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날 나는
- 2018/03 제38호
롯데호텔 여성노동자들의 오래된 미래
#20년_전 노동자들의 #metoo 파업
뜨거웠다. 그날 나는 거리에서 땀 흘리며 걷고 또 걸었다. 정확히 말하면 ‘그날’이 아니라 ‘그날들’이다. 유난히 그해 여름은 뜨겁고 또 갈증에 시달렸던 것 같다. 2000년 7월~8월, 서울 을지로 롯데호텔 앞 거리. 여름이라 뜨거웠지만, 아스팔트라서 더 뜨거웠고, 아마도 싸움이 치열해서 뜨거웠던 거 같다. 그리고 무르익지 못한 우리 내부의 인식이 아쉬워서 갈증이 났던 것 같다.
하지만 그해 여름의 그날들이 잊히지 않는 건 의연함을 잃지 않던 그 목소리 때문일 것이다. 2000년 6월 29일 새벽 4시 30분, “비정규직 정규직 전환” 등을 요구하며 농성 중이던 롯데호텔노조 조합원 1125명은 공권력의 폭력적인 침탈로 연행되었다. 그리고 이틀 뒤 7월 1일 새벽에도 사회보험노조에 또다시 경찰병력이 투입되어 농성 중인 조합원 1606명을 연행했다.
충격적이었다. IMF 직후 노동자를 쥐어짜며 근근이 회생하던 국가의 폭력적인 민낯이 속속 드러났기 때문이었다. 신문 1면에 공권력이 투입되는 사진이 대문짝만하게 실렸고, 한여름 더위를 식힐 새도 없이 거리를 뛰어다녔다.
그런데 나에게 정작 더 놀라웠고 더 뜨거웠던 기억은 극악한 공권력 침탈과 그에 맞선 투쟁이 아니었다. 일하는 여성 노동자들이 함께 모여 문제를 제기하고 투쟁했던 일명 롯데호텔 성희롱대책위 투쟁이었다. 성희롱 문제가 처음부터 나온 것은 아니었다. 롯데호텔 노동자들이 파업에 나서면서 성희롱 문제가 주목받기 시작했다. 파업은 6월 9일부터 시작되었다. 파업 과정에서 조합원 분임 토론이 있었다. 분임 토론 후 자신이 겪은 부당노동행위에 대해 대자보를 쓰기로 했는데, 놀랍게도 대자보의 내용 대다수가 성희롱과 관련한 피해 사례였다. 자신만 당했다고 생각했던 조합원들이 사실 모두의 문제임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직장에서 터져 나온 일종의 미투 운동이었다.
노동조합은 성희롱 문제 대응의 필요성을 확인하고 즉시 실태조사에 들어갔다. 실태조사 결과, 여성 노동자의 70퍼센트 이상이 성희롱을 당한 적이 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8월 9일 270명의 여성 노동자가 집단 소송을 제기했다. 그날 9시 뉴스는 이 소송을 “오늘 사상 최대 성희롱 집단소송”이라는 제목으로 보도했다. 93년 서울대 신 교수 성희롱 사건[1] 이후 최대의 성희롱 사건이어서 법원의 판단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는 첨언도 빠지지 않았다. 그러나 내 귀에 들린 건 소송 대표로 나온 여성 노동자의 목소리다.
성희롱을 근절하고 나아가 500만 이 땅 여성 노동자들에 대한 성희롱을 완전히 뿌리 뽑기 위한, 오늘의 용기를 굽히지 않을 것입니다.
사실 이 투쟁은 소송이 다가 아니었다. 성희롱 사실이 공표되고 집회가 열리던 을지로에서 롯데호텔 여성 노동자들은 발언도 했고 문제 해결을 위한 구호도 많이 외쳤다. 많은 사람이 공감하고 함께 외쳤다. 집회에 참가한 남성노동자들이 ‘사장 니 딸도 똑같이 성희롱해주마’ 같은 소름끼치는 구호를 외치는 순간도 있었지만, 그래도 직장 내 성희롱 문제의 심각성은 운동 사회뿐만 아니라 전 사회적으로 퍼져나갔다.
노사합의를 맺으며 투쟁은 마무리되었다. 처음 요구했던 비정규직 정규직화는 이루어졌다. 성희롱 문제는 어떻게 해결되었을까. 성희롱 피해자에 대한 기본적인 보호 조치, 성희롱 가해자에 대한 징계위원회 회부 등 처벌 규정과 성희롱 피해자에게 보상대책 마련 등을 명시한 별첨 문서로 남겨졌다. 문제점이 없지는 않았다. 집회에 참석한 남성 노동자들은 투쟁의 선정성에만 주목할 뿐, 페미니즘 운동에 관심을 가지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노동조합이 주요 교섭의 과제로 성희롱 문제를 받아 안지 못했던 현실도 야속했다.
그럼에도 집회에 등장한 여성 노동자들의 의연한 선동, 발언은 감동적이었다. 성희롱 피해자라면 숨어있을 줄만 알았고 눈물 흘릴 거라고만 생각했던 편견을 뒤로 한 채, 그녀들은 당당하게 싸웠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녀들은 용감했다. 주요 교섭 요구도 아니었지만, 여성 노동자들이 직접 성희롱 문제의 현실을 폭로하고 투쟁을 일구어냈다.
그날들에 나는 직장 내 성희롱 문제를 제기한 여성 노동자들의 용기, 여성 노동자들이 집단적으로 대응했던 패기를 보았다.
아쉽고 속상해 속이 타들어갔던 적도 있었지만, 그래도 당당하게 투쟁했던 그 열기를 잊을 수 없다.
지금 한국사회에서는 미투운동이 뜨겁게 번지고 있다. 법조계에서 문화예술계까지 연일 터져 나오고 있지만, 종착지가 어디로 향할지는 오리무중이다.
속이 타들어 간다. 개별 여성들의 힘겨운 싸움이 아니라, 여성들이 함께 싸울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일하는 여성 노동자들이 자신의 직장에서 당당하게 제기하고 해결할 수 있는 그런 현실을 만들어 가려고 노력했던 그날들. 내 머릿 속에 롯데호텔 여성 노동자들의 투쟁이 떠오른 건 우연이 아니었을 것이다.●
Footnotes
- ^ 당시에는 우 조교 사건으로 알려졌지만 이후 가해자를 명명하는 게 옳다는 지적으로 신 교수 사건으로 칭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