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칼럼
- 2017/02 제25호
눈먼 자들의도시, 눈뜬 자들의 도시
'노동자의 책' 이진영 대표의 구속에 부쳐
얼마 전 전공 관련 자료를 검색하다가 북한 학자의 논문이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어렵게 열람할 기회가 있었다. 신분증 제출은 물론이고 서약서까지 써서 논물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정작 논문의 질은 비참하다는 생각이 들 만큼 초라했다. 북한의 유일한 역사 학술지에 실린 그 논문은 정권에서 원하는 이야기를 시대만 바꾸어 서술하고 있는 것에 불과했다. 한숨이 나올 정도로 한심했다.
해방 전후 이름을 날렸던 비판적 지식인들은 남한의 반공주의를 견디지 못하고 상당수 월북했다. 그리하여 1960년대까지 적어도 한국사 영역은 북한에서 백남운을 비롯한 유수의 연구자가 탁월한 성과를 내었고, 그 글들이 일본을 통해 몰래 남한에 흘러들어와 한국사 연구에 큰 영향을 주었다는 것이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그러나 지배권력으로부터 감시받으며 단 하나의 학술지를 통해 발표되어야만 하는 북한의 역사연구는 정체를 넘어 후퇴하였고, 결국 내가 본 북한 최고 대학 교수의 논문은 남한 학부생의 레포트만도 못한 수준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21세기 남한 사회에서는 이와 똑같은 시도가 박근혜 정권에 의해 이루어졌다. 모든 영역에서 이루어진 낡은 검열은 그들이 내세우는 ‘자유민주주의’에서 보장하고 있는 학문 분야까지 밀려들어왔다.
절판되거나 널리 알려진 사회과학서적을 PDF형식으로 만들어 대중에게 무료로 개방해 온 전자도서관 '노동자의 책' 사이트 운영자인 이진영 대표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된 것이다. 서점에서, 헌책방에서 버젓이 팔리고 있고, 또 누군가의 서가에 꽂혀 있는 책들을 모아놓았다는 이유만으로 국가보안법의 사슬에 묶여 철창 속으로 끌려들어가는 기막힌 현실을 우리는 대면하고 있다. 해군사관학교의 교수사관으로 있던 대학원생이 정체도 모를 불온서적을 소지하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기소당해 수년 간 고통당했던 것이 바로 몇 년 전이다.
우리 모두는 ‘노동자의 책’에 빚을 지고 있다. 누군가는 잔치가 끝났다며 버리고 외면하려 했던 지성의 흔적들을 차곡차곡 모아 망각 속에서 건져낸 것이 바로 ‘노동자의 책’이다. 연구자의 입장에서는 과거의 선배들이 벌였다는, 그러나 이미 대학사회에서는 점차 사라져 공부할 수도 없었던 그 치열한 논쟁의 흔적들을 다시 찾아 곱씹을 수 있게 해준 보물창고였다. 그래서 우리는 ‘노동자의 책’에 모인 이야기들을 통해 다시 희망과 대안을 찾아낼 수 있었다.
지배자들은 눈먼 자들의 도시를 원한다. 그들의 돈과 법은 아름답고 질서 있게 보이지만 사실 사람들의 눈을 가려 그들의 지배에 순응하게 만드는 가림막이었다. 하지만 ‘노동자의 책’은 눈뜬 자들의 도시를 원했던 사람들이 쌓아올린 등대였다. 고통스럽지만 현실을 직시하기 위해 싸워왔던 노동자와 민중들이 켜 놓은 촛불이 모여 그 등대를 만들었다. 정권의 민낯이 낱낱이 드러나는 오늘까지 우리 모두는 ‘노동자의 책’에 빚져 왔다. 그렇기에 우리는 우리에게 ‘노동자의 책’을 돌려달라고 다시금 요구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