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보다
- 2016/11 제22호
일본의 진보정치는 어떻게 몰락했나?
《일본 전후 정치와 사회민주주의》 신카와 도시미쓰 저·임영일 번역
일본은 나에게 매우 먼 나라다. 청소년기의 민족주의적 반일 감정은 일본에 거리두기를 습관으로 만들었다. 또래 필독 만화인 《드래곤볼》과 《슬램덩크》도 안 봤을 정도였다. 대학 시절에도 마찬가지였고, 1980년대처럼 일본어를 배워가며 외국의 좌파 이론을 공부해야 할 까닭도 없었다.
득표력은 작지만 당원이 수십만인 대중적인 공산당이 건재하다는 것, 태평양전쟁 종전 후부터 1980년대까지 최대 야당이었던 사회당이 흔적을 찾을 수 없이 사라졌다는 것, 1960~70년대의 신좌파운동은 분열과 상호 폭력 속에서 붕괴했다는 것 정도가 일본의 운동에 대해 풍문으로 들은 것들이었다.
하지만 기업별 노조를 중심으로 한 한국과 일본의 유사한 노동 체제, 한미일 군사동맹과 동북아시아 정세, 일본의 장기침체를 뒤따르는 듯 불안한 한국 경제 등, 눈앞에서 벌어지는 두 나라의 관계는 더 이상 일본을 먼 이웃나라로 치부할 수 없게 만들었다. 그러던 중 만나게 된 책이 올 6월에 발간된 《일본 전후 정치와 사회민주주의: 사회당·총평 블록의 흥망》이다.
일본 사회당을 아시나요?
일본 사회당은 서구의 사회민주주의 정당과 여러 면에서 다르다. 일본에서는 마르크스주의와 혁명주의를 따르는 공산당과 사회민주주의와 개량주의·의회주의를 추구하는 사회민주당이란 일반적 도식이 적용되지 않는다. 적어도 1980년대 중반까지 일본 사회당의 이론적 기반은 마르크스주의였으며, 사회주의 혁명 추구를 강령적 문서에 포함시켰다. 또 의회를 통한 집권보다는 투쟁을 강조하는 저항 정당이었다. 당내 좌우파의 경쟁 속에서 좌파가 주도권을 쥔 것도 특이한 점이다.
어떻게 이런 세력이 일본 제1야당이었고, 최대의 노동조합 총연맹이었던 500만 일본노동조합총평의회(총평)의 지지를 받았을까? 그리고 어떻게 또 완전히 해체되었는가? 크고 무거우면서도 호기심을 자극하는 질문들이 머릿속을 맴돈다. 이 책은 바로 그 질문을 던지고 있다. ‘일본 최대의 좌파 정당과 노총이 실패한 까닭은 무엇인가?’
사회당 쇠퇴의 구조를 찾아서
1955년은 일본 현대 정치사의 궤적이 형성된 해였다. 지금까지 독보적 집권 정당으로 군림하는 자민당이 결성되었고, 좌파와 우파로 분열해 따로 살림을 차렸던 사회당이 재통합했다. 공산당도 1950년부터 54년까지의 무장 투쟁 노선을 수정하고 의회정치에 뛰어들었다. 이 때문에 흔히 일본 현대정치의 구조를 55년 체제라고 부른다. 자민당이 장기 집권하고 사회당을 위시한 야당들이 다당제를 이루었기 때문에 1.5당 체제로도 불렸다.
저자는 이 55년 체제를 정당 구조의 차원에서 뿐만 아니라, 계급정치의 차원에서도 중요하게 살펴본다. 사회당 쇠퇴의 원인으로 흔히 이데올로기적 경직성과 현실정당으로의 전환 실패가 꼽힌다. 그러나 이는 현상에 대한 관찰에 머무르는 진단이다. ‘왜 전환하지 못했나’에 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일 사회당이 현실주의를 택했다면 성공했을까? 일본 사회당을 탈당한 현실주의적 사민주의 세력이 만든 민사당은 사회당보다 훨씬 작은 세력으로 존재하다가 소멸하고 말았다. 사회당의 쇠퇴를 현실주의화 여부에서 찾는 분석의 설득력이 취약해지는 지점이다. 여기서 저자가 주목하는 것은 기업주의에 포획된 일본의 노동체제다.
기업주의 노동체제의 형성
1955년은 일본에서 생산성본부가 설립되고 춘투(봄 시기 임금인상 집중 투쟁)가 시작한 해이기도 하다. 기업단체들이 제기한 생산성 향상 운동을 둘러싸고 당시 노동운동의 양대 축이었던 총평과 전일본노동조합회의(전노)가 대립했다. 총평이 계급주의 관점에서 생산성 운동을 “계급 협조 캠페인”으로 규정하고 대결한 반면, 온건 사민주의 색채였던 전노 계열의 노조들은 “노동조건의 향상, 실질임금의 인상, 고용 증대를 동반할 것” 등의 여덟 가지 원칙을 조건으로 생산성 운동에 참가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생산성 운동에 대한 총평의 강경한 태도는 산하 민간 부문 노조들의 전면적 지지를 받지 못했다. 특히 총평 내 좌파들이 주도한 1960년 미이케 쟁의(탄광 폐쇄에 맞선 장기파업)에서 노조의 현장 통제 노선이 패배한 뒤에는, 민간 노조 사이에서 합리화 및 생산성 향상을 완전히 반대하는 강경파가 사라졌다.
이런 변화 속에서 1960년대 들어 전노를 재편한 전일본노동총동맹(동맹)이 민간 부문에서는 총평을 능가하게 되었다. 그리고 동맹 계열 노조들은 사회민주주의가 아니라 기업주의를 표방하기 시작했다. 특히 주요 민간 노조였던 자동차산업노조나 전력노조 등은 기업과 노동자의 이해관계를 동일시하는 기업주의 입장을 취했다. 종신고용제, 연공임금제, 기업별 복지는 노동자들의 기업 애착 의식을 강화했고, 능력주의 관리의 확대는 노동자 간 경쟁을 부채질해 노동자 단결을 저해했다.
노동운동과 계급정치의 분절
결국 일본에서 1960년대 이후 관공노(공무원, 교사, 공공 부문 노조)를 중심으로 한 계급주의적 총평과 민간 부문을 중심으로 한 기업주의 노동운동의 분열은 구조화되었다. 이를 상징하는 것이 IMF-JC(국제금속노동자연합 일본위원회)의 발족과 성장이다. IMF-JC는 수출산업 중심의 민간노조의 연합체였는데, 이들은 전노와도 다르게 산별노조 건설 자체를 부정하고 기업주의 색채를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이 무렵부터 일본 노동운동을 상징하는 춘투의 성격도 바뀌었다.
1950년대 춘투를 주도한 총평은 춘투를 산별 조직을 강화할 방도로 여겼다. 고도성장기에 노동력 부족을 배경으로 춘투를 통한 임금인상은 중소기업까지 파급되면서 임금격차를 줄이는 역할을 했다. 하지만 1960년대 기업주의를 표방한 민간 노조들이 총평에서 분리되고 이들이 세력화하면서 IMF-JC가 춘투를 이끌게 되었다. 1975년 임금인상에 대한 정부의 강경한 통제 방침이 내려졌고, 이후 춘투에서 임금인상이 자제되기 시작하면서 춘투의 기능은 결정적으로 바뀌었다. 아래로부터의 기준임금 인상에서 위로부터의 상한선 설정으로 변화해, 임금인상을 억제하는 효과를 낳은 것이다.
사회당의 짧은 집권과 소멸
공공과 민간 부문의 노조가 이념에 따라 분립한 일본 노동운동의 특징은 사회당의 정치적 선택마저 제약했다. 사회당 주류였던 당내 좌파들로서는, 총평 지도부가 지지하고 있는 원칙주의와 호헌평화주의를 변화시켜 현실주의로 전환하는 것은 성공 보장이 없는 모험에 뛰어드는 일이었다. 반면 기업주의 노동운동은 하나의 진보정당과 강하게 결속되는 것을 꺼렸고, 집권 자민당이나 비사회당계 야당에 대한 압박·로비가 정책 개입에 더 유리하다고 생각했다.
이런 상황은 사회당이 노선을 전환한다고 해서 일본 노동계급의 단결이 보장된다는 기대를 가지기 어렵게 만들었다. 따라서 평화헌법 수호를 위한 최소 요건인 의석 3분의 1을 유지하는 한 사회당은 보장된 득표력을 포기하는 모험에 뛰어들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1980년대 현실 사회주의의 위기와 붕괴가 급박하게 일어나는 국제 정세는 사회당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더군다나 일본 노동운동의 기업주의가 고도화되고, 자본의 공세 속에 고립된 총평이 1987년 민간 노조들이 주도한 일본노총연합(렝고)으로 흡수되고 말았다. 사회당의 강력한 지지 기반이 소멸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자민당이 부패 스캔들로 전후 최초로 실각하는 예상치 못한 혼돈이 발생했고, 1993년 사회당은 비자민당 연립정권과 자민당·사회당 연립정권에 잇따라 참여한다. 자민당과의 연립정권에서 총리로 추대된 무라야마 사회당 당수는 미·일 안보조약 부정, 자위대 불인정 등 사회당이 견지해왔던 원칙을 포기하고 만다. 그는 의회의 질의에 “내각의 일원으로서 연립정권 기본 합의에서 지금까지의 국가정책을 승계할 것을 분명히 했다”고 답변했다. 그러나 지지기반과 근본 노선을 모두 상실한 사회당은 짧은 공동 집권 이후 급속히 분열되고 결국 소멸되고 만다.
질문을 안고서
더듬거리며 읽은 한 권의 책으로 일본 사회당-총평 운동의 공과와 몰락을 명쾌히 파악하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여기 소개하지는 못했지만 사회당과 총평의 행적에 영향을 끼친 내부 정파 간 논쟁의 장면들도 책에 담겨 있다. 일본 정치와 노동운동 구조를 만드는 데 결정적이었던 미군정기의 역사와 냉전도 빼놓지 못할 요인이다. 이런 주제들을 포함해 사회당-총평의 몰락이라는 문제는 지금도 일본 내에서 논란이 되는 주요한 연구 꺼리라고 한다.
다만 책을 읽으면서 반복해서 떠올랐던 생각들이 있었다. 강력했던 노동자운동이 자본의 구획과 전략에 따라 분열되고 통치당할 때 이를 타파할 방도를 마련하지 않으면 안 된다. 노동조합이 시대의 변화를 읽고 새로운 노동자들을 담는 그릇이 되지 못하고 기업의 울타리 속에 머무른다면 일본과 같은 결과를 맞을 수 있다. 진보정당이 자신의 정체성과 노선을 버리고 ‘정치적 기회’에 기대어 주류 정치 질서 속으로 투신하면 붕괴할 수 있다.
우리는 정치적으로나 운동사적으로 1987년의 석양이 길게 내려앉은 시대에 살고 있다. 노동운동이나 진보정당운동이 일본의 경험에서 무엇을 읽을지, 우리의 현실을 바꾸는 데에 어떠한 참고점으로 삼을지는 계속 던져야 하는 질문이다. 이 책이 그런 질문으로 들어가는 하나의 입구가 된다면 독서의 시간이 헛되지 않을 것이다.●