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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11 제34호

신성한 어머니와 용돈벌이 노동자

《집안의 노동자 – 뉴딜이 기획한 가족과 여성》 서평

  • 박상은

 

 

여성의 재생산노동을 드러내다

2세대 페미니즘으로 대표되는 1970년대 여성운동 고양기, 사회주의·마르크스주의 페미니스트들을 중심으로 여성 억압의 물적 토대를 해명하기 위한 노력이 있었다. 이들은 여성이 가정에서 수행하는 무임금 노동인 가사노동에 주목했고, 마르크스주의 이론을 가사노동에 적용할 수 있는가를 둘러싼 ‘가사노동 논쟁’을 전개했다.

달라 코스타는 이 논쟁의 시발점에 있었던 이탈리아의 페미니스트다. 그녀는 1972년 영국의 셀마 제임스와 함께 《여성의 힘과 공동체의 전복》을 발표하고, 이를 통해 ‘가사노동이 노동자계급을 재생산함으로써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을 유지하는 데 임금 노동만큼이나 필수적’이라는 주장을 제시한다. 또한 가사 노동자들에게 임금 노동자로서의 협상력을 부여하기 위해 가사노동 임금을 쟁취하기 위한 투쟁을 벌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러한 가사노동 임금론은 마치 모든 가사노동이 임금노동에 종사하지 않는 전업주부들에 의해 이뤄지고 있는 것처럼 가정한다는 비판을 받는다. 실제 여성들이 가사노동과 임금노동을 동시에 수행하는 것이 일반적이기 때문에,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여성의 가사노동자로서의 역할보다 가사노동과 임금노동 둘을 다 수행해야 하는 이중부담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또 가내 생산관계는 자본주의적 생산 형태로부터 추상적으로 도출될 수 없고, 그것에 대한 경험적·역사적 분석이 필요하다는 논의도 이뤄졌다.

《집안의 노동자》는 가사노동 논쟁이 일단락 된 후인 1983년에 발간된 저작이다. 하지만 이 책 또한 재생산 과정에서 여성이 수행하는 노동을 가시화하기 위한 작업의 연장선에서 작성된 것으로 보인다. 달라 코스타는 20세기 초 미국에서 국가가 어떻게 가족 이데올로기를 강화하고 재생산에 개입하려 했는지를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20세기 초 가족의 재구성

《집안의 노동자》는 1910년대에 본격적으로 시작된 노동력 재생산에 대한 자본·국가의 개입과, 1929년 대공황으로 인한 재생산 위기 이후 뉴딜 시기에 국가가 또다시 가족과 여성에 개입하며 어떻게 재생산의 위기를 해결하려 했는지를 다룬다.

이 책이 다루는 1910~1930년대, 20세기 초는 19세기 미국의 핵가족 형태가 형성된 시기다. 가족을 부양할 만큼의 임금을 벌어오는 남편과 성애와 자녀교육을 담당하는 아내 그리고 소수의 자녀들로 구성되어 있는, 아직까지도 정상가족으로 받아들여지는 가족형태 말이다.

미국적 핵가족은 두 구성요소를 갖는데, 하나는 가족임금과 이를 보충하는 보호입법과 실업보험, 다른 하나는 이데올로기로서 동반자적 결혼의 발명이다. 가족임금은 1914년 포드의 ‘일당 5달러’ 전략 실행으로 시작된다. 달라 코스타는 이러한 임금 인상 정책이 가족 관리, 재생산 자체를 통제하는 장치를 동반했다는 점을 지적한다. 일당 5달러는 도덕적이거나 위생적인 생활을 하지 않으면―말다툼·이혼·담배·술·도박 등을 자주하는 등―보류되거나 취소될 수 있었다. 포드는 자신의 임금이 목적에 맞게 쓰이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대학의 ‘사회학과’와 조사관 및 관리자들로 하여금 노동자의 집에 들어가 그들의 생활과 급여 사용내역 등을 조사하게 했다. 문제는 일당 5달러가 여성에게는 해당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포드는 여성이 반드시 결혼을 해 주부로서 임금을 관리하길 원한다고 공개적으로 밝혔다.

1910년에는 각 주에서 어머니연금이 도입되기 시작해 국가가 남성의 임금을 기대할 수 없는 여성에게 재정을 지원하기 시작했다. 어머니연금 운동가들은 “미국의 모든 고귀한 어머니들이 그녀의 아기들과 함께 있을 수 있게 하라”는 구호로 이를 지지했다. 1921년에는 연방모성법이 도입되어 배우자가 없는 어머니를 지원하고 전국의 여성과 아동의 건강을 관리하기 시작했다.

이데올로기적 변화도 일어났다. 집안일에 도덕적 가치를 부여하려는 가정학 운동을 통해 가사노동의 합리화가 이뤄졌다. ‘집안의 산업혁명’으로 일컬어진 기술발달로 전기다리미·가스레인지·냉장고 등이 도입되기 시작했고 주부들은 새로운 제품의 사용법을 배워야했다. 한편, 데이트혁명이라 불리는 1차 성혁명이 일어나고, 가족에 성애 개념이 들어선다. 이를 통해 결혼의 의미가 새로운 동반자적 이상을 강화하는 방식으로 변화한다.

막 형성되기 시작한 미국적 핵가족은 대공황으로 인해 큰 위기에 처한다. 장기실업과 이에 따른 빈곤으로 가족이 해체되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이를 막으려는 노력도 있었다. 가족에 대한 정부의 개입과 책임은 더 커졌다. 1930년대에 시작된 뉴딜 정책은 2차 세계전쟁에서 군사비 지출을 거치며 완성됐는데, 가족에 대한 개입도 마찬가지다. 미국적 핵가족은 2차 세계전쟁 후인 1950년대에 황금기를 맞이한다. 이처럼 이 책은 미국적 핵가족의 형성기의 역사적 과정을 구체적으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싸우는 여성, 뉴딜이 기획한 여성

이 책의 미덕 중 하나는 여성들의 시도와 활동을 의식적으로 드러내려 노력했다는 점이다. 특히 인상 깊은 부분은 대공황 시기 여성들의 투쟁과 저항과 관한 내용(5장)이다.

대공황 시기 여성들은 남성들과 함께 싸웠다. 여성 단체를 결성해 남성들의 공장점거 투쟁과 시위에 동참했고, 식량과 돈을 모았다. 파업에 참여한 어머니를 위해 어린이집을 만드는 활동도 펼쳤다. 마치 한국의 노동자 투쟁의 ‘가족대책위’를 떠올리게 한다. 달라 코스타는 이러한 경험을 통해 여성이 스스로 변화하는 모습을 발견한다. “나는 처음으로 확고한 목표가 생겼다. …… 여성이라는 것만으로는 더 이상 충분하지 않다. 나는 나 자신을 위해서 사고할 권리를 가진 한 명의 인간이 되고 싶다.”

여성들은 구제 계획에서 여성이 배제된 것에 대해서도 투쟁했다. 또한 여성노동자가 많았던 마트, 카페 등 서비스 부문에서 점거와 파업을 주도했다. 여성노동조합연맹 역시 해고된 여성을 위해서도 일자리 계획을 준비할 것을 요청했고, 1930년대 말에는 최저임금과 노동시간을 쟁점으로 저임금 여성노동자와 함께 투쟁했다.

여성들의 투쟁에도 불구하고, 뉴딜 정책은 여성의 ‘일자리’로 가정 또는 집이 유일하다고 여겼다. 구제 사업은 극히 일부 여성들만을 포괄했고, 그녀들조차 절반 이상이 가사서비스시범사업 강사로 고용되어 여성들에게 가사노동을 하는 법을 가르쳐야 했다.

노동시장에 진출한 여성들은 많은 비난을 감당해야 했다. 생계를 위해 일하는 여성은 많았지만, 사람들은 여성이 남성의 일자리를 빼앗아 간다고 비난했다. 대량 실업의 원인을 여성이 대공황 이전 시기 노동시장에 진입한 것에서 찾기도 했다. 과거의 법률을 다시 도입해 결혼했다는 이유로 공직에 고용된 여성을 해고하는 주들이 생겨났다. 1933년부터 1945년 간 노동부 장관이었던 프란시스 퍼킨스는 그 자신이 노동운동가 출신이자 여성임에도 부유한 ‘용돈벌이 노동자’가 있다며 여성노동자들을 비난했다. 한국에서 여성의 노동을 ‘반찬값’이나 ‘아이들 학원비’용으로 여기는 현실과 비슷하다. 남성이 생계를 부양하는 자이며, 여성의 노동은 보조적이라는 이데올로기는 20세기 초에 시작되어 아직도 강력하게 지속되고 있다.
 

여전히 남아있는 질문

이 책은 일당 5달러 정책을 비판함에도 그 보편성을 높게 평가하고, 어머니연금(1910) 역시 도덕적 기준을 잣대로 삼았다고 지적하면서도 연방모성법(1921)과 요부양아동부조(1935)로의 발전은 성과이며 특히 어머니들의 대대적인 압력과 투쟁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강조한다. 

물론 미국의 사회보장은 대공황 시기 민중들의 투쟁 없이는 도입될 수 없었던 것이다. 달라 코스타는 더 나아가 이것이 어머니들이 남성의 임금에만 의지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란 점을 강조한다. 또한 이러한 20세기 초의 어머니 투쟁이 1960년대에 확립된 투쟁의 새 국면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고 본다. 1960년대 여성들은 정부로부터 받는 돈에 ‘지원’이라는 꼬리표가 붙는 것을 거부한다고 천명하고, 대신 이 돈이 자녀 양육이라는 노동에 대한 임금이라고 주장했다. 달라 코스타는 이 투쟁의 뿌리를 뉴딜 시기 어머니 투쟁으로부터 찾으며 이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데, 본인이 가사노동 임금지급 캠페인에 적극 참여한 사실이 반영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어머니연금과 연방모성법은 여성의 역할을 가정 내로 한정하려는 흐름에 편승해 만들어진 법이다. 복지 영역의 확대에도 기본정신은 그대로 유지되고 있었다. 또한 이것이 여성의 노동권을 억압하는 효과를 낳았다는 점을 고려하면 달라 코스타의 평가는 너무 후하다. 아마도 그녀는 모성주의에 기반을 둔 복지제도가 여성에게 양날의 검이지만 그 안에서 여성들이 자신의 권리를 찾아낼 수 있다는 점을 강력하게 믿고, 또 주장하고 싶은 것 같다. 1930년대 여성들의 투쟁에서 긍정성을 발견했듯이 말이다.

그러나 이것으로 충분할까? 오늘날 여성 및 아동에 대한 복지제도는 20세기 초 미국처럼 노골적으로 여성을 가정에 머무르도록 하지는 않지만, 전업으로 돌봄을 제공하는 경우에만 수당을 지급하여 여성들이 일을 포기하도록 하거나, 아이를 기르고 가족을 돌보기 위해 파트타임을 권장하기도 한다. 복지를 요구하는 여성들이 반드시 여성권을 옹호하는 입장에 서있는 것도 아니다. 단순히 자신의 계층에 도움이 되는 방식을 주장하거나, 보호의 논리로 복지를 요구하기도 한다. 저자는 국가가 가족과 여성의 바람직한 상을 기획하며 재생산과정에 개입하는 방식을 잘 보여주지만, 그녀가 희망을 찾는 방식은 과도하게 낙관적이다.

그녀가 책을 발간한 지 30여 년이 지났다. 선진국에서 복지제도는 오히려 후퇴했고, 한국은 제도 자체는 진전했을지 모르나 여성의 이중부담은 더욱 심화됐다. 가족을 변혁하고 여성의 노동권과 여성권을 쟁취하기 위한 투쟁은 어디에 와 있는가? 여성은 어떻게 ‘어머니로서만 인정받는 시민’과 ‘용돈벌이 노동자’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 그녀의 낙관적 전망은 틀렸지만, 그로 인해 이 책이 던진 질문은 오늘날 다시 현재성을 얻는다. ●
 
 
필자 소개

박상은 l 작은 일에 집요한 여성활동가. 페미니즘과 국제주의, 대중운동의 정신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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