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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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8 제43호

북한 노동자는 체제 변화의 주체가 될 수 있을까

사회주의 체제의 ‘노동조합 논쟁’과 조선직업총동맹

  • 김진영

‘북한 노동자’라는 문제

남북경협에 대한 과장된 환상과 관심은 경계해야한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북한의 대외경제개방이 진척될 가능성이 높아진 것도 사실이다. 남북 경제관계에는 새로운 국면이 열리게 될 것이다.

북한의 외국자본유치와 시장개방에서 여러 쟁점이 나올 수 있다. 남한과 북한의 관계를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을 맺은 미국과 멕시코의 관계에 유비해볼 수 있다. 둘 다 경제력 격차가 매우 크고 인접한 두 나라 사이에서 급속히 무역규모와 경제 교류가 확대되었기 때문이다. NAFTA가 발효된 1994년 당시 미국의 1인당 국민총생산(GDP)는 약 2만 8000달러, 멕시코는 5700달러로 5:1 가량의 차이를 보였다. 2016년 기준 미국은 5만 7000달러, 멕시코는 8200달러로 격차는 오히려 7:1로 벌어졌다. 그럼에도 NAFTA를 계기로 미국의 핵심 산업이 멕시코로 이전하면서, 미국의 일자리가 축소되었다는 인식이 미국 내에 확산되었다. 트럼프의 미국 대통령 당선과 ‘국경 장벽’ 건설 논란에는 이러한 배경이 있었다. 

그런데 2016년 남한의 1인당 GDP는 3198만원, 북한은 146만원으로 격차가 이미 20배 이상이다. (통계청) 거대한 혼란은 피할 수 없을 것이다. 혼란 속에서도 우리는 남북 노동자 민중의 권리를 어떻게 지키고 확장해갈지 고민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북한 노동자를 어떻게 볼 것인가’란 쟁점을 우회할 수 없다. 이종석 전 통일부 장관이 4월 26일 제이티비씨(JTBC) ‘썰전’에 출연하여 “노조 없는 대한민국 노동력이 곧 북한 노동력”이라고 발언한 일은, 이미 남한 사회에  “북한 노동자 = 착취의 대상”이란 기대가 존재한다는 것을 시사한다.
 

‘당의 전달 벨트’로서의 노동조합

현실에서 남북 노동자 교류 사업은 “만나야 통일이다”라는 기치 아래 이미 추진되고 있다. 8월 10-12일 서울에서 열릴 ‘남북노동자 축구대회’가 대표적이다. 그러나 이러한 스포츠 교류행사에서부터 앞으로 예상되는 경제적인 사안 결정에 이르기까지, 남한 노동자가 만나는 북측 노동자 주체가 누구이며 어떠한 상태냐는 것을 따져보아야 한다. 이번 남북 노동자 축구대회가 그렇듯 민주노총·한국노총의 교류 대상이 되어온 것은 북한의 유일한 노동자 단체인 조선직업총동맹(이하  직총)이므로 직총의 역사와 현재를 보자. 

직총은 현재 조선농업근로자동맹, 조선민주여성동맹 등 다른 단체에 가입하지 않은 30세 이상의 모든 노동자·기술자·사무원으로 구성되어 있다. 당원이 아닌 모든 북한 인민은 의무적으로 이러한 단체 중 하나에 가입해야 하므로, 조합원 수는 200만 명 이상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다면 직총은 이 200만 노동자들을 정말로 대표하고 있으며, 자주적으로 운영되고 있을까.

결론부터 쓰면 그렇지 않다. ‘사회주의로동법’에는 근로자의 권익을 보호하고 외국 기업과 근로조건과 관련된 계약을 체결하고 감독하는 것이 직총의 의무로 규정되어 있으나 형식적 문구에 가깝다. 북한 정치사전(1986)과 조선대백과사전(2000)에 의하면, 직총의 기능과 역할은 김일성의 항일혁명전통을 계승하여 주체사상을 유일한 지도적 지침으로 내세우는 것이다. 직총은 규약에서 “직맹(조선직업총동맹의 북한식 줄임말)은 조선노동당의 옹호자이며 당의 영도 하에 모든 활동을 전개한다. 직맹은 노동계급의 통일과 단결을 강화하며 그들을 당주 위에 결속시켜 당이 제기한 혁명임무 수행에로 조직·옹호하며, 매시간 당이 제시한 과업을 모범적으로 실천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실제로 직총은 노동당의 강력한 통제 속에 운영되고 있으며,  ‘당과 노동계급을 연결시키는 인전대(引傳帶, 전달벨트)’, ‘동맹원들에 대한 사상 교양 단체’의 역할을 하고 있다. 일반적인 자본주의 국가와는 다른 북한의 특수성을 고려하더라도, ‘노동 조건의 개선(改善) 및 노동자의 사회적·경제적인 지위 향상을 목적으로 노동자가 조직한 단체’라는 노동조합의 사전적 정의와는 한참 거리가 멀다. 이러한 문제는 북한이 아닌 다른 현실 사회주의 국가들에서도 나타난 바 있다.
 
조선직업총동맹(조선중앙통신)
 

소련의 ‘노동조합 논쟁’

1917년 러시아 혁명 직후부터 소련에서는 노동조합 논쟁이 시작된다. 사적 재산권과 시장경제를 기본으로 하는 자본주의체제와 다르게 (명분상으로는) 노동자계급이 정치권력을 장악하고 생산수단을 사회화한 사회주의체제에서 노동자들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한 노동자조직의 존재 의의를 묻는 논쟁이었다.

1920년 전후 소련은 ‘전시공산주의’와 그로 인해 파생된 위기에 시달리고 있었다. 전시라는 특수한 상황 아래 ‘노동의 군대화’와 ‘전시노동규율’ 조치가 이뤄졌으며 노동조합은 체제 내로 편입되어 당의 인전대가 되었다. 그러나 노동자들의 저항이 심해지고 봉기까지 일어나자 볼셰비키 지도부는 정책 전환했다. 신경제정책(NEP)이다. 

이 때 노동조합에 대한 논쟁이 불거졌다. 트로츠키와 부하린은 노동의 군사화를 옹호하며 ‘노동조합의 국가기관화’를 주장했다. 반면 노동자반대파의 슐라프니코프와 콜론타이는 생산 관리권을 노동조합에 집중시키고 노동조합 멤버가 구성한 러시아 의회가 국가경제를 관리해야 한다며 ‘국가의 노동조합화’를 주장했다. 레닌은 이들 모두에 반대하고 노동조합과 국가가 특수한 상황에 처해있다고 판단하여, 생산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 노동을 조직하고 결근과 생산 침체를 막으면서도 노동조합은 국가로부터 독립적인 지위를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다만 노동조합은 확고한 당의 영도 아래 놓여야 한다. 레닌파의 이러한 안(‘10인의 강령’)이 1921년 3월 10차 당 대회에서 다수의 지지를 얻게 된다.

레닌은 노동계급이 권력을 가지고 새로운 국가, 즉 진정한 인민의 정부를 강화하면 노동자 조직과 국가 간의 관계는 새로운 성격을 갖게 된다는 사실을 지적하였다. 레닌은 노동자 조직의 역할에 대해 ‘공산주의의 학교’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즉 새로운 경제적 사회구성체에 맞게 인민의 의식 수준을 높이고 사회주의 기반에서 생산 관계와 다른 모든 사회관계를 재조직하게 하는 도덕성과 실천력의 학습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결국 이후에 정권을 잡은 스탈린은 1929년 가을부터 급속한 농업 집단화 조치를 단행했다. 이른바 ‘스탈린식 사회주의’가 시작된 것이다. 이 과정에서 노동자 조직의 역할이나 기능도 새롭게 규정했다. 사회주의 건설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생산력 발전이며 노동자 조직은 여기에 몰두해야만 했다. 노동조합은 돌격대를 만들고 노동규율을 위반하는 노동자들을 감시하고 교육해야 했다. 노동조합의 역할이 점차 노동의 조직과 동원으로 귀결되면서 사실상 정부의 한 부서처럼 운영되었다.

또한 사회주의 국가에서는 자본가 계급이 소멸하고 생산수단도 국유화되었기 때문에 노동자의 이해는 본질적으로 국가의 이해와 일치하며, 따라서 노동자와 국가 간의 노사관계에서도 모순과 대립이 사라진다는 체제 본질론적 도그마가 형성되었다. 노사 간의 현실적인 이해의 대립은 무시되었다. 노동자들은 파업권을 비롯한 일체의 저항이나 항의의 기회를 박탈당하게 되었다. 당연하게도 당과 국가기관을 비판하는 등의 정치적 활동도 불가능해졌다.

노동자들이 생산수단의 관리로부터 소외되고 노동조합은 국가의 예속기관으로 전락하자, 자유로운 노동조합을 결성하자는 요구가 분출하게 된다. 하지만 소련에서 자유 노조 결성 운동은 정부의 모진 탄압에 직면했다. 노동자 천국인 국가에서 또 다른 노동조합을 만드는 것 자체가 제정신이 아닌 이로 취급되었다. 주요 지도자들은 정신병원에 감금되었다. 심지어 초창기 자유 노조 운동이 반체제적 성격보다는 ‘성공적인 공산주의의 건설을 돕고 관료주의와 투쟁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음에도 그러했다. 이후의 자유 노조 운동은 소련 체제 자체에 대한 불신으로 흘러가지만, 폴란드 및 동유럽 국가들과는 달리 소련에서는 강력한 탄압 때문에 소련 붕괴 시점까지 두드러진 활동을 하지는 못했다.
 
 

조선직업총동맹의 역사

직총의 기원은 1945년 해방 직후 전국적으로 터져 나온 노동조합 조직의 흐름을 모아낸, 한국 역사 최초의 전국적 노동조합 연맹인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이하 전평)다. 1945년 11월 북한 지역에서 전평 북조선총국이 결성되었다. 1946년 3월 전평 북조선총국은 제1차 확대집행위원회에서 미군정 하의 남쪽과는 정치적 조건이 다르다는 이유로 조직 명칭을 ‘북조선로동총동맹’으로 바꾸고, 5월 제2차 확대집행위원회에서 다시 ‘북조선직업총동맹’으로 바꿨다. 당시 북조선직업총동맹의 행동강령은 국가 법률과 노동규율 준수 및 건국증산 운동 수행을 내용으로 삼고 있다. 이는 전평 창립 당시의 단체계약권 요구는 물론, 김일성이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를 통해 1946년 3월에 발표했던 <20개조정강>의 ‘집회의 자유’, ‘노동조합의 자유로운 활동조건 보장’에서도 크게 후퇴한 것이다. ‘직업총동맹’이라는 명칭 자체가 당시에는 노동자들뿐만 아니라 기술자, 일반 사무원을 포함하는 개념으로 쓰이던 말이다. 노동조직으로서의 성격을 희석하고 서울에 위치한 전평 중앙의 영향력을 줄이려는 김일성의 의도가 드러난다.

곧 직총의 성격과 활동 방향을 놓고 소련의 노동조합 논쟁과 유사한 논쟁이 오기섭과 김일성 사이에서 전개된다. 10대부터 독립운동을 시작한 오기섭은 함경남도에서 오랫동안 공산주의자, 노동조합 조직가로 활동했으며 1929년 원산 총파업이 일어나자 총파업 후원회를 결성하고 위원장을 역임했다. 해방 직후 함경남도에서 조공, 인민위원회 조직 활동을 지도하기도 했다. 

오기섭은 1946년 9월 임시인민위원회의 노동부장이 되었다. 여기서 그는 직업총동맹은 노동자의 유일한 조직체이며 비록 산업이 국유화되었더라도 노동자의 이익을 수호하려면 직장과 투쟁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일성은 “북한의 공장과 기업소들이 이미 사회주의적 소유로 전환되었기 때문에 북한의 노동자들이 국유화된 산업경제기관에 반대하여 투쟁할 수 없다”며 오기섭을 공격했다. 이에 오기섭은 『레닌 선집』을 들고 단상에 올랐다. “레닌도 이와 같이 썼다. 나도 그와 같이 썼다. 내가 어째서 좌우경향 오류를 범했다는 것인가.”라고 항변했다.
 
오기섭은 1947년 1월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 노동행정부의 사명’이라는 글을 발표하여 “노동자는 언제든지 자기 계급의 이익을 위하여 투쟁의 무기를 버리어서는 안 될 것이며 그 투쟁방식이 생산수단이 착취의 대상만 되고 있는 영미식 자본주의 국가의 방식이 되어서는 안 되는 동시에 생산수단이 전부 국가의 수중에 있는 소련의 방식이 되어서도 안 될 것이다”라고 밝혔다. 이에 김일성은 “인민의 소유로 된 국영기업소에서는 자본과 노동 간 계급적 대립이란 있을 수 없다”며 재차 오기섭을 비판했다. 1947년 3월 15일에 열린 노동당 중앙위원회 6차 회의에서의 일이었다.

이 일을 계기로 오기섭의 영향력은 급속히 줄어들었다. 한국전쟁 이후 증산 경쟁운동이 강조되는 가운데 직총은 단체계약 체결권도 잃는 등 노동자의 권리를 방어하는 조직으로서의 기능을 급속히 잃어갔다. 1955년 12월 직총의 위원장 서휘는 이러한 상황을 비판하고 직총 부활과 강화를 위해 노력했다. 서휘는 ‘당-직총 동격론’ 또는 직총의 ‘자치적 조직체’의 필요성을 주장하며 당과 국가의 일방적인 노동증산 경쟁 강요를 비판했다. 그러나 1956년 소위 ‘8월 종파 분쟁’ (김일성 계열이 소련파와 중국 출신의 연안파 공산주의자들을 대거 숙청했다) 사건으로 숙청당했다. 김일성의 독재성과 반인민적 정책들을 비판하려는 시도가 오히려 큰 역풍을 맞은 것이다. 이러한 ‘숙청’을 거치며 김일성의 직총에 대한 입장에 대한 반대가 나올 가능성도 사라졌다.
 
2016년 10월에 열린 조선직업총동맹 7차 대회 사진
 

오늘, 북한의 노동운동은?

동유럽이나 소련에서는 정권의 탄압 속에서도 노동자들의 저항이나 자유 노조 운동이 계속되었던 것과 달리, 북한은 조직적인 저항이나 자주적인 노동자 운동이 생겨날 기미조차 보이지 않고 있다. 특이한 일이다. ‘장마당 경제’로 불리는 시장화가 상당 부분 추진되고 많은 인민이 남한과 세계의 실정에 대해 잘 알게 된 지금까지도 그러하다. ‘선군정치 관철’ 등 생산 결의, 노동 촉구, 미국과 남한의 보수단체 비판 등의 역할을 해온 직총은 김정은 시대 들어서도 마찬가지 기능을 담당하고 있다.

직총은 현실적으로 남한의 민주적인 노동조합에 해당하는, 북한 노동자의 권리를 대변하는 주체라고 보기는 어렵다. 남북 노동자 교류를 한다고 해서 ‘만나는 것’ 자체에 너무 큰 의미를 부여해서는 곤란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렇다면 앞으로 남북 노동자 간에 경쟁과 갈등이 생기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미국과 멕시코의 사례로 돌아가 보자. 미국·캐나다와 달리 멕시코에는 자주적이고 강력한 노동자조직이 없다는 문제가 있었다. 그러나 미국과 캐나다 노동조합의 대응은 멕시코 노동자들과 연대하는 길이었다. 세 국가 모두의 노동권 강화(국제노동표준, 노조 할 권리 확립)를 통해 각국 노동자 간의 갈등을 줄이자는 요구를 한 것이다. 우리가 참고할 만한 사례는 이러한 것일 테다. ●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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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우찬, 「북한 직업총동맹의 역할과 자율성의 한계: 김정은 정권 하의 직업총동맹 활동을 중심으로」, 북한연구학회 하계학술발표논문집 Vol.2016, 2016.
유동열,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http://encykorea.aks.ac.kr) ‘직업동맹’ 항목, 2009.
권오윤, 「북한의 변화추진 가능세력으로서 직업총동맹의 검토」, 『대한정치학회보』 13집 2호, 2005.
조수룡, 『‘북조선직업총동맹’의 성립과 활동(1945-1950)』, 경남대학교 북한대학원 석사논문, 2005.
예대열, 『1947-1950 북한의 노동조합 논쟁과 노동정책 특질』, 고려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7.
안문석, 「해방직후 북한 국내공산세력의 국가건설전략: 오기섭의 ‘인민전선’을 중심으로」, 『통일정책연구』, 22(2),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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