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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6 제41호

중화학공업 위기와 한국경제 추격성장의 한계

  • 한지원

중화학공업 위기론

중화학공업은 1980년대 이래 우리나라 경제의 중추였다. 이런 중화학공업이 최근 위기를 맞고 있다. 정부가 2015년부터 중화학공업 구조조정을 추진 중이지만 아직까지 가시적 성과는 보이지 않는다. 2018년 5월 기준 제조업 가동률은 세계금융위기 이후 최하 수준으로 하락했다. 울산, 창원, 거제, 목포, 군산 등 중화학공업 밀집 지역에서는 실업률이 치솟고 있다.

중화학공업 위기는 한국 경제의 미래를 예측하는 중요한 키워드다. 30년 동안 자동차, 조선, 철강, 석유화학 등은 우리나라의 10대 수출품이자 국내총생산, 고용 같은 거시경제 지표를 좌지우지하는 핵심 변수였다. 이들 산업이 겪는 위기가 어떻게 전개될지 점칠 수 있어야 한국 경제의 미래도 이야기할 수 있다. 

중화학공업 위기는 노동운동의 미래와도 연결되어 있다. 중화학공업 밀집지역에서 시작된 1987년 노동자대투쟁이 오늘날의 노동운동을 만들었고, 그 노동조합들이 지금까지 민주노총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중화학공업 위기를 대비하지 않는다면, 노동운동이 외환위기 때와 마찬가지로 어려움에 처할 가능성이 크다. 

중화학공업 위기의 형태와 원인을 분석해 보고, 노동운동의 대안을 살펴보자.
 

위기 하나. 과잉설비

우리나라 중화학공업은 주로 설비 규모를 확대해 경쟁력을 키워왔다. 하지만 세계금융위기 이후 시장이 바뀌었다. 세계경제가 장기저성장 국면으로 진입했고, 중국의 중화학공업이 급격히 발전하여 우리나라 기업들의 시장이 줄어들었다. 당연히 설비가동률이 하락할 수밖에 없다. 중화학공업에서 가동률 저하는 곧 이윤 급감으로 이어진다. 구체적 사례들을 보자.
 
(연합뉴스)

올해 2월 한국지엠 군산공장이 재가동 기약 없이 폐쇄됐다. 우리나라에서 이 정도 규모의 자동차 공장 폐쇄는 사상 처음 있는 일이다. 군산 공장 폐쇄는 우리나라가 40년 간 만들어 놓은 연 500만 대 생산규모의 자동차 설비를 이제는 유지할 능력이 없음을 방증한다. 1970년대 이래 자동차 공장들은 지금까지는 재무 위기에 빠져도 어떤 식으로든 재가동됐었다. 예를 들면, 아시아자동차 공장은 기아차에, 기아차 공장들은 현대차에, 대우버스 공장은 영안모자에, 대우차 승용차 공장들, 대우트럭 공장, 삼성차 공장, 쌍용차 공장은 해외 기업들에 매각돼 재가동됐다. 자동차공장 불사(不死)의 역사가 깨진 것이다.

과잉 설비 위기는 자동차산업만의 일이 아니다. 조선업에서는 몇 년 전부터 구조조정이 계속되고 있다. 약 10만 명 가까운 노동자가 일자리를 잃었고, 재무 위기에 빠진 조선사에 정부가 투입한 자금도 20조원에 이른다. 중형조선소 상당수가 폐업됐고, 조선3사로 불리는 현대중공업, 삼성중공업, 대우조선해양도 3년 넘게 구조조정 중이다. 조선업 밀집 지역인 군산·거제시·통영시·고성군·창원 진해구·울산 동구는 고용위기지역으로 선정되어 정부가 특별관리 중이다.

20년 넘게 한국 10대 수출품에 이름을 올리고 있는 철강산업도 사정이 비슷하다. 최근 몇 년간 중형 철강기업들을 중심으로 설비 폐쇄를 계속해 왔음에도 철강산업 가동률은 70퍼센트 수준에 머물러 있다. 철강 같은 설비산업은 가동률이 낮으면 대규모 손실이 불가피한데, 세계 조강 능력의 50퍼센트를 차지하는 중국이 국내 과잉 설비를 처리하기 위해 본격적으로 수출을 늘리고 있다. 철강 산업은 기술 격차가 크지 않아 자본집약적 설비능력이 경쟁력의 핵심이다. 중국의 어마어마한 설비능력으로 인해 선진국 철강 산업 대부분이 어려움을 겪고 있는 상황이다. 

석유화학은 수출액으로만 보면 우리나라 10대 수출품 중 두 개를 차지한다. 정유와 합섬수지가 그것이다. 석유화학 산업은 사실 아프리카에 공장을 세워도 크게 문제가 없을 정도로 기술적 격차가 적다. 설비 규모와 가동률이 경쟁력의 거의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나라의 석유화학 산업은 일본의 저부가가치산업 이전, 중국의 설비능력 부족 덕분에 1990년대부터 지속적으로 설비를 늘리며 수출을 확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최근 중국이 석유화학의 생산능력을 대대적으로 확충하며 자체수요를 충당하기 시작했고, 조만간 중국이 수출에도 나설 것으로 예상돼 설비 과잉이 우려된다.
 

위기 둘. 추격성장의 한계

중화학공업 위기의 본질은 추격성장의 한계다. 1970년대 이래 일본의 기술을 따라잡으며 성장해왔는데, 이제 따라할 기술이 많이 남아있지 않아서다. 우리나라 중화학공업 기업들이 기술선도자(frontier)로 치고나갈 힘은 없는데, 중국 기업들이 우리와 기술격차를 줄이고 있다. 기술혁신 곤란 속에서 이뤄지는 자본 투자는 자본생산성의 저하와 이윤율 급감으로 이어진다.

우리나라 중화학공업은 일본과 미국 기업들의 기술을 따라하며 성장해왔다. 현대차는 1970년대에는 미국 포드, 1980년대에는 일본 미쓰비시의 기술을 수입해 자동차를 생산했고, 회사 설립 후 30년이 지난 2000년대 초반에 이르러서야 완전하게 자기 엔진을 개발할 수 있게 됐다. 현대중공업도 비슷했다. 현대중공업은 1970년대에는 유럽 조선소로부터 기술을 도입하다 1980년대부터 일본 가와사키중공업 등의 기술을 따라하며 1990년대 이르러 현재와 같은 탱크선, 엘엔지(LNG)선 등을 자체 개발할 수 있게 되었다. 포스코(포항제철)는 아예 자금과 기술 모두를 일본으로부터 도입했다. 포항제철은 한일협정 체결로 받은 일본 자금을 종잣돈으로 삼아 신일본제철의 도움으로 생산을 시작했다. 포스코는 1990년대에 들어서 일본 기술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우리나라 중화학공업은 이렇게 1990년대~2000년대 초반에 일본 기업의 기술을 어느 정도 따라잡았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기술을 따라할 때에는 실패확률이 적고, 상대적으로 안정된 기술을 선택할 수 있어 개발 비용이 적고 개발 속도가 빠르다. 세상에 없는 기술을 만들어야 하는 상황은 완전히 다르다. 성공보다 실패가 많아지고, 개발 속도도 더뎌진다. 기술개발 비용 역시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한다. 심지어 개발비 전체가 매몰되는 경우도 발생한다. 우리나라 중화학공업 기업들은 이 지점을 돌파하지 못하고 있다. 

한국 자동차산업의 리더인 현대차의 연구개발비는 폴크스바겐의 25퍼센트 수준, 도요타의 절반 수준이다. 현대차는 10조 원 이상의 돈을 신사옥 건설에 사용하면서도, 선진국 자동차 기업들이 어마어마하게 투자하고 있는 미래형 자동차 개발에는 지출이 인색하다. 추격 성장에 익숙한 개도국 기업의 특성, 혁신보다 총수의 경영권에 더 집중하는 재벌기업의 특성이다. 

현대차는 이미 추격 성장에 적합한 기업이 아니란 점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현대차그룹은 연 8백만 대를 생산하는 현재 세계 5대 자동차기업이다. 폴크스바겐, 도요타, 제너럴모터스와 기술력으로 경쟁하지 못하면, 시장점유율 하락으로 설비가동률이 급락하며 재무위기가 닥친다. 우리나라 자동차산업의 부품사는 상황이 더 심각하다. 한국의 부품사들은 연구개발비 지출이 매출액의 1퍼센트도 되지 않는다. 이들은 현대차와 수직적 하청관계를 맺다보니 현대차 물량을 받아내는 것에만 관심이 있지 독자적 기술로 세계시장에서 경쟁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많은 부품사가 노동집약적 공정을 현대차 대신 해주는 수준이거나, 일본이나 독일에 기술수수료를 주고 생산에만 집중하는 정도다.

한국 조선업의 빅3(현대중공업, 대우조선해양, 삼성중공업)는 엘엔지(LNG)선 다음 기술을 획득하려다 된통 실패를 경험했다. 빅3는 2007년 이후 해양플랜트 사업에 대대적으로 진출했다 수십조 원의 손해를 입었다. 빚더미에 앉은 대우조선해양은 워크아웃에 돌입했다. 실패원인은 무엇보다 기술 부족이었다. 미국, 노르웨이, 프랑스, 네덜란드 기업들이 가지고 있는 해양플랜트 핵심기술을 습득하는 데 한국 조선사들이 실패한 것이었다. 일본 기술을 빠르게 습득했던 1980~90년대 엘엔지(LNG)선과 이번은 달랐다. 왜 그랬을까? 자동차와 같다. 30년 전과 달리 이제 세계 최고수준의 매출을 기록 중인 한국 조선사들에게 쉽게 기술을 내줄 해외 기업이 없어서다. 현대, 대우, 삼성 중공업은 추격성장 다음을 준비해야하지만, 여전히 추격성장 패턴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상태다.

철강이나 석유화학은 기술개발이 핵심인 산업은 아니다. 그래서 중국의 자본집약적 투자가 이어질 경우 답을 찾기 어렵다. 첨단소재로 출구를 찾아야 하지만 아직은 선진국과 기술격차가 크다. 30년 전처럼 쉽게 기술이전을 받을 수도 없는 상황인데 철강, 석유화학 기업들은 기술개발 투자나 신기술 도전에 소극적이다. 1970년대 이래 이들 산업의 기업들은 전형적으로 독점과 정경유착으로 성장해왔기 때문이다. 정부 독점 기업을 인수한 재벌이 지금까지 철강과 석유화학의 지배자들이다. 지대추구적 경영에 익숙한 이들이 추격 성장 이후를 준비하는 것은 어려워 보인다. 
 

노동운동의 지향

마르크스주의적으로 표현하면, 중화학공업은 기술구성의 증가(1인당 자본재 양의 증가) 속도가 다른 어떤 산업보다 빠르다. 노동생산성이 기술구성의 증가 속도를 앞서지 않으면 자본생산성이 하락하며, 임금이 대폭 감소하지 않는 한 이윤율도 하락하게 된다. 노동생산성을 얼마나 높일 수 있을지, 또 기술구성 증가 속도를 얼마나 늦출 수 있을지가 기술혁신에 관건이다. 그런데 따라잡기 이후에는 이런 기술혁신이 쉽지 않다. 기술혁신의 곤란이 커진다. 매출 증가로 설비가동률을 지속적으로 높일 수 있다면(유휴설비를 감소시킬 수 있다면) 자본생산성 하락을 지연시킬 수도 있지만, 지금은 세계경제가 호황도 아니고 중국이 한국산 제품을 마구 수입해서 써야 하는 상황도 아니다. 중화학공업은 ‘구조적’ 위기를 벗어날 길이 당장은 없다.
 

노동운동이 이런 상황에서 택할 수 있는 길은 두 가지다. 하나는 자본과 함께 지대추구적 행동을 강화하는 것이다. 중화학공업에서 생산되는 부를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더 많이 분배받기 위해 싸우는 것이다. 재벌은 총수의 경영권 보호를, 주주는 배당을, 노동자는 임금인상을 위해 싸우는 상황이다. 이런 투쟁이 이어진다면 힘이 강한 세력이 더 많이 가져갈 수는 있겠지만, 구조적 위기에 빠진 중화학공업이 혁신할 길은 사라질 것이다. 국민경제도 아예 급진적 변혁이 아니라면 남미와 같은 반복적 위기에 빠져들 것이다.

다른 하나는 노동운동이 앞장서 노동 친화적, 국민경제 친화적 구조개혁을 주장하는 것이다. 기술선도 기업으로 나가려면 실패를 무릅쓰고라도 기술개발에 투자를 늘려야 하고, 투자기금을 확보하기 위해 부의 사외유출을 최소화해야 한다. 계열사 내부거래로 사익을 추구하는 재벌총수의 경영관행을 뜯어고쳐야 하고, 배당만 하자는 주주들의 요구도 방어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특히 무엇보다 노동운동이 기업 내 임금인상에 몰두하기보다, 산업적 정책이나 기업 경영의 전략적 방향에 관심을 둬야 한다.

중화학공업의 위기, 다시 말하면 한국 자본주의의 구조적 위기 상황에서 노동운동이 택해야 길은 아무래도 전자보다는 후자가 아닐까. ●
 
필자 소개

노동자운동연구소 연구원. 마르크스주의와 노동자운동의 결합을 위해 불철주야 연구하고 떠드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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