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날 나는
- 2018/06 제41호
끝나지 않는 용산의 기억들
여기 사람이 있다
2018년 5월 23일, 이명박 전 대통령이 구속 62일 만에 재판장에 처음 모습을 드러냈다. 뇌물수수와 다스 횡령 등의 혐의였다. 곧 이명박 전 대통령의 진술 전문이 페이스북에 올라왔다. 나는 그 진술문을 읽으면서 경악을 금치 못했다. 진술문에는 ‘비통한 심정, 헌법을 준수, 법치주의, 바른 정신, 공정한 사회’ 등의 표현이 구구절절 실려 있었다. 물 없이 고구마 100개를 먹은 듯 답답한 가슴을 부여잡고 진술문을 읽으며 용산의 기억들을 떠올렸다.
나는 비겁하게도 도피처를 찾고 있었다. … 휴학을 선언하고 바로 다음 날 새벽 서울로 떠났다.
2009년 1월 20일, 아침부터 뉴스에서 충격적인 영상들이 나오고 있었다. 짙은 새벽 불타고 있는 건물 위의 망루와 컨테이너로 옮겨지는 경찰특공대, 소리 지르는 사람들. 현실이라고 받아들이기에는 너무나 참혹했다. 왜 이럴 수밖에 없어야 하는지… 어두운 방 안에서 정신이 반쯤 나간 채로 텔레비전만 응시하고 있었다. 방 밖으로 나가 현실과 마주할 용기가 없었다. 그때 나는 4학년 진학을 앞두고 집에서 칩거 생활을 하고 있었다. 2008년 학생회를 마칠 즈음 주변 사람들에게 실망하고 좌절했다. 비겁하게도 나는 도피처를 찾고 있었다. 노량진 임용고시 학원에서 반년 동안 공부할 계획을 세웠다. 곧 실행으로 옮겼다. 주변 사람들에게 휴학을 선언하고 바로 다음 날 새벽 서울로 떠났다.
모든 것들에 눈과 귀를 닫고 학원에서 수업을 들었다. 수업이 없는 날에는 교회에서 기도만 했다. 누군가 불타 죽었다는 충격적인 뉴스를 봤지만 내 안정과 취직이 먼저였다. 어떤 날이었다. 목사님이 설교 도중에 모 장로님이 어디 재개발 지역에 투자해 큰돈을 벌게 되었다며 은혜를 받았으니 함께 기뻐해 주자는 말을 했다. 성도들이 아멘으로 화답했다. 믿지 못할 광경이었다. 고민했다. 예수님은 재개발 지역에 투자한 장로를 보듬어 주었을까 아니면 쫓겨나는 철거민들을 보듬어 주었을까. 현실의 모순은 분명했고 답도 분명했다. 나는 그 자리에서 일어났다. 성가대 가운을 벗어 던지고 나왔다. 지금 내가 있어야 할 곳은 교회도 노량진 임용고시 학원도 아닌 용산 참사 현장임을 깨달았다. 부모님은 이해하지 못해도 예수님은 이해해 주실 것이라 믿었다. 불에 탄 채로 있는 남일당 건물 앞에서 용역 깡패들이 난도질해놓은 부서진 가게들 앞에서, 열사들의 영정 앞에서 한없이 많은 눈물을 흘렸다. 잠시만 이곳에 머무르자 생각했다.
지금 내가 있어야 할 곳은 교회도 노량진 임용고시 학원도 아닌 용산 참사 현장임을 깨달았다.
공부가 제대로 될 리가 없었다. 하루 이틀씩 결석하고 용산에 가는 일이 점차 많아졌다. 나중에는 매일 용산에 가게 되었다. 공부해야 할, 가장 중요한 시기임을 알고 있었는데도 나의 인생은 반년만 뒤로 미루자고 자신을 설득했다. 그날부터 용산참사 현장에서 청소도 하고 예배도 드리고 집회도 하고 주변도 걷고 사람들과 토론도 하고 술도 마시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농성장에서 잠을 청하는 일도 점차 많아졌다. 그때 나는 여기 사람이 있었다는 그 기억을 잊고 싶지 않았다.
경찰이 농성장을 침탈하려 했던 어느 날이었다. 늦은 밤까지 싸우다 지쳐서 다 같이 농성장에서 비닐 이불을 덮고 잠을 청했다. 아침에 일어나 분주히 할 일들을 찾아 움직이고 있었다. 희생자의 부인이신 유가족분이 오셔서 조용히 말씀하셨다. “잠은 집에 가서 주무시고 오시길 부탁드린다. 코 고는 소리에 잠을 못 자겠다.” 핼쑥하게 야윈 유가족 분의 힘없는 목소리에 나는 몹시 부끄러웠다. ‘내 코가 과했구나.’ 그 이후로 나는 선봉대나 농활처럼 며칠씩 나가 잠을 자야 할 때, 다른 동지들을 밤새 힘들게 해야 할까 괴로웠다.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했다던 윤동주 시인과 비교하면 나의 고민은 조촐하게 느껴졌다. 낮에만 연대하기로 했다. 메이데이 전날 남일당 앞에서 집회 도중에 연행될 뻔한 적이 있었다. 경찰들한테 옷이 찢기고 맞고 있었는데 그때 그 어머니가 달려오셔서 경찰들과 나를 떼어 놓았다. 그리고 나를 피신시켜 주셨다. 아무리 경찰이라도 상복 입은 유가족을 직접 건드리진 못했으니까. 그때 어머니의 말이 잊히지 않는다. “우리 아들 건드리지 마! 우리 아들 건드리지 마!” 어머니, 그때 코 골아서 정말 죄송했습니다.
나는 활동가나 운동가라는 직업을 택할 것이라고 생각도 해 본 적이 없었다. 민주노총이라는 곳에서 일하게 될 거라고는 더더욱 생각도 못 했다. 학생운동도 한때의 추억이고 경험일 뿐이라고 치부했었다. 그런 못난 생각을 했었다. 그러나 용산의 기억들은 이후 나의 삶을 바꿔 놓았다. 죽은 자들에 대한 부채감, 살아남은 자들에 대한 연민이 있었다, 2009년 사회진보연대에 가입하게 되었다. 용산에서 오히려 치유 받은 나는 복학한 후에 2010년 전국학생행진에도 가입하게 되었다. 그리고 훌륭한 동지들을 만나 학생회를 다시 하게 되었다. 단 1년이라도 제대로 학생운동을 하고 졸업하고 싶었다. 그렇게 나는 1년을 보내고 교정 밖을 나섰다. 그리고 또 몇 번의 우여곡절 끝에 지금은 민주노총 원주지역지부에서 활동 하게 되었다. 나는 지금도 용산의 기억들을 가지고 헤매며 방황하며 이 길을 걷고 있다. 언젠가는 진실을 찾을 날을 기다리며.
나는 지금도 용산의 기억들을 가지고 헤매며 방황하며 이 길을 걷고 있다. 언젠가는 진실을 찾을 날을 기다리며.
올해는 용산 참사 9주기이다. 이윤을 향한 욕망의 끝에 무고한 삶이 희생되는 참사를 여러 번 겪었음에도 우리 사회는 아직도 반성이 없다. 어쩌면 반성할 이유가 그들에겐 없을지도 모르겠다. 사람들은 ‘여기 사람이 있었다’는 사실조차 지운 채 살고 있다. 가진 자들만의 개발을 향한 욕망은 여전하다. 난개발로 삶의 터전을 송두리째 빼앗기는 사람들도 여전히 있다. 그래서 우리는 용산 참사의 기억을 오래 보존하고 아파하며 기억해야 한다. 토건 자본의 탐욕에 맞선 투쟁을 함께 벌여 나갔으면 좋겠다. 재개발로 삶터를 잃고 고통 속에 신음하는 사람들과 함께 연대해 갔으면 좋겠다. 일단 나부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