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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12 제23호

세계여성행진, "다른 세상은 가능하다!"

세계화와 전쟁에 맞선 여성들

  • 문설희 사회진보연대 노조페미니즘팀
삽화: 최설
 

지구가 한 바퀴 자전하는 동안

2005년 10월 17일 정오, 전 세계 각지에서 여성들의 공동행동이 열렸다. “여성의 빈곤화 부추기는 신자유주의 반대한다!”, “여성의 이름으로 전쟁에 반대한다!”국적과 인종, 나이와 직업은 다르지만 신자유주의가 만든 여성에 대한 빈곤과 폭력에 저항하는 여성들의 목소리가 힘차게 울려 퍼졌다. 이 날의 세계 행동은 해를 따라 지구를 한 바퀴 돌며 24시간 동안 진행되었다.
 

빈곤과 폭력에 맞서다

“여성은 세계 공식 노동의 3분의 1, 비공식 부문의 5분의 4에 달하는 노동을 하고 있다. 또한 오늘날 세계 식량의 50퍼센트는 개도국의 여성농민들에 의해 생산되고 있다. 세계의 가장 가난한 지역에서 여성들은 식량의 80퍼센트를 생산하고 있다. 하지만 하루에 고작 2달러 이하의 돈으로 살아야 하는 인구의 70퍼센트가 여성과 아동이다. 뿐만 아니라 여성들은 전 세계의 토지 중 단 1퍼센트만, 세계 전체 소득의 10퍼센트만 소유하고 있다.”
-월간 <사회운동> 2005.7/8월호 중
 
여성이 지구를 움직이고, ‘하늘의 절반’을 지탱해왔다. 하지만 세상은 여성에 온전히 존재하도록 허용하지 않았다. 특히 1970년대 세계 불황 이후 자본주의 위기 극복을 위한 대안으로 채택된 신자유주의 세계화는 대다수 여성에게 더 큰 고통을 안겨주었다.
 
신자유주의 세계화는 금융자본에 자유를 부여하며 공공서비스 감축과 시장화를 가속화했고, 이는 불평등과 빈곤을 심화시켰다. 통치성의 붕괴로 일어나는 내전과 ‘테러와의 전쟁’, 미국에 포섭된 나라들에 안전을 제공한다는 명분의 군사력 확대는 삶의 터전을 파괴했다.
 
세계화와 전쟁의 시대에 여성들은 더욱 빈곤해지고, 더 많은 폭력에 노출됐다. 노동유연화가 확산되는 가운데 여성 대부분은 비정규직 형태로, 저임금과 열악한 노동조건에 시달리게 됐다. 땅과 바다를 빼앗긴 여성 농어민들은 비공식부문 노동으로 유입되었고, 여성 빈곤이 심화되는 가운데 성매매를 택하는 여성들이 늘어났으며, 이주 여성들은 노동권의 사각지대에서 일해야 했다.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 세계 곳곳에서는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양산하는 빈곤과 폭력에 맞서는 투쟁이 벌어졌다. 그 과정에서 여성이라는 이유로 여성들이 더 큰 빈곤과 폭력에 내몰리는 현실에 주목한 새로운 여성운동이 고개를 들었다. 1995년 캐나다 퀘백에서 진행된 ‘빵과 장미’ 행진을 세계적인 수준으로 확산하자는 제안에 따라 ‘세계여성행진’이란 이름의 국제적인 여성운동 조직이 결성된 것이다.
 

다른 세상 위한 여성들의 세계횡단

‘세계여성행진’의 2005년 행동계획은 페미니스트 유토피아를 창조하기 위한 집단적 행동이었다. 여성들은 건설하고자 하는 세계의 기본원리를 담은 31개의 선언, 즉 <세계여성헌장>을 3월 8일 세계여성의 날에 ‘세계여성행진’의 모든 참가국에서 일제히 대중 집회로 발표했다. 그리고 브라질 상파울로에서 아프리카 부르키나파소까지 릴레이 행진을 했다. 끝으로 10월 17일 세계빈곤철폐의 날에 모든 참가국 동시 행동을 함으로써 대장정을 마무리한다는 계획이었다.
 
이를 위해 ‘세계여성행진’은 2005년 포르투알레그레에서 개최된 세계사회포럼 사회운동총회에 릴레이 여성행진을 제안했다. 이로써 세계여성행진과 10월 17일 24시간 연대행동이 사회운동의 주요한 일정에 포함된다.
 
“세계여성행진은 다양한 인종, 문화, 종교, 정치적, 계급적 배경의 여성 집단들로 구성된 운동이다. 이러한 다양성은 우리를 분열시키기보다는 더욱 단결시키며 연대를 달성하도록 한다. 2000년 우리는 세계여성행진에 참여하면서 세계적인 빈곤의 제거와 여성에 대한 폭력 종식, 여성의 육체적 도덕적 완전성의 존중을 내용으로 하는 17개 요구를 담은 정치 강령을 작성했다. 우리는 또 다른 세계를 건설하기 위한 대안을 제시해왔다. 우리는 세계적인, 그리고 일국적인 사회운동 속에서 능동적인 활동을 펼치고 있다. 이 행동을 통해, 우리는 다른 세계는 가능하다는 점을 확인하고자 한다.”
- <인류를 위한 세계여성헌장> 중
 
164개 국가의 6000여 개 여성운동조직이 참여한 세계여성행진은 세계 여성들의 공동행동과 연대를 강화하고, 신자유주의 세계화와 여성에 대한 폭력에 반대한다는 것을 분명하게 제기했다. 나아가 여성들만의 행진이 아니라,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고자 하는 사회운동들의 행진이기도 했다는 점에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세계여성행진 퀼트

한국: 두 개의 행진, 두 개의 퀼트

2005년 3월 8일 브라질 상파울로에서 출발한 세계여성행진은 미주, 유럽, 호주, 일본을 거쳐 7월 3일 한국에 도착할 예정이었다. 여성의 고유한 권리의 문제를 사회변혁과 결합시키면서 대안적인 사회운동을 조직해온 한국의 활동가들은 ‘세계여성행진’에 주목했다. 지구를 횡단하는 세계여성들의 행진에 함께 하자는 제안에 동의한 국내 10개 단체들은 ‘빈곤과 폭력에 저항하는 여성행진’(이하 ‘여성행진’)을 구성했다.
 
‘여성행진’은 신자유주의 정책이 야기한 빈곤과 폭력에 맞서 싸우는 다양한 여성들과 함께하는 토론과 집회 등을 조직했다. 노무현 정부의 신자유주의 여성정책을 비판하고, 일부 계층에 대한 수혜를 대가로 다수 여성들에 대한 이중부담을 은폐하고 강화하는 ‘성주류화 전략’의 기만성을 폭로하는 실천도 전개했다. 이 과정에서 여성대중운동의 자율성을 강화하는 실천보다는 정부 정책 개입과 의회 진출에 중점을 두며 정부협조적인 태도를 취해왔던 주류 여성단체와의 입장 차이가 확연하게 드러나기도 했다. 이는 두 개의 행진과 두 개의 퀼트가 등장하는 상황을 낳았다.
 
퀼트, 즉 ‘조각보’는 국가별로 행진을 이어가면서 <세계여성헌장>의 가치를 나타내는 의미로 제작되어 이웃나라에 전달됐다. 여러 나라에서 제작한 퀼트가 덧붙여져서 거대한 패치워크(patchwork)가 되었고, 이것은 ‘또 다른 세상’을 꿈꾸는 여성들의 요구가 담긴 ‘새로운 세계지도’로 여겨졌다.
 
한국의 여성행진에서 제작한 퀼트
하지만 ‘세계여성행진’의 한국코디네이터를 맡았던 한국여성단체연합은 이 연대퀼트를 ‘여성행진’에서 사용할 수 없다고 통보했다. 이에 ‘여성행진’은 전국 순례단 활동을 전개하며 만들었던 자체 퀼트를 들고 7월 3일 한국 여성행진을 진행했다. 10개 참가단체 회원뿐만 아니라 여성 노동자, 여성 농민, 빈민 여성, 장애 여성, 성매매 여성, 이주 여성 등 다양한 여성들이 ‘여성’이라는 이름으로 한 자리에 모였다. 불안정 노동의 확산, 출산과 양육에 대한 여성의 부담 강화, 빈곤의 여성화, 폭력의 증가에 대항하는 다양한 여성들의 운동이 만나고 연대를 다짐하는 행진이 이어졌다.

 

해방을 향한 행진을 이어가자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는 데 여성의 힘은 필수적이며, 여성의 요구는 그 바탕이 되어야 한다. 노동자, 농민, 빈민, 장애인, 이주노동자, 성노동자, 동성애자 등 다양한 이름이지만 우리는 함께 투쟁하고 한 목소리로 우리의 권리를 주장한다. (…) 우리는 이 모든 우리의 권리를 쟁취하기 위해 이 자리에 모였다. 우리의 행동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2005년 10월 17일 전 세계 릴레이 행진이 마무리되는 날 우리는 전 세계적으로 진행되는 24시간 연대행동에 동참할 것이다. 11월 부산에서 열리는 APEC 정상회의 반대투쟁, 12월 홍콩에서 열리는 WTO 6차 각료회의 저지투쟁 등 전쟁과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반대하는 투쟁이 진행되는 장소에서 우리는 여성의 목소리를 더욱 드높일 것이다.”
- <7.3 여성행진 권리선언문> 중
 
2005년 세계여성행진은 10월 17일 아프리카의 부르키나파소에서 마무리됐다. 마지막이 부르키나파소인 이유는 그곳이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지역 중의 하나였고, 성기절단과 조혼, 일부다처제 등 특수한 폭력 아래에서 여성들이 살고 있는 나라이기 때문이었다. 2010년 ‘세계여성행진’은 “우리 모두 해방될 때까지 행진에 나선 여성들(Women on the March until we are all Free)”이란 슬로건을 걸고 여성의 경제적 자립성, 공공재와 공공서비스, 여성에 대한 폭력, 평화와 군축이라는 4가지 주제로 행동을 지속했다. 또 전쟁에 맞서 싸우는 여성들에게 연대를 표하는 의미로 콩고민주공화국에 모여 행진을 마무리했다. 2015년에는 방글라데시 라나플라자에서 희생된 수백 명의 여성노동자들을 기리는 행동을 세계 곳곳에서 펼치기도 했다.
 
‘세계여성행진’을 통해 여성운동과 사회운동 진영이 폭로했던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폐해는 이제 임계치에 도달했다. IMF와 같은 신자유주의 국제기구에서조차 신자유주의 체제에 대한 자성론이 나오고 있다. 그렇다면 신자유주의 세계화 이후의 세계는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
 
보호무역의 강화, 이주민에 대한 폭력, 여성에 대한 혐오 등이 오히려 강화되고 있는 최근의 세계적 현상은 ‘또 다른 세상’이 유토피아가 아닌 디스토피아가 될 수도 있음을 시사한다. 따라서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야기한 여성에 대한 빈곤과 폭력에 맞선 투쟁, 여성해방을 향한 행진은 계속되어야 한다. ‘또 다른 세상’의 두 가지 길 앞에서 기로에 서 있는 오늘, 세계여성행진이 꿈꾸었던 세상을 되살리고 다시금 힘찬 행진을 준비하는 것은 시급하고 절박한 일이 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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