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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7 제42호

어떤 축구선수 이야기

  • 이준혁
6월 말, 온 나라가 월드컵과 축구 얘기로 가득하다. 그러니 나도 축구 얘기나 좀 해보려 한다.

크로아티아 대표로 출전한 데얀 로브렌이란 선수가 있다. 영국 리버풀FC에서 뛰고 있는, 엄청 유명하진 않아도 알 사람은 알 만한 선수다. 그는 1989년, 지금은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에 있는 시골에서 태어났다. 당시 보스니아는 크로아티아계, 세르비아계, 보스니아계 사람들이 섞여 살았다. 별다른 갈등은 없었다.
 
(인사이트)

1992년 4월, 그의 나이 4살 때 모든 일상이 박살났다. 보스니아 내전이 발발한 것이다. 1991년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이 붕괴되었다.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가 연방을 탈퇴하자 보스니아에서도 연방 독립 분위기가 고조되었다. 세르비아계가 독립에 반대했다. 옆 나라 세르비아의 지원을 받는 민병대가 봉기를 일으켰다. 충돌은 금세 내전으로 번졌고 내전은 잔학한 인종청소로까지 이어졌다. 어린 그의 기억에도 사이렌과 폭탄 소리가 뚜렷하게 남아있다. 로브렌의 가족은 모든 걸 버리고 독일로 도망갔다. 난민은 220만 명에 달했다. 이 중 35만 명이 독일로 건너갔다.

그는 운이 좋은 편이었다. 할아버지가 뮌헨에서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독일 이웃들도 난민들을 살갑게 맞이했다. 뮌헨의 유소년 클럽에서 축구도 배울 수 있었다. 그는 아직도 뮌헨을 제2의 고향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밤 10시만 되면 집안 분위기는 침울해졌다. 온 가족이 라디오 앞에 모여 고향 소식에 귀 기울였다. 어머니는 하염없이 울었다. 어린 그는 눈물의 의미를 이해할 수 없었지만 화가 났다. 왜 엄마가 울어야 하냐며. 나중에야 들었지만 고향에 남은 그의 삼촌 한 명은 분쟁 속에 칼에 찔려 세상을 떠났다. 지금도 가족들은 삼촌 이야기를 꺼려한단다.
 
독일 생활은 오래가지 못했다. 독일 정부는 보스니아 난민들에게 영주자격을 주지 않았다. 대신 6개월마다 전쟁이 끝나면 고향으로 돌아가라는 이야기만 반복했다. 로브렌의 부모들은 일자리조차 구할 수 없었다. 내전이 마무리되고 난 99년, 그의 가족은 크로아티아로 이주했다. 다른 보스니아 출신 난민들도 돌아가야 했다.

크로아티아 생활은 어려웠다. 친구들은 독일 억양으로 말한다며 따돌리기 일쑤였다. 유복했던 가세도 기울어 전기세조차 내지 못할 형편이 되어버렸다. 가난한 난민 출신인 그가 유일하게 박수를 받을 때는 축구를 할 때뿐이었다. 그 기억이 지금까지 축구를 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는 다름 아닌 <태극기 휘날리며>다. 내전과 난민 생활로 점철된 어린 시절의 기억 때문이란다. 정작 그 영화를 만든 한국에서는 예멘 난민 문제가 논란이 되고 있다. 4년 간 내전을 겪은 예멘 난민 500명이 한국에서 범죄를 일으키고 일자리를 뺏을 것이라며 난민 수용과 지원에 관한 반발이 거세다.

고난과 역경을 딛고 성공한 난민 출신 축구선수. 그저 극히 일부의, 전형적인 미담일 수 있다. 대다수 난민의 실상은 더 처참한 무엇이다. 하지만 어떠한 미담도, 난민들이 처한 현실에 대한 호소도 공포와 혐오를 없애기엔 모자라 보인다. 

지금의 우리는 역사를 알고 있다. 내전, 인종청소, 난민, 그리고 예멘. 지나간 역사는 말한다. 공포와 혐오를 넘어서 새로운 공존을 모색해야 한다고. 한 축구 선수의 이야기로 끌어내기에는 조금 과한 결론일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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