키를 단순한 기인으로 치부할 수 없는 순간이자, 왜 그가 전쟁이 끝난 뒤에도 오랜 시간 정념에 휩싸일 수밖에 없었는지를 드러내는 장면이다. 일본인들을 전쟁으로 이끈 어느 누구 하나 전쟁으로 피해를 입거나 사망한 이들에게 이렇다 할 사과도 하지 않는다. 처음으로 자신이 그토록 듣고 싶었던 전쟁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때, 오쿠자키는 비로소 차분한 모습으로 움직일 수 있었던 것이다.
오쿠자키는 사라졌지만, 천황의 군대는 사라졌을까
오쿠자키의 차분한 자세는 오래가지 않는다. 군의관이었던 한 상관이 동료들의 억울하고 끔찍한 죽음에 대해 증언해주었지만, 다른 상관들은 한사코 증언을 거부했다. 그들의 자세는 오쿠자키의 무례하고 거침없는 행보에 비교하면 사뭇 정중하지만 그 예의의 뒤편에는 어딘가 모를 비릿한 향기가 피어오른다. 진실에 얽힌 자신들의 책임을 방기하려는 의도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이렇다 할 증거도, 더욱 확실한 증언도 나오지 않는 상황. 오쿠자키는 부대가 주둔했던 자리에 혹시라도 남아있을 증거를 발견하고자 다큐멘터리 제작진과 함께 1983년 3월에 파푸아뉴기니를 방문한다. 이렇다 할 성과는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파푸아 뉴기니의 모습을 촬영한 필름은 파푸아뉴기니 세관에게 압수되고 말았다.) 결국 같은 해 12월, 오쿠자키는 부대 상관들을 살해할 것을 결심하고 한 상관의 집에 쳐들어가지만 미수에 그쳤다. 손님이 온 줄 알고 현관에 나선 상관의 아들만 총격을 당하고 말았다. 오쿠자키는 살인미수죄 등의 혐의로 징역 12년형을 선고받았다. 감옥에 갇힌 사이 1986년 오쿠자키의 아내가 사망했다. 1997년에 만기 출소한 오쿠자키는 그 뒤로 비교적 조용히 살아가다, 2005년 85세의 나이에 노환으로 사망했다.
오쿠자키는 ‘좌충우돌’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삶을 살았다. 살인 미수 혐의로 오쿠자키가 체포되는 순간을 신문 기사로 처리하며 영화가 끝까지 그의 행보에 거리를 두었던 것처럼, 그의 행보를 무조건적으로 긍정하는 것은 어렵다. 아무리 그가 강제로 군대에 징집되었고 지옥 같은 순간을 겪었다고 하더라도, 오쿠자키가 벌였던 기행들은 순간적인 분노와 그만의 독특한 세계관에 가득 찬 개인적 움직임 이상이 되기 어렵다. 하지만 전쟁 이후 일본 정부가 제국주의 시절의 과오를 제대로 청산하지 않는 가운데, 오쿠자키를 비롯해 직간접적으로 피해를 겪었던 이들이 제대로 된 사죄를 받지 못했던 것 역시 ‘불편한 진실’이다. <천황의 군대는 진군한다>가 오쿠자키 겐조의 행보를 충실하게 다뤘던 것은 어떤 의미로는 국가 폭력의 피해자가 막다른 길에 놓인 모습을 비추는 시도가 아니었을까.
<천황의 군대는 진군한다>가 공개되고 30년의 시간이 지난 지금, 오쿠자키는 사라졌다. 하지만 천황의 군대는 완전히 역사의 뒤편으로 퇴장했는가. 일본은 평화헌법에 의거해 ‘자위대’만 보유할 수 있지만, 아베 신조의 자민당 내각은 노골적으로 군사주의의 부활을 꾀하고 있다. 2015년에는 ‘집단적 자위권’을 합법화하는 안보법 개정을 밀어붙였고, 이후에도 헌법을 개정해 자위대를 ‘정식 군대’로 자리 잡게 하겠다는 의욕을 드러내고 있다. 일본 제국이 사라진지 반세기 이상의 시간이 지났지만, 여전히 일본에는 제국주의를 추억하는 물결이 넘실댄다.
그런 점에서 하라 카즈오가 오랜 침묵을 깨고 2017년, 일본 정부와 석면 탄광에 근무하며 폐질환을 겪은 노동자 사이의 소송을 그린 신작 다큐멘터리 <센난 석면 피해 배상소송>을 발표한 것은 너무나도 상징적이다. 노동자들이 석면의 위험성을 숨겨온 일본 정부에 맞서 싸우듯, 사람들의 적극적인 움직임이 조금이라도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의지가 느껴진다. 부활을 꿈꾸는 천황 군대의 진군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일본 시민들이며, 그들과 연대하는 한국을 비롯한 해외의 시민들이 아닐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