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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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02 제25호

진실보다 권력 쫓는 법원

삼성전자서비스 근로자지위확인소송 1심 패소에 부쳐

  • 오기형 삼성전자서비스지회 총무위원
 
사실을 말하라. 그러면 권리를 주리라.” 로마시대부터 내려온 오랜 법언이다. 당사자는 사실과 증거를 법원에 제출함으로써 자신의 역할을 완수한다. 법원은 이를 기초로 사실을 확정하고, 그 바탕 아래 법을 해석하고 적용한다.

사뭇 권위적 독선처럼 보이는 이 공식이 2000여 년 넘도록 원칙의 자리를 지킬 수 있었던 것은, 한편으로는 법전문가가 아닌 사람도 대등하게 싸울 수 있는 환경을 조성했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 법원의 불편부당한 법적용에 대한 신뢰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2017년 01월 12일, 삼성전자서비스 노동자들의 근로자지위확인소송을 기각한 서울중앙지법 민사41부는 두 가지 기대를 모두 배신했다.

삼성전자의 자회사인 삼성전자서비스는 7개 직영 센터를 제외한 전국 170여 개 센터를 ‘협력사’란 틀로 관리·운영하고 있다. 하지만 각 센터의 사장들은 소위 ‘바지 사장’이란 오명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노동조건이나 경영이 대부분 원청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이다. 삼성전자서비스 수리기사 1000여 명은 실제 사용자는 삼성전자서비스라고 여겼고, 원청 사용자성을 따지기 위해 2013년 여름 근로자지위확인소송에 돌입했다.

무수한 사실증거가 제출되었다. 원청이 채용에 관여했고 훈련비나 신입정착금을 지급했으며 업무교육과 감사, 월별 평가를 진행했다는 사실을 법원은 인정했다. 원하청 노동자들의 업무가 중첩되어 있었던 사정도, 원청 관리자들이 문자메시지로 업무를 지시하고 협력업체 간부회의나 조회에 참석한 사실도, 인력충원 서약서 등 도급업체의 권한을 넘어선 행위 정황도 인정했다.

사실은 확인되었다. 그런데 사실 확정을 배반하는 법해석이 튀어나왔다. 일부 협력사에서 일어난 일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모든 협력사에서 각각 증거가 제출되지 않으면 파견관계로 볼 수 없다는 얼토당토않은 결론이 타당하단 말인가? 노동자들은 사실을 말했는데, 법원은 진실을 보지 않았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곳에서 의심이 싹튼다. 삼성전자서비스 여의도센터나 선릉센터에 가서 휴대폰을 맡겨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원청 기사들은 특수건만 처리하니 인근 다른 협력업체 센터로 가세요’라고 말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안다. 그런데 법원은 직영 내근기사들은 특수건만을 처리했다고 단정했다. 삼성전자서비스를 둘러싼 모든 이해관계인들은 삼성전자서비스 노동자들이 예외없이 건당수수료라는 도급성 임금체계하에 있었음을 안다. 그럼에도 법원은 각 협력업체가 독자적 임금체계를 갖추고 있다고 판단했다. 과연 대등한 환경이 조성되었던 것인지, 과연 법원의 법적용이 공정했는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법률만능과 법률무능 사이

근로자지위확인소송은 법률만능과 법률무능 사이에서 춤을 추는 경향이 있다. 법률만능적 사고는 노동조합 가입과 활동의 최우선 순위를 근로자지위확인소송 승리에 둔다. 노동조합이 가지고 있는 다양한 무기들을 오직 ‘법적 투쟁’으로 왜소화시킴으로써 자본과 겨루기 위한 다양하고 창의적인 상상을 제한하게 된다. 반대로 법률무능적 사고는 어차피 검찰이건 법원이건 노동부건 전부 노동자들을 대변하지 못하는 기구인 만큼 근로자지위확인소송의 승패는 아무런 변수가 되지 않는다고 본다. 이렇게 되면 노동조합이 가지고 있는 다양한 무기들에서 법을 아예 제거하게 된다.

법률만능적 사고는 현장에서의 투쟁을 회피하는 태도로 이어진다. 법을 요구 관철의 수단으로 활용하는 것이 아니라 책임으로부터 도피하는 방법으로 이용하는 것이다. 반대로 법률무능적 사고는 법이 일반적으로 자본의 입장에서 쓰인 것이라는 점은 인정하더라도 그것이 아무런 법적 준비를 하지 않아도 되는 이유가 되지는 않는다는 점은 간과한다. 법률만능주의가 법을 책임으로부터 도피하는 방법으로 이용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법률무능주의도 투쟁의 빌드업(단계별로 쌓아나가기)이나 세밀한 기획으로부터 도망가는 것이다. 그래서 법률만능주의와 법률무능주의는 사실 서로에게 거울상이 된다. 법률만능주의는 법률투쟁에 대한 조직투쟁의 우위를 승인하는 것으로 교정되어야 하고, 법률무능주의는 충실하게 법적·사실적 사태를 대비해야 한다는 점으로 보충되어야 한다.

그간 삼성전자서비스지회는 근로자지위확인소송이 법률만능과 법률무능의 양 편향에 빠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노력해왔다. 원고를 모집하는 과정이 곧 노동조합 설립과 가입 자체였고, 증거를 취합하는 과정이 간접고용 노동자로서의 지위를 확인하고 스스로를 교육하는 각성의 계기였다. 전국 협력사의 일률적 근무형태와 노무관리가 반대로 조합원의 동일성을 강화했고, 소송을 통해 무노조 삼성자본의 노조파괴 손발을 어느 정도 묶을 수 있었다. 그래서 근로자지위확인소송은 승패와 무관하게 활용도가 높은 조직강화 전술이었다.

소송에 올인하는 법률만능의 편향은 패소의 경우에 특히 위험하다. 그래서 소송 이외의 다른 프레임을 구축하기 위해 노력했다. 패소 판결을 항소심에서 뒤집은 포스코 사내하청이나 금호타이어 비정규직과 승소 판결이 상고심에서 뒤집어진 KTX 승무원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 소송 이외의 프레임을 구축하지 못하는 경우 예외 없이 조직력의 부침을 겪을 것을 예상했기 때문이다. 재판 승소를 조직 확장의 디딤돌로 만들어야 하는 것이야, 물론 필요하다.

이와 같은 이유 때문에 패소가 조직을 망가뜨리지 않도록 재벌에 맞서는 사회적 투쟁, 위험의 외주화 해결을 위한 투쟁을 기획하고 실행해 왔다.
 
 

호랑이처럼 예리하게 소처럼 우직하게

판결 결과를 접한 후, 조합원들 사이에서 가장 광범위하고 강하게 확인된 감정은 ‘억울함’이다. 그럴 만도 하다. 아니 그럴 수밖에 없다. 그들의 삶에 녹아 있고 습관에 각인되어 있는 기억이 바로 명백한 증거이기 때문이다.

이제 문제는 ‘무엇을 할 것인지’다. 억울함이란 감정이 완전히 정서적 영역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 주목하자. 억울함은 언제나 불의와 모순에 대한 인식과 함께 온다. 모든 정서적 억울함에는 부당함에 대한 지적 인식이 깃들어 있다. 이 부당함에 대한 인식이 노동자 모두에게 일반적이라는 점, 그리고 가깝게는 간접고용 구조에서 유래한다는 점을 확인하는 게 중요하다.

억울함이 패배감으로 남아 조직 전체의 활력을 빼앗아 가는 병원균이 될지, 긴장감으로 상승해 조직의 체질을 개선하는 항체가 될지는 다시 조직 내 동일성을 구축하는 데 달려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억울함이 부당함으로, 공동의 인식이 공동의 행동으로 상승해야 한다. 이런 과정이 성공적으로 수행되었을 때, 1심의 패소는 종착지가 아니라 기항지가 될 것이다.

‘잉크로 더럽혀진 종잇조각’. 마틴 루터는 15세기 말 가톨릭교회가 재정 마련을 위해 거액의 돈을 받고 팔았던 면죄부를 이렇게 불렀다. 오늘 더럽혀진 종잇조각은 삼성 미래전략실이 국가권력과 거래한 법원 판결문이다. 법원은 일주일 간격으로 삼성전자서비스 불법파견과 이재용의 뇌물죄에 면죄부를 줬지만, 그 것은 시한부일 뿐이다.

우리는 다시 깨달았다. 진실이란 거저 주어지는 게 아니라 쟁취하는 것이라는 것을. 울분을 넘어 도약의 발판으로 삼아야 할 게다. 양날의 검인 근로자지위확인소송이 우리를 베지 않도록 ‘호랑이의 눈으로 살피고 소의 걸음으로 전진’(호시우행)할 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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