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날 나는
- 2017/03 제26호
서울 한복판에서 전쟁이 벌어졌던 날
2003년 11월 전국노동자대회
2002년 12월. 학교 선배의 집에서 노무현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는 소식을 접했다. TV화면 속, 광장에 모인 노사모가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는 것을 신기하게 바라보며 조금은 뭐라도 달라질까 하는 기대로 선배 동기들과 이야기를 나눴다.
하지만 그로부터 한 달여 뒤. 임을 위한 행진곡을 수천 번은 더 불렀을 노동자 한 분이 유명을 달리 하는 결정을 내렸다는 소식을 들었다. 두산중공업 배달호 열사. 대학 2학년이 되던 나의 2003년 새해 벽두는 그렇게 열렸다.
“견디다 못한 노동자들이 하나둘 세상을 등졌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50년 만에 정권교체를 이뤘다는 김대중에 이어 ‘인권변호사’ 출신 노무현 대통령의 시대였다. 하지만 IMF 외환위기 이후 비정규직 확대와 노조 파괴로 그늘은 더 짙어지고 있었다. 싸우는 족족 노동자들에게는 손배가압류가 떨어졌다. 조직된 노동자들뿐만이 아니었다. 비정규직이 확대되고 있었고, 이주노동자 단속은 날로 심해져 쫓기다 죽거나 심하게 다치는 이주노동자들도 알려진 것만 10여 명이 넘었다. 김대중·노무현 정권을 지나며 한국 사회의 신자유주의는 완성되었고 노동자들의 삶은 파괴되어갔다.
견디지 못한 노동자들이 하나둘 세상을 등졌다는 소식이 들렸다. 배달호, 김주익, 이해남 열사에 이어 비정규직 노동자대회가 진행되던 종묘, 집회 대오 뒤에서 근로복지공단 이용석 열사가 ‘비정규직 차별 철폐하라’ 외치며 몸에 불을 지폈다. 이른바 ‘열사정국’이었다.
전태일 열사의 뜻을 기억하기 위해 열리는 2003년 11월 9일 전국노동자대회는 그런 와중에 조직되고 있었다. 비록 그 죽음들을 막을 힘은 없었을지라도 온몸으로 이 세상이 잘못되었다고, 내 동지가 죽어갔다고 외칠 힘은 남아있던 시기였을까. 당시 나는 민중운동 혹은 노동운동의 동향을 잘 알지 못하던 시기였지만, 당일 참가만 10만 명이 넘었으니 보통의 결의는 아니었으리라.
이날의 결의는 대회 당일의 것만은 아니었다. 한 해를 지나며 쌓인 분노와 활동이 모이는 과정이었다. 나 역시 연초부터 여러 투쟁에 참여하며 먹먹한 가슴을 안고 있었다. 세상이 합리적이지 않다는 것은 학회에서 배우던 책에도 쓰여 있었지만 바로 나의 눈앞에서도 펼쳐지고 있었다.
그래서였을까 아니면 그 의미와 무게를 아직 잘 몰라서였을까? 나는 노동자대회 전야에 “앞에서 함께 싸울 수 있겠냐”는 선배의 물음에 별 시간도 들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전쟁터라는 말 밖엔 표현할 말이 없던 날”
2003년 전국노동자대회 당일은 전쟁터라는 식상한 말 이외로는 표현할 방도가 없다. 대낮부터 노동자들은 종묘에서 쇠파이프를 들고 걸어 나왔고, 어느 대학 학생회관에서 밤을 지새우고 나온 학생들 200명 가량이 합류했다. 사실 노동자대회 프로그램은 기억도 나지 않는다. 묘한 긴장이 서울 시내를 감싸고 있었다. 그날따라 속도 모르고 맑은 짤그랑하는 유리병 소리는 지난 밤 신나 냄새의 정체를 알 수 있게 해주었다. 어둠이 조금 깔리기 시작하자 쇠파이프가 아스팔트에 부딪히며 만들어지는 불꽃들이 긴장감을 더욱 고조시켰다. 집회 후 행진이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행진을 불허하는 경찰과 싸움이 시작됐다.
싸움은 조악했다. 한 번의 충돌로 지휘자를 잃은 사수대가 속출했고, 대오는 여기저기서 판판히 깨지기 시작했다. 경찰들은 누군가 버리고 간 쇠파이프를 집어던지며 달려들었고, 맨손인 노동자들마저 잔혹하게 짓밟았다. 불발된 병에서 흘러나온 휘발유는 미끄러워 퇴각하다가 넘어지는 사람들도 여럿 나왔다. 경찰 방패에 옆구리를 맞고 휘청거리면서도 넘어져서 경찰에 휩쓸리면 정말 죽을 것 같아 옆구리를 움켜쥐고 뛰었다. 영풍문고 모퉁이를 돌 때쯤 화단에 올라가 있던 시민들이 ‘그 쪽으로 가면 경찰 있어요’라고 안타깝게 외치는 소리를 들었지만 이미 종로 어디든 경찰이 가득했다. 어두운 길에 잘 보이지도 않는 검은 전경들이 서치라이트 같은 불빛을 정면으로 쏘며 새까맣게 몰려들었다.
당일 연행자는 100여명에 이르렀고 부상자는 수도 없이 많았다. 애당초 8차선 대로에서 집회 대오가 공권력을 이길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짐작컨대 이를 모르지는 않았겠지만, 그것이 싸움을 피할 이유가 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날 나는 출범 9개월 노무현 정권의 민낯을 정면으로 보았다. 세상에 대한 분노. 그 감정은 일 년간 쌓아오며 확인해왔던 것이었지만 그날은 유독 생생했다. 나 자신도 그 일들을 겪으며 서서히 바뀌어 가고 있었다.
“아프지만 그날을 기억하며 우리의 대안을 만들자”
당일 앞에서 싸우자고 이야기했던 선배도, 같이 싸웠던 몇몇도 지금은 운동을 지속하고 있지 않다. 그렇지만 나에게는 여전히 동지가 있다. 우리는 그날이 그저 개인의 체험으로 남지 않게 끊임없이 다음으로 한 걸음씩 나아가고, 언젠간 이기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이야기한다. 결국은 경험도 기억도 조직하고 재구성하는 과정이 지속적으로 필요하다. 개인적인 투쟁의 기억은 그렇게 공동의 기억이 되어야 한다.
대학을 졸업하고, 충북에서 노동조합 활동을 하며 충북지역의 활동가들과 2003년 전국노동자대회에 대해 이야기 하는 일도 종종 있었다. 그날의 기억을 공유한다는 것이 신기하기도 하고 같은 곳에 있었다는 생각에 뭉클한 마음도 들었다.
고된 ‘이명박근혜’ 정권을 지나며 정권 교체로 조금 더 나아져야 하지 않겠냐는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2003년 그날의 기억은 다시 떠오른다. 그 당시 정권과 맥을 같이 하는 사람들과 한 배를 타는 전현직 노조 간부들을 볼 때도 이 기억이 떠오른다. 본질적으로 달라지지 않은 그들이 다시 노동자에게 칼날을 겨눌 때 함께 규탄의 대상이 될 것인가.
현재의 야당이 정권을 잡더라도 지금의 경제위기를 해결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로 인해 다시 정치가 위기에 빠질 때가 오면 함께 침몰할 것인지, 아니면 스스로 대안이 될 것인지 선택해야 할 시기를 지금 우리는 살고 있다. 아프지만 그날과 그 사람들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대안을 만들어가야 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