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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6 제41호

자본주의의 대안 상상하기

파블로 솔론 외, 《다른 세상을 위한 7가지 대안》

  • 구준모
오늘날 세계의 위기를 선언하는 일은 더 이상 좌파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경제, 정치, 사회, 생태 등 곳곳에 생채기가 깊다. 한편에서는 4차 산업혁명이나 기본소득 같은 유토피아 담론이 유행하지만, 면밀한 검토에 근거하기보다는 선망이나 믿음에 가까워 보인다. 반면 체계의 위기에 대항하는 운동은 우리가 목격하듯, 끊임없이 분출하지만 쉽게 사그라지고, 탄탄한 대안은 잘 보이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 대안적 미래를 사고하는 데 힌트가 될 것은 없을까?
 

시스템 위기와 시스템 대안

볼리비아와 프랑스의 대안세계화 운동가들이 함께 쓴 《다른 세상을 위한 7가지 대안》(착한책가게)는 지금 생성되고 있는 대안적인 개념이나 가치들을 살펴보고 그 장점과 한계들을 정리한 짧은 책이다. 이들은 오늘날 전개되는 복합적이고 서로 연결된 위기를 ‘시스템 위기’로 정의한다. 시스템 위기의 대표적인 원인 중 하나는 자본주의이다. 하지만 자본주의가 시스템 위기의 유일한 원인은 아닌데, 자본주의를 극복하려고 했던 체제나 운동 속에서도 살아남은 생산주의와 채굴주의도 있기 때문이다. 생산주의는 성장주의로도 표현되는데 더 많은 생산과 성장을 추구하는 체제나 이상을 의미한다. 채굴주의는 주로 남미의 경험에 바탕을 둔 것으로, 수출을 목적으로 다량의 원자재를 캐내는 과정을 뜻한다. 여기에 저자들은 가부장제와 인간중심주의를 위기의 원인에 추가한다. 따라서 시스템 위기를 맞선 시스템 대안을 건설하려면, 자본주의뿐만 아니라 생산주의, 채굴주의, 가부장제, 인간중심주의도 맞서고 극복할 전략을 마련해야 한다.

저자들이 다루는 7가지 시스템 대안은 비비르 비엔, 탈성장, 커먼즈, 에코페미니즘, 어머니 지구의 권리, 탈세계화, 상호보완성이다. 여기서는 그중 우리에게 낯설고 새로운 가치를 담고 있는, ‘비비르 비엔’을 살펴보고자 한다. 이 개념은 남미의 원주민운동, 대안세계화운동과 좌파 정부의 실천 속에서 발전한 ‘시스템 대안’이 어떤 가능성을 가지고 또 어떤 한계에 부딪혔는지를 드러내준다.
 

비비르 비엔: 원주민운동에서 발전된 대안

비비르 비엔은 10여 년 전부터 생성된 새로운 개념으로 남미 북부의 안데스 산맥에 사는 원주민들이 가지고 있었던 삶의 비전에서 비롯되었다. 비비르 비엔은 좋은 삶, 조화로운 삶이라고 번역할 수 있는데, 거기에는 이런 표현보다 복합적인 철학과 세계관이 포함되어 있다. 비비르 비엔에서 핵심적인 가치는 전체나 지구를 뜻하는 파차(Pacha)다. 파차는 끊임없이 운동·변화하는 지구 전체이면서 또한 우주다. 모든 존재는 파차와 연결되어 있는데, 여기서 존재는 인간이나 동·식물뿐만 아니라 무생물적인 것도 포함된다. 따라서 인간과 자연의 분리가 없고, 모든 존재는 자연의 일부며 파차는 그 전체인 것이다. 안데스 원주민들에게 파차를 존중하는 삶이란 이런 전체를 안고 사는 것이고, “온화함과 존중과 자기이해와 타인에 대한 공감으로 사는 것이다.”(27쪽) 여기에는 다름 속에서 공존하기, 전체 속에서 서로 다른 구성 요소 간의 균형 찾기, 다양한 존재들 간의 상호보완, 탈식민화의 과정들이 포함된다. 

사실 사회와 자연, 전체와 부분, 원인과 결과 같은 이분법적 사고방식 속에서 생각해왔던 나 같은 이들에게 이런 설명은 알듯 말듯하다. 어떤 면에서는 비과학적인 전통적 세계관으로의 회귀가 아닌가하는 의심마저 생긴다. 하지만 불충분한 이해를 가지고 그런 의심을 제기하기 전에, 남미의 원주민들과 대안세계화 활동가들이 그런 개념을 가공하고 발전시키면서, 신자유주의에 대한 대안을 사고해왔다는 점을 충분히 숙고하는 것이 중요해 보인다. 이들은 지배적인 시스템과 세계관이 망가뜨린 역동적인 균형을 회복하기 위해서 이러한 노력을 기울여 왔다.
 

남미 좌파 정부와 채굴주의

이 개념을 둘러싼 실천에 더욱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비비르 비엔이 볼리비아와 에콰도르에서 헌법에 명문화되어 제도화되었고 그 과정에서 원래의 이상이 변형되고 훼손되었기 때문이다. 저자들은 시스템 대안들이 가지고 있는 가능성뿐만 아니라 한계와 공백에 대해서도 솔직하게 인정하고 서술하고 있다. 2008년과 2009년 각각 에콰도르와 볼리비아에서 새롭게 만들어진 헌법에는 비비르 비엔의 원칙이 포함되었다. 에콰도르 헌법에는 권리의 측면에서, 볼리비아 헌법에서는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원칙의 측면에서 다뤄졌다. 그런데 문제는 두 나라에서 모두 비비르 비엔이 개발주의와 생산주의와 공존하며, 더 나쁘게는 그것들과 연계되어 도구화되어 버렸다는 점에 있다. 저자는 이를 “자본주의식 개발모델의 변곡점이 되지 못한 채 단지 상징적인 의미만을 담은 채로 변형되었을 뿐이다”고 뼈아프게 비판한다(38쪽). 

좌파 정부가 들어선 에콰도르와 볼리비아는 최근 10년간 높은 경제성장률을 기록했다. 빈곤율과 지니계수도 상당히 감소했는데, 이런 성장과 분배의 개선을 이끈 것은 공적 투자의 확대였다. 그렇다면 정부가 재정정책을 펼 수 있었던 돈은 어디서 왔을까? 원자재 가격의 상승과 초국적 기업과의 재협상으로 인한 수입 증가가 주요 자금원이었다. 우리에게 비교적 잘 알려진 베네수엘라나 브라질의 경우와 유사하게 에콰도르와 볼리비아도 지난 10년간 석유, 가스와 원자재 가격의 상승으로 쉽게 돈을 벌 수 있다는 유혹에 사로잡혔다. 채굴주의가 경제 성장과 분배 개선의 원동력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원자재 수출 중심의 경제 구조를 개선하고, 어머니 지구를 중심에 두고 환경 정책을 펼치겠다던 정부의 수사와는 달리, 채굴주의와 초국적 기업에 의존한 경제 구조는 더욱 강화되었다. 비비르 비엔과 어머니 지구를 좌파 정권이 추구하는 가치와 명분으로 앞세웠지만, 실제로 벌어진 일은 채굴주의 발전 전략이었던 것이다. 

한편 좌파 정부가 집권한 10년 동안, 특히 볼라비아에서 원주민공동체와 사회조직은 도리어 약화되었다. 이들은 정부가 제공하는 인프라와 사회 정책의 수혜자였으나, 이런 직접적인 물질적 지원으로 인해서 자주적인 조직으로서의 성격이 약화되고 분열되었기 때문이다. 볼리비아 모랄레스 정부에 대외무역장관 등으로 참여하기도 했던 저자는, 핵발전소 건설이나 대형 댐 건설 같이 과거에는 상상할 수도 없거나 원주민공동체가 반대했던 정책들이 수용되고 있다고 비판한다. “비비르 비엔은 사문화되었으며, 단지 공식적인 담화에 갇혀 있을 뿐”이었다(50쪽).
 

다시 대안을 사고하기

볼리비아가 실제로 경험한 것이 채굴주의 모델이었다면, 비비르 비엔은 실패한 것일까? 저자는 비비르 비엔의 정신으로 다시 돌아가고 사회운동과 대안공동체를 강화하자고 주장한다. 국가주의를 넘어서고, 지역과 공동체의 자치를 강화하고, 자연을 진정으로 중시하고, 가부장제를 타파하고, 실질적 민주주의를 추구하자고 제안한다. 그리고 볼리비아의 지난 10년 경험은, 세계화된 자본주의 경제에서 한 국가 차원의 비비르 비엔은 제대로 실행하기 불가능하다는 점을 보여주었다. 대안세계화 운동의 초창기 정신에 따라 다른 세상을 위한 각 지역의 운동과 조직들의 자치를 강화하고 이를 세계적으로 연결시키는 것. 이것이 비비르 비엔을 실현하는 길이며, 또한 다른 시스템 대안들로 비비르 비엔을 보완하고 풍성하게 만드는 길이다.

이렇게 책에서는 다루는 다른 대안들은 다소 불균등하지만 제각각의 장단점을 가지고 있다. 이들을 묶어주는 것은 ‘상호보완성’이다. 저자들은 “결론의 목록을 만들기보다는, 독자들이 다양한 시각과 접근, 전망들에서 나오는 현실, 문제, 대안들을 살펴볼 동기를 부여받길 원한다”고 당부한다(233쪽). 이런 당부가 공감된다면 짧은 독서에 빠져보시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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