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보다

  • 여는글
  • 2017/01 제24호

한없이 추악하거나 한없이 위대하거나

  • 홍명교 편집실
인간이란 한없이 추악해질 수도, 혹은 한없이 위대해질 수도 있음을 느낀다. 여의도에선 국정조사 청문회가, 광장에서는 촛불 시위가 이어지고 있다.

평일에는 스마트폰과 TV 생중계로 이 사회를 어지럽히고 파괴해온 자들의 얼굴을 본다. 거짓말과 모르쇠, 꾸짖음과 호통 등 연출된 몸짓의 줄다리기가 서커스처럼 상연된다.

삼성 이재용과 현대차 정몽구를 비롯한 굴지의 재벌 총수들은 청문회에 불려나와 온종일 굳은 얼굴로 앉아 있었다. 수조 원의 돈을 쥐고 대를 이어 제멋대로 살아온 자들에겐 제법 굴욕적인 하루였을 게다.

그러나 그뿐이다. 10시간 내내 “모르겠습니다”와 “송구합니다”를 연발했던 이재용은 휴정 시간 받은 기자의 질문 세례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개돼지 같은 것들이 감히’였을까, ‘어차피 게임 다 끝났어’였을까.

청문회가 희망이 될 수 있을까? 쇼가 끝나면 재벌 총수들이 각성하고 정경유착과 경영 세습을 포기할까? 아니면 재벌을 통제하고 노동자의 권리를 향상시킬 수 있는 법안이 만들어질까? 선뜻 낙관할 수 없는 건 한편에선 탄핵안을 가결시키면서도, 다른 한편에선 각종 친재벌 법안들을 통과시키는 야당 의원들의 행태 때문이다. 이대로 정권이 교체된다 한들 우리의 삶이 나아질 수 있을까?

크리스마스 이브에도 70만이 전국에서 촛불을 들었다. 12월 초에 비하면 절반가량으로 줄었지만 아직 거리의 시민들은 물러서지 않고 있다. 토요일마다 거르지 않고 광화문을 찾았다는 한 중년의 시민은 자유발언대에 올라 1987년의 배반과 좌절을 격정적으로 털어놨다. 이런 역사를 반복하지 않으려면 정치인들에게 기대지 말고 모든 노동자, 시민들이 주역이 되어 계속해서 싸워야 한다고 했다. 어느 가난한 할머니는 2016년 달력을 찢어 별을 만들어오셨다. 정성스레 만든 흰 별들을 깃발을 든 노동자들의 깃대마다 하나씩 걸어주었다. 스물둘 청년은 어린 동생들과 함께 무대에 올라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싸우자고 조용하고 단단하게 외쳤다. 경남 창원의 촛불집회 무대에 오른 스물네 살 전기공 청년은 이번 투쟁이 박근혜 퇴진으로 끝나지 않고 우리 삶을 바꿔야 한다고 외쳤다.

추악한 자들의 거짓말이 상연되는 청문회가 정세를 뒤집긴 어려워 보인다. 정치인들의 사이다 발언은 이따금 청량감을 주기도 하지만, 모니터 밖 민중은 엑스트라를 벗어나기 어렵다. 주권이란 스스로 외치고 변화를 만드는 힘에서 발휘되는 것이지, 선망과 소극적 기대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탄핵안을 통과시키며 확인했듯, 우리 자신의 힘이 다른 미래를 만들 유일한 희망이다. 청문회 스타든 대선 후보든 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메시아 따위는 없다. 광장에서 밝힌 민주주의의 촛불을 직장과 골목 곳곳으로 번지게 하는 일, 남은 겨울과 다가올 봄에 우리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하고도 위대한 일이 아닐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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